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조용헌의 영지순례] 뱃길 밝혀 준 ‘神의 산’ 월출산의 바위 기운이 뭉친 곳

醉月 2023. 1. 2. 18:07

전라도는 무엇인가? 전라도의 기질은 무엇인가? 이는 나의 오래된 화두였다. 선가(禪家)의 화두라는 게 쉽게 풀리는 것이 아니듯이, 이 화두도 쉽게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점수돈오(漸修頓悟)의 길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공부해 나가다가 자료와 지식이 쌓이면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폭발하리라고 짐작해 본다.

전라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자료가 음식 맛이 아닌가 싶다. 돌비석에 새긴 글씨는 세월이 지나면 인멸되고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인간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음식 맛은 인멸되지 않는다. 아직도 이어지는 게 전라도의 맛이다. 돌아다녀 보니 전라도의 개성 있는 음식은 목포, 영암, 영산강 하구, 신안군 일대의 섬에 계승되고 있었다. 서해안에서 남해안으로 꺾어지는 해안가에 전라도의 개성을 드러내는 맛이 유지되고 있다.

우선 신안군 임자도 일대의 민어탕.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생선탕은 민어탕이라고 고집하는 사람이다. 임자도 전장포의 새우젓(육젓), 법성포의 노릇노릇한 굴비, 덕자 병어를 깻잎에 싸서 마늘과 초장에 찍어 먹는 맛. 영남 일대의 연포탕, 간재미를 쫑쫑 썰어서 식초를 치고 고추를 썰어 넣은 회무침도 기가 막히다. 간재미 회무침을 먹으면 우울증이 줄어든다. 완도 일대에서 나는 전복을 푹 쪄서 먹는 맛도 일품이다.

전라도의 맛은 생선 요리에 있다. 신안군 여러 섬에서 영암 일대까지는 각종 생선의 보고이다. 육지에서 나는 대파, 양파, 깨를 비롯한 각종 양념류를 섞어서 생선찌개를 먹는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해양음식이다. 전라도 맛의 가장 근원에는 시푸드(sea food)가 있다. 전라도 문화의 특징은 해양문화라는 이야기이다. 음식이 해양민족이 먹던 음식이니 말이다. 해양문화는 바닷길을 통한 물류의 움직임이 포인트이다. 해양 물류의 루트가 어떻게 되었는가? 그 핵심에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이 있다는 이야기로 비약한다.

 

해양물류의 거점

고대부터 영산강 하구는 해양물류의 거점이었다. 영산강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 가닥에는 나주가 있고, 다른 가닥에는 월출산이 있다. 내륙의 곡식과 바다의 생선이 이 영산강을 따라 움직였다. 나주와 월출산 일대는 드넓은 곡창지대이다. 이 곡창지대가 영산강이라는 물길을 따라 서남해안으로 이어졌다. 우선 고려 때는 수도인 개성으로 뱃길을 따라가면 3~5일 내로 도착할 수 있었다. 또한 영산강 하구에서 흑산도로 이어진다. 흑산도에서 가거도, 가거도에서 중국 강남의 영파(寧波)로 뱃길이 이어진다. 일본으로도 이어진다. 1970년대에 발굴된 신안군 해저 유물선도 중국에서 화물을 싣고 일본으로 가던 도중에 신안군 섬에 중간 보급을 위해 머물렀던 배였다. 일본으로 가는 루트이기도 하였다.

물류라는 게 무엇인가? 돈이 되는 루트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돈이 되는 길에 사람과 물자가 모이기 마련이다. 돈이 되는 물류는 비행기가 발명되기 전까지는 바닷길을 통한 선박이었다. 그리스에서 비롯된 유럽 문명이 해상무역을 통한 뱃놈의 문화가 기본이었다. 선자천하지대본(船者天下之大本)이었다. 뱃놈이 천하의 대본이었던 것이다. 왜? 돈이 되니까! 돈이 문명을 발전시킨다. 인류문명사는 자본주의사(資本主義史)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아니었던 시대는 없었다. 조선시대는 주자학이 지배했던 나라였고, 주자학은 정책적으로 농자(農者)를 우대하고 뱃놈을 천시하는 이데올로기였다. 농자는 정권 차원에서 통제가 가능하지만 배를 타고 다니면서 바다에 떠다니는 선자(船者)는 통제가 불가능하였다. 주자학의 영향으로 해상무역이 쪼그라들었고, 나라가 가난해지고, 보릿고개에 배를 곯아야 하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결과는 일본의 식민지였다.

전라도는 농사짓는 벌판도 넓었지만 바닷길을 통한 해상무역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무역의 밑천이 되는 곡식 생산이 되어야만 해상무역도 가능한 것이다. 이 해상무역, 해양문화가 음식에 남아 있고, 무역은 사라졌지만 그 해상민족의 맛만큼은 오늘날까지 전라도의 허름한 시골 음식점에도 전해지고 있다. 영암의 어느 음식점에서 식초를 넣은 간재미 회무침을 먹으면서 전라도는 해상무역과 문화가 그 핵심 유전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해상무역의 중심 거점은 영산강 하구였다. 전라도 내륙 들판의 곡식물류와 만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상물류와 월출산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다. 이번 주제는 월출산이 아니던가! 월출산은 하나의 바닷길 이정표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옛날에는 GPS가 없었다. 무엇을 보고 뱃사람들이 목표 지점을 가늠할 수 있었을까? 바닷가에 높이 솟아 있는 산이었다. 월출산은 평지에, 그것도 바닷가에 우뚝 솟아 있는 바위산이다. 100여㎞ 바깥의 바다에서 보아도 뚜렷하게 보이는 산이다. 이러한 뱃길의 이정표가 되기에 너무나도 조건이 잘   맞았던 셈이다. 한라산도 이러한 뱃길의 이정표였고, 중국 동해안에 있는 천태산도 뱃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는 산이었다. 천태산 밑에 중국에서 첫손가락에 꼽는 거대한 규모의 불교 사찰인 국청사(國淸寺)가 있었다. 국청사는 해상무역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월출산이 그러한 산이었고, 월출산의 수많은 사찰들이 그러한 용도였다고 짐작한다.


과거 바닷사람들의 GPS

뱃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안전이었다. 해난사고였다. 풍랑을 만나면 재산도 사라지고 목숨도 잃는다. 한순간에 고기밥이 되는 것이다. 중간에 죽어 버리면 아무 소용없다. 바다만 건너면 일확천금을 쥘 수 있지만 문제는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죽지 않고 바다를 건널 수 있단 말인가! 바닷길의 이정표였던 월출산은 이정표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해난사고로부터 안전을 보장해주는 신(神)의 산이었고,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산이었다. 관세음보살은 눈도 천 개이고 손도 천 개이다. 그래서 천수천안(千手千眼)이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뱃사람들의 신이었다. 해난사고를 당했을 때 물에 빠진 수많은 사람을 구해주려면 눈도 많아야 하고 손도 천 개쯤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산이 월출산이었다.

왜 월출산이 관세음인가. 그만큼 기도발이 잘 받는 산이다. 온통 바위산이다. 바위산 가운데서도 기가 가장 강한 화강암과 맥반석으로 되어 있는 산이다. 그중에서도 맥반석은 기가 가장 세다. 바위 강도와 뿜어져 나오는 기의 세기는 비례한다. 해발 800m급의 산이지만, 온통 바위산이라서 산 전체가 하나의 볼텍스(vortex)를 형성하고 있다. 기운이 회오리친다. 일본 사람들은 월출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수석(壽石)으로 보기도 한다. 평지에 우뚝 솟아 있어서 그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진다. 나는 시라소니 같은 산으로 여긴다. 외롭게 독고다이로 혼자 우뚝 서 있다. 지리산은 겹겹이 두꺼운 산이지만, 월출산은 외롭게 홀로 서 있다. 하지만 그 펀치는 엄청난 강도이다. 돌주먹이다. 이런 산에서 일주일만 기도를 드려도 효험이 있다. 그 효험은 꿈에 나타난다. 꿈은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연결하는 끄나풀이다. 끄나풀을 잡아야 정신세계로 들어간다. 그 끄나풀을 잡을 수 있는 산의 기운이 월출산에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산 이름에 왜 달이 들어갔을까

이 산은 고대부터, 그러니까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영험한 산으로, 뱃사람들의 산으로 숭배받던 산이 틀림없다. 이 산은 전라도 해양민족의 성산(聖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라도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산이다. 월출산의 기운을 제대로 구현한 인물이 바로 해상왕 장보고이기도 하다. 장보고도 월출산 근방에서 태어난 인물인 것 같다. 이 부분은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한다.

또 하나 드는 의문은 왜 달(月)이 산 이름에 들어가는가이다. 따지고 보면 모든 산 위에는 달이 뜬다. 월출산에만 달이 뜨는 게 아니다. 월출산 사자봉 아래에 있는 허름한 절인 천황사(天皇寺). 안내판을 보니 고려시대에는 보월산(寶月山) 사자사(獅子寺)였다고 나온다. 보월산? 보배 같은 달? 월출산을 고려시대에는 보월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이다. 그때도 역시 달이 산 이름에 들어갔던 것이다. 왜 월출산은 계속해서 달이 붙어다닌단 말인가? 이것도 뱃사람들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 필자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영산강 하구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월출산을 바라다보면 산 위로 달이 둥그렇게 떠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던 것이다. 가로등도 없던 시절에 성스러운 성산 위로 달이 뜨는 모습은 종교적 장면이었다고 추측된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같은 모습이었지 않았을까. 불화는 고려 불화가 최고이다. 세계 유명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불화는 대부분 고려 불화이다. 조선 불화는 아니다. 고려 불화라고 한다면 관세음보살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이 관세음보살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다. 수월관음도인 것이다. 물속에 비친 달을 상징한 것일 수도 있고, 자기 내면의 불성을 달이 상징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보면 바다와 강을 떠다니는 뱃사람들에게 달이 어필하였다. 물에 달이 비친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기도 하다. 하늘에 있는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친다.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화엄철학이다. 아울러 수월관음도가 월출산에서 연출된다. 월출산의 달은 수월관음도가 현실세계에 나타난 모습이었다. 월출산 또는 보월산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형상을 지상세계에 그대로 구현한 장면에서 유래하였다는 게 필자의 관점이다. 전라도 고대 해상민족의 종교적 귀의처였던 것이다. 그러려면 달이 산 위에 걸려 있어야 하고, 이 각도로 볼 수 있는 지점은 영산강 하구였다. 그 월출산의 강한 바위 기운이 뭉쳐 있는 절이 바로 천황사이다. 옛날 이름은 사자사. 법당 뒤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바위 절벽들을 보라! 그 기운은 아직도 쩡쩡하다. 하지만 절의 상태는 지저분하다. 구질구질하다. 산은 명산이고 절터는 영험한데, 사람이 여기에 못 미치는 게 현 상황이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