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의 15배 규모, 거대한 글로벌 식품시장 정복에 나선 한국 식품기업들
內需强者에 만족할 순 없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사거리에 특이한 식당이 생겼다. 이름은 ‘비비고’(bibigo). 비빔밥을 전문으로 파는데, 맥도날드처럼 줄 서서 주문하고 스타벅스처럼 손님 스스로 여러 옵션-라이스, 토핑, 소스-을 선택해야 한다. 옵션에 따라‘숯불고기를 넣은 샐러드식 레몬간장소스 찰보리 비빔밥’,‘닭가슴살과 참깨소스를 곁들인 전통식 흑미 비빔밥’ 등 총 192가지 비빔밥이 주문 가능하다.
이 식당은 CJ그룹이 계열사 CJ푸드빌을 통해 ‘한식의 세계화’를 기치로 내걸고 론칭한 야심작이다. 비비고란 이름을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직접 지었다고 한다. 오는 8월 중국 베이징(北京), 미국 LA, 싱가포르에 매장을 여는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전세계에 1000개 매장으로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에 매장을 추가로 열 계획은 현재로선 없다. 전적으로 해외시장만을 겨냥한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 ‘유학생으로 십수 년간 해외에 체류한 적 있음. 세련된 외모에 보수적 성품을 지닌, 나이가 과하지 않은 여성을 바람.’ 지난해 중국에서 개봉돼 큰 인기를 끌었던 펑사오강 감독의 영화 ‘비성물요’(非誠勿擾·국내에선 ‘쉬즈 더 원’으로 개봉)는 부유한 노총각인 남자 주인공이 구혼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자 주인공이 크림치즈 패스트리를 베어 물며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장소는 베이징의 ‘파리바게트’ 양광상동점.
이 장면은 파리바게트의 간접광고(PPL·Product Placement)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사가 점포사용료로 1만위안(약 183만원)을 지불했다. 파리바게트는 상하이(上海), 베이징 등 중국 대도시 중산층 사이에서 트렌디한 베이커리 카페로 인기가 높다.
“우리도 신라면, 초코파이처럼”
외국에 나가면 삼성, 현대, LG만큼 유명한 것이 신라면과 초코파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이하 코트라)가 2003년 중국 주요 대도시에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신라면과 초코파이를 안다고 응답한 소비자가 절반을 넘었다(신라면 63%, 초코파이 55%).
전세계 라면 소비량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에서 신라면은 프리미엄급 제품으로 인지도가 높다. 식품업계 한 관계자는 “다른 라면회사들은 중국 유통업체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기 바쁘지만, 모두가 신라면을 팔고 싶어하기 때문에 농심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귀띔했다. 오리온의 초코파이도 중국에서 최근 3년 동안 매년 56%씩 성장, 지난해 15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또 신라면은 미국 월마트, 일본 세븐일레븐 등 그 나라를 대표하는 유통매장에 입점해 현지인들에게 팔리고 있다. 오리온은 초코파이의 인기 덕분에 베트남에서 2위 제과업체로 자리를 굳혔다. 올해는 1위 업체를 제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식품의 이 같은 국제적 위상은 신라면, 초코파이를 넘어 다른 제품으로 확산되는 조짐이다.
“유리가면을 사러 공방에 올 때는 반드시 한국 소주를 가져와야 해.”
SBS 수목드라마 ‘나쁜 남자’에서 일본 유리공예가 류 선생이 여주인공(한가인)에게 하는 대사다. 이 에피소드에서 엿볼 수 있듯 한국 소주는 일본에서 애호가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우리와 달리 소주를 물이나 탄산수에 희석시켜 마신다. 진로는 1977년, 두산(현재 롯데주류BG)은 1995년부터 이런 ‘와리(割り) 문화’에 맞춰 담백하고 깔끔한 맛의 소주를 개발해 수출하고 있다.
일본 소주시장에서 롯데주류BG는 3위권, 진로는 7위권 안에 드는 것으로 추산된다. 롯데주류BG는 경월그린(鏡月GRE- EN)이란 브랜드로 수출하는데, 지난해 약 1억730만병(360㎖ 기준)을 팔아 ‘일본인 1인당 1병 소비’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회사 수출팀 정재학 부장은 “200㎖에서 4ℓ까지 16종류를 내놨는데, 최근 들어 헤비 유저(heavy user)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대형마트에서 1.8~4ℓ짜리 페트병을 사가서 매일 저녁 야구경기를 시청하며 한국 소주를 마시는 소비 패턴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정 부장은 “일본 술집에서 ‘대학 신입생 환영회 때 처음 마셔본 경월그린을 지금까지 즐겨 마시고 있다’는 30대 직장인을 종종 만난다”고도 전했다.
지방, 특히 홋카이도에서 강세를 보이는 경월그린과 달리 진로 소주는 도쿄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고급 소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진로하이트그룹 해외사업본부 류승룡 사업지원팀장은 “일본 술집에서 진로 한 병(700㎖) 값은 3만원 안팎”이라며 “먹다 남은 진로 소주에 이름표를 붙여 술집에 보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일본 주류시장에서 새롭게 나타난 트렌드 중 하나는 ‘제3맥주’ 소비의 증가다. 제3맥주란 맥아(麥芽)가 사용되지 않은 맥주맛 음료와 리큐어(liquor)를 통칭하는 말로,일반 맥주보다 주세가 3분의 1로 낮아 가격이 저렴하다. 불황의 여파로 일본 소비자들은 저렴한 제3맥주를 선호하는데, 특히 한국산 제3맥주가 일본산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품질이 비슷해 점차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이하 aT)에 따르면 지난해 제3맥주 수출액은 5963만달러(약 750억원)로 2년 사이 3배 이상으로 뛰었다. 2008년에는 일반 맥주 수출액을 앞질렀다.
aT 가공식품수출팀 박성국 차장은 “일본 대형할인매장에 가보면 한국산 제3맥주가 맨 앞에 전시된 것을 볼 수 있다”며 “일본시장에서 아사히, 기린 등 일반 맥주와 경쟁하기 어려운 국내 맥주회사들이 제3맥주라는 틈새시장을 잘 찾았다”고 평가했다. 일본에 제3맥주를 가장 활발하게 수출하는 곳은 하이트맥주. 지난해 제3맥주를 위주로 총 395만상자(1상자=500㎖×20병)를 수출했다.
중국 사로잡은 한국의 ‘맛’
파리바게트 상하이 구베이(古北) 1호점에는 매일 자전거를 타고 와 바게트를 스무 개씩 사가는 중국인 손님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손님은 푸둥(浦東)에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 직원으로, 파리바게트의 빵맛에 반한 프랑스인 사장의 지시로 매일 왕복 3시간이 걸려 매장을 찾아왔던 것이다.
영화 ‘비성물요’가 촬영된 베이징 양광상동점에 어느 날 일본인 여성 4명이 택시를 타고 와 매장을 싹쓸이하다시피 많은 제품을 사간 일도 있었다. 사연인즉 톈진(天津)에 사는 이들은 파리바게트 빵이 맛있다는 소문을 듣고 택시를 대절해 베이징 나들이를 온 것. 베이징과 톈진은 서울과 대전만큼 떨어져 있다.
2004년 중국에 처음 진출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 등에서 34개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는 파리바게트는 중국인 입맛에 맞는 제품 개발과 ‘카페형’ 베이커리 문화 전파로 중국시장에서 조기에 성공을 거둔 사례로 평가된다. 톈진의 한 고급 백화점은 회사 고위층이 직접 나서 임대료 2년 면제, 인테리어 비용 지원 등의 ‘당근’을 제시하며 파리바게트 입점을 추진하기도 했다.
CJ제일제당은 다시다와 두부로 중국 베이징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CJ제일제당의 ‘닭고기맛 다시다’는 베이징 닭고기맛 조미료 시장에서 네슬레 ‘타이타이러’, 유니레버‘지아러’등 세계 굴지의 식품기업 제품들과 어깨를 겨누며 점유율 30%를 차지하고 있다.
베이징 시민들이 가장 많이 먹는 두부는 CJ제일제당 제품이다. 점유율이 무려 70%. 김송수 베이징얼상CJ식품유한공사 마케팅총감은 중국인들에게 신뢰가 높은 국영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은 점, 그리고 품질을 개선하면서 가격은 비슷하게 유지한 점을 성공요인으로 꼽는다.
CJ제일제당은 2007년 3월 중국의 국영기업인 이상그룹과 합작해 백옥JV를 설립, ‘바이위’라는 브랜드로 두부, 두제품, 두장(중국식 두유) 등을 출시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이 진출하기 전 중국 두부는 우리나라의 1980년대 수준으로 표면이 거칠고 떫은맛이 강했다. 이런 두부시장에 CJ제일제당이 중국인들이 신뢰하는 ‘바이위’ 브랜드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맛의 프리미엄급 두부를 선보여 성공을 거둔 것이다.
한국인삼공사의 홍삼 브랜드 ‘정관장’도 홍콩, 중국, 대만 등 중화권에서 연간 3000만달러 가까이 팔리는 효자상품이다. 앞서 언급한 코트라의 한국식품 인지도 조사에서 정관장을 안다고 응답한 중국 소비자는 18%로 신라면, 초코파이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예부터 ‘고려삼’(한국의 홍삼)을 최고 등급의 제품으로 여겨온 중국인들은 정관장이 기타 홍삼 제품보다 10~20배 비싼데도 정관장을 선호한다. 캔으로 밀봉한 홍삼뿌리가 주요 대중(對中) 수출품목인데(중국인들은 홍삼뿌리를 잘게 잘라 차(茶)로 마신다), 최근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드링크제 등 가공식품의 판매 비중이 증가하는 추세다.
이에 인삼공사는 5월 말 상하이 이마트 차오바오점(漕寶店)에 직영점인 ‘정관장’ 1호점을 열고 앞으로 직영점 중심으로 영업을 펼치기로 했다. 인삼공사 해외사업실 이현용 부장은 “중국에 워낙 정관장 짝퉁제품이 많기 때문에 소비자는 믿고 살 수 있는 직영매장을 선호한다”며 “그동안 대리상에게 맡겨왔던 영업을 직접 함으로써 이익도 높이고 현지 고객들에게 신뢰감도 심어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웅진식품의 ‘자연은’ 주스는 ‘2선 전략’으로 중국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다. 웅진식품은 이미 글로벌 주스 브랜드들이 대거 들어와 있는 대도시를 피해 광둥(廣東)성, 푸젠(福建)성 등 남방 지역을 중심으로 영업력을 집중했고, 지난해 자연은 주스의 대중(對中) 수출액은 1000만달러를 돌파했다.
중국 남부 사람들은 알로에에 더위를 식혀주는 기능이 있다고 여기는데, 알로에가 주스 제품으로 공급된 것은 자연은이 처음이어서 소비자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웅진식품 김정휴 해외사업팀장은 “국내 포장 그대로 수출해 ‘코리안 오리지널’ 효과를 톡톡히 봤다”며 “작년에 머문 푸젠성의 한 호텔 결혼식 피로연장에 우리 제품이 코카콜라와 나란히 놓여 있어 인기를 실감했다”고 회상했다. 자연은의 성공 이후 이들 지역에는 ‘짝퉁’과 ‘미투’(me too) 알로에 주스가 여럿 등장했다. 이들 제품보다 자연은이 3배가량 비싼데도 판매량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이처럼 한국 식품은 주로 일본, 중국, 미국으로 수출된다. 그러나 이 밖의 ‘틈새’ 시장에서 선전하는 식품들도 있다. 한국야쿠르트의 ‘도시락’ 라면은 러시아 라면시장의 절대강자다. 하루 100만개씩 판매돼 연간 1600억원을 벌어들인다. 매일유업의 분유 ‘매일맘마’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등 중동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중동 아기 8명 중 1명이 매일맘마를 먹고 자란다.
몽골 울란바토르에는 하이트맥주의 인기가 높은 영향으로 ‘하이트 거리’(Hite Street)라고 불리는 상권이 형성됐다. 금주(禁酒)의 땅, 이라크 쿠르드 지역에서도 하이트는 ‘부드러운 맛과 향’으로 애호되고 있다. 이곳 술집들은 하이트 로고가 새겨진 간판을 달고 영업한다. 하이트맥주는 지난해 몽골과 이라크에 각각 45만 상자, 40만 상자를 수출했다.
“정체는 곧 퇴보”
식품산업은 전형적인 내수업종이다. 자동차, TV, 휴대전화와 달리 ‘먹을거리’는 곧 문화요, 생활이다. 식품은 입맛에 맞고 식생활에 적합해야 반복적으로 구입하는데, 입맛이나 식생활이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 만무하다. 따라서 그 나라 사람들이 잘 먹는 식품은 그 나라에서 가장 잘 만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국내 식품업체들이 해외 진출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괸 물은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내 식품시장의 성장률은 연평균 4%로 거의 정체 수준이다. 2009년 매출액을 기준으로 한 국내 기업 순위에서 200위에 드는 식품회사는 CJ제일제당(91위)과 농심(168위) 두 곳밖에 없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식품업체의 연평균 매출액은 102억원으로 제조업 평균(153억원)의 70%에도 미치지 못한다.
식품업계에는 “나올 수 있는 가공식품은 이미 다 나왔다”는 패배주의적 푸념이 회자된다. 서로가 서로의 제품을 베끼고, 소비자 알게 모르게 중량을 줄이거나 가격을 올려 규모를 유지하는 것은 한두 해 된 문제가 아니다. 한 식품회사 수출 담당자는 “비즈니스에서 현상유지는 곧 퇴보”라며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한편 세계시장에서 식품산업의 규모는 연 4조달러로 추정된다. 이는 반도체산업의 15배에 달하는 것이다. 정체된 내수시장에서 밖으로 눈을 돌리면 거대한 미개척지가 펼쳐 있는 셈. 또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날로 높아지는 시장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네슬레, 유니레버, 크래프트(KRAFT) 등 굴지의 글로벌 식품기업들도 국내 기업들의 도전 욕구를 자극한다. CJ제일제당 김진수 대표는 올 초 임직원 회의에서 “네슬레의 매출은 삼성전자보다 많고 영업이익률은 우리보다 훨씬 높은 14%대에 달한다”며 “네슬레는 식품기업의 한계에 대한 강한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인구 700만명의 스위스에서 출발한 세계 최대 식품회사 네슬레는 100조원이 넘는 전체 매출 중 90% 이상을 해외시장에서 거둬들인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대상으로 영입된 박성칠 대표 또한 “전세계 식품시장은 4조달러에 달하지만 글로벌 기업이 많지 않고 국내 기업의 잠재력도 엄청나다”며 도전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국내 식품기업들은 아예 목표치를 설정하고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기 시작했다. ‘2013년 매출 10조원, 글로벌 비중 50%’라는 중장기 비전을 세운 CJ제일제당은 식품 분야에서는 1조5000억원가량의 해외매출을 올리겠다는 포부다. 농심은 2015년 매출목표 4조원 중 1조원을 해외에서 거둔다는 계획 아래 동남아와 유럽 판매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상은 고추장, 된장, 불고기양념장, 김을 ‘세계화 4대 식품’으로 선정하고 적극적인 수출에 나섰다.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건강에 좋은 음료’ ‘한국 미인들이 마시는 음료’로 알려진 식초음료 ‘홍초’의 수출 증가 등에 힘입어 지난해 2500만달러였던 해외매출을 올해 4000만달러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이에 aT도 식품기업 지원에 나섰다. ‘3년 내에 식품기업의 해외매출 비중을 2배로 확대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지난 5월 국내 식품기업 25개사와 함께 ‘식품기업 수출협의회’를 결성했다. aT 가공식품수출팀 신장현 팀장은 “해외 유통업체 공동 입점 등 마케팅과 연구개발(R·D)을 공동으로 추진해 지난해 25억달러였던 가공식품 수출액을 올해 36억달러로 늘리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고추장 소스로 만드는 미트로프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도시락’ 라면은 대전역 가락우동, 천안휴게소 호두과자 같은 존재라고 한다. 열차 여행을 하면서 도시락 라면을 먹는 것을 놓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여기는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주말마다 주말농장을 즐겨 찾는데, 이때도 도시락 라면을 꼭 챙겨간다고 한다.
한국야쿠르트는 이 같은 성공요인으로 ‘맛의 현지화’를 꼽는다.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국내에는 없는 닭고기, 새우, 쇠고기, 채소 등 7가지 맛을 개발해 현지인의 입맛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팔리는 제품도 닭고기맛 라면이다.
이처럼 ‘맛의 현지화’는 한국 식품이 해외의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위한 필수요소다.
요즘 홀 푸드 마켓(Whole Food Mar- ket), Kager, HEB 등 미국의 주요 대형 유통체인에는 ‘애니천 고추장’(Annie Chun‘s Gochujang) 소스가 속속 입점하고 있다. 애니천은 CJ제일제당의 미국 계열사. CJ제일제당 홍보팀 이은영 과장은 “우리 회사가 개발한 5단계 매운맛 등급으로 따지면 2등급에 해당하는 ‘덜 매운 맛’으로 기존 고추장보다 달콤하다”고 소개했다.
이 제품은 우리가 먹는 기존 고추장이 아닌, 미국인을 겨냥한 현지화된 고추장 소스다. 그래서 제품 콘셉트도 ‘모든 음식에 잘 어울리는 소스(Goes With Every- thing Sauce)’다. 타바스코 소스나 겨자 소스처럼 평소 먹는 음식에 색다른 맛을 내기 위한 소스로 미국인 가정의 냉장고에 자리 잡는 것이 목표. 이 제품 홍보를 위해 만든 홈페이지 ‘고추장’(www.mygochujang. com)에는 이 소스를 활용해 스테이크, 비프 커리, 미트로프(meatloaf) 등을 만드는 레시피가 소개돼 있다. 이 제품은 미국의 식음료 전문잡지 ‘푸드 · 와인’에 ‘톡 쏘는 맛의 소스로 불고기나 바비큐 등 고기를 구울 때 쓰면 좋다’고 소개되기도 했다.
CJ그룹이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 비비고를 론칭하면서 비빔밥의 소스로 고추장뿐만 아니라 쌈장·참깨·레몬간장소스를 도입하고, 익힌 나물뿐 아니라 생채소를 넣은 샐러드식 비빔밥 메뉴를 개발한 것도 ‘외국인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다. CJ그룹 김경원 전략총괄 부사장은 “비비고는 지난 5,6년간 한식의 세계화를 시도해온 CJ그룹의 시행착오와 거기서 체득한 경험을 종합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CJ그룹은 세계 각지 공항에 한식당을 운영해왔고, 국내에서도 비빔밥전문점 ‘카페 소반’을 운영하면서 ‘외국인 입맛’을 연구해왔다. 이를 통해 얻은 결론은 ▲다양한 한식 메뉴 중 비빔밥에 대한 선호도가 가장 높다 ▲나물보다 신선한 채소가 풍성한 비빔밥을 선호한다 ▲고추장 이외의 소스에 대한 요구가 있다 ▲식당마다 맛과 매운 정도가 다른 점, 위생이 불량한 점이 불만이다 등이었다. CJ푸드빌 홍보팀 이병철 과장은 “이런 외국인의 요구를 반영해 비비고를 개발했다”며 “현재 외국 손님에게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샐러드식 비빔밥과 레몬간장소스, 참깨 소스”라고 말했다. 김경원 부사장은 “전통적인 한식은 외국인에게 별미로 어쩌다 한 번 먹어보는 것이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 될 순 없다”며 “오리지널을 잃지 않으면서 변형의 폭을 넓히는 것이 한식 세계화 전략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주류업계도 해외 소비자 입맛에 맞는 특화 제품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롯데주류BG는 칵테일용 소주인 Ku소주를, 버드와이저 등을 생산하는 안호이저부시사(社)의 유통망을 통해 미국 LA와 뉴욕에 판매하고 있다. 하이트진로그룹은 최근 중국시장을 겨냥한 진로주(眞露酒), 일본시장을 위한 진로 막걸리(JINRO マッコリ)를 출시했다.
진로주는 국화수로 빚은 알코올도수 20도의 고품격 소주. 진로는 독한 백주(白酒)와 저알코올 맥주로 양분되는 중국시장에서 ‘적당한 도수에 적당한 가격’으로 즐기는 새로운 음주시장을 형성해나가겠다는 전략이다. 류승룡 팀장은 “한국 사람들은 소주에 향이 나는 것을 싫어하는데, 반대로 중국인들은 향을 즐긴다”며 “그래서 국내에서 파는 소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고운 향이 그윽한 소주를 개발했다”고 밝혔다. 일본 수출 전용인 진로 막걸리는 시큼한 맛이 덜한 대신 단맛이 첨가됐다. 일본인들은 막걸리의 시큼한 맛을 낯설어해 이들 입맛에 맞춘 것이다.
또 CJ제일제당은 러시아에 다시다를 출시하면서 러시아인들이 야채후레이크를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해 후레이크를 혼합한 형태로 내놨고, 일본인들이 고기를 양념에 버무려 굽기보다 구운 고기를 양념장에 찍어먹는다는 사실에 주목해 불고기양념장을 고기용 소스로 변형한 ‘야키니쿠 타래’(燒肉のたれ)를 개발했다. 한국야쿠르트는 아예 러시아시장 전용 제품으로 러시안들이 즐겨 먹는 주식인 감자퓌레와 카사(귀리죽)를‘도시락’브랜드로 출시했다.
중국, 태국, 베트남 등에서는 김을 반찬이 아닌 스낵으로 즐긴다. ‘돌자반’ 김을 중국에 수출하는 대상 직원들은 중국 소비자들이 김에 묻은 소금을 탈탈 털어낸 뒤 스낵으로 먹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고 한다. 대상은 짠맛을 줄이고 단맛을 가미한 스낵용 김 출시 여부를 검토 중이다.
입맛뿐 아니라 현지인들의 문화, 생활습관에 맞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이 주요한 성공요인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초코파이의 ‘인(仁)’ 마케팅이 좋은 사례. 오리온은 한국에서의 정(情) 마케팅처럼 중국인들의 DNA에 박혀 있는 단어 인(仁)으로 제품 입지를 더욱 굳히기로 하고, 모든 겉포장에 ‘인자안인(仁者安仁)’을 써넣었다. 이 말은 ‘어진 사람은 천명을 알아 인에 만족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웅진식품은 최근 ‘자연은’의 중국어 브랜드밍을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을 주는 ‘취아위안(萃雅源)’으로 결정했는데, 제품명의 풍수를 보는 데만 한 달 넘게 걸렸다고 한다. 김정휴 팀장은 “중국인들은 상품명의 풍수를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며 “중국인 풍수가에게 취아위안이 더 좋을 수 없는 이름이란 평가를 받았다”고 전했다.
대상은 대용량(500㎖, 900㎖)의 홍초 포장을 50㎖짜리 소용량으로 바꿔 일본시장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2~3년 전 대용량 홍초를 시장에 내놨을 때는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았지만, 50㎖로 내놓자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는 20, 30대 일본 여성들을 중심으로 반응이 좋다고 한다. 대상 해외마케팅팀 권대호 부장은 “50㎖짜리는 원래 샘플용이었는데, 시식회에서 샘플 패키지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아 아예 제품화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 데이터를 살펴보면 작년까지만 해도 한국적인 ‘맛’은 이국적인 곳들에만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보통의 식당에서는 물론이고 최고급 식당 메뉴판에서도.”(‘The New Hot Cuisine: Korean, 월스트리트저널, 2009.3.7)
앞에서 인용한 기사의 일부는 미국의 대형식품업체인 캠벨수프(Campbell Soup)에서 신상품 개발을 위한 시장조사 업무를 담당하는 한 임원의 말이다. 이 기사에는 시카고의 유명 레스토랑이 김치를 메뉴에 올렸고, 캘리포니아의 한 피자 회사가 한국식 불고기 피자를 내놨으며, 뉴욕에는 랍스터 요리에 김치바나나 소스를 곁들이는 주방장이 있다는 소식도 전한다. 국내에도 진출한 싱가포르의 유명 제과체인점 ‘브레드토크’(BreadTalk)도 지난 2월 ‘김치의 여왕’이라는 빵을 출시했다(대상FNF의 종가집 김치가 이 빵에 들어간다).
이처럼 한국 음식과 한국적인 맛은 세계인의 생활 속에 점점 깊게 스며들고 있다. 이는 국내 식품업체들에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식품의 해외 진출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최근 들어 가공식품 수출액 증가세가 두드러지고 있지만, 식품 대기업들의 전체 매출 대비 해외매출 비중은 현재 5~10%에 불과하다. 코트라 중국사업단 김명신 과장은 “거대한 중국 소비시장에서 자리 잡은 식품기업은 농심과 오리온 정도”라며 “국내 식품기업들이 중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시작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을 넘는 수출 주력시장 발굴도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중동 지역은 주목할 만하다. 사우디,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오만, 바레인 등은 1인당 구매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코트라 중아CIS팀 김지진 과장은 “최근 이 지역에서는 비만, 당뇨 같은 성인병이 문제가 되고 있어 건강식품 등이 유망하다”고 조언했다. 음주문화가 없어 운동 후엔 이온 음료를 즐기는 편이다. 또 최근에는 홍삼 제품이 다이어트와 성인병 예방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선물용으로 선호되고 있다.
“해외 바이어를 만나면 다들 최고의 품질과 합리적인 가격을 요구합니다. 해외 시장을 다니면서 ‘이들의 까다로운 요구를 만족시킨다면 국내 소비자도 만족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겠다’고 느낍니다. 이제 식품도 밖에서 경쟁력이 있어야 안도 지킬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내수만 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내수에서 뿌리내려온 국내 식품회사들이 절감하는 요즘입니다.”(aT 박성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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