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K-21 보병전투장갑차(IFV)

醉月 2020. 3. 22. 09:55

K-21 보병전투장갑차(IFV)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 보병전투장갑차

K-21 보병전투장갑차 (출처: 한화디펜스)


개발의 역사

대한민국은 건국 후 불과 5년 만에 6·25 전쟁을 치르게 되었으나, 불필요한 남북 간의 작은 충돌이 새로운 전쟁으로 비화하는 것을 우려한 미국은 국군에 공세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중화기는 거의 공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무장에서 열세였던 국군은 전쟁 초반 소련으로부터 공여 받은 중화기로 무장한 북한군에게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군은 전쟁 중 미군에게 군원 물자 형태로 지원받은 M3A1 반궤도식 장갑차를 첫 장갑차로 도입했고, 이후 1960년대 초에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됨에 따라 다시 미국으로부터 M113A1 장갑차를 공여 받았다. 하지만 북한군 특작부대의 후방 침투 문제 때문에 도심지 운용에 불리한 궤도식 장갑차 대신 차륜형 장갑차의 필요성이 커지자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차륜형 장갑차인 이탈리아 피아트(Fiat)사의 6614 장갑차를 우선 소량 면허 생산했으며, 이후 6614 면허 생산 간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KM-900 장갑차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대(對) 간첩 작전 교리 변화에 따라 KM-900은 소량 생산으로 끝나게 되었으나, 이때 쌓인 개발 노하우와 기술은 이후 K-200을 탄생시킨 ‘두꺼비 사업’에서 이어지게 된다.

장갑차의 국내생산은 피아트 6614를 면허생산하면서 처음 시작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대한민국 국군은 베트남 전쟁 종전 후인 1981년부터 M113A1의 대체 차량 개발을 진행하면서 대우중공업과 국방과학연구소 주도로 한국형 장갑차 개발에 착수했으며, 대우중공업은 그간 M113A1 창정비를 맡으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활용하여 자체적인 장갑차 개발에 착수했다. 이렇게 1983년부터 개발된 K-200은 총 2,500대 이상이 양산되면서 사실상 국군의 주력 장갑차로 자리 잡았으며, 이 사업에 함께 참여했던 다수의 국내 기업들 또한 장갑차량 양산을 위한 기술을 축적할 수 있었다.

차기 장갑차로는 병력수송장갑차(좌)와 보병전투장갑차(우)가 모두 구상되었으나, 예산의 제약 속에서 획득 대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결국 보병수송장갑차가 선정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K-200의 성공에 힘입은 대한민국 육군은 병력수송장갑차(APC: Armored Personnel Carrier) 개념보다는 보병전투장갑차(IFV: Infantry Fighting Vehicle) 성격의 차기 장갑차 도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으며, 이에 국방과학연구소는 중구경 화기를 갖춰 어느 정도의 공세 능력을 갖춘 보병전투장갑차의 개념 연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국방과학연구소는 1991년 말까지 두 가지 기본 설계안과 소형 축소 모델을 내놓았으며, 1995년에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그 해 말 정식 소요 제기가 올라가고 탐색 개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합동참모본부는 신형 장갑차의 개발보다는 여전히 운용 중인 수량이 많은 K-200 장갑차에 중구경 무기체계를 통합하는 방식으로 보병전투장갑차 개발 사업을 진행하도록 의견을 제시함에 따라 신형 장갑차의 개발은 일시 중단되었다.

K200 장갑차는 2,500여대가 생산되면서 대한민국 국군의 주력 장갑차로 자리잡았다. (출처: 대한민국 육군)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이보다 앞선 1991년에 대북 압력 목적으로 경제 협력 차관 2억 1,400만 달러를 소련에 제공했는데, 차관을 상환하기 전인 1991년 12월에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해체되면서 상환 받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일단 구 소련의 모든 부채는 신생 러시아 공화국이 승계하기로 했기 때문에 차관은 러시아가 상환하기로 했으나, 갓 건국한 러시아 역시 전반적인 국가 정비 등으로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제 이행은 쉽지 않았다. 이에 러시아 측은 당시 보유 중이던 군용 장비를 차관 이자액에 맞춰 현물로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했으며, 한국은 그간 입수와 연구가 어려웠던 구 소련제 무기를 도입한 후 아직도 소련제 무기를 운용 중인 적성국의 전술 연구와 무기체계 분석용으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불곰사업을 통해 도입된 BMP-3는 우리 군에게 보병전투장갑차의 운용개념과 경험을 제공했다. (출처: 대한민국 육군)

일명 “불곰사업”으로 명명된 이 사업을 통해 들어온 장비들은 어떤 경우 우수한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어떤 경우는 생각보다 실망스러운 성능에 조기 도태가 결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 그간 서방권에서 입수하지 못했던 T-80 전차나 BMP 장갑차 등이 입수되며 소련 측 기술과 전술을 연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 소기의 성과였다. 그중에는 우수한 성능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장비들도 있었는데, 초창기에 도입된 BMP-3 전차의 경우는 초도 물량으로 33대만 도입했다가 성능이 입증되면서 2차 불곰사업을 통해 37대를 추가 도입했을 정도였다. 비록 BMP-3는 T-80과 함께 체첸 내전에 투입됐다가 대거 격파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이는 장갑차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동 공간이 협소한 시가지에 장갑차와 전차를 전개했던 러시아의 전술 실패 탓이 더 컸다. 무엇보다 국군의 BMP-3의 도입은 서방이 아닌 공산권 장비의 기술과 운용 노하우를 다른 각도에서 접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차기장갑차의 기동시험시제 (출처: 국방일보)

한편 K-200을 활용한 보병전투장갑차 개발 계획은 1997년 말, 통칭 “IMF 사태”로 불리는 아시아 외환위기가 벌어지면서 모두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우선 사업을 진행하고 있던 대우그룹이 흔들리면서 대우중공업마저 불안한 상태가 된 것이 가장 큰 우려였다. 결국 여러 가지 판단 고려 끝에 K-200 업그레이드 계획은 취소되었으며, 대신 앞서 추진했던 차기 보병전투장갑차 안이 다시 탄력을 얻었다. 국방부는 1999년 말에 국방과학연구소 주관으로 탐색 개발 사업을 시작했으며, 2002년경에 요구도가 수립됨에 따라 그 사이 대우중공업에서 두산그룹으로 매각되며 ‘두산 DST(現 한화디펜스)’로 사명이 변경된 옛 대우중공업 종합기계 부분과 약 770억 원 규모로 2003년에 시제 차량 개발 계약을 체결했다. 통칭 “차기 보병전투장갑차(NIFV: Next Infantry Fighting Vehicle)” 사업으로 명명된 이 사업에서 장갑차의 제식 번호는 K-21로 지정되었으며, 2005년까지 총 3대의 시제 차량이 개발되어 육군에 시험 평가용으로 인도되었다.

측면에서 본 K-21 장갑차. (출처: 한화디펜스)

K-21은 시험 평가를 거친 후 2008년 10월 약 4,580억 원 규모로 1차 배치(batch)분 계약을 체결했으며, 본격적인 양산은 2009년 11월에 체결되었다. 총 10년에 걸친 개발 기간 동안 투입된 개발비는 약 910억 원이었으며, 최초에는 900대를 양산할 계획이었으나 계약 직전인 2008년경에 양산 수량을 줄여 총 3차에 걸쳐 2013년~2016년 기간 동안 400대가 실전 배치되었다. 이후 K-21은 제20기계화보병사단을 시작으로 실전 배치가 이루어졌으며, K-200과 더불어 대한민국 국군의 주력 장갑차로 자리를 잡았다.

 

2014년 10월 3일, 국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 K-21 실사격 시범 장면 (출처: 유튜브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