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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장_08

醉月 2012. 8. 30. 06:34

사라진 우리 쪽빛 되찾은 염색장 정관채

 “전통 잇는다는 집념으로 버텨왔는데 이제는 자연 염색이 유행이네요”

한경심│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장인 정관채는 쪽빛이 전공이다. 쪽물 염색은 워낙 까다롭고 힘들어서 자연 염색의 꽃으로 꼽힌다. 쪽물 염색으로 유명했던 전남 영산강변의 나주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시절 쪽 농사와 염색을 배웠고, 교직에 몸담으면서도 평생 ‘쪽물장이’농사꾼으로 살아왔다. 천연 염색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도 쪽물 염색의 전통을 이은 그는 2001년 중요무형문화재 염색장에 오름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쪽물장이가 됐다.
짙은 쪽빛천을 얻으려면 천을 쪽물에 담갔다가 햇볕에 널고 빨아서 다시 담그는 일을 수차례 반복해야 한다.

 

염색장 정관채(鄭官采·53)는 쪽물의 일인자지만, 그가 먼저 나서서 쪽을 찾았던 것은 아니다. 대신 쪽이 그에게로 왔다.

목포대 미대 1학년이던 1978년, 정관채는 염색을 가르치던 박복규 교수(서양화가, 현 성신여대 재직)에게서 쪽씨를 건네받았다. 이 땅에 쪽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됐을 때였다.

“그 쪽씨는 박 선생님이 당시 민속문화 복원에 앞장섰던 예용해 선생님께 얻은 것이었습니다. 예용해 선생님은 어렵게 구한 쪽씨를 박 선생님께 건네며, 우리 땅에서 사라진 쪽을 되살릴 곳은 나주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답니다.”

전남 나주는 예부터 쪽물 염색이 발달한 고장이다. 굽이치는 영산강은 큰물이 나기 일쑤여서 물에 강한 미나리와 쪽을 벼 대체 작물로 재배하는 농가가 많았고, 쪽물 염색도 자연히 발달했다.

“저 어릴 때만 해도 홍수가 참 많이 났습니다. 영산강 시원지가 전남 담양 용추골이라고 하는데, 거기서 처녀가 오줌을 누면 하류에서 홍수가 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쪽을 보면 마디마디에서 뿌리가 나와요. 이런 식물은 물 많은 곳에서도 잘 자랍니다. 그래서 다른 농사가 홍수로 피해를 봐도 쪽 농사는 잘됩니다.”

더구나 영산강 하류에는 홍수 때마다 바닷물이 흘러들어 소금기 섞인 강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여간 아니었다. 그러나 쪽은 태풍이 오기 전에 수확해 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고수익이었던 쪽 농사를 이래저래 많이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명베와 쪽물 고장에서 나고 자라

화학염료가 이 땅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195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나주에서 생산한 쪽 염료는 비싼 값으로 전국에 팔려나갈 만큼 유명했다. 특히 영산포 남댕이마을과 문평면 북동리, 다시면 가흥리는 길가에 쪽을 우려내는 항아리가 늘어서 있을 정도로 쪽 염색이 성행했었다.

“저는 이곳 다시면 가흥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입니다. 가흥리는 또 ‘샛골나이’로 유명한 샛골과 붙어 있어요. 박 선생님이 쪽씨를 키울 학생을 찾다가 마침 다시면 출신인 저를 발견하고 쪽 농사를 맡겼던 겁니다.”

무명베의 대명사인 샛골나이는 한산 세모시, 곡성의 고운 삼베인 ‘돌실나이’와 함께 우리나라의 뛰어난 길쌈 전통으로 손꼽힌다. 무명길쌈과 쪽물 염색이 같이 유명했던 다시면 출신인 정관채는 천과 염색이라는 두 가지 인연을 갖고 태어난 셈이다. 실제로 그의 외가는 샛골나이 전통을 이어가는 집안이다. 지금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샛골나이 기능보유자 노진남 씨는 최씨 집안에 시집와 시어머니에게 길쌈을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정관채의 어머니가 바로 같은 최씨 집안 출신이다. 그는 어릴 적 어머니의 베틀 밑에서 잠들던 기억과 할머니가 덮어주던 무거운 쪽 이불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후 쪽물 염색을 더는 볼 수 없었다.

“조선시대 그림을 관장하는 도화서가 있었듯 염색을 전문으로 하는 도염서도 있었습니다. 신라시대부터 염장(染匠) 제도가 있었을 정도로 오랜 전통을 지닌 우리 전통염색은 6·25전쟁을 전후로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더구나 쪽은 일년생 풀로 한 해만 심지 않아도 씨 구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니 쪽도 자취를 감췄던 거예요.”

 

그의 전수관 앞뜰에 놓인 항아리와 독.

 

그는 귀하디귀한 쪽씨를 받았지만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야 재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쪽 농사를 짓고 쪽물을 들이며 살아온 어머니와 할머니의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 1984년 정관채는 쪽빛으로 곱게 물들인 무명천을 들고 박복규 교수와 함께 한국일보 논설위원이던 예용해 선생을 만나러 서울로 올라왔다.

“예 선생님은 쪽빛 무명베를 보더니 ‘와, 쪽빛이 이런 색이로구나!’하고 감탄하셨어요.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장하다고 격려도 해주셨고요.”

우리 전통문화와 민속공예 등을 발굴해 존경받았던 문화계 대부 예용해에게 칭찬과 관심을 받은 청년 정관채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큰일을 했다는 성취감보다는 재배에 성공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라졌던 문화가 이렇게 되살아났으니 잘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도 느꼈고요.”

쪽 재배와 쪽물 염색이라는 난관을 처음 돌파한 젊은이에게 이 성공은 달콤함보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안긴 것 같다. ‘누군가는 해야 할’ 전통을 되살리는 일이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그에게 떨어졌고, 그는 그 일을 반쯤은 벅찬 가슴으로, 또 반쯤은 소명의식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그는 해마다 쪽 농사를 짓고 쪽물을 들였다. 친환경이나 유기농, 생태란 말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하다 손가락이 잘리고 손톱이 뽑히고

대학을 졸업한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고 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쪽 농사와 염색까지 하기가 쉽진 않지만 그나마 방학이 있어 일할 수 있었다.

“3월이면 쪽씨를 뿌려요. 씨를 일찍 뿌려 햇볕을 충분이 쐬게 해야 좋은 염료가 나옵니다. 그래서 쪽물 염색은 씨를 심을 때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있어요. 그리고 6월 말쯤 쪽이 다 자라면 꽃피기 전에 서둘러 수확해야 해요. 사람으로 치면 청년기라 이파리도 무성하고 이파리에 든 색소 성분(인디카인)도 가장 풍부하거든요. 그때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쪽대를 베어서 항아리에 담고 물을 부어줘요. 동트기 전 습기가 아직 이파리에 촉촉이 남아 있을 때 쪽대를 베고 물에 담가야 쪽물이 잘 배어나기 때문이에요.”

 

7월이면 쪽이 무성하게 자란다. 이때부터 여름 내내 서둘러 쪽을 거둬들여야 한다. 일단 꽃이 피면 색소함유량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에 담가 아래위를 뒤집어가며 이틀 정도 두면 이파리에서 녹색 물이 빠져나온다. 쪽대는 이때 건져내야 한다. 너무 오래두면 잡균이 번식하고 너무 일찍 건져내면 인디카인이 충분히 우러나지 못한다. 쪽대를 언제 건져내느냐가 중요한데 장인은 날씨와 쪽물의 색깔, 용기 재질 등을 고려해 ‘감’으로 결정한다. 일본에는 이를 판단하는 전문가가 따로 있을 정도라고 한다.

쪽대를 건져낸 다음에는 굴이나 조개껍데기를 구워 만든 석회가루를 넣고 저어줘야 한다. 작대기 끝에 작은 목침 모양의 나무가 달린 긴 고무래(곡식이나 재를 긁거나 흙을 고를 때 쓰는 농기구)로 항아리를 휘저어주면 쪽 추출액은 처음에는 쑥색을 내다가 거품이 점점 커지면서 노란색(연두색)으로 변하고 다시 적갈색, 보라색, 청록색, 그리고 마침내 쪽빛 특유의 남색으로 변한다. 이렇게 휘저어주는 당그래질(고무래질)은 석회와 쪽물이 잘 섞이게 하고 산소를 공급한다. 석회와 산소가 쪽 추출액과 반응해 화학 변화를 일으키는 이 30여 분 동안, 항아리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무쌍한 색의 향연은 보는 사람의 눈과 마음을 홀리고도 남는다.

“알칼리성 석회는 쪽 추출액에 들어 있는 색소 성분을 잡아주는 작용을 합니다. 이렇게 색소와 결합한 석회는 바닥에 가라앉게 돼요. 석회가 완전히 가라앉도록 기다려 제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아지면 웃물은 따라내고 가라앉은 색소를 취하죠.”

색소가 들어간 석회가루는 진흙 같아서 이 상태의 염료를 흔히 니람(泥藍)이라고 하지만 그는 ‘뻘’이라고 부른다. 이 뻘을 시루나 바구니 등에 올려놓고 물기를 빼면 탈수된 니람을 얻을 수 있다. 예전에는 이 니람을 항아리에 담아 보관하거나 젓갈 통에 담아 유통시켰다.

이렇게 염료를 얻는 과정은 쪽 수확부터 며칠 사이에 이루어진다. 수확 시기부터 일련의 과정은 힘들다고 미루거나 중간에 쉬어가며 할 수 없다. 쪽대를 벨 시기를 놓쳐서도 안 된다. 물에 담근 뒤에도 잘못 건사하거나 제대로 저어주지 않으면 색소를 얻는 데 실패할 수 있다. 한 과정이라도 때를 놓치면 실패로 돌아가니, 때를 잘 맞추는 게 관건이다. 그러다 보니 쪽을 수확하는 여름 내내 그는 더위 속에서 쪽밭과 마당의 항아리 사이를 오가며 일한다.

“염색은 볕 좋고 건조한 봄과 초가을이 최적기지만, 염료를 만드는 일은 한여름에만 할 수 있습니다. 새벽에 쪽을 베어 항아리를 채우고, 학교에서 돌아와 항아리를 열 개 정도 휘젓고 나면 나중에는 항아리 속에 제가 처박힐 정도로 지치죠.”

몸도 마음도 고된 탓일까. 그는 2001년 어느 더운 날 쪽을 베다가 왼손 무명지 윗마디가 잘려나가는 변을 당한다. 잘린 부분을 가지고 곧장 병원으로 달려가 미세접합수술을 받은 덕에 가까스로 붙일 수 있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보니 멀쩡한 손톱이 뽑혀 있었다고 한다.

“의사선생님이 시퍼렇게 쪽물이 든 손톱을 보고 손톱이 썩은 줄 아신 거예요. 마취한 김에 손톱까지 뽑았다고 하더라고요.”

 

“대학 나와서 왜 이 고생을 하느냐고 말렸지만…”

 

전수관 사무실에서. 그는 쪽에 대해 더 깊이 연구하기 위해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섬유디자인학과에 진학해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이런 사고를 당한 것도 쪽 염료를 만드는 과정이 한여름 삼복더위에 몰려 있어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제일 힘든 점은 수확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염려스러운 것은 수확하는 일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쪽밭에 못 들어갈 때, 꽃이 막 피려고 하는데 수확을 끝내지 못했을 때, 더위에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했을 때 제일 곤란하지요.”

그의 공방이기도 한 천연 염색 전수관 앞과 그 인근에는 수확하는 데만 서른 명 정도의 일꾼이 필요한 쪽밭이 있다. 하지만 새벽부터 쪽밭에 나가 고된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어디 흔하랴. 더구나 삼복더위에 쪽 이파리를 물에 담가두면 그 냄새가 만만치 않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삼복더위에 냄새 나고 힘든 노동을 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사서 고생한다”며 혀를 찼다고 한다.

“쪽 농사를 하던 사람도 그만두는 마당에 대학까지 나오고 멀쩡한 직업까지 있는 사람이 왜 이런 고생을 하느냐는 거죠. 그러나 저는 쪽에 제 인생을 걸어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은행원이었다. 교사와 은행원이라는 안정되고 고상한 직업을 가진 젊은 부부가 쪽물에 매달리자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지만 그의 어머니 최정님 씨만은 늘 그를 지지하고 도와줬다. 그의 어머니는 염색에 필요한 잿물을 만들기 위해 콩대를 태운 재를 거두다가 세상을 떴다고 한다.

“어머니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쪽물 염색을 게을리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돈도 안되는 이 일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하는 의무감이 더 강했습니다.”

대개 장인에게 일은 보람이자 즐거움이다. 그런 즐거움이 있기에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외곬으로 일에 매달릴 수 있다. 정관채도 때깔이 제대로 나온 작품을 얻으면 기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그에게 염색은 즐거움이기에 앞서 의무였다. 의무감으로 하는 일은 힘들고 한계에 부딪히기 쉽다. 다행히 그는 “농사든, 어떤 일이든 두렵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농사꾼이자 일꾼이기를 자처한다. 정관채는 염색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설명하는 키워드로 세 가지를 꼽았다. 미술학도와 농부, 그리고 샛골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한 내가 샛골에서 나고 자란 것은 태생적으로 염색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건 그에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다. 하지만 농부가 되어서 다시는 이 땅에 쪽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은 그의 의지였다.

 

초록 이파리에서 더 푸른색이 나오는 비밀

정관채가 지켜내려고 하는 쪽빛이란 정확히 어떤 색인가. 쪽물 전문가인 그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쪽빛이 어떤 색깔인지 아느냐고. 독 안에 든 쪽대를 이리저리 뒤집으며 그가 물었을 때, 순간 떠오른 것은 마당에 널린 고운 옥빛 모시였다. 그러나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다.

“쪽빛이라……, 하늘빛? 바다 색깔?”

정관채는 웃음 띤 얼굴로 나직하게 말했다.

“쪽빛은 자색, 곧 보랏빛이 들어간 푸른색이죠.”

보랏빛 기운이 들어간 푸른빛은 짙푸른 빛이다. 눈이 부실 만큼 푸른 가을하늘 빛이 그렇고 깊은 바다 빛이 바로 그런 쪽빛이다. 서양에서 쪽빛을 일컫는 인디고(indigo)도 과학적으로 가시광선의 정확한 파장수로 분류되는 여느 색과는 다른, 파란색과 보라색 사이에 있는 색을 말한다.

“쪽물로 표현할 수 있는 색은 많습니다. ‘세모시 옥색치마’라는 노랫말도 있듯 연한 옥색부터 하늘색, 파란색, 검정에 가까운 짙은 암청색(dark blue)까지 다 낼 수 있어요. 하지만 쪽빛의 본색(本色)이라고 하면 역시 짙푸른 현색(玄色)입니다.”

현색은 어두운 색, 푸른색이라는 뜻이지만 깊고 신비한 색이라는 뜻도 있다. 쪽빛은 색깔로도 신비한 색이지만, 쪽빛을 얻는 과정 역시 독특하고 신비한 점이 많다.

“쪽잎은 시들어 땅에 떨어져도 갈색으로 변하지 않고 여전히 녹색을 유지해요. 이파리에 있는 인디카인 색소 때문이죠. 이 인디카인을 뽑아내어 인디고 색소를 만드는 겁니다.”

자연 염색 가운데서도 쪽물 염색이 특별한 것은 녹색 쪽 이파리에서 푸른색 계열이 나오는 점이다. 대개 천연재료는 염색하면 재료의 본디 색깔대로 나온다. 홍화는 붉은색, 양파껍질에서는 누런색 계열이 나오고, 포도껍질로 염색하면 자주색으로 물들고, 먹물로 염색하면 어두운 회색이나 검은색이 된다. 그런데 쪽만은 신비하게도 푸른색을 낸다.

쪽을 한자로 표기하면 ‘남(藍)’이다. 녹색 이파리에서 푸른색이 나오기 때문에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이 생겼고, 그렇게 나온 청색이 본디 이파리보다 더욱 짙은 색이라는 점에서 ‘청어람(靑於藍)’이라는 말도 따라붙게 됐다.

“식물은 모두 물들일 수 있는 재료가 되지만 대부분 갈색이 나오고, 염색해도 물이 잘 빠져 쉬 퇴색합니다. 그러나 쪽물 염색만은 빨수록 더 선명해지죠.”

그러나 모든 쪽이 선명한 푸른색을 내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 자라는 쪽은 대청(大靑, woad)으로 2년생 풀인데 색깔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유럽에서는 선명하고 짙은 청색을 내지 못했고, 기껏 내봤자 칙칙한 색뿐이었다. 그래서 인도에서 나온 인디고 염료를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인도의 쪽은 인디고페라(indigofera)라는 콩과의 떨기나무인데, ‘인디고’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생산해온 쪽은 중국과 중앙아시아가 원산지인 1년생 인디고 쪽풀이다.

비록 좋은 쪽이 있어도 염료를 추출해내는 방법이 까다로워 푸른색 계열은 예부터 얻기 힘든 색이었다. 청색을 염료나 안료로 만들어내기 힘든 것은 청색 염료가 환원성 염료이기 때문이다. 다른 재료는 뜨거운 물에 우려내거나 삶아 몇 가지 촉매제를 첨가하면 쉽게 물을 들일 수 있는 반면, 청색은 자연에서 추출한 염료로 곧바로 물을 들일 수 없고, 발효과정을 통해 수용성 염료로 환원시켜야만 염색이 가능하다. 이 말은 즉 뻘(니람) 상태의 염료를 가지고 곧바로 염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파리에 있는 인디카인은 수용성이라 잎을 물에 넣으면 빠져나옵니다. 이를 산화시켜 인디고 염료로 만들어주는 것이 석회인데 산화된 인디고 색소(뻘)로는 염색이 안 되고, 이를 다시 수용성으로 바꿔야 비로소 염색을 할 수 있습니다. 수용성으로 환원시키기 위해서는 잿물을 넣어줘야 하는데, 신기한 것이 잿물도 석회와 똑같은 알칼리성이면서 석회와는 정반대 구실을 하는 겁니다. 이것이 쪽물 염색의 신비한 작용이고 현대 과학으로도 쉬 설명할 수 없는 비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잿물은 쪽대를 건져내 말린 것이나 콩대, 메밀대 등을 말려 태워 얻은 재를 시루에 담고 펄펄 끓는 물을 부어서 우려낸다. 니람에 이 잿물을 붓는데, 대개 니람보다 10배 많은 잿물을 붓는다. 정관채는 석회나 잿물을 넣을 때 적당한 양을 가늠하기 위해 맛을 본다.

“조개 가루를 넣어줄 때는 떨떠름한 맛이 나고, 잿물을 넣어주면 혀끝이 알알한 맛이 납니다. 이 잿물이 잘 발효되도록 25℃에서 30℃ 사이를 유지해주면서 하루에 한두 번 저어주며 보름에서 한 달 정도 두면 됩니다.”

잿물을 니람과 섞어 발효시키는 것은 장이나 술을 담그는 법과 비슷하다. 니람에 잿물을 타는 것을 그는 “쪽물을 앉힌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장이나 술을 담글 때처럼 예전에는 쪽물 앉히는 날에 지켜야 할 금기 사항이 많았다. 그의 어머니는 쪽물 앉히는 날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이가 찾아오면 그날은 잿물 앉히기를 포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는 뜻이리라.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단계인 이 발효과정을 그르치면 봄부터 시작된 쪽물 염색 과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석회를 넣어주는 것이 색소를 잡는 과정이라면, 잿물 발효는 잿물과 쪽물을 분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발효된 잿물을 저어보면 보랏빛 거품이 일어나며 남색이 됩니다. 이 남색 쪽물에 하얀 천을 담그면 초록색으로 물이 들어요. 이를 줄에 널어 말리면 쪽색으로 변하지요.”

나주에서는 잿물이 제대로 발효됐을 때 “쪽이 잠에서 깨어난다”거나 “물발이 잘 섰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물발이 잘 선 쪽물은 ‘꽃물’이라고 부른다.

 

웰빙 바람과 함께 뜬 전통 자연 염색법

 

쪽을 가득 담은 독에 물을 채우고 무거운 돌로 눌러준다. 이틀쯤 지나면 이파리에서 쪽물이 우러난다.

 

이처럼 쪽물 염색은 과정이 까다롭고, 그 과정 중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실패하기 쉽다. 2001년 무형문화재로 염색장이 지정됐을 때, 천연 염색 중 쪽물 염색만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와 함께 염색장으로 지정된 이가 또 있었으니, 같은 나주 문평리에 사는 윤병운 옹이다. 젊은 시절 직접 염색을 했던 윤옹 역시 1980년대 쪽씨를 얻어 쪽물 염색을 다시 시작했다. 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윤옹이 일흔아홉 살, 정관채는 마흔두 살이었다. 20년간 묵묵히 쪽물 염색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42세에 역대 최연소 무형문화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정관채는 젊은 자신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일을 많이 하라는 뜻”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옹은 2010년 작고하고, 그 아들 윤대중 씨가 전수조교로 대를 잇고 있다.

한때 끊겼던 쪽물 염색을 길이 이어가야 한다는 의무감은 정관채를 ‘쪽물 전도사’로 만들었다. 누구든 가르쳐달라는 이가 있으면 그는 서슴지 않고 자신의 비법을 공개하고 쪽씨를 나눠줬다. 혼자서 묵묵히 해오던 쪽물과 천연 염색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새 천년이 가까워지는 1990년대 이후다.

“환경이니 자연이니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회자되면서 자연 염색이 뜨기 시작했지요. 제가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연 것이 1996년인데 그전까지는 돈도 안 되는 염색 일을 배우러 오는 이가 없었어요.”

물론 섬유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은 그를 찾아오고 서울대와 KAIST 등 대학에서도 염색 비법을 연구하려고 그를 초빙해 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러다 2000년을 전후로 우리의 전통 자연 염색법은 일반에게도 낯설지 않게 됐다. 천연염료가 화학염료와 달리 사람 몸을 오히려 건강하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이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 고유의 자연 염색법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2010년 한 민간단체가 쪽물 염색 기법을 특허로 등록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 단체가 전통기법을 독점하면 전국의 염색단체와 동호회, 심지어 문화재까지 로열티를 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다. 이에 특허 무효소송을 낸 곳은 나주시였다. 나주시는 2000년대 이후 나주 고유의 쪽문화를 되살리는 일에 나서 천연 염색문화재단을 발족해 염색지도사를 키워내고 천연 염색 공방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사업을 펼쳐온 주체로서 이 사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올봄 나주시가 승소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쪽물 염색을 되살리고 보급하는 데 평생 헌신해온 정관채에게는 씁쓸한 기억이 됐을 터였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어느 염색 단체는 정부 부처에서 억대 단위의 사업을 따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쪽물을 들여주는 대가로 무형문화재인 그보다 열 배 이상 비싼 값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요란한 변화에도 정관채 자신은 33년 전 처음 쪽을 심을 때와 다름이 없어 보인다. 애초에 돈벌이와 상관없이 이 일을 시작했듯 쪽물 염색이 돈벌이가 되는 세상이 되었어도 그는 돈벌이에 눈 돌리지 않고 자신의 작품에만 열중한다.

“가장 내고 싶은 빛깔은 옥색과 하늘색 사이의 연한 빛깔입니다. 연한 색을 내기 위해 생쪽을 찧어 그 즙으로 물을 들이는데, 이렇게 하면 물이 잘 빠지는 단점이 있어요. 이를 보완하기 위해 되풀이해 물을 들여야 합니다. 색이 연하면서도 색깔이 오래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관건이죠.”

 

‘쪽바지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좋은 이유

작품 활동 말고 그가 꼭 한 가지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다. 화학염료로 만드는 청바지 대신 쪽으로 청색을 내는 ‘쪽바지’를 만드는 일이다.

“화학염료로도 청색을 내는 일은 힘듭니다. 청색을 내기 위해 독성이 강한 염료를 쓰는 것도 그만큼 청색은 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특히 두꺼운 청바지 천을 물들이는 데는 염료가 더 많이 들어갑니다. 예전에 동두천과 포천, 청계천에서 만들던 청바지 공장을 시화공단으로 옮겼다가 시화호까지 오염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등에서 청바지를 염색하는데, 지구 어디에서 하든 청색 화학염료는 환경오염의 주범이 됩니다.”

갭과 리바이스 같은 유명 청바지 제조업체가 아프리카의 푸른 초원과 맑은 식수가 흐르는 강을 죽음의 땅과 폐수로 만든 사건은 유명하다. 이런 독한 성분으로 염색된 청바지를 입는 사람 역시 좋을 리 없다. 청바지를 입고 각종 피부병에 시달리는 사례는 흔하다. 이에 비해 전통 쪽물 염색은 벌레를 쫓아줄 뿐 아니라 아토피를 진정시키는 효과까지 갖고 있다. 쪽물은 피부를 건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샴푸도 만들고 보디클렌저도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쪽물은 염료를 만들고 염색하는 과정에서도 단 한 방울의 폐수도 발생시키지 않는다.

지구환경을 위해서도 우리 전통 쪽물 염색의 앞날을 위해서도 그의 명품 쪽바지 프로젝트가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아마 가능하리라. 그의 곁에는 아내 이희자 씨가 있고 두 아들이 있으니까. 이희자 씨는 오랜 세월 옆에서 그의 일을 거들다 염색과정을 다 배워 이수자가 됐는데 염색은 물론 바느질 수공품을 만드는 솜씨도 좋아 염색을 이용한 다양한 작품을 다수 만들어냈다. 전수생인 둘째아들 정찬희는 섬유공학과에 다니며 염색 일을 배우고 있다. 문화재는 전승이 되는데 아무래도 그의 뒤를 이을 사람은 아들이 되지 않을까.

“제 가족이라고 전승해줄 생각은 없습니다. 청출어람으로 저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잇도록 해야 이 전통이 오래오래 갈 것 아닙니까.”

후보자는 많다. 일 년에 한 차례 정관채가 공개시범 행사를 벌이는 7월 말엔 전국의 염색 지도자를 비롯해 전통 염색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150명 이상 몰려온다. 참가 지원자가 너무 많아 다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시범행사가 열리는 이틀은 축제에 가깝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염색을 하고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에 공연까지 펼친다. 그는 이 행사에 사비 2500만 원을 들일 정도로 후배 쪽물장이들을 아끼고 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이제 외롭게 홀로 쪽물을 들이던 시대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이 그와 함께 쪽물을 들이고 쪽물장이가 되고 싶어 하니, 33년 전 그가 쪽씨를 받아 심었을 때 의무감으로 다가왔던 전통을 되살리는 일은 이미 목적을 이룬 성싶다.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그가 의무감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일은 운명이자 사실 그의 선택이기도 했다. 그는 참으로 훌륭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책임을 졌고, 그 열매는 달콤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