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나무 위의 소녀
몇해 전 <천녀유혼>이라는 홍콩영화에 매료된 적이 있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글밖에 모르는 샌님, 장국영과 악귀에 의해 키워진 아리따운 원귀, 왕조현과의 사랑이야기. 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과 영가와의 사랑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을 연발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과연 인간이 영혼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사뭇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영화속 샌님에게 왠지 모를 시샘까지 느끼게 되었다. ‘정말 운좋은 놈이군, 저렇게 예쁜 여자 영가와 사랑에 빠지다니…’ 오십평생 수많은 여자 영가들을 봐왔지만 왕조현처럼 예쁜 영가를 만나기란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봐온 여자 영가만 해도 몇 명이던가. 생각해 보면, 인간보다도 훨씬 예뻤던 여자영가도 꽤 여럿 있었던 것은 사실인데…
그럼, 지금껏 내가 봐 왔던 가장 아름다운 여자 영가는 누구였을까. 아마도… 사춘기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던, 그토록 보고 싶었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던 바로 그녀가 아니었을까.
당시 전주초등학교 3학년생이었던 나. 친구들하고 한창 장난칠 나이지만, 상대적으로 혼자서 걷고 생각하길 좋아했던 나는 그날도 방과후 혼자 걷다 땅거미질 어슴푸레한 저녁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
어느덧 골목어귀에 다다랐을까. 마침 골목 끝자락에 흐드러지게 피어오른 벚꽃나무를 보곤 ‘우와- 예쁘다’라고 중얼거리며 벚꽃비를 맞고 싶어 나무밑둥을 있는 힘껏 흔들어 대려는 순간, “너 거기서 뭐하니?”하는 또랑또랑하고 맑은 여자 음성이 들리는 게 아닌가.
놀라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보는데, 나무 중간께 벚꽃보다 하얀 순백색의 여자애가 굵은 가지에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보통 여자애라면 절대로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아주 가볍게 앉아 있는 그녀를 보고선, 어린나이였지만 그녀가 ‘인가’이 아님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에겐 다리가 없었기 때문.
“너 벚꽃 좋아하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이리 올라와 봐!”하며 손짓해, 나는 발버둥치며 그곳까지 올라가려 했지만, 역시나 그녀가 있는 곳은 내겐 너무 멀었다.
그녀는 내가 발버둥치며 올라가려는 모습이 재미있었던지 까르르 웃어대더니 “넌 더 커야겠구나?”고 말하고선, 벚꽃비를 흩날리며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얼마후, 친구 생일파티 때. 모기업 관사에 살던 정모라는 친구의 생일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놀고 있던 중, 무심코 거실에 걸려있던 사진을 봤는데 바로 그 사진속 주인공이 그때 그녀인 것이었다! 너무 놀라 그 사진곁으로 다가가 뚫어져라 사진을 쳐다보자, 친구가 다가오더니 “우리 누나야, 예쁘지?”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나는 당황해 “지금 누나 어디 있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더니 친구는 “지금 없어. 중학교 3학년때 폐결핵으로 죽었거든”라고 말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나는 어린 마음에 “ 나, 너네 누나 본일 있다”라 했더니 “어떻게 우리 누날 봐?”라고 말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길래 “그냥 동네에서 본 적 있어”라고 말하고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렇게 오매불망하며 그리워했던 그 여자 영가가 친구의 누나였단 사실도 놀라웠지만, 친구왈 그녀가 문학소녀였으며 벚꽃나무를 좋아했단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그리워하며 벚꽃나무 밑으로 달려갔지만,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몇 번이나 벚꽃나무 밑에서 그녀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지금도 하얗게 피어오른 벚꽃나무를 보면, 그녀가 생각난다. 저 벚꽃나무 어디에선가 그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외국 영혼과도 말이 통한다?
내 이름은 차길진이다. 이름이야 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름의 속뜻까지 아시는 분은 없을 것이다. 한자로 내 이름을 풀어보면, 길할 길(吉)에, 별 진(辰)으로 ‘용이 길하게 된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예로부터 용이 길하려면 비가 와야 한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비와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을 갖고 있다.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명산 ‘케스킬’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산은 인디언들이 기도를 올리던 성지로서 기도를 위해 사용되는 작은 굴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처참히 살해당한 자신의 부족을 위해 피눈물나는 기도를 올렸던 것이다.
그날, 내가 인디언 지도자 영혼인 ‘크레이스킬’을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사랑하는 부족식구들을 죽이고, 자신들이 애써 가군 광활한 대자연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린 백인들을 저주하며 ‘케스킬’산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영혼과 만난 자리에 서서 억울하게 죽어간 인디언 영혼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그랬더니 구름 한점 없이 맑던 하늘이 갑자기 비구름에 휩싸이더니 이내 장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게 아닌가. 장대비가 되어 내리는 ‘크레이스킬’의 눈물은 그 어떤 눈물보다도 고통과 한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내가 비와 인연이 많은 것도,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 때문이리라.
이렇게 해서 시작하게 된 미국에서의 활동은, 뉴저지 법당이 자리를 잡으면서 본격화됐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뉴저지 법당, 그 자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파렐사이트 파크 애비뉴 502. 이게 그 집의 주소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집 같아도 사실 이 집에는 무시무시한 사연이 숨겨져 있다. 이 집에는 있지만 없는 지하실이 있었던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발로 콩콩-두드리면 분명 ‘공간’이 있다는 공명 소리가 들리는데, 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비밀 지하실의 존재…. 이것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나중에 이 근처에서 오래 살아온 노인분에게서 들은 말인데, 이 집의 원래 주인은 유태인으로 그 비밀 지하실을 인쇄소로 개조해 운영해 오다, 무슨 이유에선지 이 지하 인쇄소에서 무참히 살해당해 죽었고, 남은 가족들은 죽음의 흔적을 덮고 싶었는지 지하실을 깨끗이 막아버렸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자, 나는 ‘바로 이곳이야!’ 싶었다. 왜냐하면 구명시식을 위해선 영혼이 상주하는 터여야 하는데, 이 집은 유태인의 원혼이 있는 터였기 때문에 구명시식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장소였다.
드디어 미국에서의 첫 구명시식 날. 나는 그 유태인 원혼을 위해 한국에서는 제사음식에 올리지 않는 바나나와 망고 등을 잔뜩 올려놓고 시작했다.
그 구명시식에는 정계 유력 인사셨던 고(故) K씨의 여동생되시는 분과 한국의 대표적 신흥종파의 간부, 교포사회에 덕망높은 교회 장로님, 이렇게 세분이 참석하셨다.
어떻게 보면, 내가 몸담고 있는 불교와는 인연이 없어 보이는 분들과 첫 번째 구명시식을 올리게 된 셈이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구명시식은 성공적이었다. K씨의 여동생은 오빠 K시에게 구명시식을 올린 뒤 받게 된 간이식수술이 무사히 끝나,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생활하고 계신다고 한다. 또한 신흥종파의 간부라시는 분은 알코올 중독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영혼을 천도드렸고, 교회장로님께서도 그렇게 뵙고 싶어하시던 어머님 영가와 만나시는 등 너무나 뿌듯하고 감동적인 자리가 된 것이다.
이렇게 무사히 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집에서 살해당한 유태인 영가 덕분이었다.
그는 구명시식 도중 나에게 뉴저지 후암정사를 지켜주는 수호신이 되어 주겠다고 말해, 나의 마음을 징하게 만들었고, 그후로도 만 4년동안 뉴저지 법당에서 구명시식을 할 때마다 처음의 약속을 지키듯, 매번 제일 먼저 찾아와, 영혼들의 길잡이를 해주는 등 뉴저지 후암정사의 터주대감으로서 성과 열을 다했던 것이다.
유태인 영혼과의 아주 특별한 우정. 지금도, 뉴저지 후암정사를 생각하면 그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마피아와 다이어트
뉴저지에 후암정사를 세운 뒤에는 그야말로 색다른 날의 연속이었다. 미국이란 나라가 워낙 땅도 넓고 사람도 많고 인종도 다양해서 특별하고 재미난 사건들이 어찌나 많은지, 찾아오는 사람마다 차마 말로 다 못할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한나절로도 부족하기만 했다.
당시 미국은 ‘다이어트 열병’을 앓고 있었다. 내가 만난 재미교포 아가씨도 다이어트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여동생과 함께 연극의 거리 브로드웨이에서 꽃집을 운영해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이쯤되면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라는 노래가 떠오를 법도 한데 그녀의 몸은 비만의 표준, 그 자체였다. 꽃집이 잘되는 것은 좋은데 그와 비례해 닥치는 대로 먹어대기 시작한 탓이었다. 특히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은 정크푸드(쓰레기 음식)라 불리는 것들. 피자니 햄버거니 콜라를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사니 하루가 다르게 살이 찌는 것은 당연했다. 꽃가게에 들어가면 꽃보다 그녀의 육중한 몸이 먼저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찾아온 것이 다이어트 때문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본 순간 ‘이거 큰일났다’는 생각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의 멈출 수 없는 식욕은 모두다 어떤 스페인 영혼의 힘에 의해서였기 때문이었다.
“스페인 사람이 근처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까?”
그녀는 깜짝 놀라며 꽃집 지하실에 몇 년전 스페인 아줌마가 살았는데, 평소 피자나 햄버거 콜라 등을 즐겨 먹었다고 했다. 하지만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 좋아하는 음식도 제대로 못먹고 돌아가셨다는 얘기였다. 한 마디로 제대로 못먹고 죽은 스페인 아줌마의 영혼이 빙의돼 정크푸드라면 닥치는 대로 먹는 심각한 병에 걸렸던 것이었다.
구명시식 후, 스페인 아줌마의 소원을 들어주자며 가능하면 매일 피자 한쪽과 콜라 한 컵을 그 아줌마가 살았던 지하실 입구에 갖다두라고 일렀다. 몇 달후 그녀는 몰라보게 살이 빠져 있었다. 식욕이 어느 정도 완화돼 이제는 스스로 음식량을 조절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미국에서의 나날이 이처럼 즐겁고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론 정말 가기 싫은 곳도 가야 했다. ‘마피아’까지 만나게 된 것이다.
친구의 부탁으로 맨해튼 업타운 동쪽지역의 낮은 건물들 중 한곳에서 만난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모두 이탈리아계로 보였다. 그들 중 ‘루치오’라는 친구가 나를 아래 위로 훑어보더니 용건을 슬슬 털어놓았다.
이야기인즉 옆방에 자신들의 친구 시체가 있는데 왜 죽었는지 정확하게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교통사고라는데 아무래도 의심스럽고 분명 누군가에 의해 음주후 폭행당해 교통사고로 위장된 채 살해된 것 같다고 했다. 한 술 더 떠 똑바로 얘기하지 않으면 쉽게 나가지 못할거라며 협박까지 하는게 아닌가.
시체를 보자 피에 얼룩진 영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양복입은 남자가 폭행당하더니 잔인하게 교살돼 차와 함께 고속도로 부근 교각에 버려지는 장면이었다. 마피아들에게 사인을 밝혀주곤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뒤로는 나를 데리고 간 친구는 물론 마피아들의 소식도 전혀 들을 수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그들에게도 적용될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들의 소식은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
결혼하고 싶은 영혼, 이혼하고 싶은 영혼
햇빛 찬란한 5월. 5월하면 생각나는 것이 ‘5월의 신부’이다. 신부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5월의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사람이나 영혼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렇게 말하면 ‘영혼이 무슨 5월의 신부?’하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 같다. 하지만 영혼도 사람만큼이나 간절히 결혼하길 원하고, 아름다운 배우자를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주길 바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5월의 신부’를 알고 있다. 그것도 사람이 아닌 ‘영혼 신부’를 말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새 생명이 봄을 뒤덮던 닥 이맘때, 그녀가 죽기 얼마 전이었다. 당시 서울대병원에서 백혈병 말기 환자로 입원중이었던 그녀는,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명문 여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위해 이탈리아 유학을 준비중이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출국 열흘 전,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에서도 어떻게 손쓸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채 피어나지 못하고 죽어야만 하는 아리따운 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마냥 무겁기만 했다. 그런 내게, 그녀는 마치 준비해 왔던 일을 하는 사람처럼 편안한 얼굴로 말했다.
“법사님, 저는 아직 결혼을 못 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죽은 뒤에라도 좋은 사람이 있으면 결혼시켜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보름 뒤, 그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우연찮게 그녀가 죽기 2주전에 내가 아는 분의 아드님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게 아닌가. 택시운전사였던 그는 중앙선을 넘어오던 차를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죽고 만 것이었다. 그의 부고를 듣고, 나는 한참동안이나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마치 그의 영혼이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까지 들었던 것이었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나는 양가 부모님을 설득, 두 사람의 결혼을 주선했다. 양가에서도 자식들이 결혼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 못내 한이 되셨는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쯤되자 우선 그들의 사진만을 법당에 모셔두고 날짜를 잡기로 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첫눈에 반해 버린 두 영혼은 그날부터 매일같이 법당안에서 데이트를 즐기며 사랑을 속삭이는 게 아닌가. 사람이 있건 없건간에, 여기저기서 ‘키스’하는 소리까지 들려, 이거 안 되겠다 싶어 날짜를 앞당겨 서둘러 결혼식을 올려주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씩 찾아와 안부를 묻곤 하는 깜찍한 영혼 부부. ‘행복해 죽을 것만 같다’며, 엄살까지 부리는 그들을 볼 때마다, 진자 부부의 인연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맺어지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영혼결혼식이 100% 백년가약을 보장하는 결혼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영혼결혼식의 절차를 보면, 대개는 젊어서 간 자식들이 불쌍해서 부모님들이 맺어주는 인연이 많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졸지에(?) 결혼하게 된 영혼들은 이혼을 요구하며 구명시식장에서 큰소리를 내는 경우까지 생기게 되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
죽은 딸에게 영혼결혼식을 올려주고는 오히려 잠자리가 뒤숭숭해졌다는 어느 부인이 내게 찾아와 아무래도 딸의 결혼생활이 평탄치 못한 것 같다며 구명시식을 부탁했다. 부인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죽은 딸의 신랑감을 급하게 찾느라, 좋은 신랑감을 얻어주지 못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싶어, 구명시식을 통해 딸의 영혼을 모셨더니, 아니나 다를까 ‘왜 결혼을 시켰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부모님이 맺어주신 인연이기에 열심히 살려고 했는데, 남편과 학력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고, 남편의 외모 또한 마음에 안 든다며, 이제 저승에서 화려한 싱글(?)로 살고 싶으니 제발 이혼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게 아닌가.
영혼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영혼결혼식을 올렸으니,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겨우겨우 영혼을 설득해, 저승으로 돌려보내고는, 그 영혼의 남편되는 영혼에게도 결혼생활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당부했다. 저승에서까지 이혼이라니…!
아무튼 결혼하기 좋은 5월. 이승이건 저승이건 부부의 연으로 맺은 모든 이들의 결혼을 축복하며, 부디부디 ‘죽도록 사랑하며’ 살아가길 당부드린다.
돈에 웃고 울고
돈이란 참으로 묘한 존재이다. 돈이 많다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고, 없다 해서 반드시 불행한 것도 아닌데, 보통의 사람들은 언제나 ‘돈’을 좇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돈이 뭐길래, 돈 때문에 사람이 죽고, 돈 때문에 부부가 남남이 된단 말인가. 오늘은 그 알수 없는 돈을 좇아 지금 이 순간에도 바삐 뛰어다니는 분들을 위해, 돈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소위 돈 많다는 ‘재벌’님들 이야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옛날 이야기부터 하나 꺼내 놓겠다.
조선조 제7대 임금, 세조께서 산좋고 물좋기로 소문난 사찰에서 휴양하고 있었을 때 일이다. 그 당시, 세조는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여가면서 보위에 올랐던지라, 원혼들의 저주로 심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개울가에서 벗은 몸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데, 등을 닦으려 해도 팔이 닿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갑자기 동자승이 나타나 시원하게 그의 등을 닦아주니, 왕은 흐뭇하여 동자승에게 관용을 베풀었는데, 그 관용의 내용은, ‘왕의 벗은 몸을 보면 그 즉시 사형인데, 너만은 용서해 주겠으니, 나를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동자승은 빙그레 웃더니, 이렇게 말한 뒤 사라졌다 한다. “약속을 지키겠으니, 왕께서도 문수보살을 보셨단 말씀은 절대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말이다.
어찌된 일인지, 구명시식이 끝나고 나면, 재벌님들은 한결같이 내게 세조가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한다. “절대로 내가 구명시식했단 말은 하지 마시오”라고 말이다. 아마도 그분들은 자신의 치부가 알려질까 봐, 내게 당부하신 것이리라. 구명시식은, 모든 진실을 낱낱이 밝혀, 산자와 죽은자 사이의 묵은 오해를 깨끗이 씻어낸다는 점에서 ‘목욕’과도 같다. 그러니, ‘목욕’하듯 구명시식을 올린 재벌분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알몸을 보여준 기분 같을 터.
그러나, 다른 분들께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하는데, 유독 재벌님들은 다르다. 거듭 ‘함구령’을 내리시는게, 꼭 문수보살 앞 세조같다. 즉, 자신들의 재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모른 채, 현재의 위치만을 고려, ‘비밀보장’을 다짐받으시는 것이다. 물론, 현생에서야 ‘돈’을 좇는 마음으로 사셨기에,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어절씨구~’ 잘 살고 계시겠지만, 이는 한여름밤의 짧은 꿈보다 더 짧은 ‘복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시는지…
아무리 재벌이라 해도 ‘죽음’을 ‘돈’으로 막을 순 없는 법. 재벌이든, 거지든, 언제나 죽는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인데, 그분들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현생의 ‘복꿈’꾸는 재미에 푹 빠져 사시는 것 같아 애처롭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구명시식이 끝난 뒤 자신이 구명시식했단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는 재벌님들께, 나 또한 한말씀 정중히 올리곤 한다. “약속은 지킬 테니, 제발 저한테 구명시식 받았단 말씀만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재벌님들뿐 아니다. 돈을 좇는 것은 사람이나 영혼이나 같아, 돈에 대한 원한이 쌓이면, 끝가지 이를 좇아다니는 영혼도 많다. 얼마전, 큰 규모의 가구점을 경영하는 K씨가 찾아와, 구명시식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K씨 말에, 요즘들어 손님이 뚝 끊기고 특히 물건을 가져간 사람들이 물건대금을 치르지 않아, 계속되는 손실로 가게문 닫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이다.
K씨의 안타가운 사정을 듣곤, 구명시식을 올린 뒤, 모든 것은 ‘돈’때문임이 밝혀졌다. 얘기인즉, K씨의 아버지가 옛날에 고향에서 알아주는 노름꾼이었는데, 이 노름꾼 아버지께서 노름을 위해 이곳저곳에서 닥치는 대로 돈을 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돈을 채 갚지도 않고,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렇게 되다 보니, 노름꾼 아버지를 위한 구명시식장에는 아버지의 영혼을 쫓아 온 빚쟁이들까지 우루루- 몰려나와 ‘돈을 갚으라!’며 소란을 부렸고, ‘돈을 갚지 않으면 아예 가게문을 닫게 해주겠다!’며 으름장까지 놓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K씨의 사업이 기울었던 이유도,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준 뒤, 이를 받지 못한 빚쟁이 원혼들 때문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유도 모른 채, K씨는 아버지의 노름빚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돈은 돌고 돈다. 하지만, 돈은 반드시 사람들 사이에서만 도는 것은 아니다. 영혼에게도 ‘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은 안다. ‘돈’은 현생에서의 ‘한’을 정리하려는 수단일 뿐, 저승에서는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라는 것임을 말이다. 왜냐하면,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린 채, 돈을 유용한 곳에 잘 쓰고 가야, 저승에서는 재벌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자식이 뭐길래
가수에게도 자신의 노래들 중 특히 아끼고 좋아하는 노래가 있듯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구명시식이 한결같이 소중하고 귀중한 보석같지만, 그중에서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구명시식이 있다. 이제사 이 구명시식을 말하게 되는 것도 다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이 구명시식의 비밀유지 기한 5년이 작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구명시식이었길래, 비밀유지기한까지 있었단 말인가.
지금으로부터 6년전 미국 뉴저지 법당에 롱아일랜드에 산다는 유태인 노부인이 찾아왔다. 이 부인의 한국인 며느리가 통역을 해주었는데, 그 부인의 말, ‘십여 년 전 죽은 내 남편의 구명시식을 해달라. 그러나 절대로 구명시식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5년동안은 당신과 나, 그리고 통역을 맡은 한국인 며느리만 알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부인의 부탁으로 나는 일종의 ‘비밀 서약서’를 쓰고는 구명시식을 시작했다. 알고 보니, 이 노부인은 롱아일랜드 지방에서는 꽤 유명한 부인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남편이 차고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혼자 남게 된 그녀는 아비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듣지 않도록 아이들 교육에 열과 성을 다했고, 그 결과 큰 아들은 의과대학 교수로, 둘째아들은 국무성 소속 변호사로, 그리고 달은 명문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성장, 그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한 것이었다.
그런, 이 노부인에게는 걱정거리가 있었다. 그 걱정거리란,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남편의 영혼이 항상 롱아일랜드 저택을 떠나지 않고 배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자 이 걱정거리는 점점 더 그녀를 압박해 왔고, 급기야 구명시식을 청하게 되었다.
구명시식 결과, 나는 왜 부인이 5년동안 비밀을 지키라고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이유인즉, 남편은 차고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남편은 철저한 보험사기극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살을 택했던 것이다.
당시, 남편은 파산 선고를 받고 난 뒤, 토끼같은 자식들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당장 길바닥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자식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은 죽어도 좋지만 자식들만큼은 최고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는 아주 기술적인 방법으로 철저하게 사고로 위장해 차고에서 자살하기에 이른다. 물론 아버지의 계획대로 그의 가족들은 어마어마한 보험을 받게된 것은 당연했다.
얘기가 이쯤되자, 내 말을 통역해 주던 한국인 며느리는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동안 며느리의 얘기를 듣고 난 뒤, 노부인은 냉혹한 표정으로 남편 영혼에게, “당신은 바보예요. 그렇다고 자식을 위해 자살하다니… 자살했으면 더 좋은 세상으로 떠나야지, 아직도 자식곁에서 배회를 해요? 나 죽을 날도 머지 않았어요. 이젠, 제발 자식들 곁에서 떠나줘요! 그게, 당신이 자식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에요”라고 말하며, 며느리에게 절대 가족들에게 말하지 말 것을 재차 당부했다.
구명시식이 끝나자, 통역을 맡았던 며느리는 내게 머리숙여 인사를 하는데, 반면 그 노부인은 며느리를 통해 거금을 전달하며, “계약서, 잊지 마세요!”라는 단 한마디의 말만 남긴 채, 인사도 없이 서둘러 법당을 떠났다.
그렇게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한국인과 유태인과의 무서운 공통분모를 발견해 참으로 씁쓸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팔, 다리도 아낌없이 자른다는 과하다 싶은 희생정신. 도대체 자식이 무엇이길래, 머리까지 써가며 자살한단 말인가.
요근래, 유난히 보험 사기극이 늘었다 한다. 엄청난 규모의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여기저기 팔, 다리를 자르는 수고를 하는 모양인데… 제발 부탁이니, 그런 짓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렇게 보험금을 타내는 것은 또 하나의 원한을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체발부 수지부모’라 했다. 몸을 아끼는 것이 효의 시작이란 뜻일 게다. 부디 이 말을 명심하고, 자신의 몸을 아끼며 소중히 하는, 당연하고 건전한 생각을 갖고 생활하기 바란다.
귀빈실에서의 하룻밤
6월이면 벌써 1년의 반이 지난다. 무더위가 찾아오는 이맘때쯤이 되면, 더위를 잊기 위해 나름대로 오싹-했던 사건들을 떠올리곤 한다.
1982년, 나는 스물다섯분의 불자들과 함께, 유명사찰인 S사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는데…바로, 그 하룻밤이 공포의 하룻밤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S사에 도착하자, 그곳에 계시던 큰스님께선 우리를 반겨 빙그레 웃으시더니,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오늘은 특별히 귀빈실에서 주무시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밤은 차법사께서 하실 일이 많을 겝니다”고 말씀하시곤, 사미승을 시켜 잠자리를 준비시키는 것이었다.
사미승을 따라, 도착한 귀빈실은 다른 방보다 크고,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는 편이었다. 함께 오신 다른 분들은 ‘큰스님께서 괜히 겁주시려 하신 말씀’이라며 편히 자리를 잡으시는데, 웬일인지 내게만 강력한 음기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불안했다. 금방이라도 음기 속으로 빨려들 것만 같아, 혼자 방을 지키며 계속 불경을 외우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거센 돌바람이 귀빈실의 창호지를 마구 때리는 게 아닌가. 놀라, 방문을 열어보니 더 가관이었다. 절의 다른 곳은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한데, 유독 우리가 묵고 있던 귀빈실 앞에만 돌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이었다.
“악-” 외마디 비명이 귀빈실에 울려퍼진 순간. 우리는 돌바람과 함께 휘몰아닥친 검은 먹구름이 귀빈실의 창호지를 꿰뚫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을 정면으로 목격했다. 그것도 오십개의 눈으로 말이다.
빠른 속도로 들이닥친, 영가의 모습. 영가를 보자마자, 세분은 이불속으로 몸을 숨겼고, 두분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머지 스무분은 나와 함께 맞대응하고 계셨는데. 아무도 영가에게 말을 건네지 못하자, 나는 내 영능력을 이용해 다른 분 모르게 영가와 교신을 시도했다.
“왜 오셨습니까?” 그 말에 영가는 슬픈 얼굴로 “이 방은 사실 제가 쓰던 방입니다. 저는 이 방에서 사미계를 받고 머리를 깎은 뒤, 스님으로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슬퍼하시는지요?” 그러자 영가는 한숨을 내쉬더니, “제가 이 절에 불사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절에서 경내에 공덕비를 세워주셨답니다. 절 안에 공덕비를 세우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건만, 누군가가 그 공덕비 아래에 저를 화장한 뼛가루까지 몰래 묻어놓았지 뭡니까. 그 일로 인해, 이곳 토지신들에게 저는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괴로워서 미칠 지경입니다.”
세상에! 그 귀빈실 방주인 영가께선 말 그대로, 이곳 토지신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계셨던 것이다. 토지신들은 방주인 영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세워진 것도 기분나쁜데, 영가의 뼛가루까지 공덕비 밑에 매장되자, 그 분노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토지신들의 분노는 제 공덕비가 세워진 그 다음날,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찰에 있던 유명한 국보가 없어지고 말았던 거죠. 그 바람에 이곳 스님들께서 얼마나 곤욕을 치르셨던지…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어 너무나 괴로웠는데 차법사에게 털어놓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눈물까지 글썽이시는 영가가 너무 안돼 보여,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영가께선 “제가 차법사께 드린 말씀을 스님께 전해 주세요. 차법사께선 앞으로 영혼세계에 더 크게 눈뜨실 것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말씀이 끝나자 영가께서 스르르 문밖으로 사라졌다. 영가가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쏟아졌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영가를 집단적으로 목격한 사건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아침이 되자, 나는 큰스님게 영가와 교신한 내용을 몰래 전해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선 “귀(鬼)빈실에서 자길 잘했구먼”하시며 웃으시는 게 아닌가. 얼마 뒤, 그 영가의 공덕비를 절 밖에 다시 세우고 뼈도 다른 곳에 잘 뿌렸다. 바로 그날 밤에 영가가 내게 나타나 고맙다고 인사하곤 사라졌다. 그런데 그후, 내겐 생각지도 못한 횡재가 생겨 지금도 영가 덕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일은 지금까지, 큰 스님과 나만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 비밀스런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여러분께 ‘영혼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귀빈실 영가를 목격한 509개의 눈으로 다시 한번 증명하기 위해서다.
나는 여자가 무섭다
오뉴월 서리도 녹인다는 여자의 한. 그만큼 여자의 한은 강력한 저주로 상징된다. 최근 어떤 구명시식 자리에서도 여자의 한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된 일이 있었다.
3개월 전 일이다. 한 청년이 내게 찾아와 조용히 구명시식을 청한 일이 있었다. 눈밑에 흑빛이 역력했던 이 청년은, 이미 정신병원에서 중증 환자로 분리되어 치료 중이었지만,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죽기전 마지막 방법으로 구명시식을 하고 싶다며 나를 찾은 것이었다.
“저는 머지 않아 분명히 죽을 것입니다.” 죽음을 장담하는 청년 앞에서 나는 적잖이 당황해 연유를 물어보았다. 그러자 청년은, “우리 집은 10대째 내려오는 저주가 있습니다. 우리 가문에 남자란 남자는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거죠. 우리 형님도 10년 전 저수지에 빠진 신부님을 구하고는 그만 탈진해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그러니, 죽기전에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라도 알고 싶어, 이렇게 찾아 온 것입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청년 가문의 남자들은 모두 죽어야만 했을까. 죽음이 목전에 왔다는 청년의 간곡한 부탁에 시일을 앞당겨 구명시식을 하게 되었는데, 구명시식 현장에 나타난 영가는 뜻밖에도 핏덩이를 안은 젊은 여인이었다.
“누구신지요?” 나의 물음에 그 여인은 증오로 가득찬 눈으로 그 청년을 노려보더니, “바로 저 남자의 선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인네입니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랬다. 바로 그 여인이 피의 저주를 뿌린 장본인이었다.
이 가문에 내려진 저주의 근원. 그 근원의 시발점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2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 상주 목사로 계셨던 청년의 선조는 법대로 일하는 고지식한 양반으로, 하루는 죄인으로 몰린 남자가 도주해 버리자, 그 남자의 부인을 대신 잡아와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부인은 산달이 며칠 남지 않은 만삭의 몸이었던 것이다. 부인은 ‘남편 대신 옥고를 치르는 것은 당연하나, 그 대신 아기를 낳을 때만큼은 선처해 달라’며 매일같이 상주목사에게 빌고 또 빌었는데, 그 목사는 ‘죄인의 씨를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죄인의 씨를 낳는 것을 선처해 달라고? 이게 다 니 남편의 죄값이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며, 그녀의 간청을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차가운 지푸라기가 전부인 감옥에서 혼자 아기를 낳다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그녀는 죽어가면서까지 “내가 너희 가문의 10대손까지 모두 죽여버리겠다”며 상주 목사를 향한 피맺힌 저주를 퍼부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상주목사는 이유없이 급사했고, 그의 세 아들도 원인모르게 죽어나갔다 한다. 사태가 이쯤되자, 영적으로 예민했던 상주 목사의 서자는 놀래 상주땅을 떠나 경상도 함안으로 도망을 가 기적적으로 가문의 손(孫)을 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이 집안의 아들들은 모두 사십을 넘기지 못하는 단명할 팔자거나, 젊어서 급사하는 식으로 10대를 내려왔다는 것이다.
낳자마자 죽어버린 아들을 안고 나타난 한맺힌 여인의 영가. 그 영가에게 “이제 저주를 풀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달래자, 그 영가는 ’저 역시 10대의 저주가 끝나 저승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며 핏덩이를 안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청년은 불행중 다행히, 형이 죽는 바람에 목숨만은 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인의 한은 핵폭탄보다 공포스럽다. 이는 지금까지의 구명시식으로도 충분히 증명되고도 남은 사실이다. 따라서, 절대로 여자를 울리는 짓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여자 울리는 놈치고 잘되는 놈 하나 없다’는 말은 21세기에도 적용될 불면의 진리니 말이다.
인연을 잘 처리하는 법
존재가 인연이기에 피할 수 없고, 좋은 인연과 나쁜 인연이 따로 없기에 고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인연은 피하는 게 아니라 잘 처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좋고 나쁜 인연은 자기하기 나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인연을 잘 처리할 수 있을까요?
매사가 자기일이라는 주인의식이 있어야합니다.
구한말 개화기, 서양의 선교사들이 당시 근엄한 관료들과 유지를 초청하여 새로운 운동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정구(테니스)였습니다. 선수들은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방을 벌이며 열심히 경기를 마쳤습니다. 정구를 처음 본 소감을 묻자 초청자 중에 한 명이 말했습니다.
“이게 전부요? 뭐 하러 소득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뜁니까? 땀 흘리는 걸 보니 아랫것들이나 하는 일이구만.”
시켜서 하면 중노동이고 즐기면서 하면 놀이라고 합니다. 마음 하나 차이입니다. 자기에게 닥친 과보와 인연의 기원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좋은 인연이건 나쁜 인연이건 모두 자기의 일이라 여기고 즐기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소유하거나, 높은 자리에서 남을 부려야만 자기 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주인과 객은 남과 비교하여 높낮이를 재고 빈부를 따져 정해지지 않습니다. 햇빛이 만물을 가리지 않듯이 다가온 인연을 정성스레 귀한 손님으로 맞이하는 쪽이 주인이 됩니다. 좋은 인연이건 나쁜 인연이건 언제 어디서건 잘 맞이하고 잘 배웅해야합니다. 좋은 인연으로 돌아간 손님이 나중에 좋은 인연의 손님으로 다시 오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만 오르려하고, 재물을 가두려하고, 빛나는 명예만 쫓는다면 지위․재물․명예가 주인이 되고, 본인은 정작 이것들의 주변을 떠도는 객이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오면 잘 맞이하고 가면 잘 배웅하는 것이 인연을 잘 처리하는 법입니다.
뒤바뀐 시신
얼마 전, 지방 모 병원에서 장지로 가기 위해 시신을 내어주는 과정에서 시신이 뒤바뀐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유가족들을 경악시킨 사연이 뉴스에 보도돼, 보는 이의 가슴을 안타깝게 한 적이 있었다. 뉴스를 보셨던 분들은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일이!”하시며 단순하게 놀라셨겠지만, 나에겐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몇 년전 서울 강남의 모 병원에서 실제 있었던 사건이다. 당시 그 병원 영안실에는 오랜 지병 끝에 죽은 할머님 한 분의 장례식이 있었다. 장례를 치른 후, 할머니의 가족들은 평소 불교도였던 고인의 뜻을 따라 잠실 후암정사로 찾아와 구명시식을 올리게 되었다.
구명시식 도중, 나는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알게 돼, 한순간 숨이 콱 막히고 말았다. “법사님, 무슨 일인가요? 나쁜 일이라도…” 나의 경직된 표정에 유가족 한분께서 불안한 듯, 보채 물으셨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시신이, 시신이 바뀐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내 말과 함께 식은 중단되었고, 유가족들은 그럴리 없다며 혼절하는 등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유족들 대부분은 펄쩍 뛰며 ‘말도 안 된다’며 화만 내는 데 반해, 친척 중 유일하게 장례식 때까지 영안실에서 시신을 지켰던 M씨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다.
분명, M씨만은 내막을 알고 있겠거니…했지만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S 기자에게 이 사건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호기심이 넘치고 흐르는 이 기자양반은 “확인해 보자!”며 유족들을 열심히 설득했다.
이쯤되자 반신반의했던 유족들 역시, 천안에 있는 모지를 한번 파보자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천안으로 출발하기에 이르렀는데…순간, 갑자기 친척 M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그곳에 가도 할머니 시신은 없습니다!”며 주저앉는 게 아닌가.
M씨는 통곡하며, “장의사들이 실수로 영안실에 모셨던 시신의 명정(銘旌)이 앞의 사람과 뒤바뀌는 바람에, 서로 다른 사람의 관을 가지고 장례식을 치렀다구요!” M씨도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면서 “할머니의 관 모양이 약간 다른 것 같기에 장의사를 추궁해 보니, 장의사가 마지못해 사실을 털어놓지 뭡니까! 그땐 이미 할머니의 시신이 앞사람의 명정에 쌓인 채 화장이 된 후라, 저는 저만 아는 비밀로 평-생, 입 봉하고 살려 했습니다”며 눈물을 삼키는 것이었다.
M씨의 양심선언으로 ‘시신이 뒤바뀌었다’는 내말이 사실임이 증명되자, 유족들은 더 기가 막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이미 할머니의 시신이 남의 이름으로 화장된 채, 어딘가에 뿌려졌을 테니, 지금에 와서 손쓸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M씨는 평생 벙어리 냉가슴 앓듯 살 뻔했는데, 법사님께서 살려주신 거라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그런데, 법사님, 그 자리엔 저와 장의사 딱 둘밖에 없었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고 몰래 물어, “M씨의 눈엔 둘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군요”하고 미소로 대신 답해 주었다.
인륜지대사의 마지막 장례식. 한국의 장례식은 그 어느 나라보다 까다로운 절차를 가진 엄숙한 행사이며 동시에 ‘축제’의 성격을 띤다. 이는 죽음을 끝으로 보지 않고, 또 하나의 시작으로 보는 뿌리 깊은 윤회사상에 그 기원을 둔다 하겠다.
이 성스러운 ‘축제’에서 주인공이 뒤바뀌고 말았으니, 유족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이 모든 것이 현재, 번갯불처럼 진행되는 장례식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니고 뭐겠는가. 초스피드로 진행되는 장례식을 지켜보면서, 옛 선조들이 내세를 기리며, 가는 이를 떠나 보내며 느긋하게 치러졌던 장례식 문화의 자취가 점점 실종되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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