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구 빈곤 보고서 ①] 탈빈곤 정책의 실패를 목격하게 한 조사 결과… 사회 통합의 붕괴 양상 직시해야 | ||||||||||||||||||||||||||||||||||
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는 이제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밥을 굶는 극빈의 상황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있다. “지금은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고 자식 교육을 잘 시켜 나중에는, 혹은 내 자식들은 잘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희망의 절대 빈곤’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나중에도, 혹은 내 자식들도 남들처럼 잘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의 상대 빈곤’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 배제’의 현장
유럽 국가들은 빈곤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경제적 결핍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빈곤층이 주류 사회와 분리돼 사회적 참여를 제한당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의 문제를 제기한다. 빈곤층의 사회적 고립과 주변화는 그 사회의 기본적 통합성을 해친다. 유럽연합(EU)과 회원국 정부는 이를 핵심 정책 문제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한국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그런 ‘사회적 배제’의 현장이다. 우리 국민 모두 영구임대아파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다. 영구임대주택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19만 호가 건설된 뒤 중단됐다. 빈곤층에게 저렴한 주거를 제공하고 적절한 사회복지 안전망과 자활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중요한 복지 증진의 수단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빈곤층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빈곤 문제에 잘 대처해 정책목표를 달성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는 평가에 더 무게가 두어진다. 이번 <한겨레21>의 기획은 이런 우려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정부의 빈곤 정책 대상으로 표적화된 지역인 영구임대 단지를 통해 빈곤 문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다.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빈곤 문제에 대한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 등의 접근에 협조적이지 않다. 오히려 적대적인 상황이다. 빈곤층의 특성상 조사 거부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모든 가구를 2회 이상 접촉하는 ‘전수조사’ 과정을 통해 121 가구에 대한 면접조사, 20여 가구에 대한 심층면접이 이뤄졌다. 공공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현장 자료 수집이다.
복지병을 걱정할 만큼 복지가 있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탈빈곤 정책의 실패를 목격하게 된다. 영구임대주택 프로그램이 불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양한 공공임대주택 프로그램은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 빈곤 정책의 파편성과 비연속성은 짚어야 한다.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에 대응하려면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영구임대아파트 사업만 봐도 처음 몇 년간 건립 사업을 진행하다가 내팽개치다시피 중단됐다. 매번 이전 정부와 다른 ‘선전용’ 프로그램을 내놓다 보니 정책의 연속성도 떨어지고 일관성도 없다. 현 정부는 빈곤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도덕적 해이나 복지병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나라 빈곤 현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복지 서비스가 나태함을 조장한다는 것도 너무 가벼운 인식이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복지병을 걱정할 만큼의 복지를 국민에게 줘본 적이 있던가. 극히 일부에서 나타나는 복지 의존의 모습을 침소봉대할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붕괴 양상에 이르고 있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이 무거운 문제를 보는 정부의 책임의식도 더 진중해지기 바란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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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빈곤 보고서 ①] 일일이 방문한 360가구 중 121가구 통계… 무직 48.9%, 장애인 47.1%, 노동력 상실 45.8%, 사실상 ‘영구 빈곤’의 상태 | ||||||||||||||||||||||||||||||||||||||||||||||||||||||||||||||||||||||
<한겨레21>은 1989~1992년 조성된 전국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가운데 초창기에 건설된 서울 강북의 한 단지를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밀집한 수십 동의 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2개동을 골랐다. 입주민의 상당수가 15~20년 동안 이 단지에서 살아왔다.
지난 2월부터 6주에 걸쳐 2개동 360가구를 일일이 방문했다. 이 가운데 121가구의 승낙을 받아 1시간가량씩 면담조사를 했다. 가구현황·이주과정·주거환경·가족배경·사회의식·경제생활·복지현황 등에 대한 54개 항목을 물었다. 적극적으로 응답한 20가구는 다시 심층면접해 생애사를 취재했다.
조사에 응한 가구는 그나마 여유 있는 편
360가구 모두 2회 이상 방문해 조사를 시도했으나, 거절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어 외부인이 들어오면 곤란하다”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따라서 면담조사에 응한 121가구는 가족 중에 중환자나 장애인이 적고, 생계 해결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경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사 결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구 총소득이다. 전체 응답 가구의 72.7%가 한 달 100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50만원 미만의 소득은 33%였다. 9.9%는 월 20만원 미만의 벌이를 가졌고, “소득이 아예 없다”고 답한 가구도 2.5%에 이르렀다. 이 액수는 기초생활급여, 자활근로 임금, 자식·친지가 주는 용돈 등을 모두 합한 것이다.
‘구간별’로 가구 총소득을 물어본 이번 조사에서 1가구 평균소득을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3명이 사는 가구가 한 달 100만원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의 ‘평균치’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현재 정부가 발표한 2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85만8747원, 3인 가구는 111만919원이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한계선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주거비였다. 가구당 월 20만~30만원에 이르는 관리비·임대료가 가장 큰 지출 항목이라고 답한 경우가 74.4%였다. 실제 면담조사 과정에서 거의 모든 주민이 “제발 관리비·임대료가 낮아지도록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앞으로 개선되길 바라는 사항을 물었는데, 68.6%가 ‘보증금·임대료·관리비의 인하’를 꼽았다. ‘차별적 시선·사회적 소외’(4.1%), ‘범죄 단속’(5.0%), ‘주택 개선’(3.3%) 등에 비해 월등한 수치다. 가구주를 포함해 모든 가구원의 직업을 물었는데, ‘무직’인 경우가 48.9%에 이르렀다. 무응답자가 5.8%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도 뚜렷한 직업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직업이 있다 해도 단순노무직(10.0%), 단기직 아르바이트(5.4%), 공공·자활근로(6.4%) 등 비정규직이 많았다. 무직, 단순노무직, 단기직, 자활근로 등을 더하면 70%가 넘는다. 한 달 100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린다고 답한 조사 결과와 겹친다. 실직이 곧 가난과 연결된 것이다.
가난의 원인은 질병, 절실한 복지는 의료비 보장
가구 총소득 100만원 미만인 88가구 가운데 65살 미만의 성인이 포함된 가구(‘노인+성인 자녀 가구’, ‘성인 부부+자녀 가구’ 등)는 48.9%에 이르렀다. 노동능력이 있는 이들이 안정적·지속적 임금을 받게 된다면 이들의 가난에도 출구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취업 알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빈곤층 가구의 특성 때문이다. 조사 대상 121가구 가운데는 ‘노인 단독’(14.9%), ‘노인 부부’(19.0%) 등 65살 이상 노인을 중심으로 가구가 구성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분포를 봐도 조사 대상 가구원의 50.2%가 60살 이상으로 나타났다. 가구 총소득 100만원 미만인 88가구 가운데 ‘노인 단독’ 또는 ‘노인 부부’인 경우는 30%였다. 사실상 노동능력을 잃어가는 빈곤 노인 가구에 대해선 기초생활급여를 늘리는 것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장애와 질병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올무다. 가구 구성원 가운데 장애인이 있는 경우가 47.1%였다. 장애 등급별로 보면 중대 장애로 분류되는 1~3급 장애가 전체 장애인의 57.6%를 차지했다. 이들에겐 취업이 아니라 돌봄과 치료가 절실하다. 그러나 면담 과정에서 살펴본 바로는 중증 장애인의 대부분은 사실상 돌봄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상태였다.
거의 모든 가구 구성원이 각종 만성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노동력 상실과 직결되는 ‘허리·관절 질환’(31.3%), ‘신체 손상에 따른 거동 불편’(6.5%), ‘암’(5.0%), ‘정신질환’(3.0%) 등이 많았다. 빈곤층의 질병은 평생 지속된 가난의 결과이자, 남은 인생까지 가난하게 살게 될 원인이다. ‘현재 가난의 원인’을 물었더니 34.7%가 “질병과 장애 때문”이라고 답했다. ‘가장 절실한 복지 서비스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25.6%가 ‘의료비 보장’이라고 답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면담 과정에서 살펴본 바로는 빈곤층의 질병은 그냥 방치될 뿐, 치료되지는 않는다. 주거비 등의 부담이 큰 상태에서 아파도 그냥 참는 것이다. 의료비 보장 다음으로 ‘소득지원금’을 절실한 복지 서비스로 꼽은 경우가 14.9%였다. ‘취업 알선’(13.2%)이라고 응답한 것까지 감안하면 이들이 원하는 복지는 안정적 소득을 확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0년 된 입주자가 59.5%, 빈곤 탈출 실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빈곤층은 사실상 ‘영구 빈곤’의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앞으로 잘살 것이라는 희망 없이 자녀 세대까지 빈곤을 대물림하는 구조에 갇혀버린 것이다. 121가구 가운데 59.5%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1989~90년에 입주했다. 입주민의 상당수가 빈곤 탈출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모는 농사를 지었고(‘부모 직업은 농업’ 44.6%), 가난이 싫어 서울로 올라왔으나(‘서울·수도권 외 지방 출신’ 70.2%), 월세방에서 가난하게 살았던(‘입주 직전 월세·사글세 거주’ 66.1%)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가난할 것이라고(‘미래 빈곤 해결 가능성 전혀·별로 없다’ 39.7%) 스스로 생각한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은 어디일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집단’을 물었더니 정당·언론·기업·지방자치단체·종교기관 등을 제치고 중앙정부(28.1%)를 가장 많이 꼽았다. ‘가난을 해결하려면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물음에 대한 5점 척도 조사에서도 “매우 그렇다”(29.8%), “비교적 그렇다”(39.7%)는 응답이 많았다. 대한민국은 그 대답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을까.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조사 자문: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②] 가난·폭력·방치 속에 자라 직업도 없이 텅 빈 잠에만 빠져드는 영구임대아파트 2세대 청년들 | ||||||||||||||||||||||||||||||||||||||||||||
한국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서울 강북의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했다. 평균적으로 한 달 100만원 이하를 벌어 30만원의 임대료·관리비를 내고 세 식구가 근근이 살아가는 곳이다. 배우자는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죽고, 살아남은 식구들은 장애가 있거나 암에 걸렸다. 무허가 판잣집, 비닐하우스촌, 철거촌, 쪽방 등을 거쳐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지만, 가난을 벗어날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폐암에 걸린 박금자(가명)씨는 점심 때마다 무료급식을 찾아 줄을 선다.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 명령을 받은 김종택(가명)씨는 얼마 전 자살을 시도했다. 정영숙(가명)씨는 아들의 병 치료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런 사연을 지닌 4천여 세대 1만여 명이 희뿌옇게 모여 하루하루를 산다.
글 싣는 순서 1회: 영구 빈곤의 둥지
이영호(23·가명)씨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3평짜리 방의 절반은 책상과 컴퓨터가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의 자리엔 빨지 않아 후줄근한 이불이 깔려 있다. 이씨가 사는 세상이다. 아파트 복도로 향한 창에서 햇볕이 스며든다. 이씨는 한사코 누워 잠만 잔다. “불 켜지 마.”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때 어린 이씨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방구석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 반지하방이었다. 그전엔 보광동 판자촌에서 살았다고 어머니가 말해줬다. 그래도 이씨의 기억 속에는 어둠에 잠긴 반지하방이 첫 번째 집이다.
1.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삶 이씨의 집은 이제 반지하방이 아니다. 그는 방 2칸짜리 13평 영구임대아파트에서 40대 후반의 어머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함께 산다. 어머니를 일삼아 때렸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멀리 떠나버렸다. 그래도 이씨의 주변은 캄캄하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산다.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한다. 오후 2시에 일어난다. PC방에 간다. 그곳은 대낮에도 어둡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술을 그만 마시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귀찮아, 방문 창틀에 맥주와 소주를 올려놓았다. 허름한 냉장고를 뒤지는 일이 사라졌다. 귀찮은 어머니를 마주칠 일도 사라졌다. “울지 마.”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어머니는 속옷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날 새벽엔 비가 많이 왔다. 한참 있다 어머니가 돌아왔다. “너 때문에 돌아왔다”며 어머니는 울었다. 어린 이씨도 울었다. 이제 이씨는 울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이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말이 없었다. 남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발표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 근처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3번 마을버스 운전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정거장을 곧잘 지나쳤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이씨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멀리 돌아 내린 뒤 다시 걸어왔다. 어머니가 다그쳤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어떻게 내려달라고 말해.” 이씨는 도리어 어머니한테 화를 냈다. 3번 마을버스를 타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이씨의 직업은 PC방 아르바이트였다. “나 없을 때 가게 좀 봐라.” 매일 나가던 PC방 사장이 말했다. 그러나 사장은 이씨를 정식으로 고용하진 않았다. 한 달에 몇만원씩 용돈만 줬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받아주겠어.” 어디건 이력서라도 내보라는 어머니한테 이씨는 화를 냈다. 말이 없는 이씨는 화를 낼 때 무섭다. 중학교 동창과 잠시 사귀었는데, 오래지 않아 헤어졌다. 그 뒤 이씨는 칼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그었다. 수십 곳의 상처에서 피가 났다. 어머니는 아들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퇴원한 이씨는 15층 집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군대에 갔다. 거기서 또 사고를 낼까봐 어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무사히 제대했다. 다행이었다.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제대한 뒤부터 1년이 넘도록 이씨는 계속 방에서만 살았다. 어둡고 캄캄한 곳만 찾아다녔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들이 자고 있으니 옆집으로 갑시다”
4천여 세대, 1만여 명이 모여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방에만 웅크린 젊은 사람들이 많다. 평생 공사판에서 철근 구부리는 일을 했던 김형성(69·가명)씨의 아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나간다. 밤마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자고 있으니, 옆집으로 갑시다.” 잔뜩 찌푸린 2월의 어느 날, 김씨는 인터뷰하자는 기자를 옆집으로 이끌었다. 35살의 아들은 직업이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아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60대 아버지는 이웃 친구 집에서 기자와 이야기했다. “아드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기자의 물음에 김씨는 손을 내저었다.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뒤론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서 말이야.” 평생 석공일을 했던 최성원(70·가명)씨 집에도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는 30대 중반의 아들이 있다. “껄렁껄렁한 놈들하고 어울려 당구나 치고, 술에 취해서 비척거리는 사람 있으면 달려들어 지갑을 뺏고, 그 돈으로 여관 가서 자고…. 그러니 강도에 폭력으로 6번이나 구속영장이 떨어졌다고.” 최씨는 얼굴을 쓸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들에 대해 말했다. “그놈이 내 신세를 망쳤어.” 자식 때문에 곤혹스런 사람은 김씨와 최씨 말고도 많았다. “우리 아이가 자고 있어요. 집에 사람을 들일 수 없네.” “지금 자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나중에 오세요.” 기자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를 이유로 들었다. 문을 열어주는 것은 언제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였다. 노부모는 낮잠을 자는 자식을 어려워했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을 꺼렸다.
2. 배반당한 미래 자식은 미래다. 평생 가난했지만, 내 아들딸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가난을 이겨내게 만든다. 그러나 그 믿음이 배반당한다면? 면담 조사한 121가구 가운데 노부모와 성인 자녀가 함께 사는 65가구가 있다. 이들은 독거 노인과 노인 부부만 사는 41가구보다 미래를 더 비관했다(나머지는 한부모 가구 또는 65살 미만의 성인 부부 가구 등이다). 세상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가?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23.1%가 ‘그렇다’고 답했다. ‘노인 가구’ 가운데는 14.6%만 ‘그렇다’고 답했다.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58.5%가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응답을 한 ‘노인 가구’는 48.8%였다(그래프 참조). 성인 자녀와 노부모가 함께 사는 집을 지배하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무기력이었다. 그들의 무기력에는 역사가 있다. “엄마가 싫어. 엄마랑 이혼해.” 박선영(20·가명)씨가 아빠한테 말했다. 박씨가 5살 때였다. 엄마는 자주 가출했다. 엄마는 재혼해 아빠를 만났다. 전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왔다가 아빠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재혼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딸 둘을 낳았지만 자꾸 집을 나갔다. 아빠는 결국 이혼했다. 딸 둘을 혼자 키웠다. 아빠는 스웨터를 짜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지하방에서 박씨가 여동생을 데리고 지냈다. 10대의 박씨는 속옷을 빨지 않았다. 장롱의 이불 틈에 끼워두었다. 생리혈이 묻은 속옷은 장롱에서 썩어갔다. 여동생은 고등학생이 되도록 이불에 오줌을 쌌다. 그 이불도 그냥 장롱에 처박아두었다. 아무도 자매에게 씻고 갈아입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장롱에 처박아둬 썩어버린 속옷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씨는 카드회사 대리점에 취직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10시까지 잠을 잤다. 회사에 나갈 때도 씻지 않았다. 귀찮았다. 한 달 만에 해고됐다. 얼마 전 대형 할인마트에 다시 취직했다. 역시 매일 지각을 하다가 일주일 만에 해고됐다. 박씨는 요즘도 하루 종일 잠만 잔다. 아빠는 가끔 박씨를 때린다.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혁대를 풀어 등이며 다리를 때린다. 옷걸이로 때릴 때도 있다. 줄넘기 줄로 때리기도 한다. 박씨는 그런 일이 생기면 집을 나가버린다. “지난 5년 동안 가출을 수십 번은 했을 것”이라고 박씨는 말한다. 한번은 아빠에게 맞고 집을 뛰쳐나가 아동보호센터에서 지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도 덩달아 가출을 시작했다. 20대의 이영호·박선영씨에겐 공통점이 있다. 잠만 잔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뭘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본보기’가 가족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런 역할 모델은 이웃집에도 없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통틀어 별로 없다. 그들의 부모는 돈 버느라 바빴다.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가끔 자식을 마주칠 때면 때리거나 윽박질렀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탓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그런 일이 다반사다. 그런 이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제 돈 버는 일조차 심드렁하다. 늙은 부모는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젊은 자식은 일을 하기 싫은 무기력자가 된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희망 자체를 꿈꿔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무능한 부모 탓일까, 무력한 자식 탓일까.
3. 착하고 성실한 가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모든 젊은이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경우가 없진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또 다른 추진 로켓이 필요하다. 저녁 6시30분이 되면, 김성철(38·가명)씨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68살의 어머니가 혼자 저녁을 먹고 있다. 개다리소반에는 현미가 들어간 밥, 통조림에 담긴 햄, 그리고 작은 간장 종지가 놓여있다. “그렇게 짜게 드시면 안 되는데.” 아들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냉장고에는 동그랑땡, 참치 그리고 햄이 담긴 통조림만 가득하다. 열무김치도 있지만, 어머니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당장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는다. 당뇨와 고혈압이 있는 어머니는 최근 석 달 동안 3번이나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음식 조절을 해야 하지만,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어머니는 스스로 그 일을 못한다. 어머니의 ‘복지카드’에는 ‘지적·정신장애 2급’이라고 적혀 있다. 어머니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이빨 없는 잇몸으로 기름기 많은 햄을 씹고, 다시 간장을 쳐서 밥을 먹는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권투선수 출신이었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았다. 해수욕장에서 탈의실을 운영해 돈을 벌었다. 그나마 벌이가 괜찮았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서울 청량리 근처 쪽방에서 살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다. 문방구가 망하자, 학교 입학식·졸업식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노년에는 언어장애가 왔다. 언어장애가 오기 전, 아버지는 아들 김씨에게 말했다. “기술을 배워.” 배운 기술이 없어 평생 가난했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김씨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기술을 배웠다. 공고를 다니며 전기·전자 기술 자격증을 땄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문도 배달하고 자장면도 배달했다. 채소 가게 점원으로도 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임대료·관리비를 김씨가 벌어서 냈다. 고등학교 졸업 뒤엔 전문대도 들어갔다. 지금까지 10곳 이상의 직장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고쳤고, 대형 식당 주방기기도 고쳤다. 김씨보다 더 열심히 살아온 이가 또래 중엔 드물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빚만 500만원 있다. 500만원의 빚은 어머니와 관련이 깊다. 어머니에게는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 복지기관에서 알려준 ‘간호 서비스’를 받으려면 하루에 3만원을 내야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려면 한 달에 160만원을 내야 한다. 가난한 장애인이라고 나라가 우대해주는 게 그 수준이다. 2년 전에는 동사무소에서 실태조사를 다녀갔다. 대책을 마련해줄까 싶었는데, 오히려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결혼해 따로 사는 형이 돈을 번다는 이유였다. 결혼해 서울 창동에 전셋집을 얻은 형은 제 앞가림에 바쁘다. 어머니 간병 문제로 형제끼리 크게 다툰 뒤로는 내왕도 없다. 형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김씨는 알지 못한다. 얼마를 벌건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만 잘 알고 있다. 동사무소는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
“20년간 납부한 관리비만 모았어도…”
동사무소가 도움을 준 일이 하나 있었다. “주소지를 옮기지 마세요.” 동사무소 직원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김씨가 어머니와 같이 지내면,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혜택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유일한 간병인이자 보호자인 김씨는 ‘서류상으로는’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다. 이걸 복지제도라 부를 수 있다면, 김씨가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아무것도 없다. 김씨는 구청에서 받아온 ‘장애인 복지 서비스’ 리스트를 보여줬다. 그 가운데는 장애인 운전차량에 한해 저렴한 가스충전식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웃기는 일이에요. 우리야 면허가 없으니 차를 살 수도 없지만, 막상 사게 되면 승용차 굴릴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혜택을 끊어버리니까요.”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김씨는 혼자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출근한다 해도 어머니 때문에 곧잘 집으로 뛰어들어 와야 했으므로, 어머니 곁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주식 투자였다. “위험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김씨가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려는 뜻은 이뤘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대로 손해가 됐고 빚으로 남았다. 30대 후반의 김씨로선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 6개월 동안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이런저런 영업직을 전전하면서 월 30만원 정도를 벌었다. 한 달 전, 120만원을 준다는 텔레마케터 자리를 구했다. 출근한 내내 어머니 걱정에 불안하다. “요즘은 지난 20년 동안 꼬박꼬박 냈던 관리비가 생각나요.” 십자가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13평 방에 앉아 김씨가 말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매달 어김없이 납부했던 20만원을 20년 동안 모두 모았다면, 지금쯤 전셋집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간병인을 구해 어머니 곁에 둘 수 있지 않았을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뒤, 착하고 성실한 여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김씨는 자꾸 의문이 든다. “그래도 그건 허무한 생각이고, 임대아파트에라도 들어와 있으니 감사한 일이겠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4. 따라 배울 수 없는 모범 결혼해 두 사람이 같이 벌면 어떨까. 신미숙(33·가명)씨는 4년 전 결혼했다. 경기 안산 공단의 휴대전화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같은 공장의 운전기사를 만났다. 알고 보니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바로 옆 동에 살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의 부모들은 단지 옆 작은 식당에서 만나 상견례를 했다. 신혼부부는 빚을 얻어 경기 부평에 작은 전세방을 구했다. 결혼한 뒤에도 신씨 부부는 계속 일했다. 함께 벌어야 월 200만원의 수입을 얻는다. 얼마 전 신씨는 유산을 했다. 휴대전화 만드는 일을 10년 넘게 한 것이 유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한다. 그게 사실이라 한들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신씨 부부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양가 부모에게 단 한 푼의 용돈도 드리지 못한다. 결혼해 함께 벌어도 어느 한 집의 사정이나마 나아진 것이 없다. 신씨 부부에게 결혼은 빈곤의 해결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식구의 무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런 점에서 서유영(39·가명)씨는 드문 예외다. 그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탈출했다. 서씨는 남편과 함께 맞벌이를 하며 월 300만원을 번다. 지금은 서울 수유리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혹시 그의 삶에서 영구임대아파트의 젊은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서씨는 어린 시절에 살았던 서울 도봉동 판자촌을 기억한다. 낮은 지붕, 얇은 벽, 공동 화장실, 공동 우물이 있는 동네였다. 어린 서씨는 매일 아침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술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1985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3년 동안 백혈병을 앓던 언니도 이듬해 죽었다. 어머니는 식당일과 빌딩 청소일을 번갈아 하며 살아남은 식구들의 생계를 이었다. 상고를 졸업한 서씨는 10곳의 회사에서 면접을 봤다. 모두 떨어졌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취업했다. 한참 뒤에야 제조업체 대리점의 경리로 뽑혔다. 그곳에서 비밀을 알았다.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경리직으로 뽑으려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우리도 망설였지.” 인사 담당자가 말했다. 그 무렵 판자촌에서 쫓겨난 식구들이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화장실에선 물이 콸콸 나왔다. 회사에 다니면서 서씨는 공부를 했다. 2년제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빈민 봉사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서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네 학원 강사로 일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3년 전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현재 그는 강북 지역의 청소년자활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도 다른 지역의 복지기관에서 일한다. 평생 고생한 어머니는 여전히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 빌딩 청소일도 계속 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단지의 다른 집보단 유복하다. 자리를 잡은 서씨 부부가 있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서씨의 초등학생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집엔 그나마 다른 ‘불행’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큼 산다고 했다. “꿈을 갖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가난하고 무기력한 사람들만 보고 자랐으니…. 하다못해 영화라도 보여줘요. 그래야 간접적으로라도 다른 삶을 보고 꿈을 가질 테니.”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서씨가 말했다. 그의 생각은 별로 틀리지 않다. 서씨 스스로 그 길을 따라 가난을 이겨내고 두 발로 섰다.
꿋꿋이 살아내라고 격려만 할 텐가
따라서 어두운 곳만 찾는 이영호씨, 잠만 자는 박선영씨, 착실히 일해도 근심만 늘어가는 김성철씨는 이제 서씨를 좇아 살면 된다. 세상이 차별해도 버텨야 한다. 폭력적인 부모를 만났어도 인내해야 한다. 일찍 삶을 마치는 가족이 있어도 꿋꿋하게 이겨내야 한다. 가난한 부모가 배움의 기회를 주지 못해도 스스로 벌어 학교를 마쳐야 한다. 매일처럼 마주치는 무력한 사람들 말고, 영화건 소설이건 따라 배울 만한 모범을 찾아 자신의 꿈을 키워야 한다. 눈높이를 낮춰 취업해야 하고, 배우자를 만나면 함께 벌어야 한다.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나라가 베푸는 복지제도에 기대지 말고, 혼자 힘으로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빈민의 낙인을 벗고 서민의 얼굴로 세상의 밝은 햇볕 아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술병이 나뒹구는 좁은 방에서 꾀죄죄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23살의 이영호씨를 직접 만난다면, 당신에겐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꿋꿋이 살아내라고 격려하는 것조차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주문이 아닐까.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조사 자문: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조사 보조: 강보라·김민지·김옥진·김하나·김혜영·류다솜·민들레·백가희·윤현주·이수연·황단비(이상 동덕여대), 권혜미·김솔·박금지·이하늬·전수정(이상 중앙대), 손희경(건국대) 학생, 이선주 프리랜서 작가 |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③] 어른들의 방치 속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10대들 | ||||||||||||||||||||||||||||||||||||||||||||
서울 강북의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121가구를 면접조사했다. 낡고 허름하지만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어보니, 각자의 사연이 아파트 구조만큼이나 서로 닮아 있다. 질병이나 사고로 누군가 앓거나 숨진 가족사, 무허가 판잣집·비닐하우스촌·철거촌을 거쳐온 빈곤 이주의 경로, 평균 100만원 이하의 월수입과 과도한 주거비 부담이 그러했다. 노인 세대는 영구임대아파트 20년 역사만큼 낡은 ‘가난의 역사’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청년 세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부모들이 일을 나가고 면접조사에 응할 때, 청년 세대는 주로 방에서 잠을 잤다. 영구임대아파트 1세대의 무능력은 2세대에게 무기력으로 더 진하게 대물림됐다. ‘역할 모델’도 ‘추진 로켓’도 없이 좁은 방에 드러누운 이들에게 꿋꿋이 살아내라는 격려조차 가혹한 주문일지 모른다.
글 싣는 순서
1회: 영구 빈곤의 둥지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놀이터가 있다. 미끄럼틀, 시소, 정글짐, 벤치가 있다.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논다. 초등학생은 미끄럼틀 주변, 중학생은 나무 벤치 주변에서 논다. 고등학생은 놀이터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논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우리, 어린 애들 좀 팰까?”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 고등학생이 말했다. 곁에 있던 친구들이 키득거렸다. 실제로 때리지는 않았다. 농 삼은 말이었다. 만약 누군가를 때린다면, 지는 게 뻔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들의 편이 돼줄 사람이 없다.
1. 사나운 눈빛으로
“제발 그렇게 하지 마.” 김영주(가명)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돈도 없잖아.” 수신자 부담 전화였다. 김 복지사는 휴대전화 요금을 내지 못하는 형진(16·가명)의 전화를 꼬박꼬박 받았다. “돈이야 삥을 뜯어도 되고, 집을 털어도 되지.” 전화기 너머에서 형진이 말했다. 반말을 해도 김 복지사는 다 받아준다. 형진은 한 달 전, 길 가던 또래를 때렸다. 어울려 다니던 친구 2명과 합세해 때렸다. 돈을 뺏었다. 맞은 아이는 코뼈가 부러졌다. 전치 8주 진단이 나왔다. 부모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형진은 쫓겨다녔다.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찰에 붙잡힐까 두려웠다. 형진은 김 복지사한테만 마음을 주었다. “ㄱ시로 갈 거야.” 그 전화를 끝으로 연락이 없다. 형진이 저 멀리 ㄱ시로 도망갔는지, 여전히 놀이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도 많이 싸워서 만기 연장될 거 같아 그리고 면회 부말(‘주말’의 오기) 받게 않 되 근데 상담 선생님이 특별이 됫다고 했어 내가 여기서 않 싸우고 잘지내고 있을계 잘 있다가 나가면 지금보다 더 잘할꼐.” 형진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맞춤법도 지키지 않는다. 지난해 겨울, 형진은 분홍색 편지지에 마침표 없는 편지를 썼다. 김 복지사에게 보냈다. 그때 형진은 청소년재활시설에 있었다. 길 가던 아이를 때린 죄로 6개월간 보호 위탁됐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 안에서 또 누군가를 때렸다. “나가면 지금보다 더 잘할꼐”라는 다짐은 잊혀졌다. 형진은 올해 초, 임대아파트로 돌아왔다.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코뼈를 부러뜨렸다. 이번에 붙잡히면 진짜 감옥에 갈 것이다.
형진의 어머니는 키가 작다. 소아마비를 앓았다.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형진에겐 없다. 의붓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알코올중독이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진 옆에서 부부 관계를 했다. 새아버지는 형진과 형진의 누나를 구박했다. 어머니는 아파트 근처에 단칸방을 구했다. 두 남매만 따로 살라고 했다. 형진이 초등학교 5학년, 누나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좁은 방에 아이들만 살았다. 쓰레기가 쌓였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녔다. 형진의 친구, 형진 누나의 친구가 이 방에서 놀았다.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들, 집에 들어가기 싫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의 남자친구가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 훔친 오토바이였다. 형진도 그 오토바이를 몰았다. 생전 처음 탄 오토바이가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돈이 필요했다. 부모에겐 돈이 없었다. 영구임대아파트 내 복지관의 도움을 받았다. 김 복지사를 그때 만났다. 형진은 동네 아이들을 때리고, 돈도 뜯고, 집도 털었다. 단지 안에서 유명해졌다. 형진은 이듬해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 퇴학당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단지 놀이터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형진의 눈빛은 자꾸 사나워졌다. 형진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이곳에는 없다. 주먹을 들어 때리는 순간부터 형진이 지는 싸움이었다.
“이것도 좀 치워주세요”
폭력은 나쁘다. 절도도 나쁘다. 형진이 그런 짓을 못하도록 누군가 나서야 한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응어리진 것이 분출되지 않으면, 속에서 곪는다. 박성령(가명) 교사는 초인종을 한참 찾았다. 버튼이 떨어져나간 초인종 구멍에 겨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초인종은 쇳소리를 냈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렸다. 냄새가 훅 풍겼다. 해가 졌는데 방에는 전등도 켜져 있지 않았다. 문을 열어준 윤진(16·가명)은 이내 돌아가 방에 누웠다. 박 교사는 윤진의 담임이었다. 윤진이 학교에 나오지 않아 그 집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교복 때문일 것이라고 박 교사는 생각했다. 윤진은 후드 티셔츠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났었다. 지난 1년 동안 윤진의 몸무게는 20kg 이상 늘었다. 입학 때 산 교복이 맞지 않았다. 새 교복을 살 돈은 없었다. 윤진은 티셔츠를 입었다. 다른 학생들은 교복을 입었다. 그러다 윤진은 학교 나오는 일을 그만뒀다. 아무 연락 없이 결석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찾아간 윤진의 12평 집에는 과자 부스러기, 라면 봉지, 옷가지 등이 어질러져 있었다. 부엌 개수대는 라면, 김치 등 오물로 가득했다. 화장실 쓰레기통에는 휴지가 넘쳤다. 박 교사는 아무 말 없이 청소만 했다. 윤진은 문만 열어주고 아무 말 없이 다시 돌아가 누웠다. 그러다 박 교사에게 다가왔다. 냄비를 가리켰다. “이것도 좀 치워주세요.” 안에는 언제 끓였는지 모를 된장찌개가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윤진에겐 어머니도 있고 언니도 있다. 어머니는 일본에 있다. 홀로 자매를 키우다 1년 전 일본으로 떠났다.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만 남겼다. 연락은 잘 되지 않는다. 어디서 뭘 하는지 윤진은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인 언니는 좀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윤진은 밥 대신 과자나 라면을 먹었다. 살이 쪘다. 문 밖에 나가는 일이 귀찮아졌다. 등교 시간이 돼도 혼자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눈을 감으면 일본에 가서 엄마를 만나는 꿈을 꿨다. 박 교사가 썩은 냄비를 설거지한 뒤에도 윤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2. 굶어가며 공부하다 모두가 무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법을 알지 못한다. 미영(17·가명)이는 밤늦도록 눕지 않는다. 인터넷을 한다. 미니홈피를 꾸미고 친구를 만난다. 인사도 건넨다. 다만 학교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안녕?” 수없이 연습했지만 누구한테도 이 말을 먼저 건네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면 그 소극적인 성격 좀 버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 말에 미영은 더 움츠러들었다.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인터넷은 다르다. 그곳에 가면 미영의 남자친구가 있다. 짝사랑하고 있다. 인사한 적은 없다. 말도 못 건넸다. 그 남학생의 미니홈피를 구경하며 미영은 새벽을 맞는다. “몰라요.” 기자가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미영이 말했다. “몰라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을 때, 미영이 말했다. 모른다고 말할 때 미영은 아기처럼 옹알대며 작게 말한다. “어떤 직업이 또 있는지 모르겠어요.” 미영이 알고 있는 직업은 미싱사뿐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미싱일을 했다. 미영도 미싱일을 해봤다. 지난 겨울방학 때, ‘미싱 보조’로 일했다. 아버지가 일하는 직물 공장이었다. 공장에는 창문이 없었다. 직물에선 먼지가 계속 나왔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손은 금세 더러워졌다. 손을 씻을 곳은 없었다. 일주일 만에 눈병이 났다. 그만뒀다. “넌 공장일에 잘 맞지 않는다.” 아버지가 말했다. 미영의 언니는 얼마 전 카드회사 대리점에 취직해 월급을 받았다. 세금을 떼고 109만원을 받았다. “큰돈을 버는 언니가 부러워요.” 미영이 말했다. 미영은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00만원 넘게 버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만 확실하다. 돈을 벌면 제 몸을 치장하는 데 쓸 생각이다. 옷도 사고 구두도 살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미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등학생 미영은 손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랐다. 그 손톱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돈을 벌어 몸을 치장하는 게 꿈이지만, 미영은 세수하고 머리 감는 일이 귀찮다. 100만원 넘게 벌던 언니는 집을 나갔다. “언니… 언제 와?” 미영은 방에 누워 언니에게 문자를 보낸다. 답은 없다.
딸 고교 졸업하면 ‘한부모’ 박탈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좋을 것이다. 목표가 있으면 더 열심히 살 수 있다. 그러나 눈치를 봐야 한다. 미숙(17·가명)은 어머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묻자, 미숙도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이다. 미숙은 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입시 미술’ 과목을 듣고 있다. 미술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했다. 수업료 10만원을 대신 내주기로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미숙은 그림을 잘 그린다. 미술 선생님이 그걸 알아보고 미대 진학을 권했다. 그러나 방과후 수업은 모녀에게 고통이었다. 수업료는 해결했지만, 재료비가 필요했다. 22만원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큰이모에게 빚을 졌다. 빚을 냈는데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미숙은 저녁을 굶고 수업을 듣는다. ‘입시 미술’ 수업은 밤 9시에 끝난다. 학교 저녁 급식을 먹으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 밤 10시, 미숙은 빈속으로 집에 돌아온다. 허겁지겁 냉장고를 뒤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돈 벌어서 나를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어머니는 힘이 없다. 어머니는 얼마 전 암수술을 받았다. 아버지와는 이혼했다. 어머니 눈치를 보다가 미숙이 말했다. “어차피 대학도 못 갈 텐데 이제 입시 미술은 그만두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미숙은 여전히 ‘입시 미술’ 수업을 듣는다. 배고픔을 참으며 듣는다. 냉정한 것은 미숙의 어머니가 아니다. 제도다. 외동딸인 미숙은 어머니와 산다. ‘한부모 가족’이다. 그래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현행법상 ‘한부모 가족’ 지원을 받으려면 편부모 아래 미성년 자녀가 있어야 한다. 미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미숙의 가족은 더 이상 ‘한부모 가족’이 아니다.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도, 어머니의 자활근로도 한부모 가족이기에 가능했다. 이제 자격이 박탈되면 영구임대아파트 보증금마저 거침없이 오를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 미숙이가 그 돈을 벌어야 한다.
3. 길을 잃다
“학교라도 고급스럽게 지어야 해요.” 한승원(가명) 교사가 말했다. 한 교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다. “아이들이 밥 먹으러 학교에 와요. 그러니 급식이 맛있을수록 아이들이 학교에 더 애착을 느끼겠죠. 아이들은 놀기 위해서도 학교에 와요. 수업이 끝나면 달리 할 일이 없거든요. 방과후 수업에서 여러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더 좋겠죠.” 그러나 지난해부터 교육 방침이 바뀌고 있다. “방과후 수업을 교과 학습 위주로 변경하라”는 게 교육부와 교육청의 지침이다. 성적을 끌어올리라는 이야기다. 학업성취도 평가의 후폭풍이 이곳에도 불어닥쳤다. 밥 먹고 어울려 놀고 다른 세상도 경험할 수 있었던 학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국·영·수 중심의 방과후 교실에서 영구임대아파트 아이들은 이내 지칠 것이다. 한 교사도 힘이 조금 빠졌다. 그는 서울 강남의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에서 일해봤다. 그곳 학생들은 깍듯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학교와 교사를 업신여겼다. 학원과 강사를 더 신뢰했다. 이곳에선 다르다. 집과 부모보다 학교와 교사에게 더 기댄다. 교사가 노력한 만큼 학생들이 달라진다. “강남 아이들은 교사를 가장 우스운 직업으로 봐요. 부모 직업이 대단하니까요. 반면 이곳 아이들은 교사를 최고의 직업으로 치죠. 부모가 무직자이거나 일용직 노동자이거든요.” 한국 정치의 변화는 이곳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일상의 목표를 새로 전달할 여지를 잃어가고 있다. 남은 길은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10대에게 그것은 벅찬 일이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승혜(18·가명)는 혼자 힘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을 가거나 실용음악학과가 있는 2년제 대학을 가려 한다. 승혜는 수녀원에서 지낸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이다. 수녀님들이 노래 학원비도 대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수녀원에 돌아와야 하지만, “지금껏 살면서 요즘이 가장 편한 시간”이라고 승혜는 생각한다. “과대망상이 있으시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의사가 승혜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치료를 거절했다. “하느님을 믿으니까 괜찮아요.” 어머니는 새벽 기도를 가자며 승혜와 승혜 오빠를 깨웠다. 오빠는 그게 싫어 일찌감치 가출했다. 어머니는 화가 나면 승혜를 무릎 꿇게 했다. 3시간은 기본이고 한나절 동안 벌을 세웠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딸의 끼니도 챙겨주지 않았다. 단지 안 복지관에 가면 토할 때까지 음식을 먹었다.
그래도 “엄마한테 미안하다”
고등학생이 되어 승혜도 집을 나왔다. 스스로 아동학대센터를 찾아갔다. 이후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승혜의 기억 속에 있는 첫 집은 모자원이다. 어머니 혼자 남매를 데리고 모자원에서 살았다. “모자원 앞에 철길이 있었다”고 승혜는 말했다. 모자원에서 영구임대아파트로, 아동학대센터에서 수녀원으로 옮겨다닌 19살 승혜는 “그래도 내가 도움받은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이만큼 지내게 된 것도 주변의 도움 덕택이라 생각한다. “엄마를 버리고 온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도 한다. 언젠가 가수가 되어 돈을 벌면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고에서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준비한 또래들과는 경쟁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다. 1년 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승혜는 보육원에서 나와야 한다. 보육원은 18살 미만의 미성년만 지낼 수 있다. 올해가 지나면 승혜가 어디에서 지낼지 알 수가 없다.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생활비는 승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 복잡한 문제를 승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노력할 뿐이다. 승혜가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는 노래가 있다.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승혜는 말했다. 실기시험을 치르게 되면 그 노래를 부를 것이다. “잠시 길을 잃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어/ 난 아이인가봐 그저 온종일 울기만 하잖아/ 네가 없인 무엇도 못해/ 어리광 부리며 헤맬 뿐이야/잠시 길을 잃은 거야/ 다시 길을 찾을 거야.”(015B의 <잠시 길을 잃다>) *다음호에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에필로그] 정규직 가장 중심의 파편적 사회보장 체계, 비정규 시대에 맥을 못 추네 | ||||||||||||||||||||||||
빈곤 문제는 복합적이다. 이번 <한겨레21> 탐사기획에서 볼 수 있듯 주택, 의료, 노령, 장애, 교육, 가족구조, 지역적 고립과 낙인, 공공보장 체계와의 괴리, 심지어 비극적 사망 등 다양한 요소가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빈곤에 얽혀 있다. 그런데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빈곤 상황에 비해 우리의 빈곤 대책은 역동적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통적 복지 모형 안 통하는 ‘신사회위험’
소득·주거·의료 등 각 영역에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은 왜 이토록 빈약한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본격적 역사가 짧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외국 원조와 수용시설을 중심으로 한 긴급구호가 복지의 거의 전부였다. 이후 개발독재 시대에 산업화와 관련된 사회보험제도 등이 도입됐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제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빈곤 탈피는 각자의 근면성에 기초해 개발성장 과정에 동참했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됐다. 분배 문제나 사회적 안전망은 극히 잔여적 형태로 ‘일부 긍휼에 의한 자선 패러다임’을 유지했다. 당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회복지제도들은 복지가 가장 필요한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공무원·군인 등 정부기관 구성원이나 대기업 종사자 등 정부의 핵심 대리인에게 주로 적용됐다.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주택·보건의료 등 ‘집합적 소비재’에 대한 공공체계가 구축됐고, 지역사회 복지체계도 등장했다. 빈곤지역에 대한 사회복지관 설립, 영구임대아파트의 건립 등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참여정부는 사회복지 환경 변화를 감안한 새로운 프로그램의 구축을 시도했다. 근로빈곤층에 초점을 두거나 사회서비스 프로그램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펼친 것은 이런 시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와 불분명하게 혼합되면서 적절한 성과에 이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로드맵’ 수준에 머물렀다. 더구나 국민의 정부 시기에 추진된 전통적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혼란을 가중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시장 논리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빈곤 정책에서도 근로 연계가 강조된다. 빈곤층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서비스 선진화 계획’ 등을 살펴보면 기존의 공공서비스를 시장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홍보하지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자원을 실질적으로 확대 투입하지는 않는다. 사회복지 분야의 효율화가 주된 관심이다.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경쟁 논리를 폄하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빈곤 문제에 대처하려면 적절한 수준의 공공성이 필요하다.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영역에 전체적으로 시장 논리를 결합시키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근로 의욕이 높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주민 사례를 살펴봐도, 게으르고 일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적절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거나 일할 수 없는 제약조건에 갇힌 경우가 많다. 이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일하게 하여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우선 열심히 일해라. 일하면 지원해주겠다’는 현 정부의 입장으로는 일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우리 사회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복지의 역사를 단순화해 표현한다면 세 가지 국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사적 부양’의 시기로 전통적 전근대화 시기에 사적 관계망을 통해 빈곤층에 대응하던 국면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부양’으로 근대적 산업사회의 시기다.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소득을 담보하고 이 과정에서 빈곤에 빠지는 실업자와 취약층에 대해서는 국가가 사회보험 등 사회보장 체계를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던 복지국가 단계다. 세 번째는 ‘탈부양’의 단계다.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의 만연, 고령사회 등의 맥락에서 더 이상 정규직 가구부양자 중심의 사회보험이 전 국민적 사회보장 체계로 활용되기 어려워진 시기다. 이 때문에 빈곤층을 ‘부양’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를 촉진하는 방법이 활용된다. 사회서비스 등을 확대해 사회적 배제를 막으려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세 번째 ‘탈부양’ 시기의 요인에 의한 빈곤이 만연하고 있다. 근로자 가운데 빈곤자, 그리고 빈곤자 가운데 근로자 비율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가구주의 노동이 가구 전체의 빈곤을 막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빈곤 상황은 ‘구사회위험’에 의한 빈곤과 ‘신사회위험’에 의한 빈곤 문제가 중첩돼 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체계는 두 번째 ‘사회적 부양’의 단계도 완결하지 못했다. 첫 번째 사적 부양 단계의 비공식적 원조나 자선적 관점도 아직 팽배해 있다. 빈곤 문제의 진전에 비해 사회복지 발전이 지체돼 있는 것이다. 자칫 우리나라의 빈곤층은 봉건적 계급사회에서와 같이 세습적 정체와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격리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 통합성 유지는 심각한 과제다.
영구임대의 슬럼화는 정책 고립 탓
문제를 덮어두는 것은 아무런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만연한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펼쳐 보이고 공론화해야 한다. 이번 <한겨레21>의 기획은 우리 사회 영구임대아파트의 상황이 탈빈곤 과정이 아니라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절망의 과정임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문제에 대응하려면 공공성 확보에 투입되는 자원의 양을 늘려야 한다. 지체된 저발달의 복지체계를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 기본적 공공성의 확충은 전제조건이다.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영역별로 분리된 접근이 아니라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복합적 고립과 빈곤이 만연한 상황에서 지금의 정부 정책과 같은 파편적이고 분리된 프로그램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영구임대주택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거복지 프로그램이었음에도 다른 사회보장 체계와 연결되지 못해 슬럼과 낙인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 |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에필로그] 가난한 노인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하고 아픈 사람이 건강보험 혜택 못 받는 사회… 무기력한 한국의 복지제도 | ||||||||||||||||||||||||||||||
“지들 먹고살기 바쁜데, 부모를 챙기겠어? 나는 기대도 안 해.” 자식들한테 용돈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황기백(73·가명)씨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누가 봐도 가난한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자녀 가운데 한두 명은 돈을 번다. 다만 비정규직이다.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로 단칸방을 얻어 사는 경우엔 왕래조차 없다. 왜 자녀는 부모를 돌보지 않는가? 왜 국가는 이들을 돕지 않는가?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한국 복지정책의 대표 격이다. 올해로 제도 도입 10년이 됐다. 사람들은 이 제도가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 혜택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노인의 경우, 기초생활보장제 혜택을 받으려면 자녀가 사실상 돈을 벌지 않아야 한다. 부양의무자 가구의 최저생계비와 피부양자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더해 그 액수의 130% 이상을 부양의무자 가구가 번다면, 피부양자 가구는 기초생활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법에 정해져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자녀가 돈 버는 순간 수급권 박탈
가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70살 할머니가 혼자 산다. 결혼한 아들은 따로 살고 있다. 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4명이 한 식구다. 노인 혼자 사는 1인 가구와 아들 식구 4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더하면 월 172만8895원(2008년 기준)이다. 그 액수의 130%는 224만7563원이다. 아들이 한 달에 224만원 이상을 벌면, 혼자 사는 노모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될 수 없다. 노모를 봉양할 만큼 아들이 충분히 벌고 있다고 한국 정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월 224만원을 버는 아들은 노모에게 적어도 월 46만원을 용돈으로 드려야 한다. 1인 최저생계비가 46만3047원(2008년 기준)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나머지 178만원으로 아내 및 두 자녀와 함께 한 달을 생활해야 한다. 만일 아내의 부모 역시 가난하다면 4인 가구의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 현행 제도는 노인 빈곤을 장년 빈곤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들 가족만 따로 떼어놓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소득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약 126만원) 이하로 내려가면 그 부족분만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자산 평가 등을 거쳐야 하므로 수월치 않다. 전세금·차량·예금 등 ‘자산’을 갖고 있다면, 정부는 이를 소득으로 환산한다. 예컨대 6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산다면, ‘소득환산율’ 기준에 따라 월 25만원 정도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평가해 현금소득과 합산한다. 차량·예금 등도 마찬가지다. 전셋집을 월세방으로 옮기고, 생계용 차량을 처분하고, 적금을 헐어 어딘가에 탕진해야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벽에 가로막힌 ‘사각지대의 빈곤층’이 많다.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는 가구소득 통계를 바탕으로 그 수가 “200만 가구, 410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김수현 세종대 교수는 “2005년 현재 근로빈곤층 227만6천여 명 가운데 63%인 144만4천여 명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추정한 근로빈곤층 144만여 명에 그에 딸린 식구 수를 더하면, 이 교수의 추정치와 거의 일치한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우산 아래 들어오면 얼마나 받게 될까? 2008년 보건복지부 기준에 따르면, 소득이 전혀 없다고 가정할 때 4인 가족이 84만1312원의 ‘생계급여’와 21만8314원의 ‘주거급여’ 등 105만원 정도를 받는다.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다면 그만큼 제하고 남는 돈을 받는다. 복지시설 등에서 생활한다면 주거급여도 삭감된다.
68살 장애 노모 봉양, 잔인한 수렁
2009년 2월 현재 약 86만3390가구, 146만830명(전체 인구의 2.9%)이 기초생활보장제 혜택을 받고 있다. ‘400만 명의 사각지대 빈곤층’에 비해 운이 좋은 경우다. 그러나 한국 사회 평균치와 비교하면 그렇게 평가할 수 없다. 2008년 한국 4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98만원이다. 4인 가구 최저생계비 105만원은 극빈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는 “현재 기초생활급여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생존을 유지하게 지원하는 것일 뿐”이라며 “생존 유지만으로는 빈곤에서 탈출하는 활동을 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참여가 가능한 수준과 내용으로 소득보장을 구축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사회적 부담을 더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영구임대아파트에서 68살 노모를 모시고 사는 김형성(38·가명)씨에 이르러 이 상황은 더 나빠진다. 노모는 지적·정신 장애 2급을 받았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나라가 인정한 장애인이지만, 노모가 간병인 서비스를 받으려면 하루 3만원을 내야 한다. 주말을 빼더라도 한달이면 60만원이다. 월 150만원을 버는 김씨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노모를 보살피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회사를 그만두면 노모를 보살필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씨의 형이 돈을 번다는 이유로 김씨는 기초생활보장조차 받지 못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김씨는 잔인한 수렁에 빠져 있었다.
2006년 현재, 한국인 전체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 계층 비율)은 16.5%이다. 중위소득이란 소득수준이 전체의 한가운데 있는 가구 소득을 말한다.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의 2인 이상 가구 중위소득은 월 304만원 정도다. 따라서 16.5%의 빈곤율 수치는 전체 가구의 16.5%가 150만원 미만을 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 그런데 장애인 가구의 빈곤율은 더하다. 34.6%에 이른다. 전체 빈곤율의 2배가 넘는다. 현행 장애연금은 국민연금 가입자에 한해 지급된다. 가입 중에 발생한 질병 또는 부상으로 장애인이 된 경우에 한해 지급된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즉 비정규직이었거나 아예 직업이 없었다면 장애연금을 못 받는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면 월 2만~7만원 정도를 ‘장애수당’ 으로 받는 길이 있긴 하다. 앞에서 언급한 복잡한 심사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생활비가 더 필요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7년 조사를 보면, 지적·정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려면 교통비·의료비·간병비 등으로 월 105만9607원이 더 든다. 이 때문에 장애인 식구가 있는 빈곤층은 더 깊은 가난을 겪는다. 누군가 돈을 벌어도 장애인 몫의 비용을 제하면 나머지 식구의 생활은 더 열악해진다. 나라로부터 장애수당을 받으려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가족 가운데 누구도 많은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장애수당을 받는다 해도 기초생계급여에 월 최고 7만원의 돈을 추가로 얹어줄 뿐이다. 한국의 복지제도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의 편이 아니다.
꼬박꼬박 연금이 나온다면 이런 문제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한국에도 국민연금제도가 있긴 하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함께 한국 정부가 마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안전망이다. 2009년 현재 경제활동인구의 93%가 국민연금 또는 공무원·군인연금 등에 가입해 있다. 얼핏 보면 모든 국민이 노후보장을 받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선 이 제도는 1999년에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입해야 은퇴 이후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현재 60대 이상 노인 세대의 대부분은 국민연금 혜택자가 아니다. 한창 경제활동 중인 현재의 청장년층이라 해도 비정규직의 55%는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다. 98.8%의 가입률을 보이는 정규직과 뚜렷이 비교된다. 비정규직은 ‘저임금-해고-저임금’으로 이어지는 불안정 노동을 거듭한다.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입해야 하는 국민연금제의 특성상 앞으로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막내 사위 취직에 불안한 폐암 할머니
국민연금 문제는 여성 빈곤과 직결된다. 구직 활동을 포기한 ‘비경제활동인구’는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여성이다. 몇 달 전 남편을 여읜 김영희(55·가명)씨에게도 국민연금은 그림의 떡이다. 그는 30대 딸이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했다. 남편이 장애인이어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지만, 남편이 숨졌으니 조만간 아파트를 떠나야 할 상황이다. 장애인 남편은 제대로 일한 적이 없으므로 연금 수령 자격이 없다. 아내 김씨는 가끔 식당일을 하여 돈을 벌었으므로 역시 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다. 만일 여성 비정규직인 김씨에게도 국민연금의 혜택이 돌아온다면, 김씨네 식구의 근심도 조금 줄어들 것이다. 다만 국민연금 가입자라 해서 빈곤의 덫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보험료를 못 내는 사람이 많다. 이태수 교수는 “전체 가입자의 27%에 이르는 468만 명이 실직 등으로 인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6개월 이상 미납자는 250만 명, 25개월 이상 미납자는 100만 명이다. 다시 취업해 남은 보험료를 채우지 못한다면, 이들 역시 국민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다. 남성 정규직 중심으로 설계된 국민연금 제도가 보편적 사회보험 역할을 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국민연금제 모두 가난 탈출에 별 효력이 없다면, 남는 것은 국민건강보험제도다. 한국 복지제도 가운데 그나마 조기 정착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건 중산층에게만 진실이다. 빈곤층이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 폐암에 걸린 박금자(70·가명)씨는 한 달치 30개 알약을 먹는 데 180만원을 써야 했다. 딸들이 빚더미에 올랐다. 뒤늦게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부여되는 의료 혜택을 받아 약값을 낮췄지만, 막내 사위가 취직하면서 다시 위기가 닥쳤다. 기초생활수급권을 박탈하겠다고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되면 다시 100만원이 넘는 약값을 내야 한다. 그 이름은 ‘국민’건강보험제도지만, 적어도 박씨는 그 제도가 보호하는 국민이 아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치료비의 상당 부분을 환자에게 떠넘긴다. 2007년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64.3% 수준이다. 나머지는 당사자가 부담한다. 유럽 선진국의 보장성 수준이 85~90%인 것과 비교된다. 본인 부담금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세 번째로 높다. 가난하면 중대 질환에 걸려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김철웅 충남대 교수가 2005년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상위 20% 소득계층보다 식도암은 3.3배, 간암은 2.3배 더 많이 발생했다. 발병 이후 사망에 이르는 비율인 ‘치명률’에서는 하위 20% 소득계층이 상위 20% 소득계층보다 위암은 2.3배, 유방암은 2.1배 더 높게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월소득 100만원 이하 가구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46.5%. 300만원 이상 가구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19.1%였다. 가난할수록 더 많이 병에 걸리고 더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다. 박형근 제주대 교수는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5% 수준까지 높인다면 암·중풍·심장병 등 중증 질환까지 무상의료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질병·사망의 불평등’을 막지 못한다. 아무리 아파도 비바람을 막을 집이 있다면 최악은 면할 것이다.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명령을 받은 김종택(62·가명)씨는 최악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김씨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4천여 세대의 20%가 임대료·관리비를 체납하고 있다. 만나는 주민마다 “제발 관리비를 낮춰 달라”고 호소했다. 공공재정 부족 등이 주된 이유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오려고 대기중인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배경을 이룬다. 김씨가 나가도 금새 들어올 사람이 수두룩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만한 집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발표된 서울시 뉴타운 개발계획을 보면, 2010년 말까지 주택 13만6346호가 사라지고, 6만7134호가 새로 지어진다. 단순 증감만 따져도 7만여 주택이 그냥 사라진다. 새로 지은 주택은 넓고 비싸다. 전용면적 60㎡ 이하인 주택 비율은 뉴타운 사업 전 63%에서 30%로 줄어든다. 사업 이전 83%를 차지한 전세 4천만원 미만 주택은 사업 이후 한 채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전체의 13%인 206만여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은 1%, 영국은 2.4%, 일본은 4.4%만이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다. 가난한 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공공임대주택이다. 2009년 현재 한국의 공공임대주택은 전체 주택 재고 가운데 3~4% 수준이다. 영구임대주택은 2%에 불과하다. 선진국에선 공공주택 비율이 20~30%에 이른다.
과중채무자는 300만 명, 원인은 생활비
국가가 돌보지 않으므로 빚을 질 수밖에 없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간호하느라 1억원의 빚을 진 정영숙(53·가명)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정씨는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다시 빚을 냈다. 갚을 길은 없다. 2005년 현재, 과중채무자는 300만 명에 이른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과중채무 원인으로 생활비를 꼽은 경우가 29.3%였다. 가난한 사람은 정상적인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으므로, 필요한 돈을 카드로 돌려막거나 사채로 메운다. 이들이 스스로 구제할 유일한 방법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이런 제도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지만, 알게 된다 해도 다른 문제가 있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를 보면, 파산신청자의 70%가 변호사 등 법률서비스 기관에 신청 대행료를 냈다. 평균 비용은 150만원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갚을 길 없는 빚을 져도 파산신청할 비용이 없어 구제받지 못한다. 기초생활보장제, 국민연금제, 국민건강보험제 등을 축으로 삼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가난의 현장에서 무력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우산이다. 남기철 교수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빈곤을 예방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소득보장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수 교수도 “직업·소득·성·혼인 여부 등에 상관없이 일정 연령이 되면 일정 금액을 정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서구 대부분의 나라가 이 제도를 택하고 있다. 기초연금제는 현행 기초생활보장제의 사각지대 대부분을 메워줄 것이다. 여기에 경제활동인구 은퇴 이후를 보장하는 현행 국민연금제를 덧붙인다면 빈곤층의 근로 의욕까지 높일 수 있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모든 사람이 기초생활을 보장받고, 일을 한 사람은 추가 급여를 받는 방식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은 ‘사회보호’ 분야의 재정지출이 9.7%에 불과하다. 독일(46.6%), 스웨덴(42.5%), 프랑스(39.3%) 등과 비교된다. 심지어 미국(19.5%)조차 한국보다 낫다.
“기초연금 등 소득보장제 도입 시급”
나라의 예산 구조를 단박에 바꾸는 일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장차 그런 일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코 앞에 닥친 하루를 살아내느라 고단하다. 당장 돈을 줄 수 없다면 마음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돈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은 지금 당장 꺼내어 표현하면 된다. 성인의 경우엔 복지관, 청소년의 경우엔 학교가 그런 마당이 될 수 있다. 복지관에는 사회복지사가 있고, 학교에는 교사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일상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한사코 방에서만 지내며 게임으로 날을 지새는 이영호(23·가명)씨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복지사가 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121가구를 대상으로 한 이번 방문조사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이 여기에 있다. 응답자의 37.2%가 ‘어떤 복지시설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33.9%가 ‘복지시설에 관심없다·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들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구역별로 사회복지관이 있다. 그러나 주민 가운데 누구도 사회복지관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복지사와 마주 앉아 상담해본 기억이 있는 주민도 거의 없었다. 복지관은 구청의 예산을 받아 주민을 상대로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복지사들은 담당별로 주민을 상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걸까? 바로 옆 단지의 복지관에서 일하는 김영주(가명) 사회복지사는 혼자서 1700여 가구의 모든 중·고등학생을 담당한다.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을 모으고 방문상담도 한다. 그는 자기 일에 열성인 복지사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가족 구성원과 상의해야 하고, 피상담자의 학업·숙식·취미·진로 등을 모두 보살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김 복지사는 말했다. 사회복지사의 낮은 임금도 문제다. 대부분 월 15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직이 잦다. 담당할 가구가 많으므로 보통 2년은 지나야 주민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데, 자꾸 복지사가 바뀐다. 실태 파악에 시간이 걸리고, 주민들은 자신의 형편을 몰라주는 복지관을 찾지 않게 된다. 더 많은 복지사를 채용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복지관 예산이 늘어나야 한다. 복지관은 구청에서 예산을 받아 집행한다. 구청 예산은 세금에서 나온다. 마음을 주는 일이 다시 돈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청소년은 이런 상담이 더욱 절실하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동네 아이들을 괴롭히다 끝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형진(16·가명)이의 진짜 문제는 ‘마음의 병’에 있다. 부모에게 학대받고 버림받은 상처가 사춘기를 사납게 할퀸 것이다. 내버려두면 학교와 사회를 등진다. 전국적으로 1년에 6만~7만 명의 초·중·고생들이 자퇴하거나 퇴학당한다. 그 대부분이 빈곤층 자녀다. 그러나 초·중등학교에 배속된 상담교사의 대부분이 계약직이어서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사귀는 게 쉽지 않다. 다른 교사들은 입시 교육에 전념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선 더욱 그렇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은 옛말이다. 인근 중학교에 근무하는 한승원(가명) 교사는 “요즘엔 중학교 성적이 중위권은 돼야 실업계고에 진학할 수 있고, 하위권은 대학 진학 능력이 없어도 인문계고에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내놓는 청년실업 대책도 대부분 대졸자에 초점을 둔 ‘인턴 제도’이므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다. 학교 밖에서 진로를 준비하는 ‘청소년 직업 자활센터’ 등이 유일한 대안인데, 이 또한 예산 문제와 부딪힌다.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가난한 이들의 말벗이 되는 일은 공공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 확충과 연결된다. 전병유 한신대 교수는 “공공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만들고 여기에 저임금·고용불안에 노출된 근로빈곤층을 수용하는 노동시장 구조의 개선”을 주문한다. 고용과 복지를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다. 2003년 현재 OECD 국가의 사회서비스 부문 고용 비중을 보면 한국은 12.6%로 최하위 수준이다. OECD 평균은 21.7%다. 노르웨이(34.2%), 덴마크(31.3%), 핀란드(27.3%) 등과는 더 차이가 난다. 이들 나라는 공공재정을 투입해 사회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만들고 이들이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선순환 구조를 갖고 있다.
빈곤 대물림 끊을 ‘사람’을 투입하라
돈을 주는 게 싫으면 사람을 주면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런 배려와 지혜가 없는 나라에 태어난 죄로 한국의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그들을 만나면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삶에 과연 인간의 존엄이 남아 있나. 그것을 외면하고도 우리 삶은 과연 존엄한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참고 문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동산 개발>(안드레 아우버한트 외·한울),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이상이·밈), <한국의 가난>(김수현 외·한울), <한국 사회의 신빈곤>(한국도시연구소·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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