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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일본을 얼마나 따라잡았나

醉月 2010. 1. 21. 08:42

“日本은 게 섰거라”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 … 다시 뛰는 한국의 일본 추격전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짐이 덕이 없는 사람으로, 황제가 된 이후 오늘날까지 정사 혁신에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허약한 것이 고질이 되고, 영락이 극도에 이르러 짧은 시일 안에 회복시킬 대책을 세울 가망이 없게 되었다. 짐이 결연히 반성하고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이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해오던 대일본 황제폐하께 넘겨, 밖으로는 동양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는 팔도(八道) 백성을 보전하게 하는 바이다. 너희들 높고 낮은 관리들과 백성은 나라의 형세와 현재의 조건을 깊이 살펴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자기 직업에 안착하여 일본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해 행복을 받도록 하라.”

1910년 8월22일 오후 5시. 서울 남산의 통감부(統監府)에서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제국 조선주재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1300만명의 조선 백성과 22만km²의 한반도 조선 영토를 일본제국에 양도하는 ‘한일병합조약’에 서명 조인한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로써 조일수교조약이 체결된 지 34년 만에,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지 518년 만에 나라를 잃게 됐다. ‘마지막 황제’ 순종은 조약 체결 즈음 이미 어전회의에서 조약안을 재가했고, 일본은 조선 민중의 반발을 의식해 언론을 철저히 봉쇄한 뒤 8월29일 공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일본의 치밀함은 경술국치 이전부터 관찰됐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청일전쟁(1894~95년)을 통해 종주국 청(淸)의 개입을 차단했고, 고종이 친(親)러시아 정책을 펴려 하자 을미사변(1895년)을 일으키지 않았던가.

 

‘무사정신’이 단기적으로 ‘문치(文治)’를 이기다

삼국간섭(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일본의 랴오둥반도 영유를 인정하자 이에 반대하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공동간섭에 나선 것) 이후 눈엣가시 같았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대한제국의 종말을 알린 전주곡이었다. 1904년 2월부터 1905년 9월까지 68만9000명(전사자 13만5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1년8개월여 만에 끝난 러일전쟁의 결과, 조선을 보호국으로 완전 지배하는 ‘을사보호조약안’이 만들어졌다. 조선에는 통감부가 설치됐고, 각국 공사는 조선을 떠났다. 외교권 박탈은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이어져 결국 ‘저항하던’ 고종은 1907년 7월19일 강제 퇴위하면서 고별사를 한다.

“슬프다. 짐이 열조의 기업을 전수한 지 40여 년 동안 어려움이 많았고, 매사 뜻대로 됨이 없었다. …짐의 마음은 두렵기가 마치 물 위의 살얼음을 걷는 것과 같다.”

이어지는 치밀함의 끝이 바로 경술국치였다.

500년 조선왕조가 국치를 당한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이완용과 매국 조연들의 합작품이라는 분석부터 유교(주자학)와 세도정치 망국론, 일본제국주의론이 잇따르지만 한마디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다.

“‘로마가 왜 멸망했는가’라고 묻기보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존속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던 에드워드 기번(1737~94년, ‘로마제국의 쇠망사’ 저자)의 말처럼 어쩌면 대한제국 쇠망사도 여기에서 답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준비 안 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빠르게 군사력을 중심으로 근대화한 (일본의) ‘무사정신’이 단기적으로 (조선의) ‘문치(文治)’를 이긴 것이다. 문치는 무력경쟁을 하면 힘 규합이 늦다. 결속을 못했다는 건데, 그 대가로 일제 36년의 시련을 겪었다.”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근대화한 일본이 왕에 비협조적인 조선의 문벌귀족, 당파, 세도정치의 틈을 파고들었다고 분석한다.

경술국치 당시 한국합병의 담당 실무자였던 외사국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의 회고는 이 교수의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한다. 1910년 7월 서울에 부임한 데라우치 통감이 고마쓰를 불러 합방에 관한 의견을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러시아와 청국은 전쟁에 패했고, 영국과 미국은 한국에 연고가 깊지 않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단행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이완용의 비서 이인직이 찾아왔다. 새로 부임한 데라우치 통감의 합병에 관한 의중을 떠보기 위해 이완용이 이인직을 보낸 것이다.

고마쓰는 “일한일가(日韓一家)를 만들어야 한다”며 합병의 즉시 단행을 강조하면서도 “이완용 총리가 이를 피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도 생각하고 있다”며 은근히 협박한다. 그는 당시 이인직이 찾아온 일을 회상하면서 “그물을 치기도 전에 고기가 뛰어든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무사정신에는 쇼부(勝負) 의식이 있다. 처음엔 일본도 양이(洋夷)를 배격했지만, 힘에서 비교 안 되게 차이가 나니까 휙 돌아섰다. 천황 중심으로 힘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10년간 군선과 상선 100척을 샀다. 우리 (문치) 전통에선 어려운 일이지만 일본은 달랐다.”

이 교수는 무사정신은 근대화를 목표로 앞서 나갔고, 문치는 1945년 해방과 65년 한일협정을 거치면서 그 뒤를 쫓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평화공존을 지향하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궁극적으로 문치의 방향은 맞았다고 단언한다.

그러고 보면, 해방 이후 한국은 부단히 일본을 쫓았는지도 모른다. 서양의 근대화 문명에 일찍 눈뜬 일본은 늘 한국을 앞서 나갔다. ‘마이니치(每日)신문’이 펴낸 ‘전후(戰後) 50년사’와 한국 사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는 첫 고유모델인 ‘포니’를 출시했지만, 일본은 이미 1907년 일본 최초 가솔린 자동차 ‘다쿠리’를 선보였다. 일본 자동차회사 닛산이 1959년 영국의 오스틴 모델을 바탕으로 한 ‘블루버드(BlueBird)’를 출시해 1년에 20만대를 판매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끌자 ‘마이카 시대’가 일본 사회의 주요 화두가 됐고, 1967년에는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한다. 한국은 ‘포니’ ‘르망’ 등 소형차의 선전으로 1990년대 초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1997년에 자동차 보유대수 1000만대를 돌파하면서 자동차를 ‘부의 상징’에서 ‘필수품’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 소니사가 1960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 TV를 내놓자 한국의 금성(LG전자 전신)은 10년 뒤인 1970년 국내에 첫 트랜지스터 TV를 선보인다.

 

“그물도 치기 전에 고기가 뛰어든 기분”

2004년 베를린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의 ‘사마리아’와 ‘빈집’이 각각 감독상을,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한국 영화의 세계화에 열광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미 1952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영화 ‘삶’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라쇼몽’으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베니스영화제에서는 ‘5월의 이야기’로 은사자상을 수상하면서 일본인은 2004년 한국인이 느낀 자부심을 50년 앞서 만끽했다. 1946년 ‘스무 살의 청춘’에 일본 영화 최초의 키스신이 등장했는데, 한국에선 8년 뒤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년)에 처음 나왔다.

한국은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한 뒤 2005년 들어 해외여행자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반면 일본은 25년이나 앞서(1964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시행했고, 1990년대에 해외여행자 1000만명 시대를 열었다. 2000년에는 1782만명이라는 사상 최고 해외여행자 기록을 세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막대한 무역흑자에 대한 국제사회의 눈총을 피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나서서 ‘천만인 프로그램’(10Million program·해외여행자 1000만명을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을 진두지휘한 영향이 컸다.

‘올해의 키워드’로 본 한일 사회상 비교도 흥미롭다. 1961년 일본의 ‘올해의 키워드’는 ‘고도성장’. 1960년 이케다(池田) 내각이 ‘국민소득배증계획(國民所得倍增計劃)’을 발표하고 연 10% 이상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실현하면서 고도성장이라는 용어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는 ‘산업스파이’와 ‘유통혁명’이 올해의 키워드로 뽑혔고 ‘핵가족’(1967년), ‘정보화 사회’(1969년), ‘삼림욕’(1982년), ‘재테크’(1984년), ‘서포터’(1993년) 등이 뒤를 이었다.

 

핵가족, 정보화, 삼림욕 … 한국보다 20년 앞선 일본

군사정변 이후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년)의 성공으로 1970~80년대에 고도성장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한국보다 10, 20년 빠른 페이스. 산업스파이와 정보화 사회라는 용어도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며, 핵가족 문제 역시 1980년대 이후 부각된 사회문제임을 감안한다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삼림욕과 재테크 역시 1990년대 중후반부터 언론에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일본이 10여 년 앞섰다.

전체 인구에서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한국이 9.91%(2007년 기준)로 일본의 1980년대 초반 수준. 2009년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는 22.7%이다.

한국이 빠르게 따라잡은 분야도 있다. 1970년대 4.28명(일본은 2.07명)이던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최근 1.21명으로 일본(1.27명)을 추월(?)했고, 평균수명도 78.6세로 일본(82.6세)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그렇다면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2010년은 어떨까. ‘주간동아’는 정치, 경제, 국방, 교육 등 15개 분야에서 한국과 일본을 비교, 분석했다. 경술국치 이후 부단히 일본을 쫓은 한국, 과연 일본을 얼마나 따라잡았을까.

   

한국 근현대사 연표

1860 동학 창시 1866 병인박해, 제너럴셔먼호 사건, 병인양요 1868 오페르트 도굴사건 1871 신미양요, 척화비 건립 1873 흥선대원군 하야 1875 운요호사건 1876 강화도 조약, 1차 수신사 파견(김기수) 1880 2차 수신사 파견(김홍집 조선책략 유포), 통리기무아문 설치 1881 신사유람단, 별기군 창설, 영남만인소 1882 조·미 수호통상조약, 임오군란(제물포 조약), 독일·영국과 조약 체결 1883 최초 근대학교 원산학사 개교, ‘한성순보’ 창간 1884 조·러 수호통상조약, 갑신정변, 우정국 설치 1885 거문도사건(영국) 1889 방곡령 1894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1895), 갑오개혁 1895 을미개혁, 삼국간섭, 을미사변, 을미의병 1896 아관파천, 독립협회 창립 1897 대한제국 선포(광무개혁) 1899 경인선 개통

1902 1차 영·일 동맹 1904 러·일 전쟁(~1905), 한일의정서, 보안회, 1차 한일협약(고문정치) 1905 카스라-테프트 밀약, 2차 영·일 동맹, 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통감정치 시행), 을사의병 1907 국채보상운동, 군대해산,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 강제 퇴위,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 차관정치) 1908 서울 진공 작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 안중근 의거, 간도협약 1910 국권침탈, 조선총독부 1912 토지조사사업 시작(~1918) 1919 2·8 독립선언,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20 봉오동(홍범도)·청산리(김좌진) 전투, 신흥무관학교, 간도참변 1922 물산장려운동 1926 6·10 만세운동 1927 신간회 창립 1929 광주학생운동 1931 조선어학회, 만주사변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 1937 중·일 전쟁 1940 한국광복군 창군 1941 대일·대독 선전포고 1942 조선어학회사건 1943 카이로회담(한국 독립 약속) 1945 얄타회담(3·8선), 포츠담선언(한국 독립 재확인), 광복 1946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좌우합작운동 1947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여운형 암살 1948 남북협상, 제주 4·3 사건, 5·10 총선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50 6·25 전쟁, 중공군 개입 1953 휴전, 반공포로 교환

1954 사사오입개헌 1960 3·15 부정선거, 4·19 혁명 1961 5·16 군사정변 1963 박정희 정부 출범 1964 한일협정 반대 6·3 시위 1965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 파병 1969 3선 개헌

1970 닉슨 독트린, 경부고속국도 개통, 전태일 분신 사건 1972 7·4 남북 공동성명, 유신체제 1973 제1차 석유파동 1977 수출 100억 달러 달성 1979 부마 민주화 운동, 10·26, 12·12 사태 1980 서울의 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1 전두환 정부 출범 1983 아웅산사건 1984 북한 합영법 시행 1985 남북 고향방문단 상호 교류 1986 86 서울아시안게임 1987 4·13 호헌 조치, 6·10 민주항쟁, 6·29 민주화 선언 1988 노태우 정부 출범, 88서울올림픽 1990 소련과 수교, 3당 합당 1991 남북기본합의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2 중국과 수교 1993 김영삼 정부 출범, 금융실명제 1994 김일성 사망 1995 세계무역기구(WTO) 창설,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199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1997 외환위기 1998 김대중 정부 출범, 금강산 관광 2000 6·15 남북 공동선언 2002 2002 한일월드컵 2003 노무현 정부 출범 2004 이라크 파병 2007 10·4 남북 공동선언 2008 이명박 정부 출범

한국정치, ‘게임의 룰’이 계속 흔들린다
옹졸한 대통령제로 ‘꼭두각시’ 총리만 허용 … 日·中보다 안정성 뒤처져

 이정복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ljb@snu.ac.kr    

2007년 12월14일 ‘이명박 특검법’ 처리를 둘러싸고 당시 여당인 민주당과 야당인 한나라당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19세기 중반 근대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부국강병책으로 불과 반세기도 안 되는 기간에 산업화를 이뤄냈다. 그 결과 20세기 초, 일본은 세계 5대 강대국의 일원이 됐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가 완전 패망했으나 또다시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세계 2위 경제대국의 위치를 지켜가고 있다.

반면 한국은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근대국가를 세웠다. 중국의 근대국가 수립 시기도 한국과 비슷하다. 한국과 중국 모두 일본보다 한 세기 정도 늦게 근대국가로 출발한 셈이다. 그만큼 한국과 중국은 경제는 물론 정치까지 일본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일본 정치는 한국이나 중국보다 앞서 있다. 한·중·일 동북아 3개국 가운데 민주적이면서 안정적인 정치가 이뤄지고 있는 나라는 사실상 일본뿐이다.

일본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우파에서 극좌파에 이르는 다양한 노선의 정당들이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는 매우 민주적인 정당체계를 갖췄다. 공산당도 합법적으로 인정됐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안정은 유지돼왔다.

일본의 정당정치는 언뜻 보면 비민주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자유민주당(자민당)이라는 하나의 정당이 패전 이후 2009년까지 무려 반세기 넘게 정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민당 내에서는 총리(총리대신)를 담당하는 인물이 수년마다 끊임없이 바뀌었다. 당내 여러 세력이 총리 자리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권력경쟁을 벌인 결과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당이 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권력경쟁에 수반하는 원심력이 자민당 중심 정치라는 구심력을 깨뜨리지 못했던 것.

3개월 전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것은 일본 정치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다. 현재 민주당 정권은 자민당의 관료 중심 국정운영 체제를 정치인 중심 운영체제로 뜯어고치고 있다. 정부의 공공 토목사업을 되도록 최소화하는 대신 국민의 복지를 더욱 확충하고 대미 종속적인 일미동맹을 대등한 동맹으로 바꾸고,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발전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정책 변화를 과거 정권과의 단절로 봐서는 안 된다. 자민당 정권에 대해 축적된 국민의 불만을 해소하려는 정도의 시도일 따름이다. 하토야마 유키오와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민주당은 자민당과는 ‘사촌’ 같은 정당이다. 두 당은 정책적으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 앞으로도 일본에서는 사촌 정당들 간의 정권교체가 일어나는 식의 안정적인 민주정치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안정적인 정치가 이뤄지는 곳은 일본뿐

이처럼 일본 정치가 안정될 수 있었던 데는 총리의 역할이 컸다. 일본의 총리는 일인지배체제가 아니라 집단지배체제 리더의 위치만 가진 약한 지배자지만, 집단지배체제가 원활히 운영될 수 있는 구심점 노릇을 해왔다. 의원내각제는 일본에서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강력한 정부를 유지하는 데 해가 되기는커녕 도움이 되는 정치제도로 정착했다.

여기에 일본의 정치적 안정에 공헌하는 또 하나의 정치구조가 바로 천왕제다. 일본 천왕은 일본의 역사시대 이전인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온 천왕가의 후손이다. 이 천왕가는 교체된 일이 없는 단일 왕조로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 역할을 현대에도 충실히 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정치는 광복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안정의 연속이었다. 한국은 수평적 정권교체를 일본보다 많이 경험했다. 민주정치가 자리 잡은 1987년 이후에는 물론 그전에도 시위, 쿠데타와 같은 비정상적인 절차에 따른 수평적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지난 60여 년 동안 한국의 집권정당은 자유당에서 민주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신한국당, 새정치국민회의, 열린우리당, 한나라당으로 바뀌었고, 최고통치자는 이승만에서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으로 바뀌었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국 정치는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권력 추구자들 간의 권력투쟁은 매우 원심적이었으나 대통령 중심제의 일인지배체제가 그나마 이런 원심적 경향을 제어해왔다. 변화무쌍하고 불안정한 한국 정치가 그동안 파국을 맞지 않고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데는 안전판 구실을 한 미국의 기여도 적지 않았다.

 

권력승계 제도화 중국도 효율적인 통치

한국 정치는 앞으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일본 정치가 거의 100% 예측 가능한 데 비해 한국 정치는 100% 예측 불가능하다. 현재의 통치체제가 지속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다. 현재 이명박 집권세력은 대통령 중임제를 염두에 두고 내각제나 이원집정제를 추진하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 세력은 이에 반대한다. 야당은 이 가운데 무엇이 유리한 길인지를 놓고 저울질하고 있다.

당장 한나라당이 계속 유지될지, 깨질지도 알 수 없다. 다른 정당들의 장래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머지않아 한국에서 주한미군을 빼내갈 것이고, 그럴 경우 한국 정치의 파국을 막는 최후의 안전판도 사라질 것이다. 미국이 물러간 뒤에 북한이 핵무장으로 한국을 위협할 때 한국 정치가 지금처럼 불안정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게임의 룰’은 계속 흔들리고, 권력경쟁은 매우 원심적이면서 정당은 하루살이 정당들이고, 사회통합력도 없는 것이 바로 한국 정치의 자화상이다.

이에 비해 중국 정치는 비민주적이긴 해도 매우 안정적인 정치구조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이 지난 60년간 통치해왔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내부 권력투쟁으로 매우 불안정했으나, 권력승계 방법이 제도화한 지금은 비교적 안정됐다.

5년 임기의 국가주석직과 공산당 총서기직은 두 번만 할 수 있다.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의 역할분담에서 보는 것처럼 주석과 총리는 효율적인 국가통치를 위해 업무를 나눴다. 후계자도 예측 가능하다. 후진타오는 장쩌민 주석시대에 부주석으로 있다 장쩌민의 자리를 10년 만에 물려받았고, 후진타오는 그의 10년 집권이 끝나는 해에 현 부주석인 시진핑에게 권력을 물려줄 것으로 예상된다. 현 주석이 얼마나 집권하고, 다음에는 누가 집권할지 예측 가능한 것이 중국 정치인 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그동안 한국의 대통령들은 권력누수 현상을 문제 삼아 부통령제 두기를 꺼려했고, 대통령의 ‘꼭두각시’에 그치는 총리직만 허용하는 옹졸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일본과 중국을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국 정치는 민주화했지만 일본보다는 훨씬 뒤져 있고 어느 면에서는 중국보다도 뒤떨어졌다. 한·중·일 간의 이 같은 정치적 차이는 오랜 역사의 산물이라 쉽게 고쳐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적 차이가 앞으로 가져올 결과를 생각하면, 한국 정치의 안정적 제도화가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임을 모두가 깨달아야 할 것이다.

 

6大 핵심 산업 놓고 ‘한·일 각축전’
조선·반도체·LCD는 한국 우세, 자동차·IT·철강은 난형난제  
 

자동차

생산대수는 일본이 월등 … 디자인·가격경쟁력은 한국이 앞서

2008년 자동차 생산대수 순위를 보면 일본이 1156만대로 세계 1위이고 한국은 383만대로 5위를 기록했다. 일본이 한국보다 3배 이상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의 증가 속도를 비교해보면 한국이 압도적으로 빠르다. 1967년 7000대에 불과하던 한국의 생산대수는 2008년 383만대로 무려 547배가 증가한 데 비해 같은 기간 일본은 315만대에서 1156만대로 3.7배 늘어나는 데 그쳤다.

수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76년 한국의 자동차 수출대수는 1000대에 그쳤으나 2008년에는 285만대로 늘었다. 같은 기간 일본의 자동차 수출대수는 371만대에서 655만대로 늘어나는 데 머물렀다. 절대 대수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한국이 빠른 속도로 일본을 뒤쫓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일본 추격은 생산, 수출 같은 양적인 측면보다 품질, 기술, 디자인 등 질적인 측면에서 더욱 거세다. 먼저 2004년 초기품질지수에서 현대자동차는 결점 수 102를 기록하면서 산업평균(119)은 물론 BMW(116), 포드(127), 폭스바겐(141) 등 세계적 기업들보다 결점 수가 적었다. 결점 수 101개로 1위를 한 도요타와도 1점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시 언론들은 ‘지구가 평평하다’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표현을 써가며 놀라움을 표한 바 있다.

최근에는 자동차의 핵심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엔진 부문에서 현대·기아자동차의 타우엔진이 미국 자동차 전문미디어 워즈오토가 선정하는 ‘10대 최고 엔진’에 2009년과 2010년 연속으로 올라, 한국의 엔진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인정받았다. 또한 기아 ‘쏘울’(위 사진)이 세계 3대 디자인상의 하나인 ‘레드 닷 디자인상’을 받았고, 기아의 유럽 전략형 소형 다목적 차량인 ‘벤가’도 세계 3대 디자인상 중 하나인 ‘iF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이로써 한국차는 소프트웨어 부문인 디자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최근 관심이 높아지는 친환경 기술에서도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걸음은 주목할 만하다. 2009년 7월 LPG를 사용하는 하이브리드차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고, 전기차 및 연료전지차 개발 등에서도 일본차에 크게 뒤지지 않는 개발 일정을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자동차산업은 중국과 인도, 러시아 등 신흥국 시장에 일본 자동차산업보다 선제적으로 진출해 최근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종합하면 한국 자동차산업은 양적인 측면에서 다소 뒤졌을 뿐 친환경 기술을 포함한 질적인 측면에서 일본차와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고, 가격경쟁력과 신흥국 진출에서는 일본을 능가하는 성과를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복득규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전문위원 seribok@seri.org

   

포스코는 일본이 중도 포기한 파이넥스 공법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해 앞선 기술력을 자랑했다.

철강

종합경쟁력에서는 일본 추월, 생산량은 절반 수준

한국이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조금씩 기반을 갖춰나가던 1960년대에 일본은 이미 세계적 철강 강국이었다. 당시 일본은 최첨단 철강기술인 연속주조 및 산소전로제강 기술을 도입하면서 단숨에 최고의 철강국으로 부상했다. 규모 면에서는 미국과 소련에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만 경쟁력, 기술력 등에서는 ‘실질적인 1인자’였다. 1990년대 후반 중국이 철강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기 전까지 일본은 약 40년간 양적, 질적으로 세계 철강산업을 주도했다.

일본이 고속성장을 시작하던 1960년대에 우리 철강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1970년 한국의 철강 생산량은 겨우 50만t으로 일본의 200분의 1 수준이었고, 세계 철강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0.1%에 그쳤다. 그러나 2차 오일쇼크와 경기침체 등으로 일본 철강산업은 1980년대 이후 거의 성장이 정체된 데 비해, 한국은 최근까지 양적 성장을 지속하면서 이제는 일본을 바짝 따라붙었다.

지난해 한국의 철강 생산량은 5362만t으로 일본의 절반 수준. 앞으로도 그 격차는 계속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반도체·조선 같은 수출산업과는 달리 중간소재로서 내수산업의 성격이 강한 철강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국가 단위에서 우리 철강산업이 양적으로 일본을 추월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기업 단위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철강산업을 대표하는 포스코와 일본 철강산업의 자존심 신일본제철을 비교해보면 여러 면에서 포스코가 신일본제철에 앞서 있다. 규모에서는 신일본제철이 약간 앞서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부터는 양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힘겨루기를 벌이는 양상이다.

매출액, 영업이익률 같은 경영성과 면에서는 포스코가 압도적 우위에 있고, 경쟁력에서도 포스코가 훨씬 우수하다는 게 객관적 평가. 철강사들의 종합경쟁력 순위를 발표하는 철강전문연구기관 WSD에 따르면, 포스코는 순위 발표가 시작된 2002년 이후 현재까지 1∼2위를 유지해온 반면 신일본제철은 10위권 밖에 머물렀다.

기술력에서는 일본이 아직 세계 최고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한국도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올라섰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우리 철강업계는 외국에서 도입한 기술을 바탕으로 R·D(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등 기술개발에 주력한 결과 조업·공정기술에서는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고, 출선비와 원료비 등 일부 기술에서는 이미 일본을 추월했다. 파이넥스(가루 형태인 철광석과 석탄을 용광로에 넣기 전 덩어리 형태로 구워주는 등 복잡한 과정을 생략한 신기술), 스트립 캐스팅(쇳물에서 바로 두께 2~4mm의 얇은 강판을 만들어 냉각과 가열 과정을 생략하는 신기술) 등 차세대 공정기술 개발에서도 선도적 위치에 있다. 특히 100년 넘은 용광로 공법을 대체할 수 있는 혁신기술인 파이넥스를 일본이 중도에 개발을 포기한 가운데 포스코가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것은 포스코가 기술력에서도 한발 앞섰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 철강산업이 이처럼 짧은 역사에도 일본과 기술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일본이라는 좋은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는 일본을 빨리 따라 하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실패 위험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벤치마킹할 대상이 없어졌다. 지금이야말로 일본과 대등한 위치에서 정면승부를 펼쳐 진정한 실력을 가려야 할 때다. 그만큼 우리 고유의 기술개발력 배양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 하겠다.

탁승문 포스코경영연구소 철강전략연구실장 smtak@posri.re.kr

 

Tips
연속주조 및 산소전로제강

철강제품을 만들려면 액체 상태의 쇳물을 틀에 부어 고체로 굳히는 주조 과정을 거치는데, 연속주조는 이 작업을 중단 없이 처리함으로써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킨 기술이다. 산소전로제강은 쇳물의 불순물을 제거하는 공정에서 99.5% 이상의 고순도 산소를 연료로 사용해 고품질 쇳물을 빠른 속도로 생산하는 기술이다.

   

하이닉스 반도체 연구원들.

반도체

日 추월 후 1년 이상 격차 … D램 점유율은 한국 57%, 일본 17%

한국 반도체산업에서 2009년은 지난 2년간의 혹독한 불황에서 경쟁사들을 제압하며 화려하게 부활한 해다. D램 세계 1, 2위 기업을 보유한 한국은 2009년 3/4 분기에 시장 점유율 57.2%(삼성전자 35.5%, 하이닉스 21.7%)로 엘피다가 홀로 분발하는 일본(16.9%)을 3배 이상 앞섰다. 낸드플래시 시장도 삼성전자 39.3%, 하이닉스 10.0%로 한국이 절반을 차지한 데 비해 일본은 34.6%(도시바)에 머물렀다. 특히 삼성전자는 1992년 일본의 도시바를 제치고 D램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이후 1993년 도시바와 히타치를 추월해 메모리 전체 시장에서 1위에 올랐고, 2002년에는 도시바를 추월해 낸드플래시 분야에서도 1위에 오르는 등 20년 가까이 일본 반도체 기업들의 ‘천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어느 한쪽이 쓰러질 때까지 싸운다’는 치킨게임에서 한국이 승리한 이유는 뭘까. 일본, 대만 기업들이 가동률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사이에 위기관리 능력과 기술 경쟁력을 발휘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지배력을 넓힌 게 주효했다. 삼성전자는 2009년 2/4 분기에 메모리 업계 중 가장 먼저 흑자 전환했고, 하이닉스도 3/4 분기에 흑자로 돌아섰다. 반면 해외 경쟁사들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독일의 키몬다는 파산했고, 치킨게임을 촉발한 대만 기업들도 무리한 증산 경쟁에 부메랑을 맞아 생존을 걱정하고 있으며, 일본 최대 메모리 기업인 엘피다도 정부의 지원을 받을 만큼 체력이 크게 떨어졌다.

또한 공정 기술력의 경우 한국과 해외 기업 간의 격차는 2008년 6개월~1년이었으나 최근에는 1년 이상으로 확대됐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2009년에 차세대 D램인 DDR3 생산을 위해 회로선폭 40나노급 공정을 본격 가동했지만 일본과 미국, 대만 기업들은 60나노급 이상 제품 생산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최근에야 엘피다만이 40나노급 D램 양산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치킨게임은 사실상 막을 내렸지만 파산한 독일 키몬다 외에 일본, 대만의 주요 경쟁기업들은 거의 모두 살아남았다. 반도체 경기 회복과 각국 정부의 개입 등으로 기업 퇴출이 쉽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도시바, 엘피다 등 일본 기업들은 한국에 더 이상 뒤처지면 영영 추격할 수 없다는 일종의 위기위식이 작용해 공격적인 투자방침을 세우고 있다. 또한 엘피다는 윈본드, 프로모스 등 대만 기업과의 합종연횡으로 선두권 탈환을 노린다.

따라서 또다시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서바이벌 게임이 일어날 수 있으며, 그 경쟁 양상은 한층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지속적으로 반도체 시장의 지배력을 확대해야 한다. 대규모 선행투자로 경쟁사를 압도하는 물량 공세도 중요하지만, 고부가가치 제품과 고객 특화형 제품으로 점유율을 넓혀야 한다. DDR3 제품, 절전형 반도체, 메모리-비메모리 기능 결합 퓨전 제품, SSD(Solid State Drive) 등의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경쟁사들의 입지를 더욱 옥죄어야 할 것이다.

장성원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SERIJSW@seri.org

   

조선

韓, 세계 최강 탄탄한 경쟁력 … 日, 中과 손잡고 재기 노력

조선산업은 431억 달러를 수출(2008년 기준 한국 수출액의 10.2%)하는 한국 최고의 산업으로서 국가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2003년부터는 연간 수주량, 수주 잔량, 건조량 등 조선산업을 가늠하는 모든 지표에서 명실상부한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고, 세계 10대 조선소 중 7개가 우리나라에 있을 만큼 한국의 조선산업은 ‘세계 최강’이다. 2009년에도 500억 달러 안팎의 수출을 기록, 국내 최고의 산업 지위를 유지할 전망이다.

하지만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본격화한 세계 경제위기는 조선업계에도 태풍으로 불어닥쳤다. 2009년 한 해 동안 선박 수요가 전년 대비 85% 정도 줄었고, 그 결과 지난 1년 동안 유럽의 여러 조선소가 경영부진으로 파산했다. 중국 정부는 이를 틈타 강력한 조선산업 부흥책을 시행해 2009년 연간 수주량에서 한국을 앞지르는 등 세계 조선산업의 기존 질서가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세계 경제위기가 진정 기미를 보이면서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성동조선 등 국내 주요 조선소들이 다시 굵직굵직한 신조선 수주의 포문을 열기 시작해 한국의 위상은 곧 회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역사적으로 세계 조선산업의 맹주 자리는 기술혁신과 원가경쟁력 우위에 의해 세 차례 크게 바뀌었다. 근대 이후 1950년까지는 강철선(鋼鐵船)의 리벳 건조(강판에 구멍을 뚫고 리벳을 사용해 금속재료를 영구 결합하는 것) 기술을 개발한 영국이 맹주였다. 이후에는 용접을 이용한 블록 건조방식(선박을 블록 단위로 미리 만들어 최종 접합하는 방식)을 상선(商船) 건조에 활용한 일본이 최강자가 됐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는 우수한 설계 전문인력과 대형 설비(도크와 크레인 등)를 보유한 한국이 창조적인 건조 공법을 개발, 적용하는 등 생산성 혁신을 통해 고객 맞춤형 대형 첨단선박을 건조하면서 세계 조선업계를 평정했다.

기술력도 한국은 정부와 대형 조선소의 꾸준한 투자와 R·D를 통해 2006년에 이미 일본과의 격차를 대부분 줄였고, 몇몇 분야에선 일본을 앞서고 있다.

한국은 특히 선박건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설계 인력을 일본보다 4배 이상 확보, 차별화한 설계와 건조 IT의 활용 등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용도와 모양, 크기의 선박을 최단시간에 맞춰줄 수 있는 최고의 역량을 보유함으로써 드릴십, FPSO, 쇄빙유조선과 같은 고가의 특수 선박뿐 아니라 첨단 크루즈선까지 모든 선박이나 해상 구조물을 건조할 수 있게 됐다.

한편 일본은 자국 내 공간적인 한계로 증설이 힘들어졌고, 무엇보다 기술인력 부족과 고령화 등으로 향후에도 과거와 같은 경쟁력을 회복하기는 힘들 전망이어서 더 이상 한국 조선산업의 적수가 되기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이번엔 중국이 요주의 경계대상으로 떠올랐다. 최근 중국 조선산업의 종합경쟁력은 한국의 90% 수준까지 근접했고, 한국의 6분의 1에 그친 저임금과 자국 내에서 한계를 느끼고 중국에서 재기를 노리는 일본 조선소로부터의 기술이전, 중국 정부의 강력한 육성책 등으로 중국 조선산업은 급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정부가 주도하는 막대한 투자로 대형 조선소를 잇따라 건립하고 이미 세계 최대의 도크 건설을 완료했다. 뿐만 아니라 ‘국수국조(國輸國造·중국 화물은 중국산 배로 운송한다)’ 정책을 시행해 중국 해운사가 발주한 선박의 70% 이상을 중국 조선소가 건조하고 있다.

일본의 벽을 넘어선 한국이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세계 조선업계의 맹주로서 주도권을 지켜내려면 창조적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IT와 전자, 환경 등 차별화된 첨단기술로 무장한 고부가가치의 신개념 선박 개발을 선도해 높아지는 고객의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나아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사업모델을 다각화해야 한다.

조선산업의 개념을 기존의 ‘선박 건조자(Carrier Builder)’에서 ‘해양 개발자(Ocean Developer)’로 확장함으로써 단순히 배를 만드는 것을 넘어 해양 플랜트 건설, 해양 개발, 선박금융 등 사업영역과 방식의 획기적 개선이 필요하다. 정부도 한국 조선산업의 경쟁력을 한 차원 더 높이기 위해 취약한 선박금융 개선과 변화된 업의 개념에 맞는 인적 자원 육성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배병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seribae@seri.org

   

독일의 한 전자 매장에서 소비자가 삼성전자 발광다이오드(LED) TV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LCD

2001년 日 제치고 10년간 ‘지존’ 군림 … 2.5세대 건너뛰고 3세대 집중공략 대성공

LCD 산업은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샤프, NEC, 도시바 등 10여 개 일본 업체가 주도했다. 하지만 한국이 1995년 LCD산업에 뛰어든 이후 6년 만인 2001년에 세계 시장의 약 40%를 점유하며 일본을 제치고 선두국가로 부상했다. 특히 삼성전자와 LG디스플레이(LG전자→LG필립스LCD→LG디스플레이로 사명 변경)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10년간 1, 2위를 다투며 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이처럼 단기간에 LCD산업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새로운 시장 기회를 포착하고 이를 선점하기 위해 신속하고 과감한 투자를 거듭해온 기업들의 지난한 노력이 숨어 있다. LCD산업 진입 초기인 1995~96년에 11.3인치 패널 생산에 유리한 2.5세대 라인에 투자를 집중하는 일본 LCD 기업들과 달리 한국 기업은 2.5세대를 건너뛰고 12.1인치 패널 생산이 가능한 3세대에 투자한 것. 당시로서는 기술적인 어려움 외에도 양산 이후 시장에서 과연 12.1인치 패널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질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감히 도전한 것이 먹혀든 것이다.

IBM, 도시바 등 당시 노트북 업체에 대한 끈질긴 설득으로 시장의 주력 사이즈가 10.1인치에서 12.1인치로 넘어가면서 샤프 등 일본 업체들은 큰 손실을 입었고, 반면 한국 기업은 추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2000년 이후 한국 기업들은 5~7세대에 선행 투자함으로써 노트북용 및 모니터용 패널의 대형화뿐 아니라 40인치 이상 대형 LCD TV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새로운 라인에 대한 선행 투자와 대규모 투자는 부품소재 및 장비 부문이 취약한 한국 기업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기능을 했다. 일본 기업은 투자에 소극적인 반면, 한국 기업에선 새로운 장비나 공정개발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생기자 일본 부품소재 및 장비 업체들은 한국 LCD기업을 최우선 고객으로 인식하게 됐고 기술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현재 LCD산업에서 대만 기업들이 양적인 면에서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산하나, 대형 및 고가 패널 생산에 주력하는 한국이 LCD산업 종주국의 위상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과거 두 자릿수 이상 가파른 성장률을 보이던 LCD시장 규모는 빠르게 정체되고 있다. 이는 패널의 대형화와 이를 통한 새로운 시장의 개척이라는 지금까지의 성공 방정식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노트북, 모니터, TV 시장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LED 백라이트의 사례에서 보듯 화질, 디자인, 절전 등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패널의 공급이 절실해진 것이다. 향후 한국 기업들이 상용화가 점차 가시권에 들어오는 3D, AMOLED(백라이트를 통해 빛을 발하는 LCD와는 달리 자체에서 빛을 발하는 디스플레이)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에서도 주도권을 다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성배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sbpark@seri.org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한국 업체가 2, 3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부품·소재 분야에선 일본이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IT

韓, 10년 새 괄목할 성장 … 日, 부품·소재 부문 여전히 최강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IT 분야는 괄목할 성장을 기록하며 일본의 위상을 넘어섰다. 휴대전화의 경우 2009년 3분기 세계 휴대전화 시장에서 한국 업체는 글로벌 2, 3위를 기록하며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일본의 경우 소니 에릭슨이 4.9%의 점유율로 4위를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주요 업체들의 점유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업체들이 5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큰 변화다.

주요 IT 인프라 보급에서도 한국은 일본보다 우위에 섰다.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따르면 인터넷, 초고속인터넷, 이동통신 등의 보급에서 한국은 1998년에 일본보다 뒤져 있었으나 2008년 기준으로 모두 일본을 앞선 상황이다.

한국이 짧은 시간에 IT 부문에서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디지털 전환기의 기회를 맞아 앞선 정책비전과 기업의 빠른 혁신, 역동적인 내수시장 기반 등의 ‘트라이앵글(Triangle) 구조’가 혁신의 선순환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휴대전화 기업들은 국내 시장에서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일찍부터 세계시장 공략을 가속화해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트렌드를 주도하며 글로벌 위상을 확대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업체들은 내수시장 위주의 전략을 고수해 세계 시장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1억3000만명이나 되는 내수시장에 집중하다 보니 독자적인 표준이나 국내시장 특화 제품 등을 고집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은 여전히 ‘강적’이다. 지난 몇 년간 일본 정부가 IT 인프라 구축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한국의 인프라 우위는 많이 약화됐고, 모바일 브로드밴드(하나의 전송매체에 여러 개의 데이터 채널을 제공하는 것) 등에서는 일본이 앞서나가고 있다. 기술력과 제품력, 브랜드력 등에서 일본 기업들의 기초체력도 여전히 탄탄하다. 특히 완제품 분야에서는 세계시장 점유율은 낮지만, 부품·소재 부문의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액정 디스플레이와 반도체용 재료, 주요 휴대전화 부품 등에서 일본 업체들은 높은 시장점유율과 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전열을 재정비해 기존의 부품·소재 경쟁력을 유지 강화하는 동시에 차세대 IT제품 및 시장을 선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최종 가공조립 기업과 부품·소재 기업이 협력해 기술을 축적하고 시장을 동반 확대함으로써 내실 있는 업계 성장을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이 IT 부문의 경쟁 우위를 유지·확대하려면 차세대 IT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수립하고 혁신 노력을 가속화해야 한다. 2000년대가 ‘디지털 전환의 10년’이었다면, 앞으로 10년을 이끌어갈 ‘New IT시대’의 방향성 모색과 앞선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 그동안 하드웨어 등에서 구축한 경쟁력을 기반으로 부품·소재, 소프트웨어, 시스템 등 향후 중요성이 커지는 분야에서 고부가 경쟁력을 좀더 확대해나가야 할 것이다.

권기덕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kdkwon@seri.org

 

20년 앞선 일본 우주개발 “부럽다!”걸음마 뗀 한국보다 기술·인력·예산서 월등한 우위

   

2009년 8월25일 쏘아올린 한국의 첫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I).

인공위성

한국, 2020년 7대 우주강국으로 진입 목표

2009년 8월25일의 ‘나로호’ 발사는 한국 우주개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비록 위성의 궤도 진입에는 실패했지만 발사장의 성공적인 운영과 치밀한 추적 시스템, 그리고 나로호의 분리와 로켓 시스템의 작동은 한국이 독자적인 우주개발 능력을 갖추게 됐음을 입증했다. 그럼에도 일본의 우주개발 능력과 비교해보면 매우 뒤처진 것이 사실이다.

일본은 1955년 도쿄대에서 ‘펜슬 로켓’을 시험한 뒤 1970년 2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인공위성 ‘오스미’를 L-4S-5 로켓에 실어 궤도에 진입시키면서 한국보다 20여 년 먼저 우주개발을 시작했다. 그만큼 우주개발을 위한 기술, 인력, 예산 측면에서 한국과 격차가 크다.

일본은 2008년 5월 ‘우주기본법’을 제정해 국가안보 목적을 위한 우주개발의 근거를 마련했으며, 향후 5년간 34기의 위성을 개발 운영한다는 내용의 제1차 우주기본계획을 수립(2009년 5월)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일본은 주력 로켓인 H2A 발사 횟수를 현재의 배로 확대하고, 소형 위성의 발사 수요에 대응하는 고체 로켓 개발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2020년을 목표로 무인 달 탐사 이족보행로봇을 개발하고 2014~20년 상업위성을 개발하는 등 위성 수를 60개로 확대한다는 복안이다.

일본의 이러한 계획은 2020년까지 우주 강국으로 도약하려는 한국의 계획과는 위성체 분야를 제외하면 상당한 기술력 차이를 보여준다. 2007년 한국의 국가 R·D(연구개발) 예산 대비 우주개발예산 비중(2.9%)은 미국의 10분의 1, 일본의 3분의 1이며 GDP(국내총생산) 대비 우주개발예산 비중(0.03%)은 미국의 10분의 1, 일본의 2분의 1 수준이다(표2 참조).

산업경쟁력을 나타내는 우주분야 매출 총액에서도 2008년 현재 한국은 1억 달러로 세계 13위권이지만, 일본은 19억 달러로 5위다. 그리고 우주개발 참여 인력을 보면 한국의 산업체 종사자는 일본의 4.5분의 1, 전문인력 수는 3분의 1 정도다. 일본은 위성을 독자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발사장을 이미 2개 보유하고 있으며, 또 다른 한 곳을 추가로 건설할 예정이다. 우주개발 예산과 인력 등 기본적 능력에서 양국 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성의 개발 격차도 상당히 크다. 비록 우리나라의 강점인 IT(정보기술), NT(나노기술) 기술력이 결합돼 현재 운영 중인 다목적위성 2호의 해상도는 일본의 실용위성 해상도와 손색이 없거나 혹은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지만, 지구 관측위성을 제외한 다른 위성 분야인 정지궤도위성, 과학관측위성, 달 탐사위성 등에서는 기술적으로 큰 격차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위성을 우주로 쏘아올릴 수 있는 발사체 능력도 일본이 한국보다 월등하다. 2020년까지 개발 예정인 우리의 한국형 발사체(KSLV-II)와 비슷한 성능을 가진 H-II 로켓을 일본은 1994년 독자 개발한 후 지속적으로 성능을 개량했다. 정지궤도에 4t의 위성을 보낼 수 있는 H-IIA를 2001년에, 우주정거장에 6t의 탑재체를 보낼 수 있는 H-IIB를 2009년에 개발해 발사했다(표1 참조).

우리나라도 2020년까지 세계 7대 우주강국 진입을 목표로 하는 우주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2020년까지 98%의 위성기술 자립도 달성, 한국형 우주발사체 개발 등 핵심 우주개발 기술 확보와 IT, NT 같은 융합기술의 적용과 응용을 통한 우주개발 경쟁력 확보에 중점을 뒀다.

이창진 건국대 항공우주공학과 교수·한국연구재단 국책연구본부 우주단 단장 cjlee@konkuk.ac.kr

   

로봇

부품·소재 기술 막강한 일본, 전 분야 압도적 … 중간과정 생략한 한국은 지능형 로봇 추격

2000년 일본 혼다는 ‘아시모’라는 로봇을 선보였다. 어린이만한 귀여운 체구에 층계를 올라가고 간단한 율동을 시연하는 인간형 로봇이었다. 둔탁해 보이는 한쪽 팔로 자동차 공장에서 이리저리 용접하던 산업현장의 로봇이 인간의 생활환경으로 들어와 인간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당시 많은 한국인이 의아하게 여긴 것은 ‘왜 하필 자동차회사에서 로봇을 만들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로봇은 소니, 마쓰시타 같은 전자제품 공장에서 생산해야 하는 가전제품이란 인식에서 비롯된 의문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정밀기계공업이 발전한 나라다. 막강한 부품·소재 기술을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수치제어 공작기계, 산업용 로봇시장을 선도했고, 지금도 세계 최강의 자동화, 반도체설비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산업용 로봇 기술은 일본을 비롯한 기술선진국을 중심으로 1970년대 급속한 발전을 거쳐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대부분의 기술이 확립됐다. 이후 이를 바탕으로 로봇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지능 요소를 추가,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로봇기술이 발전하면서 요즘과 같은 지능형 로봇이 출현하게 됐다. 따라서 일본의 경쟁력 있는 로봇들은 대부분 혼다, 도요타, 미쓰비시, 일본총합기술연구소(AIST) 등 전통 정밀기계 분야에 뿌리를 둔 곳에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나라에선 1980년대에 제품의 국제적 품질수준 및 생산성 향상을 위해 빠른 속도로 자동화를 도입했는데, 그 중심에는 산업용 로봇이 있었다. 당시 국내 유수의 대기업이 로봇 수요 확충과 도입 원가 절감 등을 위해 자체 생산에 뛰어들었지만, 대부분 조립생산 혹은 베끼기 수준의 로봇이었던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후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국의 로봇 연구는 부품, 소재, 시스템 구축 등 기초 분야에 대한 ‘충분한 완숙단계’를 생략하고, 곧바로 지능형 서비스 로봇으로 향하게 된다. 그 결과 상대적 기술우위를 점한 전자산업을 기반으로 가전제품형 서비스 로봇이 우리에게는 지능형 서비스 로봇으로 인식된 것이다.

결국 한국의 로봇기술은 탄탄한 ‘기초체력’을 바탕으로 한 일본과 달리 상업화를 목표로 출발했기에 완성도가 크게 떨어진다. 60점을 받은 학생이 90점 받기는 쉽다. 하지만 98점 받은 학생이 99.99점을 받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오랜 기간 내공이 있어야 가능하다. 흔히 ‘2% 부족하다’고 하지만, 이는 전체 완성도 면에서 보면 천양지차다.

일부에선 한국에서 개발한 지능 로봇 ‘휴보’가 일본의 ‘아시모’를 뛰어넘었다고 하지만 그건 난센스다. 휴보가 기술개발 기간과 연구비 대비 경쟁력은 있지만, 아시모가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표 참조).

일본 등 로봇기술 선진국의 경우 군사용, 장애인용, 의료용, 위험환경용 로봇 등 전통 로봇시스템 기술을 기반으로 한 로봇 플랫폼들이 각기 경쟁력을 갖추고 연구되고 있다. 그중 일부는 이미 실용화, 상용화 단계에 진입했다. 한국 역시 많은 노력을 쏟고 있으나 완성도 면에서 적잖이 떨어진다.

지능형 서비스 로봇은 아직 본격적인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미개척 영역이다. 따라서 단기간의 상업화에 집착하지 않고 실용화 연구와 함께 장기적 안목으로 광범위한 기초 응용연구와 다양한 창의적인 시도를 해야 한다. 조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인내심으로 꾸준히 노력한다면 우리가 세계 로봇기술을 선도할 날도 머지않아 올 것이다.

오준호 KAIST 기계공학과 교수·휴머노이드 로봇연구센터 소장 jhoh@kaist.ac.kr

 

힘없어 독도를 빼앗기진 않는다
육군 우세 한국, 해군 전력에선 밀려 … 공군은 일본 항공자위대 바짝 추격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2008년 육군 제20기계화보병사단이 펼친 혹한기 도하훈련. K-21 전투장갑차를 비롯해 K1A1 전차와 K-200 장갑차 등 궤도장비 500여 대가 동원됐다. 육군력은 한국이 일본보다 센 편이다.

격세지감, 괄목상대. 1910년 대한제국은 총 한번 제대로 못 쏴보고 일본제국에 합병됐다. 그러니 100년 터울을 둔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대(對)일본 군사력 비교에선 이런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나라는 거란(요), 몽골(원), 왜(일본-임진왜란), 여진(청-병자호란)과는 군사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해 싸우다 지면 지고 비기면 비겼는데, 1910년엔 청나라와 러시아를 이긴 일본의 위세에 꼼짝도 못하고 짓밟혔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국가를 대표하는 가장 강력한 조직은 군이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선각자들은 군부터 만들려 했다. 그래서 수십 개의 군사조직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군정(軍政)을 펼친 미군은 이 조직부터 없앴다. 한 나라에는 하나의 군사조직만 있어야 하기에 이들을 사병(私兵) 조직으로 보고 ‘사설(私設) 군사단체 해산령’을 내린 것. 다만 치안(治安)을 위해 경무부를 두고 한국인을 모아 경찰을 만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를 뒤흔든 것은 좌파 무장세력이었다. 경찰만으로는 이들을 제압할 수 없어, 미군은 전투경찰과 비슷한 개념으로 ‘경찰 예비대’를 만들었다. 이를 줄여 ‘경비대’라고 불렀는데, 군 창설에 목이 말랐던 한국인들은 이를 군대로 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육상 작전 경비대는 ‘국방경비대’, 해상 작전 경비대는 ‘해안경비대’로 불렀다. 이것이 대한민국 육·해군의 모태다. 이런 이유로 한국은 경찰보다 군이 늦게 생긴 역사를 갖게 됐다.

1948년 8월15일 군정을 끝내고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경비대를 군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는 육군 소속의 항공대를 독립시켜 공군으로 만들었다. 1949년 10월1일 한국도 대세에 따라 육군 항공대를 독립시켜 공군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듬해 터진 6·25전쟁에서 실전을 겪으며 한국의 육·해·공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해갔다.

 

첨단 무기 보유 한국군, 일본과 거의 대등한 전력

일본 군대는 1945년 2차 세계대전 패망 직후 미군 군정에 의해 해산됐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부활의 기회를 엿본다. 일본에 있던 미군 4개 사단이 모두 한반도로 출동해 소련으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것이 어려워지자 미군은 구 일본군 출신들을 모아 경찰 예비대 개념으로 일본을 지키는 ‘보안대’를 만든 것. 이것이 발전해 지금의 자위대가 됐다.

일본은 헌법에 쉽게 손을 대지 않는다. 메이지(明治)천왕 때 만들어진 ‘제국헌법’이 1945년 패망 후 미 군정에 의해 개정된 것이 유일하다. 이때 이름도 ‘평화헌법’으로 바뀐다. 평화헌법은 일본의 재무장을 금하고 있다.

개헌이 어렵다는 전통 때문에 일본의 리더들은 “우리도 나라를 지킬 권리는 있다. 따라서 재무장 금지는 ‘공격할 수 있는 전력 보유 금지’로 해석해야 한다. 일본도 방위를 위한 전력은 보유할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세계 2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첨단 방어용 무기를 도입해 자위대를 무장해나갔다. 무기를 방어용과 공격용으로 나누기는 어려운데, 일본은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이용해 이를 구분했다.

섬나라 일본을 공격하려는 세력은 바다와 하늘로 들어와야 한다. 따라서 일본은 “해상과 하늘에서 침투하는 표적을 잡아야 한다”며 순항미사일과 이지스 구축함, 적기를 잡는 F-15C 공대공 전투기 등을 도입했다. 방어용이란 명분으로 최고의 무기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적 지상을 공격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과 항공모함, 해병대 등은 공격전력으로 보고 갖추지 않았다. 자위대의 해외 파병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일본은 “유엔이 분쟁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 요구하는 평화활동은 공격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세워 평화유지군 파병에는 적극 나서게 됐다.

   

사람은 자위(自衛) 능력과 살상(殺傷) 능력을 갖춰 그 자체로 전략·전술가와 무기 노릇을 할 수 있다. 한국은 대병력을 보유한 북한군의 재침 방지를 최대 목표로 정했기에 대군(大軍)주의로 나갔다. 이에 비해 일본 자위대는 직업군인 체제를 선택, 고가의 첨단 장비를 도입하는 기술군 체제를 구축했다. 한일 간의 경제력 차이가 크던 시절엔 기술군이 대군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경제 격차가 줄어들고 한국군도 첨단무기를 갖추기 시작하자, 그 차이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현재의 한국군은 잠수함, 이지스함, 순항미사일, F-15 전투기 등 일본 자위대가 가진 첨단 무기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공격전력으로 분류돼 일본이 갖지 못한 대형 상륙함(독도함)과 해병대, 탄도미사일(현무) 등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이 개발한 흑표 전차와 K-21 장갑차는 일본이 개발한 99식 전차나 96식 장갑차보다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병력은 한국군이 60만명, 일본 자위대가 30만명이니 지금의 한일 군사력은 거의 대등하다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잠수함은 한국 잠수함보다 크고, 일본의 이지스함은 척수가 많을 뿐 아니라 한국 이지스함이 갖지 못한 SM-3를 탑재했으니 더 우수한 것 아니냐고 지적한다. 그러나 잠수함은 크다고 잘 싸우는 게 아니다. 더구나 다음에 건조할 한국의 KSX 잠수함은 대지(對地) 공격용 미사일을 탑재할 예정이므로, 헌법 때문에 공격 미사일을 탑재하지 못하는 일본 잠수함보다 전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SM-3는 매우 우수하지만 발사된 적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방어용이라, 공격을 기반으로 한 전투력 증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육군, 통일 이후 중·러 의식 전력구축 계획

하지만 일본의 국부(國富)는 한국의 7~8배에 달하기에 일본 자위대는 한국군보다 2배 이상 많은 예산을 사용한다. 일본은 해상자위대를 미국 해군에 이어 세계 2위의 규모로 키워놓았다.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도 한국이 열세이나 임진왜란 초기 때처럼 일방적으로 당하거나 독도를 빼앗길 정도의 열세는 아니라는 게 두 나라 군사력을 잘 아는 전문가들의 공통된 평가다.

한국 육군은 일본 육상자위대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북한 인민군을 겨냥해 전력을 증강해오던 한국 육군은, 요즘은 통일 이후 직면할 중국과 러시아 육군을 의식하면서 전력구축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 해군은 아직 일본 해상자위대를 따라가지 못한다. 한국 해군은 일본 해상자위대를 롤모델로 설정해놓고 해상자위대가 지나온 길을 분석해 열심히 추격하고 있다.

한국 공군은 일본 항공자위대의 군사력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일본이 F-15 전투기와 E-767 경보기, KC-767 급유기를 도입하자, 한국은 F-15를 도입하고 E-737 경보기는 도입하기 직전이며 지금은 급유기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정리하면 세력 면에서 육군은 한국 우세, 해군은 일본이 상당 우세, 공군은 일본이 약간 우세다. 나라를 빼앗긴 100년 전과 비교하면 깜짝 놀랄 만큼 두 나라 사이의 군사력 격차는 줄었다.

 

한국인들은 법보다 주먹이 먼저?
2008년 25만건 발생, 일본의 4배 … 범죄의 광역화·흉포화는 공통의 고민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 피해자 시신 발굴 현장.

치안

한국 고소사건 일본의 100배 … 취중 폭행사건도 많아

탄탄한 범죄 대책과 치안은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할 사회적 인프라 중 하나다. 이 점에서 보면, 그간 한일 두 나라는 G20 국가 중에선 안정된 치안 수준을 자랑해왔다고 볼 수 있다. 객관적인 지표인 범죄발생률이 상대적으로 낮고 검거율은 가장 높은 그룹에 속한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 통계를 보면 강력범죄의 지표가 되는 살인사건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범죄발생률이 일본은 1.1건이고 우리나라는 2.2건으로 미국 5.7건, 프랑스 3.2건, 독일 3.0건, 영국 2.6건보다 낮다.

살인, 강·절도, 성범죄 등 주요 범죄발생률에서도 인구 10만명당 발생건수가 1만 건을 넘는 미국이나 6000건을 웃도는 프랑스, 독일 등에 비해 한일 양국은 2000건 이하라는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

검거율에서는 살인사건의 경우 영국이 약 60%, 미국이 80%, 프랑스가 90%인 데 비해 일본은 96%, 한국은 98%의 높은 수치를 보인다. 간혹 불상사가 벌어지긴 하지만, 대체로 서울이나 도쿄 시내에선 여자 혼자 밤거리를 다닐 수 있다는 자랑 섞인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범죄지표로 뒷받침된다.

이처럼 한일 양국의 치안상태를 보여주는 범죄지표는 다른 나라들과 구별되는 유사한 면이 있지만, 양국의 발생 범죄를 유형별로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폭행·사기·횡령·배임, 일본보다 월등

한국은 일본보다 폭행사건의 발생 빈도가 매우 높고, 사기·횡령·배임 등 재산침해와 관련된 고소사건도 월등히 많다. 2008년 통계를 보면 한국은 폭행사건이 25만 건에 육박하지만, 일본은 6만여 건에 그쳤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시비가 붙는다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다.

실제로 한국은 2002~08년 7년간 평균 주취범죄 비율이 전체 범죄의 22.5%, 폭력범죄의 39.0%, 공무집행방해사범의 52.9%를 차지했다. 이는 잘못된 음주문화, 그리고 주취 상태의 범죄를 실수로 관대하게 대하는 그릇된 사회 인식이나 사법부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바 크다.

고소사건은 한국이 매년 30만~50만 건을 넘나드는 반면 일본은 1만 건 정도에 그친다. 인구수를 감안해도 일본의 100배가 넘는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선 민사적 시비를 수사기관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우리 특유의 법문화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법 실무적으로 보면 일본의 경우 고소인이 범죄의 증거를 명백히 제시하지 않는 한 수사기관에서 고소사건 접수 자체를 반려한다는 점을 가장 큰 이유로 볼 수 있다.

한일 양국의 객관적 범죄지표는 다른 나라들보다 안정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시민들이 만족할 만한 치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하긴 어렵다. 최근 양국에선 범죄발생률 증가 및 검거율 저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질적인 면에서도 범죄의 광역화·기동화·흉포화 현상이 두드러진다. 여기에 인터넷을 이용한 사이버 범죄도 급격히 늘고, 성범죄나 스토킹 범죄도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외국인 범죄도 급증하고 있고, 마약류 불법거래나 자금세탁 등의 조직범죄도 확대 양상을 보인다. 소년 범죄의 수적·질적 변화, 그리고 평균수명 연장에 따른 고령자범죄 문제 등도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따라 범죄에 대한 시민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2008년 통계청의 사회통계조사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주된 불안요인으로 범죄발생(18.3%)이 경제적 위험(15.4%), 환경오염(13.5%), 국가 안보(10.5%)에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의 경우 범죄 발생에 대한 불안요인이 22.1%로 평균보다 높았다. 10년 후 더욱 위험해질 것이라는 응답도 54.1%에 달해 안전할 것이라는 응답(19.2%)보다 훨씬 높았다.

일본 역시 유엔의 주도 아래 법무성이 4년마다 실시하는 국제범죄피해실태조사(ICVS)에서 불법침입 범죄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는 비율이 47.3%에 달했고, 전체적으로 치안에 불안감을 느끼는 비율이 절반을 넘는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양호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은 이러한 치안상황 악화에 맞서 2003년 총리를 장으로, 모든 각료를 구성원으로 한 ‘범죄대책각료회의’를 발족했다. ‘범죄에 강한 일본’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경찰을 비롯한 행정 각부를 망라해 범국가적으로 범죄에 대처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무원 총정원 삭감에도 경찰만큼은 2만명 이상이나 증원됐다.

한국도 일본처럼 ‘범죄에 안전한 세계 일류국 만들기’를 향후 국정운영의 우선 과제로 다루기를 소망해본다.

이동희 경찰대 법학과 교수 leedh7@hotmail.com

   

1 다문화가족지원 분야에선 일본이 한국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2009년 7월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방문한 한승수 당시 총리가 이주 여성들을 격려하고 있다. 2 일본 도야마시 복지시설인 알펜하이츠에서 한 노인이 웨이트트레이닝 기구를 이용해 재활훈련을 하고 있다.

복지

日 신중하고도 오랜 정책 연구·심의 … 韓 신속한 대안 마련이 장점

일본의 사회복지제도는 일본 고유의 모델이기보다 유럽이나 미국 모델이 적용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1980년대부터 일본은 독자적인 일본형 사회복지 모델을 만들기 위한 실험을 시도했다. 최근 한국에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저출산·고령화 문제도 일본은 일찍부터 이 현상을 예측하고 대책을 수립했다.

일본은 사회복지제도를 제정, 시행하는 단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외국의 사례를 도입하는 과정에선 답답하다고 여겨질 만큼 장기간 사전 검토작업을 거쳐 새로운 형태의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탄생한 것은 주요 제도의 ‘보완재’로 활용된다. 2000년에 시작된 ‘개호보험법’(이와 유사한 한국의 노인장기요양보험은 2009년 5월 관련법 제정)이 단적인 예다. 당시 일본은 개호보험법제도를 제정하면서 후생노동성 내 개호보험추진위원회를 조직해 오랜 기간 세부 연구주제에 대한 심의를 벌였다. 이렇게 등장한 개호보험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사회 이슈로 부각될 것을 대비하는 차원에서 4대 사회보험(건강, 연금, 산재, 실업)에 그대로 편입됐다. 개호보험은 1995년 독일이 시행한 ‘수발보험제도’를 모델로 한 것이지만, 영국의 로버트 핀커 교수가 ‘영국이 일본에서 배울 사회복지 모델은 개호보험제도’라고 할 만큼 일본의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국 ‘지역사회복지계획’은 ‘캐비닛 보고서’로 전락

일본은 중앙정부가 주도적으로 사회복지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개호보험제 외에 아동, 장애인, 생활보호 대상자 등 주요 관리가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지원 제도들은 중앙정부인 후생노동성에서 통제해 관리의 집중도와 효율성을 높였다. 다만 약 20년 전부터 다문화 등 일부 복지정책 제정과 운영은 지방자치단체(이하 지자체)에 권한을 위임해왔다.

한국은 이와 비교된다. 한국도 고령화사회 대비 차원에서 2009년 5월부터 일본의 개호보험제도와 유사한 ‘노인장기요양보험법’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그러나 일본은 개호보험 대상을 6단계로 나누지만 우리는 3단계에 불과하다. 재정의 벽에 부딪혀 본래 취지와는 다른 형식적인 제도로 전락한 셈이다. 전체적으로 노인인구의 현실과 재정 부담을 감안한 세부 연구가 부족했다는 의미다.

2010년부터 의무적으로 실시하게 돼 있는 제2기(2011~14년) 지역사회복지계획(사회복지법에 따라 주민의 복지 요구를 파악해 이를 과제로 설정하고 주민 참여를 통해 해결하는 중장기적 계획) 수립 과정도 일본과 비교하면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계획을 세울 때 필수적인 주민들의 요구 조사부터 허술하다. 대개 6개월~1년에 모든 조사가 이뤄진다. 각 지자체의 제1기 지역사회복지계획 보고서들이 대부분 전시용 ‘캐비닛 보고서’로 전락한 것만 봐도 그렇다.

국고보조 사업의 지방 이양이라는 명목으로 지자체에 넘어간 사회복지재정 권한도 일본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중앙정부에서 통제해야 할 권한들이 지자체로 이관돼 오히려 지역 간 편차만 두드러지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중앙정부에서 절대 빈곤층에 대한 복지사업 관련 권한을 갖고 있지만, 바로 위 계층인 저소득층 지원사업은 지자체장의 권한에 따라 지역별로 예산의 확정과 집행의 차이가 벌어지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다만 일본의 사회복지 분야 학자들은 2008년 3월 한국에서 제정돼 시행 중인 다문화가족지원법에 큰 관심을 나타낸다. 다문화가족지원법은 중앙정부가 주도적으로 이민자, 새 국적 취득자 등 다문화 가족에 대해 생활 정보, 다국어 서비스, 교육, 산전·산후 건강관리를 지원하고 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지자체에서 모든 권한을 갖고 운영하는 일본의 다문화 관련 제도와는 규모나 제도 운영 면에서 차별화된다. 실제로 필자는 2009년 1월 일본의 다문화 관련 제도를 연구하기 위해 미노가모시를 방문했을 때 시 담당과장에게서 “일본 학자들이 일본의 다문화 정책을 위해 앞으로 벤치마킹할 나라로 유럽에선 이탈리아, 아시아에선 한국을 꼽는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일본의 복지정책 수립과 운영 기조를 ‘장기적 안정성을 위한 선택과 집중’이라 한다면 한국은 신속한 대안을 산출해내는 것에 익숙하다 할 수 있다.

김범수 평택대 사회복지대학원장·사회복지학과 교수 bumsk@ptu.ac.kr

 

덩치는 컸지만 식민교육 상처는 남아
학교 제도·학교 차별·서열제 등 일제 잔재 … 자율성 확대·줄 세우기 폐지 시급

 박재윤 한국교육개발원 수석연구위원 jypark@kedi.re.kr    

1910년 일본은 이미 공교육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학제 100년사’와 그 자료집을 통해 당시 교육 실태를 살펴보면 1910년(명치 43년) 전국의 소학교는 2만5910개에 달했고 교원은 15만2011명, 학생은 686만1718명이나 됐다. 뿐만 아니라 중학교 302개(학생 12만1777명), 고등여학교 193개(6만4809명), 실업학교 203개(4만372명), 고등학교 351개(6만3421명), 대학교 3개(5514명), 사범학교 80개(1만3401명) 등이 운영됐다.

반면 한국의 교육기관은 88개(1905년 당시 자료 참고)의 공립소학교와 일제 통감부에서 설립한 97개의 공립보통학교가 사실상 전부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의 교육 규모는 엄청나게 성장했다(‘표’ 참조). 하지만 한국의 인구가 1억2000만명에 달하는 일본 인구의 40% 수준이어서 규모 면에서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교육제도는 어떨까. 한국과 일본의 교육제도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내용적으론 큰 차이가 있다. 먼저 한국과 일본의 교육관계법을 보면 ‘교육기본법’이라는 같은 이름의 법이 있다. 또 일본의 ‘학교교육법’ ‘생애학습의 진흥을 위한 시책의 추진체제 등의 정비에 관한 법률’과 한국의 ‘초·중등교육법’ ‘고등교육법’ ‘평생교육법’ 등의 내용이 유사하다.

그러나 일본에는 학교교육을 제외한 조직적인 교육활동으로 사회교육에 관한 법률(‘사회교육법’)이 있는 반면, 우리나라에는 ‘평생교육법’에서 평생교육을 사회교육으로 정의할 뿐 별도의 사회교육법이 없어 법체계상 혼동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한국 교원 자격제도 vs 일본 교원 면허제도

‘고등학교’라는 제도도 양국이 유사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적지 않다. 한국의 고등학교는 종류는 많지만 대개 단일학과와 단일과정 중심의 학교로 법제화돼 있다. 반면 일본의 고등학교는 단일화돼 있는 대신, 다학과(多學科) 및 다과정(多課程)을 설치할 수 있게 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종류가 너무 많아 혼란스럽지만, 일본에서는 고등학교의 종류는 단순하고 학과나 과정이 다양할 뿐이다. 고등학교가 지역 실정이나 교육적 요구에 따라 다양한 학과나 과정을 쉽게 설치 및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한국의 고등학교 제도는 일본에 비해 낙후했다고 볼 수 있다.

초·중·고교생 성적 평가방식도 한국과 일본이 비슷해 보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뭇 다르다. 한국은 상대평가를 강력히 실시하는 데 반해, 일본은 중학교까지는 상대평가를 억제하고 있다. 교원자격과 관련해 한국은 교원 ‘자격제도’가 있고 일본은 교원 ‘면허제도’가 있다. 양자는 개념적으로 다소 다르다.

한편 한국의 공립학교 교직원은 국가공무원이지만, 일본에서 이들은 지방공무원이다. 교원의 신분은 교육의 ‘지방자치’와 관련 있는 것으로서 교원의 신분법제만 본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교육의 ‘지방자치’ 면에서 앞서 있다.

 1 서울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린 고교 입학설명회에서 학부모들이 고교선택제 시행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2 일본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은 고등학교 종류가 단일하다.

일본, 2003년 국립대학 일시에 법인화

사립학교에 대한 행정에도 한국과 일본은 차이가 있다. 한국의 사립 초·중·고교에 대한 행정은 시·도 교육청 소관이지만 일본은 시·군 등 일반 자치단체 소관으로 돼 있다. 한국의 초·중등 사립학교는 공립학교에 대해 일종의 ‘대용학교’ 기능을 하는 점에서 일본에 비해 특색이 있다.

사립학교 행정체계는 사학 교직원의 근로관계에 관한 법률 적용이나 노동조합 가입 등에 영향을 주게 되는데, 한국의 사립학교 교직원은 공립학교 교직원과 거의 같은 지위를 갖지만 일본의 사학교직원은 일반 근로관계법 적용 대상이다.

고등교육 분야에서 특히 다른 점은 일본은 이미 2003년에 전국 90여 개의 국립대학을 일시에 법인화해 소속 교직원을 모두 비(非)공무원화하고 근로관계법을 적용받는 체제로 전환한 반면, 한국은 이제 몇몇 국립대학에 시범적으로 법인화를 시도하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한국 교육이 일본보다 발전하려면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교육법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가야 한다. 아직도 존재하는 한국의 전통적인 학교운영제도나 학교차별 풍토, 그리고 각종 국가고시 등 공무원시험을 통한 출세 위주의 교육 풍토는 식민지 시대의 교육 유산으로부터 형성된 부분이 적지 않다. 식민교육의 핵심은 식민지 백성의 일부를 뽑아 통치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선발을 위해 교육이 이용된 측면이 컸다.

이러한 식민교육의 잔재로 나타난 폐단이 있다. 학교의 종류를 엄격히 구분해 학교 자체적으로 다양한 학과나 과정을 설치 및 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통이 그렇고, 대학 서열화 구조도 그러하며, 일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풍토 또한 그러하다.

앞으로 이 같은 식민지 교육제도의 잔재를 찾아내 개선하는 노력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교육법제도상 학교운영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일, 학교의 종류를 늘리는 것을 지양하는 일, 학교 간 차별 풍토를 제거하는 일 등이 우선적으로 처리돼야 할 일이다. 나아가 각급 학교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창의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한편으론 그러한 프로그램을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체제 정립이 필요하다.

 

커져라, 세져라 ‘韓流 영향력’
한국, 일본 문화 일방적 수용에서 쌍방향 발전까지 눈부신 성장

정지욱 한일문화연구소 학예연구관 nadesiko@unitel.co.kr    

 초기의 붐(boom)으로 시작된 한류가 이제는 일본 문화 속에 정착해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조인성의 군 입대 현장까지 찾아온 일본팬들.

일본에서는 1896년 11월25일 키네토스코프라는 영상장치가 처음 선보였고, 2년 후인 1898년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영화가 촬영돼 다음해에 상영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897년 지금의 서울 충무로에서 ‘활동사진’이라는 영화가 처음 상영됐다. 그리고 일본보다 20여 년 늦은 1919년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의리의 복수)’라는 영화가 한국인 김도산에 의해 만들어져 단성사에서 첫 개봉됐다. 이렇듯 한국과 일본의 영화 역사는 100여 년을 훌쩍 뛰어넘어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래프를 발명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엔 일본의 간섭 아래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면서 그들이 의도한 문화통치의 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그 기간에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조선영화사(朝映)’와 중국 만주에 세워진 ‘만주영화사(滿映)’는 한국과 중국의 영화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인 동시에 양국 영화산업 발전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1924년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진 조선키네마에 대항해 수많은 독립영화사가 세워졌지만, 조선총독부에 의해 1942년 ‘조선영화사’로 통폐합됐다. 이들 독립영화사는 광복 직후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말로 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주영화사’는 패전 후 일본으로 돌아가 도에이영화사(東映)의 기초가 되거나 홍콩 영화의 시조가 됐다.

 

쇼·드라마·광고 등서 심심찮은 표절시비

일제강점기를 경험한 한국으로선 광복 이후 일본 문화의 침략행위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1998년 일본 대중문화가 전면 개방되기 전까지 일부 국제영화제를 제외하고 일본 영화는 한국에서 상영되지 못했다. 이는 대중가요와 TV 방송 같은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한국 영화는 일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다만 일반 관객들은 일본 영화를 체험할 수 없어 그 영향과 관계에 대해 몰랐을 뿐이다. 수많은 일본 영화가 한국에서 리메이크되거나 일부 표절됐지만, 영화에 출연한 배우나 감독조차 이를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고, 어떤 경우에는 시나리오 작가만 알고 있기도 했다.

한 예로, 일본에서 1963년 제작된 나카히라 코우(中平康) 감독의 청춘영화 ‘흙탕 속의 순정(泥まみれの純情)’은 대사만 번역해 신성일과 엄앵란이 1964년에 주연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맨발의 청춘’으로 만들어졌다. 개봉 당시 수많은 관객의 심금을 울렸고,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꼽힐 만큼 인정받은 영화지만 카메라 각도, 대사, 의상 등이 원작과 동일한 표절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1997년 이진석 감독이 연출한 영화 ‘체인지’는 개봉 직전 일본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 감독의 청춘영화 ‘전교생(轉校生)’(1982)을 리메이크한 사실이 밝혀져 제작사가 서둘러 판권을 구입하는 해프닝이 벌이지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영화계뿐 아니라 대중문화계 전반에서 빚어졌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방송가에선 개편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관계자들의 부산행이 잦아지곤 했다. 일본 방송을 보면서 새롭게 꾸밀 프로그램을 궁리하기 위해서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해외여행 자유화와 일본 대중문화 개방 후에도 우리나라 방송의 일본 베끼기 행각은 줄지 않고 있다. 아직도 각종 버라이어티 쇼와 드라마는 물론, 광고까지 심심찮게 표절 의혹에 휩싸이고 있다. 특히 대중가수들의 노래, 댄스, 의상, 뮤직비디오는 그 정도가 더하다.

만화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386세대인 필자는 많은 TV 만화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러나 어린 시절 꿈과 희망을 안겨준 거의 모든 TV 만화영화, 즉 ‘타이거 마스크’ ‘마징가 Z’ 등이 죄다 일본 작품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고교시절 애국심에 불타 친구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지만, 집에 돌아와 결국 TV 앞에서 ‘은하철도 999’ 등 일본 만화영화에 열중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주말에 고정적으로 방송되던 디즈니 만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방송되는 상당수의 만화영화는 일본 작품이다.

일제강점에서 벗어난 지 65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국의 대중문화는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영향이 일방적이기만 했을까. 일본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문화적 영향을 미친 사례 또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송승헌에게 열광하는 일본 중년 여성들.

일본 문화 속 하나의 장르가 된 ‘한류’

1966년 이만희 감독이 연출한 ‘만추(晩秋)’는 1972년 사이토 고이치(齊藤耕一) 감독에 의해 ‘약속(約束)’으로 리메이크돼 그해 일본 영화 베스트 5에 올랐다. 이 작품은 한국과 미국이 글로벌 프로젝트로 현재 다시 촬영 중이며, 2010년 개봉 예정이다.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은 미이케 다카시(三池崇史) 감독의 ‘가타쿠리가의 행복(カタクリ家の幸福)’(2002)으로 리메이크됐다. 또한 이재한 감독의 ‘내 머릿속의 지우개’(2004)는 일본 원작을 리메이크한 작품으로, 일본에 역수출돼 큰 호응을 얻으면서 영화 부문에서 한류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겨울연가’로 대표되는 일본 방송가의 한류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아줌마 팬으로 시작된 한류는 ‘대장금’을 통해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현재 ‘아이리스’ ‘선덕여왕’을 통해 남북관계와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동방신기’를 비롯한 아이돌 스타들의 활동을 봐도 일본 연예계에서의 한류 자리매김 정도를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부에서는 ‘한류의 종식’을 걱정하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는 한류를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던 초기의 실수가 빚어낸 결과다. 사실 한류 시장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기의 붐(boom)으로 시작된 한류가 이제는 일본 문화 속에 정착해 하나의 장르로 굳어졌다. 붐처럼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고착된 장르로 일본 문화 속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이다.

10여 년 전 한국을 방문한, 영화 ‘철도원’과 ‘호타루’의 후루하타 야스오(降旗康男·75) 감독은 “한국 영화에는 에너지가 넘친다”며 “감독들이 장면 하나 하나를 찍을 때, 연기자들이 한 장면 한 장면을 연기할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놀라울 만치 강하다”고 극찬했다. 또 2009년 여름 한국을 찾은 일본 영화계의 원로 오바야시 노부히코(大林宣彦·71) 감독은 “한국 영화 속의 배우들은 연기가 살아 있다. 일본에선 이미 사라져 찾아볼 수 없는 눈빛 연기를 한국 배우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자고로 문화는 상호적인 활동이다. 즉,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이 주고받으며 서로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은 보완하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 문화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과 일본이 더 이상 대결의 시각으로 날을 세우지 말고, 더욱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양국이 서로 발전하면서 국제 문화무대를 아시아가 이끌어보는 것은 어떨까.

 

“인술을 배우자” 한·일 쌍방향 교류
한국, 전 국민의료보험·온라인 의료시스템 등 日보다 빨라

 남상요 유한대 보건의료행정과 교수·일본 도쿄대 보건학 박사 synam@yohan.ac.kr    

일본은 16세기 중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 의료기술을 들여왔다. 1874년 메이지유신 후에는 독일식 의료제도를 참고해 근대적인 의료제도를 수립했다. 이로써 서양식이 가미된 독특한 일본식 의료제도가 만들어졌다.

한국에 서양의학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말에 와서다.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일제에 의해 일본식 제도가 도입됐고, 의료기술은 미국 선교사들을 통해 들어왔다. 그 제도와 기술의 ‘원형’은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은 1877년 일본 해군이 부산에 설립한 제생의원(濟生醫院)이다. 여기선 해군 군의 야노(矢野義徹)가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을 대상으로 진료했다. 그 후 원산과 인천에도 병원이 생겼고, 1885년에는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인 앨런에 의해 제중원이 설립됐다.

1910년 한일강제합방 후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의료시설과 인력이 대대적으로 정비됐다. 각지엔 자혜병원, 도립병원 등 관립병원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를 주축으로 한 의료체제가 마련되면서 의료 종사자 대부분이 일본인으로 채워졌다. 1910년 당시엔 관립, 공립, 사립 등을 합쳐 100여 개의 병원이 운영됐다.

서양 의료기술의 도입 시기만 놓고 보면 1910년 당시 한·일 양국의 의료와 보건 수준 격차는 300년이 넘었다. 하지만 10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떨까. 일부 의료기술과 제도는 한국이 일본보다 낫다는 평가도 나온다.

 

1960년대 경제개발 이후 의료·보건환경 급속 발전

일제강점 당시 양국의 의료 수준 차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국가의 보건 수준을 가늠하는 지표 중 하나인 영·유아 사망률만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1926~30년 경성제국대 미즈시마 교수가 작성한 ‘조선 주민의 생명표’를 보면 출생아 1000명당 유아 사망률은 남아 252명, 여아 230명이었다. 같은 시기 일본의 유아 사망률은 남아 140명, 여아 124명에 그쳤다. 미즈시마 교수가 산출한 수치가 서울 인근의 제한된 지역 통계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국적인 격차는 더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1960년대 경제개발을 시작한 뒤 각종 의료시설이 양적으로 늘어나면서 보건·의료환경 및 체계의 일대 변혁을 맞았다. 한국은 이때부터 일본을 서서히 추격한다. 현재 국내 병원 수는 2000여 개. 한때 1만개를 넘어섰다가 병상 과잉현상에 따라 감소 추세로 돌아서 최근에는 8860개로 줄어든 일본에 비하면 4분의 1에 불과하지만 국토 면적과 인구 차이를 고려하면 괄목할 성장이다.

특히 1976년 의료보험을 도입한 지 13년 만인 1989년 의료보험제도 대상이 전 국민으로 확대되면서 기초적인 보건·의료 서비스에서도 일본 수준에 근접했다. 전 국민 대상 의료보험은 세계에서 가장 단시간에 달성한 것이다. 일본은 1927년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해 24년 만인 1951년에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국민개보험제도’를 시행했다.

한국은 이어 2000년대 김대중 정부 때 직장 및 지역 의료보험의 완전통합을 이뤘고, 심사기구를 일원화해 제도 운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호랑이 등에 날개 단 격’으로 1997년 국제 통화위기 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정보산업 육성에 힘입어 세계 정상권의 의료정보 시스템을 갖추면서 운영 프로세스 면에선 일본을 오히려 앞질렀다.

   

그중 EDI(Electronic Data Interchange·기업 등이 데이터를 효율적으로 교환하기 위해 지정한 데이터와 문서의 표준화 시스템)가 대표적인데, 이 시스템에 의한 온라인 의료보험 청구, 그리고 컴퓨터에 의한 심사와 분석이 행해지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몇 안 된다. 현재 한국에선 전국 대다수 병원이 EDI로 보험 청구를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의료보험 청구 시스템 온라인화 추진 작업이 지지부진해 온라인 청구비율이 50%대에 머물고 있다.

이러한 IT 강점에 힘입어 한국은 일본이 정착시키지 못한 의약분업 제도까지 확실하게 정착시켰다. 일본은 이미 1800년대 말에 의약분업을 추진했음에도 1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완전분업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1 일본은 산골마을에 사는 노인이라도 ‘지역포괄 케어’ 시스템을 통해 집에서 첨단 시설·장비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2 한국의 의료기술은 일본 수준에 근접하고 있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일본 여성이 지방제거 수술을 받고 있다.

의료 환경 및 기술, 일본의 80% 수준

전체적으로 보건·의료 환경 및 기술 수준에선 아직 일본이 앞선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수준은 가히 세계 최고로 평가된다. 일본은 2000년 WHO(세계보건기구)의 190개국 의료실태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뒤 줄곧 정상을 지키고 있다.

일본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국민 의료비 비중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8.9%보다 낮은 8.1%. 그리고 인구 대비 의사 수가 많지 않은 편인데도 일본 국민의 평균수명은 OECD 국가 중 가장 길다. 또 신생아 사망률은 낮고 자유 진료 접근도와 환자의 만족도는 높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비해 한국의 의료 환경 및 기술은 일본, 미국 등 선진국의 80% 수준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국도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에 힘입어 국민 의료비 지출 비중이 낮다. 2007년 한국의 영·유아 사망률은 1000명당 4.1명으로 100년 전보다 100배 감소했다. 일본의 2.1명에는 못 미치지만, 캐나다보다 적고 영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선 것.

의료기술 수준을 대변하는 첨단장비 보유 수준도 세계 10위권 안에 진입하는 놀라운 성장을 이뤘다. 특히 방사선 영상 진단장치를 통해 얻은 영상을 디지털 상태로 획득·저장해 그 판독과 진료기록을 각 단말기로 전송, 검색이 가능케 한 ‘의료영상 저장·전송 시스템(Picture Archiving Communication System)’은 정부의 인센티브 정책에 힘입어 일본보다 높은 보급률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과거 보건·의료 분야에서 한·일 간 교류는 일본이 주도했다. 그러나 최근엔 역으로 일본 내에 한국 의료 벤치마킹 붐이 확산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일본의 의료 관계자들이 EDI 시스템, 의료보험 통합과 의약분업 현황을 살피기 위해 한국의 병원을 견학하는 일이 잦을 정도.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이제 이처럼 일방향이 아닌 쌍방향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결코 질 수 없는 ‘숙명의 라이벌’
실력과 기량 엇비슷 외나무 승부 … 스포츠 저변과 시장규모에선 한국 열세  
 

숙적(宿敵). 정치,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한·일 관계를 비유하는 표현은 순화되고 있지만 유독 서로를 ‘적’이라 칭하는 분야가 있다. 바로 스포츠다. 두 나라는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 종목별 세계선수권 등 스포츠 대회 때마다 치열한 외나무다리 승부를 벌여왔다. 일찍이 근대 스포츠의 문을 두드리고 저변 확대를 꾀한 일본은 1980년대 초반까지 기초종목, 일부 구기종목 등 거의 전 종목에서 한국보다 우위를 차지했다. 1964년엔 올림픽(도쿄)까지 개최했다. 그러나 한국은 태릉선수촌 중심의 엘리트 스포츠 집중투자에 힘입어 1984년 LA올림픽을 기점으로 일본과 대등하게 맞섰다. 1988년엔 서울올림픽을 개최했고, 그 대회부터 전체 성적에서 일본을 추월했다. 축구에서는 월드컵 본선 8회 진출로 일본(4회)을 압도했다. 레슬링·복싱 같은 투기종목이나 양궁 그리고 하키·핸드볼·탁구 등 일부 구기종목에서 확실한 비교우위를 보이며, 유도에서도 종주국 일본의 질주를 무너뜨렸다. 중국에 이은 아시아 2위 자리를 놓고 다투는 한·일 양국은 이제 실력과 기량에서 백중세의 형국이다. 하지만 스포츠 저변과 시장규모에선 한국이 일본에 커다란 열세를 보이고 있다. 동계 종목에선 일본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열악하다. 종목별 한·일 ‘스포츠 국력’을 비교해봤다.

1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에선 한국 대표팀이 최강 라인업으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을 두 차례나 꺾으며 금메달을 따냈다. 2 일본 프로야구의 심장부 도쿄돔.

야구

대표팀 간 실력 대등한 수준 … 日, 프로리그 수준과 선수층에서 韓 압도

1990년대 한일 슈퍼게임에서 참담한 결과를 맛봤던 한국 야구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09년 제2회 WBC에서 일본을 상대로 뛰어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세계 야구의 주류로 우뚝 섰다. 그러나 1~2회 WBC 대표팀 사령탑을 맡은 김인식 감독(현 한화 고문)의 평가는 냉정하다. 그는 “이제 한국은 대표팀 간 경기에서 일본과 거의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다”면서도 “우리는 이런 대표팀을 한 개밖에 만들지 못하지만, 일본은 3~4개는 쉽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일본이 여전히 우위에 있음을 인정했다.

국가 간 프로리그 격차는 경기력과 산업화 수준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김 감독의 말대로 한·일 야구의 실력은 외견상 비슷하지만, 저변이나 시장규모를 따져보면 아직 격차가 크다. 양국이 최근 몇 년간 국제대회에서 엇비슷한 승부를 벌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야구는 이변이 많은 종목이라, 여러 번 경기를 해봐야 수준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다. 단기전인 국제대회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아직 타자나 투수들의 기본기, 경기 운영, 세밀한 플레이에서 일본 선수들이 한 수 위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선수층도 일본이 두텁다. 2009년 11월 한일 클럽챔피언십에서 한국의 KIA와 일본의 요미우리가 붙었는데, 결과는 KIA의 ‘접전 후 완패’였다. 승부의 핵심은 중간계투진이었다. 이승엽(요미우리)은 “국내에서는 중간계투진을 상대로 타율도 올리고 했는데, 일본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그만큼 일본의 선수층이 두텁다”며 혀를 내둘렀다.

프로 선수층의 차이는 곧 아마추어팀들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팀 수에서부터 차이가 크다. 일본 고교팀은 4000여 개인 데 비해 우리는 50여 개에 불과하다. 일본 프로구단들은 이 중에서 선수를 고르고 골라 프로 유니폼을 입힌다. 여기에다 실업야구, 독립리그까지 있어 수급 자원이 넘쳐난다. 그러나 한국은 한 해 600명 이상의 ‘야구 실업자’를 양산한다.

산업화지수도 차이를 보인다. 한국은 지난해 600만명 가까운 관중을 동원했다. 사상 최다였다. 그러나 일본은 4배 가까운 2240만명에 달했다. 인구 규모를 감안해도 한국은 인구 8명당 1명, 일본은 5명당 1명꼴로 야구장을 찾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인프라다. 일본의 돔구장은 6개. 우리는 프로구장이 7개인데, 그중 대구·광주·대전·서울 목동구장의 시설은 프로팀이 사용하는 구장이라기엔 창피할 정도다. 일본은 도처에 야구공원이 있어 남녀노소가 일상적으로 야구를 즐길 수 있다. 미래 팬들의 확보와 스타 마케팅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구조다.

한 야구인은 “타율 2할대 초반의 선수가 노력하면 2할9푼대까지는 갈 수 있다. 그러나 2할9푼에서 3할로 끌어올리기는 정말 어렵다”며 “현재 한국 야구와 일본 야구는 2할9푼과 3할의 차이로 볼 수 있다”고 비유했다.

윤승옥 스포츠서울 야구팀 기자 touch@sportsseoul.com

한·일 프로스포츠 비교
J리그 관중, K리그 2배…한국 여자골퍼 압도적 우세


1983년 창설된 한국 프로축구 K리그에는 15개 팀이, 2부 격인 내셔널리그에는 14개 팀이 있다. 반면 우리보다 10년 늦은 1993년에 출범한 일본 프로축구 J리그는 1부와 2부에 각각 18개 팀이 포진해 있고 1, 2부 승강제까지 도입됐다. 1부만 놓고 보면 J리그가 K리그보다 3개 팀 많지만, J리그는 2009년 한 해 585만명의 관중을 불러들여 281명만이 경기장을 찾은 K리그보다 2배 이상 많은 관중동원을 기록했다. 경기당 평균관중 수에도 J리그가 1만9126명으로 K리그(1만983명)보다 2배가량 많다. 1년 리그 예산 면에서는 시장 격차가 더 크다. J리그는 2008년에 1103억원을 책정했는데, 이는 당시 K리그 예산보다 약 10배 많은 수치다.
한국 여자프로골프(KLPGA)는 22개 대회에 총상금 110억원의 규모로 진행됐다. 이에 비해 일본 여자프로골프(JLPGA)는 31개 대회가 열렸는데 매 대회 평균상금이 15억원으로 대회 평균 약 5억원의 상금이 걸린 KLPGA보다 3배가 많다. 70년 역사의 일본 골프는 남녀 프로 모두 대회 및 상금 규모에서 한국보다 훨씬 크고, 골프 인프라에서도 앞서 있다.
프로농구도 일본 남자팀이 13개 팀(BJ리그)으로 한국보다 3개 팀이 많고, 여자팀이 8개 팀으로 한국보다 2개 팀 더 많다. 일본에서 프로농구보다 인기가 많은 프로배구는 1부(프리미어리그)에 남녀 각각 8개 팀, 2부는 남녀 각각 11개 및 12개 팀으로 구성돼 있다. 반면 2부 리그가 없는 한국 프로배구는 남녀 각각 7개 팀과 5개 팀이다. 그나마 7팀에서 한 팀은 초청팀인 국군 상무팀이다.
시장규모 면에서는 모든 종목에서 일본이 한국 프로스포츠 시장보다 월등히 앞서지만, 실력 면에서는 야구를 제외하면 한국이 약간 우세하다. 축구의 경우 프로만의 대결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최근 2년간 열린 한일 올스타전 대결에서는 1승1패로 맞서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통한 양국 프로팀 간 대결에서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러나 양팀 대표팀 간 역대 전적에서는 한국이 훨씬 앞선다. 국가대표와 청소년대표(U-19, U-20) 모두 역대 전적에서 각각 38승20무12패, 25승7무5패로 앞서 있으며, 올림픽대표 간 대결에서는 4승4무3패로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 대표팀은 1990년대 이후 부쩍 성장해 역대 전적으로만 우위를 평가하는 것은 어렵다. 오히려 일본 국가대표팀은 1998년 월드컵 이후 월드컵 3회 연속 진출을 이뤄냈고 2000년, 2004년 아시안컵에서 2회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1999년 U-19 세계청소년대회에선 결승까지 올랐다.
여자 프로골프에서는 세계 최강 한국 골퍼들이 일본 골퍼들을 단연 리드하고 있다. 한국 여전사들은 역대 한일 프로 대항전에서 5승1무3패로 앞서 있으며, 2009년 미국 LPGA에서 11승을 합작해 1승에 그친 일본을 압도했다.
한국 남자 프로농구는 2006년부터 열린 한일 챔피언전에서 역대 전적 5승3패로 우위를 보였고, 여자 프로농구는 2002년 시작된 한일 W리그 챔피언십에서 11전 전승의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 중이다. 역대 국가대표 간 경기에서도 한국이 늘 일본에 한 수 위의 경기력을 보여왔다. 2006년부터 양국 프로배구 우승팀 간 벌여온 한일배구 톱 매치에서는 한국 남자팀이 2승1패, 여자팀이 1승2패로 총 전적 3승3패의 대등한 양상. 하지만 최근 국가대표 간 경기에서는 한국이 일본에 다소 밀리는 형국이다.
이재철 스포츠 자유기고가 kevinjlee7@nate.com

   

일본의 한 초등학교 수영장. 군국주의를 요체로 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기초체력 육성이라는 과제를 떠안았고, 수영 등을 기본 소양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일본 수영의 탄탄한 토양은 여기서부터 다져졌다.

수영

일본은 박태환에만 의존하는 한국의 롤모델

2008년 베이징올림픽. 박태환(20·단국대)은 한국 수영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박태환이 우승한 남자자유형 400m는 체격 조건이 불리한 아시아 선수에게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아시아 선수가 올림픽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이후 처음이다.

한국보다 72년 먼저 자유형 세계 정상을 밟은 아시아 국가는 바로 일본이다. 데라다 노보루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자유형 1500m를 석권한 것. 일본은 이에 앞서 1928년 암스테르담올림픽에서 첫 수영(평형) 금메달을 따낸 이후, 1932년 LA올림픽(금5·은5·동2)과 1936년 베를린올림픽(금4·은2·동5)을 거치며 수영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일본의 수영 스타는 국민적 영웅이다. 1940년대 ‘후지산 날치’ 후루하시 히로노신은 남자자유형 중장거리 세계 기록을 33번이나 경신하며 전후(戰後) 절망에 빠진 일본 국민에게 위안을 줬다. 재일본 대한수영연맹 김일파 회장은 “일본은 1920~30년대부터 국가적 시책으로 수영을 육성했다”고 말했다. 군국주의를 요체로 하는 근대화 과정에서 학교는 기초체력 육성이라는 과제를 떠안았고, 수영 등을 기본 소양으로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국제대회에서 일본 선수들의 낭보가 더해지면서 열도의 수영 열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오랜 전통을 가진 일본 수영은 일단 저변에서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등록선수는 2700여 명. 반면 일본의 등록선수는 11만명이다. 준(準)선수급 마스터스만 4만8000명이다. 매년 3월과 8월 열리는 전 일본 초등학교 수영대회에는 기준기록을 통과한 선수만 5500여 명이 출전한다. 이 기준기록은 한국의 소년체전 결선 출전기록 수준. 김 회장은 “정규 교육을 받은 일본인 중 수영을 못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튼튼한 토양 위에서 일본은 역대 올림픽에서 무려 62개(금20·은22·동20)의 메달을 땄다. 일본수영연맹은 연간 예산만 140억원에 이르는 체육단체로 성장했다.

하지만 일본 수영에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64년 도쿄올림픽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일본 수영은 동메달 1개에 머물러 충격을 받았다. 일본수영연맹은 정책적으로 수영클럽을 육성했다. 미국, 호주 등 수영 선진국은 대부분의 선수가 클럽 중심으로 훈련한다. 현재 일본에는 2000여 개의 수영클럽이 성황을 이루고 있다. 대한수영연맹 정일청 전무는 “한국도 지방 외에는 클럽 중심으로 가고 있다”며 “서울에만 전문선수를 육성하는 클럽이 7~8개 있다”고 했다. 경영대표팀 노민상 감독이 일곱 살 난 박태환을 발굴한 곳도 사설체육센터였다.

1994년 일본수영연맹은 ‘수영발전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랭킹 진입에 따른 인센티브 지급과 파벌을 제외한 기록 중심 선수 선발, 훈련방법의 과학화 등이 주 내용이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기타지마 고스케 등이 금3·은1·동4의 성적을 오리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박태환에 의존하는 한국 수영의 롤모델은 이웃 일본이다.

전영희 스포츠동아 기자 setupman@donga.com

   

일본은 육상에서 이미 세계 수준으로 도약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110m 허들 예선에서 질주하는 일본의 나이토 마사토(오른쪽).

육상

실력, 지원, 관리 시스템 모두 일본과 ‘비교 불가’

기초 스포츠 종목의 대표 격인 육상은 국가 간 스포츠 경쟁력을 비교하는 절대적 잣대다. 한국과 일본은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늘 순위경쟁을 벌인다. 그러나 육상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둔 한국 육상의 현실은 한마디로 암울하다. 일본과 비교해도 참담한 현실은 그대로 드러난다.

세계선수권 및 올림픽 정식종목 47개(남 24, 여 23개)를 기준으로 한국 기록이 일본 기록을 앞선 것은 남자 800m, 높이뛰기, 포환던지기 3개 종목뿐이다. 여자 종목은 하나도 없다. 남자 800m는 이진일이 1994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육상경기대회 때 세운 1분44초14(일본 1분46초16·2009년)가 15년째 깨지지 않고, 남자 높이뛰기도 이진일이 1997년 종별선수권대회에서 세운 2.34m(일본 2.33m·2006년)가 아직도 난공불락이다. 그나마 2008년 황인성이 세운 남자 포환던지기 18.66m(일본 18.64m·2009년)가 최신 기록.

일본 육상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향해 도약하고 있다. 일본은 남자 24개 종목 중 200m에서 수에쓰구 신고가 20초3의 아시아 기록을 세우는 등 6개 아시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여자 종목에서는 2005년 베를린 마라톤에서 노구치 미즈키(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2시간19분12초의 아시아 기록을 작성했다.

일본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 4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9년 8월 열린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남자 400m 계주에서 4위를 차지해 세계 정상에 한발 다가섰다. 세계선수권 남자마라톤에선 사토 아쓰시가 2시간12분5초로 은메달을 땄고,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한국은 단 하나의 아시아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은 9개 종목 19명의 선수를 출전시켰지만 전원 예선 탈락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시스템이 만들어낸 차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본은 중·고교 등록선수가 20만명을 넘는다. 한국은 고작 3000명도 안 된다. 일본 인구가 한국보다 3배쯤 많다는 점을 감안해도 너무 큰 차이다. 일본에선 이른바 ‘직업선수’가 아니어도 모든 학생이 육상을 즐긴다. 반이나 학교에서 잘 달리면 언제나 지역대회, 전국대회에 출전할 수 있다. 사회체육을 기반으로 이렇듯 저변을 다져놓았기에 일본육상경기연맹의 체계적인 선수관리 시스템이 가능했다.

한국에서는 지도자들이 사실상 강제적으로 발탁한 소수가 육상을 한다. 저변이 형편없이 얕다. 그러니 ‘잘난’ 선수 한 명이 특정 종목을 장기 집권하는 현상이 자주 나온다. 선수는 없는데 전국체전에서 성적을 내려는 지방자치단체가 많다 보니 선수의 ‘몸값’은 일본의 그것을 뛰어넘는다. 전국체전 입상 가능 선수는 계약금 5000만~8000만원에 연봉 5000만~8000만원을 받는다. 특급 선수는 계약금 2억5000만원에 연봉 1억원은 기본. 이런 ‘배부른 돼지’를 키우는 구조이다 보니 남자 100m 한국 기록(10초34)이 30년째 깨지지 않는다. 전국체전이 한국 육상을 망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은 아테네올림픽 여자마라톤 금메달리스트 노구치가 연봉 3000만 엔을 받았다. 한화로 치면 약 3억9000만원으로 크게 보이지만, 환율이 약 13배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한국보다 많은 게 아니다. 일본 실업선수 연봉 평균은 2000만~3000만 엔. 계약금은 없다. 대신 회사에서 정년을 보장한다. 선수들은 은퇴할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1년 반 앞으로 다가왔는데 대한육상경기연맹은 전국체전에 길들여진 배부른 선수들을 배고픈 ‘맹수’로 탈바꿈시킬 방법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더 암울하다.

양종구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yjongk@donga.com

 

“보수적 일본, 높은 시민의식 배울 만”
지일파 최상용 前 주일대사 “서로를 필요로 하는 두 나라 미래 낙관”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2001년 4월10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주일대사를 전격 소환했다가 열흘 만에 귀임시킨 일은 한·일 정치외교사에서 유명한 일화다. 일본이 문부성 검정 역사교과서를 축소, 왜곡하려고 하자 전례 없이 강력하게 항의를 표시한 것. 당시 주일대사가 바로 최상용(67·사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겸 희망제작소 상임고문이다.

최 고문은 대표적인 지일파다. 서울대 외교학과 출신인 그는 서양정치철학이 전공이지만 석·박사 학위를 일본 도쿄대에서 받았다. 그 후 국내 주요 대학에 적을 두고 도쿄대 초빙교수, 미국 하버드대 일본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일본과 지속적으로 연을 맺어왔다. 한일 대중문화 개방에 앞장서 일본에 ‘한류’ 바람의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에게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의 의미와 일본은 어떤 나라이며 일본인은 누구인지, 한국과 한국인은 그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할지, 그리고 한일관계의 현재와 미래 등에 대해 들어봤다.

경술국치는 우리나라에 어떤 의미가 있는 사건인가.

“한·중·일 동북아 3국이 외부세력의 압력에 대응하는 과정, 즉 산업화와 근대화 경쟁에서 일본이 앞선 결과다. 중국은 산업화와 근대화에 앞선 일본의 침략전쟁에다 서구 열강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반(半)식민지화했고, 우리는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했다. 외압에 대한 대응에서 우리가 가장 실패한 것이다. 그 결과가 1910년 한일(강제)병합조약이다.”

학계에서는 ‘식민지 발전론’과 ‘식민지 수탈론’이 맞서고 있는데.

“유네스코 헌장이나 세계사의 보편적 합의에서 ‘식민지주의’는 나쁜 것으로 돼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식민통치에는 근대화의 역할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식민지 근대화론이 결코 식민통치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식민지 수탈론자들도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측면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 확인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100년 전의 한일관계와 지금의 한일관계를 비교한다면.

“100년 전 한국과 일본은 철저히 피해자와 가해자, 피지배자와 지배자의 관계였다. 1945년부터 한일수교가 이뤄진 65년까지는 무(無)국교 시대였다. 20년간 아무런 교류가 없었다. 양국 간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된 것은 1998년 우리나라가 일본의 대중문화를 개방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러면서 일본에 ‘한류’붐이 일었고, 시민 간 교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2005년은 ‘한일 우정의 해’였다. 그해 역사왜곡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 정부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지만, 양국에서 무려 750건의 문화행사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최근 여론조사에서 일본인의 한국 선호도가 63%에 달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된 직후엔 1년에

1만명 정도가 양국을 오갔지만, 지금은 하루에 1만3000여 명이 교류하고 있다. 그만큼 양국관계가 발전했다.”

일본은 어떤 나라라고 생각하나.

“일본은 한마디로 ‘연속성의 국가’ ‘보수적인, 너무나 보수적인 국가’다. 역사를 보는 큰 틀이 ‘연속성’과 ‘변화’다. 상대적인 이 두 개념 가운데 연속성을 중시하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하나의 왕조가 1500년간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나라는 지구상에 일본뿐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 사람들이 역사의 연속성을 자랑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일본이 전통과 문화를 잘 보존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니 당연히 진보나 혁명보다 보수가 강하다. 전통, 문화, 제도 모든 분야에서 보수적인 국가다. 간혹 일본 정치가 보수화한다든지, 우경화한다는 말을 하는데 더 이상 보수화할 것도, 우경화할 것도 없는 나라다.”

그에 비하면 한국은.

“우리나라는 신라에서 고려로, 다시 조선으로 큰 왕조의 변화가 있었다. 엄청난 역성혁명을 통해서다. 연속성보다 변화의 국가다. 민주주의 성취과정을 봐도 그렇다. 일본과 한국은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민주국가다. 일본은 시민혁명의 경험이 없다. 메이지유신의 ‘유신’은 영어로 ‘restoration(복원)’이다. 권력과 권위가 없던 천황에게 이를 복원시킨 것이다. 메이지 천황이 일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과 권위를 독점했고, 이런 천황을 정점으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서양 민주주의를 배웠다. 일본 민주주의는 학습 민주주의다. 쟁취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연속성에 뿌리를 두고 서구 민주주의를 일본 나름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반면 우리는 30년간 피 흘리면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나라다.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피 흘리며 쟁취한 나라는 우리뿐이다. 동학혁명, 3·1운동,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준(準)시민혁명이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났다. 그게 일본과 한국의 차이다.”

   

근본적으로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의 국민성에도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

“일본 사람을 ‘내향적 유형’, 한국 사람을 ‘외향적 유형’으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있다. 기질, 행동방식의 패턴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추진력이 놀랍고 결단도 빠르다. 그 대신 실수가 잦다. 반면 일본 사람들은 매사 철저해 실수가 적을지는 몰라도, 추진력이 약하다. 또 하나는 ‘문인정치’와 ‘무사정치’의 차이다. 이 차이의 경계는 바로 과거제도다. 한국은 이를 채용했다. 오늘까지 ‘사서삼경’을 읽던 사람이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바로 내일부터 정치를 해야 한다. 학문과 정치가 연결돼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제도를 채택하지 않은 일본은 완전히 단절돼 있다. 지식인의 정치참여가 거의 없다. 따라서 양국의 정치적 성향도 크게 다르다. 한국은 명분을 내세우고 이론투쟁을 벌인다. 힘에 이념까지 실리면 타협이 쉽게 되지 않는다. 이념성향이 적고 칼을 중시하는 일본은 승부가 분명하다. 타협도 쉽다.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서로 다른 만큼 서로 배워가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한국 사람이 일본 사람보다 많이 부족하지 않나.

“일본 사람들의 규범과 규칙, 태도는 문화적 쇼크를 느낄 정도로 우리와 차이가 크다. 늘 겸손하고 규칙을 잘 지킨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우열의 문제는 아니지만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 우리 국민의 지적 수준은 상당히 높다. 그러나 민주의식과 시민의식은 많이 떨어진다. 적극적이고 추진력 있는 한국 사람들이 겸손함과 남에 대한 배려까지 갖춘다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한일관계를 전망해본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조심스럽지만 낙관한다. 두 나라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한국을 뺀 일본은 대중, 대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반면 한국과 협력하면 시너지 효과가 훨씬 클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본과 협력해야 대중관계에 힘이 실린다. 두 나라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도 조심스러운 이유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독도’ ‘역사교과서’ ‘야스쿠니 신사 참배’ 세 가지다. 하지만 이 문제들도 해결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는 이미 해답이 나와 있다. 일본의 대표적 보수논객인 와타나베 쓰네오(‘요미우리신문’ 주필 겸 회장)와 대표적인 보수정치가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는 물론, 현 민주당 내각의 주요 정치인들 대부분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있다. 역사교과서는 역사적인 사실 확인 문제와 해석 문제, 두 가지다. 무엇보다 사실 확인 작업이 중요하다. 일본도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해석에서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우리 국민이 만족할 만한 최선의 답은 없다. 우리의 실효지배를 포함한 평화적인 현상유지가 차선이다. 한국은 일본이 자극하는 만큼만 반응하면 된다. 현 하토야마 내각은 일본 내에서도 그나마 합리적인 집단이다. 이들을 자극하거나 궁지에 몰지 않으면서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문제에 관한 쟁점을 해결하는 데 현 하토야마 내각은 우리가 일본의 현실에서 기대할 수 있는 양질의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새로운 100년을 시작하는 한일 양국 지도자들의 사려와 용기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한국의 문화 DNA, 일본이 벤치마킹”
지한파 호사카 유지 교수 “유교사상은 물론, 기업들도 한국 따라하기”
엄상현 기자 gangpen@donga.com
   

‘우리역사 독도’(2009), ‘일본 古지도에도 독도 없다’(2005), ‘일본에 절대 당하지 마라’(2005), ‘일본에게 절대 당하지 마라’(2002)….

일본에 비판적인 한국인이 쓴 책이 아니다. 아니, 7년 전에 귀화했으니 한국인인 건 맞다. 하지만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 쓴 책이다. 세종대 교양학부 호사카 유지(53·사진) 교수가 그 주인공.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보적인 독도 전문가다. 1988년 고려대로 어학연수를 왔다가 정치학으로 전공을 돌려 석·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한국에 눌러앉은 뒤 올해로 22년째다.

그 사이 “법적, 문화적으로 한국 사람이 다 됐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는 매년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때 일주일씩 일본에 다녀오는 것을 빼고는 줄곧 한국에서 산다. 그렇다고 일본과 무관하지는 않다. 그의 전공이 ‘일본지역학’이다. 특히 한일관계에서 가장 민감한 ‘독도’가 그의 부전공이다.

그에게 일본은 어쩌면 애증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눈에 한일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그리고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과 한국의 모습을 그는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12월 마지막 주 월요일(28일), 마침 일본에 다녀온 호사카 교수를 세종대 교수실에서 만났다. 먼저 경술국치가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지에 대해 물었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도움이 됐다는 소위 ‘식민지 발전론’에 나는 반대한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의 외형적인 발전이 있었다고 해도 이는 한국에 사는 일본 사람들을 위한 것이지, 한반도나 한국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정책만 봐도 그렇다. 일본 사람들에게는 고도의 기술교육을 가르친 반면, 한국 사람들에게는 보조기술만 가르쳤을 뿐이다. 일본이 패전 후 한국을 떠나면서 남기고 간 시설이나 기계를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만 봐도 그렇다. 일본이 한국을 발전시켰다면 광복 직후 세계 최하위의 극빈국으로 전락할 수 있었겠나. 또 하나는 ‘식민지 수탈론’인데, 나는 여기에도 전면적으로 찬성하진 않는다. 큰 틀에선 맞는 주장이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아서 누구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분석하고 증명해야 한다.”

100년 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뭐라고 보나.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다. 100년 전과는 위신이 다르지만, 지금도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고 6자회담을 통해 주변 열강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처지다. 또 지금 논의가 시작되고 있는 동북아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패권을 다툴 가능성이 큰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재자, 균형자 노릇도 해야 한다. 하지만 100년 전엔 그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은 망하고 일본은 전쟁을 일으키게 됐다.”

오랜 기간 한국에서 살아오면서 한국은 어떤 나라라고 느꼈나.

“분단이라는 현실이 한국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무척 크다. 사람들도 늘 불안요소를 안고 사는 것 같다. 한국 기업의 주가가 실적이나 가치만큼 올라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분단 현실을 잊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게 늘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당장 눈앞에 좋은 것이 있으면 서로 차지하려고 싸운다. 이런 이유로 성급한 성격이 형성된 게 아닐까.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예의를 잘 지키고 정이 많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분단돼 있지도 않고 외부의 침략도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대한 계획을 쉽게 세운다.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나고 글로벌 경제시대라 불안한 면이 없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열심히 살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요즘 일본 사회는 전체적으로 가치관이 붕괴됐다. 위아래 권위가 없고, 정신적 질서도 사라졌다. 누군가 조금만 잘못하면 엄청난 지탄을 쏟아붓는다. 총리가 자주 바뀌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한국에는 삼강오륜 같은 유교적 가치관이 규범으로 통하지만, 일본에선 상식으로만 남아 있다. 일본에선 효도도 더 이상 규범이 아니라 상식이다. 여러 사정으로 효도를 못해도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공공질서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한국 사람보다 일본 사람이 낫지 않나.

“일본에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규범이다. 그런 점은 한국 사람들이 배워야 한다. 일본 공항에선 검색대 앞까지 카트를 끌고 가면 안 되는데, 이를 어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한국에서 운전을 하다 보면 끼어들기를 잘한다. 이런 것은 질서를 파괴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다. 일본에서 함부로 끼어들기를 했다가는 사람들이 다 차를 세워놓고 비난한다.”

일본에서 한류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일본 것보다 훨씬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토야마 총리도 드라마 ‘이산’ 팬이다. ‘나도 정조 같은 정치를 하겠다’고 말할 정도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는 일본 드라마,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랑 얘기와 액션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일본 드라마와 영화의 사랑 얘기는 매우 표면적이다. 일본 사람들은 목숨을 건 사랑이라는 것을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재발견했다. 그래서 욘사마 열풍이 분 것이다. 액션 장면도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훨씬 강력하다. 일본에서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장면이 많다. 여기에 가족을 생각하고, 예의바름과 남을 먼저 생각하는 내용이 일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최근 또다시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일 양국이 마찰을 빚고 있다. 현재의 한일관계를 어떻게 보나.

“큰 틀에서 이명박 정부와 하토야마 정부는 우호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독도 문제가 뇌관으로 남아 있다. 이번 일본 고등학교 해설서의 독도 기술 문제를 놓고 하토야마 정부가 상당히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결국 독도를 표기하는 대신 ‘중학교 해설서에 입각해서’라는 말을 넣어 사실상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내용을 포함시켰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하토야마 정부는 선거공약을 많이 수정하면서 자민당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는 등 어려움에 처해 있다. 아마도 이런 국내 상황이 반영된 결과가 아닌가 싶다.

하토야마 정부는 기본적으로 자민당 정부와 자세가 다르다. 동북아 문제든, 역사 문제든 한국 정부와 신중하게 논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최근 동아시아공동체를 만들자고 먼저 말을 꺼낸 것도 하토야마 총리다. 야스쿠니 신사에도 안 간다고 했고, 한·중·일 공동 역사교재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하토야마 총리다. 그런 일본 정부에게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인정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하토야마 정권은 무너진다. 독도는 이제 역사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일관계를 어떻게 전망하나.

“지금까지는 한국이 일본에게 배우는 부분이 많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유교사상을 배우려는 일본 사람들이 늘고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이제 일본 기업들이 한국의 삼성과 LG를 벤치마킹하고 있다. 하토야마 총리가 정책을 관료 중심에서 정치인 중심으로 바꾸려는 것도 한국의 정치를 따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양국관계는 더 좋아질 것이다. 한일관계는 대립하는 것보다 협력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다.”

 

2002 월드컵, 협력과 경쟁의 추억
유치 전부터 대회 끝날 때까지 신경전 … 2022년 단독 개최 꿈 이루나

 이웅현 도쿄대 박사·국제정치 칼럼니스트 zvezda@korea.ac.kr    

2002 월드컵 개막식. 오랜 악연 때문에 감정의 공유가 불가능할 듯하던 두 나라가 낙심으로 시작해 환희로 끝맺는 드문 공감대를 형성한 시기였다.

한국과 일본이 강화도에서 불행한 만남(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가진 지 꼭 120주년이 되던 1996년 5월31일. 알프스 산맥 저편의 호반 도시 취리히에서 타전된 소식이 지구 반대편 동쪽 끝 두 나라의 2억 인구를 실망스러운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을 바라보며 역시 침묵 속에서 선망의 눈길만 보내야 했던 중국의 13억 인구를 포함하면,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순간적이긴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적 패닉 상태에 빠졌다.

2002년 월드컵 본선 한일 공동개최. 한국인들은 (1966년의 북한을 포함해) 월드컵 본선에 5번이나 진출한 ‘축구 민족’이 왜 그때껏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나라와 축제를 준비해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일본인들은 축구의 국제화에서 한발 앞서나간 경제대국이 왜 뒤늦게 유치전에 뛰어든 발전도상국과 함께 호스트가 돼야 하는지 불만스러워했다. 본선 진출 횟수와 축구의 세계화, 경제의 선진화로 치면 월드컵대회 본선은 남미와 유럽이 독점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두 나라는 애써 외면했다.

강자에 편승 전략 vs 잠재적 2인자 규합

사단은 그보다 10년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아벨랑제의 입에서 시작됐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이 FIFA의 제왕은 2002년 월드컵을 아시아에서 열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분명 일본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홍콩과의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패배하고 전국적인 소요사태를 경험한 중국이 바로 그해부터 축구 선진화에 박차를 가했고, 역시 이 대회 아시아 지역예선 최종 라운드에서 일본을 연거푸 격파한 한국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32년 만에 본선 무대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보지 못했다.

‘긴 것에는 감겨줘라’(강자를 존경하고 따르라는 의미)는 속담에 충실한 일본은 즉각 아벨랑제에 편승했다. 이는 국제무대에서 강자에 편승하는 일본의 외교 스타일을 따른 것이나 다름없다. 옛 일본은 1902년 당대의 세계 제국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1939년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처럼 보이자 이듬해 “버스를 놓치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독일을 친구로 삼았다. 패전 후 일본의 성공 배경에도 미국이라는 힘센 친구가 있었다. 일본은 FIFA의 ‘긴 것’에 휘감겨들면서 1991년 대회 유치를 공식 선언했고, 1993년에는 J리그의 돛을 높이 올렸다.

축구에 관한 한 아시아의 전통적 ‘맹주’임을 자부하던 한국은 일본보다 2년 늦은 1993년 대회유치위원회를 만들었고, 스포츠신문 기자들은 한국의 프로축구리그를 일본의 그것에 빗대 K리그(정식 명칭이 된 것은 1998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의 외교적 선택은 당연히 ‘잠재적 2인자들’의 규합이었다. 유럽축구연맹의 요한슨 회장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표들을 끌어모으면서 한국은 강자 독식의 국제무대에 새로운 외교실험과 학습을 병행해 나아갔다. 아벨랑제는 이러한 행위가 “FIFA를 깨는 짓”이라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FIFA의 1인자도 결국 기울어진 균형추 앞에 굴복했고, FIFA는 사상 초유의 월드컵 본선대회 아시아 개최, 그것도 공동개최를 결정했다.

‘절반의 성공’에서 공동의 승리로

독식을 희망하던 일본에는 ‘절반의 실패’ 또는 “최악의 시나리오”(모리 겐지, J리그 회장)였다. 뒤늦게 뛰어든 한국으로서는 사실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구원(舊怨)의 경쟁국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근대화의 선발주자와 후발주자로서 1876년 첫 만남을 가진 두 나라 사이에 남은 것은 불쾌한 기억뿐이었다. 120년 동안 경쟁의 즐거움보다는 독주(獨走)와 완승만 좇던 두 나라는 그럼에도 서로 다른 외교 스타일을 견지한 끝에 1996년 선의의 경쟁과 화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반의 승리’가 아닌 ‘공동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미증유의 월드컵 본선대회 공동개최를 성공으로 이끌고자 이후 2002년까지 한국은 6000만 달러를, 일본은 7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건전한 경쟁과 협력을 위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개최하는 그해까지 신경전도 그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대회 명칭에 어느 나라가 앞에 와야 하는지를 두고 벌인 첫 신경전에서는 한국이 승리했다. 곧 이은 결승전 유치전에서는 일본이 승리했다. FIFA의 공동개최 홍보사진에 나타난 축구경기장 조감도가 ‘일(日)’자를 연상케 한다며 한국이 항의하기도 했다. 영국의 ITV가 월드컵 뉴스 보도의 테마뮤직으로 일본을 소재로 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어떤 갠 날’을 쓰려 한다는 소식에 영국의 한국인들이 분노했다.

그럼에도 1996~2002년의 6년은 오랜 악연 때문에 감정의 공유가 불가능할 듯하던 두 나라가 낙심으로 시작해 환희로 끝맺는 드문 공감대를 형성한 시기였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이라크전 추가시간에 터진 오만 자파르의 동점골 덕분에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짓자(상자기사 참조), ‘도하의 비극’ ‘카타르의 기적’이라며 경쟁의식과 경멸을 감추지 않던 두 나라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함께 가자! 프랑스로’라는 공동의 구호를 내걸었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박지성이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고 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의 4강 진입은 축구의 ‘탈아입구’를 꿈꾸던 일본을 무색하게 했다.

동아시아 4개국 월드컵 공동개최 어떨까?

역사 논쟁보다는 ‘축구’를 화제로 만나는 양국 국민의 수도 급증했다. 2002년에는 한일 정상이 공동개최를 더 나은 양국관계를 만들기 위한 가교로 삼자고 선언하기도 했다. 최대의 에필로그는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선포와 상호간 입국비자 면제조치였다. 2002년 월드컵 개막 직전 홍콩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한 맺힌 대결(Grudge Match)’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오랜 원한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는 계기가 되리라고 전망했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vs 한국. 인구 3대 1, 국토면적 4대 1, 1인당 국민소득 2대 1. 결정적으로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다. 어느 모로 보나 균형이 맞지 않는 동아시아의 숙적도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적 경쟁을 하면 과거지향적인 정서의 상당 부분이 미래지향적 상호이해로 바뀌리라는 점을 1996~2002년의 짧은 협력의 역사는 보여줬다. 냉전과 열전 사이에서 백안시하기만 하던 두 나라가 협력과 경쟁의 성공사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한국은 2022년 월드컵 본선대회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는 북한, 1986년 축구 근대화를 선언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중국, 2002년 공동개최를 한국과 함께 한 일본. 모두가 잠재적 경쟁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6년 협력의 성공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한 우리가 유치전에서 치러야 할 출혈 대신 ‘동아시아 4개국 월드컵 공동유치’, 즉 범아시아인의 축구제전 개최라는 혁명적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협력과 우호, 건전한 경쟁의 경험을 동아시아 전체로 파급시킬 수 있지 않을까.

꿈이라고 해도 좋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은 공동의 ‘꿈’을 일궈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이 2002년 붉은악마들의 함성 아니었던가.

축구와 정치는 한국이 한 手 위?
한국, 월드컵 4강·직선제 쟁취로 日 ‘탈아입구(脫亞入歐)’ 무색


“구습을 고집하고 문명의 수용을 거부하는 한국과 중국의 문명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여기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가들과 진퇴를 함께하고, (겉으로는 몰라도) 마음으로는 동아시아의 악우(惡友)를 사절하자.”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시아를 무시하고) 유럽을 문명의 척도로 삼아 배우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이다. 이 원조 보수의 논리는 일본 축구인들의 의식까지 지배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유럽과 남미의 선진축구를 배우는 데 주력하던 일본은 1990년대 J리그의 출범과 함께 노골적인 서구 편향 기치를 내걸었다.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 리네커(영국), ‘하얀 펠레’ 지코(브라질)를 비롯한 유럽과 남미의 ‘선진’ 축구스타들을 J리그 선수로 대거 영입하면서 ‘축구의 세계화’를 지향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 연속 출사표를 던지는 한국 축구를 우회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축구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의 천적이자 악우였다. 일본에 선진축구 열풍이 불던 1970년대에도 한국은 아시아의 각종 대회를 석권하면서 ‘토종’ 축구 스타일을 견지했다. 비서구적이고 비과학적이지만 나름대로는 역동적인 한국 축구 때문에 일본은 1980년대 이후에도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번번이 접어야 했다.
특히 1981년을 제외하고 1972년부터 1984년까지 매년, 그리고 1991년까지 간헐적으로 개최된 한일축구정기전에서는 15전10승3패2무로 한국이 압도적 우위를 지켰고, J리그 출범과 함께 정기전도 열리지 않게 됐다. 축구의 ‘탈아입구’였다. 1993년 10월25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브라질 유학파 미우라가 결승골로 한국을 침몰시키자 한국은 이날을 ‘제2의 국치일’로 명명했고, 일본의 탈아입구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이라크가 일본의 발목을 잡으면서 일본 축구계는 ‘아시아 극복’의 중요성을 되씹어야 했다. 축구의 탈아입구를 ‘혁명적으로’ 실현한 것은 오히려 2002년 월드컵 4강 한국이었다.
‘혁명적인’ 변화는 한국 축구뿐 아니라 한국 정치의 전유물이다. 1987년까지 군부통치 아래 신음하던 한국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면서 축구의 역동성뿐 아니라 정치변화의 다이내미즘까지 과시하고 나섰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서구적 정치 스타일과 후기 산업사회의 평화를 만끽하는 동안 한국의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서 피를 흘리고 최루탄 가스를 마셔야 했다(사진). 이렇게 피의 대가로 얻은 민주정치의 역동성은 일본 정치의 무미건조함과 크게 대비됐다. 일본의 ‘주어진’ 민주주의는 더 이상 한국인의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당 장기집권체제에서 정치에 무관심해진 일본인들은 지도자를 자기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쟁취한 한국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축구와 1980년대의 정치. 많은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승패를 결정지어야 하는 이 두 분야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는 (자만심을 섞어 말하면) 일본에 이제 탈(脫)의 대상이 아니라 극(克)의 대상이 돼 있는지도 모른다.

“맹목적 경쟁 말고 따뜻하게 봐주세요”
‘미수다’ 출연 일본 미녀 리에·후사코 씨 “정 많고 화끈한 한국 남자랑 결혼할 거예요”

 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화장을 잘해서 예쁜 거예요.” ‘미녀들의 수다’의 꽃 후사코(왼쪽) 씨와 리에 씨.

한국과 일본을 두루 경험한 젊은 일본 여성들이 보는 한국과 일본은 어떨까. 정치나 사회, 역사적 이슈에 민감한 기성세대보다는 좀더 솔직하게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KBS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에 출연하고 있는 아키바 리에(22) 씨와 도키와 후사코(28) 씨를 만났다. 리에 씨는 니혼대(마케팅 전공)를 휴학하고 한국에 건너온 후 ‘미수다’에 출연해 얼굴이 널리 알려졌다. 최근엔 광고 모델로도 활약하며 전천후 외국인 예능스타로 사랑받고 있다. 후사코 씨는 후쿠오카 출신으로 충남대 대학원에 재학 중이며 2009년 8월부터 ‘미수다’에 출연, 귀여운 외모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두 미녀는 2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보고 느낀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그리고 한국인의 가치관 등을 솔직하게 전했다. 때로는 일본의 사례와 비교하면서 한국 문화나 사고방식의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마지막엔 “꼭 한국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보이면서. 인터뷰는 다소 무거운 질문부터 시작했다. 역동적인 한국에선 정치, 사회 분야에서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지고 방송이나 신문으로 24시간 보도되는 게 현실.

리에 : 한국 젊은이들은 대통령이 바뀌는 것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일본 젊은이들은 이런 데 신경을 안 쓰는 편이에요. 부모님 세대도 마찬가지죠. 일본 사람들은 정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잘 몰라요.

후사코 : 일본 사람들은 정치 얘기를 잘 안 해요. 제가 서른 살 가까이 됐는데도 지금까지 투표 한 번 한 적이 없어요. 한국은 (정치적 사건에 대해) 국민적으로 반응하는 게 신기해요. 일본은 매스컴에서 보도는 하지만, 일반 국민은 별로 반응을 안 하는 편이거든요.

리에 : (매우 민감해하며) 사실 1945년 8월15일에 끝난 전쟁이 한국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을 한국에 와서야 알게 됐어요. 일본인으로선 (패전했으니) 슬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밉지도 않아요.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사람들이 제게 독도에 대한 생각을 물어볼 때마다 거꾸로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물어봐요. 다른 뜻은 없고,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만 갖고 말하는 게 아니냐는 뜻으로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독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봤는데 한국이 먼저 찾았더라고요. 그런데 독도가 어느 나라 소유인지 단정하진 못하겠어요. 먼저 찾은 건 한국인인데 이름을 지은 건 일본인이라.

후사코 : 독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길을 가다가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욕을 듣는 경우가 있어요. 마음이 많이 아프죠. 일본 젊은이들은 독도 문제를 그리 중요시하지 않아요. 대부분 정부가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죠. 의식은 해야겠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마음만 답답해요. 두 나라가 긍정적인 생각으로 상호 발전적인 대안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일본과 생활수준이나 물가를 비교하면.

리에 : (일본과) 비슷해요. 도쿄와 비교하면 교통비 빼고는 물가 차이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 택시를 타면 “여기가 서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웃음) 일본 택시비는 너무 비싸요. 그래서 전철이 끊기기 전에 집에 가려고 막차 시간에 사람들이 전철역으로 많이 몰리죠.

   

한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놀란 일은?

리에 : 물건 값을 깎을 수 있고, 반찬이 추가 요금을 안 내도 계속 나오고,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들이 “어디서 왔니?” 하며 말 걸어주는 것 등 너무나 많죠. 아주머니들이 반말을 하시면서도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후사코 : 저도 지하철에서 아주머니들이 말 걸어주시는 게 인상 깊었어요. 외국인인데도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요.

리에 : 제가 혼자 살게 된 나라가 ‘한국’이라 좋아요. 친구들도 “밥 먹었어?” 하고 자주 물어보는데, 한국 사람들은 참 정이 많은 것 같아요. 한국에선 사람 덕분에 외로움을 못 느껴요. 일본에 가면 답답해요.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혹시 악성 리플 때문에 피해를 본 적은 없나요.

후사코 : ‘미수다’ 첫 방송이 나가자마자 악플이 달렸어요. 동안(童顔)이 아닌데도 방송에서 동안이라며 띄워준다고 쓴 글을 보고 많이 울었어요. 그 후로는 인터넷 기사는 보지 않아요. 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썼다는 것을 보고 놀랐죠. 일본은 인터넷 실명제이고, 악플이 달리는 사이트도 별로 없어요.

리에 : 인터넷에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법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일본에서는 심한 악플을 달면 경찰에 잡혀가요. 그런데 한국은 아직 엄격한 법이 없어서 그런지, 인터넷에 글 쓰는 것이 너무 자유로운 것 같아요. 자기 글에 책임을 느끼는 문화가 자리잡았으면 좋겠어요.

한국의 대학 문화는 어떤 것 같아요.

리에 : 한국 대학생들은 왜 이렇게 휴학을 많이 하죠? 일본 대학은 휴학하더라도 학비의 절반을 내야 하거든요. 일본은 외국 유학 같은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한국 대학생들은 그게 아닌 것 같아요.

후사코 : 도서관에 사람이 많은 게 놀라워요. 한국 대학은 시험 때만 되면 자리가 없지만 일본 대학 도서관엔 자리가 늘 넉넉해요. 일본 대학생들에게 도서관은 책을 보러 가는 곳이지 공부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일본 대학생들은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에서 ‘알바’를 많이 해요. 그러면서도 휴학 안 하고 제때 졸업해요.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의 연애 방식에 차이가 있나요.

리에 : 일본 연인들도 전화를 하긴 하지만 한국 커플처럼 밤낮으로 이렇게 많이 하진 않아요. 기념일도 별로 안 챙기는 편이죠. 100일 챙기는 건 한국에서 처음 봤어요. 꽃다발 준비하고 케이크 주는 문화가 일본엔 없죠. 일본에선 크리스마스 때나 케이크를 주고받아요.

후사코 : 한국 연인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스킨십을 많이 해요.(크게 웃음) 카페에서 붙어 앉아 서로 먹여주고 하는 광경에 놀랐어요. 친구를 앞에 두고 연인끼리 손잡고 있는 것도 충격이었어요(여기서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보다 애정 표현을 더 과감히 한다는 얘긴가요.

리에 : 일본 사람은 인생을 살면서 한두 번만 (사랑 표현을) 하면 되는 줄로 아는 것 같아요. 너무 안 해요. 사랑 표현을 자주 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후사코 : 일본 남자 중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평생 한 번도 안 하는 사람도 있어요. 한국 남자가 오히려 애교가 많고 귀여워요.

혹시 혈액형을 따지나요?

리에 : 많이 따져요. 저는 100% 믿어요. 일본에서의 환상 궁합은 남자 A형-여자 O형, 아니면 둘 다 O형이에요.

한국에서 A형은 소심한 성격의 전형으로 통하는데.

리에 : 심하게 깔끔하고 꼼꼼하죠. 하지만 A형과 O형이 서로 단점을 보완하고, O형끼리는 비슷해서 좋아요. 전 O형이에요.(웃음)

후사코 : 저도 공감해요. 궁합도 많이 보고 책도 읽는데, 개인적으로 결혼할 때까지 그걸 따지지는 않는 듯해요.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하나요. 한국처럼 남자가 집 장만하고 여자가 혼수 준비하나요.

리에 : 일본은 (결혼) 준비 거의 안 해요. 집은 결혼하고 나서 둘이 알아서 구하고, 약혼식도 없고 결혼도 같이 준비해요. 한국처럼 남자가 준비된 후에 결혼하는 것은 아니죠. 같이 고생하자는 생각을 해요.

후사코 : 일본은 예물, 예단 같은 게 없어요. 둘이 같이 고생해서 돈 모아서 살림을 꾸려가는 거죠.

일본에서도 요즘 이혼을 많이 하나요.

리에 : : 한국보다는 많지 않아요. 제가 강남에 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여자들은 남자들의 능력을 너무 중시하는 것 같아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능력만 보고 산다면 오래 못 가지 않을까 싶어요.

후사코 : 일본에서는 어린 나이-스무 살쯤-에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뒤에 성격이 안 맞아서 이혼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싱글맘’이 많다 보니 관련 법도 생겼죠.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뭘까요.

리에 : 한국 드라마엔 슬픈 장르가 많아요. 주인공이 기억상실에도 많이 걸리고…. 한국 사람들은 감정이 풍부한 것 같아요. 한국 영화도 참 좋죠.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전쟁과 액션 영화를 참 잘 만드는 것 같아요.

후사코 : 일본 드라마는 직장,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주제를 많이 다루는데 한국은 인생, 사랑 등 주제가 진지한 편이에요. 그래서 일본 아줌마 팬이 많이 생긴 듯해요.

일본 여성들은 왜 이병헌, 송승헌, 배용준 등 한국 남자배우에 열광할까요.

리에 : (한국 남자배우들은) 슬프거나 기쁜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일본에서는 남자가 우는 것을 별로 안 좋게 생각해요. 그래서 (여자들처럼) 펑펑 우는 남자 연기는 거의 없어요. 표현을 다 안 하고, 속에 감춰진 듯한 연기를 하죠. 한국 배우들은 겉으로 드러나게 연기를 해요. 또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면도 좋아요. 일본은 아내가 남편을 챙기는데, 한국 드라마를 보면 남편이 아내를 챙기잖아요. 한류 스타들은 팬들에게 “사랑해요”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래서 일본 여성들이 이들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것 같아요.

한국 음식은 어떤가요.

리에 : 일본 음식이 생각 안 날 정도로 맛있어요. 매운 음식에 중독성이 있는 것 같아요. 김치, 라면, 삼겹살을 특히 좋아해요. 일본에서 김치찌개를 끓여먹은 적도 있어요. 그래도 조금 덜 맵게 만들면 일본에 진출해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에선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해요. 일본을 ‘숙적’이라고 표현하면서 경쟁상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

리에 : 당연히 경쟁하는 건 좋죠. 그런데 일본 사람들에겐 ‘우리가 꼭 이겨야 한다’는 경쟁의식은 별로 없어요. 한국인들의 애국심은 높이 평가해요. 그러나 맹목적인 건 경계해야 한다고 봐요. 다른 나라처럼 일본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열린 마음으로 대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후사코 : 8년 전 한국에 왔을 때보다는 한일관계가 좋은 방향으로 바뀐 것 같아요. 한국 사람들이 일본인을 대하는 태도도 훨씬 편해진 것 같고요. 한국인의 마음이 세계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편하게, 한국 술도 좋아하나요.

리에 : 한국에 와서 술을 제대로 배웠어요.(웃음)

후사코 : 폭탄주는 못 마시는데 막걸리를 사이다랑 섞어서 가끔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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