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발효에 좋은 옹기 만들다보니 인생도 무르익었네요”
전라남도 강진 칠량 앞바다는 한때 옹기를 실어 나르는 배로 성시였다. 그 바다에 면한 봉황리는 대대로 옹기를 구워 살아온 옹기마을이었다. 마을 가운데 공동으로 쓰는 가마가 네다섯 개나 되고, 아낙네들은 항아리를 씻고, 옹기를 배에 실을 때는 어린애도 나와 작은 단지를 옮기며 거들었다는 마을이다. 그러나 오늘날 옹기를 실어 나르던 그 많던 범선(帆船)은 온데간데없고, 옹기 굽는 집도 단 한 집만 남았다. 그 집이 바로 옹기장 정윤석의 ‘칠량 봉황옹기’ 집이다.
“언제부터 이 마을이 옹기마을이었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저희 집안만 해도 옹기 일을 해온 지 6대째가 되는지 7대째가 되는지 잘 모르는걸요. 제가 듣기로는 옹기마을이 된 지 700년쯤 된다고 해요. 옹기를 만드는 집도 많았지만 옹기를 직접 만들어 굽지 않는 집이라도 옹기를 팔거나 가마를 관리하거나, 어쨌든 모두 옹기와 관련된 일로 먹고살았죠. 저의 외가도 처가도 모두 옹기를 굽던 옹기장이 집이었습니다.”
강진이 어떤 곳인가. 부안과 더불어 고려청자의 비색이 탄생한 곳이다. 강진군이 ‘고려청자 발생지’로 발굴, 새 단장하고 매년 청자 축제를 여는 곳이 이곳 봉황리에서 불과 7~8km 거리에 있다. 고려시대, 더 올라가서는 삼국시대까지 이어지는 도자(陶磁)의 맥은 2000년대 초반 발굴된 칠량 삼흥리의 가마터에서도 확인되었다. 가마터 17곳에서는 청자는 물론이고 고려시대의 세련된 도기(옹기)와 기와가 대량 출토되었다.
“제가 젊었을 적에 어른들이 이곳은 옹기가 더 오래됐다, 청자가 더 오래됐다고 말씨름을 하시곤 했습니다. 여기서는 옹기와 사기(자기)가 함께 발전해온 것 같아요.”
그릇 기술의 역사로 보면 청자 등 자기가 도기 이후에 나타난 것으로 보지만, 자기와 도기의 기술은 늘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왔다. 도기와 자기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재료인 흙의 재질과 굽는 온도인데, 부드럽고 차진 흙에 자기보다 낮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도기에 속하는 옹기는 신석기시대 등장한 토기의 성격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역사 깊은 그릇이라고 정윤석 옹기장은 말한다.
“빗살무늬토기부터 시작된, 흙으로 만든 그릇의 역사가 옹기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자기는 오래전에 이미 예술품이 되었지만 옹기는 아직도 실생활에 쓰이는 그릇 그대로의 효능을 가지고 있지요.”
원수 집에 쳐들어가 장독부터 부수는 이유
그의 말처럼 옹기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일상생활에서 매우 다양하게 써왔다. 소중하고 귀한 술이나 장도 옹기 독에 담아 보관했지만 똥을 담는 똥항아리와 똥거름을 나르는 똥장군까지, 옹기는 신성한 것에서 아주 일상적인 데까지 두루 쓰였다. 일부 지방에서는 굿할 때 상차림은 꼭 옹기로만 쓰기도 한다.
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는 종종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안방과 사랑방을 차지해왔으나 정신적인 면, 영적인 성격은 오히려 옹기가 더 많이 갖고 있다. 그래서 옛 문헌에 보면, 집안끼리 싸움이 나거나 원수의 집에 들어가 맨 처음 하는 일이 그 집 장독대의 독부터 깨는 일이었다. 간장이나 된장은 몇 년씩 두고 먹는 음식의 기본재료여서 현실적으로 중요하기도 하지만, 장독대가 깨지는 것은 곧 그 집안이 망하는 것을 상징한다. 장을 담글 때도 옛사람들은 삼가는 마음으로 담갔다. 우선 좋은 날을 잡아 목욕재계했고, 장이 익어갈 때면 독에 솔가지를 걸어두고 버선을 거꾸로 붙여 부정을 막았다. 그뿐인가. 장독대는 우리 어머니들의 기도처였다.
이렇게 장독이 영험한 힘을 갖게 된 것은, 옹기로 만든 그릇에서 익는 장과 술, 식초 등 발효식품이 제대로 익기 위해서는 인간의 힘만이 아니라 옹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옛사람들은 장맛이 변하면 집안에 우환이 생기며, 정치가 문란해지면 술맛이 망가진다고 보았으니, 이는 장과 술을 담글 때 정성을 다 기울일 수 있다면 이미 그 집안과 사회는 안정되고 풍족한 세상이라는 뜻일 게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영적인 심성을 담고 있는 귀한 옹기의 전통이 정윤석의 대(代)에 이르러 자칫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적이 있다. 아니, 그는 옹기가 한창 잘나가는 시절부터 옹기가 빠른 속도로 사양길에 접어들던 시기,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오늘날까지 옹기의 부침을 모두 겪어냈다. 그리고 그 부침의 물결 따라 옹기장이 정윤석의 인생도 함께 흔들려왔다.
그가 처음 옹기에 입문한 것은 열여섯 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도중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남보다 2년 늦게 졸업하게 됐습니다. 선생님들도 중학교 진학을 적극 권하셨지만, 형편이 안 되는 바람에….”
공부를 잘했던 그로서는 공부를 포기하기가 아까웠을 것이다. 그는 젊은 호기로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면 공부할 길이 열리리라는 희망을 안고서. 그러나 서울 영등포역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 부닥친 광경은 어지러운 서울거리였다. 그는 이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한 듯하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당시 영등포역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어느 아주머니가 저를 끌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어요.”
그가 아주머니를 따라간 곳은 여관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하숙보기’로, 영등포역에 나가 여관에 묵을 손님을 데리고 오는 호객 일이었다. 그나마 일자리는 잡은 셈인데, 칠량 아름다운 바닷가에 살던 소년은 난장판인 영등포역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곧 고향과 가족, 동무들에 대한 그리움에 빠지고 말았다.
“돈만 있으면 시골에서도 학교 다닐 수 있는데 내가 서울에서 공부도 못하고 왜 이러고 있나 싶더군요.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 옹기를 배워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그는 옹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동무들이 멋진 교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나갈 때면 부러움과 창피함으로 몸을 숨기곤 했지만, 그는 평생 옹기장이로만 살아왔다. 한참 뒤 마련한 서른닷 마지기 농사를 돌보는 일 외에 그는 다른 일에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다. 10대에 감행했던 서울행이 그의 인생에 유일한, 미완의 모험으로 남아 있다.
“옹기 일이 힘들 때면 한 번씩 그때 일을 떠올려보곤 했어요. 그때 참고 서울에서 계속 살았더라면 이보다 나았을까, 더 잘살았을까 하고요.”
전쟁 후 경제 부흥기와 이어지는 산업화 시기를 생각하면, 서울에서 무슨 일을 했어도 지금쯤 부자가 돼 있었을 것이다. 대신 칠량옹기의 맥은 사라지고 말았을 테지만.
치솟는 물가에 직거래로 돌파
그는 옹기를 외삼촌에게 배웠다. 그의 집안도 옹기집안이었지만 아버지는 옹기상인이었고, 외가는 할아버지도 삼촌도 옹기장이였다. 당시 옹기일 하는 사람으로는 보통 일꾼과 옹기를 직접 만드는 성형사, 그리고 대장이 있었는데 그는 애초부터 보통 일꾼보다 보수를 서너 배 많이 받는 성형사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그런 굳은 결심과 노력 덕택인지 그는 보통 사람보다 빨리 일을 배워 5년 만에 ‘기술자’가 되었다. 여러 기물을 다 잘 만들고, 흙 선택부터 불 때기까지 두루 아는 숙달된 옹기장이가 된 것이다.
“5년이면 빠른 편이었지요. 스무 살 무렵에 큰 독(열 말 넘게 들어가는 특대짜리)까지 다 만들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나 큰 독은 더 나이가 먹어 힘 좋을 때 주로 만들었지요.”
그가 옹기를 배우던 시절은 옹기를 싣고 갈 배가 항시 대기할 정도로 옹기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였다. 형편이 조금씩 피면서 어느 집이나 장독대를 마련하던 시절이었다. 남보다 일찍 기술자가 되어 일감도 많았건만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막상 기술자가 되고보니 보수가 전만 못해진 것이다.
“기술을 배울 때는 예를 들어 독 하나 값에 쌀 두 말을 팔아올 수 있었다면, 기술자가 되었을 때는 쌀 한 말 반밖에 못 팔게 된 겁니다. 물가는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데 옹기장이가 받는 보수는 잘 오르지 않으니, 죽어라고 일해도 가난을 면키 어려웠지요.”
옹기장이로 살아오는 동안, 특히 1960년대와 1970년대 경제팽창기 그의 화두는 솔직히 ‘얼마나 잘 만들까’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물가를 어떻게 따라잡을 것이냐’였다. 만드는 것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오직 배운 대로밖에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아예 고민거리도 못 되었지만, 산업화가 한창 진행되던 시기 인플레는 심할 수밖에 없었고 1차 생산자인 그는 늘 허덕이는 신세였다. 더구나 결혼하고 새살림을 시작하던 때여서 생활은 더욱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스물셋에 장가가서 그해 입대했는데, 휴가 두 번 나온 동안에도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첫 휴가 때 물가와 두 번째 휴가 때 물가가 다른 걸 실감할 정도로 물가가 빨리 뛰었습니다.”
그 시절 옹기장이들은 소변을 보고 허리춤도 채 여미지 못한 채 뛰어와 일을 했고, 담배조차 물레를 돌리면서 피울 정도로 일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렇게 쉴 새 없이 물레를 돌려도 살림은 좀체 나아지지 않자 그는 마침내 독립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다른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어요. 물론 만드는 개수에 따라 돈을 받는 도급제였습니다. 많이 만들면 많이 벌 수 있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이 안 벌리더군요. 마침 옹기 공장을 판다는 집이 있어서 그걸 사서 독립했지요.”
1970년대 후반, 옹기가 서서히 쇠퇴해가던 무렵이었다. 옹기 일을 그만두는 집이 하나둘 늘었지만, 그래도 수요는 있어서 그는 한 선주와 계약을 하고 선불을 받아 일했다.
“계약한 선주에게만 판다는 약속을 하고, 1년에 여섯 가마분을 납품하기로 했습니다. 한 가마에서 나오는 옹기 수는 1000점이 넘어요. 하목(荷木·땔감)이 워낙 비싸니 한번 구울 때 최대한 많이 넣거든요.”
가마에 쟁일 때 큰 독도 아래위 겹쳐 쌓고, 항아리마다 작은 그릇들을 넣어 구우면 1000개는 좋이 넘는다. 그렇게 한 가마 구워 그가 받은 돈은 100만 원 남짓.
“두 가마를 땔 때까지는 직공으로 일할 때보다 벌이가 낫더군요. 그런데 기술자 둘 데리고 제가 사업자가 되어 일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제 작업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지고, 그렇게 1년 지나니 빚이 생기더군요.”
옹기 수요의 절정기는 김장철을 앞둔 가을이다. 여름철에 미리 받아 쓴 돈이 고스란히 빚으로 쌓이자 그는 ‘이런 식이라면 결국 단봇짐을 싸야 쓰것다(막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원인을 분석해보니 역시 물가였다. 재료비는 올랐는데 옹기 값은 그대로니 많이 구워도 손해가 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마을에는 상인협회와 옹기업자협회가 있어서 거기서 합의된 대로 값을 받아야지, 개인이 마음대로 값을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옹기 가격이 제자리였던 겁니다. 저는 우선 보험을 깨서 빚을 반 이상 갚고, 선주에게 옹기 값을 50% 올려달라고 했지요.”
결국 30% 인상하고 그것도 앞으로 두 가마분만 더 납품하는 걸로 계약은 끝내기로 낙착을 보았다. 전속계약에서 풀려난 뒤 그는 기술자를 다 내보내고 겨울부터 혼자 작업을 했다. 그리고 한 가마분을 거의 다 만들었을 때, 배를 가진 큰 상인에게 찾아가 배를 빌렸다.
“배 빌리는 삯으로 한 가마에서 나온 옹기의 5분의 2를 주기로 했지요. 나머지 5분의 3은 아내와 함께 가까운 섬에 가서 다 직접 팔았어요. 의외로 금방 팔리고 이문도 많아서 그동안 상인들만 좋은 일 시켰다는 것을 알았지요.”
플라스틱 등장에 타격, 웰빙 바람으로 부흥
그때만 해도 옹기 판매와 옹기 배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도로사정이 좋지 못하고 운송수단도 미비했던 과거에는 옹기를 안전하게 운송하는 데 배가 최적의 수단이었다. 배를 이용해 부산, 마산 등 남해안 지방을 비롯해 거제도, 멀리는 제주도까지 가서 옹기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그는 그때 선불 받는 구속에서 풀려났기에 옹기 일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렇게 직접 판매에 나서서 빚도 갚고 가까스로 제자리를 찾았지요. 만약 그때 그런 꾀를 내지 않았더라면, 저도 다른 옹기장이들처럼 옹기를 그만두었을 겁니다. 실제로 이 마을 옹기장이들이 모두 옹기 일을 막설하게 된 것도 돈벌이가 신통찮고 빚에 쪼들렸기 때문이죠 뭐.”
옹기가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1970년대 터진 광명단 사건과 플라스틱의 등장이다. 광명단은 납이 함유된 유약인데 전통 잿물 대신 이 광명단을 발라 구우면 잿물을 발라 구웠을 때보다 옹기가 더 반짝거리고, 무엇보다 훨씬 낮은 온도로 구울 수 있기 때문에 연료비가 싸게 먹혀 많은 옹기장이 쓰게 됐다. 그 때문에 많은 장인이 구속되었으나 나중에 이 광명단의 납 함유량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반짝이는 옹기’에 대한 불신은 지금도 남아 있다.
“가끔 잿물(그는 유약을 잿물이라고 한다) 바르지 않은 질그릇으로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분들이 있어요. 저희야 일이 한 단계 주니 좋죠. 그러나 쓰는 입장에서는 잿물 바른 오지그릇이 때도 덜 타고 거칠지 않아 사용하기 훨씬 편하지요.”
전통 옹기유약인 잿물은 나무 태운 재와 철분이 섞여 있는 황토를 반반 섞어 일일이 발로 밟아 반죽하면서 천천히 흙물을 내어 가라앉힌 것이다. 잿물을 많이 묻히면 옹기가 짙은 색으로 구워지며, 또 재와 섞는 흙의 비율을 조절하면 다양한 색감을 낼 수 있어 현대 옹기 장인들은 예술품으로 옹기를 만들 때 잿물 비율로 색에 변화를 준다.
그런데 아직도 광명단을 바르는 옹기업체가 있다고 한다. 1200도가 넘는 높은 온도로 구우면 납 성분은 거의 다 날아가므로 안전하다고 보기 때문인데, 그러나 광명단을 바른 옹기는 인체에 무해한 양이기는 하나 납 성분이 꽤 남아 있는 걸로 밝혀졌다. 더구나 1200도 넘는 온도로 옹기를 구울 경우, 숨 쉬는 옹기 구멍을 막을 확률도 높아진다.
“사실 저는 광명단 사건에는 별 타격을 받지 않았어요. 저야 선배와 선조들이 해온 방식 외의 것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었으니까 그런 바람쯤이야 거뜬히 피해갈 수 있었습니다. 정작 옹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플라스틱이에요.”
광명단 사건이 일부 장인에게만 영향을 주었다면, 가볍고 싼 플라스틱 용기의 등장은 옹기 수요 자체를 없애버린 총제적인 위기를 불러왔다. 이곳 봉황리도 1980년대 중반이 되자 옹기를 굽는 집이 급속히 줄기 시작했다. 아버지 정윤석의 수제자이자 옹기도예가인 막내아들 정영균(44)에 따르면 1985년과 1987년 사이 거의 모든 옹기집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그전에는 옹기 굽는 집이 스물일곱 집정도 되었는데, 2년 만에 스물다섯 집이 문을 닫았고, 제가 입대하기 직전인 1989년 나머지 한 집의 어른마저 돌아가셔서 우리 집만 달랑 남게 됐지요.”
아버지의 만류를 마다하고 일찍이 옹기 전통을 잇는 데 뜻을 품은 정영균은 제대 후 본격적으로 옹기 일을 시작할 요량으로 아버지 정윤석에게 “제가 돌아올 때까지 잘 지키고 있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군대에 갔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과 한 약속을 지켰다.
“나머지 한 분마저 돌아가셨을 때 그 부인이 혼자서는 도저히 못하겠으니 남은 자재와 땔감을 사달라고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흙과 나무를 인수하고 새 작업장을 마련해 새 출발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계속했지요. 옹기 굽는 이라곤 저 혼자 남았으니, 저마저 그만두면 이 마을의 오랜 전통도 사라지게 되잖습니까. 그러니 힘닿는 데까지 버티면서 명맥이라도 잇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언젠가는 사람들이 옹기를 다시 찾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고, 그런 날은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1990년대가 되자 건강과 웰빙 바람을 타고 전통 된장, 고추장, 김치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이 늘어났고 매실액과 갖가지 천연식초가 유행했으며, 쪽물 등 자연 염색도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 모든 전통 음식과 염료를 발효시키는 데는 ‘숨 쉬는’ 옹기 이상의 용기가 없다.
“전통 옹기마을에서 혼자 옹기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기 시작하더군요. 마침 아들도 곁에서 함께 작업하니 많은 힘이 되었지요. 그렇게 옹기가 다시 살아나서 맥을 잇게 된 겁니다.”
미세한 기공으로 저장·숙성 효과 탁월
이렇게 옹기가 되살아나게 된 데는 풍족하고 여유로워진 사람들의 높아진 인식 덕이 제일 컸다. 1970, 80년대 조야한 플라스틱에 열광했던 사람들은 이제 건강과 멋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옹기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옹기가 ‘살아 숨 쉬는’ 그릇임이 뒤늦게 밝혀진 것도 일조를 했다. 옹기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독이나 항아리에 장을 담아두면 소금쩍(소금기가 배어나와 허옇게 엉긴 조각)이 생기는데, 이는 옹기의 통기성 때문이다. 통기성이 있는 그릇은 발효식품을 저장하고 숙성시키는 데 제격이다. 자토(고령토 같은 자기용 흙)를 씻어 곱게 걸러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자기는 매끈하고 세련된 모양을 지니지만 숨은 쉴 수 없다. 그러나 다소 거친 도토(도기용 진흙)로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구운 옹기는 미세한 구멍이 생겨 수분은 차단하되 공기는 통과시켜 미생물이 장이나 김치, 술 등을 익히도록 돕는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뛰어난 옹기를 만들어내고도 ‘통기성’을 인식한 것 같지는 않다. ‘숨 쉬는 그릇’이라는 표현도 1990년대 이후 국립중앙과학관의 정동찬 실장이 처음 썼다고 한다. 처음부터 세련된 기물로서 예술적 가치를 뽐낸 청자나 백자 같은 자기에 대한 자료는 풍부하고 연구도 일찍이 시작된 데 비해, 서민들이 주로 쓰던 질그릇과 오지그릇 같은 옹기에 대한 자료나 연구는 극히 부족했다. 그런데 정 실장은 발효식품을 담아온 옹기의 단면을 전자현미경으로 보고 미세한 기공을 확인해, 옹기의 우수성을 처음으로 입증해낸 것이다. 실제로 우리 옹기는 중국 옹기나 일본 옹기에 비해 단면이 얇고 가벼우며 통기성이 가장 뛰어나, 일본 식초 공장에서는 우리 옹기를 전량 수입해 쓴다.
비록 통기성을 인식하지는 않았지만, 옛사람들은 옹기그릇에 장과 김치, 술, 식초, 젓 등을 담아 숙성시켜왔다. 그러나 발효식품을 저장하는 용기만 옹기로 만든 것은 아니다. 물동이, 확, 화분, 쌀독, 양념그릇, 수반, 떡시루, 콩나물시루, 약탕기, 그리고 굴뚝과 똥장군까지 옹기로 만들어 썼다.
“제가 젊었을 때만 해도 굉장히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는데, 요즘은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등 새로운 재질의 용기가 많다보니 예전처럼 다양한 물건을 만들지 않게 됐습니다. 그래도 주문하시는 분들의 요청에 따라 몇 가지는 만들고 있지요.”
어느 부인네는 그에게 아파트 공간에 맞춰 네모난 쌀독을 주문하기도 했고, 식탁용 간장그릇이나 냉장고용 음식보관 그릇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비록 예전처럼 많이 쓰이지는 않지만 옹기도 나름대로 현대화를 거치면서 아직도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칠량 바다가 보이는 봉황옹기 공방의 앞마당. 출입구 쪽에 놓인 큰 특대 독을 굴리며 옮기고 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옹기 전시하고싶다”
1990년대 이후 옹기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자 그는 1996년 옹기 기능전승자로 뽑혔는데, 이는 그가 알아서 신청했다기보다 강진 군청에서 그를 적극 추천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심사를 맡은 조정현 이화여대 교수와 그의 인연이 남다르다.
“우리 마을에서 저 혼자 옹기를 만들고 있을 때, 송광사 주지스님과 조 교수가 방문한 적이 있어요. 그때 조 교수가 ‘역사 깊은 옹기마을에서 왜 혼자 옹기를 만들고 있느냐’고 물으셨어요. 저야 ‘나마저 안 하면 맥이 끊어지니 기운 있을 때까지 하려고 한다’고 대답했지요.”
미국 유학파로 미국 도자기계에서도 알아주는 이론가이자 도예가인 조 교수는 특히 옹기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 우리 옹기를 미국에 널리 알린 인물이다. 조 교수는 그 자리에서 정윤석 장인에게 경비를 대줄 테니 하버드대에 한 달간 다녀오라는 제안을 했다.
“경비야 댄다지만 흙을 갖고 가야 하고, 또 가서는 가마도 만들어 구워내야 한다는데, 제 처지로는 불가능했지요. 더구나 제 밑에서 일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을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1년이라면 모를까, 한 달은 힘들다고 했지요.”
그런 인연이 있었던 터라, 심사 면접에서 조 교수를 만났을 때 그는 반갑고 또 심사에도 무난히 통과하리라고 믿었다. 그의 믿음대로 그는 전승자가 되어 계승자 교육비로 매달 80만 원을 탈 수 있어서 안정되게 작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예는 잇따라 찾아왔다. 2004년에는 지방 무형문화재가 되었고, 드디어 2010년 경기 안성의 김일만 옹기장과 함께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다. 김일만 옹기장은 우리나라의 여느 지방 옹기와 마찬가지로 질(흙)을 가래떡 모양으로 둥글고 길게 빚어 뱀이 똬리를 틀 듯 쌓는 타림기법을 쓰는 데 반해, 정윤석은 질을 판처럼 만든 타래미(질판)를 쌓아 잇는 ‘쳇바퀴 타래미 기법’을 쓴다. 타림법은 보편적인 기법이지만 전라도에서만 쓰는 쳇바퀴 타래미 기법은 옹기를 더 쉽고 빠르게, 그리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어서 요즘 도예가들도 많이 응용한다고 한다.
“또 칠량 옹기는 다른 지방 옹기에 비해 가운데가 더 볼록하게 나온 것이 특징이에요. 튼튼하기 때문에 그렇게 볼록하게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 말로는, 볼록한 항아리가 발효에는 더 좋다고 하네요.”
항아리 모양은 지방의 기후나 토질과 관련이 깊다. 기후에 따라 가장 적당한 발효를 유도할 수 있는 모양으로 발전해왔겠지만, 정윤석은 칠량 옹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의 자부심을 더 높여줄 만한 일이 있으니, 2008년 미국 스미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한국관이 문을 열었을 때 그의 옹기 3점이 들어간 일이다. 서양 도예가들은 옹기 같은 큰 그릇을 순식간에 빚어내는 우리 옹기장의 솜씨에 혀를 내두르는데, 특히 우리 옹기가 크기도 클 뿐만 아니라 형태나 질감 모두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기와는 다른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어서 더욱 주목한다. 그래서 스미소니언 박물관 측에서 특별히 옹기를 요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윤석은 “옹기 좀 달라기에 작은 것 세 개를 내주었죠”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계승자 아들의 옹기 사랑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면 계승자를 키워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정윤석은 행운아다. 그의 뒤를 잇고 있는 아들 정영균은 아버지가 무형문화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스스로 옹기장이가 되기로 결심한 인물 아닌가. 이미 완벽한 옹기장이가 된 아들은 아버지보다 옹기에 대한 애착과 집념이 더 강해 보인다.
“제가 아들 셋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옹기 일이 힘들어서 자식에겐 절대로 시키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안 가르쳐줬지요. 흙을 이기고 떡메로 때려 반죽하는 것부터 물레 치고 굽는 과정까지 힘들지 않은 게 없어요. 또 불 땔 때 비 오면 몇 달 작업성과도 잘 못 건지게 되니 여러모로 어려운 길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일찌감치 다른 기술을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막내아들 정영균만은 끈질기게 옹기를 배우려들었다. 정영균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옹기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꼭 지켜가야겠다고 결심한 남다른 젊은이다. 하지만 그의 솜씨를 보면 꼭 의지와 의무감만으로 옹기를 선택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예술가의 피가 더 강하게 옹기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제가 아들에게 옹기 일을 허락할 때 이런 충고도 했습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전통대로만 만들겠지만, 너는 예술로 옹기를 만들라고요. 지금에야 장독과 그릇이 그런대로 팔리지만, 김치냉장고까지 나온 마당에 수요에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또 요즘 사람들이 찾는 옹기도 예술품으로서 옹기인 경우가 많더군요.”
아버지의 바람은 이미 이루어진 듯하다. 전통 공예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할 때 자칫하면 전통에 못 미치는 유치한 작품을 만들어내기 쉬운데, 아들 정영균의 작품은 전통을 충실히 지키면서도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실제로 정영균은 멋진 옹기작품으로 이미 전시회까지 한 어엿한 도예가다. 그의 예술성은 처음 배울 때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제가 처음 가르칠 때 한번은 아들이 병을 묘하게 만들게 됐어요. 가마에 구울 때 제 옹기 사이사이에 넣어 제대로 구워내지도 못하고 좀 찌그러져서 나왔는데, 도자기 축제에 갖고 갔더니 아들의 찌그러진 병이 제일 먼저, 제일 비싼 값에 나가더군요.”
배운 지 5, 6년 만에 기술자가 된 아들은 2000년 경기 이천 도자기 엑스포에 참가했는데, 짧은 기간 무려 7000만 원 어치를 팔았다.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가고 싶었는지, 이후 아버지 밑에서 떠나 경기도에서 작업하다가 지금은 다시 아버지 밑으로 들어와 무형문화재 전수장학생의 길을 걷고 있다.
“아버지를 잠시 떠난 것은 제 실력이 얼마나 되나 저 자신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울타리이자 한계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작업하다보면 부딪치는 일도 많지만 또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그가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것은 다행으로 보인다. 이미 일흔을 넘긴 정윤석 장인 혼자 칠량 봉황옹기를 유지해나가기는 힘들 것이다. 태풍 볼라벤이 휩쓸고 간 다음 날, 지붕과 벽이 일부 날아간 창고에서 특대 독을 꺼내 몇 차례에 걸쳐 트럭에 실어 공방으로 옮겨온 것도 아들 정영균 씨였다. 10월 초순 서울 인사동 학고재에서 이들 부자의 옹기전시회가 열린다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어느덧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 있었다.
옹기와 자기, 어떻게 다른가 |
흔히 부르는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를 총칭한 말이다. 도기에 옹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옹기를 주로 구워왔으므로 옹기가 곧 도기를 일컫게 되었다. 옹기에는 잿물 유약을 발라 구운 오지그릇과 잿물을 바르지 않고 그냥 구운 질그릇이 있다. 우리나라 자기의 대표는 청자와 백자다. 자기의 우리말은 사기다. 그래서 도기를 굽는 이를 옹기장이라고 하고, 자기를 굽는 이는 사기장이라고 한다. 옹기장과 사기장을 구분하지 않는 ‘도공’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토기부터 발전한 그릇의 역사는 그 사회의 문화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왔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릇 만드는 기술이 최첨단 기술에 속했다. 가마를 쓰지 않고 노지에서 구워낸 토기는 높은 온도에서 구울 수 없었으므로 그릇이 깨지기 쉬웠다. 가마가 등장하면서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단단한 그릇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청자는 1250℃ 이상, 백자는 1300℃ 이상 높은 온도에서 굽고, 옹기는 1100℃ 이하에서 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술이 발달해 천연 잿물을 바른 옹기는 1250℃에서도 구워낼 수 있다. 하지만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는 게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높은 온도에서 구우면 더 단단해지지만, 자기처럼 무겁고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옹기는 자기보다 전통이 더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쓰임새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폭넓었다. 또한 일찍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던 자기와 달리 옹기는 최근까지 전통 그대로 만들어 일상생활에서 그릇으로서 쓰였으니, 그릇 본연의 생명력이 가장 긴 그릇이기도 하다. 요즘에는 공장에서 대량생산하는 싼 옹기도 많다. 그러나 장인의 손으로 만든 전통 수제품 옹기와 공장에서 틀로 찍어낸 옹기가 같을 수는 없다. 옹기가 숨 쉬는 좋은 그릇이 되는 비결은 흙과 잿물, 만드는 사람의 손길, 굽는 온도, 가마의 종류에 달려 있다고 추정하지만 아직도 전통 옹기의 비밀이 다 밝혀지지는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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