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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예능力' 전성시대

醉月 2010. 1. 17. 15:37

웃겨야 산다 ‘예능力’ 전성시대
센스·유머감각·말솜씨는 21세기 서바이벌 스킬

김현진 기자 bright@donga.com

#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PR 컨설턴트를 거쳐 현재 파맥스 오길비헬스월드에서 헬스케어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장우혁(31) 과장은 록 음악 연주, 사진촬영, 해외여행 등 다양한 분야에 마니아적 취향을 갖춘 까닭에 평소 폭넓은 네트워크를 자랑한다. 휴직을 하고 1년간 호주, 영국 등지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그곳에서 겪은 현지 취업 이야기, 여행담과 소소한 일상 등을 담은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이러한 네트워크는 더욱 확대됐다.

그는 무뚝뚝한 첫인상과 달리 허를 찌르는 입담 덕분에 주변 사람들 사이에 ‘재미있는 사람’으로 통한다. 장 과장은 “처음 만난 상대에게는 분위기 파악을 위해 잠시 ‘진중 모드’를 보이지만, 곧 그 사람의 특징과 성향을 간파해 ‘맞춤식 유머’를 구사하다 보니 재미있다는 평가를 받는 것 같다”고 했다.

 

# 외국계 회사에서 엔지니어, 마케터 등으로 근무한 회사원 엄모(32) 씨는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남다른 ‘예능 감각’으로 인기가 많았다. 최신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를 패러디하고, 여성이면서도 ‘몸 개그’를 서슴지 않는 것부터가 비범하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남을 웃기기도 잘하지만 오버 액션을 하면서까지 남의 말에 크게 반응하고 즐거워해주기 때문에 더 편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엄씨는 “스스로를 웃음의 소재로 삼아, 코믹한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치부’를 잘 드러내는 편인데 이렇게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의 또 다른 장점은 ‘한 다리 건너’ 인연을 쌓는 데 능하다는 것. 특유의 친화력으로 우연히 만난 ‘친구의 친구’ ‘친구 회사의 상사’ ‘동료의 대학동창’까지 자신의 네트워크로 섭렵한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또 ‘창의적인’ 방법으로 남들을 즐겁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유머 감각과 말재주를 단순한 ‘센스’가 아닌 ‘능력’으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취업, 결혼 등 인생의 중요한 관문마다 이러한 남다른 감각, 즉 ‘예능력’을 갖춘 이들이 핵심 인재로 여겨지게 된 것.

 

‘재미있고 센스 있는 사람’이 최고

서인영, 김태원, 황정음 등의 예에서 보듯 ‘그냥’ 가수 또는 탤런트이던 연예인이 예능·오락 프로그램 하나로 일약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이변도 속출하고 있다. 이들이 활약하는 프로그램이 안방을 장악해 예능 전성시대를 이루고, 연예인이나 일반인 모두에게 ‘예능력’이 하나의 비범한 능력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뭘까.

연세신경정신과 손석한 원장은 ‘재미’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의식주 같은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후 사람들은 재미를 추구하는 데 집중하게 됐는데 이러한 추세가 마침 발맞춰 성장한 TV방송, 인터넷 등 미디어의 힘을 받으며 나날이 확대 재생산됐다는 설명이다.

건국대 의대 정신과 하지현 교수는 “요즘은 이성 관계에서도 잘생긴 사람보다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시대”라며 ‘예능력’을 갖춘 사람의 공통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대화의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 ‘촌철살인’의 코멘트를 날릴 수 있는 맥락 파악 능력을 갖췄고 △‘말 비틀기’를 잘하고 다른 사람 흉내를 잘 내는 언어능력과 관찰력을 지녔으며 △사전 대본이 없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처럼, 웃길 내용을 준비해오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반응하는 임기응변 능력이 있고 △모든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며 웃음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중재자적 역할에 강하다.

   

이처럼 현대적인 커뮤니케이션에 적합한 기질 덕분에 ‘예능력’은 면접 때도 빛을 발한다는 것이 헤드헌터와 각 기업 인사담당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사장의 비밀’ 저자인 ‘MPR · 커뮤니케이션즈’ 최진택 대표는 “같은 질문을 여러 면접 대상자에게 반복하는 상황이라 면접관들도 피로를 느낀다. 이럴 때 센스 있고 유머러스하게 답변하는 지원자에게는 가산점을 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특히 무한경쟁 시대를 맞아 ‘획기적인 신상품 또는 서비스의 개발’을 각 기업들이 지상과제로 내건 상황에서 이렇게 ‘예능력’을 갖춘 사람이 창의성 또한 높으리라 기대하게 된다는 것. 또 ‘예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도 높다는 것이 최 대표의 설명이다.

“이들은 자신을 통해 상대방이 즐거움과 행복을 느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또 외부에서 각종 갈등 상황을 무리 없이, 부드럽게 해결해낼 수 있습니다.”

한편 취업정보업체 ‘잡코리아’의 황선길 컨설팅사업본부장은 공기업 신입사원 채용 인터뷰 면접관으로 참여한 경험을 들려줬다.

“다들 출신학교, 학점, 공인 점수 등 소위 ‘스펙’은 대단했는데 틀에 박힌, 딱딱한 답변만 늘어놓아 과연 이런 사람들이 친절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더라고요. 그런데 첫인상은 ‘범죄형’에 가까운 한 지원자가 시종일관 서글서글하고, 위트 있게 답하는 모습을 보여 면접관들이 만장일치로 좋은 점수를 주었습니다.”

 

‘예능력’은 현대인의 생존무기

황 본부장은 이처럼 ‘예능력’을 갖춘 인재를 각 기업이 선호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산업 패러다임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에서는 묵묵하게, 오차 없이 일하는 ‘돌쇠형’ 인재가 각광받았다면 지금은 기획, 마케팅 부서뿐 아니라 기술, 영업 관련 부서에서도 튀는 발상과 아이디어로 가득 찬 ‘예능형’ 인재를 찾고 있다”며 “이는 제품과 서비스에 인간적인 감성을 불어넣는, ‘감성’과 ‘소프트웨어’가 화두가 되는 산업 트렌드의 변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황 본부장은 우리나라 기업 환경에서 ‘예능력’이 주목받기 시작한 ‘원년’으로 외환위기 직후인 1990년대 말을 꼽았다. 이때부터 수평적 문화를 근간으로 한 외국계 기업의 정서가 국내 기업으로 빠르게 유입됐고, 윗사람 눈치 보느라 감히 ‘예능력’을 표출하지 못했던 직원들이 회의, 프레젠테이션 문화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개성을 펼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국내 기업에선 이른바 ‘예능력자’들을 ‘실없이 웃긴다’ ‘만만하다’ ‘싱겁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조직이 수평적으로 변하면서 이들의 ‘소프트 파워’가 능력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최진택 대표 역시 사내에서는 ‘상명하복’, 사외에서는 ‘갑과 을’의 질서가 뚜렷했던 과거와 달리 조직 내에서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이, 외부에서는 ‘파트너십’이 강조되기 시작한 사회 분위기의 변화가 ‘예능력’을 빛나는 인재 요건으로 자리잡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명령형 또는 지시형보다는 화합형 인재가 돋보이면서 ‘예능력’을 갖춘 이들의 공통적인 장점, 즉 조화로운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주목받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직원뿐 아니라 사장 등 기업 임원들도 ‘예능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는 분위기다. 한국유머전략연구소 최규상 소장은 최고경영자, 전문직 종사자를 중심으로 유머 코칭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는 “‘송년회나 신년회 때 직원들을 대상으로 3~4분간 스피치를 해야 하는데 위트 있게 말하고 싶다’ ‘평소 말을 좀 재미있게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이들을 대상으로 상황 또는 상대에 맞는 ‘유머 공략법’을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최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같은 사회 지도층급 인사들이 구사하는 유머러스한 스피치가 각광받으면서 이러한 수요는 더욱 증가하는 추세다.

   

직원도 사장도 커뮤니케이션 도구로 활용

최규상 소장이 조언하는 ‘예능력’ 향상 기법은 이른바 ‘감·상·실 이론’. 그는 “민감한 ‘감수성’을 발휘해 일상생활의 평범한 상황을 유머 소재로 끌어내고, 각 상황에 맞게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며 재미있는 말들을 실제로 용기 있게 내뱉는 ‘실험정신’을 기억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소장은 지난해 펴낸 저서 ‘세상을 가지고 노는 힘, 유머力’에 이어 최근 ‘긍정力 사전’도 펴냈다.

“유머력이나 긍정력, 예능력 모두 타고난 ‘감각’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으로 얼마든지 키울 수 있는 ‘능력’입니다. 남들과 잘 어울리고 싶고,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만 갖췄다면 누구나 ‘예능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야흐로 ‘예능력’ 전성시대.

당신의 ‘예능력’은 극복해야 할 ‘걸림돌’인가, 아니면 하늘을 날게 할 ‘도약판’인가.

예능력 셀프 테스트
다음 문항에 ‘예’라고 답한 개수를 체크하시오.


□ 대화의 주제와 별 관련이 없어도 재미만 있으면 된다.
□ 내가 말을 꺼내놓고 내가 재미있어 먼저 웃는 경우가 많다.
□ 종종 상대의 신체적 단점이나 버릇을 주제로 유머를 구사한다.
□ 말이 많고 이야기를 길게 하는 편이다.
□ 종종 대화 상대에게 잘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한다.
□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어딘지 부끄럽다.
□ 재미없다는 반응을 얻은 얘기, 재미있다고 할 때까지 반복한다.
□ 한번 ‘히트’했던 유머는 계속 써먹는다.
□ 나를 개그 소재로 사용하긴 싫다.
□ 종종 썰렁하다는 말을 듣는다.
□ 가상의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
□ 나의 흥밋거리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
□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말할 차례가 되면 부담스럽다.
□ 코미디 프로그램은 재미없다.
자료제공 : 결혼정보회사 '듀오'

YES의 개수
0~2

“당신은 나무랄 데 없는 유머의 신!”
오늘도 ‘말발’ 하나로 좌중을 압도한 당신! 사람들과의 대화가 즐겁고 다른 이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당신은 유머의 신! 방송
3사의 코미디 프로그램부터 케이블TV, 각종 유머 시리즈까지 섭렵한 당신은 어떤 모임도 두렵지 않습니다.
3~5
“당신은 출장 개그맨”
어디서나 환영받는 당신은 ‘출장 개그맨’입니다. 유머감각 하나로 사랑도 받고 인기도 얻고 밥도 술도 얻어먹는 당신은 유머감각 99%의 소유자. 그렇지만 타고났다기보다는 노력형인 당신은 웃겨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치셨군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쇼’는 이미 시작됐는데.
6~8
“가끔 날리는 홈런! 자아도취 상태는 아닌지 점검”
당신은 꽤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가끔 “센스 있다” “재미있다” 등의 칭찬도 듣습니다. 그렇지만 그 칭찬 한마디를 1년 내내 가슴에 품고 다니는 건 아닌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마지막 칭찬은 혹시 1년 전에 듣지 않으셨나요? 그것도 가족에게서?
9~11
“이쯤 해도 안 통하면 삽질형”
이제까지 노력했는데 이런 말을 듣기는 억울하다고요? 그저 코드가 안 맞을 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의 프라모델 이야기, 차 이야기, 아이 이야기 때문에 괴로운 주변 사람들도 생각해주세요. 특수한 주제는 같은 취미, 생각, 환경을 공유한 사람끼리 하는 게 더 즐겁습니다.
12~14
“대화할 생각도 없는 당신은 소통 낙제생”
당신과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세상 사람들은 왜 그렇게 유치하고 단순한지 이해가 되지 않으시나요? 남에게 관심도 없고, 공유하는 재미조차 도통 모르는 당신. 이제껏 너무 고립된 생활을 한 것은 아닌지요.

유머에 끌리는 것은 ‘원초적 본능’
인간의 우수한 유전자가 이성에게 드러내는 뛰어난 생존전략

 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유머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이다. 유머를 이해할 때 전두엽과 측두엽을 포함한 대뇌 영역이 폭넓게 관여한다.

“입만 열지 않으면 정말 좋을 텐데….”

말주변 없는 멋진 근육남과 꽃미남들의 인기가 한풀 꺾였다. 주말 저녁 ‘예능 프로그램’은 재치와 유머감각이 빛나는 연예인들이 접수했다. 이들의 포복절도할 유머에 사람들은 어느 순간 넋을 뺏긴다. 술자리에서도, 미팅 자리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진다. 못생긴 건 참아도 재미없는 건 못 참는다.

최근 ‘예능력’이 외모만큼이나 사람의 매력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떠올랐다. 외모가 절대가치로 평가받는 현대 사회에서 유머와 ‘예능력’이 그 틈을 비집고 올라서게 된 비결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왜 이성의 유머감각에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상대의 외모를 보고 첫인상을 결정한다. 사람의 뇌가 상대의 외모를 보고 호감과 비호감을 결정하는 것은 찰나적 순간이다. 학자들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뇌가 호오(好惡)를 가리는 데 0.013~0.1초 걸린다고 한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 짧게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 호감과 비호감이 가려지는 셈.

뇌에서 호감을 결정하는 부위는 뇌 한가운데 측핵과 눈 위의 안와전두엽이다. 측핵이 좋아하는 얼굴을 고르면 안와전두엽은 이 정보를 바탕으로 호감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외모에 대한 뇌의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절세미인을 사귀어도 사랑을 느끼는 호르몬의 분비 기간이 1년을 넘지 않는 것만 봐도 그렇다. ‘화장미인’ ‘성형미인’이 넘쳐나는 시대에 외모 하나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몸과 정신건강 돕는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

외모에 대한 판단을 마친 뇌는 곧이어 상대에 대한 심층 탐색에 들어간다. 학벌, 돈, 배경, 성격 등 수많은 정보를 수집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뇌가 가장 먼저 인식하는 것은 상대의 온갖 몸짓과 말투다. 사람의 유머와 재치를 나타내는 지표 같은 정보이기도 하다. 얼마간 뒤통수를 치는 반전과 드라마틱한 과장, 오버 액션을 보고 있으면 상대에 대한 거리감이 사라지게 된다. 낯선 상대에 대한 마지막 긴장감도 어느새 무장 해제되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재치 있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에서 이미 드러났다. 특히 여성들이 유머러스한 남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비율이 더 높았다. 이를 증명하는 연구가 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 연구팀은 자기소개서를 이용해 재치와 호감도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문장 곳곳에서 재기발랄함이 느껴지는 자기소개서와 평이한 문장으로 쓰인 소개서를 실험에 참가한 남성과 여성에게 보여준 뒤 반응을 살폈다. 그 결과 상당수 여성 참가자가 자기소개서를 재미있게 쓴 남성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의 경우 여성보다는 그 비율이 낮았지만 대체적으로 매력을 느낀다고 답했다.

이처럼 재기발랄하고 유머감각이 풍부한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일부 학자들은 유머가 자연스럽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유머와 재치는 사람을 사랑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몸과 정신건강에도 보탬이 된다. 실제로 1분간 웃으면 10분간 에어로빅을 한 운동효과가 있고, 혈중 산소량과 엔도르핀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웃음은 면역체계를 강화하고 스트레스 호르몬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다.

유머를 대하면 사람의 뇌 활동이 활발해진다. 영국 과학자들은 사람이 유머를 이해할 때 대뇌의 전두엽과 양쪽 측두엽을 포함해 대뇌의 모든 영역이 폭넓게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예상치 못한 결말과 맞닥뜨렸을 때도 대뇌의 전위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이들 부위는 사람이 창의력을 발휘하고 호감과 비호감을 느낄 때 활성화하는 영역이기도 하다. 짧은 반전의 순간, 뇌에서는 고등한 사고를 담당하는 영역이 활발히 활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머야말로 인간의 가장 고등한 ‘지적 활동’인 셈이다. 미국의 과학전문 웹사이트 라이브사이언스가 선정한 ‘건강한 뇌를 유지하는 방법 10가지’에도 위트(재치)가 포함돼 있다. 이런 면에서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뇌를 끊임없이 단련한 사람이기도 하다.

사람은 언제부터 유머를 주고받으며 살아왔을까. 아마도 꽤 오래전부터였을 것이다. 과학자들은 유머와 재치를 인간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던 생존전략이라고 추정한다. 미국 뉴멕시코대 연구팀은 유머감각을 선호하는 행위가 우성 유전자를 가진 이성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유머감각이야말로 건강한 뇌와 유전자의 질을 나타낸다는 것. 뛰어난 유머감각은 자신이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음을 이성에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또 다른 연구는 여성들은 낯선 남성과의 대화에서 자신을 더 많이 웃게 만든 남성을 다시 만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성들의 이런 선택은 유머러스한 남성과 맺어질 경우 사회생활뿐 아니라 가정생활도 원만하게 유지돼 자신의 유전자를 자손을 통해 계속 전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능력=호감남녀?! 미혼남녀가 참여한 미팅 이벤트에서는 재치와 유머감각이 뛰어난 사람이 항상 인기다.

男女, 유머 느끼는 코드 달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앨버트 메라비언은 메시지를 전달할 때의 주요 요소로 목소리가 38%, 표정(35%)과 태도(20%) 등의 몸짓이 55%를 차지하는 데 비해 메시지 내용은 겨우 7%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재미없는 화제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빵 터지는 웃음’을 터뜨리는 몇몇 연예인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먼저 목소리와 말투다. 보통 남성은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 여성은 비음이 살짝 섞이거나 허스키한 듯 착 감기는 목소리가 섹시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고 이런 목소리가 반드시 이성에게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얘기라도 꺽꺽대는 목소리로 듣는다면 짜증이 밀려들 것이다. 입에서만 우물우물 맴도는 말투는 듣기 전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발음이 불분명한 경우 사람들은 금방 지루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고음은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을 정도로 귀를 잡아끌지만, 정감 없게 들릴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예능계에서 인정받는 연예인의 상당수가 과장된 말투를 쓴다는 점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진은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의 대화를 분석한 결과, 하나의 톤보다 목소리의 높낮이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며 말하는 여성이 남성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상황에 맞는 시선 처리도 재치와 유머를 배가한다. 호감을 이끌어내려면 시선을 맞추면서 얘기해야 한다. 화가 났거나 냉담한 반응을 보일 때도 마찬가지. 후천적으로 터득한 노하우인지, 선천적 감각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예능에 능한 연예인들은 어색한 순간에 대한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 종종 자신이 던진 농담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방청객에게 짓궂은 질문을 던지면서 주위를 환기시키는 연예인들을 볼 때가 있다. 방청객은 돌발 상황에 처음엔 당황하지만 잠시 뒤 마음이 누그러진 듯 미소를 짓는다. 눈을 맞추고 직접 얘기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소통수단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남성과 여성은 유머를 느끼는 코드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남성은 상황이나 사물을 권력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상하 지위를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오랫동안 각인된 습성과도 같다. 따라서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을 때 더 잘 웃는다. 반면 관계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은 수평적 관계 속에서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유머와 콩트를 통해 웃음 코드를 찾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려운 순간에도 유머를 잃지 않는 사람은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아마 우리 모두가 그런 매력의 소유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썰렁하면 어때, 일단 유머를 날려!
전격공개! 초절정 예능력 발휘 6대 기본기 … 모두가 행복해야 진짜 예능력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1980년대 미국 망명을 마친 김대중이 미국 국회의원들과 함께 서울에 도착하자 정적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DJ는 사대주의자다. 귀국 사진을 보라. 그는 미국 국회의원들과 함께 들어왔다.”

그러자 DJ는 웃으며 시인했다.

“Yes, 그렇다. 분명 나는 미국 국회의원들과 함께 왔다.”

그러고는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사진을 잘 보라. 내가 그들을 뒤따랐다면 사대주의자지만, 내가 먼저 들어오고 그들이 내 뒤를 따라 걸어오지 않는가. 그러니 나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다.”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예능력’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다. DJ는 상대의 공격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상대방의 논리와 주장을 들은 뒤 허점을 공략했다. 상대의 질문에 일단 ‘예스’라고 대답해 공격의 동력을 뺀 뒤 웃음으로 되받아쳤다. 그런 상황에서 분노하거나 정색하며 이성적으로 대응했다면 상대는 비슷한 공격을 계속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위트 넘치는 대응에 정적들은 말문이 막혔다.

이명박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여사도 비슷한 위트를 발휘한 적이 있다. 대통령선거(이하 대선) 때 “남편에게 숨겨놓은 아이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냐”는 질문을 받은 김 여사는 이렇게 답했다.

“좀 데려오세요. 바쁜데 일 좀 시키게요.”

과거 우리는 풍자와 해학을 즐기던 예능력 강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수직적인 상명하복 문화, 유교적 엄숙주의, 치열한 경쟁 등으로 여유가 사라진 사회 분위기 탓에 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게 사실.

하지만 이제 ‘웃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회를 맞고 있다. 불리한 상황과 까칠한 인간관계마저 편하게 바꿀 수 있는 마법 같은 윤활유가 바로 예능력이다. 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능력에도 기본기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김연아가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훌륭한 피겨스케이팅 연기를 선보이듯, 좌중을 사로잡는 ‘예능력자’가 되려면 기본기부터 하나하나 다져나가야 한다.

Tips
재미있는 조크를 위한 5초 어드바이스
-본인이 말하고 본인이 먼저 웃지 마라.
-짧게 끝내라.
-질문과 답을 같이 하지 마라.
-포커페이스가 돼라.
-유머가 통하지 않을 때는 주저 없이 다른 주제로 돌려라.

   

1‘수·사·반·장’을 기억하라

김진배 유머연구원장은 “예능력을 발휘하려면 ‘수·사·반·장’을 기억하라”고 강조했다. ‘수사반장’은 ‘수집하라’ ‘사용하라’ ‘반응을 살피라’ ‘장기 하나를 잡아라’의 앞 글자를 딴 것.

‘수집’은 예능력의 기초가 되는 다양한 얘깃거리를 모으는 것. 김 원장은 “‘개그콘서트’ 같은 유머 관련 프로그램을 많이 보고,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재미있는 얘기를 찾아 읽는 일은 기본이다. 그것을 머릿속에만 담아두지 말고 컴퓨터에 유머 파일을 만들어 보관하라”고 조언했다.

잡다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도 중요하다. KBS ‘개그콘서트’의 개그작가로 10년간 활동해온 장덕균 씨는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 뉴스, 다큐멘터리, 드라마, 영화, 인터넷 만화까지 닥치는 대로 보고 읽는다”면서 “이렇게 다양한 상황을 접하다 보면 슬프고 화나는 와중에도 웃음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용’은 재미있는 얘기나 유머, 개인기 등을 사람들 앞에서 직접 시도해보는 것. 많은 사람들이 주목받는 게 싫어서, 또는 썰렁하다는 반응이 두려워서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있어도 꺼내질 못한다. 김 원장은 “위대한 야구선수의 타율도 3할대다. 열 번 중 세 번만 웃겨도 된다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 유머를 날려보라”고 주문한다.

정경진 커뮤니케이션 코치도 “유머에선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경험주의자가 되라”고 강조했다. 재미있는 경험이나 농담을 완벽하게 외워 한 번 말하는 것보다, 조금씩 ‘버전’이 달라질지언정 여러 집단의 사람에게 열 번 말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 재미가 있든 없든 유머를 많이 구사하는 사람은 ‘웃기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게 된다. 이후엔 그가 웬만큼 재미있는 얘기만 해도 듣는 사람들은 관대하게 웃어준다.

‘반응 살피기’ 단계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 웃는지, 박수를 치는지, ‘썰렁하다’는 표정을 짓는지, 민망해하는지 등 다양한 비언어적 반응을 관찰하라는 의미다. 정 코치는 “유머를 구사할 때는 듣는 상대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과 눈치, 센스, 순발력이 필요하다”면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자리에선 ‘치고 빠져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기 하나 잡기’는 자신이 ‘날린’ 수많은 얘기 가운데 가장 반응이 좋았던 것 하나를 잡아 개인기로 만들라는 뜻이다. 유행어나 성대모사도 개인기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을 따라하기보다 자신만의 경험에서 재미있는 얘깃거리를 찾는 게 좋다. 장덕균 작가는 “누구에게든 재미있거나 황당했던 경험, 실수담이 있을 테니 그런 것들을 유머 소재로 삼으라”면서 “콘텐츠는 자신만의 것으로 하되, 재미있게 말하는 요령은 말 잘하는 사람의 ‘기술’을 벤치마킹하라”고 조언했다.

 

2 나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여라

1997년 12월18일 제15대 대선에서 승리한 뒤 낙선한 이회창 후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DJ는 모든 참석자를 박장대소하게 하고, 이 후보마저 웃게 만든 유머로 화제를 모았다.

“18일 이후에 선거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 후보는 아들의 병역 문제로 지지율이 추락했다가 선거 막판 급커브를 그리며 다시 올라갔지만, 시간이 모자라 간발의 차로 낙선했다. 그러니 선거가 며칠 뒤에만 치러졌어도 결과가 어땠을지 모를 일이었다. DJ는 이런 상황을 언급하면서 자신을 낮추고 패자를 띄우는 유머를 구사한 것.

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이는 유머를 구사해야 한다. ‘국민 MC’ 유재석 스타일의 유머를 떠올리면 된다. 이벤트 PD이자 유머강사인 전승훈 씨는 “자신을 망가뜨릴수록 상대방은 자신에게 좀더 편안하게 다가온다”면서 “자학 개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다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하는 자신이 자괴감에 빠진다면 그쯤에서 멈추는 게 좋다. 말하는 사람이 불편하면 상대에게도 유쾌하게 들리진 않기 때문이다.

상대를 ‘깔아뭉개는’ 가학적 개그는 절대로 피해야 한다. 개그맨 출신으로 현재 ‘듀오정보’의 파티플래너인 이재목 씨는 “뚱뚱한 여자 후배를 자주 비하하던 개그맨 선배가 있었다. ‘너 숨 쉬지 마. 산소 소비량이 2배니까’ 같은 식으로 인신공격을 했는데, 폭력과 다를 바 없었다. 모두가 행복해지도록 만드는 게 진정한 유머”라고 말했다. 이렇게 방송에서나 사적인 자리에서나 가학적 유머를 즐겨 하던 그 선배는 방송계에서 일찌감치 모습을 감췄다고 한다.

   

3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유머를 구사하라

철권 무하마드 알리는 조 프레이저에게 패배한 후 멋진 한마디를 남겼다.

“나도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교훈이었다.”

웃음과 예능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소극적이고 시니컬하며 비판적인 사람들은 예능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설령 유머러스한 얘기를 한다고 해도 듣는 이들의 사기마저 떨어뜨리는 독설적이고 비관적인 내용일 때가 많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는 자긍심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 역시 당당하고 긍정적인 유머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처칠이 하원의원에 처음 출마했을 때, 상대 후보는 과거의 한 모임에 그가 지각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늦잠 자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맹렬히 공격했다. 이때 처칠은 대수롭지 않은 듯 응수했다.

“나처럼 예쁜 마누라를 데리고 산다면 당신도 일찍 일어날 수 없을 거요.”

상대가 자신에게 실수했을 때도 화를 내거나 무안을 주는 대신, 상대와 함께 웃을 수 있는 ‘뼈 있는’ 유머를 던지는 게 좋다. 예를 들어, 후배가 인도하는 데로 주차하다 차가 벽에 부딪혔다면 ‘오히려 잘됐어. 그동안 흠집 하나 없어서 누가 훔쳐가거나 긁힐까봐 조마조마했거든’이라고 말하면서 여유롭게 넘기는 식이다. 후배에게 화를 내봤자 자동차에 난 흠집이 사라질 리 없으니 말이다.

실수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도 말하는 자신이나 듣는 상대를 모두 기분 좋게 만드는 유머다. 예를 들어 강의에 지각한 사람에게 “저런 분이 성공한다. 늦으면 눈치를 보다가 안 들어오기 일쑤인데, 늦게라도 들어오는 긍정적 자세를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4 배짱으로 부딪쳐라, 상황에 따라선 ‘오버’하라

코웃음 치는 외국 투자자들에게 500원 지폐의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면서 “한국이 400년 전에 이 배를 만들어 일본 배를 물리쳤다. 그러니 지금은 더 좋은 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이처럼 배짱으로 부딪친다면 어떤 불리한 상황과 어려운 상대도 이길 수 있다. 김 원장은 “소심함은 유머를 죽이고, 배짱은 유머를 키운다”고 강조했다.

회식이나 명절, 가족모임 등 웃고 즐기는 자리에서는 ‘오버’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는 한 방법이다. 이재목 씨는 “모 유명 방송인은 송년회나 파티 같은 모임에서 T팬티를 입고 춤을 추기도 한다. 권위의식을 버리고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는 그는 늘 ‘함께하고 싶은 사람’ 1순위로 꼽힌다”고 말했다.

 

5 상대방의 논리로 되받아쳐라

현대가 독자 브랜드 ‘포니’(조랑말)를 내놓았을 때 밀라노 모터쇼에서 한 기자가 비아냥거렸다.

“조랑말이 사람을 태우는 건 문제 아닌가요?”

마이크를 잡은 정세영 당시 현대자동차 사장은 껄껄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게 어때서요? 그럼 사람이 조랑말을 태우나요?”

인신공격을 당하거나, 까다로운 상대와 협상 테이블에 앉아야 하는 등 불리하고 불쾌한 상황에서 상대에게 화를 낸다거나 논리로 무장해 하나하나 반박한다면,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상대와의 관계도 나빠지고 만다. 김진배 원장은 “상대의 주장을 잘 듣고 그 허점을 상대의 논리로 되받아치되, 유머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는 여유롭고 침착한 태도가 필요하다.

다음은 ‘침착한 위트’의 한 예.

소아과 교수가 어린이 질병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이 장난으로 영사기에서 슬라이드 몇 장을 슬쩍 빼낸 뒤 여자 누드사진을 대신 끼워넣었다. 강의 중 갑자기 누드 사진이 나타나자 교수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은 아까 그 아이가 병을 완전히 치료하고 어른이 됐을 때의 모습입니다.”

   

6 경청하고 공감하며 웃어주라

예능력은 머리, 가슴, 배가 두루 발달해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머리는 지혜·재치·위트를, 가슴은 사랑·인간애·감성을, 배는 배짱·여유·위풍당당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예능력은 단순히 ‘웃기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과 듣는 사람 모두의 기분을 좋게 만들고 분위기를 더 밝게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내용에 공감하며, 환하게 웃으면서 반응하는 것은 예능력의 필수 요소.

아이가 “영어 100점을 받았다”고 자랑할 경우 아이의 말과 몸짓을 따라하면서 환한 웃음으로 축하해준다. 이럴 때 “수학은?”이라고 묻는 건 금물.

상대가 썰렁한 유머를 던지더라도 웃어준다. 그럼 상대도 당신의 유머에 웃을 테고,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좋아진다. 전승훈 씨는 “‘가짜’ 웃음도 ‘진짜’ 웃음 90%의 효과가 있으니, 자신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많이 웃으라”고 조언했다.

 

실전! 상황별 예능력 발휘 노하우
첫 만남엔 이름 삼행시 준비 … 모임에선 칭찬으로 띄워라


예능력의 기본기를 닦았다면 이젠 실전에 들어갈 단계. 자기소개부터 회식 등 친목모임, 프레젠테이션까지 상황별 예능력 발휘 실전 전략을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자기소개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은 비즈니스 미팅, 면접, 소개팅, 친목모임 등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때 상대를 사로잡을 만한 결정적 ‘한 방’을 날린다면 첫 만남에서부터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정경진 커뮤니케이션 코치는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감정을 담아 자기소개를 하라”고 충고한다.
“보통 ‘A회사의 B대리입니다’ 같은 식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건 명함만 주고받아도 알 수 있죠. 차라리 ‘영하 10℃의 날씨에도 당신을 만나러 온 B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김진배 유머연구원장도 “이름으로 삼행시를 짓거나 이름을 변형해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유치해 보일지 모르지만, 건조한 소개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저는 사람들을 만나면 ‘제 이름은 김진배, 받침 빼면 기지배’라고 말해요. 그럼 다들 ‘피식’ 웃으며 저를 쉽게 기억하고, 친근하게 느끼죠. ‘이찬호’라는 사람이 입사 면접 때 ‘C회사의 박찬호가 되겠다’고 말한다면 주목을 끌 수 있어요.”
또 자신의 성격이나 장단점 등을 말해야 할 때는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유쾌하게 마무리 짓는 게 좋다.

 

아이스 브레이킹
초면인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유머를 사용하는 게 좋다. 파티플래너 이재목 씨는 “미팅 이벤트나 회사 오리엔테이션 같은 모임에서 ‘오늘 이 행사를 무척 기대한 나머지, 어제 잠을 못 자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왔어요’라고 한다면 다들 공감하면서 웃을 수 있다”고 말했다.
미혼남녀가 처음 만나는 소개팅 자리에서는 상대를 관찰하고 장점을 찾아내 칭찬하는 게 좋다. 단, 칭찬에도 센스가 있어야 한다.
“웃을 때 눈이 반달 모양이 되는 여성과 만났다면, 직설적으로 ‘눈이 반달같이 아름다우세요’라고 하는 것보다 ‘빨리 밤이 되면 좋겠어요. 초승달 같은 당신의 눈매와 초승달을 직접 비교하고 싶어서요’라고 말하는 게 더 효과적이죠.”(김진배)
비즈니스 미팅에서도 ‘낯이 익다’ ‘명함 디자인이 예쁘다’ ‘(상대방 회사) 근처 떡볶이가 맛있다’ 등 사적인 관심을 보인다면 분위기가 훨씬 화기애애해진다.

 

회식, 친목모임에서 분위기 Up
회식이나 친목모임은 참석자들이 모두 알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참석자 개개인이나 조직 전체를 칭찬하는,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유머를 해야 한다. 과거의 실수나 잘못 등을 ‘푼다’는 명목 아래 끄집어내는 건 금물. 특정인을 겨냥한 인신공격성 유머도 피해야 한다.
모임에 오랜만에 나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를 하는 게 좋다. 장덕균 개그작가는 “10년 만에 만난 지인이 ‘우리가 알고 지낸 지 10년이 흘렀다’고 하자 ‘그래도 내게는 소녀야’라고 대꾸했더니 분위기가 아주 좋아졌다”고 말했다.

 

재미있는 프레젠테이션
프레젠테이션은 짧고 강렬한 유머로 포문을 여는 게 좋다. 정 코치는 “청중이 참여할 수 있는 형태면 더욱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창의성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예를 들어 붕어빵 유머로 시작할 수 있어요. ‘붕어빵을 머리부터 먹는 사람 손들어보라’고 한 뒤 ‘당신은 어느 조직에서든 머리가 되려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죠. 꼬리부터 먹는다는 사람에겐 ‘꼬리가 움직이듯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사귀는 인간성 좋은 유형’이라고 말합니다. 다음엔 ‘꼴리는 대로’ 먹는 사람을 물어본 뒤 손을 든 사람에게 ‘당신은 변태’라고 말해요. 그러고는 ‘놀라지 마시라, 변태는 재치 있고 창의적이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반전시키는 거예요. 단, 이런 오프닝식 유머는 1분 안에 끝내야 합니다.”
청중이 호의적이지 않을 때도 적절한 유머를 구사하는 게 좋다. 실적이 저조하던 부서가 발전방안에 대해 발표할 때 “지금까지 ‘5대 0’이었지만, ‘5대 6’을 만들 수 있는 ‘역전’ 프레젠테이션을 해보겠다”고 말한다면 훨씬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유머를 한다거나, 성(性) 또는 종교와 관련된 소재로 말하는 건 반드시 피한다. 사전 준비도 필수다. 사적인 자리에선 ‘애드리브’나 ‘센스’로 웃길 수 있지만, 프레젠테이션이라면 철저히 기획하고 연습한 뒤 구사해야 한다.

 

성별·연령에 따라 차별화된 유머 구사
성별과 연령에 따라 즐기는 유머가 다르다. 유머강사 전승훈 씨는 “유머에도 눈높이가 있다”면서 “어린이에게는 수수께끼, 청소년에게는 단어를 비트는 사자성어나 삼행시, 성인에게는 신랄한 풍자나 패러디 또는 성적 유머가 어울린다”고 설명했다.
“어린이들은 ‘입으로 먹고 배로 내놓는 것은?’(우체통), ‘배로 먹고 등으로 내뱉는 것은?’(대패) 등의 수수께끼를 해주면 깔깔대요. 청소년은 ‘만사형통’(모든 일은 형님을 통한다)처럼 비트는 유머를 즐기죠. 성인은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패러디와 성적 유머를 좋아하고요. 나이에 안 맞는 유머를 쓰면 바로 썰렁해져요.”
성별에 따라서도 ‘먹히는’ 유머가 다르다. 김 원장은 “남성은 정치·군대·축구, 여성은 외모·사랑·드라마에 대한 화두를 던지면 좋다”면서 “‘남녀관계’는 남녀 모두 좋아하는 화두지만, 세부 내용으로 들어가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성적 유머의 경우 남성끼리는 아주 재미없지 않는 한 다 통한다는 것. 하지만 남녀가 섞인 자리에선 매우 조심해야 한다.
“성적 유머는 또래의 남녀끼리 나눠야 재미있어요. 20대 남녀끼리는 아주 즐겁게 음담패설을 할 수 있죠. 40, 50대도 또래끼리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20대와 40대, 또는 상하가 명확한 남녀가 모인 자리에서는 성적 유머를 써선 안 돼요. 40대 남성 부장이 20대 여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성적 유머를 던지면 여직원은 아는 척하기도, 모르는 척하기도 어렵거든요. 이럴 땐 유머가 ‘언어폭력’이 됩니다.”
물론 중장년층 남성 상사들이 젊은 여직원들과 어울릴 때도 남녀의 영원한 화두인 ‘사랑’을 얘기하는 게 좋다. 하지만 ‘에로스’가 아닌 ‘로맨스’에 국한하는 게 바람직하다.  

 

고수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4인4색 예능의 힘

최양락 개그맨

“말하는 사람이 웃는 것 금물 소재는 주변에 널렸시유”

인사를 하며 명함을 내미는 기자에게 개그맨 최양락(47) 씨는 “나는 명함이 없으니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그렇게라도 ‘신분’을 확인하라는 뜻이었는데, 예기치 않게 시작된 ‘유머 선제공격’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MBC) 녹음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내내 최씨는 특유의 빠른 말투로 열정적으로 얘기했다. 재미있고도 진지한 말솜씨 덕분에 순식간에 그의 얘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백남봉·서영춘 선생님을 흉내내니 선생님과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요. 그때 개그를 통한 ‘쾌감’이란 걸 처음 맛봤죠. 낚시꾼들은 붕어를 잡을 때 ‘손맛’을 느낀다는데 개그맨들은 남들이 웃어줄 때 비슷한 쾌감을 느끼거든요.”

대학 1학년 때 개그맨 공채시험을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소문난 ‘오락부장’들이 모인 방송국 무대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1981년에 데뷔했는데 처음 3, 4년은 별일 없이 집과 방송국을 오가며 유머 소재만 궁리했어요. 연극을 봐도 드라마를 봐도 저걸 개그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영화 ‘쿠오바디스’를 보고 ‘네로 25시’란 개그 코너를 만들고, ‘참새와 허수아비’란 영화를 보면서 팽현숙 씨(최씨의 부인)와 ‘남과 여’를 만들었죠. 그때 ‘나는 봉이야~’란 유행어가 탄생했어요. 또 드라마 ‘전원일기’를 보면서 농촌 코미디를 고민하다 ‘괜찮아유’란 유행어를 만들었지요.”

그가 말하는 ‘남을 웃기는 비결’ 첫 번째는 자기 유머에 자기가 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중간에 웃음을 터뜨리면 듣는 사람의 기대치가 올라가 웬만한 개그에도 웃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웃음의 소재를 멀리서가 아니라 내 주변에서 찾는 센스가 필요하다.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때밀이 아저씨가 너무 세게 몸을 문질러 젖꼭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너덜너덜해졌다는 경험을 얘기했는데 다들 웃겨 쓰러지더군요. 이때도 표정 없이, 무심한 듯 말한 게 주효했어요. 남들 듣기엔 정말 웃긴데, 나는 나름 ‘아픈 경험’이었다고 말한 데서 더 큰 웃음을 이끌어낸 것이죠.”

그는 또 솔직함이 ‘예능력’을 키우는 첫 단추라고 조언했다.

“부장한테 찍혔다고 생각한다면 회식 자리에서 이렇게 말해보세요. ‘매주 4일씩 지각해서 김 부장님에게 찍힌 ○○○입니다. 그럼에도 김 부장님은 저를 내심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어이없어하며 웃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죄송한 마음까지 전하는 센스가 돋보이겠죠.”

‘예능력’을 발휘하고 싶어도 썰렁한 반응이 나올까 봐 주저한다면, 어떤 말을 해도 ‘용서’해주는 가족을 상대로 ‘리허설’을 해보는 것도 좋다.

“사람들이 웃음 터뜨리는 지점을 잘 관찰해보세요. 거기에 맞게 화법이나 말의 강약을 바꾸면 성공률이 높아지죠.”

최씨는 자신의 약점을 활용하는 것을 효과적인 ‘예능력 업그레이드’ 방법으로 소개했다.

“영구, 맹구, 오서방 등 우리나라 코미디 계보의 바보 캐릭터들은 모두 성공했어요. 한국인의 정서가 나보다 못난 사람을 더 아껴주거든요. 자신의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개그 소재로 삼는 것도 좋죠.”

그는 우리 사회가 사람들의 ‘예능력’에 집중하는 현상을 반기며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통’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 예능력은 사람들 사이를 잇는 가교 구실을 하리라 기대했다.

“저는 정치도 웃으면서 하면 좋겠어요. 만날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대변인들이 가끔 농담도 하고, 실없는 말도 던지면 좋겠어요. 이렇게 하면 소통이 더 잘되지 않을까요. 웃음은 병든 사람도 벌떡 일어나게 한다잖아요. 서로를 즐겁게 하기 위한 ‘예능력’ 증강에 국민 모두가 힘썼으면 좋겠어요.”

   

김정운 명지대 여가경영학과 교수·문화심리학자

“유머 던지기는 나와의 상호작용에 초대하는 것”

딱 봐도 만화 캐릭터 같은 느낌이다. 코도 얼굴도 이마도 머리카락도 동글동글하다. 미남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남’인 건 분명하다. 시종일관 다양하고 풍부한 표정으로 기자의 말을 경청하고 성심성의껏 답하는 그에게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유머러스한 입담 덕에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고 얼마 전까지 ‘일요일 밤으로’(KBS2)에 패널로 출연해 높은 식견을 자랑한 김정운 교수는 글뿐 아니라 말도 재미있기로 유명하다.

“전 어려서부터 수줍음을 많이 타서 별명이 ‘색시’였어요. 책 많이 읽고 혼자 있는 거 좋아하는 문학소년….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서 성격이 확 바뀌었죠. 주변에 여자들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정서적으로 ‘업(up)’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표현했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나, 너희들이랑 있으니 기분이 좋다’ ‘오늘 누구는 예쁜데 누구는 그렇지 않구나’ 하는 시답잖은 내용이었는데, 이런 얘기를 친구들이 재미있어 하니 말하는 데 자신감이 붙더군요.”

그는 남 앞에서 얘기할 때, 지나치게 조심스러워하며 일부 내용을 ‘필터링’하는 것은 ‘소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감정을 한 바퀴 꼬아 들어가면 교감이 차단돼버려요. 솔직하게, 느끼는 대로 말하는 것이 더 진솔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는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경쟁력 있다’고 믿는다. 한국 최초로 ‘여가경영학과’를 개설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 교수가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또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주는 것은 대화 도중 부사를 아낌없이 활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그냥 “좋네요”라고 말하는 대신 “무지하게 좋네요”라고 하며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이것이 듣는 사람을 신나게 만드는 재주로 작용하는 듯했다.

그는 재미있는 말을 잘하기 위한 조건으로 ‘다양한 경험’을 꼽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상대방이 정서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게 ‘예능력’의 첫 단계라는 설명이다. 김 교수도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하고 13년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또 아이를 직접 키우면서 ‘내면의 섬세한 촉수’를 계발했다고 한다.

“특히 아이를 키우는 30대 중반 아줌마들과 죽이 잘 맞아요. ‘신비로운 육아 체험’이라는 공통 화제 때문에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지요.”

그는 한국인이 의사소통에 익숙지 않은 것이 ‘턴 테이킹(Turn taking)’, 즉 순서에 맞게 말을 주고받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주변엔 일방적으로 자기 얘기를 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일방적으로 말하지 않고 상대방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이 끝날 때마다 약간의 추임새를 넣으면서 상대방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줘야지요. 유머가 중요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상대에게 웃을 기회를 주는 거잖아요. 유머를 던진다는 건 다른 사람을 나와의 ‘상호작용’에 초대하는 것입니다.”

   

전현무 KBS 아나운서

휴머니즘 ‘밉상 캐릭터’ “망가지길 두려워 마라!”

청소년기에 ‘마님은 왜 돌쇠에게만 쌀밥을 주는가’라는 제목의 에로 비디오를 보다 어머니에게 들켰다고 털어놓고, 영화 ‘괴물’의 괴물 목소리를 개인기로 선보이며, 얼굴이 늙어 보여 보톡스를 맞고 제모까지 했다는 그를 보며 시청자들은 기존의 아나운서 이미지와 다른 ‘예능인’의 면모를 발견한다.

최근 연예·오락 프로그램에서 MC와 게스트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KBS 전현무(32) 아나운서. 그는 KBS 시청자광장에서 ‘주간동아’ 인터뷰용 사진촬영을 할 때도 몰려든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운 기색 하나 없이 카메라를 향해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해 보였다. ‘스타 골든벨’(KBS2)의 ‘밉상 질문’ 코너로 뚜렷한 캐릭터를 갖게 된 그에게 ‘예능력’의 비결을 물었다.

“제가 원래 좀 ‘밉상’스러운 데가 있어요. ‘스타 골든벨’을 진행할 때 그런 모습을 극대화했죠. 사람들이 묻고 싶은 질문을 제가 대신 속 시원히 물어보는 방법이죠. 가령 화장이 진한 여성에게 ‘문신했느냐’고 물어보는 식인데, 이런 건 너무 밉상인가요?”

나름의 ‘밉상 철학’도 있다. 출연자 중 상대적으로 소외된 연예인에게 밉상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들에게 시청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도록 하고, 그들도 ‘발언권’을 얻게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의 밉상 질문에 “휴머니즘이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래서다.

간혹 수위 조절에 실패해 곤욕을 치르는 일도 있다. 한번은 오랜만에 복귀한 가수를 두고, 방청객은 다 알지만 나는 모른다는 설정으로 웃음을 자아내려다 방청객들 역시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난감했던 적이 있다. 결국 그 장면은 비극적인 최후(통편집)를 맞았다.

전 아나운서는 ‘밉상 코드’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 안에 웃음을 유발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웃음에는 솔직함이 있어야 해요. 반전도 있어야 하고요. 좀 이상한 옷을 입고 온 사람에게 ‘그 옷은 웃기려고 입은 거죠?’라고 물으면 다들 웃잖아요. 모두가 공감하는 상황을 직접 말로 끄집어내니까 웃음이 터지는 겁니다.”

반전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은 관찰력이다. 유재석이 박명수를 ‘아버지’라고, 정형돈을 ‘안 웃기는 개그맨’이라고 콕 집어 말해 웃음 코드로 승화시킨 것도 관찰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저는 이제 막 배워가고 있어요. 그래서 신문, 책, 영화를 챙겨 보면서 캐릭터 파악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합니다. 얼마 전 우락부락하게 생긴 게스트가 파마머리를 하고 왔기에 ‘우피 골드버그 같다’고 말했는데,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그러나 밉상이 과하면 비호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언제나 ‘솔직’과 ‘겸손’을 중심으로 하고, 자기 자신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아나운서인데도 ‘싼 티’나는 단어를 즐겨 쓰고 스스로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요. 옆집 아저씨, ‘허술한 오빠’ 같은 사람이 밉상 캐릭터를 선보이니 재미있어하지 완벽한 이미지의 근엄한 아나운서가 밉상 노릇을 하면 정말 밉상이 되거든요.”

그는 ‘예능력’을 사람을 사귈 때 가장 큰 무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쁘고 힘들게 사는데, 엄숙한 사람을 만나고 싶겠어요? 일단 ‘예능력’을 발휘해 사람들과 친해진 뒤 진지한 본모습을 보여줘도 늦지 않아요.”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

정치는 곧 엔터테인먼트 직설화법으로 감성 공략

서울 여의도동 1번지 국회의원회관 707호.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 사무실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 모서리에 걸린 홍 의원의 사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와이셔츠를 입고 붉은 넥타이를 맨 채 웃고 있는 모습이 어른 옷 입혀놓은 개구쟁이 같다.

홍 의원은 “붉은색은 러시아에선 정의(justice)와 순수(purity)를 상징할 뿐 아니라, 이 단어들의 앞글자인 ‘JP’는 내 이름의 이니셜이기도 해 ‘정의롭고 순수하게 정치한다’는 뜻으로 빨간 넥타이를 자주 맨다”고 말했다. 같은 의미에서 13년간 속옷도 빨간색으로만 입었다니 ‘비범한’ 면이 있음이 분명했다.

홍 의원을 ‘예능력’ 뛰어난 명사의 한 사람으로 취재하게 된 것은 베테랑 정치담당 기자들의 ‘증언’ 때문이다. 그가 공석, 사석을 불문하고 특유의 입담과 ‘예능력’으로 주위 사람들을 웃겨왔다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여과 없이 말하는 것으로 유명해 ‘홍 반장’이란 별명도 얻었다. 스스로도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할 말 다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12월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인 손석희 교수가 그에게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물었다. 그는 역으로 “손 박사는 출마할 생각이냐”고 물어 화제가 됐다. 홍 의원은 손 교수에게서 “(나는) 안 나간다”는 답을 받아낸 뒤에야 “국민 앞에 맹세한 거예요. DJ처럼 번복하고 나가기 없기다”라고 못 박았다.

그는 원래부터 시원시원한 화법과 태도를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고 했다.

“고3 때 남자 셋이 함께 자취를 했는데, 이들과 어울려 지내다 보니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해가더군요. 학교 다니는 친구, 장사하는 친구와 함께 먹고 살려면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대학 가서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해야 해서 전보다 더 적극적이고 시원시원하게 변했죠.”

솔직한 입담이 ‘트레이드마크’가 되자 그를 ‘웃기는 사람’으로 여기는 주변인이 하나둘 늘어갔다. 홍 의원이 대학에 입학하던 해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한 선배 가운데 당시 인기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를 연출하던 MBC 김경태 PD가 있었다. 김 PD는 홍 의원의 ‘예능력’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개그맨 시험을 보러 오면 무조건 붙여주겠다”고 꼬드겼다. 홍 의원은 “돈 많이 번다”는 말에 실제 시험을 보려고도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입학하던 1972년 유신이 선포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의 유일한 4선 국회의원인 그는 선거운동도 직설적으로 했다. 검사시절 자신이 수사한 슬롯머신 사건이 드라마 ‘모래시계’의 소재가 되면서 일명 ‘모래시계 검사’로 스타가 되자 유세장에서 이 드라마 OST만 틀어댔다. 2008년 총선 때는 ‘홍도야 울지 마라’ ‘다함께 차차차’ 등 40대 중반 세대가 좋아하는 노래만 불렀다. 공약은 이미 선거유인물로 배포됐기에 노래를 통해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홍 의원은 “정치도 결국 엔터테인먼트”라고 강조했다.

“대중을 즐겁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 아니겠어요? 정치인들도 이런 대중의 감성을 읽어내고, 그들이 웃음 짓게 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귀를 사로잡는 ‘fun fun 입담’
라디오 MC 전성시대 … 한바탕 재미있는 수다의 시간

박길숙 라디오 작가 park-gil@hanmail.net

청각매체인 라디오에서 MC의 입담은 청취율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힘이다. (시계방향으로)‘두시 탈출 컬투쇼’의 정찬우·김태균,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강석·김혜영,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조영남·최유라.

#방송사고 경계수위 넘나드는 솔직함

오후 2시 무렵, 서울역에서 삼청동으로 향하는 버스 안. 점심을 많이 먹은 탓인지 배도 부르고 잠도 솔솔 온다. 둘러보니 열댓 명 되는 다른 승객들도 식곤증에 눌려 무료한 시선을 창밖에 두고 있다. 기사 아저씨도 졸렸던 모양이다. 라디오 볼륨을 높인다. ‘두시 탈출 컬투쇼’(SBS 라디오) 정찬우, 김태균 두 MC의 입담이 버스 안을 가득 채운다.

청취자들에게서 온 문자를 소개하는데 ‘헤어진 지 18시간 됐어요’ ‘신입사원이 회사에서 놀고 있어요’ ‘양다리 걸치다가 남친한테 들켰어요’ 같은 내용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는 컬투의 코멘트는 포복절도할 만한 수준이다.

한번은 헌혈을 많이 한다는 간호사와 전화 연결이 된 적이 있다. 보통 MC 같으면 “좋은 일 하시네요” 하겠지만 컬투는 달랐다. 그들은 “헌혈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굴이 예쁜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소 뜬금없는 비교지만 지루해질 수 있는 상황을 웃음으로 ‘반전’시킨 센스가 돋보인다.

라디오 작가로서 승객들의 반응을 놓칠 수 없었다. 승객들 중 서넛은 ‘저런 것도 방송이라고…’ 하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고 있었고, 나머지 승객은 컬투의 입담에 이미 빠져든 상태다. 기사 아저씨는 ‘중독 상태’인 듯했다.

그는 오후 2시가 되면 습관적으로 ‘두시 탈출 컬투쇼’의 볼륨을 높인다고 했다. “진행자가 감추는 것 없이 솔직하고 시원시원해서 좋아요. 청취자들의 사연도 재미있고요. MC나 청취자나 왜들 그렇게 정신이 없는지… 그 맛에 들어요.”

동시간대 청취율 1위를 자랑하는 ‘두시 탈출 컬투쇼’의 두 MC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 나긋나긋해야 한다는 라디오 진행자의 틀을 완전히 깨고 육탄전하듯 지지고 볶으면서 난리법석을 떤다.

그럼에도 코너마다 전하는 메시지가 확실하다. 그리고 편안하다. 이 프로그램이 청취자를 사로잡는 힘은 두 MC의 오랜 우정에 있다. 여기에 순발력과 애드리브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하다. 사연을 보내온 청취자에게 ‘사연 좀 재밌게 보내! 이럴 거면 보내지 마’라며 종이를 구기는 소리까지 리얼하게 전파로 내보내니,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솔직함에 중독되고 만다.

그래서 ‘두시 탈출 컬투쇼’는 대본이 없다. 방송 시작을 알리는 ‘온에어’등(燈)에 불이 켜지는 순간까지 정해진 것은 진행 순서뿐이다. 즉석 대사가 생동감 있고 더 재미있다는 청취자의 반응 덕에 철저히 두 MC의 입담에 기대는 것이다. 하지만 작가와 PD는 이런 MC를 만날 때 더 많은 공력을 들인다. 그리고 방송사고 경계수위를 넘을까 봐 늘 조바심친다.

 

#돌발상황 대처하는 순발력은 기본

최근 들어 라디오 MC에 개그맨들이 대거 포진하게 됐다. 개그맨은 말로 상대방을 웃기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입담과 애드리브는 기본이고,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청취자들의 방송 참여가 적극적일수록 MC의 순발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데다가 요즘 청취자들은 ‘내숭’을 모른다. “모텔에서 나오다 남친한테 걸렸어요”라는 말을 거침없이 한다. 부부 문제로 이혼을 고민 중이라는 여성 청취자와 전화 연결을 한 MC는 “그럼 이혼하세요”라는 조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코멘트가 나오면 담당PD와 작가는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청취자는 후련해한다.

   

라디오는 ‘1대 1’의 매체다. 수많은 청취자를 대상으로 방송을 하지만 MC와 청취자가 마주앉아 한바탕 수다를 떠는 것과 비슷하다. 요즘 청취자는 지루한 것을 참지 못한다. MC가 내숭을 떠는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펀(fun)한’ 얘기가 없으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뻔한’ 프로그램이 되기에 무조건 재미있어야 한다.

청각매체인 라디오에서 MC의 입담은 청취율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힘이다. 때문에 PD와 작가는 MC의 입담이 기운차게 잘 날아올라 청취자 품으로 파고들 수 있도록 하는 무거운 책무를 지고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꽃’은 MC이지만 작가도 절반은 ‘기생’이 돼야 한다. 매일매일 바뀌는 수많은 출연자, 전화 연결자와도 친밀한 유대감을 가져야 프로그램이 생동감을 얻는다. 이런 기본기가 있어야 매일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온다. 꿈에서도 코너를 생각하는 게 작가다.

 

#적절한 가벼움, 편안함, 따뜻함

오후 4시, 버스 안. ‘조영남,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MBC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아버님(조영남)은 왕입니다요!”라는 멘트에 승객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에서 MC 중 한 명은 언제나 편안하고, 또 다른 MC는 때때로 위태롭다. 조영남은 참 수다스러운 사람이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언어가 늙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담아두지 않기 때문이다. 조영남의 ‘적절한 가벼움’이 MC로서의 매력이고 힘이다.

최유라는 편안함이 매력이다. 2007년 라디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한국갤럽이 13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라디오 프로그램 MC와 DJ를 물은 결과 최유라는 이문세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최유라는 공동진행자가 누구든, 게스트가 누구든 방송 파트너를 편안하게 해준다. 방송을 들으면 그의 편안한 표정이 그려질 정도다. ‘말발’이 센 남자 진행자들이 위태로운 발언으로 앞서가면 얼른 균형감 있게 정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질리지 않는 담백함이 그의 최대 무기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MBC 라디오)는 가히 ‘국민방송’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성대모사 호흡은 무릎을 치게 한다. 화려한 애드리브를 보여주는 강석과 부드럽게 중심을 잡는 김혜영이 찰떡궁합을 이룬다. 이 때문인지 두 사람을 부부로 오해하는 청취자도 많다.

강석, 김혜영 두 MC는 요즘 유행하는 ‘보이는 라디오’를 거부한다. 듣는 사람마다 다양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것이 라디오의 매력인데, ‘수리수리 마수리’ 주문을 외우는 ‘도사’가 청취자에게 드러나면 상상력이 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강석과 김혜영은 철저하게 라디오의 특성을 살리려고 애쓴다. 청취자들이 라디오의 즐거움에 흠뻑 빠지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힘이다.

필자는 라디오 MC로 김미화를 좋아한다. 방송국에서 오가며 눈인사를 하면 고맙게도 인사를 잘 받아준다. 김미화는 필자를 잘 모른다. 그럼에도 ‘그와 잘 통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김미화의 매력이다.

그가 진행하는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MBC 라디오)의 오프닝 멘트를 들어본 사람은 안다. 그가 얼마나 낱말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이야기하는지를. 개그맨으로서의 유머 감각과 천성적으로 지닌 사람을 향한 따뜻한 정이, 시사프로그램을 또 다른 색깔로 빚어내고 있다.

필자는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시조 부문) 후 방송에 입문, ‘안녕하십니까 황인용 강부자입니다’(KBS 라디오), ‘이명숙 변호사의 가정법원’(KBS 라디오 법정드라마), ‘다큐멘터리 인물과 사건’(KBS 라디오), ‘성공시대’(KBS 라디오 드라마), ‘라디오 극장’, ‘보람이네 집’(KBS 라디오 일일드라마) 등을 거쳐 현재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입니다’(KBS 라디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준비된 웃음’에서 ‘리얼 채취’로 ㅋㅋ
TV ‘예능프로’ 역사로 본 ‘웃음코드’ 변천사

 이응주 MBC 예능국 부장·언론학 박사 ejlee@mbc.co.kr

TV의 예능·오락 프로그램은 대중에게 저비용으로 가장 효과적인 재충전의 시간을 제공해왔다. 요즘처럼 다양한 재충전 수단이 없던 시절에는 TV가 거의 유일한 휴식과 오락 수단으로 활용됐다.

예능·오락 프로그램은 음악, 패션, 디자인, 생활습관 등 한 시대의 유행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예능·오락 프로그램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은 물론 생각의 변화까지 엿볼 수 있다.

배우에 필적하는 연기력을 자랑했던 구봉서·배삼룡.

1960~80년대

성숙한 연기력으로 ‘완벽한 대본’ 소화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1962년부터 컬러TV 시대가 열린 1980년대까지의 예능 프로그램은 크게 코미디, 쇼, 공개 오락으로 나눠볼 수 있다.

드라마 형식의 내러티브를 갖추고 비공개 세트에서 코미디언이 진행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 ‘소문만복래’ 등이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코미디언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서영춘, 구봉서, 곽규석 같은 이들은 코미디를 통해 ‘연기’를 했기에 진지함과 깊이가 돋보였다. 이들은 드라마 극본처럼 완벽하게 짜인 대본을 따랐다.

쇼 프로그램으로는 가수들이 출연하는 ‘쇼쇼쇼’ ‘OB 그랜드 쇼’ 등이 있었다. 가수들의 노래, 코미디언들의 만담과 코믹 쇼를 선사하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시청자들은 대본에 맞게 짜인 ‘준비된 상황’과 반복되는 말장난에 웃음을 터뜨렸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각박했던 시기, 온 국민이 같은 상황에 함께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에서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1990 년대

생활 속 캐릭터 통한 감정이입

199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시트콤은 드라마의 한 장르로 볼 수도 있지만 극의 흐름이나 스피디한 전개 등이 코미디에 가깝다. 1993년 한국 최초의 시트콤 ‘오박사네 사람들’이 선보였을 때만 해도 시트콤은 무척 낯선 장르였다. 그러나 주제와 내용이 국민 정서와 부합하면서 ‘남자 셋 여자 셋’ ‘순풍산부인과’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은 ‘지붕 뚫고 하이킥’ 등을 통해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시트콤 장르에서 찾을 수 있는 웃음 코드는 주변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근한 캐릭터들이 저지르는 실수와 인간적인 해프닝이다. 장르적 특성상 다소 과장된 면이 없지 않지만 이들이 실제 일어남직한 상황을 해결 또는 무마하는 과정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곧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980년대의 오락 프로그램처럼 대본이 존재한다는 점은 같지만, 시청자들은 친숙한 시트콤 속 캐릭터에 더 쉽게 감정이입, 몰입하며 웃음을 발견하게 됐다.

‘시트콤’ 시대 이후부터는 코미디가 무대 위에서만, 또 준비된 코미디언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즉 코미디의 소재가 일반인이 일상생활에서 쉽게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코미디의 대중화’가 가속화됐다.

   

구체적인 대본 없이 출연자들의 활약을 ‘채취’하는 ‘해피선데이-1박2일’. ‘리얼 버라이어티’는 현대인의 웃음 코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2000 년대

이후예능의 진화와 포스트모던함에 열광

21세기로 넘어오며 예능 프로그램 형식에 일대 혁명을 일으킨 계기는 인터넷 활성화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으로 인터넷을 적극 활용하게 된 시청자들은 방송 전반에 자신들의 의견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방송사는 시청자들의 높아진 눈높이를 반영할 수밖에 없었고, 시청자들을 선도해온 방송 제작 전반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방송 제작자들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형식이 바로 ‘탈(脫)장르’다. 오락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형식의 만남, 시사 프로그램과 오락 프로그램의 결합. 방송 제작자들은 외국의 수준 높은 프로그램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을 따라잡기 위해 어떠한 장르 파괴도 서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로써 등장한 형식이 ‘서바이벌’로 대표할 수 있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다. 대본 없이 체력과 지식을 총동원해 상대방을 탈락시키고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경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포맷에 시청자들은 신선함을 느꼈다.

이후 ‘리얼’의 기치를 내걸고 큰 성공을 거둔 프로그램이 MBC ‘동거동락’이다. 즐거움과 고통을 같이한다는 ‘동고동락(同苦同樂)’ 대신 ‘동거동락(同居同樂)’, 즉 함께 살면서 즐거움을 같이한다는 의미를 차용했다. 유재석이 진행한 이 프로그램은 여러 연예인이 같은 공간에서 일정 기간 생활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이들을 엿보는 즐거움을 전달했다.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제작 형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그전까지는 출연자가 대본에 의해, 연출자의 지휘 아래 예고된 동선을 따라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수십 대의 카메라를 곳곳에 배치한 뒤 연기자들에게는 기본적인 구성 틀만 제공하고, 연출자는 그 안에서 그들이 자유롭게 놀게 한 뒤 그 모습을 ‘채취’했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간판을 달고 인기리에 방영되는 MBC의 ‘무한도전’, KBS의 ‘해피선데이-1박2일’, SBS의 ‘패밀리가 떴다’ 등은 상황을 설정하고 출연자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시트콤과 가장 유사하다. 그러나 이런 프로그램 속에서 연예인은 연출자가 제공한 상황에서 주어진 캐릭터뿐 아니라 출연 연예인의 ‘예능성’과 그들 특유의 자유분방함까지 보여준다. ‘포스트모던’한 현대의 시청자들이 정형화한 정통 시트콤보다 리얼 버라이어티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TV 예능·오락 프로그램의 이런 변화는 일반인의 ‘웃음 코드’에도 영향을 미쳤다. TV 밖 일상생활 속에서 대중은 ‘참새 시리즈’류의 콩트를 외워 읊어대는 사람보다 상황에 맞게 남의 말을 받아치거나, 순발력 있게 리액션을 보이는 이를 ‘재미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또한 버라이어티 속 각각의 ‘캐릭터’에 열광하듯 일상생활에서도 그저 실없이 웃기는 사람보다 개성 있는 성격과 행동패턴, 말 습관을 가진 ‘캐릭터’ 있는 이들을 ‘인기남’ ‘인기녀’로 여기게 됐다.

예능 프로그램은 사회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온도계 같은 존재이면서, 미묘하게 달라지는 대중의 ‘웃음 코드’를 반영하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예능, 오락 프로그램 속 한국인의 ‘웃음 코드’는 끊임없이 발전, 진화해나갈 것이다.

 

*이응주 프로듀서는 ‘우정의 무대’ ‘남자 셋 여자 셋’ ‘오늘은 좋은 날’ ‘테마게임’ ‘환상여행’ 등 다수의 오락, 시트콤 프로그램을 거쳐 현재 ‘환상의 짝꿍’을 연출하고 있다.

‘찌질한 낙오자’ 코드가 通했다
‘예능력’으로 스타 된 연예인과 시대상의 함수관계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 연예인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김태원, 서인영, 붐, 한성주 등 ‘의외의’ 인물이 시청자들의 공감과 웃음을 사게 된 데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이들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시대 대중이 원하는 웃음 코드를 자신의 캐릭터에 녹여 성공했다. ‘예능인’으로 거듭난 이들이 현대인을 웃게 하는, 웃음의 ‘발화’ 지점을 찾아보자.

‘예능인’으로 거듭난 요즘 스타들에게는 공통적인 ‘코드’가 있다. ‘낙오자 정서’와 ‘싼 티’ 콘셉트를 자극하는 것. 경제적, 사회적 분위기는 특정 연예인 캐릭터의 인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능 판도가 변화하고 있다. 2008년까지 MBC ‘무한도전’과 KBS2 ‘해피선데이 1박2일’, SBS ‘패밀리가 떴다’ 등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다면, 2009년부터는 시청자들의 시선이 여러 프로그램으로 분산됐고 시장 자체도 확대되는 추세다. 집단 토크 버라이어티가 다양한 포맷으로 ‘업그레이드’되고, 리얼 버라이어티도 스포츠·음악 등으로 소재를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그만한 시청률을 나눠 갖는다. ‘예능 전성시대’가 허튼 말이 아니다.

넓어진 ‘시장’만큼 예능 스타도 대폭 양산됐다. 김태원, 서인영, 붐, 이하늘, 길, 한성주 등 뜻밖의 인물이 예능계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MC도 마찬가지다. 유재석, 강호동의 양대산맥 구도에서 박미선, 이휘재 등이 스타급으로 새롭게 가세했다. 한마디로 판이 커진 대가를 골고루 나눠 갖는 모양새다.

 

불황기엔 아웃사이더 이미지에 공감대

이 같은 예능 열풍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하나로 집중된다. 경제불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힘든 시기, 인기 있는 콘텐츠는 역시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짜증나는 현실을 단번에 날려줄 스피디한 ‘토크 버라이어티’, 반대급부로 따스한 인간 감정을 안겨주는 ‘리얼 버라이어티’ 등이 득세하게 된다.

물론 우리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미국도 1920~30년대 대공황 시기, 넘어지면서 무작정 웃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삶의 여유, 낭만적인 감수성을 채워주는 ‘스크루볼 코미디’(대사의 감칠맛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가 동시에 득세한 바 있다. ‘잃어버린 10년’ 동안의 일본도 TBS ‘우타방’, 후지TV ‘헤이헤이헤이’ 등 음악 토크 버라이어티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춤추는 대수사선’을 비롯한 코미디 드라마가 시대를 풍미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예능으로 ‘뜬’ 연예인 패널들의 속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마디로 경제불황기 대중 정서에 적합한 연예인이 떴다는 것이다. 예능 열풍이 일게 된 것 자체가 이런 정서를 정확히 담는 패널을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경제불황기 대중 정서에 밑바탕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낙오자 정서’다. 사회에서 뒤처지고 무시당할 법한 인물형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지지 심리가 생긴다. 대표적인 경우가 록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다. 김태원은 딱히 예능 감각이 출중한 인물은 아니다. 타이밍이 좋은 것도 아니고,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선 낙오자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다.

1965년생, 우리 나이 45세. 이 시대에 가장 고통을 겪고 있는 ‘허리’ 세대다. 거기다 그는 아이돌 열풍 탓에 뒤안길에 놓인 장수 록그룹 리더다. 점차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다. 딸을 해외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이기도 하다. 현시점 우리 사회가 지니는 고민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인물이 예능에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리액션을 하면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르다. 그는 ‘연예인’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인물이 된다.

김태원으로 대표되는 현상은 이전에 ‘호통 개그’라는 형식으로 박명수를 띄웠다. 맥락은 같았다. 힘없는 서민 이미지였다. 그런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알맹이 없이 호통만 치는 중장년층 자화상이었다.

   

속물근성, ‘싼 티’ 콘셉트, ‘이혼녀’ 코드의 경쟁력

이 패턴은 여러 형태로 전이된다. 비슷한 나이대이면서 아웃사이더적 이미지를 강화한 캐릭터가 이하늘이다. 그는 탈모 증세까지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낙오자형 아웃사이더다. 이 패턴이 30대로 내려앉으면 ‘리쌍’의 멤버 길로 이어진다. 잘생기지 않은 외모, 서툰 말솜씨, 즉 ‘예능에 어울리지 않는 예능 스타’다.

현재 예능은 ‘낙오자’를 다양한 형태와 세대로 나눠 대중에 공급, 여러 계층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경제불황 콘셉트는 ‘낙오자’의 정반대에 자리한다. 계급갈등 요소를 한껏 부각하는 ‘특권층’ 이미지가 그것이다. 늘 논란이 되지만, 그만큼 관심도도 높아진다. 불황기의 동경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콘셉트는 여성이 떠맡았을 때 효과가 커진다. ‘된장녀 열풍’의 원인이다.

언뜻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심리가 존재한다. 앞선 미국 대공황 때도 캐리 그랜트 등 ‘왕자님형’ 배우들이 득세했고, 한국에서도 올 초 재벌집 아들이 총출동하는 ‘꽃보다 남자’(KBS2)가 큰 인기를 끌었다. 남성으로 대상을 설정했을 때는 동경의 요소가 되고, 여성으로 설정하면 여성의 동경과 남성의 자괴감, 무력감이 자극돼 ‘논란형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대표적 예가 서인영이다. ‘신상’이라는 단어를 일반화한 주역이다. 구두에 집착하며,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명품 소비에 열중한다. 자신의 속물근성을 절대 감추지 않는다. 절묘한 부분에서 여성의 공감대를 사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속물근성을 감추고 사는 경제불황기에 시청자들은 서인영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도 느낀다.

한편 이처럼 계급갈등 요소에 천착하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특히 여성이 대상일 때는 절대 ‘사회적 품위’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면 아예 ‘우리와는 다른’ 계층으로 인식돼 이질감과 거부감을 산다. 연예인이라서 버는 돈은 많지만, 우리와 비슷한 감수성과 행동양식을 보여줘야 한다. 서인영이 정확히 그랬다. 수년 전 큰 인기를 모은 MBC ‘개그야’의 ‘사모님’을 그 초기 모델로 보면 된다. 김미려는 ‘돈은 많지만 품위가 없는’ 사모님 역할을 연기했다.

한편 이런 콘셉트에서 ‘특권층’ 이미지를 뺀 형태가 이른바 ‘싼 티’ 콘셉트다. 이 같은 콘셉트로 뜬 케이스는 자기 입으로 ‘싼 티’를 외치고 다녔던 붐이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낙오자 정서’와 유사하지만, 이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캐릭터로 보면 이해가 쉽다. 이런 콘셉트는 대중에게 좀더 살갑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부분이 경제불황이 낳은 사회현상이다. 대표적 사례가 이혼율 급증이다. 경제불황기에는 늘 이혼율 증가가 수반됐다. 그만큼 가정 내 갈등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시기를 거치며 이혼이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도 발생했다.

한국 예능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MBC ‘세바퀴’를 중심으로 ‘이혼녀 열풍’이 인 것이다. 한성주 등이 이런 콘셉트로 크게 부각돼 스타덤에 올랐다.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던 부분이 일반화화는 현실에서, TV 프로그램이 이에 방점을 찍어주면 효과가 커진다. 사실 한성주에게도 별다른 예능 감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사회적 약점이던 이혼을 부각한 콘셉트가 사회 상황과 맞물려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봐야 한다.

◀◀◀ MBC ‘세바퀴’는 이휘재, 박미선의 ‘부활’과 중년에 맞는 개그 코드로 각광받고 있다.

◀◀ SBS ‘스타킹’의 붐과 조권. ‘싼 티’ 콘셉트로 승부를 걸었다.

◀ KBS2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경제불황과 여권 신장에 따른 남성들의 복잡한 심리를 담았다.

‘소시민 정서’ 있어야 스타급 MC로 우뚝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제불황기 대중 정서에 기댄 콘셉트는 패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을 이끄는 MC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두 MC 유재석, 강호동의 ‘국민MC화’도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먼저 유재석은 프로그램을 유연하게 이끄는 MC로 잘 알려져 있다. 각 패널의 화학작용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러나 대중이 받아들이는 유재석 이미지는 그런 기능적인 부분이 아니다. 유재석은 프로그램을 이끄는 당당한 리더로 보이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만년계장’ 이미지다. 사회 시스템 내에서 지치고 찌들어 자기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는 ‘소극적 회사 인간’ 이미지다. 그리고 그런 ‘얍삽한’ 이미지를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유재석은 우리와 같은, 경제불황기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강호동도 타입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강호동은 프로그램을 역동적으로 이끄는 리더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카리스마적인 리더는 아니다. 사투리를 절대 고치지 않고 ‘촌놈’ 이미지도 버리지 않는다. 말 많고, 목소리 크고, 덩치 크고, 힘센 ‘촌놈’이다. 그래서 위협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은 푸근하고 든든한 리더가 된다. 경제불황기에 대중이 바라는 리더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모자란 부분이 많지만, 그만큼 어딘지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는 인물형이다.

   

유재석, 강호동과 함께 스타급 MC로 거듭나는 이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속성을 지녔다. 박미선은 전형적인 우리 시대 중년 기혼여성이다. 젊은 세대와 동세대 남성들에게 치이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내보려고 애쓴다. 사생활 영역으로 들어가면 남편은 잦은 사업실패를 겪고 있고, 자신이 벌어 가정을 이끌어간다. 경제불황기에 꼭 맞는 콘셉트인 것이다.

이휘재의 부활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성기 때 이휘재는 그저 ‘이 바람’이었다. 훤한 외모를 무기로 여성을 유혹하는 이미지였다. 그러던 그도 어느덧 중년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동안 인기 하락도 겪었고 숱한 스캔들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세상 무서운 것 알게 된’ 이미지가 형성됐다. 또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바람’이 갖은 고생을 겪고 난 뒤 ‘노총각 이휘재’로 거듭나며, 결혼 상대자를 찾으려 애쓰는 모습에 대중은 공감하고 있다.

 

예능은 늘 시대정서와 밀접한 관계

마지막으로 예능 프로그램의 콘셉트 변화도 짚어볼 만하다. 경제불황기에 화려하게 꽃피워, 이 시기에 꼭 맞는 캐릭터들을 갖게 된 예능 프로그램들은 이 콘셉트에 맞는 콘텐츠 개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리얼 버라이어티 열풍으로 한참 하락세를 겪다 부활한 KBS2 ‘개그콘서트’다. 이 프로그램의 구성 꼭지는 모조리 현재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남보원’으로 알려진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한 예다. 경제불황기 한국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가 ‘여성의 위치 변화’에 대한 남성층의 질시와 분노다. 사회 인식은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구조가 달라지니 당황감이 앞섰다. 더군다나 경제불황기는 보수적 사고를 부추기는 시기다. ‘남보원’은 이 같은 시대 정서를 대변해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분노를 한껏 부추기고, 다시 이를 와해하며 해소시킨다.

‘행복전도사’는 한술 더 뜬다. 아예 계급갈등적 요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부유층과 서민층 간 문화와 사고의 충돌을 묘사하며, 이를 풍자로 비틀어낸다. 불황기에 한껏 고조된 대중의 갈등 심리를 해소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짜증나는 대중심리를 독설로 풀어주는 ‘봉숭아 학당’의 ‘왕비호’ 캐릭터도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다. 독설 캐릭터는 이 밖에도 솔비 등에 의해 한동안 붐을 형성했는데, 가장 생명력이 긴 것이 ‘왕비호’다. 다른 이들이 충격 효과만을 줬다면, ‘왕비호’는 독설을 퍼붓는 대상의 핵심을 찔러주기 때문이다. ‘무작정 독설’ 시대는 끝나고 ‘내용 있는 독설’ 시대로 넘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현재의 예능 프로그램 열풍은 패널과 MC, 프로그램 자체의 콘셉트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경제불황 정서로 대표되는 대중 심리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불황이 지속되는 한 예능 프로그램 열풍도 지속되고, 또 더욱 거세지리라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예능 프로그램은 늘 시대정서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다. 드라마 장르 등도 물론 시대정서에 기댄 면이 많았지만, 예능 프로그램만큼 투철하진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의 역할 자체가 지치고 힘든 대중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빠르고 날카롭게 일시적으로 지워버린다. 대중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천착해 고민을 잊게 만든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갖은 비판은, 어쩌면 헛된 것일 수 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느니, 너무 저급하다느니 하는 비판까지 모두 그렇다. 현재 대중이 그 정도로 치우치고, 그 정도로 저급한 웃음을 원하기에 그런 예능 프로그램이 범람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경제불황 정서에 철저히 기댄 예능 프로그램 형식과 과도한 예능 프로그램 열풍도 비판할 것은 못 된다는 얘기다. 어쩌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모습을 가장 먼저 포착해 알려주는 것은, 심오한 사회과학 연구보고서가 아니라 주말 저녁에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 한 꼭지일 수도 있다.

 

“‘이런 된장’ … 빵 터질 줄 몰랐죠”
장안의 화제! ‘남녀탐구생활’ 김기호, 김지수 작가 “생활 바탕으로 대본 써요”

이지연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 chance@donga.com

 ‘공감의 예능력’을 발휘하는 김기호(왼쪽), 김지수 작가.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도 남자 몰라요. 사소한 것 하나부터 너무나 다른 남녀.”(‘남녀탐구생활’ 오프닝)

케이블채널 tvN의 ‘롤러코스터’ 속 코너 ‘남녀탐구생활’(이하 ‘남녀…’)은 소개팅 직전이나 대중목욕탕을 이용할 때, 군에 입대할 때와 같은 특정 상황에서 남녀가 어떻게 다르게 행동하는지를 그린 프로그램이다. ‘남녀…’를 쓴 김기호(33·남), 김지수(26·여) 작가는 누구나 아는 남녀의 차이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았던 내용을 사실적이면서도 과장되게 묘사해 큰 웃음을 주는 ‘예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09년 7월18일 케이블가구 시청률 0.54%(TNS미디어코리아)로 출발한 이 프로그램은 12월 현재 4%를 넘기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남녀 배우의 행동에 “맞아, 맞아”라고 박수 치며 웃는다. ‘우라질레이션’ ‘이런 된장’처럼 대본에 자주 등장하는 ‘욕설 같지 않은 욕설’은 젊은 층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인기를 누린다. 두 작가를 만나 이들이 발휘하고 있는 특별한 ‘예능감각’에 대해 물었다.

‘예능력’깨나 있다는 요즘 젊은이들의 상당수가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패러디하는 데 힘쓰고 있기에 이들에게 ‘영감’을 준 이 두 작가의 포스트모던한 감각이 궁금했다. 두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여자는 ‘당연’, 남자는 ‘유난’

대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궁금하다.

“주제가 정해지면, 대본의 기본 얼개는 내 생활을 바탕으로 하되 주변 사람에게 자료 조사를 한다. 내가 너무 ‘오버’해서 쓰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친구나 후배들에게 검증을 받는다.”(김지수)

 

‘남녀…’는 최근 TV에서 시도하지 않은 콩트 형식이다. 형식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었나.

“지난 5월쯤 ‘롤러코스터’ 팀이 모여서 새 코너 회의를 했다. 그때 한 남자 제작진이 ‘난 화장실에서 볼일 본 뒤 손을 안 닦는다. (오물이) 묻지도 않았는데 왜 닦느냐’고 반문하자 여자 제작진이 경악을 하더라. 그래서 남자 제작진이 ‘그럼 여자들은 어떻게 하느냐?’ 묻자 ‘남녀의 공중화장실 사용법’ 편에 소개된 과정(물티슈로 변기를 닦은 뒤 그 위에 휴지를 깔고 기마 자세로 볼일 보는 내용)이 나오더라. 남녀의 이런 행태 차이를 잘 살리면 재미있는 코너가 되겠다 싶었다. 책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보면 남녀의 큰 차이만 나온다. 우리 코너는 이 차이점들에 대해 아주 세세히 이야기한다.”(김기호)

이 프로그램이 왜 인기를 끈다고 보나.

“다들 아는 이야기인데 틀이 새로워서 시청자가 재미있어 하는 듯하다. 마치 ‘동물의 왕국’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드라마 형식으로 남녀 배우가 연기를 하고 제3자인 성우가 이들을 지켜보면서 설명해주는 방식이….”(김기호)

‘남녀…’는 7월 방송된 ‘공중화장실’ 편과 ‘대중목욕탕’ 편이 시청자에게 웃음을 주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대중목욕탕’ 편에는 샴푸와 팩, 화장품을 한가득 싸가지고 목욕탕에 간 뒤 다른 여자와 자신의 몸매를 비교하고, 사우나에서 실컷 땀을 뺀 뒤 살이 0.5kg밖에 안 빠졌다고 낙심하는 여자가 나왔다. 남자는 빈손으로 목욕탕을 찾아 누군가가 쓰고 간 때수건을 다시 쓰고, 목욕탕에 비치된 공용 로션을 바르는 광경이 그려졌다.

 

남녀 시청자의 폭넓은 공감대를 사는 게 관건이다. 두 작가는 평소 어떤 사람인가.

“나는 나 자신을 굉장히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주위 친구들이랑 같은 스타일이다. 그런데 내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남자들은 ‘유난’으로 여기더라. 회의 시간에 ‘롤러코스터’ 팀 여자 작가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으면 남자 작가들은 넋을 놓고 듣는다.”(김지수)

“나는 평범하디평범한, 정형돈 씨랑 비슷한 스타일이다. 무던하고 털털하다. 대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옮겨놓은 거다. ‘남자는 다 이래’라고 말하면서 남자들이 하는 행동이 여자들이 볼 때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내용이 되기도 했다.”(김기호)

 

재미 돋우는 ‘욕설’들

지금까지 나온 ‘남녀…’ 가운데 본인들의 실제 경험과 가장 유사한 모습은 어느 것인가.

“‘인터넷 사용’ 편이다. 여자들은 연예인 기사를 읽고 그 내용은 상관없이 여자 연예인의 몸매를 부러워하며 ‘다이어트해야겠다’고 결심한다. 또 과거에 나와 싸운 여자애가 있다면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볼까’라는 생각에 미니홈피에 가본다. 미니홈피에 갈 때는 들키지 않도록 치밀하게 ‘로그아웃’한 뒤 간다(웃음).”(김지수)

“‘동성친구 모임’ 편이 나와 비슷하다. 20대 때는 정말 매일 그렇게 술 마시고 놀았다. 대학 친구들이랑 놀 때는 그렇게 못하는데, 동네에서 만난 이른바 ‘불알친구’들이랑은 서로 가릴 게 없었다. 말도 막하고 시비 걸기도 하고.”(김기호)

 

‘우라질레이션’ ‘시베리안허스키’ ‘초절정 쓰나미’ 같은 단어는 어떻게 생각해낸 것인가.

“새로 생각해낸 단어도 있고, 웹 서핑을 하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해 사용한 단어도 있다. 요새 트렌드를 파악하려고 ‘디씨인사이드’ 같은 사이트에 자주 들른다. 전혀 생소한 단어를 쓰면 시청자들이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누리꾼 말투 중 재미있는 것이 많아서 참고를 한다.”(김기호)

코너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 하는 작가들의 부담도 커졌다. 이들은 “시청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져서 더 힘들어졌다”며 “‘연말의 지구대 풍경 탐구생활’처럼 남녀의 범주를 벗어난 탐구생활도 기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어라 신바람, 울려라 ‘여민락’(與民樂)
한국인은 모두가 하나 될 때 즐거움과 행복 느끼며 발전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 kdyi0208@naver.com

 

    우리 민족의 피 속엔 원래부터 예능의 ‘끼’가 숨겨져 있다. 절대적 빈곤과 경직된 사회 분위기 탓에 발현되지 못한 선천적인 ‘예능력’이 좋은 사회적 분위기를 맞아 이제야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우리 민족이 타고난 예능력의 유래, 흥과 신바람의 ‘필연적 관계’를 짚어본다.

한국인은 ‘내 집’ ‘내 마누라’ ‘내 부모님’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 집’ ‘우리 마누라’ ‘우리 부모님’이라 부른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기 때문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라나는 두 그루의 대나무를 보자. 지상에서 보면 각각의 대나무로 보이지만, 지하에서 보면 한 뿌리로 연결돼 있다. 그러니 지하를 기준으로 보면 두 그루의 대나무라 칭하기 어렵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몸은 별개지만 마음만큼은 하나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한마음’이란 말을 곧잘 쓴다.

한국인은 ‘하나 되기’를 좋아한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족보를 만드는 것도 할아버지를 찾아가면 ‘하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까닭이다. 지진, 태풍을 극복하느라 현재를 챙기기 바쁜 일본인에 비해 근원을 생각할 여력이 생기는 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하나 되자’는 말을 잘 쓴다. 외국인에게는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그들에겐 ‘협조하자’는 말은 있어도 ‘하나 되자’는 말은 없지 않은가. 하나 되기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정서는 ‘한국’이라는 나라 이름에도 나타난다. ‘한나라당’ ‘하나은행’ ‘우리은행’ ‘한겨레신문’ 등도 이런 정서에서 비롯됐다.

 

한(恨)을 부르는 이별과 고립 못 참아!

‘하나 되기’를 좋아하는 만큼 고립되는 것도 싫어한다. 이별을 잘하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국의 이별가와 외국의 이별가는 차원이 다르다. 외국의 이별가에선 이별을 미화하고, 이별을 하더라도 좋은 관계로 지내자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이별가는 떠나는 님에게 ‘가지 마라, 가지 마라’면서 ‘가거들랑 빨리 돌아오라’고 하고, 그래도 간다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라’며 이별을 용납하지 않은 채 처절히 절규한다.

그렇지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경쟁에서 이겨야만 하기 때문에 고립을 자처할 수밖에 없다. 경쟁에 익숙하지 않은 한국인이 경쟁하면 할수록 열 받아 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런 일로 하나가 되지 못하다 보면 한이 맺히게 마련이다.

두 마리의 돼지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한 마리는 원래부터 자신이 돼지라고 생각한다. 그런 돼지는 현재의 자기에게 불만이 없다. 열심히 돼지죽을 먹고, 열심히 돼지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다른 돼지는 마술에 걸려 돼지가 돼버린 신세다. 그 돼지는 돼지로 취급당한다는 것 자체가 불만이다. 돼지라 불리는 것도 싫고 돼지죽을 먹는 것도 싫다. 현재의 모습뿐 아니라 삶 자체가 한스럽다.

후자의 돼지가 한국인이고 그 한이 한국인의 한이다. 한국인에게 한이 많은 것도 그래서다. 아줌마는 ‘아줌마’로 불리는 것이 불만이고, 아저씨는 아저씨대로 ‘아저씨’라 불리는 것이 불만이다. 자신을 돼지(아저씨, 아줌마)가 아닌 고귀한 존재(왕자, 공주)라 여기는 까닭이다. 아줌마 대신 사모님이라 부르고, 아저씨 대신 사장님이라 부를 때 반색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반면 외국 아줌마에게 사모님이라고 부르면 자신을 잘못 본 게 아니냐며 불편해한다).

이 불만을 해소하려면 한을 풀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종교적인 깨달음과 학문적인 깨침이 필요하다. 그래선지 한국에는 예로부터 종교와 철학이 발달했다. 깨침이란 남과 내가 남남이 아니라 하나로 통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나는 너와 하나이고, 나는 모두이며 나는 하늘이고 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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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김홍도의 ‘점심`’, ‘고누도’ .

언제나 하나 될 준비 완료, 촉매제 필요

이런 깨침을 얻은 사람의 삶은 더 이상 개체적인 삶이 아니다. 개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 고통일수록 하나 된 삶을 사는 것은 행복이다. 이러한 행복이 다름 아닌 여민락(與民樂)이다. 여민락은 모든 사람과 하나가 될 때 나타나는 행복감이다.

여민락이란 말은 ‘맹자’에서 유래했다. 맹자는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음악을 하는 것이 더 즐겁다고 전제하고, 왕이 백성과 즐거움을 함께할 때 백성도 왕이 사냥을 하거나 풍악을 울리는 것을 좋아할 거라며 여민동락(與民同樂)이란 말을 사용했다(1445년 세종 27년에 여민동락의 의미를 빌려 ‘여민락’이라는 음악을 만들어서 궁중의 연향(宴饗)에서 많이 연주했는데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는 곡으로 평가받는다).

 

김홍도의 ‘풍속도첩’.

한국인은 남과 하나가 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사람은 원래 혼자라는 생각에 혼자서도 식당을 잘 가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선지 한국인은 언제나 하나 될 준비가 돼 있다. 어떤 촉매가 있기만 하면 바로 하나가 된다.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인이 보여준 놀라운 길거리 응원도 바로 그러한 예다. 그것은 하나가 된 한국인이 벌인 거대한 축제였다. 신바람이 나면 한국인은 하늘 같은 존재가 된다. 그래서 모두 성스러워진다.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는데도 길거리에 쓰레기가 남지 않았다. 외국의 언론들은 이를 기적인 양 보도했다.

한국 땅에는 가끔 신바람이 일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침체한다. 저 옛날 고구려시대 때 행하던 동맹(東盟), 부여에서 행하던 영고(迎鼓), 마한이나 예에서 행하던 무천(舞天) 등이 모두 신바람을 일으킨 촉매였다. 신라시대의 화랑이 성공한 것도 신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고, 고려 태조 왕건도 신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에 성공했다. 세종대왕의 정치는 신바람을 일으킨 정치였고, 이순신 장군의 전쟁은 신바람을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몽룡과 성춘향의 사랑도 신바람을 일으킨 사랑이었다. 이몽룡이 ‘암행어사 출두’를 외칠 때 한국인은 신이 난다.

한국인은 지금도 하나가 되고 싶어 목이 말라 있다. 그리고 신바람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다. 다만 촉매가 없어 촉매제를 기다린다. 촉매가 나타나기만 하면 바로 신바람이 날 것이고, 한국의 예술은 그 신바람을 타고 활활 타오를 것이다. 기다리지만 말고 우리 스스로 촉매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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