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선시(禪詩)감상_04

醉月 2011. 1. 5. 08:33

세상을 깨우침의 시(警世)

寒暑催人日月流 춥고 더움이 사람을 재촉하여 세월이 흐르는데.

幾多歡喜幾多愁 환희와 근심을 얼마나 했던고.
終成白骨堆靑草 마침내 백골이 되어 풀 속에 한 무더기 흙덩어리.
難把黃金換黑頭 황금으로도 젊음을 바꿀 수 없다네!
死後空懷千古恨 죽음 앞에 근심 걱정 헛된 생각이요
生前誰肯一時休 살아 생전 번뇌에 헐떡이다 쉬는 날이 있던가.
聖賢都市凡夫做 성현들도 그 옛날 범부였다네!
何不依他樣子修 어찌 본받아 수행하지 않을고!

 

환암 혼수(幻庵 混修)
고려말 조선 스님. 자는 무작(無作). 속성은 조(趙)씨.
풍양 출신. 유년 시절에 출가하여 대선사 계송(繼松)에게 득도하고 내외의 경전을 수학함.

22세에 승과에 급제하고 선원사에서 능엄경을 수학함.
오대산 신성암에 있으면서 고운암에 머물고 있던 나옹 혜근에게 도를 묻고 그의 의발을 물려 받음. 우왕이 국사로 삼았으며 공양왕 즉위 후 치악산으로 은거했다가 이성계와 함께 대장경을 완성하여 서운사에 안치함.
스님이 입적하자 이태조가 보각국사로 추증함.

 

서산대사 오도송

 

갑자기 정오에 닭 우는 소리 듣고
장부 할 일 모두 마쳤다네!
머리 희어도 마음 희지 않다고
옛 사람이 일찍이 말한 것을!

忽聞午鷄聲
大丈能事畢
髮白心非白
古人曾漏洩

 

상추(賞秋)

멀고 가까운 가을 색깔
한 모습이어라
지는 해 바라 보면서
한가로이 휘파람 부노라.
울긋 불긋 단풍 아름다워라
흐르는 물 소리, 산새 소리도


나 禪時를 말하노라!  

遠近秋光一樣奇
閑行長嘯夕樣時
滿山紅錄皆精彩
流水啼禽亦設詩

 

환향(還鄕)

三十年來還故鄕
人亡宅敗又村荒
靑山不語春天暮
杜宇一聲來渺茫

고향 떠난 지 벌써 서른 해
돌아와보니 없어진 것 뿐
산은 고요하고
해는 저물었는데
어디서 들려오나
소쩍새 울음



서산대사 휴정
(1520∼1604)
조선 중기의 승려였으며  속명은 최여신인데  보통  서산대사라 불린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1534년  진사 시험에  떨어진 뒤 지리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승과에 급제하여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종과 교종으로 분리된  불교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삼교 통합론'을  내세워  유교ㆍ불교ㆍ도교를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  <운수단>, <설선의>  등이 있다. 

 

갈하니 물 흐르는

 

喝水和聲絶
聻山幷影非
聲影通身路
金烏徹天飛

갈하니 물 흐르는 소리 뚝 끊어지고
적하니 산과 그림자가 함께 없어지네
소리와 색깔이 법신으로 통하는 활로니
금까마귀 밤하늘을 뚫고 나르네.

 

입멸이란

祖師入滅傳皆妄
今日分明坐此臺
杖頭有眼明如漆
照破山何大地來

원효대사 입멸이란 전언은 모두가 거짓말
오늘날도 또렷하게 원효대에 앉으셨네
주장자 끝에 눈이 있어 밝기가 옻칠 같은데
산하대지 삼키듯 눈부시게 비치고 계시네.

 

경허 성우(鏡虛 惺牛 1849∼1912)
선종(禪宗)을 중흥시킨 대선사. 속명은 동욱(東旭) 법호는 경허(鏡虛) 9세때 과천의 청계사(淸溪寺)에서 출가했고 개심사(開心寺)와 부석사(浮石寺)를 왕래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교화활동을 펴면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1894년에는 동래 범어사의 조실이 되었고 1899년에는 합천 해인사에서 임금의 뜻에 따른 인경불사(印經佛事)와 신설하는 수선사(修禪寺) 등의 불사에 법주가 되었다. 1904년에는 오대산 금강산 등을 두루 다니며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오백나한상의 개금불사에 중사로 참여하였다. 그해에 만공을 만나 최후의 법문을 한 뒤 사찰을 떠나 서당의 훈장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1912년 4월 25일 임종게(臨終偈)를 남긴 뒤 나이 64세 법랍 56세에 입적했다. 그는 생애를 통해 선의 생활화 일상화를 모색했으며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선문에서 정혜(定慧)가 원만히 갖추어져야만 견성(見性)이 이루어진다고 하듯이 염불문에서도 일심(一心)이 불란한 삼매경에서만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실현된다고 보았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의 마조로 평가된다.

 

귀향시(歸鄕詩)

 

 

고향을 버린 지 사십 년
집에 돌아와 보니
모르는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네!

 

살던 마을 풀에 묻혀 간데없고,
조상 묘터는 거친 이끼에 묻혀
한숨만 절로!

 

마음마저 죽으니
한숨인들 어이 일어나며.
피마저 마르니
눈물 또한 흐르지 않네!

 

저들은 지팡이 구름 따라 떠다니니
아--아 살아가는 내 인생
짐승에 부끄러움이여!

 

遠別鄕關四十秋
歸來不覺雪盈頭
新基草沒何安在
古墓苔篆復跡愁
心死恨從下處起
血乾淚亦不能流
孤笻更欲隨雲去
己矣人生愧首邱

(首邱 여우가 죽을 때 자기가 태어난 굴을 향해 머리를 돌려 죽는다는 얘기)

 

초의선사 의순(草衣禪師 意恂)(1786∼1866)
조선시대 승려. 자는 중부(仲孚). 호는 초의(艸衣)이며, 속성은 張. 나주 삼향 사람. 15세에 남평 운흥사 벽봉 민성(碧峰 敏性)에게 출가하고, 19세에 월출산에 올랐다가 마음이 열린 후에 완호(玩虎)의 법을 잇다. 금강산의 비로봉을 비롯하여 여러 산을 찾아다니다.
경향 각지의 명사들과 사귀어 그 명성이 높았고, 정다산(丁茶山),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등과 친밀히 사귀었다.
해남 두륜산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간 지관(止觀)을 닦고 참선하다. 서울 봉은사에서 화엄경을 세길 때 증사(證師)가 되고, 달마산에 무량회(無量會)가 열리자 그 강석(講席)을 주재했다. 고종(高宗) 3(1866)년 81세로 일지암에서 입적.
저서로는 초의집(艸衣集)2권, 동다송(東茶頌), 일지암유고(一枝庵遺稿),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이선래의(二禪來義)등이 있다.

 

연화(蓮花)

안개는 난간 밖
수풀에 얽히고
바람은 연못 위
꽃봉우리 뒤흔든다.
비단 씻는 여인들
꺾질 않아서
연잎은 빗 속에서
원앙새 덮어준다네.


 

자수첩(資壽捷)
생몰연대 미상. 송대(宋代)스님. 자수는 주석사명.
천의의회(天衣義懷, 993~1064)의 법을 이어 받음.
복건성 천주(泉州) 자수원(資壽院)에 머뭄.

 

연화(蓮花)

흰 연뿌리 싹 없어도
숨은 게 아니요
붉은 꽃 물 밖에
나와도 밝다고 할 수 없지
구경 온 사람들
소식 전할 게 없다네!
맑은 바람에 향기
절로 멀리 전해진다네!

白藕未萌非隱的
紅花出水不當陽
遊人莫用傳消息
自有淸風遞遠香
           
단하자순(丹霞子淳) 1064∼1117
송대스님. 조동종. 단하는 주석산명. 속성은 가(賈)씨. 사천성 검주 재동현 출신. 27세에 삭발, 구족계를 받고, 진여 모철(眞如募喆)·늑담 극문·대홍 법은(大洪法恩) 등에게 참구한 후, 대양산(大陽山) 부용도해(芙蓉道楷)의 법을 이음.
숭녕 3년 남양의 단하산에 머물렀고, 그 후 당주의 대승산·대흥산에 머물며 선풍을 진작. 정화 7년 3월 11일 입적. 문하에 진헐 청료·천동 정각·대승 이승·대홍 경예 등이 있음. 저술로는 단하자순 선사어록 2권이 있음.

 

월색(月色)

 

 

滿庭月色無烟燭
入坐山光不速賓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뜨락에 가득 찬 달빛 촛불이 됨은 없네
찾아드는 산 모습들 함께 둘러앉으면
솔바람 싱그러운 거문고 가락
소중히 즐길 뿐 전할 순 없다네.

최충 : 성종 3년∼문종 22년(984∼1068).
고려의 문신. 본관 해주(海州). 자 호연(浩然). 호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 문헌(文憲). 1005년(목종 8) 문과에 장원,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칠대실록(七代實錄)》편찬에 참여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등을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국사수찬관(參知政事國史修撰官)때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41년 서북로병마판사(西北路兵馬判事)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에 진을 치고, 산성개수(山城改修)를 감독했다.
1047년(문종 1)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律令)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때 농번기(農繁期)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고 1053년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나이가 많다고 사직을 상주하자 만류 조서가 내려지고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協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상주국치사(開府儀同三司守太師 兼 門下侍中上柱國致仕)라는 훈작을 내렸고, 1055년 내사령(內史令)을 삼은 후 다시 추충찬도좌리 동덕홍문의유보정강제공신(推忠贊道佐理同德弘文懿儒保定康濟功臣)이라는 호를 내렸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松岳山)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받았다.
처음에는 정종의 묘정(廟庭)에, 후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개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원주)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직산) 등의 글씨가 남아 있고, 저서에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

 

온갖 물건 보아도
但自無心於萬物
何妨萬物常圍遶
木牛不怕獅子吼
恰似木人見花鳥

온갖 물건 보아도 무심하다면
나를 방해 할 놈이 어디 있으랴
나무 소가 사자 울음 겁내지 않듯
나무 사람 꽃 본 것과 다를 바 없네.

 

방거사
성은 방, 이름은 蘊온, 자는 도현이다. 중국의 형주 형양현 사람으로서 당나라 정원 때 석두에게 가서 禪旨선지를 짐작했다. 뒤에 마조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는 이가 무슨 사람입니까?」마조「네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마셔버린 뒤에야 일러 주마」거사는 이 말에 깨달은 바 있어 2년 동안 정진하였으며, 죽으려 할 때에 딸 영조를 시켜 해 그늘을 보아서 午時오시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했다. 영조「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을 합니다」거사가 평상에서 내려 문밖에 나가서 보는 동안에 영조가 거사의 평상에 올라 앉아 죽어버렸다. 이를 보고 거사는 웃으면서 「내 딸이 솜씨가 빠르구나!」하고 7일 후에 죽다.
好雪片片호설편편의 공안이 있다.]


석암(石庵)

 

藍風吹不動
劫火洞逾堅
無爲眞人住無住
白雲徒自訪門前

거센 바람 불어와도 동요하지 않음이여,
겁에 불이 일어나도 더욱 견고하여라.
무위의 참 사람 무극에 머무름이여.
흰구름 만이 부질없이 문앞을 찾아오네.


태고 보우(1301~1382)
고려 스님으로 보허(普虛)라고도 하며, 속성은 홍(洪)씨로 홍주(洪州)출신이다.
13세에 양주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에게 출가하여 그 뒤 여러 총림을 찾았고,
19세에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여 성서(城西)의 감로사(甘露寺)에서 의단(疑團)을 타파하였다.
41세에는 삼각산(三角山) 중흥사(重興寺) 동봉(東峯)에 태고암(太古庵)을 짓고 머물다가, 46세에 중국에 가서 호주(湖州) 하무산(霞霧山)의 석옥 청공(石屋淸珙)에게 참구하고 그의 법을 이어받아 이로써 태고는 해동 임제종의 시조가 된다.
귀국 후에는 미원(迷原) 소설산(小雪山)에 들어가 농사 지으며 살다가 공민왕의 청으로 산을 나와 설법하고 왕사가 되었다.
봉암사(鳳巖寺)와 보림사(寶林寺) 주지로 있으면서 교화를 펴다가 신돈(辛旽)의 모함을 속리산에 유폐되기도 했으나, 신돈 사후 우왕은 보우를 국사로 삼고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게 했다.
소설산에서 입적했으며 시호는 원증(圓).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 어록으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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