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금오산 향일암

醉月 2011. 1. 6. 08:27

금오산 향일암

남해 한바다를 마당 삼은 절

봄 마중을 나섰습니다. 투둑, 툭 떨어지며, 이제 겨울 이 다 갔음을 알리는 동백이 있는 곳으로. 그렇습니다. 동백꽃 떨어지는 소리는 봄을 부르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동백꽃은 지는 모습이 더 아름다운 꽃입니다. 그 ‘꽃 진 자리’, 겨울을 건너가는 봄의 징검다리입니다.


▲ 바다로 들어가는 거북 형상의 금오산 등에 앉은 대웅전. 뒤편의 바위들은 마치 경전을 쌓아둔 듯하다.


남해 가에 동백꽃 지는 곳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만, 왠지 향일암에 가면 그 ‘꽃 진 자리’에서 극락의 징검다리를 보게 될지도 모를 것 같았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진신이 머무는 도량이니까요.

극락의 주재자인 아미타 부처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합니다. 이 세 불보살을 일러 미타삼존, 혹은 미타삼성이라 합니다. 다 알다시피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각각 자비와 지혜를 상징합니다. 자비와 지혜의 덕을 모두 갖춘 부처가 아미타불이라는 얘깁니다. 극락으로 가는 길은 자비와 지혜에 있다는 말이겠지요.

▲ 향일암 뒤 거북바위 위의 흔들바위.


절집 말로 복혜(福慧)라는 것이 있습니다. 복지(福智)라고도 하는데, 이 말 또한 자비와 지혜를 이르는 말입니다. 자기완성, 즉 부처가 되는 길은 깨달음을 위한 지행(智行)과 아울러 자비를 베풀어 덕을 쌓는 복행(福行)을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복(福)이란, 빌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데서 온다는 가르침입니다.

세 차원의 극락이 있다 했습니다. 가야할 극락, 만들어야할 극락, 이미 존재하는 극락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나는 두 번째를 지지합니다. 죽어서 가야할 극락은 너무 피동적이고, 이 세계를 이미 존재하는 극락으로 인식할 만큼 대근기도 못되기 때문입니다. 갈데없는 중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을 극락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믿음의 끈만큼은 놓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 벼랑 같은 산 기슭에 앉아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관음전. 향일암의 대부분 전각들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사실 앞서 말한 세 차원의 극락이 별개의 실체는 아닐 것입니다. 떨어진 동백꽃이 그것을 말해 주더군요. 피기 전에도, 피어서도, 떨어져서도 동백꽃은 여일(如一)했습니다. 한결같이 극락을 살아낸 그 꽃을 보며 나는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눈앞에 극락의 징검다리를 보고도 오욕의 허방다리만 밟고 온 내 가난한 삶이 슬펐습니다. 

하루해를 다 바쳐 여수에 도착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비로소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해를 향한(向日)’ 암자라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이내 다가오는 한 생각. 내가 사는 곳에도 해는 날마다 떠오르는데, 나는 지금 왜 향일암(向日庵)으로 가고 있는가? 이번 여행의 화두를 하나 찾은 셈입니다.

돌산대교를 건너서도 향일암 가는 길은 한참 멀었습니다. 돌산대교에서 향일암 아랫마을인 임포까지가 25km 정도니 꼬불꼬불한 산길을 족히 30분은 달려야 했습니다. 설사 곧다 해도 그 길은 휑하니 달려야 할 길이 아니었습니다. 곱게 가꾸어진 길가의 동백나무, 순하게 흘러내린 산자락에 기댄 작은 마을들, 그리고 호수처럼 잔잔한 남해바다와 얘기를 나누며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마치 바다 위에 떠있는 듯

돌산섬의 끝, 바다와 맞닿은 금오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향일암은 마치 바다 위에 뜬 절 같았습니다. 그 입지가 마치 가파른 벼랑에 튼 새둥지 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절 마당 곳곳에 떨어진 동백꽃이 비에 젖고 있었습니다. 그 꽃을 피해 조심조심, 인기척이라고는 없는 절집의 고요를 위해 또 조심조심 절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사람의 기척이 유일해 보이는 영구암(靈龜庵·종무소 건물로 경봉 스님이 쓴 편액을 걸고 있다)에서 종무원의 친절한 안내로 방 한 칸을 얻었습니다.

▲ 대웅전과 관음전 사이. 떨어진 동백꽃, 그 처연한 붉은 빛 다치지 않게 하려면 징검다리를 건너듯 조심조심 걸어야 한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남쪽으로 난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었을 텐데도 그리 무겁지도 차지도 않은 바람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리고 눈앞으로는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도 모를 한 세계가 열려 있었습니다. 가는 비, 옅은 안개, 거리를 가늠하기 힘든 이웃 섬들의 흐릿한 불빛만이 이곳이 남쪽 바다 끝 절집임을 알게 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새벽 6시에 먹는 아침 공양이 달고도 정갈했습니다. 시골 어머니 같은 공양주 할머니들의 모습은 관광지 사찰에서 가끔 접하게 되는 불편함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절집의 가풍은 대충 공양간을 보면 압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속담이 절집이라 하여 비껴가지 않습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나서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우리는 오랫동안 산 사람들처럼 절집의 새벽 고요를 즐겼습니다. 창밖으로 동박새 지저귀는 소리가 청명했습니다. 활짝 창문을 열었습니다. 가파른 산기슭 아래로 동백숲과 어우러진 대나무숲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짙푸른 동백 잎에 비해 연두빛으로 보이는 대나무숲의 조화가 싱그럽습니다. 대기가 투명했더라면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끝도 없는 욕심입니다.
종무소 한 켠에서 재무 소임을 보는 우석 스님과 차를 나누었습니다. 하룻밤 객의 부실한 눈보다야 오랫동안 절집에서 살아온 스님의 얘기를 듣는 편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해안(海岸) 고절처(孤絶處)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절입니다. 돌산대교가 생기기 전에는 배를 타고 와서 공양미 머리에 이고 걸어서 참배를 다녔다고 해요. 진짜 신심인 거죠. 바로 그런 믿음에 관세음보살님도 감응하는 것이겠지요. 동백꽃 자생지로서 풍광도 그만이지요. 돌산대교가 놓인 후에는 관광객의 숫자가 늘어났는데 모두들 일출에 감탄을 하곤 합니다. 그런데 실은 저녁 기도 후에 법당을 나오며 바라보는 월출이야말로 참으로 장관입니다.”

기도 성취라는 게 무엇일까요. 좋은 집 사고, 자식들 좋은 학교 가고, 돈 많이 버는 것이 그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진정한 기도 성취란 무심히 달빛에 감동할 줄 아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마음에 어찌 사악한 기운이 깃들 것이며, 타인과 비교하여 신세를 한탄하고 또 시샘하는 마음이 일겠습니다. 소욕지족,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도 성취가 아닐까요.


차별없는 한 맛, 깨달음의 ‘한바다’

▲ 경전바위(흔들바위)에서 내려다본 대웅전 앞 마당은 ‘한’바다로 무한히 확장된다.
다담을 마친 후 우석 스님과 함께 금오산을 올랐습니다. 스님은 우리를 절과 정상 사이의 흔들바위로 데리고 갔습니다. 흔들바위는 일명 경전바위로도 불리는데, 거북등 같은 무늬를 가진 바위가 갈라져 누운 모습이 흡사 경전과 같았습니다.

경전바위 앞 너럭바위에서 향일암의 진면모를 봤습니다. 지붕만 보이는 전각은 삼성각, 대웅전, 종각, 관음전, 관음원(요사, 공양간) 순서로 바위와 동백 사이사이에 부채꼴을 이루며 펼쳐져 있었습니다. 바위와 전각과 동백의 조화는 절묘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으로는 향일암의 진정한 앞마당이라 할 ‘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더없이 넓어서 ‘한바다’요, 차별 없는 한맛(一味), 깨달음의 ‘한바다’였습니다. 대지(大智)를 대해(大海)에 빗대는 까닭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일주문에서부터 다시 걸어 올라봅니다. 어젯밤 찻길로 오른 것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허망한 육신의 무게를 다는 것 같은 돌계단이 끝날 즈음, 암문(巖門)이 열립니다. 어둠과 빛을 번갈아 가며 대웅전 앞에 서서 바다로 몸을 돌려 세웁니다. 내 마음 속 미망의 바다를 깨달음의 한바다로 흘려보냅니다. 그런 다음 대웅전 옆으로 바위 문을 지나 원효 스님의 수도처였다는 관음전과 해수관음상에서 다시 바다를 바라봅니다. 한결같습니다.

지금의 향일암은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인 화엄사의 말사로, 전남 문화재자료 제40호로 지정돼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역사는 정확한 기록으로 전해오지 않습니다. <여수군지>와 <여산지>의 기록을 종합하면 원효 스님이 659년(선덕여왕 8)에 원통암이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958년(광종 9)에 윤필 스님이 금오암으로 개명했다 합니다. 그 까닭은 금오산(金鼇山·323m)의 형상이 거북 형상이기 때문이었다 하는데, 형상은 물론이거니와 바위의 육각 무늬도 흡사 거북의 등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후 1712년(숙종 38) 인묵 스님이 주석하면서 금오산 동쪽 기슭에 있던 암자를 현 위치로 옮기고 ‘해를 바라본다’는 뜻의 향일암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릅니다.

최근 들어 향일암은 일출 명소이자 관음기도 도량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 양양 낙산사와 함께 4대 기도 도량으로 불린다 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3대니 4대니 하는 위계적 의미 부여도, 다른 절과의 비교도 별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향일암은 비교 불가능한 존재감으로 거기에 있습니다.  

절문을 나서며 어젯밤의 화두를 다시 떠올려 봅니다. 언제 어디서건 매양 해는 떠오르는 법인데, 나는 왜 먼 길을 떠나 향일암을 가는가? 향일암이 내게 말합니다. ‘네가 발 딛고 선 그곳에서 맞이하는 해를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라. 그것이 향일(向日)의 참뜻일지니.’

<향일암 숙식>
향일암에서 숙식도 가능하다.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무소에서 기도 접수를 하면 숙식이 가능하다. 물론 여행객으로서 누리는 멋대로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한 의사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
남도 어디나 그렇듯 음식은 다양하다. 생선회, 전복죽, 굴구이, 해물탕이 주 메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입맛을 돋우는 건 갓김치. 그 유명한 돌산 갓김치를 맘껏 맛보고 싼 값에 사 갈 수도 있다(3kg에 10,000원).
황토방 식당(카페, 민박) 061-644-4353. 참좋은 식당(민박) 061-644-7504. 다도해횟집(모텔) 061-644-63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