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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내 인생 58년 개띠

醉月 2010. 6. 1. 08:53

58년 개띠는 무지개다
우리의 히어로, 그들에겐 뭔가 특별한 게 있다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노후대책? 국민연금이랑 서울에 아파트 한 채, 그리고 고향에 아버지 명의의 땅이 조금 있어. 자식에게 줄 생각은 물론 없지.”

“나는 딸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해. 아기도 하나를 낳든, 둘을 낳든 딸애 마음이지. 사실 자식 바글바글한 거, 지긋지긋하잖아.”

5·18민주화운동 30주년을 하루 앞둔 2010년 5월 17일 오전, 서울 인사동 한 전통찻집에 ‘58년 개띠’ 친구들이 모였다. 매일 저녁 인터넷상에서 음악을 틀어주는 다음 카페 ‘58우리들의 은하수’(cafe.daum.net/1958newdogfriends) 회원이다. 오랜만에 봤는데,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들처럼 정겹다. 이들은 “처음 만나도 친구가 되고, ‘개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며, 강하고 독하고 센 게 바로 58년 개띠”라고 말한다.

환한 미소가 유난히 따뜻한 서용욱(52) 대표는 굴지의 대기업에서 20여 년간 근무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무사히’ 넘겼으나, 2004년 ‘자의의 탈을 쓴 타의’로 명예퇴직을 했다. “진짜 어려울 때 믿었던 국가와 사회, 회사가 나를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퇴직금으로 주유소를 차렸지만 결국 비싼 수업료만 치른 채 정리했다. 다행히 지금 운영하는 ㈜한국신용카드결제는 작은 규모지만 제법 내실이 있다. 한 회사에 꽤 오래 다닌 덕분에 앞으로 탈 수 있는 국민연금도 적지 않다고 한다. 서울에 본인 명의 아파트 한 채, 고향에 아버지 명의 땅이 조금 있어 노후 걱정은 다른 친구들보다 덜한 편. 서씨는 “자식에게 신세질 생각은 전혀 안 한다. 58년 개띠 친구들이 다 그렇다. 그러니 집과 땅은 내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웃었다.

 

“집과 땅은 자식 주면 안 되지”

전통의상실에서 일하는 이숙화(52) 씨는 세 살 때부터 바느질을 했다. 2남5녀 중 다섯째인 그는 ‘국민학교’만 졸업한 뒤 ‘양장점’에 들어갔다. 자식이 많던 시절, 딸들은 늘 교육에서 뒷전이었다. 예쁜 교복 입고 학교 다니던 친구들을 부러워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멋쟁이 장발 대학생을 두근두근 훔쳐봤다. 그때는 대학생과 사귄다고 하면 정말 대단해 보였다”고 말했다. 20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결혼했다. 당시엔 여자 나이 25세만 넘어가면 노처녀 취급을 받았다. 두 딸을 낳아 키우던 그는 삶에 여유가 생기자 검정고시로 중·고교를 졸업했다. 지난해 직업 전문학교 의상학 과정을 이수했으며, 올해는 큰딸(28)과 서울시에서 진행하는 청년 사업 프로젝트에 지원했다. 이씨는 “딸이라는 이유로 공부를 제대로 못한 게 한”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두 딸은 아무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게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다. 그 덕분일까. 두 딸 모두 이른바 명문대에 들어갔다. “네 인생은 네 것이니 네 마음으로 자유롭게 살아라.” 그가 늘 딸들에게 하는 말이다.

한국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의 상징적 아이콘인 ‘58년 개띠’라는 말에선 고단한 삶이 물씬 묻어난다. 58년 개띠는 태어날 때부터 경쟁의 연속이었다. 1958년 단군 이래 처음으로 신생아 수 80만 명, 일각에서는 130만 명 이상을 기록했다고 한다(하지만 당시 출생아 수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남아 있지 않다). 8~9남매의 중간인 이들은 잠시 한눈을 팔면 저녁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했다.

한 반에 70명, 3부제로 돌아가는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하며 수많은 급우와 경쟁했다. 1974년 고교평준화 제도가 시행되면서 이른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58년생인 대통령 아들 박지만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가장 찬란해야 할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이들은 유신독재 밑에서 신음했다.

   

(왼쪽 사진)58년 개띠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당시 급증한 학생 수를 수용하기엔 학교 수가 턱없이 모자랐다. 한 반에 70명, 3부제는 기본이었다. (가운데 사진)58년 개띠는 뺑뺑이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첫 세대다. (오른쪽 사진)장발 단속을 당하는 젊은이. 하지만 당시 대학생들은 학생증을 보여주면 단속을 패스하는 ‘특권’을 누렸다고 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들의 뼛속까지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당시 22세였던 58년 개띠 중 일부는 ‘투사’가 됐지만, 일부는 입대 후 ‘진압군’이 돼야 했다. 민중을 무력(武力)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무력(無力)하게 지켜봤다. 30세가 되던 1987년, 6월 항쟁을 이끈 ‘넥타이부대’ 중심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재집권하면서 더 큰 좌절을 맛봤다.

민주화 투장에선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지만, 경제 성장에선 어느 세대보다 큰 성공을 맛본 게 바로 58년 개띠다. 이들은 20년 넘게 한 회사에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10여 년 고생한 끝에 서울에 아파트 한 채도 마련했다. 365일 중 360일 넘게 일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때 가장 먼저 잘려나간 것도 이들이다. 믿었던 국가와 사회, 회사에 뒤통수를 맞은 이후 아무도 믿지 않게 됐다. 보험도 들고, 작든 크든 금융과 부동산에 투자하며 스스로 노후를 준비했다. 그렇게 10여 년이 흐른 2010년 52세가 된 이들은 본격적인 은퇴를 앞두고 있다.

 

광범위한 삶의 궤적

이젠 머리에 서리가 내린 58년 개띠들은 2010년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을지 글로벌 김기석(52) 이사는 “숫자가 많고 삶의 스펙트럼도 워낙 넓다 보니, 어디에 가든 한두 명씩 만나게 되는 게 바로 58년 개띠”라고 자랑했다.

“‘국졸’과 ‘대졸’이 모두 친구가 되는 유일한 세대가 아닐까요. 고향을 지키며 농사짓는 친구, 장사하는 친구, 부동산으로 재미 본 친구, 대학 나온 후 대기업 다니는 친구, 유학 다녀와 교수 된 친구, 공무원 된 친구, 정치하는 친구, 명퇴 앞두고 귀농 준비 중인 친구, 불황으로 사업 접고 재기를 모색하는 친구 등 아주 다양하죠. 초등학생 늦둥이 아들을 둔 친구도 있지만, 이미 아들을 장가보내 손자까지 본 친구도 있어요. 삶의 궤적이 광범위했던 만큼 지금의 삶도 각양각색이죠.”

보통 58년 개띠를 유신독재 타파에 앞장선 77학번 열혈 대학생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당시 대학생 비중은 남자가 30%도 채 안 됐고, 여자는 20%에 그쳤다. 대학생은 소수였으며, 그만큼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대상이었다(대학 정원은 1980년 신군부의 ‘7·30교육개혁’ 이후인 1981학년도부터 점차 늘어났다). 즉 ‘국졸’ ‘중졸’ ‘고졸’ ‘대졸’이 모두 친구였고, 유신에 저항했던 사람과 새마을운동에 열심히 참가했던 사람이 공존하며, 저소득층부터 고소득층까지 넓게 퍼진 세대가 바로 58년 개띠인 것.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이삼식 저출산고령사회연구실장(인구학자)은 “인구가 많고 학력 스펙트럼도 무척 넓은 데다, 여러 차례 나타난 개발 호재를 제대로 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확연히 나뉘는 등 다양한 이유로 현재의 소득 기반이나 삶의 질이 개인마다 무척 다르다. 은퇴 후 노후 준비 역시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런 다양성은 개개인 속에도 존재한다. 서울대 정근식 교수(사회학)는 “58년 개띠는 민주에 대한 열망과 보수 성향을 동시에 지녔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와 80년 5·18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의 기억이 오롯이 남아 장년이 된 지금도 어느 세대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강하지만, 가난했던 유년 시절의 경험과 근면, 성실한 삶을 통해 이뤄낸 경제적 성취가 이들로 하여금 보수 성향을 띠게 한다는 것.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이런 보수 성향이 바로 아랫세대인 이른바 ‘386’과 자식뻘인 ‘Y세대(베이비붐 세대가 낳은 2세를 일컫는 말로, 1979~94년에 태어난 세대)’에게는 권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고 강조했다.

   

‘58우리들의 은하수’ 회원인 58년 개띠 친구들. 김기석, 서용욱, 이숙화, 정순득 씨(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실제로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52) 소장은 “지금도 386세대가 자신이 데모했던 시절의 무용담을 털어놓으면 솔직히 코웃음이 나온다. 그들은 최루탄 앞에서 시위했지만, 우리는 정말 총칼 앞에서 싸웠기 때문”이라며 “아이러니하게도 권위에 처절하게 패배했으면서도, 권위를 내세웠다”고 털어놓았다. 서 대표도 “내가 무척이나 싫어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어느 순간 닮아가고 있었다”고 말했다.

“어릴 적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술 깰 때까지 저를 앉혀놓고 이런저런 훈계를 하셨어요.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힘들었죠. 그때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제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더군요. 아이들을 앉혀놓고 꾸짖기 시작했고, 정리정돈을 안 하거나 낭비하고 시끄럽게 떠들면 버럭 화를 냈죠. 어렸을 적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으면서 ‘나 때는 이랬다’는 식의 훈계만 늘어놓았으니…. 이젠 아이들이 다 커버렸는데, 지금도 살갑게 대화를 나누지 못해요. 가슴이 무척 아프죠.”

하지만 자녀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어느 세대보다 크고 깊었던 것도 바로 이들이다. 본인 스스로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데 대한 한이 큰 만큼, 자녀의 대학 진학까지 책임지는 게 부모의 몫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여기엔 아들과 딸의 차이가 없었다. 58년 개띠가 본격적으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시작한 1980년대는 아들 선호사상과 산아제한 정책이 기승을 부렸던 시기다. 당시 가족계획의 표어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였다. 시인인 정순득(52) 씨는 “아이가 한둘밖에 없는 데다 엄마 스스로도 배우지 못한 한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 딸 구별 없이 교육을 시켰다”고 말했다.

특히 일에만 몰두하고 가정에선 부재(不在)하던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자녀교육을 책임져야 했다. 이화여대 출신인 드라마 칼럼니스트 정석희(51) 씨는 “우리가 ‘극성엄마’의 원조였다”고 털어놓았다.

“대학 때 예쁘고 똑똑한 선배나 친구가 참 많았어요. 그런데 대학 졸업과 동시에 다들 결혼했죠. 직장을 구한다고 해도 교사나 은행원 정도였고, 일반 회사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그랬기 때문에 우리 세대들이 자녀 교육에 좀 더 ‘올인’했던 것 같아요. ‘극성엄마’의 시작이랄까. 잘 자라준 아이들을 보면 뿌듯하고 기쁘지만, 조금은 아쉽고 안타깝죠.”

이렇게 자식에게 헌신했지만, 58년 개띠들은 “노후에 자식에게 기댈 생각은 전혀 없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 개인마다 노후 준비 상황은 다르지만 이 생각만큼은 같았다. 이씨는 “우리는 집도 있고 보험도 들어놓는 등 앞 세대에 비해 영악해졌다. 우리가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첫 세대인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저돌성과 노련함까지 갖춘 개

유머강사로 활동하는 전승훈(52) 씨는 “노후를 말하기엔 아직 건강하고, 충분히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농사를 지을 줄 알면서 컴퓨터도 사용할 줄 아는, 즉 농경과 산업, 정보시대를 모두 겪은 58년 개띠야말로 어떤 상황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것. 또 이들 상당수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평생 한이던 학위를 딸 정도로 열정적이기도 하다.

체력도 젊은이 못지않다는 게 58년 개띠들의 변. 다음 카페 ‘58개띠 마라톤 클럽’ 회원이기도 한 김기석 이사는 “어릴 적 자치기,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고 지금도 등산이나 달리기 등을 꾸준히 하는 우리의 체력이 체격만 큰 요즘 젊은이들보다 좋다”고 말했다.

   

“자꾸 언론에서는 ‘58년 개띠’ 운운하며 ‘은퇴’ 이야기를 하는데, 이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이미 빠르면 외환위기 때, 늦어도 2000년대 초반에 한 번씩 업(業)을 바꿨어요. 이후 혹독한 10년을 겪으며 단련했죠. 은퇴하지 않고 평생 ‘현업’으로 살 겁니다. 또 우리는 개띠잖아요. 어떤 상황도 뚫고 나가고, 한번 문 건 절대 놓지 않으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이젠 노련함까지 갖춘 개!”

 

역술로 바라본 58년 개띠는?
춥고, 그늘지고, 어두운 곳을 품는 황야의 지킴이


‘개’를 표현한 십이지신. 1958년은 육십 간지로 무술(戊戌)년이다. 지지에 개술(戌)을 달고 있어 12지지의 동물을 배속하면 58년생은 개띠에 해당한다. 개는 반려동물 중 사람에게 가장 친근한 동물이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데다 주인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기에 감정 교류가 긴밀하다. 개는 인류가 수렵생활을 끝내고 농경생활로 정착하면서부터 기르기 시작한 가축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충직했기 때문. 개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호랑이와 싸우거나, 둔갑술을 발휘해 귀신과 싸우거나, 주인이 죽자 따라 죽는 등의 설화들이 많이 전해진다.
개띠생의 심성에는 이런 기질이 공통적으로 숨어 있다. 자기를 믿어주는 부모, 선생님, 친구에게 헌신적이며 소신을 충직하게 잘 지킨다. 내성적이면서도 한번 이거다 싶으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저돌성이 있다. 그런데 58년생 개띠는 무술(戊戌)의 간지가 ‘양(陽)의 토’ 2개가 중첩된 구조이기 때문에, 이런 기질이 더욱 강하게 내재한다. 그래서 개띠 중에서도 유난히 집단 유대감이 강하다.
토는 조화와 포용의 속성을 가진다. 특히 양(陽)의 토는 높고 큰 산, 넓은 들판으로 스케일이 크다. 개띠는 ‘양의 토’로 겹쳐 있으니, 기질이 드러나면 마치 개떼가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처럼 유난스럽게 보인다. 물론 과유불급이라는 말처럼, 좋은 점도 지나치거나 부정적으로 흐르게 되면 단점이 된다. 그래서 58년 무술생의 경우 단점도 유난히 눈에 잘 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를 정도로 고집이 세고 고지식하다거나, 자기 이익이 개입되지 않으면 냉소적이기도 하다. 경계심이 많은 데다 방어적인 면이 강해 타협도 쉽지 않다. ‘욱’ 하는 성질이 폭발하면 싸움과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무술 토’는 방위로 보면 서북 방향에 자리한다. 지구상 북극 자장의 위치다. 극상권(極上圈)은 태양의 정상적인 혜택을 받지 못해 춥고 어두우며 그늘져 있다. 인간 사회에서 이런 곳이라면 범법자를 취급하는 검찰, 경찰, 교도관, 정보원, 죄수 및 환자, 요양원 등이 배속될 수 있다. 무술생은 인생이 잘 풀리면 국가 사회의 질서, 규범, 질병, 문화, 유적을 지키고 보급하는 ‘지킴이’ 구실을 한다. 반대로 잘 풀리지 않으면 하수인이나 죄수, 환자가 돼 유배지에 갇히는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는 무술이 극상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1958년 8월 29일에 태어나 2009년 6월 25일에 사망한 마이클 잭슨은 ‘팝의 황제’로 불리며 인종을 뛰어넘어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잭슨 파이브’로 음악 생활을 시작한 그는 솔로 데뷔 후 발표하는 앨범마다 새롭고 충격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며, 무술생답게 문화 창조 선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하지만 사생활을 보면 12세 때부터 계약에 묶여 있었고, 새벽 3시까지 무대에서 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즉, 노예처럼 고달프고 고독한 생활을 지속한 것. 그러고는 아동 성추문과 성형 중독, 사인(死因)에 대한 논란 등 무수한 루머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화려한 무대 뒤에 도사리고 있던 심신의 감옥이 얼마나 짙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반면 58년생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박현주 회장은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를 탄생시키며 대한민국 펀드의 역사를 창조한 투자 승부사다. 국내 최대 자산운용사, 대형 증권사 등 금융그룹을 일궈낸 그는 냄새를 맡는 후각이 발달했고 천성적으로도 부지런하다. 거기에 재물운까지 좋으며 성취도 빠른 ‘개’의 면모가 강하게 드러난다.
장옥경 명리학 연구가·해피올메이트 소장 blog.daum.net/writerjan

“현실 팍팍 그래도 낭만 세대…후배들아, 세상 두려워 마라!”
58년 개띠와 82년 개띠의 ‘취중진담’ ‘58년 개띠’들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에 ‘82년 개띠’들은 흥분했다.

나(박훈상 기자)는 개띠다. 82년 3월 개띠로 태어났다. 그러나 개띠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지는 않는다. 누군가 몇 년생이냐고 물으면 ‘82년생’이라고 할 뿐 ‘개띠’를 강조한 적은 없다. 그러나 58년생은 다르다. 늘 개띠가 따라붙는다. 궁금했다. ‘58년 개띠’라는 고유명사는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58년 개띠들에게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1978년 MBC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국민MC 임백천 씨, ‘58년 개띠’라는 안무를 직접 만든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전미숙 교수, ‘글숨의 광합성’ ‘들어라 청년들아’ 등의 책을 낸 연대 국문과 정과리 교수,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출판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이 그들이다. 82년 개띠 ‘주간동아’ 이혜민 기자도 동참했다.

 

 

미군 구호물품 옥수수빵과 가루우유

이혜민 기자_58년 개띠들의 유년시절부터 들어볼까요.

임백천_아버지가 야반도주를 했는지 여섯 살 때 서울로 왔어요.(웃음) 교육 때문에 왔겠죠. 60년대 초에는 서울에도 잘사는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전미숙_학교에서 가정환경조사를 하면 꼭 전화 있는 집, 텔레비전 있는 집을 묻곤 했죠.

임백천_기 안 죽으려고 일부러 있다고 쓰는 아이도 있었어요. 전화가 처음 들어온 날을 아직 기억해요. 74-3190번. 빙빙 돌려서 쓰는 전화기였어요.

정과리_ 소득 100달러 시대였으니, 살림살이가 넉넉했겠어요? 텔레비전 있는 집에 놀러가 같이 보던 재미가 있었죠.

한기호_초등학교 때에는 옥수수빵이랑 우유도 있었어요. 가루에 물을 부으면 우유가 됐는데 미군 구호물품이었죠. 선생님 채점 도와드리면 빵을 주셨는데, 안 먹고 동생들 가져다주면 굉장히 좋아했어요. 학교에서 받은 우유를 할머니가 가마솥에 끓여 가족이 먹었다가 배탈 난 기억도 나네요.

임백천_잘사는 아이들은 도시락을 갖고 와서, 도시락을 못 싸와 옥수수빵을 먹는 아이들과 바꿔 먹기도 했어요. 당시는 연탄을 땔 때라 연탄 중독도 많았죠. 우리 삼형제를 아버지가 여러 번 업고 뛰셨어요. 추운 날 소변보러 나갔다 연탄 가는 어머니를 도와드리곤 했는데, 코를 팍 쏘는 연탄가스에 아찔하더라고요. 이런 걸 어머니는 매일 하시는데…. 어느 날 기말고사 앞두고 친구 5명이 모여 공부하다 잠이 들었는데, 연탄가스를 마신 탓에 모두 시험을 치르지 못했어요.

박훈상 기자_58년 개띠들은 바글바글한 콩나물시루 교실에서 공부했다고 들었는데, 놀 때는 주로 무엇을 하셨습니까? 82년생들도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 세대이긴 하지만, 집에서 게임기로 노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임백천_정말 격세지감이네요. 우리 때 남자아이들은 축구를 했어요. 비만 오면 엉망인 운동장에서 수십 개의 축구팀이 모여 공을 찼으니 생각해봐요, 얼마나 복잡했을지.(웃음) 골대는 각자 만든다 해도 그 많은 애가 한꺼번에 뛰는데…. 추운 겨울이 되면 너덜너덜한 공이 물먹고 꽁꽁 어는데, 그때 헤딩했다가 기절할 뻔했어요.(웃음) 한 반에 70명씩 오전반, 오후반으로 수업했어요. 담임선생님도 1년 내내 아이들 이름을 다 못 외웠을걸요.

한기호_저는 시골 출신이라 개구리 잡아서 뒷다리를 먹기도 하고, 몸통은 삶아서 돼지나 닭에게 줬어요.

   

정과리_우리는 고교평준화 1세대로 ‘뺑뺑이 세대’라고 불렀는데, 얽힌 사연도 많죠.

임백천_시험을 친다 해도 어차피 명문고 갈 실력이 안 되는 친구들이 뺑뺑이 때문에 못 갔다고 ‘뻥’을 쳤죠. ‘뺑뺑이’로 경기, 서울, 경복 등 명문고에 간 친구들은 몇 년 동안 후배 취급도 못 받았대요.

깻잎파와 독서클럽 … 자장면 한 그릇 추억

정과리_제 아내가 뺑뺑이 경기여고 세대인데, 뺑뺑이 세대를 ‘푸른 경기’라고 부르며 차별했대요. 하루는 아내 친구가 동창회에 가서 선배들이 푸른 경기 타령을 하기에 우리는 선배들을 ‘누런 경기’라고 부른다며 받아넘겼다더군요.(웃음) 이래저래 차별이 많았을 거예요.

이혜민 기자_고등학교 시절로 넘어갈까요? 58년생들이 주인공인 소설 ‘마이너리그’를 읽다 보니 빵집이나 중국집에 참 많이들 가던데요.

전미숙_저는 진명여고를 나왔는데 빵집도, 극장도 심지어 분식센터도 못 가게 했어요. 생활주임 선생님이 단속하려고 광화문을 돌아다니기도 했죠. 빵집에서 남학생 만나면 아휴….

임백천_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깻잎파’도 있지 않았나요?

전미숙_단정하게 가르마를 타야 하는데, 머리를 바가지 모양으로 자르고 앞머리를 깻잎처럼 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저는 심하게 똑바로 잘랐고요.(웃음) 독서클럽도 기억이 많이 나네요. 고등학생 때 남학생을 합법적으로 만날 유일한 기회였거든요. 진명여고랑 양정고가 자매학교여서 YMCA나 구세군회관에서 만나 함께 책을 읽고 토론도 했어요. 정 급하면 서둘러 요약본을 읽고 갔죠. 그때 저에게 관심 보이던 남학생이 따로 만나자고도 했는데,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고 ‘인간 말종이구나’ 싶어 다시는 상대 안 했어요.(웃음)

한기호_초등학생 때 집에 있는 ‘이조 500년 야사’ ‘삼국지’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중학생 때는 사서 누나가 예뻐서 도서관에 자주 갔고요. 고등학생 때는 사서가 없어서 직접 도서반 반장 구실을 했어요. 도서관에 있던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를 봤죠. 베스트셀러를 분석하는 싹이 그때 텄나 봐요. 문화원에서 시화전을 열던 기억도 나네요.

임백천_저는 그때 음성으로 독서클럽을 했어요. 서울대에 다니던 선배를 바람막이로 두고 여학생과 교제했죠. 그때는 놀거리가 없으니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뺑뺑이로 고등학교를 가게 돼 중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에 할 일이 없었거든요. 한 달 꼬박 단편문학전집을 읽었어요. 엄동설한에 이불 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려 누워가며 책을 읽었죠. 남학생들끼리는 중국집에도 많이 갔어요.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에 배갈 마시고 담배 한 대씩 피우는 게 여흥이었죠. 자장면 누가 빨리 먹나 하는 무식한 내기도 했고요.

58년 개띠는 77학번 세대다. 1977년에 MBC 대학가요제가 시작됐다. 대학가요제가 화제에 오르자 일순간 활기가 돈다.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 차에서 통기타를 꺼내온 임씨가 “다정한 연인이~ 손에 손을 잡고~”(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 “어두운 밤 구름 위에 저 달이 뜨면~”(김정호의 ‘저 별과 달을’)을 연거푸 부르자, 어느새 합창을 하면서 서먹하던 분위기는 싹 사라졌다. 58년 개띠의 낭만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임백천_ 정동 MBC 시절 대학가요제를 처음 할 때는 지나가던 대학생들을 끌어다 방청객을 채울 정도로 인지도가 없었어요. ‘나 어떡해’를 부른 ‘젊은 연인들’이 인기를 모으기 시작하더니 가요제의 인기가 그야말로 오대양 육대주로 번졌죠. 그런데 대학가요제에 대학생다운 창작곡이 계속 나온 건 아니에요. 10회까지나 그랬을까. 그 뒤엔 가수가 되려고 나왔어요. 70년대 말 대학생들은 치열했지만 그만큼 로맨틱했죠. 대학생다웠어요.

정과리_하숙집에 일찍 들어가 대학가요제를 보던 기억이 나네요. 70년대는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세례도 많이 받았어요. 제3공화국 독재정치 속에 자유가 억압됐지만 청년문화를 즐기기도 했죠. 80년대 문화가 민중가요, 국악, 걸개그림으로 대표된다면 70년대는 밥 딜런, 조앤 바에즈 등으로 대표되는 청년 히피문화가 있었어요. 일괄적인 평등보다 영혼의 자유를 더 추구한 셈이죠.

전미숙_저도 제자들에게 대학가요제로 데뷔한 심수봉 씨 이야기를 아직도 해요. 현대무용을 전공하니 늘 새로운 것이 필요한데, 국제적 감각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한국적인 것을 바탕에 깔죠. 트로트를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 심씨가 부르면 기이할 정도로 독특하고 매력이 있었어요.

그때 심수봉과 영혼의 자유 추구

한기호_대학시절 심씨는 대단한 코드였어요. 80년 5월에도 심수봉 씨 노래를 개사해 불렀죠.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XX~ 학생과 민주인사 구속하면서~ 민주주의 매도하던 그때 그 XX~.” 거리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박정희한테 억눌렸던 감정을 터뜨린 거죠. 오늘이 5·18인데 그때 5월에 비가 많이 왔어요. 5·18 시위를 주도했다고 감옥에도 갔다 나왔어요.

임백천_ 박지만 씨와는 사회에서 만난 친구 사이예요. 제가 광화문에 살았으니 육영수 여사 상여 나가는 것도 보고, 박 전 대통령 장례도 봤죠. 저도 막연히 독재자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그냥 알던 정치인 박정희와 친구 입으로 들은 아버지 박정희는 많이 다르더라고요. 지방에 다녀오면 사람들이 밥을 굶는다는 생각에 박 전 대통령이 수저를 못 들었대요. 박지만과 상관없이, 부정축재를 하지 않았단 점에서 평가를 후하게 주고 싶어요. 지만이한테는 농담처럼 스위스비밀은행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10%만 떼어달라고 말하는데, 자기도 그 번호 좀 알았으면 좋겠다고 해요.

한기호_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박정희는 컬러 TV를 먹을거리도 없는데 왜 하냐며 반대했어요. 밥을 먹어야 한다는 건 국민에 대한 자기 생각이지, 전체 인간을 고려한 것은 아니에요. 박정희는 억눌렀죠. “유신헌법이 최상의 법이라 할지라도 발전적 비판이 허용된다”는 말을 해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해야 했는데, 그런 상황이 이해되나요?

정과리_제3공화국이 정신적으로 억압했으니 이른바 ‘박통’이 죽었을 때 통쾌하기도 했어요. 경제 일변도 드라이브 정책을 펴면서 그 밖의 것은 억압하다 보니, 지금껏 한국 사회가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지나고 보니 잘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죠. 우리는 그때 양극화된다, 매판정권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성장을 위한 차관이 매판은 아니었고, 중산층을 키웠기에 한국이 남미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게 된 측면은 있어요.

전미숙_학교에는 늘 화염병, 최루탄이 있었지만 저는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도 그 억압된 분위기가 절로 몸에 배었던 것 같아요. ‘58년 개띠’라는 솔로 안무를 만들었는데 백스테이지에서 줄넘기를 계속 하고, 또 입을 벌리고 소리를 치려 하는데 소리는 안 나오고, 토하고 싶은데 참아야 하는 것들을 안무에 담은 이유도 우리 세대가 느끼는 억압 때문일 거예요. ‘개꿈 그리고 국화’라는 안무를 만든 뒤 소개 글에 ‘개 같은 인생 꿈만 꾸다 죽는다’고 쓴 적이 있는데, 평론가들이 그 무용에서 사회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느껴졌다고 하더군요.

   

정과리_58년 개띠는 긍정적으로 사고하기 힘들어요. 4·19세대는 경무대까지 갔고 다음날 대통령 하야로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에 뭔지 모를 당당함이 있죠. 386세대도 대통령 직선제라는 변화를 이끌어냈고요. 그런데 우리는 데모하다 감옥에 갔다 와서 또 군대에 끌려가고 굉장히 고생했지만 정작 얻어낸 게 없어요. 제3공화국은 하면 된다를 내세웠지만 우리는 안 된다 생각하고, 해도 될까 망설였죠.

임백천_그래서 저는 ‘되면 한다’예요.(웃음)

한기호_저도 좌절감을 느꼈어요. 한 친구는 데모하다 감옥에 갔다 왔더니 믿었던 대들보가 감옥에 갔다며 큰형은 목을 맸고, 다른 친구는 감옥에 다녀온 뒤 정신병에 걸렸는데도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어요.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복학할 때 쓰라며 돈을 만들어 놓고 돌아가셨대요. 그런 거 보면 친구 중에 내가 가장 행복한 축에 속해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 보면 답 나올 것

58년 개띠들은 인생을 복기하며 좌절감을 토로했다.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대접받지 못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어른을 모시며 살았지만 자식들이 대접해주리란 기대는 일찌감치 접은 세대란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에 넥타이 부대로 활약했지만 공은 386이 가져갔고, 마흔 살이 돼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았을 때 외환위기가 닥쳤지만 뚝심 하나로 버티며 사회의 중추 노릇을 해온 그들이다. 그래서 이번엔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58년 개띠 선배들에게 취직하느라 진을 뺀 82년 개띠들을 위한 충고를 부탁했다. 개천에서 용 나지 않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위로를 해줄 수 있을까.

한기호_딸 친구 5명이 모여 10년 뒤에 연봉 3000만 원을 받는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아무도 손을 못 들더래요. 한 친구가 ‘나 3000 가능하다’ 해서 알고 보니 ‘시급 3000원은 자신 있다’고 했다죠. 세상을 냉소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만 해도 책을 읽으며 자랐어요. 같이 학습하던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좌절하며 인간관계를 맺었죠. 서로 같이 읽고 경계를 넘나들면서 답을 찾으려고 하면 답이 나올 거예요.

전미숙_우리 세대 예술가는 테크닉이 좋지는 않았어요. 외국과 교류도 없었죠. 하지만 족적을 남긴 독창적인 몇몇 사람이 나왔어요. 요즘 아이들은 많은 것을 배우고 활발히 교류하지만 튀는 사람이 없어요. 많은 것을 빨리 받아들인 뒤에 뭔가를 또 빨리 만들어내니까 고민하질 않는 거예요. 반면에 우리는 좌절감 속에서 많은 고민을 했죠. 직업에 대해 고민해야겠지만, 자기 존재감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정과리_82년 개띠는 프로야구와 함께 태어나 비약적인 경제 성장 혜택을 누리다 보니 인생을 즐기며 살겠다는 신념 하나는 뚜렷하지만, 뭔가를 해내겠다는 삶에 대한 전망은 없어요. 인생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람 있게 살았으면 해요. 제 딸도 82년 개띠예요. 집에서 빨리 독립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안 나가요. 스스로 살아보도록 노력했으면 해요.

임백천_ 나는 용천에서 개났어요.(웃음) 우리나라 사람들 김씨, 이씨 다 왕족이죠. 왕족 아닌 사람이 없어요. 그렇지만 두 세대만 올라가면 농부 자식 아닌 사람 없어요. 요즘에는 사람을 만나면서 조건 운운한다는데, 그렇게 재는 게 더 웃긴 거예요. 다 같은 농부의 자식이니까요. 그렇다고 너무 위축될 필요도 없어요. 그러니 패잔병 의식은 버리고 세계랑 당당히 겨뤄봐요.

 

디지털 시대 최고의 중개자
58년 개띠 기업리더 전성시대…치열한 경쟁 이겨낸 경험이 경쟁력 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한 58년 개띠들은 자유분방함과 집요함으로 한국사회의 리더가 됐다. (왼쪽 사진부터)권오철, 박인식, 신동원, 박현주, 이영미, 표현명, 이미경.

치열하게 살았다. 58년 개띠는 앞서나가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유신독재 끄트머리에 대학에 들어가 1980년대 광장에서 민주화를 외친 그들은 뜨거웠던 함성이 잦아들면서 그 열정만을 가슴에 간직한 채, 그들이 그토록 바꾸려고 했던 기성사회 속으로 들어갔다. 58년 개띠가 정치·경제·사회·문화 각 분야로 흩어져 자신의 영역에서 업을 쌓아온 지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났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던 58년 개띠가 이제는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중추세력이다. 이 중 일부는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어 말단사원에서 최고경영자(CEO)로 성장했는가 하면,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한민국 경제를 받치는 중소기업 대표로 자리 잡았다.

 

자유분방함과 치열함이 특징

실제 국세청 조사 자료에도 이런 양상은 뚜렷이 나타난다. 국세청이 수입금액 100억 원(2008년 기준) 이상을 신고한 법인의 CEO 2만2203명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CEO 평균연령은 51.6세로 50대가 전체 CEO의 38.9%(8632명)를 차지해 명실상부 한국 경제의 주역임을 말해준다. 59년생 돼지띠가 1069명으로 가장 많았고 57년 닭띠가 1014명, 58년 개띠가 998명을 차지했다.

삼성전자종합기술원 김기남 원장, 하이닉스반도체 권오철 대표이사, KT 개인고객부문 표현명 사장, 미래에셋 박현주 회장, SK브로드밴드 박인식 사장 등이 대표적인 58년 개띠 CEO. CJ그룹 엔터테인먼트·미디어사업부 이미경 부회장, 농심 신동원 부회장처럼 기업 오너일가 중에서도 58년 개띠가 눈에 띈다. 이 밖에 CEO는 아니지만 대기업에서 상무, 이사 등 임원으로 CEO를 보필하며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이들 58년 개띠 기업리더는 스스로 돌이켜보건대 ‘개’라는 동물의 특성과 자신의 경영 스타일에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중소기업 S사 강모 대표는 “개의 자유분방함과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집요함이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58년 개띠들은 오만 가지에 관심을 갖지만 일단 어떤 분야에 집중하면 외골수 기질을 보입니다. 어찌 보면 모순된 듯한 이런 개띠의 특성이 오늘날 우리를 있게 한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집요함은 KT 개인고객부문 표현명 사장이 국내 최초 지능망서비스 오픈을 위해 며칠 밤을 새우며 시험한 경험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표현명 사장은 과거 KTF의 마케팅부문장으로 재직할 당시 ‘오렌지 드림팀’이라는 청년 아이디어 뱅크를 운영했다. 이동통신의 주력 사용자인 20, 30대의 문화코드를 이해하기 위해 젊은 사원들과 홍대클럽을 가고, 명동에서 타운워칭(Town Watching)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객들의 통찰력을 이해하고자 했던 집요함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더욱이 한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기득권을 버리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이 마흔에 중학교 과학교사를 그만두고 주얼리 공부를 시작해 2007년 대통령 표창을 받을 만큼 적수공권 기업을 일궈낸 세미성 이영미 대표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리더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교사는 보람 있는 일이지만 제가 원하는 길은 아니었어요. 생활이 안정되면 원하는 삶을 찾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고 판단해 교사를 그만두고 주얼리 디자이너가 됐지요.”

   

가정보다 회사와 일에서 행복 찾아

58년 개띠 기업리더들은 학창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스스로가 굉장히 활동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주변의 평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SK텔링크 사장을 비롯, 그룹의 중책을 맡아온 SK브로드밴드 박인식 사장에 대해 직원들은 58년 개띠 특유의 활동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SK브로드밴드의 한 직원은 “그냥 사무실에만 앉아 있는 CEO가 아니라 회사 안을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소통하려고 한다. 일단 결정이 되면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물고 늘어지는 추진력이 강점”이라고 전했다.

젊은 시절 민주화의 열망에 대한 시대적 고민은 58년 개띠 기업리더가 비즈니스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됐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학우들의 투쟁에 지지를 보내며 다른 각도에서 국가의 미래를 고민했다. 표현명 사장은 “민주화 운동을 경험하면서 공학도로서 한국의 IT 성장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중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제가 졸업한 대학은 4학년 때 두 번 휴교를 할 만큼 민주화 운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때 학우들과 많은 토론과 논쟁을 하면서 국가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지요.”

58년 개띠 기업리더들은 태어난 직후부터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온 경험 자체가 현재 기업을 이끌어가는 데 큰 경쟁력이 됐다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같은 또래 수가 많고,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 속에서 치르며 대학에 들어갔다. 지금의 위치까지 가기 위해 약육강식의 기업세계에서 개처럼 일했고, 선택의 순간마다 특유의 끈질김으로 살아남았다. 강모 대표는 “평준화로 수평적 사고를 할 수 있었다. 어느 세대보다 경쟁이 심한 탓에 자립심과 역경을 헤쳐가는 의지도 남달랐다”고 말한다.

“오늘날 기업 환경은 너무나 치열합니다. CEO의 잘못된 판단으로 회사가 망하고, 수천수만의 직원이 일자리를 잃으며 그 가족들이 고통을 겪습니다. 강한 자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한 자가 강한 자입니다. 저는 기업을 경영하는 것을 ‘매일매일 깎아지른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밧줄 위를 걸어 다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경쟁을 뚫고 생존해온 경험이 기업 경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

경쟁의 연속이다 보니 개인보다는 조직, 가정보다는 회사를 우선으로 여기며 살아온 경우가 대부분. 한화손해보험 보상지원실장 강성덕 상무는 “가정으로부터 외면 아닌 외면을 당하니 일에서 삶의 행복과 쾌락을 찾아야만 했다”며 씁쓸한 마음을 털어놨다.

“가정을 일으켜 풍요로움을 확보하고,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 젊은 시절 목표였습니다. 그 성공을 쟁취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기업리더는 젊음을 불태웠던 시절 속 자신의 모습이 마치 공장의 부품 같았지만 그런 틀에 짜인 것마저 좋았다고 말한다.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획일적이고 유치하고 딱딱하지만 오늘날보다 훨씬 로망이 남아 있는 경쟁이었다는 것.

   

좌절보다는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

전하진 대표는 “산업화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이어주는 중개자로서 58년 개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58년 개띠는 선배 세대들처럼 가정을 뒤로한 채 회사에 충실하고, 경제발전의 주역으로 살아왔지만 한국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부(富)를 축적하지 못한 세대로 기록된다. 강성덕 상무는 “개는 주인을 지키고 보호하고 대신하다 생을 마감하는 희생형, 충신형 삶을 사는 동물”이라며 “결코 자신의 삶을 위하는 운명이 못 된다. 우리 58년생은 이와 같은 운명이라 생각한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1998년 초고속 인터넷망이 설치되고 불과 4년 만에 1000만 회선이 깔리면서 한국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다. 디지털 네이티브인 20, 30대에 비해 50대는 디지털에 무지하며 기껏해야 디지털 이민자 또는 이방인에 머문다.

이는 기업리더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벤처붐이 일어난 것은 1990년대 후반. 이때 IT벤처를 이끌고 오늘날 굴지의 IT기업을 선도한 이들은 40대 초반이다. 58년 개띠가 산업화 시대의 마지막 주자지만 다가온 디지털 시대의 첫차를 타는 데는 늦었다는 평가도 여기서 나온다. 그들은 산업화 시대의 막내로서 1980년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었지만 과연 21세기 디지털 시대에서 나름의 몫을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IT 세례를 받은 10, 20대와 지금의 50대는 DNA부터 다르다”는 한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자조 섞인 말에서는 아날로그의 마지막 문을 닫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어설픈 진입자에 그쳤다는 아쉬움이 배어났다. 한미파슨스 전하진 e-jip 부문 대표는 “58년 개띠가 권위적인 가치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기에는 시대가 너무나 변했다”고 강조했다.

“그래도 제가 IT업계 1세대라 멘토를 자청해 20, 30대 젊은 기업가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한테 아이폰 사용법과 트위터를 배웠습니다. 비즈니스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과연 기존의 산업사회 주역이 얼마나 경쟁력을 가질지는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산업화 세대와 디지털 세대를 이어줄 중개자로서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58년 개띠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측면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하진 대표는 “디지털 세대가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것이 우리의 마지막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싫든 좋든 더욱 적극적으로 젊은 세대가 꿈을 펼치게 해줘야 우리도 살고 그들도 삽니다. 그동안 우마차에 포르셰를 실어놓고 ‘속도는 30km가 최고야’라고 말해왔다면 이제 우마차에서 포르셰를 내려 100km, 200km 달리게 하는 것이 58년 개띠가 해야 할 일입니다.”

58년 기업리더들은 달라진 시대에 좌절하기보다는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나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표현명 사장은 삶의 모토인 ‘See Different Think Creative’를 들어 58년 개띠 기업리더의 나아갈 길을 설파했다.

“오늘날도 젊은 시절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과 극심한 변화가 되풀이됩니다. 이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58년 기업리더들이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늘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노후 무대책…‘돈없는 설움’ 겪을라
어, 어 하다 은퇴 시작 고민과 한숨…국민연금·실비보장보험 가입은 0순위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58년 개띠’ 박정훈(52) 씨는 20년간 아침마다 입던 양복 대신 폴로셔츠와 바람막이 점퍼를 입는다. 그는 2008년 겨울 모 대기업 영업이사직을 조기 퇴직하고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서 골프웨어 점포를 운영한다. 처음 퇴직자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봤을 때는 정신적 공황에 빠져 힘들었지만 은퇴 직후부터는 ‘현실’이었다.

매달 들어오던 500여만 원의 급여가 한순간에 끊기니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40대 중반부터 ‘노후자금을 마련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은 했지만 당시 고등학생, 중학생이던 두 아이 교육비 부담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퇴직 후 그의 손에 남은 것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4억 원짜리 아파트 한 채와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아 언제 돈이 될지 모르는 경북 상주의 임야 6600여 ㎡가 전부였다. 그나마 아내가 교사로 맞벌이한 덕분에 그는 퇴직금 전체를 투자해 점포를 열 수 있었다. 고정 수입은 이전의 60% 정도. 그간 쌓아온 노하우를 살리지 못하고, 갑자기 ‘이사님’에서 만년 ‘을’이 된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게만 느껴진다.

“만약 40대 초반으로 돌아간다면 착실히 은퇴 준비를 할 거예요. 자본도 든든히 마련해놓고 대학시절 전공인 건축학을 살려 공부도 하고요.”

 

58년 개띠 절반 노후 준비 0% ‘충격’

이는 박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에게 헌신하고 자녀에게 ‘올인’하는 마지막 세대인 58년 개띠들은 헐떡이며 인생길을 달려오느라 노후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서울시가 지난 2월 수도권 거주 베이비붐 세대 3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답변자의 48%가 “노후자금을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 한편 삼성생명은 “베이비붐 세대는 은퇴 후 노후자금으로 월 205만 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준비한 노후자금은 월평균 154만 원에 불과하고, 특히 24.2%는 월평균 10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58년 개띠가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상황에서 ‘노후 대책 전무(全無) 현상’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지금이라도 대책을 세워야 한다.

58년 개띠 노후 대비 키워드는 ‘위험 줄이기’다. 운용 가능한 현금이 많지 않기에 안정적으로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에 투자를 하는 것이 좋다. 그를 위해 가장 서둘러야 하는 최소한의 대비책이 국민연금과 의료실비보장보험에 가입하는 것이다. 58년 개띠는 국민연금을 낸 금액보다 많이 받을 수 있는 세대. 국가가 운영하므로 안정성이 있으며 물가 상승을 반영해 연금지급액이 오르는 것이 장점이다. 또한 대한민국 사망요인 1위인 암은 “가족 한 명이 암에 걸리면 기둥뿌리가 뽑힌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의료비 손실이 막대하다. 그러므로 다른 건강보험보다 10만~20만 원 비싸더라도 의료비 손실이 보장되는 상품을 가입해두는 것이 좋다. 여기에 비교적 수명이 긴 아내를 위해 남편을 피보험자로 하는 종신보험도 필수다.

한꺼번에 받은 퇴직금을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걱정인 사람은 개인퇴직계좌(IRA)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근로자가 퇴직하거나 직장을 옮길 때 받은 퇴직금이나 퇴직연금 일시금을 본인 명의 계좌에 적립했다가 55세 이후 매달 일정 금액을 수령하는 것으로, 세금이 안 붙어 세제상으로도 유리하다.

 

공격적 투자 + 지속적 소득 만들기 필요

수비가 준비됐다면 공격을 할 차례. 낮은 금리의 예·적금만 믿고 있다가 은퇴 기간 중에 금융자산이 바닥나면 큰일이니 ‘100-나이=주식투자 비중(%)’이라는 ‘100의 법칙’에 따라 주식형 상품 투자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는 것이 좋다. 58년 개띠의 경우 투자형 자산 30%, 안전자산 70%, 기대수익률 5% 중반인 ‘안정추구형 포트폴리오’를 따르는 게 적당하다. 50대에겐 수익률도 중요하지만, 지금까지 마련해놓은 자산을 안전하게 증식하고 유지하는 게 우선 돼야 한다.

   

따라서 70% 정도의 자금은 안정적인 확정금리 상품에 투자한다. 특히 저축은행, 새마을금고 등을 이용하면 시중은행 금리보다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 운용자금의 30% 정도는 시중금리보다 높은 상품에 과감히 투자하는 게 좋다. 이때 주가지수연계증권(ELS)을 활용하는 것도 좋다. ‘조건부 원금보장형 ELS’는 주가가 일정 수준 아래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원금이 보장된다. 안정적인 기초자산으로 설정할 경우 연 15% 전후의 금리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주가지수 변동이 크면 손실이 크므로 투자할 때 전문가와 상담하는 것이 중요하다.

58년 개띠의 최후의 보루인 부동산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들은 주택 수요가 증가하던 30대와 부동산 투자가 확대되던 40대, 두 차례 부동산 가격의 수직상승을 경험했다. 하지만 참여정부 시절 처음 부동산의 하락을 맛보며 “부동산은 두면 무조건 오른다”는 신화가 깨져 혼란을 겪고 있다. 전문가들은 “투기 목적으로 샀던 집에 실제 거주해 사용가치를 높이는 게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베이비붐 세대가 노령화함에 따라 소유했던 집을 팔게 돼 결국 부동산 거품이 빠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삼성증권 투자컨설팅팀 김도현 차장은 “서울 중대형 평수에 거주하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경기도 수원이나 파주 등의 중소형 ‘은퇴 주택’으로 옮겨가면서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에 닥스클럽 봉준호 대표는 “‘베이비붐’은 1974년까지 지속돼 주택수요 증가는 74년생이 50대가 되는 2020년대 중반까지 지속될 것이므로 집값이 한 번에 빠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겁을 먹고 부동산을 급히 처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의견은 엇갈리지만 대체적으로 “은퇴를 앞둔 시점에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이용하는 건 위험하다”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퇴직 이후 당장 현금이 없는데 집 한 채만 달랑 있는 경우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제도로 ‘역(逆)모기지론’이 있다. 역모기지론이란 65세 이상 6억 이하의 주택 소유자가 집을 담보로 잡아놓고 사망할 때까지 매달 일정 금액을 연금식으로 받는 장기주택저당 대출이다. 사망하면 집은 정부의 소유가 되는데, 만일 집값만큼 연금으로 다 받지 못하고 사망하면 자녀가 나머지 금액을 받을 수 있다. 집 한 채를 담보 삼아 사망 시까지 일정액을 받을 수 있어 안정적이다. 또한 요즘은 “집 한 채라도 자식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사라져 더욱 찾는 사람이 많다.

골칫덩어리 임금피크제?
차근차근 노후 준비 vs 청년실업 심화 우려


실버타운에 입주한 노인들. ‘58년 개띠’에게도 은퇴 후 생활은 먼 훗날 이야기가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본격화하면서 매년 임금을 줄이되 정년을 연장하는 임금피크제가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2009년 100인 이상 사업장 8423곳 중 9.2%(774곳)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으며, 3.1%는 ‘도입 준비 중’이고 15.0%는 ‘추후 도입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유형별로는 정년퇴직자를 계약직으로 재고용하는 고용연장형이 46.8%로 가장 높았고 정년을 늘리고 정년 이후부터 임금을 깎는 정년고용연장형(34.2%), 정년은 보장하되 정년 전 일정 시점부터 임금을 낮추는 정년보장형(19.2%) 순이었다.
임금피크제를 통해 정부는 연금재정 압박을 줄이고, 잠재성장률 감소 문제를 완화하는 한편 사회복지 비용의 갑작스러운 증가를 막을 수 있다. 기업 역시 숙련노동자를 한 번에 방출하면서 겪는 경제적 불이익을 줄이고 신규사원에 대한 교육비를 아낄 수 있다. 아직 노후 준비를 하지 못한 근로자는 연금 수금 때까지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장점에도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다. 대다수 근로자가 “임금피크제는 알아서 떠나라”는 권고로 여긴다. “임금피크제 저변에는 나이가 들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전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임금피크제 때문에 노후 준비 시기를 놓칠 수 있다는 경고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열린사이버대 금융보험학과 전기보 교수는 “기계적으로 1, 2년 연장하는 건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 시간에 사회에 나와 적극적으로 교육받아 제2의 창업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청년실업자가 80만 명이 넘는 상황에서 정년을 채운 근로자들이 임금피크제에 기대 고용시장에서 나가지 않으면 청년실업이 더욱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쌓인 노하우와 취미 결합해 창업하기

퇴직 후 겪는 어려움 중 하나가 ‘무위고(無爲苦)’, 즉 일이 없어 겪는 어려움이다. 열린사이버대 금융보험학과 전기보(52) 교수는 “은퇴 이후 그간 모아놓은 돈을 어떻게 야금야금 쓸지를 고민할 게 아니라, 적더라도 매달 일정 수입을 만들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58년 개띠인 그 역시 교보생명 상무로 일하다 49세에 퇴직한 후 그간 노하우를 살려 금융자산관리 관련 강의를 시작했다. 그는 “대박 터뜨릴 생각 말고 지속적인 수입이 보장되면서 기존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창업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30, 40대부터 교육, 시장 조사 등을 하며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또한 가족과 정서적으로는 더욱 가까이 지내되 장성한 자녀들과는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하다.

은퇴(retirement)는 말 그대로 끝이 아니라, 남은 인생을 더 잘 달리기 위해 새로운 타이어를 끼우는 전환점이다. 따라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서울대 통계학과 오종남 교수는 “은퇴를 하면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행복은 바라는 것 대비 가진 것이 많을수록 높아지는데, 퇴직 후에는 가진 것이 많지 않으니 바라는 것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말. 은퇴 상담을 많이 하는 김도현 차장도 “은퇴 준비는 자금을 많이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58년 개띠’, 단카이 세대란 누구인가?
1947~49년生 … 280만 명 정년퇴직에 경제 충격


일본 단카이 세대는 은퇴 후에도 활발히 경제활동을 한다. 지난해 말, 일본 자동차회사의 회계부서에서 30년 넘게 근무하다 퇴직한 장인어른은 1949년에 태어난 ‘단카이 세대(團塊の世代)’다. 단카이 세대는 1차 베이비붐 세대로 1947년부터 1949년 사이에 태어난 일본인을 말한다. ‘단카이’란 말은 ‘단단한 덩어리(硬い塊)’, 즉 강력한 결집력과 집단성을 상징한다. 단카이 세대는 일벌레란 비아냥거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회사=나’라는 생각으로 몸 바쳐 일한 세대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월급은 수직으로 상승했고, 버블경제 때 달콤한 샴페인을 마셨으나 경기침체 때는 해고나 보직 변경 등 고용불안의 쓴맛을 경험했다. 이들은 한국의 ‘58년 개띠’와 유사한 굴곡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58년 개띠’보다 4~5년 이른 2007년부터 정년퇴직이 시작됐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2010년 3월까지 약 280만 명의 단카이 세대가 정년퇴직했다. 일본 경제를 지탱해주던 단카이 세대의 급작스러운 부재에 일본 경제는 떨고 있다. 2005년도 ‘제조업 연감’에 따르면 “일본 전산기업의 22%, 제조기업의 31%가 단카이 세대의 퇴직으로 위기감을 느낀다”고 답변했다.
단카이 세대의 대량 퇴직에 따른 업무 공황을 우려한 기업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의 힘을 빌리고 있다. 한 예로 필자의 장인어른 역시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자택에서 계약직 형태로 회사 업무를 계속 하고 있다. 퇴직금으로 상당한 액수를 받았지만, 자식 결혼 등 남은 ‘숙제’와 의료비 대책을 세우려면 일할 수 있을 때 돈을 벌어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다. 상당수 은퇴 단카이 세대는 아르바이트나 계약직 형태로 재취업을 하거나 후임자의 기술이 어느 정도 안정될 때까지 정년을 연장한다.
일본 경제의 부흥을 일궈낸 단카이 세대는 금전적으로 비교적 풍요롭다. 검약과 근면이 몸에 밴 이들은 퇴직금을 제하고도 평균 저축액이 2000만 엔 이상이다. 재단법인 노무행정연구소가 2004년 9월 단카이 세대의 퇴직금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대졸자는 평균 2368만 엔, 3000명 이상 대기업 종사자는 평균 2677만 엔을 받았다. 도쿄 지바 현, 사이타마 현 등 베드타운(bed town)의 신축 단독주택이 대략 3000만~4000만 엔이므로, 저축한 돈을 조금 보태면 퇴직과 동시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전형적인 고물가 사회로 은퇴자금도 많이 필요하다. 총무성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고령자 부부 두 명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활비는 1개월에 27만1298엔이고 여유로운 생활을 위해서는 36만 엔 정도가 필요하다. 퇴직 후 생이 20~30년 남은 것으로 가정한다면, 최고 1억2960만 엔이 필요한 것.
이러한 이유로 상당수 단카이 세대가 재취업을 선택한다. 기존에 다니던 회사에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 형태로 다니는 경우도 있고, 다른 회사로 전직하기도 한다. 고령자의 재취업이 제한적인 것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슈퍼마켓 계산원, 백화점 판매사원, 카페 웨이트리스 등으로 60대 이상 고령자가 현장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일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다. 일본인의 인식 자체도 고령자의 아르바이트나 계약직 근무에 비교적 우호적이며, 이러한 일을 할 사람을 뽑을 때도 연령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을 법률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저축 세대’인 단카이 세대는 “최근의 금융상품은 너무나 복잡하고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적립식 상품만 알아온 그들에게 ‘선물옵션’ 같은 최근의 파생금융 상품은 너무 어렵다는 것. 게다가 일본 내 부동산 가치도 계속 하락해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설문조사에서 퇴직자의 60% 이상이 “원금 손실을 보지 않는 상품만 원한다”고 했을 정도. 하지만 “고령화 사회에서 인플레이션을 고려한다면 적립식 상품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는 데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단카이 세대를 위한 금융상품 시장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도쿄=김동운 리포터 dogguli@hotmail.com

울퉁불퉁을 이겨냈다, 58년 개띠라서 남달랐다
유난히 많은 58년생 문인들 자신과 세대의 아픔 노래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내가 58년 개띠라는 것도 마음에 든다. 특징 없는 57년 닭띠나 59년 돼지띠보다는 말도 많고 탈도 많고 동호회도 많은 58년 개띠라서 좋다. 58년생은 베이비붐 1세대의 개척자라느니 특이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유난히 많다느니 하는 갖가지 사회학적 분석이 있지만 좌우간 우리 1958년생들은 초면이라도 단지 58년 개띠라는 이유만으로 서로 매우 반가워하며 단박에 가까워진다.”(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중에서)

구호활동가이자 에세이스트로 유명한 한비야. 적극성과 역마살과 긍정의 상징인 그는 58년생에 대한 애착을 최근 발표한 에세이집 서두에 이렇게 밝혔다. ‘58년 개띠’의 정체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문인도 있다. 서정홍 시인은 ‘58년 개띠’라는 시집을 통해 노동자로 지내온 지난한 세월을 노래했다.

서울 하늘을 최루가스가 뒤덮고

그러나 이처럼 ‘58년 개띠’ 작가들이 ‘출신 성분’을 문학에 직접적으로 투영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은희경 소설가가 58년 개띠 남자들의 고군분투하는 삶을 다룬 소설 ‘마이너리그’를 발표하긴 했지만 그 자신은 59년생이다.) 사회에서 명명한 그 명패를 거추장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힘든 것이지, 사회에서 말하는 것처럼 58년생이라고 해서 특별히 힘들게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박지만(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이 58년생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교육제도가 변한 측면은 있죠. 저 자신이 58년생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쓴 작품은 글쎄요… 아직 발표하지 않은 글의 서두 정도인 것 같네요.”

박상우 소설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창조적인 예술가에게는 개성이 소속감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황인숙 시인은 “동년배들은 어떻게 살았던가? 그때 나는 아무것도 전혀 몰랐고, 흘깃 알았더라도 무의미했다. 지금은 어떤가? 거의 변함이 없다. (중략) 그렇지만, 나는 나다! 그 시절, 그토록이나 나를 버팅겨 주었던 구르몽의 기도문을 거듭 뇌인다. ‘나의 조국은 단 하나, 그것은 예술이다. 나의 신앙은 단 하나, 그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산문집 ‘육체는 슬퍼라’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58년 개띠라는 소속감을 전혀 발현하지 않고 살 수는 없는 터. 58년 개띠 문인들은 알게 모르게 자신들 세대의 아픔을 노래해왔다. 서홍관 시인은 1987년 민주화항쟁 당시 ‘넥타이 부대’로 거리에 나서 민주화를 주창한 58년 개띠들의 애환을 전했다.

   

“서울 하늘을 최루가스가 뒤덮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아이의 잠자는 얼굴만 보는 날이 계속되면/ 낮에 집으로 전화를 한다.// ‘한이야 나 아빤데…/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아빠아! 내가 그림 그렸는데/ 잠깐만 기다려요.’// 잠시 후/ 그림을 들고 온 한이가/ 전화기에 대고 그림을 보여주는/ 오늘!/ 아빠는 안녕하다.”(서홍관 ‘아빠는 안녕하다’)

황인숙 시인은 “한순간에 프락치로 몰려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무서운 사회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사회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기억했다. 사회적으로 눈뜰 여유가 없던 그가 죽은 후배를 생각하며 ‘1987년 여름’이란 시를 쓴 것도 그래서다.

58년 개띠의 상징인물인 박지만 씨의 불행한 개인사에 감정이입을 한 작가도 있다. 이재무 시인은 “박지만의 실존에 대해서 돌팔매를 던졌지만, 시간이 흘러 불행한 개인사를 경험하다 보니 일탈에 대한 유혹을 느꼈다”면서 “하물며 일반인인 나도 이럴진대 특수한 상황에 놓인 박지만은 그러한 욕망이 더 크지 않을까란 연민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전쟁 경험한 아버지와의 괴리감

“박지만의 흑백사진을 들여다보면/ 어디서 저녁 까치 울음소리 들려온다/ 그의 두툼한 얼굴엔 한 시대 굴욕의 역사,/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절실한 비애가/ 담겨 있다 아궁이 속 오래 묵은 재처럼 어둡고/ 칙칙한 그의 길쭉한 얼굴엔 바닥 맨몸으로/ 기어본 자의 허무 절망 권태 고독이/ 물러터진 포도알처럼 주저리주저리 열려 있다/ 바닥에 떨어져 으깨어진 설익은 과실,/ 박지만은 우리 시대 자화상이다.”(이재무 ‘아아 박지만’ 중에서)

1990년대 후반에는 동년배들의 실직을 담담하게 말하는 시인도 나왔다. 박영근 시인의 ‘나는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를 보노라면 실직의 날선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58년생들의 작품에는 부모 세대와의 괴리감 또한 많이 나타난다. 이남희 소설가는 “부모님들이 전쟁을 겪은 세대이다 보니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와는 인식의 차가 컸다”고 지적했다. 그의 소설 ‘사십세’에는 그 감정선이 잘 나타난다.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는 슬펐다. 1차 대전 말기에 태어나 수탈당하는 나라의 국민으로 자랐으며 두 번의 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2차 대전과 6·25 그뿐만 아니다. 8·15 광복이 있었고 좌우의 대결 속에서 이승만 정부가 수립되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로선 유일한 회고담. ‘김구 선생 장례식에선 이걸로 끝이구나 싶어서 나까지 눈물이 핑 돌았다.’ 가부장적인 남자로선 드물었던 눈물의 인정. 그리고 4·19가 있었고 5·16유신… 한 사람의 생애에 다 담아내기엔 너무나 많은 격변 아닌가? 그런데 5·16 근처에서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하고 박정희가 죽은 해에 대학 졸업논문을 썼던 나는 아버지 세대가 잘못 살았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비뚤어진 거라고 대들곤 해왔다.”(이남희 ‘사십세’ 중에서)

이러한 괴리감은 문학적 자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영채 문학평론가는 “58년생은 산업화에 돌입한 1970년대에 성장했으면서도, 전쟁을 경험한 부모와 함께 전쟁 이후의 황폐함 속에서 살며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유년시절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고 해석했다.

58년생이 많은 만큼 58년생 문인도 많다. 김이구 문학평론가가 “또래 문인이 많아 58년 개띠생 문인의 모임을 만들면 좋겠다”며 모임을 만든(1999년) 것만 봐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승철 시인은 “내가 소속한 민족문학작가회의 쪽의 58년생 문인을 살펴보니 얼추 60명은 됐다. 한국문인협회 쪽 문인까지 합하니, 대략 100명에 이를 정도로 지금 한국 문단의 거대세력을 형성하는 게 58년 개띠 문인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엔 ‘가짜 58년생’도 포함돼 있다. 소설가 구효서, 이순원은 사실 58년생이 아니다.

“그때는 어릴 적에 많이 죽으니까 1, 2년 있다가 출생신고하는 일이 많았어요. 58년생이 많다지만 진짜 58년생 작가를 만나는 게 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죠. 58년생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으니 저도 넓은 의미에서 58년생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웃음)”(구효서 소설가)

 

앞만 보고 뛰고 또 뛰고 기계처럼 악착같이 살았다
58년 개띠 詩人이 가슴으로 쓴 ‘세상과 나’ 서정홍 농부시인 junghong58@hanmail.net

1995년 가을, 보리출판사에서 ‘58년 개띠’라는 첫 시집을 내고 학교와 시민사회단체에 숱하게 불려다녔습니다. 시집을 낸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학생과 청년이 많이 구입해 읽는다고 합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아직도 58년 개띠를 주목하는 걸까요?

가난을 짊어지고 태어나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오직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경제성장’만을 내다보고 부지런히 살아온 덕에 나라 경제를 이만큼 일으켜 세웠다고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부지런히 살았는데 식량 가운데 75% 이상을 수입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고요? 온갖 오염된 수입 농산물로 말미암아 자라나는 아이들이 아토피와 천식, 성인병 따위에 걸려 고통받고,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살을 꿈꾸게 만들었다고요? 그렇게 기계처럼 악착같이 살았는데 벌써 명예퇴직 바람이 덮쳐 마음 둘 곳이 없다고요? 58년 개띠,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일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된다”

나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시 월영동 산골짜기에서 태어났습니다. 말이 좋아 ‘마산시’지 똥구멍 찢어지도록 가난한 산골마을이었지요. 우리 형제는 아들 셋, 딸 셋인데 나는 둘째 아들이고 다섯 번째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가난했지만 누나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뒤 많은 나날을 술로 보냈습니다. 왜 그렇게 몸과 마음이 약해빠졌는지 곰곰이 뒤돌아보니, 마음속 깊이 박힌 외로움 때문이었지 싶습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것도 겨우 졸업하고, 마산에 있는 자동차부품 공장인 ‘유공사’에 취직했습니다. 동무들이 모두 중학교에 들어가서 깔끔한 교복을 입고 멋진 가방을 들고 다닐 때, 나는 공장에서 기름때 전 장갑을 끼고, 까닭도 없이 고참들한테 얻어맞으며 때론 빨래까지 대신 해주면서 기술을 익혔습니다. 학교 가는 동무들과 골목에서 마주친 날엔 하루 종일 마음이 우울했습니다. 그래서 동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빙빙 돌아서 가기도 했습니다. 동무들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날이면 문득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되지만, 일만 해서도 사람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아는 분 소개로 뒤늦게 야간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많은 형과 누나도 있었습니다. 학교 다니면서 나를 가장 부끄럽게 했던 것은 ‘손’입니다.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아무리 힘껏 씻어도, 손톱 밑의 기름때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손을 책상에 올려놓기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야간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거의 밤 11시가 넘었습니다. 몇 시간 자고 나면 아침 일찍 공장에 가야 했기 때문에 늘 잠이 모자랐습니다. 나뿐 아니라 야간학교 학생은 대부분 집안이 가난했으므로 낮에 공장에 다녔습니다. 그래서 깊은 밤이 아니면 학교 동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없어, 수업을 마치고 가까운 포장마차에 자주 갔습니다. 저녁밥조차 먹지 못했을 때가 많아 늘 출출했지만, 돈이 모자라 김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시곤 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 열넷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자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는 일본에서 목수로 일하다 쌓아둔 목재가 무너지는 바람에 발목을 크게 다쳤습니다. 일하다가 다쳤는데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왜놈들에게 쫓겨났습니다. 보상 한푼 받지 못한 채, 낡은 기계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진 아버지는 광복을 맞아 한국에 돌아와서 월영동 가난한 산동네에 터를 잡았습니다.

큰 키에 흰 수염이 가슴까지 자란 아버지는, 사람은 배워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던 아버지는 발목을 다치고부터 만날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혼자 힘으로 아들 셋, 딸 셋을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습니다. 이런 허드렛일조차 얻기 어려운 시절이라 어머니는 하루라도 일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했습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

막노동판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며 씻지도 않고 그대로 쓰러져 주무시는 날이 잦았습니다. 그 몸으로 이른 아침 꽁보리밥을 물에 말아 드시고는 기계처럼 벌떡 일어나 다시 일하러 나갔지요. 어머니의 손은 공사장 벽돌보다 거칠고 단단했으며, 쩍쩍 갈라진 발은 동상에 걸려 차마 눈 뜨고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겨울에도 양말이 없어 맨발로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1974년 12월 17일 저녁 무렵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3년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술병으로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굶기를 밥 먹듯’ 하는 바람에 영양실조로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그날도 공장 일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만큼 추운 겨울 저녁이었습니다. 집에 닿자마다 몇 달째 아파 누워 계신 어머니를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방문을 살며시 열어보니 어머니는 벽에 기댄 채 앉아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연탄불은 꺼진 지 오래됐습니다. 형과 누나들은 객지로 돈 벌러 가고 없는 싸늘한 방에서, 아무도 없는 쓸쓸한 방에서 어머니는 영원히 잠든 것이었습니다. 그날이 1977년 12월 19일, 내 나이 겨우 스무 살 되던 해였습니다.

어린 자식들 먹일 양식과 일밖에 모르고 살아온 어머니는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막노동판에서 새참으로 나온 빵 한 조각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어린 자식 놈들 먹일 거라고 보물처럼 싸서 집으로 가져오던 어머니였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 떨쳐버리고 싶다고 보내온 누님의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숨겨두었다가 틈만 나면 꺼내 보며 울던 어머니였는데, “이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무어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혼자서 중얼거리시며 뒤척이던 어머니였는데….

살아가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절로 납니다. 어머니가 물려주고 떠난 가난과 외로움 그리고 깊은 사랑과 희생이 없었다면, 못난 내가 어찌 성직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직인 농부가 돼 농사지으며 시를 쓰고 살 수 있겠습니까. 산골마을 작은 흙집에서 나는 오늘도 아내와 남의 논밭 빌려 농사지으면서도 헛된 부추김(돈이나 명예 따위)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은 ‘가난’만으로도 모든 사람에게 희망입니다. 왜냐하면 농촌 들녘에서, 공사장에서, 공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기에 날마다 밥을 먹을 수 있고, 잠을 잘 수 있고, 온갖 필요한 물건을 다 쓸 수 있고, 이나마 깨끗한 하늘 아래 숨 쉬며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정홍 씨는 바쁘게 살면서 글쓰기에도 힘을 기울여 1992년 ‘전태일 문학상’과 2009년 ‘우리나라 좋은 동시문학상’을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 동시집 ‘윗몸일으키기’(현암사), ‘우리 집 밥상’(창비)과 시집 ‘58년 개띠’(보리), ‘아내에게 미안하다’(실천문학사)를 비롯해 자녀교육 이야기 ‘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보리) 등이 있으며, 최근에는 세 번째 시집 ‘내가 가장 착해질 때’(나라말)와 세 번째 동시집 ‘닳지 않는 손’(우리교육)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