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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믿음은 지극한 아름다움을 낳습니다. 산을 은빛 바다로 볼 줄 알았던 이 시적 상상력의 주인들은, 실제로 절의 진입로를 은빛 출렁이는 송림(松林)으로 가꾸어 놓았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741년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하니 숲의 나이는 264살이 되는 셈입니다. 일주문에서 계곡을 따라 곧고 굽은 노송들이 조화를 이루며 보화루 앞 해탈교까지 이어지는 그 길을 나는 주저 없이 ‘내 마음 속 아름다운 길’의 목록에 올립니다.
은해사는 본디 해안사(海眼寺)란 이름으로 신라 41대 헌덕왕 원년(891)에 창건되었습니다. 헌덕왕은 조카인 40대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올랐는데, 그에 대한 참회와 당시에 숨진 원혼을 달래고자 혜철 국사로 하여금 해안사를 창건케 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습니다. 절터도 지금의 자리가 아니고 운부암 옆의 해안평이었습니다.
현재의 은해사는 조선 인종 원년(1545)에 일어난 화재로 해안사가 불 탄 뒤 지금의 자리로 옮겨 새로이 지은 것입니다. 인종의 태실(胎室)을 돌보는 사찰이었으므로 불 탄 이듬해 천교 스님이 나라의 보조금으로 중창을 하고는 이름도 은해사로 고쳤다 합니다.
‘사람 기르는 일’을 최대의 불사로 삼고 있는 절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절의 역사도 그곳에 머문 사람으로 하여 빛을 머금습니다. 고려 시대에는 보조국사 지눌(普照 知訥·1158~1210) 스님이 산내 암자인 거조암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도모하면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원종 11년(1270)에 홍진국사 혜영(弘眞 惠永) 스님이 머문 뒤부터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본산으로 사격이 한층 고양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대화엄 강백인 영파 성규(影波 聖奎·1728~1812) 스님이 주석하여 화엄교학의 본산으로 이름을 빛냈습니다.▲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 전경.
그러나 현재는 조계종 교구 본사 중 가장 가난한 절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빛났던 과거는 역사의 갈피에 묻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정신만큼은 끊어지지 않아서 2002년부터 재가자 교육기관인 불교대학을 설립하여 현재 1,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할 정도로 ‘사람 기르는 일’을 최대의 불사로 삼고 있는 절이 은해사입니다.
세상을 망치는 것도 사람이지만 세상을 살리는 일 역시 사람의 몫입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절은 ‘사람의 학교’, ‘남을 위한 기도의 집’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절 또한 좀 순화된 형태로 욕망을 추구하는 곳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은해사가 자리한 팔공산(1,193m)은 낙동정맥이 남하하다가 대구쪽으로 뻗힌 가지줄기에 맺혀서 금호강을 풀어놓는 대구의 진산입니다. 신라 오악 중 중악으로 대구시뿐만 아니라 경산시와 영천시, 군위군, 칠곡군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은 본디 공산(公山), 혹은 부악(父岳)이라고 불렸습니다. 삼국유사는 물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산경표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동국여지전도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나오면서 비로소 팔공산이라는 이름이 보이는데 그 내력이 분분합니다. 양산 천성산에서 1,000명의 제자를 이끌고 수도하던 원효 스님이 8명의 제자만 데리고 팔공산으로 옮겨 살았는데 이들이 득도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나, 후세에 만들어진 얘기라는 의견이 정설입니다. 다른 전승으로는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했는데, 이 때 신숭겸 등 8장수가 전사하여 비롯된 이름이라고 하나 이 또한 어느 역사서에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허구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은해사 대웅전 뒤 한가로운 대나무 숲길.
이밖에도 여덟 고을에 걸쳐 있어서, 혹은 여덟 봉우리가 우뚝해 보여서 라는 견해도 있지만, 신뢰지수는 낮아 보입니다. 산자락이 워낙 넓다 보니 이런저런 인간사가 끼어들면서 만들어진 얘기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팔공산 동쪽 기슭, 행정구역 상으로 영천의 대표 사찰인 은해사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이지만 부속암자가 더 널리 알려진 절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보폭을 넓혀 부속암자를 두루 살피지 않은 은해사 탐방은 겉핥기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로 은해사가 보유한 1개의 국보와 3개의 보물 중 괘불탱(보물 제1270호)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내 암자에 흩어져 있습니다.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 백흥암의 극락전(보물 제790호)과 수미단(보물 제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물 제514호)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중 백흥암은 현재 비구니 선방으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습니다. 이밖에 이름의 뜻이 ‘몸은 사바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세계에 머문다(身寄娑婆 心寄極樂)’는 기기암(寄寄庵), 항상 상서로운 구름이 머물러 있다는 운부암(雲浮庵), 일명 ‘돌구멍 절’이라고 하며 김유신이 수도하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하는 중암암(中巖庵) 등을 찾으면 운부암골이나 기기암골의 절경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사실은 모든 산내 암자의 창건 연대가 본사보다 앞선다는 점입니다.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들머리의 솔숲이 그러하듯 변죽이 아름다워 몸통이 빛나는 절이 바로 은해사입니다.
한편 은혜사는 추사 김정희의 묵적(墨跡)으로도 유명한 절입니다. 1862년 지조 스님이 지은 은혜사중건기에 ‘大雄殿, 寶華樓, 佛光 세 편액은 모두 추사 김정희의 묵묘(墨妙)’라고 했고, 1879년 당시 영천군수 이학래가 쓴 은해사연혁변에는 ‘문의 편액인 銀海寺, 불당의 大雄殿, 종각의 寶華樓가 모두 추사의 글씨이며 노전의 一爐香閣이란 글씨 또한 추사의 예서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독특한 구조미로 건축가들 사랑 듬뿍 받는 거조암 영산전
은해사의 암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오백나한 절’로 유명한 거조암입니다. 거조암을 바라보는 관심의 초점은 크게 둘로 나눠질 듯합니다. 첫째, 영산전(국보 제14호)에 대한 건축적 관심일 것입니다. 얼핏 보면 경판고처럼 보이는, 일체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이 건물은 건축 양식으로 봤을 때 고려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시기의 건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이 유명한데, 거조암 영산전은 이에 비해 덜 알려졌으나 독특한 구조미로 건축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건물입니다.▲ 은해사 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본 모습. 늙은 향나무의 푸르름이 겨울에도 늠름하다
최순우 선생은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을 말하면서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라고 한 바 있는데, 영산전이야말로 ‘필요미’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이를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김봉렬 교수는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거조암 영산전은 보는 이의 시선은 아랑곳 않은 듯한 외관과 마찬가지로 내부 또한 모든 부재를 노출시킨 장쾌한 단순미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각기 다른 표정의 석조 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흔히 500라한으로 일컬어지지만 정확히는 석가모니부처의 10대 제자와 16라한을 합한 526위의 나한입니다. 사실 나의 관심은 건물보다는 나한, 좀더 좁혀 말하면 나한의 표정에 있습니다. 그 표정 속에는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시비곡직’이 다 들어 있습니다. 다 알다시피 영산전은 영산회상(靈山會上),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던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그때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이 곧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아라한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한전이나 응진전에 모셔지는 나한상은 혹독한 수행 이력을 상징하는 듯 다소 기괴한 표정을 한 노비구(老比丘)의 모습인 것이 상례입니다.▲ 은해사 수련원장(혜해) 스님과 다담을 나누며.
하지만 거조암 영산전의 나한상은 하나 같이 파격적일 만큼 해학적이고, 익살맞고, 천진스럽습니다. 마치 어떤 경우에도 야단치지 않는 선생님과 제멋대로 딴전을 피우는 아이들로 가득한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을 보는 기분입니다. 그 속에서 나는 마냥 편안했습니다.
깨달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선사는 ‘세수하다 코 만지기 같은 것’이라 했고, 또 어떤 선사는 ‘평상심(平常心)’이 그것이라 했습니다. 결국 이런 표현은 다 “모든 중생들엔 다 불성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 열반경)’는 부처의 가르침으로 수렴됩니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긍정, 이미 우리는 다 부처인데 미혹에 가려 그것을 발현하지 못할 뿐이라는 부처의 간곡한 말씀을 거조암 영산전에서 듣습니다. 소승적 깨달음의 상징인 아라한의 얼굴에서,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적 자기 구원의 미소를 봅니다. 거조암 영산전의 나한님이 말합니다. ‘어떤 순간에도 너 자신과 너의 이웃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소곤소곤 말합니다.은해사에서 숙식
은해사 일주문 앞에는 식당은 물론 여관과 민박집이 즐비하다. 상당한 규모의 상가이지만 전혀 개발되지 않아 마치 70년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면서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빼놓지 않는 메뉴는 손칼국수인데, 콩가루를 듬뿍 넣은 경상도식이어서 담백하면서도 구수하다. 그밖에 산채요리와 더덕구이, 닭요리가 주 메뉴인데 가격은 관광지치고는 싸고 양도 푸짐하다.
영일식당(054-355-1057)이 여관을 겸하고 있고, 경산식당(054-335-1667)과 영천식당(054-335-6905)이 민박집을 겸하고 있다.'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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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은해사
은빛 솔숲 지나, 이웃의 얼굴을 한 부처님 만나는 절
지금 산하는‘묵언정진(默言精進)’ 중입니다. 침묵 의 계절입니다. 천공으로 구름이 한가롭고, 빈 숲을 지나는 바람은 먼 바다 소리를 실어 나르고 있습니다. 소리가 지나간 자리에는 빛이 고입니다. 숲은, 은빛으로 출렁거립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숲속에 세워진 절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은해사(銀海寺)-. ‘은빛 바다 속 절’이라는 말이겠습니다. 은해사가 터 잡고 앉은 팔공산을 극락정토로 여긴 데서 연유한 이름입니다. 극락의 주재자인 아미타 부처의 광휘를 은빛으로 물결치는 바다에 빗댄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