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촌에서 바라본 성산자산성(동모산). 겉으로 보기에는 나지막한 미산(美山) 같지만, 정상에 서서 둘러보면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다.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유민들을 데리고 발해를 건국했다는 곳이다. 조해훈기자 | |
북쪽으로 러시아 연해주 및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을 포함하고 서쪽으로는 요녕성,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이르는 드넓은 영역을 229년간 지배했던 거대 제국 발해.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의 영토가 5경 15부 62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첫 도읍지인 구국에서 중경현덕부→상경용천부→동경용원부→상경용천부 순으로 수도를 네 차례 옮겼다. 발해(698~926)는 지금 이른바 '동북공정'을 둘러싸고 한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새롭게 주목받는 발해사의 현장을 답사해 건국에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전성기와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한다.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이끌고 와 발해를 건국했다는 동모산은 중국 길림성 돈화시에서 동남으로 12㎞ 떨어진 산성자촌에 있었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서 있는 철구조물에서 돈화시 방향 대각선으로 벌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산이 동모산으로 불리는 성산자산성이다.
날씨가 영하 10도 가까이 되는 추운 날씨여서 나무와 풀도 마르고, 북만주 벌판 곳곳을 누비며 이곳까지 오느라 입술도 말랐는데, 문득 가슴에서 물기처럼 촉촉한 감상이 치솟는다. 668년(고구려 보장왕 27), 당나라에 멸망한 거대 강국 고구려의 장수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천신만고 끝에 발해를 처음 세운 곳이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니 드넓은 벌에 성산자산성이 외로이 서 있었다. 만산홍엽으로 곱게 물들었다가 갑자기 추위에 얼어붙은 듯한 저 산이 1300여 년의 험난한 역사를 껴안고 있다는 말인가. 대조영 일가가 당나라에 의해 요하 서쪽인 영주(營州·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인근)로 강제 이주된 뒤 절치부심 끝에 30년 만에 돌아와 나라를 세운 곳이라기에는 산의 모양새나 주위 풍경이 너무 부드럽고 서정적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고구려의 잔여 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강제 이주정책을 강행했다. 하지만 당의 통제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당나라의 각지로 강제 이주됐다. 이들 대부분은 수도권에 거주하던 사람이거나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696년 영주 지역에 섞여 살던 여러 종족 중 거란족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학정을 하던 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성을 함락했다. 이 때 대조영도 말갈사람들과 연합해 반당 투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돌궐군 등의 힘을 빌려 거란군을 제압한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거란족 출신 장수 이해고를 시켜 대조영군을 진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거란족 추장 걸사비우가 전사하고, 걸걸중상도 사망한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유민들과 함께 동쪽으로 향하다 이른 바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기습, 섬멸했다.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 등의 이러한 기록 외에 '협계태씨족보'와 '제왕운기'가 걸걸중상이 이미 동모산을 비롯한 인근에 684년 소국인 진국을 세웠고, 696년 반당 투쟁을 위해 영주로 간 대조영은 그곳에 살던 거란인, 말갈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후 698년 돌아와 발해를 건국하고 1대 왕인 고왕으로 등극했다고도 언급한 동모산은 어쨌거나 대조영의 숨결이 묻어있는 곳일 게다.
대조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구당서'에 '조영은 용맹스럽고 용병술에 뛰어났다'는 기사가 있다. 중국 학자들은 '신당서'에 표기된 '속말말갈 대조영'을 들어 발해는 고구려 사람들이 아닌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나, 이는 '고구려 송화강 지역 촌사람 대조영'이란 뜻이라고 우리나라 학자들은 반박하고 있다. 꽁꽁 얼어 붙은 밭을 지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성 입구에 1980년 4월 20일 중국 길림성 인민정부가 길림성 문물보호단위(우리의 지정 문화유적에 해당)로 공포하고 돈화시 인민정부가 세운 비석이 2개 서 있다. 하나는 중국어로, 다른 하나는 한국어로 적혀있다. 비석 내용은 '성산자산성은 당나라 발해국 조기 성지로 발해 제1대 왕 대조영이 자리를 잡았다고 한 동모산으로 고증되었다……'로 쓰여 있다.
산성의 서문터로 올라가 우물터, 집단 거주지터, 연병장터, 그리고 뱀처럼 산을 감싸고 있는 흙성(옹성)을 둘러봤다. 그런 후 정상에 섰다. 사방이 너른 벌이었다. 북쪽 절벽 아래에는 허옇게 얼어 있는 강인 대석하가 동쪽의 평원을 흘러서 서남에서 오는 목단강과 합류해 동북으로 흘러간다. 목단강은 홀한하로, 대석하는 오루하라고 불린다. 여기가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돈화시와 육정산, 멀리 영승 유적이 아련히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동모산의 위치를 두고 학자들도 엇갈린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다 '신당서' 발해전에 '영주에서 2000리 되는 곳' '천모말년 흠모는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구국에서 300리로 홀한하의 동쪽'이라는 기록을 감안해 지금은 성산자산성이 동모산으로 굳혀졌다. 또 여기서 5㎞ 지점에 있는 육정산에서 발해 3대왕 대흠무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 산성이 동모산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동모산을 정점으로 주변 벌판을 둘러보니 대조영이 데리고 온 병사와 유민의 수가 40만 명('오대회요' 기록)이든, 또는 병력 2만· 유민 10여 만명(중국 학자 위국충, 주국침 주장)이든 충분히 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만한 규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조영이 동모산 일대에 발해국을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망국의 한을 안은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이곳으로 다투어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조영이 영주를 탈주해 연고지였던 요동지방에 가서 임시 나라를 세웠다가, 당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당시에는 오지였던 이곳 동모산으로 어쩔 수 없이 피신해 나라를 세웠다는 송기호 서울대 교수의 주장에도 귀 기울여 볼만 하다. 발해의 건국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역사 자체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 외에 발해가 건국과 관련, 자체 기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동모산에서 건국해 임시 거주하다 돈화 시가지 인근에 첫 도읍지를 정해 옮기고 구국으로 불렀다는 대조영의 잔영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 주민인 까오싱위는 "나이 든 사람들은 지금도 성산자산성에 발해 대왕이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산성에서 칼·창·화살 등을 많이 팠으며, 돌은 모두 주워와 집 담장을 쌓는 데 사용한다"고 증언했다.
# '홍려정비' 내세워 당나라 지방정권 홍보
중국 흑룡강성 상경용천부유지 박물관에 전시된 최흔의 홍려정비 모사품. | |
최근 중국이 홍려정비의 문구를 근거로 중국 학계는 발해의 처음 국호가 '말갈'이고, 713년 이후 '발해'로 바꿔 불렀다며, 발해가 말갈이 세운 나라라 주장한다.
홍려정비란 높이 1.8m, 너비 3m의 비석으로 713년 당나라 조정이 발해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사실을 기록했으며, 당시 발해의 영토였던 중국 요녕성 여순시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신당서'에도 나와 있듯이 발해인들 '스스로 진국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반박한다. 특히 서병국 교수(대진대)는 '구당서'는 발해국의 건국 연대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유취국사'에는 문무천황 2년(698)에 대조영이 처음 발해국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며 처음부터 발해는 '발해'라는 연호와 '고려'라는 명칭도 같이 썼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