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밥에 깍두기 한입 이보다 더 개운할 수 없다
깍두기
1970년대 지방 소도시에 살 때부터 ‘서울 깍두기가 맛있다’는 말을 들었다. 새우젓에 풀을 쒀 넣어, 달고 감칠맛이 나는 깍두기라 했다. 집에서도 서울식이라며 그렇게 깍두기를 담갔다. 1980년대 초 서울에 올라와 보니 과연 식당에서는 깍두기를 흔히 내놨다. 딱히 맛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서울은 깍두기가 유명하구나’ 생각했다.
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재배했다. 어디에서든 잘 자라 한민족 밥상을 위해 흔하게, 또 유용하게 쓰였을 것이다. 무는 조직이 단단해 소금물에 담가만 두어도 맛있는 짠지가 되니 반찬 채소로 이만한 게 없었을 것이다. 간장이나 된장에 박으면 장아찌가 되고, 짠지에 젓갈과 고춧가루만 넣으면 무김치가 된다. 채를 쳐 말리면 나물이 된다. 무청도 시래기로 만들 수 있다. 싱싱한 무를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면 땅에 묻으면 된다. 이만큼 다양하고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채소가 또 어디에 있나 싶다.
서울 깍두기가 어떻게 이름나게 됐는지 여기저기서 자료를 조사한 적이 있다. 옛 자료를 보면, 서울 사대문 밖에 채소밭이 많았는데 특히 뚝섬에서 무 재배가 흔했다. 뚝섬 지역 토질이 모래니 무가 잘 자라 그랬을 것이다. 여기에 비해 개성은 배추가 맛있어 보쌈김치가 유명하다는 글도 있었다. ‘서울 깍두기, 개성 보쌈김치’라는 관념이 생긴 지는 대충 10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인다. 또 각 지역의 토종 무를 선발, 육성하는 과정에서 ‘서울무’라는 품종이 만들어진 것도 서울 깍두기가 명성을 얻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무 종자는 소량이지만 지금도 팔린다.
여기까지만 보면 “서울무가 맛있어 서울 깍두기가 유명해졌다”고 설명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어떤 음식이든 그 지역의 것이 특별히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유명성이 확보되지는 않는다. 전국 팔도에서 무를 재배하는데 서울무가 제일 맛있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음식의 유명성은 대체로 이를 즐겨 먹는 사회적 환경이 만들어졌을 때 확보되는데, 서울 깍두기도 그런 환경에 놓였었다.
서울은 조선시대에도 수도였으나 그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서울 사대문이 열리면서 근대도시로 ‘폭발’했는데, 이때부터 지방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든 것이다. 6·25전쟁 이후 이런 현상은 극에 달했고, 개발연대인 1960~80년대를 거치면서 ‘만원’이 됐다.
서울을 꽉 채운 사람은 거의 노동자였다. 시골에서와 달리 하루에 한두 끼니는 밖에서 해결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기에 가능하면 저렴하고 간편한 음식을 먹으려 했고, 국밥이 대표 음식으로 등장했다. 식당 주인 처지에서는 밥을 지어놓고 데운 국에 말아만 내면 되니 이만큼 간편한 장사도 없었던 것. 손님 처지에서도 싸고 빠르게 한 끼 먹는 음식으로 국밥만 한 게 없었다. 이때부터 설렁탕, 곰탕, 순댓국밥, 우거지국밥, 소머리국밥 등등의 국밥이 서울의 주요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국밥에 어울리는 반찬으로 깍두기가 선택됐다.
국밥은 내용물에 ‘씹는다’는 느낌의 재료가 적다. 대충 훌훌 목구멍으로 넘긴다. 국밥만 먹으면 어딘지 서운하다. 이 허전함을 잠재울 수 있도록 ‘씹는다’는 기분을 제공하는 음식이 바로 깍두기다. 또 국밥에 깍두기를 넣거나 그 국물을 넣으면 맛이 복잡해져 맛없는 것도 먹을 만한 것이 된다. 특히 누린내 나는 국밥에 깍두기의 개운한 국물은 더없이 좋은 양념이 된다. 그래서 국밥에는 배추김치보다 깍두기가 제격인 것이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겨울엔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 귀하게 느껴진다. 가슴을 채워주는 뜨끈한 국물에 깍두기 한 그릇이면 추위도 두렵지 않다.
된장은 너무 짜
한식 세계화 행사 같은 걸 보면 된장을 이용한 요리가 간혹 등장한다. 이를테면 ‘된장 소스를 곁들인 스테이크’ 등. 외국의 유명 요리사가 이런 음식을 냈다는 기사를 볼 때면, 궁금증이 인다. ‘저기에 쓴 된장은 도대체 어떤 된장일까.’
‘식품 대기업이 낸 공장 된장일까’ 아니면 ‘시골 어느 할머니의 전통 된장일까’부터 시작해 ‘밀이나 보리를 넣은 것일까’ ‘황국균을 쓴 것일까’ ‘알메주로 한 것일까’ ‘숙성도는 어느 정도일까’…. 여러 된장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한날 한시에 담근 된장도 장독에 따라 맛이 제각각인데 수만 가지 된장 중 대체 어떤 된장을 썼을까.’ 정말로 궁금하다.
필자는 된장 맛을 보러 전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일종의 ‘맛있는 된장 찾기’ 미션이었다. 공장 된장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된장 맛 소스’ 정도가 대부분이라 빼놓고, 전통 방식으로 담근 된장을 맛보러 다녔다. 한국음식에서 된장이 가장 중요하다고들 말하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은 맛 칼럼니스트로서의 당연한 책무일 것이다.
그런데 전국 곳곳의 전통 된장이 하나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짜다는 것이다. 너무 짜다고 제조자에게 이의를 제기할 때마다 “전통 된장은 원래 그렇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단언컨대 이건 아니다. 간혹 판매용이 아닌 전통 된장 중에서 심심한 된장을 만날 수 있었다. 짜지 않으면 된장 풍미가 살아난다. 콩의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숙성을 거치면서 내는 구수함은 짜지 않은 된장에서 제대로 맛이 난다. 짜면 짤수록 구수함은 혀끝에 잠시 머물다 지나갈 뿐이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면 ‘판매용’ 전통 된장은 너무 짜다. 전통 된장 역시 심심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그런 것이다.
전통 된장이 짜다는 사실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도 안다. 일부에서는 개선 의지가 있는 것 같지만, 상황을 살피면 개선이 어려워 보인다. 먼저 장독 문제다. 전통 된장 제조자는 대부분 야외에 장독을 뒀다. 예전에도 그랬으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덧붙여 장독이 숨을 쉬니, 어쩌니 그런다. 그러나 여름 한낮에 이 장독에 손을 대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 된장이 그 뜨거운 땡볕을 이겨내려면 짜게 담그지 않을 수 없다. 그 염도면 발효가 부패를 막는다, 어쩐다 하는 것과 관련 없이 수십, 수백 년을 둬도 상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음 문제는 판매 기간이다. 된장은 한 번 담가 여러 해를 두고 판다. 그런데 된장이 맛있으라고 오래 숙성해 파는 게 아니다. 안 팔리니까 그렇게 쥐고 있는 것이다. 심심하게 담근 된장은 2년 차를 넘어가면 검어지고 신맛이 난다. 아무리 잘 숙성시킨 된장도 그렇다. 3년, 4년을 두고 팔려니 소금을 왕창 넣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요즘 별스럽게 오래 묵힌 된장을 약된장이라며 판다. 일부러 묵힌 것은 아닐 것이다. 숙성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끝난다. 또 소금은 오래 둔다고 다른 무엇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다. 소금은 광물이며 자연계에서 변화하지 않는다).
한식 세계화와 관련해 한국 발효음식의 핵심인 장류를 알려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장류는 식품 대기업이 만든 것일 수밖에 없다. 공장 된장이라 해도 일단은 적절한 염도에 적절한 구수함과 감칠맛이 있으니까. 하지만 한식 세계화가 한국음식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포함시키는 일이라면 전통 된장 제조업체에도 그 기회가 돌아가야 할 것이다. 여름 햇볕을 피하는 장독대 개선 사업은 물론, 된장을 2~3년씩 묵히지 않도록 하는 판촉 마케팅에도 지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굴 자랑
“진상품이라고 이름 난 것은 대체로 그 맛이 특별나다기보다 그 지역에서 많이 생산했기 때문이라 보면 됩니다. 서산 굴이 유명한 것도 예부터 그 지역에서 굴을 많이 땄기 때문이죠.”
얼마 전 어느 강의에서 이런 내용의 말을 했는데, 질의응답 시간에 서산시민인 듯한 한 분이 이에 반기를 들었다.
“서산에서는 굴을 뭐라 그러는지 아십니까. 강굴이라 합니다(‘강한 굴’이라는 뜻으로 그 말을 쓴다고 말하는 듯했다). 다른 지역의 굴은 무르고 향이 약하지만 서산 굴은 단단하고 향이 강합니다. 양이 많아 유명해졌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자기 고향 음식을 으뜸으로 여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필자 역시 횟집에서 음식을 먹기 전 고향인 마산 앞바다의 물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한바탕 ‘썰’을 풀어야 직성이 풀릴 때가 있다. 그러나 공적인 일을 할 때는 애향심을 멀리 버려두어야 한다. 그 서산시민이 서산에서만 살고 서산 굴을 팔아야 한다면 “서산 굴이 최고야” 해도 탈이 없을 수 있으나, 서산을 떠나 공공의 일을 한다면 이 시각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한국의 주요 굴 생산지인 통영과 남해, 그리고 여수, 강진, 태안 사람들과 굴맛을 두고 내내 논쟁을 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마침 굴철이니, 필자가 먹고 느꼈던 전국의 굴을 다뤄보겠다. 먼저 서산 굴. 서산 굴이라 해도 다 같은 것은 아니라, 대체로 간월도에서 나는 것을 서산 굴의 대표로 여긴다. 그때 강의실의 서산시민은 ‘강굴’이라 표현했는데, 간월도 할머니들은 토굴 또는 석화라는 말을 많이 쓴다. 간월도 굴밭은 바닥은 뻘이고 그 위로 큼직한 돌멩이가 깔렸다. 굴의 유생이 이 돌멩이에 붙었다 웬만큼 자라면 뻘에 떨어져 자란다. 토굴, 석화라는 말도 그래서 생긴 것이다. 조수간만 차가 큰 때문인지 굴이 잘고 단단하며 향이 농축된 듯한 느낌이다. 이 굴은 어리굴젓으로 먹어야 한다. 밥 한 숟가락에 어리굴젓 한 점, 이렇게 먹기에 딱 좋은 크기다.
작기로는 백령도 굴이 제일 작다. 백령도 굴은 커다란 바위에 붙어 자란다. 자라다 떨어질 개펄이 없다. 조수간만 차가 심하고 파도가 거칠어 굴이 크게 자랄 환경이 되지 못한다. 작아서인지 향도 강하다. 새끼손톱만 한 굴을 종지에 담아서 간장 조금 넣은 뒤 휘휘 저어 한입 탁 털어먹는 맛이란!
큼직하기로는 통영이나 남해 양식 굴이 제일이다. 이곳의 굴 양식장은 바다에 떠 있다. 굴은 줄에 붙어 바닷물 안에서 내내 자란다. 물 바깥으로 나올 일이 없어 빨리, 크게 자란다. 그 대신 살이 무르고 향이 적다. 그러나 이 양식 굴도 겨울 끝 무렵엔 맛이 좋다. 입안 가득 차는, 그 큼직한 굴맛은 어디에 비길 데가없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인은 대체로 굴을 너무 일찍 먹는다는 것이다. 김장철이 최성수기여서 이때 거의 다 따버린다. 그러니 굴이 맛있는 철에는 그 양이 적고, 찾는 사람도 없는 묘한 일이 벌어진다.
양식 중에서도 자연산과 비슷한 맛을 내는 굴이 태안 굴이다. 이 지역의 굴 양식장은 개펄에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굴을 단 줄을 매다는 형태다. 만조 때는 물에 잠기고 간조 때는 물 밖으로 드러난다. 자연산 굴 생장조건과 똑같다. 그런데 유조선 사고로 이 지역 굴 양식장이 폐허로 변해 몇 년간 이 맛있는 태안 굴을 먹지 못했다.
남해에도 자연산 굴이 있는데, 특히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의 지족해협에서 나는 굴이 단단하다. 이 지역은 바닥에 자갈이 깔리고 갯벌이 없다. 지족해협의 빠른 물살을 버티려니 당연히 단단해지는 것이다. 또 강진 앞바다 굴도 양식이지만 단단하다. 이도 물살의 영향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한반도에서 특색 있는 굴을 10여 개 이상 뽑아낼 수 있다. 음식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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