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큰스님의 삶과 수행 ⑨ 활산성수(活山性壽) 대종사

醉月 2011. 1. 7. 08:43

“사람 몸 받은 소중한 시기 정신 바짝 차려 공부하라” 최고령 원로의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참선…

현대 한국불교사 ‘새끼 사자’로 제자들에 본보기

 

유철주 조계종 홍보팀 jayu@buddhism.or.kr

“깨어 있는 동안 절대 눕지 말 것”을 강조하는 성수 스님은 장시간 말씀에도 자세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새끼 사자였다. 절벽에서 떨어져도 다시 기어올라가 어미에게 덤비는 그런 사자 말이다. 작은 입이지만 한번 잡은 먹이는 절대 놓아주지 않는 끈질김과 정글의 맹수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함을 함께 갖추었음은 물론이다.’

활산성수(活山性壽). 대종사를 친견하고 나서 든 생각이다. 88세로 현역 원로의원 중 최고령이지만 사자의 풍모와 위용은 그대로였다. 성수 스님을 뵈러 경남 함양 황대마을을 찾았다. 덕유산 자락에 우뚝 솟은 황석산 아래에 자리한 황대선원은 ‘절’이라기보다 ‘수행공동체’의 느낌이었다. 법당과 선방, 요사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일가’를 이룬 듯하다. 여기서 성수 스님은 재가자들을 지도하며 함께 생활하고 있다. 찾아오는 스님들에게도 언제나 문은 열려 있다.

성수 스님은 해방 전 출가해 1967년 7월 조계사 주지, 1968년 5월 범어사 주지, 1972년 9월 해인사 주지를 지냈고, 1973년에는 서울 세곡동에 법수선원을 열었다. 그리고 1974년 7월 이후 회암사 주지, 고운사 주지, 마곡사 주지, 표충사 주지를 거쳐 1978년 10월 일본에서 열린 세계불교지도자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1981년 1월 18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뽑혔고, 2004년 5월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수지했으며, 2005년 11월 조계종 전계대화상을 지냈다. 한눈에 봐도 수십 년간 다양한 소임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런 ‘사판(事判)’ 경력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스님의 치열한 구도행이다. 아직도 불교계 안팎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다. 그래서 곧바로 여쭈었다.

 

어려서 별명 ‘햇노인’…성암 스님 은사로 출가

▼ 큰스님의 출가 인연이 궁금합니다.

“어려서 별명이 ‘햇노인’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 근처에만 있고 또래 아이들과 놀지 않아서 사람들이 붙여준 별명입니다. 어른들에게 원효 스님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이 되면 원효대사 같은 도인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님은 자라면서 도인을 만나려고 몇 차례 가출을 시도했으나 식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번번이 실패했다. 19세가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을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맏형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출가하지 않고 돌아가신 후 나가면 내가 이 동네에서 눈 뜨고 다닐 수 없으니 날 죽이고 가라”며 말렸다. 동생이 뜻을 굽히지 않자 맏형은 “각서를 써서 동네 어른들에게 도장 받아 오라”고 했다. 맏형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동네에 계시는 13명의 어른에게 일일이 설명하고 도장을 받은 뒤 집을 나왔다.

집을 나와 1년여를 떠돌았지만 도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길 가던 스님에게 “도사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범어사에 가면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스님은 그길로 범어사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서 가장 큰 중 나오라”고 소리쳤다. 깜짝 놀란 스님들이 몰려나와 끌어내려 했지만 스님은 계속해서 “큰 중 나오라”고 떠들었다.

잠시 후 ‘큰 중’이 나와 “총각, 큰 중은 왜 찾는가?”라고 물었다. 스님은 “원효대사 같은 도사를 만나려고 전국을 다녔는데, 도사는 없고 절엔 놀고먹는 중들뿐입니다. 국민들이 절에 와서 같이 놀고먹으니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큰 중’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이 ‘큰 중’이 바로 동산 스님이었다. 스님은 범접할 수 없는 동산 스님의 기세에 더 대응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범어사에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성수 스님은 도사 찾기를 포기하고 산에 들어갈 생각으로 스님들한테 “근처에서 가장 큰 산이 어디냐?”고 물었다. 스님들은 양산의 천성산을 추천했다. 그길로 천성산으로 향한 스님은 내원사를 찾아갔다. 내원사 스님들에게 천성산에서 가장 높은 암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조계암에 가보라고 해서 또 발길을 돌렸다. 성수 스님은 조계암에서 은사인 성암 스님을 만났다.

 

범어사 주지 시절 강원 졸업식 사진.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성수 스님.

 

▼ 성암 스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성암 스님은 열한 살에 사서삼경을 떼고 한학에도 능통했던 분입니다. 당시 남방 제일선원이 있던 내원사 주지를 맡을 정도로 살림 능력도 있었습니다. 내원사 주지를 했을 때 논 170마지기를 지어 대중을 먹여 살렸습니다. 해방 전에는 두 달 반 동안 1보 1배로 만주까지 가서 수월 스님을 찾아뵙고 가르침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 후 남방으로 내려와 경허 스님의 둘째 상좌인 혜월 스님 밑에서 공부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현대 한국불교에서 큰 업적을 남겼던 일타 스님과 일각 스님도 성암 스님에게서 글을 배웠습니다. 나중에 예순이 넘어 입적하셨는데, 당신이 갈 것을 예감하고 사흘 동안 공양을 물린 채 좌선을 하다가 곁에서 함께 정진하던 저의 손을 잡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 공부는 어떻게 하셨나요?

“처음 1년은 은사 스님이 그냥 저를 지켜보셨습니다. 저는 그때 다른 것은 입에 대지 않고 여름에는 채식만 하고 겨울엔 풀잎가루를 물에 타먹으며 나무를 해다 불을 때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 스님이 저를 불러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부 생각이 없었지만 은사 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어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스님은 바로 ‘초심(初心)’을 가지고 오라 하셨어요. 한나절 만에 다 외웠더니 ‘발심(發心)’도 보라고 하셨습니다. 발심도 한나절 만에 다 봤습니다. 나중에는 ‘자경문(自警文)’까지 3일 만에 다 봤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이 ‘초발심자경문’을 10만 독 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념으로 해 49일 만에 10만 독을 해서 외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암 스님을 은사로 정식 출가했습니다. 1944년 3월 15일이었습니다.”

출가 직후 성수 스님은 은사 스님을 따라 태백산 갈래사(지금의 정암사) 적멸보궁에서 한 철을 났다. 은사 스님이 먼저 내려가고 수행을 계속하던 중 산을 찾아온 사람들이 광복됐다는 얘기를 해줘 산을 내려와 다시 내원사로 갔다. 잠시 내원사에 머물던 스님은 은사 스님의 추천으로 해인사로 향했다.

 

▼ 해인사에서 여러 선지식(善知識)을 모셨다고 하던데요.

“해인사에 갔더니 구산 스님과 청담 스님이 공양주를 하라고 권했습니다. 내가 말을 안 들어 조실인 효봉 스님에게 불려갔습니다. 효봉 스님이 하심(下心)하는 마음으로 공양주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성수 스님은 “큰스님, 상심(上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하심(下心)하라고 하면 그것이 되겠습니까?”라고 따졌다. 효봉 스님이 “너는 그럼 무엇 하러 왔나?”라고 물었다. “도를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성수 스님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에 효봉 스님이 “무자(無字)가 도이니 7일 안에 해결하라”고 했다. 성수 스님은 14일의 기간을 달라고 했다. 효봉 스님은 “무자를 14일 안에 해결하지 못하면 내 주장자에 맞아 죽어도 아무 말 못한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어라” 해서 성수 스님은 서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성수 스님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정진하다 6일 만에 우연히 머리와 몸에 서늘한 향기가 돌더니 몸과 마음이 마치 비 온 뒤 갠 날씨와 같아지는 체험을 했다. 그길로 효봉 스님에게 달려갔지만 효봉 스님은 도가 아니라고 했다. 화가 난 성수 스님은 “내가 가져온 것이 도가 아니면 효봉의 도를 내놓아라!”며 효봉 스님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효봉 스님은 “내놓고 있는데 네가 보지 못한다”고 했다. 이에 성수 스님은 “천하의 만물은 무비선(無非禪)이요, 세상만사는 무비도(無非道)”라고 읊었다. 스님의 오도송(悟道頌)이다. 그러자 효봉 스님은 껄껄 웃었다. 그 뒤로도 성수 스님은 큰스님들 방을 수시로 찾아가 애를 먹였다. 성수 스님은 구도자의 본분이 묻고 배우는 데 있다는 것을 이 일화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성수 스님은 “공부하는 수좌는 서른 전에 공부를 마친다고 생각하고 까불어야지, 나이 들면 그리도 못한다고 했다. 나는 강원 문턱에도 안 가고 설쳐대다 3년 뒤 해인사에서 계를 받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행자시절을 마감했다. 스승을 잡아먹겠다는 용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구도 과정을 겪고 비로소 효봉 스님의 한없는 은혜를 헤아리고 몸 둘 바를 몰랐다. 고집스럽기만 했던 나의 구도 자세는 막을 내리고 만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깨달음? 1000대 맞으면 얘기해주겠다

 

덕유산 황석산 아래에 자리한 황대선원의 활산교에서 성수 스님이 불자와 이야기하고 있다.

 

▼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회초리 3개를 가져와서 1000대를 맞으면 얘기해주겠습니다. 방귀를 뀌어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경지입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를 가진 납자가 오면 춤을 추겠습니다. 깨달음 자리에 가려면 먼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없애야 합니다. ‘내가 없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정진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아상은 자아에 대한 고집, 인상은 인간에 대한 고집, 중생상은 중생에 대한 고집, 수자상은 수명에 대한 고집을 말한다. 중생이 갖고 있는 ‘상’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다.

 

▼ 화두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선(禪)은 누가 일러줄 수 없는 자오자득(自悟自得)의 길입니다. 싯다르타 태자는 화두를 탄 일이 없습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새벽별을 보고 대각을 이루었는데, 싯다르타가 새벽별에게 화두 달라고 마음 낸 일도 없고, 새벽별도 화두를 준 일이 없습니다.

화두는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지엄선사가 화두를 하나 받기 위해 벽송선사에게 10년을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을 들여도 화두를 일러주지 않아 하도 억울하고 원통해서 항의를 하며 울고 돌아서 내려가는데, 벽송선사가 ‘지엄아, 지엄아!’ 하고 부른 데서 깨달았습니다. 스스로 깨달은 것이지 화두로 깨달은 게 아닙니다. 지엄선사가 간절한 마음을 내도록 해준 벽송선사가 진정한 선지식입니다.”

스님은 “화두를 받으러 오는 대중은 많지만, 견성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내 목을 베어가도 좋다”고 했다. 도(道)가 무엇인지 알고 닦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수십 년을 공부해도 모른다는 것이다. 스님은 또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도 도인 행세하는 사람이 많다”며 “남의 다리 긁는 일은 그만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스님은 “교리나 화두라고 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다. 죽고 사는 근본 문제, 그 생사의 도리 자체가 화두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본 의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 법수선원, 해동선원, 황대선원을 세우셨습니다. 많은 도량을 세운 이유가 있을 듯합니다.

“‘한곳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면 안 된다’ ‘묵은 땅에서는 새 사람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973년 서울에 법수선원, 1994년에 황대선원, 2002년 산청에 해동선원을 열었습니다. 이렇게 선원을 세우는 것은 경봉 스님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40여 년 전이었습니다.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 스님이 ‘명인도사가 쉽지 않고 흔치도 않은데, 자네가 금년 안으로 50년 지도한 결과를 내보이라’면서 등을 세 번 두드려주셨습니다. 그래서 평생 명안종사를 배출하는 선원을 만들자고 생각하고 불사를 해온 것입니다.”

세 곳의 절 모두 그리 크지는 않지만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선하는 재가자로 늘 붐빈다.

 

부처님 법 실천 수행하면 극락세계

▼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생활 원칙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절대 눕지 말 것, 많이 먹지 말 것, 새벽예불에 반드시 참여할 것, 휴지 한 장도 아낄 것, 잡기에 손대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서울 법수선원 주지 영주 스님은 “은사 스님은 출재가를 막론하고 법거량을 받아주며, 경책하고 탁마하는 법문을 많이 내리신다”며 “실천에서 우러나온 말씀이 많기 때문에 후학들이 정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예전이나 현재나 변함이 없으시다”고 전했다. 또 “은사 스님은 지금도 매일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나 저녁 9시에 주무실 때까지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며 성수 스님의 철저한 일상생활을 전했다.

 

▼ 스님과 불자들은 어떻게 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람의 몸 한 번 받는 것이 사천(四天) 위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사바세계에 겨자씨를 꽂게 하는 것보다 어렵다는데, 이런 사람의 몸을 받았으니 해야 할 일을 모두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 귀중한 몸을 아무렇게나 내던지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서 소중한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이 보물은 바로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참된 정신입니다.”

성수 스님은 그러면서 “혜가 스님이 달마 스님에게 법을 구하던 그런 자세가 요즘 스님과 불자에게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법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 종단의 원로로서 종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 법을 그대로 실천 수행하면 현재 이대로가 극락세계가 되고, 부처님 배 속에 들어가도 마음이 어지럽고 흐트러지면 곧 지옥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한마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문을 알고 무릎을 치면 산과 들이 모두 내 것처럼 반갑습니다. 부처님은 49년을 설하고 ‘설한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진리와 도는 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말과 글 밖의 도리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불법(佛法)의 도리를 제대로 알 때 마음도 열린다는 성수 스님의 말씀은 끝없이 이어졌다. 장시간의 말씀에도 흐트러짐 없는 스님의 모습이 놀라울 뿐이었다. 덕유산 줄기처럼 굽이굽이 이어지는 감로수(甘露水) 법문에 환희심이 절로 났다. 산이 높을수록 계곡은 깊고 그 안에서 뛰노는 생명이 많다는 것을 성수 스님을 보면서 다시 확인했다.

 

성수 스님과 봉암사 결사
3개월 머물며 공부…만신창이 한국불교 바로 세우기


1947년 현대 한국불교의 출발점이 된 ‘봉암사 결사’가 있었던 봉암사의 태고선원.
성수 스님은 봉암사 결사에 참여해 공부했다. 결사에 참가하게 된 과정과 공부 일화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
“해인사에 있다 보니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 등이 결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봉암사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스님들이 공부에만 진력하기로 했다기에 기대가 컸습니다. 봉암사에 가니 17명의 대중이 있었습니다. 좌장 노릇을 성철 스님이 했는데, 하루는 스님이 ‘능엄주’를 외우자고 했습니다. ‘참선하러 왔는데 이것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른 스님들이 시켜서 했습니다. 그때 성철 스님이 3일 만에 외우고 보문 스님은 5일, 내가 7일 만에 다 외웠습니다. ‘능엄주’가 끝난 뒤 자운 스님의 제안으로 ‘범망경’을 외웠습니다. 성철 스님이 5일, 보문 스님이 7일, 내가 10일 만에 또 다 외웠습니다. 공부를 잘하니 자운 스님이 저를 눈여겨보셨는지 하루는 막국수 7그릇을 사줬습니다. 그러고는 율사(律師)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저는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자운 스님이 권하셔서 저의 뜻을 밝히고 그길로 봉암사에서 나와버렸습니다. 참선공부를 하려던 나에게 율을 공부하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어 떠나온 것입니다.”
성수 스님은 봉암사에서 약 3개월 동안 공부했다.
‘봉암사 결사’는 현대 한국불교의 출발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성철, 자운, 우봉, 보문 4명의 스님이 1947년 가을 시작한 이후 결사 정신에 공감한 전국의 납자가 줄줄이 그 뒤를 따라 입산했다. 성수 스님을 비롯해 청담, 향곡, 혜암, 월산, 법전, 지관 등 훌륭한 스님들이 결사에 참여했다.
성철 스님 등은 봉암사에서 일제를 거치며 만신창이가 된 한국불교를 바로잡고자 결사를 단행했다. ‘부처님 법대로’를 기치로 내걸었다. 당시 스님들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만들어 생활의 지표로 삼았다. 16가지 규약에는 스님들이 손수 농사를 짓고 밥을 해먹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등이 포함돼 있다. 4명의 종정과 7명의 총무원장을 배출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봉암사 결사는 현대 조계종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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