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슬람-기독교 문명 충돌 들먹이나
» 다마스쿠스 구시가지 중심에 자리한 우마야드사원의 예배당 안에 세례 요한의 머리가 안치된 화려한 무덤을 관광객들과 신도들이 구경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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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에서 밤 비행기로 2시간 45분만에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에 도착했다. 미수교국이라 공항에서 입국 비자 받기가 쉽지않을 것으로 걱정했는데, 뜻밖에 20분도 채 안 걸려 비자를 내주었다. 통관도 무난하고 관리들도 사뭇 친절했다. 한때 ‘경색’됐던 시리아도 이제는 빗장을 많이 풀었다고 한다.
다마스커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다. 지금은 아랍어로 ‘디마슈끄’라고 하지만, 옛날엔 ‘샴 카비르’(약칭 ‘샴’)라고 했다. 어원과 관련해서는 그리스 신화의 다마스가 이곳에서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스켄(술 담는 부대)을 준 데서 유래(‘다마스켄’) 했다는 설과 물의 신의 아내 ‘다마키나’의 이름과 연관시켜 ‘물을 댄 땅’이란 설 등이 있다. ‘디마슈끄’는 고대 셈어 ‘디마쉬카’의 음사란 주장도 있다. 신화나 고대 셈어에서 유래를 찾을 정도로, 도시의 역사는 유구하다.
아시리아 페르시아 셈 로마 비잔틴…
흥망성쇠 거듭하며 융합문화 꽃피워
이슬람사원서 세례 요한 무덤도 ‘경배’
교황 바오로 2세 “위대한 종교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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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윤산 동남 기슭에 펼쳐진 ‘에메랄드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구타 오아시스에 자리잡은 다마스쿠스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일찍이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기원전 2천년께 아람인들이 소왕국을 세운 이래 아시리아, 페르시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87년 아랍 셈족이 처음 도읍 삼아 나바티야 왕국을 세웠으나 얼마 못 가 로마제국의 내침으로 멸망한다. 뒤이어 비잔틴제국 영역에 편입되어 기원 전후 수백년 동안 그리스-로마, 기독교 문명에 훈육된다. 635년 아랍-이슬람군에게 정복되어 우마이야왕조 아랍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초기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로 떠오른다. 그러나 아바스왕조 시대에 수도가 바그다드로 옮겨가면서 지위는 떨어진다. 10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일어난 파티마왕조의 속지로 변했고, 400년 동안 십자군과 몽골군, 티무르군의 내침을 받아 파괴와 재건을 거듭했다. 16세기 초부터는 오스만제국의 속주로 있다가 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의 식민도시로 전락했고, 1943년 시리아의 독립 수도가 되었다.
‘시대의 동반자’ ‘동방의 낙원’ 칭송
이처럼 다마스쿠스는 4천여년 동안 숱한 침탈 속에서도 폐허가 되어 터전을 잃은 적이 없었다. 그 속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비롯해 페르시아·헬레니즘 문화, 그리스-로마와 비잔틴-이슬람 문명, 프랑스 문명 등의 세례를 받으면서 여러 문명들을 융합시켜 특유의 복합 문화를 꽃피웠다. 그래서 흔히 ‘시대의 동반자’, ‘동방의 낙원’이라 부른다.
중세 이곳을 찾은 아랍 시인 누룻 딘은 이렇게 읊었다. “다마스쿠스, 행운이 가득한 우리네 집, 아득한 하늘가 너머의 그 축도/ 갈대가 춤추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이 만개하고 물이 출렁이는 곳/ 현현(顯現)한 온갖 산해진미, 훗훗한 거목의 녹음에 감싸였네/ 계곡마다 ‘모세의 샘’이 솟고 화원마다 푸르름 넘치네”
역사의 고비를 슬기롭게 헤쳐온 다마스쿠스가 ‘시대의 동반자’답게 오늘까지 빛내고 있는 미덕 중 하나가 기독교와 이슬람을 한 품에 아우른 문화다.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 사이의 해묵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에서 이 점은 더욱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미덕을 잘 보여주는 몇 곳을 답사지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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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답사지로 기독교인들(시리아 인구 2천만명 중 13%)의 거주구역인 바붓 샤르크의 아나니아 교회를 찾았다. ‘교회의 핍박자’였던 성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개종해 전도사로 다시 태어난 신앙적 탄생지다. 돌계단으로 지하에 내려가면 작은 교회가 있는데, 벽에 바울의 역정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걸려 있다. 또 근처에 바구니를 타고 피신하는 바울을 그린 성화 등 유물들을 소장한 기념교회도 있다. 기독교 순례지인만큼 몇몇 외국 순례객들이 눈에 띄었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구시가지 중심부의 우마야드(바니 우마야) 사원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네 번째 신성한 곳으로 알려진 이 사원은 705년 우마이야 아랍제국의 6대 칼리파 왈리드가 세운 아랍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규모면에서 유수의 대사원일 뿐 아니라, 건축술에서도 아랍 모자이크 예술의 백미다. 넓은 대리석 광장을 지나 동서 길이 130여m의 예배당에 들어서면 화려한 벽장식과 건축술에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1326년 이곳을 둘러본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가 묘사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섬세하며 우아하고 완벽한 사원이다. 견줄 만한 사원은 어디에도 없다”고 감탄하면서, 비잔틴왕이 칼리파에게 공장 1만2천명을 보내 이슬람사원 개축을 도운 사실도 기록해놓았다. 바투타는 또 이 사원의 특출한 공덕을 기리면서 “이 사원에서의 1배는 다른 곳의 3만 배와 맞먹으며”, “세계가 궤멸된 뒤에도 사람들은 여기서 알라를 무릇 40년 동안 신봉하게 될 것”이라는 한 성훈학자의 예언도 인용했다.
이 사원이 지닌 또다른 특별한 의미를 우리는 오랜 풍상 속에서도 기독교, 이슬람교가 어우러진 현장이란 사실에서 찾게 된다. 원래 이곳은 원주민 아람인들이 하다드(비와 땅을 주관하는 최고신)를 모신 신전이었으나 로마 시대 주피터 신전, 비잔틴 시대에 세례 요한 교회로 변했다가 이슬람 시대 우마야드 사원으로 탈바꿈했다. 이를테면 중층적인 다종교 성역인 셈이다. 지금도 예배당 한쪽에는 헤롯왕에게 참수당한 세례 요한의 머리가 안치되었다는 무덤이 있다. 한 종교의 사원 안에 묻힌 다른 종교의 성자를 경배한다는 건 보통 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가능하다. 기독교를 포함한 다른 종교 성자들을 자기 종교 성자들처럼 경배(신앙 4조)하기 때문이다.
도시 곳곳 초기 기독교 전설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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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2001년 5월 사원을 찾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무슬림들 앞에서 “위대한 종교공동체인 이슬람과 기독교를 존경할 만한 대화의 집단으로 만드는 게 열렬한 소망”이라고 연설해 박수갈채를 받은 바 있다. 갈등 아닌 대화가 종교 본연의 사명이 아닌가. 이 사원은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묻건대, 세계문화유산치고 이런 심원한 뜻을 지닌 곳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우마야드사원 곁에는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수크 하미디야’(하미디야 시장)란 재래시장도 붙어있다. 명성에 걸맞게 갖가지 토산품과 외래 상품들로 차있다. 특히 화려하고 부드러운 ‘다마스쿠스 비단’은 유명하다. 신앙의 장소와 삶의 공간이 하나되는 이슬람의 정교합일 이념을 잘 구현한 현장이다.
해가 뉘엿거릴 무렵, 서쪽 카시윤산 중턱 전망대에 올랐다. 시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현대적 고층건물들이 띄엄띄엄 있다. 로마시대 성채 잔해와 바르다강이 실오리처럼 아른거린다. 지금은 현장을 찾을 길이 없지만, 이 산에는 초기 기독교와 관련된 여러 전설들이 깃들어 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산 어느 동굴에 피신했고, 이 산 어디에 아브라함이 탄생한 동굴과 모세의 묘가 있으며,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의 은신처도 있었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이런 내용들이 경전 〈꾸르안〉(코란)에 실려 있어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유대교나 기독교 발생지인 가나안, 이스라엘과 가깝고, 기원 전후해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그리스어권과 더불어 시리아권을 문화적 배경으로 기독교가 태동했다는 등의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전설을 한낱 낭설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카시윤산은 초기 기독교와 인연이 있는 성산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이븐 바투타도 “이 산은 길상으로 유명하다”고 했던 것이다.
다마스쿠스의 어제에 얽힌 기독교와 이슬람의 어우러짐을 실감하면서, 이른바 문명간 ‘충돌’ 운운하는 현대인들의 무지와 편견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다시금 자성해 본다. 이젠 ‘충돌’ 아닌 대화와 공존을 모색해야 할 때다. 답사가 그 모색에 일말의 단서라도 제공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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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종통 찬탈’이 수니-시아파 분열의 씨앗
우마이야왕조의 100년 영화
다마스쿠스는 이슬람을 세계 제국화한 7~8세기 우마이야(옴미아드) 왕조와 한몸의 운명 공동체였다. 이미 실크로드의 교차로에 자리잡아 로마시대부터 번영했던 고도였지만 우마이야 왕조 시대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서방 실크로드는 물론 당대 세계의 수도이자 중심이 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원래 아라비아 메카에 모여살던 쿠라이슈 부족의 상인가문이 일으킨 일종의 쿠데타 정권이다. 시리아 태수 겸 장군이던 가문의 실력자 무아위야가 656~661년 이슬람 공동체에서 벌어진 왕위 찬탈전에 끼어들어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인척인 4대 칼리프 알리의 권좌를 빼앗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왕위 찬탈은 이른바 이슬람 역사에서 수니-시아파 종파의 분열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창시자 무함마드와 그의 일족으로 이어지는 칼리프의 신성한 종통을 가로챈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정치적 인정 여부를 놓고 인정하자는 수니파와 거부해야 한다는 시아파 세력으로 무슬림이 분열한 것이다.
정통성 보완을 위해 정복사업과 상업활동에 매진한 우마이야 왕조는 서쪽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북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 북인도까지 아랍권에서 유례없는 세계 제국을 형성한다.
넓어진 교역 경제의 열매를 가장 마음껏 누린 도시는 당연히 도읍 다마스쿠스였다. 하지만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왕조에 대한 무슬림들의 증오와 의구심은 더욱 높아져갔다. 칼리프 자리를 거머쥔 무아위야 1세는 부족회의로 후계자를 정하는 관행을 무시하고 아들(야지드 1세)에게 왕위를 세습했고, 후대 왕들도 세습 정책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많은 아랍인들은 이 왕조를 아랍왕국으로만 부를 뿐 자신들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당대의 증오는 후대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1400~01년 정복군주 티무르는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에게 불경하게 대했던 우마이야 왕조의 과거사를 심판한다는 구실로 다마스쿠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대학살과 방화로 우마이야 모스크를 비롯한 도시 주요 시설이 모두 불타고, 직조공, 도공 등의 장인들은 사마르칸트로 끌려갔다. 다마스쿠스가 영원한 폐허가 될 뻔했던 이 참극은 이 도시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던 우마이야 왕조의 700여년 전 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750년 이란에서 무함마드의 일족인 아바스가가 정통성 회복을 기치로 반란을 일으키자 무너진다. 아바스 혁명왕조가 새 계획도시 바그다드로 도읍을 옮기면서 다마스쿠스의 오랜 영화도 끝장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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