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시진핑
대륙에 뜨는 별 … 차기 대권 ‘0순위’
공산당 서열 6위 정치행보 부각…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최고 인기 가수
‘소박하고(平實) 자신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으며(低調) 온화한 가운데 겸허하고(謙和) 나서야 할 때는 대범하면서도 당당하다(大氣).’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새로 진입한 시진핑(習近平·54) 상무위원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진핑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벌써부터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퇴진하는 201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부의 최고지도자로도 거론된다.
그는 이번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일찌감치 후계자 소리를 들어온 경쟁자 리커창(李克强) 랴오닝(遼東)성 당서기를 제치고 중국공산당 권력서열 6위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아직도 경쟁해야 할 기간이 5년이나 남았다고 지적하지만, 앞으로 시진핑이 국가 부주석 자리와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차지한다면 차기 총서기 자리는 예약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예의·성실·겸허 당당한 품성 갖춰
시진핑을 여기까지 오게 만든 것은 그의 몸가짐이다. 예의 바르면서도 성실하고, 겸허하면서도 당당한 그의 품성을 차세대 지도자군 중에는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중국 고위 지도부에서 회자되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진핑은 미래가 밝을 수밖에 없다는 것. 왜냐하면 그의 이름 속에 조력자가 3명이나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간부로서 평소에 소박하고(平)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것.
그래서 정치분석가들은 그가 ‘4대 천왕(天王)’ 가운데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고 말한다. 4대 천왕은 이번에 중앙정치국에 진입한 5세대 선두주자들로 시진핑, 리커창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당서기, 보시라이(薄熙來) 상무부장을 가리킨다.
정치분석가들에 따르면 시진핑의 이런 장점은 중국 정치무대에서 매우 중요하다. 중국 정치는 ‘1인 독주체제’에서 점차 ‘집단 지도체제’로 옮겨가고 있다. 탁월한 최고지도자 한 명의 지도 능력보다 합리적인 다수의 지도력이 더 낫다는 게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중국 공산당의 결론인 것. 이번에 시진핑이 차세대 지도자군 가운데 선두를 차지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진핑에게는 유리한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과 정무원 비서장, 국무원 부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아버지 시중쉰(習仲勳·1913~2002)의 후광이다. 시중쉰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주요 조력자이자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렇다고 시진핑이 고위 관리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처럼 온갖 혜택을 누리며 자란 것은 아니다. 제1 야전사령 출신으로 펑더화이(彭德懷) 계열이었던 부친은 1962년 마오쩌둥(毛澤東)에 의해 반(反)혁명분자로 몰려 산시(陝西)성 오지로 하방됐다. 그래서인지 시진핑에게선 오만함이나 자만심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서민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그는 다른 태자당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한다.
1975년 마오쩌둥이 세상을 뜬 뒤 시중쉰은 복권됐다. 널리 알려진 바는 아니지만, 시중쉰은 경제특구 구상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광둥(廣東)성 서기 겸 성장으로 재직하던 79년 초 특구 설치의 필요성을 덩샤오핑에게 강력하게 제기했고, 덩샤오핑은 이를 받아들여 선전(深?) 주하이(珠海) 등 4곳에 특구를 설치했다.
굳이 따지자면 중국 개혁개방의 진정한 총설계자는 시중쉰인 셈이다. 고향 사람들은 그런 시중쉰을 자랑스러워한다. 그의 고향 산시성 푸핑(富平)현의 고속도로 입구에는 ‘시중쉰의 고향’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다.
1975년 부친의 복권과 함께 베이징으로 돌아온 시진핑은 칭화대학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뒤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耿彪) 부총리의 비서로 배치됐다. 겅뱌오는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로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부친 덕분에 배치를 잘 받은 것이다.
또한 그는 29세에 허베이(河北)성 정딩(正定)현 부서기에 임명됐다. 결혼도 하기 전인 32세엔 샤먼(廈門)시 부시장이 됐다. 이어서 연해 지역의 푸젠(福建) 성장과 저장(浙江) 성장을 잇따라 역임했다.
칭화방 출신 동부에서 경력 쌓아 … 한국과 깊은 인연
1997년 보시라이를 포함한 5세대 태자당 인사들이 중앙위원회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선거에서 대거 탈락했지만, 그는 덩샤오핑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 함께 중앙위원회 진입에 성공했다.
허베이(河北)에서 연마하고
푸젠(福建)에서 하늘로 올라
저장(浙江)에서 날개를 펴고
상하이(上海)에서 날다
시진핑의 경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1985년부터 무려 18년간 푸젠성에서 일했다. 이 시절 대만 자본을 많이 끌어들여 푸젠성의 부(富)를 크게 올려놨다. 저장성 서기로 있을 때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전국 최고인 3000달러까지 끌어올렸다. 대만을 사이에 끼고 있어 중국이 중시할 수밖에 없는 푸젠성과 저장성, 금융 중심지 상하이 등 중국 동부의 노른자위에서만 경력을 쌓은 셈이다.
이런 탓에 2002년 말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그가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이때부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장래에 ‘대임(代任)’을 맡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문은 정말 소문에 그쳤지만, 5년 뒤 그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진입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칭화대학을 나온 시진핑은 같은 대학 사회과학대학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다. 칭화대학을 고리로 후진타오와 연결되지만 단파(후진타오의 정치적 기반인 ‘중국공산주의청년단파’)와의 관계는 껄끄럽다. 2002년 그가 푸젠 성장에서 저장 성장으로 옮긴 것을 두고, 단파 쑹더푸(宋德福)가 서기로 내려온 데 따른 정치적 피난이라는 분석이 나왔을 정도다. 쑹더푸는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공청단 제1서기를 역임한 단파 출신의 핵심인물이다.
시진핑은 2002년 저장성 서기가 된 뒤 5년 만에 저장성을 중국에서 민간기업이 가장 발전한 성으로 키웠다는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에 따라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 서기가 비리 혐의로 축출되면서 지난 3월 후임으로 임명됐다. 상하이 당서기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대외적으로 중국 성장의 견인차로 상하이의 동력을 유지하면서 내부적으론 물갈이 인사 등 부패척결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또 민생문제에 집중했다. “인민이 생각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인민이 급하게 여기는 일을 먼저 처리하라.”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당정 주요 간부를 모아놓고 했다는 그의 말이다. 그는 특히 취업, 사회보장, 교육, 의료, 주택 등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태생적으로 성장우선주의자다. 그가 성장과 당서기를 지낸 푸젠성, 저장성, 상하이시는 모두 동부 연안으로 중국의 성장을 견인해온 곳이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한국에 지인이 거의 없는 리커창과는 이 점에서 차이가 난다. 시진핑은 저장성 서기로 있을 때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 복원을 승인했고,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는 데 기여했다. 2005년 7월 공산당 친선방문단 단장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한 데 이어 같은 달 18일엔 한국을 방문했다.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45)은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가수다. ‘중국 당대 민족성악의 대표가수’로 꼽히는데, 민족성악이란 민요 창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중국 특유의 음악 장르다. 인기 가도를 달리던 펑리위안은 1986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이던 시진핑을 만났다. 평리위안은 처음에 ‘늙어 보이고 촌티나는’ 시진핑에 실망했지만 대화를 할수록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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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직급 | 직책 | 나이 | 비고 |
후진타오(胡錦濤) |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당 총서기, 국가주석,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 주석 | 65 | 퇀파이 |
우방궈(吳邦國) | 〃 |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 66 | 상하이방 |
원자바오(溫家寶) | 〃 | 국무원 총리 | 65 | 친 후진타오 |
자칭린(賈慶林) | 〃 |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 67 | 상하이방 |
리장춘(李長春) | 〃 | 이데올로기 담당 | 63 | 상하이방 |
시진핑(習近平) | 〃 | 국가부주석(예상), 중앙서기처 (제1)서기 | 54 | 태자당 ★ |
리커창(李克强) | 〃 | 제1부총리(예상) | 52 | 퇀파이 ★ |
허궈창(賀國强) | 〃 |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 64 | 태자당 ☆ |
저우융캉(周永康) | 〃 | 중앙정법위원회 서기(예상), 현 공안부장 | 65 | 친 쩡칭훙 ☆ |
왕강(王剛) | 중앙정치국 위원 |
중앙보밀(保密)위원회 주임 | 65 | 장쩌민 측근 ▲ |
왕러취안(王樂泉) | 〃 |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당 서기 | 63 | 퇀파이 |
왕자오궈(王兆國) | 〃 | 전국인대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중화전국총공회 주석 | 66 | 퇀파이 |
왕치산(王岐山) | 〃 | 베이징 시장 | 59 | 태자당 ★ |
후이량위(回良玉) | 〃 | 국무원 부총리 | 63 | 계파 없음 |
류치(劉淇) | 〃 | 베이징시 당 서기 | 65 | 상하이방 |
류윈산(劉雲山) | 〃 | 중앙서기서 서기, 중앙선전부 부장 | 60 | 퇀파이 |
류옌둥(劉延東) | 〃 | 정협 부주석, 중앙통일전선공작부 부장 | 62 | 퇀파이 ★ |
리위안차오(李源潮) | 〃 | 중앙서기처 서기, 장쑤성 당 서기 | 57 | 퇀파이 ★ |
왕양(汪洋) | 〃 | 충칭시 당 서기 | 52 | 퇀파이 ★ |
장가오리(張高麗) | 〃 | 톈진시 당 서기 | 61 | 상하이방 ★ |
장더장(張德江) | 〃 | 광둥성 당 서기 | 61 | 상하이방 |
위정성(兪正聲) | 〃 | 후베이성 당 서기 | 62 | 태자당 |
쉬차이허우(徐才厚) | 〃 |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64 | 친 후진타오 ★ |
궈보슝(郭伯雄) | 〃 |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 부주석 | 65 | 상하이방 |
보시라이(薄熙來) | 〃 | 국무원 상무부장 | 58 | 태자당 ★ |
★표시는 신임. ☆표시는 정치국 위원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 |
02. 리커창(李克强)]
빼어난 능력에 공청단 인맥 탄탄 … 허난·랴오닝성 黨서기로 지도자 수업
시진핑(習近平·54) 전 상하이시 서기와 함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리커창(李克强·52) 전 랴오닝(遼寧)성 당서기는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 겸 국가주석 등 다른 7명의 상무위원과 여러 가지 면에서 확실히 다르다.
리 신임 상무위원과 시 신임 상무위원은 모두 50대 초중반으로 개혁개방 시기에 대학에 입학하고 사회에 진출한 ‘문화대혁명 이후 세대’라는 점과, 5년 뒤에는 중국 최고지도부의 핵심 멤버가 된다는 점에서 후 주석을 비롯한 4세대 지도부와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또 이번에 이들과 함께 상무위원이 된 허궈창(賀國强·64) 전 중앙조직부장과 저우융캉(周永康·65) 전 국무위원 겸 공안부장은 60대 인사로, 5년 뒤엔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하는 4.5세대라는 점에서 이들과 차이가 있다.
리 신임 상무위원의 평소 신조는 ‘신초(愼初·시작할 때처럼 신중하고) 신미(愼微·작은 일에도 신중하며) 신독(愼獨·혼자 있을 때도 삼가고 경계하며) 신욕(愼欲·물욕을 내지 않는다)’이다.
리 상무위원의 주변 인사들은 그를 “능력이 출중해 일을 잘하면서도 성과를 자랑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즐기는 관리”라고 평가한다. 그만큼 그는 자신을 잘 제어하고 관리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성실하게 일하는 자세에서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지만, 그렇다고 남을 혹사하며 부려먹는 스타일도 아니다. 그를 옆에서 지켜본 랴오닝성의 한 고위 간부는 “리 전 서기는 일벌레였지만 그렇다고 주말에 간부를 불러모아 회의를 열진 않았다”고 말한다.
일을 할 때 그는 조리 있고 질서정연하다. 아랫사람을 질책할 때는 절대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리 상무위원의 주변 인사 가운데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중을 상대로 연설할 때는 대부분 원고 없이 즉석에서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해박함에 놀라곤 한다.
리 상무위원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가 그들과 정담을 나누고 고충을 들으면서 정책 아이디어도 얻는다. 2004년 겨울부터 시작한 ‘판잣집 주민들에게 집 지어주기’ 정책도 빈민촌 현장에서 바로 결정한 것이었다.
주위 평판 좋은 청빈한 삶 즐기는 관리
청빈한 삶을 즐기는 그는 공무와 관련된 연회가 아니면 모두 정중히 거절한다. 지난해 부친상을 당했을 때 현지 관리들이 보낸 선물을 완곡하게 거절했으며,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리 상무위원은 대학시절 자유파 지식인들과 곧잘 어울렸다고 한다. ‘톈안먼 사태’ 이후 중국을 떠나 반체제 인사가 된 그의 대학 동기 왕쥔타오(王軍濤)는 “리커창은 예리한 말재주와 재능, 지혜를 갖춘 인물”이라며 그를 치켜세웠다. 왕쥔타오는 중국의 자유주의자이자 ‘톈안먼 사태’의 주역. 따라서 그의 찬사는 중국 정치체제하에선 오히려 감점 요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리 상무위원과 함께 베이징대학 법률학과에서 공부한 베이징대학의 유명 법학자 장밍안(姜明安) 교수는 “리커창은 동료들과 관계가 좋았고 사상도 매우 분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학시절의 사상이 지금의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찍이 현(縣)장을 지내고, 성(省) 정부에서 일한 청렴한 공무원이었다. 그의 청빈한 삶은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런 점은 후 주석의 후계자로 내정된 시 상무위원과 크게 차이나는 대목이다.
그가 어렸을 때 고향 안후이(安徽)성 펑양(鳳陽)현에는 3년간 큰 자연재해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한참 공부해야 할 시기엔 문화대혁명이 닥쳤다. 학교에서 배운 것은 많지 않았다. 태자당(太子黨) 출신인 시 상무위원과 달리 출생과 성장 모두 불운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는 책을 좋아해 고등학교 졸업 뒤 농장에 파견됐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부활했을 때 그는 순조롭게 베이징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세상을 꿋꿋이 헤쳐나가는 그의 재능은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할 정도다. 리 상무위원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향 농장에 배치됐으며, 2년 만에 농장의 당 지부 서기를 거머쥐었다. 23세의 늦깎이로 베이징대학에 들어간 그는 학생회 주석에 당선됐으며, 졸업할 때는 법률학과의 성적 우수생 4명에 포함됐다.
1982년 미국 유학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 대학 공청단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 공청단을 관장하던 후치리(胡啓立)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에게 발탁돼 공청단 중앙에 들어갔다. 출세길에 오른 것이다. 83년 그는 28세의 나이로 공청단 중앙서기처의 후보서기로 승진했고, 38세에는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올라 최연소 부장급(장관급) 인사가 됐다.
공청단 제1서기를 시작으로 그는 최연소 행진을 계속했다. 1997년 리 상무위원은 ‘5세대 주자’ 가운데 처음으로 15기 중앙위원에 당선돼 ‘당 중앙’의 성원이 됐다. 차세대 지도자군에서 우위를 확고히 다진 것이다.
공청단의 후보서기와 서기로 재직했던 1983~85년 3년간 그는 후진타오 주석과 함께 일했다. 후 주석은 그의 조리 있는 말솜씨와 박식함에 매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안후이성 지시(績溪)현 출신인 후 주석과 동향으로, 후 주석과의 인연으로 이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됐다. 하지만 그가 후 주석의 후광에만 기대 정치국 상무위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의 정치적 업적은 차세대 경쟁주자 가운데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다.
리 상무위원은 1998년 허난성 당부서기로 시작해 2004년 당서기를 끝으로 허난성을 떠날 때까지 6년간 재직하면서 낙후된 ‘농업 대성’ 허난성을 ‘농공(農工) 혼합경제’로 바꿔놨다. 이를 위해 그는 ‘중원(中原) 굴기(·#54366;起)’를 처음 제창했다. 2004년 중앙정부가 제기한 ‘중부(中部) 굴기’의 원류가 바로 허난성의 ‘중원 굴기’다. 그는 98년 31개 성 가운데 21위를 기록했던 허난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을 6년 만인 2004년 16위로 올려놨다. 그리고 98년 4308억 위안(약 58조9461억원)이던 허난성의 지역 총생산 역시 6년 만에 8554억 위안으로 2배나 늘려놨다.
능력보다 합리적 조정 요구하는 정치 상황이 마이너스 요인
2004년 12월 랴오닝성 당서기에 부임한 뒤에는 푸순(撫順)시의 34만5000호 판잣집에 대한 주택개량사업으로 120만명의 주택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인민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또한 동북진흥계획의 세부 항목으로 다롄(大連), 잉커우(營口), 단둥(丹東) 등 연해공업지구 개발을 위한 ‘5점1선(五點一線)’ 계획을 수립한 뒤 강력하게 추진함으로써 랴오닝성이 3년 만에 ‘낙후된 동북 3성’의 이미지를 벗을 수 있게 했다. 최근엔 단일 외자유치 규모로는 역대 최고인 인텔 반도체 공장을 다롄에 유치했다. 이 같은 치적으로 그는 언론에 얼굴을 내밀 기회가 많았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랴오닝성에서조차 그를 아는 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團派)’다. 퇀파이는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계열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 주석의 집권 2기를 맞아 중국 정치의 중심세력으로 부상했지만 퇀파이 출신은 ‘3다3소(三多三少)’의 장단점을 가진다는 평가가 많다. 즉 행정 관련 인사는 많지만 재경(財經) 인사가 적고, 지방 지도자 출신은 많지만 중앙 요직 경험자는 적으며, 학력이 높지만 현장 실무 경력이 적다는 것. 하지만 리 상무위원은 예외에 속한다. 그는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의 논문 ‘중국 경제의 삼원(三元) 구조’는 중국 경제학계의 ‘최고 논문상’인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을 수상했다. 대충 학위를 딴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이 있다. 지도자로서는 필수코스인 공업, 농업, 지방을 고루 학습했지만 중앙부처 근무 경험이 없다는 점이다. 허난성 재직 시절엔 탄광 가스폭발사고, 화재사고, 에이즈 감염사고 등 사회문제가 빈발했다. 특히 허난성 성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 12월25일 뤄양(洛陽)에서 311명이 사망하는 큰 화재가 발생해 인책될 뻔했다. 하지만 후 주석의 구명으로 2년 뒤 오히려 성장에서 당서기로 승진했다.
후 주석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상하이방(上海幇)과 태자당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계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시 전 상하이 당서기가 차세대 후계자로 급부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중국 정치가 최고 지도자의 덕목을 개인의 능력보다는 다양한 집단의 요구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지에 둔 것도 그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시 서기 뒤에 자기 이름이 불리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력으로 보나 연령으로 보나, 또 15년간 부장급 이상 직책을 역임한 정치 경력으로 보나 누구도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번 상무위원 진입에서 권력서열 7위를 기록해 6위인 시진핑에게 밀렸다. 중국에는 ‘머리 내민 새가 먼저 총을 맞는다(槍打出頭鳥)’라는 속담이 있다. 너무 빨리 후 주석의 후계자라는 점이 부각됐고,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던 것이다.
현재로서는 시 상무위원이 리 상무위원보다 한발 앞섰지만 그를 많이 따돌린 것은 아니다. 똑같이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진입했고, 앞으로 5년간 후계자 자리를 둘러싼 싸움에서 어떤 예기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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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허궈창(賀國强)]
잡음 없는 人事혁신과 조직관리 귀재
깔끔하고 투명한 일처리 높은 평가 … 푸젠·충칭 근무 땐 남다른 경영 수완 발휘
허궈창(賀國强·64·사진) 신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는 베이징 화공학원에서 무기물공학을 전공한 고급 엔지니어 출신이다. 그는 1967년 산둥성 루난(魯南) 화학비료공장에서 기술원으로 시작해 화학석유공업청 청장으로 재직할 때까지 20년간 화학석유 분야에서 근무했다. 테크노크라트로 오랫동안 일했지만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행정관료로 일하면서다.
인사비리 ‘12380 신고전화’ 개설 큰 호응
‘허궈창’ 하면 중국인들이 떠올리는 것은 ‘12380’ 신고전화다. 2002년 10월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에 임명된 그는 곧바로 대대적인 인사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바로 ‘12380’ 신고전화. 전국 어디서나 ‘12380’만 누르면 지방의 현장(縣長)과 중앙기관 처장(處長)급 이상 임용과 관련한 비리를 신고할 수 있다. 공산당 고위 지도자들끼리 속닥속닥 결정하던 간부들의 인사방식을 바꿔 국민이 직접 간부 임용에 참여하고 감독할 수 있는 길을 터놓은 것. 이를 위해 전국에 486개 ‘12380 신고’ 처리센터가 만들어졌다. 2004년부터 올해 초까지 3년간 직통전화를 통해 접수된 인사비리 사건은 무려 30만여 건. 그는 접수된 안건을 모두 철저히 조사해 관련 규정에 따라 처벌하게 했다.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 간부, 특히 지방 간부 사이에 만연한 매관매직(賣官賣職)과 ‘파오관야오관(保官要官·관직을 얻거나 승진을 위해 뛰어다니는 것)’‘다이빙티바(帶病提拔·문제가 있음에도 발탁하는 것)’ 풍조가 크게 줄였다.
그는 성(省)-시(市)-현(縣)-향(鄕)의 지방 간부 교체시기에 맞춰 2006년부터 민주적 추천과 평가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새 제도를 도입했다. 인재를 등용할 때는 반드시 집단토론을 거치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선발하되, 지역 최고책임자가 하급자에게 한두 마디 물은 뒤 곧바로 결정하거나 혼자 단독으로 결정하지 못하게 했다. 최고책임자가 남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 고집대로만 하려는 ‘이옌탕(一言堂)’ 폐단을 근본적으로 차단한 것이다.
그를 지도자로 모셨던 주민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만을 터뜨리지 않고 꿋꿋이 일을 해내는 그의 무실역행 자세를 높이 평가한다. 푸젠(福建)성 성장으로 근무하다 1999년 서부 지역의 관문인 충칭(重慶)시 당서기로 부임했을 때 일이다. 동부지역에서 일하다 와보니 서부는 궁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푸젠성에서 알게 된 홍콩과 대만, 푸젠성의 거상들에게 산성(山城) 도시인 충칭을 한 번만 둘러봐달라고 친필로 편지를 썼다. 도산에 직면한 각종 국영기업이 가득한 충칭에 동부의 자금이 오지 않으면 도저히 지역경제를 살릴 수 없었던 것. 그의 이런 정성에 대만과 홍콩, 푸젠성의 많은 기업가들이 감동했다. 그가 충칭시 서기로 재직하는 3년간 무려 10만여 명의 투자자가 몰렸고, 1000억 위안(약 12조2840억원)의 투자가 이뤄졌다. 특히 푸젠성 출신의 팔순 기업가 린원징(林文鏡) 씨를 끌어들여 50억 위안(약 6142억원)을 투자하도록 유도해 충칭의 대형 군수기업을 살려놓았다.
태자당 출신 범 상하이방 … 부패척결 시선 집중
푸젠성 사람들은 푸젠성 부서기부터 대리성장, 성장으로 재직한 그를 잘 기억한다. 푸젠성 발전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푸젠성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홍콩과 마카오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것을 깨닫고 ‘민강(?港·푸젠성과 홍콩)경제협력촉진회’와 ‘민아오( ?澳·푸젠성과 마카오)경제협력촉진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스스로 회장이 되어 민강타이( ?港臺·푸젠성과 홍콩, 대만) 금융토론회를 여는 등 투자 유치에 힘썼다.
그는 태자당(太子黨) 출신이다. 태자당이란 중국 공산당과 국가기관, 군부, 재계 고위층 인사의 자녀를 일컫는 말. 대략 4000여 명이 포진해 촘촘한 관계를 맺으면서 중국 정관계를 주름잡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전처 허쯔전(賀子珍)의 조카인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 참지 못한다. 충칭시 서기로 재직할 때 일이다. 그는 충칭시 우룽(武隆)현 센뉘산(仙女山) 진스량쯔(石梁子) 촌이라는 한 산촌마을에 갔다가 가난 때문에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는 즉석에서 두 촌민의 집과 ‘친척’관계를 맺고 자녀의 입학문제를 해결해줬다.
허 서기는 부하직원 25명을 선발해 각자 한 곳의 빈곤 농촌을 연결해주고 이들 빈촌이 일어설 때까지 도와주는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충칭시 당서기로 있는 동안 충칭은 창장(長江)강 상류의 경제중심으로 태어났다. 또 싼샤(三峽)댐 건설로 100만명 이상의 수몰민이 생겼지만 별다른 문제 없이 모두 이주시켰다.
그는 항상 주변을 깨끗이 했다. 성장과 당서기, 중앙조직부장 등 요직을 거쳤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친척이나 친구들이 이득을 챙기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그가 재임하는 지방에서는 친구들이 사업을 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특혜 의혹이 나올까봐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가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 임명된 것도 이런 청렴한 기상을 높이 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는 범 상하이방(上海幇)에 분류되기도 한다. 석유화학 분야에서 20년간 일하면서 탁월한 조직관리와 경영수완을 발휘해 행정관료로 발탁됐고, 이후 출세의 길에 들어섰지만 승승장구하게 된 데는 같은 태자당인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기 때문이다. 2002년 10월 당 중앙조직부장 자리를 물려받은 것도 쩡 부주석과 장 전 주석의 힘이 컸다.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를 끝으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난 쩡 국가부주석이 허궈창과 저우융캉(周永康) 신임 상무위원을 통해 ‘막후정치’를 펼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특정 계파의 정파적 이익에 맞춰 업무를 처리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청렴과 공명정대의 길을 걸어온 그가 중국 공산당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어떻게 뿌리뽑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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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저우융캉(周永康)]
내년 베이징올림픽 치안 진두지휘 … 쩡칭훙 후광 입은 석유 CEO 출신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직후인 10월22일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저우융캉(周永康·65·사진) 상무위원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같은 1942년 12월생이다. 후 주석이 1992년 정치국 상무위원이 됐으니 동갑내기보다 15년 늦게 상무위원회에 들어간 셈이다. 따라서 그는 이번에 함께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5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54), 리커창(李克强·52) 상무위원과 달리 ‘떠오르는 샛별’은 아니다.
경찰 정화, 대민 서비스 … 치안 확립 강경파
저우 상무위원은 5년 뒤인 2012년이면 70세가 되기 때문에 지난 호에 소개한 허궈창(賀國强·64) 상무위원과 함께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중국은 중앙정치국 위원은 70세, 부장(장관)급은 65세로 임관 나이를 제한한다. 하지만 최근엔 정치국 위원은 68세가 되면 물러나는 게 관행이 되고 있다. 저우와 허 상무위원은 후 주석 등 5년 전 상무위원이 된 사람들보다 늦었지만 이들과 동시에 물러나야 한다는 점에서 ‘4.5세대’로 불린다.
“설일불이(說一不二) 뇌력풍행(雷歷風行).”
한번 말하면 절대 두말(바꾸지) 않고, 말했다 하면 천둥이나 바람처럼 빠르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저우 신임 상무위원은 이처럼 모든 일에 태도가 분명하고 확실한 사람이라는 게 한결같은 평이다. 2003년 1월 그가 국무원 공안부장에 임명됐을 때 일이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해이해진 경찰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5조 금령(禁令)’을 내렸다. 총기 사용과 관리 규정을 어기는 것, 총기를 휴대한 상태에서 술 마시는 것, 술 마신 뒤 운전하는 것, 근무시간에 술 마시는 것, 도박 등 5가지를 엄금했다. 만약 이를 어기면 경찰을 떠나게 하고 직속상관에게 관리책임까지 묻겠다고 공언했다.
한국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중국에서는 일상사처럼 일어나는 경찰들의 ‘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한 개혁조치였다. 저우 부장의 첫 금령 지시를 받은 공안부 산하 180여만 경찰은 이번에도 이전과 비슷한 엄포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달랐다. 2003년에만 988명이 적발돼 387명이 경찰직을 떠나야 했다. 561명의 상관에게는 관리책임을 물었다. 이처럼 강력한 단속이 계속되자 3년 뒤인 2006년엔 위반자가 394명으로 60% 이상 크게 줄었다.
경찰 조직을 정화한 뒤 그는 대민 서비스의 품질 향상에도 힘썼다. 4요(要) 운동과 4개 견결(堅決)이 그것이다. ‘4요’란 사람(경찰)은 정신을 필요로 하고(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어야 하고), 물건은 정결을 필요로 하며, (민원인과) 말할 때는 온화해야 하고, 일을 할 때는 공도(公道)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4개 견결’은 경찰은 천리(天理)를 위배해 민중의 분노를 사는 악성 사건을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민중의 이익을 침해하면서 멋대로 벌금을 매기거나 이런저런 명목으로 잡비를 거두지 말며, 인권을 침해하거나 인격을 모독하는 짓을 하지 말고, 경찰이 오락실을 경영하는 데 절대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기층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라, 기초를 잘해라, 기본 능력을 갖춰라’라는 ‘3기(基)운동’을 펼치면서 ‘민원인을 국장이 직접 맞이하고 사건은 모두 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는 민원사건 처리지침을 시행했다. 그가 민원사건 처리에 특히 신경 쓴 이유는 민원을 잘못 처리하면 불만이 터져나와 사회불안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는 불법적인 시위나 소요사건을 강력히 대처했다. 치안문제에 관한 한 강경파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2003년 이후 계속 늘던 집단소요 사건은 지난해부터 줄어들기 시작했다. 1998년 국토자원부장으로 일할 때도 토지개발의 난맥상과 주먹구구식 자원개발, 어족자원 남획, 불법적인 환경오염을 단속했다.
그는 곧 중국 공산당 중앙정법위원회 서기를 맡을 예정이다. 중앙정법위원회는 공안 부문과 국가안전·사법·민생안전 부문, 법원·검찰 등 사법과 치안 분야를 총괄하는 최고 사법지도기관이다. 지난 5년간 공안부장으로 재직하며 공안을 장악하고 치안을 잘 유지한 것이 평가를 받은 셈이다.
10년 정치 경력 … 쩡 부주석 대변자 역할 예상
하지만 내년엔 또 다른 시험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베이징(北京)올림픽이다. 이를 안전하게 치르는 게 그의 임무다. 중국 정부는 독립을 원하는 소수민족이나 종교 세력, 테러 세력이 올림픽을 틈타 크게 준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예부터 인재가 많이 배출된 장쑤(江蘇)성 우시(無錫) 출신이다. 특히 그가 태어난 어후(鵝湖)진은 유명인사가 많다. 수학자 화헝팡(華?芳), 음악가 왕선(王莘), 만화가 화쥔우(華君武)가 모두 어후진 사람이다. 또 물리학자 젠위창(錢偉長), 국학대사 첸무(錢穆), 국악가 류톈화(劉天華) 등도 어후진의 당커우(蕩口) 중학교를 졸업했거나 그곳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당커우 중학교는 65년의 역사를 지닌 지방의 명문 중학교다.
저우 상무위원의 정치 경력은 길지 않다. 1998년 국토자원부 부장을 시작으로 10년 정도다. 저우 상무위원 하면 많은 사람들은 ‘공안통’으로만 생각하지만 실제는 석유 전문가다. 이번에 정치국 위원에서 물러난 ‘철의 여인’ 우이(吳儀·69) 부총리와 같이 대표적인 ‘석유방’이다. 그는 1966년 베이징석유학원을 졸업한 뒤 중국 최대 유전인 다칭(大慶)유전 엔지니어를 시작으로 중국석유천연가스총공사(CNPC) 사장을 거쳐 98년 국토자원부장에 오르기까지 32년간 줄곧 석유업계에서 일했다.
석유 분야에서만 근무하던 그가 출세길에 들어선 데는 1990년대 말부터 형성된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과의 친분이 크게 작용했다. 쩡 부주석은 그를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에게 천거했고, 고향이 그와 같은 장쑤성인 장 전 주석은 그를 직접 챙겼다. 2002년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면서 공안부장을 맡게 된 것도 쩡 부주석의 힘이 컸다. 그는 쩡 부주석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그가 허 상무위원과 함께 이번에 물러난 쩡 부주석의 막후 영향력을 대변할 것으로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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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리위안차오(李源潮)]
640만명 공산당 간부인사 좌지우지 … 장쑤성 서기로 활약 차기 상무위원 ‘0순위’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중앙조직부장에 임명된 리위안차오(李源潮·57·사진) 전 장쑤(江蘇)성 당서기. 중앙조직부장은 7336만명인 중국 공산당원 가운데 640만명의 간부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당내 핵심 요직이다. 제17차 당 대회 이전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과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의 측근인 허궈창(賀國强) 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이 자리를 맡고 있었다. 2002년 말 당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최근까지도 이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지 못했던 것이다.
리 부장은 후 주석의 신임을 받는 ‘퇀파이(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의 핵심 멤버다. 퇀파이는 후 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 공산당 내 정치파벌 중 하나다. 현재 중국의 정치권력은 퇀파이와 장 전 주석을 영수로 한 상하이방(上海幇), 쩡 부주석을 핵심으로 한 태자당(太子黨)이 골고루 차지하고 있다.
골고루 잘사는 ‘조화사회 표준 지표’ 고안
리 부장은 후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를 하던 1983년 12월부터 약 2년간 후 주석과 함께 일했다. 후 주석은 82년 12월 서기처 서기로 선출돼 84년 12월 제1서기로 승진했는데, 그때 같이 일하던 사람들로는 리 부장을 비롯해 리커창(李克强) 상무위원, 류옌둥(劉延東) 정치국 위원이 있다. 이들 3인은 현재 퇀파이의 핵심 멤버이자 후 주석의 ‘측근 중 측근’이다. 리 부장은 당시만 해도 서기처 서열에서 후보위원에 불과하던 리커창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하지만 후 주석과의 인연으로 승승장구한 리 상무위원과 달리 리 부장은 서기처 서기를 마친 뒤 중앙대외선전소조 1국장, 중앙대외선전소조 부조장, 중앙대외선전판공실 부주임, 국무원 신문판공실 부주임, 문화부 부부장 등 약 10년간 한직을 떠돌아야 했다. 89년 톈안먼 사태 당시 공청단 일부 간부들이 학생시위를 지지한 데 책임을 지고 류옌둥과 인책됐던 것. 이로 인해 그는 리커창에 뒤졌고, 공청단의 5세대 1인자에서 2인자로 전락했다.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장쑤성 서기로 임명된 2002년부터. 경제성장 방식의 전환 필요성에 대해 일찍이 후 주석과 교감을 나눴던 그는 다른 동부지역 성 지도자들이 중앙정부가 추진하는 ‘과학발전관’과 ‘조화사회론’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과 달리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그는 장쑤성 당서기로 취임하자마자 종전의 구호였던 ‘강성부민(强省富民)’을 ‘부민강성(富民强省)’으로 바꿨다. 앞뒤 글자만 바꿔놓은 것이지만, 전자는 물질을 우선시하고 후자는 인간을 본위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다.
장쑤성의 발전계획도 국내총생산(GDP)의 성장만을 중시하는 방식에서 성내 전 지역이 잘사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장쑤성은 당초 경제가 발달한 창장(長江)강 유역의 쑤난(蘇南) 경제권과 쑤난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살 만한 쑤중(蘇中) 경제권, 역사적·지리적 원인으로 경제가 낙후한 쑤베이(蘇北)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의 성에 제1세계부터 제3세계가 동시에 존재했던 것.
그는 이런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2005년 3월 ‘쑤베이 진흥을 위한 산업건설 전략’을 세우고 산업과 재정, 과학기술, 노동이 쑤난에서 쑤베이로 흐르도록 ‘4개 전이(轉移)’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고정자산 투자와 재정수입, 외자도입, 수출액 등 각종 경제지표에서 사상 처음 쑤베이가 쑤난의 성장속도를 추월하는 효과를 거뒀다.
그는 제17차 당 대회에서 당장(黨章)에 지도이념으로 올라간 ‘과학발전관’도 적극 추진했다. 2004년 4월 장쑤성의 민영 철강회사인 톄번(鐵本)이 불법적으로 서우두(首都)강철의 2배 크기로 확장하려 하자 그는 이를 과잉투자로 규정해 아예 톄번의 문을 닫아버렸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000여 개의 과잉투자 항목을 모두 취소하거나 연기했다. 이로 인해 장쑤성의 과잉투자 현상은 확실히 잡혔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이를 거시조정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았을 정도다.
5세대 4대 천왕 … 학력도 다채로워
올해 5월 중국의 3대 호수 중 하나인 우시(無錫)의 타이후(太湖)가 오염으로 녹조현상이 나타나 식수로 쓸 수 없게 되자 그는 단호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현장지도를 통해 “장쑤성의 GDP가 앞으로 15% 줄어도 좋다”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업체는 바로 퇴출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의 말은 엄포가 아니었다. 그는 사건 발생 두 달 뒤 화공 야금 인쇄 염색 제지 전기도금 등 폐수를 많이 배출하는 호수 주변 업체 2150개를 퇴출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GDP만 끌어올리면 ‘만사 오케이’로 여겨온 업체와 지방관리의 환경의식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이런 정책들이 잘 발전해나가던 장쑤성의 발목을 잡은 것도 아니다. 최근 3년간 장쑤성의 발전속도는 전국 3위를 기록했다. 실업률 역시 계속 내려가고 있다. 중국 중앙정부가 최근 내세우는 ‘좋으면서도 빠른(又好又快)’ 발전을 먼저 실천한 셈이다. 후 주석은 이런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 “장쑤성이 전국에서 솔선수범해 경제발전 방식의 전환과 샤오캉(小康·1인당 GDP 3000달러 정도의 그런대로 잘사는 사회) 사회의 건설을 착실하게 관철하고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리 부장은 시진핑 리커창 보시라이(薄熙來) 등과 함께 5세대 4대 천왕(天王)으로 불린다. 후 주석이 권력에서 물러난 뒤 다음 정권은 이들 4명이 핵심 권력을 휘두를 것이라는 얘기다. 시진핑 리커창과 달리 리 부장과 보시라이는 이번에 정치국 상무위원에 들지는 못했지만 다음 당 대회에서는 0순위로 선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가 중앙조직부장에 임명된 것은 후 주석이 집권 1기(2002년 말~2007년 말)와 달리 2기(2007년 말~2012년 말)엔 자신의 뜻대로 인사를 하게 됐음을 의미한다. 실제 조만간 이뤄질 인사에서는 공청단 계열이 대거 요직을 차지할 것이라는 소문이 많다. 하지만 공청단 세력은 인력풀이 적은 데다 상하이방과 태자당의 견제가 여전히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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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보시라이(薄熙來)] 태자당 대표주자 ‘다롄의 보물’ 명성
가문 후광과 정치적 업적 조화 … 저돌적 업무 추진 스타일에 호불호 뚜렷
중국에서 ‘보시라이(薄熙來·사진)’ 하면 곧바로 태자당(太子黨)을 떠올린다. 태자당은 중국 고위 관료의 자제로서 당정군의 핵심 요직에 포진한 인사를 말한다. 4000여 명에 이르며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영수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상하이방(上海幇)과 함께 3대 정치권력 계파다.
186cm의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그는 누가 봐도 태자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보이보(薄一波·1908 ~ 2007)의 둘째 아들. 장인 구무(谷牧) 역시 부총리를 지냈다. 덩샤오핑(鄧小平)과 절친했던 보이보는 3세대 지도부 막후에서 최종 결정권을 행사했던 ‘8인 원로’ 가운데 하나다. 그는 장쩌민-후진타오 체제 확립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그렇다고 올해 가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17차 당 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그가 아버지 후광으로만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아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보시라이는 아버지 덕분에 곧바로 중앙서기처 연구실과 중앙판공청에 배치됐다. 하지만 2년 뒤인 1984년 지방 근무를 자청해 랴오닝(遼寧)성의 낙후한 농촌 진(金)현 부서기로 배치됐다. 중앙에서 내려간 그는 지방보호주의를 타파하려 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지방 세력의 야유와 조롱뿐이었다. 보이보는 좌절하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이렇게 조언했다.
다롄시 12년간 근무하며 ‘선진’지역으로 탈바꿈시켜
“실제 행동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라.”
지방보호주의가 왜 나쁜지를 행동으로 보여줘 다른 사람이 따라오게 하라는 권고였다. 그곳에서 4년간 근무하다 다롄(大連)시 상무위원으로 떠날 무렵 다롄시 진저우(金州)구로 행정구역이 바뀐 진현은 향진 기업, 가족계획, 교육, 체육, 과학기술 보급 등 10여 개 분야에서 모두 ‘선진’ 지역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시 선전부 부장부터 시 서기까지 12년간 근무한 다롄시는 보시라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다롄이 ‘북방의 홍콩’으로 불리게 된 것도 보시라이 덕분이다. 다롄시 사람들은 축구와 복장, 보시라이를 합쳐 ‘다롄 삼보(三寶)’라고 일컫는다.
랴오닝 성장으로 재직한 2001~2004년엔 낙후한 랴오닝성의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랴오닝성의 사업가 1000명을 대동하고 중국 남부의 잘사는 광둥(廣東)성을 찾아가 상품 전시와 경제협력 상담을 벌이며 벤치마킹하려 노력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가 추진한 ‘동북진흥’ 정책은 2003년 중앙정부의 국가전략으로 채택됐다.
이처럼 시골 현 부서기에서 시작해 20년 만에 성장을 거쳐 중앙 상무부장까지 한 걸음 한 걸음 올라온 그지만 세상의 시선이 곱지는 않다. 그의 정치적 업적도 관계가 좋은 매체에 의해 부풀려졌다는 말이 많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 배경엔 그의 업무 스타일과 성격이 있다.
한때 차기 총리감으로 거론됐지만 지금은 기세 한풀 꺾여
한밤중에도 부하를 찾아 업무를 물어보는 것은 그의 장기다. ‘심야에 휴대전화로 찾기(半夜機叫)’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다. 각종 행사와 접견 등으로 근무시간에 업무를 처리할 여유가 없었던 그는 대개 밤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 업무를 처리하고 퇴근했다. 그러다 보니 한밤중에 전화로 부하를 찾는 일이 많았다. 혹시나 전화를 받지 못한 간부에겐 불호령이 내려졌다. 그는 밤 11시 이전에는 절대 휴대전화를 꺼놓지 말 것을 지시했다. 11시 이전에 잠을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하는 간부에게는 “업무가 적어 그렇게 빨리 자느냐”며 다른 일을 추가로 안겼다. 당연히 아랫사람에게 인기가 좋을 리 없었다.
랴오닝 성장 재직시절엔 업무에 간섭하는 원스전(聞世震) 당서기에게 “나는 장쩌민과 주룽지(朱鎔基)가 임명했으니 당신은 당무나 봐라”며 행정업무에 간여하지 못하게 했다. 화가 난 원 서기가 중앙에 올라와 “나를 자르든지 보시라이를 내쫓든지 하라”고 요구했을 정도다. 그래선지 그가 2004년 랴오닝 성장을 마치고 중앙으로 올라올 때 환송연에는 서기는 물론 부서기조차 불참해 썰렁한 분위기였다.
중국에서는 벼슬길에서 좌절하지 않으려면 “남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고 남이 걸은 길을 그대로 걸으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보시라이는 이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다롄 시장으로 근무하던 1993년 홍콩의 한 기자가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다롄 시장에 임명된 게 아버지 덕분 아닌가요?”
그는 오늘의 그가 있게 된 데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생산력 발전을 중시하는 덩샤오핑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1966년 주자파로 몰려 문화혁명 기간 5년 동안 노동학습반에 들어가 강제노동에 시달린 과거를 털어놓으며 시련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그 시련 때문에 자유와 민주, 인간의 존엄성과 법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하지만 올해 초 보이보가 99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버지 후광이 사라지는 것 같다. 3년 전 그가 상무부장에 임명됐을 때는 차기 총리감은 보시라이라는 추측이 많았지만 지금은 경제부총리 물망에도 오르지 않고 있다. 그는 내년 초 왕양(汪洋) 충칭시 서기가 광둥성 서기로 옮기면 그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왕양 서기는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로 보 상무부장보다 여섯 살 어리다.
현재 58세인 그는 4세대 지도자도 5세대 지도자도 아닌 4.5세대 지도자다.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다 해도 2017년엔 나이가 68세가 돼 5년 만에 상무위원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올해 초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그는 영안실에서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아버지의 후광이 사라진 지금 그가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개척해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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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왕양(汪洋)]
“앞으로 특별한 요청이 없는 한 지도자 동정은 1면에 싣지 마라.”
지난해 말 왕양(汪洋·52·사진) 충칭(重慶)시 당서기가 충칭시 지역신문에 내린 지시다. 그는 중앙 지도자의 일정이나 연설 등 특별히 중요한 내용이 아닌 한 모두 2면 뒤로 기사를 돌릴 것을 요청했다.
‘땡전 뉴스’가 사라진 지 오래인 한국에서는 대통령의 동정일지라도 뉴스 가치가 없으면 싣지 않지만, 중국은 다르다. 매일 오후 7시 전국에 동시 방영되는 ‘신원롄보(新聞聯播)’는 사실상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의 동정 뉴스나 다름없을 정도다. 항상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시작으로 우방궈(吳邦國)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순으로 그날의 지도자 활동이 전해진다.
지방 뉴스도 마찬가지다. 성(省), 직할시, 자치구의 당서기부터 서열에 따라 기사가 배열된다. 이런 점에서 왕 서기의 지시는 ‘천지개벽’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어 당 지도부와 관련한 기사도 1000자가 넘지 않게 하고, 라디오와 TV는 3분이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그는 “독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지도자들이 어디에 가서 뭘 하는지가 아니다”라면서 “앞으로 매체는 서민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소식들을 더 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2006년 1월 ‘충칭일보(重慶日報)’ 1면에 78건이나 실렸던 지도자 기사는 올해 1월 41건으로 크게 줄었다.
충칭 근무할 때 주민 식사대접·기념품도 사양
백성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백성을 섬기는 지도자로서의 왕 서기 모습은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가뭄이 심하던 지난해 여름 그는 농촌의 채소시장을 방문했다. 채소 파는 농민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는데, 옆에 있던 수행원이 농민에게 앉아서 얘기하지 말고 일어서서 답하라고 했다. 그가 손으로 제지했지만 수행원은 재차 농민에게 재촉했다. 그러자 화가 난 그는 농민이 파는 고추바구니에서 큰 고추를 꺼내 수행원에게 던지며 말했다.
“이봐, 우리가 공복(公僕)인데 우리가 일어서서 얘기해야지, 물건 파는 농민에게 몇 마디 때문에 일어서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한번은 그의 현지시찰 차량을 위해 경찰이 교통통제를 실시해 많은 시민들의 차량이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보고 당장 길을 터주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는 “아직도 백성 위에 군림하는 등 사상해방이 안 된 관리들이 있다”면서 “이들이 서민을 돕지는 못할망정 되레 괴롭히고 있다”고 일갈했다. 능력은 뛰어나지만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오히려 국민에게 폐만 끼치는 관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단 한 번의 실제 행동이 (모든 것의 정수를 모아놓은) 강령보다 낫다”고 말하는 그는 쓸데없는 공론보다 행동을 중시한다. 그래서 책상머리에 앉아 일을 하기보다 밖으로 시찰을 나갈 때가 더 많았다. 지난해 충칭에 큰 가뭄이 들었을 때도 그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현장을 뛰며 가뭄 극복에 진력했다.
그가 광둥(廣東)성 당서기로 발령나 11월30일 충칭을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눈물로 전송했다. 기업가인 랴오창광(廖長光) 씨는 “그는 실무에 힘쓰고 청렴하며, 항상 서민에게 친근하고 올바르며 진실한 사람이었다”면서 “한번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지만 끝내 응하지 않았고 기념품도 모두 돌려보냈다”며 아쉬워했다. 충칭시 우룽(武隆)현 훠루(火爐)진 바오펑(保峰)촌의 농민 왕쿤(王坤) 씨는 “왕 서기가 며칠 전에도 왔을 정도로 오지인 이곳까지 관심을 갖고 돌봐줬다”면서 “돼지 닭을 잘 기르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을 절대 중단하지 말라며 돈까지 주고 갔다”고 말했다.
이처럼 남다른 업무 태도로 그는 젊었을 때부터 인정받아 누구보다 승진이 빨랐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치가 안정기에 들어선 다음 승진이 가장 빨랐던 3인은 후 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상무위원 그리고 왕 서기다.
리 상무위원은 이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28세에 이미 공청단 중앙학교 부부장과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로 청장급에 승진했고, 2년 뒤엔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차관(부부장)급에 올랐다. 이어 38세에 장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거머쥐고, 43세에 당시 최연소로 성장급에 승진했다.
후 주석 역시 출발은 늦었지만 42세에 장관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역임한 데 이어, 이듬해 43세에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가 됐다. 그리고 49세에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는데, 후 주석의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30대 초반에 시장 지내 ‘갓난아기 시장’ 별명 듣기도
17세에 공장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왕 서기 역시 누구 못지않게 승진이 빨랐다. 26세에 안후이(安徽)성 쑤(宿)현 부서기에 이어 이듬해엔 처장급인 공청단 안후이성 선전부 부장에 올랐다. 이어 33세에 청장급, 38세에 차관(부부장)급이 됐다. 리 상무위원보다는 못하지만, 집안 배경이나 이끌어주는 사람 없이 자력(自力)으로 올라섰다는 점에서 더욱 돋보인다.
30대 초반에 안후이성 퉁링(銅陵)시 시장을 할 때는 전국에서 가장 어린 청장급 간부 가운데 한 명이었기 때문에 ‘와와(娃娃) 시장’이라 불렸다. ‘와와’란 갓난아기를 일컫는 중국어다. 이처럼 젊은 시장이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은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하면서 특별히 그를 접견해 격려했다. 38세로 안후이성 부성장에 임명될 때도 당시 전국 최연소였다.
충칭시 사람들은 그가 충칭시 서기로 재직하면서 충칭시를 농공병진의 모범지역으로 만든 것에 감사한다. 그 또한 충칭시를 떠나면서 “나는 영원한 충칭인”이라며 충칭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안후이성에서 태어나 1999년 국가발전계획위원회 부주임으로 베이징(北京)에 올라오기 전까지 안후이성에서만 27년을 근무한 정통 안후이방(安徽幇)이다. 현재 안후이방은 후 주석을 비롯해 우 상무위원장, 리 상무위원, 왕 서기, 왕민(王珉) 지린(吉林)성 당서기, 추보(儲波)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당서기 등으로 구성돼 있다.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9명 가운데 3명이 안후이성 출신이다. 중국의 태양은 안후이성에서 비추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왕 서기는 현재 25명 중앙정치국 위원 가운데 가장 어린 데다 후 주석과 같은 공청단 출신이고 고향도 같아, 2012년 18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을 예약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정치 분석가들의 지배적인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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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류옌둥(劉延東)] 剛과 柔 겸비한 자수성가형 권력자
공장 노동자로 시작해 공직에서 출세가도 … 해외까지 인맥 넓은 마당발 ‘정평’
10월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직후 선출된 25명의 중앙정치국 위원 가운데 류옌둥(劉延東·62) 위원은 홍일점이다. 류 신임 위원은 곧잘 ‘철의 낭자’로 불리는 우이(吳儀·69) 부총리에 비견된다. 중앙정치국 위원 중 홍일점이라는 점도 같거니와, 말 그대로 자수성가해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과거 장칭(江靑) 예췬(葉群) 덩잉차오(鄧穎超) 등 3명이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된 적이 있지만 이는 모두 정계 실력자인 남편의 후광을 입은 경우다. 장칭은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고, 예췬과 덩잉차오는 각각 린뱌오(林彪)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부인이다.
하지만 우 부총리와 류 위원은 다른 점도 있다. 바로 이미지다. 우 부총리 하면 ‘여전사(女戰士)’를 떠올리지만, 류 위원은 원숙함이 묻어나는 미모의 여인을 연상케 한다.
강철 같은 이미지의 우 부총리와 달리 ‘중국 정계의 미인’으로 불리는 류 위원은 일에서는 굽힐 줄 모르는 의기를 보이지만,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는다. 중화권 매체는 이런 류 위원을 ‘굳셈과 온유함을 함께 지닌(剛柔相濟) 여인’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미모에 뛰어난 패션감각으로도 유명세
류 위원은 패션감각도 뛰어나다. 2004년 5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부주석과 중앙통일전선공작부(이하 중앙통전부) 부장 자격으로 홍콩을 방문했을 때 그는 하루 4차례 치러진 행사 때마다 옷을 갈아입었다. 옷마다 행사 내용과 잘 어울리는 데다 그의 우아하고 기품 있는 자태를 멋지게 표현해 홍콩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이는 홍콩에서 ‘류 패션 선풍’이 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류 위원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소속이면서 당·정·군 고위직 인사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太子黨) 출신이다.
부친 류루이룽(劉瑞龍)은 중국 공산당 혁명운동에 참가한 혁명 원로였다. 항일전쟁 때 부친은 대장정에 참여했고, 인민해방군 제3야전사령군 후근사령원(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건국 뒤엔 상하이(上海)시 당위원회 비서장과 농업부 부부장을 지냈다.
이처럼 집안 배경은 좋았지만, 그는 부친의 후광에 따라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중앙 최고 행정기관인 국무원 판공청에서 비서로 일했던 시진핑(習近平) 상무위원과는 달리 화공공장의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0년 칭화(淸華)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허베이(河北)성 탕산(唐山)시 카이핑(開平)현의 카이핑 화공공장에서 기술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해 10년간 허베이성과 베이징시의 화공공장에서 일했다.
그가 공직자로 변신한 것은 1980년 베이징시 당위원회 조직부 간부를 맡으면서부터. 특히 82년 공청단 중앙서기처에서 후 주석과 일하면서 출세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1982년부터 84년까지 그는 후 주석과 함께 중앙서기처 서기로 근무했다. 84년 후 주석이 제1서기로 승진한 뒤에도 중앙서기처 서기로 1년 더 일했다. 중앙서기처 서기와 함께 83년부터 전국청년연합 주석직도 맡았던 후 주석 밑에서 부주석으로 일한 그는 85년 4월 후 주석이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발령나자 주석직을 물려받았다.
후 주석과의 인연으로 치면 같은 ‘퇀파이’ 가운데 리커창(李克强) 상무위원이나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정치국 위원보다 더 끈끈한 셈이다.
그는 30년에 이르는 공직생활 대부분을 공청단과 중앙통전부에서 보냈다. 특히 중앙통전부에서는 1991년 부(副)비서장을 시작으로 정치국 위원에 오른 뒤 중앙통전부 부장 자리를 두칭린(杜靑林) 쓰촨(四川)성 당서기에게 물려줄 때까지 무려 17년간 근무했다.
중국 공산당 중앙통전부는 대만과 홍콩, 마카오, 화교는 물론 부녀연합회, 공회 등 연결되지 않은 조직이 없을 정도다. 류 위원의 친구는 사해(四海)에 모두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요직 이동 기회 가졌지만 잇따라 쓴잔
하지만 그는 최근 들어 잇따라 쓴잔을 마시고 있다. 후 주석은 천량위(陳良宇) 상하이시 당서기의 낙마로 빈자리에 류 위원을 천거했지만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반대에 부딪혀 시진핑 당시 저장(浙江)성 서기에게 내주고 말았다. 류 위원이 후 주석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정치국 위원에 오르긴 했지만 이번에도 당초 예상했던 우 부총리 자리는 그를 비켜가고 있다.
4개의 부총리 자리 가운데 3개가 비었지만 올해 6월 사망한 황쥐(黃菊) 제1부총리 자리는 리 상무위원이, 내년 3월 물러날 쩡페이옌(曾培炎) 부총리 자리는 왕치산(王岐山) 정치국 위원이, 우 부총리 자리는 장더장(張德江) 정치국 위원이 각각 차지할 전망이다.
현재 그가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직위는 교육과 과학기술, 문화, 매체, 출판, 체육 등을 담당하는 천즈리(陳至立) 국무위원 자리. 국무위원은 부총리급이긴 하지만 중앙정치국 위원이 아닌 사람도 차지할 수 있는 직위다.
현재 5개인 국무위원직은 멍젠주(孟建柱) 공안부장과 양광례(梁光烈) 국방부장, 마카이(馬凱) 국무원 비서장 예정자,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상무부부장 등 모두 정치국 위원에 진입하지 못한 간부들이 맡을 것으로 관측된다. 류 위원으로서는 참기 어려운 굴욕인 셈이다.
류 위원의 길을 가로막은 장 전 주석이 중국 최고의 지도자로 오르게 된 첫 출발점이 바로 류 위원 부친의 도움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장 전 주석의 생부(生父)는 장스쥔(江世俊)이지만 딸만 둘인 동생에게 양자로 보냈기 때문에 장 전 주석은 어릴 때부터 양부인 장상칭(江上靑)의 집에서 자랐다. 장상칭의 원명은 장스허우(江世侯). 장상칭은 1927년 일찍이 혁명에 참가한 류 위원의 부친이 소개해 중국 공산당 청년단에 가입했고, 2년 뒤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정식 가입하면서 혁명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류 위원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우 부총리의 뒤를 이어 중국 최고의 여성 정치인으로서 위상을 굳힐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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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왕치산(王岐山)] 실력半 행운半 거침없는 출세가도
오지로 쫓겨갔다 권력자 딸과 결혼 … 장인 후광·겸손한 일처리로 ‘신뢰 한 몸에’
부모가 고관대작이 아닌데 태자당(太子黨)이고 칭화(淸華)대학 출신도 아닌데 칭화방(淸華幇)이며 역사학과를 나왔지만 ‘금융통’으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지난해 10월22일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힌 왕치산(王岐山·59·사진) 부총리 내정자다.
태자당이란 권력 실력자인 부모의 후광으로 중국 정치권력의 핵심 요직에 포진한 4000여 명의 당정 간부를 일컫는 말이다. 칭화방이란 칭화대학을 졸업한 동문을 지칭하는 말로 이과 계통이 많다.
왕치산이 태어난 곳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 하지만 고향을 물어보면 부모의 고향을 대는 한국인처럼 중국인도 부모의 출신지인 조적(祖籍)으로 대답한다. 왕치산의 조적은 산시(山西)성의 톈전(天鎭)이다. 톈전은 산시성 북쪽 끝으로, 예부터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는 요새였다.
칭화대 출신 아닌데도 칭화방으로 분류
왕치산의 부친은 칭화대학 교수로 지식분자였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가족은 모두 베이징(北京)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으로 하방(下放)됐다. 여기서 부총리를 지낸 야오이린(姚依林) 일가를 알게 돼 그는 야오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이 고관대작인 덕택에 태자당이 된 셈이다.
왕치산은 하방 시절 산시성 시안(西安)에 자리한 시베이(西北)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후원자인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배려로 칭화대학에서 경제학원 교수를 지낼 수 있었다. 게다가 장인도 칭화대학 출신이다 보니 그는 칭화대학을 나오지 않았음에도 칭화방으로 분류된다.
현재 4세대 지도자 중 권력서열이 각각 1, 2위인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장이 칭화대학 출신이며, 차기인 5세대 지도군 중 권력 1인자인 후 주석의 자리를 예약해놓은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 내정자도 칭화대학을 졸업했다.
1971년 산시성 박물관 근무를 시작으로 역사와 인연을 맺은 왕치산은 73년 시베이대학에 들어가 역사를 전공했고, 졸업한 뒤에는 다시 산시성 박물관에서 79년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79년부터 82년까지 3년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역사연구소에서 실습연구원으로 일했다. 역사 관련 업무만 12년간 한 셈이다.
그러나 장인의 후광으로 1982년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인 중앙서기처 농촌정책연구실에 들어가면서 농촌 전문가로 변신했다. 장인의 후원이 없었다면 공산당원도 아닌 그가 농촌정책연구실에 들어가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그는 이곳에서 근무하던 83년 2월에야 중국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88년 중국농촌신탁투자공사 총경리로 근무하면서 금융통으로 변신했고 중국인민건설은행 부행장, 중국인민은행 부행장, 중국인민건설은행장, 중국건설은행장을 역임했다.
왕치산은 ‘행운의 사나이’로도 불린다. 부모가 오지로 하방되는 바람에 정치권력을 가진 장인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002년 11월 제4세대 지도부가 출범하면서 주룽지 총리는 그를 다이상룽(戴相龍) 인민은행장 후임에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주 총리는 자신의 측근인 저우사오촨(周小川)을 미는 장쩌민(江澤民)에게 밀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왕치산은 대신 중국의 남단 하이난(海南)성의 서기로 밀려났다. 하지만 다음a 해 초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인 사스(SARS)가 터지면서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사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막 권좌에서 물러난 장 전 주석과 정권을 잡은 후 주석이 정치적 타격을 공유하기로 하면서 장 전 주석의 측근인 장원캉(張文康) 위생부장과 후 주석의 측근인 멍쉐농(孟學農) 베이징 시장이 한꺼번에 해임되고 그가 베이징 시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장인과 주 전 총리의 후원이나 행운 때문만은 아니다. 중화권 매체들은 그가 착실할 뿐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놓고 자랑하기 싫어하며 서민들을 사랑하고 작은 일에도 빈틈이 없다고 평가한다. 또 허풍을 떨지 않고 실질을 중시하며 입담도 걸출하다고 한다.
금융위기·사스사태 극복 일등공신 ‘불 끄는 소방대장’ 명성
그는 ‘불 끄는 소방대장’으로 불린다.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휩쓸어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광둥(廣東)성이 흔들릴 때 위기에서 구출했고, 베이징 시장으로 임명돼서는 사스로 하룻밤 사이 수백만명이 시내를 탈출하는 혼란을 차분하게 수습했다. 베이징 시장에 임명된 첫날 그는 “1은 1이고 2는 2다”라면서 “절대 사태를 축소하거나 은폐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보고하라”며 혼란의 근본이 사스 자체보다 당국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런 그에 대한 베이징 시민들의 신뢰는 여론조사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사스 사태가 진정된 2002년 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왕치산은 베이징 시민들에게서 70.5%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베이징의 골칫덩어리인 교통문제를 해결한 시장이기도 하다. 1200만명의 상주인구와 500만명의 유동인구가 함께 살아가는 베이징은 하루 교통인구가 836만명에 이른다. 따라서 2008년 8월 올림픽을 치러야 하는 베이징으로서는 교통문제 해결이 가장 큰 난제.
하지만 그는 2006년 11월 중국 정부가 48개 아프리카 정상급 인사를 초청해 ‘중국-아프리카 협력 포럼’을 열 때 시민들에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라고 계도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포럼이 열린 11월3~5일 베이징의 시내 교통은 어느 때보다도 한산했다. 조사결과 베이징의 300만 차량 중 90만 대가 운행을 멈추고 대중교통을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왕치산은 2008년 3월 전국대표대회에서 금융 담당 부총리로 임명될 예정이다. 경기 과열과 소비자물가 억제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지금 그가 또다시 ‘소방대장’으로서 임무를 톡톡히 해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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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가오리(張高麗)] 석유업종서 잔뼈 굵은 과감한 승부사
청렴결백한 성품 문제해결 능력 탁월 … 환 보하이 경제개발 ‘톈진시 굴기’ 중책
롄지에펑공(廉潔奉公), 웨이런정파이(爲人正派), 정지투추(政績突出).
지난해 10월22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된 장가오리(張高麗·62·사진) 톈진(天津)시 당서기에 대한 평가다. 청렴결백하고 멸사봉공의 자세로 일하는 데다, 품행이 올바르고 정치적 업적도 뛰어나다는 뜻이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1970년 대학을 졸업하고 한 석유기업 노동자로 출발해 37년 만에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뽑힌 것은 바로 이런 장점을 갖췄기 때문이다. 주위에선 그가 허언(虛言)을 좋아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만 말하며 일할 때는 과감하게 결단한다고 전한다.
장 위원은 푸젠(福建)성 진장(晋江) 출신이다. 공장 노동자로 첫발을 내디딘 뒤 ‘최고의 지방관’인 성(省)·직할시의 당서기를 거쳐 지난해 10월 단 25명에 그치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됐다.
선전시 하이테크 산업 유치 큰 업적
그는 샤먼(廈門)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지만 1960~70년대 중국 대륙을 뒤흔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를 겪으면서 전공과는 어울리지 않는 석유부 산하 광둥(廣東)성 마오밍(茂名)시의 마오밍석유공사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이후 석유공사에서만 16년을 일하면서 판공실 비서, 석유제련공장 부서기와 서기 등을 거쳐 1985년 마오밍석유공업공사 경리직까지 올라갔다. 석유공사에서의 성실한 업무 태도는 차츰 광둥성에 알려졌다. 그는 85년 광둥성 경제위원회 주임으로 발탁되면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1988년 광둥성 부(副)성장을 거쳐 93년엔 광둥성 상무위원 겸 부성장, 97년 선전(深)시 당서기, 2000년 광둥성 부서기로 승진했다. 이어 2001년 산둥(山東)성 부서기를 거쳐 2002년엔 산둥성 서기 겸 성장에서 지난해 3월 톈진시 당서기에까지 올랐다. 경제특구(선전), 경제대성(광둥성과 산둥성), 직할시(톈진)를 운영하면서 국가 지도자로서 쌓아야 할 경력을 충분히 쌓은 셈이다.
그가 경력을 쌓으면서 이룬 정치적 업적도 누구 못지않다. 1988~2001년 그는 선전시 서기로 일하면서 선전시를 하이테크 산업과 숲으로 싸인 정원 같은 선진도시로 만들어 다른 도시를 놀라게 했다.
2001년부터 2007년 초까지 그는 산둥성 성장과 서기로 재직하면서 산둥성을 무역과 하이테크 산업, 민간경제의 ‘대성(大省)’으로 끌어올렸다. 2006년 산둥성은 국내총생산(GDP)이 처음으로 2조 위안(약 257조원)을 돌파하며 광둥, 장쑤(江蘇)성에 이어 전국 3위에 랭크됐다. 이런 공적 때문에 지난해 3월 그가 톈진시 서기로 발령받았을 때 허궈창(賀國强)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장은 “톈진시가 매우 얻기 힘든 발전의 기회를 맞았다”고 시 간부들에게 강조했다.
중국 중앙지도부는 특히 장 위원의 당무와 경제업무 처리 능력, 복잡한 문제에 대한 파악과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톈진 직할시는 중국의 경제구도상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은 상태다. 주장(珠江)강 삼각주 경제권인 선전과 창장(長江)강 삼각주 경제권인 상하이(上海)에 이어 환(環)보하이(渤海)만 경제권의 중심지가 바로 톈진이다. 2020년까지 톈진을 북방경제의 중심도시로서 ‘국제 항구도시’ ‘생태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중국정부의 장기적인 계획이다. 톈진시의 빈하이(濱海) 신구(新區)에 부가가치 높은 하이테크 산업을 양성해 새로운 경제개발 모델을 세우고 동시에 금융개혁의 혁신기지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톈진에 오자마자 고위 간부들을 베이징(北京)과 상하이, 선전, 샤먼 등 각지로 학습 고찰을 나가게 했다. 고찰 지역의 개발·개방 상황과 행정관리의 혁신, 도시건설 상황, 산업발전 및 환경보호 상황을 파악해 오되 각 고찰 지역과의 협력, 합작을 위한 준비까지 마치도록 했다. 즉 중국 동부의 선진도시를 둘러봄으로써 톈진시 관리들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한 것이다.
특정 정파 소속 아닌 것이 失이자 得
그는 톈진을 빈하이 신구와 전통 도시지역, 교외의 농촌지역으로 나눈 뒤 세 지역을 유기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구상으로 외자유치에 진력했다. 2006년 6월 유럽의 에어버스사(社)가 약 70억 유로(8조5000억원)를 들여 A320 150인승 중형 여객기의 조립공장을 톈진에 세우기로 한 게 대표적인 성과다. 푸젠성 출신인 그는 특히 대만 기업인을 톈진에 많이 끌어들였는데, 현재 대륙에 있는 7만여 대만 기업 중 10%가 환보하이만 지역에 집중돼 있다.
특정 정파에 속해야 출세하는 중국 정계에서 장 위원은 특별하다.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을 영수로 한 상하이방(上海幇)도 아니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계열 출신)도 아니다. 당·정·군 고관대작 자녀들의 파벌인 태자당(太子黨)은 더더욱 아니다.
올해 62세인 장 위원은 5세대 지도부가 본격 출범하는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톈진시의 굴기(起)’라는 역사적 사명을 부여받은 그가 산둥성과 선전시에서 재직할 때처럼 정치적 업적을 이룰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11. 쉬차이허우(徐才厚)] 인민해방군 최고 실세 ‘胡의 남자’
사병부터 장군까지 풍부한 경험과 경력 … 후 주석 ‘과학발전관’ 군에 접목 중책
지난해 10월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폐막 직후 열린 제17기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군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된 쉬차이허우(徐才厚·사진)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후진타오(胡錦濤·66) 국가주석과 출생일이 6개월밖에 차이나지 않는 그는 사실 차세대 지도자라기보다는 후 주석과 같은 제4세대(2002~2012년 집권) 지도부라고 할 수 있다.
올해 65세인 쉬 위원은 차기 당 대회가 열리는 2012년엔 69세로 정년퇴직 대상이다. 부총리급 이상의 중앙정치국 위원은 정년이 70세지만 선출 시점엔 적어도 67세 이하여야 한다. 1939년 7월생으로 지난해 68세였던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이 내심 더 자리를 지키고 싶어했고, 후 주석 등 주위의 만류에도 퇴진을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4세대 지도부 … 軍과 黨 다리 구실
쉬 위원은 2002년 말 제16차 당 대회 직후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될 뻔했다. 학력이나 경력, 군 내부의 신망에서도 그는 앞서 있었다. 하지만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이 “차오강촨(曹剛川·73)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은 나이(당시 67세) 때문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그러니 (네가) 양보하라”며 그를 주저앉혔다고 베이징의 군사소식통은 전했다. 조만간 권력에서 물러날 처지임에도 당시 장 주석은 자신의 최측근인 차오 위원과 궈보슝(郭伯雄) 중앙군사위원을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밀어준 것이다.
쉬 위원은 후 주석의 ‘줘방여우비(左膀右臂)’로 불린다. 이는 심복, 최측근이라는 뜻이다. 2002년 말 후 주석이 당 총서기에 취임하자 그는 후 주석과 함께 오지를 시찰하는 등 심복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2004년 9월 후 주석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한 뒤 중앙군사위원에서 부주석으로 승진한 사람은 그가 유일하다.
실제로 그는 현재 군의 최고 실세다. 군부의 정치사상과 간부의 인사, 선전 교육을 모두 장악하고 있으며, 군과 당의 다리 구실을 하며 당심(黨心)을 군에 전하고 군심(軍心)을 당에 올리고 있다. 후 주석의 ‘과학발전관’을 군에서 관철하는 것도 그의 임무다.
그가 태어난 랴오닝(遼寧)성 와팡뎬(瓦房店)시는 장군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중국에서 혁명열사 배출지라고 하면 각각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의 고향인 후난(湖南)과 쓰촨(四川)성, 장시(江西)와 후베이(湖北)성 등을 떠올리지만 동북지역에서 와팡뎬시만큼 장군이 많이 나온 곳은 없다. 와팡뎬시는 최근까지 30여 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그는 스무 살 때 고향을 등지고 눈보라 날리는 하얼빈(哈爾濱)군사공정학원에 입학했다. ‘하쥔공(哈軍工)’이라 불리는 하얼빈군사공정학원은 중국 최고의 군 공과대학이다. 사회주의 중국 성립 이후 가장 먼저 설립된 종합국방대학으로 건국 후 국방과학기술 사업에 헌신하려는 많은 청년 영재와 혁명열사의 자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현재까지 배출한 장군과 성부(省部·성장 및 부장)급 고관만 100여 명에 이르는데, 위정성(兪正聲) 후베이성 당서기와 펑샤오펑(彭小楓) 제2포병 정치위원(상장), 최근 물러난 바이커밍(白克明) 허베이(河北)성 당서기 등이 이곳 출신이다.
하지만 국방과학기술의 종합대학이던 하얼빈군사공정학원은 문화대혁명 기간(1966년 5월~1976년 10월)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쉬 위원이 속한 전자공정과 등 일부는 잘려나가 국방과학기술대학으로 독립했고 나머지는 하얼빈공정학원(원 선박공정학원), 난징(南京)이공대학, 장갑병공정학원, 군사이공대학, 공정병공정학원, 방화(防化)지휘공정학원 등 총 6개로 흩어졌다.
서방 국가도 “유능한 인물” 우호적 평가
하얼빈군사공정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군부대 농장에서 노동자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68년부터 70년까지 농장에서 일한 그는 이어 72년까지 지린(吉林)성 군구의 독립사단 3연대 2대대 6중대에서 말단 병사로 일했다. 이후 지린성의 군구 정치부 간부처 간사, 부처장, 처장을 거쳐 지린성 군구 정치부 부주임, 선양(瀋陽) 군구 정치부 군중 공작부 부장, 육군 제16집단군 정치부 주임 및 정치위원, 해방군 총정치부 주임 조리(助理), 부주임 및 해방군보사 사장, 지난(濟南) 군구 정치위원 및 군구 당 위원회 서기까지 차례차례 승진했다. 99년 9월 그는 군 장교로는 거의 최고직인 당 및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올랐다. 이어 2002년 11월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되고, 2004년 9월 중앙군사위 부주석까지 올라갔다.
장군이 되고자 하는 꿈이 없는 사병은 훌륭한 병사가 아니다. 역으로 사병에서 시작하지 않은 장교는 부대의 밑바닥 생활을 이해하기 어렵다. 풍부한 밑바닥 생활 경험과 수련이 없다면 출중한 장군과 고급 장교가 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군 농장 노동자에서 시작해 보병단 병사와 정치부 처장, 주임을 거쳐 인민해방군의 정책을 결정하는 중앙군사위원회 위원까지 지낸 쉬 위원은 누구보다 풍부한 경험과 경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군 내부에서는 그가 한 번도 ‘나쁜 소문’이 나돌지 않은 사람이라는 얘기가 회자된다. 반면 최근 중앙정치국 위원에서 물러난 차오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과 궈 부주석은 승진을 위해 장 전 주석과 여러 차례 비밀협상을 벌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생각하지 않고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고 전한다. 그만큼 신중하고 냉정하며 판단력과 추리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는 그를 현대적인 군의 인물로 나무랄 데 없는 명성과 정치적 배경을 지닌 군 지도자로 평가한다.
1972년부터 2004년까지 32년간 인민해방군의 사상과 이념을 관철하는 정치부에서 일해온 그가 후 주석의 집권 2기(2007년 말~2012년 말)를 맞아 ‘과학발전관’을 군부에서 어떻게 관철하고 눈앞에 닥친 대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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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링지화(令計劃)] 친화력 뛰어난 胡 막료 중 큰형
공청단에서 실력 키우고 후 주석 12년 보좌 … 언론 노출 꺼리는 그림자 실세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 마지막 날인 지난해 10월21일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된 링지화(令計劃·52·사진) 중앙판공청 주임 겸 중앙기구편제위원회 판공실 부주임.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수석 막료(首席幕僚)’로 불린다. 후 주석의 막료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후 주석이 이끄는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계열의 핵심 인사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서열 6위의 리커창(李克强) 상무위원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조직부장, 류옌둥(劉延東) 중앙정치국 위원 등이 있지만 이들은 막료가 아닌 측근이다.
반면 17차 당 대회를 앞둔 9월 공산당 중앙판공청 주임에 임명된 그는 후 주석을 12년 넘게 보필해온 정치 참모다. 그는 후 주석을 21년간 보좌하고 있는 ‘후 주석의 수행비서’ 천스쥐(陳世炬) 국가주석 판공실 주임과 함께 ‘후 주석의 그림자’로 불린다.
공산당 일상 업무 모두 보좌하는 중책
중앙판공청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인 중앙위원회 직속기관으로 중추기관 중 하나다. 중국 공산당 고위 지도자의 연설문 작성과 회의 보좌 업무, 중앙정치국이 하달하는 각종 문건과 원고의 기초 및 개고(改稿)·교열 작업, 고위 지도자들의 안전과 의료 등을 책임진다.
한마디로 중앙판공청 주임은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와 중앙정치국의 일상 업무를 모두 보좌한다고 할 수 있다. 5년마다 열리는 당 대회 역시 중앙판공청의 손길이 닿는다.
중국에서는 공산당의 총서기와 국가주석을 맡았다 해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핵심 측근을 중앙조직부장과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에 앉히지 못하면 최고 실권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중앙조직부장은 지난해 6월 말 7336만명으로 집계된 공산당원 중 각 성의 당서기와 성장 등 적게는 4100여, 많게는 640만 간부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당내 핵심 요직으로 꼽힌다. 또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중국 인민해방군을 통솔하는 군의 최고 권력자다.
후 주석은 2004년 9월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에게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물려받았으나 집권 5년 만인 지난해 당 대회 즈음해서야 링지화를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임명하고, 핵심 측근인 리위안차오 중앙정치국 위원을 중앙조직부장에 임명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중앙조직부장은 태자당(太子黨) 영수인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의 측근이자 범상하이방(上海幇)으로 불리는 허궈창(賀國强) 상무위원이 맡았다. 중앙판공청 주임은 장 전 주석의 측근인 왕강(王剛) 정치국 위원 몫이었는데, 그에겐 장 전 주석을 대신해 후 주석을 감시하는 ‘대리 감시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링 주임은 공청단에서만 20년 넘게 일했다. 1975년 고향인 산시(山西)성 핑루(平陸)현 공청단 위원회 간부와 부서기로 시작해 공청단 중앙선전부 이론처 부처장, 공청단 중앙서기처 판공실 주임을 거쳐 95년 공청단 중앙선전부 부장을 끝으로 21년을 공청단에서 지냈다.
하지만 링 주임은 후 주석이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와 제1서기로 재직한 1982~85년 후 주석과 얼굴을 맞대고 일하지는 않았다. 그는 1983~85년 공청단 소속 학교인 중국청년정치학원에서 정치교육을 전공으로 연수를 마치고 졸업식에서야 당시 공청단 교장이던 후 주석을 볼 수 있었다.
이후 공청단 중앙선전부 이론처 부처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공청단 핵심 멤버들의 주목을 받는다. 시키는 일마다 야무지게 처리했으며, 특히 그가 써낸 연구보고서는 상급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당시 공청단 서기로 있던 리커창, 리위안차오, 류옌둥 등 후 주석 측근들에게서 재능과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가 후 주석의 지근거리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는 1995년 중앙판공청 조사연구실 3조 책임자로 발탁되면서부터다. 그는 이후 조사연구실 조장과 부주임, 주임을 거쳐 중앙판공청의 부주임에 이어 지난해 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꿈꿔오던’ 중앙판공청 주임 자리를 거머쥐었다.
야무진 일처리 마이크까지 철저 점검
그의 조상은 소수민족의 후예로 당초 성은 두 글자인 ‘링후(令狐)’였는데, 조상들이 나중에 한족(漢族)화하면서 한 글자인 ‘링’으로 바꿨다. 중국어로 ‘지화’는 ‘계획(計劃)’이라는 뜻이다. 그는 셋째 아들로 맏형 이름은 루셴(路線)이고, 둘째 형은 ‘정처(政策)’다. 바로 위 누나의 이름은 ‘팡전(方針)’이고, 남동생은 ‘완청(完成)’. 산시성의 처장급 간부였던 그의 부친은 신문 보기를 즐겼는데, ‘중화인민공화국’건국 당시 신문에 가장 많이 나오던 단어를 활용해 자식들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노선과 정책, 방침과 계획이 나왔고, 막내는 ‘다 이뤘다’는 뜻의 완성이 됐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예의 바르고 친화력이 뛰어나다고 전한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무척 꺼린다. 내외신 기자들은 그가 중앙판공청 주임으로 임명됐을 때 그의 얼굴사진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17차 당 대회 이후 인터넷에 올라온 것도 겨우 명함사진 한 장이다. 그는 후 주석이 기자들에게 둘러싸이면 멀찌감치 자리를 뜬다. 어떤 질문을 해도 그는 “기자 여러분, 고생 많습니다”로 답변한다. 이따금 하는 색다른 대답이라곤 “저는 선전하지 마세요”가 전부다.
1999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을 맡은 이후 그는 후 주석의 국내외 행사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가 나타난 장소엔 20~30분 후면 어김없이 후 주석이 등장한다. 그는 행사장의 안전부터 마이크 높이가 후 주석 키에 맞는지까지 철저히 점검한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판공청 주임’을 자신의 감시인인 ‘왕강’에서 측근인 ‘링지화’로 바꾼 후 주석이 앞으로 그를 활용해 집권 2기(2007년 말~2012년 말)를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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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왕후닝(王寧)] 정치민주화 이론 정립한 ‘꾀주머니’
안정 속 개혁과 발전 논리적 근거 창안 … 장쩌민 전 주석 각별한 총애
지난해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출된 왕후닝(王?寧·53·사진)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은 한마디로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막료(幕僚)이자 ‘꾀주머니’다. 그는 장 전 주석의 해외 순방 때마다 ‘주석 특별 조리’라는 직제에 없는 직함으로 수행단에 합류했다.
중국의 정치개혁과 민주화에 관련한 장 전 주석의 발언은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 정치민주화에 관한 그의 독특한 이론은 장 전 주석 시절부터 시작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집권하는 현재까지도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고수하는 지도노선이다.
왕 주임 이론의 핵심은 정치체제는 일정한 역사·사회·문화적 조건에 맞아야 하고,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 중국의 역사적 단계와 조건을 뛰어넘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다당제와 보통선거에 따른 지도자 선출을 핵심으로 하는 서구의 민주제도를 왜 중국은 실시할 수 없느냐는 일부 급진파의 주장에 대한 반박인 셈이다. 생산력(경제) 발전을 먼저 이루고 이를 주축으로 민주정치를 발전시켜야만 실질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질 수 있는 것이지, 나무를 접붙이듯 중국의 정치개혁은 이룩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논리다.
장 전 주석은 1995년 9월 열린 제14기 5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왕 주임의 이론을 인용해 중국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개혁과 발전, 안정의 3자 관계’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 가운데 개혁과 발전을 추진해야 하고, 개혁과 발전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만 정치와 사회가 안정된다는 것. 한마디로 안정의 기초 위에서 정치개혁을 추진할 때만 중국의 진보와 발전을 담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그의 이론은 이후 중국 공산당이 정치개혁과 민주화 조치를 미룰 때마다 논리적 근거로 사용됐다.
1995년부터 공산당 지도부 고수하는 이론
2000년 장 전 주석이 발표한 ‘3개 대표론’도 그가 창안해낸 것이다. 3개 대표론이란 공산당이 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선진 생산력(자본가)과 선진문화(지식인)의 근본 이익까지 모두 대표해야 한다는 이론이다.
조적(祖籍·조상의 원적)은 산둥(山東)성 라이저우(萊州)시지만, 그는 1955년 10월6일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철학을 좋아했고 정치적 사고를 즐겨 하는 경향을 보였다. 74년 화둥(華東)사범대에서 프랑스어를 3년간 전공했지만 외교 계통으로 나가지 않고 상하이 푸단(復旦)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석사를 마쳤다. 개혁개방 뒤 제1세대 정치학 연구생인 그의 지도교수는 자본론 연구로 권위 있는 천치런(陳其人)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푸단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80년대 중반 쩡칭훙(曾慶紅) 당시 상하이 선전부장의 눈에 띄어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줄곧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그가 1995년 베이징(北京)의 중앙정책연구실로 오게 된 것은 당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던 쩡 부장과 상하이 당서기를 지낸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힘이 컸다.
한때 왕 주임을 정치고문으로 쓰려 했던 우 위원장은 1994년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중앙서기처 서기로 옮긴 뒤, 장쩌민 당시 주석에게 여러 차례 “왕후닝을 베이징으로 불러와야 한다”고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 전 주석은 당시 그를 중난하이(中南海)로 불러올린 후 그와 면담하는 자리에서 “이번에 너를 불러올리지 않았으면 나와 우리 계파 사이가 틀어질 뻔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소문난 책벌레 … 후진타오 감시인 소문도
그는 1987년 13차 당 대회 때부터 시작해 학자로는 유일하게 세 번 연속 정치보고의 기초작업에 참여했다. 16차 당 대회 때 장 전 주석은 정치보고 기초작업의 실무 책임을 아예 그에게 맡겼다. 그만큼 장 전 주석의 신임이 두터웠다.
하지만 1995년 베이징으로 올라온 뒤 중앙정책연구실 정치조 조장을 거쳐 98년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 2003년 4월 주임으로 벼락출세하며 그는 학계에서 적잖은 입방아에 올랐다. 특히 주임 자리는 상급자인 텅원셩(藤文生·68) 주임을 중앙문헌연구실 주임으로 쫓아내고 차지한 것이어서 ‘하극상’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중앙정책연구실은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연구하는 중국 공산당의 싱크탱크다. 중앙정치국의 정치 이론 및 정책 연구와 문건의 기초작업은 모두 이곳에서 이뤄진다. 그만큼 막중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가 실력도 없으면서 정계 실력자들에게 줄을 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그의 제자인 푸단대 일본연구중심 궈딩핑(郭定平) 부주임은 “푸단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마다 그의 서명이 없던 책이 없었다”며 “그의 성실함과 근면함은 항상 나의 본보기였다”고 털어놨다. 푸단대에서는 책을 빌려가는 사람은 반드시 도서열람 카드에 서명하도록 돼 있다.
그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저우치(周琪)에 따르면, 결혼 직전 그에게 결혼식에 사용할 물건과 생화(生花)를 사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저녁에 땀을 뻘뻘 흘리며 그가 가져온 것은 한아름의 책이었다는 것. 그가 얼마나 ‘책벌레’였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는 자신을 소개할 때도 “전 그냥 독서인(讀書人·책 읽는 사람)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일생에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좋은 책 몇 권 읽고, 좋은 학생 몇 명 가르치고, 좋은 책 몇 권 쓰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책을 폭넓게 읽어선지 그의 논문은 심도 있으면서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설명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논문은 중국의 당대 지도부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를 다룬 데다 친절하게 대책까지 제시하고 있다.
2002년 11월 후 주석이 집권한 이후에도 그는 ‘주석 특별 조리’로 후 주석의 해외 방문을 수행하고 있다. 이런 그를 일각에서는 ‘장 전 주석의 대리 감시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후 주석의 정치노선을 감시하는 장 전 주석의 원단(文膽·핵심 막료)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내로라하는 이론가인 왕 주임의 조언을 바탕으로 후 주석이 정치개혁 및 민주화와 관련해 자신의 집권 2기(2007년 말∼2012년 말)에 어떤 길을 걸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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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왕강(王剛)] 주도면밀한 장 前 주석의 대리 감시인
공산당 당무 핵심 중앙판공청서 22년 근무 … 실질 권력 줄어 영향력 점차 감소
왕강(王剛·사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은 사실 차세대 지도자라고는 볼 수 없다. 그는 지난해 10월22일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승진해 새로운 정치국 위원이 됐지만, 올해 66세로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는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과 나이가 비슷하다.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은 1942년 10월생인 그보다 생일이 두 달 늦고,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 또한 그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을 뿐이다. 특히 차세대 지도자 시진핑(習近平)이나 리커창(李克强)보다는 9~11세가 많다. 따라서 그는 차세대 지도부가 구성되는 2012년 말엔 일선에서 은퇴해야 한다.
뒤늦게 국가의 ‘중앙 링다오(領導·지도자 또는 영도자)’ 집합체인 중앙정치국에 합류했지만, 그는 차세대(5세대) 지도부 일원이 아니라 후 주석과 똑같은 ‘현세대(제4세대) 지도자’인 셈이다.
후 주석·원 총리와 비슷한 경력
그의 경력도 후 주석, 원 총리와 매우 흡사하다. 그는 지린대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벽촌인 간쑤(甘肅)성에서 건설공사장의 선전 간부로 9년간 일했다. 후 주석은 1974년부터 82년 12월까지 간쑤성 건설위원회의 비서와 부주임,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간쑤성 위원회 서기로 8년을 지냈다. 원 총리는 지린대를 졸업하자마자 간쑤성 지질국에 배치돼 1982년 지질광산부 정책법규연구실 주임으로 부임할 때까지 14년을 오지인 간쑤성에서 일했다. 세 사람 모두 젊은 시절 산간벽지에서 고생한 셈이다.
‘왕강’이라고 하면 중국인들은 ‘다네이총관(大內總管·대내총관)’을 떠올린다. 다네이총관이란 청(淸)나라 때 황제의 비서실장을 가리키던 말이지만, 지금은 중국 공산당의 최고 권력기관인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중앙판공청 주임을 뜻하는 말로 바뀌었다. 중앙판공청은 중국 공산당 고위 영도자의 연설문을 작성하고 회의를 보좌하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이 하달하는 각종 문건과 원고의 기초 및 개고(改稿), 교열 작업을 총괄하는 곳이다. 나아가 고위 영도자들의 안전과 의료를 책임지고 전국 당정 계통의 비밀통신과 비밀번호 관리도 맡고 있다.
따라서 중앙판공청 주임은 한마디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와 중앙정치국의 모든 일상 업무를 보좌한다고 할 수 있다. 왕 위원은 1999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8년을 이 자리에서 일했다. 중앙판공청 신방(信訪·민원)국 부국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때부터 계산하면 무려 22년을 중앙판공청에서 근무했다.
중앙판공청 근무 시절 그가 모신 당 총서기만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 등 4명이다. 그가 모신 중앙판공청 주임은 왕자오궈(王兆國), 원자바오, 쩡칭훙(曾慶紅) 등 3명이다.
그가 이처럼 당무의 핵심기관이자 중앙 영도자들의 최고 보좌기관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한 업무처리 능력과 치밀한 성격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남에게 드러내놓고 자랑하기 싫어하면서도 안으로는 주도면밀하고 난관을 잘 헤쳐나가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견문이 넓어 박식하고 머리는 컴퓨터처럼 빠르게 돌아간다고 한다.
총서기가 나타나는 행사장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는 조용히 미소만 지을 뿐 말이 거의 없다. 빈틈없고 성실하면서도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의 성격은 중앙의 고위 영도자들에게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왕 위원은 직접 발표한 문장도 매우 적다. 언론매체의 인터뷰에 응하는 경우는 더욱 드물다. 현재 25명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가운데 그만큼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3월 全大 끝나면 공위 서기도 내줘야 할 판
하지만 그가 수줍음을 타는 성격은 아니다. 중앙판공청 구내식당에서 주위 동료나 직원을 만나면 항상 그가 먼저 인사한다.
간쑤성 오지에 있던 그를 발탁한 사람은 중국 항일 혁명가이자 개국 원로인 왕펑(汪鋒·1910~1998)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간쑤성 당위 제1서기로 쫓겨난 왕펑은 1977년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 당위 제1서기로 옮겨가면서 정계 동료의 추천을 받아 그를 비서로 데리고 갔다.
항일투쟁 시절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시안(西安)사변을 해결하는 등 통일전선공작 부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왕펑은 1981년 말 덩샤오핑(鄧小平)의 지시로 대만공작영도소조의 부조장을 맡았고, 왕 위원은 대만공작영도소조 판공실에서 처장급 비서로 함께 일했다.
1985년 초 왕 위원은 중앙판공청 신방국 부국장으로 영전했고, 94년 중앙판공청 부주임으로 승진하면서 쩡칭훙 당시 판공청 주임과 손발을 맞춘 뒤 99년 쩡 주임이 중앙조직부장으로 영전하면서 주임 자리를 물려받았다.
지난해 10월 17차 당 대회 직전 노른자위인 중앙판공청 주임을 후 주석의 수석 막료인 링지화(令計劃)에게 내준 그는 당 대회 직후 형식상으로는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당초 갖고 있던 중앙서기처 자리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올해 3월 열리는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끝나면 중앙직속기관 공작위원회(工作委員會·약칭 공위) 서기 자리도 링 주임에게 내줘야 할 판이다.
왕 위원은 올해 3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가 구성된 뒤 성화런(盛華仁·73)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겸 비서장이 물러나면 그 자리로 옮겨갈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이 자리엔 원래 후이량위(回良玉·64) 부총리가 오기로 돼 있었지만 4명의 국무원 부총리가 한꺼번에 모두 바뀌는 것은 좋지 않다는 지적에 따라 왕 위원 몫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최근 이 자리마저 놓치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의 상무부주석에 내정됐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과 전국 정협 부주석은 모두 부총리급이다. 하지만 27개나 되는 정협 부주석직은 웬만한 명사라면 하나씩 꿰차는 자리로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직과는 ‘격’에 차이가 있다.
장 전 주석의 측근으로 후 주석 집권 1기(2002년 말~2007년 말) 때까지 계속 ‘노른자위’에 앉아 ‘장 전 주석의 대리 감시인’ 구실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왕 위원은 이제 후 주석의 친정(親政)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조금씩 권력의 심장부에서 멀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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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자오러지(趙樂際)] 중앙정치국 위원 부동의 0순위
42세 때 전국 최연소 성장 발탁 … 산시성에서 환경과 개발의 조화 실험
지난해 11월6일부터 최근까지 본보에 소개한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는 모두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거나 중앙서기처 서기 등 부총리급 이상의 중앙 영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중국 공산당 권력 핵심부에 진입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중앙의 부장과 지방의 성장급 이상 인사 중 차세대 지도자로 떠오르는 인물을 소개하려 한다. 이들은 지난해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선출된 204명의 중앙위원들로, 5년 뒤에는 중앙 영도 그룹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이다.
자오러지(趙樂際·51·사진) 산시(陝西)성 당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은 지난해 10월 열린 17차 당 대회에서 중국 정치권력의 핵심인 중앙정치국 위원 후보로 집중 거론됐던 인물이다. 17차 당 대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선출되지 못했지만 5년 뒤 열릴 18차 당 대회에서는 이변이 없는 한 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47년간 칭하이에서 자라고 출세한 영원한 칭하이맨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이 이끄는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출신)’ 멤버 중 한 명이다. 1980년대 초 칭하이(靑海)성 상업청에서 공청단 서기를 지낸 바 있는 그는 후 주석의 공청단 직계로 서북방 공청단의 핵심(骨幹) 인물로 불린다.
현재는 산시성 당서기를 맡고 있지만 자오러지 서기는 실은 ‘영원한 칭하이 맨’이다. 칭하이의 성도 시닝(西寧)에서 태어나 베이징(北京)대학을 다닌 3년을 제외하고는 지난해 3월 산시성 당서기로 전보되기 전까지 47년을 칭하이성에서 살았다. 그는 칭하이성 이임식 자리에서 “오늘 이후 내가 어디 있든지 나는 항상 칭하이와 꿈에서도 연결돼 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칭하이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의 사회경력 또한 칭하이 일색이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4년 9월 칭하이성 구이더(貴德)현 허둥(河東)향 궁바(貢巴)대대(大隊)에서 지식청년으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75년 7월 칭하이성 상업청 통신원을 거쳐 1977년 2월 베이징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칭하이성에서 지냈다. 대학 졸업 뒤에는 또다시 칭하이성의 성도 시닝으로 돌아와 80년 1월 성 상업청 정치처 간사, 84년 12월 칭하이성 우진쟈오뎬(五金交電) 화공공사 당위 서기, 86년 4월 성 상업청 부청장, 91년 2월 상업청 청장 등 대부분 칭하이성에서 경력을 쌓았다.
1993년 2월 성장 조리(助理)로 승진한 그는 94년 7월 부성장, 99년 8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0년 1월 마침내 칭하이성의 최고 행정직인 성장을 거머쥐었다. 당시 전국 성장 가운데 최연소였다. 1987년 1월 만 42세에 랴오닝(遼寧) 성장에 임명된 리창춘(李長春) 정치국 상무위원은 실제는 만 42년 11개월로 그보다 1개월 늦다. 하지만 그의 승진 기록이 후 주석을 능가하는 것은 아니다. 후 주석은 성장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만 42세가 되기 전 이미 부장·성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지냈고, 만 42년 5개월 만에 구이저우(貴州)성의 서기로 임명됐다. 40대의 나이로 중국 공산당 최고 정치권력 기구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이 된 것도 개혁개방 이후 처음이다.
칭하이성의 대리성장과 성장, 당서기를 거치는 8년간 그는 칭하이성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성장으로 재직하던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칭하이성의 지역총생산(GRDP)은 263.12억 위안(약 3조4900억원)에서 641.05억 위안으로 2.4배나 늘었다.
하지만 그가 성장만을 중시한 것은 아니다. 그는 급속한 성장보다 지속적인 발전을 더 원했다.
“동부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반복하지 말라.”
그는 칭하이성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주 이렇게 강조했다. 그가 원한 것은 초고속 성장보다 환경과 성장의 조화였다. 소득증대에 도움이 되더라도 공해산업은 최대한 억제했다. 대신 칭하이성의 천연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과 소금, 관광업에 치중했다. 그는 2005년 7월 한국의 이수성 전 총리가 칭하이성을 방문했을 때 “환경을 보호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킨 한국의 경험을 배우고 싶다”고 말할 만큼 환경과 성장의 조화에 애착을 보였다.
사회경력 한정 탓 중앙무대서 역할 제한될 것 전망도
그래서인지 2000년 전국 31개 성 가운데 21위였던 칭하이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6년 23위로 되레 떨어졌다. 2006년 현재 칭하이성의 1인당 GDP는 1475달러로 전국 평균의 72%에 그친다. 2006년 말 547만7000여 명의 주민 중 120만명은 여전히 절대빈곤선 아래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전국대표대회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회의가 열리던 2006년 3월 그는 기자들과 만났을 때 갑자기 ‘쾌락지수’ 얘기를 꺼냈다. “칭하이성은 소득도 적고 여러 가지 조건도 안 좋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즐겁게 하려 합니다. 높은 고원에서 마음까지 유쾌하지 못하면 병을 얻기 쉽지요.” 그는 기자들에게 “칭하이성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지만 각 소수민족과 촌락, 가정이 모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소개했다.
그가 이처럼 고속성장보다 환경보호를 더 중시한 것은, 칭하이성은 자원의 보고인 만큼 환경을 훼손하면서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아도 발전 잠재력이 무한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칭하이성은 ‘중국의 물탱크’로 불릴 만큼 수자원이 풍부하고 매장 석유는 2억2000만t, 천연가스는 1575억㎥에 이른다. 중국의 지난해 석유 소비량은 3억4600만t이다.
하지만 그는 이제 산시성의 발전을 책임지고 있다. 산시성 시안(西安)은 그의 조적(祖籍·조상의 원적)이 있는 곳이다. 출생지가 칭하이성이라면 출신지는 산시성인 셈이다. 지난해 3월 산시성 당서기로 부임한 직후 가진 직원과의 상견례에서 “앞으로 전력을 다하겠다”며 출신지 발전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지방 당서기 중에서 표준 중국어인 푸퉁화(普通話)에 약한 유일한 사람이다. 사회경력 또한 칭하이성을 제외하고는 산시성 서기가 전부다. 후 주석과 같은 퇀파이지만 중앙 무대로 진출하기가 쉽지 않고, 중앙으로 진출하더라도 역할이 크게 제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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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왕민(王珉)] 낙후된 지린성 경제개발 불도저 지휘
‘백두산 공정’ 통해 한민족 흔적 지우기 … 광산채굴권 따내기 등 북한경제 포섭도
‘지린(吉林) 속도’.
왕민(王珉·58·사진) 지린성 당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이 2004년 10월 지린성 부(副)서기 겸 대리성장으로 취임한 뒤 새로 생긴 말이다.
2005년 9월2일 지린성은 성도 창춘(長春)에서 제1회 지린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를 열었다. 지린성이 박람회 개최를 신청한 것은 2004년 말. 중앙정부는 다음 해 4월 이를 정식 허가했고, 지린성은 5개월의 준비를 거쳐 국제박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중국의 국제박람회는 광저우(廣州)의 광자오후이(廣交會)와 선전(深)의 가오자오후이(高交會), 샤먼(廈門)의 샤차후이(廈洽會), 베이징(北京)의 커보후이(科博會), 광시좡족(廣西壯族) 자치구의 둥멍(東盟)박람회와 지린성 박람회까지 6개뿐이다. 국제박람회를 준비하기 위해 걸리는 시간은 최소 1년. 하지만 왕 서기는 이를 단 반년 만에 성공시킨 것이다. ‘지린 속도’라는 새로운 단어가 출현할 만했다.
2005년 서기 취임 후 ‘지린 속도’ 새 단어 출현
왕 서기가 2005년 1월 지린성 성장으로 취임한 뒤 내건 슬로건은 ‘콰이쩌우(快走·빨리 걷기)에서 콰이파오(快·빨리 뛰기)로’였다. 중국 동남부에 비해 크게 낙후한 지린성으로서는 ‘빨리 걷기’만으로는 부족하고 ‘빨리 뛰기’를 해야만 선진 지역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 왕 서기가 성장으로 취임한 2005년 이후 지린성의 성장속도는 2005년 11.6%, 2006년 18.1%, 2007년 16.9%로 전국 평균보다 훨씬 높았다. 이에 따라 지린성의 지역총생산(GRDP)은 2004년 3122억100만 위안(약 41조4072억원)에서 지난해 5000억 위안(추계·약 66조3150억원)으로 3년 만에 62.4% 늘었다.
왕 서기는 지린성으로 옮기기 전부터 ‘속도왕’이었다. 중국 정부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최첨단 기술단지 쑤저우(蘇州) 공업원구는 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다. 장쑤(江蘇)성은 1994년 7월 쑤저우 공업원구를 개발하기 위해 당초 난징(南京)항공우주대학 부(副)교장이던 그를 성장 조리(助理)로 전격 스카우트했다. 그가 장쑤성 부성장과 쑤저우시 서기로 재직한 2004년 10월까지 쑤저우 공업원구의 연간 성장률은 무려 40%에 달했다.
지난해 9월 현재 3350개 외자기업이 이곳에 투자한 돈은 모두 310억 달러. 이 지역 연간 무역액은 500억 달러를 넘는다. 쑤저우시 1인당 지역총생산(GEDP)은 2006년 이미 1만 달러가 넘었고, 쑤저우 공업원구는 2만6000달러에 이른다.
그가 낙후한 노(老)공업기지의 책임자로 임명된 것도 이런 쑤저우에서의 실적 때문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필두로 한 중국의 제4세대 지도부는 낙후한 동북3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2003년 집권하자마자 동북진흥계발계획을 수립하고 2004년부터 본격 추진에 들어갔으나 시행 초기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후 주석은 이에 따라 랴오닝(遼寧)성 당서기에는 리커창(李克强) 당시 허난(河南)성 서기를, 지린성 성장에는 왕 서기 등 젊고 유능한 인물을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왕 성장은 지린성 발전을 위해 백두산을 개발하면서 주변 국가와 적잖은 마찰을 빚었다. 그는 본격적인 백두산 개발을 위해 당초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주가 갖고 있던 백두산 관할권을 2005년 8월 발족한 지린성 직속의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長白山)보호개발관리위원회로 옮기게 했다. 또 백두산에 관광객을 유치하고 공항과 철도, 도로를 건설하며 백두산 지역에서 사용하던 한자와 한글 병용 간판을 모두 떼고 한자와 영문 간판으로 바꾸게 했다. 이와 함께 백두산 인삼은 중국명인 ‘창바이산 인삼’으로 통일하고 2006년 7월엔 백두산보호개발관리위 산하 18개 초·중·고교 이름에 모두 ‘창바이산’을 넣어 짓도록 했다.
한마디로 백두산 지역의 한민족 흔적 지우기에 나선 것이다. 일각에서는 왕 서기의 ‘백두산 개발 계획’이 실제로는 동북공정의 한 지류인 ‘백두산 공정’이며, 궁극적으로는 동북지구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지우려는 의도라고 의심한다. 한편으로는 백두산을 개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을 동북3성의 경제권 안으로 포섭하려는 것이 모두 동북공정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후 주석과 같은 ‘안후이방’ … 오랫동안 대학교수로 재직
실제 왕 서기는 2006년 초, 지린성 동쪽 끝에 자리한 훈춘(琿春)시로 하여금 북한 경제특구인 나선시와 항만 개발 및 항구 50년 사용권 협정을 체결하게 해 지린성의 동해 진출 교두보를 마련했다. 지린성의 기업들은 2005년 10월 후 주석의 북한 방문을 전후해 북한의 광산개발권을 대거 따냈다. 지린성이 북한과 인접한 지린성 내 도로망 건설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한 것도 왕 서기가 온 뒤부터다.
왕 서기는 후 주석과 같은 안후이(安徽)성 출신으로 ‘안후이방(安徽幇)’으로 불린다. 현재 안후이성 출신은 후 주석을 비롯해 우방궈(吳邦國)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과 리커창 상무위원 등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인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만 3명이 포진해 있다. 9명의 상무위원 중 3분의 1이 안후이성 출신이다. 또 5년 뒤인 제18차 당 대회에서 상무위원 0순위인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서기와 추보(儲波)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 서기 등이 모두 안후이방이다. 중국의 태양은 현재 안후이에서 뜨고 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닌 셈이다.
왕 서기는 관리로 발탁되기 전 오랫동안 대학교수로 일했다. 난징항공학원(현 난징항공우주대학)에서 기계제조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난징항공학원 비서장과 부원장을 거쳐 난징항공우주대학에서 부교장까지 지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학문에 조예가 깊고 빈틈이 없으면서 매우 엄격하지만, 성격이 활달하고 시야가 넓으며 포용력이 큰 학자였다고 평가한다. 강의 때는 엄격해도 수업이 끝나면 학생들과 친근하게 어울렸다는 것이다.
교수직을 떠난 지 13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난징항공우주대학에서 박사연구생을 뽑아 지도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3월 중국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관리를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교수를 하고 있을 것”이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감추지 않았다.
후 주석의 직계로 정치적 업적 또한 만만치 않은 그가 5년 뒤 중앙정치국에 진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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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쑹슈옌(宋秀岩)] 전국 유일 홍일점 省長 ‘질주하는 여걸’
탁월한 업무능력 올해 칭하이 성장에 올라 … 제2의 중국 철녀 행보에 주목
쑹슈옌(宋秀岩·53·사진) 칭하이(靑海)성 성장은 올해 초 선출된 중국의 지방 지도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다. 전국 62명의 당서기와 성장 가운데 홍일점으로 1983년부터 7년간 장쑤(江蘇)성 성장을 지낸 구슈롄(顧秀蓮·72)에 이어 사회주의 중국 건국 이후 두 번째 여성 성장이다.
물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의 성 단위 주석자리엔 충칭(重慶)시의 싱위안민(邢元敏·60), 산시(山西)성의 진인후안(金銀煥·56), 장쑤(江蘇)성의 장롄전(張連珍), 푸젠(福建)성의 량치핑(梁綺萍·61), 후베이(湖北)성의 쑹위잉(宋育英·60) 등 5명의 여성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여성 안배 차원인 데다 실질적 권력을 가진 성장과 정치자문기구인 정협은 천양지차다.
쑹 성장의 지도자적 자질은 어릴 적부터 나타났다.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철로국 랴오양(遼陽) 분국의 조리 역장을 하던 부친이 칭하이성의 란저우(蘭州) 철로국 시닝(西寧) 분국에 소속된 한 역의 역장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시닝 철로1중으로 학교를 옮긴 그는 6개 반 반장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문화대혁명 시절이던 1971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닝철로분국 신호통신구 업무보고원으로 배치됐다. 여섯 명의 보고원 중 업무성적이 가장 뛰어났던 그는 곧바로 영도반에 진입한 뒤 얼마 안 돼 신호통신구 지부 서기가 됐다. 1976년 6월 시닝철로분국의 선전부 간사로 임명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저 어린 여성동지 소속이 어디야?” 어느 날 그의 조리 있고 당찬 발언을 듣고 감동받은 마완리(馬万里) 칭하이성 상무부서기는 1983년 1월 28세의 젊은 그를 칭하이성의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 부서기로 승진시켰다. 부(副)과장급에서 부(副)청장급으로 수직상승한 것. 게다가 당시 서기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는 성의 공청단 부서기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서기 자리에 올랐다.
성 공청단 서기였지만 쑹은 중학교 졸업장밖에 없었다. 1985년 9월 그는 30세의 나이로 뒤늦게 중국청년정치학원(현 공청단 중앙단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대학교육을 받았다. 이때의 2년간 교육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그에게 이론적 분석능력까지 길러줬다.
하지만 그의 관직길은 되레 파란을 겪게 된다. 1989년 초 공청단 서기였던 그는 공청단 칭하이성 제8차 대회에서 서기 후보로 나갔다가 낙선했다. 보기 드문 현직 서기의 낙방이었다. 그에게는 이때가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 너무 잘나간 게 화근이었다. 그는 하이둥(海東) 지(地·중국 행정단위로 시(市) 중의 하나) 공청단 부서기로 배치됐다. 직급도 정(正)청장급에서 부(副)청장급으로 강등됐다. 과장급에서 청장급으로의 수직상승도, 청장급에서 부청장급으로의 강등도 칭하이성에서는 그가 처음이었다.
어릴 적부터 지도자적 자질 발휘
그런 쑹슈옌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해 하이둥 관할의 화룽(化隆)현 즈자(支)향에 우박이 엄청나게 떨어졌다. 2000무(畝·1무는 약 1마지기)의 농작물이 완전히 망가졌다. 그는 곧장 현지로 달려가 피해상황을 파악하고 울부짖는 농민들에게 호주머니 돈까지 털어 나눠줬다. 그리고 곧바로 대책회의를 열어 30만 위안(약 4073만원)의 구조자금을 조달해 사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민심을 얻는 데도 성공했다. 쑹은 곧바로 상무부서기로 승진했다. 1992년 4월 그가 시닝의 노동인사청 부청장으로 돌아올 때 직원들은 울면서 작별을 아쉬워했다.
뒤늦게 다시 청장급으로 올라왔지만 그는 청장급 중에서 여전히 어린 편이었다. 노동인사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손대지 못하던 노동청의 대대적인 인사개혁에 착수했다. “더 이상 소개 봉투를 들고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후진타오 주석도 각별한 관심과 배려
계획경제 시대 인사 배치는 가장 큰 권력이었다. 능력 여부와 상관없이 인사부의 지령 하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이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로비를 위해 소개 봉투를 들고 오는 것도 근절했다.
그러자 위아래로부터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는 셈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사에서 계획경제 시대의 ‘철밥통’을 깨버린 것은 곧바로 여러 효과를 나타냈다. 또 중앙정부 역시 노동법을 개정하면서 노동인사 방식을 시장경제에 맞게 고쳤다. 지런펑(紀仁鳳) 노동·사회보장부 청장은 “쑹 성장의 인사개혁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칭하이성을 크게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인사개혁 후 그는 칭하이성 통계국을 거쳐 성위의 통전부(통일전선공작부)와 조직부로 옮기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인사와 조직, 선전과 통일전선 부문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것이다.
이처럼 그가 여러 분야에서 골고루 경력을 쌓게 된 데는 공청단에서 알게 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 주석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쑹 성장이 공청단 칭하이성 부부장으로 승진했을 때 후 주석은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였다. 후 주석이 부장급(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로 있을 때 그는 공청단 산하 간부학교인 청년정치학원에서 전문대 과정을 이수했다. 후 주석이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당교 교장을 할 때 그는 중앙당교에서 대학원을 졸업했다. 쑹 성장은 리커창(李克强) 상무위원과 리위안차오(李源潮), 류옌둥(劉延東), 왕양(汪洋)과 함께 후 주석을 필두로 하는 ‘퇀파이(團派·공청단파)’의 핵심 멤버다.
1998년 4월 그는 칭하이성의 부서기에 당선됐다. 2004년 12월엔 칭하이성 대리성장에 임명된 데 이어, 이듬해 1월 칭하이성 성장으로 정식 선출됐다. 2005, 2006년 칭하이의 지역총생산(GRDP)은 각각 5억4332만 위안, 6억4158만 위안으로 매년 16.6%, 18.1%씩 고속 성장했다. 후 주석의 기대에 부응한 셈이다.
쑹의 남편 리징롄(李景連)은 당초 신호통신구에서 일하는 신호공이었다. 2005년 현재 남편은 시닝 철로운전기사 학교의 당위 서기다. 쑹은 성장이 됐지만 보모를 두지 않고 직접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며 식구들의 식사를 챙긴다.
지방 지도자 가운에 유일한 홍일점인 그가 ‘중국의 철녀(鐵女)’ 우이(吳儀)와 같은 중앙 영도자 반열에 오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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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장춘셴(張春賢)] ‘5종7횡’ 거미줄 고속도로網 설계사
중국 전역 연결 교통대계 완성 … 現 후난성 당서기로 ‘후난굴기’ 투혼
‘중국 거미줄 고속도로의 총 설계사.’
장춘셴(張春賢·55·사진) 후난(湖南)성 당서기 겸 성(省)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1997년 12월 교통부 당조(黨組) 성원으로 시작해 이듬해 4월 부부장을 거쳐 2002년 10월 교통부장에 임명돼 2005년 12월 후난성 당서기로 옮길 때까지 8년간 교통부에 재직하면서 그는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국의 고속도로 교통망을 갖춰놓았다. 그가 완성한 3만5000km의 고속도로망은 ‘5종7횡’이라 불린다. 1991년 시작된 이 계획은 중국 전역을 가로 7개, 세로 5개의 고속도로로 바둑판처럼 연결해 웬만한 지역은 자동차로 달릴 수 있게 한다는 구상이다.
이에 따라 중국의 가장 북쪽인 헤이룽장(黑龍江)성에서 가장 남쪽인 하이난(海南)성의 남부 싼야(三亞)까지 장장 5200km의 고속도로가 뚫렸다. 또 중국 중북부의 네이멍구(內蒙古) 얼롄하오터(二連浩特)부터 중남부 윈난(雲南)성의 허커우(河口)까지 중국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3600km의 고속도로가 놓였다. 수도 베이징(北京)에서 푸젠(福建)성의 성도 푸저우(福州)와 광둥(廣東)성의 주하이(珠海)를 잇는 각각 2500km, 2400km의 고속도로도 새로 생겼다.
중국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동서 고속도로도 줄줄이 탄생했다. 장쑤(江蘇)성의 롄윈강(連雲港)에서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자치구의 훠얼궈쓰(·#53926;爾果斯)까지 4400km의 고속도로가 이미 뚫렸다. 랴오닝(遼寧)성의 동쪽 단둥(丹東)에서 티베트 수도 라싸(拉薩)를 잇는 4600km의 고속도로도 조만간 완성된다. 상하이(上海)에서 청두(成都)까지, 상하이에서 윈난성 루에리(瑞麗)까지 각각 2500km의 고속도로도 모두 개설됐다. 중국 전역의 주요 도시를 대부분 고속도로로 연결한 셈이다.
당초 ‘5종7횡’ 계획은 2020년까지 완성키로 돼 있었던 사업이다. 하지만 장 서기는 2007년까지 13년이나 계획을 앞당겨 대부분의 건설 계획을 마쳤다. 이로써 1991년 당시 500km에 불과하던 중국의 고속도로는 지난해 말 5만3600km로 16년 만에 무려 107배로 늘어났다. 중국은 이를 기초로 고속도로 총길이를 2020년까지 7만km, 2030년까지는 8.5만km까지 늘릴 계획이다. 전국을 고속도로로 촘촘히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국제도로연맹 ‘2006년도 인물상’ 수상
장 서기는 ‘5종7횡’의 완성으로 국제도로연맹이 수여하는 ‘2006년도 인물상’을 받았다. 그의 도로망 확충 노력을 세계가 인정한 셈이다.
이처럼 교통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원래 장 서기의 전공은 기계 설계 및 제조 분야다. 그는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에 자리한 둥베이(東北)중형기계학원(현 燕山·옌산 대학)의 기계제조과를 졸업한 뒤 1980년 9월 삼기(三機)부 116공장 15작업장에서 기술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이어 기계부 제10설계연구원 계획과 계획원, 기계부와 기계위원회, 기전(機電)부 제10설계연구원 당위원회 서기, 기전부 제10설계연구원 당위 서기 겸 부원장, 중국포장식품기계총공사의 부(副)총경리 및 총경리 등 1995년 8월 윈난성 성장 조리(助理)로 갈 때까지 무려 19년 가까이 기계 분야에서만 일했다.
하지만 경력을 보면 장 서기만큼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한 사람도 드물다. ‘공(工), 농(農), 병(兵), 학(學), 상(商), 관(官)’을 모두 넘나들었다. 기계공장에서 16년을 일했고 고향인 허난성 위(禹)현 청관(城關)공사의 둥관(東關)대대에서 농민으로 1년9개월을 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곧바로 인민해방군에 입대해 4년3개월을 우한(武漢)군구 통신단 전사로 사회에 입문했다. 기전부 제10설계연구원에서 부원장을 지냈고, 중국포장식품기계총공사에서 부총경리와 총경리로도 일했다. 1995년 8월 윈난성 성장 조리로 발탁된 이후 현재까지 23년간 관직에 몸담고 있다.
장 서기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을 좌장으로 하는 상하이방(上海幇)도, 후진타오(胡錦濤) 현 주석을 필두로 한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도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 고급 당정군 간부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太子黨)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2002년 10월 교통부장으로 발탁될 당시 국무원 장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타고난 성실함에 불굴의 추진력 겸비
이처럼 배경도 파벌도 없는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7세 나이로 인민군 전사(戰士)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35년 뒤 후난성 당서기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불치하문(不恥下問)의 타고난 성실함과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상상력, 불굴의 추진력 때문이다. 기계 분야에서만 일하다 처음 교통부 당조 성원과 부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그는 국장들에게 직접 찾아가 질문을 하면서 업무를 익혔다. 또 윈난성 성장 조리로 재직할 때는 산악지형이 많은 윈난성의 특징상 대기업보다 소기업이 더 적합하다는 새로운 발상으로 윈난성에서 유명 소기업을 일궈냈다. 철로 변압기 시장의 80%를 장악한 쿤밍(昆明)변압기와 프린터 업체인 블루컴퓨터가 바로 그것이다.
‘5종7횡’ 계획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2005년 1월, 그는 2030년까지 베이징에서 대만의 타이베이(臺北)를 고속도로로 연결하겠다는 ‘엉뚱’하면서도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한국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건설할 수 있다는 대한해협의 해저길이가 128~ 148km인 점을 감안하면 최단거리가 100km에 불과한 양안(兩岸·중국과 대만)해협은 기술적으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장 서기는 현재 ‘부민강성(富民强省)’을 기치로 동부에 비해 크게 뒤처진 중부지역의 한 성인 후난성의 굴기(·#54366;起)를 위해 투혼을 불사르는 중이다. 매년 10% 이상의 지역총생산(GRDP) 성장률과 14%의 재정수입 증대, 과학기술 산업의 국내총생산(GDP) 공헌율을 55%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후난성의 지역경제를 끌어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능력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손해 보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가 가장 공정하고 투명하며 공평한 사회입니다.” 그가 인사(人事)가 있을 때마다 부하직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그 역시 이를 좌우명으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왔다.
촘촘한 고속도로망으로 중국의 교통대계를 일궈놓은 그가 후난성을 발판으로 5년 뒤 중앙의 영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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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루잔궁(盧展工)] 運을 스스로 개척하고 바꾸는 남자
현 푸젠성 黨서기, 탁월한 능력 발휘 … 성실함 무기로 거침없는 질주
‘관리 티(官架子) 안 나는 복장(福將)’. 루잔궁(盧展工·56·사진) 푸젠(福建)성 당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을 이르는 말이다.
3600만 인구를 거느린 푸젠성의 당서기가 아니라 시골 촌서기 같은 인상을 풍기는 그의 이력을 보면 복(福)이 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첫 번째 운은 1999년 샤먼(廈門)에서 터졌다. 사회주의 중국 건립 이래 사상 최대의 밀수사건에 푸젠성과 중앙 고위 지도부가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대리성장이던 시진핑(習近平)은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리펑(李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의 아들, 자칭린(賈慶林) 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주석의 부인 린여우팡(林幼芳) 등 상상을 뛰어넘는 고위직 인사의 친인척이 범죄에 관련된 사실이 드러나자 시 성장도 법대로 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루잔궁은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웨이젠싱(尉健行) 당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 등 중앙지도부가 그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의 뜻대로 사건은 처리됐다. 이에 따라 사건을 적당히 무마하려 했던 시 당시 푸젠 성장은 2002년 저장(浙江)성 대리성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반면 루잔궁은 2001년 1월 푸젠성 부서기, 2002년 10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3년 1월엔 성장으로 쾌속 승진했다.
두 번째 운은 2000년 12월 푸젠성 서기로 내려온 쑹더푸(宋德福, 1946~2007)가 폐암으로 2003년 베이징(北京)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받으면서부터다. 쑹 서기가 업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자 2004년 2월 당시 성장이던 루잔궁이 성의 대리서기로 당 업무까지 맡았고, 이어 같은 해 12월 정식으로 서기직에 올랐다. 쑹은 병이 깊어지자 푸젠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직도 사직한 채 병마와 싸웠지만 지난해 9월 결국 세상을 등졌다.
복과 운도 열심히 노력하는 자에게 따르는 것이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에게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게 아니다. 루 서기는 정치적 연줄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배경을 묻는 질문에 “나는 다른 사람과 다를 게 없었다”며 “시골에 내려가서는 우마차를 잘 잡아탔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반장과 공청단 지부 서기를 했듯, 기회를 잘 잡았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는 겸손의 말일 뿐이다. “난 단지 땅에 발을 디디고 착실하게 일했다.” 어느 회의석상에서 한 이 말처럼 그는 항상 임무에 최선을 다하며 기회를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샤먼 밀수사건 법대로 처리 쾌속 승진
한쪽만 있는 쌍꺼풀, 깊게 팬 주름살. 루 서기는 폼 재기 좋아하는 중국의 고위관리와는 영 딴판이다. 행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저장성 출신이지만 인생의 가장 귀중한 젊은 시절을 헤이룽장성에서 보냈다. 문화대혁명 시절인 1969년 고교를 마치자마자 머나먼 헤이룽장성의 푸민(富民)공사라는 농장에 배치돼 중국의 가장 추운 북쪽에서 무려 13년을 살았다.
“북대황(北大荒)에서의 생활은 나에게 형식주의에 물들지 않고 ‘멋부리는 틀(花架子)’을 좋아하지 않으며 진심으로 인민을 위해 일하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만약 헤이룽장성의 13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루 서기는 언젠가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헤이룽장성에서의 젊은 시절은 그의 의지를 단련시켰고, 고통을 인내하면서 노력하는 정신을 배우게 했다.
루 서기는 무당파(無黨派) 인사다. 장쩌민 전 주석 시절 요직을 휩쓴 상하이방(上海幇)도, 요즘 기세를 올리는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도 아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웨이젠싱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다. 헤이룽장성에서 근무하던 시절 그를 눈여겨봤던 웨이젠싱은 1998년 10월 전국 총공회 주석으로 가면서 저장성 당 상무위원 겸 조직부장인 그를 중앙으로 끌어올려 부주석으로 데리고 갔다. 이후 그는 웨이젠싱의 심복이 됐고 웨이젠싱도 그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농민 먼저 고려 … ‘해안 서안 경제구’ 설치도 박차
중병에 걸렸던 쑹더푸 또한 그를 믿고 지원했다. 2004년 12월 성 서기로 정식 임명되기 직전 병문안을 위해 베이징을 찾은 그에게 쑹더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푸젠성에 애틋한 감정이 있다. 병이 난 뒤 나는 두 번의 감정 변화를 겪었다. 당신을 대리서기에 임명한 뒤 나는 손을 놓았고(放手), 당신을 서기로 임명한 뒤 마음을 놓았다(放心).” 쑹은 이렇게 말하며 “이제 걱정을 안 하게 됐다”고 기뻐했다.
농촌에서 오래 생활했기에 그는 누구보다 먼저 농민을 고려한다. 푸젠성 성장으로 일하던 2003년 그는 푸젠성에서 농촌 주민의 최저생활보장제도를 시작했다. 수입이 연간 1000위안 이하인 농민에게 보조금을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2006년 5월 최저생계보조비를 받는 농민은 75만명에 달했다. 현재는 중국의 31개 성 대부분이 이를 시행하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생계보조비는 매우 드문 제도였다.
2004년 1월부터 농민을 위해 ‘육천(六千) 수리공정’도 추진 중이다. 육천 공정이란 1000만 농민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고 1000개의 저수지를 개보수하며, 1000만 무(畝·1무는 약 201.7평으로 한 마지기에 해당) 경작지의 관개시설을 확보하고 1000만㎥의 목재산지에 물을 대며, 1000만 무의 토지 유실을 막고 1000리의 하천을 정비하는 것을 말한다. 5년에 걸쳐 시행되는 이 공정은 올해 마무리될 예정이다.
루 서기는 양안(兩岸·중국과 대만) 관계 개선이 푸젠성 경제발전의 관건이라 보고 이를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푸젠성에 ‘해안 서안 경제구’를 만들어 대만 기업을 대거 유치해 창장(長江) 삼각주와 주장(珠江) 삼각주의 중간에 자리한 푸젠성을 또 하나의 경제견인차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헤이룽장성의 지식청년에서 전문대 교수, 저장성 자싱(嘉興)시 서기에서 허베이(河北)성 부서기, 전국 총공회 부주석, 푸젠성 서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강·남북과 중앙, 지방을 가로지르며 성실함 하나로 달려온 그가 앞으로 정치적 연줄이 없는 무당파로서 어디까지 나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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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장바오순(張寶順)] 뱉은 말 반드시 실천 퇀파이의 핵심
산시성 당서기, 탄광 등 현장 챙기기… 한직 돌면서도 탁월한 업무능력 발휘
지난해 1월 장바오순(張寶順·58·사진) 산시(山西)성 당서기 겸 인민대표대회 주임은 새해 첫 외부 행사로 산시성의 큰 탄광 중 하나인 자오메이(焦煤)그룹 산시석탄전기공사를 찾았다. 갱도 입구에서 막장까지는 무려 8km. 탄차(炭車)를 타고 7km를 들어간 뒤 다시 1km를 걸어야 석탄을 캐는 작업장이 나온다.
석탄은 중국이 여전히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에너지다. 2006년 중국의 석탄 에너지 비중은 69.4%로, 석유의 20.4%보다 3.5배 많다. 이처럼 중국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 비중을 차지하는 석탄의 4분의 1이 산시성에서 채굴된다. 2006년 생산한 23.73억t 가운데 5.81억t이 산시성에서 채굴됐다. 산시성은 중국의 석탄 보고(寶庫)인 셈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광부들의 안전이다. 연간 탄광사고로 사망하는 광부가 산시성에서만 500명에 이른다. 2006년 중국에서 안전사고로 사망한 광부는 4746명. 그나마 6000명 선을 계속 웃돌다 2005년부터 줄어든 숫자다. 장 서기가
새해 벽두부터 탄광을 찾은 것도 바로 안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안전하게 일하고 편안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는 얼굴이 까마귀처럼 검어진 광부들을 바라보며 안전을 제일로 강조했다. 매일 한두 명꼴로 숨지는 산시성의 탄광사고 사망자 수가 크게 줄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501명이던 사망자 수는 2003년 496명, 2006년 476명 등으로 해마다 별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탄광이 갈수록 노후화해 지하갱도의 길이가 늘기 때문이다.
중국 석탄 寶庫 지역 광부 안전 최우선
하지만 중국 전체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산시성의 탄광사고 사망자가 전국의 10분의 1이라는 점에서 다른 성보다는 비교적 양호하다고 볼 수 있다.
장 서기 하면 많은 사람들은 ‘약법삼장(約法三章)’ ‘삼불(三不)’ ‘삼계(三戒)’를 떠올린다. 약법삼장은 자신에 대한 경계다. 삼불은 자신과 부하직원에게 동시에 주문하는 내용이며, 삼계는 부하직원에 대한 당부이자 경고다.
약법삼장이란 중대 사업이나 중요 자원, 투자비가 많이 들어가는 사업은 절대로 혼자 심사하거나 허가하지 않으며, 친구든 친척이든 근무지에서 장사· 투자 등 경제활동에 종사하지 못하게 하며, 절대로 권력을 무기로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삼불이란 작게 열 수 있는 모임은 크게 열지 말고, 짧게 할 수 있는 대화는 길게 하지 않으며, 간편한 방식으로 할 수 있는 모임은 회의를 열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삼계란 감독한답시고 주민을 괴롭히지 않으며, 심사·허가를 한답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며, 협력한답시고 남의 일을 훼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국엔 예부터 ‘관리가 부임하면 새롭게 세 가지를 시도한다(新官上任三把火)’는 말이 있다. 이는 당초 제갈량(諸葛亮)이 장군에 임명된 뒤 10만~100만명에 이르는 조조(曹操)군을 세 차례나 불로 공격해 대승을 거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이 말은 새 관리가 부임하면 티를 내기 위해 새로운 것 몇 가지는 반드시 시도한다는 의미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대부분 공염불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언제 시작했느냐는 듯 사라지는 사례도 많다. 주변 사람들이 장 서기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허튼소리’를 하지 않고 한번 내뱉으면 반드시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장 서기는 젊은 시절 잘나가는 청년 간부 중 한 명이었다. 35세 젊은 나이에 부부장급인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공청단)의 서기를 지냈다.
그와 경력이 가장 비슷한 사람은 리위안차오(李源潮) 중앙정치국 위원이다. 공청단에서 각각 10년 이상씩 근무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수장으로 하는 ‘퇀파이(團派·공청단 출신)’의 핵심인물이 됐다는 점도 비슷하다. 나아가 1990년대 초반 똑같이 공청단에서 빠져나와 ‘전업(轉業)’한 것도, 심지어 성의 부서기와 서기로 나가기 전에 8~10년씩 오랜 기간 실권 없는 부(副)부장급 직책을 떠돌았다는 점도 흡사하다.
한때 잘나가던 그는 그러나 1993년 4월부터 2001년 9월 산시성 부서기로 옮길 때까지 8년5개월을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언론 분야의 한직(閑職)을 맴돌아야 했다. 아무런 실질적 권한이 없는 신화사 부사장 자리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의 직책이 바뀐 것은 단 한 번이다. 1998년 3월 신화사 부사장 겸 당조(黨組) 성원이던 그가 5년 만에 신화사 부사장 겸 당조 부서기로 바뀐 것이다.
젊은 시절 그를 주목했던 정치분석가들은 이 기간 그를 백안시했다. 하지만 그는 2001년 9월 산시성 부서기 겸 산시성 당교 교장으로 전보됐다. 2년 반 뒤에는 산시성의 대리성장에 당선됐다. 부부장 또는 부성장급 자리에서 13년 만에 부장급 또는 성장급에 오른 것이다.
젊은 시절 주목받지 못하다 서서히 두각
2005년 7월엔 산시성 서기에 올랐으며, 2006년 1월엔 산시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자리까지 꿰찼다. 같은 해 10월 당서기 연임에 성공했고 올해 1월엔 인민대표회의 주임직도 연임에 성공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그의 실력 덕분이다. 2001년 9월 그가 산시성에 부임한 뒤 2002년 전국 31개 성 가운데 21위이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2006년 15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산시성의 GDP 역시 2002년 2325억 위안에서 2006년 4753억 위안으로 4년 만에 2배 넘게 늘었다. 2005년 성급 지도자 평가에서 그는 왕치산(王岐山) 베이징(北京) 시장과 한정(韓正) 상하이(上海) 시장, 리위안차오 장쑤(江蘇)성 당서기 등과 함께 우수 평가를 받았다.
한직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일하는 태도 또한 본받을 만하다. 신화사 재직 시절 익힌 감각으로 그는 종전의 지도자들과 달리 탄광사고를 은폐하지 않고 적극 공개해 되레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퇀파이의 핵심 인사이면서도 동갑인 리위안차오나 후배인 리커창(李克强)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게 밀린 장 서기. 그가 앞으로 어디까지 다시 만회해 올라갈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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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후춘화(胡春華)] 최연소 승진 퍼레이드‘리틀 후진타오’
27세 부청장급, 29세 청장급, 43세 장관급 올라 … 후 주석 신임 각별
6세대 선두로 나선 리틀 후진타오(胡錦濤).’ 올해 4월 15일 열린 허베이(河北)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궈겅마오(郭庚茂) 성장 후임으로 대리성장에 임명된 후춘화(胡春華·45·사진) 전 허베이성 부서기를 일컫는 말이다.
2006년 11월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에 취임한 후춘화는 2008년 4월1일 허베이성 부서기에 임명된 데 이어 보름 만에 대리성장에 올랐다. 이 초고속 승진으로 후 성장은 전국 31개 성장 가운데 가장 젊은 성장이 됐다.
사실 ‘최연소 기록’은 그의 장기 중 하나다. 1990년 2월 만 27세도 안 된 나이에 부청장급인 공청단 시짱(西藏)자치구 부서기에 올랐다. 1992년엔 만 29세 나이로 청장급인 시짱자치구 공청단 서기가 됐다. 1997년 12월엔 34세로 부부장급인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에 임명됐다. 직급상 모두 최연소 기록이었다. 2006년 11월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임명됐을 때도 최연소 부장(장관)급이었다.
후 성장이 태어난 후베이(湖北)성 우펑(五峰)현은 평균 해발고도 1500m의 산악지역으로 주변 모두가 소수민족인 투자(土家)족의 자치구역이다. 벽촌 중 벽촌으로 외부와는 사실상 단절된 채 사는 지역이다. 그 역시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무신은커녕 헝겊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4km와 6.5km 떨어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해진 짚신만 한 무더기다. 당시 그의 발바닥엔 동전 굵기의 굳은살이 항상 박혀 있었다.
벽촌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 … 고향서 베이징대 첫 입학생 기록
그러나 이런 궁벽한 생활은 그를 좌절시키기는커녕 그의 의지를 더욱 강인하게 해줬다. 학교 성적도 항상 1위였다. 대학 입시가 부활한 지 3년째이던 1979년 여름 그는 우펑현 수석으로 베이징(北京)대 중문과에 합격했다. 우펑현에서 베이징대 입학생이 처음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학비는 물론 베이징에 올라갈 여비조차 없었다. 그는 학비를 벌기 위해 대학 입학 직전 여름방학 내내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강모래를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한 달 넘는 막노동으로 그가 번 돈은 100위안. 당시로선 큰돈이었다. 공사판에서 번 돈과 아버지가 친인척에게 꾼 돈으로 겨우 학비와 여비를 마련해 베이징에 올라왔다. 16세 어린 나이였던 그는 학교에서 키가 가장 작았다. 하지만 성적은 항상 수위를 유지해 졸업할 때 ‘우수졸업생’ 상장을 받았다.
탁월한 성적 때문에 당초 그는 베이징에 남을 수 있었다. 실제로 갈 자리도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벽촌오지인 티베트 근무를 자원했다. 1983년 7월18일 졸업식에서 그는 다른 동료 졸업생 2명과 함께 티베트로 가는 소회를 발표했다.
“중국은 여러 민족이 사는 국가입니다. 소수민족이 사는 지역은 전 국토의 60%에 이릅니다. 제 고향도 소수민족 자치지역입니다. 만약 개혁개방과 현대화가 신속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저 역시 현재 외부와 격리된 산간오지에서 밭을 갈고 농사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족(漢族)의 현대화는 중화민족의 현대화도 아니요, 중국의 현대화는 더더욱 아닙니다.”
자원한 티베트에서 19년 근무 … 구석구석 오가며 주민생활 챙겨
1983년 8월 티베트에 도착한 그는 공청단 시짱자치구위원회 조직부 간부에서 시작해 시짱청년보와 시짱호텔 근무를 거쳐 시짱자치구의 지방과 중앙에서 무려 19년을 근무했다. 보통 중앙의 요직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오지 근무 경력을 이용하는 사람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19년간 티베트의 7개 지급(地級) 시 가운데 6개를 현장 시찰했고 티베트의 75개 현·시 가운데 50개를 누비고 다녔다.
해발고도 3500~5000m에 이르는 시짱자치구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는 바로 중국에서 유일하게 자동차 도로가 없는 모퉈(墨脫)현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 갔다 오는 데만 15일이 걸리는 이곳을 직접 방문해 현지인들의 생활을 살펴봤다.
사람들은 그를 ‘완전한 티베트인’이라고 부른다. 혈통만 한족이지 티베트어에 능통하고 티베트 춤을 잘 추며 칭커주(靑·#53883;酒)로 불리는 티베트 술도 잘 마신다. 이처럼 오지에서 묻혀 살던 그는 2006년 말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발탁되면서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그가 티베트에서 중앙정계로 진출해 초고속 승진을 할 수 있었던 데는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 후 주석과 그의 인연은 후 주석이 1988년 시짱자치구 서기로 옮기면서부터다. 후 주석은 당시 시짱자치구 공청단 부서기이던 그를 눈여겨봤고, 침착하고 총명하면서도 일처리 능력이 뛰어난 그를 점찍어뒀다.
1992년 10월 시짱자치구 서기를 그만두고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올라간 후 주석은 직접 전화를 걸어 시짱자치구의 공청단 서기에 후춘화를 앉힐 것을 부탁할 정도로 신경을 썼다. 후춘화는 그해 12월 공청단 시짱자치구 서기로 발탁됐다. 최근의 초고속 승진도 후 주석과의 인연 덕분이다.
그는 6세대로 분류되지만 사실 5세대로 분류되는 리커창(李克强)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나 리위안차오(李源潮) 정치국 위원 겸 중앙조직부 부장과 보시라이(薄熙來) 정치국 위원 겸 충칭(重慶)시 서기와 대학 졸업이나 사회 입문 시기는 별 차이가 없다. 리위안차오와 보시라이 위원은 각각 77학번이고 리커창 상무위원 역시 78학번으로 79학번인 그와 1, 2년 차이다. 이는 문화대혁명 기간 폐지됐던 대학입시가 77년부터 부활했기 때문이다.
후 성장의 어린 시절 집안 사정은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비슷하고, 사회 입문 뒤의 경력은 후진타오 주석과 흡사하다. 산간 오지인 티베트와 공청단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이나 성격도 비슷하다. 후 성장은 “후 주석과 함께 근무한 31개월 동안 총명하고 능력 있는 일처리 솜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현재 6세대 선두주자로는 그와 함께 저우창(周强) 후난(湖南) 성장과 쑨정차이(孫政才) 국무원 농업부장 등이 있다. ‘후진타오의 분신’ ‘리틀 후진타오’로 불리는 그가 2022년 6세대 지도부가 출범할 때 어떤 자리에 오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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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저우창(周强)] 절차·민주 중시하는 6세대 선두주자
농사일 도우면서도 책 읽던 학구파 … 1985년 공직에 첫발 이후 승승장구
저우창(周强·48·사진) 후난(湖南)성 성장은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의 6세대 최고지도자 후보다. 그는 2006년 9월 세간의 화제를 모으며 최연소 성장으로 발탁됐다. 중국에서 1960년대 출생자 가운데 첫 성장이다.
현재 중앙의 부장 또는 지방의 성장급 가운데 40대 인사는 모두 5명이다. 지방 지도자로는 저우창 성장을 비롯해 4월에 임명된 후춘화(胡春華·45)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과 지난해 12월 임명된 누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47)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주석이 있다. 또 중앙 지도부엔 쑨정차이(孫政才·45) 농업부장과 5월4일 최연소로 부장급에 임명된 루하오(陸昊·41)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가 있다. 이들은 2012년 등극할 5세대 지도부인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과 리커창(李克强) 수석 부총리에 이어 2022년 이후 중국을 책임질 6세대 지도자들이다.
그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수장으로 하는 공청단 출신 가운데서도 핵심이다. 공청단의 최고 수장인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만 8년을 근무했다.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까지 포함하면 무려 11년에 이른다.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1년을 지낸 후 주석이나 5년을 지낸 리 부총리보다도 재임기간이 길다.
공청단 근무 시절의 업적도 탁월하다. 그가 제1서기로 재직하는 동안 공청단은 ‘당이 요구하면 공청단은 행동한다(黨有號召 團有行動)’는 구호 아래 여러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중국 정부가 1999년부터 대대적으로 전개한 서부 대개발을 지원하는 ‘대학생 서부자원 프로그램’부터 창장(長江), 황허(黃河) 등 오염이 심각한 중국의 주요 강들을 살리는 ‘모친하(母親河) 보호 액션’, 박사복무단, 청년문명호, 청년지원자 프로그램 등 국가를 위한 다양한 청년활동을 전개했다. 또 국제IT청년포럼, 중국타이다(泰達)생물포럼, 해외학술인 귀국창업주(週) 등 많은 국제협력사업도 새로 만들었다.
2006년 9월 최연소 성장 발탁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성과는 공청단 산하 중국청년여행사를 중국 최대 여행사로 키워낸 일이다. 2006년 현재 이 회사의 총자산은 33억3000만 위안(약 4926억원)으로 웬만한 재벌 회사와 맞먹는다. 2006년 상반기 영업수익도 11억3000만 위안(약 1672억원), 순수입만 3767만 위안에 이른다.
2006년 9월 그가 최연소 성장으로 발탁된 데는 후 주석의 핵심 인맥인 공청단 출신이라는 점도 작용했지만, 이런 탁월한 능력이 높이 평가됐기 때문이다.
그는 후난성 성장에 임명되자마자 후난성 내 55개 행정 및 법 집행기관의 권력 리스트를 일반에 공개했다. 또 각급 행정기관의 주요 사업과 정책을 일반에 공개해 조사, 연구, 전문가 포럼을 거치고 일반인의 참여 속에 정책을 결정하도록 지시했다.
이 같은 조치는 일반인들이 행정 책임자와 권한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행정권력을 감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효율을 제고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사전에 막으며 모든 행정을 법 절차에 맞게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권력의 양광(陽光) 운행’ 운동으로 불리는 이 조치를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지난해 4월 후난성 행정절차 조례를 개정했다. 주민의 행정 감독과 참여를 법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수질 개선 위해 공장 폐수와의 전쟁 뚝심 발휘
이처럼 그가 투명하면서도 법에 따른 절차를 중시하는 것은 대학 전공이나 사법부 근무 경력과 무관치 않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1년간 고향에서 지식청년으로 농사를 짓다가 1978년 충칭(重慶)에 있는 시난(西南)정법대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까지 7년간 공부한 그는 85년 사법부에 배치돼 판공청 부주임, 법제사(法制司) 사장 등 10년 남짓 사법부에서 근무했다.
학창시절 그는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의 고교 시절 스승인 저우셩(周勝) 씨는 “저우창은 나이는 어렸지만 학업성적이 매우 뛰어났다”면서 “특히 문학작품을 많이 읽어 어문 실력이 출중했다”고 회고했다.
저우창 성장의 어머니는 “명절이나 휴일에도 창은 하루 종일 바깥에 나가지 않고 책을 읽었다”며 “고향에서 지식청년으로 농사일을 할 때도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고 읽곤 했다”고 전했다.
그의 공부 욕심은 남다르다. 저우창 성장의 대학 동료인 중국검찰출판사 위안치궈(袁其國) 사장은 “저우창은 취침을 위해 기숙사 불을 끈 뒤에도 혼자 회중전등을 켜고 공부했다”며 “그래서 친구들이 이를 빗대 ‘낭잉잉쉐[囊螢映雪·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뜻]’라고 많이 얘기했다”고 말했다.
고교를 마치고 농촌에서 일하던 중 대입시험을 보고 바로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습관 덕분이다. 당시 시난정법대 법학과는 300여 명의 입학생을 뽑았는데, 저우창은 당시 17세로 어린 축에 속했다. 문화대혁명 기간(1966~76) 대학에 가지 못했던 청년들이 동시에 몰리면서 만 15, 16세부터 33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합격했던 것이다.
“격정과 이상이 충만한 시대였어요. 모든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으로 부풀었고 사회에 대한 강렬한 책임감도 느꼈죠. 모두 사회 밑바닥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절대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저우창 성장은 지난해 3월 중국의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대학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가 석사과정을 마칠 때 지도를 맡았던 진핑(金平) 교수는 그에게 기대를 표시하며 “중국은 대국으로 많은 정치가가 필요하지만 절대로 정객이 돼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저우창 성장은 성장급 가운데 최연소 나이로 인구 6700만명의 후난성 행정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으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던 걸까. 후난성에 가자마자 그는 1년 만에 물고기가 살 수 없는 5급수의 둥팅(洞庭)호를 3급수로 크게 개선했다. 후난성 경제가 파탄난다는 우려에도 폐수를 흘려보내는 236개의 제지공장 문을 닫고 234개 공장의 조업을 중단시킨 결과였다.
1995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서기로 발탁된 뒤 이러한 정치적 업적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해온 그가 최고 권좌에까지 오를 수 있을지 세인의 눈이 그에게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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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쑨정차이(孫政才)] 농업개혁 중책 짊어진 ‘옥수수 박사’
6세대 선두주자 최연소 장관급 간부 … 식량 생산 제고 8대 목표 제시
2006년 12월29일 중국 농업부 수장에 전격 기용된 쑨정차이(孫政才·45·사진) 농업부장은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선두주자 가운데 하나다.
현재 6세대 선두주자로는 저우창(周强·48) 후난(湖南)성 성장과 후춘화(胡春華·45)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 루하오(陸昊·41) 중국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가 있다. 이중 쑨 부장은 루하오 공청단 제1서기를 제외하면 가장 나이가 어린 부장(장관)급 간부다.
쑨 부장의 농업부장 기용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원자바오(溫家寶) 국무원 총리가 식량 증산을 독려하고 중국 농업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결행한 ‘과감한 모험’으로 받아들여진다. 옥수수 증산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학자라는 점에서 식량 증산을 획기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볼 수 있지만, 행정을 맡아본 경험이 지금까지 농업부장에 임명된 사람 가운데 가장 짧기 때문이다.
행정경험이 짧아서인지 그에 대한 소개 자료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 중국 관영 신화왕(新華網)에서조차 그의 경력은 명확하게 나와 있지 않다.
중국에서 ‘쑨 박사’ 하면 ‘옥수수 밀식(密植) 재배의 대가’로 불린다. 1980년 라이양(萊陽)농학원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1984년 곧바로 베이징(北京)시 농림과학원에 석사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중국 옥수수 재배계의 거두(巨頭)인 천궈핑(陳國平) 교수를 사사했다. 천 교수는 1980년부터 96년까지 베이징시 옥수수 고문단 단장으로 일하면서 베이징시의 1무(畝)당 옥수수 수확량을 1979년 229kg에서 96년 2배가 넘는 481.6kg까지 끌어올렸다.
쑨 부장은 이곳에서 밀생(密生) 옥수수의 생장과정을 집중 연구했다. 똑같은 면적에 많은 옥수수를 심으면서도 그루당 수확량이 줄어들지 않도록 연구한 것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산둥(山東)성 룽청(榮成)시 후산(虎山)진 우룽주이(五龍嘴)촌이다. 이곳은 산둥성에서도 한국에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그가 어릴 적의 이 지역 생활수준은 중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열악했다. 당시 학교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중·고교를 다닌 쑨 부장은 주말에 집에 갈 때도 학교에서 모아둔 식량을 짊어지고 집에 갔다가 남들보다 일찍 돌아오곤 했다. 집에 가도 그가 먹을 양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자바오 총리의 ‘과감한 모험’
하지만 시험성적은 항상 상위였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줄곧 반장을 도맡아 했다. 당시 체육을 가르쳤던 장수제(張樹皆) 교사는 2007년 초 ‘웨이하이(威海)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공부도 잘하고 어른스러웠으며, 친구들과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어린이였다”고 그를 회고했다.
그는 현재 우룽주이촌에서 유사 이래 가장 출세한 인물이다. 1980년 고등학교 졸업 땐 그를 비롯한 3, 4명만이 대학에 들어갔다.
석사 연구생 시험을 앞두고 그는 일주일 열흘씩 쉰다는 춘제(春節)에도 집에 가지 않고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그 혼자뿐이어서 추위 때문에 외투를 입고 담요로 몸을 감싼 채 공부했다고 그의 대학동료들은 전했다.
그가 옥수수 대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대학시절 지도교수의 엄한 질책이 큰 밑거름이 됐다.
라이양농학원 재학 시절 밀품종 실험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실험밭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분필이 없어졌던 것. 이미 실험밭은 밀을 심느라 모두 갈아엎은 상태였다. 보통 교수 같으면 그냥 넘어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지도교수는 달랐다. 분필이 밀의 발아(發芽)와 생장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러면 실험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분필을 찾아 꺼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그는 온종일 진땀을 흘리며 실험밭을 뒤집은 끝에 결국 분필을 찾아냈다.
학자 출신 관료 농업행정 우려 목소리도
그가 옥수수 재배에 조예가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천부적인 재능과 노력 외에도 지도교수의 이런 엄격한 학문연구 태도가 그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든 결과라는 게 그와 10년간 함께 공부한 동료 교수의 전언이다.
최근 발간된 우룽주이촌의 촌지(村誌)는 “보검의 칼날은 스스로 날카롭게 연마할 때 만들어지고, 매화 향기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만 발하는 것”이라며 “쑨 부장의 성공은 지난한 땀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촌의 어린이와 학생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고 적었다.
성실하고도 치밀한 그의 연구 태도는 곧바로 대학 지도교수들의 신임을 받았다. 그가 베이징시 농림과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1년간 영국 유학을 다녀오자마자 농림과학원 작물소 연구실 부주임에 임명된 것도 이런 결과다.
이어 1993년엔 30세 나이로 농림과학원 토비(土肥)연구소 소장으로 승진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농림과학원 부원장을 거쳐 당위 부서기에 올랐다.
1997년은 옥수수 연구에만 몰두하던 그에게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34세이던 그는 농림과학원을 떠나 베이징시 순이(順義)현의 부현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대리현장, 현장, 구장을 거쳐 2002년 5월 순이구 당서기 자격으로 베이징시 위원회 상무위원에 당선됐다.
쑨 부장은 중국에서 몇 안 되는 학자 출신 고위관료다. 주위 사람들은 그가 우레같이 맹렬하고 바람처럼 신속하게 일처리를 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현과 구에서의 경험만 가진 관리로서 천차만별인 중국 농업의 최고 책임자가 된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쑨 부장은 농업부장에 취임하자마자 △식량 생산 제고 △농민 수입 증대 △농업 자주기술 혁신 △농산품 안전 확보 △농업 서비스 강화 △농촌 개혁개방 심화 △동물 질병 방역 강화 △농민 실질 문제 해결 등 8대 목표를 제시하고 직원들을 독려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식량 생산량 증가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5년엔 전년보다 1455만t 늘었지만 2006년엔 1309만t, 2007년엔 350만t으로 증가분이 줄었다.
농업이 주력인 중국의 1차산업 연간 성장률 역시 2~6%로 매년 10% 이상씩 고속성장 중인 2, 3차 산업과 큰 차이가 있다.
행정전문가로 10년간 외도하다 다시 자신의 전공 분야로 돌아온 쑨 부장이 중국의 농업개혁이라는 지난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6세대 선두주자의 지위를 굳건히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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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루하오(陸昊)] 고교 때 공산당 가입 ‘될성부른 떡잎’
학생 때부터 리더십 탁월 … 공직 입문 후 최연소 승진 신기록 행진
5월4일 중국 정계에서 정치분석가들이 깜짝 놀랄 만한 사건이 하나 터졌다. 지난해 말 현재 7544만명의 단원을 거느린 중국공산주의청년단(약칭 공청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부장급·장관급)에 만 40세의 루하오(陸昊·사진) 베이징(北京)시 부시장이 임명된 것이다. 당시 많은 언론매체들이 루 부시장의 나이를 41세로 보도했지만 실은 만 41세에서 한 달이 모자라는 만 40세다.
중국 공산당이 최근 간부들의 연경화(年輕化)를 외치고 있지만 루 부시장의 승진은 실로 기록적이다. 4세대 지도부의 최고지도자인 후진타오(胡錦濤) 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게 만 41세이던 1984년이었다. 전임자인 후춘화(胡春華)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 역시 만 43세이던 2006년 11월에 공청단 제1서기에 올랐다.
물론 그의 기록이 공청단 최연소 기록은 아니다. 리커창(李克强·53)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저우창(周强·48) 후난(湖南)성장은 각각 38세에 이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현재 중국 내 중앙과 지방을 망라해 정(正)부장급(성장급) 이상 간부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리다.
만 35세에 베이징 부시장, 만 40세에 공청단 제1서기
그는 중국 정계에서 ‘연경화 신기록 제조기’로 불린다. 만 27세이던 1995년 그는 직원이 5000명이나 되는 베이징(北京)시 칭허(淸河)방직공장의 공장장에 임명됐다. 당시 최연소 국유기업 최고책임자였다.
32세이던 1999년 11월엔 청장(廳長)급인 베이징 중관춘(中關村) 과기원구 관리위원회 당조(黨組)서기 겸 주임 자리로 승진했다. 이어 2003년 1월엔 만 35세 나이로 베이징 부시장 자리에 올랐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래 베이징시 부시장 역사상 최연소였다. 이때부터 ‘중국 공산당과 정부 간부의 급속한 연경화’를 뜻하는 ‘루하오 현상’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산시(陝西)성의 성도인 시안(西安)에서 85중을 다니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줄곧 반장을 맡았다. 주위 사람을 끌어모으는 조직능력도 탁월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 그의 반주임(班主任)이던 구밍친(顧銘琴·여) 교사는 “루하오는 다른 동료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스스로 외부에서 원로 음악선생님을 모셔와 동료들과 함께 노래수업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번은 수업이 끝나고 화학실험실 변소 청소가 잘 안 됐다고 질책했는데, 그가 자원자를 모으자 곧바로 전 반의 동료들이 모두 호응했다”고 전한다.
국어 수학에서 체육까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보였던 그는 평소 동료 학생을 가르쳐주고 각종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 급우들이 ‘어린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샤오라오스(小老師)’라고 불렀다.
85중의 배구부 코치를 맡았던 정주펑(鄭九峰) 교사는 “루하오는 이것저것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며 “배구팀에서 루하오는 상대방의 전술 변화를 읽어 우리 팀의 전술을 대응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를 탁월하게 수행해 경기를 승리로 이끌곤 했다”고 회상했다.
정치적 감각과 리더십도 뛰어났다. 그는 고교시절 이미 시안 공청단 위원회의 유일한 중·고생 위원이었다. 발이 넓고 모범생이었던 그는 고교도 졸업하지 않은 1985년 5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할 수 있었다. 공산당원이 된 시기가 아버지인 루홍성(陸鴻生) 시안건축과기대 교수보다도 1년이 빨랐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베이징대에 들어가서도 그의 독보적 존재는 바뀌지 않았다. 만 19세이던 1987년 그는 문화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직선으로 선출하는 학생회 주석에 당선됐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학교와 사회를 넘나들었다. 대학시절엔 베이징시 학생연합회 부주석을 맡았고, 석사 과정을 밟고 있던 1990년 8월부터는 베이징시 칭허방직공장의 공장장 조리(助理)로 들어갔다.
부공장장을 거쳐 1995년 공장장으로 승진한 그는 과감한 개혁 끝에 엄청난 적자에 허덕이던 이 공장을 단번에 흑자로 전환해, 2년 연속 우수공장장 영예와 함께 베이징시 제3기 ‘10대 걸출 청년’에 뽑혔다. 그는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당기 효익과 국유기업의 존망’이라는 학술논문 겸 보고서를 발표했다. 국유기업의 채무 문제를 다룬 이 보고서 내용은 후일 그대로 채택돼 시행됐다.
장쩌민 계열로 분류되지만 파벌 중립적 평가받아
베이징시 부시장 시절 공업경제와 식품 등 제품의 안전 및 품질감독 업무를 맡은 그는 풍부한 경제학 소양과 현대경영관리 경험을 잘 결합해 주위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한번은 베이징 시내 대형 매장 주인들에게 주차장을 빨리 확보하라고 지시했는데도 꾸물대며 실행하지 않자, 그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시단(西單) 등 대형 매장에 직접 차를 몰고 가 시간을 잰 뒤 자신의 사례를 설명하며 이들을 설득해 결국 관철해냈다.
그가 관직길에서 이처럼 독보적 선두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1996년부터 2002년까지 6년간 베이징 시장과 당서기를 지낸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주석의 후원이 컸다. 특히 중관춘과기원구 관리위원회 주임과 베이징시 부시장에 발탁되는 데는 자 주석의 힘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자 주석의 정치계파인 장쩌민(江澤民) 계열 인사로 분류된다.
하지만 그의 계파 성향은 짙지 않다. 그는 베이징대에서 중국 유명 경제학자인 리이닝(·#21426;以寧) 교수의 마지막 수제자였다. 리커창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도 모두 리 교수의 수제자들이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점찍은 왕자오궈(王兆國) 제2자동차 부공장장을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한 이후 26년간 내부 승진이 계속되던 공청단의 인사 관행을 깨고 그가 외부에서 공청단 최고책임자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공청단 핵심 권력자들과의 인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그가 여기까지 잘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가진 정치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이지만, 파벌 관계에서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점도 작용했다”며 “상급자들이 그를 계파 사이의 의사소통과 지도부 단결에 나름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정치분석가는 “루 서기는 지금까지 잘 달려왔으나 괄괄하고 독단적인 성격을 고쳐야만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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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계파 성향은 짙지 않다. 그는 베이징대에서 중국 유명 경제학자인 리이닝(·#21426;以寧) 교수의 마지막 수제자였다. 리커창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과 리위안차오(李源潮) 중국 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도 모두 리 교수의 수제자들이다.
198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점찍은 왕자오궈(王兆國) 제2자동차 부공장장을 공청단 제1서기로 발탁한 이후 26년간 내부 승진이 계속되던 공청단의 인사 관행을 깨고 그가 외부에서 공청단 최고책임자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공청단 핵심 권력자들과의 인맥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 정치분석가는 “그가 여기까지 잘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그가 가진 정치자본이 풍부하기 때문이지만, 파벌 관계에서 비교적 중립적이라는 점도 작용했다”며 “상급자들이 그를 계파 사이의 의사소통과 지도부 단결에 나름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정치분석가는 “루 서기는 지금까지 잘 달려왔으나 괄괄하고 독단적인 성격을 고쳐야만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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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천더밍(陳德銘)] 쑤저우 특급 발전 일구고 승승장구
최첨단 기술공업단지 조성 새 모델 창출 … 국무원 상무부장으로 새 역할 주목
‘원원얼야(溫文爾雅·온문이아).’ 태도가 온화하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다는 뜻으로, 지난해 12월29일 국무원 상무부 수장에 임명된 천더밍(陳德銘·59·사진) 상무부장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주위 사람들은 남에 대한 비판도 천 부장이 하면 ‘화풍세우(和風細雨)’ 같다고 한다. 산들바람과 보슬비처럼 온화하고 부드러워 상대방이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상무부장에 임명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막대한 무역흑자, 미국 유럽과의 무역 마찰, 위안화 절상, 외국 자본의 인수합병(M·A) 등 화약내 풀풀 나는 문제들을 협상과 타협을 통해 원만하게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응, 편하게 해. 물 마실래? 담배 피워도 돼. 나 상관하지 말고.”
차를 탈 때마다 그가 운전사에게 하는 말이다. 이처럼 그는 주위 사람을 아주 편하게 대한다.
새로운 수장을 맞이한 상무부 직원들은 전임자 보시라이(薄熙來) 충칭(重慶)시 당서기와 천 상무부장을 자주 비교한다. 나이는 같지만 성격이 판이하기 때문이다.
‘천더밍’ 하면 중국인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쑤저우(蘇州) 발전모델의 창시자’다. 자칫 잘못하면 실패할 뻔했던 쑤저우공업원구를 그는 연간 무역액 500억 달러가 넘는 최첨단 기술공업단지로 바꿔놓았다.
쑤저우시는 1992년 서부에 국가급 개발구를 설치했다. 이어 1994년 5월부터 싱가포르 정부와 합작으로 동부에 쑤저우공업원구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시에 2개의 개발구가 존재하다 보니 기업과 자금 유치에 경쟁이 붙었고, 크고 작은 마찰이 계속되자 싱가포르는 1997년 12월 철수를 선언했다.
당시 쑤저우 시장이었던 그는 양측 협상이 1년을 끌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직접 싱가포르로 날아갔다. 천 상무부장의 집요하고도 저돌적인 담판 자세에 싱가포르는 결국 철수 결정을 접었고, 매년 40%가 넘는 성장을 거듭한 끝에 쑤저우공업원구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6000달러가 넘는 개발구로 발전했다.
하지만 쑤저우공업원구가 유명해진 것은 눈부신 경제성장률 때문이 아니다. 바로 친상(親商), 애상(愛商), 부상(富商)이라는 친(親)기업적 3상 서비스 정신과 전혀 중국 관리 같지 않은 쑤저우시 공무원들의 행정서비스 때문이다.
공무원들 대민 서비스 정신 개선
싱가포르와의 협상 과정에서 싱가포르 행정제도의 우수성을 깨달은 그는 쑤저우시는 물론 산하 현(縣)의 주요 간부들까지 모두 싱가포르로 보내 직접 경험하고 배우게 했다.
“국가간 합작은 어느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쑤저우공업원구 개발을 통해 싱가포르의 선진적 행정관리 제도와 서비스 정신을 배웠습니다. 정부 차원, 특히 인재 배양 차원에서의 협력은 일찍이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일입니다.”
그는 후일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자평했다.
경제가 가장 발달한 동부 연해지역 장쑤(江蘇)성에서 21년 남짓 일했던 그는 2002년 5월 중국 서부 산시(陝西)성의 상무부(副)성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동부에서의 성공 경험을 서부로 확산시키라는 중앙지도부의 의도가 담긴 인사였다.
하지만 그는 동부에서의 경험을 그대로 추진하지 않았다. 산시성은 쑤저우시와 달리 자원과 과학교육, 지리적 위치에 따른 경쟁력이 있었고 이를 잘 살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가 동부에서의 경험 중 가장 강조한 것은 관리들의 대민(對民) 서비스 정신이다.
“정부는 주민이 스스로 생활을 개선하고 기업을 일으켜 수입을 늘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주민이 정부를 향해 손을 벌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노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산시성 관리들에게 이렇게 강조했다. 그리고 투자환경을 개선하고 정부 투명도를 높이는 일도 병행했다.
이런 변화를 지켜본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는 2006년 5월 시안(西安)에 2억5000만 달러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세웠다. 영국의 엔진 생산업체 커민스는 2005년 12월 산시(陝西)자동차그룹과 합작으로 산시성에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했다.
일과 휴식 조화 새로운 지도자 유형
1949년 3월 상하이(上海)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무선전파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스스로 TV를 조립할 정도였다. 지금도 집에 있는 가전제품이 망가지면 직접 고친다고 한다. 고치는 일이 즐겁기도 하지만, 평소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천 상무부장의 설명이다.
대도시에서 평안한 생활을 누리던 그에게 천지개벽 같은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은 문화대혁명 때다. 1968년 12월22일 마오쩌둥(毛澤東)은 “지식청년은 농촌에 가서 빈한한 농민에게 재교육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이듬해 그는 267만명의 청년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산간 오지인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현 셰팡(謝坊)진으로 하방됐다.
그는 매일 농민들과 함께 일했지만 늘 쪼들리고 배고파 남몰래 오이를 훔쳐 먹기도 했다. 천 상무부장은 지금도 중국의 유명 문호 루쉰(魯迅)의 단편소설 제목이자 그 주인공인 쿵이지(孔乙己)처럼 “책을 훔치는 것은 절도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5년간 농사일을 한 그는 1974년 장시 공산주의노동대학(현 장시 농업대학) 농기계과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뒤 장시성 농기국에 배치됐다.
그의 관운이 트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 11월 장쑤성 식품공사로 배치되면서부터다. 이후 거의 2년을 넘기지 않고 승진할 정도로 그는 순조롭게 달렸다.
1988년 천 상무부장은 난징(南京)대 국제상학원에서 수량경제 석사과정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기가 어려워질 무렵 그를 지도하던 저우싼둬(周三多) 교수는 그에게 일을 잠시 중단하고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난징대 중미문화센터에서 매일 외국인 학생들과 어울려 공부하며 영어실력이 부쩍 향상된 것도 이 시기였다. 1996년 그는 관리학 박사까지 취득하며 몇 안 되는 박사 관원의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일할 땐 집중하지만 근무시간이 끝나면 홀로 자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산시성장 시절에도 주말만 되면 아내와 함께 조용히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이 같은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서양물을 제대로 먹은 중국 관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역시 조만간 일과 휴식의 조화가 일반화되는 중등사회로 변모할 것이다. 천 상무부장은 이런 사회에 걸맞은 중국의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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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왕이(王毅)] 6월3일 중국 공산당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의 대만사무판공실 주임에 임명된 왕이(王毅·55·사진) 외교부 상무부부장은 중국 외교가에서 떠오르는 샛별이다.
문화대혁명(1966년 5월~1976년 10월·이하 문혁)으로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왔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최연소 부부장에 오른 데 이어, 과거와 달리 업무가 막중해진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자리에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왕 주임은 장관급 이상 간부 가운데 보기 드문 베이징(北京) 출신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1969년 9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헤이룽장(黑龍江)성에 지식청년으로 하방된 그는 7년5개월간이나 농촌에서 생활했다. 그는 문혁이 끝난 뒤인 77년 2월에야 베이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 주임은 그해 12월, 문혁 이후 10년 만에 치러진 대학입학시험에서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학부 일어과에 합격했다. 농공병단(農工兵團)에서 일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대학 입학 당시 만 25세로 학과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는 늘 조숙했고 거동도 신중했다. 또한 식견이 넓은 데다 논리적이고 주견도 뚜렷해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다.
왕 주임을 지도했던 교수들은 그의 대학 졸업논문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친밍우(秦明吾) 당시 교수에 따르면, 그가 졸업논문으로 제출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 비교’ ‘일본어와 몽롱시(朦朧詩)의 비교’는 다른 학생들의 졸업논문보다 수준이 지나치게 높아 이를 심사, 평가할 수 있는 교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몽롱시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던, 사회 불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무형식의 시를 말한다. 그의 졸업논문은 일어계 잡지 ‘일어학습과 연구’라는 권위지에도 실렸다.
1982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외교부에 들어간 뒤 그는 승진가도를 달렸다. 외교부에 들어갈 때는 만 29세의 늦깎이였지만, 5년 만에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亞洲司) 처장에 올라 그보다 10여 년 전 외교부에 들어간 선배들을 앞질렀다.
이어 1995년 6월 아주사 사장(司長), 98년 4월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에 이어 2001년 만 48세 나이에 외교부 최연소 부부장(서열 3위)이 됐다.
성실 근면한 근무자세 타의 추종 불허
이 같은 초고속 승진은 윗사람들의 눈에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외교부 직원의 주요 평가능력 가운데 하나는 문장을 잘 다듬어 완성도 높은 연설 원고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비터우(筆頭)’라 불리는 이 분야에서 왕 주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82년 후야오방(胡耀邦)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연설 원고를 기초할 때다. 왕 주임이 쓴 원고 초안을 본 후 총서기는 단 두 곳만 고치고 원고에 ‘아주 잘 썼음’이라는 비점(批點)까지 찍어 내려보냈다.
보통 담당 직원이 초고를 쓰면 상급자를 거칠수록 빨간색 펜으로 수정되는 자리가 점차 늘어 외교부장까지 올라가면 원고가 온통 빨간색인 게 상례인데, 그가 쓴 원고는 늘 거의 고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성실 근면한 근무태도 역시 외교부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 밤 12시 넘어 퇴근하는 것은 보통이고 바쁠 때는 새벽 2, 3시까지 일을 하는데도 그는 어김없이 오전 6시면 사무실에 나온다.
신중하고 근엄한 그의 표정은 외교부의 많은 직원들에게 ‘쿨’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사람이 그리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는 반응을 보이는 직원도 있다. 평소 테니스를 즐기고 외교부 등산협회 명예회장으로서 등산도 자주 한다.
왕 주임은 ‘일본통’이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했을 뿐 아니라 주일 대사 3년을 포함해 7년6개월간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또한 1982년 외교부에 들어간 뒤 줄곧 아시아를 담당하는 아주사에서 일했다.
대만관계 개선 중책 새 시험대
그의 일본어 구사능력은 일본인이 탄복할 정도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와는 사적으로도 가깝게 지내며 아키히토(明仁) 일본 왕 부부와도 교분이 깊다. 하지만 그가 주일 대사로 임명된 2004년 9월, 중국과 일본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양국관계는 냉각되기 시작했고, 일본의 평화헌법 수정과 최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한 동중국해 가스전 분쟁,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치치하얼(齊齊哈爾) 화학무기 방치사건 등이 겹치면서 양국관계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그가 주일 대사로 취임한 지 3개월 만에 일본은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해 중국을 더욱 자극했고, 2005년 5월 고이즈미 전 총리가 “올해 안에 또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발언하자 방일 중이던 우이(吳儀) 부총리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까지 터졌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와세다대 등 여러 민간기관을 돌면서 일본이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중국과 일본이 함께 손잡고 나아가야 한다는 중국의 기본 외교정책을 설파했다.
이런 것들이 밑거름이 돼 2006년 10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일본 총리로서는 5년 만에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그리고 지난해 4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고, 올해 5월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일본을 답방했다.
꽁꽁 얼어붙었던 양국관계가 아베 전 총리의 ‘파빙지려(破氷之旅)’, 원 총리의 ‘융빙지려(融氷之旅)’, 후 주석의 ‘난춘지려(暖春之旅)’를 거치면서 해빙을 넘어 완연한 봄날 관계로 바뀌었다.
왕 주임은 앞서 2003년 8월 제1차 6자회담의 중국 측 수석대표로서 북한 핵을 푸는 첫 단추를 잘 끼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기도 하다.
왕 주임은 이제 대만과의 관계 개선과 통일이라는 중책을 부여받았다. 그는 임명 발표 직후 “양안관계 발전과 조국 통일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새로운 이 임무는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자 또 다른 시험대다. 그가 이 시험대를 잘 통과해 부총리 이상의 영도자급에 오를지 주목된다.
열전(27)-마지막회] 양제츠(楊潔)
지난해 4월27일 리자오싱(李肇星·68) 후임으로 양제츠(楊潔·58·사진) 외교부 부부장이 제10대 외교부장으로 임명됐을 때 외국인은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 ’자는 사실 중국에서도 이름에 잘 쓰지 않는 벽자(僻字)다. ‘’는 당초 8개의 관이 있는 고대 죽관악기를 말한다. 고대 악기 진품은 대만 타이베이(臺北)의 ‘공자 사당(孔廟)’에만 있다고 전한다.
1950년 상하이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부친은 호랑이띠 해에 태어난 그가 성격이 사납지만 말고 온유함과 강인함을 겸비하라는 뜻으로 ‘호랑이 호(虎)’자에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를 씌웠다고 한다. 작명이 효과를 발휘했을까? 학자 타입의 그는 성격도 매우 조용하고 부드럽다. 그래서인지 5000명 외교부 직원 중엔 그가 외교부장에 오를 때까지 누구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양 부장은 말 그대로 ‘미국통(美國通)’이다. 주미 대사 4년을 포함해 주미 중국대사관에서만 세 번에 걸쳐 10년을 근무했다. 본국에 돌아와서도 11년1개월간 미국을 담당하거나 영·미권 국가의 통역으로 활약했다. 후진타오(胡錦濤) 지도부가 이런 그를 외교부장에 앉힌 것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양 부장은 부시 대통령 집안과는 30년 가까운 교분이 있다. 1977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티베트자치구까지 수행하며 통역을 담당했다. 이때 아버지 부시와 매우 친해졌고 아버지 부시는 그에게 ‘타이거 양(Tiger Yang)’이라는 별호를 지어줬다. 외교부장에 임명된 것도 부시 일가와의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미국에 대한 이해와 평소 관리해온 인맥은 2001년 4월 중국 남중국해 하이난(海南) 섬에서 미 해군의 EP-3 정찰기와 중국 전투기가 충돌해 중국 전투기가 추락하고 조종사가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을 때 큰 힘을 발휘했다. 그는 미국 국무원, 의회 등 미국 권력기관과 대사관을 하루 네 번이나 오가며 중국 측 입장을 설명했다. 또 같은 날 그는 CNN 등 미국 TV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 “자동차 사고가 나서 한쪽은 사람이 크게 다치고 다른 한쪽은 차만 부서졌다면 어느 쪽이 먼저 사과하느냐”라는 미국 일상생활의 논리를 활용해, 미국 정부가 사과해야 한다는 미국인의 여론을 20%에서 단박에 5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양 부장은 문화대혁명 당시 농촌 벽지로의 하방(下放) 광풍에도 시골로 내려가지 않고 집에서 가까운 상하이 푸장(浦江)의 적산전력계 공장에서 학도공으로 일하는 행운을 얻었다. 문혁 기간이던 1973년엔 첫 번째 해외유학생으로 선발돼 영국에서 유학하는 행운이 뒤따랐다. 부인 러아이메이(樂愛妹) 씨는 이때 만났다.
나이와 경력으로 볼 때 그는 외교부장직을 마친 뒤에도 부총리급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에 오르는 행운이 뒤따를 것 같다.
멍젠주(孟建柱)
2004년 초부터 장시(江西)성 주민들 사이에서 나돌기 시작한 말이다. 이들이 2007년 10월 공안부장에 임명된 멍젠주(孟建柱·61·사진) 전 장시성 당서기를 계속 붙잡으려 했던 까닭은 그가 성 발전에 누구보다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멍 서기가 부임한 2001년 장시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221위안. 산시(山西), 허난(河南), 안후이(安徽), 후베이(湖北), 후난(湖南) 등 ‘중부 굴기(·#54366;起)’ 6개 성 가운데 꼴찌였다. 하지만 2006년 장시성 1인당 GDP는 1만798위안으로 그가 당서기를 역임한 지 5년 만에 2배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처럼 단기간에 GDP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멍 서기가 농촌과 동부지역에서의 경험을 살려 노력을 경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장시성 서기로 부임하자마자 3개월 만에 장시성의 60개 현 2만5000리(약 1만2500km)를 돌며 성내 시찰에 나섰다. 2005년 3월까지 성내 99개 현과 시·구를 모두 직접 누볐다. 상하이에서 32년 이상 근무한 경험을 살려 상하이는 물론 창장(長江)강, 주장(珠江)강 지역과 푸젠(福建)성 등 인근 동부 성과도 협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 후반 후베이성의 발전을 위해 샤전쿤(夏振坤) 화중(華中)과기대 교수가 제기한 ‘중부 굴기’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그는 후일 “중부 굴기는 장시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집중적으로 써먹은 말”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고졸 학력의 멍 서기는 당초 상하이 창싱(長興) 섬의 전위(前衛)농장에서 경운기를 모는 노동자로 사회에 입문했다. 하지만 업무 외 시간을 이용해 1986년 경제관리통신대학을 졸업했고, 이어 1991년엔 상하이기계학원에서 석사까지 마쳤다. 관직길에서도 타고난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13년 만에 농장의 농장장으로 올라섰고, 농장을 우연히 견학했던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당시 상하이시 조직부장)이 그를 상하이 인근 촨사(川沙)현 서기로 발탁하면서 출세길에 들어섰다.
1996년 10월 상하이시 부서기까지 올라간 그는 2001년 3월 후진타오 지도부의 출범을 앞두고 지도부 개편과정에서 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된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서기에게 밀려 장시성 서기로 전보됐다.
하지만 쩡 부주석은 지난해 10월 지도부에서 물러나며 ‘상하이방(上海幇) 주자’ 중 한 명인 그를 잊지 않았고 공안부장에 추천해 결국 관철시켰다. 그가 전혀 경험이 없는 공안 수장에 임명되자 홍콩 언론은 후 주석이 검찰과 법원, 공안으로 구성된 사법부 전체 권한에서 공안 부문을 억제하기 위해 내놓은 카드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180만 경찰을 이끄는 공안 수장에 임명된 그가 베이징올림픽을 잘 치르고 5년 뒤에도 출세가도를 이어나갈지 주목된다.
장칭웨이(張慶偉)
중국 정부가 자본금 190억 위안(약 2조8500억원)을 들여 설립한 중국상용비행기유한책임공사는 앞으로 이륙중량 100t, 승객 150명 이상의 대형항공기를 2020년까지 세계시장에 출시하는 임무를 맡았다. 현재 세계 대형항공기 시장은 미국의 보잉사와 유럽의 에어버스사가 양분하고 있다. 중국 자주기술로 이 시장을 뚫어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중국 정부가 이런 막중한 임무를 장 전 주임에게 맡긴 것은 그가 중국이 자랑하는 ‘항공 우주 분야의 젊은 1인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이 운반로켓 핵심 기술을 장악하지 못해 위성 발사에 계속 실패할 때 이를 극복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데 이어, 유인우주선의 성공발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에서 ‘중화민족 천년의 꿈을 실현한 주역’으로 불린다.
장 이사장의 조적(祖籍)은 허베이(河北)성 라오팅(樂亭)현이지만 지린(吉林)성 지린시에서 태어나 장시(江西)성에서 자랐다. ‘樂’은 당초 ‘러’나 ‘웨’로 읽지만 이곳 지명은 ‘라오’로 발음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다. 중국의 전통악기 얼후(二胡)를 잘 연주했고 피리도 곧잘 불어 학교 악대에서 활동했다. 학교 성적 또한 매우 뛰어났지만 문화대혁명 이후 처음으로 1977년 12월 실시된 대학입학 시험에서 뜻밖에 낙방했다. 1년을 더 공부해 이듬해 시안(西安)에 있는 시베이(西北)공업대에 합격했다.
석사까지 마치고 1988년 4월 항공항천(航空航天)공업부 1원1부11실 공정조에서 항공설계 및 우주개발 업무에 종사하기 시작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중국 우주항공 개발사나 마찬가지다. 1996년 2월과 8월 발사한 운반로켓이 도중에 추락하거나, 싣고 올라간 위성이 목표 궤도에 도달하지 못해 실의에 빠졌을 때 그는 중국운반로켓기술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이듬해 5월 결국 성공시켰다. 2002년 12월에는 40세의 젊은 나이에 중국항천(航天)과기집단공사의 총경리 겸 당조(黨組)서기를 맡아 2002년 3월 무인우주선 선저우 3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하지만 항공우주 산업과 대형항공기 산업은 크게 다르다. 게다가 대형항공기 제작은 현재 미국과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단 6개국만이 기술을 갖고 있을 정도로 첨단기술이 필요하다. 지난해 70~90석 규모의 중형비행기의 국산화에 성공한 중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우주공간에 우주선을 쏘아올려 ‘중국 천년의 꿈’을 실현한 그가 대형항공기 국산화라는 또 다른 중국인의 꿈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지 중국은 물론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제6세대 지도자 후보군으로 불리는 40대 부장급 인사는 현재 누얼 바이커리 주석을 비롯해 저우창(周强·48) 후난(湖南)성장, 후춘화(胡春華·45) 허베이(河北)성 대리성장, 쑨정차이(孫政才·45) 농업부장, 루하오(陸昊·41) 중국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 중앙서기처 제1서기 등 5명뿐이다.
하지만 중화권 언론은 그에게 선뜻 ‘6세대 선두주자’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 있다. 40대에 주석직에 올랐지만 능력보다는 소수민족 배려 차원이라는 의구심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입장과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단순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한족(漢族) 동화정책에 호응하는 철저한 반(反)분리주의자다. 1990년대 중반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 친구가 물었다.
“너는 신장이 중국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나?”
그러자 그가 되물었다.
“너, 콜럼버스가 미국을 언제 발견했는지 아니?”
그는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것은 1492년이지만 중국이 신장을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1500년 앞선 서한(西漢) 때부터”라고 말해줬다. 그는 평소 “나는 위구르족 주석이기에 앞서 중국인이고 공산당원”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또 소수민족 언어와 함께 반드시 한어를 배우도록 한 중앙정부의 이중 언어교육(雙語敎育) 정책을 철저히 지지한다. 상당수 위구르인들은 “이 정책은 우리 언어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이라며 거부한다. 하지만 그는 “그럼 왜 외국어를 배우느냐”며 “한족의 말을 배우는 것은 신장을 발전시키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중국어 구사능력은 한족을 뺨칠 정도다.
한마디로 중앙정부의 소수민족 정책을 가장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소수민족 출신 간부인 셈이다.
누얼 주석은 1961년 우루무치(烏魯木齊)에서 서쪽으로 500km가량 떨어진 보러(博樂)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신장(新疆)대 정치학부에 합격했다. 졸업한 뒤에도 대학에 남아 10년간 재직하면서 대학의 공청단 서기와 대학 당위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다.
이어 인구 350만명의 변경 도시 카스(喀什)시 행정공서(行政公署) 부(副)전원(專員·최고지도자)을 거쳐 36세 나이로 자치구 성도인 우루무치의 시장을 지냈다. 당시 그는 자치구 내 시장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렸다.
우루무치 시장 시절엔 산업시설과 자동차에서 나오는 오염을 크게 줄이고 녹화사업을 강력 추진해 맑은 날을 좀처럼 볼 수 없던 시내 대기오염을 크게 줄였다.
2000년 12월 중국 공산당 신장자치구 당위원회가 젊은 상무위원을 찾을 때 그는 최적임자였다. 47세에 자치구 주석 자리에까지 오른 그는 앞으로도 승승장구해 부총리급 이상의 영도자급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신언서판’ 겸비한 외교가의 샛별
뒤늦은 공직 입문 초고속 승진 거듭 … 소문난 ‘일본통’에 한반도 문제 전문가
왕이 프로필
·한족(漢族)
·1953년 10월생
·베이징 출신
1969. 9 고등학교 졸업
1969. 9~1977. 2 헤이룽장(黑龍江)성 농촌 단련
1977. 2~1978. 3 베이징(北京)으로 돌아옴
1978. 3~1982. 2 베이징 제2외국어대 아시아아프리카어학부 일어과 졸업
1982. 2~1984. 9 외교부 아주사(亞洲司) 직원
1984. 9~1987. 8 외교부 아주사 부처장
1987. 8~1989. 9 외교부 아주사 처장
1989. 9~1993. 4 주일 대사관 정무참사관
1993. 4~1994. 3 주일 대사관 공사참사관
1994. 3~1995. 6 외교부 아주사 부(副)사장
1995. 6~1998. 4 외교부 아주사 사장
1997. 8~1998. 2 미국 조지타운대 외교연구소 방문학자
1998. 4 난카이(南開)대 세계경제 전공 경제학 석사
1998. 4~2001. 2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 겸 정책연구실 주임
1999. 9 외교학원 국제관계 전공 박사
2001. 2~2004. 9 외교부 부(副)부장
2004. 9~2007. 9 주일 대사
2007. 9~2008. 3 외교부 부부장, 당조(黨組)서기
2008. 3~2008. 6 외교부 상무부부장, 당조서기
2008. 6~현재 당 중앙위원회 대만공작판공실 주임 겸
국무원 대만사무판공실 주임
제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실력은 기본 관운 겸비한 ‘4인방’ … 향후 권력층 인사에 특히 주목
양제츠(楊潔)·멍젠주(孟建柱)·장칭웨이(張慶偉)·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
양제츠(楊潔) 프로필
·한족(漢族)
·1950년 5월 상하이 출생
·1971년 12월 공산당 가입
1968. 9 상하이시 푸장(浦江)적산전력계 공장 노동자
1972. 8 외교부 출국 학습 집훈반(集訓班) 학습
1973. 1 영국 런던정치경제학원 국제관계 전공
1975. 6 외교부 통역실 과원
1983. 2 주미 중국대사관 근무. 2등비서, 1등비서, 참찬
1987. 6 외교부 통역실 참찬 겸 처장
1990. 1 외교부 미국대양주사 참찬 겸 처장, 부사장
1993. 6 주미 중국대사관 공사
1995. 2 외교부 부장 조리(助理), 당위 위원
1998. 2 외교부 부부장, 당위 위원
2000. 12 주미 중국 대사
2004. 12 외교부 부부장, 당위 위원
2005. 5 외교부 부부장, 당위 부서기
2007. 4~현재 외교부 부장
제16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제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멍젠주(孟建柱) 프로필
·한족(漢族)
·1947년 7월 상하이 출생
·조적(祖籍)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시 우(吳)현
·1971년 6월 공산당 가입
1968. 8 상하이시 전위(前衛)농장 운수사업소 화물선 선원,
배차원, 부(副)기관장
운수사업소 공청단 지부 서기, 부(副)지도원
1973. 9 상하이시 전위농장 운수연합 당지부 서기
1976. 10 상하이시 전위농장 정치처 선전조 조장
1977. 2 상하이시 전위농장 당위원회 부서기, 정치처 주임, 농장장
1986. 9 상하이시 촨사(川沙)현 당서기
1987. 9~1991. 2 상하이기계학원 공업기업계통 공정과 직장 겸임 공부, 석사
1990. 2 상하이시 자딩(嘉定)현 당서기
1991. 2 상하이시 농촌공작 당위원회 서기
1992. 7 상하이시 농촌공작 당위원회 서기, 시 정부 부(副)비서장
1993. 2 상하이시 부시장
1996. 1 상하이시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부시장
1996. 10 상하이시 부서기
2001. 3 장시(江西)성 당서기
2001. 5 장시성 당서기 겸 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2007. 10 국무원 공안부장, 당위 서기
2008. 3 국무위원, 국무원 당조성원(黨組成員), 공안부장, 공안부 당위 서기
제15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제16, 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장칭웨이(張慶偉) 프로필 ·한족(漢族)
·1961년 11월 지린(吉林)성 지린시 출생
·조적 허베이(河北)성 라오팅(樂亭)현
1978. 9 시베이(西北)공업대 비행기설계과 입학
1982. 8 시베이공업대 졸업. 항공공업부 603소(所) 설계원, 공정조 부조장
1985. 9 시베이공업대 비행기설계 전공 석사 입학
1988. 3 시베이공업대 석사 졸업, 항공항천(航空航天)공업부
1원1부11실 공정조 조장
1991. 5 항공항천공업부 1원1부11실 주임 조리(助理)
1992. 10 항공항천공업부 1원1부 주임 조리
1995. 7 항천공업총공사 1원1부 부(副)주임
1996. 8 항천공업총공사 1원 부원장
1998. 8 항천공업총공사 총경리 기술업무 조리
1999. 7 항천과기집단공사 부총경리, 당조(黨組) 성원
2001. 11 항천과기집단공사 당조서기, 총경리
2002. 2 겸임 유인우주선공정 부(副)총지휘
2004. 2 겸임 달 탐사 공정 영도소조 부조장
2007. 8 국방과학기술공업위원회 주임(장관급)
2008. 5 중국상용비행기유한책임공사 이사장, 당조서기
제16, 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누얼 바이커리(努爾白克力) 프로필
·웨이우얼(維吾爾)족
·1961년 8월 신장(新疆) 보러(博樂)시 출생
·1982년 12월 공산당 가입
1978. 11~1983. 8 신장대학 정치학부 정치이론 전공
1983. 8 신장대학 정치학부 보도원(輔導員),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신장대학 총지부 서기
1984. 11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신장대학 위원회 부서기
1986. 9~1989. 7 중국 공산당 중앙당교 정치이론 석사 졸업
1989. 1 중국공산주의청년단 신장대학 위원회 서기
1992. 1 신장대학 당위 선전부 부장
1992. 6 신장대학 당위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선전부 부장
1993. 9~1995. 4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카스(喀什)지구 행정공서
전원(專員) 조리(助理)
1994. 5~1994. 11 산둥(山東)성 페이청(肥城)시
괘직(掛職·이름만 걸어놓는) 부시장
1995. 4 신장자치구 카스지구 행서(行署·행정공서의 준말) 부(副)전원
1996. 3 신장자치구 인민정부 부(副)비서장
1998. 2 신장자치구 우루무치시 위원회 부서기, 부시장, 대리시장
1998. 3 신장자치구 우루무치시 위원회 부서기, 시장
2000. 12 신장자치구 당위 상무위원
2001. 1 신장자치구 당위 상무위원, 정법위원회 부서기
2003. 4 신장자치구 당위 부서기, 정법위원회 부서기
2005. 1 중국 공산당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당위 부서기
2007. 12 신장웨이우얼자치구 대리주석
2008. 1 신장자치구 주석
제17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그동안의 독자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2007년 가을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를 계기로 지난해 11월6일자부터 연재를 시작한 ‘하종대 특파원의 중국 차세대 지도자 열전’이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본지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의 집권 2기(2007년 말~2012년 말)를 맞아 권력 전면에 새로 등장한 인물을 심도 있게 분석함으로써, 중국 지도부 각자에 대한 이해도를 높임과 동시에 앞으로 중국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를 가늠할 수 있도록 했다. 중국의 정치권력은 공산당에서 나온다. 권력은 민주집중제 원칙에 따라 소수에 집중된다. 평당원이 전국대표를 뽑고 이들이 다시 당 중앙위원을 뽑은 뒤 중앙위원회에서 정치국 위원과 상무위원을 선출한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9명은 7336만 공산당원의 권력을 위임받은 중국 최고의 권력기관이다. 이들은 매주 한 번꼴로 모여 국사(國事)를 논의한다. 25명의 정치국 위원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모여 중대사를 논의한다. 204명의 중앙위원은 1년에 한 번꼴로 모인다. 2213명의 전국대표는 5년에 한 번 모여 전체 대회를 연다. 지금까지 소개된 인물들은 17차 당 대회 이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새로 진입한 위원이거나 앞으로 중국을 이끌어갈 지도자로 부상할 가능성이 큰 사람들이다. 직급으로 따지면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4명, 정치국 위원이 8명, 중앙서기처 서기 2명 등 영도자(부총리급 이상 간부)에 해당하는 간부가 14명이고, 나머지 16명은 지방 최고지도자이거나 중앙의 부장급(장관급) 이상 간부들이다.
이들을 세대별로 나누면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동시대 지도자인 4세대 지도부가 10명, 201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5세대 지도부가 14명, 2022년 이후 중국을 이끌어갈 6세대 지도부가 6명이다. 중국은 현직 지도자나 간부에 대한 소개 책자를 절대 출간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자료를 찾느라 적잖은 고생을 해야 했다. 중국 대륙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화권 언론매체는 물론 주간지, 월간지, 단행본까지 자료가 될 만한 것들은 샅샅이 뒤졌다. 외교부 등 일부 부서 간부의 경우 직접 주위 인사에게서 인물에 대한 평가나 후일담을 전해 듣기도 했다.
인물에 대한 소개는 주로 인물의 정치적 성장과정과 정치적 역학관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전면적 해부를 하기엔 자료가 부족했고 지면 제약도 있었다. 부족한 부분은 나중에 보완해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반년 넘게 연재한 ‘중국 차세대 지도자 열전’ 시리즈를 그동안 열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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