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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빈곤 보고서

醉月 2010. 5. 27. 09:11

[영구 빈곤 보고서 ①]
탈빈곤 정책의 실패를 목격하게 한 조사 결과… 사회 통합의 붕괴 양상 직시해야
우리 사회의 빈곤 문제는 이제 과거와 양상이 다르다. 밥을 굶는 극빈의 상황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사회적 격차와 불평등은 더 심해지고 있다. “지금은 가난해도 열심히 일하고 자식 교육을 잘 시켜 나중에는, 혹은 내 자식들은 잘살 수 있도록 하겠다”는 ‘희망의 절대 빈곤’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나중에도, 혹은 내 자식들도 남들처럼 잘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절망의 상대 빈곤’이 자리잡고 있다.
 

‘사회적 배제’의 현장

유럽 국가들은 빈곤을 ‘사회적 배제’(social exclusion)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경제적 결핍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국가에서는 빈곤층이 주류 사회와 분리돼 사회적 참여를 제한당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의 문제를 제기한다. 빈곤층의 사회적 고립과 주변화는 그 사회의 기본적 통합성을 해친다. 유럽연합(EU)과 회원국 정부는 이를 핵심 정책 문제로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

한국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그런 ‘사회적 배제’의 현장이다. 우리 국민 모두 영구임대아파트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다. 영구임대주택은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약 19만 호가 건설된 뒤 중단됐다. 빈곤층에게 저렴한 주거를 제공하고 적절한 사회복지 안전망과 자활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중요한 복지 증진의 수단으로 보였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빈곤층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가? 빈곤 문제에 잘 대처해 정책목표를 달성했는가? 불행히도 그렇지 않다는 평가에 더 무게가 두어진다.

이번 <한겨레21>의 기획은 이런 우려를 현장에서 확인했다. 정부의 빈곤 정책 대상으로 표적화된 지역인 영구임대 단지를 통해 빈곤 문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다.

최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빈곤 문제에 대한 언론과 학계, 시민단체 등의 접근에 협조적이지 않다. 오히려 적대적인 상황이다. 빈곤층의 특성상 조사 거부율이 높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모든 가구를 2회 이상 접촉하는 ‘전수조사’ 과정을 통해 121 가구에 대한 면접조사, 20여 가구에 대한 심층면접이 이뤄졌다. 공공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언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현장 자료 수집이다.


그만큼 조사 결과는 무거운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조사 결과 밝혀진 점들은 우리나라 빈곤 문제의 심각성, 빈곤 정책의 취약성을 다시 확인해주었다. 이번 조사 결과, 주거비를 부담스러워하고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주민들은 사회적·심리적으로 고립되고 있다. 낙인의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단지의 슬럼화도 진행되고 있다. 전 국민의 의료보장 체계가 구축되었다는데도 의료의 문제, 심지어는 사망까지도 계층화 현상을 보인다. 빈곤의 장기화를 막아내기는커녕,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빈곤 세습화’가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태에서 대책 없는 분노를 표현하기도 한다. 심각한 사회적 배제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통합성 위기가 이제 아슬아슬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복지병을 걱정할 만큼 복지가 있나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탈빈곤 정책의 실패를 목격하게 된다. 영구임대주택 프로그램이 불필요한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다양한 공공임대주택 프로그램은 확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정부 빈곤 정책의 파편성과 비연속성은 짚어야 한다.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배제에 대응하려면 다양한 영역에서 지속적인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그러나 영구임대아파트 사업만 봐도 처음 몇 년간 건립 사업을 진행하다가 내팽개치다시피 중단됐다. 매번 이전 정부와 다른 ‘선전용’ 프로그램을 내놓다 보니 정책의 연속성도 떨어지고 일관성도 없다.

현 정부는 빈곤 문제를 이야기할 때 자주 도덕적 해이나 복지병에 대한 우려를 표한다. 그러나 게을러서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나라 빈곤 현상의 본질을 잘못 파악하는 것이다. 복지 서비스가 나태함을 조장한다는 것도 너무 가벼운 인식이다. 도대체 우리나라가 복지병을 걱정할 만큼의 복지를 국민에게 줘본 적이 있던가. 극히 일부에서 나타나는 복지 의존의 모습을 침소봉대할 것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붕괴 양상에 이르고 있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심각성을 직시해야 한다. 이 무거운 문제를 보는 정부의 책임의식도 더 진중해지기 바란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

[영구 빈곤 보고서 ①]
일찍 사별한 배우자, 먼저 보낸 자식, 비극적 사고, 치명적 질병, 오래된 장애…
비슷한 사연 1만여 개가 희뿌옇게 모여 있는 곳
 
»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눈을 떴다. 천장이 흐릿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비슷하다. 박금자(70·가명)씨의 눈앞에서 세상은 항상 희뿌옇다. 박씨는 시력이 희미하게 남은 왼쪽 눈으로 현관에 이르는 길을 본다. 어둡고 좁고 짧다. 누운 자리에서 열 걸음이다. 방과 현관문은 거리랄 게 없이 바싹 붙어 있다.

44.15㎡, 13평형의 직사각형 집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벌써 밥때구먼.” 혼잣말을 한다. 오전 11시30분이다. 시각장애 4급의 눈으로 더듬더듬 점퍼를 찾아 입는다. “밥 먹고 올게요. 배고프면 밥 먹어요.” 이번엔 혼잣말이 아니다. 방 왼쪽 구석에 낡은 가구처럼 앉아 있는 동갑내기 남편은 아무 표정이 없다.

박씨는 노인정에서 주는 무료급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부부가 함께 가면 좋을 것이다. 한 집에서 2명이나 급식을 찾아 먹는다고 동네 사람들이 이죽거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한 남편은 시비 당할 일 없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그 상에 박씨의 밥그릇은 올라가지 않는다. 입 하나라도 줄여야 쌀을 아낀다.

귀퉁이가 녹이 슨 현관문이 삐거덕 열린다. 20년 된 문은 남편의 무릎처럼 뻑뻑하다. 매번 아픈 소리를 낸다. 문 앞에 달려 있어야 할 초인종 단추는 자취가 없다. 떨어져나간 지 5년 됐다.

 

1. 어둡고 좁고 흐릿한 인생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작은 활기가 돈다. 묘한 긴장도 흐른다. 박씨를 비롯한 4천여 세대의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줄을 서야 한다. 단지 안에 있는 사회복지관은 월~토요일 낮 12시에 무료급식을 준다. 고마운 일이다. 고맙지 않은 일도 있다. 점심 무료급식의 정원은 200명뿐이다.

사전에 사회복지관에 등록해 허가를 받은 사람만 무료급식을 먹는다. 그러나 오며 가며 들르는 주민들이 언제나 있다. 밥은 그들에게도 제공된다. 늦게 오면 무료급식을 놓친다. 오전 11시부터 노인정 앞에는 사람의 무리가 줄을 이룬다. 박씨는 매일 그 대열에 동참한다. 언제까지 줄을 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박씨는 폐암에 걸렸다.


일흔 평생 동안 내내 아팠다. 5살 때 홍역을 앓았다. 병원에 가지 못했다. 충남 천안에서 농사짓던 부모는 남의 땅에서 쟁기질을 했다. 초가집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둘째딸은 단칸방 구석에서 끙끙 앓다가 두 눈의 시력까지 잃었다.

가난한 농사꾼 남편을 만나 첫딸을 낳을 때도 아팠다. 산후조리를 잘못해 젖유종을 심하게 앓았다. 가슴에 딱딱한 덩어리 7개가 잡혔다. 매일 밤 그곳이 쑤시고 아팠다. “저승길 가는 고통이었다”고 박씨는 회고한다. 1972년 서울에 올라와 왕십리 철거촌에 살면서 딸 셋을 더 낳았다. 그때마다 저승길 가는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병원은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철거촌, 천막집, 판자촌, 단칸방…

10년 동안 15번 이사한 뒤, 마지막 이사를 20년 전에 했다. 철거촌에서 쫓겨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들어왔다. 그때부턴 가슴앓이를 했다. 4명의 딸은 모두 고등학교만 마쳤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도왔다. 하나같이 결혼을 일찍 했지만, 첫째·둘째 딸은 곧 이혼해버렸다. 셋째사위는 직업이 없고, 넷째사위는 몇천만원의 빚을 졌다. 배 아파 낳은 딸 걱정에 어머니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다 정말 가슴에 암이 생겼다. 2006년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지지리 못사는 부모 밑에 태어나서, 못사는 남자와 결혼해 죽도록 고생하고, 자식들한테도 고생만 시키다가, 결국은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 손으로 뺨도 올려붙였다. 얼마 전, 아파트 부녀회에서 각층 12세대 가운데 두 집씩 김치를 무료로 나눠줬다. 박씨는 무료 김치를 받지 못했다. 부녀회장을 찾아가 뺨을 때렸다. 김치를 얻었다. 매일 김치찌개를 끓여 아무 일 안 하는 남편에게 차려준다. 그리고 자신은 무료급식을 찾아 노인정에 간다. 어쨌거나 입으로 들어가는 밥과 반찬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득바득 살았다. 그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은 쓸쓸한 사연이 아니다. 4천여 가구에 줄잡아 1만여 명의 빈자가 모여 사는 이곳에서 그것은 너무 흔한 인생이다. 정순자(71·가명)씨의 어머니는 기차간에서 떡을 팔았다. 서울에 올라와 신설동 천막집에 살았다. 김형성(69·가명)씨는 한강 둑방 판자촌에 월세를 주고 살았다. 평생 공사장에서 일했다. 황기백(73·가명)씨는 구두닦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30년 동안 서울 용두동에서 보증금 50만원에 월 1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살았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그런 사연 1만여 개가 희뿌옇게 모여 있다.

 

2. 빈곤 이주의 궤적

가난의 사연에는 언제나 ‘나쁜 집’이 등장한다. 이희숙(65·가명)씨는 ‘나쁜 집’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려 한다. 1975년 겨울, 이씨 부부는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 아들을 품에 안았다. 꼭 안고 길거리로 쫓겨났다. 전 재산 12만원을 주고 방을 얻은 서울 옥수동 다세대주택에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우리도 보상금을 15만원밖에 못 받았어.” 집주인이 말했다. 이씨 부부를 포함해 여섯 가구가 다세대주택에 세들어 살았다. 그들 모두 쫓겨났다. 집주인은 이주비라며 2만원을 건넸다. 보증금 12만원은 돌려주지 않았다. 나쁜 집주인이었다. 이씨 부부의 생각은 거기서 그쳤다. 재개발을 강행한 관청이 더 나쁘다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전 재산을 잃은 부부는 이씨의 여동생 집으로 갔다. 여동생은 단칸방에 혼자 살았다. 그 방에서 부부와 세 아들, 그리고 여동생까지 6명이 함께 잤다. 5년이 흘렀다. 빚을 내서 방 하나가 딸린 작은 구멍가게를 얻었다. 비닐하우스촌에 몇 년만 살면 아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1987년, 400만원을 주고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의 집 한 채를 샀다. 100원짜리를 팔아 10원씩 남기며 구멍가게에서 번 돈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식물은 푸르게 자란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사람을 위한 것이 비닐하우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비가 오면 그대로 집 바닥에 떨어졌다. 용변은 더러운 공동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몸을 씻으려면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우는 아이들의 등을 떠밀어 할머니 집에 보냈다. 이를 악물고 부부만 2년을 살았다. 사람처럼 살지 않은 덕분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입주 자격을 얻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여기 살면 부자가 될 수 없다

“그때 입주하지 말아야 했어.” 이씨는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들어온 것부터가 인생 실패야.” 서울 강북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나쁜 집’의 종결이 아니었다. 조금 더 돈을 모아 작은 집을 샀다면 평생 가난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이씨는 생각한다. 작은 집을 사서 팔고 다른 집을 또 사서 팔고 그러다 버젓한 내 집을 마련하는 인생을 이씨는 머릿속으로만 상상한다. 부자들은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면 부자가 될 수 없다. 돈을 벌면 입주 자격을 잃어 단지를 떠나야 한다. 어지간한 돈으로는 전셋집도 구할 수 없다. 결국 적게 벌면서 이곳에서 근근이 사는 일에 적응해버린다. 이씨는 영구임대아파트에 발목을 잡혔다고 생각한다. ‘나쁜 집’은 철거촌에서 단칸방으로, 비닐하우스촌에서 영구임대로 변주됐을 뿐이다. 그러나 ‘나쁜 집’의 연쇄고리 가운데 최악은 따로 있다.

» 김종택(가명)씨가 지난 2월 자살을 시도했던 흔적을 내보이고 있다. 깔고 앉은 요에는 핏자국이 선명하다. 1월 말, 법원은 임대료를 밀린 김씨에게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퇴거할 것을 명했다. 항소이유서를 써두었지만 갑작스런 아들의 자살로 장례를 치르느라 시기를 놓쳤다.

3. 죽음에도 불평등이

김종택(62·가명)씨는 13평 방에 혼자 산다. 낡은 장롱 하나, 작은 텔레비전 하나가 있다. 가구의 전부다. 방에는 하루 종일 요가 깔려 있다. 세제가 없어 빨래를 못한 게 한 달이 넘었다. 더러운 요에 남은 검은 핏자국도 지우지 못했다. 한 달 전, 김씨는 부엌칼로 손목을 그었다. 늙은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요를 적셨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김씨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무서운 결심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다시 요를 깔고 하루 종일 넋 나간 듯 앉았지만, 이제 뭘 더 할 수 있을지 김씨는 알지 못한다.

지난 1월29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김씨에게 ‘퇴거 판결’을 내렸다. 김씨는 1년 넘게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했다. 단지를 관리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김씨를 상대로 퇴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처음 입주할 때 쓰는 계약서에는 ‘3개월 이상 임대료를 내지 못할 경우’ 퇴거 조처를 당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김씨가 규칙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규칙을 지키는 방법을 모른다. 2009년 10월을 기준으로 김씨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임대료·관리비를 체납한 가구는 모두 773세대다. 4천여 세대의 20%다.

 

3개월 임대료 밀리면 퇴거 조처

임대료와 관리비를 더해 매달 20만~30만원의 고지서가 날아든다. 4천여 세대의 20%는 그 고지서를 받아들고 죽어버릴까 말까 고민한다. 2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 가구마다 관리비 내역은 비슷하다. 김씨와 같은 동에 사는 황기백(가명)씨는 얼마 전 30만2290원의 2월분 고지서를 받았다. 임대료가 10만9230원, 경비·청소·수선유지 비용을 더한 관리비가 2만8450원, 전기료·난방비 등을 합친 공과금이 16만4610원이다. 황씨는 자활근로를 해서 한 달에 20만원쯤 번다. 아내가 빌딩 청소를 하여 100만원을 받는다. 월수입 120만원 가운데 4분의 1을 임대료·관리비·공과금으로 냈다.

4천여 세대의 20% 가운데 하나인 김씨에겐 그런 방책이 없다. 하는 일이 없다. 노인정이 제공하는 무료 점심 급식 외에는 하루 종일 굶는다. 소싯적의 그는 서울 뚝섬 유원지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얻어 가발 공장에 팔기도 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면서 엇나갔다. 고향 친구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다. 팔뚝에 비둘기 문신도 새겼다. “평화롭게 살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문신을 새긴 팔뚝으로 강북 지역의 룸살롱·다방 등에서 돈을 뜯었다. 룸살롱 여급을 아내로 맞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도망갔다. 이후 김씨는 경마에 빠졌다. 2002년에는 술을 잔뜩 먹고 사고를 당해 한쪽 머리가 움푹 파였다. 2004년에는 동네에서 사람을 찔러 2년6개월간 복역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떠났다.

그는 ‘평화롭게’ 살지 않았다. 죄도 저질렀다. 젊음을 낭비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무능력자’다. 거리로 내몰면 그는 또 다른 결심을 할 것이다.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이 범죄자가 되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영구임대아파트에서조차 쫓겨난 사람들은 범죄의 유혹과 쉽게 손을 잡을 것이다. 4천여 세대의 20%는 월 30만원을 구하지 못해 가난하고 불우하다.

 

퇴거 명령서 그리고 아들의 자살

일찌감치 집을 나간 김씨의 아들은 가난이 싫어 먼저 세상을 떴다. 법원의 퇴거 명령서가 날아들던 지난 1월 말, 23살 아들이 목을 매 자살했다. 아들은 지방도시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빈궁한 티를 내기 싫었는지 거리에 나서면 부잣집 아들 행세를 했다.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외제차를 선물해달라고 졸랐다.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술집에서도 해고됐다. 뭘 더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던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죽은 아들의 옷을 입고 곧 쫓겨날 방에서 우두커니 앉아만 있다. 저승사자조차 부자와 빈자를 차별한다.

 

4. 평생의 반려자, 장애와 질병

이곳에서는 일찍 사별한 배우자, 먼저 보낸 자식, 비극적 사고, 치명적 질병, 오래된 장애가 삶의 한 부분이다. 주민들은 분노하거나 억울해하지 않는다. 어쩌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마땅한 방법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건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불행을 말할 때 놀랍도록 차분하다.

최성원(70·가명)씨는 25년 전, 서울 가리봉동 셋방에 살았다. 초등학생이던 둘째아들이 촛불 장난을 하다 불을 냈다. 10살이던 셋째아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담요에 옮겨붙은 불 때문에 셋째아들은 전신 화상을 입었다. “다 죽게 생긴 놈을 중환자실에 눕혀놓고, 8일간 잠도 안 자고 요구르트를 먹여가며 살렸다”고 최씨는 말했다.

전세금 70만원을 포함해 전 재산을 그때 썼다. 아들이 퇴원한 뒤, 다섯 식구는 동네 공터에 들어선 노인정의 한켠에 얹혀살았다. 성인이 된 셋째아들은 뚜렷한 직업이 없다. 집에서만 지낸다. 공사장에서 석공일을 했던 최씨는 허리가 아프다. 도배를 하며 돈을 벌어온 최씨의 아내는 목이 아파 계속 기침을 한다. 그래도 얼굴부터 발끝까지 뒤틀린 셋째아들 앞에서 노부부는 아픈 티를 내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실향민 황기백(가명)씨의 왼쪽 이마에는 흉터가 있다. 술 마시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다.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있었다. 큰아들이 죽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결혼까지 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게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잘 모르겠네. 뭐 알 필요도 없고….” 황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웃에 사는 김형성(가명)씨의 딸은 26살 되던 해에 죽었다. 그 일에 대해 김씨는 “딸을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자살은 아닌데…. 그게 세상이 잘못되어갖고….” 말을 흐렸지만 김씨 역시 담담했다. 죽고 사는 것, 다치고 병드는 것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정영숙(53·가명)씨의 목소리는 크고 쾌활하다. 그의 음성만 들어서는 아픈 아들의 그늘을 알아차릴 수 없다. 이제 29살이 된 아들이 처음 쓰러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기절했다. 쓰러지는 주기가 갈수록 짧아져 나중에는 한 달에 열 번씩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간질이라고만 했다. 이유 없이 쓰러지며 몸이 굳어가는 아들을 살리려고 여기저기 빚을 얻어 병원을 다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마저 2002년 중풍으로 쓰러졌다.

 

버는 사람이 없는 집들

남편은 원래 액세서리 공장을 운영했다. 그 시절엔 아들도 건강했고 남편도 돈을 벌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부도가 났다. 빚쟁이들이 매일 찾아왔다. 부부는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을 데리고 서울 도봉구 창동의 반지하로 숨어들었다.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랬던 아들이 쓰러지고, 그 아들을 다시 일으켜세울 치료비가 떨어지니, 낙심한 남편마저 쓰러진 것이다. 홀로 우두커니 서서 정씨는 자살을 생각했다. 아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 마음을 접었다.

질병과 장애는 가난의 원인이자 결과다. 가난해서 아프고 아파서 가난하다. 지난해 9월, 정씨 부부는 아들의 병명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파킨슨병이었다. 애초부터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진작 알았다면 정씨 가족의 운명이 조금 달라졌을까. 부부는 이미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4년 전, 남편과 아들의 병수발을 하면서 정씨는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 돈을 끌어모아 마트 정육 코너를 인수했다.

자살 대신 선택한 길이었지만, 1년 만에 망했다. 그때 진 빚을 신용카드로 ‘돌려막기’ 시작했다. 빚은 1억원을 넘어섰고, 정씨는 끝내 파산했다. 영세민의 처지가 되어 지난 2008년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발씩 떼던 아들은 이제 일어서지도 못한다. 남편은 계속 누워 있다. 정씨도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한다.

식구 중에 돈 버는 사람이 전혀 없다 해도 여기선 흉이 되지 않는다. 권영자(74·가명)씨 부부는 30대 후반의 딸을 데리고 산다. 누구도 돈을 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무릎이 아프고, 할머니는 당뇨와 자궁암이 있다. 딸도 여기저기 아프다며 일을 못한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수백만원의 보증금을 까먹고 있다. 정미숙(57·가명)씨는 직업이 없다. 32살 아들도 직업이 없다. 아들은 몸무게가 100kg이 넘는 거구다. 여러 성인병을 앓고 있다. 정씨는 아픈 손을 치료하다 의료사고로 아예 손을 못 쓰게 됐다. 노영희(72·가명)씨는 40대 아들과 18살 손자와 함께 산다. 모두 경제적 무능력자다. 할머니는 식당일을 하다 관절염을 얻어 누워 있다. 아들은 공사판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누워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손자는 지체장애 2급이다.

» 오후 1시, 단지 내 경로당 앞에 4명의 노인이 앉아 있다. 무료 점심 급식을 먹고 나온 참이다. 별다른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가만히 앉아 지나가는 이를 쳐다본다.

5. 여자는 남자보다 가난하다

가난은 남녀를 차별한다. 남자가 일하지 않으면 여자가 가난해진다. 여자는 아무리 일해도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다 여자가 일을 놓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황지영(48·가명)씨는 2005년 갈빗집에서 서빙을 하다 쓰러졌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며칠 안 돼 무리하게 일을 나간 탓이었다. 건강이 나쁘다는 사실도 덩달아 알려졌다. 식당 사장은 위로하지 않고 해고했다. 집에 돌아온 황씨는 잠들지 못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아이들한테는 티내지 않았다. 속으로만 울었다.

황씨는 2002년 초에 이혼했다. 노름에 빠진 남편에게 매 맞고 산 지 18년 만에 결단을 내렸다. 남편은 운전사였다. 음주운전을 하다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후 노름을 시작했다. 서울 구로동 반지하방에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남편 혼자 노름에 빠졌다. 노름을 말렸더니 피투성이가 되도록 황씨를 때렸다. “아이를 하나 더 낳으면 남편이 정신 차릴 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이제 17살이 된 딸을 그때 낳았다. 남편은 임신했다고 또 황씨를 때렸다.

 

때리는 남편, 방 안에서만 지내는 아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보고 자란 아들은 이제 25살이다. 내성적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문을 닫고 지낸다.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우고 오후 2시에 일어난다. 고등학교는 중퇴했고 하는 일은 없다. 가끔 자해도 한다. 아이의 잘못은 부모가 책임진다. 아이가 클 때까지 그렇다. 그러나 다 자란 아들의 잘못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황씨는 알지 못한다.

몸이 아파 오래 서 있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일을 구할 수 있을지도 황씨는 알지 못한다. 대신 한 달에 아홉 번 자활근로를 나가 20만원을 벌어온다. 그 돈으론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는 것조차 빠듯하다. 나머지 필요한 돈은 친언니에게 조금씩 빌린다. 가슴에선 암세포와 근심이 함께 스멀댄다. 황씨가 가장 슬퍼하는 일은 “고등학생 딸아이한테 저녁 급식비를 못 주는 것”이다. 가장 걱정하는 일은 “아들과 딸이 자립하기 전에 내가 죽는 것”이다.

그래도 고순자(62·가명)씨는 황씨의 중년이 부러울 것이다. 시각장애가 있는 고씨는 환갑이 지난 나이로 5명의 식구를 건사한다. 역시 시각장애인이던 남편은 안마사였다. 오래 살지는 못했다. 1979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고씨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사남매를 데리고 서울 회현동과 명동 일대의 단칸방을 옮겨다녔다.

명동의 쪽방이 허물어진 자리에 최고급 호텔이 들어섰지만, 지난 30년간 식구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남매 가운데 3명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퀵서비스 일을 하는 큰아들은 결혼해 따로 살지만, 나머지 자녀는 늙어버린 고씨의 품에 기댄다. 이혼한 큰딸은 손녀 둘을 박씨에게 맡기고 강원도에 갔다. 미혼인 작은딸은 일자리를 찾고 있다. 막내아들은 공사장에서 일한다며 지방 어딘가로 갔다. 자식들은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렀다 훌쩍 나간다. 그들이 집에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는 이제 10살·7살 손녀들의 뒷바라지를 한다. “어쩔 수 없이 산다”고 고씨는 말했다.

 

6. 알 수 없는 도움

사는 일이 힘든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제도가 마련됐다. 그런데 그 제도는 그들을 돕지 않는다.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에 살았던 이희숙(가명)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이씨 가족은 기초생활수급권자 자격으로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세대주는 남편이다. 세 아들이 성인이 되자 수급권은 박탈됐다. 몸이 아픈 남편이 죽으면 이씨는 집을 비워야 한다. 기초생활수급권자·장애인·국가유공자 등의 입주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세대주 변경을 아예 못하도록 지난 2006년 법이 바뀌었다. 일을 하는 아들 셋이 있으니, 이씨는 세대주 변경을 신청할 수급권자 자격이 없다. 세 아들이 합쳐 50만원을 용돈으로 주기는 한다. 그러나 부모와 닮은꼴로 가난한 아들들이 이씨의 여생을 책임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남편의 사망과 함께 사라진 입주 자격

김영희(55·가명)씨는 몇 달 전 남편을 여의었다. 남편은 뇌병변 2급 장애인이었다. 장애인 가족의 자격으로 지난 2005년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그런데 세대주인 남편에게 부여된 입주 자격이 남편의 사망과 함께 사라졌다. 김씨는 이 단지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영구임대아파트는 쉽게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없다. 형편이 어려운 다른 영세민에게 입주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가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천만원의 사채를 빌려, 한 달 이자만 60만원을 내고 있다. 남편 치료비는 필요한데, 은행에선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김씨는 가끔 식당일을 나가 돈을 버는 정도지만,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도 없다. 30대의 딸이 직장에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버대학교를 졸업해 간호사로 일하는 딸은 월 100만원을 겨우 벌 뿐이다. 오랜 식당일에 김씨의 손가락은 굽어 있다. 그 손가락으로 아무리 꼽아보아도 살아갈 방도가 없다.

왼쪽 눈으로 겨우 세상을 보는 폐암 환자 박금자(가명)씨는 암 치료조차 수월치 않다. 항암제인 하얀색 알약은 한 달치 30개에 180만원이나 했다. 1년 동안 약을 먹었더니 네 딸이 모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박씨는 죽을 각오로 3개월간 약을 끊었다. 병원은 그제야 의료보험 적용이 되는 국산 복제약으로 바꿔주었다. 동사무소에서도 의료급여 혜택을 받게 됐다. 약값이 한 달 몇 만원으로 줄었다.

몇 달 전, 막내사위가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좋은 일이다. 좋지 않은 일도 생겼다. “막내사위가 수입이 있으니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막내딸은 자식이 둘이고 빚까지 있다. 막내사위가 벌어오는 150만원의 월급으론 저희들 살기도 어렵다. 박씨는 동사무소에 가서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봤다. 간신히 의료급여 혜택을 유지했다.

 

여태껏 못 본 곱고 귀한 것

앞으로 다른 딸, 다른 사위가 또 직장을 구한다면 몸부림치는 울음으론 부족할 것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래도 입에 무료 점심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박씨는 삐거덕거리는 현관문을 열어 남편이 홀로 앉은 좁은 방으로 돌아간다. 박씨의 눈앞에서 세상은 항상 희뿌옇다.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다. 방에 누워 바라본 천장은 흐릿하다. 칠십 평생 곱고 귀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을 박씨는 그냥 감아버린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영구 빈곤 보고서 ①]
일일이 방문한 360가구 중 121가구 통계…
무직 48.9%, 장애인 47.1%, 노동력 상실 45.8%, 사실상 ‘영구 빈곤’의 상태
<한겨레21>은 1989~1992년 조성된 전국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가운데 초창기에 건설된 서울 강북의 한 단지를 조사 대상으로 삼았다. 밀집한 수십 동의 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오래전에 지어진 2개동을 골랐다. 입주민의 상당수가 15~20년 동안 이 단지에서 살아왔다.

지난 2월부터 6주에 걸쳐 2개동 360가구를 일일이 방문했다. 이 가운데 121가구의 승낙을 받아 1시간가량씩 면담조사를 했다. 가구현황·이주과정·주거환경·가족배경·사회의식·경제생활·복지현황 등에 대한 54개 항목을 물었다. 적극적으로 응답한 20가구는 다시 심층면접해 생애사를 취재했다.

» 하얀 눈이 세상을 뒤엎어도 가난의 풍경까지 가리진 못한다. 날선 바람이 불던 3월의 오후, 얇디얇은 옷을 걸친 노인이 낡은 유모차를 다리 삼아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안을 거닐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조사에 응한 가구는 그나마 여유 있는 편

360가구 모두 2회 이상 방문해 조사를 시도했으나, 거절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집에 아픈 사람이 있어 외부인이 들어오면 곤란하다”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따라서 면담조사에 응한 121가구는 가족 중에 중환자나 장애인이 적고, 생계 해결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경우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사 결과,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구 총소득이다. 전체 응답 가구의 72.7%가 한 달 100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50만원 미만의 소득은 33%였다. 9.9%는 월 20만원 미만의 벌이를 가졌고, “소득이 아예 없다”고 답한 가구도 2.5%에 이르렀다. 이 액수는 기초생활급여, 자활근로 임금, 자식·친지가 주는 용돈 등을 모두 합한 것이다.

» 함께 사는 식구가 한 달에 버는 총소득


121가구의 총가구원(함께 사는 사람) 수는 313명이었다. 가구별로 나눠보면 1가구당 평균 2.59명이 사는 셈이다. 사실상 자식과 함께 거주하면서도 기초생활수급권을 박탈당할까봐 이를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실제 가구원 수는 1가구당 평균 3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구간별’로 가구 총소득을 물어본 이번 조사에서 1가구 평균소득을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3명이 사는 가구가 한 달 100만원 미만의 돈으로 생활하는 것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의 ‘평균치’라고 볼 수 있다. 2010년 현재 정부가 발표한 2인 가구 최저생계비는 85만8747원, 3인 가구는 111만919원이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 가구 구성원의 직업/최대 가계 지출 항목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계선에서 살고 있는 이들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주거비였다. 가구당 월 20만~30만원에 이르는 관리비·임대료가 가장 큰 지출 항목이라고 답한 경우가 74.4%였다. 실제 면담조사 과정에서 거의 모든 주민이 “제발 관리비·임대료가 낮아지도록 도와달라”고 하소연했다. 앞으로 개선되길 바라는 사항을 물었는데, 68.6%가 ‘보증금·임대료·관리비의 인하’를 꼽았다. ‘차별적 시선·사회적 소외’(4.1%), ‘범죄 단속’(5.0%), ‘주택 개선’(3.3%) 등에 비해 월등한 수치다.

가구주를 포함해 모든 가구원의 직업을 물었는데, ‘무직’인 경우가 48.9%에 이르렀다. 무응답자가 5.8%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도 뚜렷한 직업이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직업이 있다 해도 단순노무직(10.0%), 단기직 아르바이트(5.4%), 공공·자활근로(6.4%) 등 비정규직이 많았다. 무직, 단순노무직, 단기직, 자활근로 등을 더하면 70%가 넘는다. 한 달 100만원 미만의 소득을 올린다고 답한 조사 결과와 겹친다. 실직이 곧 가난과 연결된 것이다.

» 가구 구성원 가운데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자주 이용하는 복지기관

가난의 원인은 질병, 절실한 복지는 의료비 보장

가구 총소득 100만원 미만인 88가구 가운데 65살 미만의 성인이 포함된 가구(‘노인+성인 자녀 가구’, ‘성인 부부+자녀 가구’ 등)는 48.9%에 이르렀다. 노동능력이 있는 이들이 안정적·지속적 임금을 받게 된다면 이들의 가난에도 출구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취업 알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빈곤층 가구의 특성 때문이다. 조사 대상 121가구 가운데는 ‘노인 단독’(14.9%), ‘노인 부부’(19.0%) 등 65살 이상 노인을 중심으로 가구가 구성된 경우가 많았다. 나이 분포를 봐도 조사 대상 가구원의 50.2%가 60살 이상으로 나타났다. 가구 총소득 100만원 미만인 88가구 가운데 ‘노인 단독’ 또는 ‘노인 부부’인 경우는 30%였다. 사실상 노동능력을 잃어가는 빈곤 노인 가구에 대해선 기초생활급여를 늘리는 것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다.

장애와 질병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올무다. 가구 구성원 가운데 장애인이 있는 경우가 47.1%였다. 장애 등급별로 보면 중대 장애로 분류되는 1~3급 장애가 전체 장애인의 57.6%를 차지했다. 이들에겐 취업이 아니라 돌봄과 치료가 절실하다. 그러나 면담 과정에서 살펴본 바로는 중증 장애인의 대부분은 사실상 돌봄의 사각지대에 방치된 상태였다.

» 장애 유형/만성질병 유형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자주 이용하는 복지시설’을 물었는데, 사회복지관(10.7%), 경로당(5.8%), 동사무소(5.8%), 종교·사회단체(4.1%)를 꼽은 경우보다 “아무 곳도 이용하지 않는다”(37.2%), “관심없다·모르겠다”(33.9%)는 응답이 월등하게 높았다. 현장에서 살펴본 바로는 종교·사회단체, 경로당 등은 무료급식과 반찬 제공 등의 공간이었고, 동사무소는 기초생활급여 수급 등을 상담하는 공간이었다. 장애에 따른 각종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사회복지관 이용률이 저조한 것은 빈곤 장애인의 처지를 웅변한다.

거의 모든 가구 구성원이 각종 만성 질병을 앓고 있었는데, 노동력 상실과 직결되는 ‘허리·관절 질환’(31.3%), ‘신체 손상에 따른 거동 불편’(6.5%), ‘암’(5.0%), ‘정신질환’(3.0%) 등이 많았다. 빈곤층의 질병은 평생 지속된 가난의 결과이자, 남은 인생까지 가난하게 살게 될 원인이다. ‘현재 가난의 원인’을 물었더니 34.7%가 “질병과 장애 때문”이라고 답했다.

‘가장 절실한 복지 서비스가 무엇인지’ 물었는데, 25.6%가 ‘의료비 보장’이라고 답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면담 과정에서 살펴본 바로는 빈곤층의 질병은 그냥 방치될 뿐, 치료되지는 않는다. 주거비 등의 부담이 큰 상태에서 아파도 그냥 참는 것이다. 의료비 보장 다음으로 ‘소득지원금’을 절실한 복지 서비스로 꼽은 경우가 14.9%였다. ‘취업 알선’(13.2%)이라고 응답한 것까지 감안하면 이들이 원하는 복지는 안정적 소득을 확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0년 된 입주자가 59.5%, 빈곤 탈출 실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빈곤층은 사실상 ‘영구 빈곤’의 상태에 들어가 있었다. 앞으로 잘살 것이라는 희망 없이 자녀 세대까지 빈곤을 대물림하는 구조에 갇혀버린 것이다. 121가구 가운데 59.5%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조성된 1989~90년에 입주했다. 입주민의 상당수가 빈곤 탈출에 실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모는 농사를 지었고(‘부모 직업은 농업’ 44.6%), 가난이 싫어 서울로 올라왔으나(‘서울·수도권 외 지방 출신’ 70.2%), 월세방에서 가난하게 살았던(‘입주 직전 월세·사글세 거주’ 66.1%)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가난할 것이라고(‘미래 빈곤 해결 가능성 전혀·별로 없다’ 39.7%) 스스로 생각한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은 어디일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집단’을 물었더니 정당·언론·기업·지방자치단체·종교기관 등을 제치고 중앙정부(28.1%)를 가장 많이 꼽았다. ‘가난을 해결하려면 국가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물음에 대한 5점 척도 조사에서도 “매우 그렇다”(29.8%), “비교적 그렇다”(39.7%)는 응답이 많았다. 대한민국은 그 대답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을까.

» 입주 직전 거주지 형태/가구주 부모의 직업/ 이사가고 싶은 이유/ 이사가고 싶지 않은 이유/단지 내 개선 희망 사항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조사 자문: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조사 보조: 강보라·김민지·김옥진·김하나·김혜영·류다솜·민들레·백가희·윤현주·이수연·황단비(이상 동덕여대), 권혜미·김솔·박금지·이하늬·전수정(이상 중앙대), 손희경(건국대) 학생, 이선주 프리랜서 작가

 

[영구 빈곤 보고서 ①]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만난 한국 빈곤계층의 역사… 6주에 걸친 121가구 방문 조사 보고서
가난한 사람들은 모여 산다. 잘사는 사람들이 그들을 제 곁에서 밀어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난 반세기에 걸쳐 서울 청계천 판자촌, 난곡 달동네, 서초동 비닐하우스촌, 가리봉동 쪽방 등을 전전했다. 이에 대한 학계·언론계의 연구·조사도 간간이 이뤄졌다. 그러나 한국 빈곤층 집단 주거지를 대표했던 이들 지역은 옛 모습을 잃었다. 2010년 현재 대부분 재개발이 완료됐거나 진행되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또다시 어디론가 떠나갔다.

» 서울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다르다. 가난한 사람들의 오랜 둥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가난이 중첩한 현장이다. 꼭 20년 전인 1990년, 서울 번동·중계동·면목동 등에 국내 최초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가 착공되거나 완공됐다. 정부는 수도권 일대의 영세민·철거민·무허가주택입주민 등을 이곳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저렴한 임대료만 내면 ‘원할 때까지’ 계속 살 수 있다고 정부는 선전했다. 서울 2만2천여 호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19만 호의 영구임대아파트가 생겼다. 그러나 1992년을 마지막으로 영구임대아파트 건설은 중단됐다. 그리고 그들은 잊혀졌다. 잊혀졌지만 그 곳에서 지난 20년을 가난과 함께 살았다.

<한겨레21>은 2010년을 사는 한국 빈곤층의 현실에 주목했다. 한국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주민들을 찾아가 만났다. 1990년 무렵에 건설된 서울 강북의 한 단지를 집중 취재했다. 그들의 삶이 지난 20년에 걸친 한국 빈곤계층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남기철 교수 연구팀의 자문과 도움을 받아, 지난 2월부터 총 6주에 걸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2개 동 360가구를 방문해 이 중 121가구와 면담했다. 이 가운데 20가구는 다시 2회 이상 심층면접했다. 그들은 빈곤을 증언하고, 빈곤에 대한 무관심을 증언했다.

그들은 가난하게 태어났으며, 여전히 가난하고, 앞으로도 가난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 빈곤의 대표 현장을 세 차례의 기사로 연재하면서, <한겨레21>은 거듭 물어볼 것이다. 그들은 왜 이렇게 살게 되었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편집자


글 싣는 순서

1회: 영구 빈곤의 둥지

2회: 무기력의 대물림

3회: 격리당한 아이들의 미래

영구임대아파트 121가구 사람들

서울 강북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2개동 121가구의 상황을 요약한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아파트의 정확한 위치를 밝히지 않고, 실제 동·호수와 다른 곳에 각 가구를 표시했다. 편집자

»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1. 60대 부부가 14살 손녀를 키운다. 아들은 지방에서 일하고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2. 70대 부부. 평생 공사판에서 일한 남편은 요즘도 동사무소에 나가 자활근로를 한다.

3.70대 부부. 남편은 청소부 일을 하면서 아들 셋을 키웠다. 둘째아들은 빚 때문에 도망다닌다.

4. 60대 부부. 남편은 손을 다쳐 일을 못한다. 부인이 자활근로를 한다.

5. 6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남편은 1997년 회사가 부도나면서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아들은 직업이 없다.

6. 다섯 식구가 산다. 30대 딸·아들을 둔 60대 부부가 80대 노모를 모시고 있다. 환갑의 며느리는 정신장애가 있다.

7. 70대 부부. 부인은 식당일을 하고, 남편은 자활근로를 한다.

8. 60대 부부가 30대 아들과 산다. 남편은 공장에서 일하고 부인은 지체장애 1급이다. 아들은 직업이 없다.

9. 50대 어머니와 30대 딸이 산다. 1천만원의 사채를 빌려 한 달 이자만 60만원이다.

10. 공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30대 아들이 60대 노모와 산다. 서울 불광동 철거촌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옮겨왔다.

11. 70대 노모와 환청에 시달리는 30대 딸, 그리고 뚜렷한 직업이 없는 30대 아들이 산다.

12. 7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이고 아들은 직업이 없다.

13. 70대 노모와 40대 아들, 30대 딸이 산다. 대부업을 하는 아들이 돈을 제법 번다.

14. 60대 남편은 판매일을 하고 50대 부인은 일용직으로 일한다.

15. 50대 어머니가 혼자서 아들과 딸을 키운다. 딸이 취직하는 바람에 기초생활수급권자 자격을 잃었다.

16. 당뇨병을 앓는 70대 할머니가 혼자 산다. 무허가 집에 살다가 20년 전 입주했다. 딸 여섯에 아들 하나를 키웠다.

17. 60대 부부. 남편은 30년간 무직이었고 부인은 파출부로 일한다. 딸은 20년간 투병하다 숨졌다.

18. 6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공장이 부도나 빚을 졌다. 지금도 신용불량자다.

19. 식당일을 하며 자식을 키운 60대 할머니가 혼자 산다. 몸이 아파 일을 못한다. 자녀들에게 한달에 20만원의 용돈을 받는다.

20. 70대 부부. 부인은 위암에 걸렸다. 남편은 경비일을 한다. 따로 사는 아들은 얼마 전 파산 신청을 했다.

21. 60대 부부. 남편은 지체장애 2급이고 부인은 당뇨를 앓고 있다. 부부 모두 버는 돈이 없다.

22. 60대 어머니와 40대 아들이 산다. 어머니는 평생 보따리 장사를 했다.

23. 70대 할머니가 자활근로를 하면서 중학생 손녀 뒷바라지를 한다. 2천만원의 빚이 있다.

24. 70대 할아버지와 성인이 된 2명의 딸과 1명의 아들이 산다. 자녀들은 고교 졸업 뒤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25. 70대 부부. 서울 약수동 철거촌에서 쫓겨나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에 거주하다 이곳에 옮겨왔다.

26. 70대 노모는 자활근로를 하고, 40대 딸과 30대 아들은 직업이 없다. 초등학생 손자는 얼마 전 학원을 그만두었다.

27. 70대 부부와 30대 아들 둘이 산다. 큰아들은 학원 강사고, 둘째아들은 무직이다.

28. 70대 할머니가 40대 아들과 산다. 무직인 아들은 당뇨를 앓고 있다.

29. 70대 부부. 이곳에 오기 전 무허가 집에 살면서 행상을 했다. 함께 사는 40대 딸이 자활근로로 생계를 꾸린다.

30. 6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서울 가리봉동 셋방 시절, 불이 나서 아들 넷 중 둘이 화상을 입었다.

31. 60대 아버지와 30대 아들 두 명 모두 직업이 없다. 서울 봉천동 철거촌에서 쫓겨나 이곳에 왔다.

32. 60대 어머니가 공장일을 하며 딸을 키웠다. 함께 사는 사위는 제조공장에서 일한다.

33. 60대 할머니. 자녀가 주는 용돈과 국민연금으로 생활한다.

34. 40대 부부. 주차관리와 청소를 하며 돈을 번다. 학비를 대야 할 10대 딸이 3명이다.

35. 60대 할아버지. 임대료·관리비를 못 냈다. 법원이 강제 퇴거 판결을 내렸다. 지난 1월, 20대 아들이 자살했다.

36. 60대 부부와 40대 아들, 30대 딸이 산다. 부인이 빌딩 청소 일로 돈을 번다. 3천만원의 사채빚이 있다.

37. 60대 부부와 아들이 산다. 뇌병변장애인 남편은 주차관리를 하고, 지체장애인 아내는 가내 부업을 한다.

38. 60대 부부와 40대 아들이 산다. 아들은 늘 몸이 아파 누워 있다. 시집간 딸이 관리비를 내준다.

39. 50대 어머니는 지체장애 1급으로 키가 105cm다. 10대 후반의 큰딸은 얼마 전 가출했다.

40. 자활근로를 하는 70대 노모와 화상 장애를 입은 40대 아들이 산다. 예전엔 산 아래 비닐을 치고 살았다.

41. 60대 노모는 평생 노점을 하며 자식을 키웠다. 30대의 두 아들은 월 100만원씩 번다.

42. 70대 노모와 3명의 아들이 산다. 아들은 모두 공장에서 생산직으로 일한다.

43. 당뇨와 골다공증을 앓는 70대 할머니가 자활근로를 하며 혼자 산다.

44. 청각장애가 있는 60대 노모는 자활근로를 하고 30대 딸·아들은 각각 학원 경리, 어린이 축구교실 교사다.

45. 시각장애 1급인 6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

46. 70대 부부. 부인이 식당에서 일하며 딸 7명을 키웠다.

47. 시각장애 1급인 7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 14년 동안 기초생활수급비로만 살았다.

48. 70대 노모가 30대 아들과 산다. 아들에게 빚이 있으나 노모는 액수를 모른다.

49. 60대 부부와 20대 아들·딸이 산다. 아버지가 노점상을 한다. 아들·딸은 직업이 없다.

50. 7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 40년간 공사현장에서 일하며 자식 셋을 키웠다.

51. 70대 부부. 큰아들은 빚 때문에 숨어다니고, 딸은 이혼했다.

52. 70대 부부. 남편과 부인 모두 지체장애다. 서울 망원동 지하방에 살다가 이곳에 왔다.

53. 6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한다. 아들은 건설현장에서 일한다.

54. 70대 부부. 돈이 없어 허리디스크 수술과 틀니 시술을 계속 미루고 있다.

55. 청각장애가 있는 70대 아버지와 30대 아들 둘이 산다.

56. 60대 노모와 30대 아들이 산다. 어머니는 심장병에 걸려 입원했다. 아들은 병원비를 대느라 몇천만원의 빚을 졌다.

57. 60대 부부와 20대 아들이 산다. 아들은 파킨슨병으로 누워 있다. 직업이 없는 부부는 1억원의 빚이 있다.

58. 60대 부부. 당뇨·천식 등을 앓고 있다. 딸은 휴대전화 제조 공장에서 일하다 옆동 남자와 결혼했다.

59. 70대 부부와 30대 딸이 산다. 남편은 35년째 택시 운전을 한다. 부인은 얼마 전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60. 60대 노모와 40대 아들이 산다. 청원경찰인 아들은 미혼이다.

61. 6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 기초생활수급비와 장애수당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62. 70대 할머니가 혼자 살면서 자활근로로 생계를 잇고 있다.

63. 70대 부부와 40대 아들 둘이 산다.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됐다.

64. 80대 할아버지가 국가유공자 연금을 받아 생활한다. 40대 아들은 직업이 없다.

65. 70대 노모와 두 아들이 산다. 한 명은 공장에서 기계 만지는 일을 하고 다른 한 명은 무직이다.

66. 70대 노모, 무직인 둘째아들, 지체장애인인 막내아들, 그리고 첫째아들이 두고 간 손녀가 함께 산다.

67. 60대 노모와 30대 아들이 산다. 첫째아들은 일용직이다. 둘째아들은 지적장애가 있다.

68. 70대 노모가 알코올중독·게임중독인 30대 아들,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40대 딸과 산다.

69. 50대 부부와 20대 딸 2명이 산다. 아버지는 신체장애, 큰딸은 지적장애를 앓고 있다. 작은딸은 대학생이다.

70. 70대 할머니가 당뇨·협심증·골다공증을 앓으며 혼자 산다.

71. 50대 어머니와 20대 딸, 10대 아들이 산다. 딸은 직업이 없고, 아들은 고등학생이다.

72. 60대 부부와 40대 아들이 산다. 생계를 꾸려온 부인은 얼마 전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73. 70대 남편은 보청기를 끼고 자활근로를 한다. 60대 부인은 10년간 청소일을 했다.

74. 다리가 불편한 60대 어머니와 20대 딸이 산다. 모두 무직이다. 친척들의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75. 7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돈을 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정신지체 장애가 있다.

76. 60대 노모와 20대 딸이 산다. 둘 다 무직이다. 친척들에게 수백만원의 빚을 졌는데 독촉이 심하다.

77. 70대 아버지와 30대 딸이 산다. 예전엔 서울 삼양동 무허가 집에 살았다. 딸은 지체장애가 있다.

78. 60대 부부. 가건물에 살다 불이 나서 이곳으로 이사왔다. 부인이 분식점을 운영한다.

79. 60대 부부. 부인은 20년 동안 파출부로 일했다. 5천만원의 빚이 있다.

80. 70대 아버지와 30대 아들이 산다. 무직인 아들은 1천만원의 빚을 카드로 돌려막고 있다.

81. 70대 노모와 40대 아들 모두 무직이다. 아들은 지금껏 한 번도 돈을 벌어본 적이 없다.

82. 60대 부부와 30대 딸이 모두 무직이다. 자활근로를 신청했으나 떨어졌다.

83. 60대 부부. 부인은 파출부로 일한다. 지체장애 2급인 남편은 20년 동안 일을 못했다.

84. 60대 할머니가 위장병·고혈압·허리디스크를 앓으며 혼자 산다. 따로 사는 자녀가 관리비를 낸다.

85. 70대 부부. 시각장애가 있는 부인은 4년 전 폐암에 걸렸다. 건축일을 하던 남편은 허리를 다쳐 거동이 불편하다. 딸 4명 중 2명이 이혼했다.

86. 70대 부부. 당뇨·고혈압·허리디스크가 있다. 남편이 아파트 기계실에서 일해 한 달에 120만원을 번다. 한 달 의료비만 80만원이 든다.

87. 70대 노모와 30대 자녀 4명이 산다. 노모는 수산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자녀를 키웠다.

88. 70대 노모와 건설 노동일을 하는 40대 아들이 산다. 노모는 신장장애 2급이다.

89. 60대 할머니가 혼자 산다. 수십 년간 식당일을 했지만, 얼마 전 척추를 다친 뒤로는 누워만 있다.

90. 70대 노모는 관절이 아프고, 40대 아들은 허리를 다쳤고, 10대 손자는 지체장애 2급이다.

91. 60대 부부가 30대 딸들과 산다. 두 딸은 유치원 비정규직 교사다.

92. 40대 부부가 10대 아들과 산다. 택배 기사, 택시 운전 등을 전전하던 남편은 얼마 전부터 덤프트럭 운전을 시작했다.

93. 평생 일용직으로 일한 60대 부부와 20대 딸이 산다. 회사원인 딸이 부모의 빚을 갚고 있다.

94. 당뇨가 있는 70대 남편은 평생 일용직 노동을 했다. 60대 아내는 갑상선 질환으로 늘 피곤하다.

95. 60대 부부가 90대 노모를 모시고 산다. 60대의 아들은 공장에서 일하다 손가락을 잃었다.

96. 60대 노모와 30대 아들이 산다. 무직인 아들은 환청이 심해 정신장애 3급이다. 어머니는 3년 전 암수술을 받았다.

97. 60대 부부와 40대 아들 두 명이 산다. 임대료를 계속 못 내고 있는데, 두 아들 모두 직업이 없다.

98. 50대 어머니와 30대 아들 모두 무직이다. 어머니는 의료사고로 손을 못 쓴다. 기초생활수급비로 생활한다.

99. 70대 할머니가 홀로 산다. 고혈압·당뇨·심장병이 있다.

100. 6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서울 수유리 철거촌 세입자였다. 어머니는 3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았다.

101. 70대 아버지와 30대 아들이 산다. 아버지는 뇌병변 3급 장애가 있고, 1천만원의 빚이 있다.

102. 60대 노모, 딸 2명, 아들 1명, 초등학생 손녀 2명 등 6명이 함께 산다. 큰아들이 퀵서비스 일을 한다.

103. 60대 노모와 30대 딸이 산다. 딸은 무직이고 어머니가 지금껏 청소일을 한다.

104. 70대 아버지와 20대 딸이 산다. 아버지는 오른쪽 손발을 쓰지 못한다. 관리비는 따로 사는 아들이 내준다.

105. 70대 부부와 30대 딸이 산다. 부인은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남편은 당뇨를 앓고 있다.

106. 위장병·당뇨·자궁암 등에 시달리는 70대 부부와 30대 딸이 산다. 모두 무직이다.

107. 70대 할머니와 90대 할머니가 산다. 두 할머니 모두 자녀가 없고 기초생활수급비로 살고 있다.

108. 50대 부부와 30대 딸이 산다. 서울 삼양동 철거촌의 세입자였다.

109. 70대 아버지와 뇌성마비 1급인 40대 딸이 산다. 반지하에 오래 살다가 지난해 입주했다.

110. 70대 부부와 30대 아들이 산다. 서울 금호동 철거 주택의 세입자였다.

111. 60대 부부. 남편은 근무력증, 부인은 당뇨 환자다. 병원비 때문에 몇천만원의 빚을 졌다.

112. 40대 부부가 초등학생 딸 2명과 산다. 일용직인 남편은 카드 돌려막기를 하다 신용불량자가 됐다.

113. 70대 부부. 택시 운전사였던 남편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못 쓰게 됐고, 지금은 자활근로를 한다.

114. 60대 노모와 40대 아들 모두 정신장애인이다. 또 다른 30대 아들이 고등학생 때부터 가족을 부양해왔다.

115. 60대 아버지는 건설 일용직으로 일한다. 20대 아들 둘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한다.

116. 70대 부부. 모두 장애가 있다. 사업이 부도난 30대 아들이 함께 산다.

117. 60대 아버지와 20대 아들이 산다. 아버지는 청각장애 2급이다. 아들은 작은 회사에 다닌다.

118. 지체장애 3급인 60대 할아버지가 혼자 산다. 2천만원의 은행빚이 있다.

119. 40대 어머니가 혼자 딸을 키운다. 어머니는 암수술 뒤로 일을 못한다. 고등학생 딸은 급식비가 없어 저녁을 굶은 채 방과후수업을 받는다.

120. 70대 할머니가 가끔 자활근로를 하며 혼자 산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청소일을 하며 육남매를 키웠다.

121. 70대 할머니가 혼자 산다. 무직인 할머니는 알코올중독자가 사는 이웃집과 자주 다툰다. 관리비는 따로 사는 자녀가 낸다.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②]
가난·폭력·방치 속에 자라 직업도 없이 텅 빈 잠에만 빠져드는 영구임대아파트 2세대 청년들
» 무기력은 더 진하게 대물림된다.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지난호 이야기

한국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서울 강북의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했다. 평균적으로 한 달 100만원 이하를 벌어 30만원의 임대료·관리비를 내고 세 식구가 근근이 살아가는 곳이다. 배우자는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죽고, 살아남은 식구들은 장애가 있거나 암에 걸렸다. 무허가 판잣집, 비닐하우스촌, 철거촌, 쪽방 등을 거쳐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지만, 가난을 벗어날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폐암에 걸린 박금자(가명)씨는 점심 때마다 무료급식을 찾아 줄을 선다.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 명령을 받은 김종택(가명)씨는 얼마 전 자살을 시도했다. 정영숙(가명)씨는 아들의 병 치료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런 사연을 지닌 4천여 세대 1만여 명이 희뿌옇게 모여 하루하루를 산다.

글 싣는 순서

1회: 영구 빈곤의 둥지
2회: 무기력의 대물림
3회: 격리당한 아이들의 미래

이영호(23·가명)씨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3평짜리 방의 절반은 책상과 컴퓨터가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의 자리엔 빨지 않아 후줄근한 이불이 깔려 있다. 이씨가 사는 세상이다. 아파트 복도로 향한 창에서 햇볕이 스며든다. 이씨는 한사코 누워 잠만 잔다.

“불 켜지 마.”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때 어린 이씨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방구석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 반지하방이었다. 그전엔 보광동 판자촌에서 살았다고 어머니가 말해줬다. 그래도 이씨의 기억 속에는 어둠에 잠긴 반지하방이 첫 번째 집이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했다. 음주 운전을 하다가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 뒤로 노름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밤을 새우고 아침에 집으로 들어왔다. “불 꺼.” 아버지가 말했다. 반지하방의 형광등 불을 끄면 대낮에도 캄캄했다. 어린 이씨는 캄캄한 방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나가 놀려 해도 아버지가 말렸다. “밖에 나가지 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거역할 수도 없었다. 어린 이씨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가 잠을 자는 ‘캄캄한 낮’이 무서웠다.

 

1.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삶

이씨의 집은 이제 반지하방이 아니다. 그는 방 2칸짜리 13평 영구임대아파트에서 40대 후반의 어머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함께 산다. 어머니를 일삼아 때렸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멀리 떠나버렸다. 그래도 이씨의 주변은 캄캄하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산다.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한다. 오후 2시에 일어난다. PC방에 간다. 그곳은 대낮에도 어둡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술을 그만 마시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귀찮아, 방문 창틀에 맥주와 소주를 올려놓았다. 허름한 냉장고를 뒤지는 일이 사라졌다. 귀찮은 어머니를 마주칠 일도 사라졌다. “울지 마.”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어머니는 속옷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날 새벽엔 비가 많이 왔다. 한참 있다 어머니가 돌아왔다. “너 때문에 돌아왔다”며 어머니는 울었다. 어린 이씨도 울었다. 이제 이씨는 울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이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말이 없었다. 남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발표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 근처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3번 마을버스 운전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정거장을 곧잘 지나쳤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이씨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멀리 돌아 내린 뒤 다시 걸어왔다. 어머니가 다그쳤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어떻게 내려달라고 말해.” 이씨는 도리어 어머니한테 화를 냈다. 3번 마을버스를 타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이씨의 직업은 PC방 아르바이트였다. “나 없을 때 가게 좀 봐라.” 매일 나가던 PC방 사장이 말했다. 그러나 사장은 이씨를 정식으로 고용하진 않았다. 한 달에 몇만원씩 용돈만 줬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받아주겠어.” 어디건 이력서라도 내보라는 어머니한테 이씨는 화를 냈다. 말이 없는 이씨는 화를 낼 때 무섭다. 중학교 동창과 잠시 사귀었는데, 오래지 않아 헤어졌다. 그 뒤 이씨는 칼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그었다. 수십 곳의 상처에서 피가 났다. 어머니는 아들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퇴원한 이씨는 15층 집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군대에 갔다. 거기서 또 사고를 낼까봐 어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무사히 제대했다. 다행이었다.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제대한 뒤부터 1년이 넘도록 이씨는 계속 방에서만 살았다. 어둡고 캄캄한 곳만 찾아다녔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주변에서 노인들이 ‘자활근로’를 하고 있다. ‘무기력한 2세대’를 대신해 노인들은 몸이 움직일 때까지 돈벌이에 나서곤 한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아들이 자고 있으니 옆집으로 갑시다”

4천여 세대, 1만여 명이 모여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방에만 웅크린 젊은 사람들이 많다. 평생 공사판에서 철근 구부리는 일을 했던 김형성(69·가명)씨의 아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나간다. 밤마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자고 있으니, 옆집으로 갑시다.” 잔뜩 찌푸린 2월의 어느 날, 김씨는 인터뷰하자는 기자를 옆집으로 이끌었다.

35살의 아들은 직업이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아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60대 아버지는 이웃 친구 집에서 기자와 이야기했다. “아드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기자의 물음에 김씨는 손을 내저었다.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뒤론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서 말이야.”

평생 석공일을 했던 최성원(70·가명)씨 집에도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는 30대 중반의 아들이 있다. “껄렁껄렁한 놈들하고 어울려 당구나 치고, 술에 취해서 비척거리는 사람 있으면 달려들어 지갑을 뺏고, 그 돈으로 여관 가서 자고…. 그러니 강도에 폭력으로 6번이나 구속영장이 떨어졌다고.” 최씨는 얼굴을 쓸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들에 대해 말했다. “그놈이 내 신세를 망쳤어.”

자식 때문에 곤혹스런 사람은 김씨와 최씨 말고도 많았다. “우리 아이가 자고 있어요. 집에 사람을 들일 수 없네.” “지금 자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나중에 오세요.” 기자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를 이유로 들었다. 문을 열어주는 것은 언제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였다. 노부모는 낮잠을 자는 자식을 어려워했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을 꺼렸다.

 

2. 배반당한 미래

자식은 미래다. 평생 가난했지만, 내 아들딸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가난을 이겨내게 만든다. 그러나 그 믿음이 배반당한다면? 면담 조사한 121가구 가운데 노부모와 성인 자녀가 함께 사는 65가구가 있다. 이들은 독거 노인과 노인 부부만 사는 41가구보다 미래를 더 비관했다(나머지는 한부모 가구 또는 65살 미만의 성인 부부 가구 등이다).

세상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가?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23.1%가 ‘그렇다’고 답했다. ‘노인 가구’ 가운데는 14.6%만 ‘그렇다’고 답했다.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58.5%가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응답을 한 ‘노인 가구’는 48.8%였다(그래프 참조). 성인 자녀와 노부모가 함께 사는 집을 지배하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무기력이었다. 그들의 무기력에는 역사가 있다.

“엄마가 싫어. 엄마랑 이혼해.” 박선영(20·가명)씨가 아빠한테 말했다. 박씨가 5살 때였다. 엄마는 자주 가출했다. 엄마는 재혼해 아빠를 만났다. 전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왔다가 아빠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재혼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딸 둘을 낳았지만 자꾸 집을 나갔다. 아빠는 결국 이혼했다. 딸 둘을 혼자 키웠다.

아빠는 스웨터를 짜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지하방에서 박씨가 여동생을 데리고 지냈다. 10대의 박씨는 속옷을 빨지 않았다. 장롱의 이불 틈에 끼워두었다. 생리혈이 묻은 속옷은 장롱에서 썩어갔다. 여동생은 고등학생이 되도록 이불에 오줌을 쌌다. 그 이불도 그냥 장롱에 처박아두었다. 아무도 자매에게 씻고 갈아입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장롱에 처박아둬 썩어버린 속옷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씨는 카드회사 대리점에 취직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10시까지 잠을 잤다. 회사에 나갈 때도 씻지 않았다. 귀찮았다. 한 달 만에 해고됐다. 얼마 전 대형 할인마트에 다시 취직했다. 역시 매일 지각을 하다가 일주일 만에 해고됐다.

박씨는 요즘도 하루 종일 잠만 잔다. 아빠는 가끔 박씨를 때린다.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혁대를 풀어 등이며 다리를 때린다. 옷걸이로 때릴 때도 있다. 줄넘기 줄로 때리기도 한다. 박씨는 그런 일이 생기면 집을 나가버린다. “지난 5년 동안 가출을 수십 번은 했을 것”이라고 박씨는 말한다. 한번은 아빠에게 맞고 집을 뛰쳐나가 아동보호센터에서 지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도 덩달아 가출을 시작했다.

20대의 이영호·박선영씨에겐 공통점이 있다. 잠만 잔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뭘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본보기’가 가족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런 역할 모델은 이웃집에도 없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통틀어 별로 없다. 그들의 부모는 돈 버느라 바빴다.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가끔 자식을 마주칠 때면 때리거나 윽박질렀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탓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그런 일이 다반사다. 그런 이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제 돈 버는 일조차 심드렁하다. 늙은 부모는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젊은 자식은 일을 하기 싫은 무기력자가 된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희망 자체를 꿈꿔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무능한 부모 탓일까, 무력한 자식 탓일까.

 

3. 착하고 성실한 가난

» 착하고 성실한 가난.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모든 젊은이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경우가 없진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또 다른 추진 로켓이 필요하다.

저녁 6시30분이 되면, 김성철(38·가명)씨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68살의 어머니가 혼자 저녁을 먹고 있다. 개다리소반에는 현미가 들어간 밥, 통조림에 담긴 햄, 그리고 작은 간장 종지가 놓여있다. “그렇게 짜게 드시면 안 되는데.” 아들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냉장고에는 동그랑땡, 참치 그리고 햄이 담긴 통조림만 가득하다. 열무김치도 있지만, 어머니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당장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는다.

당뇨와 고혈압이 있는 어머니는 최근 석 달 동안 3번이나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음식 조절을 해야 하지만,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어머니는 스스로 그 일을 못한다. 어머니의 ‘복지카드’에는 ‘지적·정신장애 2급’이라고 적혀 있다. 어머니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이빨 없는 잇몸으로 기름기 많은 햄을 씹고, 다시 간장을 쳐서 밥을 먹는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권투선수 출신이었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았다. 해수욕장에서 탈의실을 운영해 돈을 벌었다. 그나마 벌이가 괜찮았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서울 청량리 근처 쪽방에서 살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다. 문방구가 망하자, 학교 입학식·졸업식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노년에는 언어장애가 왔다. 언어장애가 오기 전, 아버지는 아들 김씨에게 말했다. “기술을 배워.” 배운 기술이 없어 평생 가난했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김씨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기술을 배웠다. 공고를 다니며 전기·전자 기술 자격증을 땄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문도 배달하고 자장면도 배달했다. 채소 가게 점원으로도 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임대료·관리비를 김씨가 벌어서 냈다. 고등학교 졸업 뒤엔 전문대도 들어갔다. 지금까지 10곳 이상의 직장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고쳤고, 대형 식당 주방기기도 고쳤다. 김씨보다 더 열심히 살아온 이가 또래 중엔 드물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빚만 500만원 있다.

500만원의 빚은 어머니와 관련이 깊다. 어머니에게는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 복지기관에서 알려준 ‘간호 서비스’를 받으려면 하루에 3만원을 내야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려면 한 달에 160만원을 내야 한다. 가난한 장애인이라고 나라가 우대해주는 게 그 수준이다.

2년 전에는 동사무소에서 실태조사를 다녀갔다. 대책을 마련해줄까 싶었는데, 오히려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결혼해 따로 사는 형이 돈을 번다는 이유였다. 결혼해 서울 창동에 전셋집을 얻은 형은 제 앞가림에 바쁘다. 어머니 간병 문제로 형제끼리 크게 다툰 뒤로는 내왕도 없다. 형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김씨는 알지 못한다. 얼마를 벌건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만 잘 알고 있다. 동사무소는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

 

“20년간 납부한 관리비만 모았어도…”

동사무소가 도움을 준 일이 하나 있었다. “주소지를 옮기지 마세요.” 동사무소 직원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김씨가 어머니와 같이 지내면,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혜택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유일한 간병인이자 보호자인 김씨는 ‘서류상으로는’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다.

이걸 복지제도라 부를 수 있다면, 김씨가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아무것도 없다. 김씨는 구청에서 받아온 ‘장애인 복지 서비스’ 리스트를 보여줬다. 그 가운데는 장애인 운전차량에 한해 저렴한 가스충전식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웃기는 일이에요. 우리야 면허가 없으니 차를 살 수도 없지만, 막상 사게 되면 승용차 굴릴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혜택을 끊어버리니까요.”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김씨는 혼자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출근한다 해도 어머니 때문에 곧잘 집으로 뛰어들어 와야 했으므로, 어머니 곁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주식 투자였다. “위험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김씨가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려는 뜻은 이뤘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대로 손해가 됐고 빚으로 남았다.

30대 후반의 김씨로선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 6개월 동안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이런저런 영업직을 전전하면서 월 30만원 정도를 벌었다. 한 달 전, 120만원을 준다는 텔레마케터 자리를 구했다. 출근한 내내 어머니 걱정에 불안하다. “요즘은 지난 20년 동안 꼬박꼬박 냈던 관리비가 생각나요.” 십자가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13평 방에 앉아 김씨가 말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매달 어김없이 납부했던 20만원을 20년 동안 모두 모았다면, 지금쯤 전셋집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간병인을 구해 어머니 곁에 둘 수 있지 않았을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뒤, 착하고 성실한 여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김씨는 자꾸 의문이 든다. “그래도 그건 허무한 생각이고, 임대아파트에라도 들어와 있으니 감사한 일이겠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4. 따라 배울 수 없는 모범

결혼해 두 사람이 같이 벌면 어떨까. 신미숙(33·가명)씨는 4년 전 결혼했다. 경기 안산 공단의 휴대전화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같은 공장의 운전기사를 만났다. 알고 보니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바로 옆 동에 살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의 부모들은 단지 옆 작은 식당에서 만나 상견례를 했다. 신혼부부는 빚을 얻어 경기 부평에 작은 전세방을 구했다.

결혼한 뒤에도 신씨 부부는 계속 일했다. 함께 벌어야 월 200만원의 수입을 얻는다. 얼마 전 신씨는 유산을 했다. 휴대전화 만드는 일을 10년 넘게 한 것이 유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한다. 그게 사실이라 한들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신씨 부부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양가 부모에게 단 한 푼의 용돈도 드리지 못한다. 결혼해 함께 벌어도 어느 한 집의 사정이나마 나아진 것이 없다. 신씨 부부에게 결혼은 빈곤의 해결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식구의 무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런 점에서 서유영(39·가명)씨는 드문 예외다. 그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탈출했다. 서씨는 남편과 함께 맞벌이를 하며 월 300만원을 번다. 지금은 서울 수유리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혹시 그의 삶에서 영구임대아파트의 젊은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서씨는 어린 시절에 살았던 서울 도봉동 판자촌을 기억한다. 낮은 지붕, 얇은 벽, 공동 화장실, 공동 우물이 있는 동네였다. 어린 서씨는 매일 아침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술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1985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3년 동안 백혈병을 앓던 언니도 이듬해 죽었다. 어머니는 식당일과 빌딩 청소일을 번갈아 하며 살아남은 식구들의 생계를 이었다.

상고를 졸업한 서씨는 10곳의 회사에서 면접을 봤다. 모두 떨어졌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취업했다. 한참 뒤에야 제조업체 대리점의 경리로 뽑혔다. 그곳에서 비밀을 알았다.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경리직으로 뽑으려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우리도 망설였지.” 인사 담당자가 말했다. 그 무렵 판자촌에서 쫓겨난 식구들이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화장실에선 물이 콸콸 나왔다. 회사에 다니면서 서씨는 공부를 했다. 2년제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빈민 봉사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서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네 학원 강사로 일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3년 전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현재 그는 강북 지역의 청소년자활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도 다른 지역의 복지기관에서 일한다. 평생 고생한 어머니는 여전히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 빌딩 청소일도 계속 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단지의 다른 집보단 유복하다. 자리를 잡은 서씨 부부가 있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서씨의 초등학생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집엔 그나마 다른 ‘불행’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큼 산다고 했다.

“꿈을 갖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가난하고 무기력한 사람들만 보고 자랐으니…. 하다못해 영화라도 보여줘요. 그래야 간접적으로라도 다른 삶을 보고 꿈을 가질 테니.”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서씨가 말했다. 그의 생각은 별로 틀리지 않다. 서씨 스스로 그 길을 따라 가난을 이겨내고 두 발로 섰다.

 

꿋꿋이 살아내라고 격려만 할 텐가

따라서 어두운 곳만 찾는 이영호씨, 잠만 자는 박선영씨, 착실히 일해도 근심만 늘어가는 김성철씨는 이제 서씨를 좇아 살면 된다. 세상이 차별해도 버텨야 한다. 폭력적인 부모를 만났어도 인내해야 한다. 일찍 삶을 마치는 가족이 있어도 꿋꿋하게 이겨내야 한다. 가난한 부모가 배움의 기회를 주지 못해도 스스로 벌어 학교를 마쳐야 한다.

매일처럼 마주치는 무력한 사람들 말고, 영화건 소설이건 따라 배울 만한 모범을 찾아 자신의 꿈을 키워야 한다. 눈높이를 낮춰 취업해야 하고, 배우자를 만나면 함께 벌어야 한다.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나라가 베푸는 복지제도에 기대지 말고, 혼자 힘으로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빈민의 낙인을 벗고 서민의 얼굴로 세상의 밝은 햇볕 아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술병이 나뒹구는 좁은 방에서 꾀죄죄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23살의 이영호씨를 직접 만난다면, 당신에겐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꿋꿋이 살아내라고 격려하는 것조차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주문이 아닐까.

‘사회의식’ 설문 결과 분석

부모 세대보다 자포자기·분노 강렬해져

면담 조사한 121가구 가운데 ‘노인 가구’와 ‘노인+성인 자녀 가구’를 구분해보면, 경제적 형편에선 노인+성인 자녀 가구가 조금 더 나았다. 월 100만원 미만의 가구소득을 올리는 경우가 노인 가구 83.0%, 노인+성인 자녀 가구 67.7%였다. 자식과 함께 사는 집이 그래도 조금씩 더 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회의식 조사 항목에선 다른 결과가 나왔다. 노인+성인 자녀 가구는 현재 형편과 미래 전망에 대해 노인 가구보다 더 비관적이었다. ‘가난의 원인은 내 자신에게 있다’는 질문에서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절반 정도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한 노인 가구의 비율보다 10%포인트 높다.

가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자의식이 문제 해결의 노력으로 이어진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포자기 상태가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고 보느냐’는 질문에서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58.5%가 ‘그렇다’고 답했다. 노인 가구보다 10%포인트 높다.

부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묻는 질문에서도 노인+성인 자녀 가구는 노인 가구보다 강렬하게 응답했다.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38.5%는 부자들이 불법·편법으로 돈을 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23.1%로 나타났다. 각각 노인 가구의 응답보다 10%포인트 높다.

장성한 자식은 노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벅차고, 노부모는 다 큰 자식을 데리고 사는 것이 벅차다. 서로를 짐처럼 여기면서 이들은 무기력을 대물림하고 있다.

» 사회의식 설문 결과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조사 자문: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조사 보조: 강보라·김민지·김옥진·김하나·김혜영·류다솜·민들레·백가희·윤현주·이수연·황단비(이상 동덕여대), 권혜미·김솔·박금지·이하늬·전수정(이상 중앙대), 손희경(건국대) 학생, 이선주 프리랜서 작가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③]
어른들의 방치 속에 좌절하고 분노하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10대들
» 좁은 방에서 길을 잃다
지난호 이야기

서울 강북의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121가구를 면접조사했다. 낡고 허름하지만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어보니, 각자의 사연이 아파트 구조만큼이나 서로 닮아 있다. 질병이나 사고로 누군가 앓거나 숨진 가족사, 무허가 판잣집·비닐하우스촌·철거촌을 거쳐온 빈곤 이주의 경로, 평균 100만원 이하의 월수입과 과도한 주거비 부담이 그러했다. 노인 세대는 영구임대아파트 20년 역사만큼 낡은 ‘가난의 역사’를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청년 세대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부모들이 일을 나가고 면접조사에 응할 때, 청년 세대는 주로 방에서 잠을 잤다. 영구임대아파트 1세대의 무능력은 2세대에게 무기력으로 더 진하게 대물림됐다. ‘역할 모델’도 ‘추진 로켓’도 없이 좁은 방에 드러누운 이들에게 꿋꿋이 살아내라는 격려조차 가혹한 주문일지 모른다.

글 싣는 순서

1회: 영구 빈곤의 둥지
2회: 무기력의 대물림
3회: 격리당한 아이들의 미래
에필로그: 가난을 이기는 길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놀이터가 있다. 미끄럼틀, 시소, 정글짐, 벤치가 있다. 오후가 되면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논다. 초등학생은 미끄럼틀 주변, 중학생은 나무 벤치 주변에서 논다. 고등학생은 놀이터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며 논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린다. “우리, 어린 애들 좀 팰까?”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남자 고등학생이 말했다. 곁에 있던 친구들이 키득거렸다. 실제로 때리지는 않았다. 농 삼은 말이었다. 만약 누군가를 때린다면, 지는 게 뻔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들의 편이 돼줄 사람이 없다.

 

1. 사나운 눈빛으로

“제발 그렇게 하지 마.” 김영주(가명)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돈도 없잖아.” 수신자 부담 전화였다. 김 복지사는 휴대전화 요금을 내지 못하는 형진(16·가명)의 전화를 꼬박꼬박 받았다. “돈이야 삥을 뜯어도 되고, 집을 털어도 되지.” 전화기 너머에서 형진이 말했다. 반말을 해도 김 복지사는 다 받아준다. 형진은 한 달 전, 길 가던 또래를 때렸다. 어울려 다니던 친구 2명과 합세해 때렸다. 돈을 뺏었다. 맞은 아이는 코뼈가 부러졌다. 전치 8주 진단이 나왔다. 부모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형진은 쫓겨다녔다.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찰에 붙잡힐까 두려웠다. 형진은 김 복지사한테만 마음을 주었다. “ㄱ시로 갈 거야.” 그 전화를 끝으로 연락이 없다. 형진이 저 멀리 ㄱ시로 도망갔는지, 여전히 놀이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서도 많이 싸워서 만기 연장될 거 같아 그리고 면회 부말(‘주말’의 오기) 받게 않 되 근데 상담 선생님이 특별이 됫다고 했어 내가 여기서 않 싸우고 잘지내고 있을계 잘 있다가 나가면 지금보다 더 잘할꼐.” 형진은 마침표를 찍지 않는다. 맞춤법도 지키지 않는다. 지난해 겨울, 형진은 분홍색 편지지에 마침표 없는 편지를 썼다. 김 복지사에게 보냈다. 그때 형진은 청소년재활시설에 있었다. 길 가던 아이를 때린 죄로 6개월간 보호 위탁됐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는데, 그 안에서 또 누군가를 때렸다. “나가면 지금보다 더 잘할꼐”라는 다짐은 잊혀졌다. 형진은 올해 초, 임대아파트로 돌아왔다.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코뼈를 부러뜨렸다. 이번에 붙잡히면 진짜 감옥에 갈 것이다.

형진의 어머니는 키가 작다. 소아마비를 앓았다. 친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형진에겐 없다. 의붓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다. 알코올중독이었다. 새아버지와 어머니는 형진 옆에서 부부 관계를 했다. 새아버지는 형진과 형진의 누나를 구박했다. 어머니는 아파트 근처에 단칸방을 구했다. 두 남매만 따로 살라고 했다. 형진이 초등학교 5학년, 누나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좁은 방에 아이들만 살았다. 쓰레기가 쌓였다. 바퀴벌레가 기어다녔다. 형진의 친구, 형진 누나의 친구가 이 방에서 놀았다. 학교에 가기 싫은 아이들, 집에 들어가기 싫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누나의 남자친구가 오토바이를 몰고 왔다. 훔친 오토바이였다. 형진도 그 오토바이를 몰았다. 생전 처음 탄 오토바이가 승용차를 들이받았다. 돈이 필요했다. 부모에겐 돈이 없었다. 영구임대아파트 내 복지관의 도움을 받았다. 김 복지사를 그때 만났다. 형진은 동네 아이들을 때리고, 돈도 뜯고, 집도 털었다. 단지 안에서 유명해졌다. 형진은 이듬해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 퇴학당했다. 지금까지 3년 동안 단지 놀이터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형진의 눈빛은 자꾸 사나워졌다. 형진의 편을 들어줄 사람이 이곳에는 없다. 주먹을 들어 때리는 순간부터 형진이 지는 싸움이었다.

 

“이것도 좀 치워주세요”

» 일러스트레이션/ 최호철

폭력은 나쁘다. 절도도 나쁘다. 형진이 그런 짓을 못하도록 누군가 나서야 한다. 그러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응어리진 것이 분출되지 않으면, 속에서 곪는다.

박성령(가명) 교사는 초인종을 한참 찾았다. 버튼이 떨어져나간 초인종 구멍에 겨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초인종은 쇳소리를 냈다. 아무 응답이 없었다. 돌아서려는데 문이 열렸다. 냄새가 훅 풍겼다. 해가 졌는데 방에는 전등도 켜져 있지 않았다. 문을 열어준 윤진(16·가명)은 이내 돌아가 방에 누웠다. 박 교사는 윤진의 담임이었다.

윤진이 학교에 나오지 않아 그 집을 찾아나선 길이었다. 걸어서 5분 거리였다. 교복 때문일 것이라고 박 교사는 생각했다. 윤진은 후드 티셔츠 차림으로 학교에 나타났었다. 지난 1년 동안 윤진의 몸무게는 20kg 이상 늘었다. 입학 때 산 교복이 맞지 않았다. 새 교복을 살 돈은 없었다. 윤진은 티셔츠를 입었다. 다른 학생들은 교복을 입었다. 그러다 윤진은 학교 나오는 일을 그만뒀다. 아무 연락 없이 결석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며칠을 기다리다 찾아간 윤진의 12평 집에는 과자 부스러기, 라면 봉지, 옷가지 등이 어질러져 있었다. 부엌 개수대는 라면, 김치 등 오물로 가득했다. 화장실 쓰레기통에는 휴지가 넘쳤다. 박 교사는 아무 말 없이 청소만 했다. 윤진은 문만 열어주고 아무 말 없이 다시 돌아가 누웠다. 그러다 박 교사에게 다가왔다. 냄비를 가리켰다. “이것도 좀 치워주세요.” 안에는 언제 끓였는지 모를 된장찌개가 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윤진에겐 어머니도 있고 언니도 있다. 어머니는 일본에 있다. 홀로 자매를 키우다 1년 전 일본으로 떠났다. “돈을 벌어오겠다”는 말만 남겼다. 연락은 잘 되지 않는다. 어디서 뭘 하는지 윤진은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인 언니는 좀체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윤진은 밥 대신 과자나 라면을 먹었다. 살이 쪘다. 문 밖에 나가는 일이 귀찮아졌다. 등교 시간이 돼도 혼자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눈을 감으면 일본에 가서 엄마를 만나는 꿈을 꿨다. 박 교사가 썩은 냄비를 설거지한 뒤에도 윤진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2. 굶어가며 공부하다

모두가 무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방법을 알지 못한다. 미영(17·가명)이는 밤늦도록 눕지 않는다. 인터넷을 한다. 미니홈피를 꾸미고 친구를 만난다. 인사도 건넨다. 다만 학교에서는 말하지 않는다. “안녕?” 수없이 연습했지만 누구한테도 이 말을 먼저 건네지 못했다. “고등학교에 가면 그 소극적인 성격 좀 버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그 말에 미영은 더 움츠러들었다.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인터넷은 다르다. 그곳에 가면 미영의 남자친구가 있다. 짝사랑하고 있다. 인사한 적은 없다. 말도 못 건넸다. 그 남학생의 미니홈피를 구경하며 미영은 새벽을 맞는다.

“몰라요.” 기자가 장래 희망을 물었을 때, 미영이 말했다. “몰라요.”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물었을 때, 미영이 말했다. 모른다고 말할 때 미영은 아기처럼 옹알대며 작게 말한다. “어떤 직업이 또 있는지 모르겠어요.” 미영이 알고 있는 직업은 미싱사뿐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미싱일을 했다. 미영도 미싱일을 해봤다. 지난 겨울방학 때, ‘미싱 보조’로 일했다. 아버지가 일하는 직물 공장이었다. 공장에는 창문이 없었다. 직물에선 먼지가 계속 나왔다. 눈을 뜰 수 없었다. 손은 금세 더러워졌다. 손을 씻을 곳은 없었다. 일주일 만에 눈병이 났다. 그만뒀다. “넌 공장일에 잘 맞지 않는다.” 아버지가 말했다.

미영의 언니는 얼마 전 카드회사 대리점에 취직해 월급을 받았다. 세금을 떼고 109만원을 받았다. “큰돈을 버는 언니가 부러워요.” 미영이 말했다. 미영은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100만원 넘게 버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만 확실하다. 돈을 벌면 제 몸을 치장하는 데 쓸 생각이다. 옷도 사고 구두도 살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미영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등학생 미영은 손톱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랐다. 그 손톱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돈을 벌어 몸을 치장하는 게 꿈이지만, 미영은 세수하고 머리 감는 일이 귀찮다. 100만원 넘게 벌던 언니는 집을 나갔다. “언니… 언제 와?” 미영은 방에 누워 언니에게 문자를 보낸다. 답은 없다.

 

딸 고교 졸업하면 ‘한부모’ 박탈

하고 싶은 일이 생긴다면 좋을 것이다. 목표가 있으면 더 열심히 살 수 있다. 그러나 눈치를 봐야 한다. 미숙(17·가명)은 어머니 눈치를 보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묻자, 미숙도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이다. 미숙은 학교에서 방과후 수업으로 ‘입시 미술’ 과목을 듣고 있다. 미술 선생님이 어머니를 설득했다. 수업료 10만원을 대신 내주기로 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미숙은 그림을 잘 그린다. 미술 선생님이 그걸 알아보고 미대 진학을 권했다.

그러나 방과후 수업은 모녀에게 고통이었다. 수업료는 해결했지만, 재료비가 필요했다. 22만원이 필요했다. 어머니는 큰이모에게 빚을 졌다. 빚을 냈는데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 미숙은 저녁을 굶고 수업을 듣는다. ‘입시 미술’ 수업은 밤 9시에 끝난다. 학교 저녁 급식을 먹으려면 돈을 더 내야 한다. 밤 10시, 미숙은 빈속으로 집에 돌아온다. 허겁지겁 냉장고를 뒤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돈 벌어서 나를 도와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 말을 하는 어머니는 힘이 없다. 어머니는 얼마 전 암수술을 받았다. 아버지와는 이혼했다. 어머니 눈치를 보다가 미숙이 말했다. “어차피 대학도 못 갈 텐데 이제 입시 미술은 그만두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미숙은 여전히 ‘입시 미술’ 수업을 듣는다. 배고픔을 참으며 듣는다.

냉정한 것은 미숙의 어머니가 아니다. 제도다. 외동딸인 미숙은 어머니와 산다. ‘한부모 가족’이다. 그래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었다. 현행법상 ‘한부모 가족’ 지원을 받으려면 편부모 아래 미성년 자녀가 있어야 한다. 미숙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 미숙의 가족은 더 이상 ‘한부모 가족’이 아니다.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도, 어머니의 자활근로도 한부모 가족이기에 가능했다. 이제 자격이 박탈되면 영구임대아파트 보증금마저 거침없이 오를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 미숙이가 그 돈을 벌어야 한다.

» 놀이터 한켠 나무 벤치에 중학생들이 모여 있다. 몇몇은 담배를 피우고 있지만 지나가는 어른 중에서 제지하는 이는 없다(왼쪽).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중학교 하교 시간. 학생들 옆으로 아파트 주민이 지나가고 있다.

3. 길을 잃다

“학교라도 고급스럽게 지어야 해요.” 한승원(가명) 교사가 말했다. 한 교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서 담임을 맡고 있다. “아이들이 밥 먹으러 학교에 와요. 그러니 급식이 맛있을수록 아이들이 학교에 더 애착을 느끼겠죠. 아이들은 놀기 위해서도 학교에 와요. 수업이 끝나면 달리 할 일이 없거든요. 방과후 수업에서 여러 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면 더 좋겠죠.” 그러나 지난해부터 교육 방침이 바뀌고 있다. “방과후 수업을 교과 학습 위주로 변경하라”는 게 교육부와 교육청의 지침이다. 성적을 끌어올리라는 이야기다. 학업성취도 평가의 후폭풍이 이곳에도 불어닥쳤다. 밥 먹고 어울려 놀고 다른 세상도 경험할 수 있었던 학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국·영·수 중심의 방과후 교실에서 영구임대아파트 아이들은 이내 지칠 것이다.

한 교사도 힘이 조금 빠졌다. 그는 서울 강남의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에서 일해봤다. 그곳 학생들은 깍듯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학교와 교사를 업신여겼다. 학원과 강사를 더 신뢰했다. 이곳에선 다르다. 집과 부모보다 학교와 교사에게 더 기댄다. 교사가 노력한 만큼 학생들이 달라진다. “강남 아이들은 교사를 가장 우스운 직업으로 봐요. 부모 직업이 대단하니까요. 반면 이곳 아이들은 교사를 최고의 직업으로 치죠. 부모가 무직자이거나 일용직 노동자이거든요.” 한국 정치의 변화는 이곳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고 일상의 목표를 새로 전달할 여지를 잃어가고 있다.

남은 길은 스스로 자립하는 것이다. 10대에게 그것은 벅찬 일이다.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승혜(18·가명)는 혼자 힘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서울예술대학을 가거나 실용음악학과가 있는 2년제 대학을 가려 한다. 승혜는 수녀원에서 지낸다. 수녀원이 운영하는 보육원이다. 수녀님들이 노래 학원비도 대준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곧장 수녀원에 돌아와야 하지만, “지금껏 살면서 요즘이 가장 편한 시간”이라고 승혜는 생각한다.

“과대망상이 있으시니,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의사가 승혜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치료를 거절했다. “하느님을 믿으니까 괜찮아요.” 어머니는 새벽 기도를 가자며 승혜와 승혜 오빠를 깨웠다. 오빠는 그게 싫어 일찌감치 가출했다. 어머니는 화가 나면 승혜를 무릎 꿇게 했다. 3시간은 기본이고 한나절 동안 벌을 세웠다.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딸의 끼니도 챙겨주지 않았다. 단지 안 복지관에 가면 토할 때까지 음식을 먹었다.

 

그래도 “엄마한테 미안하다”

고등학생이 되어 승혜도 집을 나왔다. 스스로 아동학대센터를 찾아갔다. 이후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승혜의 기억 속에 있는 첫 집은 모자원이다. 어머니 혼자 남매를 데리고 모자원에서 살았다. “모자원 앞에 철길이 있었다”고 승혜는 말했다. 모자원에서 영구임대아파트로, 아동학대센터에서 수녀원으로 옮겨다닌 19살 승혜는 “그래도 내가 도움받은 게 너무 많다”고 말했다. 이만큼 지내게 된 것도 주변의 도움 덕택이라 생각한다. “엄마를 버리고 온 것 같아 미안하다”는 생각도 한다. 언젠가 가수가 되어 돈을 벌면 다시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고에서 일찌감치 대학 진학을 준비한 또래들과는 경쟁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노력할 것이다. 1년 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승혜는 보육원에서 나와야 한다. 보육원은 18살 미만의 미성년만 지낼 수 있다. 올해가 지나면 승혜가 어디에서 지낼지 알 수가 없다.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생활비는 승혜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 복잡한 문제를 승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노력할 뿐이다.

승혜가 학원에서 열심히 배우는 노래가 있다.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노래”라고 승혜는 말했다. 실기시험을 치르게 되면 그 노래를 부를 것이다. “잠시 길을 잃었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어/ 난 아이인가봐 그저 온종일 울기만 하잖아/ 네가 없인 무엇도 못해/ 어리광 부리며 헤맬 뿐이야/잠시 길을 잃은 거야/ 다시 길을 찾을 거야.”(015B의 <잠시 길을 잃다>)

*다음호에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 자녀 교육 고민 ’ 설문 결과

돈 걱정에 여유 없는 어른들

서울 강북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세대 중 19가구(15.7%)가 미성년 자녀를 두고 있었다. ‘한부모’ 가정인 경우는 5가구(4.1%), 할머니·할아버지와 손자녀만 사는 경우가 2가구(1.7%)다. 현재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이들을 포함해 자녀를 낳아 길러본 경험이 있는 세대에게 ‘자녀교육에 있어 가장 큰 고민’을 물었다. 단연 학비(36.4%) 문제였다. ‘자녀 교육 고민’을 묻는 문항에 성실히 답한 69명을 기준으로 하면 64%로 압도적이다. 학습능력 부족, 자녀 탈선, 사교육비 등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었다. 동시에 “모르겠다”고 응답한 이들도 38.8%였다.

» 미래에 가장 걱정되는 일은?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에필로그]
정규직 가장 중심의 파편적 사회보장 체계, 비정규 시대에 맥을 못 추네
빈곤 문제는 복합적이다. 이번 <한겨레21> 탐사기획에서 볼 수 있듯 주택, 의료, 노령, 장애, 교육, 가족구조, 지역적 고립과 낙인, 공공보장 체계와의 괴리, 심지어 비극적 사망 등 다양한 요소가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빈곤에 얽혀 있다. 그런데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빈곤 상황에 비해 우리의 빈곤 대책은 역동적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 빈곤만 고도화된 ‘복지지체’ 세상.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전통적 복지 모형 안 통하는 ‘신사회위험’

소득·주거·의료 등 각 영역에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은 왜 이토록 빈약한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본격적 역사가 짧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외국 원조와 수용시설을 중심으로 한 긴급구호가 복지의 거의 전부였다. 이후 개발독재 시대에 산업화와 관련된 사회보험제도 등이 도입됐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제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빈곤 탈피는 각자의 근면성에 기초해 개발성장 과정에 동참했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됐다. 분배 문제나 사회적 안전망은 극히 잔여적 형태로 ‘일부 긍휼에 의한 자선 패러다임’을 유지했다. 당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회복지제도들은 복지가 가장 필요한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공무원·군인 등 정부기관 구성원이나 대기업 종사자 등 정부의 핵심 대리인에게 주로 적용됐다.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주택·보건의료 등 ‘집합적 소비재’에 대한 공공체계가 구축됐고, 지역사회 복지체계도 등장했다. 빈곤지역에 대한 사회복지관 설립, 영구임대아파트의 건립 등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국민의 정부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산업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복지체계와 사회적 안전망을 보강했다. 공공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시행하고 사회보험 체계를 완비했다. 서구 국가를 기준으로 표현한다면, 이는 전통적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해당하는 부분이 정비된 과정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인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 복지국가 모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전면화됐다. 남성이 혼자 생계를 부양하는 핵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사회보장 체계가 도저히 포괄할 수 없는 ‘신사회위험’(New Social Risk)이 광범위하게 나타난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의 양과 질이 현저히 나빠졌고, 가구주 한 명이 일해서는 나머지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됐다. 반면 여성이 일하기에는 보육과 돌봄이 사회화되지 않았다. 교육의 계층화 현상은 빈곤층에게 빈곤 지위가 세습된다는 자괴감을 더욱 증가시켰다. 빈곤층이 다면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참여정부는 사회복지 환경 변화를 감안한 새로운 프로그램의 구축을 시도했다. 근로빈곤층에 초점을 두거나 사회서비스 프로그램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펼친 것은 이런 시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와 불분명하게 혼합되면서 적절한 성과에 이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로드맵’ 수준에 머물렀다. 더구나 국민의 정부 시기에 추진된 전통적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혼란을 가중했다.

» 역대 정부 복지정책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시장 논리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빈곤 정책에서도 근로 연계가 강조된다. 빈곤층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서비스 선진화 계획’ 등을 살펴보면 기존의 공공서비스를 시장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홍보하지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자원을 실질적으로 확대 투입하지는 않는다. 사회복지 분야의 효율화가 주된 관심이다.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경쟁 논리를 폄하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빈곤 문제에 대처하려면 적절한 수준의 공공성이 필요하다.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영역에 전체적으로 시장 논리를 결합시키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근로 의욕이 높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주민 사례를 살펴봐도, 게으르고 일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적절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거나 일할 수 없는 제약조건에 갇힌 경우가 많다. 이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일하게 하여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우선 열심히 일해라. 일하면 지원해주겠다’는 현 정부의 입장으로는 일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우리 사회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복지의 역사를 단순화해 표현한다면 세 가지 국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사적 부양’의 시기로 전통적 전근대화 시기에 사적 관계망을 통해 빈곤층에 대응하던 국면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부양’으로 근대적 산업사회의 시기다.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소득을 담보하고 이 과정에서 빈곤에 빠지는 실업자와 취약층에 대해서는 국가가 사회보험 등 사회보장 체계를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던 복지국가 단계다. 세 번째는 ‘탈부양’의 단계다.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의 만연, 고령사회 등의 맥락에서 더 이상 정규직 가구부양자 중심의 사회보험이 전 국민적 사회보장 체계로 활용되기 어려워진 시기다. 이 때문에 빈곤층을 ‘부양’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를 촉진하는 방법이 활용된다. 사회서비스 등을 확대해 사회적 배제를 막으려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세 번째 ‘탈부양’ 시기의 요인에 의한 빈곤이 만연하고 있다. 근로자 가운데 빈곤자, 그리고 빈곤자 가운데 근로자 비율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가구주의 노동이 가구 전체의 빈곤을 막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빈곤 상황은 ‘구사회위험’에 의한 빈곤과 ‘신사회위험’에 의한 빈곤 문제가 중첩돼 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체계는 두 번째 ‘사회적 부양’의 단계도 완결하지 못했다. 첫 번째 사적 부양 단계의 비공식적 원조나 자선적 관점도 아직 팽배해 있다. 빈곤 문제의 진전에 비해 사회복지 발전이 지체돼 있는 것이다. 자칫 우리나라의 빈곤층은 봉건적 계급사회에서와 같이 세습적 정체와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격리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 통합성 유지는 심각한 과제다.

 

영구임대의 슬럼화는 정책 고립 탓

문제를 덮어두는 것은 아무런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만연한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펼쳐 보이고 공론화해야 한다. 이번 <한겨레21>의 기획은 우리 사회 영구임대아파트의 상황이 탈빈곤 과정이 아니라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절망의 과정임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문제에 대응하려면 공공성 확보에 투입되는 자원의 양을 늘려야 한다. 지체된 저발달의 복지체계를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 기본적 공공성의 확충은 전제조건이다.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영역별로 분리된 접근이 아니라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복합적 고립과 빈곤이 만연한 상황에서 지금의 정부 정책과 같은 파편적이고 분리된 프로그램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영구임대주택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거복지 프로그램이었음에도 다른 사회보장 체계와 연결되지 못해 슬럼과 낙인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용어설명

사회보험제도: 국가가 법에 따라 강제성을 띠고 실시하는 보험제도를 뜻한다. 노동능력의 상실에 대비한 건강보험과 산업재해보험, 노령으로 인한 노동기회 상실에 대비한 연금보험과 고용보험으로 구분한다.

공공부조제도: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임하에 생활 유지 능력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립을 지원하는 제도다. 사회보험이 보험료를 기본 재정으로 하는 반면 공공부조는 세금을 재원으로 한다.

사회서비스: 개인 또는 사회 전체의 복지 증진과 삶의 제고를 위해 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칭한다.

공공서비스: 국가나 공공 단체가 공공의 복지를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 교육, 교통, 의료, 경찰 따위를 이른다. 공공서비스는 시장재가 아닌 공공재라는 점을 통칭하고, 사회서비스는 휴먼서비스 분야의 연성서비스에 초점을 둔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

[탐사기획-영구 빈곤 보고서 에필로그]
가난한 노인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하고 아픈 사람이 건강보험 혜택 못 받는 사회…
무기력한 한국의 복지제도
“지들 먹고살기 바쁜데, 부모를 챙기겠어? 나는 기대도 안 해.” 자식들한테 용돈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황기백(73·가명)씨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누가 봐도 가난한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자녀 가운데 한두 명은 돈을 번다. 다만 비정규직이다.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로 단칸방을 얻어 사는 경우엔 왕래조차 없다. 왜 자녀는 부모를 돌보지 않는가? 왜 국가는 이들을 돕지 않는가?

» 폭풍 같은 빈곤, 구멍 뚫린 복지 우산.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한국 복지정책의 대표 격이다. 올해로 제도 도입 10년이 됐다. 사람들은 이 제도가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 혜택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노인의 경우, 기초생활보장제 혜택을 받으려면 자녀가 사실상 돈을 벌지 않아야 한다. 부양의무자 가구의 최저생계비와 피부양자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더해 그 액수의 130% 이상을 부양의무자 가구가 번다면, 피부양자 가구는 기초생활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법에 정해져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자녀가 돈 버는 순간 수급권 박탈

가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70살 할머니가 혼자 산다. 결혼한 아들은 따로 살고 있다. 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4명이 한 식구다. 노인 혼자 사는 1인 가구와 아들 식구 4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더하면 월 172만8895원(2008년 기준)이다. 그 액수의 130%는 224만7563원이다. 아들이 한 달에 224만원 이상을 벌면, 혼자 사는 노모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될 수 없다. 노모를 봉양할 만큼 아들이 충분히 벌고 있다고 한국 정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월 224만원을 버는 아들은 노모에게 적어도 월 46만원을 용돈으로 드려야 한다. 1인 최저생계비가 46만3047원(2008년 기준)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나머지 178만원으로 아내 및 두 자녀와 함께 한 달을 생활해야 한다. 만일 아내의 부모 역시 가난하다면 4인 가구의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 현행 제도는 노인 빈곤을 장년 빈곤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들 가족만 따로 떼어놓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소득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약 126만원) 이하로 내려가면 그 부족분만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자산 평가 등을 거쳐야 하므로 수월치 않다. 전세금·차량·예금 등 ‘자산’을 갖고 있다면, 정부는 이를 소득으로 환산한다. 예컨대 6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산다면, ‘소득환산율’ 기준에 따라 월 25만원 정도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평가해 현금소득과 합산한다. 차량·예금 등도 마찬가지다. 전셋집을 월세방으로 옮기고, 생계용 차량을 처분하고, 적금을 헐어 어딘가에 탕진해야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벽에 가로막힌 ‘사각지대의 빈곤층’이 많다.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는 가구소득 통계를 바탕으로 그 수가 “200만 가구, 410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김수현 세종대 교수는 “2005년 현재 근로빈곤층 227만6천여 명 가운데 63%인 144만4천여 명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추정한 근로빈곤층 144만여 명에 그에 딸린 식구 수를 더하면, 이 교수의 추정치와 거의 일치한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우산 아래 들어오면 얼마나 받게 될까? 2008년 보건복지부 기준에 따르면, 소득이 전혀 없다고 가정할 때 4인 가족이 84만1312원의 ‘생계급여’와 21만8314원의 ‘주거급여’ 등 105만원 정도를 받는다.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다면 그만큼 제하고 남는 돈을 받는다. 복지시설 등에서 생활한다면 주거급여도 삭감된다.

 

68살 장애 노모 봉양, 잔인한 수렁

2009년 2월 현재 약 86만3390가구, 146만830명(전체 인구의 2.9%)이 기초생활보장제 혜택을 받고 있다. ‘400만 명의 사각지대 빈곤층’에 비해 운이 좋은 경우다. 그러나 한국 사회 평균치와 비교하면 그렇게 평가할 수 없다. 2008년 한국 4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98만원이다. 4인 가구 최저생계비 105만원은 극빈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는 “현재 기초생활급여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생존을 유지하게 지원하는 것일 뿐”이라며 “생존 유지만으로는 빈곤에서 탈출하는 활동을 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참여가 가능한 수준과 내용으로 소득보장을 구축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사회적 부담을 더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영구임대아파트에서 68살 노모를 모시고 사는 김형성(38·가명)씨에 이르러 이 상황은 더 나빠진다. 노모는 지적·정신 장애 2급을 받았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나라가 인정한 장애인이지만, 노모가 간병인 서비스를 받으려면 하루 3만원을 내야 한다. 주말을 빼더라도 한달이면 60만원이다. 월 150만원을 버는 김씨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노모를 보살피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회사를 그만두면 노모를 보살필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씨의 형이 돈을 번다는 이유로 김씨는 기초생활보장조차 받지 못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김씨는 잔인한 수렁에 빠져 있었다.

»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보호 분야 국가 재정지출 비교/ 가계 운영비 중 사회임금 비중

2006년 현재, 한국인 전체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 계층 비율)은 16.5%이다. 중위소득이란 소득수준이 전체의 한가운데 있는 가구 소득을 말한다.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의 2인 이상 가구 중위소득은 월 304만원 정도다. 따라서 16.5%의 빈곤율 수치는 전체 가구의 16.5%가 150만원 미만을 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 그런데 장애인 가구의 빈곤율은 더하다. 34.6%에 이른다. 전체 빈곤율의 2배가 넘는다.

현행 장애연금은 국민연금 가입자에 한해 지급된다. 가입 중에 발생한 질병 또는 부상으로 장애인이 된 경우에 한해 지급된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즉 비정규직이었거나 아예 직업이 없었다면 장애연금을 못 받는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면 월 2만~7만원 정도를 ‘장애수당’ 으로 받는 길이 있긴 하다. 앞에서 언급한 복잡한 심사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생활비가 더 필요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7년 조사를 보면, 지적·정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려면 교통비·의료비·간병비 등으로 월 105만9607원이 더 든다. 이 때문에 장애인 식구가 있는 빈곤층은 더 깊은 가난을 겪는다. 누군가 돈을 벌어도 장애인 몫의 비용을 제하면 나머지 식구의 생활은 더 열악해진다. 나라로부터 장애수당을 받으려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가족 가운데 누구도 많은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장애수당을 받는다 해도 기초생계급여에 월 최고 7만원의 돈을 추가로 얹어줄 뿐이다. 한국의 복지제도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의 편이 아니다.

꼬박꼬박 연금이 나온다면 이런 문제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한국에도 국민연금제도가 있긴 하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함께 한국 정부가 마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안전망이다. 2009년 현재 경제활동인구의 93%가 국민연금 또는 공무원·군인연금 등에 가입해 있다. 얼핏 보면 모든 국민이 노후보장을 받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선 이 제도는 1999년에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입해야 은퇴 이후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현재 60대 이상 노인 세대의 대부분은 국민연금 혜택자가 아니다.

한창 경제활동 중인 현재의 청장년층이라 해도 비정규직의 55%는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다. 98.8%의 가입률을 보이는 정규직과 뚜렷이 비교된다. 비정규직은 ‘저임금-해고-저임금’으로 이어지는 불안정 노동을 거듭한다.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입해야 하는 국민연금제의 특성상 앞으로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막내 사위 취직에 불안한 폐암 할머니

국민연금 문제는 여성 빈곤과 직결된다. 구직 활동을 포기한 ‘비경제활동인구’는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여성이다. 몇 달 전 남편을 여읜 김영희(55·가명)씨에게도 국민연금은 그림의 떡이다. 그는 30대 딸이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했다. 남편이 장애인이어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지만, 남편이 숨졌으니 조만간 아파트를 떠나야 할 상황이다. 장애인 남편은 제대로 일한 적이 없으므로 연금 수령 자격이 없다. 아내 김씨는 가끔 식당일을 하여 돈을 벌었으므로 역시 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다. 만일 여성 비정규직인 김씨에게도 국민연금의 혜택이 돌아온다면, 김씨네 식구의 근심도 조금 줄어들 것이다.

다만 국민연금 가입자라 해서 빈곤의 덫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보험료를 못 내는 사람이 많다. 이태수 교수는 “전체 가입자의 27%에 이르는 468만 명이 실직 등으로 인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6개월 이상 미납자는 250만 명, 25개월 이상 미납자는 100만 명이다. 다시 취업해 남은 보험료를 채우지 못한다면, 이들 역시 국민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다. 남성 정규직 중심으로 설계된 국민연금 제도가 보편적 사회보험 역할을 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국민연금제 모두 가난 탈출에 별 효력이 없다면, 남는 것은 국민건강보험제도다. 한국 복지제도 가운데 그나마 조기 정착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건 중산층에게만 진실이다. 빈곤층이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

폐암에 걸린 박금자(70·가명)씨는 한 달치 30개 알약을 먹는 데 180만원을 써야 했다. 딸들이 빚더미에 올랐다. 뒤늦게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부여되는 의료 혜택을 받아 약값을 낮췄지만, 막내 사위가 취직하면서 다시 위기가 닥쳤다. 기초생활수급권을 박탈하겠다고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되면 다시 100만원이 넘는 약값을 내야 한다. 그 이름은 ‘국민’건강보험제도지만, 적어도 박씨는 그 제도가 보호하는 국민이 아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치료비의 상당 부분을 환자에게 떠넘긴다. 2007년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64.3% 수준이다. 나머지는 당사자가 부담한다. 유럽 선진국의 보장성 수준이 85~90%인 것과 비교된다. 본인 부담금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세 번째로 높다. 가난하면 중대 질환에 걸려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김철웅 충남대 교수가 2005년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상위 20% 소득계층보다 식도암은 3.3배, 간암은 2.3배 더 많이 발생했다. 발병 이후 사망에 이르는 비율인 ‘치명률’에서는 하위 20% 소득계층이 상위 20% 소득계층보다 위암은 2.3배, 유방암은 2.1배 더 높게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월소득 100만원 이하 가구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46.5%. 300만원 이상 가구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19.1%였다. 가난할수록 더 많이 병에 걸리고 더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다. 박형근 제주대 교수는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5% 수준까지 높인다면 암·중풍·심장병 등 중증 질환까지 무상의료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질병·사망의 불평등’을 막지 못한다.

아무리 아파도 비바람을 막을 집이 있다면 최악은 면할 것이다.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명령을 받은 김종택(62·가명)씨는 최악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김씨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4천여 세대의 20%가 임대료·관리비를 체납하고 있다. 만나는 주민마다 “제발 관리비를 낮춰 달라”고 호소했다. 공공재정 부족 등이 주된 이유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오려고 대기중인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배경을 이룬다. 김씨가 나가도 금새 들어올 사람이 수두룩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만한 집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발표된 서울시 뉴타운 개발계획을 보면, 2010년 말까지 주택 13만6346호가 사라지고, 6만7134호가 새로 지어진다. 단순 증감만 따져도 7만여 주택이 그냥 사라진다. 새로 지은 주택은 넓고 비싸다. 전용면적 60㎡ 이하인 주택 비율은 뉴타운 사업 전 63%에서 30%로 줄어든다. 사업 이전 83%를 차지한 전세 4천만원 미만 주택은 사업 이후 한 채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전체의 13%인 206만여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은 1%, 영국은 2.4%, 일본은 4.4%만이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다. 가난한 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공공임대주택이다. 2009년 현재 한국의 공공임대주택은 전체 주택 재고 가운데 3~4% 수준이다. 영구임대주택은 2%에 불과하다. 선진국에선 공공주택 비율이 20~30%에 이른다.

» 서울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사회복지관 전경.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공공서비스 인력을 확충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과중채무자는 300만 명, 원인은 생활비

국가가 돌보지 않으므로 빚을 질 수밖에 없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간호하느라 1억원의 빚을 진 정영숙(53·가명)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정씨는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다시 빚을 냈다. 갚을 길은 없다. 2005년 현재, 과중채무자는 300만 명에 이른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과중채무 원인으로 생활비를 꼽은 경우가 29.3%였다. 가난한 사람은 정상적인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으므로, 필요한 돈을 카드로 돌려막거나 사채로 메운다. 이들이 스스로 구제할 유일한 방법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이런 제도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지만, 알게 된다 해도 다른 문제가 있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를 보면, 파산신청자의 70%가 변호사 등 법률서비스 기관에 신청 대행료를 냈다. 평균 비용은 150만원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갚을 길 없는 빚을 져도 파산신청할 비용이 없어 구제받지 못한다.

기초생활보장제, 국민연금제, 국민건강보험제 등을 축으로 삼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가난의 현장에서 무력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우산이다. 남기철 교수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빈곤을 예방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소득보장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수 교수도 “직업·소득·성·혼인 여부 등에 상관없이 일정 연령이 되면 일정 금액을 정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서구 대부분의 나라가 이 제도를 택하고 있다. 기초연금제는 현행 기초생활보장제의 사각지대 대부분을 메워줄 것이다. 여기에 경제활동인구 은퇴 이후를 보장하는 현행 국민연금제를 덧붙인다면 빈곤층의 근로 의욕까지 높일 수 있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모든 사람이 기초생활을 보장받고, 일을 한 사람은 추가 급여를 받는 방식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은 ‘사회보호’ 분야의 재정지출이 9.7%에 불과하다. 독일(46.6%), 스웨덴(42.5%), 프랑스(39.3%) 등과 비교된다. 심지어 미국(19.5%)조차 한국보다 낫다.

 

“기초연금 등 소득보장제 도입 시급”

나라의 예산 구조를 단박에 바꾸는 일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장차 그런 일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코 앞에 닥친 하루를 살아내느라 고단하다. 당장 돈을 줄 수 없다면 마음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돈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은 지금 당장 꺼내어 표현하면 된다. 성인의 경우엔 복지관, 청소년의 경우엔 학교가 그런 마당이 될 수 있다. 복지관에는 사회복지사가 있고, 학교에는 교사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일상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한사코 방에서만 지내며 게임으로 날을 지새는 이영호(23·가명)씨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복지사가 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121가구를 대상으로 한 이번 방문조사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이 여기에 있다. 응답자의 37.2%가 ‘어떤 복지시설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33.9%가 ‘복지시설에 관심없다·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들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구역별로 사회복지관이 있다. 그러나 주민 가운데 누구도 사회복지관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복지사와 마주 앉아 상담해본 기억이 있는 주민도 거의 없었다. 복지관은 구청의 예산을 받아 주민을 상대로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복지사들은 담당별로 주민을 상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걸까?

바로 옆 단지의 복지관에서 일하는 김영주(가명) 사회복지사는 혼자서 1700여 가구의 모든 중·고등학생을 담당한다.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을 모으고 방문상담도 한다. 그는 자기 일에 열성인 복지사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가족 구성원과 상의해야 하고, 피상담자의 학업·숙식·취미·진로 등을 모두 보살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김 복지사는 말했다. 사회복지사의 낮은 임금도 문제다. 대부분 월 15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직이 잦다. 담당할 가구가 많으므로 보통 2년은 지나야 주민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데, 자꾸 복지사가 바뀐다. 실태 파악에 시간이 걸리고, 주민들은 자신의 형편을 몰라주는 복지관을 찾지 않게 된다. 더 많은 복지사를 채용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복지관 예산이 늘어나야 한다. 복지관은 구청에서 예산을 받아 집행한다. 구청 예산은 세금에서 나온다. 마음을 주는 일이 다시 돈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청소년은 이런 상담이 더욱 절실하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동네 아이들을 괴롭히다 끝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형진(16·가명)이의 진짜 문제는 ‘마음의 병’에 있다. 부모에게 학대받고 버림받은 상처가 사춘기를 사납게 할퀸 것이다. 내버려두면 학교와 사회를 등진다. 전국적으로 1년에 6만~7만 명의 초·중·고생들이 자퇴하거나 퇴학당한다. 그 대부분이 빈곤층 자녀다.

그러나 초·중등학교에 배속된 상담교사의 대부분이 계약직이어서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사귀는 게 쉽지 않다. 다른 교사들은 입시 교육에 전념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선 더욱 그렇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은 옛말이다. 인근 중학교에 근무하는 한승원(가명) 교사는 “요즘엔 중학교 성적이 중위권은 돼야 실업계고에 진학할 수 있고, 하위권은 대학 진학 능력이 없어도 인문계고에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내놓는 청년실업 대책도 대부분 대졸자에 초점을 둔 ‘인턴 제도’이므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다. 학교 밖에서 진로를 준비하는 ‘청소년 직업 자활센터’ 등이 유일한 대안인데, 이 또한 예산 문제와 부딪힌다.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가난한 이들의 말벗이 되는 일은 공공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 확충과 연결된다. 전병유 한신대 교수는 “공공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만들고 여기에 저임금·고용불안에 노출된 근로빈곤층을 수용하는 노동시장 구조의 개선”을 주문한다. 고용과 복지를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다. 2003년 현재 OECD 국가의 사회서비스 부문 고용 비중을 보면 한국은 12.6%로 최하위 수준이다. OECD 평균은 21.7%다. 노르웨이(34.2%), 덴마크(31.3%), 핀란드(27.3%) 등과는 더 차이가 난다. 이들 나라는 공공재정을 투입해 사회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만들고 이들이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선순환 구조를 갖고 있다.

빈곤 대물림 끊을 ‘사람’을 투입하라

돈을 주는 게 싫으면 사람을 주면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런 배려와 지혜가 없는 나라에 태어난 죄로 한국의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그들을 만나면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삶에 과연 인간의 존엄이 남아 있나. 그것을 외면하고도 우리 삶은 과연 존엄한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참고 문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동산 개발>(안드레 아우버한트 외·한울),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이상이·밈), <한국의 가난>(김수현 외·한울), <한국 사회의 신빈곤>(한국도시연구소·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