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醉月 2010. 12. 28. 08:54

대조영 발해 건국지 동모산
우리 역사 발해여 여기 살아 숨 쉬는구나!
229년간 민족사 맥 이은 발해 숨결 깃든 곳 우물 ·집단거주지 터 등 흙성 고스란히 남아
주민 아직도 " 발해 대왕 살던 곳" 이라 불러

 
  중국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촌에서 바라본 성산자산성(동모산). 겉으로 보기에는 나지막한 미산(美山) 같지만, 정상에 서서 둘러보면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다.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유민들을 데리고 발해를 건국했다는 곳이다. 조해훈기자

북쪽으로 러시아 연해주 및 중국 흑룡강성, 길림성을 포함하고 서쪽으로는 요녕성, 남쪽으로는 한반도 북부 지역에 이르는 드넓은 영역을 229년간 지배했던 거대 제국 발해.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의 영토가 5경 15부 62주라고 설명하고 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할 때까지 첫 도읍지인 구국에서 중경현덕부→상경용천부→동경용원부→상경용천부 순으로 수도를 네 차례 옮겼다. 발해(698~926)는 지금 이른바 '동북공정'을 둘러싸고 한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의 한 가운데 서 있다. 새롭게 주목받는 발해사의 현장을 답사해 건국에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전성기와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한다.


대조영이 698년 고구려와 말갈 유민들을 이끌고 와 발해를 건국했다는 동모산은 중국 길림성 돈화시에서 동남으로 12㎞ 떨어진 산성자촌에 있었다. 마을 입구 도로변에 서 있는 철구조물에서 돈화시 방향 대각선으로 벌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산이 동모산으로 불리는 성산자산성이다.

날씨가 영하 10도 가까이 되는 추운 날씨여서 나무와 풀도 마르고, 북만주 벌판 곳곳을 누비며 이곳까지 오느라 입술도 말랐는데, 문득 가슴에서 물기처럼 촉촉한 감상이 치솟는다. 668년(고구려 보장왕 27), 당나라에 멸망한 거대 강국 고구려의 장수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천신만고 끝에 발해를 처음 세운 곳이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을 뜨겁게 만들었다.

마을을 지나니 드넓은 벌에 성산자산성이 외로이 서 있었다. 만산홍엽으로 곱게 물들었다가 갑자기 추위에 얼어붙은 듯한 저 산이 1300여 년의 험난한 역사를 껴안고 있다는 말인가. 대조영 일가가 당나라에 의해 요하 서쪽인 영주(營州·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인근)로 강제 이주된 뒤 절치부심 끝에 30년 만에 돌아와 나라를 세운 곳이라기에는 산의 모양새나 주위 풍경이 너무 부드럽고 서정적이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은 고구려의 잔여 세력을 거세하기 위해 강제 이주정책을 강행했다. 하지만 당의 통제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당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당나라의 각지로 강제 이주됐다. 이들 대부분은 수도권에 거주하던 사람이거나 당나라에 끝까지 저항한 지역에 살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696년 영주 지역에 섞여 살던 여러 종족 중 거란족의 이진충과 손만영이 반란을 일으켜 학정을 하던 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영주성을 함락했다. 이 때 대조영도 말갈사람들과 연합해 반당 투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돌궐군 등의 힘을 빌려 거란군을 제압한 당나라의 측천무후는 거란족 출신 장수 이해고를 시켜 대조영군을 진압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거란족 추장 걸사비우가 전사하고, 걸걸중상도 사망한다.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 유민들과 함께 동쪽으로 향하다 이른 바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의 추격군을 기습, 섬멸했다.

'구당서' '신당서' '오대회요' 등의 이러한 기록 외에 '협계태씨족보'와 '제왕운기'가 걸걸중상이 이미 동모산을 비롯한 인근에 684년 소국인 진국을 세웠고, 696년 반당 투쟁을 위해 영주로 간 대조영은 그곳에 살던 거란인, 말갈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후 698년 돌아와 발해를 건국하고 1대 왕인 고왕으로 등극했다고도 언급한 동모산은 어쨌거나 대조영의 숨결이 묻어있는 곳일 게다.

대조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구당서'에 '조영은 용맹스럽고 용병술에 뛰어났다'는 기사가 있다. 중국 학자들은 '신당서'에 표기된 '속말말갈 대조영'을 들어 발해는 고구려 사람들이 아닌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하나, 이는 '고구려 송화강 지역 촌사람 대조영'이란 뜻이라고 우리나라 학자들은 반박하고 있다. 꽁꽁 얼어 붙은 밭을 지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산성 입구에 1980년 4월 20일 중국 길림성 인민정부가 길림성 문물보호단위(우리의 지정 문화유적에 해당)로 공포하고 돈화시 인민정부가 세운 비석이 2개 서 있다. 하나는 중국어로, 다른 하나는 한국어로 적혀있다. 비석 내용은 '성산자산성은 당나라 발해국 조기 성지로 발해 제1대 왕 대조영이 자리를 잡았다고 한 동모산으로 고증되었다……'로 쓰여 있다.

산성의 서문터로 올라가 우물터, 집단 거주지터, 연병장터, 그리고 뱀처럼 산을 감싸고 있는 흙성(옹성)을 둘러봤다. 그런 후 정상에 섰다. 사방이 너른 벌이었다. 북쪽 절벽 아래에는 허옇게 얼어 있는 강인 대석하가 동쪽의 평원을 흘러서 서남에서 오는 목단강과 합류해 동북으로 흘러간다. 목단강은 홀한하로, 대석하는 오루하라고 불린다. 여기가 난공불락의 요새였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돈화시와 육정산, 멀리 영승 유적이 아련히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동모산의 위치를 두고 학자들도 엇갈린 해석을 내놓았다. 그러다 '신당서' 발해전에 '영주에서 2000리 되는 곳' '천모말년 흠모는 상경으로 옮겼다. 이곳은 구국에서 300리로 홀한하의 동쪽'이라는 기록을 감안해 지금은 성산자산성이 동모산으로 굳혀졌다. 또 여기서 5㎞ 지점에 있는 육정산에서 발해 3대왕 대흠무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 무덤이 발견됨으로써 이 산성이 동모산이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동모산을 정점으로 주변 벌판을 둘러보니 대조영이 데리고 온 병사와 유민의 수가 40만 명('오대회요' 기록)이든, 또는 병력 2만· 유민 10여 만명(중국 학자 위국충, 주국침 주장)이든 충분히 한 나라를 세울 수 있을 만한 규모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조영이 동모산 일대에 발해국을 세웠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자 망국의 한을 안은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이곳으로 다투어 모여들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조영이 영주를 탈주해 연고지였던 요동지방에 가서 임시 나라를 세웠다가, 당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당시에는 오지였던 이곳 동모산으로 어쩔 수 없이 피신해 나라를 세웠다는 송기호 서울대 교수의 주장에도 귀 기울여 볼만 하다. 발해의 건국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역사 자체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 외에 발해가 건국과 관련, 자체 기록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동모산에서 건국해 임시 거주하다 돈화 시가지 인근에 첫 도읍지를 정해 옮기고 구국으로 불렀다는 대조영의 잔영을 뒤로 하고 산을 내려왔다. 마을 주민인 까오싱위는 "나이 든 사람들은 지금도 성산자산성에 발해 대왕이 살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산성에서 칼·창·화살 등을 많이 팠으며, 돌은 모두 주워와 집 담장을 쌓는 데 사용한다"고 증언했다.

# '홍려정비' 내세워 당나라 지방정권 홍보

 
  중국 흑룡강성 상경용천부유지 박물관에 전시된 최흔의 홍려정비 모사품.
중국 정부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 중의 하나로 내세우는 것이 일본 왕궁의 후키아게(吹上) 정원에 옮겨 세워져 있는 홍려정비다.

최근 중국이 홍려정비의 문구를 근거로 중국 학계는 발해의 처음 국호가 '말갈'이고, 713년 이후 '발해'로 바꿔 불렀다며, 발해가 말갈이 세운 나라라 주장한다.

홍려정비란 높이 1.8m, 너비 3m의 비석으로 713년 당나라 조정이 발해왕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사실을 기록했으며, 당시 발해의 영토였던 중국 요녕성 여순시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신당서'에도 나와 있듯이 발해인들 '스스로 진국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반박한다. 특히 서병국 교수(대진대)는 '구당서'는 발해국의 건국 연대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일본의 '유취국사'에는 문무천황 2년(698)에 대조영이 처음 발해국을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며 처음부터 발해는 '발해'라는 연호와 '고려'라는 명칭도 같이 썼다고 주장했다.

발해 첫 도읍지 구국과 중경현덕부
"지린성 둔화시 영승촌이 첫 도읍지"
육정산 발해 고분군과 지척… 5개 건축터 확인
3대 문왕 둘째딸 정혜공주의 묘도 돈화서 발굴
중국측 "목단강 오동성이 수도" 주장… 위치 논란


 
▲구국 위치 논란과 육정산 정혜공주묘

중국 지린성 둔화시 오동성(敖東城)을 찾았을 땐 눈보라가 휘몰아쳤고,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날씨가 차가웠다. 지린성 정부가 1981년 4월 10일에 지린성 중점 문화유물보로단위로 공포한 오동성의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오동성은 당조시기 발해국(기원 698년~926년) 초기의 도읍이다. 성자리는 장방형이며 곽성과 왕성으로 이루어졌고 성벽은 흙을 다져 쌓았다……'. 낯선 사람이 와서 사진을 찍고 비석의 글을 읽는 것을 보고는 목도리를 얼굴까지 친친 감은 인근 구멍가게 여주인이 나와서 "여기가 발해왕이 살았던 성터예요"라고 말을 걸어온다.

발해의 첫 도읍지인 구국(舊國)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왜냐하면 '구당서' 등에 대조영이 동모산과 그 아래에 도읍지를 정하고 구국이라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더 구체적인 언급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조영, 즉 발해 고왕이 건국 초기에 동모산과 그 인근에서 10년간 통치하다가 나라가 안정되고 물산도 크게 늘어나자 동모산 인근인 목단강 충적평야에 도성을 수축한 것이 오동성이라는 주장과 오동성에서 남쪽으로 약 10㎞떨어진 곳에 있는 영승(永勝) 유적이 구국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

오동성은 내외 두 성을 가진 회(回)자 모양의 성으로 돌절구, 질그릇, 무기류, 쇠가마, 수레바퀴와 벽돌, 기와 등의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1985년 둔화시 조선족 중학교 전복록 교사가 쓴 오동성 답사기에는 당시까지만 해도 성벽이 많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적혀 있으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동네 곳곳에 성벽을 뜯어낸 것으로 추정되는 돌들만 흩어져 있다. 중국 측은 발해국은 홀한성으로도 불리는 오동성을 57년간 수도로 삼았으며, 홀한주를 구국이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당나라 시기 목단강을 홀한하라고 불렀는데, 홀한하 연안에 건립됐다고 해서 홀한성이라고 명명하고, 홀한성을 중심으로 한 목단강 유역을 홀한주라고 했다.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한 후 평지에 성을 쌓고 첫 도읍지로 정했다는 곳 중의 하나인 중국 지린성 둔화시 오동성. 성터는 흔적이 없고 지린성 정부가 세운 표지석만 눈보라를 맞으며 서 있다. 조해훈 기자

방학봉, 장월영 등 조선족 학자들은 영승을 구국이라고 주장한다. 영승은 둔화시의 발해 유적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며, 이 유적의 북쪽에 육정산 발해 고분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승 유적이 있는 영승촌은 600명가량 거주하는 농촌마을로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 여기서 5개의 건축터가 확인됐으며, 회색기와와 와당, 도기편, 당나라의 개원통보와 송나라의 숭녕통보가 발견됐다. 한규철 경성대 교수와 송기호 서울대 교수도 이 영승촌이 구국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조심스레 밝혔다. 이 유적에서 약 4㎞ 지점에 유명한 육정산 고분군이 있다. 육정산 고분군은 오동성과 영승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발해 왕족들의 무덤군인 육정산 고분군에는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무덤뿐만 아니라 대조영과 2대 무왕, 3대 문왕의 무덤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워낙 도굴이 심해 주요 고분은 봉분의 일부만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기자가 육정산 고분군을 찾았을 때는 중국 당국이 고분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책을 빙 둘러친 것은 물론 초소에 경비하는 사람을 세워 두었고, 흙을 가져가기만 해도 엄벌에 처한다는 표지판까지 서 있었다.

중국 연변대학 최문호, 오봉협 교수 등이 1949년 9월 정혜공주묘를 발굴함으로써 그동안 미궁에 빠져 있던 발해 초기 도읍지의 위치를 가늠하게 됐다. 정혜공주묘도 도굴이 극심했는데, 무덤 안에서 비석 한개와 돌사자 두개, 옥구슬, 도금한 구리못 등을 수습했다. 출토된 이 비석이 중요했다. 비문에 700여 자에 달하는 해서체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문을 통해 육정산이 발해 왕실의 묘지라는 것을 알게 됐고, 둔화가 발해의 구국이었음을 확인했던 것이다. 비문을 근거로 왕의 무덤인 진능은 정혜공주 무덤에서 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도굴로 인해 확인시켜줄 만한 유물 등이 없어 아직 대조영의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수도가 상경용천부에 있을 때도 왕족이 죽으면 이 곳 구국까지 모셔왔다고 한다.

▲구국에서 중경으로 천도

대조영의 손자인 3대 문왕 대흠무는 둔화에 있었던 구국에서 742년 중경으로 도읍을 옮겼다. 지린성 화룡시 서고성자촌이 중경이며, 도읍이 상경으로 옮겨간 후로는 중경현덕부가 소재했었다. 여기서 대흥말년(755년)까지 약 13년 동안 거주했다. 중경현덕부는 두도평원의 서북쪽, 지금의 화룡시 서성향 소재지에서 동쪽 두도진에서 화룡으로 가는 길의 남쪽에 있는 서고성이다.

연변대 방학봉 교수는 발해가 구국에서 중경으로 천도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즉, 둔화보다 서고성 일대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따뜻할 뿐 아니라 고구려 시기 산성 등이 있어 고구려 고토에 대한 통치가 손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대조영과 2대 왕 무왕까지 40년간 발해는 무력으로 주변의 여러 종족을 통일했는데, 차츰 문치의 필요성이 대두하고 당나라와 신라, 일본, 거란 등과 교류하기에 수월한 곳을 찾다가 중경을 적지로 꼽았을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옛 중경현덕부는 농사를 짓는 한적한 마을이었다. 다행히 길로 이용되고 있는 외성이 남아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지린성 당국이 서고성을 복원, 백두산과 연계하는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주민들을 중경현덕부 도로 건너 맞은 편으로 이주시키는 중이라고 말했다. 발해 중경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으나 1980년 서고성에서 가까운 지점인 용두산 고분군에서 문왕의 넷째딸이자 정혜공주의 동생인 정효공주 무덤이 발견됨에 따라 중경이 서고성으로 굳혀졌다.

불교를 크게 부흥시킨 문왕은 자신의 넷째딸의 무덤 위에 탑을 쌓아 불교적인 장례를 치렀다. 육정산에 묻힌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 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사망했다. 정효공주 묘에서 발해에서는 유일하게 벽화가 발견됐다. 정혜공주 묘비와 함께 정효공주의 묘비도 발해사 연구에 더없이 좋은 1차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발해 사람들이 남긴 유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정효공주묘를 둘러보고 과수원 길을 돌아 아래 벽돌공장으로 내려왔다.문득 이들 두 공주가 부왕이 살아 있을 때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문왕이 너무나 슬퍼 '정사를 보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애통해 했다는 어느 기록이 떠올라 가슴을 적셨다.

# 수문장 등 12인상 문왕 넷째딸 정효공주 묘

- 발해의 현존 유일한 벽화

 
  정효공주의 무덤은 중국 지린성 화룡시 용수향 용해촌 산록에 있다. 지린성 정부가 건물을 지어 그 안에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왼쪽 사진은 정효공주 묘비 탁본.

정효공주는 792년 6월 9일 사망해 그해 11월 28일 기묘시에 매장됐다. 정효공주 무덤은 15개의 계단을 따라 내려간 4m 깊이에 있다. 공주의 묘비에 "강물 흐르는 곳에 만든 무덤은 깊고 어두웠다"고 적혀 있다.

무덤의 천장을 길다란 돌로 계단식으로 쌓았는데, 이렇게 천장 공간을 줄여나가는 방식은 고구려식이라고 서울대 송기호 교수는 밝혔다.

 
무덤칸 벽은 검은 벽돌로 쌓았으며, 문 출입구와 동·서·북 3벽의 회칠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수문장(무사), 시종 무관(시위), 내시, 악사 등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수문장, 시종 무관 등은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장검 철퇴 활 등 무기를 휴대하고 있다. 악사와 내시는 복두(머리수건)를 하고 박판, 공후, 비차 등 악기를 가진 채 서 있다. 회벽 위에 철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나서 물감으로 형상화 한 다음 맨 나중에 먹선을 가지고 완성했다고 한다. 무덤은 무덤길, 무덤문, 안길, 무덤칸과 탑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정효공주묘를 발굴했던 정영진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 소장은 기자와 연구소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정효공주묘를 발굴하러 들어가보니 도굴꾼들이 버린 100년 전 물건이 있어 놀랐다"며 "그나마 무덤 안에 발해의 유일한 벽화가 남아 있어 발해의 문화와 풍속을 연구하는 데 더 없이 소중하다"고 설명했다.

정효공주 묘비는 '무덤문(높이 1.2, 두께 0.9m)을 갑자기 봉하자니 (상객들은)처량한 기분이 차 넘쳤다'고 적고 있다.

160년 발해수도 상경용천부의 영욕
제국의 영화 오간데 없고 초석만 뒹굴어
외·내성안 5개 궁전, 당시 동북아 최대 도시 선왕때 활발한 영토 확장… 일본과도 교류
중국, 자본 유치 통해 유적지 복원작업 착수

 
  중국 흑룡강성 발해진에 있는 상경용천부 궁성벽 중 가장 보존이 잘된 남문터. 160여 년 간 발해의 최고 중심부였던 궁성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중국 당국이 성벽 윗 부분 등 일부를 보수했다.

▲발해진 상경성 가는 길

중국 흑룡강성의 동남부에 위치한 목단강시에서 영안시를 거쳐 동경성진으로 가는 데는 승용차로 1시간 조금 더 걸렸다. 동경성진은 상경용천부로 들어가는 관문. 영안시의 중심지이지만 사람들의 모습이나 거리 풍경은 어두웠다. 이 곳에는 소수민족인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들이 많이 산다. 1960년 대까지만 해도 발해진은 동경성진에 소속된 촌락이었는데 그 이후 떨어져 나와 2만여 명의 인구를 가진 독립된 진(鎭)이 됐다. 그 중에서 조선족은 30% 쯤 된다.

동경성진과의 발해진과의 거리는 5㎞가량. 발해진에 들어가면 160여 년 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상경용천부)의 외성이 도로 양쪽으로 보인다. 발해 시기에 상경성은 홀한성(忽汗城)으로 불렸다. 외성은 아래에 돌로 판축을 하고 그 위에 흙을 쌓았으며, 둘레의 길이가 16㎞296.5m로 10개의 성문이 있었다. 외성 안에는 4.5㎞규모의 내성을 둘러쌌으며, 그 안에 궁성(둘레 2㎞)이 있었다. 당시 당의 수도인 장안성이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의 하나였는데, 상경성은 동북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리라.

외성에 들어서면 오른 쪽에 옥수수 술공장이 보이고 마을이 있다. 상경성은 현재 옛 터만 남아있다. 오두막 같은 관리소를 지나면 상경성에 대한 안내판과 '발해 상경궁 복원 조감도'가 있다. 현재 영안시와 상급 행정 단위인 목단강시가 지난 해 하반기부터 발해 유적지 개발을 위해 외국자본과 민간자본 유치 활동에 나서고 있다. 중국은 1961년 상경용천부 유적을 제 1차 '전국 중점 문물 보호단위'로 지정하고, 2002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복원 준비 작업을 해 왔다. 이와 관련, 연변대학 발해사연구소 정영진 소장은 "중국 정부가 2008년 이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발해국 15대 왕, 229년의 역사 속에서 해동성국은 바로 이 궁성에서 이뤄진 것이다.

 
  중국 당국이 인근 경박호와 목단강 등 주변 경승지와 연계시켜 관광단지로 개발한다는 계획 아래 세워놓은 상경성 복원 조감도.
▲해동성국으로 불리던 상경용천부

안내판을 지나면 바로 궁성의 남문인 오문(午門)터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 문터를 통과하면 상경궁성 안에 들어가는 셈이다. 남문이 있는 성벽은 높이가 6m, 동서의 길이가 60m, 남북의 너비가 20m가량 되며 성벽 위에 거대한 누각이 있었다. 지금은 누각의 초석 50개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궁성 안에는 5개의 궁전터가 있다. 남문~제1 궁전터 구간 200m, 1궁전터~2궁전터 150m, 2궁전터~3궁전터 130m, 3궁전터~4궁전터 30m, 4궁전터~5궁전터는 80m 거리다. 이 중 제2궁전이 가장 컸다고 한다. 지금은 웅장하고 화려했던 전각은 간 데 없고 커다란 초석만 뒹굴고 있다. 궁전터와 궁전터 사이에는 인근 농민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다. 기자가 찾았을 땐 꽁꽁 언 밭에 잡초만 누렇게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몇번이고 돌아보고 돌아보면서 나오는 동안 눈가가 젖어오는 걸 느꼈다. 아마도 한때는 화려한 제국이었지만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발해의 영광에 대한 무상감 때문이었으리라. 이 곳이 무려 160여년 간 거대 제국의 수도로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던 영광의 도읍이고, 비운의 도읍이었던 것이다.

발해는 818년 10대 선왕(830년까지 재위)이 즉위하면서 최고 중흥기를 맞았다. 선왕은 계속되는 내분을 수습하고, 대외 정복활동을 벌여 발해 역사상 최대 영역을 소유했던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사방 5000리'의 영토 내에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은 이 때 완비됐던 것이며, 중국은 이를 두고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렀다. 발해는 중앙에 3성 6부 1대 7사 1원 1감 1국을 설치했다.

일본 궁내청 서릉부에는 '중대성첩'이 소장돼 있다. 841년, 발해 중대성이 일본의 태정관(太政官)에게 보낸 것으로 발해와 일본 사이에 왕래한 외교문서였다. 발해는 신라와 5차례, 일본과 34차례, 당과는 100여 차례 넘게 교섭하는 등 주변 여러나라와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다. 발해와 세계의 여러나라들과 교류하던 길이 다섯 군데나 됐던 것이다. 일본 가나자와 가쿠인 대학 고지마 요시타카 교수는 지난 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동아시아와 발해' 주제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9세기 유적인 우메다 히나시 유적에서 발해의 꽃모양 혁띠 버클을 발굴했다며, 당시 발해와 일본의 활발했던 교류를 입증했다. 발해가 일본에 배를 타고 왕래한 기록은 '속일본기'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상경성터는 1933, 1934년 두 차례 발굴이 이뤄졌으며, 1963, 1964년에는 북한과 중국 학자들이 공동으로 발굴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상경성에 대한 발굴이 진행됐다. 궁전터에서 20m가량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길 한편에 상경성 당시 사용했다는 우물인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 있다. 이 우물의 현재 깊이는 5.6m로, 1963년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마친 다음 우물의 입구 부분을 고치고 정자를 지었다.

중경현덕부에서 756년 이 곳 상경성으로 수도를 옮긴 문왕은 관직 제도를 정비하고 주자감(胄子監, 대학)을 세워 학문과 교육을 장려하고 진흥시켰다. 문왕은 785년에 국력 강화를 위해 상경성에서 길림성 훈춘시 동경용원부로 천도를 했다. 발해는 동경용원부(팔련성)에서 793년 다시 상경용천부로 옮겨와 여기서 거란에게 망한 것이다.

▲발해의 멸망

발해는 926년 거란의 아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 의해 멸망된다. 중국 북방에 있었던 거란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 그 배후에 있던 발해를 공격한 것이다. 거란은 925년 12월에 발해에 대한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발해는 926년 1월 홀한성에서 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발해를 멸망시킨 아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에 '동쪽의 거란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설치했고, 홀한성을 천복성으로 개칭했다. 아율아보기의 둘째 아들인 야율덕광(요나라 태종)은 928년에 동단국의 수도를 천복성에서 동평(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옮기면서 천복성을 불사르고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갔던 것이다. 중국 학자인 관금천, 나대지 등은 상경성을 불태운 것은 야율덕광이 아니라 1234년 쳐들어온 몽골군이라고 주장한다.

오랫동안 역사의 버림을 받았던 이 곳 발해진은 청나라 당시에는 유배지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대종교 총본사가 1934년 흑룡강성 밀산현 당벽진에서 발해진으로 옮겨오기 전 백산 안희제(1885~1943)가 발해농장을 운영했던 곳이다.

발해진에서 서남으로 약 1㎞ 떨어진, 발해진 중앙대가에 이 지역 사람들이 남대묘로 부르는 흥륭사가 있다. 지금까지 상경성 안팎에서 발굴된 절터는 모두 십여 개. 흥륭사에 저 유명한 발해의 석등과 석불이 있다.

발해가 망한 후 유민들은 '후발해' '정안국' '대발해국' 등 여러 차례 발해 부흥 왕조를 세웠으나 실패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유민들은 고려로 망명하기도 했다.

# 흥륭사 석등

- 연꽃 부조는 힘찬 발해 기상
- 덮개돌 통일신라 부도 연상

 
  '연꽃 석등탑'으로도 불리며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불교 조각미를 가진 발해의 석등탑. 발해진의 중앙도로인 주작대가 옆 흥륭사 경내에 있다.
발해진 흥륭사에 우람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이는 발해 석등이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 있다. 이 사원은 천여 년 전 상경용천부 앞 주작대가(朱雀大街) 양 측에 대칭으로 건축됐던 절 중의 하나로, 몇 차례 폐사됐다가 1861년 지금의 흥륭사로 중창됐다.

남에서 북으로 5개의 건물이 줄을 이어 서 있는 이 절의 마지막 건물인 삼성전 앞 뜰에 석등이 서 있다. 석등의 원래 높이는 6.4m 였지만 상륜부 일부가 훼손돼 현재 높이는 6m이다. 현무암으로 된 이 석등의 기둥돌(石住) 아래와 위에 새겨진 연꽃 무늬 부조는 강하고 힘찬 발해 사람들의 기질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선이 굵고 명확하다. 활짝 벌린 잎을 받든 연꽃의 줄기 역할을 하는 석주 위에 얹은 팔작 지붕 모양의 덮개돌(蓋石)은 마치 통일신라의 부도를 연상시킨다.

연꽃을 신성시한 불교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는 이 석등은 많은 전설을 갖고 있다. 그 중 하나는 문왕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초에 한 석공이 홀한해(경박호)에서 커다란 돌을 옮겨와 백일 동안 정으로 쪼아 석등을 만들어 불을 켜놓고는 갑자기 돌기둥 속으로 사라졌다는 내용. 돌이 갈라 터질까봐 자신의 몸으로 껴안았다는 그 석공 덕분인지 오늘 날까지도 석등이 거연히 솟아 있다. 삼성전 안에는 문왕이 상경용천부를 세우면서 만들었다는 3.3m 높이의 거대한 돌부처가 앉아 있다.

이 밖에도 1999년 이 곳 발해진에서 도로를 만들다가 돌함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 든 6개의 함 중 가장 작은 함에서 부처의 진신사리 9개가 나왔다. 인근의 상경용천부 유지박물관에서 보관하다 돌함만 남기고, 사리는 북경박물관으로 옮겼다고 박물관 관리인 초 씨(62)는 설명했다.
발해의 대외 교류와 멸망
日·唐과 교류 활발… 신라와는 소극적
중국 흑룡강성·몽골 등서 온돌유적 발굴 거란에 망한뒤 유민들 흩어져 생활한 듯

해동성국 발해 그 현장을 가다 <5>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지난 해 8월 한국과 러시아 공동 조사단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 조사한 발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 이곳은 발해 시기 수도 중의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 제공


▲발해인의 문화

지난 11월19일 기자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중요한 유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박물관 2층에 다행히 찾으려는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발해 관리로 추정되는 인물 청동상(靑銅像)이었다.

발해는 자체 문헌기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관리의 모습뿐 아니라 의복에 대해 고증할 자료가 적어 이 유물이 중요한 것이다. 문헌상으로는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관리들의 등급별(9품 18계) 복식 규정이 기록돼 있는 정도이다. 이 청동상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인근 마을에서 발견된 것으로 관복을 입고 서류 두루마리 같은 둥근 막대를 든 채 근엄하게 서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현지 학자들은 크라스키노성에서 일본과 신라로 사신이 왕래했으므로, 당시 파견된 사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돼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청동기마인물상'도 말에 탄 관리의 모습으로 추정돼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의 청동상과 비교할만 하다.

이 청동상에 묘사된 발해의 관리, 즉 사신들은 일본에 사절로 가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814년 발해 대사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왕효렴은 5편의 한시를 남겼으며, 양태사, 석인정, 석정소, 배정, 배료 등이 지은 시도 일본에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의 시인들은 배정을 '칠보지재(七步之才)', 즉 7보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짓는 재사라고 감찬해 마지 않았다. 배정의 아들 배구도 일본 문단에서 '독보지재(獨步之才)'로 불렸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의 문학 수준이 탁월했다는 것을 알려줄 뿐더러 문학이 양국 문화교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암시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는 이 청동상 외에 연화문이 양각된 수키와와 암기와가 전시돼 있다. 이는 발해 시기 불교가 중흥했다는 증명으로 볼 수 있다. 발해 시기에 조성된 사찰의 터가 현재 40여 곳에서 발견됐다. 북송의 왕흠약 등이 1013년에 완성한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보면 '714년에 (대조영)이 왕자를 당나라 수도 장안에 파견하여 불법을 배우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발해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적극 권장한 것으로 해석된다.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3대 문왕 대흠무 시기였다. 불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발해 유물로는 석등탑, 대석불, 사리함, 돌사자머리, 비석, 귀부, 여러 가지 불상 등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유물이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흥륭사에 있는 석등탑 및 대석불과 역시 발해진 백묘촌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그외 발해는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는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太常寺)'를 둘만큼 음악과 춤 등이 발달했다. '발해국지장편'과 '금사(金史)' '거란국지' 등에 발해의 음악과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발해인의 문자와 언어

 
  위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전시 중인 발해 청동 관리상과 연화문 수키와, 발해 문자인 '수이자'.
최근 국내 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 학자들도 발해의 문자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발해는 공식적인 외교문서와 자료 등에는 한문을 사용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한자 사용의 보충적 수단으로 '수이자(殊異字)'를 만들어 일부 사용했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수이자는 발해의 기와나 벽돌에서 주로 발견된다.

발해문자는 중국의 유명한 발해 연구자인 김육불 선생이 1930년 대에 처음 그 존재를 주장했다. 이후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잘못 새긴 글자라고 고집해 왔다. 발해 문자를 연구하고 있는 대진대 사학과 김재선 교수는 "'이태백전서·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서 당으로 보낸 서신이 있었는데 온 조정에서 이를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태백은 이를 해독하고 회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며 "이태백이 742년에서 744년까지 한림원공봉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의 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발해 말기 일본을 방문한 발해 사신 2명의 이름이 '주부리'(·목현의 수령)와 '마부리'(·석현의 수령)이었는데, 당시 한 관리만이 이 글자를 알고는 '이국(발해)에서 만든 글자라고 하자 발해 사신이 매우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재선 교수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발해 '문자기와'는 모두 370개이라며 이 발해문자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한자의 형태와 일치한 문자로 한자와 형태는 같으나, 한자의 뜻은 없고 음만 빌린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문자는 135개로 발해문자 전체의 36%를 차지한다. 둘째 한자와 유사한 문자로 전체의 41%에 달하며 총 154개이다. 셋째 두 문자 이상으로 이뤄진 문자로 전체의 17%이며 총 62개다. 넷째 총 12개의 문자로 전체의 3%에 해당하며, 다섯째는 부호문자로 전체의 3%인 11개이다. 정효공주 무덤에서도 문자벽돌 3장이 출토됐다.

'속일본기' 권13에 발해가 남쪽의 신라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왕족이었던 고씨 귀족들이 대거 참여해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것처럼 피지배 주민들도 대다수가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고구려계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더더욱 지배층 일부에서라도 중국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는 설명했다.


▲발해인의 생활

발해의 왕족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기와를 덮은 궁전에서 살았고, 관료귀족들도 기와집에서 살았다. 발해의 중심지구와 남부, 서부의 일반 평민들은 규모가 작고 구조가 간단하기는 하나 역시 실내에 칸을 나눈 지상건물인 초가집에서 살았다. 변경지대와 낙후한 지역의 평민들은 지상건물, 혹은 반움집, 움집에서 생활했다고 중국의 발해 연구자 김태순은 '발해시기의 평민주택을 논함' 주제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발해 시기 발해인들을 구분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빈부에 관계 없이 온돌을 놓고 방을 데웠다는 사실이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저서 '한국 고대의 온돌'에서 현재까지 한반도 북부와 연해주 및 만주 동부를 중심으로 확인된 쪽구들 관련 고대 주거지는 모두 92개 유적에 527개이며, 이는 크게 초기 철기시대, 고구려, 발해의 3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온돌의 초기 형태라고 해서 '쪽구들'로 명칭하고 있다. 그는 발해의 주거지는 현재까지 37개 유적에서 185기가 조사됐는데, 쪽구들이 있는 것이 93기, 없는 것이 70기이고, 불명이 22기로 유무가 확인된 163기에서 쪽구들 주거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57.1%라는 통계를 냈다. 송 교수는 "발해 쪽구들은 그 구조에서 ㄱ자형·2고래가 가장 많은 데에 비해 그 이전의 초기 철기시대와 고구려 때에는 ㄱ자형·외고래가 가장 많다"며 "따라서 발해 때에 평면 형태는 변함없이 ㄱ자형이 중심을 이루지만, 고래 숫자에서는 외고래에서 2고래로 진전됐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방학봉 연변대 교수도 "지금까지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발해국이 건립되기 전 말갈인 살림집터에서는 부뚜막, 굴뚝, 고래뚝, 조돌 등 시설이 갖추어진 전형적인 구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발해는 남송 때의 홍호가 쓴 '송막기공' 권상발해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부일처제를 택했다. 발해는 또 농작물로 조 벼 보리 밀 기장 수수 피 콩 들깨 메밀 등을 재배했으며 주식물은 조였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 중경현덕부 관할 하의 한 개 주인 '노성'에서 나오는 벼와 중국 길림성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인 책성의 된장이 유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요사(遼史)'에는 '발해의 요리사가 쑥떡을 올렸다'고 기록해 발해인들이 쑥떡을 즐겨 먹었으며, 왕효렴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발해 사람들은 술을 빚어 잘 마셨던 것도 생활의 한 단면이다.



# 경성대 한규철 교수 인터뷰

- "온돌은 우리 고유의 문화"

 
"온돌(구들)은 우리나라 특유의 생활문화입니다. 고구려의 온돌을 계승 발전시킨 발해의 온돌 습속을 볼 때도 발해는 중국보다는 우리나라 계열로 분류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발해의 온돌 습속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1990년 대 초반부터 이 부문에 대해 연구를 해온 한규철(사진) 경성대 교수는 "우리나라 발해 연구자들도 이제 이 부문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해가 남긴 문헌이 하나도 없는 실정에서 발해의 문화를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온돌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첫 발해 연구자이기도 한 한 교수는 발해의 문자에 대해서도 "요즘 발해 연구의 또 다른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발해문자, 즉 '수이자'를 일정 부분 사용한 것으로 본다"며 "이는 신라가 이두문자를 만들어 쓴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발해의 독립적인 문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또 "우리는 한자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지금은 한글을 통해 이런 부분을 많이 극복했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한 발 물러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객관적인 시각을 강조했다. 한 교수는 "당도 인정했던 발해 문화는 어느날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은 물론 당과 일본과의 교류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고 말을 맺었다.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벽 위. 불을 놓아 억새와 잡목 등을 태우느라 시커멓다. 발해 시기 이 성에서 일본과 신라로 사신들과 무역품 등이 오갔다. 최근 이 곳에서 발해 당시 절터와 온돌 시설 등이 발굴 조사됐다.

▲발해의 대외 교통로

어른 키를 넘는 광활한 억새밭을 헤치며 가는 도중 파란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웅덩이에 빠지기도 하면서 한참을 가니 드디어 억새밭이 끝나는 곳에 평지가 나타났다. 이 곳에는 불을 놓아 억새와 잡풀 등을 모두 태워 걸을 때마다 옷에 검정이 묻어났다. 곧이어 발굴한 흔적과 성터가 보였다. 크라스키노 성터였다. 중국 지린성 훈춘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을 통과해 여기까지 오는데 하루가 걸렸다.

크라스키노성은 훈춘시에 있었던 발해 동경용원부(일명 팔련성) 시기 4주 가운데 하나였던 염주(鹽州)의 주부(州府)였다. 여기서 훈춘까지는 동쪽으로 40㎞,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남쪽으로 200㎞ 거리로 아름다운 포시에트 만의 안쪽에 자리하고 있다. 성터에서 동해까지는 400m, 바로 눈앞이다. 억새밭 사이로 어른거리던 바다가 한국에서 말하는 동해이다. 발해 시기 이 곳에서 일본으로 사신이 출발하고 도착하던 곳이며, 무역항이었다. 이 성 안과 성 바깥에서 발해 시대 절터와 주거지 터 등이 수없이 발견되는 점 등으로 미뤄볼 때 이 곳에 사람과 물산으로 넘쳐났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발해사 전공자인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는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 당시 일본으로 왕래하던 일본도의 출발지이며, 발해가 일본에 말과 철, 주석을 수출했는데 이들 물품이 모이는 집산지였다"고 설명했다. '신당서' 발해전의 '동경용원부는 일본도이다(東京龍原府日本道也)'라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성의 총 둘레는 1200m로 연해주 지역에 있는 체르냐치노성 등 여러 개의 발해 성터 가운데 등 규모가 가장 크다.

건국 초기부터 대외 교류를 활발히 했던 발해는 이를 통해 국가의 안정을 다질 수 있었다. 발해는 대외 교류 루트로 소위 일본도,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을 이용했다. 일본도는 크라스키노 성에서 바다를 통해 일본으로 가는 길이며, 신라도는 크라스키노 성에서 육로를 통해 신라로 가는 길이다. 조공도는 압록강변의 서경압록부를 지나 해로로 산동반도에 이르러 당의 도읍인 장안에 나가는 길이며, 영주도는 육로로 당의 동북지방 거점인 영주를 경유해 장안에 도달하는 길이다. 거란도는 부여부를 지나 거란에 이르는 길이다. 이 밖에 '담비의 길'로 불린, 발해 수도에서 시베리아로 통하는 모피 교역로가 있었다.

일본과의 교류는 727년 발해 2대 무왕 대무예가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시작됐다. 발해는 일본에 모두 34차례의 사신을 파견했으며, 일본도 발해에 13차례나 보냈다. 일본에는 발해 사신들이 일본에서 쓴 애향시와 그들이 남긴 글 등 각종 자료가 아직 잘 남아 있다. 이를테면 발해 사신 양태사와 왕효렴이 일본에 가서 지은 시 '밤에 다듬이 소리를 듣고'와 '달을 보고 고향을 생각하며'에 보면 머나먼 이국에서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절이 배어 있다.

방학봉 옌볜대 교수는 그의 저서 '발해 사절단이 왕래한 항로'에서 당시 발해 사신들이 일본을 왕래하는 데 해를 넘겨야 했으며, 도중에 죽는 경우도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예로 727년 첫 발해 사절단 24명 가운데 16명이 피살된 것이라든지, 777년 사행 120명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46명만 생존한 것, 왕효렴이 814년 일본에 사절로 갔다가 이듬해인 815년 5월 귀국길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사망한 기록 등이 있다고 한다.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것 중에 '견고려사(遣高麗使)'라는 글씨가 적힌 목간이 있다. 여기에 보면 758년 발해 사신 양승경 일행과 함께 귀국한 일본의 오노다모리 일행을 2계급 특진시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또 다른 목간에는 '발해사(渤海使)'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일본 헤이조쿄(平城京) 좌대신 나가야오의 저택이 있었던 자리에서 출토된 이 목간은 727년 일본에 온 발해 사신 일행이 평경성에 머무는 동안 만들어진 것으로, '발해사'라고 쓴 것과 함께 '교역'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 '속일본기' 759년 1월 1일조에는 일본이 자신들을 높이기 위해 발해 사신을 '고려번객(高麗蕃客)'이라고 낮추어 기록하기도 했다.

발해는 신라와는 그다지 활발한 교류를 하지 않았다. 신라인들도 발해를 자신들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유민이 세운 국가로 낮춰 보려고 하는 등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해 발해와의 외교에 소극적이었다. 발해와 신라의 공식적인 교류는 대조영이 건국 초기에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과 790년과 812년에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 거란의 위협을 받고 있던 발해가 신라에 원조를 요청한 것이 전부이다. '삼국사기'는 신라도에는 신라 천정군(오늘날의 함경남도 덕원)으로부터 발해의 책성부(길림성 훈춘시)까지 39개의 역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와는 100여 차례가 넘는 교류를 했다. 713년 당이 발해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 도독'으로 책봉했다는 기록 이후,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는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이 '구당서' 등 중국 사서에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이와 같이 발해는 발달된 교통망을 통해 활발한 대외 교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 멸망 후 발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거란의 '요사(遼史)' 돌려불전에 '요 태조는 상경을 함락하고 발해를 멸망시킨 후…'라는 기록이 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의 마지막 도성이었던 상경용천부를 천복성으로 바꾼 후 지금의 요녕성 요양으로 옮기면서 발해 주민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나라를 잃은 발해인들에 대해 문헌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다. 최근 연해주 쪽에서 이뤄지고 있는 한국과 러시아의 공동 발굴 등을 통해서도 발해 멸망 이후 그들의 흔적을 좀처럼 찾을 수 없다.

러시아 극동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부소장인 알렉산드로 이블리예프에 의해 겨우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이블리예프는 지난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서쪽 톨강 인근에서 11세기의 말갈 유적을 조사했다. 그 곳에서 발해의 온돌을 발견했던 이블리예프는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926년 발해가 망한 뒤 거란에 끌려갔던 발해 유민들이 남긴 것으로 몽골 학자들도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의 온돌문화를 계승했다는 발해의 온돌터는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의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됐고, 지난 해 크라스키노 성터에서도 최대 규모의 발해 온돌이 발견되기도 했다. 또 러시아 학자들이 금나라 유적으로 추정하는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강 인근에 위치한 니콜라예브카 성터에서 발해의 기와 등이 발견돼 이 성에 발해인들이 계속 살았다는 해석을 내놓은 정도이다.

기자는 중국 지린성 훈춘시 팔련성을 거쳐 인근에 있는 비우성을 찾았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쌓은 성으로 추정되는 이 성을 볼 때도, 발해가 망한 후 중국과 러시아에서 더 이상 발해인들의 흔적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다. 발해 관련 학자들의 주장대로 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한 이후 그들에 의해 끌려갔거나, 고려로 망명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거란과 금나라 등 발해 뒤에 세워진 나라들에 서서히 동화돼 갔던 것은 아닐까.

# 이블리예프 극동 역사연구소 부소장

- "연해주 유적 발굴성과로 볼때 발해는 중국과 대등관계 유지"

 
"1980년대부터 크라스키노에서 성터 등이 발굴조사됨으로써 연해주의 발해 연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발해의 수도의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와 가까운 이곳에 있었던 성의 규모가 밝혀지고, 성 바깥 유적에서 각종 유물과 유구가 하나하나 조사됨에 따라 일본도와 신라도의 출발지이자 도착지였던 이 곳의 성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블리예프(사진) 러시아 극동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 부소장은 이 같이 설명했다. 그는 특히 이 곳의 사원 바깥 유적에서 온돌이 설비된 주거지들이 서로 시기를 달리하며 연접 축조된 것이 확인됨에 따라 이 지역에 발해인들이 오랜 기간 살았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말했다. 또 우물 안에서 거란의 토기가 발견됨에 따라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이 지역에 짧은 기간이나마 존속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실은 이 지역까지 거란이 직접 지배방식을 취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지역에서 10기 이상의 기와 가마터와 기와로 쌓은 지하창고, 기와로 쌓은 사원의 기단 등도 발굴 조사됨에 따라, 이 지역에 살았거나 일본과 신라에 왕래했던 사절단, 무역상 등 일시 거주했던 발해인들의 생활상과 문화를 파악하는데 좋은 지표가 된다"고 강조했다.

이블리예프 교수는 "아직 크라스키노 등 연해주 지역에서 발해 멸망 이후의 유적이 나오지 않지만 발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일고 있는 동북공정을 의식해서인지 "특히 일본에 보관돼 있는 자료들을 볼 때 발해는 중국과는 독립적이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발해인의 문화와 생활
'쪽구들'에 앉아 '수이자(殊異字)'로 편지 써
남쪽의 신라와 같은 말 쓰고 독자 문자 사용 기와집·초가집에 온돌… 빈부 관계없이 이용

 
  지난 해 8월 한국과 러시아 공동 조사단이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발굴 조사한 발해 최대 규모의 온돌시설. 이곳은 발해 시기 수도 중의 하나였던 동경용원부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 제공

▲발해인의 문화

지난 11월19일 기자는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중요한 유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박물관 2층에 다행히 찾으려는 유물이 전시돼 있었다. 발해 관리로 추정되는 인물 청동상(靑銅像)이었다.

발해는 자체 문헌기록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관리의 모습뿐 아니라 의복에 대해 고증할 자료가 적어 이 유물이 중요한 것이다. 문헌상으로는 '신당서' 발해전에 발해관리들의 등급별(9품 18계) 복식 규정이 기록돼 있는 정도이다. 이 청동상은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인근 마을에서 발견된 것으로 관복을 입고 서류 두루마리 같은 둥근 막대를 든 채 근엄하게 서 있는 모양이다. 러시아 현지 학자들은 크라스키노성에서 일본과 신라로 사신이 왕래했으므로, 당시 파견된 사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돼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청동기마인물상'도 말에 탄 관리의 모습으로 추정돼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의 청동상과 비교할만 하다.

이 청동상에 묘사된 발해의 관리, 즉 사신들은 일본에 사절로 가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특히 814년 발해 대사 신분으로 일본을 방문한 왕효렴은 5편의 한시를 남겼으며, 양태사, 석인정, 석정소, 배정, 배료 등이 지은 시도 일본에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의 시인들은 배정을 '칠보지재(七步之才)', 즉 7보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짓는 재사라고 감찬해 마지 않았다. 배정의 아들 배구도 일본 문단에서 '독보지재(獨步之才)'로 불렸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의 문학 수준이 탁월했다는 것을 알려줄 뿐더러 문학이 양국 문화교류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암시한다.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는 이 청동상 외에 연화문이 양각된 수키와와 암기와가 전시돼 있다. 이는 발해 시기 불교가 중흥했다는 증명으로 볼 수 있다. 발해 시기에 조성된 사찰의 터가 현재 40여 곳에서 발견됐다. 북송의 왕흠약 등이 1013년에 완성한 '책부원구(冊府元龜)'에 보면 '714년에 (대조영)이 왕자를 당나라 수도 장안에 파견하여 불법을 배우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발해 건국 초기부터 불교를 적극 권장한 것으로 해석된다. 불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3대 문왕 대흠무 시기였다. 불교와 관련된 대표적인 발해 유물로는 석등탑, 대석불, 사리함, 돌사자머리, 비석, 귀부, 여러 가지 불상 등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유물이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 흥륭사에 있는 석등탑 및 대석불과 역시 발해진 백묘촌에서 발견된 사리함이다.

그외 발해는 예악과 제사를 관리하는 독립적인 기구인 '태상시(太常寺)'를 둘만큼 음악과 춤 등이 발달했다. '발해국지장편'과 '금사(金史)' '거란국지' 등에 발해의 음악과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발해인의 문자와 언어

 
  위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 박물관에 전시 중인 발해 청동 관리상과 연화문 수키와, 발해 문자인 '수이자'.
최근 국내 학자들 뿐만 아니라 중국 학자들도 발해의 문자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여러 설이 있으나 발해는 공식적인 외교문서와 자료 등에는 한문을 사용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한자 사용의 보충적 수단으로 '수이자(殊異字)'를 만들어 일부 사용했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수이자는 발해의 기와나 벽돌에서 주로 발견된다.

발해문자는 중국의 유명한 발해 연구자인 김육불 선생이 1930년 대에 처음 그 존재를 주장했다. 이후 중국 학자들은 대부분 잘못 새긴 글자라고 고집해 왔다. 발해 문자를 연구하고 있는 대진대 사학과 김재선 교수는 "'이태백전서·옥진총담'에는 '발해국에서 당으로 보낸 서신이 있었는데 온 조정에서 이를 해독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태백은 이를 해독하고 회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며 "이태백이 742년에서 744년까지 한림원공봉이라는 관직에 있을 때의 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발해 말기 일본을 방문한 발해 사신 2명의 이름이 '주부리'(·목현의 수령)와 '마부리'(·석현의 수령)이었는데, 당시 한 관리만이 이 글자를 알고는 '이국(발해)에서 만든 글자라고 하자 발해 사신이 매우 감탄했다'는 기록도 있다.

김재선 교수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견된 발해 '문자기와'는 모두 370개이라며 이 발해문자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고 있다. 첫째 한자의 형태와 일치한 문자로 한자와 형태는 같으나, 한자의 뜻은 없고 음만 빌린 것으로, 이에 해당하는 문자는 135개로 발해문자 전체의 36%를 차지한다. 둘째 한자와 유사한 문자로 전체의 41%에 달하며 총 154개이다. 셋째 두 문자 이상으로 이뤄진 문자로 전체의 17%이며 총 62개다. 넷째 총 12개의 문자로 전체의 3%에 해당하며, 다섯째는 부호문자로 전체의 3%인 11개이다. 정효공주 무덤에서도 문자벽돌 3장이 출토됐다.

'속일본기' 권13에 발해가 남쪽의 신라와 같은 언어를 사용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 왕족이었던 고씨 귀족들이 대거 참여해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것처럼 피지배 주민들도 대다수가 지배층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어를 사용했던 고구려계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더더욱 지배층 일부에서라도 중국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동북아역사재단 윤재운 박사는 설명했다.

▲발해인의 생활

발해의 왕족들은 화려하고 웅장한 기와를 덮은 궁전에서 살았고, 관료귀족들도 기와집에서 살았다. 발해의 중심지구와 남부, 서부의 일반 평민들은 규모가 작고 구조가 간단하기는 하나 역시 실내에 칸을 나눈 지상건물인 초가집에서 살았다. 변경지대와 낙후한 지역의 평민들은 지상건물, 혹은 반움집, 움집에서 생활했다고 중국의 발해 연구자 김태순은 '발해시기의 평민주택을 논함' 주제의 논문에서 밝히고 있다.

발해 시기 발해인들을 구분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빈부에 관계 없이 온돌을 놓고 방을 데웠다는 사실이다. 송기호 서울대 교수는 저서 '한국 고대의 온돌'에서 현재까지 한반도 북부와 연해주 및 만주 동부를 중심으로 확인된 쪽구들 관련 고대 주거지는 모두 92개 유적에 527개이며, 이는 크게 초기 철기시대, 고구려, 발해의 3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온돌의 초기 형태라고 해서 '쪽구들'로 명칭하고 있다. 그는 발해의 주거지는 현재까지 37개 유적에서 185기가 조사됐는데, 쪽구들이 있는 것이 93기, 없는 것이 70기이고, 불명이 22기로 유무가 확인된 163기에서 쪽구들 주거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57.1%라는 통계를 냈다. 송 교수는 "발해 쪽구들은 그 구조에서 ㄱ자형·2고래가 가장 많은 데에 비해 그 이전의 초기 철기시대와 고구려 때에는 ㄱ자형·외고래가 가장 많다"며 "따라서 발해 때에 평면 형태는 변함없이 ㄱ자형이 중심을 이루지만, 고래 숫자에서는 외고래에서 2고래로 진전됐음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방학봉 연변대 교수도 "지금까지의 고고학 자료에 의하면 발해국이 건립되기 전 말갈인 살림집터에서는 부뚜막, 굴뚝, 고래뚝, 조돌 등 시설이 갖추어진 전형적인 구들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한편 발해는 남송 때의 홍호가 쓴 '송막기공' 권상발해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부일처제를 택했다. 발해는 또 농작물로 조 벼 보리 밀 기장 수수 피 콩 들깨 메밀 등을 재배했으며 주식물은 조였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 중경현덕부 관할 하의 한 개 주인 '노성'에서 나오는 벼와 중국 길림성 훈춘시 삼가자향 고성촌인 책성의 된장이 유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요사(遼史)'에는 '발해의 요리사가 쑥떡을 올렸다'고 기록해 발해인들이 쑥떡을 즐겨 먹었으며, 왕효렴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발해 사람들은 술을 빚어 잘 마셨던 것도 생활의 한 단면이다.

# 경성대 한규철 교수 인터뷰

- "온돌은 우리 고유의 문화"

 
"온돌(구들)은 우리나라 특유의 생활문화입니다. 고구려의 온돌을 계승 발전시킨 발해의 온돌 습속을 볼 때도 발해는 중국보다는 우리나라 계열로 분류를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발해의 온돌 습속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1990년 대 초반부터 이 부문에 대해 연구를 해온 한규철(사진) 경성대 교수는 "우리나라 발해 연구자들도 이제 이 부문이 중요하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발해가 남긴 문헌이 하나도 없는 실정에서 발해의 문화를 단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온돌이라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 첫 발해 연구자이기도 한 한 교수는 발해의 문자에 대해서도 "요즘 발해 연구의 또 다른 주제로 떠오르고 있는 발해문자, 즉 '수이자'를 일정 부분 사용한 것으로 본다"며 "이는 신라가 이두문자를 만들어 쓴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발해의 독립적인 문자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그는 또 "우리는 한자문화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며 "지금은 한글을 통해 이런 부분을 많이 극복했지만, 역사 연구자들이 갖고 있는 중국 중심의 사고에서 한 발 물러서 고민할 필요도 있다"고 객관적인 시각을 강조했다. 한 교수는 "당도 인정했던 발해 문화는 어느날 갑자기 솟아오른 것이 아니라, 고구려의 계승은 물론 당과 일본과의 교류 등을 통해서 끊임없이 확대 발전시켜 나갔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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