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을 순례길이라 불러마지않는 첫번째 이유는 숨을 헐떡이며, 쥐가 나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오르는 고행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거친 길을 허리 굽은 팔순의 할머니들이 온 힘을 다해 오르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할머니들이 등산객들이 주로 택하는 수렴동 계곡을 따라 오르는 비교적 순한 길을 버리곤, 오세암으로 둘러 몇 배나 더 힘든 길을 택해 기다시피 암자를 향해 오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짐작하시다시피 할머니들은 등산화도 등산복도 아닌 평상복 차림에 낡은 운동화를 신고 그 거친 길을 기도하듯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순례길이라 부르는 또 하나의 연유는 길에서 구현되는 ‘완전한 평등’ 때문입니다. 그 길 위에서는 돈이 많고 적음이나 권력이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아무리 좋은 차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길은 누구나 제 발로 걸어 올라야 합니다.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고통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봉정암에 당도한 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샤워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내거나 비누 없는 세수 정도만 허락될 뿐입니다. 이것도 봉정암에서 열악한 잠자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암자를 찾은 신도들이건, 대청봉을 오르려는 등산객이건 봉정암을 찾는 이들은 누구나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가게 됩니다. 그들에게 하룻밤 동안 주어지는 것은 이불도 베개도 아닌 달랑 기도용 방석 한 장뿐입니다. 몸을 누일 자리는 번호가 매겨진 폭 40㎝에 길이 120㎝의 공간이 고작입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어깨를 세우고 다리를 웅크려 맞춰보려 애쓰지만, 그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잠 못들고 뒤척이던 몇몇은 법당으로 혹은 별빛이 쏟아지는 사리탑 앞으로 가 밤샘 기도를 나가고, 이들이 비워준 공간에서 남은 이들이 잠을 청합니다. 기도를 하는 이들에게도, 그들이 비워준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는 이에게도 마치 고행과 같은 하룻밤입니다. 설악산의 봉정암을 찾아가는 것은 이렇듯 고행의 연속이지만, 모진 오르막길을 걸어 그곳에 당도한 사람들의 눈빛은 이상하게도 참으로 맑았습니다. 스스로 두 발을 디뎌 그곳에 당도한 것에 안도했고, 미역국에 말아 오이김치 몇 개를 얹은 밥을 받고도 그들은 감사했습니다. 우람한 암봉 아래 깊숙이 숨은 암자를 찾아든 이들에게서는 아무런 욕심도, 잡념도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 몸으로 할머니들이 이렇게 어려운 걸음으로 깊은 산중 암자를 찾아든 연유는 무엇일까요. 모르긴 해도 자식들 때문이지 싶었습니다. 늙고 병든 노인들에게 자식에 대한 애정보다 더 간절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제 몸으로 고행을 감수하며 공덕을 쌓아 자식들에게 바치려는 거룩하고도 숭고한 그들의 걸음을 어찌 수행보다는 ‘발복’만을 바라는 이기심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습니까. 별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봉정암의 깊은 밤. 잠 못들고 사리탑 앞에 섰는데, 찬 밤기운에도 밤을 새워 간절하게 3000배를 올리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장정들도 거기까지 올라온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3000배라니요. 거기서 전설처럼 떠도는 17년 동안 700번이 넘게 봉정암을 올랐다는 칠순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 그 사연은 알 수 없었지만, 무너지듯 끊임없이 절을 하는 할머니의 뒷모습에 그만 가슴이 뭉클해지고 말았습니다.
# ‘순례의 길’ 이름에 합당하다…봉정암 가는 길 우리 땅에서 ‘순례의 길’이라 이름 할 만한 곳이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설악산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 백담사에서 출발해 11㎞를 넘게 걸어 해발 1224m까지 고도를 높여야 당도하는 길이다. 맑디맑은 계곡을 끼고 오르는 원시의 천연림을 타고 오르는 이 길은 그 아름다움으로만 다 설명할 수 없다. 그 길은 누구에게는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의 길이겠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단단한 결심’을 필요로 하는 길인 까닭이다. 애초부터 설악산 등반을 염두에 둔 등산객들이야 백담사에서 출발해 수렴동 계곡을 따라 봉정암을 향해 오르는 것이 산행의 즐거움의 하나일 터이지만, 암자 순례를 목적으로 오르는 이들에게 그 길은 이른바 ‘오체투지’와 같은 ‘고행의 길’에 다름아니다.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의 들머리인 백담사에서부터 사람들의 차림은 확연하게 둘로 갈렸다. 붉고 푸른 원색의 세련된 등산복 차림으로 등산용 스틱을 양손에 쥔 남녀 등산객들이 한 편이라면, 나머지 한 편은 평상복을 입고 낡은 운동화를 신은 늙수그레한 할머니들이었다. 봉정암에서의 기도와 대청봉 등반을 겸해 오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평상복 차림의 남루한 할머니들에게는 ‘등산의 개념’이란 애초부터 없어 보였다.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신 우리 땅의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봉정암을 참배하러 나선 그들에게 그 길은 자신의 고통을 바치는 ‘순례’에 다름 아니었다. 낡은 배낭을 메고 평상복 차림으로 그 길에 선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한발 한발 산길을 걸어 올랐다. 원색의 등산복 차림의 젊은이들이 힘차게 숲길을 디디며 휙휙 앞서 나갔다. 할머니들은 추월을 당하면서도 꾸준하게 걸었다. 부산에서 왔다는 한 할머니는 관절염이 도진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몇 걸음 걷고 쉬고, 또다시 몇 걸음 걷고는 쉬고…. 그날 밤이 이슥해 봉정암에 당도한 그 할머니는 그 길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줄곧 ‘과연 내가 갈 수 있을까’란 질문을 내내 던졌다고 했다.
봉정암을 오르는 길은 수렴동 계곡의 물길을 따라 영시암까지는 부드럽게 이어진다. 봉정암의 스님들이 ‘가장 아름답다’고 단언하는 구간이다. 발밑의 흙은 탄력 있고, 오르내림이 거의 없다시피한 이 길은 그야말로 숲길 산책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짙푸른 녹음의 그 길에 서면 저절로 몸이 앞으로 나아간다. 침엽수와 활엽수가 어우러져 초록의 그늘을 드리우고 계곡의 물소리와 새소리가 청아하게 더해지니 무엇하나 모자람이 없다. 영시암. 6·25전쟁으로 불탄 것을 지난 1992년 복원해 지금도 불사가 계속되고 있는 절집이다. 근래에 대웅전을 세우긴 했으되 아직 법당에 전깃불을 들이지 못해서 오가는 이들에게 시주를 받고 있었다. 영시암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300년 전쯤 이곳에 암자를 처음 들인 삼연 김창흡의 자취와 만난다. 장희빈 소생의 세자책봉에 반대했던 부친이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하자 그는 ‘내 삶은 괴로워 즐거움이 없고 / 세상 모든 일이 견디기 어려워라’고 읊으며 고향을 떠나 백담사에 은거하면서 영시암을 지었다. 내설악의 빼어난 아름다움이 밖으로 알려진 것은 삼연의 학문과 덕을 기리는 선비들이 영시암을 찾아들면서부터라고 전해진다. 영시암기(永矢庵記)에는 ‘휴양하려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 다투어 몰려왔고 그를 기르려는 선비들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영시암에서 봉정암으로 향하는 길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수렴동대피소를 거쳐 오르는 길이요, 또 하나는 오세암을 들러 오르는 길이다. 두 길의 사이에는 뾰족한 암봉이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갈기를 세우고 있는데 그게 바로 용아장성이다. 등산을 목적으로 하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봉정암의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순례객들도 대개 수렴동 대피소로 오르는 길을 택하곤 한다. 그건 그 길이 오세암 쪽으로 오르는 길보다 풍광이 빼어난 데다 훨씬 쉽게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세암 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거리는 좀 짧다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교차하는데다 막바지 1㎞ 정도의 구간은 워낙 경사가 가팔라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힘겹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행을 자처하는 순례자들은 일부러 오세암을 들러가는 길을 택하곤 한다. 한 번에 백담사와 영시암,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까지 내설악의 절집과 암자를 다 들를 목적에서다. 또 하루에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오르기 힘겨운 이들이 하루종일 백담사에서 오세암까지 걸은 뒤, 거기서 하룻밤 묵고는 다시 이튿날 오세암에서 봉정암까지 갈 요량으로 이쪽 길을 택하기도 한다. # 오세암 거치며 더 어려운 길 택해 오르는 길 이쪽과 저쪽 길을 놓고 망설이다가, 두 길을 다 걸었다. 먼저 영시암에서 수렴동대피소 쪽으로 이어지는 길. 이 길은 평탄하다. 잘게 잘라보자면 오르내림의 연속이지만, 길게 보면 딱 계곡의 물굽이 높이만큼 고도를 올린다. 계곡과 바짝 붙어가니 구곡담의 힘찬 물소리와 함께 시원스레 쏟아지는 폭포와 청록색 소(沼)와 담(潭)이 끝없이 이어진다. 폭포가 있는 곳은 오름길이 높아지고, 아늑한 소가 있는 곳에서는 기울기가 낮아진다. 나무덱이 이어져 흙길을 걷는 맛이 좀 덜하긴 하지만 걷는데 드는 힘은 훨씬 덜 하다. 차츰 고도를 높이면서 일순 좁아졌던 시야가 확 트이고 날선 암봉들이 병풍처럼 우뚝 솟은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웅장하고 힘찬 암봉들이 화려하게 펼쳐지는 모습. 설악의 산세란 본디 이런 맛이리라. 봉정암 500m의 표지판이 나오면 길의 끝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지만, 진짜 힘든 구간은 이제부터다. 잔뜩 치켜 올라간 경사면을 줄곧 허덕거리며 올라야 한다. 숨이 턱에 닿고 장딴지 근육이 단단하게 뭉쳐올 즈음 오른편으로 사자바위가 나오고 저 위로 봉정암의 기와지붕이 올려다보인다. 이렇게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의 5시간이 넘는 산행이 마무리된다. 다른 코스. 영시암에서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닿는 길이다.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구곡담으로 오르는 길이 물과 함께 걷는 길이라면 이쪽 길은 인적 드문 적막한 숲길을 따라 오른다. 수백 년은 족히 됐음 직한 아름드리 전나무며 신갈나무, 단풍나무 노거수들의 숲 그늘을 걸어가는 길이다. 영시암에서 오세암까지는 줄곧 오름길이지만, 그나마 순한 편이다. 이 길은 멀게는 신라 때의 자장율사가, 가깝게는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가 남아 있다. 오세암은 1400여년 전쯤 자장율사가 지은 관음암에서 유래한 암자다. 이후 쇠락한 암자를 1000년 뒤에 중건한 설정 스님이 암자에 네 살짜리 조카를 데려다 키웠는데, 어느 해 가을 양식을 구하러 양양으로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폭설로 산길이 닫히고 말았단다. 눈이 녹은 이듬해 3월쯤 돌아와 보니 굶어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조카가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더란다. 해가 바뀌어 다섯 살이 된 조카가 관음의 힘으로 살아났다 해서 그때부터 오세암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청명한 오후에 당도한 오세암에서는 뭉게구름 하나가 고요한 암자의 뒤편의 암봉에 척척 감겼는데, 노 보살은 법당 앞 평상에 앉아서 무심하게 감자만 갈고 있었다. 오세암을 지나서 봉정암까지는 그야말로 고행의 길이다. 바짝 선 비탈길을 겨우 올랐는가 하면 다시 내리막길이고, 그 끝에서 다시 오르막이 이어졌다. 오름길은 길었고, 그보다 짧은 내리막길이 나왔다. 이런 길이 수없이 교차했다. 그러다가 봉정암 1㎞를 앞둔 지점부터는 끝없는 오르막이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한 길을 오르느라 진이 다 빠졌을 무렵에야 암봉 너머로 봉정암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백담사를 출발한 지 거의 7시간이 다 됐다. # 이 고된 산길 750번 올랐다는 거짓말 같은 전설 백담사에서 출발해 돌과 바위투성이의 산길을 걸어서 그날 봉정암에 당도한 이가 500명을 넘었다. 사람들의 숫자만큼이나 수많은 사연들이 모였다. 거친 산길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먹을 것을 주고받으며 함께 오른 이들이었다. 대청봉 등반을 위해 봉정암을 찾은 등산객들도 있었고, 오로지 적멸보궁의 참배와 기도를 위해 오른 평상복차림의 순례객들도 있었다. 관절염으로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면서 올라온 할머니도, 입대를 앞두고 홀로 산길을 뛰듯 올라온 젊은이도, 은퇴 이후 적막해진 마음을 다스리러 온 말 없는 중년의 사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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