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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 문화건강족의 걷기 본능

醉月 2010. 5. 18. 09:01
‘호모 워커스’의 출현
걷기 본능 회복 신인류 문화건강족 … 걷기, 등산 제치고 생활체육 1위로 등극

태초에 인간이 있고, 길이 있었다. 영장류가 ‘인류’로 특정된 시점은 그들이 창조적 사고를 하며 직립보행을 하는 순간이었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로 불리는 영장류의 출현, 즉 ‘생각하며 꼿꼿이 걷는 존재’의 탄생이 인류의 시작이었다. 생각하는 인류의 출현 이후 효율적인 이동을 보장하는 단거리 공간에는 절로 길이 만들어졌다. 진화가 거듭되면서 인간은 스스로 길을 만들어나갔다. 역사의 발전에 따라, 시대의 필요에 따라 버리고 새로 만드는 일이 되풀이됐다. 생존과 진화를 위한 길, 인간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 수십km를 걷고 또 걸었다.

걷기는 인간의 대표적 이동수단이다. 인간의 두 다리와 반복된 걷기를 통해 만들어진 길은 스스로 문명을 만들고, 그것을 서로 전파했다. 실크로드, 누들로드, 페이퍼로드…. 걸음을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우마(牛馬)뿐. ‘생각하며 걷는 존재’들은 길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시장을 만들었다. 많이 걷는 자가 더 큰 부를 얻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길을 선점해야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제국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알렉산더 동방원정대의 도보 이동거리는 무려 3200km에 달했다.

 

인간의 기억에서 멀어졌던 걷기

길은 이처럼 생존과 쟁탈의 터전일 뿐 아니라 문화의 본거지였다. 사연 없는 사람이 없듯, 그들이 걸어 다닌 길 곳곳에는 갖은 이야기가 별처럼 숨어 있다. 비록 길은 사라져도 길에 뿌려진 수많은 눈물과 사연은 설화로, 전설로, 신화로, 문학으로 살아남았다. 길의 문화는 곧 그 지역의 인문지리학적 특성을 구성했다. 이렇듯 자연과 인간은 길 위에서 하나가 됐고, 인간은 자연의 거대함에 순응했다. 오를 수 없는 절벽이 나오면 길은 순순히 산을 돌아갔다. 장삼이사는 권력층이 다니는 큰길을 피해 눈에 띄지 않는 숲 속 길을 개척했다. 오솔길, 둘레길, 모로길…. 그 길 주변에는 더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숲과 목마름을 달래줄 물줄기가 있었다.

그렇게 길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소통 공간이자 문명과 문화의 전파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걷기와 자연의 길은 20세기에 들어 ‘기계 말’인 자동차와 콘크리트길, 아스팔트길이 출현하면서 인간의 기억에서 점점 멀어졌다. 급기야 인간은 자신의 본령인 ‘생각하며 걷는 존재’임을 망각했다. 아스팔트가 나라의 모세혈관을 장악하고, 자동차가 불어나는 속도만큼 ‘걷는 인간’의 수는 줄어들었다. 계단은 엘리베이터와 케이블카로 대체됐다. 하루 평균 3만 보 이상을 걷던 인간이 불과 100년 사이 하루 1000보를 겨우 걷는 존재로 바뀌었다. 문명이 고도화할수록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기를 포기했다. 아니, 거부했다. ‘시간이 돈’인 세상에서 걷기는 가난뱅이의 전유물이 됐다. 그리고 불러오는 뱃살은 부의 상징이 됐다.

 

걷기 본능을 잃어버린 인간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피둥피둥 살이 찐다. 단단했던 근육은 지방으로 변하고 머리에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다. 자연으로부터의 격리로 삶의 의미를 잃었다. 인류는 고혈압·당뇨병·고지혈증·동맥경화·우울증 등 온갖 질환이 엄습해 자신의 목숨 줄을 옥죄자, 그제야 ‘걷기 본능’에 주목했다. 돈을 벌 만큼 번 선진국 중산층은 서서히 육체적·정신적 건강이 시간보다, 돈보다 중요하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이른바 ‘웰빙(well-being·참살이)’ 바람이 불어닥친 것. 그것은 하나의 조류가 아닌, 인간 속성으로의 복귀 선언이자 자연과의 새로운 조우를 의미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웰빙 걷기 열풍

하지만 1990년대 인간에게 걷기 열망을 되살려낸 불씨는 정작 건강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구원’과 ‘극기’의 차원에서 걷기 시작했다.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정신 건강을 되찾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종교적, 철학적 자아 찾기’에서 비롯됐다. 대표적인 길이 유럽의 산티아고 순례길(800km)이고, 한국의 국토종단 순례길이다. 뙤약볕 아래서 수백km를 걷는 동안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신과 신(神)을 재발견한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쏟아지는 경험을 한다.

   

현생 인류 호모사피엔스의 조상인 호모에렉투스. 직립보행은 인류의 본능이자 속성이다.

199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테마가 있는 길과, 배우면서 걷기에 대한 싹이 자라나고 있었다. 옛길에 대한 탐구 열기가 바로 그것. 일단의 지리학자와 고지도 전문가인 고(故) 이우영 선생이 조선의 옛길을 지리학적으로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역사지리학이 발전하지 못한 한국에서 조선의 8대로(영남대로, 호남대로, 관동대로 등)를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관련 문헌만으로 복원하는 작업은 엄청난 고난이 뒤따랐다.

이들의 작업은 이후 옛길 걷기 전문가인 신정일 씨와 언론인들이 실제 그 길을 걷고 길에 얽힌 역사와 사연, 전설, 신화 등을 묶어 소개함으로써 대중에게 알려졌다.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아예 사라지거나, 보존돼 있다 해도 옛길인 줄 모르던 길에 역사와 구전문학이라는 테마를 불어넣음으로써 대중에게 생각하고 느끼면서 걷는 재미를 안겨주었다. 사실 매년 20여만 명이 찾는다는 산티아고 순례길도 1980년대까지는 연간 수천 명의 순례자만 찾는 단순한 옛길에 불과했다. 이 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80여 개국에 6000만 부가 팔려나간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순례자’ 덕분이었다.

2000년대 들어 길 관련 저작과 기사에 자극받아 온·오프라인 공간에서 ‘옛길 걷기 모임’이 잇따라 결성됐다. 이들은 직접 옛길을 찾아 나섰고, 자신들이 걸은 길에 대한 정보와 감상을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다. 뒤이어 각 지방자치단체가 자기 지역의 옛길 복원에 발 벗고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뒤늦게 이에 동참했다.

걷기 열풍은 웰빙 문화가 더해지면서 불이 붙었다. 2000년대 후반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가 개막되면서 사람들은 생각하고 느끼는 재미에 더해 몸이 건강해지는 걷기를 원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제주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이다. 걸으면서 그 길을 걸어간 선조의 체취도 맡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느끼면서 건강도 도모하는 일석삼조의 길 걷기가 시작된 것. 테마가 있는 웰빙 걷기가 인기를 끌자 산림청과 환경부 등 산림 관리 주체들은 너도나도 숲길과 생태체험 길의 조성에 들어갔다.

이 때문일까. 지난 수십 년간 건강관리를 위한 운동의 대명사였던 등산과 조깅은 그 자리를 걷기에 내줬다.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국민생활체육활동 참여 실태조사’에 따르면 생활체육 참여순위 1위는 단연 걷기였다. 2위인 헬스(14.4%)와 3위인 등산(13.6%)보다 2배나 많은 30%의 사람이 건강관리 수단으로 걷기를 선택했다. 2003년 이래 꾸준히 3위권에 머물던 조깅은 5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

걷기가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은 별다른 준비 없이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친인간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과체중인 사람과 노인들은 등산과 조깅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고, 빠르게 걷는 것이 뛰는 것보다 지방분해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이제 누구나 아는 상식. 인간의 뼈는 모두 206개, 이 중 25%에 이르는 52개의 뼈가 양발에 있는데, 뛰거나 산을 오르내리는 등 심한 운동은 이 뼈를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뼈와 뼈를 잇는 무릎과 발의 관절들은 걸을 때보다 뛸 때 2배 이상의 충격을 받는다. 헉헉거리며 뛸 때 신체는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지만, 오래 걸으면 몸에 나쁜 지방을 끌어다 소모한다. 근육은 일절 손을 안 대고 지방만 연소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난치성 질환인 아토피 피부염을 비롯해 각종 질환의 치료와 전반적인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숲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숲길 걷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날로 늘고 있다. 산림청이 산을 찾는 사람의 등산 유형을 분석한 결과, 산 정상을 올라가는 사람(54.1%)과 산기슭의 숲길을 트레킹하는 사람(45.1%)이 비슷하게 나올 정도다. 숲길을 걷는 사람이 늘면서 등산(산 정상을 올라가는) 인구도 2010년 최초로 줄었다(산림청 ‘산림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보고서’).

   

호모 워커스, 서울 숲길을 말하다

이처럼 환경부, 산림청,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수산식품부, 각 지방자치단체, 관련 기관단체가 너도나도 걷기 좋은 길 조성에 나서는 것은 반갑지만 ‘길과 걷기’에 관한 정책을 아우르고 조율하며 통합, 홍보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가 없어 현장에서는 혼선을 빚고 있다. 길 조성 주체가 중복되고, 내 것이니 네 것이니 다투기도 하며, 상대방을 폄훼하는 현상까지 빚어지고 있다.

생각하고 느끼는 걷기를 통해 건강을 도모하는 신인류 문화건강족 ‘호모 워커스(walkers)’의 탄생에 발맞춰 ‘주간동아’는 올 한 해 전국에 산재한 걷기 좋은 길을 테마별, 지역별로 소개하기로 했다. 첫 작업으로 서울 도심의 숲길을 기자들이 직접 걸어보고 그 길에 담긴 사연을 글로 옮겼다. 서울에 수십 년 사는 사람도 그런 길이 있었는지 모를 아름다운 숲길을 만날 수 있다. 마음은 있는데 몸이 따라가지 않는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운동화를 꺼내 신고 집 앞 골목길부터 걷기 시작하자. 어쩌면 그 길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잃어버린 건강을 되찾을 수도 있다. 음미하고 걷는다면 우리 주위엔 산티아고 길보다, 제주 올레길보다 걷기에 더 좋은 길이 참으로 많다.

 

산림청 후원 ‘숲길 정책의 발전 방향’ 토론회
“숲길에 스토리를 심어라”


“비행기가 점에서 점으로, 버스나 기차는 선으로 가는 여행이라면 걷기는 입체여행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길에 담긴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숲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걷기 문화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선 길의 스토리 찾기가 가장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4월 16일 건국대 상허연구관에서 열린 ‘숲길 정책의 발전 방향’ 토론회에서 패널로 참가한 동아일보 김화성 전문기자(‘길 위에서 놀다’ 저자)는 “숲길의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까지 고민해야 할 때다. 길에 스토리를 심어줘야 한다. 숲에 있는 식물 하나하나에도 이야기를 붙여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신산행문화 정립을 위한 숲길정책’을 발표한 이미라 산림청 산림휴양등산과장은 “산림청이 꿈꾸는 숲길의 미래는 ‘집 앞에서 걸어서 백두대간까지’를 숲길로 만드는 것”이라며 “산림청은 체계적인 숲길 조성을 위한 중장기 계획(‘트레킹 숲길 네트워크’ 조성 계획) 아래 2016년까지 백두대간, DMZ 트레일을 근간으로 간선과 지선을 합쳐 총 4840km 숲길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과장은 “숲길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길을 살리는 개념으로 접근하겠다. 숲길 정책 수립과 집행에서 민·관 거버넌스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토론회 참가자들의 관심은 단연 ‘숲길의 스토리텔링’에 모아졌다. 사단법인 ‘나를 만나는 숲’ 한광용 사무처장은 “길은 선이 아닌 면, 공간의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길을 새로 만들고 이어붙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길 주변의 이야기를 서로 이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산티아고 길에 순례자가 모이는 이유도 길이 지니는 의미 때문이다. 길에는 걸으며 배우기, 걸으며 성찰하기, 걸으며 치유하기 등 다양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가슴 펴고 11자로 ‘뚜벅 뚜벅’ 제대로 걷는 3가지 비법
600개 근육과 200여 개 뼈 모두 사용, 걷기는 ‘만병통치약’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고백하건대 ‘걷기’엔 자신이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튼실한 하체 덕분에 ‘빨리 달리기’는 못해도 ‘오래 걷기’는 문제없었다. 걷는 자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세’를 중요시하는 살사댄스를 5년간 해오면서 걸을 때도 어깨나 허리, 무릎을 곧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기자의 걷는 모습을 본 한마음 재활·스포츠의학 클리닉 김창원 대표원장은 “잘못된 걸음걸이의 전형”이라고 지적했다.

“한쪽 어깨가 처진 채로 걷습니다. 이렇게 걸으면 몸의 불균형을 초래하죠. 특히 무거운 가방을 한쪽 어깨에만 메고 오래 걷는 건 좋지 않아요. 무엇보다 하이힐이 문제입니다. 뒤꿈치부터 땅에 대면서 걷는 게 올바른 자세인데, 하이힐을 신으면 발의 앞쪽만 계속 디디게 되죠.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면서 몸이 뒤로 젖혀짐에 따라 무릎이나 골반, 허리에 부담을 줍니다. 물론 발에도 좋지 않죠. 팔은 앞뒤가 아닌 옆으로 흔드는 편이군요. 전신거울을 보며 걷는 자세부터 고쳐야겠네요.”

걷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운동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별다른 준비 없이 할 수 있고, 큰 비용도 들어가지 않는다. 아름다운 자연을 둘러보며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이야기 나누면서 할 수 있다는 것도 걷기만의 장점이다.

건강한 몸을 만드는 데도 걷기는 무척 중요하다. 우선 걷기는 전신운동이다. 사람 몸을 이루는 600개 이상의 근육과 200여 개의 뼈가 모두 사용된다. 특히 하체를 단련해 무릎 주변의 근육과 관절을 튼튼하게 해준다. 뼈에 자극을 주면서 골다공증도 예방한다. 심폐기능을 향상시킴은 물론 체지방을 줄여 비만에도 좋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꾸준히 걸을 경우 대장암에 걸릴 확률을 50%, 유방암 확률을 20% 정도 낮추고, 파킨슨병의 진행도 늦춘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스트레스 해소, 정신적 안정과 숙면, 저혈압·고혈압·빈혈·당뇨 예방, 면역력 증강에도 효과가 있다. 또 걷기는 뇌를 젊게 한다. 철학자 칸트와 키르케고르는 걷기 마니아였고, 니체와 루소 역시 걷기 예찬론자였다.

하지만 이는 올바르게 걸었을 때의 이야기다. 기자처럼 올바르지 않은 자세로 걸으면 신체 기형과 질병을 불러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 있다. 누구나 걷지만, 모두 제대로 걷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3분의 2가 ‘팔자걸음’ 등 잘못된 걷기를 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제대로 걸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움말 주신 분 : 한마음 재활·스포츠의학 클리닉 김창원 대표 원장, 하늘스포츠의학연구소 이재현 책임연구원, 제일정형외과병원 신규철 병원장, 연세사랑병원 권세광 부원장, 강남을지병원 족부 센터 양기원 교수

 

1 걷기 전 체크리스트

“1.6km 걸어 체력부터 알아본다!”

걷기 전에 자신의 체력과 건강 상태부터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1.6km(400m 트랙 4바퀴)를 최대한 빨리 걸은 뒤, 걸린 시간을 체크해 아래 표에서 자신의 체력을 확인한다. 체력이 약한 경우 주 3회, 30분씩 걷기부터 시작한 뒤 서서히 늘린다. 고령자나 임산부, 질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혈액순환이 좋지 않은 겨울철엔 걷지 않는 것이 좋다.

본격적으로 걷기에 앞서 준비운동은 반드시 한다. 신발을 신기 전 발가락과 발목을 꼼꼼히 손으로 돌려주는 건 기본. 신발을 신은 뒤엔 제자리걸음 등으로 몸을 따뜻하게 해주고 발목과 무릎, 목과 팔, 허리, 다리 등을 중심으로 5~10분 스트레칭을 한다. 걷기를 마친 뒤에도 비슷한 방법으로 정리운동을 한다. 이는 걷기 후에 통증이 지속되거나 근육이 단축하는 것을 막아준다.

걷기 장소로는 어느 정도 걸었는지 알 수 있도록 거리 표시가 돼 있는 곳이 좋다. 시멘트나 대리석 바닥에서 걷는 것은 피하고 흙이나 나무, 공원 등지에 깔아놓은 푹신푹신한 바닥(탄성고무 재질)에서 걷는다. 시간은 일반적으로 오전 10시에서 12시, 오후 2시에서 5시 사이가 좋다.

   

신발은 매우 중요하다. ‘좋은 신발’은 신어서 편안하고, 올바른 걷기를 도와준다. 운동화를 신은 다음 엄지손가락으로 엄지발가락 끝을 눌러 신발 끝 부분이 눌러지는 정도를 살핀다. 이때 가볍게 눌러지는 정도가 적당하다. 너무 쑥 들어가면 신발이 크다는 뜻. 신발 밑창은 잘 닳지 않고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이 좋고, 발뒤꿈치를 감싸서 지탱해주는 ‘힐가드’가 있는 것을 선택한다. 신발 폭이 잘 맞는지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폭이 맞지 않으면 걸을 때 발과 신발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 발이 아픈 것은 물론 무지외반증(엄지발가락이 안쪽으로 휘는 것) 등이 생기기 쉽다. 토 브레이크(발가락 부분과 발등 사이에 굽혀지는 부분)가 부드럽게 휘는지도 확인한다. 또 통기성이 좋아야 오랜 시간 걸어도 물집이 생기지 않으며, 발바닥 부분의 쿠션이 좋아야 몸의 충격을 흡수해준다.

만약 아래와 같은 증상이 있으면 다음 사항을 유념해서 걸어야 한다. 자칫 잘못 걸으면, 걷기가 ‘약’이 아니라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비만

반드시 쿠션 기능이 있는 신발을 신는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은 금물, 흙이나 푹신푹신한 바닥에서 걷는다. 그래야 발에 가해지는 하중을 줄이면서 관절을 최대한 보호할 수 있다.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고 서서히 강도를 높이며 걷는다. 비만이면 체형 때문에 팔자걸음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되도록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만일 고도비만이라면 수중 워킹으로 체중을 조절한 뒤 걷는 것도 좋다.

퇴행성관절염

흙길이나 푹신푹신한 바닥에서 걷는다. 아스팔트나 시멘트 길에서 오래 걷는 것은 치명적이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생기는 충격이 발과 무릎으로 바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쿠션 기능이 좋은 신발과 양말을 신는다. 필요하다면 지팡이를 사용한다. 경사가 급한 산에 오르거나 달리기를 하는 것은 금물. 준비 및 정리운동을 할 때 무릎을 꿇거나 쪼그려 앉아서 하는 스트레칭도 하지 않는다. 물속에서 천천히 걷는 것도 좋다.

고혈압

새벽이나 한겨울엔 절대로 걸어선 안 된다. 온도가 1℃ 내려갈 때 혈압은 3mmHg 올라가기 때문. 모자를 쓰고 걷는 게 뇌졸중 예방에 좋다.

당뇨병

식후 1~2시간 뒤 걷는다. 특히 인슐린 주사 치료를 받는 경우 식사 후 바로 걸으면 안 된다. 운동을 1시간 넘게 할 때는 간식을 준비해 중간에 먹도록 한다. 오전보다는 따뜻해지는 오후에 걷는 게 좋으며, 운동 후 발을 씻어 잘 말린 다음 보습 크림과 로션을 발라 건조해지지 않게 한다.

요통

바른 자세로 걷는 것이 중요하다. 아랫배를 집어넣고, 항문 괄약근을 오므리면서 걷는다. 요통은 물론 요실금 환자에게도 좋다. 충격 흡수가 잘되는 신발과 양말을 신어 허리로 전해지는 충격을 최대한 줄인다. 준비·정리 운동을 반드시 하되 과도하게 허리를 젖히는 동작은 삼간다.

   

2 올바른 걷기 자세

“세 박자 보행, 11자로 걷는다!”

올바르게 걷기 위해서는 전신거울을 통해 자신의 걷는 모습을 관찰한다. 균형이 잘 잡혀 보기에 좋다면 올바른 걷기 자세지만, 어딘지 어색하고 불편하다면 올바르지 않은 자세이기 때문. 즉 보기에 좋은 자세가 건강에도 좋다. 올바른 걷기의 기본은 머리와 어깨, 엉덩이와 발이 일자가 되도록 몸을 꼿꼿이 세운 상태에서 걷는 것.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상체

머리를 똑바로 세우고 가슴을 펴며 시선은 앞을 향한다. 이때 어깨는 힘을 빼고 최대한 내린 자세를 유지한다. 구부정한 자세로 걸으면 허리와 어깨의 근육에 만성적 스트레스가 가해져 통증이 생기기 쉽다. 팔은 앞뒤로 자연스럽게 흔들리도록 놔둔다. 양옆으로 흔들면 에너지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상체가 바로 펴지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다.

하체

무릎을 앞으로 향하게 해 양다리가 스친다는 느낌으로 걷는다. 무릎을 완전히 펴면 충격을 흡수하는 데 불리하고 과도한 스트레스가 가해지기 때문에, 약간 구부려서 걷는 게 좋다. 골반은 안정감 있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지나치게 골반을 좌우로 흔들지 않는다.

뒤꿈치에서 발끝 순으로 땅에 닿는 세 박자 보행을 한다. 뒤꿈치가 먼저 땅에 닿고(한 박자), 발바닥이 새끼발가락에서 엄지발가락 쪽으로 자연스럽게 체중을 이동하며 닿도록 한 뒤(두 박자), 발끝으로 땅을 치듯 걷는다(세 박자). 발끝은 너무 벌리거나(팔자걸음) 안쪽으로 모으지 말고(안짱걸음), 11자에서 양쪽으로 살짝(8도 정도) 벌려 걷는 게 좋다. 속도를 높일수록 좀 더 11자에 가깝게 한다. 보폭은 키에서 100cm를 뺀 정도가 적당하다.

3 잘못된 걷기의 폐해

“팔자로 걸으면 골반이 벌어진다!”

우리나라 국민의 대표적인 잘못된 걸음걸이는 바로 ‘팔자걸음’이다. 발뒤꿈치가 안쪽부터 땅에 닿아 발끝이 11자(일직선)에서 많이 벗어나는 자세로, 걸을 때 상체가 흔들리고 골반이 벌어져 허리 통증이나 관절염이 생기기 쉽다. 또 허리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등 쪽 척추 관절에 압력이 가해져 염증을 야기할 수 있다. 만일 자신이 팔자걸음을 걷는지 궁금하면 신발을 보면 된다. 팔자로 걸으면 신발 뒤축의 바깥쪽이 많이 닳는다.

고개를 앞으로 내민 채 구부정하게 걷는 사람도 많다. 이런 자세는 머리의 하중이 목으로 집중돼 목뼈와 디스크의 퇴행성 변화를 촉진한다. 즉, 각종 퇴행성 척추질환의 원인이 되는 것. 어깨를 움츠린 채 아래를 보며 걷는 것도 좋지 않다. 이때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려 자세가 불안해지기 때문. 또 엉덩이를 심하게 좌우로 흔들며 걷는다면 허리와 무릎에 과도한 부담을 줘 디스크가 생길 수도 있다.

최근 유행하는 ‘킬힐’처럼 굽 높은 신발을 신으면 올바른 걷기를 할 수가 없다. 뒤꿈치에서 발끝 순으로 땅에 닿는 세 박자 보행이 불가능하다. 특히 굽이 높아질수록 뒤꿈치를 높이 들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몸의 중심을 잡는 게 더욱 어려워진다. 따라서 체중이 신발의 앞쪽으로 이동해 무릎이 튀어나오고, 허리는 뒤로 젖혀진다. 이런 자세가 반복되면 척추가 뒤로 휘는 ‘척추후만증’과 발목인대 손상, 퇴행성관절염이 생길 수 있다. 또 하이힐을 신으면 엄지발가락이 안쪽으로 휘는 무지외반증(사진)도 많이 생기는데, 이 경우 걸음걸이가 이상해지고 발목, 무릎, 허리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더군다나 굽 높은 신발은 지면에 닿는 충격이 그대로 척추 관절로 이어진다. 따라서 하이힐을 신고 딱딱한 아스팔트나 대리석길을 오래 걷는 건 매우 좋지 않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걷는 것도 피해야 한다. 특히 한쪽 어깨에만 메고 걸으면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고 척추까지 휠 수 있다. 가방을 뒤로 메도 어깨가 앞으로 굽어지니 좋지 않다. 짐을 가지고 걸어야 한다면 어깨에 걸치기보단 허리춤에 메는 게 낫다.

딱 맞는 운동화를 신고 자연을 바라보며 포근한 흙길을 걷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하지만 대다수 현대인은 최상의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직장을 오가며 걷는다. 이럴 때는 걷는 게 좋을까, 아예 걷지 않는 게 나을까.

걷기 전문가들은 “편치 않은 상태에서 걷더라도 걷지 않는 것보단 건강에 좋다”고 말한다. 현대인이 하루에 걷는 양은 자가 운전자가 3260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은 7280보 정도. 즉 대다수 사람은 1만 보도 걷지 않는다. 이렇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어찌 됐든 걷는게 안 걷는 것보다는 낫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악조건 속에서 오래(30분 이상) 걷는 건 금물. 특히 비만, 관절염 등 질환이 있으면 더욱 조심해야 한다. 또 하이힐 등 불편한 구두는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만 신는 게 좋다. 그 정도면 발에 크게 무리가 가지 않기 때문. 특히 불편한 상태로 걸은 뒤엔 아킬레스건을 스트레칭해주는 것도 잊지 말자.

 

걷기에 대한 진실 OX
빨리 걷기가 무조건 좋다? … 새 신발 불편한 것은 당연?


X 걸을 때 느껴지는 통증은 그만큼 효과가 있다는 증거다?
아니다. 운동 후 허벅지나 발목 등에 통증이 느껴진다면 운동 강도가 지나쳤다는 걸 뜻한다. 일종의 위험신호로 봐야 한다. 이럴 땐 휴식을 취하는 게 좋다. 지나치게 피곤할 정도로 걷는 것도 좋지 않다.

X 일반 걷기보다 빨리 걷기가 좋다?
아니다. 운동효과만 따지면 운동량이 많은 빨리 걷기(파워워킹)가 일반 걷기보다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관절이 좋지 않거나 관절염이 있는 사람, 비만인 사람에게는 빨리 걷기가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다. 속도는 천천히 하면서 운동량을 증가해주는 게 좋다.

X 걷는 것보다 뛰는 게 다이어트에 좋다?
아니다. 살빼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달리기보다 걷는 게 낫다. 비만의 원인이 되는 체내 지방 연소율이 달릴 때보다 걸을 때 높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하면 체내에서 에너지원이 되는 탄수화물은 소비되지만, 지방은 에너지원으로 거의 전환되지 않는다. 하지만 걷기는 운동 시작 후 15~30분까지는 탄수화물을주로 소비하지만 이후부터는 지방 소비율이 급격히 높아진다. 단,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30분 이상 운동을 지속해야 다이어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점. 체내 지방 연소율이 급격히 증가하는 시점이 30분 이후부터이기 때문이다.

X 신발을 처음 신을 때 불편한 건 당연하다. 신다 보면 좋아진다?
새 신발을 산 뒤 잘 맞지 않아 불편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보통 신발가게 점원은 “처음엔 다 불편하다고 느낀다. 적응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신발은 처음 신었을 때부터 발에 착 감기듯 편해야 한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신발이라도 편하지 않으면 내게 맞지 않는 것이니, 선택하면 안 된다.

X ‘기능성 신발’은 누구에게나 좋다?
기능성 신발 중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족의 걸음걸이에 착안해 만든 것이 있다. 마사이족은 자연의 흙길을 하루 3만 보 이상 맨발로 걷는데도 근골격계 질환이나 성인병을 앓지 않는다. 체중이동을 발바닥 전체로 분산한다는 게 마사이 워킹의 특징인데, 이 신발은 바닥이 둥글게 처리돼 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이 신발이 건강한 발엔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 발에 힘을 주지 않아도 신발이 저절로 앞으로 나가게 하기 때문에 발 근력이 약해지기 쉽다. 또 평형감각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는 위험할 수 있다. 물론 족관절에 염증이 있거나 관절이 잘 움직이지 않는 고령자에게는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 즉, 기능성 신발도 개개인의 발과 건강 상태에 따라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X 하이힐보다는 플랫슈즈가 좋다?
아니다. 굽이 1cm로 낮은 플랫슈즈도 하이힐만큼이나 걷기에 좋지 않다. 발을 디뎠을 때 받는 충격이 고스란히 발바닥에 전해져 골반과 척추에 무리를 주기 때문. 발바닥 근막에 염증이 생겨 부종과 통증이 나타나는 ‘족저근막염’이 발병할 수도 있다. 이는 방치해뒀을 경우 걷기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질환이다.

켜켜이 쌓인 역사의 흔적…한양의 넉넉한 품에 안겼다
내사산 성곽길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북악산 성곽길의 모습.

햇빛과 부딪혀 희게 빛나는 북악산 성곽. 그 사이에서 푸름을 뽐내는 녹음을 바라보며 부풀어오는 마음을 어쩔 줄 몰랐다. 춥다고 투덜거리는 새에 보란 듯 다가온 봄. 조선의 수도 한양을 둘러싼 성곽을 따라 걸었다.

조선시대 한양을 둘러싼 북쪽 북악산, 동쪽 낙산, 남쪽 남산, 서쪽 인왕산은 내사산(內四山), 지금의 서울을 둘러싼 북쪽 북한산, 동쪽 용마산, 남쪽 관악산, 서쪽 덕양산은 외사산(外四山)이라 부른다. 2009년 6월 서울시는 “내사산과 외사산 숲길을 각각 원형의 녹지길로 잇는 ‘그린 트레킹 네트워크’를 2011년까지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이 중 내사산은 한양을 둘러싼 성곽과 현 서울의 화려한 모습을 함께 볼 수 있기에 걷기 좋다.

내사산 트레킹은 총 18.6km. 보통 걸음으로 13시간 정도 소요된다. 체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하루 만에 다 돌 수도 있지만 천천히 봄을 만끽하려면 2~4일에 나눠 걷는 것이 좋다. 걷다 앉아 쉬고, 여유롭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걷는 것이 재미다. 서울시는 성곽길을 걷는 사람들을 위해 내사산 성곽길을 총 4개 구간으로 나눴다. 숭례문에서 남산을 넘어 장충체육관을 잇는 1구간, 장충체육관에서 낙산을 지나 혜화문까지 다다르는 2구간, 혜화문에서 북악산을 넘어 창의문까지 닿는 3구간, 창의문에서 인왕산을 넘어 출발지 숭례문까지 도달하는 4구간이 그것이다.

하지만 꼭 구간 출발점에서 시작해 끝까지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서울시내를 걷는 장점을 살려 중간 어느 지점에서든 내려와도 되고, 버스를 타고 구간 중간 지점까지 가 그곳에서 걷기 시작해도 된다. 주변 관련 유적지를 돌아봐도 좋다. 기자는 총 이틀에 걸쳐 첫째 날에는 혜화문-북악산-창의문-인왕산-숭례문 코스를, 둘째 날에는 숭례문-남산-동대문-낙산-혜화문 코스를 걸었다.

 

하얗게 뻗은 성곽을 따라 걷기

북악산-인왕산 루트는 내사산 코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네모반듯하고 흰 성곽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내려다보는 서울시내 경치도 환상적이기 때문. 4월 마지막 날 일요일, 조금 걷다 보니 겉옷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포근한 날 도심 속 성곽여행을 시작했다.

혜화동과 동소문동 사이 언덕에 있는 혜화문에서 여정을 시작했다. 높은 온벽 위에 삐죽이 모습을 드러낸 혜화문이 새침해 보였다. 서울과학고등학교를 향해 오르막을 걸었다. 중간에는 내셔널 트러스트로 지정된 고고한 한옥, 최순우 옛집과 ‘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이 살던 심우장이 있으니 한번 들러보자. 명륜동 성균관대 후문을 지나 오르막 능선을 둘러싼 성곽 곁을 걸으니 깔끔이 정돈된 와룡공원 쉼터에 도착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저질 체력’인 기자는 본격적으로 산에 오르기도 전 숨이 턱까지 찼다. 성곽에도 못 가고 지칠까봐 걱정이면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에서 종로02번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해 성균관대 후문까지 와 와룡공원에서 걷기 시작하면 된다.

   

북악산(342m)은 경복궁의 진산(鎭山)으로 1968년 1·21사태 이후 시민에게 개방되지 않아 천연식물이 많다. 와룡공원을 지나 끝도 없이 펼쳐진 계단을 따라 20분쯤 걷다 보면 말바위안내소에 닿는다. 북악산은 사적 10호로 2007년 4월부터 시민의 출입이 가능해졌지만 아직도 신분증을 지참해 현지에서 출입신청서를 작성해야 한다. 이 밖에 창의문안내소, 숙정문안내소 등에서 신청 가능하지만 창의문-백악마루 구간은 경사가 급해 오르기 힘들기 때문에 체력이 약한 사람은 말바위나 숙정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1일 2회 해설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으니 시간 맞춰 가도 좋다.

조금 더 걷다 보면 우거진 수풀에 엄숙하게 서 있는 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숙정문이다.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그 이름은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었기에 평소 굳게 닫아놓는 문이다. 남대문과 반대로 음기(陰氣)에 해당해 ‘여자가 숙정문에 세 번 가서 놀면 바람이 난다’는 말이 전해진다.

재미난 이야기를 뒤로하고 길을 재촉했다. 저 멀리 길상사의 웅장한 이마가 보였다.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어쩜 서울시내에 이렇게 좋은 길을 내놨을까.”

“여긴 보물이야, 보물.”

감탄하는 소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촛대바위를 지나 한참 오르면 경사가 급해지면서 성곽이 툭 튀어나온 곳을 만날 수 있다. 반원형으로 굽은 성곽인 곡장(曲墻)이다. 서울 성곽을 걸으면 이런 곡장을 인왕산에서 한 번, 북악산에서 한 번 해서 모두 두 번 볼 수 있다. 저 멀리 서울시내와 북한산 언저리까지 보였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 이마의 땀을 씻어냈다. 땅에서는 높게만 보였던 종로 고층빌딩들이 한 손에 쥘 수 있을 듯 작게 보였다.

이제는 내리막길. 성곽을 따라 돌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다 길게 늘어진 성곽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웅장하고 견고한 성곽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청운대(靑雲臺)에 닿았는지도 몰랐다. 청운대는 북악산을 개방하면서 젊은이들이 푸른 꿈을 안으라는 의미로 새로 지은 이름이다. 저 멀리 촛대바위와 북악산 기슭의 해태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오르니 1·21사태 소나무가 나타났다. 1968년 김신조 등 무장간첩 31명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처단하겠다고 내려왔던 길목이다. 소나무 여기저기에 총상 흔적이 뚜렷한데 그 상처를 잊지 않으려는 듯 도드라지게 흰색과 붉은색 페인트를 칠해놨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심해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진기를 꺼내자 곳곳에서 공익근무 요원이 나와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하고 말했다. 펼쳐진 성곽의 아름다운 광경을 사진에 담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이 몰래몰래 사진기를 꺼내 한 장씩 찍었다.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라도 담아가고 싶은 절경인 것을.

 

24시간 열려 있는 유일한 문, 창의문

창의문은 서울 성곽의 4소문 중 하나로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있어 북소문(北小門)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이곳 계곡 이름을 따라 ‘자줏빛 안개’라는 뜻의 자하문으로 더 많이 부른다. 조선시대 지어진 서울시내 9개 문 중 유일하게 24시간 개방하는 문이다. 창의문 옆에 작은 정자도 늘 개방해 안에 들어가 쉴 수도 있다. 길을 떠난 지 2시간 반 만에 창의문에 다다랐다. 창의문 근처에는 1·21사태 때 북한 무장공비가 쏜 총탄에 쓰러진 고(故) 최규식 경무관의 동상이 늠름히 서 있다.

조금만 내려오면 부암동이다. 분위기 있는 작은 카페와 허름하지만 인심 좋은 주인이 지키는 호프집이 곳곳에 있다. 함께 걷던 친구와 노천 레스토랑에서 담백한 마르게리타 피자와 파스타를 먹으며 맥주 한잔을 곁들이니 그야말로 ‘이보다 좋을 순 없다’였다. 허름한 슈퍼마켓에서 콘아이스크림 하나 사들고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볕이 충만한 휴일 오후. 마음 맞는 가족, 친구, 연인과 걷는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 운동화에 편한 복장이었지만 곳곳에 높은 구두를 신고 잔뜩 멋을 부린 채 성곽 걷기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도 있었다. 그런 복장으로도 오를 수 있을 만큼 계단길이 깔끔하게 마련돼 있고, 중간에 언제든지 창의문으로 내려와 경복궁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으니 부담 없다.

   

길을 건너면 인왕산(338m). 가장 먼저 마중 온 건 윤동주의 시다. 인왕산 초입의 윤동주 시인 언덕에는 ‘서시’ ‘길’ ‘별 헤는 밤’ 등 시인의 시가 나무, 바닥, 돌 등에 적혀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에 새기다 보니 마음이 어느새 풍요로워졌다.

언덕을 넘어 인왕산 입구에 다다르면 복구된 성곽을 볼 수 있다. 곳곳에서 공익근무 요원들이 관리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머무르는 초소는 네모반듯 멋없는 컨테이너 박스였다. 인왕산의 절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조선시대 성곽을 지키던 전망대처럼 멋스럽게 꾸며졌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성곽 및 등산로는 보수공사를 하느라 폐쇄된 곳이 많았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끝없는 계단이어서 무릎이 아팠다. 하지만 계단을 오르다 허리를 쭉 펴니 그림 같은 서울시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아픈 다리를 잊을 수 있었다. 걷다가 때때로 울창한 소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에서 땀을 식혔다.

인왕산에서 내려와 서울시교육청 쪽으로 걸으면 작곡가 홍난파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6년간 살았던 집을 찾을 수 있다. 김구 선생이 1948년 안두희의 총을 맞은 경교장도 있다. 그 길에는 성곽이 소실된 골목길이 많다. 나무담장으로 겨우 표시만 해둔 초라한 돈의문 터에서 길을 건너 정동에 다다랐다. 정동길의 성곽은 창덕여중 뒷담 20m 정도가 전부지만 옛 러시아 공사관 터, 이화여고 교정 내 유관순 우물,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인기인 덕수궁 돌담길 등 들러볼 곳이 많다.

정동길을 지나 서소문으로 나오니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잔뜩 올린 듯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 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새삼 이곳이 서울이었음을 깨달았다. 소의문 터, 중앙일보, 대한상공회의소를 지나 숭례문에 다다랐다. 2008년 초 불탄 숭례문은 아직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제 모습을 가리고 있다. 까치발을 들어봤지만 회색 가리개만 눈앞을 가렸다. 아쉬움 끝에 오늘의 여정을 마쳤다. 천천히 걸은 까닭에 오전 10시에 길을 떠났지만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1 인왕산에 곧게 뻗은 소나무와 흰 성곽. 2 서울시내 9개 문 중 유일하게 24시간 개방된 창의문. 3 날이 좋으면 잠실까지 한눈에 보인다. 4 북악산에서 바라본 서울 야경. 5 외국인들도 성곽의 매력에 푹 빠졌다.

 

빌딩 숲 속 성곽 찾기

다음 날 아침, 너무 오랜만에 오래 걸은 탓인지 종아리 핏줄 한 줄기 한 줄기가 제 존재를 알려오는 듯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남은 성곽길도 마저 만나고 싶은 기대감에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길을 나섰다.

남쪽 성곽길은 북쪽 성곽길에 비해 성곽이 드문드문 있어 성곽길이라기보다는 서울 도심을 걷는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하지만 숨은 성곽을 찾는 재미도 쏠쏠해 무시할 수 없다. 숭례문 앞으로 건너 남산육교 쪽으로 올랐다. SK빌딩 앞에서 채 100m도 안 되는 옛 성벽의 흔적을 만날 수 있었다. 남산(262m)길의 시작이다. 무수한 계단을 오르다 보니 어느새 성벽이 사라졌다. 아쉬움도 잠시, 아담하게 잘 꾸며진 백범 광장에 다다랐다. 전날 경교장을 봐서인지, 허공에 손을 뻗은 김구 선생의 동상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계단 따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지나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팔각정과 N서울타워, 봉수대가 모여 있는 곳에 다다른다. 남산 구간은 상점이나 음식점이 많지 않고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도시락을 준비해 와 팔각정에서 먹는 것이 좋다.

조금 쉬었다 숲길을 올랐다. 아카시아 숲 사이로 뻗어 있는 성벽이 아름다웠다. 이쪽 성곽은 북악산의 희고도 네모반듯한 성곽과 달리 자연스러운 모양새가 그대로 남아 있는 크고 검은 돌로 쌓여 있다. 불규칙함 속의 조화가 아름다웠다. 우리나라 고유 소나무 5만 그루가 심어진 남산 고유 소나무 탐방로 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천천히 성곽을 에둘러 발길을 움직였다. AFKN 송신소 쪽으로 난 성곽 주변 300m가량이 출입 금지돼 있기 때문. 아쉬움도 잠시, 국립극장을 지나 타워호텔에 다다르니 사라졌던 성곽이 다시 제 모습을 보였다. 이 구간에서 성곽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에는 성벽 돌에 새겨넣은 각자(刻字)가 많다.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 이름 등을 기록한 것이다. 한 글자, 한 글자 아는 글자를 찾아 읽는 것도 재미다. 그 옛날 ‘공사 실명제’를 실시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뒤쪽 산길을 따라 성벽이 굽이쳐 흐른다. 신라호텔 옆을 지나 장충체육관이 바라보이는 큰길에서 성벽은 아쉽게도 모습을 숨긴다.

   

성곽이 끊긴 곳에서 천주교 신당동교회 쪽으로 올라가면 성곽의 유산이 주택가 골목 곳곳에 남아 있다. 장충아트빌라 옆 골목 등에서 현재 집 축대로 사용되는 성곽 조각들을 볼 수 있다. 본래 서로 어깨를 마주한 채 도성을 지켰던 성곽이 제 모습을 잃은 채 군데군데 흔적만 남긴 모습을 보니 왠지 섭섭했다. 10년 넘게 서울 성곽길을 걸었다는 유근표 씨는 “겨울에는 눈, 여름에는 풀 때문에 이곳 성곽 모습을 아예 못 찾는 경우도 많다”며 아쉬워했다.

대금빌딩 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다시 성곽의 모습이 보인다. 광희문이다. 광희문은 상여가 드나드는 문으로 1975년 복원됐다. 본래 열어두었지만 숭례문 화재 이후 개방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소통시켰던 문이 두 입을 굳게 닫고 있음에 서글펐다. 한양공고 쪽으로 길을 건너 조금만 걸으면 패션 쇼핑센터가 즐비한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다다른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조선시대 별기군 훈련 장소였던 하도감 터 등을 전시한 동대문유구전시장과 도성 안에서 밖으로 물을 빼내기 위한 시설인 이간수문(二間水門) 등이 자리한 곳으로 2009년 10월 일부 개장됐다. 특히 동대문운동장 철거공사 도중 흔적이 발견된 142m 구간이 복원됐다. 위풍당당한 성곽은 세월의 흔적이 묻지 않아 뽀얀 속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낙산공원 성곽에 앉아 소곤소곤

흥인지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쌩쌩 달리는 찻길 사이에 묵묵히 서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이대 부속병원 담장으로 성곽길이 이어지는데 여기 돌에는 이 성곽을 지은 책임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짚어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 주민 편의를 위해 성곽 중간마다 뚫어놓은 암문(暗門)을 통해 나가 천천히 오르막을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낙산(駱山, 125m)에 도착했다. 낙산은 원래 낙타를 닮았다고 해서 생긴 이름으로 낙타산 또는 타락산이라고 불렀다. 도심 속 휴식 공간으로 1년 내내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은은한 가로등과 흰 성곽이 닿을 때 만들어내는 로맨틱한 분위기 덕에 야간 데이트 장소로 인기다. 성곽에 자유로이 걸터앉아 대화하는 가족, 연인들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성 밖으로 난 골목길은 나무 우거진 산책로로 이어졌다. 낙산공원에서 성벽 밖 창신동으로 나갔다. 천주교 신학대학으로 성벽이 이어지지만 출입금지 지역이라 철조망이 쳐져 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계속 성곽길을 따라 내려왔다. 군데군데 이가 빠진 성곽이 안타까웠으나 그조차도 멋스러웠다. 오른쪽으로는 마당에 빨래를 걸어둔 단층집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재미있다. 특히 이 길에서는 큰길에서는 자세히 볼 수 없는 혜화문을 눈높이로 볼 수 있어 좋다. 이정표를 따라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니 이 길의 출발점, 혜화문에 다다랐다. 서울 성곽을 따라 한양을 품고 돌던 이틀 간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Basic info.

☞ 교통편과 구간

제1 구간 숭례문(시청역 7번 출구/서울역 4번 출구)→힐튼호텔→남산도서관→N서울타워→남산→타워호텔→신라호텔→장충체육관

제2 구간 장충체육관(동대입구역 5번 출구)→광희문→동대문운동장→흥인지문→낙산→혜화문(동소문)

제3 구간 혜화문(한성대입구역 5번 출구, 혜화역 1번 출구 사이의 언덕길)→서울과학고→와룡공원→숙정문→북악산→창의문

제4 구간 창의문(경복궁역 3번 출구→0212, 1020, 7022번 버스→자하문고개 하차)→인왕산→한국사회과학도서관→돈의문 터→정동길→소의문(서소문)→숭례문

☞ 북악산 서울성곽 탐방 안내

제1 구간 말바위안내소→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안내소

제2 구간 숙정문안내소→숙정문→백악마루→창의문안내소

제3 구간 창의문안내소→백악마루→숙정문→말바위안내소

입장시간 하절기(4~10월) 09:00~15:00, 동절기(11~3월) 10:00~15:00, 매주 월요일 휴관

신청방법 신분증을 지참하고 말바위안내소, 숙정문안내소, 창의문안내소에서 출입신청서 작성 후 제출, 30명 이상일 경우 홈페이지에서 신청서 작성 후 e메일 접수

해설 프로그램 운영 매일 오전 10시, 오후 2시에 말바위안내소, 창의문안내소에서 시작

홈페이지 www.bukak.or.kr

 

순국선열을 만나는 그곳 바람에 실려온 ‘애국魂’
북한산 순례길, 우이령길

“조국애란….”

초·중·고생 10명 중 4명이 3·1절의 의미를 모른다고 한다. 어른들도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의 의미를 잊은 채 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우리지만 일본의 역사왜곡은 강하게 비판한다. 자신은 잊고 살면서 남 탓만 하는 모순된 현실 속에서 북한산 순례길은 좋은 교훈이 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하 국립공원)은 북한산 둘레길 정비사업 시범사업으로 순례길을 조성했다. 북한산 둘레를 잇는 첫걸음이다. 이곳에는 일성 이준 열사(1859~1907), 성재 이시영 선생(1869~1953) 등 순국선열의 묘역이 있다.

여름 장마처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화창한 4월 27일 순례길에 올랐다. 순례길은 국립공원 북한산사무소 수유분소 쪽 입구와 덕성여대 앞 솔밭공원 쪽 입구 모두 이용할 수 있다. 기자는 통일교육원, 아카데미하우스 인근의 수유분소 쪽 입구를 택했다. ‘북한산 둘레길’ 표지가 큰 도로부터 이어져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입구 표지판에 ‘조국애란’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동행한 국립공원 공원시설팀 윤대원 차장은 “순례길 조성 뒤에도 자문단과 탐방객의 의견을 계속 반영하고 있다. 개선할 점이 있다면 언제든지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통해 지적해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다.

 

이준 열사·이시영 선생·김병로 선생 …

입구에서 100m쯤 걸어가면 이준 열사 묘역이다. 그곳까지 오르는 길에 열사의 말씀을 새겨 놓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에 감히 덧붙이자면, 위대한 인물을 기억하고 뜻을 잇는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아닐까. 이준 열사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돼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열사의 유해는 1963년 헤이그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이곳에 안치됐다. 열사의 생애를 적어놓은 안내판을 읽으면서 그분의 뜻을 기렸다.

묘역에서 내려와 순례길을 따라 걸으면 되는데 이곳에는 음식점이 있어 식사도 가능하다. 표지판은 가인 김병로 선생(1887~1964) 묘역을 안내한다. 약 170m. 입구에 순국선열에 대한 안내판을 두어 직접 올라가지 않더라도 선열의 생애를 알 수 있도록 해놓았다. 김병로 선생은 전북 순창 출신으로,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으며 광복 후 초대 및 2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표지판을 따라 20m 더 걸으면 광복군 합동묘역과 이시영 선생 묘역 입구다. 광복군 합동묘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1943년~45년 중국 각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애국선열 17위가 모여 있다. 이시영 선생은 서울 출신 독립운동가로 만주로 이주해 1911년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강습소(경희대의 시초)를 설립했다. 광복 후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통치에 반대해 사직했다.

이시영 선생 묘역 입구에 자리한 낡은 집에는 선생의 며느리인 서차희 여사가 살고 있다. 100세인 서 여사의 사연은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됐다. 고령임에도 직접 이시영 선생 묘역을 돌봤으나 2008년 환경부와 국립공원이 순국선열 묘역 주변을 깔끔하게 정비해 후손의 힘을 덜어주었다. 낡은 서 여사의 집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우리는 순국선열의 고마움도 잊고 남은 후손의 고단한 삶도 외면하며 살아왔다.

   

수유분소 쪽 순례길 입구. 표지판들이 안내를 돕는다.

무거운 마음을 모르는지 대동천 물 흐르는 소리는 쾌활했다. 연일 내린 비 덕에 계곡 물이 불었다. 북한산 대동문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이곳까지 흐른다. 대동교를 건너면 ‘백련공원 지킴이터까지(340m)는 노약자의 통행이 용이한 구간’이란 표지가 눈에 띈다. 국립공원 순례길 계단 옆에 경사로를 두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도,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 단위 탐방객도 편하게 이용하게 배려했다. 길 찾기도 어렵지 않다. 표지판이 잘 돼 있고 목재 울타리를 따라 이동하도록 해놓아, 중간 중간 순국선열의 묘역에 들러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윤 차장은 “목재 울타리는 순례길을 안내하는 이동 통로인 동시에, 샛길로 이동하는 사람을 막아 동식물을 보호하는 기능도 한다”고 말했다.

순례길 탐방객들은 순국선열 묘역이 이처럼 한군데 모여 있는 이유를 궁금해한다. 국립공원 측도 알아봤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한 순국선열의 후손은 북한산 인수봉이 민족의 정신적 구심체라 수유지역에 모였다고 말했다. (사)대한풍수지리학회 강환웅 이사장은 “예부터 성 내에는 묘를 못 쓰고 성 바깥 100리로 나가야 했다. 묘역 터는 강남보다 강북이 좋고 남향은 시내를 바라봐서 안 되니 동향을 찾게 됐다. 이런 사정을 고려한 최적지가 수유지역이다”고 말했다.

 

사진 찍기 좋은 곳 섶다리

이윽고 순례길의 명물 섶다리가 나온다. 원래 길은 민가 바로 앞으로 이어지지만, 민가에서 생활의 불편함을 호소해 섶다리를 놓게 됐다. 섶다리는 예부터 나무 잔가지를 이용해 만드는 임시다리로, 여름에 물이 불어나면 휩쓸려 떠내려가기도 했다. 순례길에 놓인 섶다리는 유래는 따랐지만 튼튼하다. 섶다리를 건너니 국립공원 직원들이 야생화 단지를 만들고 있다.

섶다리를 건너면 왼편에 단주 유림 선생(1894~1961) 묘역이 있다. 선생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신채호(1880~1936), 김창숙 선생(1879~1962)과 함께 ‘천고(天鼓)’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알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유림 선생 묘역은 순례길과 가까워 직접 올라보았다. 묘역 앞을 지나는 이갑순(63) 할머니는 “매일 순례길을 걷는다. 순국선열 묘역의 안내판을 꼼꼼히 읽는 편이다. 순례길을 걸으면 자연스럽게 순국선열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순례길을 따라 170m 정도 걸으면 체육시설이 나온다. 배드민턴, 탁구장은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시설이다. 국립공원은 장기적으로 주민들을 설득해 다른 곳에 체육시설을 짓는 방향으로 철거를 유도할 예정이다. 탐방객과 등산객 편의를 위해 백련사 오르는 길 입구에 운동기구를 설치했다. 걷기로 유산소운동을 충분히 했다면, 이곳에서는 기구로 무산소운동을 할 수 있다.

체육시설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백련사, 대동문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가면 현곡 양일동 선생(1912~1980),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1887~1962) 묘역이 있다. 양일동 선생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30년 광주학생운동 동조시위를 주도했고, 광복 후에는 정치가로 통일당 총재를 지냈다. 김창숙 선생은 경북 성주 출신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며 매국 5적 처형을 요구하다 옥고를 치렀고, 19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 활동을 주도했다. 46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을 설립했다. 서상일 선생은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으로 헌정의 초석을 다졌다.

순례길은 주말농장을 따라 이어진다. 주말농장은 사유지라 국립공원이 직접 정비를 하지 못했다. 주말농장 주변 철조망과 도구들이 잠시 눈을 어지럽힌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샛길, 나무테크길, 포장길이 혼재돼 있다. 국립공원 측은 원래 있던 길을 이용하고 새로운 길을 내지 않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주말농장을 내려오면 150m쯤 동네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 길바닥과 전봇대 등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둘레길 표지가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동네길이 끝나고 강재 신숙 선생(1885~1967) 묘역까지 가는 길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이다. 등산복보다는 가벼운 외출복 차림의 사람들이 더 눈에 띈다. 이곳에서 마주친 80세 할머니도 “적당히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니 운동하기 딱 좋다”며 활짝 웃었다.

   

1 섶다리는 순례길 명물이 됐다. 2 이준 열사 묘역 앞에서 고인에 대한 담소를 나눴다. 3 북한산에서 내려온 등산객들도 순례길을 찾는다. 4 순례길 4·19민주묘지 전망대에선 4·19묘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5 목재 울타리와 표지판이 탐방객을 친절하게 안내한다.

신숙 선생은 경기도 가평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11년 매국노 이용구 일진회장의 암살을 기도했다.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30년 만주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국독립군 참모장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신숙 선생 묘역을 지나면 보광사 뒤편을 만나게 된다. 갈림길에서 순례길은 오른쪽으로 빠진다. 왼쪽 길은 등산로로, 주민들이 이용하는 약수터와 진달래능선으로 이어진다. 보광사 주차장이 있는 콘크리트길 경계에는 울타리 대신 나무를 심어 탐방객의 발길을 바로 잡는다. 다리가 조금 무거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국립 4·19민주묘지 전망대까지 걸었다. 이곳에 서면 4·19묘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나무테크길을 따라 내려가면 순례길 출구인 솔밭공원이 나온다. 기자는 수유분소에서 솔발공원 방면으로 걸었지만, 인근 주민들은 솔밭공원에서 수유분소 방면도 많이 이용한다. 북한산 등산로와 바로 연결되고 운동 강도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유모차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탐방객에게는 수유분소에서 시작해 나무테크길로 이어지는 길을 추천한다.

국립공원은 북한산국립공원 자락 저지대 일원에 북한산 둘레길을 2012년까지 완성할 예정이다. 둘레길은 총 63.17km로 서울 6개 구와 경기도 3개 시에 걸친다. 순례길을 시작으로 북악 오솔길, 우이 소나무길, 불광 언저리길, 회룡 탐방모험길 등 각각 테마를 갖고 조성할 예정이다. 2010년에 강북구와 은평구 지역 둘레길이 완공된다.

2012년 북한산 둘레길 완공 예정일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면, 북한산국립공원 우이령길을 따라 둘레길을 가로지르는 것도 좋다. 우이령길과 연결되는 둘레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찾아가기 쉽지 않다. 차도를 따라 우이동 먹거리 마을 입구로 걸어가거나, 덕성여대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우이동 방면 120번이나 153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리면 된다. 우이령길 입구까지 오르는 길은 MT촌을 지나쳐야 한다. 민박집, 음식점 간판이 눈을 괴롭히지만 인내를 갖고 오르면 40년간 숲의 속살을 간직한 우이령길이 위로한다.

우이령길은 지난 40여 년간 출입이 통제됐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과 경기 양주시 장흥면을 연결하는 총 6.8km의 길로, 군과 경찰이 통제해오던 비포장 도로 부분 4.46km가 공개됐다. 우이령길 안내판에는 그 연유가 이렇게 적혀 있다.

Basic info.

☞ 교통편과 구간

수유분소 쪽 출입구(104, 1119번 버스는 차고지앞 정류장에서 하차, 강북01번 버스는 아카데미 하우스 정류장 하차.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강북01번 버스 환승)→이준 열사 묘역→광복군 합동묘역, 이시영 선생 묘역→대동교?섶다리→유림 선생 묘역→체육시설→주말농장→신숙 선생 묘역→보광사 뒤편→4·19전망대→솔밭공원 쪽 출입구(1120, 1144, 1161, 1166, 1218, 109, 120, 144, 151, 153번 버스 덕성여대입구 정류장 하차)

   

남북 대치의 상흔을 간직한 대전차장애물. 편한 복장의 탐방객들이 우이령길을 찾는다. 우이령길의 표지판(왼쪽부터).

자연의 고마움을 우이령길에서 느끼다

‘소귀고개로 알려진 우이령길은 6·25전쟁 당시 미군 공병대가 작전도로로 개설해 차량 통행이 가능하게 됐다. 1968년 무장공비침투사건 이후 1969년부터 국가안보 및 수도 서울 방어를 목적으로 2009년 6월까지 민간인 출입이 전면 금지됐었다.’

소의 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소귀고개란 이름이 붙었다.

북한산국립공원사무소 우이분소 안명옥 분소장은 “41년간 통제구역으로 묶여 숲이 잘 보존됐기 때문에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의자, 화장실 같은 편의시설을 갖췄다. 바닥에 마사토를 깔아 노약자, 어린이 산책 코스로 좋다”고 말했다. 802전경대 숙소 아래 우이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이곳에서 예약 확인을 받는다. 미리 신청하면 자연환경 안내원이 안내도 해준다. 우이령길은 일일 1000명만 방문이 가능하기에 고즈넉한 숲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우이령길 곳곳에는 안내판이 있어 탐방객의 눈길을 잡는다. 안 분소장은 ‘맨발로 느끼는 우이령 숲’에서 맨발로 걸어볼 것을 권했다. 우이령길은 탐방객들을 위해 마사토를 깔아놓았다. 발에 직접 닿는 흙의 느낌이 낯설고 따갑기도 했지만, 이내 온몸이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숲길을 따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 ‘흙 속에서 살아가는 친구들’ 등 숲의 고마움을 깨우치게 해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순례길을 걸으며 순국선열의 고마움을 느꼈다면 이곳에서는 자연에 대한 고마움을 배운다.

기존 숲길과 조화를 이루는 차원에서 꽃들도 심어놓았다. 아쉽게도 참나리를 심어놓은 곳에서 참나리를 보지 못했다. 입산이 통제된 시간에 멧돼지가 내려와 참나리를 먹기 때문이란다. 나무, 꽃에 이름과 함께 친절한 설명도 달아놓아 식물에 문외한인 기자도 공부하는 기회가 됐다. ‘벌개미취는 별처럼 생긴 꽃모양을 갖고 있으며 벌판에서 핀다고 벌개미취로 부른다’고 달아놓은 식이다. 더 이상 무책임하게 이름 없는 꽃이 폈다고 말할 수 없게 됐다.

우이 탐방지원센터에서 정상인 우이령길 작전도로 개통기념비까지는 약 1.1km의 완만한 경사길이 이어진다. 숲길 정취에 취해 걸으니 힘든지도 모르고 올랐다. 정상에는 대전차 장애물도 있다. 남북분단의 대치 상황이 숲의 생태계를 보존했지만 전쟁의 상흔도 남겨두었다. 정상에서 100m 정도 내려오면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에도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태양광집열판에서 모은 에너지를 활용해 화장실 내부공기를 정화하고 있는 것.

   

도봉산 오봉이 한눈에 담기는 곳

좀 더 걸어가면 도봉산 오봉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오봉을 바라보며 쉬었다 가기로 했다. 오봉은 봉우리가 다섯 개라는 뜻이며, 한 마을의 다섯 총각이 원님 외동딸의 마음을 얻으려고 돌을 던지는 내기를 해 만들어졌다는 설화가 있다.

전망대에서 잠시 쉬었다가 길을 따라 내려가니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우이령길 안에는 군부대 유격장이 있다. 유격훈련을 받는 군인들 함성소리가 숲의 고요함을 깨고 귓속까지 파고든 것이었다. 숲의 넉넉함을 배운 덕일까, 이 소리도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지친 탐방객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응원소리라고 생각하면서 발걸음을 힘차게 내디뎠다. 유격장을 지나 부드러운 마사토를 밟으며 30분 정도 더 내려오면 어느새 우이령길이 끝나고 교현 탐방지원센터에 닿는다. 가까이 들려오는 차 소리가 아쉬운 여정이 끝났음을 알린다.

조국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과 인간을 위해 아낌없이 주는 숲의 고마움을 배운 보람된 걷기였다.

Basic info.

☞ 교통편과 구간

우이 탐방지원센터(지하철 4호선 수유역 3번 출구에서 120, 153번 버스 종점 하차, 20분 소요. 우이동 먹거리 마을 방향 우이동전경대로 이동)→전경대 숙소→대전차장애물→오봉전망대→유격장→교현 탐방지원센터(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에서 704번 버스 승차 석굴암 입구 하차, 또는 34번 버스 승차 우이령 입구 하차)

☞ 예약방법

참가 비용 무료

운영 기간 연중무휴

운영 일시 예약을 실시한 탐방객 대상으로 개방일에 09:00~14:00 출입 허용(16시까지 하산)

예약 인원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에서 인터넷 예약(일일 800명)
-노령층(65세 이상), 장애인, 외국인은 전화 예약 가능(일일 200명)
-우이 탐방지원센터 (02) 998-8365
-교현 탐방지원센터 (031) 855-6559
※ 전화예약은 주중 업무시간(09:00~18:00)에만 가능

필수 사항 예약 확인증과 신분증(예약자, 동행인) 지참, 전화예약자는 예약번호 확인 후 입장 가능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반나절 5월의 꽃향기 날리고…

 

불암산 둘레길

‘산에나 들어갈까.’ 헐레벌떡 준비해서 출근하고, 무거운 짐 지고 퇴근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그러나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떠나는 게 억울해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사실 산속에 우두커니 앉아 재미있게 살 자신도 없다. 이렇듯 이상과 다른 현실을 살며 늘 투덜대는 것이 나의 일상이다. 혹시 불암산 인근에 사는 문인과 함께 산을 오르면 남다른 ‘감상’이 떠오르지 않을까 해서 노원구 주민인 소설가 구효서, 정지아 씨, 민음사 장은수 대표를 찾았지만 연락이 닿지 않거나 시간이 맞지 않았다. 할 수 없다. 혼자 몸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횡단형 건강 산책로 2km를 걷다

4월 마지막 날 오전 10시, 덕암초등학교 앞에서 노원구청 공원녹지과 신현호 팀장과 만나기로 했다.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내려 아무리 물어도 이 학교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자, 5분도 안 돼 산 밑에 자리 잡은 아담한 학교로 데려다줬다. 불암현대아파트와 불암동아아파트가 보였다. 약속시간에 늦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배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다. 한참 걸어야 할 텐데 벌써부터 힘이 빠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게에 들러 빵과 우유를 샀다. 크림빵을 입에 밀어 넣으려는 순간, 누군가 나를 불렀다. 신현호 팀장이다. 입 안 가득 빵을 넣고 대답도 못하고 있는데 그의 마음 씀씀이가 나를 더 민망하게 했다. 그의 손에는 내게 건넬 생수가 쥐어져 있었다.

“이 길은 ‘넓은마당’에서부터 ‘넓적바위’까지 가는 2km 횡단형 건강산책로로 지난해 여름 개장했습니다. 불암산 둘레길 중 유일하게 재정비한 길이라 일반인이 다니기에 불편함이 없습니다. 불암산 둘레길은 총 20km에 이르는데, 6월부터 기존 등산로 노면을 다듬고 산책로를 연결해 만들 예정입니다. 그러니 지금 직접 가보실 만한 불암산 둘레길 숲길은 여기뿐입니다. 물론 노원구에 7개 노선이 있고 남양주시에 3개 노선이 있으니, 남양주시 쪽으로 가시면 가볼 만한 숲길이 있긴 하죠. 그렇지만 서울 쪽에서 갈 수 있는 불암산 둘레길 대부분은 다듬어지지 않은 오솔길이라 초행자가 찾아가긴 어렵습니다.”

 

서울 노원구는 4월부터 2011년 말까지 총 6억5000만 원을 들여 남양주시와 함께 제각기 관리해오던 불암산 등산로와 산책로를 연결해 횡단형 둘레길을 조성할 예정. 그러나 현재 서울에서 걸을 수 있는 정비된 길은 2km뿐이다.

일단 횡단형 건강산책로를 걸으며 높이 509.7m의 불암산(佛岩山)을 느껴보기로 했다. 불암산은 화강암으로 이뤄진 산으로 최고봉인 큰 바위가 마치 관을 쓴 부처의 형상 같다고 해서 천보산(天寶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인근의 먹골(묵동), 벼루말(연촌) 등의 지명과 함께 필(붓), 묵(먹), 연(벼루)으로 땅의 기운을 다스린다고 해 필암산(筆岩山)이라고도 부른다.

불암산은 덕릉고개 남쪽에 높이 420m의 봉우리를 또 하나 거느린 산으로, 산 자체는 단조롭지만 거대한 암벽과 절벽이 어우러져 풍치(風致)를 자랑한다. 산 남쪽 사면에는 불암산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산에는 신라 지증국사(智證國師)가 세운 불암사와 그 부속 암자인 석천암(石泉庵)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무공(無空)이 세운 학도암(鶴到庵)이 있다.

 

눈높이를 조정한 뒤 찾아온 마음의 여유

삼육대 안에 있는 ‘제명호’는 불암산 둘레길의 숨겨진 보석이다.

그러나 대여섯 사람이 함께 갈 만한 폭의 건강산책로를 걸으며 불암산의 정기를 느끼기란 쉽지 않았다. 산 주변만 맴돌면서 본체를 파악하는 것은 사람의 옷차림만 보고 본심을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20여 분을 그렇게 감흥 없이 걷자 눈높이를 조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복궁을 지을 때 채석장으로 쓰기도 했다는 불암산을 걸으며 산의 너른 품을 제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욕심을 버리자 신기하게도 산의 아름다움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얼굴, 나무와 꽃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길쭉한 잣나무들을 보면서 추진력을 배울 수 있었고, 주민들이 생성약수터에 붙여놓은 타일을 보며 함께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배꽃과 하얗게 늘어진 이팝나무를 보며 낭만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고, 불암산의 명예 산주(山主)인 탤런트 최불암의 시비를 보며 겸손한 자세를 배울 수 있었다. 벌레 때문에 잘려나간 신갈나무를 보며 물러서는 것이 이기는 길일 수도 있음을 마음에 새겼다. 절에 오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달아놓았을 연등을 보며 소망의 중요성도 새삼 깨달았다. 정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열심히 운동하는 주부들, 한 구간을 오가며 운동에 매진하는 강아지, 봄날을 만끽하며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노인들 모두 저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불암산 둘레길 숨겨진 보석 ‘제명호’

불암산 둘레길에 있는 숲길은 현재 넓은마당에서부터 넓적바위까지 2km 횡단형 건강산책로뿐이지만, 이 둘레길 안에는 이미 만들어진 도로가 포함돼 있다. 도로는 원자력병원에서 서울여대, 육군사관학교, 태릉선수촌을 지나 삼육대 입구로 이어진다. 우리는 차를 타고 이 길을 이동해 삼육대 입구에서부터 걸었다. 한전연수원을 통과하면 불암산 자체의 둘레를 잇는 길을 만들 수 있지만,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잠든 태릉은 문화재 보호구역이라 둘레길에 포함되지 않았다.

삼육대 입구를 지나 학교 숲길을 10여 분 오르다 보면 공해에 대한 저항성이 약해 도심지 주변에서는 생육이 불가능하다는 서어나무(일명 근육나무)가 기울어진 채 인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 길을 2~3분 더 오르면 학교를 세운 이제명 목사의 이름을 딴 인공호수 ‘제명호’와 만날 수 있다.

제명호는 불암산 둘레길에 숨겨진 보석이다. 폭이 100m는 돼 보이는 타원형의 이 호수는 연인이 손을 잡고 7번 오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청신한 푸른 물빛에 비단잉어가 뛰노는 모습은 생과 사의 경계에 놓인 것처럼 신성하고 고요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고 정갈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이 호수처럼 삶이 풍요롭게 마무리된다면 어떻게 해서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에 불평불만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제명호는 평범한 삶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가능성이자, 삶의 목표와도 같아 보였다.

짧은 길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허세겠지만 삶이 곧 둘레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남다른 성과물과 장애물이 없어 지루해 보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조금씩 다른 현실을 맞이하고, 그 안에서 나를 키우는 자양분을 만나는 배움의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어떤 이의 인생이든 나름의 가치가 있다 말하는 둘레길의 가르침 덕분인지 살아가는 자세가 조금은 밝아진 것 같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툴툴 털고 일어나 씩씩하게 걸어갈 힘을 얻는다.

1 불암산 명예 산주인 탤런트 최불암 씨가 쓴 시가 적힌 시비. 2 소풍 나온 어린이들. 3 불암산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둘레길을 걷는 주민들.

Basic info.

☞ 교통편

넓은마당 주변 지하철 4호선 당고개역에서 걸어서 15분 소요, 덕암초교 부근.

삼육대 입구 위치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또는 석계역 1번 출구에서 나와 삼육대행 버스를 이용.

☞ 코스

불암산 둘레길(20km) 넓은마당→넓적바위→회춘샘약수터→공릉2단지→삼육대 입구→삼육대 갈림길→불암사 입구→불암터널→덕능고개→넓은마당

불암산 하루길(12km) 넓은마당→넓적바위→회춘샘약수터→삼육대 갈림길→불암사 입구→불암터널→덕능고개→넓은마당

불암산 나절길(8km) 회춘샘약수터→공릉2단지→삼육대 입구→삼육대 갈림길→회춘샘약수터

 

살아 있는 나무 박물관 저마다 사연이 구구절절
관악산 생태숲길

안국사(오른쪽)에서 출발하는 관악산 생태 숲길은 소나무, 참나무, 계수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의 향연을 맛볼 수 있다.

관악산은 서울의 금강산이다. 봉우리와 바위가 많고,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바위와 어우러져 철 따라 변하는 모습이 금강산과 같다고 해서 ‘소금강’ 혹은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해서 ‘서금강’이라 부른다. 서울의 명산으로 알려져 많은 등산객이 찾지만 아름다운 숲길이 조성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에서 나와 서울대 후문 쪽으로 10여 분 걸어가면 왼쪽으로 낙성대공원이 나온다. 관악산 생태숲길은 관악산 자락의 숲길을 걷는 것으로, 크게 낙성대공원 관리사무소 앞 안국사에서 시작하는 1코스와 관음사에서 출발하는 2코스로 나뉜다. 두 코스 모두 1시간 남짓이면 돌 수 있으나, 숲 향기에 취해 걸음을 멈추고 숲의 대화에 귀 기울이다 보면 서너 시간은 훌쩍 걸린다.

4월 29일, 예년 같으면 봄이 한창이지만 이상기온 탓에 바람이 쌩쌩 불었다. 거센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숲해설가인 산림문화콘텐츠연구소 김지현 기획위원과 함께 낙성대 1코스가 시작하는 안국사에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낙성대(落星垈)는 고려시대 명재상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 그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져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1973년 박정희 정부는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강감찬 생가 일대를 성역화했다. 본래 출생지는 현재 공원 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

코스가 시작하는 안국사 앞엔 주목나무가 중간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주목은 사시사철 푸른 나무로 살아서 1000년, 죽어서 1000년을 살 정도로 생명력이 넘친다. 특히 바둑판 재목으로 최고인데 바둑돌을 놓는 순간 바둑판이 약간 꺼졌다 올라온다고 한다. 은행나무처럼 종자식물에서 암수의 생식기관 및 생식세포가 다른 개체에 생기는 암수딴그루 나무다.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고, 꽃과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이것이 암나무임을 안다.

“저렇게 떨어져 있으니 서로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처음엔 둘이 오래된 연인처럼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공원 내 공사로 조경을 새롭게 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떨어지게 됐다. 사람들은 그리워하면서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안 만나고 살기도 한다지만, 이 둘은 어떤 인연이었기에 오랜 세월을 함께하다 이처럼 떨어지게 된 것일까.

주목나무를 바라보던 시선을 강감찬 장군 동상이 바라보이는 도로 건너편으로 옮겼다. 궂은 날씨에도 봄은 분명히 오고 있었다. 예년 같지 않은 날씨 탓에 ‘이렇게 봄이 지나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컸지만 나무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푸름을 뽐냈다. 같은 초록색은 하나도 없다. 어림잡아 꼽아도 20가지가 넘는 초록색의 스펙트럼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초록 물결에 눈을 씻고 안국사로 들어서면 벚나무, 소나무 등이 좌우대칭으로 자리 잡은 정원이 나온다. 인공미가 더해진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 형태로, 자연과 어우러진 한국식 정원이 아닌 것에 아쉬움이 남았다. 안국사를 절(寺)로 생각하기 쉽지만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다.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소나무

때마침 천안함 사고로 귀중한 목숨을 잃은 46명의 장병을 애도하는 사이렌이 1분여간 울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묵념했다. 김지현 위원의 말이 폐부를 찔렀다.

“1000여 년 전 거란족을 물리쳤던 강감찬 장군의 행적을 떠올리면,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지킬 힘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여 분간 안국사를 둘러본 뒤, 동쪽으로 난 작은 길을 이용해 본격적으로 숲에 들어섰다. 흙에 발을 디디며 산길을 올라서는데 군데군데 앙상하게 드러난 소나무 뿌리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사람이 많이 오가면 흙이 다져져 이렇게 뿌리가 드러납니다. 비가 오면 흙이 쓸려 내려가고 토사가 유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죠. 그래서 나무로 계단을 만드는 겁니다.”

경사진 계단을 밟고 올라서자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붉은 빛깔을 띠는 한국의 적송과 북아메리카산 리기다소나무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었다.

“앗! 따가워.”

솔방울을 손에 쥐었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솔방울에 밤송이처럼 가시가 삐져나와 있었다. 리기다소나무의 솔방울로, 매끈한 적송의 그것과 비교됐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의 한국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면서 수탈을 당한 것은 비단 사람만이 아니었다. 팔도강산 곳곳에서 나무가 베어졌는데 특히 상당량의 소나무가 일본으로 옮겨졌다. 이름마저 일본에 빼앗겼다. 일본이 먼저 세계에 알리고 등록하는 바람에 한국 적송의 학명은 ‘Japanese Red Fine’이다. 대신 민둥산을 채운 것은 일본의 아카시아와 리기다소나무다. 적송은 한군데에서 2장의 잎이 나오는 반면 리기다소나무는 3장이 나온다. 특히 나무 곳곳에 마치 사람의 털처럼 잎을 내기 때문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소나무 숲길을 지나 20여 분 걸어가면 굴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등 다양한 참나무가 세찬 바람을 뒤로하며 어서 오라는 손짓으로 손님을 맞았다. 인간 생활사가 변하면서 숲 속의 주인도 조금씩 변해간다. 솔방울의 씨앗이 땅을 뚫고 자라려면 떨어진 잎이 치워져야 한다. 과거 나무는 물론 낙엽까지 연료로 쓸 때는 소나무 씨앗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점차 석유와 석탄 등 새로운 연료를 사용하면서 낙엽은 그대로 산에 쌓여갔고, 소나무 씨앗이 그것을 뚫기가 어려워졌다. 그 틈을 참나무 씨앗이 파고들었다. 햇볕을 덜 받더라도 자랄 수 있는 끈질긴 생명력의 참나무가 조금씩 소나무를 밀어내며 숲 속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참나무 숲과 전나무 길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해발 629m의 기암절벽 정상에 자리한 연주대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나온다. 연주대 위쪽엔 연주암이라는 작은 사찰이 유명하다. ‘연주암 중건기’ 등의 자료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관악산에 의상대를 세우고 수행했으며, 677년에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연주암이란 사찰 이름에 대해선 두 가지 유래가 전한다. 첫 번째는 고려 말 충신이었던 강득룡, 서견, 남을진 등이 고려가 멸망하자 의상대에 숨어 살면서 멀리 개성을 바라보며 고려왕조를 그리워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조선 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맏아들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유랑길에 나섰다가, 관악사를 찾아와 수행하면서 40칸 규모의 건물을 지어 궁궐이 잘 보이는 현재 위치로 거처를 옮겼다는 것. 이후 사람들이 두 대군의 심정을 기리는 뜻에서 의상대를 연주대, 관악사를 연주암으로 부르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끼 속 작은 열대우림

연주암의 전설을 뒤로한 채 발길을 낙성대 방향으로 돌렸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만큼 가파르진 않다. 박새와 쇠딱따구리의 앙증맞은 지저귐에 발맞춰 10여 분을 내려오면 안국사 둘레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계수나무 여럿이 누가 더 큰지 뽐내고 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어릴 적 어머니 품 안에서 이 노래를 들어야만 편히 잠잘 수 있었던 기억이 어슴푸레 떠올랐다. 계수나무는 사랑의 나무이기도 하다. 낙엽에서 나는 ‘달고나’ 향기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청춘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계수나무 아래서 사랑을 고백하면 향기에 취한 탓인지, 계수나무의 아름다움에 빠진 탓인지 상대방은 안 넘어갈 수가 없다.

   

1 루페로 이끼를 보면 열대우림이 펼쳐진다. 2 리기다소나무는 나무 곳곳에 사람의 털처럼 잎을 내기에 쉽게 구별할 수 있다. 3 가시가 있는 리기다소나무 솔방울(오른쪽)과 매끄러운 적송 솔방울.

발걸음을 멈추고 거울을 꺼내 코에 갖다 댄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낯선 각도에서 나무들이 춤추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인간이 수평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땅 밑 작은 동물이 올려다보는 시각에서 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잠시나마 인간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연과 하나가 됐다.

관악산 숲길여행의 대미는 루페가 장식했다. 루페는 10배로 확대해서 볼 수 있는 확대경으로 ‘늑대의 눈’이라고도 부른다.

“어디가 좋을까요. 음, 저기 계수나무 아래 이끼가 가득한 곳이 좋겠네요.”

김 위원은 엎드린 채 루페를 눈에 갖다 대며 먼저 시범을 보인 뒤, 루페를 건넸다. 손으로 흙을 쓸어낸 뒤 엎드려 조심스레 눈을 갖다 대자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영화 ‘아바타’ 속 판도라 행성의 거대한 열대우림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열대우림을 보려고 굳이 브라질 아마존 유역이나 태국의 열대우림 정글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냥 지나치는 이끼에도 생명은 시퍼렇게 살아 숨 쉰다.

벅찬 감동을 가까스로 누르며 안국사 뒤편을 돌아나가면 출발 장소인 낙성대공원 관리사무소가 나온다. 출발하기 전만 해도 강하게 몰아붙였던 바람이 이젠 잠잠해졌다. 바람을 핑계 삼아 심란하게 흔들렸던 내 마음도 관악산 숲길을 거닐며 한결 안정됐다.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한 그루 나무를 보라/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 부는 쪽으로 흔들리나니.”(이외수, ‘가끔씩 그대 마음 흔들릴 때는’)

1km 남짓의 짧은 숲길이었지만 나무 이야기에 흠뻑 취해 걷는 데만 2시간이 더 걸렸다. 관악산처럼 험한 등산로도 아니어서 가족과 함께 걷기에 좋다. 숲길을 걷고, 낙성대공원에서 정성껏 준비한 김밥을 먹는다면 이보다 좋을 수 없다.

Basic info.

☞ 교통편

낙성대공원 위치 관악구 낙성대동 228번지 낙성대공원. 서울대 후문 뒷길로 걸어서 15분 소요,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4번 출구에서 500m 거리.

관음사 주변 위치 관악구 남현동 산57-48(이경직신도비)~산519-3(관음사) 일대. 지하철 2호선 사당역 5번 출구, 4호선 사당역 4번 출구에서 약 1.2km.

☞ 코스

제1 코스 공원관리소 앞→연못→안국사→자작나무 숲→소나무 숲→참나무 숲→사시나무 숲→버즘나무 숲→안국사

제2 코스 관음사 입구→이경직신도비→초화류 동산→누수식 생태연못→소나무 숲→잣나무 숲→상록수약수터→관음사에서 해산

☞ 숲 해설

참가비용 무료

운영기간 2010년 3월 6일~11월 30일

운영일시 매주 토·일요일 10:00~12:00(약 2시간)

참가대상 시민 누구나, 단체 참가신청 시 평일에도 운영

참가인원 매회 코스별 30명 내외(선착순 접수)

 

나지막한 역사의 숨소리…나무친구와 말을 트다
정릉 숲길

4월의 끝자락과 5월 초,일주일 새 두 차례나 서울 성북구에 자리한 정릉을 찾았다. 처음엔 정릉 숲길을 취재하기 위해, 다음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로 나와 버스를 타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 정릉이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10여 분을 더 걸어가야 비로소 정릉관리소가 나타난다. 입구에 들어서는 것만으로 속세와 단절되는 느낌이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나무들과 도원향을 향한 듯 펼쳐진 길 앞에 서면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게 된다. 시원한 산들바람에 웃옷을 벗어 손에 든 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몇 걸음 걷지 않아 거대한 능이 보는 이를 압도했다. 잘 가꿔진 겉모양과 달리 정릉은 우여곡절이 많은 능이다.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처음엔 현재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역이 조영됐다. 정동이라는 명칭도 정릉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강씨를 끔찍이 사랑한 태조는 강씨 봉분 오른쪽에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마련했다.

원비 신의왕후의 태생인 이방원(태종)은 신덕왕후를 무척이나 미워했다. 살아생전에도 자신의 앞길을 막더니 죽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강씨에게 이방원은 이를 갈았다. 그는 왕자의 난을 일으켜 강씨 소생의 왕자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고, 왕릉제인 병풍석이나 난간석은 봉분에서 사라진 채 현재의 위치로 천장됐다.

 

정릉을 감싼 소나무 왕권의 영원성 상징

정릉이 복구되고 종묘에 배향된 때는 그로부터 260년이 지난 현종 10년(1669)이다. 이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서 사람들이 이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고 한다.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능 주위엔 소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소나무는 십장생의 하나로 왕권의 영원성과 절개를 나타낸다. 소나무는 위로 곧게 자라며 뿌리까지 밑으로 곧게 뻗어 봉분을 헤치지 않는다. 능 앞으로는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 참나무는 종류만 300종이 넘는다. 잎이 굉장히 커 짚신을 갈 때 썼다는 신갈나무, 넙적한 잎으로 떡을 감쌌다는 떡갈나무, 가을 늦게까지 잎을 간다는 갈참나무, 도토리로 묵을 쑤어 수라상에 올렸다는 상수리나무까지 참나무는 그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재미있다.

자작자작한 개울을 건너 비로소 본격적인 숲길에 접어들었다. 물길 따라 올챙이가 머리를 들이밀며 꼬리를 흔든다. 올챙이를 비롯해 도롱뇽, 가재까지 살 정도로 물이 맑다. 하천 주위에는 물을 좋아하는 오리나무가 심어져 있다. 10리(4km)의 절반인 5리마다 심어져 위치를 나타냈다고 전한다.

개울을 따라 10여 분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정심약수터가 나타난다. 정릉 안엔 몇 곳의 약수터가 있지만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다. 예전부터 물맛이 좋고 아토피 치료에 용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입맛을 다시며 지나가려 하자 인심 좋은 아저씨 한 분이 바가지를 건넸다. 기분 좋게 물 한 잔 들이켜며 백운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옆으로 이름도 이상한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때죽나무. 특이한 이름만큼 유래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하다. 열매껍질을 짓이겨 물에 풀면 독성이 있어 물고기가 죽어 떼로 떠오르기에 그리 불렀다는 설, 열매 모양이 스님의 머리처럼 반지르르한 데다 떼로 몰려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 그리고 수피의 색깔이 검어서 때가 낀 것처럼 보인다는 유래도 있다.

1 정릉 앞으로 떡갈나무, 신갈나무 등 각종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 2 정릉 앞 개울은 올챙이, 가재 등이 살 정도로 맑은 1급수다. 3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

   

땀방울을 씻어주는 벚꽃비에 가슴이 후련

서늘한 바람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씻어낼 때마다 벚꽃비가 내렸다. 한창 벚꽃이 피는 시기는 지났지만, 왕벚나무와 산벚나무에서 이따금 내리는 벚꽃비는 저만치 멀어져가는 봄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수백 년을 사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이들 벚나무는 기껏해야 100년 남짓 살 뿐이다. 그 추웠던 겨울날 나목인 상태로 동면을 하다, 이른 봄이 오면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어 함박꽃을 피운다. 짧고 굵게 청춘을 불사르는 벚나무의 열정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길의 북동쪽 끝에 다다르면 이제부턴 오르막이다. 10여 분을 올라가자 간간이 들려오던 자동차 소리마저 아득하다. 고운 모래는 잠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게 만든다.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 곳에서 잠시 땀을 닦으며 휴식을 취했다. 잣나무는 소나뭇과의 일종으로 한군데서 5장의 잎이 나온다. 적송과 달리 잣나무는 학명이 ‘Korean Fine’이다. 잣이 귀했던 신라시대엔 잣나무 두 그루만 있어도 자식들 당나라 유학까지 거뜬히 보냈다고 한다.

인수천을 거쳐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도심 속에서 숲이 지니는 의미로 이어졌다. 김희영 숲해설사는 숲을 ‘휴식처’라는 말로 간단히 정의했다. 특히 나무친구 덕분에 숲을 더욱 사랑하게 됐다고 한다.

“나무친구를 만들어 속 깊은 사귐을 나누세요.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을 이 친구에게 털어놓고 위안을 받는 거예요.”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놀이 상대가 돼주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지만, 인간들에게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무에게 잠시나마 기대고 싶어졌다. 백록담을 지나 출발지에 도착할 즈음 눈앞에 36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들어왔다. 이 나무를 나무친구로 삼아볼까. 행여 다른 사람이 친구로 찜해둔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친구라고 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죠. 나무어른이죠.”

겸연쩍어 괜스레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개를 돌리자 참나무 한 그루가 눈짓을 보냈다.

‘그래, 앞으로 네가 나의 친구가 되어줘.’

1시간에 걸친 정릉 숲길의 마지막은 나무친구를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만남의 순간은 짧았다.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것이 이내 마음에 걸렸다. 다음 주말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5월 2일 일요일 아침 정릉 숲길을 다시 찾았을 때, 누구보다 반갑게 맞이한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나무친구였다.

Basic info.

☞ 교통편

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 6번 출구→아리랑고개 방향 버스 승차→ 정릉 앞 하차, 10여 분 도보→정릉관리소

☞ 코스

정문→정릉→정심약수→백운정→인수천→백록담→정문, 2.5km

☞ 숲 해설

수~일요일 1차 10시 반~11시 반, 2차 14시 반~15시 반, 3차 16시 반~17시 반

매달 둘째, 넷째 토요일 1차 10시 반~11시 반, 숲 체험 프로그램 14시~15시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