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조용헌의 영지 순례] 호리병 구멍을 통해 들어가면…방호산 법계사

醉月 2022. 12. 29. 18:07

“왜 지리산을 방호산(方壺山)이라고 하느냐? ‘壺(호)’는 호리병이라는 뜻이다. 방호산은 ‘사방이 호리병이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 지리산을 호리병에다가 빗대었을까. 물론 도가에서 은둔하는 별천지를 호리병에 비유하는 전통이 있다. 호리병은 세속과 격리된 또 다른 세계를 상징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리산의 산세를 호리병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

지리산 치밭목 산장에 30년간 상주하면서 지리산의 역사와 유적, 골짜기와 봉우리, 샘물 등을 환히 꿰고 있는 민병태(68) 선생은 필자의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었다.

“호리병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지리산은 외부에서 접근할 때 골짜기를 통해서 접근하도록 되어 있는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하동 쪽의 화개 골짜기, 남원 쪽의 뱀사골, 함양의 마천, 산청 쪽의 덕산도 그렇다. 지리산에 들어오려면 이들 골짜기를 타고 들어와야 한다. 골짜기는 양쪽이 바위 암반으로 되어 있다. 큰 길을 내기 어려운 구조이다. 그러니까 골짜기 옆의 자그마한 소로(小路)를 통해서 왕래를 했다. 소로라고 하면 소 한 마리 끌고 갈 수 있는 너비에 해당한다. 남명이 말년에 들어와 살았던 덕산만 해도 그렇다. 덕산에 들어가려면 골짜기를 통해서 들어와야 했다. 골짜기 입구에 ‘入德門(입덕문)’이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덕산으로 들어오는 입구라는 뜻이다. 이 입덕문 글자는 골짜기 옆의 바위 벽에 써 있던 글자였다. 골짜기 바위 옆의 소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위치였다. 이 입덕문에서 덕산마을까지는 대략 2㎞를 더 걸어 들어와야 한다. 2㎞의 골짜기도 직선이 아니다. 구불구불하므로 외부에서는 이 동네를 한눈에 볼 수 없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 힘든 구조이다. 덕산에서 지리산 내부로 들어가려면 역시 또 다른 골짜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물론 산 고개를 넘어 들어갈 수도 있지만 골짜기 옆의 길이 고도가 낮고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광복 이후로 자동차 도로를 내면서 이러한 골짜기 옆의 바위들을 화약으로 폭파해 길을 넓혔다. 그래서 옛날 길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유·불·선 와이파이가 발사되는 곳

지리산 사방에 물이 흘러내리는 이러한 골짜기들이 호리병의 구멍 역할을 한다. 호리병 구멍을 통해서 들어가야 하는 산. 그러니 그 호리병산은 인간세계의 접근도 쉽지 않고, 속세의 사람들에게 쉽게 자기 속을 보여주는 산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런 특성을 지닌 산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무엇이 적당할까. 호리병 ‘壺(호)’ 자를 써서 ‘方壺山(방호산)’이라고 하는 게 아주 적절한 명칭이 아닐 수 없다.

외부와 격리된 공간, 호리병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선 첫째로 신선, 승려, 도사들이었다. 전쟁이 났을 때는 난리를 피해서 들어온 피란민, 패배자들이 살았다. 평상시에는 실패한 반란 가담자, 쫓기는 범죄자들도 있었다. 이 가운데 호리병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간군은 신선, 승려, 도사들이었다. 도를 닦는 공간, 수행공간으로서 방호산은 최적의 산이었다. 도는 호리병 속에서 익어가는 발효식품과 비슷한 것이었다.

방호산에서 가장 높은 천왕봉은 특별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다. 해발 1915m의 천왕봉은 유·불·선의 공부인들에게 강력한 전파를 발사하는 송신탑이자 안테나였다. 유·불·선의 와이파이를 발사하는 피라미드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와이파이 전파를 가장 민감하게 수신할 수 있는 수신기는 천민 계급인 무당들이 가지고 있었다. 무속신앙을 더럽고 천하다고 배척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그 잡초 같은 생명력이 원체 강하기 때문이다. 기득권 종교들이 갖지 못하는 생명력이 있다. 그것은 예언과 치병이었다. 자기 앞일을 예언해주는 예언능력, 이건 거부하기 어렵다. 기존 종교가 이 예언력에서 무당, 무속신앙을 이기지 못한다.

병을 고치는 치병능력은 요즘 종합병원이 생겨서 많이 대체되었다. 그러나 예언의 영역은 종합병원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자기 앞일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도 있던가! 주식 시세를 미리 알아도 팔자가 바뀔 수 있다. 돈을 초월할 수 있는 힘도 예언에서 나오고 돈을 벌 수 있는 파워도 예언에서 나온다. 신의 섭리, 팔자가 있다고 한다면 돈에 죽을 둥 살 둥 매달리지 않는다. 초연하게 받아들인다. ‘道돈不二(도돈불이)’이다. 도와 돈이 둘이 아니다. 아무튼 팔자가 바뀌는 예언을 얻기 위해서 인간은 미신이고 나발이고 상관없는 것이다.

 영발 발전소의 기도터들

천왕봉은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영발 발전소로 보는 게 맞다. 그 근거는 천왕봉 밑에서부터 각종 굿당 기도터가 즐비하다는 점이다. 산청군 중산리에서부터 봐도 그렇다. 순두류(여기서부터가 진짜 두류산이다라는 의미)에서 천왕봉을 올라가다 보면 중간중간 큰 바위가 있다. 그 옆에 계곡물이 흐르면 대개는 무당들이 기도를 하던 기도터라고 보면 된다.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곳에 기도발이 받는다. 바위와 물이야말로 몇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인간이 믿고 의지한 애니미즘, 범신론(汎神論)의 원형이다. 그 원형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천왕봉 올라가는 곳곳에 무당 기도터가 산재해 있다. 수십 군데, 수백 군데가 될 것이다. 기도발은 천왕봉 꼭대기에서만 받는 게 아니다. 밑에서도 받는다. 아래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수백 군데의 기도터가 촘촘히 깔려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천왕봉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자연 피라미드이자 불교에서 말하는 우주의 중심 산인 수미산이 아닐까. 필자의 직설적인 표현으로는 ‘영발 발전소’에 해당한다.

천왕봉의 7부 능선쯤에 법계사가 자리 잡고 있다. 해발 1450m이다. ‘고소(高所)의 사상’이라는 게 있다. 높은 데로 올라가야 사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높은 곳에 있으면 아래를 내려다본다. 내려다보아야 사상이 생긴다. 전체를 조감할 수 있다. 조감이 되어야 사상이 생기고 인간 삶의 통찰이 온다. 법계사가 이런 지점이다. 법계사 법당 뒤의 바위에 앉아 있으면 아래 골짜기에서 아주 백설같이 하얀 운무가 서서히 올라오는 모습을 바라다볼 수 있다. 운무가 서서히 밀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도시에서는 하늘 위로 올려다보아야 하지만 법계사에서는 내려다본다. 이 시각 차이가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준다. ‘신선이 이런 거 보는 사람이구나!’

법계사는 일단 바위가 몰려 있는 지점이다. 기도터가 되려면 일단 바위가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물이 나온다. 고지대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나온다. 물이 나와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법계사 앞으로 쭉 뻗어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걸 ‘세존봉’이라고도 부르고 ‘문창대(文昌臺)’라고도 부른다. 문창성은 하늘의 별자리이다. 학문을 관장하는 별자리이다. 최치원의 별칭이 문창제군(文昌帝君)이다. 여기에 최치원이 와서 명상도 하고 쉬기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문창대이다.

이 문창대(세존봉)가 법계사 앞으로 700~800m 뻗어 있다는 점이 법계사 터의 커다란 장점이다. 이 문창대는 풍수에서 말하는 전순(前脣)에 해당한다. 순(脣)은 입술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는 말도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리다. 터에 입술이 있어야 이빨을 보호해 준다. 법계사가 이빨이라면 이 세존봉이 법계사 입술 역할을 한다. 법계사 터의 탁월함은 이 문창대가 있다는 점이다.


노인성을 3번만 보면 100세까지 산다

도가의 옥추경을 신봉하는 천둥벼락파(派)들은 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창대를 주목하였다. 이른바 ‘스리쿠션’의 이론이었다. 천왕봉 정상에 번개가 치면 그 번개의 에너지는 곧장 이 문창대로 뻗쳐 내려온다고 보았다. 문창대에서 다시 법계사로 번개 에너지를 스리쿠션으로 반사해 넣어준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장쾌한 발상인가! 천왕봉의 번개를 충전하는 도량이라니! 그래서 법계사야말로 천둥벼락 에너지가 충전되는 영발 도량으로 존중되었다. 도가의 도사들은 법계사 법당의 뒤쪽 바위를 옥추봉(玉樞峰)으로 부른다. 법계사는 불교의 사찰이지만 도가 쪽에서 아주 중요시하는 도량이었다.

도가에서 또 하나 법계사를 주목하는 포인트는 별이었다. 별을 바라다볼 수 있는 첨성대(瞻星臺)로 본 점이다. 도가에서는 별의 기운을 받아야지 도가 닦인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도가에서 주목한 별은 노인성(老人星)이었다. 이 노인성을 일생에 3번만 보면 100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게 도가와 민간신앙의 믿음이었다. 그런데 다른 장소에서는 이 노인성을 보기가 어려웠다. 중부지방에서는 노인성을 볼 수 없다. 남쪽 지방에서만 가능하다. 법계사는 해발이 높으므로 남쪽 수평선상에서 밤에 보이는 노인성을 관찰할 수 있다. 그것도 추운 겨울의 새벽녘에만 보인다는 것이다.

법계사에서는 멀리 남해 바다가 보인다. 바다의 수평선상에 걸려 있는 노인성을 볼 수 있다. 물론 위도가 더 낮은 제주도에서는 노인성을 보다 잘 볼 수 있다. 제주목사로 부임하면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가 노인성 보는 일이었다니, 현대인의 시각과 너무나 차이가 있다. 별이 인간의 수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보느냐, 아니냐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생긴다. 필자는 제주도에서 보는 것도 감질이 나서 오키나와까지 가서 노인성을 보았던 경험이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수평선에 보일락 말락 하게 노인성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머리 위로 뜬다. 시원하게 볼 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법계사 삼층석탑 적멸보궁탑이 서 있는 자리에는 집채만 한 바위 덩어리가 따로 독립해서 서 있다. 여기가 별 보는 포인트였다. 한 가지 짜증 나는 일은 이 바위 여기저기에 낙서처럼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삐뚤빼뚤 글자가 새겨져 있어서 보기에 아주 좋지 않다. 이러한 낙서 같은 무질서한 암각은 그 동안 법계사가 주인 없이 방치되어 민초들 손에 관리되어 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법계사는 중간중간에 왜구의 침입과 각종 변란, 그리고 빨치산을 겪으면서 그 직격탄을 맞았다. 6·25전쟁 이후에도 절이 불타 버리고 초막 형태로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왔다. 이때 주인이 없으니 너도나도 와서 경내의 바위에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법계사는 서기 500년대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매우 오래된 사찰이다. 화엄사, 법계사, 대원사가 이때 연기조사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공통점은 돌탑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에 남원 황산대첩에서 패배한 왜구 집단, 즉 소년장수 아지발도의 군대가 이성계에게 패배하고 난 뒤에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이 왜구 패잔병이 지리산 심장부까지 들어와서 노략질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왜구들이 법계사도 불살랐다고 전해진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활동하였던 벽계정심(碧溪淨心) 선사가 여기서 머무르며 도를 닦았던 모양이다. 벽계정심은 벽송지엄의 윗대이다. 서산대사가 벽송지엄의 맥이니까 조선 선불교의 맨 앞에 벽계정심이 있다.

구한말 의병활동 때에도 이 절이 의병들의 본거지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일본 헌병대가 와서 불태웠다. 아무튼 삼층석탑 옆의 커다란 바위에는 낙서처럼 새겨진 글자가 보인다. ‘老人星照(노인성조)’ ‘北斗七星照(북두칠성조)’ ‘三台星照(삼태성조)’ ‘紫微星照(자미성조)’ 등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朴治映(박치영)’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좌우와 밑에 새겨져 있다. 새긴 형태는 엉성하고 낙서 같지만 아마도 법계사가 불타고 초막 형태로 있을 때 여기에 와서 공부하던 도꾼의 흔적으로 보인다. 노인성, 북두칠성, 삼태성, 자미성이 자기를 비춰주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비록 형식은 삼류 같지만 민초들 저변의 밑바닥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던 별신앙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법계사 여기저기 바위에 낙서처럼 새겨져 있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朴正民(박정민), 朴治映(박치영) 등의 이름은 법계사가 빨치산 토벌로 불에 타서 무주공산 상태로 있던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후반쯤 사이에 새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암각들이 경내를 어지럽히는 것 같아 기분은 나쁘지만 넓은 시각에서 바라다보자면 이것도 당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자료이자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사상의 해방구

법계사에는 문창대가 또 하나 있다. 법당에서 5분쯤 왼쪽으로 걸어가면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평평한 바위 암반이 구(舊) 문창대이다. 세존봉이 신(新) 문창대이다. 구 문창대 바위 암반에는 ‘陸象山(육상산)’이라는 각자가 새겨져 있다. 육상산은 양명학의 시조이다. 왕양명의 선생이 육상산 아닌가. 그래서 양명학을 육왕학(陸王學)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양명학은 이단이었다. 사문난적으로 몰려서 죽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이 바로 양명학 신봉자였다. 그런 양명학의 시조 이름이 어떻게 이 법계사 구 문창대 바위에 새겨져 있을까? 누가 이런 담대한 발상을 했을까? 아주 흥미롭다. 구한말 조선이 망해가던 시점에 누가 새겨 놓은 게 아닐까. ‘주자학만 믿다가 나라가 망했다. 양명학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조선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심정으로 새기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육상산은 금기어였는데 법계사 문창대에 이렇게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는 게 놀랍다. 이곳은 사상의 해방구였단 말인가? 전국 어느 곳에서도 양명학을 신봉하는 암각 글씨는 발견하기 어려우니까 말이다. 법계사는 불교를 비롯하여 도가의 별자리와 옥추경, 무속신앙, 그리고 육상산까지 포용하고 있는 사상의 발원지이자 저수지라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