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상 고쳐주며 나주반 원형 살려낸 소반장 김춘식
알고 보면 가장 흔한 것이 가장 귀한 것일 때가 많다. 공기와 물이 그렇고, 물건 가운데서는 밥상과 밥그릇, 수저가 그렇다. 나무로 만든 소반(小盤)은 작은 목공품(小木) 중 가장 흔한 기물이다. 삼층장처럼 크지도 않고 자개함처럼 화려하지도 않은, 그저 수더분한 낯빛을 한 소반은 흔한 만큼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존재였다. 집에 근사한 장롱이나 영롱한 자개함은 없을 수 있지만 밥상 없는 집은 없다.
“뭐니뭐니 해도 제일의 공예는 소반입니다. 왜냐고요? 소반이 기본이니까요. 임금님도 소반에 잡수시고, 서민도 이 소반에 먹었습니다. 거지가 밥 빌러 와도 멋진 개다리소반에 상을 차려주는 것이 우리네 인심이었어요. 옛 노래에 ‘개다리 목반에 닭다리 하나 얹어주라’는 대목도 있잖습니까.”
김춘식 장인은 소반이 보기에도 아름답지만 소반에 담긴 문화가 더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사실 머슴이나 걸인에게도 상을 차려내는 것은 멋진 문화다. 더구나 그 상이 우아한 개다리소반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단아한 소반 위에 올라오면 초라해 보이지 않고, 소박하되 당당해 보인다. 그것은 아마 소반이 품고 있는 인간 중심 문화, 즉 ‘상을 받는 것은 한 사람으로 제대로 대접받는다’는 의미 때문일 것이다. 서양 식탁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 음식을 먹으려면 사람이 식탁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 소반의 경우 앉아서 기다리면 음식이 사람에게 온다.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것도 좋지만, 끼니를 놓치고 늦게 들어온 가장이나 식구에게 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여보내보십시오. 3, 4인용 식탁에 혼자 앉아 먹는 것과 일인용 소반(單盤)에 담아 내온 음식을 먹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실감할 수 있을 겁니다.”
예닐곱 때 받는 독상, 인격체로 대접한다는 뜻
김춘식 장인의 말대로 우리 문화는 상과 관련이 깊다. 아이를 점지해달라고 비는 정화수 상이 있었고, 아이를 낳기 전에는 안전한 출산을 기원하는 삼신상을 차려 산모의 방을 꾸몄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삼신상을 올렸고, 백일에는 백일상, 돌에는 돌상을 차렸다. 특히 돌상은 아이가 그 상에서 무얼 집느냐에 따라 행운을 점쳐보기도 하는 중요한 상이다. 또 자라면서는 생일상, 어른이 되는 입문과정에서는 관례상을 받고, 혼례에서는 동뢰상(同牢床)을 사이에 두고 신랑신부가 절을 한다. 그뿐인가. 장 담글 때도, 먼 길 떠난 식구의 안위를 빌 때도 정화수 상을 장독대에 올렸고, 부부가 합방하는 날에는 낭만적인 둥근 일주반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이 들어 환갑상을 거쳐 죽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제사상을 받는다.
이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죽은 뒤까지 갖가지 상을 받으니, 우리나라 사람에게 상은 삶의 여정이 담긴 상징적 물건이자 육체적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까지 삶을 연장하는 도구가 된다. 그러나 대다수가 아파트에서 사는 오늘날 그런 의미는 확실히 빛이 많이 바랬다. 김춘식 장인이 안타까워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옛사람들은 인간의 도리와 예절도 이 밥상에서 가르치고 배워왔어요. 할아버지와 겸상하면서 아이는 어른이 숟가락을 들고 놓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배웁니다. 자기 마음대로 먹고 치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보조를 맞추고, 나아가 상대보다 자신을 낮추는 자세를 익히게 되는 거지요. 또 어른은 아이에게 맛난 음식을 권해주는 자상함을 보임으로써 밥상을 중심으로 따뜻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요.”
우리 예법으로는 부자(父子)는 겸상하지 않아도 조손(祖孫)은 겸상이 가능했으니 아이는 할아버지 상에서 숟가락질, 젓가락질을 익히고 밥 먹는 예절을 배운다. 자식은 가르치다 보면 역정이 나기 일쑤지만 손자는 실수도 너그럽게 넘기며 인자하게 가르칠 수 있다. ‘밥상머리’ 교육이 잔소리와 훈계가 아니라 할아버지와 귀여운 어린 손자가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고 밥을 먹을 때 자연스레 일어나는 마법이라는 것을 겸상 소반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전에는 예닐곱 살이 되면 독상을 받았어요. 그때 벌써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겸상할 때는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고, 독상을 받을 때는 독립적인 주체성을 인정받았으니, 얼마나 성숙하고 멋진 문화입니까.”
그의 소반 예찬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실 일반 집기 가운데 소반처럼 정서가 깃들어 있는 물건은 드물다. 그래서인지 전통 목공품이 많이 사라진 오늘날에도 소반은 여전히 인기다. 독상을 받는 전통 덕분에 남아 있는 옛 소반도 그만큼 많고, 가격 역시 구입하기에 비교적 부담이 없는 것도 소반의 인기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옛 소반이 모두 전통대로 제대로 만든 소반은 아니다. 광복 후부터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 마구 만들어낸 막상이 아주 많다. 그 역시 한때는 그런 상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온 손님이 내준 숙제
그가 소반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0년대 초다. 그의 나이 20대 초반이었으니 일찍부터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연배 장인들이 대개 10대 중반에 도제로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빠르다고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는 ‘누구의 제자’로 수업을 받지도 않았다. 물론 여러 사람에게 기술을 배웠지만 그는 늘 ‘보스’였다. 상 만드는 기술을 소반 공장을 차린 다음 종업원인 장인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상 공장을 차릴 생각을 한 것은 삼종형님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그 형님이 상을 만들다가 건축계로 나갔는데, 제게 상 만드는 연장을 주며 ‘상 만들면 먹고살 만하다’고 했거든요.”
군대를 제대한 후 그는 그 형님 말대로 상 만들 생각을 하고 떡하니 공방부터 차렸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누구 밑에 들어가 기술 먼저 배울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기술자를 데려다 부리면서 소반을 만들어 팔았다. 당시 나주반은 물론이고 다른 소반 기술자, 소목이든 대목이든 목수들은 대개 전국을 떠돌며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공방에 머물며 일하곤 했다. 그는 그런 기술자들을 채용해 상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든 상을 그는 ‘장따래기 상’이라고 한다.
“기술자들은 월급제가 아니라 상을 만든 숫자만큼 품삯을 받는 도급제로 일해 비록 기술이 출중하다 해도 시간 들여 정성껏 만들기는 힘들었죠. 그리고 이미 그때 제대로 만드는 전통 목수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역시 밥벌이로 ‘장따래기 상’을 만들어 파는 목물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주반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찾아 왔다.
“공방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서울에서 손님이 왔어요. 집안에 아주 멋진 제상(祭床)이 있었는데, 당숙이 가져가버렸대요. 그 상이 나주서 만든 상이니 그와 똑 같은 상을 만들어달라고 저를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다리마다 용이 휘감고 올라와 상판에 이르러 두 마리씩 마주 보는 모양을 한 상을 재현해낼 기술자를 찾기는 어려웠다. 서울 손님은 기술자 찾는 경비로 쓰라며 500원을 맡기면서까지 그에게 매달렸고, 그날부터 그는 장인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전통 나주반을 만드는 장인을 여럿 소개받았는데,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이라고 할 이운연 선생에게도 부탁을 넣었다.
“제가 아는 허일만이라는 목수가 이 선생님댁과 사돈지간이라며 부탁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이 선생님 연세가 아주 고령이라 도저히 일할 상태는 아니었고, 허일만 씨가 ‘선생님 말년의 역작을 남기시라, 일이 힘드시면 지시만 하시고 일은 제가 하겠다’고 해도 거절하셨답니다.”
이운연은 일제강점기 조선 예술에 빠졌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조선을 돌아다니며 공예품과 장인들을 찾아다니던 1920년대에 쓴 글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이운연과 그의 부친인 이석규를 만나는 자리에 있던 어린아이를 보며 이 아이가 과연 자라서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 조선 공예의 맥을 이을 수 있을지 염려했다. 야나기의 걱정대로 이운연의 아들 이민섭 씨는 대를 잇지 못했다.
“이민섭 씨는 고등학교 때 일본으로 유학 갔다가 나중에 철도공무원이 됐는데 상 만들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부끄러워해서 그런 사실을 숨겼대요. 그런데 나중에 그분 선배가 일본에 가서 야나기 무네요시의 자료를 보고 와서 ‘나주반 명인으로 자네 할아버지와 아버지 기록이 남아 있더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공예의 가치를 알게 됐답니다. 이민섭 씨가 나중에 제게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맥을 잘 이어달라고 당부하더군요.”
‘나주반의 맥을 이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는 1980년대 초였고, 문제의 ‘제사상’을 짤 장인을 찾아 헤맬 때는 1960년대 초, 젊은 목물상인 김춘식은 아무런 기술도 갖고 있지 못한 때였다.
“그런데 그 뒤로도 서울에서 교수니 사장이니 하는 모모한 분들이 나주반을 구한다며 저를 자꾸 찾아왔어요. 그래서 저도 점점 나주반에 빠지게 된 거죠.”
그런데 서울 손님의 주문은 어떻게 됐나? “지금 내 실력이라면 어떻게든 만들어냈을 텐데, 당시로서는 서울 손님의 숙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고 그는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숙제가 인연이 되어 그는 제대로 된 나주반 찾기에 나서 마침내 직접 나주반을 만드는 장인이 되었으니 서울 손님의 숙제는 오랜 세월 뒤 다른 방식으로 풀린 셈이다.
나주반의 마지막 장인 장인태를 모시다
그가 운영하는 공방에는 기술자가 많았지만 나주반을 제대로 만드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그는 우선 나주반의 원형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한 가지 꾀를 냈다. 헌 상 고치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헌 상을 해체해서 때를 벗겨내고 곱게 다듬어 제대로 조립해주는 일을 했습니다. 워낙 정성 들여 해주니 소문이 나서 헌 상이란 헌 상은 죄다 모여들었지요. 닭이 1000마리면 그중에 학도 있고 봉(鳳)도 있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쇠못으로 대충 박은 엉터리 상이 많지만 가끔은 좋은 상도 만나게 마련이거든요.”
헌 상을 고치는 일은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상을 접할 수 있었고, 해체해서 다시 조립하는 과정에서 상의 구조를 잘 파악하게 되어 기술이 그만큼 빨리 늘었다. 그리고 헌 상을 고쳐주고 받는 보수 역시 짭짤했다. 그의 공방에서는 기술자들이 ‘장따래기 상’을 열심히 만들었지만 정작 사장인 그는 나주 영산포의 헛간을 빌려 헌 상을 분해하고 다듬고 보수하고 조립하는 일을 했다. 물론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기술자에게 물어가면서. 그렇게 10년 넘게 고치고 연구하다 보니 어느덧 나주반을 직접 짤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그래도 그는 늘 나주반을 제대로 짜는 옛 장인을 수소문했다. 그가 채용한(또는 모신) 기술자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장인태 장인이다.
“이운연 선생의 아드님인 이민섭 씨가 장인태 어른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여름방학 때 일본에서 고향에 돌아와 지낼 때 할아버지와 아버지 공방에서 일하는 장인태 장인을 봤다고요.”
그런데 막상 장인태 장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기술 좋은 목수들이 대개 그렇듯 장인태 역시 역마살이 심했다. 나주 출신인 장인태는 영광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홍길동’ 같은 이로 한곳에 진득하니 붙어 있지 못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를 김춘식 장인은 ‘3년간이나 모셨다’고 한다.
“늘 술을 마시면서 위장약도 함께 드시곤 했죠. 나중에 아들네에 다녀오겠노라고 가시더니 석 달이 지나도 종무소식이어서 제가 직접 대전으로 찾아갔더니 글쎄, 돌아가신 뒤더라고요. 위암이었다고 해요.”
단순하고 세련된 선, 튼튼한 구조의 나주반
장인태 장인은 다른 사람이 상을 세 개 만들 때 겨우 하나 만들까 말까 할 정도로 나주반을 제대로 만드는 이였다. 아마도 정확하고 프로 정신까지 갖춘 마지막 전통 목수 세대였을 것이다. 김춘식이 장인태를 모신 시절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였다. 그때 김춘식은 이미 나주반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을 정도로 기술을 익혔지만, 그는 “장인태 장인은 대패질부터 달랐다”고 기억한다. 그런 장인태 장인이 죽기 전 3년 동안 김춘식 장인에게 옛 목수의 전통을 전해줌으로써 이석규와 이운연, 장인태, 김춘식으로 이어지는 나주반의 전통은 맥을 이을 수 있게 됐다.
그의 뒤를 이을 아들 김영민 씨와 함께. 전시실 한 면을 마루와 방 두 칸으로 꾸몄다. 이 공간을 채운 집기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장롱을 비롯해 나주 지방의 명물 부채인 ‘남평선’까지 솜씨 있게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목을 매단 나주반의 전통, 아니 정통 나주반은 다른 지역 소반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나주반은 단순하면서도 견고한 게 가장 큰 장점이지요. 해주반은 조각이 아름답지만, 사실 실생활에서 많은 조각은 위생에 좀 불리하지 않겠어요?”
그의 찬사 담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나주반은 현대인의 눈에 가장 편안해 보이는 외형을 지녔다. 상판의 테두리(변죽)를 따로 만들어 끼워서 판이 잘 휘지 않고 튼튼한데, 상판 아래 조각된 운각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미가 돋보인다. 또한 경상도에서 주로 사용했던 통영반은 무거워도 무늬가 아름다운 느티나무 괴목을 선호한 데 반해 나주반은 가볍고 단단한 은행나무를 주로 사용해서 실용적인 면에서도 뛰어나다.
“어디 소반이든 괴목과 은행나무를 다 썼지만, 아무래도 나주반은 행자반(은행나무 소반)이 최고지요. 행자반은 괴목보다 반은 가볍습니다. 아낙네들이 자기나 놋그릇 같은 무거운 그릇을 상에 올리고 부엌에서 토방으로 올라가려면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나주반은 실용적이고 인간적이고 또 여성을 배려한 상이다. 괴목은 아랫사람들이 밥상을 날라다 줄 수 있는 형편의 사람들, 실용성보다 멋진 무늬에 더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애호했다. 통영반에 괴목이 많은 것은 체면을 중시하는 양반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김춘식 장인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나주반의 옻칠이다. 지난해 새로 문을 연 나주반 전수교육관에 특별히 옻칠을 말리는 방을 마련했을 정도로 그는 옻칠에 신경을 쓴다.
“옻칠은 나무를 보호해서 소반의 수명을 늘여주죠. 행자반에 생옻칠을 여덟 번 정도 해주면, 다섯 달 뒤부터 옻빛이 살아나기 시작해 해가 갈수록 옻빛이 피어납니다. 나중에는 대춧빛으로 아주 예쁘게 변하지요.”
그는 옻칠한 밥상에서 밥 먹는 사람치고 간 나쁜 사람이 없다고 주장한다. 놋그릇 등 뜨거운 음식 그릇을 상에 놓으면 옻칠이 수증기와 함께 조금씩 피어올라오는데, 옻이 몸에 좋기 때문이다. 이는 곧 다른 화학도료는 자칫 몸에 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좋은 빛깔을 내기 위해 공력과 재료를 아끼지 않는 그의 상은 칠 값만 생각해도 꽤 비싸야 마땅하지만, 그렇게 비싸게 받지는 않는다. 보통 상은 30만 원부터 15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다. 요즘 상 값이 많이 싸진 편이란다. 25년 전에는 소반 하나에 15만 원씩 했다고 한다.
“연세대 법대 교수가 환갑을 맞아 제자들이 기념논문집을 그에게 바치는데, 보답으로 소반을 선물하고 싶다고 제게 문의해온 적이 있어요. 15만 원이라고 했더니 ‘우리 교수들은 돈이 많지 않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백골 소반을 직접 들고 서울로 찾아갔습니다.”
수유리까지 물어물어 교수 집을 찾아간 그는 이 소반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일일이 설명했다. 칠하기 전의 백골은 작업한 손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일부러 백골을 가지고 간 것이었다. 그의 설명을 들은 교수는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그에게 숙박비로 쓰라며 봉투에 10만 원을 넣어주었다. 그는 대신 갖고 간 백골 소반을 선물했다.
“백골에 기름칠해 길을 들이면 그것도 멋진 소반이 되거든요. 그분이 정년퇴임하실 때 기념으로 소반을 스무 개 주문하셨어요.”
교사 자리 거절하고 사업하다 차압·경매당해
헌 상을 고치며 나주반의 원형을 하나둘씩 찾아나간 노력의 첫 결실은 1977년 나주반 재현 전시회로 나타났다. 나주반 70점을 충실히 재현해낸 이 전시회는 TV 뉴스에도 나올 만큼 화제가 되었다.
“학계에서는 나주반은 이제 죽은 걸로 보고 있을 때였으니, 그 전시회가 눈길을 끈 것 같습니다. 전시회 덕택에 조금 유명해져서 부산공예학교에서 교사로 초빙까지 받았답니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기술학교를 많이 세웠는데, 부산공예학교도 그런 전문 기술학교였다. 그는 일본에서 초등학교 다닌 것이 학벌의 전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가장 노릇하던 큰형을 따라 온 가족이 일본에서 살게 됐는데, 그때 학교를 다니다 돌아와서는 중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그 뒤로 먹고살기 힘든 세월이 이어지는 바람에 학교공부는 그걸로 끝이었고, 서당에만 다니고 말았다.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저를 정교사로 모시겠다고 하니 무척 고마운 일이었죠. 제가 직접 그 학교에 찾아가 보니 목공뿐 아니라 도자 등 몇몇 공예를 가르치고 있는데, 정말 정예교육을 하고 있더군요. 그런데 저는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제 작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니 공방을 만들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난색을 표하더군요.”
어쩌면 공방은 핑계였는지 모른다. 그가 생각하기에, 부산은 통영반 전통에 속하는 지역이니 통영반을 가르치는 게 맞을 것 같았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통영반 장인이 대기업 수위가 되어 “이렇게 편한 일 놔두고 뭐 하러 다시 상 짜는 일을 하겠느냐?”며 거절했다고 한다.
그만큼 옛것을 지키기가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그래도 박정희 정권 때는 경기가 좋아 형편이 나아진 사람들이 갖가지 목물을 잘 사들였고, 장따래기 상을 만드는 그의 공방에는 한때 종업원이 열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공방도 사업인지라 차압을 세 번 당하고 경매도 두 번이나 겪었다.
“종업원 월급과 자재 값은 늘 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데, 사업이 어려워지면 은행 빚에 쪼들리게 되죠. 그럴 때는 부산의 공예학교에 근무할걸, 하는 후회도 했지만 결국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일해 빚을 갚는 도리밖에 없더군요.”
이렇게 힘들게 빚을 겨우 다 갚았는데, 1989년 나주에 큰 홍수가 나서 작업공방과 전방, 살림집, 목재까지 다 떠내려가는 바람에 큰 고통을 받은 적도 있다. 그래도 그는 천주교 신앙의 힘과 사내다움으로 고비를 넘겼다.
“고난이 닥쳤을 때 도망가면 망하지만 싸우면 해결책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꿋꿋함으로 정면 돌파하면 뜻하지 않은 도움도 받게 된다고 한다. 경매하러 온 사람들이 그의 작품 홍보에 나서 오히려 작품을 비싼 값으로 판 적도 있고, 한번은 그의 사업이 망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리자 목포의 ‘주먹’이 그에게 찾아와 800만 원어치를 주문해준 적도 있다.
이제는 그의 인생에 더 이상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없다. 1986년 ‘나주소반장’으로 무형문화재가 되면서 그는 서서히 공방을 정리해나가기 시작해 1990년 무렵 사업을 완전히 접었다.
“명색이 무형문화재가 되었는데 장따래기 상을 계속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공방을 정리하니 형편은 어려워졌지만 속은 편하더군요.”
그의 나이 어느덧 일흔 중반이 되었다. 다행히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나선 둘째아들 김영민(40) 씨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김영민 씨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벤처기업을 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마다하고 자진해 소반기술을 배우겠다고 나선 기특한 젊은이다.
“제가 제 돈 까먹어가면서 한 일이라 아들이 이 일 하겠다고 나설 때 반대했습니다. 3년을 반대했는데도 아들이 대학원 산업공예과에 진학할 정도로 의지를 보이니 결국 제가 손들었죠.”
그렇게 반대했지만 일단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한 뒤 그는 모든 경제권과 관리권을 아들에게 싹 다 넘겨주었다.
“제 나이 일흔을 훌쩍 넘겼고, 살면서 쓴맛 단맛 다 봤습니다. 이제 삶의 고비를 넘기고 아들에게 모두 맡기고 물러나니 삶이 아주 평온해졌습니다.”
그는 진짜로 평온하게 산다. 새벽에 일어나 고추밭을 돌보고 오전에 작업실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컴퓨터를 배우러 간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동네를 한 시간 가까이 산책한다. 빚도 없고, 10년치 목재가 쌓여 있으니 부족함이 없다. 특히 지난해 문을 연 나주반 전수교육관은 멋진 작품전시실과 공방을 갖추어 다른 문화재 기능보유자들의 부러움을 듬뿍 사고 있다. 더구나 바로 옆에 그의 집까지 마련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경비를 시에서 거의 다 대다시피 했다.
“신정훈 전 나주시장이 저의 옛 공방에 놀러온 적이 있는데 공방이 너무 초라했는지 새 공방을 짓는 데 얼마 정도 들겠느냐고 하더군요. 저는 공예인은 거주지와 공방이 같이 있지 않으면 안 되니, 집까지 지어줄 것 아니면 아예 시작하지도 말라고 했죠.”
애초 예산보다 자꾸 늘어나 시의회에서 예산 증가를 반대하기도 했지만, 그는 직접 의장을 만나 설득했다.
“나주반이라는 나주의 명물을 되살리는 데 평생을 바쳤는데 당신들은 열매만 보고 내가 평생 쏟은 노력과 고생은 보지 않느냐고 했지요. 이제 공예인도 정당한 대접받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시절이 오기까지 그는 사업과 빚에 시달리면서도 혼자 헌 상과 씨름하고, 각종 민속자료 책자를 구해 공부하면서 소반의 역사와 가치를 되새기며 공예인으로서 자부심을 다져왔다.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온 김춘식 장인에게 이런 다사로운 노후는 절대 과분한 대접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소반의 ‘특별한’ 아름다움
더구나 소반은 그 크기나 구조로 보아, 상보를 덮는 키 큰 식탁이나 다리 없는 쟁반과는 달리 만드는 이가 다양한 형식을 시도해보고 솜씨를 부릴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그래서 우리 소반은 편리한 실용성과 더불어 미적으로도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장롱이나 궤, 문갑, 사방탁자 등 다른 소목은 형태가 거의 일정하다. 그러나 소반은 여러 가지 디자인을 시도해볼 수 있어 목수의 창의성과 상상력을 발휘하기 좋다. 소반이 ‘소목 공예의 꽃’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소반은 지방마다 다른 개성을 뽐냈고, 다양한 용도의 갖가지 상이 만들어졌다.
우리 소반의 아름다움을 처음 발견한 이는 일제강점기의 일본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에 힘썼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는 ‘조선의 소반’이라는 책에서 올바른 공예품이란 세월이 흐를수록 아취를 더해가는 기물로서 ‘사용자가 완성자’라는 혜안을 드러냈다. 이 책은 당시 일본인들이 수집한 멋진 소반까지 소개돼 있는 중요한 자료다.
개다리소반과 개상판은 다르다
한편 다리 모양으로 구별하면 다리가 안으로 휘어진 개다리소반((狗足盤)과 밖으로 우아하게 휜 호족반(虎足盤), 말 다리처럼 씩씩해 보이는 마족반(馬足盤`·통영반에 자주 사용한다), 대나무의 마디처럼 장식한 죽절반(竹節盤), 다리가 하나인 일주반(一株盤·단각반이라고도 한다), 다리를 두 개의 판으로 처리한 이각반(해주반 형식), 일주반이면서 상이 돌아가도록 만든 회전반 등이 있다.
이 중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개다리소반은 그 말이 주는 어감과 달리 매우 세련된 소반에 속한다. 개다리소반에 다리가 여섯 개인 것도 있는데, 특별히 아름답다. 개다리소반은 거칠게 짠 개상판과는 다르다. ‘춘향전’에서 변사또의 잔치에 끼어든 이몽룡이 받은 상이 ‘모 떨어진 개상판’이다. 사람들이 개다리소반과 개상판을 혼동하는 바람에 개다리소반이 하품 취급을 받는 오해가 생겼다.
소반은 또 용도별로 부르기도 한다. 밥상부터 운반용 밥상인 공고상(이고 갈 때 잘 보이라고 앞을 튼 상, 번상이라고도 한다), 주안상, 밥상 옆에 숭늉 등을 놓는 낮은 높이의 곁반이 있으며 차를 내는 다담상은 낮은 목판 형태의 네모상이나 짧은 다리의 둥근상이 많다. 또 냄비를 올려놓을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전골상, 반찬을 두는 짧은 다리의 찬반, 잔을 올려놓는 구멍이 뚫린 작은 잔상, 크고 푸근한 형태의 12각반의 돌상 등이 있다. 특별한 형식으로는 각반에 구멍을 낸 풍혈반이 있는데, 다양한 투조(透彫) 문양이 아름답다.
가장 흔한 구분법은 산지를 중심으로 한 방법이다. 나주반, 해주반, 통영반, 충주반, 안주반 등이 있는데 제작법과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 나주반은 간결하며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이고, 통영반은 남성적이고 중후하다. 해주반은 다리를 아름답게 조각한 통판 두 개로 처리한다. 강원도에서 주로 사용했고 서울 사대부들이 선호한 소반이다. 충주반은 개다리소반이 많고 안주반은 통영반과 비슷하면서도 다리에 번개무늬(雷文)를 주로 새긴다.
원반이나 각반, 반월반 같은 상은 어디서나 만들었고, 전문가가 아니면 산지를 구분하기 어렵다. 더구나 다른 지역 소반 형식을 일부 응용하는 것 역시 장인들 마음이었다. 이 민족은 언제나 새로운 걸 받아들이고 시도하는 데 개방적이었고, 이런 실험정신으로 소반은 이렇게 다양하고 멋지게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