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림만 프로젝트, 30여년 만에 재기되나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아시나요?
가로림만이 다시 한 번 주목 받고 있다. 고(故)박정희 대통령 정권 시절 청와대 제2 경제수석비서관을 지낸 오원철(82)씨가 최근 한 언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새삼 가로림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행정수도 건설과 함께 국토의 균형개발을 위해 박 전 대통령이 추진한 국토개발안으로 계획된 ‘가로림만 프로젝트’에 대해 오 전 경제수석은 인터뷰에서 “국가 전체로 볼 때 그냥 방치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란 말로 가로림만의 무한 가능성을 내비췄다.
그렇다면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담고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
가로림만, 행정수도 배후 도시와 공업기지 최적지
오 전 경제수석은 한 언론매체와 나눈 인터뷰에 따르면 1977년 당시 청와대는 수도권의 인구 집중 현상을 막기 위해 행정수도 건설의 일환으로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진행해 현재의 태안군과 서산시에 포함된 가로림만 일대를 행정수도의 배후 도시와 중부공업기지의 최적지로 꼽았다고 전한다.
이유는 이 지역이 안으로는 국토의 허리에 위치해 물류비용을 최소화하고 밖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초대형 화물선이 이동하는 허브로서의 역할이 가능하다는 판단에서란다.
입지조건에 있어서도 20만톤 이상의 대형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 후보지며, 수심이 깊고 항만에 필요한 지형적 구조가 잘 갖춰져 있어 원유, 석탄 등 대형 화물선을 통해 운반되는 물류를 받아 동북아 전역에 나눠주는 역할이 가능했다고 한다.
오 전 경제수석이 밝힌 논리는 이렇다. 가로림만에 건설될 공업기지는 창원 공단의 10배에 달하는 1억 ㎡(3억평) 규모에 400만 정도가 거주할 공간과 원스톱 생산이 가능하고 국내적으로 항구화 공업기지가 건설되면 수송비를 대폭 줄이는 효과와 상대적으로 낙후된 서해안 개발에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인터뷰에서 오 전 수석은 “당시 청와대가 검토한 바에 따르면 가로림만은 20만톤급 대형선박의 정박이 가능하고 주변 야산지대를 등에 업고 넓은 공업기지를 형성하기에 적합하다”며 “특히 가로림만은 오랜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수심(20m)이 깊고 방파제가 필요 없을 정도로 파도가 안정돼 있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당시 전담팀은 가로림만에 중부종합공업기지가 건설될 경우 수도권과 행정수도의 관문이 될 것으로 예측하고 인천, 반원, 군산 목포 등 서해안에 위치한 여러 항구의 모(母)항 역할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통해 낙후된 호남과 충정지역의 소외감이 자연스럽게 해결 될 것이고, 행정도시 이전 시 이를 지탱해줄 대규모 공업기지가 배후에 필요했기 때문이란다.
오 전 경제수석은 “그때는 수출 주도의 정책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러자면 국제 물류의 원활한 이동이 핵심 과제였다”며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원료를 수입하고 여기서 만들어진 제품을 내다팔기 위해서는 커다란 항구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행전수도 이전과 함께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추진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지역을 향후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독립된 도시국가로 운영해 중국, 일본 , 동남아 지역 국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통일 이후에도 물류 중심지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는 것이다.
‘가로림 프로젝트’,구체적 계획 세워졌지만 끝내 중단
앞선 이유로 박 전 대통령이 직접 가로림만 현지를 답사하기도 했다. 오 전 경제수석은 청와대 제 2경제수석실에서 가로림만 프로젝트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이후 1977년 중부공업기지 건설안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이 고(故) 정주정 회장을 동행한 채 헬기로 가로림만 일대를 직접 현지를 시찰했다고 설명한다.
오 전 경제수석은 “당시 박전 대통령이 시찰 후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토도록 하라고 지시했다”며 "정 회장도 당시 가로림만에 종합제철소 건설을 구상했고 가로림만 입구의 땅을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고 말했다.
이후 1978년 12월에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 계획이 수립돼 가로림만 인근에 산업도로가 건설됐으며, 삽교천 담수호의 경우도 이 지역에 공업요수를 공급할 계획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추진되지 못했다. 오 전 경제수석은 “당시 우리는 연구결과를 책자로 만들어 박 대통령에게 우선 보고 했다”며 “이후 종합적인 브리핑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대통령 서거소식을 접했고 이후 이곳에 건설될 제2 종합제철은 전남 광양에 세워졌다.”고 증언했다.
행정수도와 가로림만의 연관성
하지만 최근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함께 다시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거론되면서 오 전 경제수석이 밝힌 이 사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행정수도의 축소판 격인 세종시는 32년 전 우리가 다듬었던 초안보다 미숙해 보인다”며 “지금처럼 불완전한 행정수도라면 세종시는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가로림만을 활용한 공업기지가 추진된다면 굳이 행정수도를 옮기 필요가 없다”며 “서해안을 따라 호남의 경제활성화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고 경쟁국인 중국이 10만톤급 배를 정박할 곳조차 없어 2005년 심해를 파서 양산(洋山)항을 건설 한 것과 부산항도 20만톤급 배가 정박할 수 없는 것을 점 등의 정황을 고려할 때 이미 객관적인 검토가 이뤄진 사안으로 충분히 검토해볼 만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말한 소위 ‘플러스 알파’와 연관이 있냐는 질문에는 “언뜻보면 (행정수도에 있어서) 이게 플러스 알파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정치하는 분들 얘기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따라서 앞선 정황들로 살펴볼때 가로림만 일대에 박 전 대통령 시절 행정수도 이전 계획과 더불어 중점 추진됐던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새해 정부의 최대 현안사항으로 급부상할지 여부에 이목이 집중된다.
가로림만 일대는 지금?
박 전 대통령 시절 중부공업기지로 독립된 도시국가까지 계획됐던 가로림만 일대의 현재 모습은 어떠할까?
몇 년전부터 가로림만 일대에 대한 개발이 시나브로 계획돼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우선 서산시는 지난 2004년 조규선 전 시장이 가로림만 일대 북부권역을 물류와 유통, 정밀화학,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개발하겠다고 밝힌바 있다.
당시 계획에 따르면 가로림만 인근의 대산항이 ‘신행정수도의 관문’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산항 뮬류기지 구축과 배후사업도시 조성 등을 추진하고 기아자동차 공장의 조기 입주와 성연면 명천리 일대에 14만 1,900㎡(약 4만 3천평)규모로 자동차전문화단지를 조성하고 이후 2010년까지 성연면 해성리 일대 91만 800㎡(약 2만 8천평) 규모의 ‘제2 지방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것이다.
또, 최근엔 2015년까지 총까지 총 1조 6,000억원을 투자해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과 오지리 벌말 사이의 가로리만 연안에 제2 대산항과 자동차, 중화학 산업단지를 조성한다는 개발 계획도 품고 있다.
그러나 가로림만 일대 개발 계획 가운데 최근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사업은 조력발전소이다. 태안군 이원면 내리와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를 2km의 해수유통 방조제를 축조한 뒤 52만KW 규모의 발전소를 건설한다는 계획이다.
한국서부발전 산하 (주)가로림조려발전이 추진하고 있는 이 사업은 지난해 11월 국토해양부로부터 가로림만 일대 34만 3,174㎡(약 10만 3,800평)의 공유수면 매립계획을 승인받아 향후 사업추진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현재 가로림 조력발전소를 둘러쌓고 주민들과 환경단체 등은 환경파괴 문제를 놓고 찬반 양측이 모두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찬성측 입장은 “조력발전소 건설로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농어촌 사회에 새로운 수익사업을 가져 올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측 입장은 “가로림만은 서해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어장으로 후세에 물려주어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반박한다.
더불어 충남도와 서산시, 태안군 등이 최근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굴포운하를 복원하려는 계획이 맞물리면서 조력발전소 사업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특히 지난해 6월 충남도의회에서 굴포운하 연구회를 발족하면서 복원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굴포운하는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군 팔봉면 어송리를 연결하는 운하 유적으로 1134년(인종 12)년 착공하여 1669년(현종 10)까지 530여년간 계속 되었지만 결국 전체 7㎞중 4㎞만 개착되고 나머지는 완공하지 못했다.
삼남지방의 세곡을 서울로 운송할 때에는 반드시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안흥량은 수로가 매우 험난하고 암초가 많아서 사고를 방지하고 서울까지의 항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굴포운하 건설이 계획되었다.
현재 굴포운하의 유적지로 남아 있는 지역은 평균적으로 운하 밑바닥의 넓이는 약 19m이고 상층부의 넓이는 52m이며, 높이는 제일 낮은 곳이 3m이고 제일 높은 곳은 50m이다.
이외에도 충남 태안군은 신재생에너지 생산계획으로 정부로부터 이원, 원북면 일원에 16㎿급 태양광발전소와 100㎿급 해상풍력발전단지, 바이오에너지 생산시설 등이 들어서는 종합에너지특구를 공식 지정받아 바이오가스, 우드칩, 지열, 매립가스를 이용한 발전설비 5개소를 오는 2010년까지 건설하기로 계획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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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2월22일, 드디어 한국은 연간 100억 불(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했다. 목표연도는 1980년이었는데 3년을 앞당겼다. 朴正熙 대통령은 이날의 일기를 기사처럼 적었다.
<백억 불 수출의 날. 백억 불 수출목표 달성 기념행사 거행. 오전 10시 장충체육관에서 각계인사 7000여 명이 참석, 성대한 행사를 거행하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해 연간 수출액이 5000여만 불이었다. 그 후 1964년 11월 말에 1억 불이 달성되었다고 거국적인 축제가 있었고, 11월30일을 수출의 날로 정했다. 1970년에는 10억 불, 7년 후인 금년에 드디어 백억 불 목표를 달성했다. 서독은 1961년에, 일본과 프랑스는 1967년에, 네덜란드는 1970년에 백억 불을 돌파했다고 한다.
10억 불에서 백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1951~1967)이 걸렸다. 우리 한국은 불과 7년이 걸렸다. 1981년에 가면 200억 불이 훨씬 넘을 것이다. 1986년경에 가면 500억~600억 불이 될 것이다. 백억 불,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朴대통령은 이날 무엇보다도 100억 달러 수출전선에서 일한 한국 근로자들의 勞苦(노고)에 감사했다. 그는 이해 4월13일 일기에서 창원공단을 시찰한 소감을 썼는데 이런 대목이 보인다.
<모든 산업전사들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이 거룩하게만 보였다. 눈에서 사라지지를 않는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구호로 표현되었다. 국민들의 개인적 목표는 「마이 카」와 「아파트 입주」로 상징되었다. 朴대통령은 목표를 수치로 정해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념적 말장난보다는 누구도 속일 수 없는 수치를 신봉했다. 100억 불이란 수치를 맨 먼저 꺼낸 것도 朴대통령이었다.
1972년 5월30일 중앙청 홀에서 무역진흥확대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끝난 뒤 朴대통령은 전시된 수출상품들을 둘러보았다. 이날 오후 朴대통령은 청와대 집무실로 吳源哲 제2경제수석비서관을 불렀다. 朴대통령은 집무용 의자에 앉아 있다가 『吳수석, 차 한잔 들지』 하면서 방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 쪽으로 가서 앉았다. 보통은 회의용 탁자 쪽 의자에 가서 앉는데 소파에 앉는 일은 드물었다. 吳수석은 긴장했다.
『임자, 100억 불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하지?』
吳수석은 「지난 2월에 1980년도 수출목표를 50억 달러로 확정지었는데, 왜 갑자기 100억 불 이야기를 할까」 하고 의아해했다. 吳수석은 이런 때를 대비한 복안은 갖고 있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동자세를 취한 뒤 외치듯 말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와 사정이 같습니다.
그 후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때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입니다. 그 후 10년이 지난 19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의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일본 수출의 主力(주력)상품이 되었습니다』
朴대통령은 생각에 잠기더니 『자료를 갖고 와서 다시 설명해』라고 말했다.
吳수석은 사무실로 돌아와 우선 朴대통령의 국가운영에 대한 철학과 전략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朴대통령의 저서와 연설문을 다시 읽어 보고 그가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朴대통령은 우리의 역사적 과업을 민족의 중흥과 평화통일로 설정하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은 富國强兵, 즉 국력증강이다. 국력의 바로미터는 수출이다>
유신은 수단,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
吳수석은 며칠 뒤 金正濂(김정렴) 비서실장과 함께 朴대통령에게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보고했다.
『일본은 1957년 중화학공업 선언을 하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했습니다. 1957년에 일본은 산업구조상 중화학공업 비율이 지금의 우리나라와 같은 43%였습니다만 10년 뒤엔 78%가 되었습니다. 수출품목에서 차지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도 1955년엔 41%였는데, 1967년엔 67%로 늘었습니다.
중화학공업 유치에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와 경쟁관계에 있는 동남아 국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의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단순조립 공업은 임금이 올라가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한국의 임금상승률은 대만을 앞지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만보다 더 빨리 중화학공업을 이룩해야 합니다』
옆에서 金正濂 실장은 『각하, 자금 문제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내자 동원은 별 문제가 없고, 외자는 수출이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합니다』라고 말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朴대통령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吳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도록 해보지』
朴대통령은 金실장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중화학기획단 구성에 대해서 내각에 지시하시오』
朴대통령은 초인종을 누르더니 비로소 커피를 시켰다. 기분이 대단히 좋을 때 하는 행동이다. 吳수석은 설명을 덧붙였다.
『중화학공업을 건설하게 되면 남성 기능공이 주역이 됩니다. 일자리가 많아지고, 급료도 여성 기능공보다 많아집니다. 그래서 국민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민소득도 급상승합니다』
吳수석의 이날 보고가 1970년대 한국의 가장 중요한 발전 테마가 되는 중화학공업 건설의 시작이었다. 이 大사업이 朴대통령이 던진 「수출 100억 불」이라는 화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1972년 상반기 朴대통령은 남북회담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그리고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을 준비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朴대통령이 그해 10월17일 유신조치를 통해서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국회를 해산한 뒤 유신체제를 발족시킨 배경을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된다.
朴대통령은 유신체제 수립의 당위성을 7·4 남북공동 성명을 만들어 낸 남북회담과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한 체제정비에 두었으나, 유신체제의 실질적 목표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해 한국을 선진국 문턱으로 밀어 올린다는 것이었다.
吳수석 같은 이는 『중화학공업 건설을 위해서 유신체제를 선포해 국력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金鍾泌 前 총리도 『朴대통령으로부터 「삼선개헌과 유신체제의 목적은 중화학공업 건설에 있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권력의 집중은 수단이고, 목표는 중화학공업 건설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유신의 중간평가
吳源哲 수석은 혁신적 발상을 잘 하는 엔지니어 출신으로서 독창적인 방법으로 중화학공업 건설을 밀고 나갔다. 그 핵심은 이러했다.
<朴대통령으로부터 지시받은 「방위산업 건설 계획」, 「100억 달러 수출 계획」 「중화학공업 건설 계획」의 3개 과제를 한 시스템으로 통합한다. 즉 兵器(병기)를 생산하는 중화학공업, 수출을 하는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중복투자 방지, 건설비 감축, 작업량 확보와 가동량 증가, 평시 防産시설 활용과 戰時 병기 증산, 그리고 수출이 가능해진다>(吳源哲, 「한국형경제건설」 제7권)
유신선포 직후인 1972년 12월28일에 상공부는 수출진흥확대회의에서 100억 달러 수출계획을 보고했다. 1980년에 100억 달러를 수출한다는 계획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는 『10월 유신에 대한 중간평가는 수출 100억 달러를 기한 내에 달성하느냐, 못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행정, 생산양식, 농민생활, 국민의 사고방식, 외교, 문교, 과학기술 등 정부의 모든 정책초점을 100억 달러 수출목표에 맞추어 총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 운영의 鬼才(귀재)」라고 불리는 朴대통령은 국정운영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수치화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 부서의 역할을 명백히 한 다음에 適材適所(적재적소)의 인사를 통해서 각각의 역량을 이 방향으로 집중시켜 놓고는 그 집행과정을 제도적으로 확인하고 점검하며 수정과 독려를 되풀이했다.
朴대통령은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3년이나 단축해 1977년에 달성함으로써 이제는 1980년대의 國政 목표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이 무렵 朴대통령은 1980년대의 비전으로서 國土改造(국토개조)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겨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완충하면서 국토이용의 효율성, 특히 物流의 편의를 극대화하는 국토개조를 생각하다가 「가로림 프로젝트」(공식명칭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라는 큰 그림을 그리게 된다.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자』
행정수도건설을 위한 백지계획(案). |
1977년 2월10일 朴대통령은 서울시청을 연두 순시해 市政(시정)을 보고받고 나서 몇 가지 지시한 뒤 약간 뜸을 들인 후 조용한 말투로 폭탄발언을 했다.
『서울의 근본문제는 인구가 느는 것을 어떻게 억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잡음이 생길까 봐 이야기를 안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를 만들어 옮겨야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구체화된 것도 아니고, 위치가 결정된 것도 아닙니다.
서울에서 한 시간, 길어도 한 시간 반 정도면 오고 가고 할 수 있는 그러한 범위 내에서 인구 몇십만 명 되는 새로운 수도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인구 700만 명이 넘는 수도 서울이 휴전선과 너무 가깝게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기적인 안목에서는 통일이 될 때까지 임시행정수도로서 독일의 본 같은 그런 수도를 만드는 것이 좋다는 구상을 한 것입니다.
수도 서울을 死守(사수)한다는 개념은 추호도 변함이 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대통령과 중요한 기관은 즉시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전쟁을 지도한다는 것만 국민들이 확실히 알면 심리적 동요는 없으리라고 믿습니다』
朴대통령이 행정수도 건설을 이야기한 것은 그보다 2년 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1975년 8월2일 진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朴대통령은 기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보도금지를 전제로 말했다.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옮기는 것밖에 없다. 정치·경제·문화는 서울에 두고 행정만 옮기는 것이다』
1975년 12월 朴대통령은 李經植(이경식) 경제1수석에게 「수도권 인구억제 정책」 수립을 지시했다. 이 업무는 1976년 초 申炯植(신형식) 무임소 장관에게 넘어갔다. 申장관은 朴鳳煥(박봉환) 재무부 이재국장을 기획실장으로 영입해 이 업무를 맡겼다. 朴실장은 그해 3월 金秉麟(김병린)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불러 의견을 들었다. 金과장은 李經植 수석팀 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임시행정수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소신 있는 경제엘리트 관료로 정평이 나 있던 朴실장은 그해 5월에 끝낸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구상」에 임시행정수도案을 집어넣었다.
한편 朴대통령은 1976년 6월, 그 전해에 총리직을 그만두고 쉬고 있던 金鍾泌씨를 불러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세워 보도록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서울에서 두 시간 이내로, 가급적 금강변이며, 인구가 50만 명 정도인 행정수도 건설 계획을 짜보라」고 지침을 주었다.
金씨는 6월2일 서울大의 최상철, 주종원 교수를 청구동 자택으로 초대했다. 金 前 총리는 지도 한 장을 주면서 임시행정수도의 입지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崔교수팀은 서울 타워호텔에서 3주간 비밀작업을 해 미니 차트를 만들어 金 前 총리를 통해서 6월22일 朴대통령에게 올렸다. 차트의 명칭은 「N.C(New Capital)」였다.
『백지계획을 짜라』
吳源哲 수석은 임시행정수도 건설, 가로림만 프로젝트를「2000년대의 국토구상」으로 종합, 국토개조를 위한 청사진을 만들어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
1976년 7월22일 申炯植 무임소 장관은 朴실장과 함께 대통령과 총리(崔圭夏) 이하 관계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수도권 인구 재배치 구상」을 보고했다. 이 보고에 임시행정수도 건설안이 들어 있었다. 대전·청주·조치원 삼각지대 인근에 인구 50만 명 규모의 행정수도를 만들되 통일 후에는 서울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듣고 대단히 만족했다.
『이렇게 많은 대학과 대학생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 것 아닌가. 실은 나도 2, 3년 전부터 저 문제를 생각했어요. 6·25가 끝난 뒤 저 정도의 자리에 새로운 수도를 만들어야 했어. 서울로 되돌아와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저 방법 외에 무슨 방법이 있어?』
그 한 달 뒤인 8월18일 朴대통령은 金載圭 건설부 장관과 김의원 국토계획국장을 불러 관련자료를 넘겨주고 입지기준을 제시하면서 행정수도건설계획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朴대통령이 직접 메모해 불러 준 임시행정수도 입지기준은 이러했다.
<휴전선을 고려할 것, 서울에서 두 시간 거리일 것, 경부선 주변 도로망이 좋은 곳일 것, 水源(수원) 확보가 용이할 것, 30분 내지 1시간 내에 기존 중심도시로 접근이 용이할 것, 優良(우량)농지가 적을 것, 排水(배수)가 좋고 낮은 구릉 야산지대일 것, 20~30분 거리에 비행장 건설이 가능할 것, 50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을 것, 문화재 등 기존 특수시설이 철거되지 아니할 것>
건설부는 보고서를 올리면서 朴대통령에게 『범국가적인 사업이니만큼 새로운 임시기구를 만들어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이상이 朴대통령의 연두 순시 공개 발언이 있기 전 진행상황이었다. 朴대통령의 발언으로 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공개된 직후인 1977년 3월7일 朴鳳煥 실장은 朴대통령에게 「수도권 인구 재배치 기본계획안」을 올려 결재를 받음으로써 임시행정수도 건설은 국가기본계획으로 확정되었다. 朴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행정수도 건설에 관한 지침을 구체적으로 내렸다.
<첫째, 행정수도 건설은 아무리 빨라도 앞으로 10년, 혹은 그 이상이 걸릴 것이다. 국방력 증강 등 다른 중요사업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무리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
둘째, 백지계획부터 수립한다. 작성기간은 2년 정도로 하되 청와대가 직접 담당한다.
셋째, 수도의 이전은 예산 범위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수행한다.
넷째, 백지계획 업무는 중화학공업기획단장 책임下에 추진토록 하며 오늘 수도권인구계획을 성안 보고한 朴실장이 기획단으로 옮겨 吳수석을 보좌하도록 한다>
방위산업 건설, 중화학공업 건설을 책임진 吳源哲 제2경제수석은 또 일복이 터진 것이었다. 그는 朴鳳煥씨를 중화학공업기획단 부단장으로 임명하고 그 밑에 10명의 실무기획팀을 구성했다.
결단을 망설이는 대통령
백지계획이란 立地를 생각하지 않고 이상적인 도시계획을 한 뒤에 행정도시가 들어설 곳이 확정되면 거기에 맞게 수정해 확정계획을 세우는 방식이다. 기획팀에 참여했던 金秉麟씨에 따르면 1977년 5월경에 吳源哲 수석이 충남 공주군 長崎面(장기면) 일대를 想定(상정)한 백지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장기면의 남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이 지역을 가르는 대교천이 금강으로 들어간다. 북쪽엔 국사봉, 남쪽엔 장군산이 있다. 서울의 북한산·남산·한강축과 비슷한 지형이다.
吳수석은 장기면의 동서 12km 구간을 행정도시 축으로 설정했는데, 이곳은 서울 청량리-신촌의 12km 축과 비슷했다. 언덕이 많고 농지는 적으며 低지대가 아니라서 適地란 것이었다. 金씨는 『이 지역의 남북 간격이 좁고 구릉지가 완만하지 않아 공사비가 많이 들며, 북쪽이 낮고 남쪽이 높아 문제가 있다』고 반대했으나 吳수석은 『많은 곳을 조사했으나 그만한 지역이 없다』고 했다. 盧武鉉 정부가 확정한 행정복합도시 입지는 吳源哲 팀이 想定(상정)했던 장기면과 일부 겹치되 동쪽으로 약 5km 밀려난 곳이다.
吳씨는 『풍수지리적으로도 우리가 정했던 곳이 낫다. 이번에 정한 곳은 低지대이고 지하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어 걱정이다』고 했다. 吳씨는 『朴대통령이 임시행정수도 건설이라고 했지만 청와대도 옮기는 사실상의 遷都(천도)였다』고 했다. 청와대가 들어갈 자리에는 경회루와 똑같은 연못도 마련했다고 한다.
―전쟁이 났을 때 먼 곳에서 지휘를 할 수 있습니까.
『전쟁 지휘소는 일선에서 떨어진 곳에 있어야 합니다. 서울이나 사령부가 일선 가까이에 있으면 敵을 유혹합니다. 서울을 기습해 포위한 다음 停戰(정전)하자고 제안하면 큰일 아닙니까. 땅굴도 서울이 가까우니까 뚫는 것이고. 수도가 대전이라면 뚫겠습니까』
吳수석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백지계획이 거의 마무리될 때쯤인 1996년에 올림픽을 유치하기로 하고, 경기장을 계획도면에 집어넣도록 지시했었다고 한다. 吳源哲씨는 통일 이후에도 新행정수도가 통일한국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획을 짰다고 말했다.
『북한이 적화통일하면 평양이 수도가 되는 것이고, 자유통일을 하면 그대로 가는 거지요. 이유는 간단해요. 북한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게 그쪽은 동해안도 서해안도 좋은 항구 자리가 없어요. 동해안은 수심이 너무 갑자기 깊어져서, 서해안은 얕아서 그렇죠. 북한은 통일이 되어도 좋은 항구가 있는 남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쪽은 물건을 만들고 남한을 통해서 수출해야 할 운명이지요.
한국은 해양국가라는 원칙이 지리적으로 이미 나와 있습니다. 한반도는 어디까지나 남한이 중심입니다. 장기면이 내륙이라도 가로림만이 서울에 대한 인천 역할을 하는 거지요』
吳씨는 新행정수도 건설은 국민투표로 결정할 문제라 생각하고 그 준비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朴대통령이 결정을 미루는 것이었다. 장기면을 朴대통령이 시찰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입지를 공식적으로 결정하려 했는데 대통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朴대통령은 헬기로 국토개발 현장을 시찰하고 와선 『꼭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말을 할 만큼 건설과 토목에 취미가 있었다.
吳수석은 대통령이 유신체제와 1970년대의 宿願(숙원)이던 중화학공업 건설을 궤도에 올려놓은 다음엔 국토개조와 그 핵심인 遷都에 착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吳씨는 「대통령을 했다는 것과 遷都를 했다는 것은 역사에 어느 쪽이 더 높게 평가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래서 朴대통령이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가 10·26 사건을 맞았다」고 보고 있다.
吳源哲씨는 가로림만 일대를 싱가포르와 같은 거의 독립국 수준의 선진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 800만 명을 입주시키면 한국 전체 GDP의 약 30%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다. |
『수도분할은 후진의 길』
하나 흥미로운 것은 吳源哲 前 수석을 비롯해 행정수도 백지계획에 참여했던 사람들일수록 盧武鉉 정부의 遷都 계획과 그 뒤의 이른바 수도분할式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부정적이란 점이다. 吳씨는 이렇게 말했다.
『행정기능을 분할해 일부만 옮긴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연방국가인 미국이 만약 행정부처를 각 州(주)에 나눠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행정기능 분할은 효율성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킵니다.
행정이란 것은 지휘소가 분명해야 카리스마가 생기고 명령에 따라 딱딱 움직입니다. 나눠 놓고 싸움만 한다면 일이 됩니까』
임시행정수도 실무팀에 근무했던 유원규(現 우정건설 부회장)씨는 이렇게 썼다.
<혹자는 행정수도는 충청권으로 옮기고 경제중심지로 계속 키워 나간다고 주장하지만, 미국과 같은 나라는 연방형 국가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州정부가 자치권을 명실공히 행사하고 있어 政經분리가 잘 기능하고 있는 반면 우리나라는 연방제도 아니고 地自體의 分權도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政經일치로 움직이고 있어 행정수도가 건설되면 경제도 옮겨 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수도 서울은 최악의 상태로 되어 버릴 것이고, 신행정수도에 정부기능과 민간기능이 이전하면서 政經일치로 체계를 갖추는 상당기간은 혼돈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이 기간 우리나라는 국제경쟁대열에서 뒤처지리라 예상된다>(「임시행정수도 백지계획은 살아 있다」. 해토 출판)
上海港의 확장으로 부산港이 경쟁력을 잃게 되더라도 가로림만에 대형 항만을 만들면 上海港보다 우세한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
균형감각
朴正熙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은 독점과 경쟁을 적절하게 배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 모든 성공조직과 인간은 상반되는 요소와 성격을 균형 있게 통합·활용·조정해 시너지 효과를 올리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朴대통령의 인간됨 자체가 수줍음과 강인함, 엄정과 관용, 理와 氣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통합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략과 정책에서도 그러했다. 1970년대 朴대통령의 중화학공업 건설과 방위산업 건설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면서 이 사업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던 吳源哲 경제제2수석비서관은 朴正熙식 「독점과 경쟁의 배합 전략」을 이렇게 정리했다.
<1960∼1970년대에는 수요가 부족해서,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규모에 미달하는 공장이라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국제경쟁력이 없는 공장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생산 제품은 국제 가격보다 비쌀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럴 때는 하루 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으로 키워 나가는 것이 우선적 과제였다. 즉 독점은 국제경쟁력이 생기고 난 후의 문제라는 뜻이다.
이 독점 공장이 일단 국제규모화가 된 후에는 즉시 또 하나의 회사를 설립해서, 경쟁체제로 가야 한다는 것이 朴대통령의 방침이었다. 그래야만 善意의 경쟁이 일어나서, 품질향상과 가격引下가 이뤄지고, 국제경쟁력 강화가 계속된다는 이론이었다.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이었다>.
1973년 1월12일 朴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 선언을 할 때 「제2의 석유화학과 제2의 종합제철」을 건설한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중화학공업 건설에서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을 2대 기본공장으로 설정했다. 여기서 생산된 제품이 한국 공업구조 전체의 기본 소재로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제2석유화학 단지는 麗川(여천)에 건설되어 민간업체 간 경쟁체제로 들어갔다. 종합제철만큼은 포항종합제철 하나만 존속되어, 독점체제로 남게 되었다. 포항 제철소가 확장을 계속하다 보니 입지여건상, 포항에서는 증설이 어렵게 되었다. 종합제철을 건설할 만한 다른 입지를 선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석탄과 철광석을 호주나 캐나다에서 수입하려면 20만t급의 화물선을 이용해야 수송비가 낮아져서 생산원가가 내려간다. 20만t급 화물선이 출입할 수 있는 항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連關團地(연관단지)까지를 생각하면 1000만 평의 공장용지가 필요하다
加露林灣(가로림만)의 발견
제2종합제철 입지선정 작업을 하고 있을 때,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계획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1976년부터 그는 「행정수도건설 계획과 이에 따른 국토개편 계획」을 수립 중이었다. 이때 전국 인구의 再배치 문제가 큰 과제로 등장했다. 농촌으로부터는 계속 인구가 빠져 나오는데, 2000년대 초까지 1500만 명이 될 것이란 계산이 나왔다.
이 중 기존 공업 基地(기지), 즉 포항·울산·창원·巨濟·구미·여천·溫山의 7대 基地에서 한 基地당 50만 명의 인구를 흡수한다고 계산하더라도 흡수 가능 인구는 35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약 1000만 명에게는 새로운 공업지구를 건설해서 일자리를 마련해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농촌에서 빠져나오는 인구는 서울 등 대도시로 모여들 것이다.
吳源哲 수석은 국토개편 작업을 하면서 획기적 개념의 공업지구를 구상하게 된다. 그 전에 吳수석이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한국 기계공업의 메카로 불리는 창원공업기지였다. 吳수석은 창원공업기지만 한 공업기지를 10개 이상, 한 지구 內에 건설하는 거대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지구엔 초기 400만 명, 최종적으론 8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약 3억 평이라는 토지가 필요하게 된다. 물론 20만t급 대형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끼고 있어야 한다.
1978년 어느 날 吳수석은 그런 조건의 땅이 있으리라고는 크게 기대도 하지 않은 채, 행운만 바라며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大항만을 건설할 자리를 알아보려고 海圖(해도)를 구해서 전국의 해안지대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상적인 장소를 발견한 것이다. 黃海에는 큰 항구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는데, 이렇게 이상적인 장소가 있다니, 이런 것을 天運이라고 하나 보다. 20만t급 배 여러 척이 정박하는 데 문제가 없고, 배후에는 넓은 野山지대가 있었다.
나는 全엔지니어링의 鄭鎭行(정진행)씨로 하여금 곧 현지답사를 하라고 지시했다. 鄭씨는 창원공업기지, 구미공업기지의 토지계획안을 수립했고, 그땐 행정수도 계획안을 작성 중이었다>(吳源哲씨의 최근 메모)
현지답사 후 확신을 갖게 된 吳수석은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각하! 오늘은 참으로 좋은 소식을 보고 올리겠습니다. 서해안에서 20만t급 배를 정박시킬 수 있는 항만 자리를 발견했습니다』
朴대통령은 금세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어디야?』라고 되물었다.
『可露林灣(가로림만)입니다. 가로림 만은 그 넓이가 바다와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 灣 안으로 막대한 양의 潮水(조수)가 매일 드나들다 보니, 입구가 파여 水深(수심)이 20m가 넘습니다. 20m의 수심이라면, 20만t급 화물선이 출입 가능합니다. 방파제도 필요 없습니다. 부두 岸壁(안벽)만 건설하면 되는데, 안벽을 만들 수 있는 길이도 9000m나 됩니다. 실로 보기 드문 이상적인 항만 자리입니다. 그 외에 10만t급 선박이 정박 가능한 항만을 건설할 수 있는 장소도 그 주위에 있는데, 이곳의 안벽 길이가 2000m나 됩니다. 이것만 해도 대단히 큰 항만이 됩니다』
중부종합공업기지 구상도. 창원기계공단의 8배나 되는 부지에 5개의 항만을 만들어 80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완공되면 제2의 싱가포르가 된다. |
『싱가포르를 능가합니다』
吳수석은 도면들을 펼쳤다. 도면에는 5개의 항만 자리가 표시돼 있었다. 朴대통령은 이 도면들을 한참 보고 있었다.
『각하! 이만하면 동양 최대의 항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황해에서 가장 큰 항구가 上海(상해)인데 그 수심은 10m에도 못 미칩니다. 대대적인 준설 공사를 하더라도 5만t급 화물선 정도가 겨우 출입 가능합니다. 그 외에 황해에 있는 靑島나 天津이나 大連, 북한의 남포항 등은 2만∼3만t급 항만에 불과합니다.
더욱이 가로림만 주변에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야산지대가 많습니다. 3억 평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정리하면 공장대지 또는 주택용지로 사용할 수 있는데, 400만~8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됩니다』
설명의 내용이 중대해지자, 朴대통령은 얼굴을 들고 그를 직시했다. 吳수석은 보고를 계속했다.
『각하, 싱가포르도 이만한 항구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싱가포르의 국토 면적은 685.4km2로서, 2억 평 정도입니다. 이 안에서 300만∼400만 명 정도의 인구가 경제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가로림만을 개발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싱가포르의 1.5~2배가 되는 공업지대를 국토 안에 새로 건설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환언하면 싱가포르의 두 배가 되는 항만과 공업지구가 우리나라에 예속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토종합개발 계획상의 효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산업지구는 浦項·蔚山·釜山·창원·여수灣 등 동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이들 산업 벨트에서 생산되는 鐵鋼材(철강재), 석유화학제품 등의 소재나 원료 등은 긴 거리를 수송해서 서울이나 수도권 및 기타 전국에 산재하는 공장에서 가공한 후 또다시 부산港 등으로 수송해서 수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철강재는 重量物(중량물)이라서 수송비가 많이 듭니다. 이에 반해 앞으로 건설될 중부공업기지는 수도권이라는 대규모 消費地(소비지)와 인접해 있으므로, 공업의 효율화를 가일층 촉진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현재 서울이나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공급원은 호남권과 중부지방입니다. 중부공업기지는 이들 지방의 遊休(유휴) 노동력을 흡수하는 데도 크게 작용할 것이며, 아울러 호남권과 충청권의 공업발전 및 지역개발에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중부공업기지를 중심으로 해서 북쪽은 수도권까지, 남쪽은 호남지방까지의 거대한 서부공업지대가 새로 구축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가로림 港灣을 중심으로 해서, 仁川항·아산만·비인만·長項항·群山항·木浦항·麗水항 등을 연결하는 경제적이고 편리한 해상교통망이 짜임새 있게 구성될 것입니다. 장차 우리나라의 공업지구는 서부공업벨트와 동남공업벨트로 양분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호남이나 충청도의 소외감도 완전히 소멸될 것입니다』
朴대통령은 이 보고를 다 듣고도, 아무 질문이나 의견을 달지 않았다. 『한번 가보도록 하지』라고 딱 한 마디 했다.
가로림만 시찰
吳源哲 수석은 임시행정수도의 관문항만으로서 가로림만 일대를 개발함으로써 京釜축선과 맞먹는 중부경제권을 형성하려고 했다. |
며칠 후 朴대통령 일행은 헬기를 탔다. 일행 중에는 현대의 鄭周永 회장도 끼어 있었다. 도착지는 충남 서산군(당시) 가로림만 북쪽 입구 모래둑. 허허벌판에 집 한 채 없고 사람의 발길조차 뜸한 곳인데 바람이 셌다. 가로림만의 물은 푸르다 못해 검정빛이 돌고 있었는데, 물결치는 파도가 요란해서 넓은 바다 그대로였다. 넓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가로림만 입구의 남쪽에 돌산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朴대통령은 빙 둘러보고는 『과연 넓긴 넓구먼』이라고 했다. 동쪽 멀리 끝자락에 높게 보이는 산이 있었는데, 산꼭대기에는 공군 레이더 기지의 둥근 안테나가 보였다. 일행은 바람을 피해, 모래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에서는 몇 사람의 일꾼들이 메주 덩어리만 한 돌들을 파내고 있었다. 朴대통령이 『무엇에 쓰려고 하오?』라고 묻자, 이들은 하도 깡 시골에 사는지라 朴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한 듯 일을 계속하면서 『硅石(규석)입니다. 품질이 세계 최상이지요. 몽땅 수출합니다』라고 대답했다.
朴대통령은 다시 헬기를 타고 가로림만 주위를 한 바퀴 돌고는, 공군 레이더 기지에 착륙했다. 거기서 가로림만을 바라보니, 얕은 야산들이 해변까지 계속 이어 나갔는데, 가로림만의 윤곽은 너무 멀고 커서 알아보기 힘들었다. 朴대통령은 『꼭 조선시대의 烽燧臺(봉수대)에 올라온 것 같구먼』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기지內를 돌아보고 장병들을 위로했다. 대통령은 돌아오는 헬기 안에서 金正濂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건설부에 지시해서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토록 하지』
이것이 이날의 시찰 결과였다.
며칠 지나서 현대의 鄭周永 회장이 吳源哲 수석을 찾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내 나이 칠십인데 이제부터 큰일을 또 한번 시작해 봐?』
吳수석이 『무슨 뜻이오?』라고 하니 鄭회장은 『종합제철을 내가 해볼까 해』라고 했다. 吳수석이 『대통령의 내락은 얻은 것이오?』 하니 鄭회장은 빙그레 웃고 답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검토는 해보지」라는 정도의 뜻은 받은 것 같았다. 당시 현대그룹에서는 각종 대형 토목 공사, 많은 아파트 공사, 플랜트 건설, 선박 건조, 자동차 생산 등으로 철강재 수요가 많았다. 현대그룹은 자금력도 있었다. 이런 이유로 현대는 종합제철을 원했고, 그 뜻을 대통령에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吳수석은 그래서 朴대통령이 가로림만을 시찰할 때 鄭회장을 동행시켰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보았다. 여하간 鄭회장은 가로림만에 대해서 그 가치를 직감적으로 파악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吳수석이 나중에 들으니 鄭회장은 지난번 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에 있는 돌산(石山)을 구매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가로림만을 개발하자면 앞으로 많은 암석이 필요하게 될 터인데, 암석을 구하는 길은 그 돌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1978년 12월 吳수석은 중화학기획단을 시켜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이란 125페이지짜리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신행정수도의 關門
산업도로는 곧 착수돼서 완공을 보았다. 중부공업기지에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도 완공했다. 바로 그날 朴대통령은 세상을 떠난다. 그 후, 제2종합제철은 현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포항제철 소속의 제2期 제철소는 중부공업기지에 입주하지 않았다.
포항제철의 제2공장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에서 여천 석유화학공업基地의 확장 예정지로 잡아 놓았던 光陽에 건설되었다. 그 대신 加露林灣에는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그리고 삼성석유화학이 들어섰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의 입지가 서로 바뀐 것이다.
2004년 9월, 吳源哲 前 수석은 加露林灣으로 가서, 朴대통령이 시찰했던 바로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보았다. 그곳 바닷가, 종합제철소 예정지였던 곳에는 현대와 삼성의 석유화학 공장들이 널찍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작은 항만 하나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리고 항만 입구에는 해안 경비용 탱크 한 대가 加露林灣을 혼자서 지키듯, 포신을 높이 들고 버티고 있었는데, 光化門 앞 해태像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2004년 11월 호주에서 개최된 「朴대통령 서거 25주년을 기념하는 포럼」 때의 일이다. 회의는 朴대통령이 벌였던 30∼40년 전의 일에 대해 贊否가 엇갈리는 논쟁을 계속했다. 吳源哲씨는 『미래에 대한 朴대통령의 이야기도 나와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주최 측에 부탁을 해서 회의종료 전 30분의 시간을 얻어 즉석 강연을 했다. 제목은 「가로림만 프로젝트」였다.
吳 前 수석이 새삼 加露林灣 프로젝트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된 것은 최근 발생한 새로운 국면 때문이다. 盧정권이 공주-연기 지방에 행정복합도시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일과 중국 상해항의 개발로 부산항의 경쟁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吳源哲씨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이 두 가지 요소를 한꺼번에 해결하고 보완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중화학기획단에서 만든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 보고서도 그때 朴대통령이 추진했던 행정수도 건설과 이 계획을 연결시키고 있다.
<대전 부근에 위치하게 될 2000년대 신행정수도의 형성에 따라 本종합공업기지는 新수도와 강력한 張力(장력)을 유지할 것이다. 본 계획지에서 新수도에 이르는 간선 도로망이 구축되어 도시 간 소통이 원활하게 될 것이며, 본 계획지는 경제적 측면에서 新수도로, 新수도는 문화적 측면에서 계획지로 상호 상승효과를 부여함으로써 중부권은 국토의 중심적 기능을 발휘하며, 이에 따라 본 계획지는 바람직한 국가기간산업의 中核기지가 될 것이다>
이 논리를 진행 중인 공주-연기 행정복합도시 건설에 적용한다면 가로림만 기지는 이 도시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공업특구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세계 최대의 산업기지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가로림만에 대규모 공업특구가 들어설 경우 몇 가지 점에서 결정적 優位(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첫째, 이 공업특구에서 생산되는 물건의 상당량은 수도권에 공급되거나 수출될 것인데, 서울과 가깝고 항만이 좋아 물류비가 아주 적게 먹힌다.
둘째, 노동력도 호남권과 충청권에서 확보할 수 있다.
셋째, 깊은 바다에 면하면서 넓은 평야지대를 갖고 있어 400만 명이 수용될 수 있다(지금은 800만 명 가능). 개발지역을 표고 80m 이하, 경사도 30% 이하로 한정해도 공업지 약 5800만 평, 주거지 약 6360만 평, 상업 업무용지 약 610만 평, 공원녹지 약 4030만 평, 기반시설 약 2100만 평이 나오고, 자연녹지 등으로 약 1억1000만 평이 남는다.
吳 前 수석은 『현재 한국에서 남아 있는 마지막 要地(요지)이기 때문에 이를 소중하게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8년 吳수석 팀이 만든 보고서에는 이 산업기지에 유치할 업종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공업
▲해외 원료 의존도가 높은 공업
▲원자재 및 제품수송에 항만시설을 요하는 공업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높은 공업
▲대규모 공업용수를 필요로 하되 회수율이 높은 공업
이런 기준에 따라 이 산업기지에 유치하기로 한 공장은 세계적인 규모로서 「이슬숲」이란 뜻을 가진 加露林灣이 세계에서 가장 큰 중화학 산업기지가 되도록 계획했다. 종합제철소는 연간 2000만t 생산 능력을 가진 부지 500만 평, 철강 관련산업 부지는 360만 평, 기계공업은 국내 총수요의 37%를 공급할 수 있는 규모로 하고 부지는 820만 평, 자동차공장은 年産 50만 대로서 부지는 120만 평, 非鐵금속 공장 부지는 240만 평, 석유정제 업종의 부지는 300만 평, 석유화학공업 시설은 에틸렌 기준 年産 200만t 규모로 하여 부지가 300만 평, 전기전자 공업은 전국 수요의 15%를 감당할 것으로 계산하여 300만 평, 기타 화학공업은 전국 수요의 10%로 잡고 부지가 210만 평이었다.
이 보고서는 「개발전략」 항목에서 가로림만 일대를 「새로운 지역사회를 창조한다」는 개념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회계층, 연령별 주민 대다수가 지역의 산업구조에 유기적인 결합을 갖고 적극적인 형태로서 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지역사회를 건설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 가로림만 기지의 핵심은 항만이다. 이 거대한 기지에서 연간 발생하는 물동량은 5408만t으로 예상되었다. 이를 처리할 항만은 다섯 개 만든다. 가장 큰 것은 안벽의 길이가 9000m이고, 20만t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수심 20m 항만이다.
이 기지가 필요한 電力은 400만~500만kw로 추정되었다. 현재 한국 전체 전력 생산량의 약 10%에 해당한다.
독립국 수준의 자유지역으로
지금 가로림만 일대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1978년 이후 상황은 吳源哲 수석이 예상했던 방향으로 크게 변했다. 중국의 경제성장, 韓·中무역의 급증, 서해안 고속도로 완공, 공주-연기 지역의 행정중심 복합도시 추진 등으로 충남 서산시를 중심으로 하는 가로림만 일대로 공장들이 몰리고 항만이 확장되고 있다.
28년 전 吳源哲 수석 팀이 가로림 지역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예측했음을 보여 준다. 문제는 현재 가로림 지역 개발이 道와 市, 그리고 기업 단위에서 단편적으로 이뤄지고 있을 뿐이란 점이다.
吳씨가 안타까워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한국에서 마지막 남은 要地인데 이곳을 귀하게 써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 국내의 停滯性(정체성)을 돌파해 21세기의 선진화 비전을 담는 기념비적 프로젝트로 만들어야 할 아까운 공간을 너무 작게, 잘게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산시는 작년 행정도시특별법이 통과되자 서산 일대를 「임해관문도시」로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가로림만권·아산만권·평택 지역에 경제자유지역을 만들고, 건설 중인 대산항(2011년 완공 때 23만 평, 8선 석, 연간 약 590만t 처리)에 이어 가로림만에 25선 석 규모의 항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가로림만권의 대산항은 1991년에 무역항으로 지정되어 현대석유화학 등 油化 3社가 民資(민자)로 개발해 유류전용 부두로 쓰고 있다. 가까운 곳에 자동차 산업지대가 들어서고 서해안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정부는 2002년부터 4374억원을 들여 2011년에 완공할 목표로 컨테이너 처리능력을 가진 항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한화그룹이 瑞山市와 함께 100만 평 규모의 서산 테크노폴리스를 조성해 550개 자동차 산업관련 첨단기술기업을 유치함으로써 2만5000명분의 일자리를 만들고 연간 2조8000억원의 매출을 올린다는 내용의 협약을 맺었다. 여기엔 3조2000억원이 들어간다. 서산시에 따르면 앞으로 5년 동안 기존공장의 증설과 새로운 공장의 입주 등으로 10조원이 이곳에 투자될 것이라고 한다.
吳源哲씨는 최근에 「중부종합공업기지기본구상」을 자주 펼쳐 보면서 朴대통령이 10·26 사건을 맞지 않고 이 거창한 계획을 밀어붙였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본다고 한다. 그는 지금 이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긴다면 1978년에 계획했던 「산업기지」 개념을 더 발전시켜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유경제특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加露林灣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0만t 선박이 출입할 수 있는 항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20만t급 선박으로 외국에서 원자재를 들여올 수 있는 산업은 여기서 하라는 겁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는 원료공급지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것으로 소재를 만들고,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여기서 또 다음 단계 소재를 만들고 하자는 것입니다.
거의 독립국 수준의 자유경제지역으로 만들어 놓고 생필품은 수입 자유화해 생활비, 교육비를 싸게 해줍니다. 외국노동자들을 데려다 써 노임을 싸게 만들면 경쟁력이 최고가 됩니다. 이렇게 잘 돌아가면 자연히 국제금융이 들어와 싱가포르처럼 센터가 되고요. 정부는 데모만 막아 주면 됩니다.
이렇게 해주면 여기에 800만 명이 입주하고 1인당 국민소득이 본토보다도 높아집니다. 3만 달러는 되어야지요. 한국 전체의 GDP 중 30%를 全국토 면적의 1%가 만들어 내는 거지요』
2030년의 가로림 FTS
吳源哲씨는 지금 이 계획이 실천에 옮겨질 경우 25년 뒤의 모습이 어떻게 될지를 상상한 시나리오를 만들어 실감을 갖도록 하고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한다. 중부공업기지가 완성되어, 가로림 自由經濟特區, 즉 가로림 FTS(Free Trade State)라는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여기에는 州정부가 있어 국방과 외교는 本國 정부에서 맡고 나머지 행정은 州정부 장관이 통괄하는 체제가 수립되었다.
2030년 가로림 FTS 장관은 현황 브리핑을 이렇게 시작한다.
『가로림 FTS의 기획은 1978년에 작성된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이라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작성된 것인데 당시 행정수도 계획과 맞물려 거대한 공업지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朴대통령 서거 후 25년간 방치돼 오다가, 행정수도 문제가 되살아남으로써 이 문제가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1990년대부터 鄧小平이 집권하고 개방정책을 개시한 후 중국의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황해연안, 즉 大連·天津·靑島, 특히 上海를 중심으로 한 양자강 연안은 日進月步(일진월보), 즉 하루가 다르게 공업화되어 갔습니다. 그 결과 막대한 수출·수입 물량이 발생해서 머지 않은 장래에 황해는 세계 굴지의 물량 集散地(집산지)가 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확실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上海港으로 변해 갔습니다. 특히 중국이 10만t급 컨테이너선이 정박 가능한 上海 洋山港을 건설하고 난 후로부터, 그 양상은 뚜렷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만회하고자 부산항 확장 등을 시도했지만, 황해 연안의 중국 항구와는 거리가 멀어서 중국에서 발생하는 물량을 처리하는 데서 차차 上海港에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가 2005년입니다.
원유값이 배럴당 60달러 선으로 급등했습니다. 원유값이 올라가면 갈수록 수송비가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수송 선박을 대형화하는 것뿐입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上海港보다 규모가 한 단계 더 큰, 20만t급 대형 선박이 정박 가능한 대규모 항만을 개발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항만 근처에 대규모 공업지구도 설치해야 되겠다」는 데로 의견이 접근해 갔습니다
세계는 계속 국제화가 이뤄지고 있는데, 당시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이 발생했는 데도, 적절한 대응을 못 하는 상태가 계속돼 나갔습니다. 그 결과 경제사정이 악화돼서, 국민생활이 어려워지고 국민들은 장래에 대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국가발전 방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 방안으로서 「싱가포르와 똑같은 성격의 자유경제특구를 시범적으로 만들어 실시해 보자」 라는 案이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는 가로림 FTS 건설에 총력을 경주했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나가고 현재는 2030년이 됐습니다. 現 단계는 가로림 FTS의 건설 공사는 모두 끝내고, 그 여건을 싱가포르化하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FTS에서는 금융·무역·상거래·제조업·병원·학교·종교, 심지어 토지취득, 이주, 출입국 모든 분야가 싱가포르와 똑같이 자유입니다. 사업도 하고 싶으면 하고,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 결과 세계 각국에서 가장 우수한 학교·병원·은행·기업 등이 속속 입주해 오고 있습니다.
이 가로림 FTS에서는 공용어로 영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무원은 완전히 국제화된 선진국 수준이며, 능률 면에서나 서비스 면에서 세계 최상급입니다. 경험이 많거나 기술을 갖고 있는 고급 인력도 세계 각지로부터 여기에 와서 일하고 있는데, 단순기능밖에 능력이 없는 노무자도 여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들 노무자의 노임은 각자의 出身國에서 보다 많이 받으면 더는 바라지 않기 때문에, 가로림 FTS에서는 비교적 값싸고 능력 있는 외국 노무자를 필요한 만큼 고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노사문제도 없습니다. 불법행위와 질서유지는 州정부가 책임지고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와 꼭 같습니다〉
上海港을 압도한 이유
임시행정수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수도권(「2000년대의 국토구상」에서)의 등장. |
한 사람이 『가로림 FTS가 上海港과 비교해서 유리한 점이 무엇이라고 봅니까?』라고 질문하자, 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가로림 FTS에서는 本土(본토: 대한민국 전체)로부터 전기를 공급받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전기는 석유에 거의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전기값은 아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있습니다. 그 외에 LNG나 석탄 등 각종 에너지나 용수도 싱가포르나 上海·홍콩보다 싸게 공급됩니다. 특기할 사항은 그간 수에즈 運河가 확장돼서, 이제는 20만t급 컨테이너선도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上海港은 10만t급이 상한선입니다. 가로림 FTS의 경쟁港인 上海의 洋山부두에는 방파제가 없습니다. 풍랑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上海는 태풍이 자주 통과하는 곳에 위치합니다. 태풍이 오는 계절이 되면 항상 비상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장관은 항만 쪽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저기 컨테이너港의 작업광경을 보십시오. 처리능력이 몇 배로 빨라졌습니다. 이 일이 끝나면 20만t 배는 떠나고, 다음에는 2만~3만t의 소형선박 여러 척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크레인이 알아서, 야적장에 내려 놓은 컨테이너를 행선지 별로 실어 줍니다. 소형 선박들은 제각기 목적지를 향해 운항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만~3만t 배들은 주로 중국 선박인데, 중국의 각 지방에서 컨테이너를 모아 싣고 가로림만으로 들어옵니다. 컨테이너를 내려 놓고는, (20만t의 대형 컨테이너선이 세계 각국에서 운반해 온) 컨테이너를 바꿔 싣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20만t 컨테이너선은 母船격이고, 2만~3만t 선박은 子船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가로림 항구는 이러한 중계작업으로써 허브(Hub) 역할을 하는 母港인 것입니다. 이것이 東北亞 허브의 진면목입니다』
장관은 말을 이어 갔다.
『가로림 FTS에서는 원스톱 생산, 즉 OSP(One Stop Production)라는 개념의 체제를 갖춰 놓고 있는 곳입니다. 우선 천연원료는 20만t이라는 초대형 화물선에 의해 가장 싼 금액으로 수송되어 옵니다. 거대한 면적의 야적장이 있으며, 원료나 소재나 부품 등을 저장하는 거대한 창고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모두 세계 최대급이며 FTS의 자랑입니다.
先物去來(선물거래)도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원료를 가공하는 공장들도 가로림 FTS內에 위치합니다. 필요하다면 컨베이어 벨트로 수송이 가능합니다. 수송비가 거의 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산되는 소재나 半제품을 가지고, 다음 단계의 작업을 하는 공장도 바로 근처에 위치하게 됩니다.
가로림 FTS는 23개의 공업단지가 있고, 18개의 주민주거용 도시가 있는 공업지구입니다. 모든 작업과 주민들의 생활이 가로림 FTS內에서 이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송비가 적게 들고 작업기간이 단축되어 생산비를 가장 싸게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전기 등 동력비나 노동력의 임금이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는 것이, 가로림 FTS의 큰 장점이라고는 이미 설명을 한 바 있습니다』
장관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가로림 FTS가 본토에 주는 영향도 막대합니다. 본토 공장들은 천연원료로부터 기초소재·중간소재·중간부품·부속품 그리고 최종제품까지 필요한 물건을 가장 싼 값으로 가로림 FTS에서 구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工業들은 과거에는 주로 東南海 지방에 편중돼 있었는데, 가로림 FTS가 가동하고 난 뒤부터는 경기지방(首都圈)부터 호남지방까지, FTS를 母港으로 해서 海上으로 연계되어 서해안 일대의 공업화와 지방발전에 큰 활력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특히 FTS에 새로운 종합제철회사가 설립됨으로써, 제철사업도 경쟁체제로 들어갔으며, 이에 따라 重量物인 각종 철강재를 浦項이나 光陽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공급받을 수 있게 돼 수송비가 인하되고, 철재 값도 싸졌습니다.
다음 순서로는 가로림 FTS의 면적을 점차로 확대해 나갈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본토 전부에 적용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換言(환언)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FTS 國家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난 후, 북한 땅에도 작용하는 것이 「21세기에 사는 우리 민족이 꼭 이룩해야 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대의 국토구상」
1978년부터 吳源哲 수석은 행정수도 건설 백지계획과 가로림만의 중부공업기지 계획을 세우면서 자연스럽게 1980년대 朴正熙 대통령이 중점적으로 추진할 국토개조 사업의 청사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국토개조 계획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는 보고서로 만들어져 朴대통령이 죽기 직전에 보고되었다.
朴대통령 국장을 마친 다음 날인 1979년 11월4일 吳源哲을 비롯한 수석 비서관들이 대통령의 유품 정리를 하려고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전에 없던 간이책상이 눈에 띄었다. 그 책상 위엔 두툼한 보고서 두 권이 놓여 있었다. 표지엔 각각 「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백지계획」,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라고 쓰여 있었다. 보고서 옆엔 전기 스탠드가 있었고, 보고서 위엔 돋보기가 놓여 있었다.
朴대통령은 10·26 사건 전날에도 이 보고서를 들여다본 듯했다. 朴대통령이 서거하고 吳源哲 수석이 물러남으로써 국토개조를 위한 세 개의 계획(「행정수도 건설」, 「가로림만 계획」, 「2000년대의 국토구상」)도 잊혀졌다.
朴대통령이 피살되지 않았더라면 1980년 연두기자 회견에서 발표했을 가능성이 높은 「2000년대의 국토구상」은 행정수도 건설을 계기로 하여 한국의 국토이용 체계를 再편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이 보고서는 「고도산업사회를 구축하고 국민총생산의 확대를 위해서는 유한한 국토공간, 국토자원을 합리적으로 효과적으로 활용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임시행정수도 건설과 병행해 국토 再편성 작업을 추진함이 요구된다」고 했다.
<기본방향
첫째, 국토활용의 극대화를 이룩해 국토 공간질서의 체계화를 기한다.
둘째, 新행정수도 형성에 따라 국토권역을 再편성한다.
셋째, 물동량의 신속한 처리를 기해 국토의 교통상 동맥경화증을 사전에 예방함과 아울러 수송에너지 절약을 도모한다.
넷째, 생산 및 항만기지를 개발해 산업의 확대에 대비한다.
다섯째, 국토 動線(동선)을 구상해 국토 간선체계를 형성한다.
여섯째, 자연환경의 보존을 이룩해 맑은 물, 푸른 하늘,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든다>
이 보고서는 국토의 한가운데로 옮긴 新행정수도를 중심으로 도로망과 산업기지를 再편성하면 효율적인 국토이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즉, 서울을 중심으로 한 전국 350km 반경권이 新행정수도 중심 150km 반경권으로 좁혀지고, 이에 따라 수도와 전국의 통달 소요시간이 3분의 2로 단축된다.
이 단축 시간을 생산에 활용하면 산업활동이 활발해지고 소득증대에 기여하게 된다. 이 보고서는 또 국토공간을 5대권으로 나눴다. 영남권·호남권·영동권·경기권(서울)에다 수도권(충청권)을 추가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新행정수도의 관문인 가로림만 일대에 중부종합기지라고 불리는 최대의 산업기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 규모는 창원 기계공단의 8배이다.
이슬숲에서 선진국으로 만나자
朴대통령의 遺作이 된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 「가로림만 프로젝트」, 「2000년대의 국토구상」 중 이 시점에서 살려 낼 수 있는 것은 加露林灣 프로젝트일 것이다. 인구 800만 명이 입주해 國富의 약 30%를 창출하는 선진 자유경제지구를 準독립국 개념으로 만들 수 있는 지리적 조건과 국제적 조건이 무르익은 정도가 아니라 그 길밖에 없다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문제는 그 방향으로 국가적 의지를 결집시킬 수 있는 정치적 결단의 有無일 것이다. 「우선 이슬숲에서나마 선진국을 만들어 보자」는 방향으로 국민들의 뜻을 모아 3억 평을 자율적인 행정조직에 떼주는 결단을 내릴 국가 지도자 待望論(대망론)이다.
대통령 후보들은 이런 야망을 차기 大選 공약으로 내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볼 만하지 않는가? 朴대통령이 남긴 꿈을 21세기에 이루는 지도자가 나타나면 한국은 자유통일의 관문을 지나 선진국이 될 것이다.
삼국통일의 元勳(원훈) 金庾信(김유신)의 여동생 文姬(문희)는 언니 寶姬(보희)로부터 꿈을 사서 金春秋(김춘추·태종무열왕)와 결혼하고 통일대왕 金法敏(김법민·문무왕)을 낳았다. 文姬가 산 꿈이 삼국통일의 꿈이었듯이 朴正熙로부터 이슬숲의 꿈을 산 사람은 조국 선진화의 꿈을 이루게 될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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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朴대통령, 세계최대 중화학공단 개발 지시… 10·26으로 무산
대규모 항만 천혜의 입지 공주일대 행정수도 전제로 국토개조 차원서 추진
"계획대로 개발됐으면 중국 초고속성장 맞물려 두바이도 제쳤을 것"
1978년 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가 충남 서산의 동쪽 해안가를 날았다. 헬기 안에서는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해변의 황금산(152m)·봉산(69m)이 한 눈에 들어왔다. 현재 서산시 팔봉면·지곡면·대산읍과 태안군 이원면·원북면·태안읍 등으로 둘러싸인 가로림만(加露林灣)의 북단이다. 공중에서 한 바퀴 둘러본 박 대통령이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우선 산업도로부터 건설하도록 하지." 이날 동행했던 고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은 귀경하자마자 가로림만 입구의 돌산을 사들였다. 가로림만이 개발되면 공사를 위한 암석 수요가 커질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 ▲ 30년 전 구상대로 추진됐더라면 가로림만의 지금 모습은 어땠을까. 싱가포르(오른쪽 사진)나 두바이를 훌쩍 뛰어넘는 글로벌 도시로 성장했을까. 지난 7일 충남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에서 바라본 가로림만. 물이 빠진 갯벌 위에 어선들이 흩어져 있다. /곽수근 기자, 싱가포르 관광청
6일 오후 충남 서산시 독곶리 해변. 31년전 박 대통령 일행이 내려다봤던 그 장소에 섰다. 예나 지금이나 드넓게 펼쳐진 바다는 여전히 푸르렀다. 해질 무렵이어서 인적은 드물었고 어선들도 해변에 머물러 있었다.
'어민 외 출입을 제한한다'는 푯말이 눈에 띄었다. 가로림만을 등지고 북쪽을 보니 바닷가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우뚝 솟은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현대석유화학과 현대정유가 자리한 중화학 공단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정작 상전벽해(桑田碧海), 세계 최초의 '두바이'나 '싱가포르'를 꿈꿨던 가로림만은 그대로였다. 가로림만은 도대체 어떤 꿈을 꿨고 왜 그 꿈이 중도에 좌절되고 말았을까.
◆가로림만이 행정수도와 관련 있다?
7일 낮 충남 서산시 지곡면 중왕리 바닷가. 독곶리에서 남쪽으로 10㎞쯤 떨어진 곳으로 가로림만의 허리쯤 되는 위치다. 썰물이 빠져나간 이곳은 갯벌 천지였다. 북으로 900여m 떨어진 저섬은 섬이라기보다 동네 야산처럼 보였다.
가로림만 구상 이전인 1977년 2월10일 박 대통령은 서울시청 순시에서 임시행정수도 논의를 꺼냈다. 수도권 인구 억제와 북한의 기습을 완충한다는 취지에서 행정수도를 서울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예정지로 꼽혔던 곳이 지금의 세종시에서 서쪽으로 불과 5㎞쯤 떨어진 충남 공주군 장기면 일대다. 가로림만 프로젝트는 수도 이전을 공주군 일대로 가정한 것에서 비롯됐다. 서울에 대한 인천의 역할처럼 장기면이라는 내륙의 행정수도에는 가로림만 같은 항만 입지가 필요했다. 가로림만 남동쪽에 위치한 공주군 장기면은 직선거리로 90여㎞쯤 떨어져 있다.
게다가 1977년 12월 당초 목표보다 3년 빨리 연간 100억 달러 수출목표를 달성한 박정희 정부는 포항종합제철의 뒤를 이을 제2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한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중부종합공업기지 기본구상(가로림 프로젝트)'은 수도를 공주 부근으로 옮긴다고 했을 때 이에 따른 물류 편의 등을 고려해 나온 국토개조 방안의 하나였다.
◆싱가포르·두바이 능가했을까
'이슬숲'이란 뜻을 지닌 가로림만은 내륙으로 깊이 파고든 형태여서 천혜의 항만 입지다. 남북간 직선거리가 16㎞, 동서간 최대거리도 9㎞ 이상이다. 1978년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은 가로림만의 잠재력을 알아차렸다. 창원공단 10배 규모를 들일 수 있는 대(大) 항만 입지를 알아보다 가로림만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박 대통령에게 "싱가포르를 뛰어넘는 동양 최대의 항구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다.
서해 최대였던 중국 상하이항이 수심 10m 이하인 데 비해 가로림만은 수심이 20m 이상이어서 20만t급 선박도 오갈 수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로림만 주변에는 미개발 토지가 수두룩했다.
오 수석은 이런 곳들을 공장이나 주택용지로 쓰면 최대 800만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배후도시도 가능할 것으로 봤다. 692㎢에 400여만명이 사는 싱가포르쯤은 가볍게 뛰어넘을 것이란 얘기였다.
그는 "싱가포르의 2배 정도인 항만과 공업지구가 생기는 셈이며 중부지방과 호남권의 유휴 노동력을 흡수해 이들 지역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가로림만 일대를 독립국 수준의 경제특구로 만들어 생필품과 외국인 노동력 수입 등을 자유화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자는 주장도 있었다. 오늘날 인천·광양만 등의 경제자유구역보다 한발 더 나간 개념도 있다.
당시 계획대로 됐다면 이곳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는 됐을 것이라고 오 전 수석은 생각한다. 가로림만 일대가 국내총생산의 30%를 도맡음과 동시에 외국 금융기관도 대거 유치, 오늘날 중동의 금융·무역 허브(hub)인 두바이도 제쳤을 것이란 얘기다.
◆펼치지 못한 꿈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좌초한 이후 진행된 주변 상황은 30년 전 전망을 벗어나지 않았다. 중국의 성장에 따른 교역량 폭증으로 서해 물동량이 크게 늘었다. 그만큼 서해의 대항만에 대한 수요도 커졌다.
반면 동해의 부산항은 상하이 양산항 등의 약진으로 주춤하기 시작했다. 서해안 고속도로도 개통돼 수도권과 가로림만 일대의 접근성도 개선됐다. 프로젝트대로 인천·아산·군산·목포·여수와 가로림만을 잇는 서부공업벨트가 구축됐다면, 포항·울산 등 동남공업벨트와 함께 두 축으로 고르게 성장했을 것이다.
31년 전 구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중화학산업단지를 염두에 뒀다. 500만평 부지에 연간 2000만t 생산능력을 가진 종합제철소를 비롯, 국내 총수요의 37%를 공급할 수 있는 기계공업 단지를 820만평 부지에 마련한다는 식이었다.
연산(年産) 50만대인 자동차공장(120만평) 비철금속(240만평) 철강 관련산업(360만평), 석유화학(300만평)을 조성한다는 계획도 있었다. 중화학 공업을 총망라하는 것으로, 이 경우 가로림만 물동량은 5400여만t으로 추산됐다.
31년 전 박 대통령이 이곳을 돌아본 이후 가로림만 일대는 변화의 시동을 걸었다.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될 삽교천의 담수호도 완성됐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을 다녀온 날 박 대통령은 암살당했다. 그가 10·26 전날에도 손에서 떼지 않았던 '2000년대의 국토구상' 보고서에는 가로림만 프로젝트가 담겨 있었다.
◆다시 꾸는 꿈은?
몇 년 전부터 가로림만 일대가 다시 들썩이고 있다. 가로림만 일대 북부권역을 물류·유통·정밀화학·자동차산업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계획과, 가로림만 조력발전소 건설에 대한 논란이다.
전자는 이곳을 중화학공단으로 키우겠다는 30여 년 전 정부 구상을 참고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이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것이라 일부 권역에 한정돼 있다.
2004년 서산시는 가로림만 북쪽 대산항 일대에 물류기지를 구축하고 배후산업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작년에는 미래혁신단지 조성이라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2015년까지 총 1조 6000억원을 들여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과 오지리 벌말 사이의 가로림만 연안에 제2대산항과 자동차·중화학 산업단지를 들인다는 계획인데 실현 여부는 두고 봐야 할 전망이다.
서산시는 "현재 연구 용역중"이라고 말했다. 10여년 전에는 대산읍과 석운면 사이 가로림만 수백만평을 매립해 제철소를 들이는 방안이 추진됐으나 환경파괴 논란과 어민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다.
가로림만 북쪽의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와 태안 내리간 2㎞ 구간에 520MW 조력발전소를 만들어 잇자는 계획은 탄력을 받았다. 지난달 가로림 조력발전소 건설을 위한 공유수면 매립계획이 국토해양부 심의를 통과했다. 1979년 5월에도 시설용량 20만~30만㎾ 규모 조력발전소를 가로림만에 들이자는 방안이 추진됐지만, 화력·원자력 발전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보류됐다.
주민들 반발은 여전하다. 조력발전소가 생계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게 이유다. 발전소 건설로 갯벌이 훼손되면 어획량도 크게 줄어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워진다는 우려도 많다. 가로림민 일대 어민들은 요즘도 조력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며 항의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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