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선시(禪詩)감상_03

醉月 2010. 12. 27. 08:40

강설(江雪)

 

千山鳥飛絶
萬徑人踪滅
孤舟蓑笠翁
獨釣寒江雪


눈 덮힌 천산에 산새도
날지 않고
길에는 사람 자취도 없네!
외로운 배
도롱이 삿갓 쓴 노인이
홀로 차가운 눈 속에
낚시를 드리우나!

 

유종원(柳宗元, 773~819)
중당기(中唐期)의 시인, 자 자후(子厚). 장안(長安) 출생. 유하동(柳河東)·유유주(柳柳州)라고도 부른다. 관직에 있을 때 한유(韓愈)·유우석(劉禹錫) 등과 친교를 맺었다. 혁신적 진보분자로서 왕숙문(王叔文)의 신정(新政)에 참획하였으나 실패하여 변경지방으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좌절과 13년간에 걸친 변경에서의 생활이 그의 사상과 문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고문(古文)의 대가로서 한유와 병칭되었으나 사상적 입장에서는 서로 대립적이었다.
시는 산수의 시를 특히 잘하여 도연명(陶淵明)과 비교되었고, 왕유(王維) ·맹호연(孟浩然) 등과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하였다. 송별시 ·우언시(寓言詩)에도 뛰어나 우분애원(憂憤哀怨)의 정을 표현하는 수법은 굴원(屈原)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시문집 《유하동집(柳河東集)》이 있다.

 

장졸선사 오도송

 

光明寂照徧河沙
凡聖含靈共我家
一念不生全體現
六根纔動被雲遮
斷除煩惱重增病
趣向真如亦是邪
隨順世緣無罣礙
涅槃生死等空花

 

광명이 고요하게 비추어
河沙에 두루하니
범부성인이 다
한 집안이더라.
한 생각을 내지 아니하면
전체의 모습이 보이지만 
六根이 움직이면
어두운 구름이 가리나니라!
번뇌를 없애려고 하면
                                        더욱 병만 불어나고
                                        진리에 달리려고 하면
                                        더욱 삿되나니라!
                                        세상 인연따라
                                        걸림이 없으면
                                        열반과 나고 죽음도
                                        허공의 꽃인 것을

장졸수재(張拙秀才)
당대(唐代)스님. 성은 “장”, “졸”은 이름이다. 수재는 당시 선비를 뽑는데 효렴(孝廉) 수재(秀才)의 두칭이 있었는데, 졸은 이 수재에 뽑힌 것이다. 청원(靑原行思)하 6세로 석상 경저(石霜慶諸)선사의 법을 이었다. 처음 석상에게 참예하니 묻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장이고 이름은 졸입니다.” “공교한 것(巧)도 오히려 얻을 수 없는데 졸(拙)이 어디서 왔느냐?”하는 데서 홀연히 깨치고 위의 게송을 지어 바쳤다고 한다.

 

 

삼매 가운데

定中見解最高圓
硬把乾坤比一拳
七冊金門開次第
這般心事淨如蓮


삼매 가운데 참된 앎이
가장 원만함이여
하늘 땅 잡아서

한주먹에 비유하노라
法華經 다 읽고나니
내 마음이여
깨끗함이 연꽃 같음이여
 

산중우음

 

一塢雲霞只寂然
十年甁鉢遠人煙
遙知槐穴千鍾祿
不博松窓半日眠
 


저 언덕 구름과 노을
참으로 적적함이여
십 년이 넘도록
                                                             산중행각이여 
                                                             사람과 인연 멀어졌네! 
                                                             화려한 왕후장상이라지만 
                                                             소나무 창문에 기대어
                                                             꾸벅 조는 半目禪을

                                                             어찌 바꿀까!

 

연파(蓮坡, 1772∼1811)
조선시대 승려로 대둔사 혜장(惠藏)의 법호.
조선 승려. 호는 연파(蓮坡) 또는 아암(兒庵). 자는 무진(無盡). 색금현에서 출생. 어려서 대둔사에서 출가하고 월송 재관(月松 再觀)에게 구족계를 받다. 주역과 논어를 즐겨 읽고, 춘계 천묵(春溪 天默)에게 내외 경전을 배우고, 다시 연담 유일(蓮潭 有一)과 운담 정일(雲潭 鼎馹)에게 내전(內典)을 연구함. 27세에 정암 즉원(晶巖 卽圓)의 법을 받고, 30세에 두륜산 대흥사의 강석(講席)을 맡다. 특히 내전에서는 능엄경과 기신론을 좋아하고 변려문(儷麗文)을 잘하다. 조선 순조 11년 40세에 입적함.

 

탁한 것은 탁한 대로

 

濁者自濁淸者淸
菩堤煩惱等空平
誰言卞壁無人鑑
我道驢珠到處晶
萬法泯時全體現
三聖分別假安名
丈夫自有衝天氣
幕向如來行處行
 

탁한 것은 탁한 대로
                                    맑은 것은 맑은 대로
                                    보리대로 번뇌대로
                                    원래 허공처럼 평등하도다.
                                    누가 변화의 옥을
                                    감별 못하겠는가.  
                                    흑룡의 구슬은
                                    저절로 빛나도다.
                                    만법이 사라질 때에 참된 모습 드러나니
                                    부처님 말씀도
                                    그냥 이름만 붙일 뿐이라네!
                                    장부의 하늘을 뚫을 기운
                                    굳이 부처님의 길을 따르랴!
 

동안상찰 (同安常察, ? ∼961)
중국 송대(宋代)의 스님으로 청원행사(靑原行思)의 6세손이며 동안(同安)은 오래 주석한 사명(寺名)이고 상찰(常察)은 호(號)이다. 저서로 열 수의 율시(律詩)가 실린 <<십현담(十玄譚)>>이 있다.


 맑고 텅빈 노래(淸虛歌)

 

君抱琴兮倚長松
長松兮不改心
我長歌兮坐綠水
綠水兮淸虛心
心兮心兮我與君兮


그대 거문고 품고 오렴
난 긴 소나무에 의지함이로다.
긴 소나무에 지조를 고치지 않음이로다.
길게 노래 부르고 푸른 물가에 앉도다.
푸른 물이여 맑고 텅빈 마음이로다.
마음이여, 마음이여
나와 그대는 한몸이로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
조선스님. 자는 현응(玄應). 속명은 여신(汝信).
묘향산(妙香山 즉 西山)에 오래 있어 서산대사라 함. 속성은 최씨. 안주출신.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안주목사(牧使) 이사증(李思曾)의 양자로 입적.
성균관에서 공부하다 진사과에 낙방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숭인(崇仁)에게 출가하여, 이후 영관에게서 법을 얻고, 30세에 승과에 급제하고 이어 선교양종판사의 지위에 오름.
이후 여러 곳을 유력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8도(道) 16종(宗) 도총섭이 되어 승병을 모집,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움. 75세에 제자 사명 유정에게 병사를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 휴정은 좌선 견성을 중히 여기며 교종을 선종에 포섭함으로써 조선 불교가 조계종으로 일원화되는 기틀을 마련함.
저서로는 선가귀감(禪家龜鑑), 선교석(禪敎釋), 삼가귀감(三家龜鑑), 청허집(淸虛集) 등 4권이 있음.

 

먼 空劫으로도

迢迢空劫勿能收
豈爲塵機作繫留
妙體本來無處所
通身何更有蹤由
靈然一句超群像
逈出三乘不假修
撒手那邊千聖外
廻程堪作火中牛


空劫으로도 거두지 못하거늘
어찌 세속 번뇌에 묶이겠는가
의 본체는 본래 장소가 없음이여.
온몸이 다 그 어디 있으리요.
신령스러움이 삼라만상 뛰어넘어
멀리 三乘 벗어나 수행을 아니 빌릴세
千聖 밖에 손 털어 버리니
길 되돌아와 불 속에 白牛 모습이여!

 

동안상찰 (同安常察, ? ∼961)
중국 송대(宋代)의 스님으로 청원행사(靑原行思)의 6세손이며 동안(同安)은 오래 주석한 사명(寺名)이고 상찰(常察)은 호(號)이다. 저서로 열 수의 율시(律詩)가 실린 <<십현담(十玄譚)>>이 있다.

 

꽃은 뜨락에

花笑階前雨
松鳴檻外風
何須窮妙旨
這箇是圓通

 

꽃은 뜨락에
내린 빗물에  미소짓고
소나무는 난간 밖
바람에 운다.
어찌 진리를 구하랴!
이 경계가 바로
원통의 소식인 것을!

 

벽송지엄(碧松智儼)
조선시대 승려. 벽계정심(碧溪正心)의 법을 이은 지엄(智儼)의 법호.
태고보우(太古普愚)의 5세손. 속성은 송씨(宋氏). 부안(扶安) 사람이다.
세조 10년(1464) 탄생. 전공(戰功)을 세우고 돌아오다가 느낀 바 있어 계룡산(鷄龍山) 조징대사(祖澄大師)에게 입산하였다. 벽계정심(碧溪正心)에게 전등(傳燈)의 밀지(密旨)를 연구. 중종 3년 금강산 묘길상암 (妙吉祥庵)에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보다 불성무(佛性無)의 이야기에서 깨달음. 온갖 산(山)을 유화(遊化)하였으며 중종 29년(1534) 겨울 문인들을 수국암(壽國庵)에 모이게 한 후 《법화경(法華經)》을 강하다가 방편품(方便品)에 이르러 탄식, 게송을 읊은 다음 시자를 불러  차 한 잔을 부탁, 입적하였다. 춘추 71세.

明月이 소나무 사이로

 

明月松間照
淸泉石上流
竹喧歸浣女
蓮動下漁舟
隨意春芳歇
王孫自可留


明月이 소나무 사이로 비추이고
淸泉이 돌 위로 흐르는구나.
대나무 사각거리니
빨래 빠는 여인이 돌아가고
연잎이 흔들거리니 어부가 지나가누나.
봄꽃은 피고 지지만
나의 主人公은 함께 하누나.

 

왕유(王維/699?/701?∼761?)
당(唐)나라의 시인ㆍ화가.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ㆍ좌보궐(左補闕)ㆍ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위응물(韋應物)·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청학폭포(靑鶴瀑布)

 

六月飛霜雪
渾身冷似鐵
聲搖洞壑心
色奪虛空骨

 

유월 불더위에
서리와 눈이 내리고
온몸 차갑기가
쇳덩이와 같구나.
물소리는 계곡의
심장을 흔들고
폭포의 색깔은
허공의 뼈마저
빼앗아 버리네!

 

서산대사 휴정(1520∼1604)
조선 중기의 승려였으며 속명은 최여신인데 보통 서산대사라 불린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1534년 진사 시험에 떨어진 뒤 지리산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승과에 급제하여 봉은사 주지가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나이로 승병을 모집하여 서울을 되찾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선종과 교종으로 분리된 불교를 통합하는 데 힘썼으며, '삼교 통합론'을 내세워 유교·불교 ·도교를 하나로 합치려는 노력을 하였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고승으로 시와 문장에도 뛰어났으며, 저서에는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 <운수단>, <설선의> 등이 있다.

 

옛대밭에

舊竹生新筍
新花長舊枝
雨催行客路
風送片帆歸


옛대밭에
새죽순이 나고
새로운 꽃이
묵은 가지에서 피누나!
소낙비는
나그네의 길을 재촉하고
바람은 조각배를
포구에 보내누나!

 

야보 도천(冶父 道川)
생몰 연대 미상. 남송대(南宋代) 스님. 속성은 적(狄)씨. 곤산(崑山)출신. 금강반야경송(金剛般若經頌)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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