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봉길리 앞바다의 대왕암은 죽어서 용이 되고자 했던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다른 일출명소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장미 넘치는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다. 대왕암 뒤의 구름띠 위로 해가 떠오르기 직전의 모습. 겨울 일출 무렵의 대왕암의 바다에는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갈매기떼가 몰려든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간절한 희망의 여정… 경주 ‘소원 명소’
통일신라 꿈 스민 불국사
나한전 주변에는 수많은 돌탑
추녀 위까지 정성껏 쌓아올려
극락전 황금돼지상 ‘반들반들’
‘쓰다듬은 뒤 로또 1등’ 일화도
선덕여왕이 만든 분황사
‘향기로운 임금의 절’ 이란 뜻
눈 먼 아이 안고 와 빌었더니
시력찾게 됐다는 전설깃들어
장엄한 일출 만나는 대왕암
삼국통일 이룬 문무왕 수중릉
영험한 기운에 한달 내내 붐벼
고즈넉함 원할땐 ‘송대말 등대’
물안개·갈매기 풍경 그림같아
웅장한 마애불 품은 남산
금오봉 아래에 솟은 상사바위
높이 13m·길이는 25m 달해
틈에 돌던져 얹히면 ‘소원성취’
경주 = 글 · 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새로 한 해를 맞았습니다. 새해 첫날의 정갈한 시간 앞에서 결의와 소망 하나쯤 내어보셨습니까. 차가운 대기 속에서 흰 입김을 뿜으며 새 출발의 기지개를 켜기 위한 신년 여행을 제안합니다. 신년은 이미 시작됐지만, 그래도 1월 한 달은 새로운 해를 맞는 시간입니다. 새해 첫 여정의 목적지는 경주입니다. 새해의 기원을 받아줄 수 있는 소원 명소를 골라봤습니다만, 사실 새해에 소원을 빈다는 건 스스로의 의지를 묻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겁니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얘기를 다 믿는 건 아니지만, 그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거기까지 갈 손톱만 한 이유라도 돼 준다면 좋겠습니다.
# 나한전 마당에 돌탑으로 공덕 쌓는 일
불국사부터 간다. 여행지로 불국사는 새삼스럽다. 가본 사람이 가보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은 절. 불국사는 ‘전 국민의 수학여행지’다. 통계는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 과반수가 가본 절이 여기 불국사 말고 또 있을까. 불국사는 이름 그대로 ‘불국(佛國)’, 그러니까 불교 세상을 속세에 건설하고자 했던 통일신라의 꿈이 스며 있다. 불국의 정토를 꿈꾸던 신라의 경주에는 얼마나 많은 이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을 것인가.
불국사 나한전 마당의 소탑지. 법당을 끼고 소망을 담은 작은 탑들이 가득 차 있다.
불국사에서 ‘가장 많은 소원이 모이는 곳’은 아마 나한전이 아닐까. 나한전은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로 수행을 통해 모든 번뇌를 끊어낸 덕이 높은 승려를 말한다. 나한전 주변은 작은 돌로 쌓은 탑이 전각을 감싸듯 펼쳐져 있다. 방문객들이 나한전 주위에 돌탑을 하나둘 쌓기 시작하자 사찰은 거기에 ‘소탑지’를 조성하고는 방문객들이 돌탑을 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다.
삼국시대 서라벌에는 탑이 마치 기러기떼 날아가듯 즐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때의 석탑은 불법을 상징하는 크고 거대한 것이었으리라. 그에 비하면 나한전의 돌탑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나한전 돌탑은 이런 식의 돌탑 중에서도 유난히 작다. 큰 탑이라고 해봐야 높이가 무릎쯤이고, 그만한 크기도 두어 개가 전부다. 나머지는 대부분 한 뼘 남짓 높이의 탑이다. 작은 건 키가 반 뼘이 채 안 돼 보였다.
돌탑 쌓기는 소망을 기원하는 풍습의 하나다. 탑을 쌓는 이유에 대한 단서가 ‘법화경’에 있다.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모래탑을 쌓더라도 한량없는 복락을 받아 부처가 된다.” 돌이 아닌 모래로도, 그리고 탑을 쌓는 공덕만으로도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얘기다. 작은 돌로 쌓았더라도 소원의 절실함이나 정성의 크기는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한전 마당은 물론이고 돌담과 추녀 위까지 정성껏 쌓아 올린 돌탑에는 저마다의 무겁고 간절한 소원이 깃들어 있으리라.
신년 벽두에 나한전을 찾은 이들은 십중팔구 돌을 주워 숨을 참고 탑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아예 작정하고 탑 하나를 새로 쌓는 이들도 있었다. 인상적이었던 건 돌탑을 쌓는 모습이 극도로 조심스러워 보였다는 점이다. 촘촘한 돌탑 사이에서 행여 다른 탑을 허물어뜨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늘 앞지르려 애쓰고 때로는 옆 사람을 떠밀기도 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소원을 쌓으면서 남의 소원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탑은 지어지고 다시 허물어지기를 반복한다. 탑을 쌓으면서 다시 깨닫는다. 진리를 구하고 깨달음을 얻으며 그걸 실천하는 과정에서 위안과 구원을 얻는 것. 그게 종교가 가르쳐주는 성취의 방식이라는 것. 불법의 가르침대로 중요한 건 탑이 아니라 ‘탑을 짓는 공덕’이다.
위 사진은 불국사 지장전 현판 뒤의 돼지상, 아래는 돼지상을 황동으로 재현한 것이다.
# 극락전과 두 마리 돼지의 가르침
불국사에는 빠뜨리지 말아야 할 소원명소가 또 한 곳이 있다. 대웅전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극락전이다.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축소해놓은 법당. 극락의 주불인 아미타불을 모신다. 아미타불은 고통받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부처님이다. 극락전 앞에 제법 잘생긴 석등이 있고, 석등 아래 석주 위에는 난데없이 금빛으로 반들반들 빛나는 황동 돼지상이 있다. 이름하여 ‘극락전 복돼지상’이다. 어금니가 길게 난 걸 보면 복돼지는 멧돼지다.
천년 고찰의 극락전 법당 앞에 웬 돼지일까. 사연이 있다. 지난 2007년 때마침 정해년 돼지해에 불국사 극락전 현판 뒤 처마 밑에 길이 50㎝ 정도의 목조 돼지상이 발견됐다고 해서 한참 떠들썩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고 다시 지은 극락전 현판 뒤에 ‘250년 넘게 숨어 있었다’고 해서 특히 화제를 모았다. 미심쩍은 건 돼지상에 곱게 단청이 돼 있었다는 것. 돼지상이 현판 뒤에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은 알았다는 얘기다. ‘발견’이라기 보다는 ‘주목받았다’는 쪽이 더 정확하겠다.
아무튼 돼지해에 현판 뒤에 숨어 있던 돼지에 세간의 관심이 쏟아지자, 불국사에서는 돼지상에 ‘극락전 복돼지’라는 공식 이름을 지어주고 100일 기념 법회까지 성대하게 열었다. 극락전 앞 복돼지상은 현판 뒤 숨겨진 돼지를, 누구나 보고 만질 수 있도록 하자고 해서 그때 만들어진 것이다.
극락전 복돼지상은 지난 2017년 로또 1등 당첨자가 “복돼지상을 쓰다듬고 복권당첨 소원을 빈 뒤에 법당 안에서 108배를 올리고 나서 복권에 당첨됐다”고 밝히면서 화제가 됐다.
왜 극락전이고, 왜 하필 돼지일까. 극락전의 주불인 아미타불이 맹세한 소원 가운데 ‘모든 것에 만족하길 원한다’는 것이 있다. 극락전 복돼지 안내문에는 “돼지는 부귀를 상징하는 길한 동물인데, 지혜로움으로 부귀를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욕심의 끝을 알아 지혜로 스스로 절제하라는 경계의 뜻이 담겨 있다는 얘기다. 부와 귀가 함께하는 곳에 착한 지혜의 근본이 있다면 그곳이 극락정토라는 뜻일 터. 새해 소원을 빌며 모든 것에 만족하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겨 볼 일이다.
# 천수관음보살이 소원을 들어주다
분황사(芬皇寺)는 선덕여왕이 만든 절이다. 이름부터가 ‘향기로운(芬) 임금(皇)의 절(寺)’이란 뜻이다. 절은 아담하다. 지금이야 탑 하나, 법당 하나, 우물 하나가 거의 전부인 자그마한 절이지만, 신라 때 분황사는 담을 맞대고 있던 황룡사와 함께 신라불교의 중심 역할을 했던 거대한 절이었다.
분황사를 상징하는 건 절집 중앙의 모전 석탑이다. 본래 7층이나 9층 탑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훼손돼 3층만 남았다. 모전(模塼)이란 ‘벽돌을 모방했다’는 뜻이다.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탑이 유행했는데, 벽돌을 찍어내는 건 엄청난 자원과 기술이 필요한 일이었다. 벽돌을 구울 때 땔 나무를 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돌을 깨서 벽돌을 모방한 건 그래서다. 이렇게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깨서 쌓은 탑을 모전 석탑이라 부른다. 형태로도 눈길이 가지만, 분황사 모전 석탑은 신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든 탑이기도 하다.
분황사에는 삼국사기가 기록해 놓은 짧은 전설이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 때 이야기다. 경주 한기리(漢岐里)라는 마을에 희명(希明)이란 여자가 살았다. 희명의 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에 갑자기 시력을 잃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 희명이란 이름은 ‘밝음을 바란다’는 뜻이었는데, 정반대로 자식이 눈이 멀었으니…. 희명은 애끊는 모정으로 백방으로 방법을 찾다가 분황사를 찾는다. 분황사에는 솔거가 그렸다는 천수관음보살 벽화가 있었다. 천수관음은 천 개의 손에 천 개의 눈이 달려 있다는 보살. 아이를 안은 희명은 분황사 왼쪽 전각의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관음보살 앞으로 나아가 아들에게 향가를 부르도록 하고 기도를 했다. 다섯 살 아들이 불렀다는 향가의 가사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무릎을 곧추세우며/두 손바닥 모아/천수관음께 비옵니다/천수 천안/눈 하나를 내어/하나를 덜기를/둘 다 없는 이 몸이오니 하나만이라도 주시옵소서/아아 나에게 주시오면/그 자비가 얼마나 클까요.”
천 개의 눈을 가졌다는 관음상 앞에서 ‘두 눈이 없는 내게 자비로 눈을 달라’는 기원의 노래였다. 어미와 자식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를, 관세음보살은 들어줬다. 아이는 눈을 떴고, 분황사는 신라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찰이 됐다.
분황사에는 탑을 돌며 소망을 비는 ‘탑돌이’를 하는 이들이 끊이질 않는다. 절집이 지어진 지 1400여 년. 그 오랜 시간 동안 기도가 있었을 것이니, 탑에는 얼마나 많은 소망과 간절한 기도가 바쳐졌을까. 분황사에 가거든 신년의 기원을 합장으로 모아 탑을 도는 것도 좋겠고, 소원성취를 기원하며 분황사 대종을 쳐보는 것도 좋겠다.
분황사 한쪽에 ‘분황사 대종’이 있다. 유물은 아니다. 종도, 종각도 1990년에 지은 것이다. 종 한쪽에는 희명의 다섯 살 아들이 천수관음보살 앞에서 불렀다는 향가가 돋을새김돼 있다. 다른 한쪽에는 ‘이 종소리 법계에 울려 자비와 법열(法悅)로 충만케 하시라’로 시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절집의 종은 함부로 치지 못하지만, 분황사 대종은 누구나 칠 수 있다. 종 한 번에 1000원. 종각 앞에 놓인 ‘자비함’에 ‘1000원 이상’을 보시해야 한다. 수입 전액은 불우이웃돕기에 사용된단다. 한 해의 소원을 종소리로 담아내는 데 1000원이면 싸지 않은가.
하나의 거대한 암봉을 이룬 경주 남산의 상사바위 뒤쪽 모습. 왼쪽 끝 바위 절벽에 새겨진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보인다.
# 남산의 바위틈에 소원의 돌을 던지다
경주 남산에도 소원 명소가 있다. 삼릉계곡을 따라 남산을 오르다 금오봉 능선 바로 아래 만나게 되는 상사바위다. 남산의 상사바위는 두 개다. 하나는 남산 서쪽 삼릉계곡으로 올라가서 만나는 상사바위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편 남산 동쪽의 통일전에 올라가서 마주치는 상사바위다. 이름도 같지만, 위치도 비슷해서 헷갈리기 쉽다.
소원을 들어주는 상사바위에 가려면 삼릉 숲에서 출발해야 한다. 삼릉계곡 길의 백미는 깎아지른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인 ‘마애석가여래좌상’이다. 경주 시내 남서쪽 일대 전경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바둑 바위를 지나 마애불상이 보이는 자리까지 간다면 상사바위에 다 온 것이다. 거기서 바위를 끼고 왼쪽으로 돌아가면 상사바위다.
병풍처럼 우뚝 솟은 경주 남산의 상사바위. 가로로 파인 홈에 돌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전설이 있다.
상사바위는 높이가 13m, 길이가 25m 정도 되는 거대한 바위다. 암봉처럼 능선 위에 힘차게 솟아 있어 자못 위세가 당당하다. 병풍처럼 펼쳐진 상사 바위에는 가로로 긴 틈이 있는데, 거기에 돌을 던져서 얹히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바위 신이 소원을 받아주지 않으면 돌이 얹히지 않고 굴러떨어진단다.
상사바위 주변을 ‘포석곡 제9사지’라 부른다. 여기 포석곡에만 최소 9개의 절이 있었다는 얘기다. 용장곡에만 18개 절의 자취가 있고, 포석곡에도 또 9개가 있었다. 여기다 냉골, 탑골, 절골, 웃밭골, 철와골, 국사골, 비파골까지 30개가 넘는 남산 골짜기의 절집까지 다 합친다면 도대체 남산에 절이 몇 개나 됐을까. 100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건너 남산 전체가 거대한 기원과 꿈으로 빛났던 시간을 생각한다.
경주 남쪽 외동읍 모화리에는 원원사(遠願寺) 절터가 있다. 절터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멀고 외진 곳에 있다. 원원사는 통일신라 시대 전성기던 8세기 중반에 세워진 절이었는데, 지금은 근래 불사를 해서 다시 지은 절집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봐야 할 건 절보다는 동·서 삼층석탑이다. 석탑 기단에는 십이지신상이, 탑의 몸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신년 초라 그럴까. 십이지신상이 눈길을 끈다. 원원사 석탑은 십이지신을 조형으로 새긴 첫 번째 사례다. 십이지신은 삼국시대에는 ‘방위를 지키는 신(神)’이었지만, 그걸 시간으로 읽는다. 올해는 토끼의 해. 12지신 중 토끼는 정동(正東)의 방위를 맡는다. 기단의 동쪽 중앙에 돋을새김한 의인화된 십이지신 중 토끼의 모습이 선명하다.
경주 원원사지의 삼층석탑. 기단에 의인화한 12간지의 동물을 새겼다. 아래 오른쪽이 토끼다.
# 장엄하게 뜨는 해를 만날 수 있는 곳
워낙 알려진 곳이라서 이야기를 뒤로 미뤘지만, 신년에 어울리는 경주의 으뜸가는 명소는 단연 봉길리의 대왕암이다. 대왕암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신라 제30대 왕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봉길해변은 새해 첫날만큼은 아니지만, 1월 한 달 내내 일출을 보려는 이들로 붐빈다. 문무대왕릉이 일출 명소로 꼽히는 건 경관도 경관이지만, 그보다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운’ 때문이다. 죽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비장한 각오와 유언 때문일까. 문무대왕릉 주변 바다에는 신비롭고 영험한 기운이 맴도는 듯하다. 이곳의 일출이 유독 장엄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장엄하고 비장한 일출과 마주 선다면 한 해 소원을 비는 속칭 ‘기도발’도 잘 듣지 않을까.
겨울 대왕암 일출을 몽환적으로 만드는 건 안개와 갈매기다. 추운 겨울날 일출 무렵이면 해안가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데, 어디선가 때맞춰 갈매기떼들도 몰려든다. 물안개 속에서 일출의 붉은 기운이 바다 위로 번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일출을 만나러 그곳까지 간 보람이 충분하다.
흠이라면 워낙 일출 명소로 알려진 곳이어서 붐빈다는 것. 좀 더 고즈넉하게 일출 풍경을 보겠다면 문무대왕릉과 감포 못미처 오류리 부근의 송대말 등대의 일출을 권한다. 한때 노송들이 즐비했다고 해서 ‘송대말’로 불렸던 등대 일대는 일제강점기 최고급 휴양지였다.
당시의 영화는 옛 등대의 시멘트 기초 흔적으로만 남아 있고 신라 석탑 모양으로 복원된 등대만 바다를 밝히고 있다. 등대 앞의 전망대에서는 갯바위로 밀려드는 파도와 파도 끝에서 자욱하게 번지는 물안개, 푸르고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는 갈매기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일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 신라인의 발원을 보다
간절한 바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불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소원을 ‘발원(發願)’이라고 한다. 모든 불사는 발원을 담는 법. 경주의 모든 사찰과 탑이 발원으로 서 있는 것이다. 그 발원의 간절함을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경주박물관에는 1915년 분황사 모전 석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됐던 사리갖춤과 공양물이 전시돼 있다. 사리는 비단에 싼 은 상자에서 수정, 향유병, 장신구 등과 함께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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