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내 주변에 있으니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라
유교의 인간관은 ‘관계’에 기초한다. 즉, 오륜(五倫)은 ‘관계적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이며 그 첫째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다.
구글 검색은 유형의 상품이 아니라 추상적인 상품을 생산한다.
‘지식’이라는! (켄 올레타, ‘구글드’)
공자가 바라보는 인간은 서구 근대의 ‘존재론적 인간’이 아니라 ‘관계적 인간’이라 할 만하다. 서구의 인간관이 ‘더 이상 쪼개지지 아니하는 원자’(in-dividual), 즉 개인을 기초로 한다면, 공자의 인간관은 ‘관계’에 기반을 둔다. 말하자면 유교는 ‘관계’의 바탕 위에 지은 집이다. 정약용이 공자사상의 핵심인 인(仁)을 ‘사람과 둘’(+二)로 쪼갠 뒤 ‘두 사람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때 따라붙는 이름’으로 정의했을 때, 그의 심중에는 이미 ‘관계적 인간관’이 전제되어 있었다.
문제는 사람 사이에서 관계 맺기를 제대로 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상대가 바뀜에 따라 ‘나’가 변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들에게 아비가 되었다가 아내를 만나면 남편이 되고 학생 앞에선 교수로 변한다. 맹자는 사람 관계를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오륜(五倫)이다. 첫째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요, 둘째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며, 셋째는 국가와 국민의 관계고 넷째가 형과 아우의 관계이며, 다섯째가 동료 관계다.
여기 다섯 가지 관계망은 제각각 그 코드가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예컨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망(net)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친밀함’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요구된다(父子有親). 즉,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네트)는 ‘유친’이라는 운영체계(OS)를 갖출 때라야만 소통이 가능하다. 또 부부라는 네트에는 ‘유별난 사랑’이라는 OS가(夫婦有別), 군주와 신하 사이의 네트에는 ‘의·불의’라는 OS가 요구된다(君臣有義). 이 네트워킹에 성공하는 사람을 군자라 칭하고, 서투르거나 실패하는 사람은 소인이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논어’, 즉 유교는 네트워크의 체계다.
유교는 네트워크의 체계
그런데 상대방과의 소통에 성공하려면 우선 사람을 제대로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공자는 지식(知)을 ‘사람을 아는 것’(知人)으로 정의한다(논어, 12:22). 사랑하기 위해선 알아야 하고, 알아야만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공자사상의 구조다. 그렇기에 ‘논어’는 그 첫 대목을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즉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 기쁘지 않으랴’라는 학습과 지식의 선언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인간관과 오늘날 인터넷의 관련성을 추출할 수 있다. 인터넷이란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을 이른다.
“오늘날 외교는 ‘공공과 민간의 관계자들로 구성된 국제적 네트워크를 동원해야’하고, CEO들은 ‘수직적 상하관계에서 네트워크 형태의 수평세계로 이동’하는 현상을 절감하고 있으며, 미디어는 점점 ‘거대한 대화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온라인 블로그와 참여적 미디어’로 구성된다. 사회 자체가 네트워크로 묶이면서 마이스페이스의 세상은 ‘아워스페이스(OurSpace)’라는 전 지구적 세상을 형성하며 대륙과 대륙 사이의 수백만 명을 연결해준다.” (켄 올레타, ‘구글드’, 447쪽)
너와 내가 접속하여 우리가 되는 인터넷은, 너와 내가 관계를 맺어 ‘우리’가 되는 유교적 인간 세계와 그 구조가 같다.
인터넷 세계의 두 번째 특징은 지식과 정보의 상호교류에 있다. 과거 위에서 아래로 명령이 내려지고 아래에서는 그 지시에 따르던 상하관계가 횡적 관계로 전환됐다. 지식과 정보의 특성 때문이다. 따라서 지식정보시대의 조직 원리는 기필코 “혁신적이고 유연하고 창조적인 인간의 속성이 발휘될 수 있도록 창의적인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조직이 중앙집권화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수직적 조직을 수평적이고 시장 지향적으로 바꿔야 한다.”(게리 해멀, ‘조선비즈’, 2010. 5. 15일자)
최근 검색엔진 구글(Google)의 급속한 확장, 애플 앱스토어의 번성과 아이폰의 출현은 이런 시대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우리가 알던 세상의 종말’과 함께 지식정보의 시대, 지식경영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즈음이다. 컴퓨터백신 전문가 안철수 교수는 이렇게 진단한다.
지금은 수평적 사고와 융합의 시대인데요. 아이폰이 탈권위주의 시대의 실체화된 증거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이폰은 단순히 단말기가 아니라 플랫폼입니다. 콘텐츠와 이익을 나누는 수평적인 네트워크 모델입니다. 하청업체에게 가장 저렴한 부품을 공급받는 수직적 모델이 아니라 도와줄 수 있는 관계 회사를 누가 더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느냐 하는 일종의 연합군 간 경쟁입니다. 그러려면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관계로 인정해야 해요. 이제 세상을 그런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시사in’, 2010. 6. 5일자, 39쪽)
수직적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지시와 명령이 아닌 협의와 토론으로의 전환이 오늘날 시대변화의 핵심이다. 또 이것은 도요타의 경영 방식, 마른 수건을 더 쥐어짜는-예컨대 30% 경비 절감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시대가 끝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품질과 저가 생산은 함께 달성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 관계임이 드러난 것이 지난번 도요타 사태의 교훈이었다.
덧붙여 지식경영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애플의 주역인 스티브 잡스가 말한 바, ‘애플은 언제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다’(Apple has been always existed between technology and liberal arts)에서 잘 드러난다. 이것은 지식정보가 기술과 인문학의 접점에서 피어난다는 그 기원을 알려준다. 피터 드러커의 지적도 이 대목에 근사하게 겹친다.
경영이란 전통적인 의미의 인문학(liberal art)에 속한다. 경영은 지식, 자기인식, 지혜 그리고 리더십의 원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리버럴(인문)’이며 이 원리를 실천하고 적용한다는 점에서 ‘아트(학문)’이다. 경영자는 심리학·철학·경제학· 역사학·물리학은 물론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대한 지식과 통찰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해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학생을 가르치고, 다리를 건설하고, ‘사용자 친화적인’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판매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 ‘경영학, 개정판’(Management, Revised Edition), 2008)
이를테면 지식경영의 세계는 인문학적 소양을 통해 얻은 지식을 뿌리로 하여 피워내는 꽃송이라고 표현할 수 있으리라. 여기에 인문학의 의의가 있다. 공장제 기업 경영의 시대와는 달리 지식경영과 인문학은 친화적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새로운 지식경영의 시대에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앎’
‘논어’의 첫 장이 배움과 익힘, 곧 학습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논어’의 마지막 장 역시 앎, 지식으로 마감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늘의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라고 이를 수 없고, 예를 몰라서는 올바로 처신할 수 없으며,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는 상대방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孔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논어, 20:3) 곧 배움(學)으로 시작하여 앎(知)으로 끝나는 것이 ‘논어’다. 이처럼 ‘논어’ 속에 오롯한 지식·학문적 면모야말로, 공자사상이 명령과 복종을 특징으로 하는 공장제 산업시대와 불화하고 오늘날 지식정보의 시대와는 친화할 것임을 예감케 하는 근거인 듯싶다.
그러면 공자에게 지식이란 무엇인가. 공자에게 지식이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깨달음, 곧 각성으로 보인다. 그가 개천에 물 흐르는 것을 보며 토로한 장면에서 그런 점이 잘 드러난다.
공자가 개천가에서 물을 보고 말했다. “이렇구나. 흘러가는 것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흐름이여.”(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논어, 9:17)
평소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던 물이 제 스스로 흘러가는 사실 자체가 낯설고 새로운 광경으로 확 덤벼들었다. 공자는 그 순간 개천을 재발견했다. 그저 풍경처럼 존재하던 개천의 물이 어느 순간 자연의 주인공이 되어 불끈 앞으로 돌출하고, 그간 세계의 주인공이던 ‘나’는 물가에 선 손님으로 도리어 쪼그라드는, 뒤집히는 체험을 한 것이다. 우주의 중심이 나(사람)가 아니라 저 흘러가는 물임을, 물속에 자연의 진리가 흐르고 있음을 공자는 문득 깨닫고 토로한다. “흘러가는 것이 저럴진저. 밤낮을 가리지 않음이여….”
그렇다면 공자에게 지식이란 눈(안목)의 확장, 또는 심화를 뜻한다. 한편 지식경영이란 일상과 주변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과정이며, 또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법을 의미한다. 핵심은 일상과 주변, 즉 심드렁하게 보아 넘기는 평상을 ‘비상’하게 바라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길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원로 광고인 이강우의 언급은 참고할 만하다.
좋은 광고는 슬쩍 보기만 해도 무슨 뜻인지 곧 이해가 되면서도 아, 나는 왜 저런 생각을 하지 못했지 하는 놀라움을 안겨준다.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다. 보고 나면 쉽다. 그러나 막상 그런 것을 찾아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르키메데스의 목욕탕이 그랬고, 뉴턴의 사과도 그랬다. 그런 점에서 크리에이티브란 내 생각을 얼마나 잘 표현하느냐에 앞서서 내 주변에 있는 사물과 현상을 얼마나 잘 보느냐에 달린 것이 아닌가 싶다. 그것(좋은 광고소재)들은 언제나 내 눈앞에서 존재하고 있었건만 나는 그것들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수많은 낮과 밤을 생각 속에서만 헤매고 있었다. (이강우, ‘대한민국 광고에는 신제품이 없다.’ 살림, 45쪽)
내 눈 앞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알지 못하던 것을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지식의 출발점이다. 공자가 제자 자로에게 “자로야. 네게 앎을 가르쳐주련? 아는 것은 안다고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아는 것이 앎이니라.”(子曰, “由! 誨女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논어, 2:17)라던 귀띔은 배움의 시작을 퉁겨주는 대목이다.
매일매일 출퇴근길에 지나치면서도 몰랐던 새로 생긴 건물을 문득 발견하는 눈길에서부터, 즉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상한 느낌을 갖는 순간부터 호기심은 피어나고 그 호기심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앎(배움)의 길로 나서게 된다. 요컨대 낯익은 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안목, 여기서 지식이 탄생한다.
상호적 지식경영자의 면모
공자는 자신을 ‘덩어리 지식’을 일방적으로 풀어먹이는 교사가 아니라, 주어진 문제를 질문자(제자)와 함께 연구하고 해결해나가는 지식경영자로 여겼다.
공자 말씀하시다. “나는 나면서부터 안 사람이 아니다. 다만 옛사람들의 말을 좋아하여 그 말뜻을 민감하게 구하려는 사람일 따름이다.”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논어, 7:20)
당시 제자들 중에는 공자를 천재나 성인으로 추앙하는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이 있기 전부터 머릿속에 저장된 ‘지식 덩어리’ 곧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니라, ‘지금 여기’ 현장에서 질문을 기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와중에 앎과 지식이 이뤄지는 것임을 민이구지(敏以求之)라는 말로 드러내었다. 이 넉 자 가운데서도 민감함(敏)이야말로 지식경영의 핵심이다. 즉 ‘민’ 자는 공자의 솔깃한 배움에의 자세, 열린 마음가짐 등을 명징하게 표상한다.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내리는 교육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더불어 앎을 추구하고 문제를 풀어가는 ‘상호적 지식경영자’로서 공자의 면모는 다음 술회에서 더욱 환하게 드러난다.
공자 말씀하시다. “내게 아는 것이 있더냐? 나는 따로 아는 것이 없다. 어떤 천한 사람이 내게 질문하더라도 나는 텅텅 비었을 뿐. 다만 그의 질문을 두고 이모저모를 헤아려 이치를 다할(竭) 따름인 것!”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논어, 9:8)
일본의 논어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 대목에 대해 “아마 공자가 단순히 박식한 사람으로 알려져 지혜를 빌리러 찾아오는 것에 반발하여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학문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해설했다(미야자키 이치사다, ‘논어’, 이산, 134~135쪽). 정녕 교학상장하는 공자의 열린 자세, 지식경영자로서의 면모가 이보다 잘 드러난 대목이 따로 있을 것 같지 않다.
한편 위의 인용문에서 핵심적인 단어는 갈언(竭焉), 곧 ‘사려를 다함’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위에서 공자 학술의 특징을 술회하면서 ‘생이지지’가 아닌 ‘민이구지’였다고 했을 때, 민(敏)자에 방점이 찍힌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오롯이 힘을 다함’(do best)을 뜻하는 ‘갈’자에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공자 스스로 스승으로 자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다만 ‘배움에 급급한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은 겸양이 아니라 내력이 있는 객관적 진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열 가구로 이뤄진 조그만 마을에조차 나만큼 성실하고 또 신용 있는 사람이야 있겠지만 호학(好學), 곧 나만큼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논어, 5:28)는 술회가 그러하다.
여기 ‘호학’이라는 말은 남보다 열심히 공부한다는 따위의 자기 자랑이 아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 스스로 분노하고, 새로운 앎에 대해 갈증을 느끼는 일종의 결핍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공자는 호학, 곧 ‘배움에의 목마름’을 따로 이렇게 술회하기도 하였다.
섭공(葉公)이 자로에게 스승의 사람됨을 물었는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이를 듣고 공자는 말했다. “이렇게 말하지 그랬더냐. ‘그 사람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분해서 밥 먹는 걸 잊어버리고, 알고 나면 즐거워 근심걱정을 잊어버리는데, 급기야 장차 늙음이 닥치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사람’이라고.” (葉公問孔子於子路, 子路不對. 子曰, “女奚不曰, 其爲人也,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논어, 7:19)
죽는 순간까지 배움에 급급한 존재, 이것이 공자일 뿐이다. 모르는 걸 배우려는 열망으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發憤忘食), 배우고 나면 배운 그것이 기뻐 근심걱정을 잊어버리는(樂以忘憂) 사람, 나아가 배움에 몰두하여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공자였다. 실은 배우는 순간만이 삶이요, 배우는 존재만이 인간으로 여긴 사람이 공자일 따름이었다. 이런 지적이 과장이 아닌 것은 그가 음악을 배우던 때를 회상한 대목에서 요연하다.
공자가 제나라에서 고전음악 소(韶:순임금 음악)를 처음 들었다. 음악을 배우는 석 달 동안 고기를 먹어도 고기 맛을 몰랐다. 다 배우고 난 다음 토로하기를 “음악이 이런 경지에 이를 줄을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子在齊聞韶, 三月不知肉味, 曰, “不圖爲樂之至於斯也.” 논어, 7:14)
새로운 지식이나 이해하지 못할 사태 앞에 그것을 알려고 드는 오롯한 마음, 이것이 공자의 공자다움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호·학’ 가운데 ‘학’도 중요하지만 실은 ‘호’, 좋아함이야말로 지식경영의 핵심성분이다. ‘호’에는 상대방(지식)에 대한 솔깃한 마음과 수용하려는 적극적 자세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호학의 속살을 더 깊이 세분하면, 열린 마음과 경청하는 자세, 그리고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 그 구성성분이다.
구글의 박문약례
확장하자면 공자에게 호학하는 존재, 즉 배우고 또 익히는 사람만이 인간이다. 외부의 지식, 알지 못하는 대상을 학(學)하여 배우고, 그것을 몸소 익혀서(習) 내 것으로 소화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충일한 기쁨(悅)을 느끼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 이렇게 읽자면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라는 대목은 공자의 ‘인간 선언’이 된다. 배워서 익힘에 기쁨을 얻는 존재만이 인간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짐승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공자의 학교가 어찌 만만할 수 있으랴. 공자학교는 스승이 일방적으로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은 그것을 받아 적는, 말하자면 초등학교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공자학교의 커리큘럼이 시(詩)와 서(書) 그리고 예(禮)를 실행하는 것(논어, 7:18)이라고 전해오긴 하지만, 그것은 교육의 수단이었을 뿐 ‘시경’을 외우고 ‘서경’을 읽으며 ‘예’를 따라 모방하는 실습과정이 교육의 목표는 아니었다.
공자의 지식경영의 목표는 안목(눈)을 틔우는 것이었으리라. 이를테면 ‘민이구지’의 민(敏)이 표상하는 민감성(sensitivity), 무지한 사람의 질문에 대해서도 견지했던 양단이갈언(兩端而竭焉) 속의 갈언의 자세, 그리고 공자가 자처한 단 한마디 호학의 ‘호’에 담긴 열린 마음(open mind)으로 세상살이와 사람됨의 의미를 각성하는 것! 이것이 공자 지식경영의 정체였다. 사물과 사건에 대한 ‘민감성’, 사람과 사안을 대할 때 최선을 다함(do best), 그리고 ‘열린 마음’이 공자 제자들이 학습해야 할 참된 지식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지식경영론과 관련하여 다음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널리 글(文)을 배우고서 이를 예(禮)로 요약할 수 있다면, 또한 어긋나지는 않을 터! (子曰 博學於文, 約之以禮, 亦可以弗畔矣夫! 논어, 6:25)
이 문장은 요약하여 박문약례(博文約禮)라는 구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 ‘문’은 정보(information)로 해석할 수 있다. 지식은 기본적으로 정보로 구성된다. 이에 박문약례는 ‘정보를 널리 수집하되, 그것을 가치에 따라 잘 요약해야 한다’로 해석된다.
‘박문’은 풍부한 정보를 널리 획득하는 것을 이른다. 정보는 풍부하면 할수록 좋다. 그러나 산더미처럼 쌓인 정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고, 또 정리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더욱이 정보만으로는 실제에 응용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요약·정리되어 가치 있는 지식으로 조직되어야 한다. 그것이 ‘약례’다. 이렇게 읽자면 박문약례는 공자 지식경영의 원칙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최근 정보검색 엔진의 대명사가 된 ‘구글’의 특성은 박문약례의 실증 사례로 보인다. 구글의 창립자 페이지와 브린은 대학생 시절 야후나 알타비스타와 같은 기존 검색엔진이 비효율적이어서 사용자가 제대로 된 정보를 얻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고 생각했다. 가령 “알타비스타에서 ‘대학’을 검색하면 ‘대학’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텍스트를 수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실제로 그 링크를 사용하는지 평가하거나 가치의 순위를 매기지는 않았다. 동일한 검색에서 구글은 사용자들의 ‘집단지성’에 의지하여 상위 10개 대학을 보여준다.” (‘구글드’, 71쪽)
‘논어’ 식으로 해석하면 알타비스타는 ‘박문’하였고, 구글은 ‘약례’하였다. 약례, 곧 정보의 양이 아니라 질(가치 배열)을 통해 새로운 길을 개척한 데서 구글의 힘이 생겼다. 알타비스타가 박문에 치중하였다면, 아니 정보의 가치 판단을 수용자에게 맡겼다면 구글은 수용자의 입장에서 가치 결정에 개입했다. 여기서 핵심은 집단지성에 의거한 합리적인 선택 과정과 수용자 입장에 서는 자세에 있다. 이는 구글이 마이크로소프트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지향했음을 뜻한다고 평가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방식은 이런 식이다. ‘당신들은 내 방식에 따라야 한다.’ 그 반대는 이런 것이다. ‘아니, 난 만들기만 할 테니까 당신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아. 난 그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도와줄 거야.’ 이것이 유닉스 철학이다. (그리고 구글이 이것을 해냈다.) (‘구글드’, 76쪽)
양적으로만 쌓아놓은 정보더미는 별 의미가 없다. 갈무리되어 지식으로 전환될 때 가치를 지닌다. 한 걸음 나아가서 공급자가 정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 스스로 정보를 ‘구성’하는 체계를 구글이 이뤄냈다는 것. 곧 지식경영은 정보를 지식으로 전환할 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정보의 가치를 선별하고 구성하는 시스템(마당)을 마련해줄 수 있어야 한다.
지식경영과 도덕주의
전세계 인터넷 참여자들이 선의로 제공하는 지식을 바탕으로 ‘구성’된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검색하다보면 인간이란 맹자가 말한 대로 성선설에 기초한 존재, 즉 ‘선의의 동물’임을 절감하게 된다. ‘사람의 사이’(人·間)가 사람 본연의 측은지심으로 평화를 이뤄낸다면, ‘지식의 사이’ 곧 인터·넷 세상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개개인의 자발성으로 구성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이런 점에서 사이(間)는 도덕주의적 특성을 본질적으로 내장한 듯하다.
인터넷의 도덕주의적 형태는 웹이 개방되어야 한다고 믿는 오픈소스 운동이나 ‘군중의 지혜’를 신뢰하는 비영리모델 위키피디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또 빌 게이츠가 시장의 힘으로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는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를 제시한 것도 지식사회의 특성인 도덕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식경영의 리더십도 이런 도덕주의적 구조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경영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지시를 내리는 지배적 리더십, 또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가치가 상실될 수밖에 없다. 구글의 CEO 슈미트의 면모는 지식경영 리더십을 관찰하는 좋은 창구다.
슈미트는 구글에 CEO로 초빙되자마자 창립자이자 엔지니어인 페이지와 브린이 기술과 상품에 집중하고 싶어한다는 사실과, 일을 방해하는 관료주의를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두 창립자와 엔지니어들에게 훌륭한 관리자란 엔지니어를 자유롭게 해주고 관료주의를 혁파하며 자원을 효과적으로 분배하고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재무시스템을 제공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기로 했다.”(‘구글드’, 124쪽)
슈미트는 구글의 윤활유, “그가 스스로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포수(캐처)가 되었다. ‘저는 구글의 문제를 다 잡아내죠.’ 그는 결정해야 할 일을 촉진하고, 경영시스템을 만들고, 재정분석가나 기자와 만나고, 산업과 정부를 구글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한다. 두 창립자에게 이런 것은 혐오스러운 업무였으나, 구글로서는 점점 중요해지는 일이기도 했다.”(‘구글드’, 126~127쪽)
구글의 성공 원인을 찾는 데 치우쳐 경영자로서 슈미트의 긍정적인 측면에 치중한 감이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묘사는 지식경영자가 실천해야 할 업무의 특성과 접근 자세를 잘 보여준다. 요컨대 업무상 장애요건들을 배제하고 업무의 동선을 단순화하며, 내부소통을 가능하게 만들고 내외의 요구를 연결해주는 작업, 이것이 지식경영자의 업무라는 것. 지식경영사회를 일찌감치 예측한 피터 드러커는 정보기반 조직의 리더십에 대해 이런 조언을 남긴 바 있다.
정보기반 조직은 전문가들로 구성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들에게 업무 처리 방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금물이다. 가령 지휘자가 프렌치 호른 연주자에게 호른 연주 기법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지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프렌치 호른 연주자의 기량과 지식이 전체 연주의 틀에 맞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정보기반 조직의 리더는 이처럼 모든 조직원의 역량이 어느 하나의 초점에 집중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피터 드러커, “정보기반 조직의 운영시스템”, 노나카 이쿠지로(외), ‘지식경영’, 21세기북스, 29쪽)
지식경영의 리더십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꼭 닮았다. 뿐만 아니라 지식경영자는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면서 자신을 혁신해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남에게 지식과 학습, 혁신과 창의를 요구하는 리더가 아닌, 스스로가 학습과 혁신, 지식 습득을 실천하는 것이 지식경영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구글의 창업자들 모두 엔지니어이면서 또 끊임없이 배우고 학습하며 토론하는 리더임은 그 좋은 예다. 이런 대목에서 공자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지식경영자들에게 지침이 될 수 있으리라.
“남이 나를 알아주길 바라지 말고, 도리어 내 주변에 스승이 있음을 알지 못함을 근심하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논어, 1:16)
“세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잘하는 사람에게선 그렇기를 배우고, 못하는 사람에게선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우라.”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논어, 7:22)
공자가 구글을 만난다면…
그렇지만 공자는 오늘날 공공성을 잃고 오로지 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식 활용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적일 것 같다. “이익에만 매몰된 사업을 경영하면 사람들의 많은 원망을 사리라”(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논어, 4:12)는 성난 목소리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이 대목에서 근래 기업인들이 대학에 와서 ‘기업적 인간을 만들어라’고 요구하는 데 대해 동물행동학자 최재천 교수가 한 비판은 인용할 만하다.
제가 모 대기업 CEO와 한바탕 다툰 적이 있습니다. 기업 CEO들이 요즘 최고의 강사잖아요. 언젠가부터 그분들이 대학에 와서 하는 말씀이 요즘 대학교육 틀려먹었다, 요즘 대학 졸업생들 데려다 써먹을 게 없다, 대충 이런 것들이에요.
제가 그런 얘기를 듣다 발끈했어요. 그래서 제가 손을 들고 나랑 약속을 하나 해달라, 당신 기업에서 우리 학생 뽑아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완벽하게 책임지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어달라, 그러면 내가 총장님한테 우리 대학을 당신 기업의 직업훈련소로 만들자고 적극 추천하겠다, 그럼 대학도 살고 기업도 사는 것 아니냐? (도정일 외, ‘글쓰기의 최소원칙’, 룩스문디, 116쪽)
아마 춘추시대의 공자도 이른바 ‘쩐의 전쟁’ 시대로 불리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기업 경영자들을 만난다면 이와 비슷한 비판을 할 것으로 보인다.
공자는 지식경영자들에게 사사로운 이익 추구를 넘어서, 남과 더불어 지식을 공유하는 세계, 곧 ‘지혜로운 지식’으로 진보하기를 권할 것이다. 이를테면 구글을 창립하면서 가졌던 초심, “인터넷이 사람들을 해방시켜줄 민주주의 정신을 고무시킬 것이라는 믿음, 또 직원들에게 20%의 자유시간을 주는 것은 관리자들을 ‘대화의 장으로 끌어냄으로써’ 관료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구글드’, 194쪽)라던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이길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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