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01. ‘제2의 영토’ 우주 경영 나선다02. 우주 개발 이렇게 한다
03. 인공위성의 세계
04. ‘To the Space’에서 ‘From the Space’로
05. 이것이 한국의 위성이다
06.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07. 미래의 우주산업
08.우주는 무궁무진한 벤처산업
09. 우주발사체와 발사장
10.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11. 인터뷰 | 김승조 항우연 원장
12. “적도 밑 인도네시아에 한국 발사장 짓자”
13. 시론
14. 항우연을 국가개발연구원에 집어넣겠다고?
15. 나로호 2단 개발 비사
16. 우주 점화 성공시킨 한국 최초의 고체로켓
17. 나로호 총조립 대한항공의 꿈
18. 숱한 좌절 고통 겪었지만 ‘우주의 문’ 우리가 연다
19. 항공 없이 우주 없다
20. 한국의 항공산업
21. 부활호에서 T-50까지 그리고 KFX를 향해
22. 한국의 미사일
23. “포착 10분 이내 북한 미사일 기지 격파하라”
24. 미국의 항공산업
25. 라이트 형제에서 스텔스기까지
26. 미국의 우주 개발사
27. 지구패권 이어 우주패권도 잡는다
28. 미국의 미사일
29. 소련보다 늦게 출발, 그러나 다탄두로 역전승
30. 러시아의 항공산업
31. 소련 붕괴 뒤 구조조정… 재도약 발판
32. 러시아의 우주 개발사
33. ‘인류 최초’ 신기록 쏟아낸 우주 자이언트
34. 러시아의 미사일
35. 역발상으로 미국의 허 찌른 미사일 선도국
36. 중국의 항공산업
37. 짝퉁 생산국에서 명품 제조국으로
38. 중국의 미사일
39. 미국에 맞서는 판다의 ‘우주굴기’
40. 일본의 항공산업
41. 시행착오 거치며 항공 강국 부상
42. 일본의 우주개발사
43. 非군사에서 군사로, 戰犯국가의 놀라운 집념
‘제2의 영토’ 우주 경영 나선다
▲아리랑 2호가 찍은 부산의 ‘광안대교’(2008년). 아리랑 2호는 흑백으로 1m, 컬러로 4m 해상도의 사진을 찍는다.
1 바다와 맞닿은 세계적인 갈대숲 ‘순천만 습지’를 아리랑-2호에서 찍은 모습(2010년). 오른쪽 밑으로 이어진 육지는 여수반도고. 왼쪽 옆으로 뻗어가는 육지는 나로우주센터가 있는 고흥반도와 연결된다.
2 올해 5월 18일 발사된 아리랑-3호는 흑백 70cm, 컬러 2.8m 해상도의 사진을 찍는다. 왼쪽은 아리랑-2호, 오른쪽은 아리랑-3호가 찍은 미국 필라델피아 공항 사진이다.
▲올해 6월 아리랑-3호가 찍은 세계 최고층인 두바이의 ‘버즈 알 아랍(아랍의 탑)’빌딩. 도로의 자동차까지 식별된다.
3 앞쪽에 있는 거대한 산호초 장벽(그레이트 베리어 리프)이 파도를 막아줘 세계적인 휴양지가 된 호주의 골드코스트 해안(아리랑-2호, 2011년).
4 2010년 아리랑-2호가 찍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 같은 곳을 다른 각도로 여러 번 찍으면 입체 사진을 만들 수도 있다.
1 세계적으로는 475번째, 여성으로는 49번째,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우주인이 된 이소연 박사. 러시아 우주인들과 소유즈 발사체로 향하고 있다(2008년).
2 남미 기아나 쿠르발사장에서 발사되는 프랑스의 아리안-5 발사체. 쿠르발사장은 적도 바로 북쪽에 있어 최적의 발사장으로 꼽힌다.
3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 발사되는 일본의 H-2A 발사체. 일본은 미국(우주왕복선), 프랑스(아리안)와 함께 액체수소로켓을 이용한 발사체를 쏘고 있다.
4 2009년 1차 발사를 위해 나로호 1단과 2단을 조립하는 기술진.
5 발사를 위해 기립되는 나로호. 나로호용 발사대는 현대중공업이 제작했다.
6 나로호 궤적을 추적하며 지령을 내리는 관제실. 1급 보안시설이다.
7 나로호에서 발신한 신호를 받는 수신 안테나.
1 전천후 촬영이 가능한 한국 최초의 레이더영상(SAR)위성인 아리랑-5호의 가동 상상도. 아리랑-5호는 제작이 완료됐으나 발사를 담당한 러시아 측 사정으로 발사가 늦어지고 있다.
2 한국 최초의 상용위성인 KT의 무궁화위성 가동 상상도. 이 위성이 발사됨으로써 한반도 전역에서 방송 수신과 위성전화 통화가 가능해졌다.
3 SAR위성은 전파로 촬영하기에 다양한 전자파 환경 실험을 거친다.
4 두 날개를 위로 접으면 헬기처럼 수직 이착륙하고, 앞으로 펴면 프로펠러 비행기처럼 빨리 비행하는 틸트 로터 방식의 스마트 무인기.
5 개인용 항공기(PAV) 상상도. 미래의 개인 교통은 자동조종되는 무인기를 응용한 자가용 비행기가 대세를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올 가을 세 번째로 발사될 나로호. 나로호 3차 발사에 성공하면 한국은 추력 75t의 액체산소+케로신 로켓을 개발하고, 이 로켓을 토대로 1.5t의 위성을 띄우는 한국형 발사체 KSLV-2 독자 개발에 들어간다.
‘제2의 영토’ 우주 경영 나선다
사진 제공·한국항공우주연구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들여다보지 않았던 위성의 세계를 살펴본다.
소련이 1957년 스푸트니크-1호를 발사한 이래 지금까지 6500여 기의 위성이 발사됐다. 그중 상당수는 수명이 다해 떨어졌으니 현재 지구 궤도를 도는 것은 훨씬 적을 것이다. 위성 중에는 비밀리에 발사된 것이 많다. 수시로 쏘아 올리고 수명이 다하면 떨어지기에 현재 지구 궤도를 도는 위성 수를 정확히 파악하긴 어렵다.
위성은 추력이 없어도 지구 궤도를 돈다. 지구는 강한 인력(引力)을 갖고 있는데, 왜 위성은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가. 이유는 위성이 지구 주위를 빠르게 돌기 때문이다.
빠르게 원 운동을 하는 물체에서는 밖으로 날아가려는 원심력이 일어난다. 이 원심력이 지구가 잡아당기는 인력과 일치하면, 지구로 떨어지지 않고 지구에서 먼 곳으로 날아가지도 않으면서 지구 주위를 돌게 된다. 따라서 ‘모든 위성은 지구 주위를 돈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모든 위성은 지구 주위를 돌지만 아무 곳에서나 돌면 안 된다. 반드시 공기가 없는 곳에서 돌아야 한다. 그 이유가 뭘까.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내리고 팔을 내밀어 손바닥을 펼쳐보자. 차의 속도를 높일수록 강한 공기저항이 느껴질 것이다. 사람 팔이 아닌 거대한 판자를 내밀었다면 공기 저항은 더욱 강해져,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는 데 한계를 주기도 한다.
위성은 일정한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아야 지구 인력과 동일한 원심력을 얻는다. 그런데 공기(대기)가 있다면 공기저항 때문에 속도가 줄어 결국엔 추락하게 된다. 추락을 피하려면 위성은 대기가 없는 곳을 돌아야 한다. 대기가 없는 곳이 바로 ‘대기권 밖’이다. 대기권 밖을 보통 우주라고 하므로, 위성은 우주에서 지구 주위를 돈다. 지구 인력은 예상외로 강력하기에, 위성이 여기에 맞서는 원심력을 얻으려면 아주 빨리 돌아야 한다.
온도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소리는 1초에 약 340m를 간다고 한다. 여객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비행기는 초속 340m인 음속 이하로 비행한다. 전투기도 마찬가지다. 마하 2~3이라고 하는 전투기의 최고속도는 ‘애프터버너’라고 하는 또 하나의 엔진을 켰을 때만 낼 수 있다. 애프터버너를 켜면 연료 소비가 급증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으니, 비상시에만 켠다.
대기권 밖은 진공세계
저궤도위성이 지구 인력에 맞서는 원심력을 얻으려면 하루에 지구를 14바퀴 반 정도 돌아야 한다. 음속으로 따지면 마하 20~25 정도 되는 속도다. 공기가 있는 곳에서는 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그러나 공기가 없는 ‘진공(眞空)’이라면 가능하다. 진공에서는 마찰이 없으니, 이 속도가 나도록 한번 밀어주면 계속 같은 속도로 돌아간다. 대기권은 지구 표면에서부터 고도 100km까지를 가리킨다. 100km 이상은 대기가 거의 없어 대기 마찰이 없는 진공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00km를 경계로 아래에는 대기가 있고, 위에는 전혀 없는 식의 완전한 구분은 이뤄지지 않는다. 대기도 인력 때문에 지구에 붙잡혀 있는 것이니, 고도가 낮아지면 밀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고도가 높아지면 밀도가 낮아질 뿐이다. 학자들은 지상 100km 정도면 지구 인력이 ‘의미 있는 대기’를 잡아놓지 못한다고 보고, 그 이하를 대기권으로 명명했다. 100km 이상에서도 희박하지만 대기는 있다. 이러한 대기도 마찰을 일으키므로 위성은 대개 400km 이상에서 비행한다. 대기권 밖에 있는 이 ‘희박한 대기’가 미세한 저항을 일으켜 400km 이상에서 도는 위성의 고도를 낮춘다.
대기(공기)는 열을 받으면 팽창한다. 열(熱)기구가 사람과 물자를 태우고 떠오를 수 있는 것은, 기구 안으로 열을 넣어 기구 안의 공기를 팽창시켜 공기의 밀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대기권 밖에 있는 대기도 열을 받으면 팽창하고 열을 잃으면 수축한다. 태양 활동은 활발해졌다 약해졌다를 반복하는데, ‘태양 활동 극대기’엔 대기권 밖에 희박하게 존재하는 대기의 밀도도 높아져, 위성은 이전보다 조금 더 내려온다. 위성은 내려올수록 에너지가 약해지기 때문에 지구인력에 이끌려 떨어져 소실된다.
따라서 위성을 오래 사용하려면 떨어진 고도를 높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저궤도위성에서는 ‘추력기(thruster)’, 정지위성에서는 작은 로켓엔진을 사용한다. 추력기는 고무풍선 방식으로 힘을 낸다. 고무풍선을 빵빵하게 불어 묶어 놓았다가 풀어주면 공기가 강하게 빠져나오며 풍선은 공기가 나오는 반대 방향으로 날아간다. 추력기나 작은 로켓이 힘을 잃으면 위성은 더 이상 고도를 높일 수 없기에 차츰 고도를 낮추다 지구 인력에 이끌려 소실되는 것이다.
에너지를 잃은 위성은 고도를 낮추다 고도 150km쯤에서 지구 인력에 강하게 이끌려 원형으로 회전하며 낙하하다 100km의 대기권에 들어와 마찰로 소실된다. 이때 몇몇 위성은 대기권에 튕겨 나가는 ‘물수제비 현상’을 보인다. 잔잔한 호수에 납작한 돌을 비스듬한 방향으로 세게 던지면, 수면을 치고 튀어 오르는 것을 반복하다 가라앉는데, 그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대기권에 진입하지 못하고 튀어 오른 위성은 에너지를 많이 잃었기에 잠시 지구 주위를 돌다 대기권으로 끌려들어와 소실된다.
대기권의 물수제비 현상
위성 중에는 사람을 태운 것도 있다. 흔히 말하는 (유인)우주선이 그것이다. 우주선은 어떠한 경우에도 대기권에 튕겨나가지 말고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 우주과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해 물수제비 현상을 일으키지 않고 대기권으로 들어오는 각도를 찾아냈다. 장거리 미사일에서도 이 각도는 중요하다.
사거리 1000km 이상의 (지대지)탄도미사일의 탄두는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대기권으로 들어오는 ‘재진입(re-entry)’ 과정을 거쳐 목표물로 떨어진다. 재진입할 때 각도를 찾지 못하면 탄두는 물수제비 현상으로 튀어 올랐다가 나중에 엉뚱한 곳에 추락한다. 대기권에 닿아 튕기는 순간 충격을 받아 폭발할 수도 있다. 이를 피하려면 물수제비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각도로 진입시키고, 대기권과의 충돌로도 폭발하지 않게 해야 한다. 대기권에 진입한 우주선과 탄두는 점점 더 밀도가 높아지는 대기와 마찰하면서 고열 덩어리가 된다. 보통의 위성은 이 열 때문에 소실되지만 우주선과 탄두는 타지 말고 지상에 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우주선과 탄두의 외부는 강력한 내열(耐熱)물질로 도배한다.
탄두는 적을 공격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지상에 충돌하거나 목표물 상공에서 자폭해야 하지만, 우주선은 안전하게 지구에 내려야 한다. 비행기는 커다란 날개로 공기저항을 일으켜 속도를 줄이고 바퀴(기어)로 활주로에 내린다. 우주선에는 이러한 날개를 달 수가 없다. 날개를 단다면 대기권 진입 후 엄청난 저항을 받아 타버리거나 부러져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날개가 부러지거나 타버리면 날개가 사라진 곳으로 엄청난 열기가 들어와 우주선은 폭발한다.
우주선은 바퀴가 없어 활주로에 내릴 수도 없다. 바퀴를 내리면 마찰열 때문에 바퀴가 타버리고 우주선도 폭발할 것이다. 우주선은 지구 표면을 ‘폭격’하듯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되면 타고 있던 사람들이 상하게 된다. 따라서 마지막 단계에서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거대한 낙하산을 펼친다. 러시아와 중국의 유인우주선이 이러한 방법으로 지상에 떨어진다. 러시아와 중국은 사람이 살지 않는 넓은 초원에 낙하산을 펼친 유인우주선을 착륙시킨다.
2008년 러시아의 소유즈 발사체를 타고 국제우주정거장에 갔던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를 태운 소유즈 우주선도 낙하산을 펼치고 러시아 남쪽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초원에 떨어졌다. 그때 이 박사는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허리를 쓰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도 초기에는 지상 충돌 식으로 우주선을 착륙시켰다. 그러다 타고 있는 사람과 장비에 주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보다 부드러운 ‘바다 착수(着水)’를 검토했다. 낙하산을 펼쳤다지만 우주선의 낙하 속도는 빠르다. 우주선은 부력(浮力)도 크지 않으니 그냥 떨어지게 하면 수면을 뚫고 들어가 해저에 꽂힐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거대한 고무튜브인 ‘부낭(浮囊)’을 자동으로 펼쳐지게 했다. 부낭 덕분에 착수(着水) 시 물에 들어갔던 위성은 수면으로 떠오른다.
미국은 전 세계에 함대를 보내놓고 있는 최강의 해군국이다. 우주선이 착수하면 그 순간 대기하고 있는 해군 함정이 달려가 이들을 건져 올리게 했다. 미국은 보다 안전한 착륙(착수) 방법을 찾아냈지만, 다른 어려움을 만났다. 악천후 때 우주선이 떨어진 경우다. 태풍이 불어 거칠어진 바다에 우주선이 떨어지면 함정 접근이 쉽지 않다. 접근했다 하더라도 거대한 파도를 헤치며 이들을 구조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악천후가 없는 바다로 우주선이 떨어지게 했다. 이를 위해서는 세계의 기상 정보를 꿰뚫는 시스템을 갖고 있어야 한다. 미국은 뒤에서 설명할 기상위성을 띄움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바다로 위성을 귀환시키던 미국은 한발 더 나아가 비행기처럼 바퀴로 활주로에 내리는 우주선을 개발해냈다. 이 우주선은 ‘착륙 충격’이 거의 없기에 다시 발사체에 실어 우주로 쏘아 올릴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주왕복선’이다.
초속 7.8km 로 지구 돌아
다시 위성의 속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대기권 밖인 400~1500km 고도에 올라간 위성이 지구 인력과 균형을 이루는 원심력을 내려면 고도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최소한 초속 7.8km로 지구를 돌아야 한다. 마하로 환산하면 20~25 정도 되는 엄청난 속도다(고도에 따라 속도는 달라진다). 대기권에서는 대기마찰이 있기에 어떠한 비행체도 이 속도를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진공’인 대기권 밖에서는 가능하다. 위성은 이러한 속도를 발사체로부터 얻는다.
발사체의 정식 이름은 ‘우주발사체(Space Launch Vehicle)’다. 발사체는 로켓(엔진)과 다르다. 발사체는 여러 개의 ‘단(段)’으로 구성되는데, 각각의 단은,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로켓엔진으로 구성된다. 한 개 로켓으로 단을 만들 수도 있고, 여러 개를 묶어서 단을 만들 수도 있다. 단이 되지 못한 로켓을 부스터(booster)라고 한다. 부스터는 큰 힘을 내야 하는 1단 옆에 따로 붙이는 로켓엔진이다.
발사체에서 가장 큰 것은 1단이다. 발사체는, 모든 로켓엔진이 연료를 가득 채워 가장 무거운 상태에서 1단을 점화해 상승한다. 1단은 아주 강력한 힘을 내 발사체를 상승시킨다. 점화된 1단에서는 강력한 힘이 나오는 만큼 연료도 매우 빨리 소진한다. 덕분에 1단의 무게는 급격히 가벼워져 더욱 빨리 치솟는다. 1단은 200~300여 초 사이에 모든 연료를 소진하고 대기권 밖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빈 연료통과 로켓엔진으로 구성된 1단을 재빨리 떼어내 무게를 줄이고, 2단을 점화한다.
2단은 대기권 밖에서 점화되니 발사체는 더욱 빨라진다. 이런 식으로 모든 단을 떼어내면 위성을 실은 탑재부만 남아 엄청난 속도로 우주를 날게 된다. 대기권 밖에 나와 2단을 점화할 때쯤 유선형으로 된 탑재부는 뚜껑인 ‘페어링(fairing)’을 떼어내고 안에 있는 위성을 노출시킨다. 대기 저항이 없는 진공에서 위성을 노출시키므로 속도는 줄지 않는다. 마지막 단이 분리될 때면 마찰이 더욱 작은 고고도에 올라와 있으니 위성은 빠른 속도로 지구를 돌게 된다. 이 속도가 지구 인력과 균형이 잡힌 원심력을 내는 마하 20~25인 것이다.
위성을 띄우는 것은 일을 시키기 위해서다. 위성이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이 에너지는 매일 소모되는 것이라 바로 보충해줄 수 있어야 한다. 우주에서 매일 보충받을 수 있는 에너지원은 태양빛뿐이다. 따라서 모든 위성은 거대한 태양전지판을 붙이고 올라간다. 태양전지로 전기를 일으켜 탑재 장비를 가동하는 것이다. 태양전지를 일정하게 가동하려면, 위성은 일정하게 태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위성의 궤도는 발사체가 어떤 방향으로 밀어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구의 적도를 따라 돌도록 밀어줬으면 계속 지구 적도를 따라 돌고, 남북극을 따라 돌도록 밀어주면 소실될 때까지 계속 남북극을 따라 돌아간다. 적도와 남북극 사이 비스듬한 각도로 밀어주면 비스듬한 그 궤도로 돌아간다.
남북극 도는 태양동기궤도
지구는 남북극을 잇는 선을 축으로 자전(自轉)하면서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 따라서 남북극을 돌아갈 때만 위성은 일정하게 태양을 접할 수 있다. 적도를 따라 돌게 했거나, 비스듬한 궤도로 투입한 위성은 태양을 보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것이다. 태양전지판을 일정하게 가동할 수 있도록 남북극을 따라 돌게 하는 것을 ‘태양동기(同期)궤도’라고 한다. 남북극을 도는 위성(극궤도위성)은 지구의 자전 덕분에 전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저궤도를 도는 극궤도위성은 지구 관측용으로 많이 쓰이게 됐다.
위성이 지구 궤도를 도는 속도와 회전수는 위성이 떠 있는 고도에 따라 달라진다. 더 높이 올라가면 지구의 인력이 약해지므로 위성은 속도와 회전수를 줄여 보다 작은 원심력이 일어나게 한다. 그래서 지구에서 3만5786km 고도까지 올라가면, 이 위성은 정확히 하루에 한 번만 지구를 돌아도 지구 인력과 균형을 맞추는 원심력을 낼 수 있다. 그때의 속도가 초속 3.07km다. 400~1500km 고도에서 돌 때보다는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음속의 열 배 이상 빠르게 비행한다.
지구의 지름은 1만2756km이므로, 이 고도는 지구 지름의 세 배가 되는 아주 먼 거리다. 이렇게 높은 고도를 돌아가는 위성은 태양빛을 충분히 쬘 수 있으니 태양동기궤도를 돌 이유가 없다. 이 위성은 적도를 따라 돌게 한다. 하루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아가는 위성이 적도를 따라 돈다면, 이 위성은 지구에서 보면 늘 같은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특별히 ‘정지위성’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북극을 도는 위성은 통신이나 방송용으로 쓸 수가 없다. 반대편으로 넘어갔을 때에는 이 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로 전파를 쏘아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지위성은 늘 같은 곳에 떠 있으니 특정 지역을 향해 방송전파와 통신전파를 쏴줄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정지위성은 통신위성과 방송위성으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KT(한국통신)는 1995년 이래 무궁화 시리즈의 위성을 띄우고 있는데, 무궁화위성이 바로 통신과 방송을 겸하는 정지위성이다.
정확한 기상 예보를 하려면 특정 지역의 기상 변화를 24시간 지켜보고 있어야 한다. 한반도의 기상을 알기 위해서는 광대한 북태평양과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일어나는 기상 변화를 함께 지켜보아야 한다. 한국은 이러한 곳을 영유하고 있지 못하니 그곳의 기상 변화를 추적할 수가 없다. 영유하고 있다고 해도 지상에 설치한 장비로는 그렇게 넓은 구역을 관찰하지 못한다. 그러나 기상용 정지위성이 있으면, 이웃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고도 정확히 살펴볼 수 있다. 보통 대기권인 100km까지만 영공으로 보기 때문에, 3만5786km 높이에 떠 있는 정지위성은 영공을 침해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정지위성은 기상위성으로도 많이 쓰이게 되었다. 기상을 관측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양을 관찰하게 된다. 해양에서 발생한 수증기는 일기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 요인이기 때문이다. 2010년 6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통신장비와 해양관측장비, 기상관측장비를 함께 실은 천리안 위성을 정지궤도에 띄우는 데 성공했다. 천리안은 통신과 해양관측, 기상관측을 겸하기에 ‘통·해·기 위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은 또 하나의 정지위성을 갖게 된 것이다.
자연위성, 달(月)
정지위성은 특정 국가를 24시간 감시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 특정 국가가 장거리탄도미사일을 쏠 수 있는 적성국가라면, 미사일 발사 사실을 포착하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실은 정지위성을 띄워놓고 항시 그 나라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러한 위성은 미국이 띄워놓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설명한다.
정지위성보다 더 먼 거리에서 지구 궤도를 도는 ‘자연위성’이 달(月)이다. 달은 약 38만4400km 떨어진 거리에서 지구 주위를 돈다. 따라서 회전수도 크게 줄어들어 29.5일 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돈다. 29.5일 만에 지구 궤도를 돈다고 해서 달의 속도를 우습게 보면 안 된다. 달이 지구 궤도를 도는 속도는 마하 3인 초속 1km 정도다. 달은 지구에서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지구 인력도 약하게 받아 그만큼 천천히 돈다. 달이 있는 곳은 대기가 없으므로 대기마찰 또한 없어, 속도가 느려도 달이 지구로 떨어지는 경우는 없다. 달이 지구 인력에 이끌려 떨어진다면 이는 지구 종말의 날이 될 것이다.
위성은 크게 저궤도위성과 정지위성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보자. 1961년 인류 최초로 지구궤도 비행을 하고 돌아온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은 “지구는 푸른빛이었다”고 말했다. 이로써 위성에서 지구를 관측할 수 있는 것이 확인돼 지구 관측을 전문으로 하는 저궤도위성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저궤도위성은 지구주위를 빠르게 도니 특정 지역을 24시간 관찰할 수 없다. 하지만 정지위성에 비해서는 아주 낮은 고도로 비행하므로 정밀한 관측은 할 수 있다. 따라서 저궤도위성을 여러 대 띄워놓고 정지위성과 연동해 운영한다면, 특정국가를 대관소찰(大觀小察)할 수 있게 된다. 정지위성으로 개략적인 감시를 하다가 수상한 조짐이 발견되면, 그 시각 특정국가 인근을 지나는 저궤도위성을 조작해 정밀하게 살펴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운영은 군사 분야에서 주로 이뤄지는데, 군사용으로 관측하는 위성을 ‘정찰위성(Reconnaissance satellite)’이라고 한다. 미국은 국방부 산하의 국가정찰국(NRO·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과 공군의 우주사령부(AFSPC·Air Force Space Command)가 공동으로 여러 대의 정찰위성을 운영한다. 두 기관이 운영하는 저궤도 정찰위성이 KH 시리즈다. 미국은 ‘열쇠 구멍(Key Hole)’으로 적성국가를 엿본다는 뉘앙스로 이 위성의 이름을 KH로 지었다고 한다.
KH 시리즈 정찰위성은 1959년부터 미 공군이 쏘아 올리고 있었는데, 한발 늦은 1960년 미 국방부가 NRO를 창설함으로써 공군과 NRO가 공동으로 운영하게 됐다고 한다. 두 기관은 KH-1, KH-2, KH-3 식으로 숫자가 커질수록 발전한 정찰위성을 제작해 띄워왔다. 초기의 KH 위성에 관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이 전해진다. KH-1을 쏘아 올린 1959년의 기술 수준은 지금에 비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메모리 카드를 사용하는 디지털 카메라가 일반적이지만 당시는 필름 카메라뿐이었다. KH-1을 비롯해 초기에 올라간 정찰위성들은 필름 카메라로 적국(주로 소련과 중국)을 찍어야 했다. 필름 카메라를 싣고 하루에 14.5바퀴씩 남북극을 돌다 소련이나 중국 상공을 지나면, 미국이 보고자 한 군사 시설을 촬영한 것.
위성서 떨어뜨린 필름 회수 작전
이 위성에 탑재한 카메라는 태양빛을 이용해 촬영하는 ‘광학(光學) 카메라’다. 따라서 태양빛이 없는 밤에는 찍지 못했다. 표적 상공에 구름이 덮여 있으면 구름만 찍어야 했다. 이러한 난관을 뚫고 찍어내려면 표적이 있는 곳의 기상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적국의 적도 상공에 기상관측용 정지위성을 띄웠다. 기상위성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정찰위성은 구름층을 피해가는 각도에서 표적을 찍었다.
이렇게 찍은 필름을 지구로 보내는 데 큰 어려움이 있었다. 한번 올라간 위성은 4~5년간 궤도를 돌다가 지구로 추락해 소실된다. 정찰위성은 살아서 귀환하지 못하니, 찍은 필름을 어떻게 회수할 것인가.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4~5년 전에 찍은 사진은 군사작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찍는 즉시 받아봐야 정보로서 가치가 있다. 필름을 받기 위해 대기권 밖으로 다른 위성을 쏘아 올릴 수도 없었다. 정찰위성을 기획했을 때 봉착한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위성이 찍은 필름을 빨리 회수할 것인가’였다.
폐쇄된 최정산의 미군기지(중계소) 흔적.
고민 끝에 택한 방법이 찍은 필름을 지구로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었다. 위성은 필름을 캡슐에 넣고, 물수제비 현상을 피하는 각도로 캡슐을 떨어뜨린다(그래서 물수제비 현상을 피하는 각도를 찾기 위해 많은 연구를 했다). 캡슐은 대기마찰에 타버리지 않도록 내열처리한 것이어야 했다. 본부에 자기 위치를 알리는 송신시설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냥 떨어뜨리면 바다에 빠질 수도 있고, 소련 같은 적국(敵國)에 떨어질 수도 있으니 본부는 낙하 지점까지 철저히 고려해 위성에 캡슐 투하를 지시해야 했다.
이런 까닭에 위성은 찍은 필름을 바로 보내지 못하고 적합한 때를 골라 투하했다. 이런 식으로 정찰위성에서 캡슐이 투하되면 미 공군은 이 캡슐을 공중에서 낚아채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항공기를 띄웠다. 캡슐에서 나오는 신호를 포착해 이륙한 이 항공기는 잠자리채로 잠자리를 잡듯이, 캡슐을 공중에서 포획한다. 그리고 기지에 착륙해 필름을 현상 인화했는데, 필름을 찍어 현상 인화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최소 6일이었다. 6일 전의 사진이지만, 이것이 그때는 적국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음모를 가장 빨리 알아내는 방법이었다.
공중 낚아채기에는 종종 실패가 있었다. 출격한 특수항공기가 위성에서 떨어뜨린 필름을 낚아채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끔은 적국이 떨어뜨린 캡슐을 낚아채기도 했다. 미국은 소련 정찰위성의 신호를 추적하다 캡슐을 떨어뜨린 신호가 포착되면 특수항공기를 이륙시켰다. 미국은 유럽과 일본 한국 등 전 세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었기에 소련 국경 밖으로 떨어지는 소련 캡슐 낚아채기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소련은 반드시 소련 상공에서만 캡슐을 투하하도록 했다.
골치 아픈 필름 회수 문제는 디지털 카메라가 개발돼 찍은 정보를 무선으로 보낼 수 있게 됨으로써 해결됐다. 찍은 사진을 무선으로 보내줄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를 ‘전자광학 카메라’라고 한다. 전자광학 카메라가 등장한 뒤로는 정찰위성이 찍은 사진 정보를 받는 수신소가 중요해졌다. 미국은 본토와 해외 영토 그리고 동맹국과 우방국에 정찰위성과 교신하며 지령을 내리는 추적소와 정찰위성으로부터 실시간으로 사진을 받는 수신소를 설치했다. 한국에는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 있는 해발 905m의 ‘최정산’ 정상에 수신소가 아닌 추적소를 설치했다. 미국은 1990년까지 이 추적소를 유지하다 폐쇄했다.
지금도 최정산 정상에 올라가면 ‘지뢰지대’란 표지와 함께 안에 있던 시설을 철거해 황폐화된 미군 시설을 볼 수 있다. 인근 주민들은 오랫동안 이곳을 미군 미사일 기지로 알고 지내왔다고 한다. 최정산은 대구시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에 산꾼들 사이에서 최정산 미군 기지는 상당히 유명한 존재로 기억되고 있다. 미국은 최정산 일대의 기상이 좋지 않아 추적소를 폐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t의 KH-12 위성
1959년 일반 필름 카메라를 싣고 최초로 발사된 KH-1 정찰위성 사진의 해상도는 무려 8m였다. 지상에 있는 8×8m 물체를 점(點) 하나로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해상도가 현저히 높아져 현재 지구를 돌고 있는 KH-12에서는 15cm가 되었다. 미국은 농구공만한 것도 식별해내는 위성을 갖게 된 것이다. 1994년 한국 최초로 발사한 관측위성 아리랑-1호의 해상도가 6.6m, 1999년 발사한 아리랑-2호는 1m, 올해 5월 18일 궤도에 올린 아리랑-3호는 70cm니, 미국과 한국 위성 간의 수준 차이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KH 위성은 미국의 록히드마틴이 제작한다. 해상도 15cm의 사진을 얻기 위해 록히드마틴은 우주 관찰에 사용하는 허블 망원경과 비슷한 광학렌즈를 KH-12에 탑재했다. KH-12는 전자광학 카메라와 함께 적외선카메라도 싣는다. 적외선카메라는 적이 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를 쏜 사실을 쉽게 잡아낸다. 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를 쏘면 발사장 일대에 강한 열기가 남는데, 그 열을 포착해내는 것. 이러한 열은 밤에도 포착할 수 있으니 KH-12는 전천후 정찰을 할 수 있다.
적외선카메라를 탑재한다는 점 때문에 이 위성은 다른 이름을 가질 뻔했다. KH-11이 가동되던 1980년대 후반 NRO와 미 공군우주사령부는 ‘아이콘(ikon)’ 또는 ‘임프루브드 크리스털((Improved Crystal)’이라는 사업명으로 발전한 정찰위성 개발을 추진했다. 고(高)해상도의 전자광학 카메라와 적외선카메라를 탑재한 정찰위성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적외선카메라는 적국에서 몰래 한 지하 핵실험을 확인하는 데 유용하다. 지상과 대기권은 물론이고 지하에서 핵실험을 하면, 상당 시간 동안 핵실험한 곳에서는 열이 나온다. 광학카메라는 이 열을 포착하지 못하지만, 적외선카메라는 포착한다. 열을 잡아 ‘열(熱)영상’을 만드는 것이다.
열영상카메라는 요즘 보편화됐다. 2010년 3월 26일 밤 백령도 인근에서 천안함이 피침됐을 때 백령도에 주둔한 해병대 초병이 찍은 TOD 동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다. 가동하는 함정에서는 열이 나오는데, 이 열을 잡는 장비가 바로 TOD다. 적외선카메라는 살아 있는 동물과 가동 중인 물체에서 나오는 열로 영상을포착하기에, 컬러가 아닌 흑백 사진을 만든다. KH-12는 이전 정찰위성과는 기능이 아예 달랐기에 NRO와 공군우주사령부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KH=정찰위성’이라는 인식이 워낙 강해, KH-12로 명명했다.
해상도 15cm의 전자광학 카메라에 적외선카메라까지 탑재했으니 KH-12는 덩치가 매우 커질 수밖에 없었다. KH-12의 무게는 무려 19.6t이나 되었다(아리랑-3호의 무게는 1t이다). 1992년 11월 28일 NRO와 미 공군우주사령부는 KH-12 1호기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록히드마틴이 제작한 타이탄-4 우주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같은 기능을 가진 위성을 계속 쏘아 올렸다. 미국은 KH-12를 몇 대 쏘아 올렸는지 공개하지 않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2005년까지는 5대를 궤도에 올려 운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5대 중 어느 하나가 수명이 다해 추락하면 보다 개량한 것을 띄워 총 대수를 다섯으로 유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미국은 5대의 KH-12가 있으면 24시간 적성국가를 볼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KH-12가 19.6t이나 되는 무게를 갖게 된 이유로는 많은 연료를 실은 것을 꼽는다.
미국은 KH-12의 궤도를 공개하지 않는다. 미국은 5대의 KH-12를 전부 태양동기궤도로 돌게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정밀히 살펴 봐야 하는 나라가 있으면 한두 대의 KH-12는 돌 때마다 반드시 그 나라를 보도록 비스듬히 돌게 해놓는다. 정밀한 촬영이 필요하면 KH-12는 추력기나 작은 로켓으로 지구 가까이 내려가 촬영을 한다. 그리고 추력기나 로켓을 다시 가동해 자기 궤도를 찾아가야 하기에 많은 연료를 실었다. 미국은 KH-12는 개발하는 데 10억 달러를 투입했고, 한 번 쏘아 올리는 데 4억 달러를 지출하고 있다. 한마디로 KH-12는 최고가의 저궤도위성인 것이다.
미 국방부 산하 정보기관이 올리는 위성 중에는 안테나 길이가 수 km에 달하는 것도 있다. 이 위성은 지구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무선 신호를 포착해야 하기에 거대한 안테나를 달았다. 이러한 위성이 있기에 미국은 전 세계의 무선통신을 감청하는 ‘에셜론’을 운영할 수 있었다.
NASA의 예산은 190억 달러(한화 20조 원 상당) 정도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우주에 쏟아 붓는 돈은 750억 달러(80조 원)가 넘는다. NASA 예산을 초과하는 560억 달러(60조 원)는 누가 집행하는 것일까. 대답은 국방부와 그 산하의 정보기관 그리고 각 군이다. 미 국방부 밑에는 공군과 함께 정찰위성을 운영하는 NRO(국가정찰국), 통신감청을 담당하는 NSA(국가안보국) 등 위성을 활용하는 정보기관이 여럿 있다. 미군에서는 공군이 가장 많은 우주 예산을 집행하고 다음이 해군, 육군 순이다.
라크로스 위성 개발로 MD 구축
적성국가가 미사일이나 발사체를 쏜 것을 잡아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KH-12 정찰위성은 MD(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하는 기본 장비가 됐다. KH-12가 등장한 후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적외선 카메라를 탑재한 정찰위성이나 관측위성 제작이 보편화됐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도 적외선카메라를 탑재한 ‘아리랑-3A’를 제작해 러시아의 드네프르 우주발사체로 쏘아 올리려고 한다.
2005년 NRO와 미 공군우주사령부는 ‘SAR’이라는 레이더영상위성을 새로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 위성은 광학카메라나 열영상카메라(적외선카메라)가 아니라, 자신이 쏜 전파가 표적에 맞아 돌아오면 그 반사파로 영상을 만드는 장비를 실었다. SAR의 원리는 초음파 사진과 비슷하다. 초음파 대신 레이더파를 쏘고 그 반사파로 흑백사진을 만드는 것. 전파는 어둠은 물론이고 구름도 뚫고 들어가므로, 야간은 물론이고 구름이 짙게 깔려 있어도 지상 표적을 찍을 수 있다.
SAR 위성 개발로 미국은 KH-12가 갖고 있던 허점을 보완하게 되었다. 두 기관은 이 위성만큼은 KH 시리즈와는 전혀 다르다고 판단해 ‘라크로스(Larcrosse)’로 이름 지었다. 미국은 라크로스 위성을 3대 띄웠다. 그 후 선진국들도 앞 다퉈 SAR 위성을 개발했다. 한국의 항우연도 이탈리아의 기술을 도입해 최초의 SAR 위성을 제작해 ‘아리랑-5호’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위성을 드네프르 우주발사체로 쏘아주기로 계약한 러시아 회사가 러시아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 발사가 연기되고 있다. 러시아의 코스모트라스사는 드네프르 우주발사체로 한국 최초의 적외선카메라 위성인 ‘아리랑-3A호’와 한국 최초의 SAR 위성인 ‘아리랑-5호’를 띄워준다고 계약해놓고 계속 순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KH-12 5대와 라크로스 3대는 미국이 구축한 MD 조기경보망의 기본이 된다. 미국의 MD 조기경보망을 보다 상세히 설명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저궤도위성은 정밀한 촬영을 하지만 넓은 지역을 24시간 감시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미국은 적외선 감지장비를 탑재한 정지위성 ‘DSP(Defense Support Program)’를 따로 쏘아 올렸다. 적국이 탄도미사일이나 발사체를 띄우면 강한 적외선이 나오는데 DSP 위성은 이 적외선을 전문으로 포착한다. DSP는 특정 적성국가를 24시간 감시하기에 ‘조기경보위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DSP 위성은 소련이 발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전문으로 감지하기 위해 제작됐다. 소련에서 발사된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약 30분 후 미국에 떨어지므로, 냉전 시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쏘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는 대륙간탄도미사일보다는 작은 전쟁에서 일반 탄도미사일을 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은 일반 탄도미사일 위협에도 대처하게 되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은 대기권 밖으로 올라와 장시간 비행하지만 일반 탄도미사일은 잠시만 대기권 밖으로 올라온다. 비행시간도 짧기에 훨씬 더 정밀한 적외선 감지장비를 싣고 있어야 탐지해낼 수 있다. 미국은 일반 탄도미사일의 발사 사실을 알기 위해 보다 정밀한 적외선 감지장비를 탑재한 정지위성 ‘SBIRS (Space Based Infrared System)’를 개발했다. SBIRS는 북한의 스커드B나 노동, 대포동 같은 미사일의 발사 여부를 탐지하는 데 적합하다.
북한 미사일 추적하는 SBIRS 위성
미국은 DSP와 SBIRS 위성으로 적성국가를 24시간 감시한다. 그러다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KH-12와 라크로스를 집중 투입해 정밀 정찰한다. 이러한 위성들의 활동으로 적성국가가 미사일을 발사했다는 판단이 들면, 탄도미사일을 전문으로 추적하는 레이더 부대에 알린다. 이러한 레이더의 대표가 미 해군 이지스함에 실린 SPY-1 계열의 레이더다(한국 이지스 구축함에도 이 레이더가 탑재돼 있다).
정찰위성과 SPY-1 레이더의 가동으로 탄도미사일의 궤적이 정확히 추적되면, 미국은 이지스함에 탑재한 요격미사일 SM-3를 발사해 격추를 시도한다. 이것이 실패하면 육군이 THAAD(전구 고고도 공역방어)라고 하는 고고도 요격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를 시도한다. 이것도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육군이 PAC-3(패트리어트 개량형)를 발사해 요격한다.
미국은 DSP와 SBIRS, KH-12와 라크로스 위성만으로 MD를 구성하지 않는다. 적국이 미사일을 쏠 것이 확실하면 ‘코브라 볼’이라는 별명을 가진 RC-135 정찰기도 띄운다. RC-135 정찰기도 적외선 탐지장비를 싣고 있어 발사된 미사일과 우주발사체의 궤적을 정확히 추적한다. 미군은 유사한 장비를 고공정찰기 U-2와 무인정찰기 글로벌호크 등에도 실어 함께 추적한다.
발사 직후의 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는 속도가 느리다. 이때 RC-135 등의 활동으로 이 미사일과 우주발사체의 궤적이 정확히 포착되면 미국은 레이저 공격을 가한다. B-747기 같은 대형기에 레이저 발사시설을 준비해놓았다가 RC-135 등이 표적을 잡아주면 쏘게 하는 것이다. 레이저 빔을 맞은 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는 폭발하는데, 이렇게 되면 파편과 낙진이 적국에 떨어져, 적국이 큰 피해를 보게 된다. 미국은 이를 ‘발사단계 요격’이라고 명명했다.
MD는 저궤도위성과 정지위성 그리고 적절한 항공자산을 함께 운영해야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저궤도 정찰위성과 조기경보용 정지위성은 떠 있는 고도만 다를 뿐 한 배를 탄 존재다. 우주개발과 항공은 한 배를 탄 운명임을 알 수 있다. 레이건 대통령 시절 미국이 소련을 상대로 MD의 전 단계인 ABM이라는 대(對)탄도탄 요격미사일을 소재로 한 경쟁인 ‘스타워즈’를 벌인 것은 이런 자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선진국들이 우주로 올라가는 To the Space를 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미국은 우주에서부터 지상을 향하는 우주전쟁인 From the Space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양한 우주정거장 활용
위성의 활용은 군사 분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친김에 특이한 저궤도위성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하자. 저궤도위성이 정지위성에 비해 반드시 작은 것은 아니다. 위성은 진공 상태에서 발사체가 밀어준 속도로 비행하는 것이라, 덩치가 커도 속도는 작은 것과 똑같이 낼 수 있다. 덩치 큰 저궤도위성의 대표가 우주정거장이다.
우주정거장은 사람이 장기간 거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주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기에 다양한 우주 실험을 해볼 수 있다. 대기가 없으니 태양을 비롯한 천체 관측도 용이하다. 심(深)우주라고 하는 더 먼 우주를 탐험하는 기지도 될 수 있다.
지구에서 심우주를 탐험할 우주선(위성)을 쏘아 올리려면, 지구 인력을 이겨내는 것이 가장 큰 과제가 된다. 달에 사람을 착륙시켰다가 돌아오는 아폴로 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이 만들었던 새턴-5 우주발사체의 총무게는 약 2800t이었다. 2800t짜리를 쏘아 올리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겠는가. 한국의 나로호도 140여 t의 무게를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상에서 우주발사체를 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력이 거의 없는 우주에서 쏜다면 이야기는 180도 달라진다. 우주는 마찰이 없는 완전 진공이라 살짝만 밀어줘도 무한히 날아가므로, 새턴-5 같은 거대한 발사체가 필요하지 않다. 우주정거장에서 발사체를 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주왕복선 등을 이용해 부품을 조금씩 날라놓고 우주정거장에서 조립해 발사하면 된다. 조립을 하려면 작업자가 거주해야 한다. 따라서 우주정거장은 사람이 장기 거주하는 ‘우주숙소’ 혹은 ‘우주 호텔’ 구실도 한다.
국제우주정거장(ISS)은 러시아와 미국이 중심이 돼 이렇게 만들어졌다. 국제우주정거장의 완성 시 무게는 무려 460t이다. 따라서 한 번에 띄워 올리지 못하고 부품으로 나눠 조금씩 올린 후, 레고 블록을 맞추듯 우주에서 조립해 만들어갔다. 저궤도위성은 초속 7.8km라는 놀라운 속도로 돌아가지만 같은 고도에서는 같은 속도로 돌아가니 그들끼리는 정지해 있는 상태가 된다. 따라서 추력기 등을 가동해 약간씩 떨어뜨려놓은 부품을 모아 우주정거장을 조립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우주에 떨어뜨려 놓은 부품을 결합하기 위해서는 도킹 기술이 필요한데, 미국과 소련은 1960년대에 이미 이 기술을 습득했다.
초대형 우주정거장은 다용도로 쓰일 수 있다. 이곳에서 우주를 관찰한다면 아주 좋은 자료를 얻을 수 있다. 망원경을 거꾸로 돌려 지구를 본다면 초정밀 관측 자료를 얻을 수 있다. KH-12나 라크로스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지구를 정찰하지만, 우주정거장은 사람이 머물며 조작할 수 있기에 더 정교한 정찰을 한다. 극단적으로는 우주에서 지상을 향해 무기를 쏠 수도 있는 것이다.
큐브위성의 활용
저궤도위성의 활용은 이것만이 아니다. 저궤도위성 한두 기로는 특정지역을 24시간 관찰할 수 없지만 많이 띄워놓으면 가능하다. 이러한 위성의 대표가 GPS 위성이다. GPS는 일반적인 저궤도위성보다는 높은 2만200km의 중고도에 떠 있다. 미국이 띄워놓은 GPS 위성은 24대인데, 늘 가동하는 것은 21대이고 3대는 예비용이다. 이렇게 많은 위성이 떠 있으니, 지구상에서는 어떤 곳에 있어도 늘 GPS 위성 5~8개를 접할 수 있다.
GPS 위성은 지구 주위를 돌지만 자기 위치를 알고 있다. 이러한 위성 3개로부터 신호를 받는 사람은, 간단한 계산으로 자기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 있다. 5개 이상으로부터 신호를 받는다면 정확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GPS 위성 덕분에 ‘토마호크’를 비롯한 미국의 순항미사일은 표적 건물의 유리창을 뚫고 들어가는 정밀도를 보인다. 일반인은 민간 버전의 GPS 신호를 수신하지만, 미군은 암호처리한 군사용 GPS 신호를 받기에 초정밀 사격이 가능하다. GPS 위성은 저궤도위성도 여러 대 띄우면 전 지구를 24시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건조기에 일어나는 산불로 세계 여러 나라가 피해를 보고 있다. 산불은 바람을 타고 이동하기에 우주에서 살펴봐야 어디로 번질지 알 수 있다. 황사도 광범위한 지역에 피해를 주기에 우주에서 보지 않으면 윤곽을 잡기 어렵다. 산불과 황사는 정밀하게 관측할 필요까지는 없다. 정지 기상위성을 통해 관찰할 수도 있지만 이 위성은 기상 관측이라는 고유 임무를 해야 한다.
산불과 황사는 해상도가 낮은 카메라를 실은 낮은 저궤도위성으로 충분히 추적할 수 있다. 저궤도위성은 2분 만에 한반도를 지나간다. 따라서 30여 대를 띄우면 그중 한 대는 항상 한반도의 직상공이나 그 옆을 지나가게 된다. 해상도가 낮은 카메라는 크기가 작으니 이를 실을 위성도 작게 제작한다. 항우연 설립 전인 1992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영국 서리대학의 도움을 받아 48.6kg 무게의 ‘우리별-1호’를 제작했다. 우리별-1호는 해상도 400m의 사진을 찍었는데, 이 정도의 사진이면 산불과 황사의 추세를 감시할 수 있다.
지금은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40여 kg의 위성에 더 좋은 카메라를 실을 수 있다. 작은 위성이 주목받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같은 성능을 가졌다면 위성은 작은 것이 좋다. 작아야 발사체도 작은 것을 사용해 발사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목하 ‘작은 것이 좋은’ 시대다.
항공우주학자들은 10~100kg의 작은 위성을 마이크로 위성이라고 했다(표 참조). 이 분류대로라면 우주정거장과 미국의 KH-12와 라크로스는 물론이고 한국의 아리랑-3호와 3A호, 5호는 대형 위성에 해당한다. 요즘의 대형 우주발사체는 1t이 넘는 대형 위성 두서너 개를 함께 싣고 가 지구 궤도에 올리므로, 마이크로 위성만 띄운다면 한꺼번에 40개 이상을 띄울 수 있다.
전자산업의 발달로 소형화된 장비를 실은 마이크로급이나 그보다 작은 위성을 수십 개 띄울 수 있다면 굳이 많은 돈을 들여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는 정지위성을 띄울 이유가 없다. 마이크로급 위성은 수십 개가 올라가니 한두 대가 고장 나도 애초 목적을 이루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저가의 마이크로 위성은 각광을 받을 수 있다. 기술은 끝없이 발전하므로 GPS 위성도 점점 작아질 수 있다. 언젠가 마이크로 위성 정도로 작아진다면 웬만한 나라들도 GPS 위성을 띄울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위성들에 통신장비를 탑재한다면 거대한 정지 통신위성을 올릴 필요가 없어진다. 통신장비를 탑재하고 저궤도에 올라간 수십 개의 위성으로 전 세계를 연결하는 무선통신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정지통신위성은 특정 지역의 무선통신망만 구성해주는데, 이 위성은 전 세계를 하나의 무선통신망으로 엮는다. 실제로 미군은 이러한 통신망을 구축해 전 세계를 네트워크로 엮어놓았다.
우주개발에도 블루 오션 있다
1999년 미국 연구진은 나노급 위성 급인 크기 10×10×10cm, 무게 1kg짜리를 특별히 만들어 ‘큐브 위성(Cube Sat)’이라고 명명했다. 앞으로는 큐브 위성을 저궤도에 올려 활용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표>에서처럼 나노 위성, 피코 위성, 마이크로 위성이 주목받는 시대가 열린다면, 한국은 후발국이지만 우주 개발에 적극 도전해 볼 만하다.
위성의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위성 운영은 산업 영역으로 발전한 지 오래다. 위성 운영뿐만 아니라 위성을 올리는 발사체도 사업거리가 되었다.
미국과 러시아 등 몇몇 나라는 일찌감치 국가 차원에서 위성을 제작하고 발사체를 만들었기에 이제는 쫓아갈 수 없는 우주 개발 강국이 되었다. 우주 개발은 미사일 개발과 직결되기에 이들은 후발국들의 진입로를 막아버렸다.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를 만들어 우주 개발 기술이 후발국으로 전수되는 것을 차단해버린 것.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파고들 공간이 있다. 우주 개발은 1950년대 미국과 소련에서 시작된 것이다. 한국의 기술이 뒤처졌다고 해도 50~60년 전 미국과 러시아가 한 것을 못할 리가 없다. 북한도 하고 있는데 말이다. 교과서에 나와 있는 기술에 새로 공부한 기술을 접목하면 선진국이 하고 있는 단계까지는 따라갈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 프랑스 일본 중국 인도 등 우주 개발 선진국들은 대단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들도 그들이 할 수 있는 분야에만 치중하고 있다.
우주는 시간과 공간이 합쳐진 광대한 영역이기에 발상만 바꾸면 선진국들이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무대를 찾아낼 수 있다. 선진국들이 손대지 않은 블루 오션이 있는 것이다. 이 공간을 찾아내 공략한다면 한국은 단기간에 우주강국이 될 수 있다. 우주개발의 블루 오션은 무엇인가. 우주의 블루오션을 찾는 방안을 다음 글에서 하나씩 설명해보고자 한다.
사업성 보고 뛰어든 우주 개발
이것이 한국의 위성이다
한국은 시장을 보고 기술을 만들어감으로써 놀라운 진전을 이뤄냈다.
우주 개발에서도 압축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신화를 살펴본다.
선진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한국의 우주 탐색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타국의 발사체에 실어 위성을 올렸지만 선진국 못지않게 우주를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를 개발하려면 항공 기술이 발전해 있어야 한다. 항공기는 하늘을 비행한다는 것이 다를 뿐, 땅을 달리는 자동차와 비슷한 원리로 힘을 낸다. 움직이는 기계인 자동차는 기계공학 분야에 속한다. 따라서 기계공업이 발전해야 항공 분야가 발전하고, 항공 기술이 있어야 우주 개발에 도전할 수 있다. 선진국들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우주로 진출했다.
한국 우주 개발의 메카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은 1989년 10월 10일,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항공우주연구소’를 뿌리로 삼아 탄생했다. 한국 최초의 국책연구소인 한국원자력연구원에 비하면 30년 늦다. 항공우주연구소가 독립해 한국항공우주연구소(KARI)가 된 것은 1996년 11월 15일이다. 이후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모태기관인 한국기계연구소보다 유명해졌다. 그리고 2001년 1월 1일 한국항공우주연구원으로 개칭하면서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 양대 국책 연구기관으로 부상했다.
항우연의 출범이 늦은 만큼 대한민국의 우주 개발도 늦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ISAS(‘아이사스’로 발음)라고 하는 도쿄대학의 연구기관이 우주 개발을 이끌다가, 이후 NASDA라고 하는 과학기술청 산하 우주개발 기관이 주도했다. 한국도 일본과 유사한 길을 걸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한국의 과학기술이 발아한 시원(始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항우연이 한국기계연구소 부설기관으로 태어난 1989년, KAIST가 한국 최초로 위성 제작에 도전했다.
KAIST가 선도한 위성 개발
그러나 기술이 부족해 선생을 모셔야 했다. KAIST는 영국 서리대학을 선생으로 삼았다. 1990년부터 학생들을 서리대학으로 보내 2년간 공동연구한 끝에 48.6kg의 마이크로 관측위성인 ‘우리별-1호’를 제작했다. 우리별 1호의 무게는 1970년 중국이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둥팡훙-1호’(173kg)의 3분의 1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다. 그러나 성능은 앞섰다. 그 사이 과학기술이 발전한 덕분이다. 둥팡훙-1호에는 지구 사진을 찍는 장비가 없었으나 우리별-1호에는 있었다. 왜 중국은 둥팡훙 1호에 카메라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의 중국 기술로는 인공위성에 카메라를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 음악만 발신하는 위성을 만들었다. ‘둥팡훙(東方紅)’은 문화혁명기인 1966년부터 1978년 사이 중국이 공식화하지 않고 사용한 애국가 제목이다. 둥팡훙의 가사는 마오쩌둥 찬양 일색이기에,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중국은 진짜 국가를 지어 대체했다. 지구 궤도에 오른 둥팡훙-1호는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둥팡훙’을 실은 전파를 발신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이 전파를 접수하고, 중국이 세계 다섯 번째로 인공위성을 올렸음을 확인했다.
中 본뜬 북한 위성
이를 본뜬 것이 북한이다. 북한이 세 차례나 지구 궤도에 올리는 데 실패한 광명성 위성에는 북한의 애국가나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보내는 송신기가 실려 있었다고 한다. 1998년 8월 북한이 대포동-1호 발사체(북한 이름은 ‘백두산’ 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린 광명성-1호는 잠시 지구 궤도를 돌다 추락했는데, 그때 광명성-1호는 27MHz의 전파로 김일성-김정일 부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날려보냈다. 그리고 노동신문에 ‘황해도에 사는 한 주민이 밤하늘을 보다가 광명성-1호를 발견하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는 허무맹랑한 기사를 게재했다.
KAIST는 그런 길을 걷지 않았다. 우리별-1호를 만들 때는 디지털카메라 기술이 나왔기에 KAIST는 우리별-1호에 광학카메라를 실었다. 그러나 작은 위성이라 최대 해상도 400m에 만족해야 했다. 서리대학이 선생이 되고 KAIST는 학생이 돼 제작한 우리별-1호는 1992년 8월 11일 오전 8시 8분 프랑스가 만든 아리안-4 발사체로 쏘아 올려져 지구 궤도에 올라갔다. 한국은 세계에서 25번째로 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된 것이다.
KASIT가 주도한 우리별 사업은 유럽(아리안, 1호), 유럽(아리안, 2호, 1993년), 인도(PSLV, 3호, 1999년)의 발사체에 실어 띄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우리별-2호의 사진 해상도는 200m, 3호는 13.5m까지 높아졌다. 13.5m 해상도에서는 얼추 물체를 식별할 수 있다. 3호는 1호보다 배 이상 큰 100kg짜리였기에 훨씬 더 정밀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싫든 좋든 우리의 맞상대는 북한이다. 남북한 대결과 관련해 우리별-1호 위성의 역사성은, 북한의 광명성-1호보다 6년 앞서 우주로 올라갔다는 데 있다. 물론 차이는 있다. 우리별-1호는 외국 기술로 제작했고, 광명성-1호는 북한이 자체 개발했다. 우리별-1호는 지상 촬영도 했으나 광명성-1호는 음악만 발신했다. 우리별-1호는 제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구 궤도를 돌았으나 광명성-1호는 바로 떨어졌다. 우리별-1호는 외국 발사체로 올라갔으나 광명성-1호는 북한 발사체로 올라갔다 등등….
KAIST가 우리별 사업을 하고 있을 때 KT(한국통신)가 지상 3만5786km까지 올라가는 정지위성인 방송통신위성을 쏘아 올리는 사업을 추진했다. 당시의 한국은 이런 위성을 만들 능력이 없어 ‘무궁화’로 명명된 이 위성 제작을 미국의 록히드마틴 사에 맡겼다. 직육면체로 된 이 위성의 몸체 크기는 1.42×1.96×1.74m였다. 태양전지판을 활짝 폈을 때의 길이는 15m였고, 추력기를 단 총 무게는 1460kg이었다.
KT가 시작한 무궁화위성 사업
무궁화위성-1호는 1995년 8월 5일 미국 플로리다 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맥도널 더글러스 사의 델타-2 발사체에 실려 우주로 올라갔다. 델타-2 발사체는 1단에 9개의 부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부스터는 다 타면 자동으로 떨어져 나가야 한다. 그런데 하나가 제때에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그로 인해 추력이 떨어져 무궁화-1호는 3만5786km의 정지궤도에서 6350km 모자란 곳까지만 올라갔다.
다행히 상당히 높은 고도였기에, 무궁화-1호는 달고 있는 소형로켓을 가동해 3만5786km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로켓의 연료 소모가 많았기에 10년으로 예정된 수명이 4.5년으로 줄어들 것으로 판단됐다. 예상 수명이 줄어들긴 했지만 무궁화-1호가 올라감으로써 대한민국은 22번째로 상용위성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적도 직상공에는 많은 정지위성이 같은 고도로 올라가 있어 혼잡하다. 따라서 새로 올라가는 정지위성은 자국을 정면으로 보지 못하는 곳에 자리 잡을 수도 있다. 무궁화-1호는 적도에 위치한 인도네시아 직상공에 자리 잡고, 한반도로 방향을 잡았다. 무궁화-1호가 올라간 후 우리나라에서는 TV 난시청 지역이 사라졌다. 안테나만 있으면 한반도에서 한참 떨어진 바다로 나가 있어도 깨끗한 TV 화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에 사는 교포들도 안테나를 구입하면 한국 방송을 보게 되었다.
무궁화-1호 발사 후 한국통신은 예비용인 무궁화-2호의 발사를 준비했다. 2호는 1호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동시키는 것이라, 1호와 똑같이 만들었다. 2호는 1996년 1월 14일 성공적으로 발사돼, 예비용으로 있지 않고 문제가 생긴 1호와 분담해 임무를 수행했다.
1999년 한국통신은 4.5년으로 예상 수명이 줄어든 무궁화-1호를 대체하기 위해 역시 록히드마틴에서 제작한 3호를 아리안-4호 발사체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했다. 3호의 무게는 1호보다 배 이상 무거운 2800kg이었다. 그에 따라 1호에서는 12기이던 통신중계기가 27기로 늘었고, 방송중계기도 3기에서 6기로 증설되었다.
4자는 불길하다 해 건너뛰고, 2006년 8월 22일 한국통신은 미국과 러시아 노르웨이 우크라이나가 합작으로 만든 시론치(Sea Launch) 사를 통해 프랑스의 알카텔(Alcatel) 스페이스 사가 만든 무궁화-5호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시론치 사는 미국의 보잉(지분 40%), 러시아의 에네르기아(25%), 노르웨이의 크베르너(20%),우크라이나의 UMZ(15%)가 만든 해상 발사 전문회사다. 이 회사는 노르웨이 크베르너 사의 석유시추선 오디세이호에 러시아의 에네르기아와 우크라이나의 UMZ 사가 공동 개발한 ‘제니트-3SL 발사체’를 싣고 적도로 가 발사한다. 무궁화-5호는 성공적으로 정지궤도에 진입했다.
무궁화-5호는 3호의 두 배 정도인 4470kg의 무게를 가졌다. 당연히 성능도 크게 향상됐다. 5호는 민간용 통신 중계기뿐만 아니라 우리 군이 시용하는 통신 중계기도 실었다. 이로써 대한민국군은 무궁화-5호가 커버하는 각도 안에서는, 어느 곳에 있든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다. 5호의 수명은 15년이므로 상당 기간 한국통신과 우리 군은 안정적으로 위성통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5호는 방송장비는 싣지 않고 민군용 통신중계기만 실은 것이 특징이다.
2009년 KT는 자사의 통신 서비스 명칭을 ‘올레’로 정하고 무궁화-3호를 대체할 무궁화-6호를 준비하면서, ‘올레-1호’로 고쳐 불렀다. 올레-1호는 프랑스의 탈레스가 제작했다. 이 위성은 2010년 12월 29일 남미 기아나에서 아리안-5 발사체에 실려 정지궤도에 올라갔다. 올레-1호에는 통신중계기는 빼고 방송중계기만 실었기 때문에 무궁화-5호보다 훨씬 가벼웠다.
KT가 약진하고 있을 때 국내 1위의 이동통신업체인 SKT가 일본의 MBCO와 공동으로 미국 회사에 세계 최초로 DMB용 위성 제작을 의뢰했다. SKT는 이 위성을 ‘한별-1호’로 명명했다. 두 회사는 이 위성을 미국의 아틀라스-3A 발사체에 실어 2004년 3월 13일 지구 정지궤도에 쏘아 올렸다. 한별-1호의 수명은 12년이므로 SKT의 이동통신 가입자는 이 기간에 빨리 달리는 차 안에서도 DMB 방송을 즐길 수 있게 됐다.
시장을 보고 사업을 시작하다
민간 사업자의 필요성에 따라 ‘우리별’이라는 작은 저궤도위성을 제작해본 한국은 무궁화, 올레, 한별 같은 정지위성을 외국 업체에 의뢰해 띄웠다. 한국은 위성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한 나라가 되었다. 위성의 효용을 이해해야 위성을 제작하고 위성을 쏘는 사업을 할 의지가 생긴다. 선진국이 탐험을 하듯이 신기술을 개발한 후 시장을 창출했다면, 한국은 후발주자이기에, 시장을 보고 기술을 개발하는 역사를 만들었다.
시장을 보고 기술을 만드는 것은, 목표가 분명한 도전이기에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하다. 대도약을 뜻하는 ‘퀀텀 점프(Quantum Jump)’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항공우주연구소가 한국기계연구소에서 독립한 1996년부터 본격화했다. 그때 북한은 1차 핵실험을 선포하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한국은 북한이 무엇을 획책하고 있는지 궁금했으나 정찰위성을 갖고 있는 미국은 우리의 궁금증을 충분히 해소해주지 않았다. 이에 한국도 관측위성을 띄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우리별’은 영국 기술로 만든 ‘남의 별’이라는 시비가 있었으므로 진짜 우리 위성을 제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한국이 북한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관측위성을 만든다고 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에, 항우연은 다목적실용위성을 만든다고 발표했다. 다목적실용위성의 별명은 ‘아리랑’으로 정했다. 항우연은 해상도 10m의 사진을 찍는 500kg의 아리랑-1호를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개발 도중 계획을 바꿔 해상도를 6.6m로 높였다.
이렇게 크고 정교한 위성은 만들어본 적이 없기에 항공우주연구소는 미국의 위성 제작사인 TRW사를 ‘선생’으로 모셨다. TRW사는 미국의 정찰위성 ‘KH-12’ 제작에 참여했던 회사다. 항공우주연구소는 TRW에 연구진을 보내 ‘도제’처럼 설계기술을 배워오게 했다. 1999년 12월 21일 한국항공우주연구소는 ‘개소 첫 작품’으로 아리랑-1호를 미국의 토러스 발사체에 실어 우주로 보내는 데 성공했다.
항우연은 바로 돈을 버는 사업에 참여했다. 미국의 유명 필름제조사인 ‘코닥’이 운영하는 위성사진 전문 판매회사인 ‘스페이스 이미징’사를 통해 아리랑-1호가 찍은 사진을 판매하기로 한 것. 당시 상업용 위성사진의 해상도는 최고 1m까지 올라가 있었으므로 6.6m인 아리랑-1호의 사진은 좋은 값을 받기 어려웠다. 빈약한 출발이었지만, 항우연이 돈벌이를 하며 위성 사업을 시작했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아리랑-1호는 예상 수명을 넘겨 2008년 2월 20일부로 임무를 공식 종료했다. 아리랑-1호 발사 후 항우연은 흑백 해상도는 1m, 컬러 해상도는 4m인 카메라를 실은 아리랑-2호 제작에 도전했다. 1호와 달리 2호에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만 과외선생을 모셔와 배우는 ‘우리 주도’ 방식을 택했다. 항우연은 본체의 80% 이상을 자체 제작하고 카메라는 이스라엘의 ELOP사를 과외선생으로 모셔 제작했다.
한국, 2개 관측위성 운영
상업성을 지향할 때는 생산단가를 낮춰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건비도 절감해야 하지만, 값싸게 위성을 올리는 방안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당시 러시아를 비롯해 소련에서 독립한 나라들(CIS)의 경제난이 자심했다. 이 중 몇몇 나라는 구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러시아를 상대로는 전략무기감축협상(START)을 추진해 보유한 핵무기를 줄였다. 동시에 러시아를 제외한 나라에는 상당한 지원을 해주고 그 나라가 갖고 있는 핵무기를 없애는 비핵화협상을 추진했다.
러시아와 CIS 국가들은 핵탄두를 제거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우주발사체로 개조해 위성을 발사해주는 사업에 뛰어들었다. 자연히 위성을 쏘아주는 가격이 크게 떨어졌다. 보잉과 록히드마틴을 비롯한 미국 기업들도 이러한 나라의 회사들과 협력해 위성 발사 단가를 낮추어야 할 정도였다.
항우연은 가장 싸게 위성을 발사해주겠다고 한 러시아 흐루니체프 사의 로콧(Rockot) 발사체로 아리랑-2호를 올리기로 했다. 이때 항우연과 맺은 인연으로 흐루니체프는 그 후 두 번 발사에 실패하는 나로호의 1단을 만들게 된다. 2006년 7월 28일 러시아의 블레세츠크 공군기지에서 발사된 로콧은 아리랑-2호를 궤도에 진입시켰다.
아리랑-2호가 찍은 사진을 고화질로 뽑아내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영상은 정보량이 많아 전송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항우연은 아리랑 2호가 촬영한 사진을 ‘스폿 이미지’사를 통해 판매했다. 1호 때보다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아리랑-2호는 설계수명 3년을 넘겼지만 지금도 쌩쌩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여담 두 가지를 밝히고 넘어가자.
첫째는 아리랑-2호를 중국의 장정(長征) 발사체에 실어 쏘려다 좌절된 경우다. 항우연이 아리랑-2호 발사를 국제시장에 발주했을 때 가장 좋은 조건으로 응찰한 것은 중국 항천(航天)과기집단이었다. 항우연은 여기와 계약을 했는데 갑자기 미국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아리랑-2호에는 미국산 부품이 탑재돼 있다. 미국은 이 부품을 공급하면서 아리랑-2호를 발사할 때는 미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었다. 미국은 중국을 잠재적인 적국으로 보고 있기에 미국산 부품이 들어간 아리랑-2호를 중국의 발사체로 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기에 항우연은 즉각, 그러나 매우 조용히, 발사체를 러시아의 로콧으로 바꿨다.
둘째는 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아리랑-2호가 그 사실을 포착했느냐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17일 김정일이 현지지도를 하던 열차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김정일이 숨진 곳이 전용열차가 맞는지, 서방 정보기관들은 북한 공식 발표 전에 김정일의 사망을 포착했는지 등에 큰 관심이 쏠렸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과 서방의 모든 정보기관은 북한 발표 전에 김정일 사망을 포착하지 못했다. 이유는 사전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죽을 것 같다’는 정보가 있었으면 중국과 서방국가들은 모든 정찰·관측위성의 초점을 김정일의 동선에 맞췄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에 각국은 늘 하던 대로 탄도미사일 기지를 비롯한 북한의 전략시설에 변화가 없는지 등을 관찰했다. 아리랑-2호도 김정일이 숨졌다고 하는 시각에 전용열차를 촬영하지 못했다.
이는 휴민트(HUMINT·인간정보)가 없으면 이민트(IMINT·영상정보)도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리랑-2호를 통해 상업용 위성사진 분야에 제대로 진출한 항우연은 해상도 70cm의 카메라를 실은 아리랑-3호 제작에 들어갔다. ‘퀵버드’라고 하는 세계 최고의 상업위성이 해상도 60cm의 사진을 찍고 있고, 일본 역시 해상도 60cm의 사진을 찍은 ‘광학-3호’ 위성을 준비하는 시점이었다. 항우연은 1t 무게의 아리랑-3호를 독자 개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메라에서 핵심 중의 핵심 기술은 개발하지 못해 유럽 EADS 아스트리움 사의 도움을 받았다. 항우연은 아리랑-3호도 가장 싼값에 쏘아 올리고자 했다.
아리랑-3호 일본 H-2A로 발사
그 시기 자국 위성만 쏘아 올리던 일본이 갑자기 해외시장에 진출했다. 자국 위성만 발사해주다보니 발사 횟수가 적어 단가가 높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국 위성을 유치해 발사해주면, 발사 단가가 내려가 자국 위성도 싸게 올릴 수 있다고 보고 러시아나 중국보다도 낮은 단가로 위성 발사 대행업에 뛰어든 것이다(2009년).
한일 간에는 독도영유권 문제, 과거사 문제, 역사 왜곡 등 많은 현안이 있다. 그 시기 후쇼(扶桑)사가 만든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계약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는데 항우연은 ‘감정은 감정이고 실리는 실리다’라는 논조로 국민을 설득해, 일본과 아리랑-3호 발사 계약을 맺었다. 올해 5월 18일 일본은 다네가시마(種子島) 발사장에서 H-2A 발사체로 아리랑-3호를 띄우는 데 성공했다. 현재 아리랑-2호는 설계수명을 넘겼지만 건실히 작동하고 있으니 한국은 광학카메라를 탑재한 2기의 관측위성을 운용하게 된 것이다.
적외선카메라 위성, SAR위성 제작
봇물이 터지자 항우연의 위성 사업은 매섭게 질주했다. 구름만 덮여 있지 않으면 주야간 촬영이 가능하고 핵실험을 하거나 발사체나 미사일을 쏜 것을 탐지하는 적외선카메라 위성과 구름이 끼어 있어도 전천후 촬영이 가능한 레이더영상(SAR)위성 제작에 나선 것. 항우연은 적외선카메라를 탑재한 위성을 아리랑-3A(무게 1t)로 명명했다. 아리랑-3A는 3호보다 뛰어난 55cm 해상도의 광학카메라와 5.5m 해상도의 적외선 카메라를 싣는다.
적외선카메라 해상도는 광학카메라보다 열 배 정도 떨어지니 5.5m는 우습게 볼 수 없다. 아리랑-3호 제작 경험이 있는 항우연은 아리랑-3A호에 실을 광학카메라를 대부분 국내에서 제작했다. 그러나 적외선카메라는 처음이라 독일의 AIM 사로부터 핵심 부품을 제공받았다. 아리랑-3A 본체는 T-50을 제작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AP우주항공이 조립했다.
현재 아리랑-3A호는 최종조립을 끝내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 수정하기 위해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수정 작업은 2014년 9월경 끝난다. 아리랑-3A 제작이 한창이던 2009년 항우연은 아리랑-3A호를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기업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드네프르 발사체로 쏘아 올리기로 계약했다.
항우연은 SAR 위성인 아리랑-5호 제작에도 도전했다. 레이더영상위성도 처음 만드는 것이라 선생을 찾아가 배우기로 했다. 여러 나라의 기업을 접촉한 끝에 이탈리아의 알레니아를 선생으로 정했다. 알레니아는 그 후 프랑스의 탈레스와 합병돼 TAS(탈레스-알레니아 스페이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알레니아는 TAS-I(이탈리아)로 개칭됐기에, 항우연은 이 회사로부터 최고 해상도 1m의 레이더영상위성 제작 기술을 배우게 됐다.
아리랑-5호는 해상도를 1m로 하면 5km 폭을 관측하나, 해상도를 20m로 높이면 100m 폭을 관측할 수 있다. 보통은 3m 해상도로 30km 폭을 관측한다. 아리랑-5호의 제작은 이미 완료됐다. 항우연은 5호도 러시아의 드네프르로 쏘아 올리기로 계약했다.
드네프르는 소련이 실전배치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 R-36을 개조한 것이다. 미국과 맺은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따라 러시아는 R-36을 58기만 남기고 전량 폐기하게 되었다. 러시아 국방부는, 핵탄두는 떼어내 희석한 후 원자력발전용 연료 등으로 팔아버리고, 몸체는 러시아(45%)+우크라이나(45%)+카자흐스탄(10%)이 공동 투자한 코스모트라스(KOSMOTRAS) 사에 넘겨 발사체로 사용하게 했다. 코스모트라스는 우크라이나 기술로 R-36을 위성을 실을 수 있도록 개조해 ‘드네프르(DNEPR)’로 이름 지었다. 발사는 러시아 발사장이나 카자흐스탄 발사장을 사용하기로 했다.
러시아 국방부의 심통
코스모트라스는 후발업체인 만큼 낮은 가격을 써내 아리랑-5호와 3A호 발사를 낙찰받았다. 그런데 R-36 사용권을 불하해준 러시아 국방부가 코스모트라스에 더 많은 사용료를 내놓으라고 하면서 꼬여버렸다. 코스모트라스는 항우연과 계약을 맺고 중도금도 받았는데, 러시아 국방부가 ‘내 몫을 더 내놓으라’며 허가를 해주지 않는 바람에 드네프르를 발사하지 못하게 된 것. 이 때문에 5호는 제일 먼저 제작을 끝내고도 일본의 H-2 발사체로 쏘기로 한 3호에 발사 우선 순위를 넘겨주었다.
항우연은 아리랑-4호는 만들지 않았다. 4는 불길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4호대신 3A호로 명명했다. 아리랑-3호, 3A호, 5호는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만들어졌다. 사업을 시작할 때 정해놓은 순서가, 입찰과 개발 과정에서 늦어지고 빨라지면서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사업에 착수한 것은 3호였지만, 가장 먼저 제작된 것은 5호였다. 3호는 국내 기업들이 대거 참여해 국산화하느라 진행이 더뎠다. 5호는 이탈리아 기업이 이미 개발해놓은 탑재체 기술을 활용했기에 가장 빨리 완료됐다. 그런데 5호는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드네프르 발사체 이용이 연기되면서 아직 우주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코스모트라스와 러시아 국방부 간의 다툼은 상당히 심각하다. 항우연과 우리 정부는 러시아 정부 측에 협조를 요청했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는 코스모트라스와 러시아 정부 간의 문제라며 일축하고 있다. 이 문제가 풀려야 한국은 아리랑-5호를 쏘아 올리고, 2014년 적외선 카메라를 탑재한 3A 역시 쏘아 올릴 수 있다. 이는 ‘싼 것을 찾아가다 뜻밖의 봉변을 당하게 된’ 경우라고 하겠다.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이유가 없다. 한국은 안전성과 경제성이 높은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을 개발하고 이를 다양하게 조합해 여러 발사체를 만들어 머지않아 열릴 우주관광+우주산업 시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KARI)의 김승조 원장(62)은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미국 텍사스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항공우주 분야의 전문가다. 귀국 후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11년 6월 항우연 제8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김 원장은 어려운 항공우주 분야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특기가 있다. 이 때문에 오래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이해하기도 쉽다.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그는 과학자 특유의 ‘연구를 위한 연구’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초적인 연구도 중요하지만, 한국은 후발국인 만큼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는 실용연구를 중시하자는 것. 그와 나눈 대화 가운데 한국의 우주 개발과 관련해 귀 기울여야 할 부분을 발췌해 정리한다.
▼ 왜 우리는 일본만큼 우주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일본은 미군정이 끝난(1952년) 직후 도쿄대 이토카와 교수 주도로 우주 개발을 시작했으니 60년의 역사가 쌓여 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미국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미국 NASA(항공우주국)의 특징이 무엇인가. 냉전기 소련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 우주 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한 곳 아닌가. 그 결과 다양한 발사체를 만들었지만 경제성 있는 발사체는 만들지 못했다. 상업성을 따지지 않고 연구한 탓이다.
일본은 초거대국인 미국과는 사정이 다른 데도 상업성을 따지지 않고 연구하는 NASA 모델을 따랐다. 대표적 사례가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이지만 상업성면에서는 문제가 있는 H-2의 개발이다. H-2는 제작과 발사비용이 너무 비싸 대신 H-2A를 만들었지만, H-2A도 경제성이 적다. 위성을 올리는 것이 우주 개발의 1차 목표라면, 가장 좋은 기술이 아니라 가장 싸게 위성을 올리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 세금을 아끼고 외국 위성을 발사해줌으로써 돈도 벌 수 있을 것 아닌가. 일본은 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본은 잘하고 있는 게 아니다”
▼ 몇 해 전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H-2 제조공장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때 생산 책임자가 “세계에서 수소로켓을 만드는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 일본뿐”이라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정지위성을 올리려면 힘 좋은 수소로켓 발사체가 유리한 것 아닌가.
“H-2 발사체의 전체 무게는 500t에 달하는데, 1단인 수소로켓의 추력이 100t 정도다. 이 정도 힘으로는 H-2 발사체를 띄울 수 없기에 주위에 여러 개의 고체로켓 부스터를 붙였다. 일본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가 만들어지기 전 미국 기술을 도입했기에 추력 제한을 받지 않고 고체로켓을 만들 수 있었다. H-2 1단에 붙이는 고체로켓 부스터의 추력이 280t 정도다. H-2는 이러한 부스터를 두 개 이상 붙였기에 우주로 올라가는 것이다. H-2 1단에서 큰 힘을 내는 것은 수소로켓이 아니라 고체로켓인 부스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수소로켓과 고체로켓 부스터는 고가(高價)이기에 H-2는 값비싼 발사체가 되고 말았다.
기술적인 한계로 당분간 더 큰 추력을 내는 수소로켓 개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술적으로 쉽고 가격도 저렴한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을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이를 미국의 스페이스X사가 입증했다. 스페이스X사는 추력 65t의 케로신+액체산소의 멀린(merlin)엔진을 개발하고, 이 엔진 9개를 묶어 1단, 1개로 2단을 구성한 ‘팰콘(falcon)-9’ 발사체로 우주왕복선을 대신해 국제우주정거장까지 물품을 보냈다. 우주왕복선도 수소로켓을 사용하는데, 스페이스 X사는 3분의 1 가격으로 우주왕복선이 하던 일을 수행했다.
스페이스X사는 팰콘-9 1단 좌우에, 9개의 멀린 엔진을 묶은 팰콘-9 1단을 부스터처럼 붙이고, 그 위에 멀린엔진 1개로 2단을 만든 ‘팰콘-헤비(heavy)‘를 제작해 정지위성을 쏘아 올리겠다고 했다. 사업은 이렇게 해야 한다. 로켓은 추력이 작을수록 만들기 쉽다. 대량 생산하면 제작비도 낮아지니 한 종류를 개발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게 경제적이다. 항우연은 스페이스X사를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수소로켓을 만들어놓고 값비싼 제작·발사 비용 때문에 마음고생하는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길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똘똘한 75t 로켓으로 모든 것 해결”
▼ 그런 말을 들으면 추력 75t 엔진 개발을 전제로 하는 KSLV-2 사업은 상당히 장밋빛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늦어지고 있다. 잘되고 있다면 늦춰질 이유가 없을 텐데….
“이 엔진 개발을 놓고 말이 많았다. 애초에는 러시아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공동 개발하기로 했는데, 러시아가 자국 기술보호를 이유로 난색을 표해 난관에 부딪혔다. 그에 따라 ‘30t 추력의 엔진을 만들어 지상실험까지 해봤으니, 이 엔진도 자력으로 만들자’는 결정을 내리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그때 이 엔진의 추력을 ‘60t으로 하자’‘70t으로 하자’로 논쟁하다, 어렵게 75t으로 개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항우연이 과연 이 엔진을 개발해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2008년 기획재정부는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사업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기술 확보 수단이 부족하다’며 예산 배정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또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다, ‘먼저 나로호 발사를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75t 엔진을 개발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2009년, 2010년 나로호 1, 2차 발사가 실패해 수행하지 못하다 2011년 간신히 개발이 재개됐다.
힘든 과정을 거쳐온 만큼 우리는 75t 엔진을 가장 경제적이고 안정적으로 개발하고, 이것으로 KSLV-2를 제작해 가장 저렴한 가격에 위성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똘똘한 로켓’을 개발해 대한민국을 우주산업을 수행할 중추국가로 만들 것이다.”
▼ 나로호 1차 발사도 계속 늦어졌다. 왜 그랬는가.
“나로호 사업을 하기 전 한국은 러시아와 우주기술보호협정을 맺고 양국 국회 비준을 받기로 했다. 우리 국회 비준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러시아는 기술 보호를 이유로 반대 여론이 형성돼 비준이 늦어졌다. 그리고 항우연은 흐루니체프 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나로우주센터 공사 등에 차질이 생겨 또다시 사업이 늦어졌다. 우주 개발은 처음 도전하는 분야라 애초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 실패한 나로호 1, 2차 발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3차 발사에 올리는 위성은 어떤 것인가.
“실패했기 때문에 제작에서 조립, 발사, 관제 그리고 사고 조사까지의 전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실패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에 75t 로켓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게 됐다. 1차 발사에서 바로 성공했다면 그러한 성과는 없었을 것이다. 3차 발사에 탑재하는 위성은 1, 2차 발사 때 실었던 과학기술위성-2호를 토대로 설계한 나로과학위성인데 상당한 과학장비를 탑재한다.”
“우주 개발은 정권과 무관해야”
▼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으로 ICBM을 만들 수 있는가?
“못 만든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은 주로 고체로켓을 쓴다. 액체를 쓴다면 상온(常溫)에서 저장할 수 있는 액체를 써야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만든 V-2 로켓은 액체산소를 썼고 북한의 ‘노동’과 ‘대포동’은 상온저장성 액체를 사용했다. 산소는 극저온인 섭씨 영하 183도 이하에서 액체가 되는데, 이러한 극저온 상태는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발사하기 직전에 로켓에 주입한다. 무기는 바로 쏠 수 있어야 하는데,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은 그렇게 할 수 없다. ICBM에는 값은 매우 비싸지만 상온에 둘 수 있는 고체연료 로켓을 탑재한다.”
▼ 추력 75t 로켓과 KSLV-2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 것인가. 일본과 중국은 그들이 만든 위성과 우주선에 자국의 역사와 신화 속 인물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KSLV-1을 우주센터가 들어선 외나로도 이름을 따서 나로호로 명명했는데, 이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접에서 아쉽다.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역사 왜곡이 자심한데 그에 맞서는 명명을 하면 어떤가. 75t 엔진은 ‘단군’, KSLV-2는 ‘해모수’ 식으로….
“좋은 생각이다. 우주 개발을 통해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국가 대전략이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는 하늘을 숭배한 민족이니 하늘과 이어준 역사 속 인물 이름을 붙이는 것을 검토해보겠다.”
▼ 일본은 H-2를 개발한 뒤 상업적으로 운영할 회사로 미쓰비시를 지정했다. 추력 75t의 로켓 개발에 성공하면 이 로켓과 발사체 제작을 담당할 업체는 누가 되는가.
“대한항공이나 한국항공우주산업,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 같은 회사들이 원하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 입찰을 통해 그중 한 회사를 결정하지 않겠나 싶다.”
“인도네시아와 공동보조”
▼ 나로우주센터는 발사각이 좁지 않은가. 나로호 발사만 의식하고 지었기에 덩치 큰 KSLV-2 발사에는 부적합하다. KSLV-2보다 훨씬 큰 정지위성 발사체 발사까지 고려한다면 제주도에 새 발사장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도로 건설을 포함해 많은 돈을 들여 나로우주센터를 지었는데, 왜 제주도에 중복 투자를 하는가. 물론 미국의 시론치나 프랑스의 쿠르 발사장 예에서 보듯이, 정지위성 발사체는 적도 근처에서 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다면 우리도 적도 발사장을 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인도네시아는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등 여러 섬이 적도에 걸쳐 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가 우리의 항공우주 개발에 관심이 아주 많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생산하는 T-50도 도입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인도네시아에 발사장을 지어 우리와 인도네시아가 같이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 인도네시아는 스페인과 함께 CN-235 수송기를 개발해 생산하는 등 나름대로 항공산업을 장려해온 나라다. 그러나 우주 개발은 한 적이 없는데 우리의 파트너가 될 수 있겠는가.
“항공우주산업을 하려면 전후방산업이 발전해 있어야 하는데, 인도네시아는 이 부분이 취약하다. CN-235를 생산하면서 그것이 문제란 것을 알았다. 반면 한국은 전후방산업이 탄탄하고 항공우주산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파트너로서는 우리만한 나라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T-50을 구입했고, 한국형 전투기 KFX 사업도 같이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관계자들이 우주 개발에 도전하기 위해 자국에 발사장을 지어 우리와 공동 운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비공식적으로 해온 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발사장을 지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쿠르 발사장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한국에서 생산한 발사체는 배나 항공기에 실어가면 되니까.”
우주 개발서도 대도약을
▼ 위성 사업은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아리랑-5호는 국산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는데
“아리랑-5호에 탑재할 레이더영상(SAR)위성은 이탈리아의 알레니아에서 사왔지만 다음부터는 이 장비를 우리가 제작한다. 적외선위성(아리랑-3A호)도 최초의 것은 외국에서 제작하지만 다음부터는 우리가 만든다. 위성 제작에서 중요한 것은 탑재체(장비)를 실을 본체(bus) 제작이다. 본체에 카메라를 실으면 관측위성이 되고, 통신장비를 실으면 통신위성이 된다. 여러 탑재체를 잘 실을 수 있는 본체를 만들어놓으면 다양한 주문에 대응할 수 있다.
위성이 필요한 기관은 많다. 군은 물론이고 방재 업무를 하는 곳, 해양관측을 하는 곳, 기상관측을 하는 곳 등등…. 이러한 수요에 맞춰 다양한 탑재체를 실을 수 있는 본체를 만들어놓고 위성을 싸게 발사해주면 외국 수요도 끌어올 수 있다. 올 연말까지 항우연은 100kg에서 3.5t에 달하는 60여 종의 위성을 실을 수 있는 본체 10여 종을 소개하는 카탈로그를 제작해 국내외 예상 수요처에 보내려고 한다. 이미 중동과 중남미 동남아 국가에서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 후발국인 한국이 우주 개발을 할 경쟁력 있다고 보는가.
“엔지니어들은 자기 방식대로 하려는 고집이 있다. 우주 개발의 최선진국은 미국인데, 미국의 최고 엔지니어들은 오래된 방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놀랄 만큼 발전한 현대 기술을 외면하고 젊을 때 배운 익숙한 방법만 쓰려고 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발국이 후발국에 추월당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우주 개발은 정밀기계, 첨단 소재, 정보통신(IT), 전자기술 같은 전후방산업이 발전해 있을 때 본 궤도에 오른다. 요즘 동물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로 여행하는 사람이 많은데, 같은 이유로 우주여행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호텔을 만들고 왕복선 같은 우주비행기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산업 개척은 창의력 있는 사람들이 잘하는데, 한국은 이 분야에 강점이 있다. 전후방산업도 발전해 있으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주 개발에서도 퀀텀 점프를 해야한다”.
이를 바탕으로 나로호 2단에 필요한 고체로켓을 한화그룹을 중심으로 한 국내 기업들이 자력으로 개발해냈다. 2단을 개발할 때 한 차례 폭발사고가 있었지만 한국은 훌륭히 작동하는 고체로켓을 만들어냈다. 조용히 추진돼온 국내 고체로켓 개발사를 살펴본다.
로켓엔진은 뉴턴의 제3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추력을 발생시킨다. 내부에 저장한 추진제를 연소시켜 발생된 고온 고압의 가스를 노즐로 분사함으로써 얻는 반작용력으로 추력을 얻는 것이다.
로켓엔진은 화학로켓 추진과 비(非)화학로켓 추진으로 나누어진다. 화학로켓 추진에는 고체추진제를 사용하는 고체로켓과 액체추진제를 사용하는 액체로켓, 그리고 고체연료에 액체산화제를 사용하는 하이브리드로켓이 있다. 현재는 화학로켓 추진만 사용되고 있으니, ‘로켓=화학로켓 추진’으로 봐도 무방하다.
액체로켓은 연료를 산소 같은 산화제에 섞어 태움으로써 힘을 낸다. 산소는 섭씨 영하 118도에서 50기압 이상을 가하면 액체가 된다(고압을 가하지 않으면 영하 183도 이하에서 액체가 된다). 로켓은 대기가 없는 우주를 비행하기 때문에 액체산소를 탱크에 넣어 사용한다. 액체산소 외에도 질산과 사산화이질소를 사용하기도 한다. 연료로는 등유(kerosine)와 액체수소, 하이드라진 계열이 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액체산소와 액체수소의 결합이다. 액체수소가 액체산소와 결합하면 강력한 폭발력을 낸다. 액체수소를 연료로 쓰는 액체로켓은 추진기관 무게 대비 추진력인 ‘비추력(比推力·specific impulse)’이 가장 높다. 액체수소를 연료로 쓰는 액체로켓이 가장 강력한 추력을 내는 것이다.
고체로켓은 일종의 화약인 고체추진제를 점화시켜 힘을 낸다. 고체추진제는 산소와 같은 산화제에 연료를 혼합해 고체화한 것이다. 액체로켓은 액체산소와 액체로 된 연료(보통은 등유)를 넣을 탱크 그리고 이들을 섞어 점화시킬 연소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고체로켓은 고체연료를 바로 점화시키기에 탱크가 없어 구조가 단순하다. 하지만 연소되는 추진제의 양을 조절할 수 없고, 점화하는 순간부터 바로 큰 힘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상단부 로켓으로 많이 쓰여
고체로켓은 액체로켓에 비해 많은 추진제를 넣을 수 있다. 따라서 상단부 로켓으로 많이 사용한다. 액체로켓은 많은 연료를 소모해 큰 힘을 내므로 주로 1단으로 사용한다. 1단에 쓰인 액체로켓은 대개 엔진으로 불린다. 고체로켓을 많이 쓰는 2단이나 3단 로켓은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해 툭 차듯이 마지막으로 밀어주기에 ‘킥 모터(kick motor)’라고 한다.
백곰과 현무 그리고 다연장로켓인 구룡을 개발해낸 한국은 과학로켓 개발을 시작으로 우주 개발에 나섰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은 과학관측로켓인 KSR-1(1단, 고체), KSR-2(2단, 고체), KSR-3(1단, 액체)를 만들어 시험발사했는데 여기에는 한화를 비롯한 많은 방산업체가 참여했다. 국내 기업들은 소규모이긴 하지만 KSR에 필요한 고체로켓을 완벽하게 제작한 것이다. KSR 시리즈 개발을 통해 한국은 단 분리 기술을 익히고, KSR-3에서는 기초적인 액체로켓 기술을 확보했다. KSR에 이어 한국형 액체로켓을 만들어 인공위성을 띄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1단은 러시아가 만든 액체로켓을, 2단은 우리가 만든 고체로켓을 채택한 나로호를 만들어 발사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한화를 비롯한 국내 기업은 나로호 2단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2단은 1단 액체로켓이 점화된 395초 뒤 점화돼 100kg급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진입시켜야 한다. 위성의 방향을 틀어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개다리 기동을 해야 한다. 킥모터는 그때 걸리는 높은 중력을 견뎌내야 한다. 2003년 12월부터 2005년 6월 사이 한화는 실물보다 축소한 킥 모터를 만들어 시험에 들어가 주요 데이터를 확보하고 제작공정 등을 사전 검토했다.
2005년 9월부터 2008년 9월 사이엔 실물형 킥 모터를 개발해 각종 시험을 했다. 대기가 희박한 고고도의 환경을 모사한 조건을 만들어주고 킥모터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점검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게를 가볍게 하면서도 원하는 정도의 추력을 오랫동안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킥 모터는 화약의 일종인 고체추진제를 사용하기에 단시간에 높은 추진력을 발휘하기는 쉽다. 문제는 오랫동안 추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 고체로켓에서는 3000도가 넘는 고열이 나오므로 오래 가동하면 노즐이 견디지 못한다.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킥 모터 실험 중 폭발사고
이를 막는다고 내열재를 추가하면 로켓이 무거워진다. 고체로켓이 타는 시간만큼만 견딜 수 있도록 최소한의 내열재를 첨가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킥 모터 개발에서 어려웠던 것은 시험이었다. 1.5t 이상의 고체추진제를 탑재한 킥 모터를 진공환경에서 연소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기술이 아니어서, 성공 여부를 실험해보아야 했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 장비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러시아의 기술협력을 받아 ‘고공환경 시험장치’를 개발해 지상연소시험과 고공환경(우주환경) 모사(模寫) 지상연소시험 등을 12회 실시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 킥 모터 앞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폭발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연소시험장은 폭탄을 맞은 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기에 망연자실할 겨를도 없이 바로 원인을 분석하고 설계를 변경해 새로 제작한 다음, 다시 시험에 들어갔다. 이때 제작한 킥 모터는 지상에서 11번 연소시험을 했지만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킥 모터의 안전성과 개발을 자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개다리 기동을 견디는 구조를 찾는 것이었다. 우주에서는 대기가 없기 때문에 비행 방향을 바꾸기 위해 날개를 이용할 수 없다. 방향 전환은 배기되는 화염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추력방향 제어 노즐을 사용해야 한다. 3000도가 넘는 고온 고압의 연소가스에 60초 이상 노출돼 있던 노즐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기술은 선진국만 보유한 핵심기술인데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는 이 기술의 국가 간 이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화를 비롯한 국내 기업은 많은 노력으로 이 노즐을 개발해냈다. 이 노즐의 성능이 나로호 1차에서 증명됐다. 나로호는 마지막 단계에서 한쪽 페어링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 무게중심이 기울어졌다. 자세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노즐을 틀어야 했다. 2단의 노즐은 방향을 튼 상태에서 설계치 이상으로 엔진을 가동했는데도 끝까지 견뎌냈다. 나로호 1차 발사는 우리 고체로켓을 우주에서 성공적으로 점화시킨 최초의 사례다.
1차 발사가 끝난 후 분석해보니 킥 모터의 성능은 예측했던 것과 0.6% 오차밖에 보이지 않았다. 2% 편차의 오차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보다 작은 오차를 보였다. 그러나 2차 발사 때는 킥 모터가 작동하기 전에 나로호가 폭발해 킥 모터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주 개발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뤄야 한다. 오는 가을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하면 우리는 본격적인 한국형 발사체 KSLV-2 개발에 도전한다. 이를 위해서는 추력 75t의 액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해야 한다. 이미 고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해냈으니 액체로켓 개발도 성공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항우연은 아리랑 사업을 계속한다. 아리랑-6호는 SAR위성으로 제작해 2016년 발사하고, 7호는 해상도를 더욱 높인 광학카메라를 탑재해 2017년쯤 올린다.
항우연은 아리랑 위성들이 찍어온 한반도 사진 가운데 일부는 국가정보원이나 국방부 등에 제공해 안보 목적으로 사용하게 한다. 일부는 여타 부처에 제공한다. 그리고 민간이나 해외에서 주문이 있으면 그에 맞는 사진도 찍어 제공한다. 항우연은 수익을 내는 연구소인 것이다.
아리랑위성을 제작하던 시절 항우연은 ‘천리안’으로 명명한 최초의 정지위성 제작에 도전했다. 한국에서 제작한 것 가운데 가장 커서 무게가 2.4t에 달했다. 천리안은 무궁화-올레위성처럼 적도 직상공 3만5786km에 떠서 한반도를 내려다보며 통신 서비스와 기상관측, 해양관측을 한다.
이 위성을 만들기 위해 항우연은 프랑스의 EADS 아스트리움을 선생으로 모셨다. 천리안에 탑재된 통신장비는 무궁화-올레위성이 하지 못하는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천리안은 2010년 6월 26일 프랑스령 남미 기아나에서 아리안-5 발사체에 실려 성공적으로 발사돼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1999년 우리별-3호를 발사했던 KAIST가 106kg의 우리별-4호를 만들어 2003년 9월 27일 러시아의 블레세츠크 발사장에서 러시아의 코스모스(COSMOS)-3M 발사체로 발사했다. 우리별-4호는 우주와 지구 관측을 주목적으로 했기에 ‘과학기술위성-1호’로 불렸다.
2009년 8월 25일 항우연은 한국 땅에서 최초로 위성을 띄우기 위해 나로-1호를 발사했다. 나로-1호에 탑재된 것이 우리별-5호에 해당하는 KAIST 제작의 ‘과학기술위성-2호’(99.9kg)였다. 나로호는 저궤도에 위성을 올리는 발사체를 시험 삼아 쏴보는 것인 만큼 당장 사용할 실용위성은 싣지 않고 우리별을 이은 과학기술-2호를 실었다. 그러나 이 위성은 나로호가 마지막 단계에서 페어링 분리에 실패함으로써 지구 궤도에 머물지 못하고 추락했다.
우주 강국 머지않았다
2010년 6월 10일 항우연은 나로호 2차 발사에 들어갔다. KAIST는 나로호를 2번 발사할 것으로 보고 과학기술위성-2호를 2개 만들었기에, 남은 것을 2차 발사에 들어간 나로호에 실었다. KAIST는 나로호 1차 발사에 실었던 것은 과학기술위성-2A호, 2차 발사에 실은 것은 과학기술위성-2B호로 구분했다. 그러나 2차 발사를 한 나로호가 공중폭발했기에 2B호도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올해 가을 항우연은 나로호 3차 발사를 하는데, 여기에는 KAIST가 새로 만든 나로과학위성이 탑재된다. 나로과학위성은 과학기술위성-2호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그동안 발전한 기술을 접목했기에 꽤 뛰어난 관측장비를 싣는다고 한다.
항우연이 중심이 돼 추진해온 한국의 위성 사업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우주개발 선진국들은 발사체를 먼저 개발한 후 위성을 개발했으나 한국은 거꾸로 위성부터 개발했다. 덕분에 발사체는 완성하지 못했는 데도 위성만큼은 선진국을 거의 따라잡는 퀀텀 점프를 했다. 위성은 거의 대부분이 전자장비로 구성된다. 한국은 전자산업과 IT(정보기술)산업 강국인 만큼 위성 제작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은 만들어봐야 할 위성은 대부분 다 제작해본 것이다.
이제부터는 위성의 질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 그리고 큐브 위성처럼 소형 위성을 무더기로 띄워 한국형 GPS 망을 구성해내야 한다.
위성 분야는 한국이 우주 강국으로 가는 노정에 처음으로 돌파한 관문이다. 이어 발사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우주 강국 한국은 생각보다 빨리 구현될 수 있다. 원자력 강국에 이어 한국이 우주 강국이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미래의 우주산업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주 활용법은 무궁무진하다. 군사 분야, 의료 분야, 수송 분야, 관광 분야 등 지구에 있는 모든 영역을 적용해 우주를 활용할 수 있다. To the Space가 아니라 우주에 머물며 지구를 위해 우주를 활용하는 From the Space 입장에서 창의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 |
2009년 12월 공개된 최초의 민간용 우주선 스페이스십 투. 가운데 동체가 우주여행을 한다.
우주 개발은 미소 냉전이 첨예하던 1960, 70년대 가장 치열했다. 당시 미국은 우주 개발에 국가 GDP의 약 3%를 투자했다. 투입한 엘리트는 30여만 명에 달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방예산 비율이 국가 GDP의 3%가 되지 않으니, 미국이 우주 개발에 쏟아 부은 돈은 정말 막대하다.
그리고 달에 사람을 착륙시켜 가져온 것이 370kg의 암석이다. ‘플라이 투 더 문(Fly to the Moon·마이클 콜린스가 쓴 달 탐험에 관한 에세이 제목이기도 하다)’을 한 아폴로-11호에서 닐 암스트롱과 마이클 콜린스가 달에 내렸을 때 전 인류는 천지개벽이라도 한 듯 환호했다. 미국은 소련을 제치고 우주 개발에서 승리한 것인데, 370kg의 달 암석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전리품이 없었다.
경제적인 이득이 거의 없다는 판단에 따라 1970년 중반 미국의 우주 개발 열기는 갑자기 시들해졌다. 정찰위성을 올리는 것과 방송통신위성을 띄우는 것이 거의 유일한 우주사업이 되었다. 소련과 그 뒤를 이은 러시아도 비슷한 판단을 했다.
러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400억 달러를 들여 국제우주정거장을 지구 저궤도에 띄웠다. 한국도 이를 반겨 최초의 우주 승객인 이소연 씨를 러시아 소유즈 발사체에 태워 국제우주정거장에 다녀오게 했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는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인류 발전에 기여할 정도로 큰 성과는 아직 없었다. 우주 개발과 연구는 기초과학 분야가 중심이기 때문이었다. 돈은 응용과학을 해야 벌 수 있다.
그래도 각국은 국가기관 주도로 우주 개발을 지속했다. 미국에서는 NASA, 일본은 JAXA, 러시아는 FSA(러시아 알파벳으로는 RKA로 표기), 유럽은 ESA라는 국가기관이 우주 개발과 우주 연구 사업을 계속했다. 그 결과 위성 활용이 늘어나, 달 착륙 후 시들해졌던 우주 개발 관심이 조금씩 증가했다. 이는 탐험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관심의 증가였다. 우주는 왜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무대로 인식됐는가.
상업 우주여행 본격화
첫째는 우주여행이었다. 미국이 우주왕복선을 만들어 반복 운행하면서 우주여행에 관심이 증가했다. 우주왕복선은 몇 차례 사고를 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지만, 유인 우주선으로 우주여행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돈 많은 부자들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자 한다. 살아서 돌아올 수만 있다면 큰돈을 들여 우주여행을 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스페이스 어드벤처(Space Adventure) 같은 우주여행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가 등장했다.
민간인 우주여행을 위한 최초의 우주선은 영국의 버진 갈락틱(Virgin Galactic)과 미국의 ‘스케일드 콤포지트(Scaled Composits)’라는 회사가 투자해서 만든 스트라토런치 사의 ‘스페이스십 원(Space Ship one)’이다. 스페이스십 원은 우주왕복선과 비슷한 방식으로 비행한다. 큰 제트항공기에 업히거나 매달린 형태로 하늘로 올라가 로켓엔진을 점화해 우주로 올라간다.
스페이스십 원은 우주비행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한 시제기(試製機)였다. 2004년 6월 21일 스페이스십 원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시험비행조종사인 마이크 멜빌(Mike Melvill)을 태우고 ‘화이트 나이트(White Knight·백기사)’라는 비행기의 배에 붙어 미국 모하비 사막에 있는 공항을 이륙했다. 화이트 나이트는 2대의 비행기를 옆으로 붙인 특수 제작 비행기였다. 화이트 나이트가 16km 고공에 올라가자 스페이스십 원이 로켓엔진을 점화해 순식간에 고도 100km에 올라가 대기권 비행을 하고 90분 뒤 에드워드 공군기지의 활주로에 안착했다.
스페이스십 원을 통해 우주여행의 가능성이 확인되자 진짜로 민간인 승객을 태우고 우주비행을 할 ‘스페이스십 투’ 사업이 시작됐다. 로켓엔진을 점화한 뒤 스페이스십이 비행하는 시간은 25분 정도다. 그중 대기권 밖인 우주를 비행하는 시간은 4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짧은 우주여행이지만 비행요금은 1인당 20만 달러(약 2억2000만 원)로 책정됐다. 스페이스십 투의 최초 비행은 올 12월로 예정됐다.
‘민간인으로 우주에 갈 수 있다’는 사실과 호기심 덕인지, 430명이 예약을 신청했다. 이들을 모두 태우면 8600만 달러(약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 그러자 한 보험회사가 우주여행자 보험 출시를 검토하게 되었다. 스페이스십 투는 올해 연말 6명의 여객을 싣고 최초의 상업 비행을 한다. 최초의 승객은 이 회사 회장이자 모험가인 리처드 브랜슨과 우주선을 설계 제작한 엔지니어 버트 루탄이다. 발사 장소는 뉴멕시코 주의 우주기지로 정해졌다.
스페이스십 투가 우주 승객을 끌어 모으고 있을 때 ‘스페이스X’라는 또 하나의 벤처 기업이 등장했다. 스페이스X 사는 미국이 퇴역시킨 우주왕복선을 대신해 국제우주정거장까지 화물과 우주인을 보내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스페이스X 사는 65t 추력의 케로신+액체산소 로켓(멀린엔진)을 값싸게 개발해 대량 제조한 다음 이를 다양하게 조립해 아주 경제적인 발사체를 내놓았다.
벤처사업 된 우주산업
스페이스X 사가 처음으로 내놓은 발사체는 멀린엔진 9개를 묶어 1단을 만들고, 멀린엔진 1개로 2단을 구성한 팰콘-9이었다. 팰콘-9은 위성이 아니라 ‘드래곤(dragon)’이라는 이름의 우주화물선을 싣는다. 드래곤에는 미국이 국제우주정거장에 보내야 하는 화물이 탑재된다. 드래곤은, 팰콘-9이 마지막으로 밀어주면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접근해 도킹하고, 싣고 간 화물을 국제우주정거장에 전달하는 무인화물선 일을 한다.
지난 5월 22일 NASA는 미국 플로리다 주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스페이스X 사가 제작한 팰콘-9 발사체를 쏘아 올렸다. 팰콘-9은 국제우주정거장이 떠 있는 궤도(고도 350km)까지 드래곤을 진입시켜 5월 25일 도킹하고 우주인들이 사용할 물과 음식 등 생필품 460kg을 전달했다. 임무를 마친 드래곤은 국제우주정거장과 분리돼 5월 31일 지구로 돌아왔다.
대기권으로 재돌입한 드래곤은 고도가 낮아지자 3개의 거대한 낙하산을 펼쳤다. 그리고 미국 서부에서 450km 떨어진 태평양에 착수해 귀환했다. 우주왕복선은 지상의 활주로에 내리지만 드래곤은 바다에 착수한 차이만 보였을 뿐이다. NASA는 우주왕복선을 띄울 때의 3분의 1 비용을 스페이스X 사에 지불했다.
케로신+액체산소를 쓰는 저가의 엔진을 만들고, 이 엔진을 다양하게 조립해 발사비용을 크게 줄이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스페이스X 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 IT 산업으로 돈을 번 엘튼 머스크가 2002년 세운 벤처기업이다. 1800여 명의 직원 평균 연령이 30대 초반일 정도로 이 회사는 젊다. 스페이스X는 멀린로켓과 멀린로켓을 이용한 발사체 개발, 그리고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붙인 캡슐 등을 개발하는 데 1억 달러(약 1270억원)를 쏟아부었다.
팰콘-9의 제작과 발사비용은 6000만 달러다. 우주왕복선이 퇴역한 후 NASA는 러시아의 소유즈 사에 6300만 달러를 주고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위성과 화물선을 발사했다. 그런데 미국 기업인 스페이스X 사가 300만 달러(약 33억원) 싼 가격으로 같은 일을 해주게 됐으니 NASA는 스페이스X 사를 새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다.
NASA는 화성 탐사 집중
팰콘-9으로 사업성을 확인한 스페이스X 사는 다음 작업에 들어갔다. 사람을 태우는 우주선을 만들기로 한 것. 방법은 화물용으로 개발한 드래곤을 최대 7명의 우주인이 탈 수 있도록 개조하는 것이다. 스페이스X 사가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우주인을 보내고,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오래 근무해온 우주인을 태우고 지구로 귀환하는 유인 드래곤을 개발해낸다면 NASA는 국제우주거장 사업을 스페이스X 사에 전담시킬 계획이다.
스페이스X 사는 한발 더 나가고 있다. 멀린엔진 9개를 묶은 1단 주위에, 멀린엔진 9개를 묶은 것 2개를 부스터처럼 붙이고, 그 위에 2단으로 멀린엔진 하나를 올린 ‘팰콘-헤비’를 제작해, 정지위성을 쏘아 올리겠다고 한 것. 팰콘-헤비가 제작돼 성공을 거두면 NASA는 모든 위성 사업에서 손을 떼도 된다. 그렇게 되면 지구위성 분야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정부 사업이 아닌 민간사업 영역이 된다.
중요 산업은 대개 이렇게 시작됐다. 처음에 정부가 큰돈을 들여 개척하면, 사업성을 발견한 민간 기업이 뛰어들어 블루 오션으로 만들어버린다.
민간 기업이 우주여행과 위성발사 사업에 진출하자 NASA는 화성 탐사로 눈을 돌렸다. 화성에는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대기가 있고 물이 있어 과학기술을 동원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수 있다. 화성을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NASA가 ‘연습지’로 활용하려는 것이 달이다. NASA는 과학을 동원해 달을 심우주 탐험을 위한 국제우주정거장처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다.
우주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다르게 활용될 수 있다. 올해 6월 16일 미국 공군우주사령부는 우주과학 전문매체인 ‘스페이스닷컴’을 통해 보잉의 방위사업본부가 제작한 극비의 무인 우주기(宇宙機) X-37B가 캘리포니아 주의 반덴버그 공군기지로 귀환하는 동영상을 공개했다. 몸체 길이 8.8m, 날개 길이 4.5m인 이 무인우주기는 2011년 3월, 270일간의 우주 체공을 목표로 플로리다 주의 케이프커내버럴 공군기지에서 아틀라스-5 발사체에 실려 발사됐다. 그런데 예정 체류기간을 훨씬 넘겨 469일(1년+104일)을 우주에서 보내고 돌아온 것이었다.
미국은 2010년에도 X-37B를 발사해 7개월간 우주 항해를 하게 한 후 귀환시킨 바 있다. 그때는 X-37B의 발사와 귀환 영상을 공개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돌아오는 모습을 공개한 것이다. 미 공군은 1년 3개월 보름(469일)을 우주에서 보낸 X-37B가 돌아오는 모습은 공개했지만, X-37B가 무슨 일을 하고 왔는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미 공군은 X-37B는 ‘궤도시험기(Orbital Test Vehicle·OTV)’로 사용한다고만 밝혔다.
일각에서는 X-37B가 정찰용 카메라 등의 장비를 탑재하고 올라가 적성국가의 위성을 감시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X-37B가 발사됐을 때 예민하게 반응한 나라가 중국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군이 중심이 돼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고 우주 도킹을 성공시키는 등 우주 개발을 활발히 하고 있으니 감시할 필요가 있는 것.
무인 우주기 X-37B
2011년 퇴역시킨 우주왕복선은 귀환용 엔진을 달고 있지 않았다. 무동력 상태로 활강해 공항 활주로에 내린다. 활주로에 착륙한 다음에는 거대한 낙하산을 펼쳐 멈춰 선다. X-37B는 착륙 시 가동하는 엔진을 달고 있다. 크기는 우주왕복선의 반 정도다. 우주왕복선은 대기권 돌입 시 발생하는 열을 견디기 위해 외벽에 내열 타일을 붙였다. 이 타일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떨어져나가면 우주왕복선은 바로 폭발한다. X-37B는 내열 타일 대신 내열 코팅을 했다.
X-37B는 엔진을 갖고 있어 우주에서 자유기동을 할 수 있다. 적절한 무기를 탑재하고 있다면 적성국가의 위성 을 격파할 수도 있다. 이러니 X-37B는 우주왕복선이 아니라 우주에서 자유비행을 하는 ‘우주기(宇宙機)’로 불려야 한다. X-37B는 사람이 타지 않는 무인기라는 것도 큰 특징이다. X-37B는 미 공군우주사령부에서 원격 조종한다.
미국의 도전은 끝이 없다. 전략무기감축협정이 발효된 후 미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많이 폐기했다. 미국은 어떤 대안이 있기에 러시아를 설득해 ICBM을 상호 폐기하기로 했는가?
발사된 ICBM에서 로켓엔진이 가동되는 시간은 총 비행시간의 10분의 1 정도다. 로켓은 ICBM을 대기권 밖으로 나가게 하는 시간까지만 가동된다고 보면 된다. 대기권 밖은 진공상태이니 엔진이 없어도 ICBM은 고속으로 비행한다. 대기권으로 들어오면 자기 속도에 지구 인력까지 가세하게 돼 아주 빠른 속도로 목표를 향해 떨어진다.
그런데 MD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미국과 러시아 등은 빠르게 날아가는 ICBM을 요격할 수 있게 되었다. MD용 미사일들은 자신이 먼저 터져서 만들어진 파편으로 적 ICBM을 격파하지 않는다. 현대는 레이더 기술과 유도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기에, 이 미사일들은 적 ICBM과 공중충돌함으로써 적 미사일을 완전 파괴해버린다.
미국과 러시아는 마하 10 이상의 속도로 떨어지는, 직경 1m도 되지 않는 탄두를 맞힐 수 있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여타 국가들도 유사한 능력을 갖는다. 중국도 미국의 ICBM을 공중에서 정면충돌함으로써 산산조각 내는 요격 미사일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과 러시아는 종이호랑이가 된다. 슈퍼파워로 존재하고 싶다면 ‘ICBM 감축+여타 국가의 MD 구축’이 초래한 전력 상실을 만회할 수 있는 방안을 갖고 있어야 한다. 미국은 그 방안으로 스크램제트(SCRAM Jet) 엔진을 채택한 무(無)탄두 미사일을 선택했다.
핵탄두 없는 ICBM
스크램제트는 초음속 연소 램제트(Supersonic Combustion Ramjet)의 약어다. 램제트는 제트엔진의 일종이다. 여객기와 전투기에 많이 쓰이는 제트엔진을 터보제트라고 한다. 터보제트는 정지 상태에서부터 속력을 낸다. 터보제트를 단 여객기와 전투기는 정지한 상태로 있다가 활주로를 달려 이륙한 후 비행하는 것이다. 램제트는 정지 상태에서는 추력을 내지 못한다. 램제트는 마하 2 이상의 속도를 내고 있을 때 돌려야 제대로 가동한다.
램제트를 이용한 최초의 비행은 1949년 4월 21일 프랑스에서 있었다. 램제트 엔진을 단 ‘르뒤크(Leduc) 0.10’이라는 비행기가 다른 비행기에 업혀 비행하다 램제트 엔진을 점화해 발진했다. 고속 비행 중 점화해야 한다는 불편 때문에 램제트 엔진을 단 항공기는 상용화되지 못했다.
상대의 MD를 깰 방안을 모색하던 미국이 역사 속에 파묻혀 있던 램제트 엔진에 주목했다. 램제트의 일종인 스크램제트는 마하 15 이상의 속도를 낸다. 램제트는 제트엔진이라 산소가 있는 대기권에서 가동해야 한다. 대기권에 들어온 ICBM이 램제트를 가동시키면 ICBM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진다.
‘문닫고 들어와라’
이 속도가 MD용 레이더 탐지망을 뚫어버린다. MD용 레이더는 보통 레이더보다 훨씬 정밀하지만 램제트를 단 ICBM을 추적하지 못한다. 미국은 이러한 ICBM에 핵탄두를 달지 않는다. 고폭약으로 만드는 재래식 탄두는 붙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ICBM이 아니다. 아무 탄두도 붙이지 않았다면 미사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워낙 속도가 빠르니 지상에 떨어지면 엄청난 충격을 준다. 소행성이 지구에 떨어진 것 같은 폭격 효과를 내는 것이다.
스크램제트를 탑재한 핵탄두 없는 ‘초초고속’ ICBM이 나오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이나 핵확산금지조약(NPT),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는 소용이 없어진다. 미국은 WMD(대량살상무기) 확산을 금지하는 모든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지키면서도 강력한 WMD를 보유한 나라가 된다. 이는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고 창의력을 총동원해 경쟁국이 따라올 수 없는 퀀텀 점프를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 스타워즈로 소련을 무너뜨렸다면 지금은 핵탄두 없는 스크램제트 ICBM과 X-37B 무인기로 중국을 해체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한미미사일협정 때문에 ICBM에 사용되는 대형 고체로켓을 만들지 못한다. 이 협정이 한국이 개발할 수 있는 미사일의 사거리를 1500km 등으로 늘여주는 쪽으로 개정되더라도 역시 한국은 ICBM급 미사일에 들어갈 대형 고체로켓은 만들지 못한다. 따라서 대형 고체로켓을 이용한 우주발사체 개발도 제약을 받는다.
이렇듯 기성(旣成)의 우주 개발은, 선진국들이 차지한 후 진입할 수 있는 문을 닫아버렸다. 선진국들은 ‘문 닫고 들어오라’는 말로 후발국에 우주 개발을 권유한다. 문을 닫아놓고 ‘함께 우주 개발을 하자’는 립 서비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찾아야 하는 것은 선진국도 막 진입하려고 하는 ‘블루 오션’이다. 이러한 분야에서는 ‘문을 닫아 놓고 들어오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것이 국제우주정거장의 활용법 모색이다. 지금 국제우주정거장으로 사람이나 물자를 올리는 데 들어가는 돈은 kg당 5만 달러 정도다. 물자는 올려 보내기만 하면 되지만, 사람은 지구로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국제우주정거장에서 사람을 태우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오는 데는 올라갈 때 비용의 두 배가 든다.
블루 오션을 찾아라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국제우주정거장을 어떻게 활용하면 수익을 낼 수 있을까. 선진국 제약회사들은 중력이 거의 없는 우주정거장에서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하려고 한다. 대기권은 지구의 법률이 적용되지 않은 공간이다. 영공은 대기권까지만 적용되니 대기권 밖은 어느나라의 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을 복제하는 데는 법률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르는데, 우주에서는 그 문제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무중력이 끼치는 영향을 생명공학 연구에 활용할 수 있다.
무엇이 나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무중력 상태는 신약을 개발하고 복제를 연구하는 데 최적의 공간일 것으로 선진국 제약회사들은 보고 있다. 중력이 없고 대기가 없는 우주에서 치료를 하고 수술을 하는 것은 강한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에서 하는 것보다 효과가 좋을 수도 있다. 우주에서의 임신이 지상에서의 임신보다 좋은 결과를 낳는다면 품종이 좋은 가축을 찾기 위해 우주에서 교배시키는 방법도 검토해볼 수 있겠다.
새로 개발한 엔진은 연소 시험을 해 안전성 등을 사전에 점검해야 한다. 그런데 지구에서는 만유인력이 작용해 연소시험에서 예상치 못한 오차가 생긴다. 그러나 인력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 우주정거장에서 한다면 그 오차는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지구 근처를 지나는 소행성 중에는 희귀 금속을 품고 있는 것이 많다. 소행성에서 희귀 금속을 캐내려면 우주정거장을 발진기지로 삼아야 한다. 이미 미국은 달에서 광물자원을 캐오는 ‘문 익스프레스(Moon Express)’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도 소행성에 탐사선을 착륙시켰기에 소행성 광산 개발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우주 이용이 활발해지면 질수록 우주정거장은 시험장·개발장, 공장이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우주도시도 된다. 도시가 있으면 도시를 잇기 위한 교통수단(발사체)도 따라서 발전한다.
산업혁명에서 한국은 200년 뒤져 고생했지만 정보 분야에서는 블루 오션을 잘 공략해 선진국이 되었다. 40여 년 뒤진 우주 개발도 그렇게 해야 한다. 돈벌이가 되는 우주산업을 찾아낸다면 한국의 미래는 장밋빛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우주로 올라가는 To the Space를 외칠 것이 아니라 지구를 위해 우주를 활용하는 From the Space를 생각해야 할 때다.
우주학과 정치학의 교묘한 만남
우주발사체와 발사장
이 때문에 발사체 개발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이러한 제악을 뚫고 한국형 발사체를 만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지리적으로 발사장 조건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선으로 발사하는 모험까지 택했다. 우주발사체를 만들기 위한 남북한의 경쟁, 발사장을 둘러싼 자연적·지정학적 조건 등 접하기 힘든 비밀을 공개한다.
우주 개발에 도전하려면 위성과 함께 위성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 우주발사체(SLV· Space Launch Vehicle)를 만들어야 한다. 우주발사체는 ‘발사체’로 약칭한다. 한국은 위성 분야에서는 꽤 앞서가고 있으나 발사체 쪽은 그렇지 못하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이 우주 개발 선진국들은 발사체 개발에 중점을 뒀다. 이유는 국방 때문이었다. 발사체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폰 브라운 박사가 이끈 독일의 페네뮌데 연구소에서 개발한 V-2 로켓에서 비롯됐다. 폰 브라운 박사 이전 미국에서는 고다드 박사가 로켓을 만들었지만, 로켓으로 사거리가 긴 무기를 만들어 실전에 사용한 것은 폰 브라운이 최초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은 V-2 로켓으로 영국을 공격했다.
ICBM 전력에서 앞섰던 소련
미국이 ‘리틀보이(우라늄탄)’와 ‘팻맨(플루토늄탄)’이라는 원자폭탄을 개발해 사용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무기는 V-2 로켓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해 독일을 분할 점령한 소련과 미국은 V-2를 토대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개발했다. 원폭 개발 경쟁에서는 미국이 앞섰지만 ICBM 경쟁에서는 소련이 앞에 있었다.
소련이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을 실전배치했을 때 미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인 ‘주피터’를 운용했다. 소련은 ‘스푸트니크-1호’로 명명한 인공위성도 미국보다 먼저 지구 궤도에 올렸다. 최초의 우주비행사(유리 가가린·1961년)와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발렌티나 테레슈코바·1963년)도 소련에서 나왔다. 그제야 원폭 2발로 제2차 세계대전을 끝냈다고 자신하던 미국이 정신을 번쩍 차렸다.
미국은 패전국가 독일에서 기술을 배울 수 없다는 자존심 때문에 독자적으로 로켓을 개발하려다 소련에 뒤지게 된 것이다. 원폭과 수소폭탄 개발에서 근소한 차이로 미국에 뒤졌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발사체 개발에서 앞서가자 미국은 전율했다. 미국인들은 지구 궤도를 돌고 있는 소련 위성이 미국을 향해 핵무기를 떨어뜨릴 것을 우려했을 정도니 당시 소련에 대한 미국인의 적대감과 경쟁심은 극에 달했다고 하겠다.
1961년 취임한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1970년이 오기 전에 달에 사람을 내려놓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의 우주 개발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항공우주국(NASA)을 가동했다. 총력전 덕분에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달에 사람을 착륙시켜, 우주개발 분야에서도 소련을 앞서나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일본 중국 인도 프랑스 영국 이스라엘 등 내로라 하는 나라들도 ‘뒤지면 죽는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우주 개발을 추진해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뒤지면 죽는 것’이니 그 시절의 우주 개발은 미사일로 전용할 수 있는 발사체 개발에 쏠릴 수밖에 없었다.
한국도 국방을 위해 로켓 개발에 눈을 돌렸다. 1968년 한국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는 1·21사태와 울진과 삼척 지역을 일시 점령하는 울진·삼척사태를 겪었다. 그해 북한은 원산 앞바다로 접근한 미 해군 정보함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하고, 이듬해에는 함남 해안으로 접근한 미 공군의 EC-121 정찰기를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안보 위해 시작한 로켓 개발
그로 인해 한반도의 긴장상태가 극에 달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모토로 국산무기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국방과학연구소(이하국과연)를 만들었다(1970년 8월 6일). 이듬해 박 전 대통령이 국과연에 유도탄(미사일) 개발 가능성을 검토하라는 극비 지시를 내려 추진된 것이 그 유명한 ‘백곰 사업’이다. 이 사업의 목적은 미군이 한국군에 이양한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이하 나이키)을 모방 생산하는 것이었다.
1978년 9월 26일 국과연은 박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곰 미사일 시사회를 열었다. 결과는 멋진 성공이었다. 백곰 사업을 통해 한국은 최초로 고체로켓엔진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핵 개발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서거하고 새로 들어선 전두환 정부는 미국을 의식해 핵 개발은 물론이고 미사일 개발까지 중단시켰다. 적잖은 국과연 직원이 일자리를 잃고 민간 기업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다행히 국과연은 백곰을 통해 개발한 로켓 기술을 폐기하지는 않았다.
북한군에서는 ‘방사포’라고 하는 것을, 한국군에서는 ‘다연장로켓’이라고 한다. 국과연은 백곰 사업으로 습득한 고체로켓 기술로 한국형 다연장로켓인 ‘구룡’을 만들었다. 구룡 사업이 한창 추진될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버마(지금의 미얀마) 아웅산국립묘지를 방문했다가 북한이 설치한 시한폭탄이 터져 정부 각료 등 수십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후 전두환 정부는 미국의 협조를 얻어 미사일 개발을 재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평양까지 도달하는 사거리 180km이내의 미사일만 개발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동의하고, 한국에 관련 기술을 이전해주었다. 그 결과 국과연은 백곰보다 훨씬 성능이 좋고 사거리도 길어진(150→180km) ‘현무’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었다. 현무와 백곰 나이키는 모두 고체로켓을 탑재했다. 군용 미사일은 신속하게 발사해야 하기 때문에 고체로켓을 탑재하는 경우가 많다.
V-2로켓은 액체연료를 사용했다. 액체연료는 물성(物性)이 예민해 미사일이나 발사체를 똑바로 세워놓고 주입하고 주입한 다음에는 빨리 발사해야 한다. 발사를 미루면 액체연료의 물성이 변하기 때문이다. 미사일 측면에서 보면, 액체연료 주입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큰 약점이다. 상대의 선제공격을 받으면 탄두와 함께 액체연료도 폭발해 엄청난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탄도미사일은 고체로켓 사용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고체연료였다. 고체연료는, 간단히 설명하면 고화(固化)제를 사용해 액체연료와 산화제를 섞어 물성 변화가 적은 고체 상태로 바꿔놓은 것이다. 고체연료는 미사일 안에 항상 장전해놓을 수 있어, 점화만 하면 미사일이 바로 날아간다. 그러나 우주발사체는 워낙 크기에 대개 액체연료를 사용한다.
우주 개발 선진국들은 가장 큰 힘을 내야 하는 발사체 1단에는 액체로켓을 채택하고 2단부터는 고체로켓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백곰과 현무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이나 우주발사체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전술미사일이다. 현무-1의 무게는 5t에 불과하지만, 나로호는 140t이 넘는다. 현무-1은 대기권 밖으로 나가보지도 못하는 미사일이므로 현무-1에 사용한 로켓으로는 나로호를 띄울 수 없다.
전술미사일에 사용된 것과는 다른, 우주발사체에 쓸 로켓엔진을 만들어보자는 노력은 1989년 한국항공우주연구소(항우연)가 한국기계연구소 부설기관으로 떨어져 나오면서 본격화했다. 항우연은 한국기계연구소 부설 기관으로 시작된 항공우주연구소를 뿌리로 삼지만, 일부 인사들은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설 천문우주과학연구소도 뿌리로 본다. 기계연의 항공우주연구소와 전자통신연의 천문우주과학연구소가 합병해 항우연이 만들어졌다 고 보는 것이다.
1990년 항우연은 현무에 사용된 것과 다른 고체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이 로켓은 영어로는 KSR(Korea Sounding Rocket)-1, 우리말로는 ‘과학로켓-1호’로 명명됐다. 우주발사체를 만들려면 고체로켓도 필요하기 때문에 기술이 축적돼 있는 고체로켓 분야부터 도전해보기로 한 것. 1993년 6월 4일 항우연은 KSR-1 1호기를 시험발사해 고도 39km, 지상 기준 비행거리 77km를 기록했다. 그해 9월 1일에는 2호를 발사해 고도 49km, 지상 기준 비행거리 101km를 달성했다.
전문가들은 KSR-1을 미사일로 개조하면 200kg 탄두를 달고 최고 150km까지 비행할 것으로 추정했다. 이는 현무(현무-1)보다 떨어지는 성능이다. 그러나 현무는 2단으로 구성돼 있고, KSR-1은 1단이어서 둘을 바로 비교할 수는 없다. KSR-1의 무게는 1.25t으로 5t에 육박하는 현무보다 훨씬 가볍다. KSR-1은 현무 개발 과정에 습득한 기술로 만든 초보적인 우주발사체용 로켓으로 보아야 한다.
KSR-1 발사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항공우주연구소는 2단형 KSR-2 개발에 도전했다. 1997년 7월 9일 서해 안흥시험장에서 KSR-2의 최초 발사 시험이 있었다. KSR-2는 단 분리에 성공해 2단이 성공적으로 점화됐으나, 그 직후 본부와의 통신이 끊어졌다. 통신이 두절된 KSR-2는 비행정보를 알리지 못한 채 날아가 127.7km 떨어져 있는 예상 착수(着水)처에 떨어졌다.
북한에 밀렸던 로켓 실력
1998년 6월 11일 항우연은 KSR-2 제2차 발사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통신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137.2km 고도까지 올라갔다가 지상 기준 123.9km거리를 비행한 뒤 서해에 떨어졌다.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성공은 50여 일 후 북한이 거둔 거대한 성공에 파묻히고 만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3단형 발사체인 대포동-1호(북한 이름은 ‘백두산’)를 동해로 발사해 남한 국민을 긴장시켰다.
대포동-1호는 마지막인 3단이 점화되지 않아 북한이 기대한 것보다는 짧은 1600여 km를 날아 바다에 떨어졌다. 이 때문에 대포동-1호에 탑재했다는 광명성-1호 위성은 자기 고도에 올라가지 못하고 추락했다. 제대로 점화됐으면 대포동-1호는 광명성-1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고 3단은 지상 기준으로 최대 2200km를 비행하는 기록을 세웠을 것이다. 대포동-1호 발사로, 과거 미국이 소련에 뒤졌던 것처럼 한국도 우주 개발과 탄도미사일 분야에서 북한에 크게 뒤져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졌다.
북한이 2000km 이상 날아가는 액체로켓을 기술을 갖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한국은 액체로켓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KSR-3 개발에 나선 것이다. 항우연은 KSR-3를 1단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것을 토대로 대포동-1호와 비슷한 한국형 우주발사체 KSLV-1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러자 현무를 개발하면서 미국과 맺은 한미미사일각서가 문제가 됐다.
이 각서는 한국은 사거리 180km 이내의 탄도미사일만 개발한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한다.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려면 우주 개발 선진국인 미국으로부터 부품과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데, 미국은 이 각서를 근거로 발사체 개발에 필요한 부품과 기술의 수출을 거부할 수가 있다. 미국이 반대하면 서방 진영에 속한 다른 선진국들도 회피할 것이니, KSR-3와 KSLV-1의 개발은 어려워진다.
미국을 한미미사일각서를 개정해도 좋다는 쪽으로 돌려놓기 위해 한국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 가입을 추진했다. MTCR은 탄두중량 500kg, 사거리 300km가 넘는 탄도미사일의 기술과 부품을 MTCR 회원국이 아닌 나라에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 MTCR 회원국에 한해서만 탄두중량 500kg과 사거리 300km까지의 미사일 기술 수출을 허가한다. 그러나 우주발사체 기술은 거리 제한 없이 회원국으로부터 도입할 수 있게 해놓았다.
미국과 미묘한 신경전
한국은 MTCR 가입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국의 MTCR 가입 여부는 미국이 결정권을 쥐고 있었다. 2001년 미국은 한국의 MTCR 가입에 동의했다. 동시에 별도로 한국과 ‘한국은 탄두중량 500kg, 사거리 300km의 탄도미사일은 개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 때문에 한국은 MTCR 회원국이면서도 자력으로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이 넘는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MTCR은 탄두중량이 500kg 이하의 순항미사일이라면 사거리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한국은 이 점을 활용해 사거리 300km, 탄두중량 500kg의 ‘현무-2’ 탄도미사일과 함께 탄두중량은 500kg 이하이지만 사거리는 500km(현무-3A), 1000km(현무-3B), 1500km(현무-3C)인 ‘현무-3’ 순항미사일 시리즈를 개발했다.
그때도 북한은 한국을 앞서갔다. 한국이 현무-2를 완성하기 전 북한은 현무-2보다 사거리가 긴 ‘노동’을 시작으로 ‘대포동-1호’, ‘대포동-2호’를 개발했다. 현무-2를 개발했어도 한국은 계속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 아래 놓여 있게 된 것이다. 이 위협을 없애려면 유사시 후방 깊숙한 곳에 있는 북한의 미사일 기지 등 전략거점을 잡아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는 사거리 300km가 넘는 탄도미사일이 있어야 하는데, 한미미사일협정은 한국이 자력으로 사거리 300km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지 못하게 금지한다.
한국에서는 한미미사일협정을 개정해, 한국이 사거리를 1000km나 1500km로 늘인 탄도미사일을 자력으로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터져 나왔다. 이러한 여론을 토대로 정부는 미국과 미사일협정 개정 논의에 들어갔다. 한국의 탄도미사일 사거리를 늘여야 한다는 주장은, 중국이 황해와 동중국해, 남중국해 등을 내수(內水)로 하는 ‘도련(島鍊)’ 정책을 추진한 후 미국에서도 지지를 얻게 되었다.
친미국가이면서도 중국에 가까이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미국 턱 밑에 붙어 있는 공산국가 ‘쿠바’에 비교할 수 있다. 소련은 R-7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갖고 있는데, 미국은 중거리탄도미사일만 보유했던 1961년, 미국은 미사일 전력 차이를 메우려 다각도로 시도했다. 사거리가 짧아 미국에서 발사해서는 소련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주피터 IRBM을 소련의 발아래인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한 것.
소련은 그에 맞서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미국을 공격할 수 있는 ICBM을 배치하려고 했다. 소련의 대응에 깜짝 놀란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소련의 ICBM을 실은 배가 쿠바로 오면 전 함대를 동원해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1962년). 그로 인해 세계는 ‘핵전쟁을 일으키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미사일의 정치학
이 절체절명의 위기는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포기함으로써 해소됐다. 미국도 양보했다.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한 IRBM을 철수한 것. 쿠바사태로 명명된 이 사건은 미국에 대한 쿠바의 지정학적 가치가 어떤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한국이 ‘중국의 쿠바’인 셈이다. 한국은 반도 국가이니 ‘플로리다 반도에 자리 잡은 쿠바’라고 하겠다.
소련 붕괴 후 G-2 국가가 된 중국은 A2/AD(Anti Access/Area Denial) 전략을 펼치고 있다. 해상방어선인 도련(島鍊·섬 사슬) 안쪽으로 미국 함정이 들어오면 공격한다는 것이 골자다. 중국은 유사시 도련 안쪽으로 들어온 미국 함정을 공격하겠다며 대함탄도미사일인 ASBM(Anti-Ship Ballistic Missile)을 만들었다. 배는 작은 표적이기에 사격 명중률이 높은 순항미사일로는 맞힐 수 있어도, 속도가 빠른 탄도미사일로는 맞히기 어렵다. 그러나 적지(敵地) 상공에서 터지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만든다면 궤멸시킬 수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중국이 만든 것이 대함탄도미사일이다.
중국이 이렇게 나오자 미국에서는 ‘그렇다면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억제하기 위해 장거리 탄도미사일 개발을 원하는 한국의 요구를 들어주자. 한국이 개발한 사거리 1500km의 탄도미사일은 유사시 중국을 견제할 수도 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소련은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했지만, 한국은 스스로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려 하니 미국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초점을 한국의 액체로켓 개발로 옮겨보자. MTCR 가입 이듬해인 2002년 11월 28일 항우연은 1단 액체로켓인 KSR-3를 발사해 고도 42.7km, 지상 기준 비행거리 79.5km를 기록하는 데 성공했다. KSR-3의 추력은 13t이었다. MTCR 가입으로 한국은, 우주발사체용 로켓 기술을 MTCR 회원국으로부터 이전받을 수 있게 되었다.
100kg의 위성(과학기술위성-2호)을 실어 발사하려고 하는 나로호의 무게가 140t이다. 따라서 나로호 발사 추력은150t 이상이어야 한다. 100kg짜리 위성을 올리는 데 150t 추력이 필요하다면 KSR-3는 의미 있는 발사체라 할 수 없다. KSR-3는 대기권 안인 42.7km까지 올라갔으니 만족할 만한 액체로켓이 될 수 없었다. 그러한 한국은 KSLV-1을 개발하기로 했다. 13t에서 150t 이상으로 추력을 높이는 퀀텀 점프를 해보기로 한 것.
러시아 빼고는 협력국가 없어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마음씨 좋은’ 엉클 샘이 아니었다. MTCR 회원국 가운데 액체로켓 기술을 가진 나라는 7개 국가 정도였다. 기술을 이전받을 때는 가격도 중요한 검토요인이 되는데, 이 조건까지 만족시키는 나라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러시아만 조건을 충족시켰다. 당시 러시아는 석유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우주 분야만큼은 여전히 침체 상태라 갖고 있는 기술을 팔려는 의지가 있었다.
우주 개발 의지가 강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적극적으로 러시아를 노크했다. 그리하여 2004년 9월 21일 러시아의 크렘린궁에서 한국의 오명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은 페르미노프 러시아연방우주청장과 노무현 대통령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러우주기술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국회의 비준 동의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항우연은 러시아 최대의 우주 개발 업체인 흐루니체프 사와 계약을 맺어 우주기술을 도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제동이 걸렸다. 러시아 의회가 기술 보호를 이유로 브레이크를 걸고 나온 것. 이 시기 미국은 러시아에 ‘왜 한국에 로켓기술을 전해주려고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는데 이것도 브레이크를 거는 데 일조했다. 그로 인해 처음부터 다시 관계자를 설득하는 노력을 펼쳐 ‘한국은 러시아가 제공한 우주기술을 제3국에 유출하지 않고 철저히 보호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한러우주기술보호협정’을 국회 비준을 받는 조건으로 만들게 되었다. 2006년 10월 한국의 과기부총리와 러시아 연방우주청장은 서울에서 이 협정에 서명했다. 한국 국회는 바로 비준 동의를 했고 러시아 의회는 조금 늦게 비준 동의해 2007년 7월 이 협정이 발효되었다.
2004년 협정보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많이 추가됐지만 한국은 우주 개발에 도전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항우연은 즉각 흐루니체프와 계약을 맺고 나로호 개발에 들어갔다. 흐루니체프 사는 액체로켓인 나로호 1단을 개발하고, 항우연은 고체로켓인 2단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런데 2001년 확정하고 2002년 시잔된 나로우주센터의 공사가 늦어져 나로호 1차 발사는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8월 25일 이뤄지게 되었다. 후일담이지만 이명박 정부의 실세들은 나로호 발사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가 정권 홍보 차원에서 러시아 우주선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에 다녀오는 우주인(이소연 박사)을 만들고, 많은 돈을 들여 발사체를 쏘는 ‘우주쇼’를 한다고 보았던 것.
이런 까닭에 나로호 후속 사업 등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KSLV-2에 들어가는 추력 75t의 액체로켓 개발 사업이 ‘타당성 검토’ 등을 이유로 계속 연기된 것이다. 이들의 인식은, 나로호 1차 발사에 쏠린 국민 관심이 대단한 것을 확인한 후 비로소 전환됐다. 이 시기 항우연은 미국으로부터도 의심을 받았다. 미국은 한국이 개발하는 나로호에 미국이 제공한 기술이 사용되는 것을 염려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한국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현무-2 탄도미사일을 만들었다. 현무-2에는 미국산 부품이 들어가는데, 미국은 ‘미국이 원하면 이 부품을 사용한 미사일을 만드는 곳을 항상 사찰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은 미국이 허가하지 않은 사업에 이 부품을 사용할 수 없다’는 조건을 달고 수출했다. 미국은 현무-2에 사용된 고체로켓 부품이 나로호 2단에 사용됐는지 살핀다는 명목으로 수시로 국과연을 사찰했다. 국과연에서는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과연이 비명을 지르면 항우연은 국과연을 위해 미국 부품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을 반복해야 했다.
우주 개발이나 첨단 무기 개발 등 국가 중요사업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미국은 결코 엉클 샘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미국은 타국과 맺은 협정이나 조약을 철저히 검증한다. 대상이 러시아나 소련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쿠바사태로 냉전이 치열하던 1963년 소련과 대기권과 우주, 바닷속에서는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고 오직 지하에서만 한다는 ‘부분적 핵실험 금지조약(일명 모스크바 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조약 이행 여부를 살피기 위해 주기적으로 WC-135 기상관측기를 소련 근처로 띄워 소련의 핵실험을 감시했다.
미국은 과연 ‘엉클 샘’인가
핵무기를 겨누고 있는 적국에 대해 이 정도로 감시하니 동맹국이나 우방국에 대한 감시가 어떨지는 불문가지다. “미국이 세계 1위인 것은 이러한 감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단순한 대국이 아니라 초거대국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의 힘을 아는 사람들은 “국가 중요사업을 하다 보면 미국의 사찰이 너무 심해 정서적으로 반미주의자가 된다”는 뼈 있는 농담을 한다. 미국은 MTCR로 살펴보고, 한미미사일협정으로 살펴보고, 국과연을 사찰하면서 한국을 감시하는 것이다.
MTCR과 관련해 가장 운이 좋은 나라는 일본이다. MTCR이 없던 시절에는 자유롭게 우주발사체 기술이 수출됐다. 그 시절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도입해 ‘뮤’와 ‘람다’란 이름의 고체로켓과 ‘N’이란 이름의 액체로켓을 만들었다. 원자력 분야에서도 일본은 미일원자력협정을 개정해 재처리공장을 짓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은 ‘문이 닫힌 뒤 뛰어든’ 후발국인지라 평화적인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도, 우주발사체를 위한 로켓 개발도 제한을 받았다.
러시아와 협력해 나로호를 발사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절 항우연은 해상도 1m의 사진을 찍는 아리랑-2호를 중국의 장정(長征) 발사체에 실어 쏘아 올리기로 했다가 미국으로부터 크게 ‘한방’맞았다. 미국이 갑자기 ‘중국은 MTCR 회원국이 아니다. 미국산 부품을 쓴 제품은 미국이 허가해준 나라의 발사체로만 발사해야 한다. 중국은 미국이 허가한 나라가 아니다’며 문제를 제기한 것. 깜짝 놀란 항우연은 MTCR 회원국인 러시아 발사체에 실어 아리랑-2호를 쏘아 올리기로 하고 러시아와 계약을 맺었다.
과거 한국은 선진기술을 가진 외국 기업을 ‘선생’으로 정해놓고, 우리 연구진을 ‘도제’로 보내, 신제품을 공동 개발하는 방법으로 기술을 익혔다. 외국 기업이 만들어놓은 제품을 성능과 안전성이 검증됐다는 이유로 배우고자 하면, 선생은 완성된 도면을 갖다 쓰라고 할 것이기 때문에, 도제는 ‘설계를 왜 이렇게 했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신제품을 개발하면 선생은 ‘이 제품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 설계하는 방법까지 보여준다. 도제는 설계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선생-도제 시스템을 통해 한국형 원자로인 OPR-1000과 한국산 고등훈련기인 T-50을 개발했다. 2004년 한국이 러시아와 비준이 필요 없는 ‘우주개발협력협정’을 맺은 것은 러시아의 흐루니체프 사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앙가라’라는 이름의 초대형 발사체를 개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흐루니체프를 상대로 170t 추력의 또 다른 로켓(나로호 1단)을 ‘선생-도제’ 방식으로 공동 개발하자고 해야, 한국은 흐루니체프가 앙가라에 적용하기 위해 개발한 기술을 배울 수 있다. 흐루니체프로서는 2개 로켓을 개발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는 만큼 이 제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흐루니체프는 앙가라 로켓을 RD-191, 나로호용 1단 로켓을 RD-151로 명명했다.
흐루니체프 사장 전격 교체
로켓 설계는 단계를 나누어 진행한다. 첫 단계를 설계 제작해서 실험해본 후 문제가 없으면 다음 단계를 설계한다. 이 설계도로 제작해서 실험해본 후 문제가 없으면 다시 다음 단계로 들어가는 식이다. RD-191 로켓(앙가라)과 RD-151(나로호 1단)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로켓이다. 따라서 RD-191용으로 만든 부품을 RD-151에 적용할 때는 설계와 실험을 다시 해봐야 한다.
그런데 러시아가 2005년 12월 갑자기 흐루니체프사 사장을 경질했다. 흐루니체프는 국영기업이기에 러시아 정부가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사장을 교체할 수 있다. 러시아 측은 사장 경질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흐루니체프 사장이 한국과 지나치게 밀착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러한 사단을 겪은 후 러시아가 국회 비준이 필요한 ‘우주기술보호협정’을 맺자고 주장하면서 나로호 사업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나로호에 실을 과학기술위성-2호는 한국이 제작하는 것이라 그대로 진행됐다. 이 위성은 예정대로 제작돼, 나로호 완성을 기다리게 되었다.
우주기술보호협정이 발효된 후 흐루니체프사와의 협력이 재개되었다. 나로우주센터 공사가 끝난 2009년 나로호 1단을 갖고 한국에 온 흐루니체프 측은 사장 경질 사건 때문인지 그들이 머무는 시설과 나로호 1단이 있는 시설에는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등 상당한 보안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로호가 2009년과 2010년 발사됐으나 아쉽게도 모두 실패했다.
항우연과 흐루니체프는 심각한 대립 상태에 빠졌다. 먼저 손을 들고 나온 것은 흐루니체프였다. 나로호 1단이 성공하지 못하면 앙가라의 안전성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흐루니체프는 앙가라 개발에 사운(社運)을 건 처지였기에 나로호 3차 발사에 동의했다. 세계 최고라는 자사의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항우연의 3차 발사 요구를 들어준 것이다. 마지막이 될 나로호 3차 발사는 2012년 10월로 일정이 잡혀 있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2번 발사에 실패함으로써 항우연은 우주발사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흐루니체프와 사고 원인을 찾기 위해 연구하면서, 만들어서 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수많은 노하우를 얻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2020년쯤 1.5t의 진짜 위성을 띄우는 KSLV-2를 자력으로 만들어보자는 투지에 불을 붙였다. 나로호를 만들 때 항우연은 추력 30t짜리 액체로켓을 개발해 지상실험을 했다. 흐루니체프가 1단을 만들지 못할 것에 대비해 예비로 만들어본 것이다.
이것이 KSLV-2를 위한 75t 추력의 액체로켓 개발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러시아는 더 이상의 기술은 전해주지 않는다 했으니 KSLV-2는 한국이 단독으로 만들어야 한다. 추력 30t 엔진은 75t 엔진을 만드는데 토대가 된다. 항우연은 75t 추력을 가진 액체로켓 4개를 묶어 300t(75t×4=300t)의 추력을 가진 1단을 구성하고, 1개로 2단을 만들고, 3단에는 7t의 추력을 가진 액체로켓을 올려 KSLV-2를 만들기로 했다. 75t 추력의 액체로켓 개발은 나로호 3차 발사가 완료된 후 본격화하기로 했다.
실패가 가져다준 기회
흐루니체프와 손잡고 나로호 사업을 하기 전인 2001년 한국은 나로호 발사장을 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발사장 선정에는 발사체 제작만큼 정교한 준비와 검토가 필요했다. 발사체의 성능과 특징은 어디를 발사장으로 정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발사체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외국의 발사장을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해본다.
‘지구에 있는 모든 물체는 지구 인력의 받는다’는 만유인력(萬有引力)을 발견한 이는 뉴튼이다. 지구가 생긴 이래 지구에서 생겨난 물체는 지구 인력을 이겨낸 적이 없었다. 거대한 엔진을 가진 비행기도, 폰 브라운이 만든 V-2 로켓도 지구 인력을 이겨내며 우주로 날아가지 못했다. 달(月)도 지구 인력권 안에 있으므로, 달에 착륙하는 것도 지구 인력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인류는 화성과 금성을 탐험하는 우주선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지구 인력을 극복하게 된다.
강력한 지구 인력을 극복하려면 발사체는 수직에 가까운 각도로 발사되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대기(공기)저항이 거의 없는 대기권 밖인 지상 100km 이상으로 올라갔다면, 다른 기동을 할 수 있다. 대기권 밖은 공기 마찰이 없는 곳이니 지구 인력을 이겨내는 원심력만 있으면 떠 있을 수 있다. 원심력은 초속 7.8km(마하 23 정도)로 비행할 때 발휘되니 발사체는 위성을 매우 빠른 속도로 밀어주어야 한다.
수직으로 올라가던 발사체는 지구 주위를 회전할 수 있도록 궤적을 꺾어 수평에 가깝게 비행해야 한다. 마하 20이 넘는 속도로 수직으로 올라가던 발사체가 수평비행을 하기 위해 자세를 수정하면 엄청난 압력을 받는다. 이를 높은 G(Gravity)를 받는다고 한다. 수직에 가깝게 올라가던 발사체가 자세를 트는 것을 ‘개다리 기동(Dog Leg Movement)’이라고 한다. 개 뒷다리가 무릎 부근에서 약간 꺾어져 있는데, 발사체가 그런 궤적을 그리며 방향을 틀기 때문이다. 개다리 기동을 할 때 발생하는 높은 G를 견뎌내지 못하면 발사체는 부러지면서 폭발한다.
발사장과 地政學
개다리 기동을 하기 전 발사체는 단(段) 분리를 한다. 1단의 연료를 소진하면 1단을 떼어내 무게를 크게 줄이고, 2단을 점화해 날아가는 것이다. 분리된 단들은 지구로 떨어진다. 공기 저항 때문에 파편화해 떨어질 수도 있고 그대로 떨어질 수도 있다. 덩치가 커서 파편화하지 못한 1단이 인구집중지역에 떨어진다면 큰 피해가 발생한다. 따라서 1단은 일반적으로 바다에 떨어지게 한다. 바다에는 각 나라가 주권을 주장하는 영해가 있으므로, 발사체를 쏜 나라는 어떻게 해서든 분리된 단을 공해(公海)에 떨어뜨려야 한다.
이때 지나가는 배가 있으면 피해를 볼 수 있으므로, 발사가 임박하면 발사국은 국제해사기구(IMO) 등에 ‘단이 떨어질 공해를 항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해줄 것’을 요청한다. 지나가던 비행기도 떨어지는 단과 충돌할 수 있으므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그 공역을 비행금지구역으로 선포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는 우주발사체를 쏘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다. 반면 대륙간탄도미사일은 이러한 절차 없이 바로 발사된다.
앞 장에서 설명했듯 저궤도위성은 태양전지판을 가동하기 좋도록 지구의 남북극을 돌게 발사해야 한다. 대부분의 나라는 북반구에 있기 때문에 발사국은 정남(正南)으로 넓은 공해가 있는 곳을 발사장으로 정한다. 이러한 조건을 가장 잘 갖춘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열도 남쪽으로는 넓고넓은 공해가 있어 전 열도를 발사장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런데 정지위성은 적도에 올려놓아야 하므로 적도에서 쏘는 것이 가장 좋다. 이러한 조건까지 고려하면 남미에 있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기아나의 쿠르 발사장이 최고다. 쿠르 발사장은 적도 바로 북쪽에 있고 ‘북대서양’이라는 아주 넓은 공해를 마주하고 있다.
쿠르 발사장과 관련해 프랑스는 행운을 잡은 나라다. 쿠르 발사장이 있는 기아나는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19세기 초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지배하자, 이 지역으로 건너가 살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기아나도 프랑스가 지배해야 한다며 일어났다. 이에 네덜란드인들은 ‘본국은 프랑스에 항복했어도 이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며 맞서 내전이 벌어졌다. 힘이 달린 네덜란드인들은 나폴레옹에 맞서고 있던 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은 즉각 군대를 보내 프랑스인들과 싸웠다. 이러한 와중에 나폴레옹이 붙잡혀 사망하자 기아나에서의 전쟁도 끝났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차지한 땅을 네덜란드인에게 내주지 않으려 했다. 영국도 그대로 눌러앉아 기아나 지역은 3등분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네덜란드 식민지 지역이 ‘수리남공화국’, 영국이 차지했던 지역은 ‘가이아나공화국’으로 독립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자국 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기아나 얻은 프랑스의 행운
기아나가 최적의 우주발사장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자, 아리안 발사체를 개발해오던 프랑스는 즉각 쿠르 지역에 발사장을 지었다. 지정학적, 자연적 조건이 너무 좋은 탓에 쿠르 발사장에서 올라간 아리안 발사체는 아주 높은 발사 성공률을 보였다. 그러자 기아나에 대한 투자를 늘려 그곳을 프랑스만큼 잘사는 곳으로 만들었다. 수리남과 가이아나공화국은 최빈국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프랑스령 기아나는 프랑스만큼 살게 된 것이다. 이로써 기아나 사람들은 독립을 포기해 기아나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해외영토가 됐다.
북반구에 있는 나라는 이러한 조건을 갖출 수 없으니 정남으로 공해가 펼쳐진 곳을 발사장으로 삼는다. 그런데 정남(正南)으로 공해가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남으로 공해가 없는데 우주기술이 발전한 대표적인 나라가 이스라엘과 러시아다. 이스라엘은 남쪽에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이 있어 그곳에 단을 떨어뜨리지 않고서는 정남으로 발사체를 쏠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바다는 서쪽으로 터져 있다(지중해).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지브롤터 해협을 향해 쏜다.
지브롤터 해협은 좁은 바다지만 국제해협이기에 공해(公海)다. 배가 많이 다니는 공해지만 이곳이 아니고는 위성을 쏘아 올릴 공간이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 위성은 남북극을 돌지 않고 적도와 남북극 사이를 비스듬히 돌아간다. 이스라엘 공군기지이기도 한 팔마힘 발사장은 사선으로 우주발사체를 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스라엘 위성은 일정하게 태양전지판을 가동할 수 없으니, 극궤도위성에 탑재한 것보다 더 큰 태양전지판을 탑재한다.
이스라엘의 기막힌 발사 통로
이러한 위성도 나름의 장점이 있다. 이 위성은 사선으로 발사됐기에 발사국인 이스라엘을 상공을 많이 돌아간다. 극궤도위성은 하루 2, 3번만 발사국 상공을 지나가는데, 이 위성은 각도를 조금 틀어주면 14.5바퀴를 모두 이스라엘을 지켜보며 돌 수 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주변국들을 더 정밀하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비슷한 길을 걸으려다 포기한 나라가 북한이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은 함경남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동해로 대포동-1호(백두산)를 발사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한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은 북한에 대한 탐지능력을 감추기 위해 대포동-1호 궤적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때 왜 북한은 동해로 대포동-1호를 쏘았을까. 그 이유는 북한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
무수단리에서 정남으로 발사체를 쏘면, 일본 영공을 넘어가면서 단을 떨어뜨려야 하니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동쪽이라면 해볼 만했다. 일본의 홋카이도와 러시아의 사할린 섬 사이에는 ‘소야(宗谷)해협’이 있다. 이 해협은 폭이 좁지만 국제해협이어서 공해로 분류된다. 무수단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공해는 소야해협이 유일하기에 북한은 이 해협을 향해 대포동-1호를 쏘았다.
대포동-1호 3단이 제대로 점화해 광명성-1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면 광명성-1호는 이스라엘 위성과는 반대 방향으로 지구를 사선으로 돌아가는 위성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은 무수단리 발사장에서 같은 방향으로 대포동-2호를 두 번 더 발사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때마다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소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일본은 북한이 대포동 발사를 위장해 탄도미사일을 쏘지 않을까 염려했다. 이 때문에 “북한이 미사일 공격을 할 조짐을 보이면 선제사격을 하겠다”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북한은 정책을 바꾸었다. 평북 철산군 동창리는 북한이 정남으로 발사체를 쏠 경우 공해에 단을 떨어뜨릴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다. 북한은 동창리에 새로운 발사장을 지어 2012년 4월 은하-3호를 쐈으나 실패했다. 동창리 발사장에서 북한이 은하-3호를 쏠 경우 1단은 한국의 서해안, 2단은 필리핀 부근에 떨어지는데, 자칫 잘못하면 한국과 필리핀의 영해에 추락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한국과 필리핀은 강력히 반발했다. 한국의 국방부 장관은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군 유도탄사령부를 방문해 “북한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한국의 미사일을 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북한이 동창리 발사장 만든 이유
이러한 사실은 북한이 마땅한 발사장이 없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한은 미사일 개발 의지가 매우 강한데 지정학적 조건이 나빠 문제인 것이다. 이 때문에 발사장 사정이 좋은 이란, 파키스탄 등과 미사일 협조를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남북통일이 되면 무수단리와 동창리 발사장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문가들은 두 발사장을 나로우주센터보다 지정학적 조건이 열악하므로 폐쇄하고 다른 용도로 써야 한다고 대답한다.
우주 개발 선진국인 러시아와 중국도 발사장 문제로 고민이 많다. 러시아는 남쪽으로 중국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접해 있어 마음대로 발사체를 쏘지 못한다. 굳이 쏜다면 1단이 러시아 영토에 떨어지게 해야 한다. 1단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에 떨어뜨려야 하므로 그러한 조건을 갖춘 발사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북쪽으로 북극해를 마주하고 있다. 이 때문에 러시아는 북쪽으로 발사체를 쏠 수 있도록 몇 개의 발사장을 만들었다. 북쪽으로 발사체를 쏘는 발사장은 과거 미국을 향한 ICBM이 배치됐던 곳이다. 북한의 지정학적 조건이 발사장 건설에 불리했듯이 러시아도 지정학적 조건이 발사장 짓기에 미국보다 불리했던 것이다.
중국도 러시아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중국은 남중국해라는 넓은 바다에 접해 있지만 자국 발사체에서 분리된 1단이 바다에 떨어지면 미국이 회수해 갈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자국 영토에 1단이 떨어지도록 발사장을 북쪽에 만들었다. 1단은 황무지에 떨어져야 한다는 조건도만족시켜야 하므로 중국의 발사장도 제한된다.
이러한 중국이 경제가 발전하자 변모했다. 중국의 최남단인 하이난(海南)도에 새로운 발사장을 지은 것이다. 하이난도에서 발사된 발사체는 남중국해 남쪽에 1단을 떨어뜨리는데 이곳에는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국명 난사군도(南沙群島, 영어 이름은 스프래틀리 제도)가 있다. 중국이 도련 전략에 따라 난사군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남중국해 전부를 내수화하는 것은, 하이난도 발사장을 의식한 측면도 있다.
정지위성 발사까지 고려할 경우 발사장은 적도 부근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은 미국도 갖추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시추선을 이용해 적도에서 정지위성을 올리는 시론치(Sea Launch) 사업을 펼쳤다. 이렇듯 발사장을 짓는 데는 나라마다 다른 지정학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다. 다른 나라로 둘러싸인 영토가 작은 내륙국은 우주 개발 기술이 발달해도 주변국을 설득하지 못하면 발사체를 만들어도 자국에서 발사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처지에서 최고의 발사장은 어디일까. 정남으로 가장 넓은 공해가 터져 있는 곳은 제주도 남쪽에 있는 마라도다. 마라도는 발사장으로 쓰기에 적당한 0.3㎢의 면적을 갖고 있다. 주변이 다 바다이므로 배의 출입을 금지해놓으면, 발사체가 추락해도 사람은 피해를 보지 않는다. 마라도에서 쏜 발사체는 오키나와 부근의 공해를 통해 남극으로 날아가므로 1단 분리에도 어려움이 적다.
발사체를 통제하는 발사통제동은 안전을 위해 발사장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설치한다.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장과 발사통제동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2km다. 마라도에서 제주도까지의 직선거리는 9km 정도인데, 이는 발사장과 발사통제동 사이의 거리로도 적당하다. 제주시 대정읍에는 송악산이라는 ‘오름’이 있고 인근엔 대일항쟁기 때 일본 육군이 중국과 일본을 잇는 항공기의 중간 기착지로 사용한 ‘알뜨르비행장’이 있다(알뜨르는 ‘아래 뜰’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이다). 광복 후 알뜨르비행장은 국가 소유(국방부)가 됐으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지금은 주민들이 이곳에서 자유롭게 경작하고 있다.
날아간 꿈, 제주우주센터
1990년대 들어 군은 제주 남방 방어가 중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제주에 해군 기동전단을 위한 기지를 짓기로 했다. 그리고 공군력도 전개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알뜨르를 비행장으로 다시 바꾸는 것을 검토했다. 제주공항은 한국에서 가장 붐비는 비행장 중 하나다. 부산의 김해공항을 제치고 인천, 김포에 이어 외국인이 세 번째로 많이 찾은 국제공항이기도 하다. 제주공항이 붐비자 제주도는 또 하나의 공항 건설을 추진했다. 이 공항은 서귀포 쪽에 있는 것이 나을 듯했다. 제주도의 이러한 필요성과 공군의 필요성 등이 합쳐져 알뜨르를 새 비행장으로 만드는 안을 검토했다.
우주센터를 운영하려면 인근에 비행장이 있는 것이 좋다. 미국의 반덴버그와 케이프커내버럴 우주센터도 공군기지를 끼고 있다. 이 때문에 알뜨르에 민항기와 군용기가 함께 뜨고 내리는 공항을 만들고, 그곳에 가까운 송악산에 발사통제동을 지어 우주센터로 삼는다는 계획이 만들어졌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송악산은 민간 회사에 의해 관광단지로 만든다는 계획이 수립돼 있었다. 주민들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의 섬인 제주도에 공군기지와 우주센터가 들어서는 것에 반대한다고 외쳤다.
10번째 우주클럽 가입국
그로 인해 제주 우주센터 건설과 새 공항을 겸한 공군기지 건설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안을 찾아나선 항우연은 적극적으로 우주센터 유치를 희망한 전남 고흥군의 외나로도를 선택했다(2001년). 제주도를 포기한 상태에서 외나로도는 최적의 장소였기에 공사에 들어가 2009년 센터를 완공했다. 지금은 추가 예산을 투입해 나로호보다 훨씬 큰 KSLV-2도 쏠 수 있도록 개조하는 사업을 펼치려 한다. 나로센터에 투자된 돈은 2조 원이 넘기 때문에 제주도가 제주우주센터를 지어달라고 해도 항우연은 제주센터를 짓지 않는다.
나로우주센터 완공 후 한국은 세계에서 9번째로 자력으로 인공위성을 올리는 나라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아홉수’는 험난했다.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의 나로호 발사가 실패한 것. 나로호 2차 발사(6월 10일) 실패 닷새 뒤인 2010년 6월 15일 이란의 사피르 발사체가 라사드-1호 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아홉수는 한국과 아홉 번째 위성 발사국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이란이 먼저 차지한 것이다. 사피르는 북한의 은하-3호를 토대로 설계됐다. 이란과 북한은 미사일-발사체-잠수함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란군이 보유한 샤하브-3 미사일은 북한의 노동미사일을 변형한 것이다. 2010년 3월 CHT-02D 어뢰를 쏴 한국의 천안함을 격침시킨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은 이란에 수출돼, ‘가디르급 잠수정’이 되었다. 이란이 사피르 발사에 성공한 후 올해 4월 북한은 은하-3호를 쏘았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이란이 성공한 사례가 있는 만큼 북한은 조만간 은하-3호의 추가발사를 준비할 것이다.
남북한의 위성 띄우기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2012년 가을 한국은 나로호 3차 발사를 시도한다. 한국은 열 번째로 우주클럽에 들어가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적도 밑 인도네시아에 한국 발사장 짓자”
인터뷰 | 김승조 한국항공우주연구원장
한국이 일본의 전철을 밟을 이유가 없다. 한국은 안전성과 경제성이 높은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을 개발하고 이를 다양하게 조합해 여러 발사체를 만들어 머지않아 열릴 우주관광+우주산업 시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KARI)의 김승조 원장(62)은 서울대 항공공학과 졸업 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미국 텍사스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항공우주 분야의 전문가다. 귀국 후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11년 6월 항우연 제8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김 원장은 어려운 항공우주 분야를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특기가 있다. 이 때문에 오래 들어도 지루하지 않고 이해하기도 쉽다.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 그는 과학자 특유의 ‘연구를 위한 연구’에 집착하지 않는다. 기초적인 연구도 중요하지만, 한국은 후발국인 만큼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내는 실용연구를 중시하자는 것. 그와 나눈 대화 가운데 한국의 우주 개발과 관련해 귀 기울여야 할 부분을 발췌해 정리한다.
▼ 왜 우리는 일본만큼 우주 개발을 하지 못하고 있는가?
“일본은 미군정이 끝난(1952년) 직후 도쿄대 이토카와 교수 주도로 우주 개발을 시작했으니 60년의 역사가 쌓여 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인지 미국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미국 NASA(항공우주국)의 특징이 무엇인가. 냉전기 소련과의 경쟁에 이기기 위해 우주 개발에 많은 돈을 투자한 곳 아닌가. 그 결과 다양한 발사체를 만들었지만 경제성 있는 발사체는 만들지 못했다. 상업성을 따지지 않고 연구한 탓이다.
일본은 초거대국인 미국과는 사정이 다른 데도 상업성을 따지지 않고 연구하는 NASA 모델을 따랐다. 대표적 사례가 기술적으로는 최첨단이지만 상업성면에서는 문제가 있는 H-2의 개발이다. H-2는 제작과 발사비용이 너무 비싸 대신 H-2A를 만들었지만, H-2A도 경제성이 적다. 위성을 올리는 것이 우주 개발의 1차 목표라면, 가장 좋은 기술이 아니라 가장 싸게 위성을 올리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 국민 세금을 아끼고 외국 위성을 발사해줌으로써 돈도 벌 수 있을 것 아닌가. 일본은 잘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본은 잘하고 있는 게 아니다”
▼ 몇 해 전 나고야에 있는 미쓰비시 중공업의 H-2 제조공장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때 생산 책임자가 “세계에서 수소로켓을 만드는 나라는 미국과 프랑스 일본뿐”이라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정지위성을 올리려면 힘 좋은 수소로켓 발사체가 유리한 것 아닌가.
“H-2 발사체의 전체 무게는 500t에 달하는데, 1단인 수소로켓의 추력이 100t 정도다. 이 정도 힘으로는 H-2 발사체를 띄울 수 없기에 주위에 여러 개의 고체로켓 부스터를 붙였다. 일본은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가 만들어지기 전 미국 기술을 도입했기에 추력 제한을 받지 않고 고체로켓을 만들 수 있었다. H-2 1단에 붙이는 고체로켓 부스터의 추력이 280t 정도다. H-2는 이러한 부스터를 두 개 이상 붙였기에 우주로 올라가는 것이다. H-2 1단에서 큰 힘을 내는 것은 수소로켓이 아니라 고체로켓인 부스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수소로켓과 고체로켓 부스터는 고가(高價)이기에 H-2는 값비싼 발사체가 되고 말았다.
기술적인 한계로 당분간 더 큰 추력을 내는 수소로켓 개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술적으로 쉽고 가격도 저렴한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을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이를 미국의 스페이스X사가 입증했다. 스페이스X사는 추력 65t의 케로신+액체산소의 멀린(merlin)엔진을 개발하고, 이 엔진 9개를 묶어 1단, 1개로 2단을 구성한 ‘팰콘(falcon)-9’ 발사체로 우주왕복선을 대신해 국제우주정거장까지 물품을 보냈다. 우주왕복선도 수소로켓을 사용하는데, 스페이스 X사는 3분의 1 가격으로 우주왕복선이 하던 일을 수행했다.
스페이스X사는 팰콘-9 1단 좌우에, 9개의 멀린 엔진을 묶은 팰콘-9 1단을 부스터처럼 붙이고, 그 위에 멀린엔진 1개로 2단을 만든 ‘팰콘-헤비(heavy)‘를 제작해 정지위성을 쏘아 올리겠다고 했다. 사업은 이렇게 해야 한다. 로켓은 추력이 작을수록 만들기 쉽다. 대량 생산하면 제작비도 낮아지니 한 종류를 개발해 다양하게 활용하는 게 경제적이다. 항우연은 스페이스X사를 벤치마킹하려고 한다. 수소로켓을 만들어놓고 값비싼 제작·발사 비용 때문에 마음고생하는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길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똘똘한 75t 로켓으로 모든 것 해결”
▼ 그런 말을 들으면 추력 75t 엔진 개발을 전제로 하는 KSLV-2 사업은 상당히 장밋빛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늦어지고 있다. 잘되고 있다면 늦춰질 이유가 없을 텐데….
“이 엔진 개발을 놓고 말이 많았다. 애초에는 러시아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공동 개발하기로 했는데, 러시아가 자국 기술보호를 이유로 난색을 표해 난관에 부딪혔다. 그에 따라 ‘30t 추력의 엔진을 만들어 지상실험까지 해봤으니, 이 엔진도 자력으로 만들자’는 결정을 내리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그때 이 엔진의 추력을 ‘60t으로 하자’‘70t으로 하자’로 논쟁하다, 어렵게 75t으로 개발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동시에 ‘항우연이 과연 이 엔진을 개발해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2008년 기획재정부는 타당성 조사에 들어가 ‘사업의 필요성은 인정되나 기술 확보 수단이 부족하다’며 예산 배정을 거부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또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다, ‘먼저 나로호 발사를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75t 엔진을 개발하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2009년, 2010년 나로호 1, 2차 발사가 실패해 수행하지 못하다 2011년 간신히 개발이 재개됐다.
힘든 과정을 거쳐온 만큼 우리는 75t 엔진을 가장 경제적이고 안정적으로 개발하고, 이것으로 KSLV-2를 제작해 가장 저렴한 가격에 위성을 올리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똘똘한 로켓’을 개발해 대한민국을 우주산업을 수행할 중추국가로 만들 것이다.”
▼ 나로호 1차 발사도 계속 늦어졌다. 왜 그랬는가.
“나로호 사업을 하기 전 한국은 러시아와 우주기술보호협정을 맺고 양국 국회 비준을 받기로 했다. 우리 국회 비준에는 어려움이 없었지만 러시아는 기술 보호를 이유로 반대 여론이 형성돼 비준이 늦어졌다. 그리고 항우연은 흐루니체프 사와 계약을 맺었는데, 나로우주센터 공사 등에 차질이 생겨 또다시 사업이 늦어졌다. 우주 개발은 처음 도전하는 분야라 애초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 실패한 나로호 1, 2차 발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3차 발사에 올리는 위성은 어떤 것인가.
“실패했기 때문에 제작에서 조립, 발사, 관제 그리고 사고 조사까지의 전 과정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실패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기에 75t 로켓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알게 됐다. 1차 발사에서 바로 성공했다면 그러한 성과는 없었을 것이다. 3차 발사에 탑재하는 위성은 1, 2차 발사 때 실었던 과학기술위성-2호를 토대로 설계한 나로과학위성인데 상당한 과학장비를 탑재한다.”
“우주 개발은 정권과 무관해야”
▼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으로 ICBM을 만들 수 있는가?
“못 만든다.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은 주로 고체로켓을 쓴다. 액체를 쓴다면 상온(常溫)에서 저장할 수 있는 액체를 써야 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만든 V-2 로켓은 액체산소를 썼고 북한의 ‘노동’과 ‘대포동’은 상온저장성 액체를 사용했다. 산소는 극저온인 섭씨 영하 183도 이하에서 액체가 되는데, 이러한 극저온 상태는 오래 유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발사하기 직전에 로켓에 주입한다. 무기는 바로 쏠 수 있어야 하는데, 케로신+액체산소 로켓은 그렇게 할 수 없다. ICBM에는 값은 매우 비싸지만 상온에 둘 수 있는 고체연료 로켓을 탑재한다.”
▼ 추력 75t 로켓과 KSLV-2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 것인가. 일본과 중국은 그들이 만든 위성과 우주선에 자국의 역사와 신화 속 인물 이름을 붙인다. 우리는 KSLV-1을 우주센터가 들어선 외나로도 이름을 따서 나로호로 명명했는데, 이는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는 접에서 아쉽다. 동북공정을 통한 중국의 역사 왜곡이 자심한데 그에 맞서는 명명을 하면 어떤가. 75t 엔진은 ‘단군’, KSLV-2는 ‘해모수’ 식으로….
“좋은 생각이다. 우주 개발을 통해 국민을 하나로 묶는 국가 대전략이 있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는 하늘을 숭배한 민족이니 하늘과 이어준 역사 속 인물 이름을 붙이는 것을 검토해보겠다.”
▼ 일본은 H-2를 개발한 뒤 상업적으로 운영할 회사로 미쓰비시를 지정했다. 추력 75t의 로켓 개발에 성공하면 이 로켓과 발사체 제작을 담당할 업체는 누가 되는가.
“대한항공이나 한국항공우주산업,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한화 같은 회사들이 원하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쟁 입찰을 통해 그중 한 회사를 결정하지 않겠나 싶다.”
“인도네시아와 공동보조”
▼ 나로우주센터는 발사각이 좁지 않은가. 나로호 발사만 의식하고 지었기에 덩치 큰 KSLV-2 발사에는 부적합하다. KSLV-2보다 훨씬 큰 정지위성 발사체 발사까지 고려한다면 제주도에 새 발사장을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도로 건설을 포함해 많은 돈을 들여 나로우주센터를 지었는데, 왜 제주도에 중복 투자를 하는가. 물론 미국의 시론치나 프랑스의 쿠르 발사장 예에서 보듯이, 정지위성 발사체는 적도 근처에서 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다면 우리도 적도 발사장을 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인도네시아는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등 여러 섬이 적도에 걸쳐 있다. 이러한 인도네시아가 우리의 항공우주 개발에 관심이 아주 많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이 생산하는 T-50도 도입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한 인도네시아에 발사장을 지어 우리와 인도네시아가 같이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 인도네시아는 스페인과 함께 CN-235 수송기를 개발해 생산하는 등 나름대로 항공산업을 장려해온 나라다. 그러나 우주 개발은 한 적이 없는데 우리의 파트너가 될 수 있겠는가.
“항공우주산업을 하려면 전후방산업이 발전해 있어야 하는데, 인도네시아는 이 부분이 취약하다. CN-235를 생산하면서 그것이 문제란 것을 알았다. 반면 한국은 전후방산업이 탄탄하고 항공우주산업을 하겠다는 의지가 있으니, 파트너로서는 우리만한 나라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T-50을 구입했고, 한국형 전투기 KFX 사업도 같이 하겠다고 한 것이다.
인도네시아 관계자들이 우주 개발에 도전하기 위해 자국에 발사장을 지어 우리와 공동 운영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비공식적으로 해온 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발사장을 지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프랑스의 쿠르 발사장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 한국에서 생산한 발사체는 배나 항공기에 실어가면 되니까.”
우주 개발서도 대도약을
▼ 위성 사업은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아리랑-5호는 국산이 아니라는 지적이 있는데
“아리랑-5호에 탑재할 레이더영상(SAR)위성은 이탈리아의 알레니아에서 사왔지만 다음부터는 이 장비를 우리가 제작한다. 적외선위성(아리랑-3A호)도 최초의 것은 외국에서 제작하지만 다음부터는 우리가 만든다. 위성 제작에서 중요한 것은 탑재체(장비)를 실을 본체(bus) 제작이다. 본체에 카메라를 실으면 관측위성이 되고, 통신장비를 실으면 통신위성이 된다. 여러 탑재체를 잘 실을 수 있는 본체를 만들어놓으면 다양한 주문에 대응할 수 있다.
위성이 필요한 기관은 많다. 군은 물론이고 방재 업무를 하는 곳, 해양관측을 하는 곳, 기상관측을 하는 곳 등등…. 이러한 수요에 맞춰 다양한 탑재체를 실을 수 있는 본체를 만들어놓고 위성을 싸게 발사해주면 외국 수요도 끌어올 수 있다. 올 연말까지 항우연은 100kg에서 3.5t에 달하는 60여 종의 위성을 실을 수 있는 본체 10여 종을 소개하는 카탈로그를 제작해 국내외 예상 수요처에 보내려고 한다. 이미 중동과 중남미 동남아 국가에서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 후발국인 한국이 우주 개발을 할 경쟁력 있다고 보는가.
“엔지니어들은 자기 방식대로 하려는 고집이 있다. 우주 개발의 최선진국은 미국인데, 미국의 최고 엔지니어들은 오래된 방식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놀랄 만큼 발전한 현대 기술을 외면하고 젊을 때 배운 익숙한 방법만 쓰려고 하는 것인데, 이는 사람의 속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발국이 후발국에 추월당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우주 개발은 정밀기계, 첨단 소재, 정보통신(IT), 전자기술 같은 전후방산업이 발전해 있을 때 본 궤도에 오른다. 요즘 동물을 보기 위해 아프리카로 여행하는 사람이 많은데, 같은 이유로 우주여행을 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호텔을 만들고 왕복선 같은 우주비행기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산업 개척은 창의력 있는 사람들이 잘하는데, 한국은 이 분야에 강점이 있다. 전후방산업도 발전해 있으니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우리는 우주 개발에서도 퀀텀 점프를 해야한다”.
항우연을 국가개발연구원에 집어넣겠다고?
시론
최근 일본은 내각부에 ‘우주전략실(Space Strategy Office)’을 만들었다고 한다. 각 부처에 흩어져 진행되는 우주 정책을 일원화하려는 것이다. 우주전략실은 우주 이용의 기획과 입안, 부처 간의 정책 조정, 안전보장 정책 수립 등의 일을 한다. 우주전략실은 우주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면서 우주의 군사적 이용 범위를 확대하는 중국에 대한 경계심도 높일 것이다.
우주전략실 신설을 통해 일본은 정찰(일본 이름은 정보수집)위성과 조기경보위성을 개발하고, 미국과 연계해 중국의 위성요격기에 대응하려고 하는 것 같다. 지난해 말부터 일본은 무기 수출 3원칙을 완화하고 우주 개발 관련법에서 ‘평화 목적만을 위해 한다’는 문구를 삭제하는 등 변화를 보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우주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 나가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일본은 지난 5월, 우리나라 아리랑-3호 위성의 위탁발사를 성공시키는 등 H-2A 발사체의 20회 연속 발사를 성공시켰다. 독자적인 위성항법 시스템인 JRANS도 구축하려고 한다.
중국은 어떠한가?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9호의 우주 도킹 성공은 1990년대부터 중국이 준비해온 ‘프로젝트 921’이 이룬 중간 결과물일 뿐이다. 중국도 위성항법 시스템 COMPASS를 구축하고 우주정거장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중국의 라이벌로 떠오르는 인도는 러시아를 벤치마킹해 우주 개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발사체와 위성, 영상가공기술 분야에서 상용화 수준에 올라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9년 인도는 PSLV(Polar Satellite Launch Vehicle) 발사체로 한국의 ‘우리별-3호’위성을 쏘아 올려준 적이 있다.
6+1 國의 공통점
미국, 러시아, 유럽, 일본, 중국, 인도 6개국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쉽게 설명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유럽을 한 국가로 가정한다). G8 국가인가 싶겠지만 중국과 인도는 G8 국가가 아니다. 하지만 국가 전체의 경제력이 막강한 대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6개국은 모두 1억이 넘는 인구를 갖고 있다. 여기에 캐나다를 추가해보자. 캐나다의 인구는 3400만 명 정도이니 7개국은 1억이 넘는 인구에 큰 국가경제를 가진 대국으로 규정하기 어려워진다.
6+1개국의 공통점은 우주 개발에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캐나다만 발사체를 갖고 있지 않을 뿐 이들은 발사체와 위성체(위성본체+임무 장비), 위성 정보 이용 기술 등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캐나다를 제외한 6개국은 위성항법 시스템을 운영하거나 운영하려고 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미국은 GPS, 러시아는 GLONASS를 운영하고 있고, 유럽은 Galileo, 중국은 COMPASS(중국명 北斗), 인도는 IRNSS, 일본은 JRANS라는 이름의 위성항법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한다. 왜 이들은 우주 개발에 열을 올리는 것일까.
우주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설명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강조점이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주 개발은 국가의 미래와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설명은 피할 수 없다. 우주 개발은 지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주 개발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지만 반대급부가 별로 없다는 인식 또한 존재한다.
일본도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런데도 일본 문부과학성의 자문기구인 과학기술·학술심의회는 2006년 인력과 자원을 집중 투자해야 할 ‘10대 중점 기술 개발’을 선정하며 그중 3개를 우주 개발 기술로 꼽았다. 이는 일본이 우주 개발을 SF 영화나 수십 년 후에나 이뤄질 먼 일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에서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하 항우연)이 우주 개발을 전담한다. 항우연은 독립법인이지만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산하 기초기술연구회 소속이어서 정책과 연구개발 방향은 교과부의 지휘 감독을 받아 결정한다. 몇 달 전 한 언론이 2000년 이후 과학기술부와 교과부에 있었던 우주 개발 담당 부서(우주 개발과, 우주기술과 등) 과장의 재임 기간을 분석한 기사는 충격적이었다.
단명하는 우주개발 부서 공무원
그 기간에 재임한 12명의 과장 중에서 1년 이내 자리를 옮긴 이는 7명이었고, 1~2년 재임한 이는 4명이었으며, 단 1명만 2년을 넘겼다(2년 1개월). 직속상관인 국장들의 재임기간도 대부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항우연을 지휘 감독해야 하는 공무원이 이렇게 자주 바뀌니 우주 개발 정책이 제대로 펼쳐지겠는가? 정부기구는 고위 공무원을 순환 보직시켜야 하니, 교과부는 대한민국의 우주 개발 정책을 끈기 있게 추진할 조직이 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몇몇 산업은 기반이 거의 없는 상태로 출발했음에도 세계 최고에 올라섰다. ‘3대 기술 분야’로 불리는 조선, IT(반도체, 휴대전화), 자동차 분야가 그것이다. 이 산업들은 초기에는 국가 주도로 기술 개발이 시작됐지만, 중반부터는 산업체(기업)가 이어받아 정부의 직·간접적인 도움으로 외국 기업과 치열하게 경쟁해, 20~30년 만에 세계 정상급에 올라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중기에는 과학기술부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같은 정부 조직이 끌어주고 한국기계연구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산기술연구원 등의 정부 출연 연구소가 밀어줌으로써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춰 세계 최고 자리에 올라선 것이다.
이러한 성공 방정식이 우주 개발을 하는 데는 오히려 장애가 될 수 있다. 과기부, 정통부, 산자부가 이끌어주는 것은 우주 개발을 성공으로 이끄는 방정식이 되기 어렵다. 왜 그럴까. 필자를 포함한 항공우주 분야 종사자들은 타 분야 전문가들과 회의를 할 때마다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주 개발은 답보를 거듭하는지도 모르겠다.
우주 개발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 결과물은 대량생산품이 아니어서 일반인은 사용할 수가 없다. 다른 산업과 달리 우주 개발은 주문생산을 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3대 기술 분야에 적용한 과거의 방정식으로는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좀 더 체계적인 방법으로 설명해보자. 3대 기술 분야와는 달리 우주 개발은 전 기초과학이 동원된다. 지금 당장은 쓸모가 없어도 도전해서 기술을 확보하지 않으면 결코 강국으로 올라설 수 없다. 우주 개발은 군사 분야와 연결된 것이 많아서 진입장벽이 높다. 국가의 예산과 인력, 조직이 투입돼 긴 시간 씨름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가 없다.
우주 개발은 체계 종합적이고 투자회임 기간이 긴 자본집약적 산업이다. 정부의 지원이 필수인 거대 과학이다. 6+1개국은 30~50년 이상 정부가 꾸준히 우주 개발에 투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부 지원은 예산 지원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일관된 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권이 교체되고 정책 담당자가 바뀌어도 세워놓은 계획에 따라 그대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권교체나 정책 담당자 교체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컨트롤 타워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기구 우주청 신설 필요
6+1개국은 모두 독립된 우주 개발 조직을 갖고 있다. 그 조직이 국가의 우주 개발 정책을 세우고, 필요한 국가 자원을 통합적으로 관리했으며 예산을 확보하고 조정했다.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의 선택이다. 일본은 문부과학성 산하에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를 만들었는데, 이와 별도로 문부과학성보다 상위인 총리실 내각부에 우주전략실을 만들었다. 우주 개발 강국인 일본이 내각부에 우주전략실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한다.
대통령선거의 계절이 다가왔다. 5년마다 정치의 계절이 찾아오면 항공우주 종사자들은 각 대선후보의 우주 개발 공약을 살피며 고민한다. 어떤 이가 대통령이 되는지에 따라 우주 개발 정책이 마구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니 장기 계획을 세우지 못한다. 최근 정부는 항우연을 비롯한 19개 정부 출연연구소를 통합해 ‘국가개발연구원(가칭)’을 만들려 하고 있다. 항우연을 국가개발연구원의 한 기관으로 묶어 놓으면 각각의 연구소들은 예산 쟁탈전을 벌여 사업기간이 긴 항우연은 지속적으로 우주 개발을 하지 못하게 된다.
1958년 서울 출생. 서울대 항공우주공학과 석사, 미국 텍사스주립대 박사, UCLA 교환교수 역임. 저서 ‘항공기 개념설계(공저)’, 논문 ‘항공기 탑재용 GNSS 수신기 고장 검출 알고리즘 및 운용범위 연구’ 외 다수
우주 개발을 제대로 하려면 항우연을 국가개발연구원에 집어넣을 것이 아니라 예산과 인사권을 갖고 연구와 사업을 하는 독립기관 ‘우주청’으로 만들어줘야 한다. 거대 산업은 공학자가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정치인과 국민이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항공우주국(NASA)이라는 정부 조직을 만들어 세계 최고의 우주 개발국이 됐다는 것을 안다면 한국이 가야 할 방향은 명확해진다.
우주 점화 성공시킨 한국 최초의 고체로켓
나로호 2단 개발 비사
백곰과 현무 미사일 개발을 통해 한국은 일찌감치 고체로켓 기술을 습득했다. 이를 바탕으로 나로호 2단에 필요한 고체로켓을 한화그룹을 중심으로 한 국내 기업들이 자력으로 개발해냈다. 2단을 개발할 때 한 차례 폭발사고가 있었지만 한국은 훌륭히 작동하는 고체로켓을 만들어냈다. 조용히 추진돼온 국내 고체로켓 개발사를 살펴본다. |
로켓엔진은 뉴턴의 제3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로 추력을 발생시킨다. 내부에 저장한 추진제를 연소시켜 발생된 고온 고압의 가스를 노즐로 분사함으로써 얻는 반작용력으로 추력을 얻는 것이다.
로켓엔진은 화학로켓 추진과 비(非)화학로켓 추진으로 나누어진다. 화학로켓 추진에는 고체추진제를 사용하는 고체로켓과 액체추진제를 사용하는 액체로켓, 그리고 고체연료에 액체산화제를 사용하는 하이브리드로켓이 있다. 현재는 화학로켓 추진만 사용되고 있으니, ‘로켓=화학로켓 추진’으로 봐도 무방하다.
액체로켓은 연료를 산소 같은 산화제에 섞어 태움으로써 힘을 낸다. 산소는 섭씨 영하 118도에서 50기압 이상을 가하면 액체가 된다(고압을 가하지 않으면 영하 183도 이하에서 액체가 된다). 로켓은 대기가 없는 우주를 비행하기 때문에 액체산소를 탱크에 넣어 사용한다. 액체산소 외에도 질산과 사산화이질소를 사용하기도 한다. 연료로는 등유(kerosine)와 액체수소, 하이드라진 계열이 주로 사용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이 액체산소와 액체수소의 결합이다. 액체수소가 액체산소와 결합하면 강력한 폭발력을 낸다. 액체수소를 연료로 쓰는 액체로켓은 추진기관 무게 대비 추진력인 ‘비추력(比推力·specific impulse)’이 가장 높다. 액체수소를 연료로 쓰는 액체로켓이 가장 강력한 추력을 내는 것이다.
고체로켓은 일종의 화약인 고체추진제를 점화시켜 힘을 낸다. 고체추진제는 산소와 같은 산화제에 연료를 혼합해 고체화한 것이다. 액체로켓은 액체산소와 액체로 된 연료(보통은 등유)를 넣을 탱크 그리고 이들을 섞어 점화시킬 연소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고체로켓은 고체연료를 바로 점화시키기에 탱크가 없어 구조가 단순하다. 하지만 연소되는 추진제의 양을 조절할 수 없고, 점화하는 순간부터 바로 큰 힘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상단부 로켓으로 많이 쓰여
고체로켓은 액체로켓에 비해 많은 추진제를 넣을 수 있다. 따라서 상단부 로켓으로 많이 사용한다. 액체로켓은 많은 연료를 소모해 큰 힘을 내므로 주로 1단으로 사용한다. 1단에 쓰인 액체로켓은 대개 엔진으로 불린다. 고체로켓을 많이 쓰는 2단이나 3단 로켓은 위성을 궤도에 올리기 위해 툭 차듯이 마지막으로 밀어주기에 ‘킥 모터(kick motor)’라고 한다.
백곰과 현무 그리고 다연장로켓인 구룡을 개발해낸 한국은 과학로켓 개발을 시작으로 우주 개발에 나섰다. 1990년대 초반부터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은 과학관측로켓인 KSR-1(1단, 고체), KSR-2(2단, 고체), KSR-3(1단, 액체)를 만들어 시험발사했는데 여기에는 한화를 비롯한 많은 방산업체가 참여했다. 국내 기업들은 소규모이긴 하지만 KSR에 필요한 고체로켓을 완벽하게 제작한 것이다. KSR 시리즈 개발을 통해 한국은 단 분리 기술을 익히고, KSR-3에서는 기초적인 액체로켓 기술을 확보했다. KSR에 이어 한국형 액체로켓을 만들어 인공위성을 띄운다는 계획을 세웠다. 1단은 러시아가 만든 액체로켓을, 2단은 우리가 만든 고체로켓을 채택한 나로호를 만들어 발사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한화를 비롯한 국내 기업은 나로호 2단 개발에 전력을 기울였다.
2단은 1단 액체로켓이 점화된 395초 뒤 점화돼 100kg급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진입시켜야 한다. 위성의 방향을 틀어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개다리 기동을 해야 한다. 킥모터는 그때 걸리는 높은 중력을 견뎌내야 한다. 2003년 12월부터 2005년 6월 사이 한화는 실물보다 축소한 킥 모터를 만들어 시험에 들어가 주요 데이터를 확보하고 제작공정 등을 사전 검토했다.
2005년 9월부터 2008년 9월 사이엔 실물형 킥 모터를 개발해 각종 시험을 했다. 대기가 희박한 고고도의 환경을 모사한 조건을 만들어주고 킥모터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점검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게를 가볍게 하면서도 원하는 정도의 추력을 오랫동안 발생시키는 것이었다.
킥 모터는 화약의 일종인 고체추진제를 사용하기에 단시간에 높은 추진력을 발휘하기는 쉽다. 문제는 오랫동안 추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 고체로켓에서는 3000도가 넘는 고열이 나오므로 오래 가동하면 노즐이 견디지 못한다. 구조물도 마찬가지다.
킥 모터 실험 중 폭발사고
이를 막는다고 내열재를 추가하면 로켓이 무거워진다. 고체로켓이 타는 시간만큼만 견딜 수 있도록 최소한의 내열재를 첨가하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반복해야 했다. 킥 모터 개발에서 어려웠던 것은 시험이었다. 1.5t 이상의 고체추진제를 탑재한 킥 모터를 진공환경에서 연소시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기술이 아니어서, 성공 여부를 실험해보아야 했다. 우리는 이러한 실험 장비를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러시아의 기술협력을 받아 ‘고공환경 시험장치’를 개발해 지상연소시험과 고공환경(우주환경) 모사(模寫) 지상연소시험 등을 12회 실시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 킥 모터 앞부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다가 폭발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연소시험장은 폭탄을 맞은 듯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기에 망연자실할 겨를도 없이 바로 원인을 분석하고 설계를 변경해 새로 제작한 다음, 다시 시험에 들어갔다. 이때 제작한 킥 모터는 지상에서 11번 연소시험을 했지만 문제를 보이지 않았다. 킥 모터의 안전성과 개발을 자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개다리 기동을 견디는 구조를 찾는 것이었다. 우주에서는 대기가 없기 때문에 비행 방향을 바꾸기 위해 날개를 이용할 수 없다. 방향 전환은 배기되는 화염의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추력방향 제어 노즐을 사용해야 한다. 3000도가 넘는 고온 고압의 연소가스에 60초 이상 노출돼 있던 노즐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기술은 선진국만 보유한 핵심기술인데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는 이 기술의 국가 간 이전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화를 비롯한 국내 기업은 많은 노력으로 이 노즐을 개발해냈다. 이 노즐의 성능이 나로호 1차에서 증명됐다. 나로호는 마지막 단계에서 한쪽 페어링이 떨어져 나가지 않아 무게중심이 기울어졌다. 자세를 바로 하기 위해서는 노즐을 틀어야 했다. 2단의 노즐은 방향을 튼 상태에서 설계치 이상으로 엔진을 가동했는데도 끝까지 견뎌냈다. 나로호 1차 발사는 우리 고체로켓을 우주에서 성공적으로 점화시킨 최초의 사례다.
1차 발사가 끝난 후 분석해보니 킥 모터의 성능은 예측했던 것과 0.6% 오차밖에 보이지 않았다. 2% 편차의 오차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보다 작은 오차를 보였다. 그러나 2차 발사 때는 킥 모터가 작동하기 전에 나로호가 폭발해 킥 모터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
우리는 우주 개발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이뤄야 한다. 오는 가을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하면 우리는 본격적인 한국형 발사체 KSLV-2 개발에 도전한다. 이를 위해서는 추력 75t의 액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해야 한다. 이미 고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해냈으니 액체로켓 개발도 성공시킬 것으로 확신한다.
숱한 좌절 고통 겪었지만 ‘우주의 문’ 우리가 연다
나로호 총조립 대한항공의 꿈
대한항공은 러시아가 제작한 나로호 1단과 한화가 제작한 2단을 연결해 나로호를 조립하는 일을 담당한다. 나로호 이후의 한국형 로켓 개발과 KSLV-2 개발 사업이 시작되면 여기에도 참여해 한국형 발사체를 직접 제작하고자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우주산업체가 되겠다는 것이 대한항공의 꿈이다. |
대한항공이 총조립한 나로호를 발사대에 기립시키고 있다.
나로호 1, 2차 발사가 절반의 성공으 로 끝났지만, 나로우주센터 연구원들의 생활은 바쁘기만 하다. 나로호 발사가 두 번 좌절된 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연구와 시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1차 실패의 원인인 페어링 분리 메커니즘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와 각종 테스트가 있었다. 2차 실패의 원인으로 지목된 1, 2단 분리 기술을 개선하기 위한 점검과 시험도 있었다.
나로호 1, 2차 발사 때 발사체 상단에 태극기와 대한민국이라고 쓴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아래에 파란 글씨로 ‘KOREAN AIR’라고 쓰여 있다. 이는 대한항공 항공우주사업본부가 나로호의 총조립을 수행하고 있다는 표시다.
우주 개발 뛰어든 KOREAN AIR
대한항공은 항공 운송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항공우주산업사(史)도 함께 써왔다. 1976년 500MD 헬리콥터 생산으로 시작된 대한항공의 항공우주사업은 최초의 국내 생산 전투기인 F-5 제공호, 중형 기동헬기인 UH-60 조립 생산으로 이어졌다. 보잉과 에어버스, 엠브레이어 등 해외 유수 항공기 제작사의 개발 파트너 역할도 수행해왔다. 1991년에는 5인승 민수항공기 ‘창공-91’을 개발하고 형식승인 1호를 받음으로써 국내 최초로 항공기 개발 기록을 남겼다.
대한항공은 1992년 무궁화위성 개발을 시작으로 우주 개발에 도전했다. 이어 다목적실용위성(아리랑)과 통신해양기상위성(천리안) 개발에 참여하고 나로호 총조립과 한국형 발사체 시스템 개발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왔다. 2000년대 들어 대한항공은 인공위성과 우주발사체 체계를 종합하는 전문업체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주 개발의 양대 영역인 인공위성과 우주발사체 개발사업에 모두 도전하려는 것이다.
2002년 정부는 최초의 한국형 우주발사체인 KSLV-1(후에 나로호로 명명) 사업을 시작하면서 총조립 주관기업 선정 입찰을 했다. 대한항공이 KSR 개발에 참여했던 기업들을 제치고 선정되었다. 항공 3사가 통합한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출범함으로써 소외됐던 대한항공이 우주산업에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그때 정부와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세운 계획은 기체와 엔진은 러시아의 기술을 받아 3단으로 KSLV-1을 독자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2004년, 이 계획은 러시아와 공동으로 2단형 발사체를 개발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발사체의 핵심인 1단은 러시아에서 개발하고, 2단은 국내에서 고체로켓을 이용해 개발하기로 한 것. 이러한 변경이 대한항공에는 큰 충격이었다. 대한항공은 우주 개발을 신(新)성장동력으로 보고 독자 개발을 전제로 한 운영 계획을 세워놓았는데, 공동개발로 바뀌었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공동개발을 한다며 핵심인 1단을 러시아에서 제작하게 하면 국내 기업은 기술 축적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된다. 공동개발로 국내 사업 규모를 축소시켰으니 우주 개발이 신성장동력이 될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도 대두됐다. 고민 끝에 대한항공은 규모를 축소해 KSLV-1사업에 계속 참여하기로 했다. 이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KSLV-1 다음에 진행될 추력 75t의 로켓 개발에 대한 의욕이 있었다. 대한항공은 이 로켓 개발을 위한 전담 조직을 만들었다. KSLV-1 참여를 계기로 KSLV-2 사업도 따내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3차 발사 마지막 준비
그때부터 대한항공은 공동개발 파트너인 러시아 측과 적극 접촉해 ‘최대한 배운다’는 쪽으로 노력했다. 러시아가 기술을 제공하지 않기로 한 부분에 대해서는 유럽의 발사체 개발기관에 연구진을 보내 공부해오게 했다. 그리고 나로호 발사체 시스템 총조립을 준비했다. 발사체 시스템 총조립이란 부품(하드웨어)을 최종 조립하고 발사하는 단계까지의 흐름도를 작성해 그것대로 일이 이뤄지게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조립 도면을 만들고 각각의 전자장비를 연결해주는 회로를 만들어야 한다. 치공구도 미리 준비해놓아야 한다. 조립이 끝난 다음에는 설계한 대로 성능이 발휘되는지 알아보는 시험도 실시한다.
나로호 1차 발사가 있은 2009년 대한항공은 김해공항에 도착한 나로호 1단을 나로우주센터 조립동으로 옮겨 2단과 결합시켰다. 조립이 끝난 나로호는 발사장으로 옮겨져 발사대에 세워졌다. 2009년 8월 25일 기립된 발사체에 연료가 주입되었다. 비상대응 인원을 제외한 전 연구개발진이 안전지대로 철수한 후 기립장치가 제거된 나로호가 점화됐다. 불을 뿜으며 하늘로 치솟은 나로호는 성공적인으로 발사된 듯했다.
그러나 6분 후, 항우연 연구진의 바쁜 움직임이 주위를 긴장시켰다. 페어링의 이상 분리로 나로호가 싣고 간 과학기술위성-2호가 궤도 진입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2010년의 2차 발사도 실패하면서 대한항공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 얼마 후 나로호 3차 발사가 결정되고, 이미 결정돼 있던 KSLV-2 개발사업이 지연되었다. 대한항공은 또 한 번 조직을 바꾸는 어려움을 겪었다.
나로호 3차 발사를 앞둔 지금 대한항공은 개선사항을 검증하는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나로호 3차 발사가 성공하면 여세를 몰아 KSLV-2 개발도 주도할 예정이다. KSLV-2를 총조립하는 것은 물론이고 추력 75t의 로켓도 총조립해 명실상부한 발사체 제작업체가 될 꿈을 갖고 있다. 항우연을 통한 정부 주도의 우주 개발은 언젠가 민간으로 넘어온다. 그때 그것을 받아 우주산업을 일구겠다는 것이 대한항공의 꿈이다.
부활호에서 T-50까지 그리고 KFX를 향해
한국의 항공산업
앞으로의 30년은 이 꿈을 실현하는 기간이다. 항공·우주산업을 성공적으로 육성하려면 정권에 따라 바뀌지 않는 일관된 항공정책이 있어야 한다.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항공산업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1 한국이 최초로 독자 개발한 KT-1 기본훈련기 2 한국 최초의 초음속기인 T-50
조선시대에 ‘비차(飛車)’를 만들어 타고 날았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항공기에 대한 오랜 염원과 역사가 있다. 그러나 근대화에 실패해 세계의 변방이 되면서 항공은 단지 꿈으로 전락했다. 항공 불모지였던 우리나라가 다시 항공기를 향해 눈뜨게 된 계기는 식민지 경험과 전쟁 체험이었다. 우리나라의 항공에는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를 관통하는 파란만장한 현대사가 압축돼 있다.
조선인 최초의 조종사 안창남은 ‘금강호’를 몰고 식민지인 조국에 나타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전쟁의 사연을 담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우리나라 최초 설계의 ‘해취호’와 그 뒤를 이은 ‘부활호’‘통해호’.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자주국방의 표상으로 추진된 ‘제공호’와 산업화·민주화 시대를 관통해 항공기 수출 시대를 연 기본훈련기 KT-1과 고등훈련기 T-50의 생산 과정은 대한민국 현대사 그 자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이제 대한민국은 중견 항공 국가로 세계와 우주를 향해 비상하고자 한다. 외국 전투기에 의존해온 굴레를 벗고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개발해보자”는 의지와 비전은 밝은 면이다. 자주국방을 표방한 박정희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창설해 국산 항공기 개발의 초석을 놓았다. 노태우 대통령은 ‘2000년대 한국형 전투기를 만들겠다’며 선진 항공기술 도입을 전제로 한 한국형 전투기사업(KFP)을 펼쳤다. 그리고 지금 한국형 전투기를 개발하는 KFX사업을 펼치고자 한다.
항공산업의 빛과 그림자
KFX사업은 항공 분야의 산업과 기술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로 한국 항공업계가 반드시 달성해야 할 분명한 중간 목표다. KFX사업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한국은 KFX를 넘어 그 이상의 세계로 날아가야 한다. 항공력을 외국에 의존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그림자도 있다. 항공 선진국이 보유한 최첨단 기술과 막강한 인프라에 눌려 지레 겁을 집어먹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한들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패배주의와 비관주의가 큰 장벽이다. 소수의 백인 국가가 주도하는 항공 분야에 후발 주자인 우리가 막대한 투자를 한들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경되는 항공정책과 국산 항공기보다 외국 항공기의 직구매를 선호하는 군의 정서도 항공산업 발전을 어렵게 한다. 미래에 필요한 핵심기술 축적을 곤란하게 하는 형식주의와 관료주의, 그리고 전략적인 사고능력의 결핍 등 대한민국 항공이 날아야 할 창공엔 두꺼운 먹구름이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낙관주의와 비관주의는 항공산업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대립했다. 우리의 산업화는 기계산업으로 출발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전자, 통신, 소재 분야로 발전했다. 이것이 선진 항공산업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이자 다양한 국제협력을 이끌어내는 도약대다. 다른 나라들이 백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항공 선진화를 30년 만에 이룬 비법이다.
일반적으로 항공산업은 창 정비→라이선스 조립(면허생산) 및 부품 국산화→독자개발 및 국제공동개발 순으로 발전한다. 교과서적인 이러한 발전 경로를 걷게 된 것은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한 후의 일이다. 그전에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항공기 제작 경험을 쌓았다.
건국기, 부활호, 해취호…
전쟁 시인 1952년 우리나라에서 설계해 만든 최초의 항공기 부활(復活)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부활호는 85마력짜리 왕복엔진을 장착한 길이 6.6m, 폭 12.7m, 높이 2.07m의 경비행기급으로 총 3대가 제작됐다. 1954년 비행시험을 했다는 기록을 남긴 후 행방이 묘연해졌다가 2004년 경북 경산의 한 고교 지하창고에서 기체가 발견됐다. 이름대로 역사 속에 부활한 부활호는 현재 공군사관학교에 영구 보존된 문화재가 되었다.
해취호(海鷲號·물수리라는 뜻) 제작은 부활호보다 앞선 1951년 이루어졌다. 해취호는 미군이 쓰다가 추락해서 버린 AT-6 텍산 연습기를 주어다 부낭(浮囊·바다나 호수에 떠 있게 해주는 공기주머니)을 달아 해상에서 사용하도록 개조한 수상비행기다.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개조한 것이니, 들어간 것은 ‘현란한 손재주’다.
한국인이 최초로 제작한 항공기이기는 하지만 미군 항공기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것이기에 국산 항공기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같은 시기 우리는 미국의 T-6 연습기를 개조한 NK-1 통해호도 제작했다. 그러나 통해호는 취역 석 달 만에 바다에 추락했다. 해군 항공반은 새로운 수상항공기 제작에 도전해 1954년 6월 서해호를 세상에 내놨다. 미 공군의 L-5 연락기 엔진을 토대를 제작한 서해호는 평화선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을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25전쟁 전 우리가 최초로 보유한 군용기는 L-4 연락기였다. 1940년대 제작돼 1948년 9월 13일 공군의 전신인 육군항공대가 미군으로부터 10대를 인수한 프로펠러 비행기다. L-4는 여수·순천사건이나 지리산 공비 관련 작전에 투입됐다. L-19 연락기가 도입되면서 1954년 퇴역했다. L-4와 함께 운용했던 L-5 역시 무장이 없고 골조도 간단한 연락기였다. 이어 한국은 한결 나은 T-6 텍산 훈련기를 캐나다에서 10대가량 사왔다. 이러한 군용기는 정부를 세울 때 들어온 것이라 ‘건국기’로 통칭됐다.
6·25전쟁기 한국 공군은 미 공군으로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 활약한 F-51D 머스탱을 도입해 지상공격용으로 투입했다. 우리는 이 전투기를 흔히 ‘무스탕’으로 불렀다. 북한군의 중요 보급루트 중 하나인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을 성공시킨 것이 바로 머스탱이었다. 그러나 머스탱은 제트엔진을 달지 않았다. 당시 제트엔진은 첨단 전투기에만 탑재됐다. 제트엔진을 단 F-86 세이버는 미 공군만 운용해 미그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1 한국에서 최초로 설계한 수상비행기 해취호 2 수상비행기 통해호
6·25전쟁 후 제트전투기 보유
전쟁이 끝난 후 한국은 F-86 세이버를 도입해 제트전투기 보유국가 대열에 올라섰다. 1990년대까지 한국 공군에서는 소수의 F-86F가 사용됐으나 현재는 모두 퇴역해 F-51과 함께 전쟁기념관 등에 전시돼 있다. 이 시기 우리는 부활호와 해취호 통해호 서해호 등을 제작하며 하늘에 대한 꿈을 키웠으니 항공기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하겠다.
이어 항공산업 진입기로 들어섰다. 1955년 L-19 정찰기의 창 정비로 시작된 이 시기는 1970년대 초 C-130 수송기 등의 정비로 이어졌다. 창 정비는 격납고에서 항공기의 각종 시스템을 사전 점검하고, 때로는 완전분해해 주요 부위의 상태를 검사하는 것이다. 비파괴검사 등으로 발견한 결함을 수리 보강해 성능을 개선하는 전 과정을 말한다.
창 정비에는 고가의 장비와 숙련된 기술자가 필요하다. 따라서 차 정비에 익숙해지면 항공기의 구조와 비행 원리에 정통한 전문가를 다수 확보할 수 있다. 손재주가 뛰어난 우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둔 미군의 공격기와 수송기, 헬기까지 창 정비하게 되었다. 이어 성능개량도 하는 종합정비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항공기는 기둥 없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 여러 장비를 넣고 연결해 봉(縫)한 것이기 때문에 일반 치공구와 다른 별도의 치공구를 사용한다.
따라서 항공기의 창 정비를 거듭하면 작업공정을 어떻게 구성하고 각각의 공정에 필요한 치공구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에 대한 노하우가 쌓인다. 이러한 노하우는 항공기 제작의 전(前) 단계인 면허생산과 기술도입 생산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 시기 창 정비를 주도한 것은 대한항공이었다. 민항기 정비를 통해 능력을 쌓아온 대한항공은 전투기와 수송기 같은 군용기 정비에 도전했다. 대한항공의 군용기 정비술은 상당히 발전해서, 미 7함대의 항공기와 동남아에 전개해놓은 미 공군의 F-4 팬텀기, F-5E와 F-5F 기, UH-1 헬기, C-123과 C-130 수송기, 500MD 헬리콥터까지 창 정비했다. 물론 한국 공군의 전투기도 창 정비했다. 창 정비의 마지막 단계가 기체 표면 작업이다. 1970년대 말 대한항공은 기체 표면작업 기술을 확보해 완벽에 가까운 창 정비 능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창 정비로 내디딘 첫걸음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습격은 자주적 항공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운 경종(警鐘)이었다. 침투했다가 도주하는 북한 특수부대원을 추적하는 비정규전이 펼쳐짐에 따라 정부는 헬기 도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AH-1 코브라 공격헬기와 UH-1 기동헬기가 너무 비싸 싼 헬기를 찾기 시작했다.
정부는 미국 휴즈 사가 민수용으로 만든 소형 헬기를 군수용으로 개조한 500MD를 선택해 1976년 4월 조립생산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대한항공을 면허생산 업체로 선정했다. 500MD는 민수용 헬기에 로켓포와 기관총을 탑재한 것이었다. 계약 1년 만에 1호기를 출고한 대한항공은 꾸준히 생산해 1988년까지 308대의 500MD를 육군에 납품했다.
대한항공은 단순한 조립에 머물지 않았다. 단계적으로 부품 국산화를 추진해 금액의 42%에 달하는 부품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초기의 500MD는 무장이 간단했다. 그러나 후기로 오면서 대전차미사일인 ‘토우’ 4발을 탑재할 수 있는 ‘500MD 디펜더’도 158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500MD 디펜더를 제작하려면 새로운 투자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대한항공은 직접 투자도 했다. 500MD 면허생산은 자주국방과 산업화라는 시대정신에 부응한 모양을 제대로 갖춘 최초의 항공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1978년 항공공업의 육성·지원을 위한 항공공업진흥법이 제정되었다. 보조금 지급과 같은 유치 단계의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항공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힘입어 대한항공은 1980년 당시로서는 고성능 초음속기라 할 수 있는 미국 노스롭 사의 F-5F기를 면허생산하기로 했다.
대한항공이 면허생산한 제1호 F-5F기는 1982년 9월 9일 시험비행에 성공했다. 정부는 이 전투기를 ‘제공호’로 명명했다. 제공호 조립은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추진됐는데, 국방과학연구소가 추진한 미사일 개발과 더불어 한국이 독자적인 무기체계를 갖추는 신기원으로 평가됐다. 제공호 제작에 필요한 기술은 노스롭이 제공했지만, 대부분의 공정은 대항항공 기술진이 수행했다. 전투기의 핵심 구성품인 엔진 부분을 20% 국산화함으로써 항공산업의 새 시대를 열었다.
2004년 복원된 한국산 항공기 부활호
외국회사 로비에 자주국방 실종
항공기를 독자 개발하려면 기체 설계에 필요한 항공역학적 지식과 해석 능력, 설계 능력이 필요하다. 실제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부품 생산기술과 조립기술, 시험비행 능력이 요구된다. 그러나 당시는 이 능력을 갖추는 데 필수적인 천문학적인 비용을 감당할 경제력이 없었다. 면허생산이나 공동생산이 항공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제공호 생산은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로 한반도의 안보 불안이 가중되던 시기에 이뤄진 것이라 그 의미가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다.
면허생산은 외국에서 개발을 완료한 항공기의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거나 일부 부품만 국내에서 생산해 조립하는 것이라 독자적인 전투기 개발과는 거리가 있다. 제공호의 면허생산은 1986년 종료됐기에 어렵게 마련한 생산시설과 노하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대두되었다.
그 무렵 항공업계에 ‘우리가 직접 항공기를 개발해보자’는 자주국방 세력이 등장했다. 국방과학연구소 내부에서 ‘미국 전투기로부터 독립하자. 언젠가는 우리 전투기로 영공을 지켜야 한다’는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강력히 대두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공군용 전술통제기와 육군이 쓸 30인승 경수송기를 개발하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5공화국 정부는 한국의 독자적 무기체계 개발을 견제하는 미국을 의식한 듯, 검토단계에서 ‘성공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묵살했다. 미 방위산업체의 집요한 로비에 흔들린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노스롭 사가 F-5를 이을 전투기로 내놓은 F-20 도입을 검토했다. 그런데 1986년에 경기 성남공항에서 시험비행을 하던 이 전투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F-20 도입이 중단됐다.
5공 세력은 당시 미국이 새로 내놓은 F-15 도입을 추진하다 거절당했다. 전두환 정부는 미국 전투기를 도입해 전력을 강화하고 동맹을 강화하자는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제공호 생산으로 이미 항공산업 기반이 마련됐으니 자주적 방위력을 확보하기 위해 항공기를 개발하자는 대의가 확산됐다. 그리하여 1985년 전두환 대통령 지시로 공군과 각 분야의 항공전문가들이 모여 항공산업육성위원회를 결성했다. 범정부적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에서 ‘북한의 위협을 억제하기 위한 군 전력 증강의 핵심은 항공력이다. 미국이 유도무기 개발 제한의 굴레를 회피하기 위해서는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 능력과 기술을 갖춰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훈련기로 도약한 항공기 개발
이 시기 삼성항공과 대우중공업이 대한항공이 독점적으로 구축한 항공산업의 아성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기존 사업인 제공호 생산은 종료되고 후속사업은 묘연한 상황이라 국민의 피와 땀으로 조성한 대한항공의 항공기 생산시설은 활용되지 못했다. 각종 치공구가 방치되는 등 쌓아온 항공산업의 성과가 유실되는 위기상황에 놓였다. 이런 난맥을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항공기 개발사업이 요구되었다. 여기에 대기업이 자발적으로 뛰어듦으로써 항공산업은 새로운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항공의 미래를 개척할 사업의 우선 고려 대상은 훈련기 개발이었다. 1987년에 국방과학연구원 연구팀이 내놓은 훈련기 개발사업을 검토한 국방부는 국과연이 기본훈련기를 개발하고, 공군이 고등훈련기를 개발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1988년에 착수한 것이 기본훈련기를 개발하는 KTX-1 사업이다.
KTX-1사업은 터보프롭 엔진으로 기술 난도가 낮은 저속미 초중등 훈련기를 만들자는 것이다. 개발 업체로는 대우중공업이 선정되었다. 대우중공업은 사내에 ‘항공결사대’를 조직해 550마력의 엔진을 탑재한 KTX-1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KTX-1 시제기를 제작해 시험비행을 할 때 갑자기 조종석이 사출돼 시제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국내 기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해외 도입으로 훈련기를 확보하는 방안이 검토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KTX-1은 시험비행을 하면서 계속 출력을 높였다. 1991년 12월 12일 첫 비행에 성공한 KTX-1은 ‘여명(黎明)’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세상에 나올 때는 950마력 엔진으로 바꿔 달고, 이름도 ‘웅비(雄飛)’로 변경되었다. 영어 이름은 KT-1이 되었다. KT-1은 2000년부터 공군에 납품돼 노후화된 T-37 중등훈련기를 대체했다. 국산 항공기로서는 최초로 터키,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되는 기록을 세웠다.
KT-1은 국내에서는 최초로 컴퓨터로 100% 설계된 항공기다. 항공기 설계는 요구조건에 따라 만들어보는 ‘개념설계’, 개념설계를 현실화해 만드는 ‘기본설계’, 실제 항공기를 만들 수 있도록 구체화하는 ‘상세설계’로 구분된다. 이러한 설계를 하려면 공기역학과 비행역학, 구조역학 분야가 발전해 있어야 한다. 핵심 부품인 추진기관(엔진)은 물론이고 항공기에 탑재되는 각종 전자장비를 만드는 분야, 그리고 조종장치와 착륙장치, 사출좌석 같은 세부계통 부문이 고루 발전해 있어야 한다.
제작에 필요한 치공구를 만들고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각 부분을 조립하는 데에도 현대적인 공정이 필요하다. 설계에서 조립까지의 복잡하고 어려운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대우중공업 항공결사대원들은 사생활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쓰고 항공기 설계와 제작에 매진했다. 그 덕분에 950마력으로 생산된 KT-1은 최고의 회전성능, 낮은 실속(失速)속도를 실현했다. 편대비행과 야간비행, 계기비행, 저·중고도 항법비행, 기동비행이 가능해졌다. 기체의 안전성과 신뢰성이 높은 기본훈련기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항공산업 역사상 백미는 ‘골든이글’ T-50 고등훈련기라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 사업은 1991년 시작된 한국형전투기사업(KFP)의 기종이 F-16으로 결정되면서, 그 절충교역으로 록히드마틴의 기술을 이전받아 추진된 것이다. 시작할 때의 사업명은 KTX-2였다. 우리는 KTX-2를 초음속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 고등훈련기는 공격기(A-50)로 파생될 수 있고, 나아가 전투기(F-50)로 개량됨으로써 숙원인 한국형 전투기가 될 수도 있다. 노태우 대통령은 2000년대 초반 독자적인 전투기가 영공을 날 수 있게 한다는 비전을 세우고 KFP사업과 함께 KTX-2사업을 동시에 추진하는 항공산업 육성전략을 구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 남다른 자주국방 열정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작전통제권 환수와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 등 일련의 ‘한국방위의 한국화’ 프로그램을 펼쳤다. 이 프로그램의 중심부에 한국형 전투기 개발이 있었던 것이다.
T-50을 조립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
정부 주도냐, 민간 주도냐
그 시기 삼성그룹은 항공산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삼성항공을 자회사로 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직접 노태우 대통령을 설득하는 등 공세적인 마케팅을 펼친 끝에 삼성항공이 KFP 기종으로 선정된 F-16(KF-16) 조립 주사업자로 선정되었다.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국방과학연구원의 황매팀이 미국 포트워스에서 KTX-2에 대한 탐색개발을 마치자, 삼성항공은 KTX-2 사업을 민간 주도로 전환해 KTX-2 체계개발 업체로 지정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에 대해 탐색개발을 해온 국방과학연구소는 강력히 반발했다. 공군 일각에서도 고등훈련기 개발에 들어갈 막대한 예산을 의식해 부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그로 인해 KTX-2 체계개발이 지연되었다. 그러다 삼성과 록히드마틴이 개발비를 분담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사업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1997년 7월 항공우주산업개발정책심의회는‘KTX-2는 업체 주도로 체계개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97년 말 한국은 외환위기(IMF 사태)에 빠지면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당시 항공업계는 대한항공, 대우중공업, 삼성항공, 현대우주항공이 난립하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항공 4개 업체를 통합하고 통합사에는 KF-16 20대를 추가 생산하는 ‘당근’을 주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에 대해 대한항공이 운항사업에 주력하겠다며 회피함으로써, 삼성항공·대우중공업·현대우주항공이 통합해 한국항공우주산업(KAI·한국항공)을 만들었다. 국가 차원의 항공산업 통합법인이 탄생했으니 UH-60을 조립해오던 대한항공은 조립업체 위치를 상실하고 이를 한국항공에 넘기게 되었다.
한국항공은 록히드마틴과 KTX-2 공동개발을 위한 컨버전스팀을 구성했다. 그리고 훗날 T-50으로 명명되는 훈련기인 A형과 A-50으로 불리는 공격기인 B형 개발에 착수했다. 체계개발의 첫 단계는 외형을 정하는 것인데, 1999년 8월에 확정됐다. 이 외형에 맞추어 공기역학, 추진계통, 비행제어, 세부계통, 구조, 항공 전자를 담당하는 세부 개발팀이 구성돼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2조1000억 원이 투입돼 길이 13.14m, 폭 9.45m, 높이 4.91m, 최대속도 마하 1.5, 최대이륙중량 1만3454㎏, 실용상승고도 1만4783m의 T-50이 만들어졌다. 공격기인 A-50은 F-5 전투기 수준의 기동성과 무장성능을 갖추게 되었다. T-50 시제기 조립이 완성돼 출고된 것은 2001년 10월이었다. 이듬해 8월 T-50은 첫 공개 비행에 성공하고, 2003년 2월 19일에는 초음속 돌파 비행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초음속 항공기 제작 시대로 돌입한 것이 확인된 것이다.
시제기의 시험비행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수정해 양산이 결정됐다. 양산 1호기는 2005년 8월 30일 출고돼 차례로 공군에 납품되고, 이어 TA-50 전술입문기가 개발돼 납품되었다. 지금은 내년 실전배치를 목표로 FA-50 경공격기의 개발과 양산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T-50은 고도의 기동성을 자랑하는 디지털 비행제어 시스템을 갖고 있어 동급 훈련기 중에서는 최고의 성능을 자랑한다. T-50 양산으로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12번째로 초음속 항공기를 개발한 나라가 되었다. 지난 6월 말과 7월 초 사이 T-50으로 구성된 한국 공군의 곡예비행팀 ‘블랙이글’은 영국의 워딩턴 국제에어쇼와 RIAT 국제에어쇼의 곡예비행 경연에 참가해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21세기는 우주와 항공, 인터넷과 위성통신 등이 융합되는 시대다. 이 시대를 선도하는 기술 집약의 고부가가치 산업이 바로 항공산업이다. T-50을 생산하면서 한국항공은 300여 개의 협력업체를 발전시켰다. T-50 개발 도중 협력업체에서 노사분규가 발생하면, 한국항공의 중역이 이 업체의 노조를 방문해 설득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항공산업 시작 30년 만에 한국은 회의론과 비관주의를 밀어내고 초음속기를 만드는 나라 대열에 올라선 것이다.
항공산업 정책, 법제화해야
그러나 도전도 만만치 않았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집요한 방해와 견제가 그것이다. 그 조짐은 1991년 KFP 사업을 진행할 때 미 의회와 정부가 미국 업체에 압력을 넣어 핵심 항공 기술이 한국에 이전되지 못하도록 절충교역 상한선을 30%로 제한한 데서 드러난다. 2002년 F-15K를 생산하기로 한 차기 전투기사업(FX)을 진행할 때도 미국은 한국형 전투기 개발에 필요한 항공전자와 비행제어, 무장 등 핵심 기술을 절충교역으로 이전하는 데 난색을 표했다.
방해세력은 국내에도 있다. 정치권은 항공산업은 장기간 선행투자를 요구하기에 생색이 나지 않는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밀어주지 않는다. 소요 군은 국내의 항공기 개발능력을 불신해, 외국 항공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항공은 2006년부터 육군의 중형 기동헬기 개발에 도전해 2010년 ‘수리온’으로 명명한 중형 기동헬기 시제기를 내놓았다. 그리고 시험비행을 거듭해 양산 허가를 받음으로써 올해 9월 양산 1호기를 내놓는다. 육군용 중형 기동헬기 개발은 성공한 것이다.
애초 이 사업이 성공하면 이 헬기를 토대로 중형 공격헬기를 만든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육군은 수리온을 플랫폼으로 공격헬기를 만든다는 안을 거부하고 이보다 소형에 경무장을 한 무장헬기 사업을 별도로 추진했다. 무장헬기는 민수·군수 겸용으로 추진된다.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어 탑승용으로 제작한 것은 민수, 무장을 한 것은 군수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형 공격헬기는 해외에서 직도입하기로 했다. 애초 계획대로 중형 공격헬기를 제작했으면 한국은 굳이 대형 공격헬기를 보유할 필요가 없다. 북한의 기동전력은 대형 공격헬기가 아닌 중형 공격헬기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군은 성능이 입증됐다는 이유로 해외의 대형 공격헬기 도입을 결정해, 국내 헬기 산업이 발전할 기회를 봉쇄했다. 이렇게 군사와 산업이 따로 가기에 우리는 세계 6위권의 국방비를 지출함에도 항공산업은 여전히 10위권 밖에 머물러 있다. 언제까지 외국 업체의 배만 불리는 의존과 종속을 되풀이해야 하는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현재 공군의 노후한 F-4, F-5 전투기를 대체하기 위해 KFX 보라매사업의 탐색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이 사업은 최초 소요가 제기된 후 지지부진하다 어렵게 탐색개발이 시작되었다. KFX 사업은 더 이상의 지연 없이 진행돼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바뀌는 정책은 다음 단계로의 도약을 막는 걸림돌이다. 항공산업에 대해서는 정부의 간섭과 규제가 난무한다. 그로 인해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실종되고 있다. 소요 군과 방위사업청, 국방과학연구소, 업체 등은 각자의 이익만 추구하는 주도권 경쟁을 벌여 사업관리의 비효율성을 초래했다.
앞으로의 30년을 위해
2010년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는 무기 체계개발 사업을 정부 주도에서 민간 업체 주도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도 방위사업청과 국방과학연구소는 다시 정부 주도로 전환해 업체들이 반발하는 행태가 3년째 되풀이되고 있다. 모두가 협력해야 할 시기에 엉뚱한 싸움으로 항공산업의 성장동력을 잠식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1966년 충북 제천 출생.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방전문위원,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무총리 비상기획위원회 혁신기획관,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 역임.
민간기업과 정부, 군은 2030년 우주시대를 열 수 있도록 장기 발전정책을 합의해 결정하고 이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정치논리에 춤추지 않는 백년대계를 세워야 하는 것이다. 지난 30년은 성공적으로 발전했다. 앞으로의 30년도 비약적으로 도약하려면 우리는 일관된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한다. 그것이 정부 수립 후 60년간 우리가 만들어온 항공 발전 역사의 교훈이다.
“포착 10분 이내 북한 미사일 기지 격파하라”
한국의 미사일
197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6년까지 평양을 공격할 수 있는 사거리 200km급의 지대지미사일을 개발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리면서 한국의 미사일 개발 역사는 시작된다. 당시 북한은 1960년대 초부터 강화해온 4대 군사노선 정책으로 군사력이 급강화돼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청와대 기습 침투와 울진-삼척 공비침투사건 같은 강력한 대남 도발을 벌였다.
그런데도 미국은 괌 독트린이라는 새아시아 정책을 펼쳐 중국과 외교관계 복원을 시도하고 휴전선을 방어하던 미 육군 7사단의 철수를 추진했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은 ‘기술주권에 의한 자주국방’비전을 세우고 평양 등 북한의 종심을 공격할 미사일을 만들라는 지시를 국방과학연구소(ADD·국과연)에 내렸다.
박정희의 비밀 지시
1차로 1976년까지 사거리 200km급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고 다음으로 미군이 전술용으로 막 실전 배치한 퍼싱-1급과 같은 사거리 500km급의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곧‘항공공업계획’이라는 위장명칭을 내세운 미사일개발계획이 수립됐다. 그러나 국내 기술이 너무 부족해 기존 미사일의 모방 생산으로 기본 기술을 확보한 후, 500km급 미사일까지 개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모방 생산할 모델로는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이하 나이키)을 선정했다.
나이키는 진공관 전자회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반도체를 쓰는 쪽으로 개량하면서 복제 생산한 것이 ‘백곰’ 또는 나이키허큘리스 코리아를 줄여 ‘NHK-1’으로 불렸던 K-1 미사일이다. K-1은 나이키와 똑같이 4기의 허큘리스 엔진으로 본체를 이루었다. 4개 엔진을 하나로 통합하고 관성항법장치를 탑재해 정밀도를 높인 것이 ‘현무’, ‘현무-1’ 또는 ‘NHK-2’으로도 불렸던 K-2 미사일이다. 그 후 국과연은 사거리를 300km로 늘인 K-3와 500km급인 K-5 등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국과연은 미국에 지술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한국의 미사일 개발을 핵무장을 위한 준비단계로 이해하고 강하게 반대했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지대공·지대지 미사일로 운용하고 있던 나이키를 실전에서 퇴역시키고 있었다. 한국은 미국이 나이키를 퇴역시키면 부품을 구하지 못해 한국군이 보유한 나이키의 운용유지에 어려움이 있으니, 이를 현대화하고 개량하기 위해 이 사업을 한다고 설득했다. 이에 미국은 나이키의 최대 사거리인 180km 이상의 탄도탄 개발을 제한한다는 조건으로 한국에 기술이전을 허용하게 되었다.
이 조건이 처음엔 스틸웰 주한미군 사령관이 메모를 전달하는 형태였다가 한국이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300km로 연장하면서 한미 미사일협정이 된다. 미국은 한국 연구원들이 레드스톤 미 육군 미사일연구소에서 연수하게 했다. 그곳에서 기본적인 연구개발을 할 수 있는 기술자료를 넘겨주고 폐업하는 LPC 고체추진제 제조공장 설비를 저가에 판매했다. 미사일에 들어가는 주요 전자부품과, 워낙 소량 생산돼 국산화하기 어려운 일부 추진제 원료를 미국에서 수입했다.
프랑스로부터는 추진제 관련 기술을 획득했다. 현무-1 개발 시에는 미국이 판매를 거부하는 관성항법장치 관련 기술을 영국으로부터 도입했다. 1979년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중거리탄도미사일인 ‘아틀라스 센타우르’의 부품과 기술을 획득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군축 연구자인 피터 하이에스(Peter Hayes)는 ‘미사일 국제 거래와 두 개의 한국’이라는 보고서에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아틀라스 센타우르의 노즈콘 합금, 유도 시스템, 조립 장비, 엔지니어링 설계도 등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이런 식으로 확보된 로켓과 미사일 관련 기술을 기반으로 백곰(1978)과 현무(1987), 현무-2(2005) 등을 개발했다. 이 기술은 KSR-1과 KSR-2를 발사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무기 분야의 권위서인 ‘제인 전략무기 시스템(Jane’s Strategic Weapons Systems)’은 ‘KSR-2가 사거리 100km에서 900km 정도의 탄도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미확인 보고가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탄도미사일
■ 백곰(K-1, NHK-1)
나이키 미사일은 1950년대 미국 맥도널 더글러스(MD)사가 개발한 지대공 미사일인데 지대지 임무도 수행할 수 있었다. 한국군은 1960년대 중반 도입해 지금까지 운용하고 있다. 백곰은 나이키를 국산화한 것이다. 새로운 미사일 설계에는 항공역학적 안정성 검증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당시의 한국은 기술력이 너무 미약해 새 미사일 설계 도전은 무리였다. 이 때문에 안전하게 기존 미사일을 모방생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나이키는 1950년대 기술로 제작된 것이라, 모방 생산을 하더라도 대폭적인 성능개량이 필요했다. 사거리를 연장하기 위해 1, 2단 추진기관을 전부 추진력이 큰 복합추진제로 바꾸었다. 진공관 전자회로는 반도체화하고, 아날로그 시스템인 유도신호처리도 컴퓨터화했다. 유도방식은 나이키와 같은 레이더 지령 유도방식이었다. 하지만 1·2단 로켓 모두 콤퍼지트(composite)을 썼기에 출력은 나이키보다 훨씬 커졌다. 그에 따라 미사일을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어 기체도 완전 재설계했다.
백곰을 개발하는 데 금성정밀(본체), 한화(탄두), 삼성항공(추진기관), 대우중공업(발사대), 대우전자-금성사(추적-탐지장치) 등이 참여했다. 백곰은 초기 생산물량을 시험운용포대에 배치했지만, 개발 직후 10·26과 12·12 사태 등이 일어나 양산되지 못했다.
■ 현무-1(K-2, NHK-2)
백곰 개발 성공 후 신군부가 정권을 잡았다. 신군부는 미국과 관계개선을 위해 미국이 반대하던 독자적인 탄도탄 개발을 포기하게 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나이키에 페인트를 칠해서 국산 미사일로 사기 쳤다”는 논리로 백곰 개발을 폄하했다. 국과연 연구원 1000여 명 이상을 해고하고 미사일 개발 조직을 해산시켰다. 힘들게 확보한 미사일 개발능력이 결정적으로 훼손된 것이다.
그러나 1983년 미얀마에서 아웅산 테러사건이 터지면서 전 전 대통령은 다시 국산 미사일 개발을 지시한다. 그에 따라 백곰 개발에 참여했던 연구원들을 모아 새로운 미사일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그때 개발에 들어간 것이 백곰을 개량한 현무(현무-1) 미사일이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 이전에 이 사업을 완료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짧은 기간에 개발하라고 했기에 새로운 외형설계를 할 수 없어, 나이키 외형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추진 유도방식은 완전히 바꿨다. 허큘리스 엔진을 하나로 통합해 대형 1단을 채택했다.
1단 로켓엔 무연(無煙)추진제인 더블베이스(double base)형을, 2단 로켓엔 콤퍼지트형 추진제를 썼다. 고체연료를 채택한 것인데, 이는 발사시 발사포대의 위치 노출을 최대로 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영국 GEC 사의 관성항법장치(INS)도 적용했다. 한국은 영국으로부터 INS 기술을 도입해 국내생산하면서 INS 관련 기술을 확보하게 된다. 현무의 탄두는 500kg급이다. 표적에 따라서 단일 고폭탄이나 클러스터탄을 바꿔 사용할 수 있어, 백곰에 비해 유연성이 높아졌다. 물론 파괴능력도 강화됐다. 백곰은 양산되지 못했지만 현무는 200여 기 이상 생산돼 운용되었다.
일부 현무는 나이키를 운용하던 강화진지에 배치됐으나, 상당수는 차량용 발사대에 장착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현무-2에 임무를 넘기고 퇴역해 예비전력으로 보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현무-2(NHK-2 PIP A/B)
블록 A
백곰과 현무가 나이키의 외형을 차용해 설계했다면, 현무-2는 외형부터 완전 새로 설계한 정밀타격용 미사일이다. 1990년대 중반 러시아에서 획득한 SS-21 지대지 미사일의 기술정보가 현무-2 설계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는 북한의 은하-3호 발사에 대응해 2012년 4월 19일 현무-2 발사시험 동영상을 공개했다. 이를 통해 크기와 외형 등이 처음 확인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SS-21과 SS-23 중간형이었다. 길이 6m, 직경이 80cm인 현무-2는 사거리 300km, 발사중량 3t 내외로 개발 초기에는 공산오차(CEP)가 100m급이었다. 하지만 유도장치의 성능개량 작업을 통해 공산오차를 30m급으로 낮췄다.
공개된 동영상은 현무-2가 매우 정확하게 표적에 명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는 탄착 정밀도가 매우 높은 수준임을 입증한다. 이 정도 정밀도라면 탄두 위력을 고려할 때, 발사진지에서 발사준비를 하는 적의 이동식 미사일발사대를 충분히 파괴할 수 있다. 현무-2는 트럭으로 견인하는 컨테이너 박스형 발사대에 장착되어 운용된다. 일부는 나이키와 현무-1을 운용하던 강화진지에서 운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무-2 블록A의 최초 발사시험은 1999년 이뤄졌다. 위키리크스는 NHK-2 PIP 블록A형은 2005년 양산을 시작해 매년 15~20대가 생산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2009년 15기, 2010년 17기, 2011년 19기 생산).
블록 B
블록B형은 2011년부터 양산을 시작했다. 초기 시제품 중 일부는 2009년부터 시험운용포대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국회 예산보고 자료는 중기계획상 현무 성능개량 사업에 2조 원가량의 예산이 투입된다고 밝히고 있다. 기당 가격은 40억 원 정도이고 매년 생산수량이 20기 미만임을 고려하면, 이 2조 원에는 순항미사일인 현무-3 양산비도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위키리크스에 의하면 2009년 6월 3일 현무-2 블록B는 12번째 시험비행을 하고, 2010년 말에는 개발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양산은 2011년부터 시작되었다. ‘월간조선’ 2011년 3월호는 사거리를 500km급으로 연장한 현무-2 블록B를 중부와 동부의 두 개 미사일 기지에 실전 배치했다고 한다.
현무-2는 개발 초기부터 사거리가 500km급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1999년 블록A를 첫 시험발사했을 때도 미국 정보기관은 이 미사일(현무-2 블록A)의 사거리는 최대 500 km일 것으로 분석했다. 1999년 7월 2일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처하려면 대한민국도 사거리 500㎞의 현무-2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 바 있다.
현무-2 블록B의 배치로 한국군은 만포나 개마고원 등 북한의 내륙 깊은 곳까지 정밀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노동미사일을 쏘기 위해 연료를 주입할 때 이들을 파괴할 능력을 갖췄음을 의미한다. 이동 중인 발사대를 명중시키기는 어렵지만 이미 위치가 확인된 발사진지라면 10분 이내 파괴가 가능하다.
한계가 있다면 블록B는 블록A를 크게 개량하지 않고 탄두중량을 500kg에서 300kg 정도로 줄여 사거리를 연장했다는 점이다. 사거리를 늘이면 탄착 정확도도 일정수준 커져서 정밀타격도가 떨어진다.
북한이 현무-2 블록B의 존재를 의식해, 블록B의 사거리 바깥인 함경북도 북부로 올라가서 노동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한국은 대응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한국 정부는 사거리 800km 이상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미국에 요구하는 것이다. 800km라면 중부지역에서 발사해 북한 전역을 공격할 수 있다. 1000km라면 남부 해안지역에서 발사해도 한반도 전역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현재 한미 양국은 한미미사일협정 개정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측은 사거리 1000km에 탄두중량 1000kg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러시아가 순항미사일과 같은 규제를 받는 글로벌 호크의 임무중량이 900kg으로,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상의 기준인 500kg을 넘어섰다는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과 일본의 우려를 고려해 550km 사거리를 제안한 상태여서 협상은 지지부진하다.
한미미사일협정 개정 협상에서 미국은 사거리를 늘이는 것보다 탄두중량을 늘리는 것을 강력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2년 7월 10일 ‘동아일보’는 미국이 사거리를 800km로 연장하는 방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논의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한국 측 협상책임자였던 김태효 전 대통령전략기획관이 한일정보보호협정 문제로 사임해 미사일협정개정 협상 자체가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미국 측 반응은 이명박 정부가 종료되기 전인 올해 10월 한미연례안보회의(SCM)에서 미사일협정 개정을 논의하자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로는 사거리 800km, 탄두중량 500kg 선에서 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차기 전술 지대지 미사일
다연장로켓시스템(MLRS)에 장착해 운용하는 미국의 ATACMS와 비슷한 전술용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자는 것이 차기 전술 지대지미사일 개발사업이다. 앞에서 언급한 현무 시리즈 지대지 미사일들은 합참 차원에서 운용하는 전략미사일이다. 한국형 ATACMS인 차기 전술 지대지 미사일은 육군에서 운용하는 전술 미사일이다. 국방개혁 2020으로 작전구역이 넓어진 육군의 군단급 제대에서 이 미사일을 운용할 것으로 보인다.
차기 전술 지대지 미사일은 평시 현무 시리즈와 함께 육군의 유도탄사령부에서 운용하나, 실전이 벌어지면 군단 화력으로 운용된다. 차기 전술 지대지는 다연장로켓 발사대 규격에 맞춰 개발되기에, 길이는 4m, 직경은 60cm 이하다. 미국의 ATACMS를 기준으로 볼 때 무게는 2t 내외일 것으로 보인다. 450kg급 탄두를 장착하면 200km 정도의 사거리를 갖게 될 것이다.
현무-2 개량형에 적용된 유도기술은 300km를 날아가 30m급의 공산오차를 보인다. 따라서 사거리 200km급인 차기 전술 지대지 미사일 정밀도는 20m 일 것이다. 기술은 진보하므로 현무-2 블록B보다 늦게 개발되는 차기 전술 지대지 미사일은 더 높은 정밀도를 갖출 것으로 보인다.
■ 차기 탄도탄 (현무-4 추정)
한미미사일협정의 개정 협상이 타결되면, 국과연은 북한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800~1000km급 탄도탄을 개발하려고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사용하려 할 경우 한국은 이 정도의 사거리를 가진 정밀무기를 보유해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사거리 800~1000km급 지대지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은 동맹국인 미국 처지에서도 꼭 필요하다. 현재 주한미군은 상황파악 후 10~20분 이내에 800km 거리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차기 탄도탄 개발 시 꼭 탄두중량을 1t급으로 늘려야 한다. 한국은 국가 비상상황 시 억제력을 확보하기 위해 탄두 중량을 1000kg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한다. 사거리 800km급인 탄도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준비를 해놓았기에 협정이 개정되면 빠른 시간 안에 개발이 가능하다. 그러나 탄두중량을 늘리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사거리 800km급의 지대지 미사일은 2단의 고체엔진을 탑재하고 총 중량은 5~6t일 것으로 예상된다. 사거리 300~500km급의 탄도미사일은 최대 초속 2km 내외의 속도를 내야 하지만, 800~1000km급 탄도미사일은 최대 3km의 속도를 내야 한다. 이러한 속도를 얻으려면 2단 추진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현무-1을 개발하면서 단 분리 기술을 확보했다지만, 이 기술은 대기권 안에서 비행하는 미사일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사거리 800~1000km 미사일은 대기권 밖인 100km 이상으로 올라갔다가 대기권으로 재진입한다. 따라서 안전성과 정밀도가 보장되는 새로운 단계의 기술이 요구된다.
멀리 날리는 것으로만 따지면 우리는 사거리 2000km의 미사일도 개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미사일은 정확도가 낮다. 이렇게 먼 거리를 날아가 표적을 파괴하려면 고도의 유도장비가 있어야 한다. 국과연은 장기과제로 고성능 관성항법장치인 HRG를 개발하고 있다.
그 외 추진제의 성능을 개량하고 보다 정밀한 공격을 위해 종말유도장치도 추가로 개발해야 한다. 종말유도장치를 개량하면 이동하는 함정을 공격하는 대함(對艦)탄도미사일(ASBM)을 개발할 수 있다. ASBM은 급속히 전력을 증강시키고 있는 중국의 해군력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역시 ASBM으로 미국 해군력을 견제한다. 중국은 사거리 2000km급인 DF-21D라는 ASBM을 확보했기에 미국 항모 전단이 중국에 접근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논리로 한국이 사거리 800km급의 ASBM을 확보한다면 서해와 남해에서 활동하는 중국 항모와 기동함대는 상당한 압박을 받게 된다.
순항미사일
한미미사일협정에 의해 미사일 사거리에 제한을 받게 된 한국은 이 제한에서 자유로운 순항미사일 개발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국의 순항미사일 개발은 대함 미사일 개발로부터 시작됐다. 국과연은 1984년 ‘해룡’이라는 이름의 소형 대함미사일을 개발했다. 소형 레이더 탐색기의 구매와 국산화가 불가능했기에 레이저 유도방식을 채택했다. 그로 인해 사거리가 제한되고 기상 악화 시 운용도 제한돼, 1987년 양산을 포기하고 대함미사일은 해외에서 직구매하게 되었다.
1993년 해군은 국과연에 미국제 대함미사일인 하푼보다 성능이 뛰어난 차세대 대함미사일 개발을 의뢰했다. ‘계속 해서 건조할 한국형 구축함과 차기 고속함, 차기 호위함에 장착할 독자적인 대함 순항미사일을 개발하는 것이 경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SSM-700K 해성
하푼을 대체하는 대량생산의 대함미사일을 개발한다는 목표로 1996년 시작한 것이 ‘해성’ 대함미사일 개발이었다. 1000여억 원의 개발비가 투입된 이 사업은 2003년 완료됐다. 2006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100여 이상이 생산돼 각종 함정에 배치되고 있다.
해성은 완전 자동화된 대함 순항미사일이다. 표적을 지정해주면 발사 후 스스로 최적 고도와 비행경로를 따라 비행한다. 표적 가까이에 가서는 해면에 밀착된 초저공비행으로 표적 함정의 방어장비를 회피한다. 표적을 맞히지 못하면 다시 선회비행해 명중시킬 때까지 반복 공격한다. 해성은 스트랩다운 방식의 관성항법장치(INS)를 채택했기에 속도와 위치 자세 등의 비행정보를 스스로 판단해 최적의 코스로 비행한다. 내부 유도시스템에 데이터버스(data bus)를 채택해 내부 컴퓨터로 파악된 장비 상황을 외부에서 모니터할 수도 있다.
하푼은 동체 하부에 하나의 공기흡입구가 있다. 해성은 양 측면에 2개의 공기흡입구가 있고 엔진 추력이 높아 높은 수준의 회피기동을 할 수 있다. 종말유도장비로는 Ku 밴드(11~15 GHz)의 소형 레이더를 장착해 표적을 추적한다. 종말유도 시 적 기만기(欺瞞器)에 매우 강하게 대응하는 알고리즘을 가지고 있다. 신형탄두는 티타늄과 둔감화약으로 제작돼 기존의 강철제 탄두에 비해 더 큰 공격력을 갖는다.
해성의 양산과 배치는 한국군이 최초로 순항미사일 기술을 확보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한국군은 해성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대지공격형 순항미사일 현무-3 개발을 추진했다. 시기상으로 따지면 먼저 추진된 것이 대지공격형 순항미사일이기에 이 기술이 해성에 적용됐다고 볼 수도 있다.
■ 현무-3 A/B/C
걸프전에서 확인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의 위력은 북한의 탄도탄 위협을 받고 있던 한국군에게 지상 공격용 순항미사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1990년대 전반 한국은 기본 기술의 확보와 개발에 매진해 2000년대 초반 ‘현무-3’란 이름으로 지상 공격용 순항미사일을 배치했다. 현무-3에는 A,B,C 형이 있다.
현무-3A는 터보제트 엔진을 장착하고 500kg급 탄두와 500km급의 사거리를 갖는다. 해성과 현무-3A는 크기와 용도는 다르지만, 같은 시기에 같은 엔진을 갖고 개발된 순항미사일이다. 현무-3B/C 형은 효율이 좋은 터보팬 제트엔진을 장착하고 탑재 연료량도 늘려 사거리를 대폭 연장한 것이다.
현무-3는 발사 후 GPS/INS를 이용해 비행속도와 위치, 비행자세 등을 파악해 50~100m 고도로 비행한다. 일정 거리를 비행한 뒤에는 중간유도를 위해 내장한 디지털지도와 비행 중에 파악한 고도를 비교해 현재의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TERCOM 기술을 적용했다.
종말유도에는 적외선 화상센서를 사용한다. 미리 확보된 표적의 적외선 사진과 미사일 앞에 장착된 적외선 화상센서로 찍은 영상을 비교분석해 1m급의 오차로 정밀 공격을 한다. 쉽게 말해 건물 5층의 세 번째 창문을 표적으로 지적하면 정확히 그 위치를 타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밀공격 능력은 토마호크보다 더 앞선 것이었다.
표적을 찍은 적외선 사진을 화상처리하기 위해서는 매우 높은 컴퓨터 프로세싱 능력이 필요했다. 당시 이러한 능력을 갖춘 순항미사일은 SLAM-ER뿐이었다. SLAM-ER은 조종사가 미사일에서 보내오는 적외선 화상센서의 영상을 보면서 유도하는 방식이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자동화된 적외선 화상센서로 최종 유도까지 하는 기술은 어느 나라도 실용화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한국은 해내야만 했다. 한국은 만포지역에 밀집한 북한의 지하 무기공장 갱도 입구나 환기통을 맞히는 순항미사일을 만들어야만 했다.
북한은 만포지역의 지하 무기공장 출입구를 북한-중국 국경 근처에서 북쪽으로 내놓았기에 이들을 부수기 위해 출격한 한미 연합전투기들은 중국 영공을 침범하지 않고는 공격할 수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한국 주장대로 초정밀 사격이 가능한 순항미사일로 공격해야 한다. 미국은 현실을 인정해 한국의 지상 공격용 순항미사일 개발을 인정했다.
현무-3A의 배치로 한국군은 북한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정밀공격 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것이 북한에 심각한 위협과 압력이 되었다. 북한은 핵심지역 방어를 위해 순항미사일이 저공으로 접근할 것으로 예상되는 골짜기마다 기구나 새그물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런 장애물은 위성사진으로 확인되므로 회피하는 경로를 택하거나 고도를 높여 피할 수 있다. 현무-3B는 저공 장애물과 방공망을 피하기 위해 직선거리에 비해 훨씬 먼 비행경로를 선택한 측면이 있다. 장애물이 있는 500km의 표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800km를 비행하는 순항미사일이 필요한 것이다. 현무-3A형은 지상 발사 순항미사일(GLCM)이다. 발사트럭에 2기씩 장착돼 운용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중부지방에 00기의 발사대를 운용하는 대대가 실전 배치되었다.
위키리크스 자료에 의하면 B형의 2차 비행시험이 2006년 3월 미국에 통보된 바 있다. B형은 2009년경부터 배치되었다. 한국형 구축함인 KD-2와 KD-3(이지스 구축함)의 수직발사대에는 사거리 1000km의 해상 발사 순항미사일(SLCM)이 배치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해성-2를 함대지로 개량한 것인지, 아니면 현무-3B의 해상 발사형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B형은 해성-2와 크기와 사거리가 비슷해 동일 미사일에서 분기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현무-3B를 기반으로 종말비행을 초음속으로 하는 함대함 미사일인 해성-2가 개발되었을 개연성이 큰 것이다.
종말 초음속 미사일은 아음속 비행을 하다가 적함 방어 장비의 사거리 영역에 들어서면 탄두 내부에 장착된 로켓 부스터가 작동해 초음속으로 비행한다. 러시아가 개발한 클럽 대함 순항미사일이 이런 방식을 택했다. 중국은 이 미사일을 구매한 후 자국산 대함미사일을 종말 초음속으로 개량한 바 있다.
사거리를 1500km로 연장하고 탄두중량을 축소한 C형은 2011년 개발이 완료돼, 양산 준비 중이라는 국방부장관의 언급이 있었으니 2012~13년 정도에 실전 배치될 것으로 보인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존재가 밝혀진 함대함 미사일로서 현무-3B와 같이 개발해 분기했거나, 현무-3B와 동시에 개발된 미사일이다. 위키리크스는 ‘해성-2의 비행중량은 1280kg(부스터 제외), 무게는 1000kg, 엔진추력은 360kg, 탑재 연료량은 270kg이고 2009년 11월 열 번째 시험비행을 했다. 2010년 이후 생산한다’고 밝혔다. 2012년 초 코리아 타임스는 ‘방사청 담당자가 해성-2는 초음속 순항미사일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는데, 이는 해성-2가 종말초음속 비행을 한다는 뜻이다. 잠수함에서 발사하는 잠대함(潛對艦)형도 개발되었다.
■ 해성 함대지 버전 (해성-B)
천안함 피격 사건 후 차기호위함(FFX)과 한국형 구축함인 KD-1과 KD-2 등에 탑재해 북한의 지상표적을 향해 즉각 대응 공격할 함대지 무기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긴급사업으로 개발하고 있는 것이 해성-B다. 2015년경 개발이 완료될 것으로 보이는 해성-B에는 레이더시커 대신 적외선 화상센서를 장착한다. 중간 유도를 위해서는 GPS/INS 그리고 현무-3에 사용한 TERCOM을 채택할 것으로 추측된다.
전체적으로는 SLAM-ER과 비슷한 성격의 미사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형 수직발사기에서 발사되는 수직 발사형과 기존의 경사형 발사대를 사용하는 형 두 가지로 개발될 예정이다.
>■ 해성-3(추정) 순항미사일
지금까지의 대함미사일은 해면 가까운 고도로 비행하기에 적함의 레이더는 파도의 반사파와 대함미사일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최신 함정에는 파도의 반사파를 걸러내는 고성능 저고도 레이더와 대함미사일 방어용 무기(SAAM ,CIWS)를 장착돼 있었다. 그로 인해 아음속 대함미사일의 효용성이 낮아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초음속 대함미사일인 ‘선번’과 ‘크립톤’ 등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개발해 운영해왔다. 이에 자극받아 중국 인도 대만 일본 등도 유사한 미사일을 개발했다. 한국도 초음속 대함/대지 순항미사일을 개발하기로 결정해 현재 진행하고 있다.
1000km 거리라면 아음속 순항미사일은 발사에서 타격까지 한 시간 이상이 걸린다. 탄도탄은 적이 발사 준비를 할 때 공격해야 격파할 수 있다. 그러나 야지(野地)로 이동해 발사를 준비하면 신속한 표적 지정이 어려워 정밀타격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야지에 전개한 탄도탄 발사대는 비행속도가 빠르고 종말단계에서는 탐색기로 표적을 식별해내는 초음속 순항미사일로 공격한다. 한국은 2017년쯤 대함/대지 겸용 초음속 순항미사일을 개발해 수상함과 잠수함에 탑재할 것으로 보인다.
라이트 형제에서 스텔스기까지
미국의 항공산업
미국을 제외하고 세계 항공우주산업의 역사를 논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유인비행에 성공한 후 미국은 세계 최고의 항공 국가 자리를 다른 나라에 양보한 적이 없다.
세계 항공기 산업계를 이끌고 있는 미국의 스텔스 전투기 F-35.
1903년 12월 17일, 미국의 윌버 라이트(1867~1912)와 동생 오빌 라이트(1871~1948) 형제가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 근처의 바닷가에서 세계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이것이 미국을 항공산업과 항공기술의 종주국으로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그때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라이트 형제는 유럽의 항공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08년 프랑스 보르도 근처의 파우에 문을 연 세계 최초의 비행학교는 윌버 라이트가 만든 것이었다. 세계 최초의 군용기는 1909년 라이트 형제가 미 육군에 납품한 ‘플라이어(Flyer)-A(Army)’였다. 라이트 형제의 성공은 페르디낭 퍼버, 로베르에노 펠트리, 가브리엘 부아쟁 같은 유럽 항공 선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항공기 제작국
미국에는 라이트 형제만 있지 않았다. 라이트 형제 못지않게 초창기 미국 항공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글렌 하몬드 커티스(1878~1930)를 꼽을 수 있다. 미국 최초의 항공기 제작사는 1906년 6월 글렌 하몬드 커티스와 오거스터스 헤링이 설립한 ‘헤링-커티스’였다. 이 회사는 라이트 형제가 프랑스, 독일, 영국의 회사들과 연합해 1909년 세운 ‘라이트 비행기회사’보다 3년 먼저 등장했다. 이 회사가 제작한 ‘모델 F’ 수상비행기는 1912년 미 해군에 150대나 납품돼 JN 혹은 ‘제니’라 불리며 1920년대 말까지 6000대 이상 생산됐다.
유럽 항공계의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유럽에서는 정부나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많은 항공대회가 개최되었다. 맹렬한 추격 덕분에 유럽과 미국의 항공산업 기술 격차는 근소한 차이로 좁혀졌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비행기가 전쟁무기로 대량 사용되면서 유럽 항공계는 비로소 미국을 앞서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 사이 프랑스는 6만7987대, 영국은 5만8144대, 독일은 4만8537대의 군용기를 생산했다. 같은 기간 미국과 이탈리아,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생산한 군용기의 총합은 4만5000대 남짓이었다. 유럽의 항공산업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미국을 크게 앞서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비행기는 더 튼튼해진 동체와 엔진을 갖게 되었다. 반대로 조종법은 간단해 무거운 화물과 더 많은 승객을 수송할 수 있게 되었다. 제1차 대전이 끝나자 군에서 수천 명의 조종사와 수천 대의 군용기가 방출되면서 ‘상업항공’이 탄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주도권을 빼앗긴 미국의 항공산업은 1920년대 말까지 뚜렷한 성장동력을 찾지 못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5년, NAS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NACA(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국립항공자문위원회)를 창설해 미국의 항공기술을 세계 최고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집중했다. 그러나 1930년대가 오기 전까지 미국의 항공산업은 유럽을 따라잡지 못했다.
1919년 독일을 필두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항공사가 등장했다. 당시의 항공여행은 매우 불편했는데 많은 사람이 비행기를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하던 유럽의 항공기 제작사들은 새로운 여객기를 개발해 선보였다.
1차 대전 때 유럽에 주도권 뺏겨
그러나 1920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국제 항공운송 회사인 에어로마린 웨스트 인디스 에어(Aeromarine West Indies Airways)는 적자를 견디지 못해 1923년 파산했다. 전쟁으로 기존 교통망이 파괴돼 여객기가 유일한 대체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은 유럽과 달리 철도와 도로가 거미줄처럼 깔린 미국에서는 민간 항공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정부 주관의 우편 비행기 운영에 관한 법률인 켈리 법안이 1925년 미 의회를 통과한 것이다.
이 법안이 발효되자 수많은 항공사가 등장해 여객 운송과 항공우편 항로를 놓고 경쟁을 펼쳤다. 그 결과 미국의 항공운송은 빠르게 성장해 유럽과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1930년 미국 항공 우편제도의 혁신을 이룬 워터스 법이 미 의회를 통과하자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등 몇몇 회사가 독점하던 항로가 개방돼 항공운송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항공사 간 통폐합이 일어나 아메리칸 에어라인, TWA(Trans World Airlines), 이스턴 에어라인,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팬 아메리칸이 미국 5대 항공사로 등장했다.
윌슨 대통령이 펼친 항공산업 육성정책이 1930년대에 접어들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 NACA와 미국의 주요 대학들의 항공기 설계/생산 기술이 항공산업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와 유럽에서 건너온 기술자·과학자 출신 이민자들도 큰 기여를 했다.
1933년 2월 첫 비행에 성공한 보잉의 247과 같은 해 7월 첫 비행에 성공한 더글러스의 DC-1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현대식 여객기였다. 이들의 등장은 미국 항공산업이 다시 유럽을 앞서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었다. 1935년 12월 첫 비행에 성공한 DC-3는 최대 21명의 승객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DC-3는 항공 역사상 최초로 승객 운임만으로 운항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여객기가 되었다.
DC-3는 민간 여객기 시장을 빠르게 장악해, 1939년에는 미국 여객기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DC-3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1939년) 직후 C-47(미 해군은 R4D로 명명)이라는 이름의 수송기로 채택돼 큰 활약을 했다. 민간항공 분야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용항공기 분야는 발전 속도가 느렸다. 1930년대 유럽 각국은 군비 경쟁으로 다양한 군용기를 만들었으나 미국의 군용항공기 분야는 한발 늦었다.
2차 대전 계기 항공산업 부흥
제2차 세계대전은 오늘날 미국이 세계 항공우주산업을 제패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러시아 이민자인 시코르스키 박사가 세운 시코르스키 항공기 제작사는 수상비행기 제작에 경쟁력이 있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수상비행기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수직 이착륙이 가능한 회전익기 개발에 도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시코르스키 사는 세계 최초의 양산형 헬리콥터인 R-4 호버플라이(Hoverfly/Sikorsky S-47)라는 이름의 헬기를 제작해 1942년 1월 첫 비행에 성공하고, 이어 R-6(Sikorsky S-49) 헬기도 제작했다.
제자리 비행이 가능하고 활주로가 없어도 이착륙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미 육군은 시코르스키 사로부터 400여 대의 R-4와 R-6 헬기를 도입해 수색과 인명구조 , 부상병 수송 등의 용도로 활용했다. 헬기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진가가 확인돼 지금은 적 기동부대를 섬멸하는 지상군의 핵심 항공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미국 항공산업계가 생산한 전투기와 폭격기, 수송기, 훈련기, 초계기, 헬리콥터의 총 대수는 28만 대였다. 덕분에 연합군은 제공권을 장악해 승리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만 해도 미국에는 공군이 없었다. 항공부대는 육군과 해군에 속해 있었다. 작전환경과 전투기 운용 개념이 달랐기에 미 육군과 해군은 항공산업계에 자기만을 위한 전투기 제작을 요구했다. 항공기 제작사들은 이에 부응해 P-38, P-39, P-40, P-47, P-51과 F4F, F4U, F6F, F8F 같은 전투기들을 개발해 수천, 수만 대를 육군과 해군에 납품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전략 폭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미 항공업체가 B-17, B-29 같은 폭격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만2000대 이상이 생산된 B-17 폭격기는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대한 주간 전략 폭격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3970대가 생산된 B-29 폭격기는 일본에 고고도 폭격을 했다. B-29는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냈다.
종전과 함께 미국의 항공산업계는 평시체제로 전환됐다. 이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맞춰 과도하게 확장된 항공산업을 대대적으로 축소하고 구조조정을 한다는 뜻이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때 Me-262로 명명된 제트전투기를 처음 실전에 투입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물량공세에 밀려 제트전투기는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제트전투기의 발전 가능성을 주목한 미국이 전후 본격적으로 제트전투기를 개발해 미국 항공산업에 새로운 활로를 열어주었다.
종전 후 열린 제트기 시대
독일이 발전시킨 각종 전투기와 로켓무기(V-2) 기술은 독일 패망 후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미국 항공우주산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를 겪지 않았기에 항공산업을 발전시키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전역한 조종사와 정비사 등 전문인력은 민간항공 분야를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미국 최초의 제트전투기는 1942년 10월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기술정보를 교환하던 미국은 1941년 9월 벨 사에 제트전투기 제작을 의뢰해, XP-59A 에어라코멧(Airacomet)을 내놓았다. 1944년까지 3대의 시제기가 완성됐다. 양산기인 P-59A는 20대가 제작됐고, P-59A의 엔진을 교체하고 성능을 개량한 P-59B는 30대가 제작됐다. P-59 시리즈는 제트조종사 훈련, 제트전투기 성능 분석, 교육훈련, 시험비행 등의 용도로 쓰였다.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P-59는 미국의 제트전투기 발전에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미국의 두 번째 제트전투기는 1944년 1월 8일 처녀비행에 성공한 XP-80인데, 이 제트기는 훗날 F-80 슈팅스타와 T-33A 실버스타로 발전했다. F-80은 1715대가 생산돼 미 공군과 해군,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우루과이 등에서도 주력기로 사용되었다. 가장 성공적인 제트훈련기로 평가받는 T-33A는 1948년부터 1959년까지 6557대가 생산돼 41개국에서 조종사 양성에 활용됐다.
미 해군은 1944년 6월 처녀비행에 성공한 FR 파이어볼(Fireball)을 시작으로 1945년 처녀비행에 성공한 FH-1 팬텀, 1947년 1월 첫 비행에 성공한 XF2H-1 밴쉬(Banshee) 등의 제트전투기를 개발했다. 종전 후 동서 냉전이 본격화하며 신무기에 대한 소요가 급증했다. 나치 독일에서 입수한 각종 기술 자료와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인 기술자들이 항공산업계로 흡수되면서 미국의 제트전투기 개발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947년 미 육군에서 공군이 독립하면서 미국은 P(Pursuit)로 표기하던 전투기 식별부호를 F(Fighter)로 변경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제공권을 쉽게 장악할 것을 기대하며 공군의 F-80과 F-84 선더제트(Thunderjet), 해군의 F9F 팬서(Panther)를 급파했다. 그러나 소련이 비밀리에 제공한 미그-15가 1950년 11월 1일 모습을 드러내면서 상황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전개됐다. 같은 달 8일, 미 공군의 F-80과 중공군의 미그-15가 역사상 최초로 제트전투기들 간의 공중전을 펼쳤다. 미국은 미그-15의 성능이 F-80은 물론이고 F-84보다 우수해 베테랑 조종사들조차 고전을 면치 못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제트전투기 최초 맞붙은 6·25전쟁
깜짝 놀란 미국은 당시로서는 최신예 전투기인 F-86 세이버(Sabre)를 급파했다. 1950년 12월 13일 한국에 도착한 첫 번째 F-86 비행대대가 미그-15와의 공중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보여줬다. 12월 한 달 동안 F-84는 1대 8의 비율로 미그-15를 격추했다. 문제는 미 공군이 충분한 숫자의 F-86을 배치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족한 전투기는 F-80과 F-84로 채워야 했다. F-80과 F-84 조종사들은 미그-15 대응 전술을 보완해, 소련 제트전투기들과 치열한 공중전을 벌이게 되었다.
땅과 가까운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큰 활약을 펼쳤다. 벨, 시코르스키 등에서 제작한 벨-47, S-51, H-19, H-21, HRP-1S 등의 헬기가 부상병 수송에서 공중강습작전까지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1951년 10월 미 해병대 1개 대대가 12대의 H-19에 나눠 타고 공중강습작전을 펼쳤는데 이것은 헬리콥터를 동원한 최초의 대규모 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6·25전쟁을 통해 소련의 항공기술력이 미국 못지않은 수준까지 발전했고 서방세계보다 우수한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는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미국 정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국 전투기를 제압할 수 있는 전투기 개발을 항공우주산업체에 요구했다. 미 항공우주국(NASA)과 미 공군은 X로 시작되는 실험기 운용 자료와 다양한 항공정보를 정리해 항공기 제작사에 제공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4년 사이 6종 이상의 신형 전투기가 개발돼 미 공군에 도입됐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센추리(Century) 시리즈다.
수평 비행에서 마하 1 이상으로 비행할 수 있는 최초의 제트전투기인 F-100 슈퍼 세이버(Super Saber)를 시작으로 삼각날개의 F-102 델타 대거(Delta Dagger), 마하 2 이상으로 비행할 수 있는 최초의 제트전투기 F-104 스타파이터(Starfighter), 전천후 요격 능력을 갖춘 F-101 부두(Voodoo), 1인승 전폭기 F-105 선더치프(Thunderchief), 1980년대 후반까지 요격기로 활약한 F-106 델타 다트(Delta Dart)가 차례로 실전 배치됐다. 같은 시기, 미 해군용으로 F11F 타이거(Tiger), F-8 크루세이더(Crusader) 등이 개발돼 실전 배치됐다.
냉전이 격화되자 미국과 소련은 경쟁적으로 신형 폭격기를 실전 배치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전략폭격기는 핵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정받았다. 1947년 12월 보잉 사는 B-47 스트라토제트(Stra-tojet), 1952년 4월 B-52 스트라토포트리스(Stratofortress) 전략폭격기의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보잉은 707 여객기를 모체로 한 KC-135 스트라토탱커(Stratotanker) 공중급유기를 내놓았는데, 이 급유기로 인해 전략폭격기의 장거리 비행이 가능해졌다.
여객기 시장 평정한 보잉-747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초토화됐던 유럽의 항공운송 사업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전쟁 중에 건설한 수많은 비행장과 장거리 항법장치, 군에서 방출된 군용기들은 민간항공사의 운항 재개에 큰 도움이 됐다. 종전과 함께 동서냉전이 바로 시작됐기에 상당수의 미군이 유럽에 주둔하면서 자연스럽게 미국과 유럽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대륙 간 비행이 가능한 고성능 여객기를 개발, 양산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었다. 보잉, 록히드, 더글러스 같은 항공기 제작사들이 전쟁 전부터 개발해온 신형 여객기들을 앞 다퉈 선보였다.
1947년 보잉은 보잉-377 스트라토크루저(Stratocruiser), 록히드는 L-649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과 L-1049 슈퍼 콘스텔레이션(Super Constellation), 더글러스는 DC-6, DC-7을 동시에 선보였는데 이들은 여압구조의 객실을 갖춘 장거리 여객기였다. 프로펠러 여객기들은 제트여객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 내는 물론이고 대서양, 태평양을 잇는 장거리 노선에서 활약했다. 미국 내 항공수요는 폭발적이었다. 1957년 미국 내 도시 간 수송에서 프로펠러 여객기에 의한 항공수송이 철도와 버스 등 지상 운송수단을 앞서기 시작했다.
1949년 7월 영국 해빌랜드 사가 첫 번째 제트여객기를 생산했다.‘디 하빌랜드 DH 106코멧(De Havilland DF 106 Comet)’으로 명명된 이 제트여객기는 세계 각국의 항공사들로부터 많은 주문을 받아 영국 항공산업의 자존심으로 불렸다. 하지만 1954년 1월과 4월, 잇달아 추락해 안전성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하루아침에 외면받았다. 이를 보완한 코멧2가 등장했지만 승객들은 물론 항공사들도 냉담하게 반응했다. 코멧은 전 시리즈를 통틀어 114대가 생산된 것을 끝으로 단종되고, 코멧이 열어 놓은 제트여객기 시장은 미국 항공사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보잉은 피스톤 엔진 여객기 시장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보잉은 제트여객기 개발에 사활을 걸어, 1954년 7월 미국 최초의 제트여객기인 707을 선보였다. 1955년 3월 미 공군이 KC-135A라는 이름으로 이 항공기를 정식 채택하고, 1955년 10월에는 미국 팬암 사가 양산형 707-120 6대를 주문했다. 더글러스 사는 DC-8 제트여객기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1958년 5월 첫 비행에 성공했다.
상업운항에 나선 보잉707과 더글러스 DC-8은, 대서양 횡단 노선에서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일조했다. 보잉은 707을 1000대 이상, 더글러스는 DC-8을 550대 이상 제작해 제트여객기 시장을 장악했다. 1963년 보잉이 3대의 제트엔진을 동체 후방에 설치한 727을 선보이자 2년 후 더글러스 역시 2대의 엔진이 동체 후방에 설치된 DC-9을 내놓았다.
1967년 보잉은 단거리용 737을 선보였다. 737은 시장 진입 초기 단계에는 이전 모델과 같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탁월한 기본설계와 성능을 바탕으로 주문 대수를 늘려나갔고 지속적인 성능개량으로 현재까지 활약하고 있다.
세계 주요 도시들은 제트여객기로 연결됐다. 여객기 수요가 폭증하자 보잉은 1969년 2월, 항공기 역사의 이정표로 불리는 세계 최대 여객기 747을 내놓았다. ‘점보제트’와 ‘하늘의 여왕(Queen of the Skies)’으로 불린 747은 한 번에 400명 이상을 수송할 수 있어 1300대 이상이 판매되었다. 747은 에어버스의 A-380이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제트여객기 로 군림했다.
정찰기 분야서도 괄목할 발전
그 시기 맥도널 더글러스는 DC-10을, 록히드는 L-1011 트라이스타를 내놓았다. 그러나 747의 아성을 뛰어넘지는 못해 두 회사는 여객기 시장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1950~70년대 민간항공 발전에 기여한 마틴, 콘베어, 록히드, 더글러스가 합병이나 구조조정을 통해 사라지거나 여객기 사업을 포기하게 되었다. 더글러스는 전투기 제조업체인 맥도널 사에 합병됐으나, 1997년 8월 맥도널 더글러스가 보잉에 흡수됐기에 여객기 사업 부문은 보잉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냉전 기간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을 염탐하기 위해 다양한 정보전을 전개했다. 첩보위성이 등장하기 전까지 미국은 전략정찰 분야에서 소련을 확실히 압도했다. 비결은 U-2 고고도 정찰기와 SR-71 초음속 정찰기에 있었다. 록히드의 비밀 연구개발팀 ‘스컹크 웍스(Skunk Works)’가 켈리 존슨의 지휘 아래 중앙정보국(CIA)을 위해 개발한 U-2는 적 방공망과 지대공 미사일을 피할 수 있는 20㎞ 고고도를 비행한다. 1956년부터 소련 영공 깊숙이 침투해 전략정찰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거대한 글라이더처럼 생긴 U-2는 1960년 5월 소련의 SA-2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기 전까지 전략정찰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소련 영공을 침범해 전략정찰하는 것을 제한했다. 그러나 여타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U-2를 투입해 정찰했다.
베트남전으로 누린 반짝 특수
1962년 4월 미국은 최고의 기술을 집약시켜 그때까지 개발된 것 가운데 가장 비밀스러운 SR-71 초음속 정찰기의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블랙버드란 별명을 가진 SR-71은 26km 고고도에서 마하 3(시속 3218km)으로 순항하기에 지대공미사일로 격추할 수 없다. 이 정찰기는 초음속 순항비행 시 발생하는 대기와의 마찰열을 견디기 위해 티타늄 합금으로 동체를 만들고 검은색 특수 코팅제로 기체를 감쌌는데, 이는 지금도 모방하기 힘든 최첨단 항공기술이다. SR-71은 완전 퇴역했지만 이보다 빠른 제트비행기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체와 방위산업체들이 특수를 맞았다. 1950년대에는 견줄 수 없지만 다양한 전투기 개발과 획득 사업이 추진되었다. 당시 미 공군과 해군은 자기 임무에 특화된 전투기와 공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의 스타는 5195대가 생산돼 미 해군과 공군, 해병대는 물론이고 영국, 독일 등 동맹국에 판매된 F-4 팬텀II 전폭기였다.
이 시기 미국은 동맹국이 사용하도록 F-5 프리덤 파이터 경(輕)전투기도 개발해 20개국 이상에 수출했다. 미 공군은 F-100, F-101, F-102, F-104, F-105, F-106, F-111, F-4 등의 전투기/공격기를 운용했고, 미 해군은 A-4, A-5, A-6, A-7, F-8, F-4 등의 전투기/공격기를 운용했다. 전자전기, 정찰기, 특수작전기 등 파생형을 포함하면 가짓수는 배 이상으로 증가한다. 일부에서는 다양한 기종을 운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지적했지만 베트남전쟁을 이유로 이 주장은 묵살됐다.
레이저 유도폭탄, 공대지 유도미사일 등이 실용화되면서 항공전자장비 비중이 높아지자 미국의 주요 항공우주산업체는 항공전자 분야에 대한 투자를 확대했다. 일부 회사들은 항공기 생산을 포기하고 항공전자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는 전문화/계열화 현상을 보였다. 헬리콥터의 가치가 재평가되면서 벨과 시코르스키의 가치가 높아졌다. 베트남전쟁 기간에 미국은 소련과의 기술 격차를 벌렸다. 유럽 주요 국가들도 전투기 개발을 추진했지만, 역시 미국을 따라오지 못했다.
베트남전쟁 후 미국은 차세대 전투기 획득 사업을 추진했다. 그 결과 미 해군은 1974년 F-14 톰캣(Tomcat)을, 미 공군은 1976년 F-15 이글을 실전 배치했다. 날개를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는 F-14는 미 해군 항모기동부대의 주력이자 상징으로 활약했다. 712대가 생산돼 미 해군과 이란 공군에서 운용되었다.
스텔스 전투기 F-22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강력한 제공전투기로 평가받은 F-15는 미 공군은 물론 일본 항공자위대, 사우디 공군, 이스라엘 공군에 1198대가 공급됐다. 1988년에는 전천후 전투폭격 능력을 갖춘 F-15E 스트라이크 이글이 등장해 미 공군과 사우디, 이스라엘, 한국, 싱가포르 공군이 운용하게 되었다.
1976년 미 공군의 ‘하이-로 믹스(Hi-Low Mix) 개념’에 따라 F-16 파이팅 팰콘(Fighting Falcon)이 등장했다. F-15가 하이급이니 F-16은 로급 전투기다. F-16은 1978년 8월 미 공군에 실전 배치된 이후 지속적인 성능개량을 해 현재는 전천후 폭격 능력을 갖게 되었다. 총 생산대수는 4500대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이외에 한국을 포함한 24개국에 수출되었다.
1983년에는 F/A-18 호넷(Hornet)이 미 해군에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다. 미 공군의 로급 전투기 사업에서 F-16에 패했던 YF-17이 미 해군에 의해 F/A-18 호넷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1480대가 생산되어 미 해군과 해병대, 호주, 핀란드,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스페인, 스위스 공군 등에서 운용하고 있다. 1999년에는 성능이 강화된 F/A-18E/F 슈퍼호넷이, 2006년에는 전자전 기체인 EA-18G 그라울러(Growler)가 등장했다.
복잡한 방산업체 인수합병
라이트 형제의 역사적인 동력 비행 후 수많은 항공기 제작사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항공우주산업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은 그 정도가 심한데, 미국 항공우주산업 역사에 이름을 남긴 회사 가운데 현재 명맥을 유지하는 회사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냉전이 끝나기 전인 1987년 미국의 군용기 획득 예산은 330억 달러였는데, 냉전이 끝난 1998년은 140억 달러로 대폭 줄어들었다. 그로 인해 미국 항공우주산업계는 재편 과정에 들어갔다. 1994년 5월 노스롭(Northrop)과 그루만(Grumman)의 합병을 시작으로 전례없는 인수합병을 반복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루만, 보트(Vought), 더글러스 사는 미 해군용 전투기를 생산했다. 1967년 더글러스가 맥도널에 흡수돼 맥도널 더글러스(McDonnell Douglas)가 되었다. 맥더널 더글러스는 F-15, F/A-18, KC-10, MD-11 등을 생산하며 미국 항공우주산업 분야를 대표하는 최고의 군산복합체가 되었다. 그러나 차세대 여객기로 주목받은 MD-11과 MD-80/90 시리즈가 실패하고, JSF(Joint Strike Fighter) 차기 전투기 사업에서도 패배하면서 흑자 도산해 1997년 보잉에 흡수합병되었다.
그루만은 1994년 노스롭에 합병돼 노스롭 그루만으로 재탄생했다. 노스롭 그루만은 보트를 흡수했다가 2001년 매각했다. P-47부터 F-105까지 미 공군의 주력 전투기를 생산했던 리퍼블릭 사는 인수합병을 거치면서 페어차일드(Fairchild Aircraft) 사가 되었으나 A-10 선더볼트 II(Thunderbolt II) 생산을 끝으로 도산했다. 그 후 매각과 인수합병을 거듭하다 현재는 이스라엘 엘빗 시스템스(Elbit Systems) 산하에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4500대 이상이 생산됐고 지금도 계속 생산되는 F-16을 개발한 제너럴 다이내믹스는 록히드에 F-16의 생산 부문을, 텍스트론(Textron)에 세스나 부문을 매각해 군용기 사업 부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록히드는 1995년 3월, 미사일 제조로 유명한 마틴 마리에타와 합병해 현재의 록히드 마틴이 되었다. 그리고 전자기기와 미사일을 생산하던 로랄(Loral)을 흡수해 명실상부한 미국 최고의 방위산업체가 되었다.
록히드의 라이벌인 보잉은 1996년 12월, 로크웰 인터내셔널의 국방 및 우주사업 부문을 흡수했다. 2000년 10월에는 휴즈의 우주 및 통신 사업 부문을 인수했다. 2012년 보잉은 록히드 마틴을 능가하는 미국 제1의 항공우주 복합산업체가 되었다. 현재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은 보잉, 록히드 마틴, 레이시온, 노스롭 그루만의 4대 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최대의 화두 스텔스
1991년 걸프전 이후 미국 항공우주산업체들은 후발 주자들의 도전과 냉전 종식이라는 환경 변화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냉전 종식으로 세계대전 위협은 크게 감소한 대신 비정규전, 대테러전 같은 작은 전쟁이 잦아졌다. 그에 따라 큰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든 전투기와 폭격기에 대한 소요가 줄어든 것이 첫째 원인이다. 후발 국가들의 추적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와 유럽은 물론 중국, 인도 등도 강력한 경쟁상대로 부각되고 있다.
미국 항공우주산업 분야의 최대 화두는 누가 뭐라 해도 스텔스 기술이다. 스텔스는 록히드가 SR-71 제작으로 처음 선보였다. 1977년 12월에는 F-117 나이트 호크(Nighthawk)로 명명된 최초의 스텔스 공격기 비행이 있었다. 1982년 실전 배치된 F-117은 1988년 처음 그 존재가 확인되고, 1991년 걸프전 활약상이 공개됨으로써 베일을 약간 벗었다.
1993년부터 실전 배치된 B-2 스피리트(Spirit) 폭격기에도 스텔스 기술이 접목됐다. B-2는 재래식 폭탄은 물론이고 핵폭탄을 싣고 주요 전략 목표를 타격할 수 있다. 1997년에는 세계 최강의 스텔스 전투기로 평가받는 F-22 랩터를 실전배치했다. 현재는 JSF로 불리는 F-35 라이트닝 II가 개발되고 있다. 스텔스 비행기들은 모두 록히드 마틴에서 제작됐다. 현재 미국의 군용기 사업은 스텔스 전투기와 폭격기는 록히드 마틴이, 수송기와 공중급유기는 보잉이 전담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스텔스 기술과 함께 주목받는 차세대 항공 기술 분야가 바로 무인항공기(UAV)다. 미국은 무인항공기 분야에서도 선두를 지키고 있다. RQ-4 글로벌 호크, RQ-7 섀도, MQ-1 프레데터와 MQ-9 리퍼, RQ-170 센티넬(Sentinel) 등을 개발해 활용하고 있다. UAV 사업에는 록히드와 노스롭 그루만 같은 전통적인 항공기 제작사는 물론이고 신생 업체들도 참여하고 있다.
민간항공 분야에서는 미국 유일의 여객기 제작사로 남은 보잉이 급성장한 에어버스와 세계 1위 자리를 놓고 접전을 벌이고 있다. 보잉은 1981년 767, 1983년 757을 선보이고, 1988년에는 747을 개량한 747-400을, 1994년에는 777을 등장시켰다. 1997년에는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제작하던 MD-90 시리즈를 717로 명명해 제품군에 추가했다. 2011년 보잉은 차세대 여객기로 평가받는 787과 747-8 시리즈를 인도하며 에어버스와의 정면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미국은 독보적 최고
많은 전문가가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이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예측한다. 보잉과 에어버스의 접전은 서로 다른 미래 예측과 대응 전략에 따라승패가 갈릴 것으로 보고 있다. 군용기 분야는 냉전 종식과 군축의 영향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F-35의 개발 지연으로 록히드 마틴의 입지는 매우 좁아져 있다. F-35가 혁신적인 미래 전투기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은 비용대비 효과가 강조되는 시점이라, F-22처럼 전체 사업 규모가 축소될 수 있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지만 지난 100여 년 동안 항공우주산업 분야에 축적돼온 미국의 기술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체들은 스텔스, 무인항공기, 바이오연료, 신형 엔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기술 개발에 노력을 집중하고 있다. 항공우주산업에 대한 저변 역시 다른 국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매년 수천 명의 젊은 피를 공급받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계속되는 한 미국의 항공우주산업은 여전히 세계 최고로 평가받을 것이다.
지구패권 이어 우주패권도 잡는다
미국의 우주 개발사
오늘날 미국은 우주 초강대국으로 꼽힌다. 그러나 미국의 우주 개발 과정은 자체 기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만이 아니라 행운과 시대적 상황, 정치적 결단이 맞물려 이뤄진 것이다. 현재 작은 좌절을 겪으며 우주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우리에게 미국의 우주 개발사는 어떤 교훈을 주는가. |
미국의 공식적인 우주 개발 역사는 1958년 익스플로러-1호를 궤도에 진입시키면서부터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노력은 1920년대부터 진행되었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으로 비행하는 항공기를 띄운 것이 1903년이니 항공을 시작하고 바로 우주 개발에 나선 것이다.
시작은 1919년 한 대학 교수가 발표한 작은 논문이었다. 논문 제목은 매우 거창해서 ‘초고도에 도달하는 방법’, 저자는 클라크대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로버트 H. 고다드(Robert Hutchings Goddard) 박사였다. 국내외에서 발간된 우주 관련 책은 대부분 고다드가 우주여행을 꿈꾸며 이 논문을 발표한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고다드가 이 논문을 쓴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머리말에도 나오듯이 고다드는 당시의 고고도 비행체인 풍선보다 더 높은 곳(고도 32km 이상)까지 관측 장비를 실어 보낼 추진 장치로서 로켓 활용성에 대해 언급했다. 현대의 ‘사운딩 로켓(Sounding Rocket·과학관측 로켓)’의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지 우주비행사를 태우고 비행하는 우주선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액체로켓 최초 발명
공학도답게 그는 많은 수식(數式)이 들어간 지루한 문장의 논문을 만들었다. 그는 초고도의 타깃을 설명하기 위한 예로 ‘달(Moon)’을 거명했다. 이것이 미디어의 관심을 끌어 그의 로켓은 SF소설에 등장하는 ‘달 로켓(Moon Rocket)’이 되고 말았다. 1920년 1월 12일자 뉴욕타임스는 고다드 박사가 지구 대기를 넘어 달까지 도달할 수 있는 고효율의 로켓을 발명하려는 내용의 논문을 썼다고 보도했다.
이 과장된 보도로 고다드의 로켓은 도달 고도가 32km에서 38만km로 잘못 알려지고 말았다. 이런 시선이 고다드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그 후 고다드는 평생을 바쳐 연구했건만 그의 로켓이 도달한 고도는 애초 목표의 10분의 1도 안되는 2.7km에 불과했다. 목표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그는 로켓 개발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고다드의 업적은 화약을 이용한 고체추진제의 비효율을 실험실 수준에서 확인하고, 대안으로 액체추진제 로켓을 발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20년간 214개의 로켓 특허를 획득했으니 가히 현대 로켓의 발명자라고 할 만하다. 고다드가 숨진 뒤인 1960년 NASA(항공우주국)가 고다드 특허 무단 사용을 인정해 미망인에게 100만 달러를 지불하기도 했다.
고다드가 찾아낸 액체추진제는 가솔린과 액체산소였다. 가솔린과 액체산소는 구하기 쉽기에 주목을 받았다. 이 연료를 사용하는 최초의 액체로켓 비행이 1926년 매사추세츠 주 클라크대학에서 가까운 그의 친척 농장에서 이뤄졌다. 외피 없이 골조만으로 이루어진 4.7kg짜리의 원시적인 액체로켓은 2.5초 동안 56m를 날았다. 도달고도는 12.5m에 불과했다. 로켓의 자세를 제어할 만한 장치가 없었기에 수직으로 날기보다는 수평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 실험으로 고다드는 로켓 비행에는 추진력과 더불어 자세 제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그는 자세 제어 장치 개발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
이런 업적에도 고다드의 로켓은 미국 로켓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폐쇄적인 연구 방식과 연구비 부족이었다. 그는 다섯 명 정도의 보조 인력을 이끌고 연구했다. 대서양 횡단비행을 한 영웅 찰스 린드버그의 소개로 알게 된 구겐하임재단으로부터 지원받은 연구비로 그가 완성할 수 있는 로켓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로켓은 1940년에 만든 길이 6.7m, 무게 107kg짜리였다. 적은 인력과 적은 자금이 지구 반대편에서 진행된 독일의 V-2로켓(길이 14m, 무게 12t)과 현격한 차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고다드가 미국 우주 개발에 미친 영향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달 로켓 발명가로 미디어에 소개되면서 공개된 그의 연구내용과 논문은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던 아마추어 로켓 연구를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1930년 미국로켓협회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폐쇄적인 성격의 고다드와 정보를 교류하지 못했다. 미국로켓협회에서 만든 로켓도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1938년 제임스 와일드가 만든 재생냉각형(2겹의 연소실벽 사이로 연료를 흘려보내는 방식) 엔진은 모든 로켓 개발자에게 골칫거리였던 엔진 냉각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와일드를 비롯한 미국로켓협회 회원 일부가 1941년 세계 최초로 로켓엔진 개발 회사를 설립했다. 제너럴 모터스를 본떠 ‘리액션 모터스(Reaction Motors)’로 사명을 정했다.
미국 동부에 아마추어 로켓협회가 있었다면 서부에는 프로페셔널에 가까운 조직이 있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의 구겐하임 항공연구소(GALCIT)가 그 것이다. 미국이 우주 개발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구겐하임재단의 역할은 매우 컸다. 구겐하임 항공연구소는 고다드보다도 이후의 미국 우주 개발에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연구소의 중심인물은 헝가리 출신의 항공역학자인 테오도르 폰 카르만(Theodore von Karman)이었다. 이 연구소는 미 육군의 도움으로 파사데나 계곡의 땅을 빌려 ‘자살특공대’란 별명을 얻으며 위험한 로켓 연소 실험을 해나갔다.
이들의 연구 목적은 미 육군으로부터 의뢰받은, 비행기 이륙보조용 추진장치(JATO) 개발이었다. 1943년 제트추진연구소를 설립한 이들은 고체추진제 연구에서 오늘날 복합추진제로 불리는 연료의 토대를 놓았으며 액체추진제 연구에서는 상온 보관이 가능하고 자동점화 기능이 있는 하이퍼골릭(Hypergolic) 추진제의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독일에서 급속히 진행된 연구에 비하면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 수혈통해 급성장
미국이 걸음마를 하던 1940년대 독일은 놀라운 진보를 이뤘다. 주인공은 우주여행을 꿈꾸던 아마추어 로켓동호회 출신의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이었다. 그는 국가 차원의 지원을 받았기에 세계 최고의 로켓 전문가가 되었다. 고다드는 최대 5명을 데리고 연구했지만 독일 정부의 지원을 받은 폰 브라운은 3000여 명의 인원을 거느렸다. 많은 대학과 연구소, 회사들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44년 탄생한 것이 V-2였다. 그러나 독일의 패망으로 이 기술은 고스란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폰 브라운을 비롯한 120여 명의 핵심 인력이 미국 망명을 선택한 것. 이때 상당량의 자료가 소련으로도 넘어갔다. 미국은 소련보다 먼저 V-2 제작 공장이 있는 노르트하우젠과 미텔베르크에 도착해 V-2 100여 기를 만들 수 있는 완성품과 부품을 획득했다. 미국은 V-2 연구원들이 몰래 숨겨둔 설계도도 입수했는데 이것이 미국 우주 개발의 핵심 토대가 되었다.
미국 항공회사들은 V-2 기술을 나사 하나까지 복제해가며 익혔다. 그리고 성능을 개선해가며 V-2 파생품을 만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나온 첫 번째 작품이 미국 최초의 우주발사체가 되는 레드스톤 미사일이다. 이 미사일 개발에는 6·25전쟁이 기여한 바 크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은 탄도미사일의 전략적 가치를 간과해, 탄도미사일을 시급히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폰 브라운은 텍사스 주 포트 브리스에서 V-2 복원 발사를 하는데 자문을 하며 허송세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6·25전쟁을 계기로 미사일 필요성을 절감한 미 육군은 폰 브라운을 앨라배마 주 헌츠빌의 레드스톤 병기창에 전속 배치해 미국형 V-2인 레드스톤을 개발하게 했다. 그러나 폰 브라운은 미사일이 아니라 우주선을 실어 나르는 우주발사체 제작을 꿈꾸고 있었다. 1951년 폰 브라운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V-2 세례를 받았던 런던에서 열린 제2회 국제우주대회에 참석해 유인 화성 탐사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기도 했다(2009년 한국은 대전에서 이 대회를 개최했다). 사거리 325km의 레드스톤 미사일이 완성되기 전 그는 화성 여행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2년 폰 브라운은 ‘콜리어스(Collier’s)’란 잡지에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 우주정거장이나 우주왕복선, 달 탐사선을 묘사한 총천연색 그림을 넣었는데 적잖은 로켓 개발자가 그의 몽상가적 비전에 냉소했다. 그러나 일반 미국인의 반응은 달랐다. 월트 디즈니가 대표적이었다. 그는 폰 브라운의 우주 비전에 매료돼 그의 이론을 영상으로 옮긴 세 편의 우주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디즈니랜드에는 우주여행을 테마로 한 놀이시설을 마련하도록 했다. 특유의 과학 세일즈 능력 덕분에 폰 브라운은 우주여행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전쟁 말기의 독일은 궁핍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V-2 개발을 계속하려면 폰 브라운은 세일즈를 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에 온 그는 국가적 지지가 없으면 우주로 갈 수 없다고 보고 숨어 있는 능력을 꺼낸 것이다. 우주 개발은 국민에게 꿈을 심어줄 수 있어야 발전한다. 그는 우주 개발 전도사 역할을 했다. 한국에도 우주 개발 전도사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우주 개발이라고 하는 하드웨어에만 집중하고 그 토대가 되는 꿈을 만드는 일은 등한히 할까.
그런데 중요한 순간 폰 브라운에게 좌절이 찾아왔다. 지구물리학계의 11개 분야 학자들은 지구와 지구환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일정 기간 지구와 지구환경을 연구하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제도를 만들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1957년 7월 1일부터 1959년 12월 1일 사이에 펼쳐진 3차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었다.
뱅가드의 불행, 불운…
3차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확정된 1955년, 미국은 인공위성을 발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미국에서는 각 군이 우주 개발에 도전하고 있었으므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줄 발사체로 무엇이 선택될지 관심이 집중됐다. 미 육군은 폰 브라운이 개발해온 레드스톤 미사일을 개량한 주피터-C를 이용해 위성을 발사하는 ‘오비터 계획’을 제안했다. 미 해군은 고공 과학탐사용 바이킹 로켓을 발전시킨 뱅가드를 이용한 ‘뱅가드 계획’을 내놓았고, 미 공군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아틀라스를 이용한 ‘월드 시리즈 계획’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자고 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미 육군의 오비터 계획이었다. 인공위성은 저궤도에서 초속 7.7km의 속도로 궤도를 돌아야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다. 이 속도를 내려면 강력한 발사체로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로 쏘아야 한다. 중거리탄도미사일의 실험용이었던 주피터-C의 탄두부는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데, 그때 속도가 초속 7km 정도였다.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려놓는 속도 7.7km에 상당히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군은 발사시험은 하지 못하고 겨우 설계를 하는 수준에 있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은 군사가 아닌 과학 사업이라는 이유로, 해군연구소가 과학용으로 개발하고 있는 뱅가드 계획을 선택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소심함 때문에 미국은 이런 선택을 했다. 당시 미국 사회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소련의 정찰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군사용 위성이 정찰을 위해 적국의 상공을 지나면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리고 군사용 발사체를 이용한 인공위성 발사를 회피해버렸다.
해군의 뱅가드는 3단이었다. 뱅가드 1단의 추력은 주피터-C 1단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 12t 짜리였다. 2002년 우리나라가 발사한 KSR-3의 추력이 13t이었으니, 이보다 낮은 추력으로 위성을 띄우는 우주발사체를 제작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그러나 기간이 짧은 탓에 뱅가드 발사체 완성 시기를 국제지구물리관측년에 맞추지 못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인류 최초의 위성 발사는 1957년 10월 4일 소련이 해냈다. 언론으로부터 엄청난 질책이 쏟아지자 다급해진 백악관은 그해 12월로 예정된 뱅가드의 3차 시험발사를 실제 발사인 것처럼 과장해 발표했다. 그때부터 뱅가드의 운명은 꼬이기 시작했다.
뱅가드는 여러 시스템이 미완성 상태였기에 여러 차례 시험발사가 필요했다. 그런데 정치적 이유로 3차 발사를 공개 발사로 전환했다. 1957년 12월 6일 뱅가드는 발사 직후 바로 추락해, 미국은 세계적인 망신을 사게 되었다. 이것이 폰 브라운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되었다. 스푸트니크 쇼크를 받은 미국인들은 미국인이 만든 것이든 독일인이 만든 것이든, 과학용이든 군사용이든 따지지 않게 된 것이다. 냉전의 상징인 우주전쟁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냉전은 미국의 우주 개발을 발전시킨 최대의 원동력이었다.
‘구원 투수’ 폰 브라운의 성공
폰 브라운이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V-2는 생산 후 시일이 지나면 성능이 저하됐다. 이 때문에 미 육군은 1956년부터 새로 만든 주피터-C 여러 기를 창고에 장기 보관하는 시험을 했다. 위성 발사 명령이 떨어지자 폰 브라운은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제29호 주피터-C 로켓에 운명을 걸었다. 폰 브라운은 발사체에 대해서는 자신했다. 그러나 위성 쪽은 불안해했다.
스푸트니크-1호를 제작한 소련의 세르게이는 발사 날짜를 앞당기기 위해 ‘꼼수 위성’을 제작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임무를 수행하려면 실험장비를 탑재한 위성을 올려야 하는데, 시간이 부족해 그런 장비가 없는 위성을 올린 것. 시간이 부족하기는 폰 브라운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아이오와주립대학의 제임스 반 앨런 박사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의 장비를 갖춘 위성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58년 1월 31일 V-2에 뿌리를 둔 레드스톤 미사일의 변형인 주피터-C가 발사됐다.
우주발사체로서 주피터-C는, ‘주노(JUNO)-1’으로 명명되었다. 주노-1은 익스플로러-1호 위성을 성공적으로 지구 궤도에 올려놓았다. 미국 최초의 위성인 익스플로러-1호는 지구 주위의 방사능 띠를 발견하는 등의 혁혁한 성과를 올리며 1970년 3월 31일까지 궤도에 남아 있었다. 이 성공으로 나치의 과학자인 폰 브라운은 일약 주전투수가 되었다. 다음 경기는 그가 독일우주여행협회의 꼬맹이였던 시절부터 꿈꾸던 유인 우주비행과 달 비행이었다. 익스플로러-1호 성공으로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소련에 추월당해 구겨진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미국은 연구기구의 설립을 추진했다.
그에 따라 1958년 10월 1일 오늘날까지 가장 유명한 연구·행정기관인 국립항공우주국(NASA)이 출범했다. NASA는 X-1이란 초음속 로켓기 등을 개발한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 산하의 연구센터인 랭글리·에임즈·루이스·에드워드공군기지와 미국 최초로 탄도미사일을 개발한 제트추진연구소, 뱅가드 로켓과 위성을 연구하던 미 해군연구소(그후 고다드우주비행센터로 개칭)와 폰 브라운이 이끌어온 육군 탄도미사일개발국(그후 마셜우주비행센터로 개칭)을 흡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군의 우주 조직은 빠졌다는 점이다. 덕분에 공군은 군사 목적의 우주 연구를 계속하게 되었다. 미 공군은 우주사령부를 설치해 수많은 군사위성과 지상에서 발사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관리하게 되었다.
NASA 출범 불구 소련에 또 뒤져
NASA는 출범 5일 만에 원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다. 유인 우주비행인 ‘머큐리(Mercury)계획’을 세운 것이다. 미국 과학계는 유인 우주비행과 관련한 제반 기술을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에 머큐리 계획은 해볼 만한 도전이었다. 신뢰성 있는 발사체인 레드스톤이 있고, X-1 유인 로켓기가 초고속으로 고고도 비행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ICBM의 탄두 재돌입체 귀환실험을 통해 우주선 귀환과 관련된 기술도 확보해 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도 유인 우주비행을 준비할 것으로 예측했다. 미국은 유인 비행에서는 소련을 앞서기로 하고 최우선으로 머큐리 계획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NASA와 국방부를 비롯한 정부 조직과 항공우주 산업계, 교육기관 등에 200여만 명의 인력을 투입했다. 국가 과학 인력을 총동원한 것이다. 개발자들은 ‘깡통(Can)’이란 별명으로 불린 1인승 유인 캡슐과 이 캡슐을 싣고 발사할 수 있도록 레드스톤의 설계를 변경하는 일에 매달렸다. 발사가 잘못됐을 때 캡슐에 있는 우주비행사를 비상 탈출시키는 하드웨어 개발도 추진했다.
그리고 유인 우주비행을 할 우주비행사 선발을 추진했다. 1959년 4월 최초의 우주비행사 후보로 군인 신분의 시험비행조종사들이 대거 선발되었다. 그러나 시스템 완성 일정이 불분명했다. 1.3t의 머큐리 우주선을 궤도에 진입시킬 방법은 당시 공군이 개발해 발사체로 쓰는 ICBM 아틀라스를 개량하는 것뿐이었다. 시스템 완성 일자가 불확실했던 것은 아틀라스를 개조한 발사체 개발 일정이 불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준비를 갖추자 시험을 할 필요가 있었다. 신체구조가 사람과 가장 비슷한 침팬지를 태우고 쏘아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궤도비행에 앞서 준(準)궤도(포물선)비행을 준비했다. 대륙간탄도미사일처럼 우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비행체에 사람을 태워 발사해보는 것이다. 미국은 최초 유인 우주선 발사 일정을 1960년 10월로 잡았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연기했다. 그러는 사이 소련에 또 선수를 빼앗겼다.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을 태운 인공위성 보스토크-1호가 지구 궤도에 올라가 선회하다 지구로 무사히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5월 5일 미국은 앨런 셰퍼드를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선정했다. 그러나 앨런 셰퍼드는 15분간의 준궤도비행을 했을 뿐이다. 진정한 궤도비행은 가가린보다 10개월 늦은 1962년 2월 20일 머큐리-아틀라스6호를 탄 존 글렌 우주비행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발사체인 아틀라스 개발이 지체됐기 때문에 미국은 최초의 우주인 탄생에서도 소련에 뒤진 것이다.
이는 미국과 소련의 발사체 성능 차이에서 비롯됐다. 미국은 추진력을 높여가며 여러 발사체를 개발했으나 소련은 R-7이라는 대추력 발사체를 바로 개발했다. R-7은 추력이 워낙 셌기에 간단한 변형만으로 무인·유인 우주선을 모두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미국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결과 소련의 우주기술을 과대평가해 소련을 이기기 위해 몇 단계를 뛰어넘는 극약처방을 쓰게 되었다. 유인 달 착륙, 아폴로(Apollo) 계획을 세운 것이다.
9년 만에 이룬 달 착륙
유인 달 착륙은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됐다. 정치가 개입했으니 미국의 우주 개발 과정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그 후유증을 미국은 지금도 겪고 있다. 미국은 유인 우주비행 성공 20일 뒤인 1961년 5월 25일 유인 달 착륙 계획을 내놓았다. 미 국회 상하의원 특별합동연설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대 이내에 우주비행사를 달에 착륙시키고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달 표면을 찍은 변변한 사진 하나 없던 시절, 미국은 9년 안에 달까지 갈 로켓과 우주선, 착륙선, 우주복 등을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경험이 쌓인 오늘날에도 위성을 기획해 발사하는 데 5~7년이 걸리는데, 그러한 경험이 없는 시절 9년 안에 달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국민적 관심이다. 현재의 기술을 뛰어넘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치적 국민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은, 한국형 발사체 개발에 노력하는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절한 우주 개발 과정은, 1단계로 유인 지구 궤도 비행을 하고, 2단계에서는 정기적인 우주비행을 할 수 있도록 우주왕복선과 우주정거장 등을 짓는 것이다. 3단계에서 달이나 화성으로 유인 우주비행을 한다. 이러한 단계를 밟아야 하니 폰 브라운도 1980년대에 이르러야 달 비행이 가능하다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2단계를 건너뛰어 바로 3단계로 달려갔다. 달 착륙을 한 후 우주왕복선과 우주정거장을 만들게 된 것이다.
케네디 연설 이후 유인 달 착륙을 위한 여러 비행법이 제안되었다. 논란 끝에 짧은 기간에 목표 달성할 수 있지만 위험성을 내포한 비행법이 채택되었다. NASA 랭글리 연구센터에 근무하는 존 후볼트의 끈질긴 설득으로 채택된 이 비행법은 ‘달 궤도 랑데부’ 방식이었다. 우주선과 착륙선을 명확히 나눠, 착륙선의 일부를 달에 버리고 최소한의 무게만으로 지구로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의 장점은 개발 가능한 로켓으로 비행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머나먼 달 궤도에서 일부를 버리고 달에서 이륙한 착륙선의 일부와 우주선을 도킹시켜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튼 비행법이 확정되자 NASA가 다음으로 할 일은 랑데부와 도킹, 우주유영 등의 비행 기술을 마스터하는 것이었다. 달 로켓 개발도 ‘우주여행 전도사’인 폰 브라운에게 맡겨졌다. 이 사업은 제미니(Gemini) 계획으로 명명됐다. 3.8t인 2인승의 제미니 캡슐은 미국 최초의 진정한 우주선이라 하겠다. 유인 우주비행을 위한 머큐리 계획에서 우주선은 자세제어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궤도 변경 같은 우주비행은 불가능했다. 우주비행사가 타고 있었지만 그는 할 일이 없었다.
제미니 우주선(캡슐)은 궤도 변경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고 최장 14일간 우주인의 생활이 가능했다. NASA는 자체 발사체를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군이 ICBM용으로 만든 타이탄(Titan)-2를 발사체로 사용했다. 타이탄은 중국의 창정(長征) 발사체처럼 독성 추진제를 사용했다. 그러나 제미니 계획도 2인승 우주선 보스호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소련의 보스호트 계획에 한발 뒤졌다. 제미니 계획에 따라 미국은 1965~1966년 10회 우주비행을 했다. 이를 통해 달 착륙에 도전할 우주비행사들은 우주 기동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달 착륙을 하기 위해 폰 브라운이 이끄는 NASA 팀은 ‘새턴(Saturn) 시리즈’라는 새로운 발사체 개발에 나섰다. 이들이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개발시간을 줄이는 것이었다. 최초의 새턴인 새턴-1은 H-1 엔진을 8개 묶어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업이 새턴-5의 완성으로 승부를 보게 되었다. 새턴-5 발사체는 3 명의 우주인이 탄 우주선과 착륙선 등 45t의 화물을 초속 11.1km라는 엄청난 속도로 38만km 떨어진 달까지 운반할 수 있어야 했다.
성공, 그러나 한여름 밤의 꿈
이륙 무게(2800t)가 워낙 무거웠기에 1단은 케로신과 액체산소를 추진제로 사용해 680t 추진력을 내는 F-1엔진 5개로 구성했다. 2단은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추진제로 사용해 105t 추진력을 내는 J-2엔진 5개로, 3단은 J-2 엔진 1개로 구성했다. 무지막지하게 크고 우수한 발사체를 만든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달 탐사 경쟁은 초대형인 1단 로켓 개발에서 승부가 갈렸다. 거대한 케로신 엔진의 단점인 연소 불안정성을 미국은 기술적으로 극복해냈으나 소련은 그러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은 F-1보다 훨씬 작은 155t 추력의 NK-15 엔진 30개를 묶어 ‘N-1’으로 명명한 1단을 만드는 무리수를 두었다. 당시 소련에는 30개의 엔진으로 구성된 N-1로켓을 연소시험해볼 수 있는 지상 시설이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소련의 어려운 사정을 알지 못했다. 1968년 9월 19일 미국의 정찰위성 KH-8이 소련이 달 여행을 위해 만들고 있는 N-1 발사체가 바이코누르 발사장에 세워진 모습을 촬영했다. 웅장한 N-1의 모습은 미국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미국은 유인 달 착륙마저 소련에 선두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에 빠졌다.
백악관과 CIA는 NASA에 빨리 사업을 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는 아폴로-1호의 화재사고로 3명의 우주비행사를 잃고(1967년) 다시 유인 비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소련에 앞서려면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아폴로-8호의 임무를 변경해 달을 향하도록 했다. 그 시기 소련의 우주비행사들도 N-1 탑승을 주장했지만 로켓 시스템이 불안전해 허가를 받지 못했다. 그 결과 1968년 12월 21일에 발사된 미국의 아폴로-8호가 유인 달 선회 비행에 먼저 성공하게 된다. 달 주변을 돌고 왔으니 남은 것은 착륙이었다. 몇 번의 시험을 걸쳐 1969년 7월 21일 2명의 우주비행사가 탄 아폴로-11호의 착륙선 이글호가 ‘고요의 바다’로 명명된 달 표면에 내려앉아 성조기를 꽂는 데 성공했다.
1957년부터 진행된 12년간의 우주 경쟁은 미국의 최종 승리로 끝났다. 그 후 달 비행은 하룻밤의 꿈처럼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20호로 계획된 아폴로 사업은 17호로 중단되었다. 달 경쟁에서 승리한 미국이나 패배한 소련은 모두 막대한 예산을 사용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 결과 우주 개발은 긴 침체기를 맞는다. 시간이 지나자 정치적이 아닌 실용적, 순수한 과학 탐사 목적의 우주 개발이 조용히 부활했다.
사람 사로잡는 것은 정보
미국은 태양계 행성 전체에 대한 탐사도 실시했다. 이 사업도 소련과의 경쟁 속에 시작됐지만 소련은, 미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소련은 코룔로프 연구소를 중심으로 폐쇄적이고 독점적으로 우주 개발을 진행했으나, 미국은 NASA가 중심이 돼 산학연이 모두 참여하는 개방적이고 경쟁적인 구도로 진행한 것이 이 차이를 낳았다.
1970년대 미국은 달과 행성, 행성 공간의 기초 조사를 위한 ‘파이어니어 프로그램’, 유인 달 탐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레인저 프로그램’(달 근접 사진 획득이 목적)과 ‘서베이어 프로그램’(로봇 탐사선의 달 착륙 목적), 수성·금성·화성에 행성 간 로봇 탐사선을 보내는 ‘마리너 프로그램’, 2대의 화성 착륙선을 보내는 ‘바이킹 프로그램’, 목성·토성·천왕성·해왕성을 그랜드 투어하는 ‘보이저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 마디로 1960~70년대는 우주 탐사의 황금기였다.
주춤해진 우주 개발
이러한 우주 개발에서 노다지를 건져낸 것은 위성통신 분야였다. 1960년 8월 미국은 30m 크기의 알루미늄 코팅 풍선인 에코1호를 이용한 전파 반사시험을 했다. 1962년 미국 통신회사 AT·T 소유의 최초 민간위성 텔스타(Telstar)-1호가 신호를 수신-증폭-발신하는 방식으로 컬러TV 프로그램을 대서양 너머로 전송했다. 위성통신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우주를 통해 전송된 최초의 영상은 미국 자유의여신상과 프랑스의 에펠탑이었다.
미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시험 통신위성 릴레이(Relay)-1호는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을 지구 반대편인 일본으로 신속히 중계해, 일반인도 우주 개발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을 사로잡는 것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로 옮겨지는 정보였던 것이다.
텔스타나 릴레이 같은 저궤도위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텔스타는 150분에 지구를 한바퀴 도는 빠른 주기(週期) 때문에 20분 정도만 통신이 가능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도 3만5786km에 정지위성을 띄워야 한다. 1964년 미국은 최초의 정지위성인 신콤(Syncom)-3호를 올려 도쿄(東京)올림픽을 중계하는 성과를 올렸다. 위성통신 분야는 급속히 상업화되었다. 그 결과 정지통신위성을 관리하기 위해 국제기구인 인터샛(INTERSAT)을 워싱턴DC에 두게 되었다. 소련은 지리적으로 적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지위성 부문에서도 미국에 뒤졌다.
유인 우주비행에서 우주비행사의 눈을 통해 지구관측의 실효성을 깨달은 미국은 ‘인공 눈’인 카메라를 위성에 탑재하게 된다. 이 위성 덕분에 군사적인 정찰, 기상 관측 등 다양한 지구 관측이 가능해졌다. 1961년 발사된 타이로스(Tiros)-3호는 미국 최초의 기상위성이다. 기상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것은 항법용 GPS 위성 분야다. 위성항법기술은 잠수함 발사 핵탄두인 폴라리스 미사일에 위치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1983년 대한항공의 민항기가 소련 영공에서 소련 전투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격추되자 미국은 민간에도 GPS 정보를 제공하게 했다.
부분 재사용 하는 왕복선 사업 승인
1980년대 이후로 미국의 우주 탐사는 주춤해졌다. 1980년대 우주왕복선의 개발과 운영에 막대한 예산이 쏠리면서 우주 탐사는 암흑기를 맞았다. 허블우주망원경이나 갈릴레오 탐사선 등 일부 대형 프로젝트는 진행됐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예전만 못했다. 돌파구는 주어진 예산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맞춤형 프로젝트의 진행. ‘보다 빠르고 보다 좋고 보다 값싸게’란 모토로 디스커버리 프로그램이 진행되었고, 이전에는 생각하지도 못한 화성로봇차량(Mars Pathfinder), 소행성 근접(NEAR Shoemaker), 혜성 충돌(Deep Impactor), 혜성물질 수집(Star Dust) 등이 저렴한 비용으로 성과를 이루었다. 옛날만큼 화려한 성과는 적었지만 과학 교과서의 빈칸을 채우는 과학적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1958년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1700여 개가 넘는 위성을 우주로 발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2년 마지막으로 아폴로-17호를 발사하기 전 미국은 다음 목표를 준비했다. 아폴로 사업에 천문학적 예산이 들어가는 동안 미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이 나빠졌기에 경제적으로 우주에 접근할 수 있는 우주 수송시스템이 요구되었다. 핵심은 1회용이 아닌 재사용 로켓을 만드는 것이었다.
재사용 우주선의 개발은 오래전부터 예측되었다. 폰 브라운의 ‘페리 로켓’이 대표적이다. 재사용 우주선은 달로 가는 터미널 역할을 할 우주정거장 건설에 적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우주 개발 초기 미국은 일종의 우주왕복선인 X-20 등 우주비행기의 가능성을 검토했지만, 러시아와의 달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개발이 쉬운 1회용 로켓과 캡슐형 우주선 개발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1970년 초 미국은 우주왕복선과 함께 우주정거장 개발을 진행했으나, 예산 문제로 우주왕복선 개발만 진행했다. 우주왕복선 개발은 우주정거장 건설 지원이 아니라 우주실험실과 군사 및 상업위성을 저렴하게 발사하고 인공위성을 수리하기 위해 추진되었다.
그러나 완벽히 재사용하는 왕복선 개발 사업은 예산 부족으로 포기되고, 부분 재사용하는 왕복선 사업이 의회의 승인을 받게 되었다(1972년). 이것이 훗날 우주왕복선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게 된다.
우주왕복선 개발에는 신기술이 요구되었다. 재사용 가능한 고성능 엔진과 열방호 시스템 개발이 지연됐기에 1979년으로 예상되던 처녀비행은 1981년으로 늦춰졌다. 우주왕복선의 궤도선에 부착되는 3개의 메인 엔진은 재사용을 보장할 만큼 고성능이어야 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극저온의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사용하는 엔진을 만들었다. 한 방울도 헛되게 버리지 않고 모두 사용하는 ‘다단 연소’방식을 통해 세계 최고의 비추력(比推力)인 453초를 달성했다.
우주왕복선의 영욕
예산상의 이유로 저렴한 고체추진제 부스터가 유인 발사체에 처음 사용되었다. 한번 불이 붙으면 끌 수 없는 것이 고체추진제의 단점이지만, 미니트맨 ICBM 개발 등을 통해 확보한 고체추진제 기술이 있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채택했다. 1986년에 폭발한 챌린저호 사고는 고체 부스터 부품의 문제와 함께, 적절하지 않은 날씨에 발사를 강행한 것도 원인이었다. 당시 NASA는 우주왕복선에 냉담해진 국민의 관심을 다시 일으키고자 학교선생님을 임시 우주비행사로 뽑아 우주로 보내는 이벤트를 펼쳤다. 발사과정은 전국의 학교에 생중계하기로 했다. 그런데 몇 번의 연기로 이벤트가 망쳐질 것 같자 기술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발사를 강행했다가 대형 사고를 냈다. 이 사고를 계기로 고체부스터를 개조했기에 고체부스터는 우주왕복선이 폐기될 때까지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우주왕복선의 핵심인 궤도선은 소형 여객기 크기다. 삼각형 날개를 갖고 초음속에서 활공비행을 한다. 우주선으로는 처음으로 우주비행사가 조종해 착륙시킬 수 있다. 7명이 탑승할 수 있는 거주공간이 마련돼 있고 대형 화물을 운반하기 위한 화물칸도 있었다. 우주로 갈 때는 24.4t, 귀환할 때는 14.4t의 짐을 실을 수 있다.
1984년에는 궤도에 올라갔다가 고장 난 위성 2대를 회수해 지상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2대의 위성은 수리 후 다시 우주로 발사되었다. 우주왕복선의 진면목을 보여준 활약이었지만 챌린저호 사고 후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이런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궤도선의 안전한 지구 귀환을 위해서는 1회용 우주선의 열방호 시스템과는 다른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이런 요구로 개발된 것이 내열 실리카 타일이었다. 타일이라고 하지만 90%가 공기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실제 느낌은 스티로폼에 가깝다. 2003년 컬럼비아호가 공중에서 폭발했을 때 약한 내열 타일이 원인으로 지적받았다. 하지만 분석 결과 의외의 결론이 나왔다.
독립조사위원회의 사고 재현 실험 결과 궤도선에 부착된 열방호 시스템 중에서 강도가 높은 날개의 전면에 부착된 강화 카본-카본 패널에 구멍이 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구멍은 발사 도중 외부 연료탱크에서 떨어져 나온 스프레이식 폼 타입의 단열재와 충돌로 생긴 것이었다. 이 사고로 우주왕복선 안전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으며 왕복선 사업의 폐기를 앞당긴 계기가 되었다.
우주왕복선은 컬럼비아(1981년), 챌린저(1983년), 디스커버리(1984년), 아틀란티스(1989년), 엔데버
(1992년)가 완성돼 2011년까지 135회의 비행을 했다. 1998년부터는 우주왕복선 본연의 임무인 우주정거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이런 성적에도 2회의 사고로 14명의 우주비행사를 잃었다. 비상탈출 장치가 없는 위험한 시스템과 고액의 발사 및 유지비용, 그리고 노후화 등으로 우주왕복선은 퇴역하고 말았다.
대신 민간 우주선을 빌려 쓰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상업용 궤도 수송 서비스 계획에 따라 NASA가 개발비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민간 우주선 개발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2012년 5월 스페이스X사의 드래곤 호가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민간 우주 시대의 장이 열렸다. 정부의 지원으로 성장한 풍부한 기술과 인력이 우주를 비즈니스 무대로 보는 벤처기업가들과 만나 신사업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ISS와 우주산업 생태계 재편성
우주 개발의 궁극의 목표는 무엇일까? 우주 몽상가뿐만 아니라 과학자들도 꿈꾸어온 ‘우주 거주’일 것이다. 거주를 위한 우주 공간 마련과 우주정거장 건설은 우주 개발의 종착점이다.
1970년대 미국은 베트남 전쟁과 사회복지 프로그램에 대한 지출 확대로 NASA의 예산을 축소했다. 그에 따라 우주정거장 계획을 취소하고 우주왕복선에만 올인했다. 하지만 소련이 1971년 살류트 우주정거장을 띄우자, 실험형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 계획을 체면치례 차원에서 진행하게 된다. 1981년 우주왕복선이 완성되고 소련과 신냉전을 벌이면서 우주정거장 프로젝트를 부활했다. 미국은 유인 달 착륙처럼 소련이 쫓아올 수 없는 규모의 사업으로 우주 헤게모니를 잡고자 했다. 우주 경쟁으로 공산주의를 제압하려 한 것. 1984년 레이건 대통령은 새로 마련하려는 우주정거장의 이름을 ‘자유(Freedom)’로 명명했다.
미국은 자유진영의 유럽, 일본, 캐나다를 끼워 넣어 이 사업을 펼쳤지만, 1986년 챌린저호 폭발사고로 설계도만 그리고 더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1991년 소련 붕괴로 신냉전이 종식되자 자유호 계획은 폐기됐다. 소련 붕괴로 만들어진 화해 무드는 우주정거장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다. 1986년부터 미르우주정거장을 운영해 우주체류 기술에 경쟁력이 있는 러시아가 미국의 자본을 만난다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노후한 미르를 대체하는 미르-2와 축소된 자유호를 결합한 ‘국제우주정거장(ISS)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조금 지연된 형태로 나아가던 ISS 건설은 2003년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의 폭발사고로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 사고로 2006년 조시 W. 부시 행정부는, ISS를 짓기 위한 목적의 우주왕복선 비행만을 허용해 2011년에야 ISS는 완공될 수 있었다. 이 시기 우주왕복선 사업이 종료됐다. 우주정거장을 완성했으면 우주인과 물자를 실어 나를 왕복선이 있어야 하는데, 우주정거장 완성이 목전에 달했을 때 정작 왕복선 사업은 종료되는 엇박자를 넣은 것이다.
ISS는 현재 러시아의 실험모듈을 결합하는 마지막 숙제를 남겨놓고 있다. ISS는 419t의 무게에 길이가 108m에 달한다. 330~410km의 고도를 유지하며 매일 지구 둘레를 15.7회 돌고 있다. ISS에는 11년째 우주인들이 생활하고 있다. 우주왕복선을 폐기한 후 미국은 전적으로 러시아의 우주선에 보급을 의존했다. 그러다 지난 5월 25일 스페이스X사의 민간우주선(드래곤)이 도킹에 성공함으로써 민간 우주선으로 보급하는 길을 열었다.
개척정신 DNA 가진 미국
수송의 한계로 현재 ISS에는 겨우 3명이 생활하고 있다. 1명당 하루 숙박료는 750만 달러 정도다. 천문학적 숙박료이지만 지난 14년 동안 우주인들은 돈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500여 건이 넘는 과학실험을 실시했다. ISS의 가장 큰 문제는 노후화다. 미국은 2020년까지 유지보수 예산을 투입하겠다고 했다. 2028년까지 ISS는 성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국도 정권 교체에 따라 하던 사업들이 춤을 춘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달 재방문과 화성 유인 탐사, 소행성 유인 탐사 사업이 오락가락한다. 하지만 분명한 원칙은 있다. ‘근(近)지구’는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을 후원하는 차원으로 추진하고, ‘심(深)우주’는 정부가 담당한다는 점이다.
1967년 마산 출생. 동의대학교 졸업. 한국우주정보소년단 과학팀장, 천문우주기획 우주팀장 역임. 국내 최초로 우주비행사캠프 운영. 저서 ‘우주개발 숨은 이야기’ 등
20세기 과학과 정치가 오묘하게 맞물린 덕에 급성장한 미국의 우주 개발은 21세기에는 상업적인 영역에서 번성할 것이다. 이러한 재편성을 통해 미국은 여전히 우주 주도권을 잡으려 할 것이다. 미국은 미지에 도전하는 개척정신이 돈보다 귀한 유전인자임을 알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소련보다 늦게 출발 그러나 다탄두로 역전승
미국의 미사일
국가 운명을 걸고 소련과 벌인 개발 경쟁에서 먼저 성과를 내기 위해 미국의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것. 파괴의 무기이자 우주 개발을 가능케 한 두 얼굴을 가진 미국의 ICBM 개발사를 살펴본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독일로부터 단거리탄도미사일인 V-2 관련 과학자와 기술자를 확보했지만 탄도미사일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해서는 소홀히 생각했다. 명중률이 낮은 탄도미사일보다는 기존의 장거리 폭격기를 훨씬 값싸고 믿을 만한 무기로 평가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탄도미사일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1946년부터 미 공군은 장거리 미사일 연구를 시작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미사일의 추진 장치는 로켓이 아닌 공기흡입식의 램젯(ramjet) 엔진이었다. 연료의 연소를 돕는 산소를 몸체에 지니고 비행해야 하는 로켓에 비해 주위의 공기를 이용하는 제트엔진은 효율성이 좋아 장거리 비행에 적합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북미항공(North American Aviation)사의 MX-770, 이른바 ‘나바호(Navaho)’ 프로젝트다.
하지만 복잡한 구조로 인해 개발이 쉽지 않았는데 문제는 램젯이 아닌 로켓엔진에 있음이 발견됐다. 나바호의 램젯 엔진은 마하 3의 환경에서 작동해야 한다. 이러한 속도를 내려면 나바호에는 보조 추진장치로 로켓엔진을 붙여야 했다. 이 때문에 나바호를 만들려면 보조 추진장치인 로켓엔진을 먼저 완성해야 했다.
북미항공의 로켓다인 사업부는 V-2 로켓을 토대로 나바호를 위한 여러 로켓엔진을 개발했다. 12년간 계속된 나바호 프로젝트는 1958년 탄도미사일에 밀려 중단됐다. 그러나 보조 추진장치로 개발된 로켓엔진 기술은 다른 로켓 개발에 전용돼 ICBM과 우주발사체 개발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6·25 계기 탄도미사일 개발 박차
나바호에서 파생된 로켓엔진 기술은 미 육군의 레드스톤 단거리미사일에 가장 먼저 이용되었다. 레드스톤은 6·25전쟁 발발 후 핵탄도미사일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미국이 개발한 최초의 핵미사일이다. 6·25전쟁은 미국 미사일 개발에 ‘터닝 포인트’ 역할을 했다.
V-2의 미국판이라 할 수 있는 레드스톤은 2t의 핵탄두를 사거리 800km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러자 원거리 공격을 하는 공군이 반발해 사거리가 320km로 축소되었다. 이 마찰을 계기로 320km 이하는 육군, 이상은 공군이 작전하는 영역으로 정리됐다. 미국에서 ICBM 개발은 공군의 고유 영역이 되었다.
사거리가 짧은 레드스톤으로 소련을 위협하려면 소련과 멀리 떨어진 미국에 배치할 수는 없었다. 유럽에 배치해야만 했다. 그러나 유럽에 배치된 레드스톤은 미국에 있는 것처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운영할 수 있는 대륙 간 비행 장거리탄도미사일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었다.
미 공군은 제트추진을 하는 나바호 사업 외에도 MX-774 계획으로 로켓추진용 장거리탄도미사일의 가능성을 연구하다 1947년 중지한 바 있다. 6·25전쟁 직후 공군은 장거리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MX-1593 계획을 추진했지만, 이 사업의 우선순위는 낮았다.
1953년 소련이 수소폭탄 시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은 인식을 바꿨다. 소련에 맞설 군비 증강을 하려면 최우선으로 ICBM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의 미사일은 유도시스템이 발전하지 못해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 하지만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수소폭탄을 탄두로 달아 발사하면 명중을 시키지 못해도 적의 전략시설을 제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공군이 주도한 ICBM 개발은 순탄치 않았다. 미국이 주춤하고 있던 1957년 10월 소련이 ICBM인 R-7을 이용해 세계 최초로 스푸트니크-1호 인공위성을 쏘아올림으로써 미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소련과의 ‘미사일 갭(missile gap)’을 메우는 것이 가장 화급한 일이 되었다. 미국은 기존의 로켓 기술을 총 집합하고, 개발하고 있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을 생산해 긴급 배치했다. 2~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완성한 IRBM이 공군의 ‘토르(Thor·천둥의 신, 전쟁의 신)’와 육군의 ‘주피터(Jupiter)’다.
토르 IRBM은 1.4Mt의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 탄두를 달고 영국에서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었다. 이때의 원형 공산오차(탄두의 절반이 중심에서 빗나가는 정도)는 2km 정도였다. 미국은 1958년부터 토르 IRBM 60기를 영국에 긴급 배치했다. 토로는 미국이 ICBM을 개발해 본격 배치에 나서는 1963년부터 퇴역하게 된다.
미 육군이 레드스톤의 발전형으로 개발한 주피터 IRBM은 사거리가 2400km에 달했다. 주피터는 개발 후 공군으로 넘겨져 1959년부터 45기가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되었다. 소련은 터키와 이탈리아에 배치한 주피터에 자극받아 1962년 미국의 턱밑인 쿠바에 그들의 핵미사일을 배치하려고 했다.
그에 대해 미국이 강력히 대응함으로써 핵전쟁을 뜻하는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것 같은 전운이 감돌았다. 이 쿠바위기는 소련이 쿠바에 대한 핵미사일 배치를 포기하고 미국은 이탈리아와 터키에 배치한 주피터 IRBM을 철수하면서 마무리됐다. 미국이 소련 인근 국가에 배치한 IRBM을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본토에서 모스크바를 때릴 수 있는 ICBM을 개발해 실전 배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쿠바위기가 진행될 때 미국은 미국 최초의 ICBM인 아틀라스를 완성했다.
1세대 ICBM, 아틀라스·타이탄
ICBM은 사거리 5500km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가리킨다. 이 미사일을 개발할 때 가장 큰 문제점은 탄두의 중량이다. 1950년대 초 미국이 최초로 실험한 수소폭탄의 무게는 62t이나 되었다. 이렇게 무거운 폭탄은 탄두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1~3t 정도로 줄여야 했다. 미국이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수소폭탄의 경량화였다.
1951년의 연구에서, 3t의 탄두를 9260km까지 운반하려면 544t의 추력을 가진 48m 길이의 대형 ICBM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 ICBM 개발에는 10년 이상이 소요된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연구해보자 탄두 중량의 경량화가 예상보다 빠를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1953년 미국은 ‘1960년쯤에는 1메가톤의 폭발력을 가진 680kg의 수소폭탄 탄두(열 핵탄두)를 개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틀라스’로 명명한 ICBM 개발 계획이 본격화했다.
1954년 미국은, 아틀라스의 제원을 1.3t의 탄두를 달고 1만190km를 비행하며, 길이는 25m, 추력은 160t으로 잡았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 비하면 요구성능은 절반 정도로 줄었지만, 개발기간까지 줄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아틀라스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혁신적인 기술 개발이 선행돼야 했다.
미사일이 대륙 간을 날아가려면 초속 7km란 놀라운 스피드가 필요하다. 이 속도를 내려면 아틀라스에 탑재하는 로켓은 기존 로켓과는 다른 기법으로 제작해야 한다. 우선 가벼워야 한다. 가볍게 만들수록 로켓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지기 때문이다. 로켓은 몸체 안에 연료(RP-1이란 고순도 등유)와 산화제(액체산소)를 싣고 발사된다. 발사되는 순간부터 전체 중량의 70~80% 이상을 차지하는 연료와 산화제가 빠르게 소모된다. 이 때문에 로켓은 더욱 빠른 속도를 낸다. 속도가 붙는 것이다.
아틀라스 개발의 책임자인 카렐 보사르트(Karel Bossart)는 로켓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추진제(연료와 산화제) 탱크에 주목했다. 항공기 전문가인 그는 보강 구조물이 없는 얇은 스테인리스 스틸만으로도 추진제 탱크의 외피를 충분히 튼튼하게 만들 수 있음을 알았다. 요즘의 맥주캔처럼 내부에 가스를 채우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한 것. 스틸-풍선형으로 불리는 이 방법은 당대 최고의 로켓 전문가인 폰 브라운도 성능을 의심할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다음으로 로켓을 다단계로 만드는 것에 주목했다. 하나의 로켓으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없을 때는 2개 이상의 로켓을 병렬로 연결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를 위해서는 ‘단 분리’와 고고도에서의 2단을 점화하는, 당시로서는 어려운 기술이 요구되었다. 아틀라스는 스틸-풍선형으로 제작한 가벼운 몸체 때문에 3개 엔진 가운데 2개를 비행 중에 분리해 버리는 다이어트를 해도 충분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아틀라스는 병렬로 로켓을 연결하지 않았다. 로켓 3개를 옆으로 묶었다. 지상에서 발사할 때 아틀라스는 3개 로켓엔진을 모두 점화한다. 그리고 비행을 해, 추진제가 상당 부분 소모되면, 2개 로켓엔진을 분리해버린다. 아틀라스는 1개 로켓엔진만 달고 목표물까지 날아가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으나 지금 보면 조금은 이상한 ‘1.5단 분리’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아틀라스의 추진제로는 V-2나 그것을 미국형으로 만든 레드스톤에서 사용한 ‘알코올+액체산소’보다 성능이 좋은 ‘케로신(RP-1)+액체산소’ 조합으로 선택했다. 액체산소는 다루기가 어렵고 장기 보관할 수 없는 단점이 있지만 엄청난 가속력을 낸다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엔진 개량과 유도장치의 개발이 지지부진해 일정은 계속 연기됐다. 아틀라스 개발에만 목을 맬 수 없는 공군은 대안을 찾아야 했다.
미국은 아틀라스의 백업용으로 보수적인 기술을 이용한 타이탄 ICBM 개발을 동시에 진행했다. 타이탄의 첫 번째 모델인 타이탄-1은 2단형으로 케로신+액체산소를 사용한다. 추진제 탱크는 기존 방식으로 제작한 평범한 ICBM이었다. 그럼에도 타이탄의 긴급 개발은 쉽지 않았다.
아틀라스는 1957년부터 다양한 버전을 생산해 무려 158회 시험발사했다. 타이탄-1이 1959년부터 57회 시험발사를 한 다음에 개발 성공 판정을 받았다. 초기 발사 성공률은 아틀라스가 69%, 타이탄-1이 67%를 기록했다.
아틀라스-A, B/C 다음에 아틀라스-D가 완성됐다. 1959년부터 긴급하게 실전 배치된 아틀라스-D는 1.5단형 액체로켓으로 길이는 23m, 직경은 3m, 중량은 118t, 사거리는 1만4000km, 원형 공산오차는 1400m에 달한다. 아틀라스-D는 1.4메가톤 위력의 W-49 열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었다. 1962년 실전 배치된 타이탄-1은 길이 31m, 직경 3m, 무게 105t, 사거리 1만km의 2단형 액체 로켓으로 3.75메가톤 위력의 W-38 열핵탄두를 탑재했다.
1세대 ICBM은 반(半)지하 사일로나 지하 사일로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장기 보관이 어려운 액체산소 때문에 실효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ICBM은 연료를 주입하는 데 15분 이상이 걸리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밖으로 끄집어내 발사해야 하므로, 소련의 선제공격에 맞서 반격하는 데 30분 이상이 걸렸다.
소련의 공격에 즉각 대응하려면 지하 사일로에서 바로 ICBM을 발사할 수 있어야 한다. 타이탄-1 개발 초기부터 엔진 개발을 맡은 에어로제트(Aerojet)는 특수한 추진제를 연구했다. 오랫동안 저장할 수 있는 저장성 추진제나 별도의 점화장치 없이 자동 점화되는 자발 착화성(hypergolic) 추진제 개발이 그것이었다.
에어로제트는 케로신 대신에 아에로진50(UDMH +히드라진), 액체산소 대신에 사산화질소의 사용을 검토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저장성 추진제를 사용하는 타이탄-2가 개발됐다. 타이탄-2는 버튼만 누르면 지하 사일로에서 60초 내에 발사가 가능했다. 1963년부터 54기가 실전 배치된 타이탄-2는 길이 31m, 직경 3m, 무게 154t, 사거리 1만5000km의 2단형 액체 로켓으로 당대 최고의 파괴력인 9메가톤 위력의 W-53열핵탄두를 운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추진제에도 문제가 있었다. 독성과 부식성으로 유지보수에 많은 어려움이 따른 것이다. 추진제 누출로 사일로가 큰 손상을 입어 폐쇄되는 사고도 일어났으므로 ICBM 추진 시스템에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었다. 해답은 액체가 아닌 고체에서 찾아야 했다.
고체 ICBM으로 세대교체
미국의 ICBM에 큰 변혁을 가져온 고체추진제 기술 도입은 1950년대 중반 해군에서 시작되었다.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탄도미사일 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늦게 깨달았다. 해군은 육군 폰 브라운 팀의 도움을 받아 육·해군 공용의 주피터 IRBM 개발에 참여했다. 그러나 곧 주피터의 실효성에 의문을 가졌다. 파도가 세차게 치는 해상에서 주피터에 액체산소를 주입해 발사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위험하고 취급하기 어려운 것은 액체추진제만이 아니었다. 액체 로켓에 내장된 많은 밸브와 배관, 탱크도 고장 날 수 있었다. 해군은 전투함보다는 잠수함에 미사일을 탑재하길 원했다. 잠수함은 적진 가까이 접근할 수 있고 노출되지 않으니 소형 미사일을 발사해도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길이 18m에 무게가 50t이나 되는 주피터 같은 대형 액체 미사일은 잠수함 탑재에 적합하지 않았다.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을 위한 최적의 추진제는 고체추진제다. 고체로켓은 밸브나 배관 등 고장이 날 부품이 적고, 연료도 장기간 보관할 수 있으며 점화와 동시에 발사할 수 있다. 하지만 고체로켓 기술은 걸음마 단계였다. 당시의 고체추진제에는, 산화제인 과염소산 암모늄에 연료이면서 결합제인 폴리설파이드(polysulfide) 폴리머를 결합해 연소실에서 특별한 모양으로 굳힌 ‘복합추진제’가 있었다. 산화제와 연료 구실을 하는 니트로셀룰로오스와 니트로 글리세린를 이용한 ‘더블베이스추진제’도 있었다.
그러나 둘의 성능은 액체추진제의 절반에 지나지 않았다. 1950년대 초 고체추진제의 성능을 높일 수 있는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 있었다. 폴리우레탄(polyurethane)을 결합제로 사용하고 소량의 알루미늄 가루를 첨가하는 것이 그것이었다. 복합추진제와 더블베이스추진제를 혼합한 ‘복합 더블베이스 추진제’도 개발되었다. 고체추진제의 성능이 50% 정도 향상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고체추진 SLBM은 완성될 수 없었다. 로켓의 방향을 조정하는 추력 방향 조종 기술, 원하는 속도에 도달했을 때 추력을 중단하는 기술, 높은 연소열에도 불구하고 장시간 녹지 않고 작동할 수 있는 노즐 제작, 작고 성능이 좋은 유도장치 개발 등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사거리 2000km의 폴라리스 SLBM 개발은 1957년부터 본격화되었다.
폴라리스는 1960년 처음으로 잠수함 발사에 성공했다. 그해 11월 폴라리스 A-1이 조지 워싱턴급 핵추진 잠수함에 실려 작전 임무에 들어갔다. 조지 워싱턴급은 탄도탄을 탑재하는 스킵잭급 공격형 핵추진 잠수함을 급히 개조한 것이었다. 1962년부터 생산된 폴라리스 A-2는 처음부터 전략 핵추진 잠수함으로 제작된 이산 알렌급에 탑재되었다.
그 후 개량을 거듭하면서 폴라리스의 성능과 파괴력, 명중 정밀도 등이 향상되어갔다. 폴라리스에 이어 포세이돈 SLBM을 개발해 실전 배치하고, 지금은 대형인 트라이던트 SLBM을 배치해놓고 있다. 고체추진제 미사일에 대한 해군의 노력이 ICBM 개발을 전담하는 공군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군은 1958년 액체추진제 ICBM인 아틀라스와 타이탄을 개발하면서 동시에 고체추진제 ICBM인 미니트맨(Minuteman) 개발을 진행했다.
다탄두화, 이동화
액체추진제 미사일은 보통 2단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미니트맨은 추력이 떨어져 3단으로 만들었다. 미니트맨은 1, 2단에는 복합추진제를, 3단에는 복합 추진제와 더블베이스 추진제를 혼합한 복합 더블베이스 추진제를 사용했다. 미니트맨의 가장 큰 장점은 제작비용이 적게 든다는 것이었다. 미니트맨은 구조가 복잡하고 부품이 많은 액체 미사일에 비해 제작비가 적게 들었다. 1962년부터 실전 배치된 사거리 9260km의 미니트맨-1은 타이탄-2(길이 33m, 무게 150t, 직경 3m)에 비해 모든 것이 절반(길이 16m, 무게 30t, 직경 1.5m)밖에 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일로도 작아졌다. 적은 인원으로 발사할 수 있었기에 운용과 관리비도 크게 줄어들었다.
타이탄-1은 1기를 발사하는 데 6명의 인원이 필요했지만 미니트맨-1은 10기를 2명이 발사할 수 있었다. 미니트맨이 실전 배치되자 액체산소를 사용하는 아틀라스와 타이탄-1이 1965년 가장 먼저 퇴역했다. 저장성 추진제를 사용한 타이탄-2는 1986년까지 배치돼 있다 퇴역했다. 타이탄-2 퇴역으로 미국에서는 액체추진제를 쓰는 ICBM은 모두 사라졌다.
실전 배치 초기 ICBM은 1기의 미사일에 1개의 핵탄두만 실었다. 이때의 ICBM은 명중 정밀도가 낮았다. 광범위한 면적의 도시를 공격할 수는 있어도 적의 ICBM 사일로나 지하에 설치된 적군 사령부를 공격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에 따라 명중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개의 핵탄두를 동일한 목표물에 투하하는 다탄두 재돌입 운반체(MRV·Multiple Reentry Vehicle) 방식이 도입되었다.
‘재돌입 운반체’는 대기권으로 나갔던 탄두부가 대기권으로 재돌입할 때 발생하는 열과 충격으로부터 핵탄두를 보호하는 원추형 특수 캡슐을 말한다. 이캡슐이 없으면 탄두는 대기권에 들어오면서 폭발해버린다. 북한도 재돌입체를 개발해야 ICBM을 제대로 만들 수 있다. 1기의 ICBM에 여러 개 탄두를 싣는 다탄두화로 개별 재돌입 운반체의 크기가 작아져 조종 정밀도가 높아졌다. 다탄두 방식은 SLBM인 폴라리스 A-3에 처음으로 채택되었다. 1964년 실전 배치된 폴라리스 A-3는 200킬로톤의 W-58 열핵탄두 3개를 탑재하고 4630㎞의 거리를 비행할 수 있었다.
그 후 유도제어 기술이 발전하자 한 개의 목표를 타격하는 다탄두 방식과 다르게 여러 개의 목표를 별도로 타격하는 다탄두 독립목표 재돌입 운반체(MIRV·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Reentry Vehicle) 방식이 개발되었다. 다탄두 독립목표 재돌입 운반체는 각각의 목표를 공격해야 하므로 운반체에 별도의 조종장치를 붙였다. 탄두 중량을 줄였기에 MIRV 방식의 탄두는 폭발력이 작아졌다. 최초의 MIRV 방식 ICBM은 미국의 미니트맨-3다. 1970년에 배치된 미니트맨-3는 길이 18m, 직경 1.7m, 무게 35t, 사거리 1만3000km, 원형 공산오차 200m의 3단형 고체로켓으로 170킬로톤의 W-68 열핵탄두 3개를 탑재했다. 탄두는 대기권 밖에서 방향 조정을 할 수 있도록 액체추진 로켓이 설치된 포스트-부스트단(post-boost stage)을 장착했다.
MIRV 방식의 ICBM 한 기는 여러 기의 ICBM 역할을 할 수 있기에 MIRV 개발이 늦었던 소련을 제치고 미국은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MIRV 방식은 기술이 아닌 정치적인 문제로 위기를 맞았다. 1962년 쿠바위기를 겪으며 미국과 소련은 핵전쟁을 막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한쪽이 기습공격을 당하더라도 살아남은 전력으로도 충분한 보복을 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체제를 유지하는 한, 양국은 끝없는 군비확장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을 안 것이다.
ICBM 감축 협상
미국과 소련은 1967년 쌍방이 보유한 전략무기의 상한선을 규제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1971년 미소 정상회담에서 결실을 본 1차 제한협정(SALT-1)에 따라 미국의 ICBM은 1000기, SLBM은 710기로 제한되었다. 이 협정은 전략핵무기의 수량만 문제 삼고 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2차 제한협정을 위한 협상에서는 ‘질의 제한’도 의제에 올랐다. 1979년 합의된 SALT-2는 미소 모두 다탄두 ICBM을 820기로 제한하기로 했다.
그해 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에 항의해 1980년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고, 레이건 대통령이 전략방위구상(SDI)을 추진함으로써 SALT-2는 이행되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의 불신은 극에 달했다. 이런 와중에 레이건 대통령이 전략무기의 수량을 제한할 것이 아니라 대폭 삭감하자는 ‘전략무기감축회담(START)’을 제안했다. 우여곡절 끝에 협상이 시작됐으나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인 1994년 타결됐다. START-1 조약 발효로 미국의 ICBM은 1600기, 탄두 수는 6000개로 제한되었다.
START-1이 발효되자 미국은 ICBM의 절반을 차지하던 미니트맨-2 450기를 1990년 폐기했다. 사일로는 폐쇄하거나 일반에 매각했다. 그 후 타결된 START-2는 MIRV와 중량급 다탄두 ICBM의 전량 폐기를 규정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미니트맨-3를 단일 탄두로 바꿔나가게 됐다.
미국은 소련 측의 ICBM도 다탄두화함에 따라 소련의 기습공격으로 미국 ICBM이 괴멸될 것을 우려해, 소련 ICBM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이동식 ICBM인 피스키퍼(Peacekeeper)를 연구하게 된다. 길이 22m, 직경 2.3m, 무게 96t, 사거리 9600km, 원형 공산오차 120m에 10개의 다탄두를 가진 3단형 고체로켓인 피스키퍼는 1986년부터 실전 배치되었다. 그러나 START-2에 따라 2005년 모두 퇴역했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20배에 달하는 파괴력을 가진 피스키퍼용 W-87 열핵탄두(300킬로톤 위력)는 미니트맨-3에 탑재되었고, 피스키퍼용 발사체는 오비탈 사이언스 사의 우주발사체인 미노타우르-4 발사용으로 전용되었다. 피스키퍼가 포기한 이동성에 관한 연구는 1980년대 중반에도 이어졌다. 핵심은 일반 도로로도 이동할 수 있을 만큼 소형화하는 것. 이에 소형 대륙간탄도미사일(SICBM)이란 새로운 개념의 ‘미지트맨(Midgetman)’이 개발되었다. 미지트맨은 소련의 SS-24(선로 이동)나 SS-25(도로 이동) ICBM에 맞서 개발된 것이기도 했다.
미지트맨은 길이 14m, 직경 1.17m ,무게 13.6t, 사거리 1만1000km의 3단형 고체로켓으로 475킬로톤의 W-87-1열핵탄두를 가지고 있었다. 미지트맨을 실은 차량은 기지에 있다가 위기가 고조되면 미국 전역으로 흩어져 적의 감시망을 벗어난다. 미지트맨은 마틴 마리에타가 개발해 1991년 시험발사에 성공했다. 하지만 미지트맨 SICBM도 미소 양국의 핵무기 감축 협상으로 1992년 개발이 취소되고 말았다.
START-2 협정의 일부는 미국의 탄도탄 요격미사일조약(ABM) 탈퇴로 이행되지 못했다. 미-러 양국은 2001년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SORT·Strategic Offensive Reduction Treaty)’을 맺고 2011년에는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을 맺어 다시 전략무기를 줄였다.
현재 미국은 450기의 미니트맨-3에 500발의 탄두를 탑재해 운용하고 있다. 250기는 1개의 탄두를, 200기는 1~2개의 탄두를 장착하고 있는 상태다. 비록 40년 전에 탄생했지만 미니트맨-3는 유도장치와 추진기관 교체 등의 수명연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ICBM으로 거듭나고 있다. 미니트맨-3는 2030년까지 미국 ICBM의 대표 역할을 할 예정이다. 미 공군은 2030년 이후 미니트맨-3를 대체할 새로운 ICBM 개발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련 붕괴 뒤 구조조정… 재도약 발판
러시아의 항공산업
그러나 천연자원 수출을 바탕으로 러시아 경제가 다시 살아나면서 러시아의 항공산업은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냉전 시절 소련은 계획경제체제였다. 소련은 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 말하는 경쟁을 낭비로 보았다. 이 때문에 소련의 항공기 제작사들은, 경쟁 없이 설계국 중심으로 항공기 산업을 발전시켰다. 소련은 수십 개의 설계국을 운영했다. 설계국은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 같은 기능을 했다.
한국의 국방과학연구소는 여러 종류의 무기를 설계하는 종합 설계센터다. 반면 소련의 설계국은 특정 무기를 전문으로 설계했다. 주문은 정부로부터 받는다. 설계국은 정부의 요구에 맞게 신형 항공기를 개발하기만 하면 됐다.
항공기 생산은 별도의 시설에서 진행됐다. 이는 한국도 비슷하다. 국방과학연구소는 설계만 하고, 제작은 한국항공우주산업이나 현대로템 같은 전문 기업이 한다. 소련도 설계국에서 새로운 무기를 설계하면 한국항공우주산업이나 현대로템 같은 공장을 가진 시설이 그 무기를 제작했다.
이러한 무기 생산체계가 소련 붕괴로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에서 독립한 러시아의 국내 항공기 수요는 가파르게 감소했다. 일부 설계국과 항공기 생산시설은 우크라이나 등 새로운 독립국가에 편입되었다. 수요는 없는데 설계국과 생산시설이 분산됐으니 모든 것이 어수선했다.
러시아 출범 후 설계국과 생산시설이 합쳐서 하나의 회사가 되었다. 그러나 거듭된 경제난으로 줄도산했다. 이 혼란은 푸틴 대통령 시절인 2005년 항공산업을 살리기 위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함으로써 정리되었다.
2006년 2월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설계국과 항공기 제작시설들이 연합항공기업(UAC)으로 통합됐다. 연합항공기업은 유럽의 EADS를 모방한 것이다.
UAC는 일종의 지주회사이고 그 밑에 일루신, RSK 미그, AVPK 수호이 등이 있다. 연합항공기업이 2009년부터 매출을 확대해 러시아 항공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 되었다. 러시아는 군용기 수출을 전문으로 하는 로스보론 엑스퍼트(ROE)도 만들었다. 연합항공기업이 항공기를 생산하면 수출은 로스보론 엑스퍼트가 맡는다.
러시아의 현재 주력 전투기인 수호이-27(위). 러시아가 만든 5세대 스텔스 전투기 파크파.
■ 최초 스텔스 전투기 (파크파)
러시아 항공산업을 대표하는 기종에는 러시아 최초의 스텔스 전투기인 ‘파크파(PAKFA)’가 있다. 파크파는 전술공군용 차세대 항공 복합체를 의미한다. 파크파는 미 공군의 F-22 랩터 대항 기종으로 개발되고 있다. 초음속 순항기능을 갖춘 전투기로 알려져 있다. 파크파 시제기는 2011년 1월 29일 첫 비행에 성공했다. 현재는 시제기를 이용해 각종 시험평가를 하고 있다. 양산과 실전 배치는 2015년부터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 전투기 대표 (미그) (수호이)
러시아 전투기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미그(MiG) 사와 수호이(Sukhoi) 사는, 1930년 말 설계국으로 출발했다. 미그 설계국은 항공기 설계가인 미코얀과 구레비치가 창설했고, 수호이 설계국은 파벨 수호이가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그 설계국은 미그-1과 미그-3 레시프로 전투기를 개발했지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1947년 개발한 미그-15는 6·25전쟁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그 후 미그는 소련의 핵심 전투기 설계국으로 급부상했다.
제트 전투기 시대 수호이 설계국은 공격기 설계를 주로 담당했다. 이 설계국은 1983년 9월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한 수호이-15 요격 전투기를 개발한 곳으로 유명하다. 냉전 시절 수호이는 미그 아래에 있었으나 소련이 무너진 다음에는 반대가 되었다. 수호이-27 계열은 세계 각국에서 러브콜을 받았고, 러시아 공군의 대표 전투기가 되었다. 반면 미그의 미그-29 계열 전투기들은 러시아 공군에서조차 외면받고 수출 실적도 미미했다. 수호이는 러시아 공군의 차세대 전투기인 파크파를 개발하고 있다.
■ 수호이의 여객기 (슈퍼젯 100)
슈퍼젯-100(Super Jet 100)은 수호이 사가 만든 차세대 중소형 여객기다. 100인승 규모로 기계적 제어가 아닌 전기 신호로 제어하는 플라이 바이 와이어(Fly-By-Wire) 조종체계를 채택했다.
슈퍼젯-100 개발은 2000년 시작돼 2008년 3월 19일 첫 비행에 성공했다. 대당 가격이 3500만 달러로 경쟁 기종에 비해 저렴하다. 운용 유지비용도 적게 든다는 것이 수호이 사의 설명이다. 지금까지 14대가 생산되었으며, 세계 각국의 민간 항공사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 헬기 대명사 (밀) (카모프)
밀의 대표적인 헬기에는 Mi-8/17 다용도 헬기와 Mi-24, Mi-28 공격헬기가 있다. 세계 최대의 수송헬기인 Mi-26도 이 회사가 개발했다.
카모프 사는 하나의 축에 반대 방향으로 도는 2개의 로터를 연결하는 기술을 택한 세계 유일의 헬기 회사로 유명하다.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은 로터의 회전반력을 상쇄하기 위해서다. 대표적인 헬기로는 KA-32가 있다.
한국도 밀과 카모프 사가 생산한 헬기를 도입했다. 소련에 빌려준 차관 원리금을 방산물자로 돌려받는 ‘불곰사업’에 따라 밀 사의 Mi-17 헬기를 도입해 경찰청에서 운용하고, 산림청은 카모프 사의 Ka-32 헬기를 도입해 산불진화용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공군도 탐색구조용으로 Ka-32를 도입해 HH-32로 이름을 바꿔 사용하고 있다.
■ 병력 수송 가능한 (Mi-24 헬기)
소련 시절 밀 사가 개발한 공격헬기 Mi-24 하인드(Hind)는 공격뿐만 아니라 병력과 물자 수송에도 쓰였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은 Mi-24 하인드 공격헬기로 기관포와 로켓탄 그리고 각종 폭탄을 투하해 무자헤딘 게릴라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두려움에 떨던 무자헤딘 게릴라들은 Mi-24 하인드를 ‘사탄의 마차’로 불렀다.
Mi-24는 이란-이라크전쟁 때 미국제 공격헬기인 AH-1J 시코브라(Sea Cobra)와 공중전을 벌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Mi-24는 이라크군 공격헬기였고 AH-1J는 이란군 공격헬기였다. 이란은 미국과 사이가 좋았던 팔레비 왕정 시절 미국으로부터 AH-1J를 도입했다.
공중전 결과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전쟁 초반에는 이란 군의 AH-1J가 압승을 거두었으나, 이후에는 Mi-24 하인드가 우세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Mi-24 하인드 공격헬기는 6대, AH-1J 시코브라 공격헬기는 10대가 손실되었다. 하지만 이 숫자는 대공화기와 전투기에 격추된 것도 포함돼 있어 두 공격헬기의 성능 차이를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긴 어렵다.
Mi-24 하인드 공격헬기는 총 2000여 대가 생산되었다. 개발국인 러시아를 포함해 전 세계 50여 국가에서 운용 중이다.
■ (일류신) (투볼레프) (야크)
투볼레프(Tupolev)는 러시아 항공기 설계국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안드레이 투볼레프가 중심이 돼 1922년 창설됐다. 주로 여객기와 폭격기 등을 개발했다. 대표적인 항공기로는 Tu-22M과 Tu-160 폭격기가 있다.
일류신(Ilyushin)은 1933년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일류신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전차 잡는 공격기 Il-2 슈톨모빅(Shturmovik)을 개발했다. 냉전 시절에는 전투기, 공격기, 수송기, 여객기 등 40여 종을 개발했다. 지금은 Il-76 수송기와 러시아 대통령 전용기로 사용되는 Il-96M 여객기를 생산하고 있다.
야크(Yak)는 1934년 야코블레프에 의해 창설돼 수직이착륙 전투기와 훈련기를 생산했다. 야크는 1990년 고등훈련기 겸 경공격기 ‘야크(Yak)-130’ 개발에 들어가 1996년 4월 첫 비행을 성공시켰다. 2010년 2월부터는 양산에 들어갔다. 야크-130은 4.5세대 전투기나 5세대 전투기의 훈련에 적합한 최신예 훈련기로 평가받고 있다.
야크-130은 이스라엘의 고등훈련기 경쟁에서 우리나라의 T-50을 물먹인 이탈리아의 알레니아 아에르마키(Alenia Aermacchi) 사의 고등훈련기 M-346의 모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차기 고등훈련기 도입사업에선 T-50에 역전패당했다.
러시아의 우주 개발사
러시아에서는 어떤 조직이 우주 개발을 이끌어왔는가.
통시적인 관점에서 소련과 러시아의 우주 개발사를 살펴본다.
소련이 탄생시킨 세계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왼쪽)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1호.
우리에게는 ‘우주학’이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20세기 들어 과학의 한 분야로 시작된 우주학은 실생활에 응용됨으로써 우주 개발 선진국에서 학문 분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단시간에 정착된 것은 아니었다. 하늘과 우주에 대한 인류의 꿈과 희망, 상상은 인류가 시작되던 시기부터 존재해왔다. 각종 신화에 남겨진 비행에 대한 동경과 우주에 대한 환상은 ‘과학 혁명기’를 거쳐 비로소 이론화됐고, 실험을 거쳐 실생활에 응용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지구를 알게 해준 우주학
초기에 인류가 생각한 우주여행과 우주 개척의 꿈을 이루는 길은, 토네이도나 허리케인 같은 초자연적 힘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 등장한 공상과학소설에는 우주여행과 우주 개척이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술 장치로 열기구와 대형 대포, 로켓엔진 같은 것들이 나온다. 쥘 베른의 ‘지구에서 달까지’, 허버트 웰스의 ‘타임머신’ 등이 그 시기 대표적인 우주여행 문학작품이다. 공상소설 작가들과 과학자들은 상상력과 정보를 주고받으며 꿈을 현실로 이끌어냈다.
20세기 초반 소련에서는 치올코프스키, 찬데르, 콘드라 같은 학자들에 의해 우주학 관련 이론서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학·과학교사였던 치올코프스키는 지상에 국한되어 있던 인류의 활동 범위를 우주에 이르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우주 탈출 속도를 계산해 우주비행에 대한 이론적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발표함으로써 ‘우주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지구는 인류 문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요람에서 살 수는 없다”고 했지만, 택일을 강요하진 않았다.
치올코프스키는 지구를 탈출하거나 버리기 위한 존재로 보고 ‘우주로 나가야 한다’고 한 적이 없다. 반대로 우리의 지성을 발휘해 지구 자연을 합리적으로 활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후 사람들은 지구 표면과 대양, 대기, 식물을 연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찾음으로써 치올코프스키의 말을 증명해왔다. 덕분에 인류는 오랫동안 인류에게 적합한 곳인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지구가 ‘어떤 곳인지’ 알고 살게 되었다. 앞으로 인류는 날씨를 조절하게 될 것이고 태양계 구석구석까지 진출하게 될 것이다.
우주 개발 신기록 제조국
우주기술에 관한 한 소련과 러시아가 이룬 성취는 세계 우주 개발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달 착륙을 제외한 우주학 분야의 기술적 성취는 거의 대부분 소련이 최초로 이뤄냈다. 인공위성 발사, 생명체 궤도 비행, 유인궤도비행, 우주 유영, 그룹 우주비행, 우주비행체 도킹, 달 이면(裏面) 촬영 등 우주학 분야에서 소련이 이룬 ‘세계 최초’는 너무 많기에 이 글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언급을 자제했음을 밝힌다. 지면의 한계로 소련과 러시아의 업적을 모두 열거하기는 어렵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류가 본격적인 우주 개발을 시작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에서 개발된 로켓기술을 소련이 도입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이 단기간에 이를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토대가 마련돼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흑색 화약은 무기로 쓰였는데 이러한 토대 위에서 러시아는 1884년 무연(無煙) 화약 개발에 성공했다. 이때 치올코프스키가 반(反)작용 원리를 이용한 우주비행 가능성에 대한 이론을 연구하고, ‘달에서’와 ‘우주로켓여행’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우주탐험에 대한 인류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찬데르는 이 아이디어를 이어받아 화성 여행에 대한 글을 쓰고, 행성 간 탐사에 대한 기초 연구를 수행했다.
1928년에는 티코미로프가 이끈 가스역학실험실(GDL)이 로켓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1929년에는 글루쉬코가 이끄는 레닌그라드대학교 실험실이 여기에 합류해, 전기로켓엔진을 연구하다 후에는 로켓엔진을 연구하게 되었다. 1930년 중앙항공기엔진연구소(TsIAM)에서 근무하게 된 찬데르는 액체로켓엔진의 전신인 1.5뉴튼급(0.18kg의 추력) 제트추진엔진 OR-1, 이어 500뉴튼급(51kg의 추력) 액체로켓 엔진인 OR-2를 개발했다. 그는 ‘행성 간 공간이동’이라는 책에서 액체수소와 액체산소를 이용하는 4단형 로켓 개념을 설명하고, 중력장 안에서의 물체 이동뿐만 아니라, 미세중력 상황(지구 중력이 약하게 작용하는 대기권 밖의 상황)에 있는 우주비행체의 가속과 정지에 대한 연구 결과도 얻어냈다.
1931년 찬데르의 지도로 반작용추진연구그룹(GIRD)이 결성돼 1932년 코룔로프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33년에는 가스역학실험실과 반작용추진연구그룹이 통합해 반작용연구소(RNII)가 설립됐다. 초대 연구소장은 클레이묘노프였고, 연구 부소장은 코룔로프였다. 소련 시절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이끈 양대 산맥은 코룔로프와 티혼라보프였다.
1945년 초반 티혼라보프는 반작용연구소 연구진과 고고도용 로켓장치(2인용 캐빈)를 이용한 유인 우주비행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상층대기 연구를 목적으로 한 이 프로젝트에 체르니셰프, 이바노프, 갈코프스키, 모스칼렌코 등이 참여했다. 훗날 VR-190으로 명명된 이 연구를 위해 고도 200km까지 올라가는 1단형 액체로켓이 사용됐다. 이 연구에서 밀폐공간에서 인간이 짧은 시간 자유비행할 경우 받게 되는 미세중력의 영향과 캐빈의 무게중심 이동, 발사체에서 분리된 비행체의 운동, 상층대기에 관한 정보 획득 등의 성과를 거뒀다.
VR-190 연구로 위성 발사 본격화
VR-190 프로젝트를 통해 연착륙을 위해서는 △감속(減速)로켓 엔진이 있어야 하고, 이 엔진을 점화하기 위해서는 전기접촉봉이 있어야 한다. △캐빈의 안전한 대기권 하강을 위해서는 낙하산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캐빈은 생명유지 장치가 달린 밀폐형 구조여야 한다. △고밀도의 대기영역을 통과할 때는 소형 추력기를 이용해 캐빈의 자세를 안정화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 등이 확인되었다. 이때 발견한 시스템이 21세기 우주발사체에도 대부분 사용되고 있다.
1946년 티혼라보프는 VR-190 프로젝트의 연구 결과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1947년부터는 과학자들과 함께 여러 개 단이 묶인 배치(batch)형 발사체 개발에 착수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나와 있는 기술로도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우주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확인돼, 1950년 발사체와 인공위성을 만드는 연구가 본격화했다.
최초의 인공위성이 될 ‘PS-1’ 발사 준비를 위해 코룔로프를 위원장으로 한 고위설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1950년대 초반 코룔로프가 시제설계국-1을 만들었다. 시제설계국-1은 OKB-1으로 약칭됐는데, 소련 해체 후 OKB-1은 에너지기계중앙설계국→에네르기아 주식회사 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코룔로프는 우주 개발 연구와 산업체를 총지휘하는 소련 우주 프로그램의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해 지구궤도를 돌게 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또 하나의 승전고를 울렸다. 인류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 후 소련은 그룹 우주비행과 우주 유영을 성공시키고, 우주정거장이라고 하는 궤도선 살류트와 미르를 우주공간에 건설했다. 이 우주정거장들은 오랫동안 떠 있으면서 유인 우주비행 프로그램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류는 한 번 발사로 한 기의 위성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한 번 발사로 여러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는 것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미·소 우주선 도킹 성공
우주비행체가 비행하는 데 필요한 우주속도는 운반수단인 우주발사체로부터 얻는다. 우주학은 우주속도를 얻고 위성엔 궤도비행이 가능한 속도를 주기 위해 고추력의 대형 액체로켓엔진을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이 분야에서는 글루쉬코의 업적이 돋보인다. 그의 연구팀은 엔진을 대형화하고 고추력화하기 위해 터보펌프의 손실을 거의 없애는 등 다양한 기술을 개발했다.
글루쉬코와 이사예프 박사는 세계 최초로 실용 로켓엔진개발학파를 만들었다. 이 학파의 이론적 토대는 1930년대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로켓 개발 기술을 근거로 했다. 그리고 여러 형태의 발사체와 액체로켓엔진 개발을 시도함으로써 열역학, 유체역학, 가스동력학, 열전달 이론, 구조강도 이론, 고강도 금속학, 내열소재, 추진제 화학, 측정기술, 진공 기술, 플라스마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을 유도했다.
1950년대 초반 켈디쉬, 코첼니코프, 이쉴린스키, 세도프, 라우셴바흐 등은 우주비행과 관련된 수학모델링과 탄도항법에 관한 이론을 연구했다. 이로써 우주비행을 실현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이 해결되고 무중력 이론 등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새로운 수학적 해법을 적용하고, 최신 성능의 컴퓨터가 개발되면서, 우주궤도역학 설계, 비행 프로세스 제어 같은 가장 복잡한 문제들이 해결되었다. 그 결과 새로운 학문인 우주비행역학이 탄생했다.
먀시셰프, 첼라메이 등이 이끌었던 설계국-52(OKB-52, 현재는 NPO Mashnostroenie)는 대륙간탄도로켓인 UR-200, UR-500,UR-700 등에 꼭 필요한 특수 고강도 외피의 대형화에 성공했다. 이 기술은 국제우주정거장의 모태가 된 유인 우주선 살류트, 알마스, 미르를 개발하는 데 사용되었다. 국제우주정거장을 만드는 데 사용된 각종 모듈인 크반트, 크리스탈, 프리로드, 스펙트르, 자랴, 즈뵤즈다 등을 개발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설계국-52는 흐루니체프 공장과 협력해 새로운 발사체 시리즈인 ‘앙가라’, 소형 우주선, 그리고 국제우주정거장용 모듈 개발을 성공시켰다. 설계국-52와 흐루니체프 공장을 합병해 러시아 최대의 우주과학생산 센터인 흐루니체프사가 만들어졌다.
1975년 7월 세계 우주 개발의 기념비적 사건이 일어났다. 초속 7.8km에 달하는 우주속도로 운행 중이던 소련의 소유즈 우주선과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이 우주공간 도킹에 성공한 것이다. 이 성공으로 국제협력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국제우주정거장이라는 국제 공동 프로그램이 탄생한 것. 흐루니체프 사가 기술적 리더로서 국제협력을 주도했다.
탄도미사일 기반의 우주발사체 개발은 얀겔이 지도하는 설계국 유즈노예(SDO Yuzhnoye, 현재는 우크라이나 소속)가 수행했다. 이 설계국은 우트킨의 지도로 중형 발사체인 ‘제니트-2’를 개발했다. 제니트-2는 2세대 로켓의 대표주자다. 저궤도위성 발사체로 제니트-2보다 뛰어난 것은 아직 없는 것 같다.
발사체와 우주선의 유도제어 시스템도 급속히 발전했다. 독일에서 로켓 기술을 습득한 빌류긴은 1946년 제어 관련 설계국인 ‘연구소-885’를 설립해 초기 로켓인 R-1의 자이로스코프 유도제어 시스템과 비행용 컴퓨터를 개발했다. 이 설계국은 상당히 신뢰성이 높은 발사체 제어 시스템도 개발했다. 그리하여 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투입하던 1957~58년엔 수십km의 궤도 투입 오차가 발생했지만, 1960년대 중반에는 달에 내릴 때 목표지점에서 5km 이내에 착륙할 수 있었다.
우주학의 발전으로 이제 우리는 우주통신, 텔레비전 방송과 재송출, 항법 등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게 됐다. 1965년 인류는 지구에서 2억km 떨어진 화성에서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낼 수 있었다. 1980년엔 15억km 거리의 토성을 찍어 지구로 전송했다. 코룔로프의 시제설계국 OKB-1의 분소로 출발한 ‘응용기계 과학생산연합(NPO PM)’은 레셰트네브 지도하에 우주선 개발을 선도하는 기업이 되었다.
목성 화성에도 탐사선 착륙
이제 세계는 운용지점 두 곳만 있으면 거의 모든 나라와 연결될 수 있는 통신위성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신뢰도가 높고, 경제·기술적으로 매우 우수하다. 이런 재송출 시스템 덕분에 위성이나 우주선, 탐사선 같은 우주비행체에 대한 동시 제어가 가능해졌다. 이러한 제어를 위해 위성항법 시스템이 개발됐는데, 이 시스템은 오늘날 바다와 하늘, 우주를 떠다니는 모든 운송수단에 적용되고 있다.
유인 우주선 분야에도 질적인 발전이 있었다. 1960~70년대에 이미 우주선 밖에서 작업이 가능함을 증명했고, 1980~90년대에는 인간이 미세중력 하에서 장기간(1년 정도) 거주하며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지구물리와 관련된 실험과 천문학과 관련된 실험들이 유인우주비행 프로그램을 통해 수행되었다. 이 프로그램을 수행할 때는 우주의학과 생명유지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중요했다. 장기간 우주비행을 할 경우, 사람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초기의 우주 실험은 지구 촬영이 대세였다. 우주에서 지구를 관찰함으로써 지상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자연자원을 새로 발견해 개발하게 되었다. 지구 자원의 합리적인 개발과 활용의 다양성을 깨달은 것이다. 코즈로브가 이끈 시제설계국-3(OKB-3, 오늘날은 ‘프로그래스 중앙설계센터’로 불린다)는 수많은 지구 관측사진을 찍고, 이를 지도로 만들었다. 지구 자연자원을 연구하고 환경을 모니터링했으며 R-7A를 기본으로 하는 중형 발사체도 개발했다.
최초의 우주 도킹 성공
1967년 소련은 두 개의 위성인 ‘코스모스-186’과 ‘코스모스-188’의 무인 도킹을 성공시킴으로써, 우주공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우주비행체의 접촉이나 연결과 관련된 복잡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해결했다. 덕분에 러시아는 아주 짧은 시간에 세계 최초로 우주궤도선(우주정거장)을 개발할 수 있었고, 미국은 달에 도달하는 우주선의 최적 비행경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반세기 사이에 이뤄진 놀라운 우주 개발로 지구 주위에는 무수한 인공위성이 형성한 띠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위성들이 연구를 수행함으로써 지구와 태양으로 떨어지는 전하입자 간의 상호작용을 깊이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행성 간의 우주비행은 태양풍과 태양폭풍, 유성우(流星雨) 같은 자연 현상에 크게 영향 받는데,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달로 발사된 우주장치(탐사선)들은 달 표면을 찍은 정보를 지구로 보내왔고, 지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반대편 모습을 찍는 데도 성공했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은 달 표면에 자동 무인착륙선인 루나호드-1호와 루나호드-2호를 보냈다. 1970년에는 루나호드-16호를 보내 달 토양을 채취했다. 금성과 화성에도 탐사선을 착륙시켰고, 목성·토성·수성에 대해서는 한층 정밀한 관측을 했다.
무인 탐사선이라고 하는 자동우주장치 덕분에 행성의 모양과 중력장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구와 지구 자기장에 대한 정보도 더욱 정확히 알게 되었다. 다른 행성으로 발사된 자동우주장치(우주탐사선)는 원격으로 조종된다. 우주라고 하는 지극히 낯선 환경에서도 원격조종에 의해 제대로 작동되도록 정교하게 개발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가 정밀한 전자부품 개발을 가속화했다. 랴잔스키, 구세브 등이 개발한 자동화된 지상제어 시스템은 오늘날 러시아 위성의 궤도 그룹화를 가능하게 했다.
1962년 코스모스-4호 발사 성공을 계기로 소련은 우주를 군사적인 관점에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은 초기에는 ‘연구소-4(NII-4 MO)’가 수행하다 ‘중앙연구소-50 MO’로 이관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길, 우주장치를 활용하면 무력(병력) 효율이 1.5~2배 높아진다고 한다.
20세기 후반 들어 적대적 대치상황에서 우주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커졌다. 우주관측, 우주통신, 우주항법 장치 덕분에 자국군을 알듯이 적군을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실질적인 군사력 투입 없이도 군사정보 활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주기술은 적국의 핵미사일 공격도 막아내게 했다. 그로 인해 ‘우주군’이라고 하는 새로운 군사력이 생겨났다.
모듈화된 발사체 제작
러시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코누르와 블레세츠크 발사장을 운영하고 있다. 만주 북쪽에는 시험발사를 전문으로 하는 스바보드늬 발사장을 짓고 있다. 러시아는 이 발사장에서 모듈화된 발사체를 발사하려고 한다. 모듈화된 발사체란 표준화된 발사체를 뜻한다. 과거 러시아는 미국도 그랬지만, 여러 개의 발사체를 만들고 발사체에 탑재하는 탑재체도 각기 다르게 설계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발사비용이 크게 올라가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미국의 팰콘 시리즈처럼 안전하고 경제적인 로켓을 만들고 그 로켓을 다양하게 조합해 여러 발사체를 만드는 쪽으로 가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러시아의 우주사업의 수익성을 높여줄 것이다.
대기권 밖에서처럼 지구 중력이 약하게 작용하는 것을 ‘미세중력’이라고 한다. 미세중력 상태에서 반도체를 제작하면 수율이 아주 높아진다. 따라서 우주 공간 활용 기술이 발전하면 우주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날이 곧 올지도 모른다. 러시아는 영토가 넓기에, 우주를 통한 인터넷망 구축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그로 인해 전국적인 텔레비전 방송망과 통신망도 함께 구축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러시아는 광대역 우주통신 채널을 확보해 인터넷 정보 전달의 고속화를 이룰 것이다.
1973년 강원 속초 출생. 인하대 화학공학과(학사), 러시아 모스크바 바우만공과대 파워엔지니어링학부 로켓엔진학과 액체로켓엔진 전공(석사), 모스크바 항공대 연수. 항우연에서 KSR-3 개발에 이어 현재는 나로호와 KSLV-2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주과학기술은 러시아연방우주청 지도하에 즈니마쉬, 켈디쉬와 같은 연구소와 대기업인 흐루니체프, 에네르기아, 프로그래스 중앙설계국, KBOM, KBTM 등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작금의 러시아 우주학은 황금기를 보낸 듯이 보인다. 그런데도 러시아의 과학자들은 21세기형 우주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신흥 경제국 러시아가 우주에 투자하는 비율을 서서히 올리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러시아는 이 분야에서 여전히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새로운 발사체 개발사를 써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역발상으로 미국의 허 찌른 미사일 선도국
러시아의 미사일
토폴-M ICBM(위). 현무-2와 비슷한 이스칸다르 전술탄도미사일(오른쪽).
러시아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미사일 운용을 중시 한다. 핵전력도 미사일전력이 뒷받침해주기에 힘을 발휘한다. 전략미사일군은 러시아의 군사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전략미사일군은 러시아가 자랑하고 싶지만 깊이 숨겨놓은 ‘강력한 한 방’이다. 8만 명의 병력에 3개 미사일군(15개 사단), 570기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다. 군 통수권자의 명령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부대이기도 하다.
러시아 해군의 전략핵잠수함과 공군의 폭격기도 핵전력을 운용하지만 러시아 핵무기의 절반 이상을 전략미사일군이 운용한다. 1959년 창설된 이 부대는 소련 시절에는 ‘전략로켓군’으로 불렸다. 당시 소련은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인 R-7을 배치하면서 서둘러 전략로켓군을 창설했다.
막강한 전략미사일군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던 흐루시초프는 전략로켓군 창설을 공개하며,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고, 이 부대가 보유한 무기는 지구 어느 곳에도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현재 러시아 전략미사일군은 오래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신형인 토폴-M 미사일로 교체하고 있다. 차세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토폴-M(Topol-M)은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MD)에 대항하기 위해 러시아가 개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이다. 1997년부터 전략로켓군에 배치됐다. 러시아는 미국이 토폴-M 발사 장소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차량에 탑재할 수 있게 했다. 차량에 싣고 예상치 못한 곳으로 달려가 발사할 수 있게 한 것.
토폴-M은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에 비해 속도가 빠르다. 비행 중 방향 전환이 가능한데, 이 기능으로 미국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있는 MD를 뚫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 제3세계 전략무기 (스커드)
러시아는 전술 탄도미사일 분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스커드(Scud)는 냉전 시절 소련이 개발해 제3세계 국가에 판매하거나 기술을 전수해준 대표적인 전술탄도미사일이다.
스커드는 소련이 명명한 이름은 아니다. ‘스커드’란 이름의 정찰작전을 펼쳐 이 미사일의 존재를 확인한 나토(NATO)가 붙인 코드네임이다. 소련이 개발한 R-11 전술탄도미사일을 NATO가 SS-1B로 판단하고, ‘스커드 A’(사정거리 180km)라는별명을 붙였다. R-11 탄도미사일은 마카예브 설계국(Makeyev OKE)이 개발해 1957년부터 소련군에 실전 배치되었다.
스커드 B는 1970년대부터 총 7000여 기가 생산돼 소련을 포함해 32개국이 운용하는 미사일이다. 많은 나라가 복제하거나 사정거리를 연장하는 쪽으로 개량해가며 이 미사일을 확산시켰다. 이 때문에 소련과 가깝게 지낸 나라에는 사정거리를 연장한 스커드 B 계열의 탄도미사일이 다수 존재한다. 이러한 미사일의 대표가 이라크의 ‘알 후세인’과 북한의 ‘화성5/6호(스커드 Mod B/C)’ 그리고 ‘노동’ 탄도미사일이다.
■ 5m 이내 명중 (이스칸다르)
2006년부터 러시아군에 배치된 전술탄도미사일로 이동식 발사대를 사용한다. 사정거리가 500km를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사 속도가 매우 빠르다. 전자광학장치가 부착된 유도장치를 장착하면 목표물 5m 이내의 정확도로 명중시킨다.
이스칸다르는 현무-2 탄에 비교할 수 있다. 현무-2의 정확도는 30m 이내로 알려져 있으므로 이스칸다르가 현무-2보다 우수할 것 같다. 이스칸다르는 미사일 잡는 미사일로 알려진 PAC-3도 회피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가지고 있다.
■ 지대공미사일 (S-75)
냉전이 시작된 뒤 소련은 서방 측의 공군력에 큰 위협을 느껴 지대공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하여 개발한 최초의 지대공미사일이 S-25 베르쿠트(Berkut)다. 나토는 이 미사일을 SA-1 길드(Guild)로 명명했다. S-25는 1955년부터 실전 배치되었고, 무려 1만 1000여 기가 생산되었다.
1957년 소련은 S-75 드비나(Dvina)를 내놓았다. 나토는 이 미사일을 SA-2 가이드라인(Guideline)으로 명명했다. 이 미사일은 미국이 개발한 고공정찰기 U-2를 격추함으로써 유명세를 탔다. 그때까지 U-2는 지대공미사일이 도달할 수 없는 고고도를 비행한다고 알려졌기에 미국은 마음놓고 U-2를 소련 상공에 진입시켜 정찰활동을 했다.
이러한 U-2를 1960년 5월 1일 발사된 S-75 드비나가 격추시켰다. 드비나는 베트남전에서도 맹활약을 했다. 그로 인해 지대공미사일을 의식하지 않고 작전하던 미 공군기와 해군기의 작전 방식이 크게 바뀐다. 지대공미사일과 연동된 레이더 기지에서 발사되는 전파를 잡아 레이더 기지를 무력화하는 전자전기를 개발하고, 레이더파를 따라 들어가 레이더 기지를 파괴하는 미사일 개발에 나선 것이다.
■ 러시아판 MD 핵심 (S-400)
오늘날 가장 정교한 지대공미사일 체계로 꼽히는 S-400 트라이엄프(Triumf) 지대공미사일은 2007년부터 러시아군에 실전 배치되었다. S-400 트라이엄프는 PAC-3 이전에 나온 패트리어트 체계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목표물에 따라서 최단 40km부터 최장 400km까지 요격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텔스전투기와 순항미사일도 격추할 수 있으며, 격추가 어렵다고 알려진 중거리 전술탄도미사일도 요격할 수 있다고 한다.
■ 해전의 양상 바꾼 (스틱스)
냉전이 시작되던 1950년대 소련은 미국에 비해 해군전력이 약했다. 해군력이 약하면 상대 함대의 접근을 막는 거부전략을 택하게 된다. 대함미사일을 발사해 접근해 오는 상대 함대를 격파하는 것이다. 소련 해군은 거부전략을 위한 카드로 대함미사일의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소련 최초의 대함미사일인 P-1을 개발해, 1958년부터 실전 배치했다. 1960년에는 보다 성능이 우수한 신형 P-15를 개발해 배치했다. P-15를 나토는 SS-N-2 스틱스(Styx)로 명명했다. P-15는 지대함 형식이었는데 곧 함대함 식으로도 개발되었다.
P-15, 즉 스틱스 지대함미사일이 위력을 발휘한 것은 제3차 중동전 때였다. 1967년 10월 이집트의 포트사이드 항 인근 해역에서 이집트 군을 감시하던 이스라엘의 구축함 에일라트(Eilat)함이 4발의 스틱스 지대함미사일에 격침되었다.
에일라트 구축함 피침으로 세계 해군은 대함미사일의 위력을 절감했다. 소련 역시 대함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해, 러시아는 대함미사일 분야에서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되었다.
■ 초음속 대함미사일 (야혼트)
초음속 대함미사일은 아음속 대함미사일에 비해 비행속도가 빨라 전투함에 설치한 골키퍼, 팔랑크스 같은 방공미사일체계로는 대응하기 어렵다.
러시아는 세계 최초로 초음속 대함미사일을 전력화했다. 1999년에 내놓은 야혼트(Yakhont)는 마하 2.5의 비행속도를 자랑한다. 발사 고도에 따라서는 최장 사거리가 300km까지 늘어난다.
야혼트는 러시아와 인도가 공동 개발한 브라모스(BrahMos) 초음속 순항미사일의 모체가 되었다. 브라모스는 초음속 대함미사일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목표물을 공격하는 초음속 순항미사일이다. 함정은 배경이 간단한 바다에 떠 있기에 표적 확인이 쉬우나, 지상 목표물은 유사 표적이 많은 탓에 표적 확인이 어렵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순항미사일은 표적 확인이 용이하도록 음속보다 늦은 속도로 날아간다.
그런데 러시아가 야혼트를 만들자 인도는 이 미사일을 토대로 러시아와 함께 지상 공격이 가능한 초음속 대지 순항미사일 ‘브라모스’를 만들고 있다.
중국의 항공산업
구 소련의 항공기를 복제 생산하던 중국이 소련 붕괴 덕분에 소련의 항공기술을 도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를 협박해 전투기 기술을 습득하고 스텔스 전투기를 제작하는 등 중국은 항공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울러 광대한 내수시장을 미끼로 내걸고 선진국 항공기 제작사들의 투자를 이끌어내 민항기 부문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키고 있다. |
2012년 6월 18일 중국의 네 번째 유인 우주선 선저우(神舟) -9호가 중국이 쏘아 올린 우주정거장인 톈궁(天宮)-1호와 도킹함으로써 중국은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유인 우주 도킹에 성공한 국가가 되었다. 이는 우주 기술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항공기술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주발사체를 쏘아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기권을 통과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우주왕복선, 우리나라의 나로호, 북한의 은하-3호가 그랬듯이 우주발사체 사고는 대부분 대기권 내에서 일어난다. 대기권을 비행하는 것이 항공기술이므로, 우주발사는 항공기술 기반이 없으면 이뤄질 수 없다. 최근 중국은 스텔스기인 J-20과 함재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이 우주 개발에 성공을 거듭하는 것은 항공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방증이다. 우주 개발의 초석이 되고 있는 중국의 항공 개발은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J-20이 공개된 지 1년이 지났다. 단일 무기 도입으로는 창군 이래 최대라는 3차 FX사업을 펼치는 우리로서는 J-20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이 스텔스기를 개발하고 있는 이상 우리도 스텔스기 도입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J-20 개발에 앞서 중국은 4세대 전투기인 J-10을 내놓았다. J-10은 1998년에 처녀비행에 성공했지만 4세대 전투기라고 하기엔 부족한 점이 매우 많았다. 그 뒤 내놓은 것이 5세대인 J-20이다. 중국은 어떤 경로를 거쳐 5세대 전투기까지 개발하게 됐을까.
스텔스 전투기 J-20이 나오기까지
일본과 싸우던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은 조종사 후보생을 소련에 보내 조종사를 양성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만을 제외한 전 중국을 석권한 다음인 1949년 11월 11일 공군사령부를 설립했다. 그때는 소련과 관계가 좋았으므로, 소련으로부터 전투기와 엔진 수리설비, 조립라인 등을 원조받아 운용했다. 미그-7과 미그-19의 도면도 이전 받았다. 이를 토대로 중국은 기초적인 전투기 설계 능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소 관계가 악화된 1950년대 말이 오기 전에 복제를 통한 국산화에 성공했다. 이 시기 중국은 복제 전투기를 5000기까지 보유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짝퉁 전투기를 생산한 것. 이 전투기들은 숫자만 많았지 전투능력이 매우 떨어져 중국 공군을 근대화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중국 항공산업의 견인차는 1953년 랴오닝성에 세운 선양항공공사(瀋陽航空公司)다. 중국은 소련과 가까운 선양에 이 회사를 세워 소련의 기술을 적극 흡수했다. 소련과의 사이가 멀어진 1958년, 소련에서 멀리 떨어진 쓰촨성의 청두(成都)에 청두항공공사(成都航空公司)를 세웠다.
소련과 사이가 나빠진 1960년대와 1970년대 중국의 항공산업은 암흑기에 빠졌다. 당시 중국은 주체성을 강조했기에 소련 전투기를 복제한 전투기에 그들의 이름을 붙였다. 중국 전투기의 이름은 J로 시작하는데, J는 섬멸하다의 ‘섬(殲)’을 중국어로 읽은 ‘젠’에서 나왔다. 이 시기 중국은 미그-17은 J-5, 미그-19는 J-6, 미그-21은 J-7로 복제해 유지 보수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1980년대 들어 중국 주변국들이 항공 전력 강화에 나섰다. 한국이 ‘평화의 가교(Peace Bridge)’라는 사업명으로 미국에서 F-16을 도입하고, 일본은 최강의 전투기 F-15J를 미국에서 도입했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해리어(Harrier) 수직이착륙기를 도입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당 가격이 1000만 달러였기에 ‘지갑이 얇아’ 포기했다.
대신 주력인 J-7 개량에 도전했다. 이 사업은 청두항공공사가 맡았다. 1980년대까지 중국의 전투기는 레이더를 탑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청두항공공사는 J-7에 레이더를 싣고 엔진을 개량해 최고 속도를 마하 2까지 높였다. 청두항공공사는 2000년대까지 J-7Ⅳ를 내놓았는데 J-7Ⅳ는 4세대 전투기로 분류된다.
구 소련 아닌 서방 전투기 수입
이러한 발전은 뜻밖의 사태로 접하게 된 서방국가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다. 1980년대는 냉전이 첨예했다.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들이 1980년에 열린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 등 공산국가들이 1984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이때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에 성능이 낮은 F-16을 판매하겠다는 소식을 흘렸다. 중국에 대한 F-16 판매는 성사되지 않았지만 미국은 다른 선물을 주었다. 보잉과 노스롭 그루먼 등이 항공 전자장비와 엔진 부문 등에 도움을 준 것이다. 덕분에 청두항공공사는 J-7 개량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중국은 프랑스의 전투기 제작업체인 닷소(Daussault)와도 결과적으로 유리한 거래를 하게 됐다.
중국이 항공력을 강화하자 대만도 대응에 나섰다. 당시는 미중 관계가 매우 좋았던 때라 대만은 미국제 무기를 도입할 수 없었다. 대안으로 프랑스를 두드려 닷소로부터 공대공·공대지 능력을 보유한 미라지 2000-5를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닷소는 공대지 공격 능력이 없는 미라지-2000을 인도했다.
대만은 강력히 항의했고 계약을 위반한 닷소는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려면 상륙전을 벌여야 하고, 상륙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공대지(공대함) 전투기가 있어야 한다. 공대지 전투기 확보가 시급한 대만은 3년간 미국의 록히드마틴을 두드려 야간 저고도 항법과 야간에 적외선으로 표적을 찾아내는‘랜턴(LANTIRN·Low Altitude Navigation and Targeting Infrared for Night)’을 탑재한 F-16을 도입하는 데 성공했다.
대만이 항공력을 강화해가자 중국은 닷소에 불만을 표시했다. 중국은 프랑스로부터 항공 전자장비와 물방울형 캐노피 등 많은 부품을 수입하고 있었다. 중국은 프랑스가 대만에 공대공 능력을 갖춘 미라지-2000을 공급한 것을 핑계로 프랑스와 맺은 모든 계약 중단을 선언하고, 주중 프랑스영사관을 폐쇄했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대만보다는 중국이 훨씬 큰 시장이기에 미라지-2000 완제품을 중국에 넘기고 정밀분석을 해도 좋다는 데 동의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은 항공기 개발에 탄력을 받게 되었다. 중국의 항공산업은 비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봄은 길지 않았다. 1989년 톈안먼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프랑스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이 중국의 인권탄압과 비민주적인 행동을 비난하며 중국에 대한 군사 프로젝트 지원을 끊었다. 중국은 다시 자력으로 항공산업을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기 전 중국은 소련과 군사적 대결을 지양하고 군사기술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협의에서 소련은 미그-29를 팔려고 했으나, 중국은 수호이-27이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수호이-27SK 도입 계약을 체결했다. 톈안먼 사태와 함께 이 일이 미국을 자극해 잘 나가던 미중 관계는 삐걱거리게 됐다.
최초의 독자 설계 전투기 J-10
1991년 동유럽 공산국가에 이어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은 중국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를 선언했다.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와 CIS 국가들이 독립하고 러시아가 소련의 지위를 이었다. 이 시기 러시아의 경제는 최악이었다. 중국은 수호이-27SK의 도입을 서둘렀다. 이것이 재정난에 빠진 러시아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1992년부터 러시아는 단좌형인 수호이-27SK 20대와 복좌형인 수호이-27UBK 6대를 중국에 인도했다. 러시아는 경제위기가 심해지자 생산라인의 수출도 허락했다. 완제기 70여 대를 비롯해 항공기 생산라인 설비, 100여 기의 조립 키트를 중국에 수출한 것.
청두항공공사는 러시아의 미코얀(Mikoyan) 사도 노크했다. 미코얀 사는 미그-29 판매 실패 이후 닥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항공기 설계 기술 전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청두는 미코얀 사를 접촉해 기술을 전수받았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추진한 자유화는 공기업의 사유화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가 직장을 잃었다. 이들을 미국과 영국 등이 먼저 챙겨가고 중국이 다음으로 확보했다. 러시아의 기술인력 유출은 푸틴 대통령이 취임해 첨단 군사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막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대 중국의 가장 큰 적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수호이-27과 미그-29 등 막강한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중국은 구식 전투기가 아무리 많아도 최신식 전투기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다목적 전투기 J-10의 개발을 결정했다. 이때 세계 항공업계는 플라이 바이 와이어(Fly-By-Wire·FBW)라는 새로운 기술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 기술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 시기 이스라엘의 IAI 사가 라비(Lavi)라는 전투기를 개발했다. 그러자 미국이 압력을 넣어 생산을 못하게 했다. 중국은 라비 개발에 참여한 이스라엘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J-10 개발에 참여시켰다. 이런 이유로 J-10 원형은 라비와 비슷한 외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개발이 거듭되면서 미라지-2000을 닮은 쪽으로 변해갔다.
J-10은 카나드-델타익(翼) 구조를 한 다목적 중형 전투기로 개발됐는데, 중국이 카나드-델타익 기술을 독자 개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 부분에서 가장 앞선 프랑스로부터 기술을 도입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설명했듯 중국은 델타익을 적용한 미라지-2000을 프랑스로부터 제공받아 정밀 분석해 J-10에 적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은 J-10을 본격 개발하려는 순간 톈안먼 사태로 서방 세계로부터 고립돼 엔진 기술을 도입할 수 없었다. J-10 개발은 소련이 무너진 후 러시아로부터 AL-31F 엔진을 받을 때까지 답보 상태로 있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J-10은 1998년 처녀비행에 성공하고 2004년부터 J-6를 대체해 실전 배치되었다. 현재 중국은 J-10 전투기 210대를 운용 중이다. J-10의 해외 수출도 진행하고 있는데, 파키스탄 공군에 36대를 납품할 예정이다. J-10은 우리나라가 운용하는 KF-16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중국이 이스라엘의 라비 전투기와 프랑스의 미라지-2000 기술을 도입해 독자 개발한 J-10.
다목적 전투기 Su-30MKK의 도입
소련에서 도입한 수호이-27에 만족한 중국은 수호이 사와 수호이-27 22대를 추가 도입하는 계약을 맺었다. 이어 선양항공공사가 수호이-27 200여 대를 25억 달러에 면허생산하는 계약을 맺는다. 이 계약으로 중국은 대형 전투기 제작 기술과 설계도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중국은 면허생산한 수호이-27을 J-11로 명명했다. J-11은 공대지 정밀타격 능력이 없어 공대공 전투기로 분류된다. 다목적 전투기의 필요성을 확인한 중국은 1996년 러시아와 다목적 전투기 수호이-30MKK의 구매 계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2000년부터 수호이-30MKK를 실전 배치했다. 공군이 수호이-30MKK를 도입하자 중국 해군도 관심을 보여 수호이-30MKK 24대를 인수해 실전 배치했다. 수호이-30은 우리나라의 1차 FX사업 때 F-15K에 패한 바 있다.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미완성 항공모함 바랴그(Varyag)를 구매한 후 개조해 실전 배치를 앞두고 있다. 함재기가 필요해진 중국은 수호이 사를 상대로 함재기 도입 협상을 벌였지만 성사시키지 못했다. 중국은 독자적으로 J-15 함재기 개발을 결정했다. J-15는 J-11의 함재기 버전으로, 수호이-27의 함재기 버전인 수호이-33을 참고해 개발하는 것이다. 중국은 2001년경 비공식 경로로 수호이-33의 원형기인 우크라이나의 T-10K-3를 확보해 J-15 개발에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함재기 J-15 개발
1999년 중국 정부는 중국항공산업공사(中國航空産業公司)를 상하이에 있는 중국항공산업공사(AVIC-Ⅰ)와 하얼빈에 있는 중국항공산업공사(AVIC-Ⅱ)로 분리했다. AVIC-I 은 Xian H-6, JH-7 폭격기와 같은 대형기, ARJ-21 같은 중형 민항기, J-8, J-10, J-11, JF-17 같은 전투기를 생산하고, AVIC-II 는 소형기와 헬기를 생산했다. 2008년 둘은 다시 AVIC 으로 합쳐졌다.
2011년 1월, 미중 군사 관계 개선을 위해 게이츠 미 국방부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은 기습적으로 J-20시험비행을 실시했다. 미국 정보기관의 예측보다 한참 앞서 발표한 J-20의 시험비행에 당황한 미국의 정보기관 관계자들이 워싱턴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중국의 스텔스 전투기 개발 능력을 과소평가했으며 게이츠 장관의 중국 방문 도중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J-20을 본격적인 스텔스 전투기 개발을 위한 실증기로 판단했다.
J-20이 공개된 지 1년이 넘은 지금 J-20의 성능에 대해 논란이 많다. 4세대 전투기인 J-10의 개발 능력을 가진 중국이 5세대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어찌됐든 중국이 엄청난 속도로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통상적으로 스텔스기는 기계식 레이더가 아니라 AESA(Active Electron -ically Scanned Array)로 약칭되는 능동 전자 주사식 위상배열 레이더 탑재를 기본으로 한다. 중국은 AESA 레이더의 개발을 추진해 J-10과 조기경보기 KJ-2000에 장착 운용하고 있다. 중국의 AESA 레이더 성능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J-20은 러시아의 AL-31F나 중국의 WS-10 계열의 엔진을 장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항공기 엔진 개발 실력은?
레이더와 엔진의 성능 추정만으로도 5세대 스텔스 기체 개발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중국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개발에 맞는 장비 개발이 저조하다. 따라서 미국의 스텔스기인 F-22에 비교하면 한참 뒤떨어진 수준임을 알 수 있다. 2006년에 실전 배치한 J-10이 1970년대 개발된 미국의 F-16 초기형 수준이란 사실도 중국의 항공기 개발 기술이 미국에 비해 뒤처진 예로 들 수 있다.
중국 공군 장군들이 수년 전 5세대 스텔스 전투기 프로그램에 대해 언급했다. 그때는 중국이 4세대 전투기인 J-10조차 완벽하게 만들지 못했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1년 J-20을 공개하자 중국 주변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긴장했다. 최근 J-20은 시험비행을 더 자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문제 분석가들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이 지켜온 힘의 균형이 깨질 수 있다고 염려한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전문가인 류장핑(劉江平)은 J-20이 여전히 시험 단계이기에 단기적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군사 지형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이 J-20을 실전 배치하려면 10년 이상 걸릴 것이기 때문에 J-20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위협이라는 것이다.
최근 중국은 항공기에 자체 개발한 엔진을 장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WS-10인데 WS-10은 중국 항공기 엔진 중 성능이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에서는 선양항공공사 산하 항공엔진개발국인 606연구소가 1987년부터 항공기 엔진 연구를 시작했다. 606연구소 설립 전인 1982년부터는 미국에 유령회사를 설립해 항공기 엔진 기술을 빼내는 노력을 펼쳤다. 606연구소는 구 소련의 새턴 설계국으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바이패스비(By Pass Ratio) 터보팬 엔진과 FADEC (Full Authority Digital Electronics Control) 기술의 국산화에 성공한다.
WS-10 엔진은 2008년 주하이(珠海) 에어쇼에서 J-10에 장착된 형태로 실체를 드러냈다. WS-10 엔진은 J-11, J-15 그리고 J-20에도 장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WS-10 엔진을 스텔스기인 J-20에 장착해 운용하기에는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엔진 열 감소 설계 기술 등을 적용해야 한다.
2011년 초, 중국은 엔진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았다. 후진타오 주석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GE(General Electronic)와 9억 달러 상당의 항공기 엔진 개발 합작회사를 상하이에 설립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GE와 AVIC은 보잉787 드림라이너에 사용한 엔진 기술을 공유할 예정이다. 이 회사가 설립되면 중국은 미국의 최신 엔진 기술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1949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산하 민용 항공국으로 시작한 중국의 민항 개발사는 올해로 63년을 맞았다. 중국은 민항기 개발을 위해 많은 항공 기술자를 해외로 파견해 기술을 습득하게 했다. 선진 민항기 제작사와 합작을 통해 항공 기술을 배워나갔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민항 강국 건설 전략을 수립했다.
민항 강국 건설도 꿈꾸다
이를 위해 AVIC II사가 2003년 브라질의 항공기 제작사인 엠브라에르(Embraer) 사와 50인승 단거리 여객기 ERJ-145 생산을 위한 합작기업을 설립했다. 2005년 2월 AVIC II가 중국에서 생산한 ERJ-145를 공개하자, 남방항공을 비롯한 중국 항공사들이 11대를 구매했다.
2005년 7월, 세계 최대의 상업용 항공기 생산업체인 에어버스 사는 중국 베이징에 기술연구센터를 설립하고, 이듬해 8월부터 여객기의 설계와 개발을 시작했다. 톈진(天津)에는 에어버스사가 51%, 중국이 49%를 출자한 FALC (Final Assembly Line China)라는 조립 라인을 설치해 A320을 매달 3대 정도 생산하고 있다. FALC에서 생산되는 항공기의 품질이 프랑스 툴루즈와 독일 함부르크의 조립라인에서 생산되는 항공기와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FALC에서 생산되는 항공기는 유럽 밖에서 생산되는 최초의 에어버스 민항기다.
에어버스는 2016년까지 중국에서 여객기 286대를 생산할 예정이다. 에어버스와 엠브라에르뿐만 아니라 보잉, 유로콥터, 엔진 제작사인 롤스로이스와 GE, P·W(Pratt · Whitney), 하니웰(Honeywell) 등도 중국에 투자했다. 중국은 선진 항공기술사들과 협력해 독자적인 민항기를 개발 생산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AVIC의 직원 수는 약 40만 명, 총자산은 500억 위안이다. 산하 계열사는 200여 개에 달한다. 2009년 AVIC은 217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포춘지 선정 세계 426위 기업에 올랐다. AVIC은 향후 20년 동안 자국 중형항공기 시장의 60% 점유를 목표로 한다. 이 전략의 중심에 AVIC이 독자 개발하려는 민항기 ARJ-21이 있다.
ARJ-21은 78~90석의 민항기로 2008년 첫 비행에 성공했다. AVIC은 이 항공기 개발을 위해 60억 위안을 투자했다. 전 세계 항공사를 상대로 수주전에 나서 2010년 현재 340여 대를 수주했다. ARJ-21은 엔진과 주요 전자장비를 GE와 로크웰 콜린스(Rockwell Collins), 하니웰 등 미국 회사 장비로 채웠다. 이는 중국 민항기의 서브시스템과 부품 기술이 미국과 유럽 기술에 미치지 못함을 보여준다.
중국 민항기, 듀오폴리 시대 끝낼까
보잉의 상용기 부문 책임자인 짐 알바는 여객기 분야에서 듀오폴리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했다. 듀오폴리란 보잉과 에어버스가 민항기 시장을 양분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짐 알바는 중국이 COMAC(Commercial Aircraft Corporation of China·중국 상용항공기 유한공사)의 C-919를 가지고 민항기 시장에 본격 가세했음을 알린 것이다. 2011년 파리 에어쇼에서 COMAC은 유럽 최대 저가 항공사인 라이언에어(Ryan Air)로부터 C-919 200대 구매의향서(MOU)를 받았다. 라이언 에어가 COMAC을 선택하는 이유는 가격이었다. 2011년 초 COMAC이 GE와 C-919에 탑재할 통신 및 항법 장치를 공동 개발하기로 한 것도 라이언에어가 COMAC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됐다. C-919는 최장 항속거리가 5555 km인 150인승 중형항공기다.
COMAC은 세계 3위 민항기 제조업체로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 COMAC은 290인승 C-929와 390인승 C-939도 함께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C-919는 경쟁기종인 A-320과 B-737에 비해 기술적으로는 앞서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항공기를 개발했을 때에 손익분기점을 300대 판매로 본다. 한국의 KT-1과 T-50, 헬기인 수리온 등은 우리 군 수요로 300대 안팎의 물량이 확보되므로 개발할 이유가 있다. 중국은 우리보다 훨씬 큰 내수시장을 갖고 있다. 엔진은 2000~3000기를 생산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데, 중국이 이런 시장이 될 수 있다. 유무인 우주선과 대륙간탄도미사일 사업도 펼치는 등 전후방 사업이 많아 중국의 항공기 제작 실력을 빨리 성장시킬 것으로 보인다.
他山之石
1967년 마산 출생. 동의대학교 졸업. 한국우주정보소년단 과학팀장, 천문우주기획 우주팀장 역임. 국내 최초로 우주비행사캠프 운영. 저서 ‘우주개발 숨은 이야기’ 등
2018년 중국의 항공전력이 미국을 7 대 1로 앞설 것이라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한 한 미국 군사전문가의 경고를 과장으로만 볼 수는 없다. 당장은 북한이 우리의 주력 방어 대상이지만 우리는 중국의 군사적 패권정책에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1차적으로 ‘이에는 이로’ 대항해야 한다. 우리 항공력과 공군력을 극대화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도 첨단 항공기술을 외국에서 이전받는다는 방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체 기술력을 키워야 한다. 국가적인 의지와 투자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미국에 맞서는 판다의 ‘우주굴기’
중국의 미사일
추적 결과 중국은 예상했던 대로 소련의 미사일을 복제하면서 기술을 익혀 ICBM까지 개발해냈다. 영어로는 DF, 중국어로는 ‘둥펑(東風)’이란 이름으로 개발돼온 중국 미사일의 A to Z를 밝힌다. DF 개발에서 얻은 기술을 우주발사체 ‘창정(長征)’ 개발에 전용했다.
중국 탄도미사일의 탄착범위도
■ (DF-1)
중국의 탄도탄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을 통해 미국의 항공 전력과 핵무기 전력에 위협을 느낀 중국은 대응무기체계로 탄도탄 도입을 결정했다. 당시는 탄도탄 자체 개발이 어려워 소련을 통해 조달했다.
처음 도입한 것은 서방진영에서는 SS-2로 알려진 R-2 단거리탄도탄이었다. R-2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전력화한 V-2 로켓(사거리 300km)을 모방하고 탄체를 연장한 것으로 사거리는 600km였다. 중국은 R-2를 면허생산 방식으로 조달했다. 중국군 제식명칭은 ‘DF-1’, 즉 ‘둥펑(東風)-1호’다.
■ (DF-20)
핵탄두 장착을 목적으로 한 탄도탄으로 1960년 본격 개발에 들어갔다. DF-2는 서방국가들이 SS-3라 부르는 소련의 R-5 탄도탄을 모방한 것으로 액체연료 엔진을 사용한다. 최장 사거리는 1250km인 준중거리탄도탄(MRBM)이었다. 중국은 원자폭탄 개발도 진행해 1970년대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전략유도탄을 보유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최초 시험발사 시기는 1964년 6월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시험발사는 1966년 10월 이루어졌다. DF-2의 탄두부 중량은 약 1.29t이었다. 여기에 12킬로톤 위력의 원자탄 탄두를 탑재할 수 있었다. DF-2는 1단 액체연료 로켓추진으로 약 90발이 전력화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DF-2 탄도탄의 액체연료는 장기보존이 불가능해 DF-2는 즉각 발사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의 탄도탄 개발이 요구되었다.
DF-2와 함께 등장한 DF-3는 사거리를 2500km로 연장한 IRBM(중거리 탄도탄)이었기에, 중국 본토에서 발사하면 필리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중국은 필리핀 수비크만 등에 주둔하는 미 공군과 미 해군을 견제하기 위해 DF-3를 만들었다.
■ (DF-3)
1단식의 액체연료 로켓추진 방식으로 발사중량은 64t에 달했다. 엔진추력은 96t으로 최단 사거리는 750km, 최장 사거리는 2650km를 기록했다. 탄두부에는 3메가톤의 수폭을 탑재할 수 있었고, 관성유도 방식을 채택해 탄착오차는 반경 2km 정도였다.
DF-3는 1970년 전략화됐다. 150여 발을 만들어 제2포병군에 배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DF-3 탄두부를 MRV(2개 이상의 재돌입체)로 교체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1985년 중국은 MRV 개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DF-1에서 DF-3까지의 개발과 배치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이 미국의 핵무기 전력을 견제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중국은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미국과 수교하는데 이는 중국이 발전한 탄도탄 전력을 기반으로 자신감을 갖고 미국과 관계를 개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DF-3의 개량에 실패한 중국은 차선책으로 최장 사거리를 2800km로 늘이고 탄착오차를 반경 1km로 줄인 DF-3A 도입에 집중한다. 1980년대 후반 중국은 DF-3 탄도탄을 수출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의 제리코 탄도탄 전력을 견제하기 위해 DF-3를 사들인 것이다. 미국은 알고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2012년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DF-3 보유 여부는 확인 불가 상태이나 폐기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출된 DF-3는 탄두중량이 2.5t, 사거리가 2400km인 파생형이었다. 1986년 중국에서 발사시험을 하고 1987년 60여 발을 인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12년 현재 중국군의 DF-3A는 10발 이하로 퇴역 일보 직전인 것으로 파악된다.
■ (DF-4)
1965년부터 별도로 개발된 탄도탄이다. 2단 액체연료 로켓추진체를 사용하며 괌에서 출격하는 미 공군 B-52 폭격기 부대 공격을 목표로 했다. DF-3의 탄체를 전용해 개발하는 것이기에 사거리는 4000km가 목표였다. 그런데 1970년 위성요격체 개발 가능성을 위한 시험발사를 하면서 계획을 수정해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까지 도달하도록 목표 사거리를 4500km로 연장했다.
그리하여 2단에 발사중량이 82t인 대형 탄도탄 DF-4가 탄생했다. 최종적으로 탄두중량 2.2t, 사거리 4750km를 달성했다. 유도방식은 스트렙 다운 방식이고 탄착오차는 1.5km였다. 탄두는 3메가톤급의 핵무기를 탑재한다. DF-4는 1980년대 전력화됐으나, 30여 발만 생산됐다. 현재 20발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DF-21)
중국은 고체연료 로켓추진체를 사용하는 DF-21 탄도탄을 1982년 개발했다. DF-2 탄도탄을 바탕으로 이동발사대 차량에 탑재하고 발사중량은 14.7t, 분리형 탄두부의 탑재 가능중량은 600kg이다. 최대 500킬로톤 위력의 핵탄두 탑재도 가능하다. 최초의 시험발사는 1985년에 했고, 전력화는 1987년 시작했다.
전력화 초기 이동식 발사차량은 세미 트레일러 방식이었다. 개량형인 DF-21A와 DF-21B는 차체 위에 잠수함 발사 탄도탄의 발사관 형태로 수납됐다. DF-21A 유도부에는 1990년대 말에 완성된 관성유도장치에 GPS와 종말유도 레이더가 추가됐다. 사거리 약 2500km, 탄착오차는 50m로 향상됐다.
후속 개량형인 DF-21B형은 2006년 전력화했다. 개량한 유도시스템을 추가해 탄착오차를 10m 이하로 줄였다. 20~150킬로톤의 위력을 가진 핵폭탄, 500kg 무게의 재래식 탄, 클러스터탄 등을 탄두로 탑재한다. 미국 국방부는, 중국이 DF-21 발사차량을 35대 갖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미사일의 대수는 최대 80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DF-25)
DF-21의 후속 탄도탄으로 1990년대 개발을 시작했다. 고체연료의 2단식으로 사거리 약 1700km, 탄두중량은 2t, 재래식 탄두를 탑재한다. 1999년에는 발사중량 20t에 사거리 3000km에 도달했다. 탄착오차는 사거리 2500km 전후에서는 10m 미만으로 판단된다. 이동식 발사차량으로는 대형 차량을 사용한다. 탄두부는 탑재량에 따라 1.2t짜리와 1.8t짜리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DF-25에는 대형의 단일형 재래식 탄두는 물론이고 클러스트 탄두, 집속탄 탄두, 1~3메가톤 위력의 핵탄두, 3개의 재돌입체 탄두를 달 수 있다. DF-25는 중국이 개발한 최신형 중거리 탄도탄으로 곧 배치된다.
■ (DF-5)
중국 최초의 대륙간 탄도탄으로 발사중량이 183t에 달한다. 1단 추진체는 액체연료 방식을 채택해 280t을 추력을 내고, 2단 추진체는 70t의 추력을 낼 수 있다. 유도방식은 컴퓨터가 제어하는 자이로 관성유도이고 실전배치는 1981년 이뤄졌다. 최장 사거리는 1만2000km, 탄착오차는 약 800m다. 탄착오차를 500m로 줄인 DF-5A 개량형은 1986년 등장했다. 50여 발을 제작해 2012년 현재 40여발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DF-5 로켓추진체를 전용(轉用)한 것이 창정(長征)-2호(CZ-2C) 우주발사체였다.
■ (DF-31)
3단식의 고체연료 로켓추진 방식의 탄도탄으로 탄두중량은 700kg, 최장사거리 8000km, 발사중량 42t, 탄두 탑재량 약 1.75t이고 1~3메가톤 위력의 단일형 핵탄두나 20~150킬로톤의 다탄두 MIRV를 탑재할 수 있다. 유도방식은 관성유도와 스테라 보정 방식을 조합했다. 탄착오차는 300m이며 세미 트레일러형 트럭에 탑재한 1식과 사이로 발사형 2식, 대형 트럭 탑재형 3식, 열차이동형의 4식이 존재한다. 2006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10여 발이 배치됐으며, 개량형인 DF-31A형 10여 발도 전력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DF-31A는 사거리를 1만km로 연장한 것으로 중국군의 주력 ICBM 으로 인정되고 있다.
■ (DF-41)
DF-5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는 차기 ICBM이다. 사거리 2만km에 6개 이상의 다탄두를 장착한다. 도로 및 철도 이동식으로 설계되었다.
■ (JL 시리즈)
중국 해군은 잠수함 발사 탄도탄(SLBM)으로 JL 시리즈를 갖고 있다. 1960년대 개발된 JL-1은 DF-21 기술을 전용해 만들어졌다. 탑재할 잠수함은 094형이다. 실전용 잠수함인 094형에는 12발을 탑재한다. JL-2는 DF-31 지상발사탄도탄과 동일한 8000km 사거리에 1메가톤 위력의 단일형 핵탄두나 20~150킬로톤의 다탄두를 3개 이상 탑재하도록 설계됐다.
1987년 중국 해군이 취역시킨 092형 원자력 추진 잠수함은 JL-1A SLBM을 12발 수납한다. JL-1A의 성능은 사거리 2500km에 탄착오차 50m다. 개량성과는 있으나 사거리가 짧기에 JL-1A를 SLBM 전력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때문에 중국 해군은 대체형인 JL-2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일본의 항공산업
일본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이고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F-2 전투기.
일본은 1910년 12월 처음으로 동력비행에 성공했다. 1903년 12월 7일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12초간 동력비행에 성공하고 나서 10년도 안 지난 때에 비행기를 날린 것이다. 자국산 비행기가 아니라 프랑스와 독일제 기체로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 일본의 기계공업은 서구에 비해 크게 낙후돼 있었기에 기체를 제조·생산하는 단계에는 못 미쳤다.
모방에서 창조로
항공기 관련 사업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주체는 ‘임시군용기구연구회’였는데, 이 조직은 육군성, 해군성, 문부성의 3성이 공동으로 설립한 것이었다. 초기 일본의 항공산업은 군이 추진해 산업화가 더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세계대전으로 기체와 엔진의 수입이 어려워지자, 일본 자체적으로 모방생산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인 만큼 모방생산한 엔진은 성능이 불안정하다는 등의 기술적 한계를 드러냈지만, 일본은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생산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축적했다. 항공기 개발의 실행 주체였던 임시군용기구연구회가 육군의 직속단체로 바뀌자, 해군은 1916년 함정본부에 해군항공기술연구위원회를 설치했다. 문부성도 항공학조사위원회를 설립함으로써 3성은 별도로 항공기 개발을 추구했다.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육군과 해군은 대립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모방생산을 본격화한 시기 민간에서 항공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육군과 해군이 해외에서 항공기를 수입하면서 일부 소요를 민간기업에 맡기기로 한 것이 계기였다. 1919년 나카지마 비행기, 1920년 미쓰비시의 고베 내연기제작소가 설립되고, 이어 가와사키, 가와니시 등 훗날 일본 항공기산업의 핵심이 될 기업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신생 제작사들은 설계능력이 없었다. 군이 기체나 엔진 제조권을 해외기업에서 구입해주면, 해외기업이 보내준 기술자가 일본에 와서 지도생산을 하는 식이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항공기의 재고가 쌓여 항공시장이 포화 상태였기에 우수한 서구 기술자들이 일본 항공기산업에 투입되었다. 일본은 1922년 체결된 워싱턴 조약으로 영·미에 비해 주력함 건조비율 면에서 불리해졌다. 일본 해군은 전력 열세를 항공력 강화로 극복하고자 했다. 육군은 해군에 뒤질세라 1924년 육군항공본부를 설치했다. 육·해군이 동시에 항공력 강화에 나선 것이다.
덕분에 항공기 제작 국산화에 속도가 붙었다. 생산능력도 일취월장해 군의 조병창을 능가하는 항공기 제작사들이 등장했다. 그로 인해 1930년 민간에서 개발한 항공기가 해군의 연습기와 함상전투기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은 항공기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2년의 상해사변을 겪은 일본군 수뇌부는 광활한 중국대륙에서 효율적인 작전을 위해 더 많은 군용기를 요구했다. 군의 요구에 맞는 최신예기종을 개발·양산하라고 일본 항공산업계에 요구한 것이다.
일본 항공산업계는 국산 전투기로 F-2를 개발 생산했으나 커다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로 파괴된 F-2 전투기들의 모습이다.
1935년 미쓰비시가 A5M 96식 함상전투기를 개발하자 일본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다. ‘레이센(零戰)’ 함상전투기(일명 제로 전투기·제로센)의 개발원형이 된 96식 전투기의 우수한 성능을 확인한 일본 해군은 더 이상 해외기종을 구입하지 않기로 했다. 최신예 항공기를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일본 항공기산업에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주었다. 확전으로 전투기와 폭격기 소요가 급증해, 1936년 한 해 동안 민간기업은 557대의 군용기를 생산했다. 이듬해에는 두 배인 1144대를 생산했다. 아시아 점령 야욕이 구체화되면서 군용기 소요는 더 증가했다. 1938년 육군은 2262대를 요구했고, 1939년에는 3064대를 요구했다.
공포의 제로센 허상 드러나
중일전쟁이 시작됐을 때 일본군은 월 항공기 100대 생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양산 요구에 응할 수 있을 만큼 일본 기업들의 기술과 자본은 성숙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항공기 성능이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최신 항공기에 장착되는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정밀부품을 대량 생산할 수 없었다. 일본의 기술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많은 민간 항공기 제작사가 다양한 항공기를 만들어 일본군에 납품했다. 미쓰비시는 무려 1만500여 대의 제로전투기를 납품했고, 나카지마(현 후지중공업)는 2만6000여 대의 항공기를 납품했다. 전쟁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에서는 60여만 명의 노동자가 연간 2만5000여 대의 항공기, 4만여 개의 엔진을 생산했다. 1944년경에는 12개의 항공기 제작사와 7개의 엔진 제작사가 있었다.
일본 해군이 채용한 레이센, 즉 제로센은 뛰어난 기동성과 상승속도, 긴 항속거리 등으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진주만 기습으로 초전에 승기를 잡은 일본 해군의 베테랑 조종사들이 제로센에 탑승해 미군을 공략했다. 실전 경험은커녕 비행경력도 짧았던 미군 조종사들은 성능이 낙후된 전투기로 제로센을 막아섰다가 전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떨어졌다. 미군은 ‘제로센 쇼크’에 빠졌다.
미군이 추락한 제로센 기체를 획득한 후 상황은 바뀌었다. 분석 결과 제로센은 소문만큼 우수한 전투기가 아니었다. 엔진 출력이 부족한데 강력한 기동성을 확보하려다 보니 장갑을 제거해 기체가 약해져버렸다. 미국은 제로센이 공중분해될 것이 두려워 급강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기관포 몇 발만 맞아도 산산조각 날 만큼 연약하다는 것도 간파했다. 미군은 ‘태치위브(Thach Weave·미 해군 조종사인 태치가 개발한 공중전 전법)’ 전법을 활용해 제로센을 차례로 격파해나갔다.
미군 전투기들은 강력한 장갑과 우수한 전술로 우위를 점해나갔다. 일본은 그에 대응해야 했으나 능력이 달렸다. 제로센의 가면은 벗겨졌다. 일본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제로센을 설계·제조했다고 자랑했으나, 제로센은 영국에서 개발된 글로스터 F.5/34 전투기의 복제품이었다. 일본의 기술력은 모방설계와 생산까지는 가능했으나 엔진 출력을 강화하거나 장갑의 추가장착 같은 큰 개조는 전혀 하지 못했다. 실전에서 요구되는 사항을 제로센에 반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항공기의 대량생산에도 실패했다. 개전 초기 일본은 국력 차이를 고려해 항공기 생산목표를 미국의 3분의 1 정도로 책정했다. 1944년 일본은 일시적으로 이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생산량이 아니었다.
항공기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일한 품질 유지다. 균일한 품질이 유지되어야 항공기는 실제가동률을 유지한다. 일본 항공기들은 전쟁이 장기화되자 가동률을 유지하지 못했다. 부품의 정밀성이 떨어진 것이 큰 원인이었다. 제로센 전투기에 사용된 볼베어링의 정밀도가 오늘날 파친코에 쓰이는 구슬보다 떨어진다고 하니, 짐작이 갈 것이다.
숙련공들이 최종공정을 담당했던 전쟁 초반 육·해군 항공기의 가동률은 80%에 달했다. 전쟁이 계속돼 숙련공들이 대거 징집되자 그 자리를 주부와 학생들이 대신하게 되었다. 숙련공이 사라졌으니 1944년 군 항공기의 가동률은 50%대로 떨어졌다. 1945년에는 항공유 부족까지 더해져 20%대로 곤두박질했다.
물론 미국에 대항할 정도로 성장했던 일본의 항공산업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제트기까지 생산했다. 나카지마가 ‘황국 2호 병기’라는 명칭으로 신무기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트전투기인 ‘기카(橘花)’였다.
일본 해군은 미군의 전략폭격기에 대응할 결전 병기가 필요했다. 일본 해군은 호위기의 도움 없이 폭격기를 공격할 수 있는 단좌식 쌍발 제트요격기 개발을 요구했다. 이 요격기의 원형은 동맹국인 독일의 Me 262 제트기였다. 제트기의 생산에서 큰 문제가 된 것은 엔진이었다. Me 262는 BMW 003 축류터보 엔진을 장착했다.
6·25전쟁 계기로 항공산업 부활
일본은 독일로부터 설계도와 함께 견본으로 사용할 엔진을 제공받기로 했다. 그러나 이를 운반해오던 잠수함이 격침되면서 설계도를 받지 못해 BMW 003 엔진의 실물을 보며 복제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1945년 여름 이시카와지마 하리마에서 BMW 003을 카피한 Ne-20 엔진 개발에 성공했다. 8월 7일에는 이 엔진을 장착한 기카 시제기가 초도비행을 했다. 그때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다.
기카는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종전 뒤 패전국 일본은 항공산업이 금지됐으므로 기카는 완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기카는 양산했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일으켰을 것이다. Ne-20 엔진의 출력이 너무 낮아 기카를 이륙시키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과거 항공산업은 과대 포장돼 알려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2003년에야 T-50 훈련기로 제트기 생산 시대를 연 우리보다 60년 앞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는 저력은 평가절하할 수 없다.
일본을 점령한 미군은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주체가 돼 군정을 시작했다. 미국은 일본이 어떤 군사무기도 생산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생산금지에 항목에 항공기가 포함돼 있었다. 세계가 프로펠러 추진 항공기에서 제트 항공기로 발전해가는 시기, 항공기 생산을 금지당했으니 일본의 항공기 산업은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미군정 종료와 6·25전쟁 발발로 일본 항공업계는 기회를 잡았다.
1952년 최고사령부의 군정이 끝나면서 일본은 주권을 회복했다. 최고사령부가 내린 항공기 생산금지 정책도 종말을 맞게 될 터였다. 6·25전쟁에 참전한 미국은 일본에서 항공기를 정비했다. 부활하기 시작한 일본 항공산업은 일본에 배치되거나 6·25전쟁에 참가하는 미군 항공기를 유지 보수하는 능력을 갖추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리고 항공기를 자체 생산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독립한 일본은 미국과 협력해 항공산업 재건에 나섰다. 미국은 일본을 소련과 중공의 위협에 대처할 전진기지로 봤다. 미국은 기술과 군수지원능력을 강화해 일본의 전쟁억제력을 강화시켰다. 연합 작전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미군과 동일한 군수와 군 장비 체제를 갖추게 했다. 미군 식으로 자위대 장비를 표준화해 미 공군의 보조전력으로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양국의 공조는 1954년 미일 상호방위조약으로 구체화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노스아메리카의 F-86 세이버 전투기가 일본에서 처음으로 면허생산됐다. 일본 정부가 미국 정부와 양해각서(MOU)를 맺으면, 일본의 제작업체가 미국의 원 제작사로부터 기술지도를 받아 생산하는 형태였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모방생산체제를 답습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점은 있었다. 전후 빠르게 발전한 공업기반을 토대로 일본은 선진국 수준의 품질을 갖춘 제품을 생산할 능력 배양을 목표로 했다. 일본의 통상산업성(현 경제산업성)은 항공업계의 빅4(미쓰비스중공업, 가와사키중공업, 이시카와지마 하리마중공업, 후지중공업)를 중점 육성했다.
실패로 끝난 YS-11 생산
미국은 일본에 경제적인 도움도 주었다. 군사원조사업의 일환으로 기술이전과 함께 미국 항공기의 일본 내 생산 비용 일부를 지원했다. 1954년 일본은 항공자위대를 발족하자 전투기를 도입해야 했다. F-86 전투기의 대당 가격은 1억5000만 엔에 달했는데, 방위청에 할당된 항공기 구입예산은 7억 엔에 불과했다. 미국은 미일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항공기 구매에 필요한 예산을 상호방위 원조사업 형식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원조는 1964년까지 계속되었다.
전후 일본이 생산한 항공기들은 제1세대 전투기나 헬기, 해상초계기 등이었다. 자신감을 회복한 일본은 최신 기종들을 생산하고자 했다. 1960년대 F-104J를 면허생산했다. 그러나 진정한 도약은 민간항공기 분야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일본 통산성은 진작부터 항공기 생산규제가 풀릴 것에 대비해 항공기 개발자를 관리해왔다. 규제가 풀린 1957년 통산성은 재단법인 ‘수송기설계연구협회(이하 수연)’를 발족시켰다. 운수성으로부터 일본 내에 필요한 항공기 수요를 확정받은 통산성은 수연으로 하여금 쌍발 터보프롭 중형항공기인 YS-11을개발하게 했다.
민용기 개발에 나선 것은 군용기를 개발하면 미국으로부터 제재를 받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민용기를 양산해 수출을 모색하자는 실리적인 의도도 깔려 있었다. YS-11의 개발에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최고의 군용기 설계자들이 대거 투입되었다. 제로센과 라이덴(雷電·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 해군이 사용한 국지전용 전투기)을 개발한 미쓰비시의 호리코시 지로(堀越二郎)를 필두로, 하야부사 전투기를 설계한 후지중공업의 오타 미노루(太田稔), 시덴카이 2식 국지전투기를 설계한 신메이와공업의 기쿠하라 시즈오(菊原靜男), 히엔 3식 전투기를 설계한 도이 다케오(土井武夫), 그리고 장거리 비행기록을 세운 항연기를 만든 도쿄제국대학의 기무라 히데마사(木村秀政)까지 일본 최고의 전문가 5명이 모여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1년여 만에 설계를 완료하고 YS-11 모형을 공개했다. 수연과 항공기 제작사들은 YS-11의 본격적인 개발과 생산을 시작했다. 수연은 해체되고 민관 공동의 특수 법인인 ‘일본 항공기 제조(NAMC·Nihon Aircraft Manufacturing Corporation)’가 1959년 6월 1일 설립되었다. YS-11 시제 1호기는 1962년 8월 30일 초도비행을 했는데, 언론은 이 모습을 일본 전역으로 실황 중계했다. 일본 국민은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과도한 투자
그러나 YS-11은 장점보다도 한계점이 많은 기체였다. 군용기를 염두에 두고 개발한 탓에 민간 여객기에 필요한 쾌적함과 안전성, 그리고 경제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러한 항공기는 민수시장에 진출할 수가 없다. NAMC는 150대를 생산해 개발비를 회수할 예정이었지만, 그 정도의 생산으로는 비용회수가 어렵다고 판단해 180대로 생산 목표를 높였다. 일본은 182대의 YS-11을 생산했다. 생산대수를 늘리자 적자폭도 따라서 거켜만 갔다.
처음으로 해보는 민간 여객기 사업인데다 높은 생산원가와 판매대금 회수의 지연, 과다한 개발 및 생산비용 등이 원인이었다. 엄청난 과외비를 낸 일본은 1974년 2월 YS-11 생산을 종료했다.
일본은 최첨단 전투기에 대한 열망도 유지해갔다. 항공자위대는 F-86F 세이버에 이어 F-104J를 선정했다가 1966년 차기 주력전투기사업을 펼쳐 F-4EJ를 대상 기종으로 선정했다. 당시 F-4EJ의 대당 가격은 무려 20억 엔에 육박했지만, 일본은 1981년까지 154대를 도입했다. F-4EJ 역시 면허생산을 했는데 이 기종의 생산 면허를 획득한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1974년 F-104J 후계기종 선정에 들어가 당대 최고의 전투기인 F-15를 선정했다. 일본은 고가의 F-15도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원칙을 고수해 1999년까지 F-15J/DJ를 213대 면허생산했다. 상당한 투자를 한 것이다.
일본은 면허생산에 만족할 나라가 아니었다. 꾸준한 면허생산을 통해 상당한 기술을 축적했지만 부족한 것이 많았다. 시스템 차원의 R·D 설계와 시스템 통합, 그리고 국제적인 판매와 지원활동 등이 그것이었다. 일본은 면허생산으로 ‘노하우(know-how)’는 전수받았지만, ‘노와이(know-why)’를 깨닫지 못했다. YS-11 개발·생산으로 기술적인 성공은 거두었지만, 사업적으론 성공하지 못하는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YS-11 실패 후 일본은 항공산업의 승부를 군용기 개발에 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단의 근거로 첫째 항공산업이 발전한 나라들은 민수용이 아니라 군용기 사업으로 시장을 지탱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당시 서구에서 제작된 29개 기종의 제트여객기 가운데 보잉에서 만든 4기종만 손익분기점을 넘기고 있었다. 일본은 보잉이 30년이 넘는 투자와 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겨우 민수시장에서 이익을 낼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군용기 개발로 항공기술 축적
두 번째로는 군용기를 개발해야 국내와 해외에 시장이 형성돼, 각종 부품과 서브시스템에 대한 수요가 발생한다고 판단했다. 군용기를 개발해야 마이크로 전자산업과 컴퓨터·통신산업 등 최첨단 산업 분야가 발전하는데, 이 분야 기술은 민간기로 전용할 수 있다. 군용기 사업을 통해 최첨단 기술을 계속적으로 개발하고 육성하는 ‘기술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속내였다.
당시 세계 최대의 민수 항공시장을 보유한 미국조차 항공기의 60% 이상을 국방부가 구매했다. 나머지도 미국 내 정부기관이나 다른 나라의 군이 구매했다. 일본에서는 자체 생산하는 항공기의 80%를 방위청이 구매했다. 제트엔진을 생산하는 가와사키중공업은 민수 판매는 거의 하지 못했다. 따라서 군용기 사업을 계속 일으켜 군이 구매하게 해야 항공산업이 발전할 수 있다고 통산성은 판단했다.
일본은 전투기를 독자 개발하고자 했다. 그에 이르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일본은 항공산업이 해방을 맞은 1956년 중등훈련기 T-1의 자체 개발을 추진해 1958년 초도비행을 성공시켰다. T-1은 ‘기카’ 이후 최초의 제트기였다. 그러나 미군이 무상으로 훈련기를 공여해준 데다 일본에서 면허생산한 항공기들이 우수했기에 T-1은 66대만 생산하고 종료됐다.
그리고 초음속 훈련기 필요성이 부각되자 TX(차기 훈련기)사업을 시작했다. TX사업에는 초음속 훈련기만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초음속 전투기도 동시에 개발한다는 의도를 포함시켰다. 당시 하나의 플랫폼을 개발해 훈련기와 전투기 양쪽으로 사용한 예로는 미국 노스롭 사의 T-38훈련기/F-5전투기가 대표적이었다.
TX사업 주관기업으로는 미쓰비시가 선정되었다. 원형으로 삼은 기체는 영국과 프랑스의 합자회사인 SEPECAT에서 개발한 ‘재규어’였다. TX사업으로 개발된 T-2는 1971년 초도비행에 성공해, 모두 96대가 생산되었다. T-2는 철저하게 국산화에 집중했다. 전체 부품 가운데 자체 개발한 것이 56.5%, 면허생산한 것은 41.8%였고, 직수입한 것은 1.7%에 지나지 않았다.
T-2라는 초음속 기체가 확보되자 일본은 이를 근접지원임무용 전투기(즉 공격기)로 개수하기 시작했다. SF-X사업에 들어간 것이다. T-2의 구조를 변경해 최소 비용으로 초음속 지원전투기를 만들겠다고 한 것이다. T-2의 후방석을 제거하고 전자장비를 추가했으며 하드포인트를 증설해, 전후 일본 최초의 국산 전투기인 F-1 지원전투기가 탄생했다. 1978년 4월부터 실전 배치된 F-1은 160대를 생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F-4EJ의 수량 확보와 개량을 위해 예산이 축소돼, 77대만 생산되었고 종료됐다.
F-1은 전후 개발된 전투기 가운데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1970년대의 공격기치고는 항속거리가 멀고 지상공격 능력도 갖추었다. 정비도 간편해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품 국산화율은 대단히 높아서 일본 항공기술력을 15년 앞서게 했다는 것이 일본 항공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야심작 F-2사업도 추락
전투기 국산화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식은 종교와도 같았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방위청을 중심으로 한 정부와 항공기업들 사이에는 향후 개발할 전투기는 완전 국산화한 것이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70년대 주력 전투기인 F-4EJ의 국산화율은 무려 99%에 달했지만, 1980년대 주력기종인 F-15J에서는 75%까지 하락하고, 사업 손실도 증가했다.
일본은 1982년 F-1의 후계 기종을 개발하는 FS-X(차세대 지원전투기) 계획을 입안했다. 방위청은 차세대 전투기를 염두에 두고 운동능력향상기(CCV)를 연구했다. 컴퓨터 지원에 의한 항공기 설계시스템을 구축하고 차세대 사격통제장치, 전투기 탑재용 컴퓨터, 추력 5t급의 전투기용 엔진 개발 등에 예산을 투입했다. 일본은 엔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 개발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미쓰비시중공업과 가와사키중공업은 전투기 개발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제출하고 각각 독자 모델을 제안했다. 그러나 엔진을 국산화하지 못하고 첨단을 추구해 개발비가 엄청나게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그때 ‘일본의 항공 독립’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미국이 국제공동개발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CCV와 미션 컴퓨터 개발에서 성과를 올리지 못해 완전한 자국산 전투기 개발이 어렵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1987년 FS-X는 국내 개발이 아니라 미국과 공동개발한다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측면이 있다. 심각한 미일 무역 불균형을 바로잡겠다는 미국의 정치적 압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일본은 F-15, F-16, F/A-18 세 기종 중 어느 것을 FS-X의 개조 모체로 삼을지 고민했다. 그때 가장 유력한 기종인 F-16의 제작사인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기수 재설계와 복합재료의 사용, 일본산 항전장비 탑재 등 일본 측의 주요 요구사항을 수용하겠다는 회신을 보내왔기에, FS-X는 F-16을 기초로 공동개발하는 것으로 낙착되었다.
공동개발에 들어가자 여러 가지 문제가 도출됐다. 업무분담은 일본이 60%, 미국이 40%로 결정되었지만, 개발 단계에서는 미국이 60%가 됐다. 가장 큰 문제는 기술이전이었다. 1989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 정부는 일본의 대미무역 불균형 등을 문제 삼으며 F-16 기술이전을 막고자 했다. F-16의 소스코드 이전을 제한하고 미국의 사업분담률은 최대로 보장받는 반면, 일본이 보유한 기술은 반드시 제공받도록 보증한다는 불평등협약을 적용한 것이다. 일본이 미국에 협력한 핵심적인 이유는 엔진기술을 이전받는 것이었는데, 미 의회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기술이전만 이루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F-2 전투기가 1995년 초도비행을 했다. 그런데 시험비행에서 일본 측이 제작한 탄소계 복합소재로 만든 주익(主翼)에서 미세균열이 발생했다. 이 문제점을 해결해 일본은 2000년부터 F-2를 실전 배치했다.
그러나 F-2는 국산 전투기 개발을 갈망하던 일본 항공산업계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대미 무역불균형 해소라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추가돼 일본은 실리 측면에서도 얻은 것이 별로 없었다.
FS-X의 실망스러운 개발과정으로 일본은 군용기 개발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냉전 종식으로 군축 붐이 일었고 방위수요도 줄어들었으니, 군용기 개발은 항공산업을 이끄는 기관차가 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경제산업성은 중소형 민간항공기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최초에는 30~50인승 소형 제트여객기 개발을 거론하다가, 나중에는 사업성이 높은 70~90인승 중형제트기 개발로 전환했다.
민간항공기 시장 눈떠
그에 따라 미쓰비시가 추진한 것이 MRJ(Mitsubishi Regional Jet)라는 중형 여객기 개발 사업이다. 미쓰비시는 MRJ 시제기를 2013년 초도비행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MRJ는 YS-11 이후 일본이 개발한 최초의 민항기로, ANA(전일본항공)가 25대, 미국의 트랜스 스텝 홀딩스(Trans Step Holdings)사가 100대, 홍콩의 ANI 그룹 홀딩스가 5대 등을 사전 계약해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항공업체들은 미국 보잉의 B-767, 777, 787이나 유럽 에어버스사의 여객기 개발에 하청업체로 참여해왔다. 보잉 787 드림라이너에서는 전방동체와 윙박스 등 주요부분 제작을 담당함으로써 전체 사업 분담량의 35%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군용기에서도 눈에 띄는 개발이 있었다. 1970년 개발된 C-1 수송기를 대체하기 위해 C-X(차기수송기)사업과 P-3 해상초계기를 대체하기 위한 P-X(차차기 초계기)사업을 2007년부터 동시에 추진했다. 일본은 개발비용과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공통 플랫폼을 개발해 두 기종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개발된 P-1 해상초계기가 2007년 초도비행을 했다. C-X사업에서 탄생한 C-2 수송기는 2010년 초도비행을 마치고 시험비행 중이다.
이외에도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하나 있으니 바로 일본 방위성 기술연구본부가 개발하는 ATD-X(선진기술실증기) ‘신신(心神)’ 이다. 신신은 미래의 일본 전투기에 적용할 첨단기술을 모두 실증해보기 위해 개발하는 스텔스 연구기체다. 신신에는 3D 추력편향 엔진이 장착된다. 스마트 스킨 센서 등 다양한 신기술이 접목될 예정이다.
스텔스 전투기 연구
신신은 이미 모형 제작 단계를 넘어서 2009년부터 미쓰비시가 실증기체를 개발하고 있다. 2014년에 초도비행, 2015년에 항공자위대의 시험비행이 예정돼 있고, 2016년 체계개발이 완료될 예정이다. 신신은 양산이 계획된 기체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102년간 그리고 전후 55년간 일본이 추구해온 첨단 항공기술이 모두 구현될 항공기이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1910년 이후 무려 1세기가 넘도록 항공산업을 육성해왔다. 그러나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선진국에 비하면 뒤처진 상황이다. 중국이나 한국 등 항공 후발국가들로부터는 맹렬한 추격을 받고 있다. 미국에 대항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10만여 대의 군용기를 생산했던 국가치고는 초라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우직하리만큼 군용기에 집착해 항공산업을 이끌어왔지만, 냉전 종식 후 대테러 전쟁까지 종료됨으로써 방산수요가 줄어들어 힘들어하고 있다. 경제불황이 장기화되고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군용기 개발 및 면허생산에 예산을 무조건적으로 투입하기도 어려워졌다. 따라서 MRJ와 같은 민간여객기 개발이 일본 항공산업이 약진할 수 있는 토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75년 서울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밀리터리 칼럼니스트, 방산 컨설턴트, 영화 ‘쉬리’의 군사자문으로 활동. 저서로 ‘그림자전사, 세계의 특수부대’ ‘KODEF 군용기연감 2012~2013’등.
그럼에도 일본에는 보잉이나 에어버스 같은 대형 민항기 제작업체가 없다. 하지만 일본의 항공산업을 얕잡아 볼 수는 없다. 수십여 년 동안 꾸준히 연구개발을 하고 시스템 통합에 집중해서 쌓아온 일본의 노하우와 노와이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한국의 반면교사다. 한국은 일본을 잘 연구해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는 쪽으로 연구와 투자를 해나가야 한다.
非군사에서 군사로, 전범국가의 놀라운 집념
일본의 우주개발사
이토카와는 전범(戰犯)국가 일본이 받을 수밖에 없는 제한을 애국심과 지혜로 뚫고 나간 사람이었다. 이토카와가 우주로 가는 길을 열자 과학기술청이 나서서 강력한 액체로켓 개발에 도전함으로써 일본은 미국 유럽과 더불어 액체 수소로켓을 발사하는 최고의 우주 선진국이 되었다.
지금 일본은 안보를 위해 우주 기술을 활용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일본의 우주 개발은 단 한 명의 천재로 인해 시작되었다. 바로 도쿄(東京)대학 교수였던 이토카와 히데오(系川英夫·1912~1999). 1935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항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본의 3대 항공기 제작사였던 나카지마 비행기(現 후지중공업)에서 육군의 97식 전투기, ‘하야부사’로 불린 1식 전투기 등의 설계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즈음에는 독일로부터 건네받은 도면 몇 장을 들고 제트 전투기 ‘기카’ 제트엔진을 담당해 Ne-20 엔진을 만들었다.
1941년 도쿄제국대학의 조교수로 임용된 이토카와는 1948년부터 정교수로 활동했다. 전후 일본이 항공 개발에 제한을 받자 그는 바이올린을 연구하며 유유자적했다. 1953년 약 6개월간 미국을 둘러보고 돌아와서는 도쿄대에 5명의 회원으로 로켓연구클럽을 만들고 일본 정부에 로켓 개발 허용을 요구했다. 1958~59년이 국제지구물리관측년(IGY)으로 지정된 점에 착안해, 연구 목적으로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로켓 개발을 추진한 것.
클럽 활동이 본격화되자 이토카와는 1954년 2월 도쿄대학 생산기술연구소(이하 생기연)에 AVSA(Avionics and Supersonic Aerodynamics·항공전자 및 초음속 공기역학) 연구반을 만들었다. 이 연구반은 1975년까지 태평양을 20분에 주파하는 ‘하이퍼소닉 수송기’개발을 목표로 했다. 이토카와는 로켓 개발에 관심조차 없던 정부와 기업을 설득해 연구에 투자하도록 만들었다.
이토카와의 펜슬로켓
1954년 부족한 예산으로 다양한 소형 로켓을 개발해 연소시험을 했다. 그때 탄생한 것이 직경 1.8cm, 길이 23cm, 무게 200g의 펜슬로켓이다. 펜슬로켓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 즉 무연화약이 사용되었다. 무연화약은 니트로글리세린과 니트로셀룰로오스를 주성분으로 하고 안정제와 경화제를 혼합 압축시켜 만든 것이었다. 펜슬로켓의 첫 수평발사는 1955년 3월 11일, 고쿠분지역 근처의 총기공장 권총사격장에서 있었다.
4월 12일에는 정부 관계자와 언론이 참가한 가운데 공개 시험발사를 실시했다. 1.5m의 발사대에서 수평으로 발사된 펜슬로켓은, 연구진이 세워놓은 종이스크린을 뚫고 나가 그 뒤에 있던 모래더미에 박혔다. 이후 연구진은 1개월 이상 시험을 계속하며 실제 비행을 위한 사전 데이터를 수집했다. 그리고 지바에 있는 생기연에서 50m 길이의 선박실험용 수조 안에서 300mm의 2단형 펜슬로켓 수평발사시험을 실시했다.
그 후의 시험은 아키타현의 미치카와(道川) 해안에서 했다. 미치카와는 1955년 8월부터 1962년 사이 일본 로켓 기술 발전의 근거지로 자리매김했다. 1955년 8월 6일 미치카와에서 처음으로 펜슬-300 로켓의 경사 발사가 있었다. 이 로켓은 고도 600m, 거리 700m를 16.8초간 비행했다. 펜슬로켓 다음은 베이비로켓이었다. 이 로켓도 직경 8cm, 길이 120cm, 무게 약 10kg에 불과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베이비로켓은 2단식의 무연화약 고체로켓으로 S형, T형, R형의 세 모델이 만들어졌다.
이 로켓들은 1955년 8월부터 12월 사이 발사되었는데, 고도는 6km 정도에 달했다. 베이비로켓-S형에는 스모크 파우더를 섞은 추진제를 넣어 연기가 나게 함으로써, 궤적을 추적해 비행 성능을 확인했다. T형에는 일본 최초로 원격측정장비를 탑재했다. R형을 통해서는 탑재기기의 회수에 성공했다. 베이비로켓의 시험발사가 모두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2단 추진장치가 점화되지 못했고, 진공관에 문제가 발생했다. 로켓 앞쪽에 장착한 관측카메라가 제일 중요한 영상을 찍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실패를 극복해나가면서 로켓 기술의 걸음마를 착실히 배워나갔다.
펜슬 아닌 진짜 로켓으로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다가오면서 로켓 개발에 속도가 붙었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 프로젝트에는 지구상 9개소에 관측지점을 세운다는 것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일본이 맡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토카와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빨리 관측용 로켓을 완성시켜야 했다. 베이비로켓의 성공을 확인한 이토카와 팀은 실물 로켓인 ‘카파(Kappa)’개발에 돌입했다.
이토카와 팀은 순차적으로 로켓을 대형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펜슬, 베이비로켓 이후에는 알파, 베타, 카파로켓을 개발하며 노하우를 쌓은 후, 오메가로켓으로 고도 100km를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제지구물리관측년까지 시간이 촉박해, 바로 카파로켓으로 고도 100km에 도달하기로 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고도 100km에 도달한 로켓을 만들었는데 이 로켓은 모두 액체추진제 로켓이었다. 일본은 액체추진제 기술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에 이토카와 팀은 고체엔진을 만들어 고도 100km에 도달해보기로 했다. 고체엔진으로는 추력이 부족하니 몇 개 엔진을 모아 부스터처럼 카파로켓에 붙여 사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연소 화력이 너무 강력해 분사노즐이 녹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 문제는 노즐의 재질을 강화하면 해결되지만, 그러면 중량이 늘어나 상승고도가 낮아진다. 이 때문에 이토카와 팀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강화플라스틱제 노즐을 채택하기로 했다.
로켓 본체도 재설계해 공기저항을 줄였다. 본체는 강도 높은 허니콤 구조의 알루미늄 재질을 선택했다. 컴퓨터 설계기술이 없어 수동식 계산기에 의존해 설계해야 했다. 연구자들은 수치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 고된 정신노동을 반복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카파로켓은 고도 100km에 다다를 수 없었다. 이토카와 팀은 로켓을 기구에 매달아 하늘 높이 띄운 후 창공에서 점화하는 ‘라쿤’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창공에는 돌풍 등 통제할 수 없는 숱한 변수가 있어 포기했다.
결국 추진제를 강화하지 않으면 더 이상 고도를 높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카파-4형까지에는 더블베이스 추진제를 사용했는데 이것 대신 새로운 복합추진제를 개발해 사용해보기로 했다. 복합추진제는 고분자화합물에 과염소산 암모니아를 혼합해 로켓연료실에 수납하는 것으로 무연화약보다 더 큰 추력을 얻을 수 있다.
복합추진제는 우주 개발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막 개발한 것이었기에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연구진은 폭발을 불러오는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끈질기게 연구해 복합추진제를 사용하는 카파-6형을 만들었다. 카파-6형은 고도 60km 정도까지만 올라갔다. 하지만 그 정도의 상승으로도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이 요구한 상층 대기 관측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었기에 일본은 한숨을 돌렸다.
그때 고도 60km까지 로켓을 올린 나라는 미국과 소련 영국 그리고 일본뿐이었다. 카파-6형은 21기가 발사되었다. 1960년 7월, 카파-8형이 처음으로 고도 200km를 넘어 전리층의 F층에 도달했다. 본격적인 우주 관측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자, 세계가 일본의 우주 개발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일본은 카파로켓 19기를 유고슬라비아와 인도네시아에 수출하게 되었다.
카파로켓, 대기권 넘어서다
국제지구물리관측년을 맞아 관측을 완료한 일본은 다음 목표를 인공위성 발사로 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도달고도와 발사장소라는 두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서는 500~1000km의 고도에 올라가는 로켓이 필요하다. 이렇게 센 로켓을 발사하려면 안전성이 보장된 발사장이 있어야 한다.
빈약한 발사장에서 도달고도를 높인 로켓을 시험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사고가 입증해주었다. 1962년 5월 24일 카파로켓-8형 10호가 발사 직후 추락해 2단이 폭발하면서 파편이 흩어지고 화재가 발생했다. 부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고로 미치카와에서의 실험은 중지되고 말았다.
이토카와 팀은 펜슬로켓 발사 성공 후부터 태평양을 향해 로켓을 안전하게 발사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있었다. 새로운 로켓의 메카로 가고시마(鹿兒島)현 오스미(大隅)반도의 우치노우라(內之浦)가 선정돼, 카파로켓-8형 10호가 사고를 내기 전인 2월 2일 기공식을 했다. 미치카와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발사장으로 선정된 우치노우라는 반대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폭적인 지원을 해 발사장 이전 작업이 빨라졌다.
우주 개발의 가능성이 엿보이자 다양한 기관이 탄생했다. 1963년 과학기술청이 항공우주기술연구소(NAL·National Aerospace Laboratory)를 설치해 기초연구에 착수했다. 과학기술청은 1964년 우주와 관련된 항공기술만 연구하는 우주 개발추진본부도 만들었다. 로켓 개발을 주도하던 도쿄대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1964년 생기연의 이토카와 팀과 항공연구소가 합병해 우주항공연구소(ISAS·Institute of Space and Aeronautical Science)를 출범시킨 것이다.
정부의 우주 개발 참여 이끌어내
로켓의 시대도 바뀌고 있었다. 29개종이 개발된 카파로켓 시대는 종료하고 람다(Lambda)로켓 시대가 열렸다. 람다로켓은 2000km 고도 도달을 목표로 했기에 위성을 올리는 초보적인 플랫폼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4단으로 구성된다는 점이었다. 단이 너무 많다 보니 단 분리에 문제가 있어, 람다는 4차례나 발사에 실패했다. 단 분리를 한 다음에는 궤도를 수정해야 하는데, 궤도를 수정하는 유도장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유도장치는 로켓 개발 시 필수 요소다. 그러나 일본은 정치적인 이유로 유도장치 개발에 제한을 받았다. 탄도미사일 유도로 전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유도장치를 개발하지 못해 실패를 거듭할 때 미국과 소련은 인공위성은 물론이고, 유인 우주비행까지 성공했다. 프랑스도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써 유도장치 없이 다단계 발사체를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일본은 줄기차게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1970년 2월 11일 비유도방식의 고체로켓인 람다(L)-4S 5호가 올라가 인공위성 ‘오스미(おおすみ)’를 지구 궤도에 띄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24kg에 불과한 초소형 인공위성 발사였지만, 일본은 소련과 미국, 프랑스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자력으로 위성을 띄운 국가가 되었다.
람다-4형은 9번 발사돼 5번 실패했다. L-4S는 1966년 9월 26일 최초로 발사되고 1974년 9월 1일 마지막으로 발사됐다. 그리고 일본은 뮤(Mu) 로켓 개발에 들어갔다. L-4S의 기술을 바탕으로 뮤 로켓의 초기형인 M-4S를 개발했으나 1호기는 발사에 실패했다. 뮤 로켓에도 유도제어장치를 탑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도제어장치 없이 계산만 정확해도 발사에 성공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기상과 풍향 변화가 극심하므로 정확한 계산은 소용없게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은 엔진 성능 개량에 집중했다. 그리고 유도제어장치 사용이 허가돼 ‘추력편향제어장치(TVC·Thrust Vector Control)’를 장착하게 됨으로써 뮤 로켓의 정밀도는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 연구도 이토카와 박사가 이끄는 도쿄대학의 우주항공연구소(ISAS)가 주도했다.
고체연료를 향한 우주항공연구소의 고집 덕에 1985년 새로운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전장 27m의 M-3S-2 로켓으로 핼리혜성 탐사기인 ‘스이세이’를 중력권 밖으로 발사시킨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초로 고체추진 로켓으로 지구 중력권을 넘어서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M-3S-2의 성공으로 안전성이 증명된 뮤 로켓으로 일본은 20기 이상의 위성을 발사했다. ‘하큐초’‘히노토리’‘아케보노’‘히덴’ 등 주요 과학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돼, 중요한 데이터를 갖고 지구로 귀환했다. 1990년대에 뮤 로켓은 M-5라는 세계 최대의 고체로켓으로 발전했다.
도쿄대 ISAS가 고체로켓을 발전시키는 사이 과학기술청의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전혀 다른 방향의 연구를 했다. 20여 명의 연구진으로 시작한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도쿄대에서 제공받은 고체로켓을 바탕으로 LS-A 로켓(고체로켓과 액체로켓을 연결한 2단식 로켓)을 개발해 시험발사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러나 노하우를 축적해 LS-A의 발사를 성공시키고 이어 LS-C로켓을 개발했다. 또 NAL-6, NAL-16과 SA, SB 등 ‘S 시리즈’ 로켓을 발사하기도 했다.
우주 개발추진본부는 1969년 10월 1일 우주 개발사업단(NASDA)이라는 과학기술청 산하의 특수법인으로 바뀌었다. 개발사업에 힘이 실린 것이다. 추진본부 시절에는 방위청의 니이지마 시험장을 사용했지만, 1968년부터는 다네가시마(種子島)에 우주센터를 건설해 조직적으로 우주 개발을 하게 되었다. NASDA의 목표는 단순하고 명백했다. 문부성 소관의 도쿄대 ISAS와는 달리 상용(商用) 로켓 실용화를 목표로 잡았다.
양 조직의 관할도 정해졌다. 직경 1.4m 이하의 과학로켓은 ISAS가 맡고, 1.4m 이상의 대형 로켓은 NASDA가 담당하는 것. 1981년 도쿄대학의 ISAS는 문부성 산하 우주과학연구소(역시 준말은 ISAS)로 바뀌었다. 그렇게 된 이후에도 ISAS와 NASDA 간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우주 개발을 놓고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은 계속 경쟁하게 된 것이다.
상용 로켓 개발에 나선 NASDA
새로 발족한 NASDA는 5년 이내에 위성을 발사할 수 있는 실용 로켓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1972년까지 150kg의 위성을 고도 1000km에 올리겠다’는 Q계획과 ‘1974년까지 100kg의 정지위성을 발사한다’는 N계획을 입안한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 액체로켓을 개발한다는 엄청난 목표도 세웠다. 경험이 일천한 NASDA로서는 이루기 힘든 목표였지만 개발계획은 의외의 도움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미일우주협정에 따라 미국의 액체로켓 기술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로켓 기술을 보유하면 탄도미사일을 손쉽게 개발할 수 있다. 일본은 ISAS를 통해 고체로켓을 자력으로 개발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일본을 관리감독하에 두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이전해주고 일본의 로켓 개발 전체를 관리감독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미국은 일본과 우주협정을 맺고 미국 우주 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한 액체연료 로켓인 ‘델타’기술을 전수해주기로 했다.
이에 따라 NASDA는 Q-N 계획을 정지위성을 올리는‘신N계획’으로 수정했다. 신N계획에 따른 제1세대 로켓이 N-I인데, 이 로켓 제작은 미쓰비시가 맡게 되었다. 일본은 미국의 기술을 도입하되 일본 기술을 결합해 1970년부터 3단의 N-1 로켓을 개발하기로 했다. N-1 로켓에서 1단과 3단은 미국 델타로켓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2단만큼은 우주 개발사업단 시절의 NASDA가 Q계획으로 개발한 LE-3 엔진을 개발해 만들기로 했다.
N-1 로켓으로 정지위성 띄워
2단으로 쓸 액체로켓을 자체 개발하기로 함으로써 일본은 뒤떨어져 있던 액체로켓 기술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 직경 2.4m, 전장 34m의 N-1 로켓인데, 이 로켓이 1975년 9월 9일 1호 발사됐다. N-1 1호는 100kg급의 기술시험위성인 ‘기쿠(きく)-1호’를 정지궤도에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N-1은 거듭해서 시험용 정지위성을 쏘아 올리다, 1977년 본격적인 정지위성인 ‘기쿠-2호’를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정지위성을 보유한 나라가 되었다. N-1 로켓은 1982년까지 7번 더 발사돼 6개의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렸다.
일본 기술이 포함됐다고 하지만 N-I은 엄밀히 말하면 미국제 델타로켓을 면허생산한 것이었다. 당시 선진국에서는 300kg 이상의 대형 정지위성을 띄우고 있었으니 최대 발사중량 130kg인 N-1 로켓으로는 선진국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에 따라 N-2 로켓 개발이 시작됐는데, 짧은 시간 내에 국산화가 어렵다고 판단한 일본은 역시 미국 기술에 의존해 개발하기로 했다. 그리고 별도로 자국산 액체로켓인 H-1 개발에 착수했다. N-1 발사로 NASDA는 발사 기술, 개발 플로와 기술 실증방법, 프로젝트 관리기법 등 로켓 개발의 전반을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H-1 개발에 도전해볼 만했다.
1976년부터 개발에 들어간 N-2로켓의 직경은 2.4m로 N-1과 같지만 길이는 36m로 길어졌다. N-2는 350kg짜리 위성을 정지궤도에 쏘아 올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81년 2월 11일 N-2로켓1호가 ‘기쿠3호’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했다. N-2로켓은 1987년까지 모두 8기가 발사되었다.
델타로켓은 중거리탄도미사일 기술을 채용하고 있어, 미국은 완성부품을 제공했다. 완성부품을 받아 N-1과 N-2를 조립했으니 일본이 액체로켓 기술을 이전받는 효과는 미미했다. 따라서 자력으로 만들기로 한 액체로켓 H-1 개발에 집중해야 했다. N로켓 제작으로 확보한 기술자와 예산을 H-1 개발에 집중투자하기로 한 것이다.
1981년부터 시작된 H-1 사업은 1차로 2단과 3단 로켓, 그리고 관성유도장치의 국산화를 목표로 했다. 2단 로켓은 재점화 능력을 갖춘 자국산 LE-5 엔진을 채용하고, 3단은 닛산의 UM-129A 모터를 채택했다. 그러나 1단은 여전히 미국산이었다. 따라서 H-1은 여전히 델타로켓의 기술을 도입한 기종으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국산화율은 높아져, N-2에서 54~61%이던 것이, H-1에서는 78~98%에 달했다.
500kg급 위성을 정지궤도에 투입할 수 있는 H-1 발사체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9기가 발사되었다. ‘사쿠라-3호’ 통신위성, ‘히마와리-4호’ 기상위성, ‘푸요-1호’ 자원위성 등이 정지궤도에 올라갔다. NTT로 약칭되는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는 1980년대 초반부터 2t 이상의 통신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으로 보다 큰 발사체 개발 필요성이 제기돼 1986년부터 H-2 개발이 시작되었다.
국산화의 최대 목표로 1단용인 LE-7 엔진의 개발이 추진됐는데, 시험 도중 이 엔진이 폭발해 1명이 사망했다. 그럼에도 자중(自重)의 60배에 달하는 추력을 낼 수 있는 LE-7을 개발해냈다. 1단에 붙이는 고체 보조로켓인 부스터까지 국산화했다. 일본은 H-2라는 명실상부 자국산 발사체를 갖게 된 것이다.
직경 4.0m, 길이 49.9m에 달하는 H-2 발사체는 3.8t의 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H-2 는 1994년 2월 4일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시킨 후 1997년까지 총 5기를 성공적으로 발사시켰다. H-2 발사체는 ‘히마와리-5호’ 기상위성, SFU 우주실험관찰위성, ‘미도리’ ADEOS 지구관측위성, COMETS 방송통신 실험위성, TRMM 열대강우 측정위성 등을 정지궤도에 진입시켜 일본의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고비용 극복하고 주문식 발사
그러나 5호와 8호가 발사에 실패하고 7호가 취소되는 등 난관에 봉착했다. 더 큰 문제는 발사비용이 매우 비싸다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이 개발한 ‘아리안’이 100억 엔 미만의 비용으로 발사되는데, H-2는 190억 엔을 사용했다. H-2는 상용 위성을 표방했지만 국제경쟁력이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급격한 엔고(高)가 보태져 H-2는 경쟁력을 상실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로 H-2A 개발이 추진되었다. H-2A 발사체는 비용통제를 위해 H-2를 재설계해 구조를 단순화했다. 국산화에 집착하지 않고 해외의 저가부품을 채용하기로 했다. 1996년 시작된 H-2A의 개발비는 약 1532억 엔을 기록해, 델타-4 발사체 개발에 들어간 2750억 엔이나 아틀라스-5의 2420억 엔보다 훨씬 저렴했다. 구성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발사비용도 85억~120억 엔이 됐다. 최대 190억 엔이던 H-2에 비하면 대단한 경제성을 갖춘 것이다.
H-2A의 최대 장점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발사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발사 능력은 고체로켓 부스터(SRB)와 고체 보조로켓(SSB)·액체로켓 부스터(LRB)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 H-2A는 최대 5.8t을 정지궤도로 올릴 수 있었다. 최대 발사중량이 H-2의 약 1.5배가 된 것이다. 2001년 여름, 시험1호기가 발사에 성공하면서 H-2A는 일본의 중심 발사체로 자리 잡았다.
H-2A의 개발로 엄청난 발전을 이뤘지만, 이면을 들여다보면 2000년대 초까지 일본의 우주 개발은 많은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야심 차게 계획한 화성탐사선 ‘노조미’는 궤도 투입에 실패했다. 2003년 11월 29일에는 H-2A 6호가 정보수집위성(정찰위성)을 올리기 위해 발사됐으나 문제가 발생해 통제실의 지령으로 공중 폭파되었다.
이러한 실패에 즈음해 행정개혁의 물결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는 우주 관련기관의 통폐합을 검토했다.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던 문부성과 과학기술청이 통합돼 문부과학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ISAS와 NASDA, NAL 등이 통합돼 2003년 10월 1일 독립행정법인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Japan Aerospace eXplo-ration Agency)가 발족했다.
JAXA의 발족에 앞서 또 다른 움직임이 일어났다. 1998년 8월 31일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발사하자, 일본 정부는 정찰위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러나 1969년 중의원이 ‘우주의 개발 및 이용의 기본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우주 개발은 군사 목적 이외로 한정한다’고 해놓았기에 군사용 위성은 만들 수 없었다. 이 때문에 JAXA 관련법의 목적을 ‘모든 분야에서 평화 목적에 한정한다’로 바꾸고 업무 범위도 우주 개발과 연구, 인공위성의 개발과 발사로 수정했다.
군사위성 보유 합법화한 일본
법률적 제한을 바꿈에 따라 일본은 정찰위성을 ‘정보수집위성’으로 바꿔 부르며 2003년부터 발사 준비에 들어갔다. H-2A로 발사될 정보수집위성은 광학(光學)위성과 레이더영상(SAR)위성을 한 조로 편성했다. 광학위성은 초망원 디지털카메라를 장착해 주간 촬영을 담당한다. 광학-1호와 2호까지는 해상도가 1m 수준이었고, 광학-3호에서는 60cm급으로 높아졌다. 조만간 발사할 예정인 광학-5호는 40cm급 해상도를 갖는다. 이는 상업위성 가운데 세계 최고의 해상도를 자랑하는 지오아이(GeoEye)-1의 해상도를 능가한다. 레이더영상위성은 1호에서 3호의 해상도는 1~3m 정도였지만, 2011년 발사된 4호부터는 1m 급으로 향상되었다.
첫 번째 조인 광학-1호(IGS-1A)와 레이더-1호(IGA-1B)는 H-2A 5호에 실려 2003년 3월 28일 발사됐다. 광학-2호와 레이더-2호를 실은 H-2A 6호는 같은 해 11월 9일 발사됐으나 단 분리 실패로 지령을 내려 공중 폭파시켰다. 2011년 말까지 일본은 광학-4호(IGS-6A), 레이더-3호(IGS-7A)를 발사해 총 7대의 정보수집(정찰)위성을 갖게 되었다. 2016년에는 광학-6호, 2017년에는 레이더-6호를 발사할 예정이다.
일본은 2008년 5월 ‘방위목적의 군사이용을 허용하고 자위대가 최첨단 전용 위성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우주기본법’을 제정했다. 일본 중의원은 올해 6월 15일 JAXA법 개정안을 가결하면서, JAXA의 활동을 평화 목적으로 한정한다는 규정을 삭제하고 ‘국가의 안전 보장에 도움이 되도록 진행되어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했다.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 성공
H-2A 발사체는 2001년 이후 21회 발사해 20번 성공(95.2%)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아틀라스-5(미국)의 96.4%, 아리안-5(유럽)의 94.9%에 필적하는 성공률이다. H-2A 21호는 올해 5월 18일 한국의 아리랑 3호를 저궤도에 올림으로써 처음으로 해외 상업위성을 발사해주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8t을 올려 보낼 수 있는 H-2B 발사체도 만들었다. 2009년 9월 10일 H-2B로 국제우주정거장으로 보급품을 보내줄 무인 우주화물선 HTV(H-2 Transfer Vehicle)-1 ‘고우노토리(こうのとり)-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했다. 2011년 1월 22일 H-2B로 발사한 HTV-2도 우주정거장과 도킹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은 HTV보다 한발 나아간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왕복수송기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위성 분야에서도 노하우를 축적했다. 2010년에는 2003년 발사한 소행성 탐사선 ‘하야부사’가 소행성의 샘플을 채취해 귀환함으로써 달 이외의 천체 샘플을 가져온 최초의 탐사선이 되었다. 2008년에는 국제우주정거장에 일본의 시험모듈인 ‘기보(希望)’를 완성하고 교대로 우주인을 보내 각종 실험을 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우주 개발을 추진해온 덕에 일본은 미국과 러시아, EU, 중국과 함께 우주 개발 선진국이 된 것이다.
일본은 전범국가이기에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든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비군사적인 발사체 개발에 노력했다. 그 결과 상당한 기술을 축적해, 우주를 군사적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우주를 통해 안보를 지키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우주를 향한 일본의 도전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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