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물로 흙 살리고 토종 씨앗 살리는
괴산 농부 이태근
그런 땅에서 농작물을 키우고, 토종 씨앗 연구에 한평생을 바치고 있는 흙살림 이태근 대표의 삶.
추수 끝난 벌판을 달려 충북 괴산군 불정면 ‘흙살림 토종연구소’에 도착했다. 종자들이 이삭째 벽에 줄줄이 걸려 있다. 벼와 수수와 조와 기장이다. 특히 벼는 10여 종류에 가깝다. 이삭이 길고, 짧고, 때로 알록달록하기도 하다. 탈곡되기 전의 이삭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도시인은 흙에서 나는 것을 먹지 않으면 단 하루를 견디지 못하면서 생생한 곡식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군데군데 ‘흙살림 20년, 유기농 20년’포스터가 붙었고 ‘토종, 5000년 희망을 싹틔우다’라는 현수막도 걸렸다.
흙살림의 이태근 대표는 묵묵히 이삭들을 보여주고 높이와 이파리 모양이 들쭉날쭉한 10여 가지 토종배추가 자라는 밭을 구경시켜준다. 음식물 쓰레기와 미생...
어린 시절부터 농부가 꿈
▼ 그래서 흙살림이 미생물을 배양하는 연구소를 만들었군요.
“괴산미생물연구소를 만든 것이 올해로 딱 20년 됐습니다. 유기농법 기술 중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미생물 배양입니다. 미생물도 토종이 있고 수입종이 있어요. 내가 학교 졸업 후 처음 농촌에 내려왔을 때가 1984년인데 유기농 초창기였지요. 그때도 정농회 같은 선진 농업연구기관이 있었지요. 땅이 죽어간다는 것을 자각하고 미생물을 키워내야 한다는 건 알았는데 토종 미생물을 찾지 못하고 일본에서 수입해 쓰더라고요. 우리 미생물을 찾아 배양해보자고 결심했지요.”
▼ 농촌으로 내려오신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고향이 대구라고 들었는데 왜 하필 괴산으로?
“다른 선택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어려서부터 꿈이 농부였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장래 희망을 쓰는 난에 한결같이 ‘농부’라고 썼고 진학도 농대로 했지요. 다른 친구들이 대통령, 법관, 군인이라고 쓸 때 농부라고 쓰면 다들 와르르 웃었지요. 괴산에는 대학동기인 친구가 살고 있어서….”
농촌에서 태어났으니 이태근에겐 논과 밭, 산, 개울이 다 익숙했다. 두엄내기, 모내기, 가을걷이도 자연스레 터득했다. 남들은 농촌을 떠날 때였지만 농학을 전공한 이웃집 대학생과 자주 만나며 농사꾼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찍 깨쳤다. 뿌듯한 각성이었다. 군사독재가 막바지에 달한 무렵, 대학생이 되었고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고 민중이 억압받지 않는 세상을 꿈꿨다. 아니 민중이란 말은 막연하다. 이태근에게 그건 아버지였다. 성실하고 과묵한 농사꾼이던 아버지가 두어 마지기 논을 지주에게 뺏기는 것을 목격하면서 가난해도 억울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려 했다. 그러다 군에 강제징집되었고, 곡절과 상처를 안고 농촌으로 내려왔다. 뜻을 같이하는 선후배들과 함께였다. 우둔하다면 우둔하고 진지하다면 진지한 일이었다. 그는 농사를, 농민을, 흙을 살리는 일에 제 삶을 걸기로 작정한다. 어릴 때 꿈꾸던 농부와는 조금 달랐다. 그냥 농사가 아니라 ‘농민운동’이었으니까! 흙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는 운동은 신념과 구호로 되는 게 아니었다. 실험과 노동으로만 이뤄지는 것도 아니었다. 흙에 엎드려서 증명해 보여야 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했다. 무엇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흙처럼 푸근한 사람
이제 ‘흙살림’ 20년이다. ‘흙살림’은 이태근의 정체성이고 그의 인생을 압축한 말이다. 나는 이번 괴산길에서 쉰이 갓 넘은 이태근의 그 뿌듯한 20년 수확물을 여기저기서 눈으로 확인하고 내심 환호했다.
그를 처음 본 건 교보문고가 벌이는 ‘독자와의 만남’ 자리에서였다. 언제 봐도 싱그러운 호기심과 아이디어로 번뜩이는 천호균 쌈지 대표와 괴산 농부 이태근이 ‘어울리지 않게도’ 함께 책을 냈다는 소문에 달려간 자리였다. 이태근은 젊은 독자의 질문에 답하기 전 민망한 듯 벙긋벙긋 웃기부터 했다. 그 벙긋대는 웃음이 왜 저렇게 푸근하고 친숙할까를 따져보다 나는 알게 됐다. 그게 바로 흙의 성질이란 것을! 이태근은 서울 세종로처럼 시멘트와 돌로 뒤덮인 땅에서 만나기엔 너무나 황송한, 흙냄새를 그대로 닮은 사람이었다! 나는 행사 뒤풀이에 따라가서 그의 전화번호를 받고 취재 약속을 잡았다.
▼ 지금 농업의 가장 큰 문제가 농약입니까?
“어찌 한둘이겠어요? 유기농을 부르짖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요. 우선은 농업의 공업화에서 벗어나자는 겁니다. 농약, 비료, 제초제를 들이붓는 농업은 농업이라기보다 차라리 공업에 가깝거든요. 농업은 이미 기계 중심의 속도를 중시하는 방식으로 기울었어요. 농촌은 이제 석유가 없으면 멈춰 섭니다. 석유 없이 비닐과 비료가 만들어지며 석유 없이 트랙터나 경운기가 움직입니까. 흙의 가치는 석유 다음으로 밀려나버렸어요. 1970년대 곡물파동 기억하세요? 곡물생산량은 3% 감소했는데 곡물가격은 100% 올랐었지요. 석유파동으로 기름값이 오르면서 생긴 현상이지요. 이 파동으로 한몫 챙긴 곳은 미국의 거대 곡물자본이었고! 우리 농민은 지금 거대 다국적 기업인 종자회사, 농약회사, 농기계 회사를 먹여 살리느라 등골이 휘고 있어요. 오염된 음식과 과도한 노동으로 병원비도 엄청 지불해야 하고요. 농약과 제초제에 기대 농사를 짓는 한 공기 좋고 물 좋은 농촌은 옛말이에요. 그래서 농업의 현주소가 확실히 드러나게, 천호균 쌈지 대표 같은 사람은 ‘관행농’ 대신 ‘화학농’이라고 부르자고 주장하지요.”
▼ 그렇지만 유기농으로는 생산량이 적어서 문제 아닌가요? 상당히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좋은 거름을 만들어 쓰면 생산량은 크게 문제될 게 없어요. 유기농의 가치를 인정하는 소비자만 있으면 덜 효율적일 것도 없고요. 물론 손이 많이 가고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점에서 효율이 떨어지긴 하지요. 그러나 유기농은 인간이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가치를 일깨워주거든요. 그게 바로 공존이에요.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다보면 생명체들이 서로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돼서 살고 있는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돼요. 유기(有機)란 말 자체가 몸의 기관, 즉 유기체의 조직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강조하는 의미거든요.”
도시서도 텃밭 가꿔야
▼ 마치 불교의 인드라망 같네요.
“그렇지요. 불교의 ‘연기설’과도 닮았어요.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을 보면 강아지가 길가에 눈 똥이 흙이 되고 거기서 민들레가 피어나잖아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끝없이 순환하면서 서로의 밥이 되어주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농사지요. 진정한 농사는 인류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기도 합니다. 흙을 살리는 농사를 지으면 사람마다 마음 안에 뿌리내린 선한 본성이 살아난다고 생각해요.”
▼ 반대로 흙을 죽이면 사람 안의 좋은 본성이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씀이군요.
“지금 바로 우리가 그런 위기를 맞고 있는 거 아닙니까. 생명이 모조리 유기체로 얽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렁이와 미생물들이 애써 살려놓은 흙에 화학비료, 제초제, 농약을 마구 뿌려대지요. 흙이 죽어 자생력을 잃으니 병충해가 심해지고 수확도 줄어들고! 그래서 더 많은 비료와 농약을 쓰게 되는 거지요. 땅 힘으로 길러야 할 농작물을 비료와 농약으로 길러내고 있으니 식물에 힘과 영양이 들어있을 게 뭡니까. 대신 해가 갈수록 사람들 몸에 그 화학물이 독성으로 축적됩니다.”
▼ 유기농업은 단지 농사법만이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도시문명, 기계문명이 파괴해버린 인간의 심성을 재생하자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땅에 씨앗을 뿌려두고 그걸 들여다보면 대자연의 공존과 순환의 섭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건 건강에도 좋아요. 성인병이란 건 사실 인간이 흙에서 멀어지면서 생긴 병이거든요. 도시인도 작은 텃밭 하나쯤은 가꾸고 살아야 합니다. 어떤 시인은 텃밭이 일종의 예방주사라고 말하더군요. 천호균 대표는 아프거나 외로운 사람들에게 반려동물 대신 ‘반려식물’을 기르게 하자는 제안도 했지요. 흙살림에서 판매하는 방수천으로 만든 ‘주머니 텃밭’이 그런 용도로도 쓰였으면 좋겠어요.”
▼ 아파트 생활이 대부분인 도시에서 텃밭이 가능할까요? 설령 작물을 심는다한들 다들 바빠서 정신없는데 거기 공들일 시간을 낼 수가 있을까요?
“개인이 어려우면 국가가 할 수도 있어요. 일본 롯폰기에 가서 옥상에 논을 만들어놓은 것을 봤어요. 벼라는 작물은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으니까 물 새지 않게 비닐 한 장 깔고 흙을 두툼하게 넣고 물 넣고 모 심으면 끝입니다. 여름에는 초록, 가을에는 황금빛의 풍경을 만들고 무엇보다 추수를 할 수가 있잖아요. 서울시청 앞 광장에 잔디를 깔 때 그 잔디를 걷어내고 논이나 텃밭을 만들자고 주장한 적이 있어요. 광화문광장도 마찬가지고요. 인제 박원순 시장에게도 제안할 겁니다. 잔디 키울 비용으로 논이나 밭을 만들면 여러모로 이득 아닙니까. 돌보는 일손이 필요하니 일자리 생기지요. 구경하는 시민들 마음에 예방주사가 되지요. 수확한 쌀과 채소를 저소득층에게 나눠줄 수 있지요. 똑같은 땅이지만 곡식을 심을 때 거기서 나온 결과는 천양지차가 됩니다.”
논은 아름다운 정원
▼ 세상에! 그러고 보니 논이 잔디보다 훨씬 아름다울 수 있겠네요. 계절 따라 빛깔이 변하고 물을 담는 계절에는 하늘이 그대로 내려와 비치고 바람이 지나갈 때는 그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가 뉴욕현대미술관 일행과 남도 구경을 갔는데 떠들썩하던 차안이 갑자기 숙연해지더래요. 외국손님들이 창밖만 내다보면서 저 끝도 없이 아름다운 누런 풀의 이름이 뭐냐고 탄복을 하더래요. 유 교수는 그날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논이라고 한다는군요. 그뿐인가요? 흙이 살아있는 논에는 우렁이 미꾸라지 민물새우가 살았거든요. 고기를 못 먹던 시절에 단백질 공급원이 돼줬어요. 우렁이는 논의 잡풀을 다 갉아먹어줘서 제초제를 쓸 필요도 없고요.”
우리가 버린 유기농법 안에 우리 삶을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이 들어있다. 그건 땅의 건강이기도 하고 우리 심신의 건강이기도 하다.
그가 농촌에 내려올 당시엔 물론 지금 상황을 예측한 건 아니었다. 1984년 그가 처음 자리 잡은 시골은 충북 음성이었다. 거기서는 농민교육과 신용협동조합 운동을 주로 했다. 아직 경찰의 감시가 뒤따를 때였고 막상 농촌에서 ‘농민 조직화’란 목표가 쉽지도 않았다. 그보다 땅과 사람이 병들어가는 것이 더욱 심각했다. 땅을 살리자면 우선 미생물을 살려야 했다. 그는 ‘발효라면 김치 된장 먹는 우리나라가 최고인데 농약과 제초제 쓴 지 고작 십 몇 년 만에 미생물까지 외국에서 수입해야 하나. 어찌 됐던 우리 미생물을 살려내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1991년 충북농촌개발회, 괴산소비자협동조합의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 2000만원으로 ‘미생물 발효기’를 구입했다. 이것이 ‘괴산미생물연구회’의 발족이었다. 그러니까 ‘흙살림’은 괴산미생물연구회로부터 시작된다. 연구 책임은 서울대 농대 시절 학보사 일을 함께 했던 친구 서현창 교수가 맡았다. 물론 미래가 보장된 일이 아니었다. 남이 박수 치는 일도 아니었다. 당시만 해도 유기농을 한다면 반정부인사로 낙인찍히는 분위기였다. 농약과 비료 없이도 농사지을 수 있다는 말은 철부지 아이들의 환상으로 치부됐다. 그러나 젊은 그들은 열정과 투지로 연구를 밀고 나갔다.
“처음 배양한 미생물이 유산균이었어요. 안방 아랫목 구들에 묻어놓고 애지중지 길러냈을 때 정말 다이아몬드라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그걸 들고 농가를 찾아다니면서 설득에 들어갔어요. ‘흙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이 엄청난 활동을 하면서 흙을 숨 쉬게 만듭니다. 건강한 흙에서 자라는 작물은 농약을 치지 않아도 병해충을 스스로 이깁니다. 농약과 제초제를 치지 않아야 작물이 건강해집니다. 그래야 농민의 건강이 보장되고 도시민의 건강도 지킬 수 있습니다. 흙을 살려야 농촌에 미래가 있습니다.’ 그렇게 역설하면 어르신들 표정엔 저놈들이 무슨 사기를 치러 왔나 하는 눈치가 역력해요. 배양균을 일단 재래식 화장실에 넣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다시 찾아가면 따로 설명이 필요 없었지요. 분뇨 냄새가 줄고 거름 냄새가 달라진다는 걸 어르신들이 직접 확인할 수 있으니까!”
유기농 자재 공급, 출판
그러면서 미생물에 관심 갖는 농민이 하나둘 늘어났다. 처음엔 무료로 나눴으나 연구소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판매도 시작했다.
▼ 지금 흙살림의 수입원이 바로 그 미생물인가요?
“아주 다양한 종류가 나와 있어요. 흙살림은 이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됐습니다. 크게 사단법인과 주식회사 둘로 나뉘는데 사단법인 흙살림은 교육·출판·컨설팅·친환경인증 사업을 담당하고 주식회사 흙살림이 유기농 농자재 공급을 맡고 있어요. 미생물균에는 재미있는 이름을 많이 붙였어요. 발효 유기질로 토양을 관리하는 ‘흙살림 균배양체’, 음식쓰레기를 퇴비로 만들어주는 ‘다용도미생물’, 퇴비가 잘 썩도록 하는 ‘흙살림골드’, 뿌리를 튼튼하게 만드는 ‘빛모음’, 땅심을 좋게 하는 ‘흙살림’, 해충을 없애주는 ‘진달래’, 동물사료에 섞는 ‘도움이’, 잎이 무럭무럭 크게 하는 ‘잎살림’, 미생물 함량이 높은 흙인 ‘흙나라’….”
▼ 퇴비를 만드는 데도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셨다면서요?
“미생물을 배양한 후엔 퇴비 만드는 일에 주력했어요. 음식물 찌꺼기에 미생물을 넣어 발효시켜 퇴비를 만드는 건데 다행히 이 사업은 담배인삼공사의 지원을 받아 큰 고생 없이 했지요.”
그는 매일 트럭을 몰고 청주와 괴산 일대를 돌아다녔다. 아파트 주민들이 모아놓은 음식물 찌꺼기를 수거해서 톱밥과 발효균을 섞어 기계에 넣었다. 1년을 음식물 찌꺼기 퇴비를 만들다보니 기계로 발효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고 싶어졌다. 발효퇴비는 우선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고 인분이나 축분처럼 영양이 충분치도 않았다. 생각 끝에 닭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음식물 찌꺼기를 일단 닭에게 먹여놓고 닭이 눈 똥으로 퇴비를 만들기로 했다. 기계 대신 닭의 위장을 이용하는 방식이랄까. 닭은 양계장에서 알을 낳지 못해 버려지는, 이른바 ‘폐계’를 사왔다. 닭들을 농장 뜰에 풀어놓고 채소를 마음껏 먹였더니 얼마 안 돼 다시 알을 낳기 시작했다. 닭의 자연 생명력을 무시하고 인간이 쓸모에 따라 폐계라고 규정해버린 것이다. 건강한 똥은 거름으로 쓰고 달걀은 음식물을 공급하는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음식물 쓰레기를 닭이 먹고, 생명이 다한 줄 알았던 닭은 건강을 회복하고, 닭똥은 발효되어 거름이 되고, 거름이 흙을 살리고, 흙은 농작물을 키우고 농작물이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말로만 부르짖던 순환농법, 함께 사는 공생농의 체계가 저절로 자리잡혀갔지요. 정말 뿌듯한 경험이었어요.”
흙살림 생활꾸러미
다음에 그가 찾은 것은 지렁이를 이용한 좀 더 정밀한 순환농법이었다. 비닐하우스 여러 동을 짓고 닭과 지렁이를 각각 나눠놓은 뒤 닭들이 밟고 뒤적거린 음식물을 지렁이가 있는 곳으로 옮기는 식이었다. 지렁이는 음식찌꺼기를 감쪽같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유기물이 풍부한 흙을 토해냈다. 그렇게 온갖 모색을 거듭하며 흙을 살릴 궁리에 빠졌던 그는 요즘 천호균 대표와 함께 ‘도시농부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쌈지농부다. 쌈지처럼 작은 땅을 가꾸는 농부란 뜻.
“천 대표가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이라 여러 새로운 시도를 할 겁니다. 도시와 농촌을 연결하는 ‘농부로부터’란 농산물 직판장도 만들었고, 아파트에서도 작은 텃밭을 가꿀 수 있는 제품도 개발했어요. 헌 현수막 같은 걸로 ‘그로우백’이라 해서 유기배양토를 채워 넣고 바로 씨앗을 심을 수 있는 튼튼한 가방도 만들고요. 그걸 두어 개만 놓아도 쌈채소를 길러 먹을 수 있는 텃밭이 되지요.”
▼ 올해는 ‘흙살림 생활꾸러미’란 것도 만드셨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그 꾸러미를 받는 친구가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도시와 농촌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유기체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도시민이 식생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100배 넘는 농토가 있어야 해요. 도시인도 그 땅에 감사하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데 농산물을 공산품처럼 마트에서 기계적으로 사고 말지요. 도시와 농촌이 유기적으로 이어져야 생명과 환경이 살아날 수 있어요, 그걸 위해 제가 희망을 거는 첫 번째가 도시 텃밭입니다. 텃밭에서 작물을 직접 키워보면 흙에 감사하고 감자 한 봉지, 파 한 뿌리의 가치를 저절로 배울 수 있게 되거든요. 두 번째 희망이 그 생활꾸러미입니다. 흙살림 회원 농가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도시 신청자들에게 보내드리는 거지요. 내용이야 마트에서 장보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그러나 생산한 농부를 일일이 소개하니 안심할 수 있고 제철에 나오는 걸 금방 받아 먹을 수 있고 누군가 정성 들여 만든 꾸러미를 받는 기쁨도 있을 거고. 반응이 꽤 좋습니다.”
농사는 마음밭 가꾸기
▼ 조리법도 적혀 온다고 하던데요?
“정을 담은 편지를 넣어 보내려고 노력하지요. 말이 그렇지 제초제 농약 비료 없이 농사짓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작물 곁에 붙어살아야 하거든요. 일일이 김매고 벌레 잡고 거름 주고…. 그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농사지을 맛이 나거든요. 꾸러미를 주문한다는 것은 화학농법 대신 유기농을 선택한 농부의 진심을 인정한다는 거거든요. 농부는 안전한 먹을거리로 소비자를 지켜주고 도시사람은 농부의 생산기반을 만들어주고. 그런 연대가 널리 퍼져나가는 게 저의 꿈입니다. 생활꾸러미 신청자가 늘어나면 유기농 농가들은 판로 걱정 없이 농사지을 수 있고 도시민은 매주 정성 들여 꾸러미를 보내는 농촌에 관심을 갖게 되고 방학이면 자신들이 먹을 농산물을 기르는 땅을 구경 오게 되고 바쁠 때는 일손도 거들고.”
▼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세상이 오겠군요.
“도시와 농촌이 함께 새 삶을 시작하는 거지요. 흙이 살아나면 속도와 경쟁에 치닫던 사람들 마음속에 묻어둔 선한 본성도 살아납니다. 비료를 친다는 것은 자연의 속도를 어기는 거였어요. 생명에는 저마다 본래의 시간들이 내장돼 있어요. 그런데 생산성에 목적을 두다보니 그 시간을 무시하고 억지로 빨리빨리 키워냈어요. 그건 생명에 대한 폭력이었어요. 식물만 그런 게 아니라 동물과 인간도 마찬가지지요. 땅을 살린다는 건 생명에게 고유한 시간을 찾아주는 일입니다. 유기농이 일반화되면 사람도 쓸데없이 바쁘지 않게 제 나름의 속도를 내며 살 수 있게 될 겁니다.”
▼ 말만 들어도 아름답네요. 왠지 안심이 되네요!
“농사란 흙 속에서 생명을 캐내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마음 밭에서 새로운 생각을 캐내는 일이거든요.”
▼ 미생물 연구와 동시에 토종 연구도 하셨지요? 토종이란 게 도대체 뭐지요? 토종이 왜 좋다는 겁니까?
“괴산에 와서 미생물 연구 다음으로 이어진 프로젝트가 토종 연구였어요. 토종은 대대로 우리 땅에서 자라던 종자지요. 토종이란 이 땅의 물, 바람, 흙을 먹으며 뿌리내린 종자입니다. 이 땅과 잘 어울리는 종자입니다. 강인해서 웬만하면 병에도 잘 안 걸려요. 무슨 맥락인지 아시겠지요? 토종을 심으면 농약을 그리 많이 칠 필요가 없다고요. 종자회사에서 새로 만들었다고 내놓는 대부분의 품종은 단위면적당 생산량을 높이는 데만 집중해서 개량한 종자입니다. 빨리 자라야 하니까 병충해에 취약하고 물도 많이 필요하고 양분도 많이 필요하지요. 종자 파는 회사들은 대부분 농약회사를 함께 운영합니다. 그러니까 종자 팔고 농약 팝니다. 지금 세계는 소수의 독점업체가 종자시장을 독점하고 있어요. 그런 기업 입장에서야 꿩 먹고 알 먹는 거지요.”
외국에 빼앗긴 종자
▼ 세상에! 국내 종자회사는 없습니까. 정부는 그걸 막지 못합니까.
“1960~70년대 보릿고개를 거치면서 토종 대신 신품종을 권한 것이 바로 정부였지요. 농약과 비료도 농협을 통해 공급해가면서! 재래종 심는 걸 관에서 못하게 막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지요. 원래 심던 토종 종자들은 소출이 적으니까 점점 사라져간 것이고. 국내 종자회사들은 대개 영세해요. 종자 하나를 개발하려면 최소 10년은 걸립니다. 기껏 개발해봤자 수익이 얼마 되지도 않고. 수지가 맞지 않으니 민간업체들이 연구개발을 맡을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청양고추라고 아시지요? 경북 청송과 영양 글자 하나씩을 따서 생긴 이름인데 매운 고추의 대명사 격인 이 작물은 이제 우리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 품종을 개발한 종묘회사가 외국기업으로 넘어갔거든요. 지금 이 땅에 심는 무 배추 씨앗 가운데 절반은 다국적기업에서 돈 주고 사온 겁니다. 당근 토마토는 80% 이상이 외국씨앗이고요. 이렇게 육종해서 개발한 품종은 씨앗을 받을 수가 없어요. 잡종교배한 것이라 씨앗을 심을 경우 어떤 형질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 생산량 때문에 흙을 죽이고 우리 땅에 어울리는 토종 종자까지 죽였군요.
“그래도 토종을 구하러 시골을 다니다보면 몇 십 년 전의 씨앗봉지가 나옵니다. 시어머니가 싸놓은 거라고 하면서. 눈물겹죠! 밥에 넣어 먹는 밤콩도 수십여 종류가 넘습니다. 얼룩무늬가 들었다고 아주까리밤콩, 한 포기씩 심으라고 홀애비밤콩, 큼직하다고 귀족서리태에…. 이런 것들을 들여다보면 이게 다 조상의 몸이고 내 몸이다 싶어요. 우리나라는 콩의 원산지입니다.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콩이 자라는 나라가 없는데 바로 그게 원산지라는 증명이지요. 메주콩만 해도 300종이 넘고, 지금 농촌진흥청에 보관하고 있는, 돌콩이라 불리는 야생콩 종류가 1100여 가지랍니다.”
토종이 희망
▼ 그런 콩을 심어야 병충해가 적겠네요.
“문제는 이 다양한 토종콩을 심고 수확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어요. 우리나라 콩 자급률은 5%입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95%가 수입된다는 말이지요. 콩나물, 두부, 된장, 간장 등 콩으로 만든 식품을 어느 나라보다 많이 먹는 우리나라 사정이 이렇습니다. 토종콩은 미국 가서 구하는 편이 훨씬 빨라요.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콩 5000여 종을 수집해갔고 거기 절반 정도를 보유하고 있지요. 지금 우리가 수입해 심는 콩은 우리 토종과 중국, 일본에서 가져간 콩종자를 교잡해 미국에서 개량한 것이지요. 우리 종자가 자꾸 줄어드니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토종벌이 집단폐사하고 있대요. 꿀벌이 없으면 과일나무나 채소가 수정이 되지 않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지요. 지구 전체 식물의 3분의 1이 벌의 도움으로 수분을 한다는데 벌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요? 재앙이지요. 인간이 우쭐거려봐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면 하루아침에 무너집니다. 자연이란 아주 치밀하게 얽혀서 생명을 유지해가기 때문에 어느 한 곳이 상처 나면 금방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 토종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토종 씨앗을 심어야겠군요. 농약 안 치고 비료 안 쓰기 위해서도 토종을 찾아야겠고!
“바로 그렇지요. 토종이 희망이고 열쇠입니다. 토종 연구를 하신 분으로 안완식 박사가 계셔요. 그분 말씀으로는 80년대에 종자 수집을 한 뒤 7~8년 후 다시 그 마을에 가봤더니 전에 있던 씨앗 열 개 중 일고여덟이 사라졌더랍니다. 그나마 80년대 부지런히 모아둔 게 다행이라고 하시면서! 씨앗 하나가 아무것 아닌 것 같지만 농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대대로 이어오던 전통생산방식을 바꿔놓은 것이 불과 30년이에요. 우리처럼 급격하게 변한 곳은 세계 어디도 없어요. 저도 독립운동하시던 분들처럼 절박하게, 빼앗긴 주권을 찾는다는 심정으로 토종 씨앗을 찾고 있어요.”
토종연구소에 높이 걸린 ‘토종, 5000년 희망을 싹틔우다’란 걸개가 무슨 의미를 담은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나라의 토종식물은 18만7000종 정도인데 매년 200종 이상이 감소한다고 한다. 흙살림 토종연구소가 보관하는 곡식종자는 1000여 종 된다. 그는 지난 20년간 휴가를 간 적이 없다. 한가하게 쉬고 있을 여유가 없어 그렇게 맹렬하게 뛰어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친환경 농산물에 관한 인식은 좋아졌고 유기농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도 늘어났지만 아직 농촌의 현실은 암담하단다.
▼ 흙살림의 모색대로 미생물을 키워 흙을 살리고 토종을 심으면 우리 농촌은 희망이 있을까요?
“무엇보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지속가능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일정한 수입이 보장돼야지요. 그게 안 되면 만사 도루묵입니다. 현재 쌀값이 한 가마니 15만원이에요. 도시사람 1인당 1년에 쌀 한 가마니를 먹습니다. 1년 쌀값이 15만원이란 소리지요. 커피값은 아마 100만원 이상일 걸요. 쌀값이 이래서는 농민이 살 수가 없어요. 지금 농가당 경지면적이 1만3200㎡(약4000평)가 조금 넘거든요. 거기 쌀농사를 지어 손에 쥐는 소득이 1년에 1000만원이 채 안됩니다. 한 달에 100만원도 못 버는데 어떻게 농사를 짓겠어요. 적어도 쌀 한 가마 40만원은 돼야 농민이 살 수가 있어요. 수지타산 맞춘다고 생산량만 신경 쓰니까 농약 뿌리고 제초제 쓰게 되는 겁니다. 논은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을 포함해 5800종류의 생물이 살지요. 논에 그만큼의 생물이 살 때에 농촌은 희망이 있습니다. 도시민이 땅에 대한 자각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해요. 그들이 생산기반을 만들어줄 때 농촌에 희망이 있지요.”
농업 위기 속 희망
▼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 농촌에 타격을 주겠지요?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은 25%밖에 되지 않아요. 답답하지요. 2010년 배춧값이 폭등했을 때를 기억해보세요. 한 포기가 3만~4만원 해도 해결 방법이 없었어요. 예전 같으면 중국에서 수입하면 됐는데, 작년엔 중국도 가격이 올라 어쩔 수 없었거든요. 식량부족은 이미 예고된 사태입니다. 자급하지 않으면 주권을 잃어요. 도시 곳곳에 논과 텃밭을 만들어야 합니다. 취미나 풍경 수준을 넘어 식량자급의 단계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농사 농(農)자는 별진(辰)자 위에 노래 곡(曲)자를 올려놓은 거 아닙니까. 별의 노래지요. 곧 하늘의 조화라는 말이지요. 농사 경험을 통해 우주의 조화를 느낄 수가 있으니 누구나 도시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 우리 농민 수가 너무 많다고도 하던데?
“지금 인구 5000만명 중 농민은 320만 정도죠. 앞으로 20년 안에 농민 100만명을 유지하면 그나마 다행일 겁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그 자체가 위기지요. 기업농으로 해결하면 된다는 이들도 있지만 우리 국토의 모양과 토양은 기업농에 맞지 않아요. 기업농에서 유기농을 선택하겠습니까? 유기농은 기업에서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기업은 당연히 경제성을 우선할 테고 세월이 갈수록 땅은 죽어갈 테지요.”
과묵하고 겸손한 그이지만 농촌 현실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어쩔 수 없이 흥분한다. 우린 누구나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지만 이태근은 삶 전부를 흙속에 묻어놓고 살았다. 그는 무위당 장일순 선생을 우러러봤다. 괴산 생활 초기 그를 찾아가기도 하고 강의도 들었다.
“그분은 스스로를 좁쌀 한 알이라고 칭하셨지요. ‘쌀 한 톨에 우주가 담겨 있다. 거기 흙, 공기, 물, 햇볕이 농축되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럴 때 선생은 존재 자체에서 흙냄새가 났어요.”
그런데 나는 그 말을 고스란히 이태근씨에게 돌려주고 싶다. 이제 쉰을 막 넘긴 그도 존재 자체에서 흙냄새가 나는 사람이다. 흙처럼 미덥고 흙처럼 부지런하고 흙처럼 덤덤하다. 이제 흙살림은 한 해 매출액 250억원, 직원 100명을 가진 탄탄한 기업으로 자랐다. 미생물연구소, 토종연구소를 거느렸고 2008년엔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받았다. ‘흙살림’은 ‘농부’가 되기를 꿈꾸던 소년이 농촌에 내려온 지 27년 만에 이뤄낸 장엄이다. 그는 이제 한국 농업의 맨 앞장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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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요즘 2주일에 한 번씩 흙살림 농부들이 싸 보내는 생활꾸러미를 배달받는다. 지렁이가 사는 흙에서 제 고유의 시간대로 천천히 자란 토종 열매와 뿌리들, 내 마음과 몸의 본질은 여기 있다. 이 향기와 빛깔과 영양이 나를 키우고 있다. 20여 년 전 이태근 대표가 괴산에 내려가지 않았더라면 자칫 사라질 수도 있었을 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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