문화&사상

한국 한시와 역사

醉月 2012. 4. 21. 10:02

한국 한시와 역사
1. 머리말

모든 문학형태 및 종류가 다 그러하듯, 한시(한자시)라는 문학형태도 역사적 산물이다. 개인적이고 순간적인 시적 감흥을 표출한 서정시 작품이라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구조 속에서 가치정향적으로 재구성하여 서술한 역사소설만큼이나,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개인에 의해 역사사회적 관련 속에서 창작된 것이라서 집단 및 시대 의식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한시 작품도 예외일 수 없다.

 

한시 가운데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자연시도, 현실의 모순을 비판한 사회시만큼이나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이 글은 한국한시와 역사와의 관련을 논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이와같이 한시 및 한시작품이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은 ,우리 한시가 역사사실을 시적 계기로 삼는 창작방법을 어떻게 발전시켜왔는가 개관하면서, 우리 한시가 우리 역사 속의 주요한 사건과 시대변혁의 계기를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들을 몇몇 분석함으로써, 우리 한시가 지닌 풍부한 문학적 전통을 확인하고자 한다.

사실, 한시는 다른 문학형태 및 종류보다도 역사사실을 소재로 삼는 일이 많다. 즉 한시는 수사법에 있어서 典故를 통하여 시적 정서를 증폭시키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기 때문에 역사사실을 적극 인용하거나 환기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 典故에서 우리 한시는, 중국 고사를 빌어오는 일이 많고, 역사사실을 시적 계기로서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는 예도 많다. 한시 작가가 역사와 직접 관련을 맺는 것은, 그처럼 소극적으로 전고를 이용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역사 속에서 시적 계기를 발견하여 형상화해낼 때 이루어진다. 이때 역사사실은 과거사실일 수도 있고 작가의 당대 사건일 수도 있다.

 

이처럼 역사사실을 형상화하는 방법에는, 역사사실의 선택방식과 형상화방법에 따라 네가지 양태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는 작가가 과거사실이나 그것에 관련된 유적과 유물에서 시적 계기를 발견하고 형상화하면서 과거사실에 대한 사상정서적 평가를 담는 경우이다. 전통적으로 詠史詩나 懷古詩로 분류되는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작가가 당대 현실 혹은 주요사건을 시화해내는 경우이다. 이 때는 시 작품의 인식적 기능이 중시되어, 작품 속에 반영된 당대현실은 현재적 시각에서 의의있는 역사사실로 재구성되어 있다. 이른바 詩史를 표방하거나 詩史라고 평가받는 작품들이 이 부류에 속한다. 세째는, 작가가 이미 전설이나 신화로 된 역사사건을 내용으로 하여 이야기구조를 만들어내는 경우이다. 史詩 곧 敍事詩가 이에 속한다. 네째는, 과거의 역사사실을 논증을 통하여 재분석하는 예로, 역사사실에 대한 역사학적 고찰이 관심의 주대상인 경우이다. 이른바 論史詩가 이에 속하는데, 조선후기에는 考證之學의 영향 속에서 특히 이러한 시풍이 몇몇 학자들에 의하여 활용되었다.

 

우리 한시 가운데는 미학성이 높은 영사시 및 회고시, 시사 작품들이 많다. 그에 비하여 史詩는 수적으로 적지만, 이규보의 [동명왕편]같은 우수한 작품들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영사시(회고시)와 시사, 및 논사시에 대하여 검토하고, 史詩의 전통에 대하여는 별고에서 다루기로 한다.

 

2. 史實의 詩化
한시와 역사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시 종류는 詠史詩와 懷古詩이다. 그 둘은 우리 한시사에서도 중국시가사에서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單聯만 남은 최치원의 [姑蘇臺]는 회고시의 일부였을 것같다. 11세기의 고려 문인 崔思齊의 [詠史詩]는 '영사시'라 제한 예이고, 김부식의 [結綺宮]은 영사시라 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離宮 축조를 빗대어 비판한 훌륭한 영사시이다.

 

영사시와 회고시는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그 둘은 발생과정이 다르고 시적 계기의 포착이나 주제표출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영사시는 역사 자체를 시적 계기로 삼아 창작된 것이고, 회고시는 역사유적이나 지역에 의탁하여 그에 관련된 역사제제를 음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소재선택의 문제를 지나치게 중시한 것이라서 영사시와 회고시의 차이를 올바르게 설명한 것이 못된다. 실상 영사시와 회고시는 창작방법상 차이가 있다. 영사시는 역사사실을 이용하여 작가 자신의 문제를 빗대거나 당대현실을 풍자·권계하려는 의도에서 창작되며, 그에 따라 감정논리나 분석논리에 따른 평가(후자의 경우는 史評이라 불리운다)를 수반하는 데 비하여, 회고시는 無常感을 기조로 하여 사실 자체에 대한 감정적 논리적 평가가 그다지 수반되지 않는다.

 

발생적으로 보면 영사시는 동한 班固에 의해 명칭이 성립되어 {文選}에 9명 21수의 작품이 실릴 만큼, 이른 시기부터 하나의 시가양식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이에 비하여 회고시라는 명칭은 唐代에 이르러서야 陳子昻에 의하여 사용되었다. 이후 영사시와 회고시는 시 제목상 혼용되어 왔으므로, 시 제목만 보고 양태를 나눌 수는 없다. 阮籍의 [詠懷詩]는 사실상 영사시이며, 당대 이전의 시 가운데도 회고시가 존재하였다. 따라서 영사시와 회고시를 분별할 때는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유득공의 [二十一都懷古詩]는 엄격히 말하여 회고시가 아니라 영사시다.

 

중국의 영사시는 역사기술 중심에서 抒情言志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중국학자 降大任의 試論은 중국의 영사시사를 다음과 같이 개괄하였다.

 

①동한부터 위진까지 : 역사서술이 중심이고 그 서술 속에 서정이 물들어 있는 것이 고작이다가, 左思, 陶淵明에 이르러 자아가 주체가 되어 詠史와 서정이 통일됨으로써 '史爲我用'의 방식이 증강되었다.

 

②당대 : '史爲我用'이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되어,역사에 대한 반성과 자아의 체험을 직조하거나,역사를 현실의 경물 위에 묘사 배치하여 시공간을 교차시키기도 하였다.나아가 역사를 가지고 작가 자신이 처한 역사현실을 반영하고자 시도하여 '古爲今用'의 방식이 일어났다.

 

③송대 : 영사를 통하여 현실정치 및 사회문제를 비판하려는 태도가 강화되어 '以議論爲主'의 방식이 선호되었다.

 

④원명청대 : 영사시는 봉건사회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강화하여,정치주장,도덕관념,사회인식을 표현하는 도구로 되었다.
한국 영사시도 나름대로 여러 발전단계를 거쳤다. 하지만 한국 영사시에 대한 전문연구는 아직 없었다. 다만 이규보, 이승휴, 이제현, 김시습, 유득공의 영사시가 부분적으로 논해졌고, 졸론 등에서 조선후기의 영사악부 작품들이 분석된 바 있다. 우선 영사시는 중국의 사적을 소재로 한 것과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것을 구분하고, 특히 후자의 시 가운데 예술성이 높은 것을 선별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한국 영사시의 발전과정에 대하여 시론해보고자 한다.

 

(1) 한국 영사시는 이미 최치원의 작품들에서 발견된다. [ 河懷古]는 '회고'라는 제목을 취하였고 또 회고조의 애상성이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호화와 사치를 경계하는 감계의식을 짙게 담고 있어 영사시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무방할 듯하다. 그러나 나말려초의 역사를 소재로 한 시들로서 현재 남아 있는 시들은 회고시가 대부분이고 영사시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박인범의 [馬嵬懷古], [九成宮懷古]등은 대표적인 회고시이다. 이처럼 이 시기의 영사시 작품이 적은 수밖에 전하지 않고 오리혀 회고시가 많이 전하는 것은, 후대의 選家들의 경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2) 고려중기 이후에도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시들이 많이 나왔으나, 대부분 회고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13세기초 김극기의 題詠詩 가운데 많은 작품들과, 13세기 중엽 金之岱의 [麒麟窟], 14세기초 安軸의 [鐵嶺], 14세기 후반 이색의 [浮碧樓], 姜淮白의 [鐵原懷古], 洪甫之의 [扶餘懷古] 등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노래한 영사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金坵(1211∼1278)의 7언고시 [過鐵州]({止浦集} 권1)를 들 수 있다. 이 시는 고려 고종 18년(신묘, 1231)에 몽고의 撒禮塔이 咸新鎭을 빼앗으려고 鐵州를 공격하였을 때 州守 李元禎이 고수하다가 힘이 다하자 창고에 불을 지르고 처자도 불 속에 들게 한 다음 자결하였던 사적을 노래한 것이다. 이 역사사실은 위에 언급한 안축의 [철령]이나 강회백의 [철원회고] 뿐만이 아니라, 조선후기에 이르도록 회고와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의 이 시만큼 반침략정신을 강하게 드러내고 민족영웅의 출현을 갈망한 한시는 그리 흔하지 않다. 원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지난날 모진 외적이 국경을 침략하여
사십여 고을이 들불붙듯 차례로 무너졌으나
산 등진 외론 성이 적의 갈길 턱막았으니
숱한 적군이 입맛다셔 삼킬듯 덤볐어도
얼굴 맑은 선비가 이 성을 지키면서
나라에 몸바치길 터럭보다 가벼이 했지
진작부터 어질고 미뻐 민심을 다잡아
장사들 환호하길 하늘땅 뒤집을 듯
맞서싸운 보름 동안 해골주워 밥솥하고
밤낮을 싸우고 지켜 용사들도 지치고 말았다
힘이 다해 부쳤지만 여유를 보이자고
누대에서 울린 군악 그 소리도 구슬펐지
하룻밤에 창고가 불길에 휩싸이고
처자와 더불어 선뜻 제몸 태웠으니
의롭고 장한 혼백 어디로 간 것일까
천고에 고을 이름만 부질없이 철산이라 하는도다
當年怒寇 塞門, 四十餘城如燎原.
依山孤堞當虜蹂, 萬軍鼓吻期一呑.
白面書生守此城, 許國身比鴻毛輕.
早推仁信結人心, 壯士 呼天地傾.
相持半月折骸炊, 晝戰夜守龍虎疲.
勢窮力屈猶示閑, 樓上管絃聲更悲.
官倉一夕紅焰發, 甘與妻 就火滅.
忠魂壯魄向何之, 千古州名空記鐵.

 

鐵州라는 구체적 장소가 관련사적을 회상케한 매개체였지만, 이 시는 회고조에 빠지지 않고 역사사실에 대한 감정정서적 평가를 기탁하였다. 그러나 이 시는 작가가 곧 화자로서 역사사실을 서술하되, 감정정서적 평가를 시어의 선택,전고의 차용과 같은 표현방식에 기탁하였을 뿐, 역사사실의 의미를 주체의 입장에서 직접 논하지는 아니하였다. 따라서 서술성이 강한 서정시이다. 결련의 '부질없이[空]'라는 虛詞에는, 그러한 영웅적 반침략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몽고의 간섭을 받고 있는 현실을 통분해 하는 작가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2) 고려말에서 조선전기까지는 중국의 사실을 소재로 한 영사시가 발달하였다. 이 영사시들은 소재선정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鑑戒와 현실비판을 의도하기도 하고 자기성찰과 자아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여, 역사사실을 주체적으로 평가하는 의론을 펼치고 있다. 이제현이나 이곡, 김시습의 작품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이곡의 [詠史] 27수는 後漢의 역사사실을 통해 작가가 처한 당시의 정치현실을 비판한 수준 높은 連作詠史詩이다. 이 시기에는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영사시들도 많이 나와, 민족의식이 한시 속에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외교시의 백미인 권근의 응제시 24수 가운데 [王京作古]·[始古開闢東夷王]·[辰韓]·[馬韓]·[弁韓]·[新羅]·[耽羅] 등은 조선인의 문화적 자부심을 표출한 영사시들이다.

 

고려말 조선전기에 영사시가 발달한 것은 감계론적인 역사인식과 역사교양이 시대사조로서 팽배하게 된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을 듯하다. 우리 나름대로의 通鑑學이 발달하게 되고, 자국 역사서의 편찬사업이 官 주도로 추진된 점은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준다. 통감학은 고려 중엽에 崔詵이 왕명을 받들어 {資治通鑑}을 교정한 데서부터 이 땅의 한 전통학술분야로 정착하게 되고, 고려말에는 {통감강목}이 경연의 교재로서 채택이 되며 세종조에는 思政殿訓義本 통감이 간행되기에 이른다. 또한 세종의 {明皇戒鑑} 저술과 세조 명에 따른 {명황계감}의 언해주석은 감계론적 역사교양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주요한 찬술작업이었다. 주지하다시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이 이 시기에 나온 주요한 관찬 사서이다. 또한, 역사를 종관할 수 있는 年表類와 系譜圖가 이 시기에 다수 나온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거정의 {歷代年表}(1478)나 權 의 {歷代世年歌} 및 {東國世年歌}, 김정국의 {歷代承統圖}(1532) 등이 그 예다. 그리고 崔溥의 {東國通鑑論}({錦南集} 권

 

1)과 같이 우리 역사서를 대상으로 한 史論 專論이 나온 것도 주목된다.
이 시기의 영사시들은 창작동기가 다양하다. 즉, 畵屛에 적는 題詩로서 짓기도 하고, 역사서를 읽고난 독후감으로 짓기도 하였으며, 당대현실의 문제를 생각하다가 과거역사를 연상함으로써 짓기도 하고, 유적지 기행에서 기필하거거나 藝文館과의 月課나 廷試에서 회고시나 영사시 제작을 부과받아 짓기도 하였다. 조선전기의 작품들만을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① 題畵屛의 영사시로는 중국역사를 소재로 뛰어난 작품이 많다. 신숙주의 [題古畵屛十二絶]({保閑齋集} 권7), 강희맹의 [題任侯士洪屛風]({私淑齋集} 권4), 신용개의 [題洪進士등家畵屛八幅]({二樂亭集} 권1) 등이 그 예이다.

 

② 영사시 가운데는 독후기의 형식으로 된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들은 독후기임을 명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명시하지 않은 예도 있다. 독후기 형태의 영사시들에는 읽은 사서의 종류에 따라 중국사적을 소재로 한 것도 있고 우리 사적을 소재로 한 것도 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만을 들면, 서거정의 [讀三國史]({四佳集} 권3), 김시습의 [詠東國故事] 제편({梅月堂集} 권2) 및 [ 百濟故事] 제편(동 권11), 유호인의 [偶閱三國史兼採雜記作東都雜錄]({雷溪集} 권2), 李우의 [讀麗史恭愍紀]({松齋集} 권2) 및 [讀東史箕子紀](동 권2), 주세붕의 [夜讀高麗史有感]({茂陵雜藁} 권1) 및 [讀高麗史有感](동 별집 권4) 등등이 있다.

 

③ 영사시 가운데 많은 양을 차지하는 것은 유적지 기행에서 시적계기를 포착해 지은 작품들이다. 역시 중국의 사적을 노래한 것과 우리 사적을 노래한 것이 있는데, 예는 생략한다.

 

④ 또한 傳聞 사실에서 시적 계기를 발견하여 지은 영사시도 있다. 임억령의 [宋大將軍歌]({石川集} 권5)는 장편의 서술서정시로 예술성이 높다.

 

⑤ 이 시기의 영사시들은 연작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다. 이들 연작영사시는 대체로 보아 연작내의 각 시편들 사이에 사적 연속성을 보이고 있지는 아니하며, 작가의 주관적 심리나 사고 면에서 각 편들이 하나의 맥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沈義의 [詠史五首]({大觀齋亂稿} 권2), 김안로의 [詠史詩二十四首]({希樂堂集} 권2) 및 [詠史雜言二十六首](동 권4), 신광한의 [詠史] 65수({企齋別集} 권1), 소세양의 [讀史] 12수({陽谷集} 권6), 심언광의 <擬詠史> 40수({漁村集} 권10) 등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연작영사시 가운데 김시습의 [病臥彌旬至秋深乃起感今思古作感興詩十一首]({매월당집} 권12)는 영사를 통해 현실의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였다('感今思古')고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李 ({음애집} 권1)는 樊姬 등 부인 30인의 사적을 소재로 한 연작영사시를 지어 이채를 띈다. 이들 연작영사시는 모두 중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것이지만, 김시습의 [詠東國故事] 제편({매월당집} 권2) 및 [ 百濟故事] 제편(동 권11)은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하면서 작가의 사관을 농후하게 드러내어 주목된다. 특히 [영백제고사]는 백제의 흥망을 단계적으로 노래하여 연작내의 시편들이 사적 연속성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⑥ 이 시기에 제작된 영사시 가운데 주목되는 한 형태는 악부체를 차용한 김종직의 [東都樂府({점필재집} 권3)이다. 이 악부체의 연작영사시는 숙종조 南克寬의 [동도악부]에 직접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해동악부 계열 작품들의 선성을 이루기도 하였다.

 

⑦ 이 시기에는 月課와 廷試에서도 영사시나 회고시 제작이 부과된 일이 많았다. 그러한 課詩들은 대부분 '회고'의 제목이 붙어 있으나, 영사시의 성격을 띤 작품도 들어 있다.

 

한편 조선전기의 영사시들은 주제구현의 방식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고려조의 영사시나 마찬가지로 역사사건의 서술이 중심이고 작가의 주관은 수사법에서나 드러나는 경우이다. 그 일례로는 최숙정의 [棘城懷古]({逍遙齋集} 권1)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고려말 홍건적의 난이 극심하였던 황해도 黃州의 棘城鎭에서 관군이 홍건적에게 섬멸되었던 사실을 소재로 하였는데, 弔喪을 주제로 하여 애상성이 짙다. 둘째로는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이 시기의 영사시 들의 주류를 이룬다. 세째로는 과거 사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당대 정치현실의 구체적인 특정사실을 비판하고자 의도한 경우이다. 두번째의 의론 위주 영사시들도 현실비판 의도를 지니기는 구체적인 특정 정치현실을 문제삼는다고는 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세번째 부류의 대표적인 예로 성현의 [過昌和里]({虛白堂集} 拾遺 권1)를 들 수 있다. 이 시는 당대 권문세가를 비판하되 과거 인물의 비판을 전면에 내세우는 형상화방법과 주제구현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주목된다. 5언 84구의 장편고시인데, 편의상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강을 건너 십리 길 온 곳에, 기름진 들판이 둑 아래 펼쳐 있고
솔나무는 뒷산에 빽빽한데, 버들은 앞시내에 열지었다.
궁금하이, 뉘 집이 저처럼, 청기와 붉은 난간 어울렸는고.
지난 날 화락하던 그 시절, 시인이 鳧  태평가를 부르고.
많은 영웅들 들붙어 귀히 되어, 나랏일로 이리 뛰고 저리 달릴 때
뉘 알았나, 수레 밑 망아지가, 홀연히 천리마돼 튈 줄을.
청운 일어 수레바퀼 버팅겨주어, 까마득 남산을 단숨에 올라서
금술잔은 조정에 찬란하고, 인끈은 궁정계단에 통하였지
동북면에 전란 일어, 자줓빗 광채 살기 등등할 때에
외방서 군대 지휘 위엄을 떨쳐, 戰鼓 만 좌 끼고서 대군을 부려
하늘이 살피고 인심도 순하여서, 난적들을 모두다 쓸어내버려
스무해 동안을 명성 화려히, 대궐을 제 마음껏 드나들었네
渡江十里餘, 沃野開平堤. 松柏滿後崗, 檉柳連前溪.
借問誰氏宅, 碧瓦暎朱梯. 在昔雍熙際, 詩人歌鳧 .
攀附多英雄, 靡 走東西. 安知轅下駒, 便作千里蹄.
靑雲起扶 .  蔚南山蹄, 金 照廊廟. 寶綬通天犀,
東北曾喪亂. 殺氣纏紫霓. 敷揚 外威, 身擁萬鼓 .
天助人亦順,  掃鯨與 . 聲華二十載, 出入黃金閨.

 

성현의 문집에서 {습유}에 수록된 시들은 창작시기가 분명치 않은 것이 많은데, 이 시도 지어진 시기를 알 수 없다. 昌和里는 경기도 파주의 지명으로 고려조 이래 파평 윤씨 문벌이 있던 곳이고, 대상인물이 동북면 전란에서 무공을 세웠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윤관의 사적을 읊은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파평윤씨는 尹瓘의 고조(尹莘遠)가 이미 파주 지방의 호족으로 태조에게 협력하여 三韓功臣에 봉해진 바 있어, 이 시에서 '수레밑 망아지가 문득 천리마가 되었다'고 노래된, 한미한 門地나 직위에서 초등한 인물을 윤관이라고 볼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윤관의 후손인 尹麟瞻을 소재로 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공신첩에 그 이름 다섯번 들어, 雲臺라 공신각 가로보를 으리비춰
상으로 받은 것이 수십만금, 비단이 진흙같이 천하다.
가산 늘리기로 하루도 겨를 업서, 주판을 받들기를 규옥 받들 듯
사나운 종놈은 사방으로 내달려, 늙은이건 애들이건 매질 안가려
인민의 기름을 짜내고 짜내, 막대하게 요로에 쌓아두었지.
여러 해를 三司의 장이 되고도, 인민을 안정시킬 생각을 안해
부국한답시는 그 잘난 경영책이, 하찮은 개,닭에도 이해가 미쳤다
나라와 개인 다 이롭게 한다며, 이끝을 분별하길 한냥에 한푼까지
뜨락에 오얏 나듯 인물 모이고, 문앞에 준마 매였듯 준사 많아라.
아이놈은 고관에게 꾸벅 인사, 골목엔 귀족들 수레 모였지.
본처는 별실에 물리쳐두니, 해로할 부부가 아예 이별한 꼴.
미려한 첩들은 넓은 집에 그득, 얼룩덜룩 분칠한 요물이 태반
가련토다 나어린 계집마저도, 보송보송 애리애리 열댓도 못되
모두다 정절을 어그러뜨려, 번쩍이는 옷차림에 두터운 화장.
창지게엔 죽엽 꽂아 주인 끌어선, 높았다 낮았다 서열 뒤바껴
제마다 주인 사랑 차지하려고, 얼굴엔 붉은 분 손도 다듬지
이러니 문 닫고 손님을 사절, 편히 누워 비녀 꽂은 미녀나 대해
부부 도리 다 무엇해 금슬 내치고, 마음대로 취하여 부둥켜 안네
名參五功籍, 輝暎雲臺 . 賞賜累鉅萬, 金帛賤如泥.
潤屋日不暇, 牙籌如奉圭. 悍僕走四方, 鞭 敲 倪.
剝 萬民膏, 茨梁列要蹊. 長年押三司, 不解安黔黎.
經營富國術, 貽害到犬鷄. 利公兼利私, 析利分刀錐.
階前生桃李, 門巷繫  . 頑童揖貂珥, 深陌簇雕 .
糟糠 別室, 百年終離 . 綺羅 厦屋, 太半鬼人妻.
可憐年少者, 婉 未及 . 共虧栢舟操, 炫服紛  .
竹葉揷窓戶, 門房高復低. 爭姸各取寵, 顔 手柔荑.
杜門麾外客, 高枕對  . 不用絲與竹, 隨意醉相携.

 

이 단락은 대상인물이 요직에 있으면서 축재축첩하여 음행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이 시가 축첩의 문제을 심각히 비판한 것은 단순히 명분론적 시각에서 그런 것이아니다. 조선전기에는 사대부 가문의 보호와 상층 집단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하여 처첩 분별과 적서 분별이 제도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정실을 소박하는 사대부는 공공연히 규탄되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文行으로 금고에서 풀려나 환로에 올랐던 柳允謙이 정실을 소박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던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즉 이 시의 축첩 비난은 조선전기의 사환자 윤리를 바탕으로 한 시대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는 축첩의 음행을 지나치게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艶詩의 풍격을 띠기까지 한다. 이 점은 성현을 포함한 당시 문인들의 艶風 취향과 일정한 관련이 있을 듯하다.

 

우습구나, 그 늙은 버드나무가, 늙마에 새 싹을 많이 내어서
제 애비 잘못 덮을 인물 없어도, 그런대로 가문은 보전하다니
조물주는 어이 그리 감감하신지, 그 이법 도대체 공정치 않아
평소에 선한 자가 되려 죄입고, 악한 짓 한 자가 복 많이 받는다.
악한 漢의 張禹는 재물 많았고, 학행 높은 晉의 戴邈 모함받았다.
平津侯(孔孫弘)은 거짓을 꾸며, 시비를 못가리게 장난했지만
끝까지 목숨 부지, 오래오래 장수 누렸으니,
자잘한 옷속 이 같고, 쇠뿔 갉는 새앙쥐라 그냥 놔둔 것
아득히 천년 뒤엔, 직필로서 평가할 것이라.
나 지금 산 아래 지나쳐가니, 날씨는 왜 이다지 음산하다냐.
시내는 차가와 제홀로 위위 울고, 숲은 깊어 날새들 괜스레 우는구나
짐짓 이런 한편 시를 지어서, 옛 자최 더듬으니 더더욱 슬프고나
堪笑枯楊樹, 晩來多生 . 雖非幹父蠱, 亦足保家畦.
眞宰何茫茫, 厥理本不齊. 爲善反獲罪, 爲惡多蒙 .
張禹富 財, 望之困斐 . 平津 詐僞, 是非令人迷
畢竟保首領, 享壽至  . 彷彿衣中蟬, 依 牛角 .
悠悠千載下, 直筆爭評題. 我今過山下, 風日何凄凄.
溪寒水自響, 林深鳥空啼. 聊寫一篇詩, 撫跡增悽悽

 

이 단락은 문제의 인물이 악행을 하였지만 장수하고 후손이 많아 가문이 융성한 사실을 지적하고, 심판에 휘임이 있는 조물주를 원망하고 있다. 문제의 인물은 성현 당대에도 득세하고 있었던 듯하며, 따라서 이 시는 당대의 특정 權貴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는 과거인물의 행실을 비판함으로써 당대 인물을 비판하고 있는 영사시라고 할 수 있다.

 

(4) 조선후기의 영사시는 근체시,고체시의 일반 양태뿐 아니라 樂府體와 宮詞體의 양태를 도입하여 양적, 내용적으로 풍부해졌다. 일반 양태의 영사시들은 앞서 고려말,조선전기의 일반 영사시들과 같은 창작동기와 주제표출방식에 의하여 창작되었다. 그 영사시들이 지닌 개개의 예술성과 문제제기의 깊이에 대하여는 별도로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악부체와 궁사의 양태를 빈 영사시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해 두기로 한다.

 

① 17세기 중엽 이후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악부체의 연작영사시가 출현하여 해동악부체 양식이 성립하였다. 이 양식은 엄격한 규범성을 확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작품들 상호간에 계승관계가 인정되며, 소재 선택, 형상화방식, 시편의 구성 등에서 일정한 틀이 형성되었으므로, 하나의 양식으로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들 가운데는 성호 이익의 {해동악부}와 같이,연작된 각 시편 사이에 사적 연속성을 유지시켜 史書를 대신하는 기능을 떠맡은 것도 있다. 대체로 감계론적인 관점에서 과거사실을 품평하는 것이 보통인데, 士 계층의 독특한 자기인식과 실천의지를 담고 있으면서 과거사실의 서술을 통해 당대 현실문제를 적극적으로 환기시키려 한 경향을 띠었다. 다만, 이유원의 {해동악부}는 연작시를 빌어서 樂府史(즉 음악사)를 서술한 것이어서 역사사실을 소재로 한 다른 해동악부체 작품들과는 구별된다. 이 해동악부체의 성립은 조선후기의 민족의식의 성장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서 크나큰 의의가 있다.

 

② 宮詞體는 중국시가사에서 볼 때, 궁중사,특히 후궁의 일을 소재로 하여 艶風 취향을 드러내는 양태이다. 그러나 허균은 후궁의 일보다 군왕의 기거동작을 소재로 하여, '훼손되지 않은 과거'(즉 선조 때의 궁중사)의 제시를 통하여 '훼손된 현실'(즉 광해조)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궁사를 활용하였다. 다만 그 소재는 여전히 제한적이며, 부분적으로는 호사가적인 취향과 염풍 추구의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는 부정적 측면도 다소 드러난다. 그런데 박규수의 {鳳韶餘響絶句一百首}({ 齋集} 권2)은 소재선택의 범위를 확장하여 군왕의 기거동작과 관련된 국조고사를 광범하게 다루면서, '훼손되지 않은 과거'(과거의 昇平)를 제시함으로써 '훼손된 현실'(君臣之分의 문란)을 비판하는 수법을 적극 활용하여 주목된다.
이상에서 한국 영사시의 흐름을 개관하여 보았으나, 시대구분이나 사조적 특징의 기술은 모두 시론에 불과하다. 상세한 서술은 과제로 남겨둔다.

 

3. 현실의 반영
우리 한시는 과거 역사사실을 소재로 택할 뿐 아니라 당대의 중요 사건도 소재로 택하여 왔다. 왜적의 침략에 대한 투쟁, 이를테면 임진, 병자란의 반침략투쟁을 주제로 한 시나, 당쟁, 정변에 얽힌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만 아니라, 권력자의 탐학,삼정의 문란, 인민의 고통을 고발한 시들도 넓게는 이 부류에 속한다. 그런데 한시는 당대의 사건을 직접 소재로 삼을 수도 있지만 그 사건으로부터 배태된 사회현실의 한 작은 단면을 시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사건을 환기시킬 수도 있다. 후자의 예로, 임란 때 군영에서 탈주한 악공을 소재로 한 李山海의 시를 하나 들어 본다. 이 시는 [문밖에 구걸하는 자가 왔는데 풀피리를 잘 불어 그 소리가 아주 구슬펐다. 물어보니 병영의 악공이었는데 난리를 피해 도망했다고 한다](門外有行乞者 善吹草笛 其聲甚悽楚 問之 乃兵營樂生之逃亂者也)라는 제목을 가진 칠언율시({鵝溪遺稿} 권2 所收)다.

 

지난 날엔 장군 휘하 악대에서
초병 갈피리 절묘히 불었었지
서너 곡 불어 바닷 달 하노리고
한 가락 뽑아 울릉도 구름 쓸었다나
중국 강남 장정들 어느 때나 돌아갈까
파촉 땅 젊은이는 마음만 울컥울컥
속없이 전장에서 곡조 타지 말게나
우리 군대 싸움앞서 느껴울까 염려되이
元戎幕下舊梨園, 學得蘆茄妙絶群.
數調弄殘滄海月, 一聲吹破蔚陵雲.
江南帝子無歸日, 巴蜀王孫欲斷魂.
莫向沙場閑捻曲, 恐敎臨陣泣三軍.

 

시인의 눈 앞에는 꾀재재한 행색에 풀피리를 입에 문 탈주 군악병이 서 있다. 이 악공이 군악대서 갈피리를 불면 마치 계림 玉笛같이 왜군을 다 쓸어낼 기세였을텐데("一聲吹破蔚陵雲") 이제는 우리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릴 구슬픈 풀피리를 불고 있다는 대비를 하였고, 중국 군사들이 어느때나 고향에 돌아갈까 하면서 울컥거리고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사실은 힘들고 지친 우리 군사들의 모습을 포개보이는 가탁을 행하였다. 그러한 대비와 가탁을 통하여 서정적 자아는 임란의 참혹함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대의 역사현실을 시화해낸 시들은 강한 현실비판의 성격을 띠는 것이 보통이며,그러한 시들 가운데는 민요적 풍격의 악부체나 풍자적 내용을 담은 신악부체의 수법을 이용하는 일이 많다.

 

李穡의 [山中謠]({牧隱詩集} 권26)는 서정적 자아가 왜구의 노략에 살아남은 산촌 노인으로 扮하여 왜구의 노략질이 해변 마을만이 아니라 산촌에까지 확대되는데도 조정에서 모책을 내지 못하는 것을 은근히 비판한 시이다. 5·7언잡언의 32구로 이루어진 이 시는 이색이 53세 때인 禑王 6년(1380) 늦겨울에 지은 것이다. 그 시를 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들은 적 있지, 바다에 도적 있어
이따금 바닷마을 쳐들어 온다는 말
처음엔 밤에 해안에 올라
쥐새끼처럼 담장을 몰래 넘더니
얼마가선 뻣대어 물러 안가서
대낮에도 들판을 다니다가는
점차로 관군에게 감히 맞서서
새벽부터 와와 시끌대어 해질녘까지
그땐 듣고서 딴 세상 일로 여겨
푹 자고 일어나 손주놈과 노는 게 일
我聞海有賊, 時時攻水村.
其初夜登岸, 鼠竊踰牆垣.
中焉驕不退, 白晝行平原.
漸與官軍敢相敵, 淸晨鼓 俄黃昏.
我時如聞異世事, 寢早起遲弄兒孫.

 

왜구는 신라시대부터 있어왔으나 특히 13-4세기 일본에서 남북조 시대라 불리우는 57년간의 내란기에는 약탈의 규모가 커졌다. 즉 충정왕 2년(1350) 이후 왜구는 백여척의 선단을 형성하여 규모가 커지고,우왕 원년(1375) 5월 이후로는 더욱 잔학한 양상을 띄게 된다.문헌 기록만 보더라도 1350년부터 1392년까지 471-476회가 있었고,우왕 16년간의 왜구만도 378회에 이른다. 충정왕 2년의 왜구에 대하여 {고려사}는
왜가 고성·죽림·거제 등지를 침략하였다. 합포천호인 최선 등이 싸워 무찔러 적 사망자가 3백여인이었다. 왜구가 일어난 것이 이때부터다.
라고 적었다. 이 충정왕 2년 2월에 격퇴되고도 왜적은 선단을 이루어 순천·합포·고성·회원·동래 등을 약탈하였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 때에는 74-78회의 침구가 있었는데, 고려 선박을 불태우고, 漕運을 어렵게 하였으며, 강화도에 침구하여 경성에 계엄이 내려지게도 하였다.

 

왜적은 일찍부터 '쥐새끼처럼 담장을 몰래 넘던' 단계를 벗어나 백주에 횡횅하며 관군에 감히 맞서고 있었다. 또 그 침략지도 해안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서, 공민왕 9년 5월에는 왜적이 양광도 평택,아주(아산),신평(홍주)과 용성(수원)까지 침입하였다. 우왕 6년 7월에는 왜적이 부여·定山·雲梯·高山·유성 등지에 침입하였다가 게룡산에 들어가, 산으로 피했던 부녀자와 아이들을 살해하였다. 따라서 [산중요]의 서정적 자아가 해안의 침구를 '딴 세상 일'로 알았다는 것은 아래에 서술할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허두이지 실제는 아니다.

 

이즈음엔 방비가 허술한 골짝도
왜적이 날뛰어 삼킬 듯한 기세
그놈들 맨발로 가파른 벼랑 다녀
가시낢 바위틈 나는 것이 흡사 원숭이
관군이 배 태우자 더더욱 성깔내어
독기 뿜고 불길 내어 다 태울 양이네
규중 여자 장정을 가릴 것 없이
한데 죽어 엎어지니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요행 덤불 속에 몸을 숨겨서
목숨은 그저 하나 달랑 건졌다만
주리고 쓰린 것이 날로 더하니
해변민 하소 많은 걸 이제야 알겄소
年來陵谷忽易處, 賊勢猖獗將幷呑.
赤足走上千 崖, 藤棘石角飛 猿.
官軍燒船激其怒, 肆毒烈火如俱焚.
閨中女兒與卒徒, 騈首就戮餘何言.
我幸竄伏榛灌中, 僅保性命無留存.
忍飢忍苦日復日, 始知濱海多呼寃.

 

왜구에 대하여 고려 조정은 鎭守와 築城으로 관방하고 출군하여 격퇴하기도 하였으나, 왜구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색이 [산중요]를 쓴 이 해 8월에는 羅世·沈德符·崔茂宣이 왜적선 500척을 鎭浦에서 격침시키고, 9월에는 이성계 등이 雲峰에서 왜적을 대파시켰다. 진포대첩에 대하여 李穡은 오언율시 [聞官軍得倭舡]과 칠언율시 [聞羅沈崔三元帥舟師回病不能郊아] 3수를 지은 일이 있다. 또 운봉대첩에 대하여도 문생 鄭達蒙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기뻐서 5언고시를 지었다. "관군이 배 태우자"는 이 진포대첩의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왜적의 창궐은 줄어들지 않아, {고려사}를 보면 운봉대첩 때 남은 왜적이 智異山으로 숨었다고 하였다. [산중요]의 화자는 지리산에 숨어든 왜적에 의해 가족을 잃은 노인일 지 모른다.

 

하소하길 서른하고도 한 해
조정선 진작부터 백성을 염려했다만
어째서 이 일이 내게도 닥쳤는가
곧바로 궁궐에 고하려다가
돌이켜 생각하니 이게 내 운명
편타간 위태하고 형통하단 막히는 법
하늘이야 인간에게 편애함이 없으려니
늦게라도 은혜를 골고루 주시겠지
태평을 내리심이 조금만 빠르시길
머리 조아려 하늘에 호소합니다
呼寃三十又一年, 廟堂久矣憂黎元.
奈何今日亦及我, 告焉直欲排天 .
反而思之實我命, 久安必危亨必屯.
天於人兮無厚薄, 雖有久速均其恩.
賜之太平或者近, 我今稽 呼乾坤.

 

"(해변민이) 하소하길 삼십하고도 일년"이라 한 것은, 충정왕 2년부터 우왕6년까지가 31년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중요]의 화자는 자신의 원통함을 궁궐에 호소하려다가 체념하고 하늘에 기구하는 것으로 그친다. 이 체념 속에는 조정의 關防政策에 대한 불신 혹은 비판이 깊이 담겨 있다.

 

4. 詩史
당대 사건이나 현실을 핍진하게 형상화한 시를 詩史라고 부른다. 본래는 두보의 [兵車行]이나 三別三吏에 대하여 붙여진 평어였지만, 후대에는 일반화된 평어로 사용되었다. 이 詩史에는 역사적인 주요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과 당대 현실상황의 형상화를 주로한 작품의 두 부류가 있다. 후자는 이른바 社會詩란 개념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전자의 詩史 작품은 동란의 시대를 반영하면서 난리의 장면들을 서술하여 감동을 일으키거나 불굴, 충절, 절조 등의 정신을 고취시키려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한시 가운데 전자의 詩史 작품의 예로 조수삼의 [西寇  ]을 들 수 있다.

 

이 시는 홍경래난을 소재로 한 5언 186운 1860자의 장편고시로, 민중의 봉기를 한자시로 형상화한 대표적인 예이기도 하다. 조수삼이 [서구도올]을 지은 것은 1812년 4월에 홍경래난이 진압된 뒤 定州 현감 李身敬 부름으로 그 밑에 가서 공문서 작성을 맡아 하던 때이다. 정주는 본래 牧이었으나, 평난 뒤 5월15일, 홍경래의 내응자인 金履大와 崔爾崙의 출생지라는 이유로 縣으로 강등되었다. 그보다 앞서 5월4일에는 평안도관찰사 鄭晩錫의 청에 따라, 정주의 전곡이 비고 인민이 안정되지 못하자 목사 林栽洙가 파직되고 이신경이 대신하여 정주를 안무하게 되었었다. {秋齋集} 권8에 실려있는 [定原亂後喩大小民人]과 [定州陣弊事目公移文]은 평난 뒤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현감 대신 지은 제술문이며, [祭戰亡諸將卒文]과 [祭亂死諸人文]은 평난 뒤 한 돐되는 1813년 정월 19일에, 王事로 죽은 이들을 제사지내도록 한 14일자 명령에 따라 현감 대신 작성한 제문이다. 1814년(계유) 9월에는 관찰사 정만종이 문사를 뽑아 정주성 전몰장졸을 위한 紀績碑文을 짓게 하였는데,조수삼은

 

이 무렵에도 평안도 兵幕에 參軍으로 있었으나 이 비문의 제작에는 관여하지 아니한 듯하다.
조수삼의 [서구도올]을 서사시(史詩)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서사시는 주제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완결적인 이야기를 서술하는 데 중점이 놓이고 작가는 객관적 입장에 서 있는 경우의 운문시를 가리킨다. 그런데 [서구도올]은 과부를 작중화자로 이용하여 홍경래난의 경과를 서술하되, 이야기의 중심인물이 없고 사건서술이 완결적인 구조로 짜여 있지 않으며 작가의 주관적인 판단이 서술 표면에 나타나 있다.즉 이 시는 장편의 서술이 들어있기는 하지만, 시적계기의 포착과 사건형상의 제시가 모두 서정적 자아의 주관적, 순간적 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서술서정시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이 시는, 홍경래나 혹은 관군,의병측의 특정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가 겪은 전쟁과 애증이 민족적 체험과 시대정신을 대표하도록 서술되어 있지 않다.

 

[서구도올]은 仁義의 정치를 구현하여 민란을 방지할 것을 수령에게 풍간하는 유가의 감계론적 시각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그러한 시각을 서문에서 밝혔다. 임신(1812) 7월 모일에 조수삼이 쓴 [서구도올병서]를 현대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구난의 근원을 따져보면 어찌 갑자기 일어난 것이겠는가? 차츰 그렇게 되어 간 것은 좋지 못한 풍속이 있어서요, 사단이 벌어진 것은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요, 일이 일어난 것은 좋지 못한 인물이 있어서이다. 춘추를 보면 거기 기록된 난적의 일치고 이처럼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없다.정원은 서변에 있어 그 풍속은 억세고 그 토지는 비옥하고 그 인민은 교만하고 사치하다. 그런데다 심양과 요동에 가까와 화폐가 유통되고 關市에 통하여 그 풍속이 잘 다투고 교활하여, 이끝만 좇아 그릇 하나에 치껴뜨고 근수 조금에 죽이려 대든다. 그래서 우리 조선 때 차츰 교화되고는 있지만 연개소문과 을지문덕의 기풍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근년에 여러해 큰 흉년이 들어, 관아 민간이 다 고갈하고 부자 가난뱅이가 다 곤란하여, 지아비는 처를 팔고 노예는 주인을 약탈하며 아우가 형을 관가에 소송하고 부자가 집안에서 다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읍정을 맡은 이는 부득이 세금을 독촉하고 형벌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자 홍경래와 禹君則은 바깥에서 오고 金履大, 崔爾倫은 안에서 호응하여, 성 하나를 점거하여 수개월 버텨 나라 안 군사를 다 동원하고 백만금을 허비한 끝에야 겨우 섬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좋지 않은 일 가운데서도 가장 좋지 않은 일이다. 적이 평정된 뒤 定原현감 李身敬이 나를 관영으로 부르길래 와보니, 피비린내는 막 가셨으나 고통받는 인민은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성가퀴에 올라 잡목림을 보고, 시선 닿는대로 보며 배회하노라니, 들판에는 귀신들이 웅얼대고 있다.

 

北城(北將臺)에 화약 터뜨린 곳과 西臺에 말을 세웠던 곳에서는 관군이 호통치던 모습을 상상하고 적도들이 겨우 목숨붙어 헐떡대던 일을 통분히 여기었다. 또한 때로 아낙이나 목동들에게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묻고 따져 절충하여 종합해보니 절로 그 상세한 경위를 알 수가 있었다. 그러나 평안도 사람들은 거짓말 잘하고 난중 일은 잘못 전해지기 쉬워, 거짓말 전하고 잘못 전해들을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文永基({陣中日記}에는 文榮基)란 인물이 죽은 것에 대하여 어제는 충신이었다고 하고 오늘은 역적이었다고 하다가 다음날에는 충신도 역적도 아니라고 하는 류와 같다. 지금도 이러하거늘,

 

뒷날 전장에서 부러진 창을 찾고 밭두덕에서 유골을 주워 역사를 탐구하려는 사람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줄거리를 세울 수 있겠는가. 이에 나는 들은 것을 기록하되 수치스런 것은 빼고 실상만을 들어서 시 한편을 만들었으니, 모두 1860자이다. 먼저 난이 있게 된 이유를 말하고 다음으로 난의 경과 사실과 평난한 사적을 말하였으며,끝에 난을 막는 방도에 대하여 말하였다. 이름하여 "서구도올"이라 하였으니,도올이란 초나라 역사서이다. 은미한 것을 드러내고 충신을 표장하고 악인을 죄주며 史筆을 휘두르는 것은 사관이 따로 있으니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또 고금 시편 가운데 장편으로는 두보의 [北征]과 한유의 [南山]이 있는데 두 대가의 크고 넓은 재주는 내가 감히 그대로 본딸수가 없다. 나의 이 시는 단지 동시대에 살고 그 지역을 다녀보아 내 이목으로 보고 내 울분을 풀어 짐짓 오늘을 탄식하고 읊조린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도올은 神獸 가운데 악하여 선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 시로써 정주 인민을 경계하고 아울러 현감에게 고하여, 위에 있는 자는 선하지 못한 것을 가르치지 말며 아래 있는 자는 선하지 못한 것을 따르지 말도록 하고자 하니,이것은 도올의 뜻에서 취한 바가 있다. 이 현감은 양심적인 관리이다. 그래서 조정에서 평난 뒤에 이 고장을 맡겼다고 한다.

 

또한 작가는 원시의 허두 및 말미에서도 감계론적 시각을 드러내고, 시적 수사의 운용에서도 그러한 시각을 담았다. 작가는 봉기군을 명화적(강도)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민중의 봉기를 배고품을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인 투탁으로 보았다. 봉기군에 대하여 "주려죽어 시궁에 뒹굴긴 면했지만/ 아깝게도 연못에 죄다 빠졌지요"(溝壑幸不塡, 潢池嗟胥沒)이라 한 것은 그러한 시각이 가장 잘 드러난 구절이다. '주려죽어 시궁에 뒹굴긴 면했지만'은 {맹자} [양혜왕·下]의 '凶年饑歲, 君之民, 老弱轉乎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를 전고로 하되,흉년에 굶어 죽어 시궁에 나뒹굴게 될 것을 면하려고 군도에 투탁하였다는 뜻으로 쓴 것이다. '아깝게도 연못에 죄다 빠졌지요'는 {漢書}[ 遂傳]의 "其民困於飢寒, 而吏不恤, 故使陛下赤子盜弄陛下之兵於潢池中耳"에서 따온 말로, 바닷가 인민들이 강박에 못이겨 도적이 되기는 하였으나 마치 아이들이 무기를 훔쳐 연못가에서 장난하는 것과 다름없고 본시부터 난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란 뜻이다. 潢池는 아주 적은 구역의 땅을 비유한 말인데, 조수삼은 인민들이 난 때문에 죽은 것을 '연못에 빠졌다'란 말로 상징하고자 하여 그 어휘를 '연못'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물론 이 시에는 '황지' 전고의 사용에서 드러나듯 施政의 잘못을 비판하는 풍유 정신이 담겨 있다. 그러나 정치 문제를 추상적으로 바라보고 민란의 원인을 敎化의 불철저함에서 찾고 있으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민풍의 괴란 원인으로 보았을 뿐 그 속에 담긴 진보성과 근대성을 인식하지는 못하였다. 이 시는 鄭蓍·許沆·林之煥 등 이른바 평난에 충절을 다한 인물들을 부각시키고, 동시에 金益淳·趙文亨 등 이끝을 좇아 변절하고 간교를 부린 인물을 함께 다룸으로서, 忠과 奸을 대비시켜 두었다. 여기서, 충절의 표양은 廷論과 다를 바 없고, 각 인물의 실제 행적을 나름대로 해부하거나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를테면 가산군수 鄭蓍는 봉기군을 역도로 매도하다가 李喜著에게 죽었는데,

 

그의 죽음은 향촌지배구조, 특히 서북면의 향촌사회에서 보수적 수령과 상승하는 신분과의 대립이 파국을 맞은 사건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희저는 驛屬이면서도 鄕案에 들었으나, 정시는 이희저의 이름을 향안에서 삭제하여 원한을 산 일이 있다.이 사실로 보아 정시의 죽음이 지닌 의미를 논하려면 향안작성에 반영된 수령권의 행사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할 듯하다. 그러나 조수삼은 배후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그러한 인물관계의 문제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 廷論과 마찬가지로 정시의 죽음을 殉節로서 표양하는 데 그쳤다. 또한 조수삼은 봉기군과 군리와의 결탁 사실에 대하여 언급하였으나 그 결탁의 원인에 대하여는 살피지 아니하였고, 민중들이 주림을 해소하고자 봉기군에 가담하였다고 하면서도 官府의 구황책의 잘못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이 시는 송림동 전투와 3월20일∼22일의 관군측 승리(우군측과 홍총각의 피격, 홍경래의 패주입성), 북장대의 폭파작전 및 정주성 탈환 사건을 다루고는 있으나, 관군측 인물이나 활동에 대하여는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 주목된다. 忠憤을 떨친 것으로 찬영된 관군측 인물로는 諸景彧이 있으나 그의 행적의 작은 일면만을 서술하였을 뿐이며, 3월19일(사실은 3월8일)에 봉기군의 기습으로 군사를 다수 잃은 咸從陣의 尹郁烈의 실책에 대하여는 자못 신랄하게 논평하고, 송림동 전투 뒤 관군의 약탈에 대하여 "적은 대빗 관군은 참빗 같아/ 거두고 빼앗길 터럭 하난 안 남겨"(賊梳兵如 , 蒐掠靡遺髮)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조수삼은 봉기군과 관군의 접전에서 희생된 대다수의 인민들을 동정하고 있으며, 그의 민중관은 동정적,감상적이었다. 정주성 탈환에서 희생된 일반 백성에 대하여 조수삼은 다음과 같이 동정하였다.

 

적괴와 그 일당은
죽어도 마땅치만
정원 사람이라고 어찌 죄 없으랴만
안타깝네 昆岡 불 옥까지도 죄다 태워
제 지아빈 늙고 눈멀어
제 아이는 어리고 다리 절어
밖을 나가려도 적도가 길을 막고
목숨을 구해도 관군이 살려주지 않았어라
渠帥 黨羽, 殲獲分其秩. 定人豈無睾, 昆炎嗟不別.
我夫老而 , 我兒幼且 . 欲出賊不出, 欲活兵不活.

 

조수삼은 홍경래난을 민중봉기로서 긍정한 것이 아니었지만, 민중의 삶에 대하여 동정하고 위정자의 失政을 분개하는 마음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조수삼은 평소에 민중에게 예의염치를 알도록 교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스스로 작은 고을을 맡아 그러한 교화를 실천하고 싶어 하였다.

 

5. 조선후기의 論史詩
조선후기의 한시는 특히 임진, 병자의 양란을 겪으면서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담는 일이 많아졌다. 삼전도비를 소재로 한 영사시들처럼 치욕적인 과거를 돌이켜 분개한 작품들도 많이 나왔지만, 저항운동에 뛰어든 義士들의 영웅적 행위를 칭송하는 일도 많았다. 이 후자의 예로, 鄭文부를 따라 鏡城에서 거병한 李鵬壽의 사적을 노래한 洪良浩의 [臨溟大捷歌]가 있다. [臨溟戰勝碑](崔昌大)나 {彰烈誌}가 전하는 등, 정문부의 사적은 지속적으로 칭송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민중적인 구비전승의 세계가 크게 자리잡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는 7언 歌行體 47운의 장편으로, 사적을 서사적으로 제시하고 李鵬壽의 伸雪 褒贈 경위를 서술하였으다. 그리고 말미에,

 

지난날 김종서, 윤관이 강토를 개척한 것은
나라 위엄, 군대 강성에 의존하여서였네
공은 나라가 어지러운 때에 빈주먹을 휘둘러
우뚝하기가 마치 미친 물결 속 砥柱山같았네
그렇지 않았더면, 두만강 안 땅이 우리 차지 안 되었을 뿐 아냐
上國에 잠식당하는 것이 이로부터 있었으리
昔日金尹拓疆土, 國威兵力是憑倚.
公遭板蕩奮空拳, 屹若狂瀾障一砥.
不然不惟豆江以內非吾有, 蠶食上國從此始.

 

라고 하여, 北地에서 叛賊을 막아낸 일을 두고 우리 강토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 淸에 의한 국토 잠식을 예방한 공적으로 논평하였다.
조선후기에 민족사에 대한 연찬이 깊어지자 史學的인 관심을 표출한 論史詩시도 다수 출현하였다. 阮堂 金正喜의 [石弩詩]는 靑海의 土城에서 발굴되는 石斧·石촉에 대한 考證을 행하면서 사학적 관심을 읊고 있다. 완당의 시는 유득공의 [肅愼弩歌]와 같은 소재를 다루되, 유득공이 北虜 來服의 과거사실화를 안타깝게 여기는 민족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박물고증학적인 관심을 더 짙게 보여주었다. 특히 시의 끝부분에서는, 孤證을 증거로 强通하는데 조심하는 考證之學의 방법론(하나만의 증거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이 고증지학의 기본태도다)의 일단을 피력하고, 사적 증거를 토대로 상고사를 재서술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토로하였다.

 

이 돌도끼와 돌촉이 단연코 숙신 것이라면
동이가 대궁에 능하단 게 더욱 상상되네
토성의 유적은 비록 정하기 어렵지만
이 孤證[돌도끼, 돌촉] 있으니 强通할 수는 있네
돌은 아무 말없고 또 아무 표시 없는데
산빛에 의지하여 하늘은 안개만 자욱하다
도끼 끝에 무어라 쓴 글씨도 보기 괜챦고
긴 화살촉 끝에는 홍혈색을 띄고 있네
그래도 나으니, 조천했다는 기린석이
강물빛이 비단같아 주몽과 연관짓는 것보다는.
此斧此촉斷爲肅愼物, 更想東夷能大弓.
土城舊蹟殊未定, 得此孤訂猶强通.
石不自言, 又不款耶.
賴山色, 空  .
長爪疾書亦不錯, 長平箭頭古血紅.
勝似朝天麒麟石, 江光如練訛朱蒙.

 

석부·석촉의 실물은 그것밖에 남아 있지 않은 孤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실물로 숙신의 토성을 考證하는 데 强通할 수 있어, 토성을 숙신 토성이라 지목하는 것은 한결 근거 있다고 하였다. 기린석을 두고 그 주위에 햇볓이 비치면 강빛이 비단같다고 하여 朱蒙의 고사와 연결시키는 訛謬를 저지르는 것보다는 한결 근거있다는 주장이다.

 

茶山 丁若鏞은 젊어서부터 [鷄林懷古]·[扶餘懷古]·[金井懷古]·[靑石谷行]·[過延安城] 등의 시로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여 왔는데, 解配 뒤 춘천 여행길에서 지은 [和杜詩十二首]({與猶堂全書} 권7, 新朝鮮社本)는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연찬이 깊다. 두보의 [成都府]에 和韻한 陽韻의 5언고시 [牛首州]를 예로 든다.

 

종복 시켜 돌아갈 배 살피게 하니
강바람에 옷이 나부낀다
저녁에 우수촌에 들어
사방을 자세히 살피고 싶었다
아아, 이 낙랑성이 어쩌다 貊 땅이라 이름되
맥 땅이라고 뒤집어썼는가
나무껍질은 한 치도 안되고
오곡은 밭에 가득하며
기후가 따뜻하니 발생이 빨라
초하에 벌써 나뭇잎 무성하고
산비둘기는 나무마다 재잘거리고
뻐꾹새는 아릿다운 노래를 부르거늘
예전에 남한에 순무왔을 때
한의 사신 彭吳는 강에 다리가 없었다
그 때에 길 통하고 세운 비석이 땅에 묻혀
공덕을 끝내 상고할 길 없다
작은 개울 정말로 구정물같다만, 濊貊이란 그
예맥이란 이름은 참으로 빛깔 없도다
국사를 읽는 이 누가 있다냐
올라 바라보니 슬픔만 더한다
命僕理歸楫, 水風吹衣裳. 暮宿牛首村, 願瞻詳四方.
嗟玆樂浪城, 冒名云貊鄕. 木皮不能寸, 五穀連阡長.
地暄發生早, 首夏葉已蒼. 鳴鳩樹樹喧, 黃鳥弄柔簧.
南韓昔巡撫, 漢使川無梁. 勒石久埋沒, 薰聲竟微茫.
小水梁[良]若濊, 其名本無光. 國史有誰讀, 登覽深悲傷.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현재의 춘천 일대는 본래 貊國이었던 것을 신라 善德王 6년에 牛首州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산은 나무껍질이 얇고 오곡이 자라는 사실을 들어, {漢書} [晁錯傳]의 "胡貊之地, 木皮三寸, 氷厚六尺"이라든가 {孟子} [告子·下]의 "貊, 五穀不生, 惟黍生之"라고 한 貊鄕을 이곳으로 비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다. 다산은 基臨尼師今이 300년에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望祭한 뒤 樂浪과 帶方이 귀속되었다는 {三國史記}의 기록과 그것을 계승한 {東國通鑑}의 기록을 근거로, 牛頭山에 [彭吳通道碑]가 있다 없어졌으며 신라 基臨王이 우두주에까지 순행온 뒤로 漢吏가 오지 않게 되었다고 注記하였다. 다산이 근거한 {삼국사기}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대하여는 현재 의문점이 많지만, 다산이 古地名의 해석에 우리 史書를 적극 참고하려 한 태도는 참으로 값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南袞의 "東國通鑑有誰讀之"라는 말을 끌어다, 국사에 대한 연찬이 없는 것을 개탄하였다.

 

6. 맺는말
한시는 역사적 산물로서 존재하기에, 늘 역사와 상관을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글은 , 우리 한시에서 역사사실을 시적 계기로 삼는 창작방법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 지를 개관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글은 그러한 창작방법을 네가지 양태로 나누어 보앗다.

 

곧, ①작가가 과거사실이나 그것에 관련된 유적, 유물에서 시적 계기를 발견하고 형상화하면서 과거사실에 대한 사상정서적 평가를 담아낸 詠史詩 및, 懷古詩.

 

②작가가 당대 현실 혹은 주요사건을 시화해낸 詩史.

 

③작가가 이미 전설이나 신화로 된 역사사건을 내용으로 하여 이야기구조를 만들어낸 史詩(곧 敍事詩)

 

④과거의 역사사실에 역사학적 고찰이 관심의 주대상인 論史詩의 넷으로 나누어 보았다. 이 글은 이 네 양태 가운데서 영사시(회고시)와 시사, 및 논사시의 예를 들어 보았다.

 

(1) 詠史詩와 懷古詩는 우리 한시사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영사시와 회고시는 그 경계가 모호하고 제목에서 서로 구별없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둘은 발생과정이 다르고 시적 계기의 포착이나 주제표출방식에서 차이가 있다. 영사시는 역사사실을 이용하여 작가 자신의 문제를 빗대거나 당대현실을 풍자, 권계하려는 의도에서 창작되며, 그에 따라 감정논리나 분석논리에 따른 평가(후자의 경우는 史評이라 불리운다)를 수반하는 데 비하여, 회고시는 無常感을 기조로 하여 사실 자체에 대한 감정적 논리적 평가가 그다지 수반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잠정적인 견해이다.

 

우리 영사시는 이미 최치원의 작품들에서 발견되고, 고려중기 이후에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시들이 많이 나왔다. 고려말에서 조선전기까지는 중국의 사실을 소재로 한 영사시가 발달하였는데, 소재선정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鑑戒와 현실비판을 의도하기도 하고 자기성찰과 자아비판을 담고 있기도 하여, 역사사실을 주체적으로 평가하는 의론을 펼치고 있어 주목된다.

 

또한 이 시기에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영사시들도 다수 창작되어, 민족의식이 한시 속에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고려말 조선전기에 영사시가 발달한 것은 감계론적인 역사인식과 역사교양이 시대사조로서 팽배하게 된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을 듯하다. 이 시기의 영사시들은 또한 창작동기가 다양하였다. 즉, 畵屛에 적는 題詩로서 짓기도 하고, 역사서를 읽고난 독후감으로 짓기도 하였으며, 당대현실의 문제를 생각하다가 과거역사를 연상함으로써 짓기도 하고, 유적지 기행에서 기필하거거나 藝文館과의 月課나 廷試에서 회고시나 영사시 제작을 부과받아 짓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전기의 영사시들은 주제구현의 방식에 따라, 역사사건의 서술이 중심이고 작가의 주관은 수사법에서나 드러나는 예,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의론을 위주로 한 예, 과거 사실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당대 정치현실의 구체적인 특정사실을 비판하고자 의도한 예의 세가지로 나뉠 수 있다. 이 세번째의 일례로서 성현의 [過昌和里]를 분석하여 보았다. 조선후기의 영사시는 근체시,고체시의 일반 양태뿐 아니라 樂府體와 宮詞體의 양태를 도입하여 양적, 내용적으로 풍부해졌다. 일반 양태의 영사시들은 앞서 고려말,조선전기의 일반 영사시들과 같은 창작동기와 주제표출방식에 의하여 창작되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한 악부체의 연작영사시가 출현하여 해동악부체 양식이 성립하는데, 이 양식은 엄격한 규범성을 확보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작품들 상호간에 계승관계가 인정되며, 소재 선택, 형상화방식, 시편의 구성 등에서 일정한 틀이 확인된다. 대체로 감계론적인 관점에서 과거사실을 품평하고 있으나, 그 속에 士 계층의 독특한 자기인식과 실천의지가 드러나 있고, 과거사실의 서술을 통해 당대 현실문제를 적극적으로 환기시키려 한 의도거 엿보인다. 宮詞體는 艶風 취향을 드러내는 시양태이지만, 허균의 예나 박규수의 예에서 드러나듯, '훼손되지 않은 과거'의 제시를 통하여 '훼손된 현실'을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은 작품들이 있어, 영사시의 성격을 지니기도 하였다.

 

(2) 우리 한시는 당대의 중요 사건을 소재로 택하여 문제의식을 담기도 하였다. 외적의 침략에 대한 투쟁을 주제로 한 시나 당쟁, 정변에 얽힌 사건들을 소재로 한 시만 아니라, 권력자의 탐학,삼정의 문란, 인민의 고통을 고발한 시들도 넓게는 이 부류에 속한다. 이때 한시는 당대의 사건을 직접 소재로 삼기도 하고, 혹은 그 사건으로부터 배태된 사회현실의 한 작은 단면을 시화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 사건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후자의 예로 李山海의 [門外有行乞者 善吹草笛 其聲甚悽楚 問之乃兵營樂生之逃亂者也]를 살펴보았다. 또한 당대의 역사현실을 시화한 시들은 강한 현실비판의 성격을 띠는 것이 보통이며, 그러한 시들 가운데는 민요적 풍격의 악부체나 풍자적 내용을 담은 신악부체의 수법을 이용하는 일이 많다. 그 일례로 李穡의 [山中謠]를 들었다.

 

(3) 詩史는 당대 사건이나 현실을 핍진하게 형상화한 시를 말한다. 본래는 두보의 [兵車行]이나 三別三吏에 대하여 붙여진 평어였지만 후대에는 일반화된 평어로 사용되었다. 이 詩史에는 역사적인 주요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과 당대 현실상황의 형상화를 주로한 작품의 두 부류가 있다. 후자는 이른바 사회시란 개념으로 다루어지기도 한다. 전자의 詩史 작품은 동란의 시대를 반영하여 난리의 장면을 서술하여 감동을 일으키거나 불굴, 충절, 절조 등의 정신을 고취시키려 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 한시 가운데 전자의 詩史 작품의 예로 조수삼의 [西寇도올]을 들어 보았다.

 

(4) 조선후기에 민족사에 대한 연찬이 깊어지자 사학적인 관심을 표출한 論史詩시도 다수 출현하였는데, 그 가운데서 김정희의 [石弩詩]와 정약용의 [牛首州]를 예로 들어 보았다. 김정희의 시는 박물고증학적인 관심을 짙게 드러내었고, 특히 孤證을 증거로 强通하는데 조심하는 考證之學의 방법론과 상고사를 재서술하고자 하는 학적 욕구를 보여주었다. 정약용은 우리 역사에 대한 연찬을 주장하고, 고지명의 해석에서 우리 역사서를 적극 참고하였다.
앞으로 우리 한시 속의 詠史詩·詩史·史詩·論史詩의 각 부류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고찰하고 우수한 작품들을 선별하여 주석과 함께 보급하여야 할 것이다.

 

부 : 조수삼의 [西寇  ]
정주 뒷산 馬山은 쓰리도록 푸르고, 앞강  川은 오열하여 우우 울어라.
열에 아홉 집은 홀로된 부인, 곡도 채 못하고 피눈물을 쏟는다.
서러워 잠못이뤄 긴긴 밤을 오똑히 앉아, 난리 전 일부터 이야기 꺼내었다.
우리 땅 정원은 옛부터 낙토요, 저 적도는 서북면서 가장 세었습니다.
물길은 鄭, 白渠보다 훨씬 낫고, 땅덩이도 등나라 薛나라에 곱절 크기라,
군진은 8만호에 비늘마냥 짜였고, 개닭 소린 변경까지 멀리 이었으며,
수송하는 수레는 이리저리 다니고, 조운하는 배는 저 밖까지 널린데다,
고기 많은 섬과 풀밭 너른 똥섬은, 하늘의 별이랑 바둑판 같이 널려있지요.
하루 세 끼 모두 기름진 쌀밥에, 철따라 숭어탕에 붕어탕.
걸친 옷은 越女가 짠 것같고, 모자는 초나라 것보담 나았고요,
세공은 교묘하여 온갖 기술 다했고, 귀한 보물이 여기서 다 낫어요. 소매점엔 명주 비단 쌓이고, 전매점엔 鐵과 소금이 그득그득.
날마다 杭州서 물건이 오고, 해마다 燕京서 수레가 모여,
작은 부자라도 쇠 우물을 으시대고, 큰 부자는 금테 연못 뽐내었고요.
농상민이 모두다 제 이끝을 즐기고, 글하는 선비는 한결 고상했지요.
땅이름이 예로부터 新安이라 하여서, 여기에 향교가 세워져 있고,
사람마다 경전을 배워 외우고, 집집마다 예의를 익히었지요.
나이 많은 준사는 稷下만큼 그득하고, 준재도 득실득실 冀州 땅같았어요.
어린 학동에게는 글구를 깨우치고, 명문 자제에게는 저술을 전하여,
작록은 땅에서 초개 줍듯 쉽고, 집집마다 과거급제 계수낢을 꺾었지요.
으리번쩍 화려하고 넉넉도 하고, 오손도손 한 사람도 빠진 이 없어,
아녀자는 앞채 뒷채 거처하여서 긴 눈섭 그리고 예쁜 버선 차림,
곱상히 미소지며 새 단장 가꾸어, 흥겨운 노래로 유쾌도 하고,
덩더끼 풍악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 고기 갖추갖추 절기를 즐겼지요.
황황히 빛나는 箕子 성인 가르치심, 팔조 금법은 중도 훼철 않았어요.
그러나 뉘 알았겠어요 풍속이 날로 박해져서, 순박한 풍기는 사라지고,
한 말 보리에 형 아우가 다투고, 열 냥 돈푼에 죽이고 능멸할 줄 말입니다.
그 좋던 풍속은 악착하게 뒤바뀌고, 억세고 사납긴 오랑캐같게 되어서,
사람들이 교만코 게을러져, 하늘이 그 음풍을 벌주려 하셨나 봐요.
첫해에는 많은 비에 시달리고, 이듬해엔 더위에 괴롭고,
세째 해엔 하마 물고기가 될 번하고, 네째 해엔 사정 없는 한발.
그 이어 다섯째 해 여섯째 해에는, 곡식 담는 자루가 텅텅 비었고,
일곱째 해는 더욱 심하여, 가뭄에다 혹서까지 겹쳐서,
논엣 벼는 미쳐 익지 못하고, 보리는 씨뿌린 뒤 싹도 안 나고,
불모지가 되고 말았어요, 강변 기름진 水田들이.
쌀 한 되에 칠십 냥, 베 한 필에 육백냥.
배고픔 추위는 참는다지만, 세금은 언제 끝나나.
관리는 성화같이 독촉을 하고, 어쩔꺼나 里正은 다그침 받아,
내 괴로운데 뉘 사정 봐주랴, 문을 쾅쾅 두들기곤 고함질.
가난한 사람은 제 자식 팔고, 부자는 제 옷 벗어 감변하려고,
마지못해 내놓아 몸 꽁꽁 얼어도, 독촉 세금 열에 하나도 채우질 못하고,
두 밤 자곤 방에 온기 끊기니, 때는 바야흐로 풍설이 몰아칠 때였어요.
서도 사람 크게 술렁대기를, 오랑캐 기마가 몰려 온다고.
백성들은 현혹되어 곧이 들으니, 별자리가 병란 조짐 蚩尤星이었어요.
궁하던 차에 이 난리 만나게 되니, 한 밤새 예닐곱 읍이 다 경동할 수밖에.
그 날은 열여드레, 그 달은 섣달.
극악한 무리 동쪽에서 달겨들어, 가는 곳곳마다 엎어지고 무너졌지요.
모은 수는 임꺽정 홍길동보다 많고, 작란하긴 連, 李适에 짝했어요.
嘉山 사또 鄭蓍는 祖孫이 다 명망있었죠, 변란에 곡진한 충성을 다했으니,
직분이 고을 맡은 신하라, 신하는 마땅히 임금위해 순직할 일,
鄭魯, 蓍 부자는 칼날을 밟아서도, 태연하여 조금도 두려워 않았어요.
강도들은 軍吏와 서로 짜고서, 돈으로 호걸들을 사모으고는,
병장기 가져다 무기로 삼고, 곳간 곡식을 제멋대로 퍼내어다가,
장부에다 멋대대로 朱點을 찍어 두고, 자물통은 푸른 녹이 부끄러울 정도.
주린 빛 백성들 선동에 응했지만, 밥사발 볼록한 걸 보아서일 뿐이었어요.
단정한 의관을 융복으로 바꾸고, 머리에 쓴 것은 붉은 띠.
주려죽어 시궁에 뒹글긴 면했지만, 아깝게도 연못에 죄다 빠졌지요.
배부르건 고프건 죽는 건 마찬가지, 죽고 죽이고를 같은 고을 사람끼리.
"너는 군신 의리가 어둡구나", 이는 바로 목민관의 매서운 질책.
嘉山과 博川엔 불길 퍽퍽 솟구치고, 宣川과 郭山엔 물길이 콸콸 솟아,
일곱 고을에 남아장부 하나 없어, 능멸만 당하고 막지를 못하였어요.
인끈 품고 한밤에 도주하거나, 왼손에 활 잡고 적에게 배알하였지요.
아아 위대한 우리 태조께옵서, 神武로 몽고족 쓸어내신 이 땅,
태조의 사적 얽힌 우뚝한 元帥臺와 높이 빛나는 五丈碣.
정주에 삼군을 배치하여서, 군용은 하 그리 늠름하였고,
울긋불긋 깃발은 중군에 서고, 작벽관 무인들은 두줄로 열하였으며,
성곽은 그다지 우람챦지만, 순라꾼 주행은 아침에서 저녁까지요,
화살과 화살촉 굳진 않지만, 쇠가죽 투구엽편 일곱은 뚫을 만하였으며,
한양성만큼이나 건량을 재워두고, 산처럼 창과 무기 쌓여있더니,
고을 안 예닐곱 적이, 하나하나 농간 떨어,
태평시엔 기름 알짜 다 먹어놓고, 난리통엔 혓바닥 날름대다니.
여우놈 거짓 위세 너무 허탕하고, 지렁이 얽히듯 얽은 관계 아주 은밀해서,
태수는 자식잃고 西河서 운 子夏같이, 슬픔과 두려움이 망연히 뒤섞이고,
말몰이는 눅눅한 데 묵을까 저허하여 산메나리 있는가 묻고,
이웃골 사람들은 빨리와 구하쟎는다고  丘 칡을 노래하였지요.
슬프도다 이 나라 철옹같은 요새가, 사악한 뱀무리의 소굴이 되다니.
철옹성 寧邊의 吳淵常 부사는, 기미를 미리 살펴 도적을 참수하여,
왼 성을 빙둘러도 적이 없었고, 순국하자 卒했다고 기록하였지요.
그 때에 난적들 송림동 머무를 때, 관군을 엉겹결에 맞닥뜨리고서는,
시끌시끌 소리하며 새짐승 숨 듯이, 백리만치 가서야 돌아볼까 말까 하였고,
괴수 홍경래도 나살려라 허겁댔으니, 그 후미를 어느결에 구할 틈 있었나요,
그 기량이 이 정도였으니, 빨리 뒤쫓길 게을리 말았어야 할 일.
적은 대빗같이 성글고 군사는 참빗같아, 거두고 빼앗길 터럭하나 안 남겨서,
마을을 한번 분탕질하면, 사내 아낙 모두가 베어 엎어졌어요.
홍경래는 세 밤만에 정주성에 이르러서는, 성벽에 올라가선 비웃음 쳤지요.
유격군을 이름하여 북진대라 하고, 선봉 李濟初가 제법 용맹했는데,
곽산 將臺 앞 싸움터에서, 타고 있던 말이 발 접질려서,
관군 앞에 머리가 높이 달리자, 성위에 오른 도적들 풀이죽어서,
움켜잡을 손톱이 죄 부러지고, 앙물 송곳니도 전부 빠진 격이었어요.
적 부관 金昌始는 얼추 문자 알아, 부적에 격문에 늘 붓을 잡아 만들어,
龍灣 칠 策書로 인민을 선동하고, 상벌을 도맡아 환치고 비점쳤다만,
한번 패하자 산성으로 들어가니, 그 머리 베어다 알랑댈 마음일어,
천금에 여섯 마을 준다고 하자, 역신 金益淳 꾀 정말로 간사했지요.
더 어리석은 건 이쫓은 趙文亨 무리, 남 때문에 칼날 위에 엎어지다니.
이 때 관군이 높푸른 하늘에서 내려와, 깃발 날리며 궁궐을 하직하니,
보무당당 병사들은 열을 지었고, 준마는 터럭을 나란히 하여,
한끼 식사마다 오백섬 먹어 치우고, 일만 가마솥엔 푸른 연기 솔솔.
속절없이 해자 가의 버들가지는, 봄바람에 휘휘 늘어져 흔들흔들.
諸景彧이 칼 차고 내려오셔서, 미친 먼지를 전부다 쓸려 하여,
수레 밀면 수레 곧 바숴지고, 관문 치면 관문 곧 끊길 형세.
몸을 빼어 국난에 달려감이, 이 바로 집안 대대로 전할 공적이라.
강개한 金兵使(見臣)는, 출전 앞서 눈물로 맹세하기를,
괴수의 고기를 맛보지 않는다면, 살수를 두번 다시 건너지 않겠노라고.
東 樓(동포루)에 육박하니, 보이는 적마다 다 자빠졌지요.
조정서 모른 것은, 3월 20일 두 분 함께 돌아가신 일이어요.
義州 출신 두 의병장은, 재략이 어슷비슷하여,
긴 창 잡이 許統制(沆)는, 말몰기를 매보다 빨리 하고,
적을 베길 호박 베듯이 하여서, 비단 두루막엔 피비가 쏟을 지경.
고을을 하나하나 탈환하고서, 보루를 순식간에 거둬 들였지요.
굉장타 西門 밖 싸움이여, 독한 선봉이 빗살처럼 섰거늘,
상처를 싸감고 손으로 치고 싸워, 死地에 임하길 편안히 여기셨어요.
安陵 義士 林之煥은, 灣府 보낼 비밀 문서를 숨겨 가지고,
누덕누덕 해진옷에 곱사등 모습으로, 샛길로 구걸행색 꾸며 나섰지요.
적괴가 탐지하고 의대를 끄르자, 살신하여 끝내 자결하셨으니,
사내 장부는 마땅히 이러할 일, 충과 신 두 의리를 오롯이 하였지요.
郞署에 고단했던 前令 韓浩運, 띠집에 늙었던 유생 白慶翰,
글 읽기는 주공과 공자를 흠모하고, 나라에 몸 바침은 稷과 契 같아서,
도적을 꾸짖어 그치지 않고, 적도들 앞에서도 몸을 아니 굽히셨죠.
죽기까지 적 꾸짖은 顔 卿 같고, 친한 척하다 적을 침은 段秀實 같아,
포상은 윤음에 애절하고, 영화는 역사에 찬란하리.
윤리강상이 이에 보전되었으니, 이 사람 아니면 하마 멸했을 겁니다.
3월하고도 19일 밤, 적이 성을 나오길 회오리 바람같이 하여,
咸從陣은 늘 승승한 군대거늘 꿈결에 크게 분탕질 당했어요.
周穆王 군대같이 沙蟲됨이 나을 걸, 全軍 모두 나무동강 된 꼴이라.
씩씩한 銅面 장군, 기율을 엄히했다 하더니,
어리석었지, 새벽에 項羽 난 줄 알았던, 저 옛날 회음후 韓信같았어요.
전쟁은 성현께서 중히 여기는 바, 그 계율을 선비가 따르지 않은거지요.
독전하는 피리 북을 새벽에 들여서, 그 소리 듣고서 몰래 울음 삼켰겠지요.
포위한 속에 사방 달이 보이니, 단속하길 어찌 느슨히 한 것인지.
정원 사람은 활화살 부리고, 박천 적은 골자가 되어선,
박천 적 하나가 정원 사람 열을 부려, 감시하길 조금도 쉬지를 않았다만,
줄타고 도망하길 틈봐 하기도 하고, 가까운 보좌가 모반해서 죽임을 당하여,
도적이 도적이라 말할 지경이라서, 족히 죄받아 마땅하였으니,
머리 몸 떨어진 걸 대중에게 보이고, 신체를 욕보여 속살 내놓게 될 수밖에.
애처로운 인민들은, 죽여 달래도 죽이질 않았어요.
지난날 인민들이 부지런히 심고 가꿔, 수목이 무성하게 우거져서,
푸른 나으리는 백년 묵은 소나무요, 흰 어르신넨 천 이랑 그득 칠나무,
관가 앞에는 오얏을 나열하고, 가문 해엔 대추 밤 나무 영글어서,
도끼로 베고 자르지를 않고, 비이슬 늘 촉촉히 적시더니만,
하루 아침에 불살라져서, 삼춘에도 싹을 틔우지를 못하였으니,
도적 관부는 곡식 다했다 고하고, 민간에선 긁어모으느라 정신없어,
크게는 곳간을 기울이고, 작게는 밥사발을 엎어서,
저장한 걸 지킬망정, 남들에게는 쉬쉬 말하지 않았지요.
그런데도 주린 빛이 있었거든, 적도는 사정없이 욕지거리 고함질이라.
고단한 짐승이 한번 싸움 벼루어, 大陣과 한밤에 결판내려 꾀하였지요.
깜빡이는 별이 창끝을 비추고, 봄비 멎은 길바닥은 진득진득.
척후가 불 일어남을 보고서, 길에 숨어 차례로 공격해대니,
홍경래는 말 버리고, 무기를 질질 끌고 도망하고,
우군측은 얼굴에 화살 맞고, 피범벅에 외마디 소리하며 고꾸라져.
홍총각은 손바닥에 총알 맞고, 신음하며 못 일어났어요.
장정들이 다 이 지경이니, 적의 소굴에는 고물대는 것 하나 없어,
원망과 노염만 쌓여가는데, 땅굴 판다는 말까지 들렸지요.
호미 가래로 힘자라는대로, 잘되건 못되건 따질 것 없이,
강엣 구름같이 모인 노련한 광부들이, 땅속에서 머리가 희어져라 일하여,
높았다 낮았다 깊었다 얕았다, 어깨 높이로 무릎으로 기어 들어가,
푸석 바위 만나면 그 소리 융융하고, 점토층에 만나면 그 소리 찰찰하여,
뭇굼벵이가 오얏 속을 먹어가듯, 뭇 개미가 진주에 구멍 뚫듯하였으니,
적도들 구차한 목숨도 그저 잠시, 위세하던 자들이 두려워 벌벌 떨었지요.
강계 牛毛嶺서 온다고 소문냈던 천군만마는, 기갈이 너무 심해 못왔나 봐.
부인네들 길일은 놓쳤지만, 열흘전이 4월 8일 욕불일.
새벽빛은 긴 구름에 비끼고, 높다란 성벽에는 안개가 애리애리.
꽝하는 소리에다, 우르릉대는 소리.
알록달록 성가퀴는 날아 떨어지고, 곱다란 망루는 거꾸로 뽑혔지요.
담벽에 오른 오백 군사들은, 하늘에 올라 휏불을 다타도록 잡고있어,
병졸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불기둥은 땅속에서 솟아나니,
비명지르며 저마다 도망하기 바빠, 누가 남을 이끌어 도우려 하였겠어요.
적괴와 그 일당은, 죽어도 마땅치만,
정원 사람도 어찌 죄 없으랴만, 안타까와요 昆岡 불이 옥까지도 태웠으니.
저는 지아비가 늙고 눈멀어서고, 저는 애가 어리고 다리 절어서 그랬어요.
성을 나가려도 적도가 막았고, 목숨을 애걸해도 관군이 살려주지 않았지요.
막부에 내걸린 두 머리, 종당에는 누군가가 몰래 훔쳐갔어요.
西門을 목표로 십리를 가니, 드러난 해골을 분간할 길이 없을 지경.
"얼르고 겁주어 적도에 낀 것이리라", 임금님 말씀 자상도 하셔라.
도적은 도적으로 죽어서, 갑인지 을인지 죽은 몰골 분별 어려웠죠.
억울한 원혼은 화평한 기운을 해쳐, 역병이 더러운 몸에서 물씬 이는데,
목숨부지 인민들이 밭도 채 갈기 전에, 접동새는 다시 피나게 울어대내요.
병들어 죽은 이가 열에 다섯이요, 굶어서 죽은 이가 열에 여덟.
주리고 병들어 하루 살기도 괴로워, 칼에 죽는 게 빨리 죽어 쾌할 것을.
내 삶은 정말 괴로워, 빨리 죽는 게 꿀처럼 달 것같애요.
이 말을 차례로 시로 지어서, 임군 위해 사방에 전하리라.
이천석 고을 고을마다, 염치있어 탐욕을 부끄리고,
예의로 이끌고 다스리어서, 농사를 힘쓰고 이끝을 좇지 말 일.
그러면 화평할 때에는 잘 따를 것이고, 난리 때는 도망가는 일 없으리라.
큰 도둑은 성읍을 도적하고, 작은 도둑은 적은 엽전닢을 도적하여,
온갖 것 다 도적해 간다고 해도, 도적맞지 않은 것이 그래도 정치.
바라건대 적은 고을 하나 빌어서, 임금님 귓전에 삼가 들리게,
南風 태평가를, 거문고로 타봤으면.
馬山碧慘憺,  川鳴嗚咽. 十室九寡婦, 未哭淚先血.
哀哀坐終夜, 自從亂前說. 維定舊樂土, 厥賊雄西 .
有渠過鄭白, 其地倍 薛. 魚麟萬正錯, 鷄犬四境達.
 車旣狼戾, 漕輓乃遠渫. 漁島及牧洲, 星羅又棋綴.
三時飯稻粳, 四節羹  . 衣須越女裁, 帽勝蜀主結.
纖巧極人力, 大寶皆地出. 區賣峙絲蘭,  亭居鹽鐵.
日 杭市貨, 歲湊燕山轍. 小戶誇錢 , 大戶號金 .
農賈 樂利, 儒士尤卓絶. 地名古新安, 有此俎豆設.
人人誦經籍, 家家習綿 . 稷下盛 俊, 冀北多馬 .
句讀誨童孺, 著述傳子侄. 榮爵地芥拾, 比屋天桂折.
芬華兼富厚, 團圓無虧缺. 有女南北院, 長眉而曲襪.
 笑工妖冶, 謳歌相欣悅. 絃管淹晨夕, 酒肉慶年節.
煌煌聖人敎, 八條不中轍. 奈何俗日薄, 醇風盡壞裂.
斗麥訟朞功, 十錢相殺越. 齷齪變華夏,  悍似胡 .
人事恣驕惰, 天意禍淫 . 一年苦多雨, 二年悶中 .
三年又幾魚, 四年仍肆魃. 五年六年中, 甁罌已 竭.
七年最爲甚, 水旱俱酷烈. 秋火爛不秀, 春苗種不茁.
今爲不毛地, 昔之長腰 . 七十米一升, 六百布一疋.
飢寒分所甘, 租稅從何畢. 官吏立徵督, 里正遭鞭撻.
我困執誰故, 敲門卽嗔喝. 貧者 子女, 富者解衣褐.
割愛凍肢體, 十不充其一. 信宿斷煙火, 維時政風雪.
西人大煽動, 虜騎將馳突. 下民熒惑聽, 惟星蚩尤 .
貧窮 亂離, 一夜驚六七. 其日十八夕, 是歲十二月.
劇寇從東來, 所向皆顚蹶. 嘯聚倍林洪, 犯順 連适.
賢宰名祖孫, 處變克纖悉. 職爲守土臣, 臣當殉符 .
父子蹈白刃, 從容無畏말. 明火計軍吏, 懸金購豪傑.
藏兵藉爲銳, 倉粟爛自發. 點朱浪簿記, 沈綠愧  .
  應叫呼, 但見飯盂凸. 衣冠幻殊服, 虎兜紅額抹.
溝壑幸不塡, 潢池嗟胥沒. 一死等飢飽, 同鄕忍誅伐.
汝昧君臣義, 是亦父母質. 嘉博火 爆, 宣郭波蕩 .
七州無男兒, 憑陵遂莫 . 懷綬或夜走, 左 或朝謁.
洪惟我聖祖, 神武掃蒙 . 鬱 元帥臺, 巍赫五丈碣.
于定制三軍, 軍容何洸勃. 雕旗竪中權, 鵲弁趨兩列.
城郭雖不壯, 週行晨及 . 弓弩雖非勁, 犀革貫七札.
範京量  , 齊山積矛鉞. 府中六七賊, 一一舞奸猾.
昇平 脂膏, 板蕩鼓吻舌. 狐威劇 張, 蚓結固密勿.
太守哭西河, 悲懼交恍惚, 徙御問山 , 隣邦賦邱葛.
痛矣國之障, 化爲龍蛇窟. 傳聞鐵甕守, 奸 幾微察.
環城已無賊, 殉國復有卒. 時賊據松林, 官軍遇倉猝.
大조鳥獸竄, 百里行一瞥. 其魁恐不免, 其後遑顧恤.
其伎乃止此, 疾追尙無逸. 賊梳兵如 , 蒐掠靡遺髮.
村閭一焚蕩, 夫婦盡斬割. 三宿抵城下, 登 賊笑 .
游寇號北陣, 前鋒頗勇 . 東嶺大戰場, 所騎偶蹶失.
軍前首高懸, 城上氣先奪. 欲攫爪已 , 欲 牙卽脫.
賊副粗識字, 符檄常秉筆. 宣人攻灣策, 圈批主陟黜.
一敗入山 , 斬 起幸 . 千金指六里, 逆臣謀亦譎.
愚哉重利徒, 爲人伏砧 . 王師下靑冥, 旌麾辭北闕.
子營閱超距, 甲馬班毛物. 一飽五百斛, 萬 靑  .
無 濠邊柳, 春風   . 諸公仗劒來, 狂塵志掃滅.
推車車直 , 撞關關將截. 挺身赴國難, 乃有傳家閥.
慷慨金兵使, 戎壇告泣訣. 未 賊魁肉, 誓不重渡薩.
肉溥東砲樓, 眼前無突兀. 朝廷所不識, 二公死同日.
義州兩義將, 材智便  . 長槍許統制, 跋馬先秋 .
斫賊同斫苽, 錦袍血雨撤. 州縣復次第, 鎭堡收磋 .
壯哉西門戰, 毒鋒如比櫛. 裏創手格搏, 安如死房 .
安陵林義士, 蝎書藏之密.   與鵠形, 間道行 乞.
賊諜發衣帶, 殺身終自潔. 丈夫當如此, 忠信兩專臺.
韓公困郞署, 白生老蓬 . 讀書希周孔, 許國輩稷契.
罵賊聲不絶, 見賊身不屈. 死後顔 卿, 來時段秀實.
恩褒憫絲綸, 榮 煥綽楔. 綱常賴扶植, 微斯定幾滅.
暮春十九夜, 賊出風  . 咸從常勝兵, 夢裡大焚 .
何如爲沙蟲, 一軍化  . 桓桓銅面將, 聞道嚴紀律.
平明覺羽出, 淮陰政疎闊. 惟戰聖所愼, 其戒士不率.
가鼓向曉入, 聽之潛泣 . 圍中四見月, 團束 少豁.
定人游弓殼, 博賊爲 括. 一博 十定,   不暫歇.
 跳或乘間, 騈誅及傍轄. 至令賊曰賊, 重足被告 .
徇衆異身首,  體露私褻. 哀我赤子身, 求死亦不殺.
昔人勤培殖, 樹木喬而蔚. 蒼官百歲松, 素封千畝漆.
公門羅桃李, 荒年就棗栗. 斧斤勿剪伐, 雨露常湛濊.
一朝入焚燎, 三春鮮滋蘖. 僞部報粮盡, 民間急搜刮.
大者傾  , 小者空簞鉢. 寧復護盖藏, 不敢私語 .
然猶有飢色, 其徒  叱. 困獸 一鬪, 大陣謀夜決.
稀星在戟芒, 雨止春泥滑. 斥 見火起, 伏路奔攻迭.
景來棄其馬, 衣甲盡掉 . 君則面帶矢, 被血叫頓跌.
總角掌中丸, 呻吟不振刷. 丁壯盡是役,   無揭揭.
歸來相怨怒, 況聞地道掘.  鋤之所及, 不問巧與拙.
江雲老 工, 頭須白地室. 高低若淺深, 量肩度以膝.
遇창聲隆隆, 遇埴聲軋軋. 群 食李心, 衆 穿珠穴.
游魂 須曳, 作威耐恐慄. 萬馬牛毛嶺, 說梅難止渴.
婦人雖失日, 旬前 浴佛. 晨光帶長雲, 危堞曳靄靄.
千雷疊  , 萬電同  . 粉雉忽飛墮, 畵櫓自倒拔.
乘障五百徒, 朝天燭見跋. 兵從天上下, 火自地中洩.
號 各奔 , 誰能共提 . 渠帥 黨羽, 殲獲分其秩.
定人豈無辜, 昆炎嗟不別. 我夫老而 , 我兒幼且 .
欲出賊不出, 欲活兵不活. 幕府兩級首, 竟歸誰冒竊.
十里定西門, 無由認暴骨. 雖賊宥脅從, 天語誠惻 .
匪賊死以賊, 亂數某甲乙. 幽寃干天和, 疫 蒸汗 .
生者未耕田, 時復鳴  . 病死十之五, 飢死十之八.
飢病苦費日, 兵死快俄忽. 我生良亦苦, 快者甘如蜜.
斯言次爲詩, 爲君傳四訖. 百郡二千石, 廉平恥  .
禮導幷義齊, 務本莫趨末. 治日易勸從, 亂時罔散佚.
大盜盜城邑, 小盜盜 鎰. 百物盡盜去, 未盜爲政術.
願借方寸地,   一仰徹. 縱愧南風歌, 猶堪被琴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