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天眞과 興趣

醉月 2011. 8. 21. 07:56

天眞과 興趣
-문봉선 화백의 매화전에 부쳐
출처 :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1

문봉선 화백이 외곬 탐매(探梅)의 스케치 북을 펴니 백설이 난분분한 언 땅 위에 난데없는 매화 동산이 펼쳐졌다. 추위의 기세에 움츠러들고 세상의 서슬에 주눅들었던 마음이 그만 개운하게 펴진다. 그 긴 외사랑의 속내를 바깥 사람이 어찌 다 가늠할 수 있겠는가. 펼쳐진 화폭만으로도 켜켜이 서린 사연과 눅진한 풍정이 거나하다.
그는 지난 20여년 간 이 산하 곳곳의 고매(古梅)와 명매(名梅)를 찾아 긴 시간을 헤맸다. 선운사와 광양 매화농원을 거쳐, 김해 농고와 지리산 단속사, 화엄사 구층암 등 이름난 매화가 있다는 곳이면 어디든 그의 발길이 가 닿았다. 급기야 봄날 중국 남경의 매화산 아래서 한 시절을 보냈고, 일본 오사카성 매원(梅園)과 후쿠오카의 신사, 사찰과 농원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도록에 실린 것만 70점을 헤아리고, 그간의 자취가 고스란히 담긴 스케치 북이 50권을 넘는다. 동양 매화의 절창고조(絶唱高調)가 모두 그의 붓 끝에 있다 한들 허튼 말이 아니다.
무릇 글 공부든 그림 공부든 발로 해야 진짜 공부다. 그의 매화는 맨날 『개자원화보』나 『매보(梅譜)』를 베끼며 책상물림의 손재주로 익힌 솜씨가 아니다. 쨍한 칼 바람이 불고, 서릿발의 기상이 있다. 매화 가지마다 고즈녁한 산사의 흰 달빛이 서렸고, 그의 말대로 4분의 3박자로 밀려드는 도저한 매화 향기가 풍겨나온다. 언 손 언 붓을 녹여가며 사생한 현장이 떠오르고, 관성에 따라 마른 가지에 꽃을 달다가 시골 농부에게 혼이 난 사연이 있다.
다 같은 매화도 같은 것이 없다. 둥치의 체세가 다르고, 가지의 성정이 같지 않다. 꽃의 빛깔이 제각금이다. 나라마다 다르고 품종으로 구별되며, 생육 환경에 따라 차이난다. 하지만 빙자옥질(氷姿玉質), 빙부설의(氷膚雪衣)로 기리고, 청향투골(淸香透骨), 일점무재(一點無滓)를 아끼는 마음이야 나라의 경계도 소용없고, 고금의 차이도 흥미 없다. 매화의 단일성장(端一誠莊)과 유한정정(幽閑貞靜)에서 옥같은 미인의 담장(淡粧)을 떠올리고, 담박을 즐겨 부귀를 마다하는 소쇄(瀟灑)함을 보고 지사(志士)의 고심(苦心)을 읽기도 한다. 매서운 동장군의 기세 속에 그 야윈 그림자가 창에 가로 걸려 암향(暗香)이 호흡을 따라 부동(浮動)할 때면, 세상의 제 아무리 견디기 힘든 시련과 역경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려니 하는 기개가 불쑥불쑥 솟곤 하는 것이다.


2

매화는 꽃이 아니다. 차라리 하나의 엄연한 인격체다. 사군자로 매란국죽(梅蘭菊竹)이 나란해도, 매화를 첫손으로 꼽는데 아무 이견(異見)이 없다. 이제 옛 선인들이 매화에 대해 품었던 애호의 긴 사연을 푸는 것으로 글 머리를 열어본다.
퇴계 이황(李滉) 선생에게 매화는 범상한 꽃일 수가 없었다. 임종하시던 날 아침, 퇴계 선생이 하신 말씀은 “저 매화 화분에 물을 주어라”였다. 병이 위중해 그 며칠 전 옷을 입으신 채 설사를 하셨다. 매화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며 하신 말씀이 또 이렇다. “매형(梅兄)에게 불결하니, 마음이 절로 미안하다.” 선생은 평생 매화를 끔찍이 아껴, 자신이 지은 매화시 91수를 모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을 펴냈다. 도산서원에 수십 그루의 매화를 심었고, 아예 매화동산으로 꾸밀 작정을 두었다. 애지중지하던 매화가 얼어죽자 그 넋을 달래는 장시를 짓기까지 했다.
다음은 선생이 남긴 「도산 달밤의 매화(陶山月夜詠梅)」 중 한 수이다.

산창 홀로 기대서니 밤빛이 차가운데
둥그런 보름달이 매화가지 끝에 돋네.
괜시리 미풍 오라 굳이 부를 것도 없이
해맑은 그 향기가 뜨락에 가득하다.

獨倚山窓夜色寒 梅梢月上正團團
不須更喚微風至 自有淸香滿院間

그 유혹을 끝내 못 이겨 선생은 그예 뜨락으로 내려서고 만다. 다시 한 수.

뜰 가운데 거니는데 달이 나를 따라오니
매화 둘레 몇 번이나 서성이며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설 줄 몰랐는데
향기는 옷깃 가득, 그림자는 몸에 가득.

步屧中庭月趁人 梅邊行遶幾回巡
夜深坐久渾忘起 香滿衣中影滿身

이제 그는 뜰 가운데 한 그루 매화 나무로 서 있다. 뼈속까지 저미는 해맑은 운치란 이런 경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덕무(李德懋)는 매화에 벽(癖)이 있어, 자신의 호(號)도 매화에 완전히 미친 바보란 뜻으로 매화탕치(梅花宕癡), 또는 매탕(梅宕)이라 했다. 매화가 다 진 뒤에도 매화를 일년 내내 가까이 두고 볼 수 없는 것이 그는 늘 서운했다. 그래서 밀랍과 종이로 매화 꽃잎과 가지를 만들어 피우는 방법을 익혔다. 이름하여 윤회매(輪廻梅)다. 그가 윤회매 만드는 방법을 설명한 「윤회매십전(輪廻梅十箋)」이란 글이 문집에 남아있다. 그 글 속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가 17-18세 때 삼호(三湖)의 수명정(水明亭)에서 조용히 지낸 것이 3년이었다. 매화를 만들어서 책을 읽다가도 등불에 비치는 그림자를 감상하곤 했다. 평소 세속이 좋아할만한 운치는 없었지만, 대략 마음을 붙일만한 즐거움이 있었다. 봄비가 갓 내리고,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가 변하며, 바위의 얼음이 녹고, 붉은 이끼가 둥글게 무리질 때면, 매화를 바위 틈에 꽂아놓고 울타리를 서성이며 목을 빼어 멀리서 바라보곤 했다. 남은 꽃잎이 외롭게 빛나 문득 임포(林逋)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또 “옛날 임포는 매화 365그루를 심어놓고, 날짜를 매화 한 그루씩으로 헤아렸다더군요. 이제 제가 비록 이를 배우려 해도 고산(孤山) 같은 동산이 없으니 어찌 하겠소.”라고 적었다. 그러니 결국 윤회매라도 만들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얘기다.
박지원(朴趾源)과 유득공(柳得恭)도 이덕무에게서 윤회매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유득공은 자신의 거처에 납매관(蠟梅館)이란 현판까지 내걸었다. 박지원은 이덕무의 방법대로 매화 한 가지를 만들어 보증서까지 붙여서 팔았다. 보증서의 내용이 이랬다. “만약 가지가 가지답지 못하거나, 꽃이 꽃답지 못하고, 꽃술이 꽃술답지 못하며, 상 위에 놓아도 빛이 나지 않거나, 촛불 아래 그림자가 성글지 않으며, 거문고와 어울려 기이하지 않고, 시 속에 넣어도 운치나지 않는 등 이중 한 가지라도 해당한다면 영원히 물리쳐 배척한다 해도 끝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겠소.” 보증서 뒤편에는 이덕무와 유득공 등이 보증인으로 서명까지 했다. 그 매화를 비단가게에 팔아 20전을 벌고 나서 이덕무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꽃병에 매화 11송이를 꽂아 팔아 돈 스무 닢을 받았소. 형수님께 열 닢 드리고, 아내에게 세 닢 주고, 작은 딸에게 한 닢, 형님 방에 땔나무 값으로 두 닢, 내 방에도 두 닢, 담배 사는데 한 닢을 쓰고 나니, 묘하게 한 닢이 남았구료. 이렇게 보내 드리니 웃으면서 받아주면 참 좋겠소.

말하자면 이 한 닢이 수업료였던 셈이다. 이덕무는 답장에서 그 한 닢으로 구멍난 문을 발라, 올 겨울 이명(耳鳴)도 나지 않고 손도 트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 적빈(赤貧)의 세월 앞에서도 따뜻한 유머를 잃지 않았던 그들의 마음자리가 고맙고 그립다.
박지원은 대단한 매화 마니아였던 정철조(鄭喆祚)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군자의 도는 담박하되 싫증나지 않고(淡而不厭), 간결하나 문채가 난다(簡而文)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매화를 위한 칭송인 듯하오. 소동파가 도연명의 시를 논하면서, ‘질박하나 실제로는 화려하고(質而實綺), 여위어도 절로 기름지다(癯而自腴)’고 했는데, 이 말을 매화에 빗대면 다른 평이 필요 없겠지요.” 또 다른 편지에서는 “곽유도(郭有道)는 곧아도 속세를 끊지 않았고(貞不絶俗), 부흠지(傅欽之)는 맑았으나 번쩍거리지는 않았다(淸而不耀)고 했는데, 매화가 이 두 가지 덕을 갖추었다 하겠소.”라고 했다. 이럴 때 매화는 단순한 식물로서의 꽃일 수가 없다.
승지 박사해(朴師海)는 매화벽(梅花癖)이 대단했다. 하루는 안채에서 밤을 지내는데, 눈보라가 몰아쳤다. 한 채 밖에 없던 이불로 매화 화분을 두디두디 둘러놓고, 옹송그려 발발 떨면서 하는 말이 이러했다. ‘안 춥겠지?’ 이 때 지었다는 시가 남아있다.

포근한 이불 내주고서 홀로 추위 참으니
이런 나의 멍청함을 다시 누가 따르랴.
해마다 눈보라가 날리는 시절 오면
맑은 바람 오백 칸과 나누어 산다네.

借與衾溫自忍寒 蒼巖癡絶更誰攀
每年鹽絮飛時節 割據淸風五百間

맑은 바람이 제 안뜰 휘젓듯 마음 놓고 돌아다니던 한 겨울 안방의 정상(情狀)이 가긍하다. 그저 사랑채에서 잘 일이지, 괜히 안채로 건너와 아닌 밤중에 이불마저 빼앗긴 그 아내의 심정이 자꾸 궁금해진다. 차라리 매화를 마누라로 삼을 일이지.
영조 때 김석손(金祏孫)은 매화를 사랑한 나머지 매화시에까지 미쳤던 인물이다. 그는 마당에 수십 그루의 매화를 심어 놓고, 당대에 시에 능한 사람 수천 명의 매화시를 받아왔다. 신분의 높고 낮음도 거리의 원근도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모은 시를 비단으로 꾸미고 옥으로 축을 달아 족자로 만들었는데, 그 둘레가 소 허리통 만했다. 사람들은 매화시에 미친 놈이라고 해서 그를 ‘매화시전(梅花詩顚)’으로 불렀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로 이름난 조희룡(趙熙龍)도 매화광이었다. 그는 거처에 매화루(梅花樓)란 편액을 걸고, 호를 매화수(梅花叟)라 했다. 입으로는 매화시를 읊고, 손으로는 매화도를 그리며 늙겠노라고 다짐한 말이 있다. 63세 때 임자도로 귀양가 살 때도 매화도만 그렸다. 병풍으로 꾸밀 매화를 그리는데, 그 큰 종이를 펼쳐 놓을 데가 없자, 눈 내린 마당 위에 대문짝만한 화선지를 펼쳐놓고, 호호 입김을 불어 언 붓을 녹여가며 그림을 그렸다. 한번은 술이 얼큰하게 취해 일필휘지로 매화를 그렸다. 그날 밤 꿈에 한 도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부산(羅浮山) 가운데 산 것이 5백년이라오. 매화 1만 그루를 심었지요. 돌난간 옆의 세 번째 그루가 가장 기이해서 여러 매화 가운데 으뜸이었소. 어느 날 저녁 비바람에 휘말려 가서 간 곳을 몰랐더니, 어찌 그대의 붓 끝에 이끌려 갔을 줄을 알았겠소. 원컨대 나무 아래서 사흘만 자고 돌아가리다.” 자기 그림에 대한 묘한 자부마저 느껴진다. 다음은 나부산의 도사가 꿈속에서 벽에 적어주고 갔다는 시다.

구름의 뜻 푸른 바다 알지 못하고
봄빛은 산 허리로 오르려 한다.
인간 세상 떨어져 천 겁 지나도
여태 매화 사랑해 못 돌아갔네.

雲意不知滄海 春光欲上翠微
人間一墮千劫 猶愛梅花未歸

자신은 인간세상에 귀양 온 신선인데, 매화에 대한 벽(癖)을 끊지 못해 천겁의 세월이 지나도록 구름 위 천상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조희룡의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속에 나온다.
구한말 서주보(徐周輔)란 이가 끼니도 잇지 못하는 빈한한 살림에 빚을 내서 엄청난 값에 세 길 남짓 되는 매화와 실버들을 한 그루씩 사와 좁은 뜰에 옮겨 심었다. 집안에서 당장 난리가 났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건창(李建昌)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보냈다. 그 시의 내용이 이랬다.

온 종일 가난한 집 작은 방에 앉았자면
부엌 종이 쫑알대는 소리가 들려오리.
“실실이 버들실은 옷 지으면 좋겠고
낱낱 매화 꽃잎으론 밥 지으면 맛있겠네.”

盡日淸齋坐小龕 時聞廚婢語呢喃
絲絲楊柳裁衣好 粒粒梅花作飯甘

‘으이구! 내가 못 살아.’ 그집 마나님과 부엌 계집종의 속 터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리는 것만 같다.
이상 두서없이 선인들의 매화 사랑을 시 몇 수와 일화 몇 가지로 간추려 보았다. 다 꼽기로 말하면 열 권 책으로도 될 일이 아니다. 매화를 향한 옛 사람의 애호가 이러했다.


3

청나라 공자진(龔自珍)이 쓴 글에 「병신 매화의 집(病梅館記)」이란 글이 있다. 널리 읽힌 글이 아니라서 여서기 잠깐 소개한다. 전문은 이렇다. 원문도 첨부한다.
강녕의 용반산(龍蟠山), 소주의 등위산(鄧尉山), 항주의 서계(西谿)에서는 모두 매화가 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한다. “매화는 굽어야 아름답지 곧으면 자태가 없다. 비스듬해야 멋있지 바르면 볼 맛이 없다. 가지가 성글어야 예쁘지 촘촘하면 볼품이 없다.”
맞는 말이다. 이것은 문인(文人)과 화사(畵士)가 마음 속으로는 그 뜻을 알지만, 드러내놓고 크게 외칠 수는 없는 것인데, 이것으로 천하의 매화를 구속해 버린다. 또 천하의 백성으로 하여금 직접 곧은 줄기를 찍어내고, 촘촘한 가지를 제거하며, 바른 줄기를 김매서 매화를 요절하게 하고, 매화를 병들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돈을 벌게 할 수는 없다. 매화를 기우숙하게 하고, 성글게 하며, 굽게 만드는 것은 또 돈벌이나 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능히 그 지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인 화사의 고상한 벽(癖)은 가만히 감추고서 매화 파는 자에게 분명하게 알려주어 바른 가지를 찍어내서 곁가지를 길러주며, 촘촘한 것은 솎아내어 어린 가지를 죽이고, 곧은 것은 김매서 생기를 막아버린다. 이것으로 비싼 값을 받으니, 강절(江浙) 땅의 매화는 모두 병신이 되고 말았다. 문인화사의 매운 재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매화 화분 3백개를 구입했는데, 모두 병신으로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사흘을 울고 나서 이를 치료해 주겠다고 맹세했다. 놓아주어 제멋대로 자라게 하려고 그 화분을 부숴 모두 땅에다 묻고, 옭아맨 노끈과 철사를 풀어주었다. 5년으로 기한을 삼아 반드시 온전하게 회복시켜 주려고 한다. 나는 본래 문인도 화사도 아니다. 달게 욕먹을 각오를 하고 병매관(病梅館)을 열어 이를 기르겠다. 아아! 어찌 해야 내게 한가한 날이 많고, 노는 땅이 많게 하여, 강녕과 항주와 소주의 병든 매화를 널리 기르면서 내 인생의 남은 세월을 다해 매화를 치료해 볼까?
(江寧之龍蟠, 蘇州之鄧尉, 杭州之西谿, 皆産梅. 或曰: “梅以曲爲美, 直則無姿; 以欹爲美, 正則無景; 梅以疏爲美, 密則無態.” 固也. 此文人畵士心知其意, 未可明詔大號, 以繩天下之梅也; 又不可以使天下之民, 斫直·刪密·鋤正, 以殀梅病梅爲業以求錢也. 梅之欹·之疏·之曲, 又非蠢蠢求錢之民, 能以其智力爲也. 有以文人畵士孤癖之隱, 明告鬻梅者, 斫其正, 養其旁條; 刪其密, 殀其稚枝; 鋤其直, 遏其生氣, 以求重價, 而江浙之梅皆病. 文人畵士之禍之烈, 至此哉!予購三百盆, 皆病者, 無一完者. 旣泣之三日, 乃誓療之, 縱之順之, 毁其盆, 悉埋于地, 解其椶縛; 以五年爲期, 必復之全之. 予本非文人畵士, 甘受詬厲, 闢病梅之館以貯之. 嗚乎! 安得使予多暇日, 又多閒田, 以廣貯江寧杭州蘇州之病梅, 窮予生之光陰, 以療梅也哉?)

멀쩡한 매화를 분매(盆梅)로 꾸며 생가지를 끊고, 곧은 줄기를 찍어낸다. 일부러 늙은 태를 내려고 철사로 옭조여 비틀고 구부린다. 겨우 숨 하나 붙어 고졸한 맛을 내지만 생기는 하나도 없는 병신들이다. 공자진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무얼까? 지난 학기 고전명문감상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이 글을 함께 읽었다. 강독을 다 마치고 나서 내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 병신 매화는 바로 너희들이다. 하고 싶은 일 하려 들면 잘라버리고 솎아내버린다. 값비싼 상품이 되려면 온전히 제 성질대로는 안 된다.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생각지 않고, 돈 많이 벌고, 남들이 하고 싶고 되고 싶어 하는 것만 쫓아다닌다. 나는 너희들이 화분을 깨고 두 팔 쭉쭉 뻗으며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는 젊은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글을 함께 읽었다.” 매화 얘긴줄로만 알고 듣다가, 망연자실한 표정들을 지었다.
이번 전시회의 매화는 아무 손댄 것 없는 자연산 매화들이다. 눈치 보지 않고 제멋대로 커서 볼품이 없을망정 기상이 없는 것은 없다. 여기에 그의 장한 붓이 어우러져 한바탕 난장을 벌여 놓았다.
이제 글을 마무리 하겠다.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유명한 송나라 때 임포(林逋)의 매화시 한 구절.

성근 그림자 맑고 얕은 물 가에 빗겼는데
그윽한 향기 달 황혼에 가벼히 떠 일렁이네.

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매화 성근 가지가 비스듬히 물 가에 서 있다. 초저녁 달빛 창백한 황혼 무렵, 숨을 들이쉴 때마다 매화 향기가 물밀 듯 끼쳐온다. 매화시의 천고절창(千古絶唱)으로 꼽는 구절이다. 사실 이 구절은 그의 시가 아니라, 오대(五代) 시절 남당 사람 강위(江爲)의 잔구(殘句)였다. 원래 구절은 ‘대 그림자 맑고 얕은 물 가에 빗겼는데, 계수 향기 달 황혼에 가벼이 떠 일렁이네(竹影橫斜水淸淺, 桂香浮動月黃昏)’였다. 앞의 두 글자만 바꿔서 매화시로 삼자 의경(意境)이 확 살아났다.
주자(朱子)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평했다.

이 열 네 글자야 누군들 모르겠는가? 하지만 선배들은 다만 칭찬하고 감탄하며 그가 매화를 잘 형용하였다고만 말했다.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말 밖의 뜻을 얻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모름지기 매화 속에 담긴 정신을 보아야만 한다. 만약 정신을 얻게 되면 절로 활발한 뜻이 생겨나 저도 모르게 발을 구르고 소리를 지르며 손과 발이 춤추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글의 뜻을 밝게 아는 것이 하나이고, 의미가 어째서 좋은지를 아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만약 겉으로 드러난 의미만 알고 그 안에 담긴 좋은 뜻은 모른다면 하나의 큰 병통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형사(形似)가 아닌 심사(心似)다. 핵심을 찌르는 정신은 손재주로는 결코 투득(透得)할 수가 없다. 매화 속에 깃든 정신을 얻을 때, 붓 끝에 기운이 생동하고, 손이 춤추고 발이 뛴다. 자기도 모르게 미쳐 소리 지르게 된다. 겉모습을 그대로 사생하는 것이야 숙련된 기술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매화의 살아있는 정신을 잡아채려면 기교만으로는 어림없다.
문봉선 화백의 매화 그림에는 환호작약의 흥취가 여전히 살아있고, 일기가성(一氣呵成)의 천진(天眞)이 새초롭다. 한 폭 한 폭의 장면마다 그가 현장에서 맞닥뜨렸던 고매(古梅)의 아운(雅韻)과 언 붓을 녹여가며 바삐 오간 살아 영동(靈動)하는 필치가 되살아난다. 그의 전시가 시작되면, 조희룡의 꿈 속 일처럼 전국 방방곡곡의 유서 깊은 노매(老梅)와 남경 매화산, 오사카성 매원의 명매(名梅)들이 한꺼번에 그의 붓끝으로 빨려 들어와 실종되는 사태를 빚게 될 것만 같다. 그래서 그 매화를 지키던 신선들이 하릴없어 밤마다 전시장 어둠 속과 화가의 꿈 속을 서성이는 멋진 상상을 해본다. 전시를 축하하며 이것으로 눌필(訥筆)을 가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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