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한국 방위산업 2020년을 전환기로

醉月 2020. 3. 30. 14:26

한국 방위산업 2020년을 전환기로
성장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50년, 미래 50년을 위해 준비할 것은? (1-1)

 

 

서용원  방위사업청 방산정책과장 육군 대령(진)
김민욱  한국방위산업진흥회 대외협력팀 차장 월간<국방과 기술> 편집장

 

 

 

* 내용 중 ‘성장을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50년’ 부분은 방위산업 성장과정에서 진행되었던 사실의 기록이므로 이를 잘 요약해 놓은 한국방위산업진흥회 발간 ‘한국방위산업진흥회 30년사’와, 한국방위산업학회가 발간한 ‘방위산업 40년 끝없는 도전의 역사’를 참고해 정리하였습니다.

 

 

  2020년 새해가 밝았다. 1970년부터 본격적인 시동을 건 한국 방위산업은 올해 방산 50년을 맞이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해를 맞았다. 사람 나이로 치면 50세는 공자가 쉰의 나이에 하늘의 명을 알았다고 한 데서 연유해 ‘지천명’이라는 비유적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 만큼 우리 방위산업은 50년 동안 비약적이고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며 관련 산업계의 기술발전을 이끌어 왔다. 사업 구조면에서도 초기 OEM 생산방식 위주에서 벗어나 기술 국산화는 물론 해외 수출까지 사업영역을 다양화하고 확장해 왔다.
  지난 50년간 눈부신 성장과 기술적 발전은 방위산업 진흥을 위해 노력해 온 수많은 관계자들의 열정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나온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우리 방위산업은 힘겹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 북한과의 대립, 세계열강들의 이해관계로 벌어지고 있는 국제정치학적인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들이 일련의 문제들을 불러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도전과 변화를 요구받았다.
  2016년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포럼에서 언급한 디지털 혁명을 기반한 초연결·초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전 인류에게 새로운 도전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우리는 AI가 탑재된 로봇, 총알 없이 발사되는 레이저의 시대, 극초음속 미사일, 하늘·땅·바다에서 활약하고 있는 무인 스텔스 무기체계들을 더 이상 상상의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개개인의 생각과 철학, 이념은 물론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거대한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미래는 우리 앞에 성큼 다가오고 있다.
  이미 시작된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이를 반대하거나 거부한다고 되돌릴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순응하고, 적응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의 50년을 위해 지금까지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애써 온 노력들을 다시 돌아보고 혁신적인 방향으로 변신을 모색하고 구체적 실행 방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를 구체적으로 설계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방위산업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 방산의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보고, 다가올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사항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 방위산업 성장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50년

 

  한국 방위산업의 태동기는 1970년에 시작되었다. 1969년 미국의 닉슨대통령이 ‘아시아 각국의 위기는 스스로 대처해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 선언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우리의 자주적인 방위산업의 육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사진 1]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신응균 초대 국방과학연구 소장(1970년 8월 15일)(사진_국방과학연구소)

 

 

  연간 국민총생산이 100억 달러에도 미치지 않는 경제적 상황에서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경제발전과의 병행을 목표로 시너지 효과를 노리는 방법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초기 단계로 예비군의 무장화를 위한 기본병기 제작과 연구개발 사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방산 발전의 시대적 구분은 여러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서우덕 고려대 교수가 구분한 4가지로 나누어 보았다.

 

 

 

 

[표 1] 한국의 방위산업 발전 과정 구분

 

 

  먼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기를 방위산업의 ‘태동과 기반조성기’, 1980년대 전두환 정부 시기를 ‘시련과 도전의 시기’, 노태우 정부 시기인 1990년대부터 김대중 정부의 2000년대 초까지 ‘안정과 성장의 시기’,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200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를 ‘경쟁과 도약의 시기’로 구분했다.

 

 

 

 

[그림 1] 국산 무기체계 개발 과정

 

 

◆ 태동과 기반조성기(1970년대) :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방위산업의 씨앗

 

  우리나라에 방위산업이 뿌리내리게 된 계기는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1월 9일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국정지표로 하는 연두 기자회견을 갖고, 1월 19일 국방부를 순시하는 자리에서였다. 이 때 방위산업 육성과 국방과학기술의 연구가 시급함을 강조하고, 2월 2일 국방부에 ‘방위산업 육성 전담부서’를 설치할 것을 지시하면서부터 국방부 군수국장 산하에 군수산업육성 담당관실을 설치하여 방위산업 육성 및 지원에 관한 기본방침의 연구에 착수했다.

 

 

∷ ‘육군병기공창’의 창설, 무기체계 자체생산의 시작


  1970년 한국 방위산업의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육·해·공군의 발족과 대외 환경의 변화는 육군병기 공창의 창설과 과학기술연구소 설치와 같이 방위산업에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하였다.
  1945년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우리 국군은 1946년 1월 미국식 군 조직 체계인 주 방위군 형태를 모티브로 삼은 국방경비대 창설을 시작으로 각 도에 1개 연대씩 총 9개 연대를 설치하였고,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국군조직법이 시행되면서 정식 육군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육군의 발족과 함께 당시까지 밀수 방지와 난파선 구조를 주 임무로 하던 해안경비대 역시 정식 해군으로 발족되었고, 이어 1949년 10월에는 총 병력 1,600명의 공군이 발족하면서 육·해·공군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군이 겨우 군대의 모습을 갖추어 갈 무렵인 1949년 경, 미·소 양국의 냉전 갈등은 이미 한반도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미 남북 양측이 사상적으로 대립되는 각각의 독립 정부를 수립하고 있던 한반도는 적대적 대치상태에서 일촉즉발의 위협에 처해 있었다. 대부분의 물자와 기반을 미국에 의지한 채 독자적으로는 전차(당시 북한은 242대) 1대 보유하지 못한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던 대한민국의 약소한 방위력은 그러한 위협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미·소 양국의 군사적 지원에 있어서도 남북한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공군 강화를 약속받고 중공과 방위조약을 맺은 반면, 미국은 오히려 한반도 내에서의 완전 철군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외적 환경은 기술적·체계적 배경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로 하여금 군수·방산장비의 자체생산 체제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었다. 안보적 위협에 비하여 열악한 장비체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시설과 기술개발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1948년 12월 15일 육군특별부대 산하에 ‘육군병기공창’이 창설되었다. 당시 가장 역점을 두었던 부문은 개인화기와 탄약의 생산능력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이미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은 구 일본군의 조병창이 있었으나, 파손된 상태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관계로 복구가 불가능하여 새로운 공장을 물색해야 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1949년 1월 15일, 정부 귀속업체인 유환상공주식회사의 용산공장과 조선유지주식회사의 인천공장을 각각 접수하여 제1, 2공장으로 지정하였다. 두 공장은 인수와 동시에 시설보완과 기계정비 과정을 거친 후, 일본군 99식 소총의 부속품과 수류탄 제작에 착수했다.

 

 

 

 

[사진 2] 육군병기공창 창립 1주년 기념사진

 

 

  그 당시 미국은 ‘합동전략조사보고서’에 의거해 500명의 주한군사고문단과 부속요원만을 남겨둔 채 미군의 완전철수를 진행했다. 미군의 철수와 함께 군수물자들이 이양되었으나, 대부분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된 노후된 구식 장비와 일본군의 99식 소총 등이 주력 장비였다. 장비의 내용으로 볼 때 무기 원조라기보다, 쓸 수 없는 장비를 두고 간 것뿐이라고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무렵 한국 정부에서는 북한이 20대 이상의 YAK전투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국에 폭격기를 포함한 항공기 원조를 요구하였으나, ‘남북 간의 충돌’을 우려한 맥아더 원수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한국 정부에서 대안으로 퇴역예정인 B-26 경폭격기 30대의 인도를 요청하자, 미국은 아예 30대 모두를 도끼로 파괴한 후 고철로 매각해 버렸다. 이렇듯 미국이 적극적 협조도 방치도 아닌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이, 소련의 원조로 북한 장비는 점차 증강일로를 걷고 있었다.

 

 

∷ 국방 연구개발의 효시, ‘과학기술연구소’ 설치


  1949년 12월, 국방부에 병기생산의 운영과 관리를 전담하는 ‘병기행정본부’가 설치되면서 ‘육군병기공창’은 병기행정본부의 예하로 흡수되었다. 당시까지 ‘육군병기공창’의 주된 수행업무는 일제 구식화기의 정비 재생과 탄약의 생산 등 주로 기존장비의 생산과 정비에 치우쳐 있었다. 기술 인력과 기자재 등의 부족도 그 원인이었지만, 기술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 기술의 연구를 위한 전문적인 기관이 없었다는 것 또한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병기행정본부’는 육군병기공창을 1, 2조병창으로 나누는 동시에, 서울의 삼화정공주식회사를 제3공장 으로 지정하고 인천의 조선알미늄공업주식회사와 기호전업주식회사를 생산 감독공장으로 각각 지정하여 병기생산능력을 확충하였고, 각 공장을 전문화·계열화하였다. 제1공장에서는 총포의 수리 정비, 제2공장에서는 각종 탄피생산과 권총제작연구, 제3공장은 정밀기계연구에 착수했고, 2곳의 감독공장에서는 주로 99식 소총 탄피와 탄환을 생산했다.
  더불어 미비한 기술개발을 위하여 ‘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개발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조치했다. 그러나 이런 기술개발을 위한 노력이 채 빛을 보기도 전에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최초의 방위산업은 시작부터 휘청거리게 되었다.
  1952년 연구개발을 위한 기관 전문화와 인재 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국방부는 다시 1, 2조병창을 ‘국방부조병창’으로, ‘과학기술연구소’를 ‘국방부과학기술연구소’로 재편하였고, 조병 중견 기술자의 양성을 목적으로 ‘기술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특히, 6·25전쟁이라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1952년 10월 11일 ‘대한식 소총’ 시제품 6정에 대한 시범 사격회를 실시하였다.

 

 

 

 

[사진 3] 육군박물관에 소장중인 ‘대한식 소총’ 7호. 1950년대 자주국방 노력의 상징 격이다.

 

 

  이는 1950년대 기술·자본의 뒷받침 없이 절박함으로 기적을 창출한 것이며 자주국방 노력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1953년에 병기 탄약에 대한 제조기술의 해결과 최신 제조 연구시설 도입 등을 추진한 결과 1953년에는 6·25전쟁의 휴전과 함께 연구제조기기를 목표량의 90%까지 도입, 확보하게 되어 연구개발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960년 1월 15일에는 군수사령부의 전신인 군수기지사령부가 부산시 양정동에서 창설되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우리 군의 독자적인 군수부대 창설과 지원능력 구비는 중요한 과제였기에 ‘한국군 독자적인 군수지원’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각 병과 군수부대를 지휘·감독하고 군수품의 부정유출 방지와 전군 군수지 원을 촉진하는 데 힘썼다.

∷ 1970년대 : 닉슨 독트린 선언과 한·미 군사 동맹 관계의 변화
  한·미 군사동맹관계의 변화를 가속화시킨 도화선은 1969년의 이른바 닉슨 독트린 선언이었다. “강대국의 핵무기 위협을 제외한 내란·침략에는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하여 대처해야 한다. 미국은 직접 적·군사적 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요약되는 이 선언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미국의 한국 방위 의지에 대해 강한 불안을 품게 만들었다. 1970년 7월 6일 공식적인 주한미군 철수 결정이 통보되면서, 이러한 불안은 점차 현실로 드러났다.

 

 

 

 

[사진 4] 닉슨 독트린은 닉슨 미국 대통령이 1969년 7월 25일 괌에서 발표한 외교정책으로 아시아에 대한 군사 개입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정책기조로 동아시아 동맹국들에 대한 중대한 안보정책의 변화를 야기시켰고, 한반도 안보에도 중대한 정책전환의 신호탄이 되었다.

 

 

  닉슨 독트린 선언에서부터 1971년 3월 주한미군 7사단 철수로 이어지는 미국의 태도 변화는 상대적으로 우리 정부에게 방위산업 기반 조성이 시급함을 체감하게 만들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1월 9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방위산업의 필요성과 방위산업 육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였고, 병기에서부터 탄약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장비를 자급자족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정부는 방산육성방안에 대한 연구 결과, 경제개발과 방위산업 육성이라는 두 가지 과제에 있어 양쪽의 발전이 서로 상충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상승효과를 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민수산업의 육성보완을 통한 방위산업 기반구축이라는 전략적 입장을 밝혔다. 그 방안으로 정부가 주도하고 민간기업이 수행한다는 기본계획을 수립하였고, 정부 요인으로 구성된 한국경제공업위원회와 민간연구원 중심의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설립하고 기술 측면에서 지원했다. 또한 민간조직인 자동차공업협회에 장비생산 지시를 내리면서, 최초로 민간기업 참여에 의한 방위산업이 시작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국방 연구개발의 본산인 ‘국방과학연구소’는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같은 연구기관이 국방분야에서도 필요하다는 검토 지시가 1970년 4월 27일날 있었고, 그에 따라 1970년 7월 국방과학연구소법에 따라 국방에 필요한 병기 장비 및 물자의 조사 연구 개발 시험 등을 담당하는 연구기관인 국방과학연구소를 1970년 8월 6일에 창설하게 되었다.

 

 

 

 

[사진 5] 국방과학연구소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휘호 ‘국방의 초석’(사진_국방과학연구소)

 

 

  1971년에는 1968년의 제1차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서 원칙적 합의를 보았던 M16 소총 생산공장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하였다. 이 생산공장은 1971년에 착공하여 1972년 12월에 준공되었고, 1973년부터 양산체제에 들어갔다.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와 함께 미군 군사장비가 이양되면서 어느 정도 전력이 대체·보강된 것처럼 보였지만, 상당수가 이미 노후된 것들이었다. 그 중에 성능이 좋은 장비는 미군이 선별하여 가지고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남겨진 것은 제 성능을 내지 못하거나 주요부품이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 부품을 교체·정비하려 해도 국내에는 생산기술이 없었고, 미국에서는 생산중단으로 공급이 끊긴 상태라 불량상태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당시 주종화기였던 M1 소총은 본래 반자동식임에도 불구하고 가용화기 중 절반가량이 단발사격 외에는 불가능했다.
  그나마 양도 많지 않았다. 1968년에 대공비 작전을 주목적으로 설치된 향토예비군의 경우, 병력은 20개 사단이지만 장비는 2개 사단분 밖에 없었다. 10명 중 9명이 비무장인 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군수 무상원조마저 대외군사판매FMS Foreign Military Sales의 차관형태로 전환되면서, 방산물자 자체생산 체제의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 번개사업


  1971년 11월 11일 “칼빈 소총 10정, M1 소총 2정, 경기관총 5정, 60밀리 박격포 4문, 3.5인치 로켓포 4문, 수류탄 300발, 대전차 지뢰 20발 등 주요 군수 장비를 4개월 내에 국산화 하라”는 긴급병기개발 지시가 청와대 비서실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에 전해졌다. 이른바 ‘번개사업’이다.
  무기생산의 기초가 되는 산업기반과 기술축적이 전무하다시피 한데다, 총예산 970만 원이라는 상황에서 단기간 내의 개발은 아무리 모방생산이라 해도 무모한 계획일 수밖에 없었다. 번개사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몇 차례의 건의와 방안수립, 수량 수정 등의 과정을 거쳐 최초지시 후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1월 17일에 제1차 번개사업이 실행되었다.
  1차 번개사업에는 당시 국내 과학계의 핵심 전문가들로 꼽히던 10여 명이 부문별 책임자로 동원되었고, 개발방식으로는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TDP(Technical Data Package, 기술자료묶음)를 기초로 한국화하거나 견본장비를 획득하여 이를 역설계하고, 국방과학연구소의 기술지도하에 방산업체가 시험제작하는 방식이 주로 사용되었다.
  육군에서 쓰던 장비를 견본품으로 대여 받아 분해하여 구성을 파악하고, 치수를 정밀측정 하는 작업이 주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대부분의 장비가 신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치수를 산출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화기의 대부분이 국내 생산이 전무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구를 위한 자재를 구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엔 특수강 공장이 없던 때라 연구원들이 자재를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았던 곳은 시중의 철물상, 그 중에서도 주로 청계천의 고물상들이었다.
  예산부족과 설비의 미비에도 불구하고, 국방과학연구소 담당부서는 물론이고 금성사를 비롯한 시제업체 및 국방부 담당부서 등 각 부처의 노력 끝에 두 달도 채 안된 그 해 12월 하순부터 시제장비의 시험사격이 실시되었다.
  번개사업은 1972년 9월까지 제2차, 3차 사업으로 이어져 통신장비와 개인장구류 등의 품목까지 확대되었고, 모든 시제품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사진 6] 4.2인치 박격포 시제품(1973년 5월)(사진_국방과학연구소)

 

 

∷ 국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 중화학공업화 정책


  번개사업이 추진되고 M16 소총 생산 공장이 준공된 1972년 이후부터는 국내에서 기본화기 제품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술적 기반과 생산시설의 완비에도 불구하고, 그 효율화에 있어서는 쉽게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몇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정부는 그 원인을 초정밀 기술의 절대적 부족으로 진단하고, 중화학공업의 기반조성과 정밀기능사 양성을 계획하였다. 이러한 취지와 ‘산업구조 고도화’라는 경제개 발목표가 맞물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선언’이 탄생했다.
  중화학공업 계획에서 방위산업을 국가주도로 추진할 것인지, 민간주도로 추진할 것인지가 정부 각 부처 간의 논점으로 떠올랐다. 이에 관한 논쟁 가운데 “공기업 형태로 육성하면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를 경우 기업의 생존을 위해 자칫 전쟁 불가피론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결국 방위산업은 민간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는 정책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체제로 자리 잡았다. “방위산업의 생산 활동은 민간 기업이 담당하되 생산체제의 정비를 통해 복수 기업으로 육성한다”는 기본원칙에 따라 무기 부품별로 82개의 생산 공장을 지정하고 생산시설의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평시에는 각 공장 생산능력의 80%는 민수용 으로, 20%는 방산용으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진 7]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1기 설비 종합착공식에 참석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사진_포스코)

 

 

∷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


  1972년은 한국 방위산업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해였다. 1972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으로부터 방위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업체 및 산업의 보호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이 연구결과를 토대로 1973년 2월, 기존 법령에 우선하는 특별법으로서 ‘군수조달에 관한 특별조치법(이하 ‘군 수특조법’)’이 공포되었다.
  각 방산업체는 이 군수특조법의 제정으로 인해 방산시설의 설치 보완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각종 세금 면제와 감면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방산업체에 종사하는 기술자와 기능사들 역시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게 되어 업체 보호뿐만 아니라 인력 보호 차원에서도 큰 진전을 이룰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방산물자지정제도도 군수특조법에 명시되면서 1973년에 도입되었다. 방산물자지정제도는 군이 필요로 하는 무기체계를 획득함에 있어서 개발을 수행한 업체에게 일정 기간(최소 5년) 양산 독점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이로써 정부는 품질이 보장된 제품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기반을 확보·유지하고, 방위산업의 보호·육성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게 됐다.
  이후 방위산업의 효과적인 육성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계획이 선결되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국방과학연구소와 민간연구기관 등이 주축이 되어 ‘방위산업 10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1976년까지 총포, 탄약 및 기본장비를 국산화하고, 1980년대 초까지 전차, 항공기, 유도탄, 함정 등의 정밀무기를 국산화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방위산업 10개년 계획은 크게 두 단계로 나뉘어 전반기인 1971~1976년까지는 기반조성을 위한 단계로, 후반기인 1977~1981년까지는 기반완성 단계로 구분하였다. 기반조성 단계는 다시 두 단계로 나뉘어 1971~1973년을 기초 개발기, 1974~1976년을 라이선스 시제품 생산기로 구분하여 기본병기 개발과 생산 기반 구축을 목표로 삼았다.

 

 

∷ 양산을 위한 공장건설


  방산업체의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우선 1, 2차 국산화 시제 완료된 10여 개 병기품목에 대하여 담당할 업체를 선정한 후 기존시설을 최대한 활용 하여 장비를 생산하도록 하였으며, 지정된 방산업체에 대해 TDP(기술자료묶음) 등 제반 기술자료를 제공하여 개발, 생산토록하고 생산된 병기에 대해서는 성능시험을 거쳐 합격된 품목에 한해서 양산체제를 갖추도록 추진했다.
  양산체제 구축을 위해서 계열별 병기생산의 선결 과제인 생산공장의 지정 및 건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평시의 탄약 수요충족과 전시에 대비한 비축을 감안하여 화약공장 건립이 우선 목표로 꼽혔고, 1974년까지 완공을 목표로 화약공장 건설의 검토에 나섰다. 당시 이미 인천에 한국화약(주)이 소유한 민수용 화약 공장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방위차원에서의 지역적 취약점을 감안하여 군용화약공장은 별도로 후방에 건설하게 되었다. 화약을 만들고 난 뒤의 부산물을 비료원료로 쓸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전남 여천에 제7비료공장을 건설하기로 하고, 인접한 곳에 화약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이미 기본소화기를 M16으로 교체한다는 방침이 굳어져 있었으나, 개인화기를 생산하는 신공장의 건설이나 지정은 고려되지 않았다. 현역군용 M16 소총과 M60 기관총은 이미 건설중이던 M16공장에서 생산(육군 조병창 주도)하고, 현역군이 쓰고 있던 M1 소총, 칼빈총 및 기관총은 예비군에서 물려받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단, 예비군용 유탄발사기(M79), 박격포, 대전차 로켓은 민간 방산업체에서 생산하기로 결정되었고, 105밀리 포를 비롯한 대구경포 생산공장은 화포생산의 소재로 고급특수강이 필요했기 때문에 삼미특수강(주)이 맡게 되었다. 이 대구경포 생산 공장은 창원 기계공업 기지에 세워졌으며 당시로서는 최신식 공장이었다.
  이러한 계획 하에 개발생산업체 19개, 화포 시제업체 9개, 포탄 시제업체 19개, 기타 11개 업체 등 중복 제외 29개 업체가 제1차 방산업체로 지정되었다. 당시로서는 극비사항에 해당되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방위산업공장 건설계획은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에 일체 흡수 통합되었고, 건설자금도 중화학공업 건설 자금에서 지출하게 되었다.

 

 

∷ 1차 율곡사업


  1974년에는 율곡사업 집행방침 및 절차를 대통령령으로 마련하여 율곡사업의 추진 절차를 규정화했다. 방위사업을 위한 재원마련을 위해 1974년과 1975년에 방위성금을 모았고, 방위세를 특별세로 신설하여 안정적인 무기체계 획득재원이 마련되었다.
  1974년 4월부터 1981년까지 1차 율곡사업(전력증강 8개년 계획)에 착수하면서 양적 질적으로 열세한 대북 방위전력 확보와 북한보다 우위의 방위산업 육성을 목표로 했다. 중점 전력증강 분야는 조기경보와 방공 능력 강화, 항공·해군 전력증강, 전투사단 개편과 후방경비사단 무장화, 지상화력 및 기동력 보강, 국방연구개발 및 방위산업 육성 등이었다. 이에 따라 국방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첨단정밀무기체계를 제외한 기본적인 재래식 무기체계를 생산할 수 있는 방위산업 기반은 1981년 무렵에 거의 조성되었다.

 

 

 

 

[사진 8] 1호 국산미사일 백곰 시험발사 광경(1978년 9월 26일 안흥시험장)(사진_국방과학연구소)

 

 

  한편 이 시기에 연구 인력을 확대하고 체계적인 연구개발에 전력하던 국방과학연구소에서는 1978년 9월 26일 백곰 지대지미사일 발사에 성공하면서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사거리 180km를 자랑하던 백곰은 당시 북한이 갖고 있던 사거리 50km의 프러그 미사일에 비해 3배 이상의 사거리를 보유하고 있어 전 세계가 단기간에 상당한 발전 속도를 이룩한 한국에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 한국방위산업진흥회 설립


  방위산업은 그 특성상 업무체계가 다소 자유롭지 못하고, 어떤 사업보다도 정책적 제약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더구나 1975년 당시 방위 산업육성정책은 산업의 토양을 착실히 닦고 그 위에 씨앗을 뿌리는 완만한 방식이 아닌, 황무지에 씨앗을 다져 넣는 듯한 다소 급한 방식이었다.
  탄생배경이 이렇다 보니 정작 뒤에서 받쳐 줄 구조적·정책적 환경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부족한 환경적 요인에서 발생하는 모순들은 결국 방산업체의 부담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특히 업체가 수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는, ‘민수와 함께 발전’이라는 기본취지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근본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업체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정부 관계부처로서도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적절한 수익이 보장되고 업체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차후 방위산업 육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타 업체들의 방위산업에 대한 기피현상을 불러일으켜 양적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차후 육성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업체의 경영부담과 불만은 곧 생산력 저하와 시스템 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에, 적절한 해결책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구상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정부와 업체의 이해가 일치해 제안된 것이 바로 업계의 대변자 성격을 가진 협의기구의 설립이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1975년 6월, 군수심의회에서는 본격적인 방위산업진흥을 위한 협의기구의 설치가 논의되었다. 군수심의회가 개선책 연구에서 의결까지 총괄하는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국내외 정세와 제도 연구, 업체 지원 등 밀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육성업무를 효과적으로 완수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생산의 주체가 민간기업인 만큼 업체대상 업무 지도 및 지원과 정부부처 대상 애로 및 건의사항 전달 등, 민과 군의 창구 역할을 수행할 협의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적극 동의한 방산업체 대표자들은 5개월에 걸친 논의와 준비 끝에 1976년 3월 5일 한국군수산업진흥회를 발족했다.

 

 

 

 

[사진 9] 한국군수산업진흥회에서 한국방위산업진흥회로 명칭을 바꾼 뒤 거행한 현판식(1979년 3월 5일)

 

 

  한국군수산업진흥회는 회원사의 수익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제도들의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제도개선에 우선 점을 두고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이 무렵 1977년 6월부터 대통령 주재 방산 진흥확대회의가 정기적으로 개최되기 시작했 다. 방위산업에 관련된 민·관·군이 한 자리에 모인 가운데 방위산업 육성에 관한 원칙적이고 기본적인 문제들이 직접적으로 토론되었는데, 주로 방산자금 지원의 원활화, 육성기금 조성, 계약조건 개선 등의 주제가 거론되었다.
  한국군수산업진흥회는 방산진흥확대회의를 통하여 현 계약제도상의 문제점, 자금지원의 난점 등과 개선책을 지속적으로 건의하였고, 정부 및 관계자들로부터 방산육성 지원의 보강 필요성에 대한 관심과 동의를 이끌어 내었다. 이 방산진흥확대회의를 통하여 ‘방산 육성 지원 시책의 지속적 추진, 기능공 처우개선, 품질 관리 및 검사제도의 확립’ 등이 대통령 지시로 하달되었고 이후 관련 기관의 적극적 협조를 통해 관세 감면 대상의 확대, 원가계산 인정범위 확대 등 많은 성과가 이루어졌다. 방산진흥확대회의를 기점으로 정부와 방산업체의 업무가 점차 유기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장기적인 경제개발계획과 방위산업육성계획이 동시에 진행되던 상태에서 율곡사업까지 진행되면서, 1970년대 후반의 정국은 대규모 사업의 진행과 그에 비해 열악한 소득 수준이라는 난관에 부딪혀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방산업계가 당면한 기업수지 개선 방안으로 방산물자의 수출촉진이 선결과제로 떠올랐다.
  한국군수산업진흥회는 1977년부터 해외시장 개척 활동 방안과 수출제도 개선을 위한 방안을 수립하고, 국방부와 연계하여 체계적 계획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해외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품질 향상도 중요하지만 이와 병행하여 시장의 정보, 각 국가별 수요물자와 공급 상태 등 수출 가능성에 기반한 조사와 회원사 대상 정보 전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결론 하에 해외 시장 정보를 입수하여 수출가능품목을 작성, 시달하였다. 또한 해외기술교류를 위해 전시회를 비롯한 해외 방위산업 관련 행사 소식들을 수집하여, 각 정보와 분석내용을 회원사에 제공하고, 해외협력부를 신설해 본격적으로 해외협력사업을 전개하게 되었다.

 

 

 

 

[사진 10] 청와대에서 열린 4차 방위산업진흥확대회의(1979년 5월 8일)

 

 

  해외협력 사업의 적극적 추진과 함께, 이사회에서 기존 영문 표기의 적합성이 제기되었다. 논의 결과 한국군수산업진흥회의 업무 성격을 알리는데 있어 적절하지 않으므로 영문 명칭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1978년 이사회 회의를 거쳐 1979년 3월 5일 현재의 명칭인 한국방위산업진흥회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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