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산하를 노래한 한국한시의 미학적 전통
1. 머릿말
우리나라가 비좁고 폐기물로 더러워졌다고 하지만 우리의 산하는 마음을 평안히 해주고 용솟음 치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金馹孫은 [頭流紀行錄]의 첫머리에서 "선비가 나서 한 지방의 바깥을 떠나보지 못하고 마는 것도 운명이라고나 할까? 천하를 두루 구경하여 견식을 넓히기 어렵다 해도, 제 나라 산천은 모두 탐방하여야 하련만, 어디 세상일이 그것인들 용납하랴!"라고 하였다. 우리 산하를 두루 탐방하여 공간인식의 폭을 넓히는 일이 현대인에게는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의 산하는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민족사의 간단 없는 흐름이 이루어진 생활 공간으로서 '歷史美'를 지니고 있다. 高裕燮 님은 {松都의 古蹟}이란 책에서, 고적을 역사적으로 천명하기 보다는 歷史美에 더욱 탐닉하고 말았다고 하였다. 역사는 창조적 新生을 위한 유일한 온상이며, 고적은 역사의 상징, 전통의 顯現이다. 그러한 고적을 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지만, 고적 자체의 아름다움에 끌리었다는 말이다.
산하가 이루는 풍경은 인간 주체의 삶에 의하여 부단히 변화한다. 인간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 가운데 풍경(경관) 만큼 고착되지 않는 것이 또 없다고 한다. 산하는 여행자의 눈에 소외된 채로 사물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활하는 인간 주체를 매개로 재구성된다. 조국 산하의 풍경 속에 인간 주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 한시 작가들은 일찍부터 인식하였다. 비록 관찰자적인 자세를 취하기는 하였지만 紀
俗이라든가 譜風土라든가 하는 개념으로 지방 풍속을 알리고 현실 문제를 해부하여 제시한 예들이 그것이다.
현재 우리는 국토산하가 지닌 자연미와 역사미, 그리고 지방 고유의 풍경(경관)을 온전히 감상할 수 없는 형편이다. 분단의 현실이 그것을 방해하고, 무모한 국토개발이 그것을 방해한다. 정책적 지역분할이 그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자연미와 역사미와 풍경을 새로 정립할 技術은 졸열하기만 한데, 미래의 행복을 파괴하는 힘은 가증되고 있다. 자연미와 역사미와 풍경(경관)은 우리 삶의 과정 속에서 재창조되어야 하겠기에, 우리 삶 자체를 반성하는 진지한 자세가 요구된다. 이러한 때에, 우리 한시가 국토산하를 생명의 공간으로 인식해 온 전통을 반추하는 일이 큰 의미를 지닐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글은 한시가 국토산하의 자연미와 역사미, 그리고 각 지방의 풍경(경관)을 시적 주제로 삼은 창작방식을 몇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유형화는 관념적, 고정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된다. 각 유형간에는 상호 간섭, 병렬, 혼재가 있었다. 窺見의 한계상, 각 창작방법의 역사적 변천을 다루지는 못할 것이다. 각 작품의 시대성이나 당파성을 고려하는 일이나, 형식과 모드(Mode)의 차별적 특성을 논하는 일은 당면 과제의 바깥에 있다. 세부 서술에서는 기왕의 학계의 연구 성과를 많이 참조하였으나, 참조 문헌을 일일이 들지 않는다. 여러분들의 양해를 구한다.
2. 玄對를 통한 意念의 정화
우리의 산수는 한낫 속된 유흥의 수단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六根의 번거로운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로움을 느끼게 하는 안온함이 있다. {莊子} [外物篇]에서 말한 '大林丘山'의 면모를 우리 산하는 지닌다. 승경지를 중심으로 문사들이 樓臺亭閣을 얽어두고 시문을 즐긴 것은 주변 풍광에서 幽靜·閒雅·淡泊의 美意識을 추구한 때문이었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무신들의 문객이 되지 않고 고단한 삶을 살면서 국토산하에 대한 애정을 시로 담아내었던 金克己가 평양의 영명사를 노래한 칠언율시를 보면, "(두련 생략)첩첩 산마루는 하늘을 받치고 일어섰고, 아득히 맑은 강은 바다에 흘러든다. 만 골짝 서늘한 바람은 경쇠 소리에 따르고, 물결에 잠긴 흰 달은 두어척 배를 따른다. 機心 버리고 사랑하나니 백사장의 해오리, 사람들 돌아간 해질녘에 더욱더 자유롭군."(紺宇淸高足勝遊, 憑欄卷箔久凝眸. 叢叢秀嶺撑空起, 澄江入海流. 萬壑冷風隨一磬, 千波皎月 三舟. 忘機却愛沙頭鷺, 日落人歸更自由)이라고 하여, 幽靜·閒雅·淡泊이라는, 산수경물을 읊은 우리 한시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적 분위기를 잘 구현하고 있다.
김부식이 송도의 서호(즉 서강)에 있었던 甘露寺를 두고 지은 시도 같은 분위기를 담고 있다. 이태백의 [敬亭山] 시에서 표현을 끌어오기는 하였으나, {小華詩評}은 이 시에 "속세를 벗어난 취향이 있다"고 하였다.
속객 오지 않는 이 곳
누대에 오르니 맑아지는 정신.
산 형상은 가을이라 더 좋고
강물 빛은 밤 중에 더욱 밝군.
흰 새 높이 날아 아득히 사라지고
외론 돛배는 둥실 떠간다.
부끄럽네, 달팽이 뿔 위에서
일생을 공명 찾아 바쁜 내 자신이.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自 蝸角上, 半世覓功名.
牧隱 李穡은 驪江을 歸臥處로 마음에 두었다. 68세 되던 때에 신륵사를 둘러보고 淸心樓에 묵으면서 지은 시는, 청심루 시판에 걸려 있던 題詠에 차운한 것이지만, 그 제2수는 이전의 어느 시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더 나은 시가 나오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개 聯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에 있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이 크도다"( 水功高馬岩石, 浮天勢大龍門山)의 기상이 씩씩하여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頸聯·尾聯을 보면 "방안에 있으면 창밖에는 눈송이 떨어지고, 서늘한 데 누우면 바람은 베갯머리에 들어라. 봄바람 불 때와 가을 달 떴을 때는 또 어떤가, 경치 구경에 마음이 넉넉하다"(懊居雪落軒窓外, 凉臥風來枕 間. 況是春風與秋月, 賞心美景更寬閑)라고 하여, 賞心樂事의 閒靜을 잘 드러내었다.
春川 昭陽樓는 많은 누정시를 낳은 곳이지만, 아무래도 梅月堂 金時習의 시가 世外之心을 담은 압권으로 꼽힌다. 예시는 생략한다. 한편, 김시습이 石州慢 詞牌에 맞추어 지은 [寒松亭]는 왜소한 인간 존재의 모습을 돌아보면서 북받치는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여 나온 작품이다. 역시 예시는 생략한다.
三淵 金昌翕은 59세 때인 1711년에 강원도 葛驛(인제)에 精舍를 지어 살며, 자연과 인생에 대한 상념을 [葛驛雜詠] 392수로 남겼다. 序詩는 "늘 먹는 밥 다 먹고 사립문 나서자, 문득 따라오는 나풀나풀 범나비. 삼밭 가로질러 꼬불꼬불 보리밭 두둑. 풀꽃이며 까시라기가 옷을 잡아끄는군"(尋常飯後出荊扉, 輒有相隨紛蝶飛. 穿過麻田 麥壟, 草花芒刺易牽衣)이라고 하여, 매순간의 義利之分에서 느껴야 할 긴장마저도 벗어난 지극히 평안한 마음 상태를 읊었다. 그리고 김창흡은 내 자신을 질책하고 그리하여 끊임없이 투명하게 하는 초월자의 모습을 설악산에서 보았다. [갈역잡영] 제24수.
자취를 보면 초연히 세속 떠난 몸이지만
이 마음에 물어보니 凡人에도 못 미쳐라.
밝고 또 밝아 속이기 어려운 것
나를 죄줄 자는 오직 설악산 신령.
觀迹超然物外身, 求諸方寸愧凡人.
昭昭自有難欺者, 罪我其惟雪岳神.
세상사에 괴로움을 느낀 사람들은 흔히 시골에 가서 묻혀 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당나라 때 寧轍 스님은, 모두들 林下에 가서 살겠다 말하지만 "임하를 보아도 사는 사람 하나 없더군"이라는 비아냥의 시까지 지었다. 그러나 고려 예종 때 李資玄은 귀환가의 출신으로 淸平山(현재의 오봉산) 골짝을 찾아 은거하여 逸民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退溪 李滉은 [過淸平山有感(幷序)]을 지어, 이자현의 은거 사실에 동정하였다. 이자현의 은거를 두고, 이름을 구하려는 수작이었다느니, 농장을 마련하여 지역 농민들을 괴롭혔다느니 하는 비난이 역사서에 있다. 하지만 그러한 비난은 영리를 탐하는 사대부들이 불편한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논한 것이라고 퇴계는 반박하였다. 퇴계의 논평은 자연 속에 동화하여 진정으로 세간 영리를 초월하고자 하였던 문인 학자들의 공감을 샀다.
3. 莊嚴 山河와 超塵脫俗
우리 산하는 거대한 풍경을 이루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장엄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지 않다고 할 수가 없다. 現實性과 本來性의 一如態로 귀환하도록 부추기는 강한 힘을 우리 산하는 지니고 있기에, 한시 작가들은 그러한 정신 세계를 시로 담기도 하였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본래성은 늘상 현실성에 의하여 가리워져 있거나 현실성과의 대치 속에서 괴리되어 있다. 이러한 괴리 속에서 실천 주체는 늘상 좌절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좌절의 경험은 인간 주체의 심신을 뒤흔들어, 본래성과 현실성이 一如에 귀착하도록 요구한다. 본래성과 현실성의 一如態로 귀환하려는 노력은 종파에 따라 방식이 다르고 개인에 따라 양상이 다르다. 장엄 산하가 펼쳐보이는 廣大無邊·無垢淸淨의 세계 앞에서 시인이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바로 세속계의 절대부정을 통하여 起死回生의 轉身을 이루는 한 자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耳溪 洪良浩는 北關의 산하에 대하여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그 기굴하고도 웅장한 형상을 시로 묘사하여 내었다. 함경도의 남부와 북부를 이어주는 교통로에 위치한 磨天嶺을 노래한 시는 대표적이다. "마천령 산마루는 툭트이도 하였구나, 해 달이 거꾸로 비추고 구름 무지개가 앞뒤를 다툰다. 기이한 봉우리는 깎아질러 웅장하여, 천만 길 옥가지에서 금연꽃이 솟아났다. 이 몸이 아득한 하늘 위에 있어, 겨드랑이에 바람 일어 절로 훨훨 나는 듯. 칼 짚고 긴 휘파람 불어본다, 사방이 모두 망망하여라. 올려보면 창창하여 사방이 다 끝이고, 굽어보면 아득하여 가이 없어라.(…후략…)"(磨天之嶺何遼廓, 日月倒景兮雲霓後先. 奇峯削立雄且秀, 萬丈瓊枝擢金蓮. 飄然身在九 上, 兩腋風生自翩翩. 倚劍一長嘯, 四顧何茫然. 上蒼蒼兮四垂, 俯渺渺兮無邊) 가지런하지 않은 雜言의 구들은 崎險하고 雄壯한 산세를 구법상 상징하고 있다.
鄭斗卿이 마천령에 올라 지은 다음 절구는 {史記} [大宛傳]의 "광대한 못이 굽어 보여 끝이 없다. 이것을 북해라 한다"고 한 지세 표현을 끌어와, 마천령의 광활한 풍경을 절묘하게 노래하였다.
말 몰아 마천령에 오르니
층층 봉우리가 구름 속에 솟았다.
저 아래 펼쳐 있는 광대한 못.
모두 저것이 북해라 말하지.
驅馬磨天嶺, 層峰上入雲.
前臨有大澤, 蓋乃北海云.
燕巖 朴趾源이 강릉 총석정에서의 일출을 묘사한 장편시 [叢石亭觀日出]은 밝음과 어둠의 세계를 대조시켜 가면서 實景 描寫와 신비스런 분위기 연출을 교차시킨 명편이다. 특히 "(전략)하늘끝이 암담하다간 홀연 찌뿌려, 바퀴통을 힘껏 밀어 기운 더욱 솟구친다. 바퀴처럼 둥글지 않고 항아리마냥 길쭉한데, 출몰할 때마다 첨벙첨벙 소리 들리는 듯. 만물이 서로를 지켜보길 어제처럼 하니, 누가 두손으로 받들어 단번에 튀어올렸나"(天際 慘忽 蹙, 努力推 氣欲增. 圓未如輪長如瓮, 出沒若聞聲 . 萬物咸覩如昨日, 有誰雙擎一躍騰)는, 어둠을 이기고 나오는 붉은 해에게서 느낀 원시적인 힘을 굳센 필치로 그려내었다. 해는 마치 깊은 심연에서 누군가가 떠받들어 올리기라도 하듯 돌연히 튀어오른다. 그 과정은 점진적인 것이 아니라 돌연하다. 그 돌연함 속에 창조의 비밀이 있다.
疎菴 任叔英의 [登毗盧峰]은 금강산의 광대한 세계를 자못 커다란 기상으로 노래하였다. 비로봉은 금강산을 하나하나 발밑에 두고 내려다 볼 수 있는 절벽 산이라고 한다.
개골산 정상에서 온 세상 바라보니
광대무변 대천세계, 풍진을 떠나 있다.
동해 물 길어다가 봄술을 담아내어
억만 사람들을 취케 하련다.
皆骨山頭望八垠, 大千超越隔風塵.
欲傾東海添春酒, 醉盡 中億萬人.
川 李秉淵은 金化縣 수령으로 있을 때인 1712년에 鄭敾과 함께 금강산을 유람하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海岳傳神帖}으로 엮고, 3천자의 장편 시를 지었다. [내가 풍악에 노닐 때에 게을러서 시를 짓지 못하다가, 올라가 다 본 뒤에 마침내 구경한 바를 한데 몰아 3천 자로 서술한다. 감히 시라고는 할 수 없고 그저 지나쳐 온 바를 기록할 따름이며, 말이 저속한데다 운자까지 중복하여 놓았으니, 독자게서는 비웃지 마시라]라는 긴 제목이 붙어 있다. 그 전반부에서는 금강산의 생성을 우주 만물의 생성 이치 속에서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금강산 시로는 尤庵 宋時烈이 지었다는 [금강산] 오언절구가 잔 수식을 일체 떨어버리고 응축된 정신세계를 그려내어 가장 절묘하지 않은가 한다. 그 첫째 수인
산봉우리 구름과 함께 희어
구름인지 산인지 가리기 어려워라.
구름 간 뒤 산만 홀로 섰어라
일만하고 이천 봉.
山與雲俱白, 雲山不辨容.
雲歸山獨立, 一萬二千峰.
에서는 特立獨行하는 志士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우암의 일흔 살 때 초상을 보면 氣로 사람을 압도할 만한 느낌이 든다고 다산 정약용도 말하였거니와, 이 시는 왠지 그러한 氣가 느껴진다.
朴漢永이 1926년에 최남선과 백두산을 오르면서 지은 23편의 한시는, 두번 다시 마주칠 수 없는 無動·不動·無瞋 의 정신 세계를 펼쳐보여, 오언고시 [登白頭頂]에서는 "아침 햇살이 우리 동방을 밝히니, 가을바람은 만주에 서늘하다. 아쇼바 부처의 무진에 나라같아, 한번 보고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또한 진붉은 하늘같아, 바라만 볼 뿐이지 그 누가 가까이 놀리"(朝旭明東土, 金風冷滿洲. 猶如阿 國, 一見難再繇. 又似絳 漢, 可望誰狎遊)라고 하였다. 그는 열강과 왜적의 침략으로 영토를 빼앗겨도 어리숙하기만 해왔던 우리 민족에 대한 연민의 정과, 秋琴 姜瑋를 사숙하였으면서도 그의 정신을 따르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을 이 시에 담았다. 하지만 일순간, 멱라수에 몸을 던진 굴원의 일이나 태산에 올라보고 천하가 좁다고 여겼던 공자의 일도 이러한 영산에 올라보면 차라리 왜소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본 시인이다.
4. 神話傳說의 空間과 浪漫的 飛越
'송도 3절'의 하나로 꼽히는 朴淵에는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의 딸이 박진사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 반하여 원래의 남편을 죽이고 박진사와 혼인하였다는 전설이 있었다. 李奎報는 [題朴淵]라는 시에서
백년고락 같이한 일이 인정에 맞군 그래.
임공의 과부보다야 낫지 않은가
절개 버리고 淫奔한 게 거문고 소리 듣고서라니.
龍郞感笛嫁先生, 百載同歡便適情.
猶勝臨 新寡婦, 失節逃爲聽琴聲.
라고 하여, 탁문군 이야기와 박연의 용녀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용녀의 로망스를 더욱 농염하게 부각시켰다. 이규보는 이처럼 우리 산하가 지니고 있는 신화전설의 세계를 사랑하였기에, [동명왕편]이라는 민족서사시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리라.
중종 14년(1519) 11월의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제주도에 籬安置되었던 菴 金淨은, 전해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牛島歌]를 지어 현실의 질곡을 벗어난 낭만의 세계를 꿈꾸었다. 특히 "바닷물결 요동하여 산허리를 날름거리고, 으무숙 계곡 하늘에 구름 빗장 깊어라. 아롱진 층벽에는 비단 무늬 화려하고, 부상의 해 비치면 번쩍번쩍 빛난다. 구슬모양 이슬 엉겨 가벼이 떨어지고, 壺洞天에는 푸른 옥같은 별들. 옥 궁전 깊어서 바닥을 볼 수 없고, 이따금 은은하게 창살이 엿보인다"(溟濤崩洶 山腹, 洞天深雲 . 稜層鏤壁錦 殷, 扶桑日照兆晶熒. 繁珠凝露 輕濕, 壺中瑤碧 列星. 瓊宮淵底不可見, 有時隱隱窺窓 )라고 한 부분은 낭만적인 飛越이 극에 달한다. 하지만 이 시는 암울한 분위기로 마친다. 黨禍에 걸린 시인은 결국 36세의 나이에 絶命辭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경기 땅 여주 신륵사는 英陵의 願刹로서, 고려말에 나옹화상 惠勤이 열반한 고찰이기도 하다. 나옹은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었는데 병환이 났다. 공민왕은 회암사가 소란하니 밀양의 영원사로 옮기라고 하였다. 나옹은 藍輿를 타고 三門으로 나왔다가 다시 죽은 사람이 나가는 열반문으로 나왔다. 그 길로 여주를 향하여 호송관 卓潭의 재촉으로 신륵사에 당도하였다. 다시 재촉하자 나옹은 "이제 아주 갈 것이다"라 하고는 그 날로 숨을 거두었다. 그런데 동명 정두경의 시를 보면 나옹이 신륵사에서 설법할 때 귀신도 참예하였다고 한다. [신륵사]라는 제목의 칠언율시이다. 함련과 경련을 보면 "동대 아래 강물은 백 丈으로 맑아, 설법을 하면 귀신이 들었다. 천녀는 낮에 방장에 내려오고, 용왕은 밤에 연화법석에 참여하였다"(臺下江流百丈淸, 當年說法鬼神聽. 天女晝下方丈室, 龍王夜參蓮花經)라고 하여, 역시 상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5. 纖麗한 姿態와 哀傷의 情調
白光弘이 명종 10년(1555)에 평안도 병마평사로 부임하여 가면서 지은 [關西別曲]에는 "感松亭 도라드러 대동강 보니, 十里波光과 萬重烟流 상하의 어릐엿다. (…중략…) 연광정 도라드러 부벽루에 올나가니, 綾羅島 방초와 錦繡山 烟花는 봄비슬 쟈랑愎"라고 하여, 듣는 이들이 모두 눈물을 뚝뚝 흘렸다는 대목이 있다. 물론 王事로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절로 로맨스의 공간을 이루었기에 그러한 것이겠지만, 평양의 산색 자체가 纖麗한 자태를 띠어 哀愁와 悲愴의 감정을 자아내기에 족하였던 듯하다. 백광홍의 [關山別曲]이라고 李裕元의 {해동악부}에 소개된 칠언절구를 보면 그 점을 느낄 수 있다.
봄 산은 점점 강물은 넘실넘실
성 위의 누대는 바라보니 몇 겹인가.
푸른 깁창에 흐느껴 노래하는 기방 아가씨
사는 곳은 수양버들 짓푸른 저기.
春山點點水溶溶, 城上樓臺望幾重.
綠窓歌咽梨園子, 家在垂陽一色濃.
대동강 일대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대동루에서 질탕하게 노는 일은 고려시대에도 이미 있었다. 金仁存의 [大洞江] 율시를 보면, 頸聯의 "한 줄기 긴 강은 거울처럼 깨끗하고, 두 줄로 선 수양버들은 멀리 아물아물"(一帶長江澄似鏡, 兩行垂柳遠如煙)이라고 한 표현이 얼핏 밋밋한 듯하면서도 실은 봄날의 알 수 없는 애상감을 자아나기에 극히 훌륭한 묘사이다.
자유분방한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던 白湖 林悌는 대동강을 배경으로 한 남녀 이별의 정한을 [浿江歌] 10수로 그려내었는데, 중국시의 玉臺體를 모방하되 전래의 민요적 정서를 도입하여 절창을 이루어 내었다.
님 이별에 날마다 버들가지 꺾어
천만 가지 다 꺾어도 머무르는 이 없어라.
붉은 소매 푸른 눈썹 눈물 많이 고여라
내 낀 물결에 지는 저 해 천고의 수심.
離人日日折楊柳, 折盡千枝人莫留.
紅袖翠娥多小淚, 烟波落日古今愁.
섬려한 자태로 애상감을 자아내는 풍경은 寒碧堂 주변에서도 묘사되었는데, 비교는 생략한다.
5. 景觀의 公式化와 再發見
-八景詩·十景詩·九曲歌·四時詞 등
팔경시·구곡가 등의 제작은 주변의 낯설고 소외되어 있던 풍경을 친숙한 공간으로 재인식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일단 팔경과 구곡이 확정되면 풍경의 규범화가 초래되지 않을 수 없었다. 풍경표현이 신체경험으로 괴리되는 과정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평판화를 극복하고 규범적 형식으로 이용하여 오히려 공간의 재인식을 시도한다는 긴장이 팔경시·구곡가에는 있다. 특히 다산이 谷雲 金壽增 선정의 '谷雲九曲'을 실지 답사하고, 곡운구곡을 재선정한 것은 풍경의 형식화를 부정한 好例라고 할 수 있다.
초기의 한양에는 京都十詠이 있었다. 월산대군과 함께 徐居正·姜希孟·李承召 등 당대의 문인들이 같은 소재와 같은 운자를 내어 절구들이 전한다. 월산대군이 지은 [楊花踏雪]은 평성운과 입성운의 두 시로 되어 있다.
북풍이 쌩쌩 밤새도록 울더니
아침 되자 눈꽃이 손바닥만하다.
아득한 천지는 본래 끝이 없거니와
언덕도 골짝도 평평하여 몇 길이나 될지.
朔風怒號終夜響, 朝來雪花大如掌.
漫漫天地自無垠, 陵谷已平深幾丈.
강마을 초가가 두어 집
울밑에는 은빛 대같은 고드름이 가득하군.
세속 떠나 이 곳 오니 제 흥에 겨워
시 읊으랴 술잔 들랴 쉴 새 없도다.
江村漁家數茅屋, 籬下森森滿銀竹.
歸來此地足乘興, 吟詩擧酒無休息.
서거정의 [鍾街觀燈]은 한성의 번화함을 극히 호사스럽게 나타내었고, 강희맹의 [木覓賞花]는 봄꽃이 한양에 가득한 모습을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묘사하였다. 이러한 시들로 볼 때 경도십영은 경도 주변의 자연풍광과 함께 경도의 번화함을 동시에 노래하는 詩 樣態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호남의 광주·나주·장성·창평·담양·장흥·영암·해남을 중심으로 歌壇이 형성된 것도, 풍경의 공식화와 재발견을 반복하여 행한 대표적인 예이다. 담양군 남면에 있는 息影亭은 星山四仙이 林泉의 생활을 즐긴 곳으로, [息影亭題詠] 20수가 남아 있다. 서석산(무등산)에 감도는 한가로운 구름, 식영정 앞 푸른 시내에 일어나는 흰 물결, 물가 정자에서 보는 물고기의 유영, 벽오동에 걸려 있는 가을달, 푸른 솔에 어리비치는 흰눈, 낚시터에 우쑥 서 있는 두 그루 소나무, 環碧堂 아래 푸르고 맑은 용못, 松潭에 배를 띄우는 흥취, 紫薇灘 옆에 천연으로 이루어진 石亭에서 납량하는 일, 平郊에서 목동들이 한가롭게 피리를 부는 모습, 외나무 다리 위로 돌아가는 승려, 흰 사장에서 졸고 있는 오리, 노자새와 황새와 물오리가 서식하는 노자암, 자주빛 장미가 피어 있는 여울인 자미탄, 복사꽃이 만발한 좁은 산길, 식영정에서 환벽당에 이르는 芳洲, 식영정 바로 아래 연꽃이 만발한 연못, 네 시인이 살고 있던 仙遊洞, 이 모든 것이 星山 일대의 아름다움을 구성하고 있었다. 흰 물결이 한낮에 은빛을 아른거리며 찰랑대는 소리, 바람 불 때 포효하는 소리, 한 밤 고요한 때에 빗방울이 튀는 소리, 물이 불어나 콸콸 대는 소리가 말해주는 원시적인 생명과 무한한 운동은 국문시가보다도 다음 한시로 더 잘 표현된 듯하다.
다림질 곱게 된 긴긴 비단폭이
반지롭게 깔려선 은빛이 아른아른.
바람을 만나 골짝을 울리고
밤비에 사람을 놀래켜라.
細 長長練, 平鋪 銀.
遇風時吼峽, 得雨夜驚人.
7. 조국산하를 마주한 민족사의 反芻
산하의 장엄함과 수려함은 그 산하에 뒤지지 않는 인간의 창조적 능력, 강인한 의지, 충일한 정신력을 상징하며, 그 필연적 결과로, 그러한 산하를 마주한 인간의 품성을 숭고하게 하고 인간 사회 전체의 진보와 향상에 補益을 가져온다.
安鼎福의 시에,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왕검성을 근거지로 대항하다가 죽은 成己를 찬미한 [成己歌]는 "외론 성 형세가 머리칼에 매달린 듯한 때, 목숨 바치길 기러기털보다 가벼이 여겼다. 패수는 넘실넘실 흐르고, 왕검성 아스라이 높아라. 성기의 큰 이름이 이제도 남았거늘, 반란했다 죽였다고 기록함은 무슨 의리에서냐. 역사가가 기록법을 그르쳤구나"(孤城勢急危如髮, 到此一死鴻毛輕. 浿水流洋洋, 王儉高 . 成己大名留至今, 書反書誅是何義, 史臣秉筆迷書法)라고 하여, 패수와 왕검성의 자연 환경이 成己라는 숭고한 인물을 출현케 하였음을 암시하였다. 민족 영웅을 중국의 시각에서 서술하는 일을 거부하고 민족사를 새로 서술하자는 제안도 담았다.
金坵의 칠언고시 [過鐵州]는 고려 고종 18년(1231)에 몽고의 撒禮塔이 咸新鎭을 빼앗으려고 철주(영변)를 공격하였을 때 수령 李元禎이 고수하다가 힘이 다하자 창고에 불을 지르고 처자도 불 속에 들게 한 다음 자결하였던 사적을 노래하였다. 아군이 전력을 다 잃고도 적개심을 불태운 일을 서술한 聯인 "맞서싸운 보름 동안 해골주워 밥솥하고, 밤낮을 싸우고 지켜 용사들도 지치고 말았다. 힘이 다해 부쳤지만 여유를 보이자고, 누대에서 울린 군악 그 소리도 구슬펐다"(相持半月折骸炊, 晝戰夜守龍虎疲. 勢窮力屈猶示閑, 樓上管絃聲更悲)의 부분은 신이한 힘이 넘쳐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의롭고 장한 혼백 어디로 간 것일까, 고을 이름만 부질없이 '鐵'이라 하는구나"(忠魂壯魄向何之, 千古州名空記鐵)라고 하여, 영웅적인 반침략투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몽고의 간섭을 받고 있던 현실을 통분해 하는 심경을 드러내었다.
조선 선조 34년(1601)에 선산 사람 吉雲節이 제주에서 반란을 음모하였다가 발각된 일이 있었다. 조정에서는 그 사건을 무마하고자 당시 典籍 벼슬의 金尙憲을 어사로 보내기로 하였다. 김상헌은 8월 13일에 서울을 출발하여 이듬해에 귀로에 올라 2월 15일에 입궐하여 復命하였는데, 제주도의 풍토·물산·형승·민정·풍속·고적·공물 등을 상세히 기록하여 {南 錄}을 편찬하였다. 이 기행록에서 김상헌은 제주도 산하에서 느낀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다. 水山의 허물어진 성을 보고는, 탐라에 국가권력이 미치지 못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제 조정의 교화가 미치고 있음을 안도하였다.
찬 구름과 쇠한 풀이 거친 성을 덮었군
이곳이 오랑캐 원나라의 목장이었다네.
牧奴를 두었더니 걸핏하면 발호하여
都統이 여러번 遠征 왔었다.
金通精의 놀란 피는 반딧불로 푸릇푸릇
근초고왕 요혼은 귀신불로 파릇파릇.
지금은 임금님 교화가 내외에 지극해서
우물파고 밭갈며 섬 백성들 안락하군.
寒雲衰草掩荒城, 云是胡元牧馬坰.
舊置牧奴多跋扈, 屢勤都統元興兵.
通精驚血秋螢碧, 肖古妖魂鬼火靑.
聖化至今覃內外, 海邦耕鑿樂遺氓.
조선 후기에 민족사에 대한 연찬이 깊어지자 사학적인 관심을 표출한 시도 출현하였다. 阮堂 金正喜의 [石弩詩]는 靑海(북청) 토성에서 발굴되는 石斧·석촉에 대한 고증적 관심을 읊었다. 시의 끝부분에서 孤證을 증거로 强通하는 데 조심하여야 한다는 考證之學의 방법론과, 물적 증거를 토대로 상고사를 재서술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담았다.
茶山은 젊어서부터 우리 역사를 반추하는 시를 지었는데, 해배 뒤 첫번째 춘천 여행길인 1820년 봄에 소양정에 올라서 회고시를 지어, 춘천이 맥국이 아니라 낙랑의 남부지부였다는 자신의 상고시대 역사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즉 {穿牛紀行卷}에 들어 있는 [昭陽亭懷古] 시에서 "弓遵과 劉茂의 할거하던 자취는 없어 지고, 진한과 맥국 싸우던 일 가련키만 하다. 우수주 옛 밭에는 봄풀만 아스라하고, 인제에서 흘러온 물에 낙화가 어여쁘다"(弓劉割據渾無跡, 韓貊交爭竟可憐. 牛首古田春草遠, 麟蹄流水落花姸)라 하고는, 다시 自註에서 "曹魏 정시 연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바다를 건너와 땅을 차지하여, 북으로 고구려에 저항하고 남으로 진한을 공격하여 진한 여덟나라를 취하였다.
이 때 낙랑이 근거로 삼은 곳이 실은 춘천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춘천을 낙랑의 남부도위로 보아, 춘천맥국설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두번째 춘천 여행 때인 1823년 4월에 지은 [牛首州和成都府]에서도 "아아 이 낙랑성이 어쩌다가, 맥국이란 이름을 뒤집어썼나. 나무껍질은 한 치도 안되고, 오곡은 밭에 가득하며, 기후 따뜻하여 발생이 빨라, 초하에 벌써 나뭇잎 무성하고, 산비둘기는 나무마다 재잘거리고, 뻐꾹새는 고운 노래 부르거늘"(嗟玆樂浪城, 冒名云貊鄕. 木皮不能寸, 五穀連阡長. 地暄發生早, 首夏葉已蒼. 鳴鳩樹樹喧, 黃鳥弄柔簧)이라고 하였다. 그 설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추사와 다산의 시는 우리 상고사의 흐름을 재구성하려는 연찬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주목할 만하다.
8. 地勢와 關防 논하는 遠謀
조선 후기에는 富寧 북쪽과 車踰嶺 바깥의 서북지방에 대한 변경의식이 높아졌다. 淸과의 접경지인 이 지방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국방상의 문
제점이 지적되어 왔고, 그러한 관심이 시로도 표출되어 왔다.
胡亂 뒤 淸은 반도내의 胡人들을 소환하고 동시에 조선인의 만주 유입을 禁封하는 政策을 시행하였으나, 우리 조정은 서북지방의 방어를 위한 아무런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藥泉 南九萬은 함경도 관찰사를 역임한 이후 舊土回復의 열정에서, 厚州에 군읍을 재설치하고 폐사군을 재설치하자는 西北防禦論을 내어놓았고, 서북지역에 대한 관심을 [咸興十景圖記]와 [北關十景圖記] 등의 敍事體 散文으로 표출하였다. 그러나 시로 그러한 관심을 표명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 뒤 숙종 38년(1712) 5월에 백두산 定界碑가 세워져 두만강 북쪽 칠백리(천여리)를 淸에 빼앗긴 뒤, 李瀷·申景濬·洪良浩·丁若鏞 등에 의하여 失地回復意識이 고양되었다. 이들 학자들은 論辯類 散文으로 변경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홍양호는 실지회복 의식을 시로도 담아내었다. 서북면 개척에 공이 있던 尹瓘의 일을 회상면서 耳溪는 [侍中臺]에서 "여러번 전쟁으로 경략한 땅을, 중간에 버리길 헌신짝처럼 왜 하였나. 神武하신 우리 聖祖 아니더면, 옛 강토를 수복할 수 있었으리. 아아 육식자들[權貴]이 遠謀 없어서, 국경 정하길 장난하듯 하였구나. 先春嶺 아래를 되는대로 가르쳤으니, 古碑 묻힌 곳이 어디란 말인가"(奈何百戰經略地, 中間棄擲如弊 . 微我聖祖神且武,安能收復故疆理. 嗟哉肉食無遠謀, 向來定界兒戱耳. 先春嶺下漫指點, 古碑埋沒何處是)라고 개탄하였다. 신무한 성조 덕에 옛 강토를 회복하였다는 것은, 태조가 李之蘭의 공으로 長白山에서 訓春江까지 천여 리를 조선의 영토로 편입시겼던 일을 가리킨다. 선춘령의 古碑는 윤관이 세운 경계비이다.
다산은 북한강 양근 일대의 산에 鎭堡를 설치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서애 유성룡의 주장({懲毖錄} 所收)에 동조하면서, 關防策을 시 속에
담았다. {穿牛紀行卷}의 절구를 보면 이러하다.
송의촌 뒤 벼랑은 아스라이 높아라
하늘이 金城을 강물 등져 만들었군.
다만 마늘봉(蒜峯)에 보루를 쌓을 만한데
태호다 간악이다 기괴도 하군.
(유서애는 민보를 둘 곳으로는 마늘봉만한 데가 없다고 하였다.)
松 村北石崔崔, 天作金城背水 .
可但蒜峰宜築堡, 太湖艮嶽 .
(柳西厓云, 民堡之地莫如蒜峰.)
아득한 하늘은 참으로 봉황이 비상할 듯한데
시야는 진한과 삭방을 다 볼 수 있구나.
맑은 햇빛이 종일토록 강물과 수풀을 감싸고
하늘 가득한 좋은 기운은 金城湯池를 보호한다.
형세를 논하기는 星湖 李瀷 선생이 자세하고
구체적인 시정 건의는 李沃 재상만한 이가 없다.
이제부터 대신들이 험요지를 잘 방비하겠지
깊은 근심이 바다에만 있지 않으니.
九 眞與鳳 翔, 眼界辰韓盡朔方.
終日淸暉涵水木, 滿空佳氣護金湯.
論形最有星翁細, 建議無如李相良.
自是王公能設險, 殷憂扶盡在環洋.
9. 景觀 形成主體인 基層民의 발견
자연을 탐승의 대상으로 삼으로 때 흔히 우리는 자연을 인간 주체로부터 분리시켜 物神化하고 均質化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 한시 작가들은 국토산하를 關係論的으로 해독하여, 풍경을 형성하는 주체로서의 기층민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경향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인간의 실천을 풍경이라는 개념 속에 위치시켰던 것이다.
호남 땅은 일찍부터 곡창으로 중시되어 왔다. 그만큼 수탈도 많았다. 고려 무신정권기에 이 지방을 여행한 金克己는, 향리에 즐거운 웃음이 드물고 시내와 산이 참담한 빛을 띠고 있음을 보았다. 南平을 지나면서 지은 시가 있다.
저녁나절 남평에 이르니
거친 들 안개만 아른아른.
죽루 객관은 열렸어도
인가 사립문은 닫혀 있다.
마을에는 웃음 소리 없고
산과 시내는 참담한 빛.
누가 비단 옷감 마름하여
다섯벌 흥타령을 부를 것인가.
晩到南平郡, 荒煙眩眼花. 竹樓開客館, 荊戶掩人家.
里 歡聲少, 溪山慘色多. 何人裁美錦, 五袴便興歌.
尾聯은 중국 후한의 廉范(자는 叔度)이란 사람의 고사를 따왔다. 그는 촉 땅의 태수로 좌천이 되어 가서는 농민들에게 방화수를 저장하게 하고 밤 농사를 금하지 않았다. 그러자 농민들이 "염숙도여 어찌 이리 늦게 왔소. 불을 금하지 않으니 우리들이 편히 농사짓겠네. 평생에 속옷도 한 벌 없었더니 이제는 겉바지가 다섯벌이네"라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농민의 처지를 알고 올바른 정책을 펼 수 있는 목민관이 와야 이 지방에서 흥타령이 들릴 것이라는 뜻을 이 시는 담고 있다.
고려 충숙왕, 공민왕 때의 대학자 益齋 李齊賢은 제주도의 풍속을 민가풍의 칠언절구로 묘사하였는데, 그 둘째 수는 탐라민의 고초를 민요풍으로 노래하였다. 당시 탐라에는 관가와 사대부의 소와 말만 들에 가득하고, 백성들은 고관의 전송과 영접에 신역을 나간다, 물자를 조달한다,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쌀은 육지에서 배로 실어오는 것을 사서 먹어야 하였다.
보리이삭이야 거꾸러지든 헤쳐지든
언덕배기 삼마밭에 잡풀이야 나든 말든.
청자와 흰 쌀을 가득싣고서
북풍에 배 올날만 기다린다오.
從敎壟麥倒離披, 亦任丘麻生兩枝.
滿載靑瓷兼白米, 北風船子望來時.
조선시대에 경상도의 농민들도 적지 않은 고통을 겪었다. 筆齋 金宗直의 [洛東謠]에 그러한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김종직이 영남 병마평사로 가다가 黃池를 떠나 觀水樓에 묵었을 때 눈으로 본 현실을 "누대 아래로 천만량 실은 배가 지나네, 가렴주구를 남방 백성들이 어이 견디리"(樓下網船千萬緡, 南民何以堪誅求)라고 적었다. 李民宬은 [鳥嶺行]에서 조령이 험준하여 그래도 남방에서는 농민에 대한 수탈이 덜한 편이라고 하였다. 영남의 백성들도 심하게 고초를 겪고 있음을 둘러 표현한 것이다.
조선 후기 평양의 풍속, 지리, 역사를 노래한 石北 申光洙의 {關西樂府} 108장은 '關西志'라 할만한 거작이다. 그 45장에서는 운모로 바른 화려한 창 안에서 기녀들이 염불타령을 하고 부채춤을 추고는 시주금 청하는 흉내를 하면서 行下를 떼쓰는 모습을 극히 농염하게 묘사하였다. 이렇듯 질탕한 놀이가 관변에서 벌어진 만큼 민간의 수탈은 극심하였으리라. 일반 한시는 주민들의 고통을 언명하지 않았지만, {관서악부} 31장은 간접적으로 그 점을 드러내었다.
종루에 해질 무렵 취한 사람도 많고
관솔불 연기에 집집마다 태평가.
감영 아동들 웃으며 묻는군
금년에는 방채가 정말 어떨까고.
鐘樓日暮醉人多, 朱火靑烟樂歲歌.
營下兒童笑相問, 今年防債政如何.
감영의 급창이나 통인들이 올해는 풍년이라 防債(防結)로 돈벌지는 못하겠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고, 시인은 적었다. 그러나 독자들은 묻지 않을 수 없다. 저 관변의 질탕한 유흥을 위하여 방채는 커녕 더 많은 잡세가 부과되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기층민의 곤궁한 생활상을 암시시킨 교묘한 수법이다.
함경도 鐘城은 愁州라는 별명이 있다. 朴齊家가 순조 원년에 윤가기·윤행임의 옥사에 관련되어 유배가 있으면서 그 지방 풍속과 느낀 점을 [愁州客詞] 79수로 담아내었다. 관가는 잡세를 징수하여 사채로 이용하는 반면에 백성들은 구멍뚫린 집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는 등, 종성의 백성들이 겪는 고초를 형상화한 내용이 많다.
함경도 여러 곳에서는 일찍부터 광산이 개발되었지만 조선 말에는 벌써 노천광이 폐광이 되어 음산한 분위기를 띠는 곳도 있었다. 李建昌은 함흥에서 일어난 민란을 수습하는 按 使로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영흥의 金坡村에 들러, 금광을 연 지 10년에 모래먼지만 남고, 나무도 없고 우물도 말라붙은 광경을 목도하였다. 더구나 "듣자니 산골짝에는, 백골이 가시덤불 새에 쌓여 있다지.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어서, 비 맞으며 도깨비불 근심하고, 여염집 처녀는, 속곳 치마 다 찢기어, 뭇사람이 희롱하고 버리고 가, 길가에 뒹굴며 신음하고 있다"(況聞山谷間, 骨 委荊榛. 蓬顆失所庇, 雨立愁靑燐. 閭家好兒女, 紅羅裙. 衆 棄之去, 宛轉道傍呻)라고,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기층민을 弔喪하였다.
정조 등극 이후에 홍국영이 실권을 잡자, 홍양호는 함경도 경흥부사로 나가 3년을 있었는데, 그 때에 북관민의 향토정서를 {朔方風謠}와 {北塞雜謠}로 묘사하였다. 대부분의 시는 失政을 근심하고 상황을 개선할 방도를 찾고자 하는 의도가 뚜렷하여, 북관 백성들의 건강한 삶이나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내용이 드물다. [孔州謠] 三疊만은 비교적 객관적인 묘사에 치중하였다. 공주는 경흥의 옛이름이다. 첫 수의
(…앞부분 생략…)
웃옷과 바지는 붉은 개가죽 껍질이요
문서는 대개 황마지를 쓴다
사투리 괴이하여 목구멍 소리 촉급해서
자주 들어야만 겨우 알아듣겠다
소나 말 부르는 소리는 휘파람 불듯하여
처음 들으면 모두 놀란다
발구는 삐그덕삐그덕
눈 위에서 땔감 싣는군, 신발도 안 신고서.
해마다 섣달에는 소에다 소금을 싣고 가
청나라 말을 경원 開市에서 사오네.
녹둔도 근처는 말달리기 좋아
왼쪽에 칼차고 오른쪽에는 화살 끼고
말을 달려 활쏘기를 겨루니
내달 行營에서 騎士를 뽑는다나.
衣袴多穿赤狗皮, 文書盡用黃麻皮.
方言詭異喉聲急, 入耳漸慣方默知.
呼牛喚馬若長嘯, 初聞人皆 然視.
跋高車行軋軋, 雪上載柴足無履.
每年臘月將牛 鹽去, 買來淸馬慶源市
鹿屯島邊好馳馬, 左帶儉兮牛挾矢.
馳馬兮較射, 來月行營選騎士.
라고 한 부분은, 이국적이기까지 한 북관민의 생활을 약동적으로 묘사하였다.
순조12년(1812) 4월에 홍경래난이 진압된 뒤 定州 현감의 막하에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던 추재 趙秀三은 홍경래 난의 경과를 [西寇 ]이라는 장편시로 서술하더니, 나이 61세 되던 1822년에 관북지방을 여행하고 이듬해 新安에 있으면서 관북지방의 '통곡하여 눈물흘리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들을 [北行百絶]로 표현하여 내었다.(江淹의 '江行百絶句'의 창작의도를 번의한 것이다.) 그 가운데 豊田驛을 두고 지은 시는 "보리는 누렇게 시들고, 밀은 새파란 채 말랐구나. 흉년에 굶주려 근심이 눈에 가득한데, 어디가 豊田이란 말인가"(大麥黃而萎, 小麥靑而乾. 飢荒愁溢目, 何處是豊田)라고, 반어법의 효과를 살려 농민들의 굶주린 실상을 알렸다. 身役으로 목축하는 사람들이 사는 馬廊島의 사정을 소재로 한 제29수는, 말이 얼어 죽으면 목자가 변상하느라 밭 팔고 자식을 팔아야 할 기층민의 고단한 삶을 애처럽게 그려내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譜風土의 의도를 담은 竹枝詞 계열 시, 두보의 [夔州雜詩]에 차운하거나 그 풍격을 이용한 시, 민요풍의 單形詩나 雜言詩 등을 통하여 지방 풍정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기층민의 삶을 보고한 시들이 많아진다. 그 이전 시기에 그와 같은 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공간 인식이 확대되고 기층민의 삶을 발견하면서 그러한 시들이 다량으로, 그것도 해부적인 시각을 담고서 출현하게 되었다. 茶山의 [ 城雜詩]·[長 農歌]·[耽津村謠]·[耽津農歌], [耽津漁歌] 등의 七言絶句 連作詩, 庭 金 의 악부민가풍의 단형시, 洛下生 李學逵의 [金官竹枝詞]와 徐有英의 죽지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김해에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던 洛下生 李學逵는 1819년에 김해 지방의 풍물을 [金官紀俗詩] 77수로 묘사하였다. 鹽丁의 생활을 노래한 시편을 보면 이러하다.
염전에 구은 소금 만 섬은 족히 되나
한 해의 반은 배타고서 보내는군.
자잘한 원한일랑 아예 생각 마시게
소금밭에는 한 숱 생선기름이 무서운 걸.
鹵地熬鹽萬斛優, 一年强半上江舟.
生來 休相念, 政 渦一勺油.
염정은 소금만 구어서는 먹고살 수가 없다. 그래서 일년의 반은 강 고기를 잡아야 한다. 소금밭에는 한 숱가락 정도의 생선기름만 넣어도 썩은 냄새가 나서 소금을 버리게 된다. 만일 고기잡으로 간 사이에 평소 정을 떼인 여자가 생선기름을 소금밭에 넣는다면 소금을 공납할 수 없게 되어 큰 낭패다. 고기잡는 염정의 속마음은 소금밭에 가 있을 것이다.
김해에 "佛巖 모기는 竹島 모기와 혼인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다. 불암 사람들이 죽도 사람을 천대하는 것을 비유한 속담이다. 또 "죽도 모기들이 중양절에 왔다 갈 때에는 떡장수의 치마속을 문다"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죽도 사람이 천박하다고 풍자한 속담이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죽도 사람들이 생활력이 강하고 활기에 차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학규는 이 두 속담을 이용하여 다음 시를 지었다.
죽도 모기들이 구름처럼 떼지어 오니
그 숫자는 불암 모기떼와 견줄만 하다.
서리 전에 주둥이 작살처럼 찔러서
중양절에 떡장수 치마 속이 걱정되네
竹島蚊兒陣似雲, 較來多少佛巖群.
霜前利喙 於刺, 愁殺重陽餠 裙.
10. 공간인식의 확장과 경관의 재발견
각 지방의 고유한 경관은 그 지방민의 삶과 더불어 끊임없이 변모되어 왔다. 하지만 그 고유한 경관을 인식하여 한시로 표현하는 일은 중앙의 관리로서 일시적으로 그 지방에 부임하거나 여정 행로상 경유한 시인들, 혹은 유배되어 온 시인에 의하여 '발견'되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宦路에 염증을 느낀 逸民들이나, 양반 계층의 분화에 따라 발생한 鄕班이나 殘班들에 의하여 지방 고유의 경관이 예찬되는 일도 많았다. 전자의 경우, 조선후기에 이르면 단순히 여행자의 시선으로 경관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인식의 확장에 따라 지방의 경관미를 적극적으로 감상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미학을 추구한 예들이 적지 않다.
甁窩 李衡祥은 나이 50세 되던 숙종 28년(1702)에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그 해 10월 그믐에 제주영을 출발하여 한달간 순력하고 돌아오기까지의 행사를 28폭 화면에 옮기는 한편 연례행사를 역시 13폭 화면에 옮겨 {耽羅巡歷圖}라 이름하였다. 이형상은 또 숙종 30년(1704)에 永川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기왕의 제주 관련 문헌기록과 제주목사 시절 자신이 직접 조사한 제주도의 풍물과 고적의 사항을 함께 이용하여 {南宦博物}을 편찬하였다. 박물지 뒤에는 부록으로 [荒服願戴歌]가 있어, 金宗直의 [ 羅歌], 金淨의 [牛島歌], 崔溥의 [탐라시] 53절구를 게재한 뒤에 자신의 차운시도 수록하였다. 공간 인식이 확대되면서, 생의 권태를 가져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보다도 이국적이라고까지 할 풍경 속에서 珍과 奇의 미학을 추구한 예이다.
紫霞 申緯는 나이 오십 되던 순조 18년(1818) 3월부터 순조 19년(1819) 8월까지 춘천부사로 있으면서 이제현이 지은 [施藏經碑]를 발견하고 고증하는 등 사적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춘천의 풍물을 약 200여수의 시로 나타내었다. 그 가운데 [貊風] 12장은 춘천에서 나는 보리와 밀, 귀리, 메벼, 기장, 수수, 모밀, 콩과 팥, 조, 면화, 삼, 들깨, 담배 등 농작물을 대상으로 그 농작방식이나 작황 등을 노래하였다. 목민관으로서의 애민사상을 담고 있으면서 한편으로 素朴美를 추구한 것이다. 모밀을 읊은 시에는 '색채'의 풍경이 잘 드러나 있다. "절기가 처음 중복의 허리를 돌자, 붉은 고추잠자리가 석양에 나와 들끓는다. 흰꽃이 흰눈처럼 울을 에워 향기롭군, 열매는 50일 사이에 익은 것이지."(節氣初回中伏腰, 紅 沸夕陰出. 白花如雪繞籬香, 實熟其間五十日)
충남 연산면 일대는 黃城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지역의 풍물을 읊은 시에 담정 金 의 [黃城俚曲]이 있다. 노론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1797년에 이른바 姜彛天 사건에 연루되어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신유사옥 때 재심리를 받고 진해로 이배되는데, 1806년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기구한 운명은 그로 하여금 더욱 서민의 애환에 눈 뜨게 하였고 인간성을 존중하는 사상을 갖도록 하여, 악부풍의 시 속에 그러한 정서와 사상을 표출토록 하였다. 1812년에 의금부의 말직을 얻어 벼슬을 시작하고 1817년에는 연산현감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 풍속과 역사를 [황성이곡]에 담았다. 大通橋 남쪽 시내의 작은 거리에 있는 李在元이란 사람의 점포에 새로 기생이 들자, 이런 시를 지었다.
외진 거리맡에 작은 점포를 차지하여
금성(나주) 관기가 배시시 주점을 열었다.
사람들에게 사탕맛이라 꼬이며
붉은 칠 소반에 옥호(술)를 담아낸다.
僻淨 頭占小鋪, 錦城官妓笑當 .
向人自 砂 味, 紅漆 盤托玉壺.
높은 이상이나 무의미한 정치적 신념에 매달리지 않고 주변 사물을 따뜻히 바라보는 것이 그의 시가 지닌 한 특징이다. 인간과 사회를 되돌아보게 된 시인들의 시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宦路에 염증을 느낀 逸民으로서 지방의 경관미를 예찬한 일례로, 雪下 南紀濟가 迷源 일대의 아름다움과 은거의 한정을 노래한 시들을 들 수 있다. 구체적인 예는 생략한다. 한편 양반 계층의 분화에 따라 발생한 鄕班이나 殘班들이 지방 고유의 경관을 예찬한 이른 예로는 崧嶽 林昌澤이 開城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민요적 정서로 담은 시들을 들 수 있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면 향반이나 잔반들이 자기 고장의 경관미를 재발견하고 노래한 한시들이 대량으로 나왔다. 예는 일일이 들지 않기로 한다.
영조 때(1750년대)에는 산수화풍의 군현도집인 {해동지도}가 작성되었다. 국토산하를 문명창조의 공간으로서 재인식하게 된 중요한 사건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또한 진보적 지식인-시인들이 각 지방의 풍경 속에서 그 풍경을 형성하는 주체인 기층민을 '발견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보다 앞서 영조 19년(1743)에 具聖任이 '도성수비책' 66조를 올리자, 영조 21년에는 三軍門이 분담하여 이듬해 1746년까지 40여처의 수축을 완료하였다. 이 무렵에 대형 도성도가 만들어진 듯하다. 40년 뒤인 정조 말년에는 그 도성도와 구도와 내용이 같은 도성도가 만들어졌다. 정조는 도성도를 완성하고서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시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 때 楚亭 朴齊家가 지은 [城市全圖應令]이 {貞 集}에 들어 있다. 이 시에는 궁궐과 저자의 위치, 저자의 흥판 상황, 저자에서 벌어지는 기예, 여러 계층 인물의 행동과 복색 등을 그림처럼 묘사하였다. 태평성세를 구가하고 성덕을 찬양하려는 의도 때문에 미화하거나 과장한 부분이 없지 않겠지만, 18세기 서울 거리의 생동적인 움직임과 발전상을 또렷이 알 수 있게 한다.
영조 조 이후로 군현도집과 {輿地圖書}, 官撰 및 私撰 邑誌 등이 제작되는 시기를 전후하여, 각 지방 고유의 문명 발전의 정도를 가늠하고 예찬하는 의식이 팽배하였다. 국토산하를 문명창조의 공간으로 재인식한 한시 작품들이 다수 출현한 것도 이 시기이다. 구체적인 예는 생략한다.
11. 경관의 독점·훼손에 대한 비판
전근대 시기의 한시가 모두 자연풍경과 인간과의 조화를 찬미하고, 발전을 낙관하는데 일관한 것은 아니다. 자연풍경은 이미 부당한 점유와 훼손을 겪고 있었으며, 그러한 현실을 시인들은 묵과하지 않았다.
조선 초부터 경기도 지역에는 벌열들이 전장이 많았다. 특히 파주 근처 한강유역이 그러하였다. 파주는 昌和里라고 하였다. 성종 때 문인인 허백당 성현이 그곳에 거처하였던 벌열의 부도덕함을 풍자한 시인 [過昌和里]는 "강을 건너 십리 남짓에, 기름진 들판이 둑 아래 펼쳐 있고, 솔나무는 뒷산에 빽빽하고, 버들은 앞시내에 열지었다. 궁금하이 뉘 집이 저처럼 청기와 붉은 난간 으리번쩍한가"(渡江十里餘, 沃野開平堤. 松柏滿後崗, 檉柳連前溪. 借問誰氏宅, 碧瓦暎朱梯)라는 물음으로 시작하여, 자연풍경과 인간의 삶이 조화로운 관계에 있지 못함을 문제시하였다. 악행을 저지른 權貴가 장수하고 가문이 융성하여 주변일대의 자연풍경을 무단 점유하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고, 심판에 휘임이 있는 조물주를 원망하였다. 그러한 풍경 속에서 시인은 정신의 안온함이나 화해의 미감을 얻을 수가 없다. "지금 산 아래를 지나치는데, 날씨는 왜 이리 음산한가. 차가운 시내는 제홀로 위위 울고, 깊은 숲에 날새들은 괜스레 우는구나."(我今過山下, 風日何凄凄. 溪寒水自響, 林深鳥空啼)
權 이 지은 [忠州石]도 세태 풍자의 시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자연 풍경의 인위적 파괴를 고발한 내용으로 볼 수도 있다. "충주 돌이 유리같이 아름다워, 천 사람이 캐어 만 마리 소로 실어낸다"(忠州美石如琉璃, 千人 出萬牛移)라고 한 허두는, 자연 풍경이 더 이상 정신의 안온함도 화해의 미감도 주지 못한다는 위기감을 담고 있다. 그래서 "마침내 충주 돌들을, 갈수록 줄여 남은 게 없게 되리"(遂令忠州山上石, 日銷月 今無有)라고 우울한 전망으로 시를 끝맺었다.
12. 맺는 말
시는 작가가 이루지만, 그 작가 또한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그 시가 나온 시간과 공간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시를 낳은 시간과 공간이란 시인이 존재하였던 현실의 풍경(경관)이다.
시에 담긴 현실의 풍경(경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시의 창작배경이 된 지역공간을 들여다 보는 방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지역공간을 들여다 보는 일로는 실제 답사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도면 확인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실제 답사가 불가능한 때에는 도면확인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지역공간의 풍경이 이미 변모를 겪었기에, 역사지도, 읍지, 기타 관련 자료를 통한 도면확인이 여전히 필요하다.
국토산하를 노래한 한시는 우리에게 고작 殘存의 모습을 찾아내어 그 의미를 자의적으로 독해하라고 남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민족사의 흐름과 더불어 형성되어 온 자연 및 역사 공간의 변화상을 올바로 파악하여 미래로의 전망을 제시하라고 말을 걸고 있다.
앞으로 역사지도나 관련 참고도서를 충실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한시 속에 반영된 공간적, 시간적 좌표를 조사하여 역사지도와 참고도서를 만드는 일이 이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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