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07

醉月 2011. 1. 2. 12:31

영혼은 핸드폰을 싫어한다

구명시식은, 죽은자의 영혼을 불러 산자와 만나게 하는 의식으로 고도의 영능력을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비행기를 운전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땅과 하늘을 오가는 비행기의 운항에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듯, 구명시식 또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데 있어서 고도의 영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비행기가 이착륙할때면 어김없이 ‘핸드폰이나 호출기, CD 플레이어 등 전자제품은 반드시 꺼주시기 바랍니다’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이는 비행기 이착륙시 전자제품에서 나오는 전자파로 인한 불의의 사고를 막고자 함이다. 사실, 몇 달전 비행기 안에서 승객이 핸드폰을 사용하는 바람에 큰 사고가 발생할 뻔 했다지 않은가. 나 역시 구명시식 중 핸드폰 때문에 죽을 뻔한 사고가 있었다.
올 2월이었다. 바짝 긴장하며 저승에서 망자의 여혼을 불러오기 위해 저승에 있는 영혼과 이래저래 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 그 경쾌한 도라지타령이 들리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저승까지 내 영혼이 휘말려 들어감을 느꼈던 것이다.
겨우, 정신을 차려보니, 다행히 구명시식을 올리던 그 자리였고 주위 사람들이 걱정스런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휴우-’하는 한숨도 잠깐, 그 핸드폰 주인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초혼을 하는 최고 난이도의 영능력을 진행시키는 자리에서 어떻게 핸드폰을 켜논 상태로 방치했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면, ‘벨소리만 안 들리게 하면 안 되나요?’하고 되묻는 분도 계시지만, 전자파가 방출되긴 벨이나 진동이나 매 한가지라 하겠다.
특히 영계에 계신 영혼들은 핸드폰을 무척이나 싫어하시는 바람에, 초혼 의식 중 핸드폰 소리가 들리자 어찌나 역정을 내시는지, 급기야 내 목숨까지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나는 핸드폰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고, 어디서든 어느 자리에서든 핸드폰 소리만 들리면 자연 그때 일이 생각나 불쾌해지고 말았다.
핸드폰뿐만이 아니다. 영혼은 전자파에 해당되는 모든 것을 싫어한다. 이는 작년 <다큐멘터리 이야기 속으로>에서 차마 나올 수 없었던 화면을 보면 그 사실이 증명된다. 그 방송에서는 내가 집전하는 구명시식을 방영할 예정이었는데, 문제의 장면 때문에 구명시식 장면전체가 삭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문제의 장면이란, 바로 적외선 카메라로 구명시식 현장을 촬영한 장면으로, 적외선 카메라로 구명시식을 찍던 중 갑자기 어떤 곳에서 화면이 하얗게 나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다 또 다른 곳에서는 제대로 화면이 잡히는데, 또 어떤 곳에서는 화면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깜빡깜빡’하며 적외선 카메라로 찍은 화면이 나왔다 안 나왔다 하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촬영팀은 시청자에게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사실을 방영할 수 없다며 화면을 삭제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문제의 장면은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적외선 카메라라 함은 기본적으로 물체의 ‘열’을 촬영하는 것인데, 영혼은 아주 당연하게도 ‘열’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화면이 깜빡깜빡 할 수 밖에. 이와 비슷한 예로, 어떤 분이 아버지 장례식 때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들여다보니 아버지 영정이 사진에 하얗게 나왔다는 것이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은 아주 예민하다. 우리는 전자파의 해악을 느끼지 못하지만, 영혼은 이미 전자파를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영혼도 싫어하는 핸드폰 공해! 이제, 우리도 이 핸드폰 공해에서의 그린벨트를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나는 시도때도 없이 터지는 핸드폰만 보면 겁이 난다.

미래를 예언한다

1996년 8월 9일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지 38주기가 되는 날로, 신기하게도 38년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날도 양력 8월 9일, 음력 6월 24일이었는데, 그 날도 양력 8월 9일, 음력 6월 24일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절대 평범치 않은 날에 올리게 된 추모제에서, 아버님께선 여느 때와는 분명 다른, 미래를 예언하는 말씀들을 내게 전해 주셨다. 그 예언의 정체는 네 곳에서 불게 될 바람(!)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었다. 그 네곳에서 불어오게 될 큰 바람들… 지금은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한바탕 휩쓸고 난 뒤이기에, 그 바람의 정체들을 공개할 수 있었지만, 당시 나에겐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어서 벙어리 냉가슴으로 시종 초조하게 진행되는 국정을 잠자코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를 초조하게 했던 아버님의 말씀을 오늘에야 속시원히 여러분께 털어놓겠다.
그 예언의 첫 번째는, 서풍이었다. “11월에는 서해안에서 큰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 바람으로 국가 기강이 크게 흔들리게 될 터, 절대로 제2 금융권의 돈은 쓰면 안된다”는 말씀이었다.
당시 나는 서풍이 도대체 뭐길래, 제2금융권의 돈을 쓰지 말라고 하셨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 말씀은 서해안쪽에 위치한 기업에서 큰 사건이 벌어져 경제적 파장이 금리인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11월이 되자, 한국은 서풍(西風)의 피해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서풍의 정체는 바로 ‘한보사태’였던 것이다. 한보철강의 위치는 모두 아시겠지만, 강화도가 아니던가. 이 서풍의 피해로 인해 제2금융권의 돈줄은 꽉 조여지기 시작했고, 시중의 금리 또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말씀은, “북쪽에서도 거센 바람이 불겠구나, 이 바람은 북쪽에서 건너올 사람 때문에 일어난 바람이다”였다. 이 북풍의 정체는 바로 황장엽의 망명사건이었다. 황장엽씨가 몰로 온 북풍 때문에 정국은 ‘황장엽 리스트’ ‘북풍사건’으로 혼미를 거듭했고, 이 사태를 미리 예견했던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 번째, 바람은 중풍(中風)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 죽으면서 바람을 일으킬 게야. 그것이 중풍이다.” 처음에는 중(中)이 충청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바람을 일으킬 만큼 큰 인물이 있겠냔 말이다. 생각해 보니, 한 시대를 호령한 인물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중국의 등소평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위태스러웠지만, 그럴 때마다 건강하게 나타나곤 했던 등소평의 거동 때문에 ‘혹시나’했지만 역시나 아버님의 말씀이 맞았다. 머지 않아, 등소평의 사망 소식으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온 세계가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 바람은 동풍(東風). 동풍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을 것이다. 바로 ‘북한 무장공비의 동해안 침투사건’이다. 이를 미리 말씀해 주신 아버님께서는 ‘동풍의 영향으로 온 국민이 불안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고 말씀하셔서, 이 동풍의 정체를 북한의 무장공비임을 직감했다.
YS 집권 후부터 아버님께서는 많은 예언을 하기 시작하셨다. 그때 남기신 예언들은 2004년까지 계속되지만, 여기서 모든 예언들을 한꺼번에 풀어놓을 수는 없는 일. 분명한 것은 앞으로
우리나라는 매우 ‘희망적’이라는 것이며, 또 하나 ‘통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문화공동체를 지향하는 일관된 정책으로 갈라진 민족의 ‘문화’부터 통일시키는 것이 포인트라 하겠다.

벼락 조심하세요

요즘 우리나라에는 시원스런 ‘나이스샷!’ 소식이 연일 스포츠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US LPGA 투어중인 여자골퍼들이 매 투어때마다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어 새삼 한국인의 긍지를 높여주고 있음은 물론, 지난 8월 5일에 일본 군마현 후지 CC에서 치러진 일본 프로테스트에는 박현순, 조정연 선수가 테스트에 합격, 연말에 벌어지는 시드 배정전을 통해 내년부터 본격적인 JLPGA 사냥에 나선다고 한다. 골프팬인 나에겐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다.
이렇듯 골프를 좋아하다 보니, 생활에 지쳐 힘들 때나 나름대로 스트레스가 쌓여 답답할 때면 아끼던 골프채를 챙겨 너른 필드를 찾는 것이 지금 나의 삶의 유일한 낙이 되었다. 골프를 시작한 지는 얼마 안되지만, 처음부터 욕심내지 않고 매너를 기본으로 한 정공법을 익힌 탓에 지금은 ‘잘’친다는 과찬까지 듣게 된 정도.
얼마전 일이다. 몇주 동안의 스트레스를 풀고자 필드로 나가 스윙하려는데, 묵묵히 옆에 서 있던 캐디가 “벼락 조심하세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만 멋진 헛스윙을 해버리고 말았다. “벼락이 어디 있다고 그러십니까!”캐디의 어이없는 장난에 조금 화를 냈더니, 캐디는 미안하다면서 “그래도, 미국에서는 골프장에서 벼락을 맞아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구요. 그래서 미국 골프 마니아들은 벼락대비 보험까지 든다고 그러던데요?”
캐디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몇 년 전 미국 뉴저지 후암정사에서 올린 구명시식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몇 년 전 미국 뉴저지에 있을 때 일이다. 평소 잘 알던 분의 구명시식을 하던 주, 갑자기 그분의 친구영가가 구명시식 장에 출현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나는 당황해 친구영가에게 ‘여길 왜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영가 왈 “저는 필드에서 골프를 치던 중에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천행인지 죽기 전, 벼락사 대비하는 거액의 보험을 들어놓았고, 그 덕분에 제 아내는 3백만 달러라는 거액의 보험금을 타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그 영가는 이내 눈물을 흘리며 “부탁이 있습니다. 지금 제 아내에게 딱 3년 동안만 그 돈으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라고 말하고선 스르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뜻밖의 영가 출현에 적잖이 당황한 나는 구명시식을 부탁하신 분에게 사실여부를 물었고, 그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남자의 부인은 ‘로사’라는 여인이며, 여기서 몇 블록 남짓한 거리 살고 있다며, 자기가 ‘로사’와 안면이 있으니 오늘의 사건을 그녀에게 그대로 전하겠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얼마 안 돼 나에겐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그 ‘로사’라는 여인이 남편의 목숨값으로 받은 3백만달러로 사업을 하다 1년만에 부도로 전재산을 날려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남편 덕에 횡재해 평생을 편히 살 수 있을 만한 큰 돈을 그녀는 한줌의 재처럼 부질없이 그 돈을 낭비하고 만 것이었다.
‘쉽게 얻은 돈은 큰 불행을 불러들인다’는 진리가 여지없이 적용되는 씁쓸한 순간이었다. 죽은 후에도 거액의 보험금을 받은 아내를 걱정하며 영가가 되어서까지 지켜주려 했던 착한 남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다면 그런 불행은 찾아오지 않았을 텐데….
요즘도 필드로 나가 스윙할 때면, ‘벼락 조심하세요!’라는 캐디의 말과 함께 그날의 사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헛스윙을 날리곤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 ‘헛스윙이 3백만달러짜리 죽음의 스윙보다 백만배 더 낫지. 안 그렇소, 여보?’

백색 기모노를 입은 두 여자

누구에게나 ‘최초의 것’은 소중하며 아름답다 한다. 그 최초의 것이 현존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되돌아갈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최초의 것이 갖고 있는 의미는 각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바로 최초의 ‘후암정사’가 그것이다. 서울 후암동에 위치했던 그 집은 유독 사연깊은 집이었기에 처음부터 나에게 강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일제시대땐 일본 경무국장 관사로, 70년대엔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의 집으로, 또 얼마전까진 모 장관의 사택으로 사용했을만큼 나름대로 대단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었지만, 그에 앞서 집 전체를 둘러싼 4차원적 에너지에 나는 주저없이 그 집을 최초의 후암정사로 점찍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어디선가 “어서 오세요” 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사위를 살폈지만, 주위엔 여성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서둘러 현관문을 ‘확-’하고 여는데, 바로 그곳엔 백색의 기모노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두 명의 여자가 곱게 앉아 있는게 아닌가!
“어서오세요,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 분명 사람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이 섬뜩한 광경에 그만 온몸이 경직되고 말았다. 그러자 둘 중 어머니로 보이는 영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부디 저희 모녀의 한을 풀어주세요”라고 말하곤 아리따운 딸과 함께 마루에 엎드리듯 흩날리더니 이내 눈앞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너무나 아름다운 일본 여자 영가의 뜻밖의 출현에 나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알고 보니, 내게 말을 건넨 그 영가는 바로 일제시대 경무국장의 아내로, 딸과 함께 그 집에서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그 후 수십 년이 지난 그날까지도 집안을 배회하며 자신의 한을 달래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내가 그 집에 나타났으니, 큰 절로 반길 수밖에…얼마후, 나는 그곳에서 일본인 모녀 영가를 위한 천도제를 정성껏 올려주자, 백색 기모노를 입은 모녀 영가가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나더니 연신 ‘고맙다’며 절을 하곤 짙은 벚꽃향기와 함께 홀연히 이승을 떠났다.
사태가 이쯤 되자, 당시 집주인 되시던 분도 그 집의 비밀스런 영적 기운을 직감했던지, 그 집을 법당으로 쓰고 싶다는 나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그때부터 매달 음력 18일, 그곳에서 법회가 열리게 되었다.
최초의 법회가 열리는 날. 나는 떨리는 심정,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과연 내가 법회를 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수십 번 고민하고 갈등해 봐도 대답은 한 가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만이 내린 결정으로는 부족했다. 나는 흔들리지 않는 절대자에게 ‘법회’를 인정받고 싶었다.
마침내, 최초의 법회가 열리는 날. 꼼꼼하게 옷매무새를 살피곤 정성껏 차려진 제상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한동안 엄중한 침묵이 법당안을 제압했고, 그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 역시 입을 굳게 다물곤 침묵에 동참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허공에 조용히 시선을 던지곤 주먹을 꽉-쥐었다. 그러자 나 스스로도 감당못할 엄청난 에너지가 손안에 가득 들어차는 것이었다! 그 강력한 에너지의 폭풍우가 몸안을 휘몰아치는 순간, 나는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저는 머리깎은 스님도 아니오, 깨달음을 얻은 도인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부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신다면,
그 징표로 매달 음력 18일날이면 비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러자, 갑자기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 ‘쏴아-’하는 소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너나 할것없이 경악하며 창가로 몰려들었고, 창밖엔 그 어떤 날보다 세찬 빗줄기가 우렁차게 땅바닥을 내치고 있었다.
그후, 법회날마다 어김없이 내리는 하늘의 징표에 나는 최선을 다해 보답했고, 그 비가 인연이 되어 썰렁했던 법당 안에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돼 법당 안엔 내가 앉을 자리도 없을 만큼 북적이게 되었다.

게이샤, 환상을 깨라

한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새 영화 <게이샤>에 출연할 여배우를 찾는다는 소리에,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서 알아준다는 여배우들이 <게이샤>의 오디션에 참가했던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다는 여배우들이 너도나도 스필버그 영화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어 오디션을 몰래 받곤 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왔더랬다.
과연 그 여배우들은 ‘게이샤’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게이샤’가 어떤 여자인지 알고 오디션에 참가했었을까. 일본 여성들이야, 조금 이해가 간다손치더라고, 도대체 우리나라 여배우들은 무슨 생각에 ‘게이샤’라는 영화에 출연하려고 안달했던 것일까.
물론, 나 역시 ‘게이샤’에 대해 환상적인 상상력을 펼치던 때가 있었다. 화려한 기모노에 하얀 분을 바른, 정숙하면서도 요염한 게이샤들이 옆에 앉아 술자리의 여흥을 돋워주면 얼마나 술이 맛있을까란 생각에 일본 남자들이 사뭇 부러울 때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몇 년 전 내가 갖고 있던 ‘게이샤’에 대한 환상을 산산히 부숴놓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도 40년 전 친구였던 한 남자에 의해서 말이다.
아버지 차일혁 총경이 충주에서 경찰서장으로 근무하셨을 때, 그러니까, 나는 정말 철없던 꼬마아이였을 때, 동네 코흘리개 친구였던 놈이 40년이 지난 몇 년 전, 나를 찾아온 것이었다.
그때 기억으론 그 친구는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늘 우리들을 웃기곤하던 아주 재미있던 애였는데, 정작 잠실로 찾아온 옛날 모습은 간데 없고 짙은 수심이 얼굴에 박혀 활짝 웃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외형적으로야, 성공한 중년남성이었다. 사업도 남들이 알아준다 할만큼 성공했고, 또 교회도 열심히 다녀 부인과 아들, 그리고 딸과 함께 주일에 교회가는 것을 낙으로 삼고 사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난 요즘에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네”였다.
그의 얘기인즉, 그의 아버지가 불치의 병에 고통스러워하던 중, 치료조차 진전이 없자 이를 비관하여 자살한 이후로, 큰아버지가 자살했고, 뒤를 이어 큰아버지의 아들이 독약을 먹고 자살했으며 사촌 여동생은 목매달아 자살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친구한테 생길수 있을까. 거기다가 친구는 우울증마저 심해, 문득문득 찾아오는 우울증이 언젠가 자신을 죽게 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하루도 마음편히 지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이 심상치 않아, 친구에게 구명시식을 권했고, 며칠 뒤 올려진 구명시식에서 친구의 가족사에 덥친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게 되었다.
불행의 씨앗은 바로 친구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분께서 군수로 재직하던 당시 일본을 여행할 기회가 있어 부관선을 타고 시모노세키의 한 유곽에서 잠을 자다 일본인 게이샤를 만나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그만 순진한 마음에 그녀에게 몸값을 속량해 주기로 약속해 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한국으로 내빼듯 도망와 버렸고, 약속이라면 목숨까지 거는 일본인 ‘게이샤’는 그를 신처럼 기다리다 배신감과 비참함에 치를 떨곤 시모노세키 부근 바다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바로, 이 한맺힌 ‘게이샤’의 영혼이 친구의 집안을 ‘자살’로 멸문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그녀의 영혼을 담는 그릇으로 일본인형과 꽃을 사서 예를 지낸 뒤, 강물에 띄워 보내게. 그럼 그녀의 한이 조금은 풀릴 걸세.”
고맙다며 돌아서는 친구를 보며
‘여자에게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더군다나 게이샤에게 한 약속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난 그래서, 게이샤가 더 이상 예뻐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녀들만큼 ‘무서운’ 여성들은 이 지구상에 또 없을테니.

 

영혼달래기에 열올리는 일본인

최근 모 오락프로를 보고 있는데, 재미있는 장면이 나와 나의 관심을 끈 적이 있다. 그 장면은, 모 연예인 두명이서 흉가라고 알려진 집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는 과정을 찍는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사용하기 위해 설치한 마이크에 이상한 소리가 끼여 들리는 것이었다. 촬영이 계속 될수록 그 소리가 멈추지 않자, 결국엔 마이크를 방 밖으로 글어내고야 말았다. 후에, 그 소리의 주파를 측정해 보니, 인간이 낼 수 없는 고주파의 소리였다 한다. 결국 그 소리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미미하게 결론낸 채 프로를 끝냈는데….
그 정체가 어찌됐건 간에, 우리에게 흉가가 주는 이미지는 사뭇 묘하다. 어쩌면 흉가 근처엔 얼씬도 않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곤 접근조차 회피하는 게 대개의 경운데, 이웃한 일본은 우리와는 정반대인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부산 해운대에 있는 모 호텔에 묵던 신혼부부가 무슨 사연에서인지 동반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사건이 발생한 옆방에 한국에 출장차 온 일본 바이어가 투숙하고 있었는데, 무슨 꿍꿍이속인지, 사건이 발생한 방의 현장검증이 끝나자마자 그 방을 쓰윽-훑어보더니, 당장 카운터로 내려가 비싼 돈을 주고 그 방을 계약하는 것이 아닌가!
호텔측에선, 사건이 일어난 방이기에 손님들이 꺼릴 것을 염려했는데, 오히려 일본 손님이 와 숙박비의 몇 배를 주고 방을 계약해 가니, 처음엔 영문몰라 당황했지만 일단은 ‘감사’한 마음에 선선히 방을 내주었다는데….
바로 다음날, 부산 수영 비행장에 일본 굴지의 기업체 회장님을 태운 전용비행기가 도착했다. 그의 정체는 일본인 바이어 회사의 회장님. 한번 거동하기가 후지산보다 어렵다는 일본인 회장님께서 그 바쁜 일정을 뒤로 한 채, 한국으로 날아오신 것도 이상했지만, 더욱 이상한 것은 회장님 손에 당연히 들려있어야 할 007가방은 간데없고, 그의 손엔 향통과 염주가 들려있는 게 아닌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회장님의 하루일과. 그는 공항에 내려, 그 어떤 비즈니스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신혼부부가 죽었다는 그 방으로 들어가 하룻밤을 꼬박 새워 영혼을 달래주곤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기엔 도저히 이해 못 할 일본 회장님. 이 일화는 타고난 장사꾼이라는 일본인들의 징크스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징크스의 실체, 그것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주면 복을 받는다’라는 어찌보면 아주 간단한 것인데, 이것을 실천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징크스에 목숨 걸었다는 사람들이 바로 일본, 중국, 유태민족이란 사실이다. 세계 일류 장사꾼들이라는 이들이 왜 이토록 영혼달래기에 나서서 열을 올리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은 안다. 그 돈이 자기의 노력만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말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의 노력 외에 얻어지는 그 무엇을 위해 그들은 오늘도 그토록 열심히 영혼을 달래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그 일본인 바이어는 자회사 회장님을 한국에 급히 초청, 신혼부부가 죽은 방에 특별히 모신 것이었고, 회장님 역시,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만사 제쳐놓고 한국으로 날아와 향통과 염주로 영혼들을 정성껏 위로해 줬던 것이리라.
세계 경제를 휘어잡은 섬나라 일본. 패전국 일본이 세계무대를 장악한 데는 다 이런 작은 ‘징크스’도 소홀히 하지 않는 ‘치밀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니었을까. 한국 회장님들께서도 좋은 호텔에 최고의 명당만 고집하지 마시고, <귀신은 절대 공짜밥을 먹지 않는다>는 진리를 한번쯤 실천에 옮겨보심이 어떠실지….

운명은 바꿔갈 수 있다

한여름 바캉스 시즌이 찾아오면, 한강둔치 야외 수영장에는 비키니 인파들이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기도 하는데…어느 리서치에서 바캉스 갈 때 가장 가져가고 싶은 것을 조사한 결과 남자들의 1위는 여자친구인 반면, 여자들의 1위는 바로 ‘돈’이었다 한다.
그만큼 남자들은 비키니 입은 여자친구와 함께 해변을 거니는 아늑한 상상을 하는 반면, 여자들은 현실적으로 재미있게 노는 방법에 몰두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내가 생각해도, 여성들은 확실히 남성들보다 현실적인 감각이 뛰어난 것 같다. 그러나 바꿔 생각해 보면, 그만큼 남자를 볼 때 사랑보다도 현실적인 조건들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이 될 것이다.
한 노처녀가 나를 찾아온 게 몇 년 전인 것 같다. 그녀는 비록 나이는 37세였지만, 어느 누가봐도 20대 후반의 세련된 커리어우먼이라 생각할 만큼, 젊고 싱그러운 몸매를 유지하고 있었다.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학벌, 가문, 경제상황 등등이 다른 어떤 신부들보다 앞서는 한마디로 완벽한! 여성이었는데, 101번도 더 넘게 선을 봤는데도, 번번히 ‘Oh-No!'였다 한다. 그녀는 말미에 살짝- “법사님, 저 시집가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겉모습과 배경이 완벽한 서른 일곱 살 노처녀를 만나고 나니까,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지금것 많은 노처녀들이 법당을 찾아와 ‘결혼여부’를 묻고 돌아가곤 했으나, 그녀만큼 완벽한 노처녀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의문에 나는 찬찬히 그녀 얼굴을 살폈다. 하얀 피부에 맑은 눈동자, 고아한 얼굴선… 어디 하나 흠잡을데 없는 그녀의 미모를 보고선 ‘앗! 바로 이거구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너무나 완벽했다! 그렇기에, 남자가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안 살듯이, 어느 정도의 빈틈이 있어야 남자들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인데, 그녀에겐 바로 그 작은 틈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미소지으며 “당신은 매화같은 여성입니다. 한겨울 흰 눈속에서 피어오르는 매화는, 겉보기엔 너무나 아름답지만, 매화의 주위엔 나비도 벌도 없지요.” 그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안돼요! 그럼 영영 남자가 없단 말씀인가요?”라고 되묻길래, 역시 조심스레 “당신은 전생에도 여자였습니다만, 비구니로 살았기에 이생에서도 이렇게 혼자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얘기가 이쯤되자, 그녀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그랬군요. 어쩐지 저는 지금도 집안 한켠에 불당을 마련 매일같이 부처님을 모시고 있답니다. 그리고 전 선천적으로 고기를 안 좋아해서, 육식은 절대하지 않고요… 그럼, 전 결혼할 수 없는 여잔가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전생의 영향이 현생까지 미치게 된 그녀는 지금껏 보통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생활을 영유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집안에 불당을 모셔놓고 밤낮으로 기도하고, 또 매일 샐러드 같은 채소만 씹어대는 여자를 어떤 남자가 좋다 하겠는가.
수심이 가득찬 얼굴을 하고 앉아 있던 그녀에게 나는 마지막 ‘비법’을 공개하고 말았다.
“정 결혼하고 싶으시다면, 두 가지를 고치세요. 하나는 강력하게 남성을 원하셔야 합니다. 집안 곳곳에 남자들의 사진을 붙여가면서 노력해 보세요. 그리고, 두 번째, 제발 육식을 좀 하십시오. 그러면, 늘 차가웠던 몸이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따뜻해질 것입니다.”그러자 그녀는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그럼, 언제쯤 남자가 생기나요?” 라길래, “딱 2년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당신을 전생부터 사랑했던 한 4년 연하의 남자가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모든 것을 다 털어놓고야 말았다. 그제서야 그녀는 안심하며 집으로 돌아갔는데….
몇 년 후, 그녀는 예쁜 딸 아기를 안고 법당에 찾아와 “법사님~ 고기고 먹어보니까 아주 맛있던데요?”라고 말하며 마냥 행복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 웃음속에서 ‘역시 운명은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는 거’이라는 진리를 발견하곤 또 한번 보람을 느끼게 되었다.

초라하지만 단 하나뿐인 곳

언젠가 서울 근교 모처에 본점이 있다는 유명한 칼국수집에 간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한 집이라 몇십 분 줄서는 것은 보통이라는 말은 듣고 갔지만, 이거 가보니까 도저히 먹을 엄두가 안 나는 것이었다. 전국적으로 이 가게 간판을 걸고 칼국수집을 하는 집이 꽤 될 정도로 유명한 집이라기에 나는 몇 층짜리 대규모 식당일 줄 알았는데, 가보니 손님 몇 명이 겨우 앉을 만한 말 그대로 ‘칼국수집’, 그 자체였던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칼국수 한 그릇을 먹는데 줄을 서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오기로 순서를 기다리는데, “거참, 가게 좀 늘리면 안 되나. 가게 몇자리 더 만들면 손님들도 줄 안서서 좋고, 자기들도 돈 많이 벌어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좋고 아닌가.”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사람 왈 “그래서 장사가 잘 되는 거야. 원래 잘되는 가게터는 절대로 늘리지 말라잖아. 다른 곳에 가게를 내면 냈지 본범은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장사가 잘되는 법이라구.”
두 사람의 얘기를 듣는 순간, 갑자기 번득 누군가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법사님, 석촌동 후암정사는 아담해도 너무 아담한게 아닙니까? 찾아오기도 힘들고, 규모도 워낙 작아 사람도 몇 명 못 앉고 말입니다. 아무래도 서울 다른 지역으로 규모를 확장해 옮기시면 어떨까요?”
사실, 석촌동 후암정사가 규모가 작은 것도, 찾아오기 힘든 곳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20, 30명만 와도 자리가 좁아 옹기종기 모여앉아야 할 정도니 말이다. 반면, 유성의 후암정사나 미국 뉴저지 후암정사만 해도 석촌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규모니, 석촌동으로 찾아오는 분들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석촌동 후암정사는 내게 아주 특별한 곳이다. 나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불자님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곳일 것이다. 이유인즉, 석촌동 후암정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가 불교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최초로 불교가 전승된 지역이기 때문. 물론,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고구려 소수림왕 때 최초로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하나, 본격적으로 불교가 이 땅에 뿌리내리게 된 것은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인도의 정통 불교사상을 안고, 바로 이곳-송파나루에 도착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나 역시, 불교를 설파하기 위해, 대륙끝 작은 반도까지 찾아왔던 마라난타가 된 기분으로 이곳 석촌동 후암정사에 본거지를 잡겠다 했을 땐, 내 뜻을 모르던 많은 분들은 ‘왜 하필 이렇게 작고 초라한(?) 곳으로 본거지를 잡으려 하나’며 참으로 많이들 반대도 하셨지만, 후에 내 뜻을 알리자 ‘그렇게 깊은 뜻이!’하시며 다들 찬성하게 되었다.
그렇게 옮기게 된 석촌동 후암정사. 그런데 얼마 안가 이상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석촌동 후암정사에서의 최초의 구명시식을 올리기로 한 바로 전날 밤. 한참을 뒤척이다 어렵사리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꿈속에서 화려한 풍채의 금관을 쓴 남자가 나타나더니,
“나는 백제의 근초고왕이오. 이 근방에 있는 백제 고분 중, 가장 큰 고분이 바로 내 무덤이라오. 이곳은 인도승려가 이 땅에 불교를 최초로 들여온 자리임은 이미 알터. 이 자리가 우리나라에 큰 기운을 줄 것이니 명심토록 하시오”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잠깐만요!” 나는 너무나 생생해 벌떡 일어나 그를 잡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께서도 인정하신 석촌동 후암정사 터. 그야말로 불자에게 있어 대한민국 최고의 터라 할 수 있지 않은가. 여하튼, 그날 이후로 석촌동 후암정사는 날이 갈수록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발길이 오늘 이 순간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담백한 맛의 칼국수 한 그릇을 우려낼 줄 아는, 작고 볼품없던 칼국수 본점처럼, 석촌동 후암정사 역시 초라하긴 마찬가지지만, 인도승려 마라난타의 그 고귀하고 순수했던 불가사상의 원형을 그대로 우려낼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장소이기에 누가 뭐라해도 나는 이곳을 그 어떤 곳보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5천달러를 갚는 꿈

영화 <니키타>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여자 킬러, 니키타. 암살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그녀는 필사적으로 탈출, 유유히 잠적하고선 또 다른 목표를 기다리면서 해서는 안 될 ‘사랑’에 빠져들어 킬러로서의 위기를 맞곤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 뒤 그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 영화를 본 관객들은 여자킬러에 대한 환상을 품기 일쑤겠지만, 나는 여자킬러에 관해서라면 자나깨나 ‘환상’조심을 강조하고 싶다.
유난히 심한 나의 여자킬러 알레르기… 그것의 시작은 바로 일제초. 내가 일본인 여자킬러인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초’의 일이니 당연히 현생이 아닌 나의 ‘전생’의 일임을 독자들은 이미 눈치채셨을 터. 그런데, 문제의 시작은 다시는 만나지 말았어야 할 그녀를 현생에서 또다시 만난 것이었다. 그것도 미국 뉴저지 후암정사에서 말이다.
늦가을 지던 어느 날이었다. 30대 중반의 어떤 여인이 뉴저지 후암정사에 찾아와서는 나에게 5천 달러를 내밀며, “법사님, 여기 5천 달러를 갖고 왔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법사님께 5천 달러를 드려야 하는지 알 수 없네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서글서글한 매력을 갖고 있던 묘한 분위기의 그녀는 한국에서 일본인 회사에 다니던 남자와 결혼해 미국에 건너와 살던 중, 남편의 도벽과 구타를 견디지 못하고 이혼한 뒤, 봉제공장을 다니며 성실하게 자신의 삶터를 가꾸던 중, 몇 달 전부터 꿈만 꾸면 나에게 5천 달러를 주는 꿈을 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5천 달러를 들고 뉴저지 후암정사로 ‘쳐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녀를 찬찬히 살피던 나는 빙그레 웃으며 “당신은 전생에 일본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혹시 왼쪽 옆구리에 붉은 사마귀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져 “법사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라고 물어, “전생에 갖고 있던 점입니다”라고 대답한 뒤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불안한 듯, “그럼, 제가 왜 법사님께 5천달러를 드려야 하는지… 그 이유도 알고 계시겠군요?”라고 물어, 나는 몇 번이고 대답을 회피하려 했지만, 그녀는 재촉에 결국엔 모든 것을 말하고야 말았는데….
일제시대가 막 시작되려던 무렵, 전생의 나는 교세가 극도로 번창한 한 신흥종교단체의 핵심인물로, 6백만 신도들의 깨우침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단체라 할지라도 신도수가 6백만이 넘자, 일제는 우리를 ‘제거해야 할 단체’로 규정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핵심인물들을 제거할 계획에 착수하게 되었지만, 이를 미처 전해 듣지 못한 우리는 하필 그날밤, 신도들끼리 모여 조촐한 잔치를 열고 만 것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잔치를 지켜보다 방에 들어간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어여쁜 기녀가 술상까지 봐놓고는 섹시한 자태로 앉아있는게 아닌가. “이 술 한잔 받으시지요” 그녀는 ‘어서 나가라’는 나의 호통은 무시한 채 술을 권하며
“저도 자존심이 있으니, 이 술 한잔만 받아주신다면 미련없이 이 방을 나가드리지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정체를 파악했음은 물론, 나의 죽음까지 직감적으로 알아채곤, 아무말 없이 그녀에게 돈 5천원(약 1억원에 해당되는)을 내밀려 “당신같은 미녀는 살생해선 안 되오. 자, 당신이 날 죽이면 받기로 한 5천원이오. 이 돈을 갖고 이곳을 떠나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 역시 제 조국과 저를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하며 5천원을 받더니 “이 돈 언젠가 꼭 갚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황급히 내 방을 빠져나갔던 것이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제가 법사님께 5천달러를 드리는 꿈을 꿨던 거군요.” 전생에 나를 독살하려 했던 일본인 미녀 킬러가 환생해, 전생에 졌던 빚을 갚다니… 그뿐 아니라 그녀는 내가 뉴저지에 있는 동안, 때로는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나를 도와줘, ‘킬러’의 이미지를 완전히 버리는 데까지 성공했다. 지금도 미국 뉴저지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그녀… 오늘따라 그녀가 보고 싶다. 물론 ‘여자킬러’가 아닌 ‘친구’로서 말이다.

 

긴자 마담이 말하는 부자의 조건

사람 속마음을 잘 아는 이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술집 마담이 꼽힐 것입니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고, 술을 먹으면 숨겨졌던 속마음과 성격이 드러납니다. 어느 회사에서는 수습사원과의 질펀한 술자리를 입사 잣대로 삼기까지 합니다. 취객들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바로 ‘술집 마담’입니다. 이것저것 묻기 위해 오는 손님을 상대해야하는 점쟁이보다, 스스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손님을 상대하는 술집 마담이 사람 보는 데는 더 용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 도쿄의 긴자거리는 서울의 강남 로데오거리처럼 고급 명품 숍이 즐비한 거리로 유명합니다. 낮에는 고급 명품 숍 천국이지만 밤에는 최고 부자들이 가는 술집으로 유명세를 치릅니다. 한 지인이 이곳 긴자의 유명한 술집 마담에게 들었다며, 부자로 성공하는 사람들의 다섯 가지 공통점에 대해 저에게 귀띔해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어린 아이의 눈을 하고 있다.
둘째, 인색하지만 귀엽게 인색하다.
셋째, 가정에 충실하다.
넷째, 어린 아이처럼 천진난만해서 저 사람이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궁금해진다.
다섯째, 살짝 바람기가 있다.

제가 만나본 부자들도 다섯 가지 모두는 아니더라도 아이처럼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단순히 돈만 많은 부자가 아니라 만인에게 존경받는 부자가 되려면 한 가지가 더 보태져야합니다.

‘부자가 되어서도 과거에 자신이 갖고 있던 장점을 버리지 않는다.’

부자는 자기 혼자 힘만으로 이룩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장점이 사회에서 펼쳐지기를 바라는 하늘의 뜻이 애초에 있었습니다. 나무꾼이 나무해서 자기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장터에 내 놓듯이, 부자가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내 놓을 역할을 맡긴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점을 간과합니다. 부(富)에는 한 사람의 곳간에 곰팡이 나도록 쌓여야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져야 한다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부자가 되었다고 장점을 잊는다면 하늘이 그 부자의 역할을 다시 거둬갑니다.
본연의 모습을 간직한 채 앞으로 나가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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