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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순례] 지리산의 3대 전설 우천 허만수가 멈춘 곳

醉月 2023. 1. 13. 16:20

지리산의 전설이 3명 있다. 고운 최치원, 남명 조식, 그리고 우천(宇天) 허만수(許萬壽·1916~1976)다. 신라 말기의 인물인 최치원은 지리산의 신선이 된 인물이다. 조식은 조선 4대 학파 가운데 하나인 남명학파의 수장이다. 현대의 인물인 우천 허만수는 이들에 필적할 만한 업적이나 내공을 갖고 있을까? 최치원과 남명에게 비유하는 것은 좀 과대포장 아닌가?

하지만 21세기 지리산을 좋아하고 주말에 시간을 내서 지리산을 등산하는 등산 매니아들에게는 아득한 시대의 전설인 고운이나 남명보다는 우천 허만수가 훨씬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인데 처자식을 버리고 지리산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남다르다. 그는 지리산에서 춥고, 배고프고, 고독을 겪으면서도 입산(入山) 생활을 더 높은 가치로 여겼다. 지리산 입산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은 처자식과 회사 조직, 월급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회사와 월급은 2㎝ 굵기의 쇠사슬보다도 더 질긴 속박이다. 그런데 우천은 이걸 떨쳐버리고 산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 점을 지리산 매니아들은 높이 친다. 우천은 지리산에 들어와 지리산을 사랑하였다. 등산로를 내고, 이정표를 만들고, 조난당한 등산객들을 구조하는 데 성심성의를 보였다.

대개 입산하는 사람은 팔자가 세서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사업이 파탄나서, 죽을 병이 걸려서, 아니면 범죄를 저지르고 숨어 들어온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천은 진주의 부잣집 아들이었다. 1916년생이니까 10대 중반 무렵에 일본에 유학을 가서 중학교를 다니고, 교토의 전문대학을 다녔다고 한다. 왜정 때 일찍부터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있는 집은 최소한 천석 이상의 재산은 있어야만 했다. 천석이면 요즘 수백억대 부자이다.


이념보다 산에 빠지다

자료를 보니까 우천은 입명관(立命館) 중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등산에 취미를 붙였던 모양이다. 일본의 명산들을 여기저기 다녀보았을 것이다. 그 시대에 다른 학생들은 좌파 사상에 경도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마도 우천은 등산에 경도되었다는 점이 좀 다르게 보인다. 우천을 사로잡는 것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산이었던 것이다. ‘지리산’을 쓴 소설가 이병주가 1921년생이다. 우천보다 5년 아래지만 같은 진주(하동) 출신이다. ‘지리산’을 보면 이병주 세대가 겪은 이념의 갈등이 강하게 다가온다. 해방정국에서 미군의 감시망을 피해다니는 남로당 박헌영의 비서 박갑동, 그가 1919년생이다.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 박헌영 비서를 맡아 지하조직을 총괄하면서 그가 겪은 살벌한 고생이 ‘통곡의 언덕에서’라는 그의 자서전에 잘 나온다. 우천의 3년 아래이다.

이 박갑동이 산청 태생이다. 산청은 진주 문화권에 속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끼리 한두 다리 건너면 서로 다 알 만한 관계이다. 그러나 우천은 이러한 동시대 선후배들의 취향과는 아주 달랐던 것 같다. 우천은 광복 후 고향 진주에 돌아와 서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서점이 돈 되는 사업은 아니다. 물론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과 딸자식들이 있었다. 외견상으로 우천은 해방정국의 좌우갈등, 6·25전쟁이라는 살육을 피해 간 것으로 보인다. 그 시대 일본 유학 인텔리라면 여기에 한두 코씩 걸려 곤욕을 치렀을 판인데, 우천은 별다른 큰 액운은 없었지 않았나 싶다. 아니면 산을 좋아했던 도가적(道家的) 취향의 우천은 당시의 이념갈등과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인생에 대해 커다란 환멸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참으로 살벌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오래 있다가는 개죽음이나 하겠구나! 이렇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산에서 살다가 죽자’는 환멸과 다짐 아니었을까.

산을 좋아하는 도가적 취향은 우도 아니고 좌도 아닐 수가 있다. 싸움판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니면 결국은 외롭다. 갈 데는 산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지리산에 입산한 것 같다. 그때가 우천의 나이 40세 무렵인 1956년이 아닌가 싶다. 1976년 6월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서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산 생활이 계속되었다.

우천의 지리산 움막집은 세석평전에 있었다. 해발 1500m. 1862년 일어난 진주민란의 연루자 일부가 추적을 피해 세석평전으로 숨어들어 살았던 적이 있다. 땅이 평평하고 물이 많아서 비교적 사람이 살 만하다.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매를 잡아서 관청에 바치는 매사냥꾼들이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자유의 대가는 고독

우천도 이 세석평전에서 움막집을 짓고 살았다. 1960년대 초반 조선대 약대생이 우천의 집을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을 보면 움막집이다. 지붕은 억새로 엮은 것 같기도 하다. 지리산 토박이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산죽(山竹)으로도 지붕을 많이 엮었다고 한다. 지리산 산죽은 키가 유달리 커서 2~3m 되는 게 많았다. 지붕을 엮기에 안성맞춤이다. 산죽과 억새를 서로 섞어서 지붕을 이었을 수도 있다. 벽은 통나무를 대고 중간 틈새에 흙을 바른 형태로 불을 때는 구들을 깔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밤이 되면 산봉우리 위로 떠오른 보름달을 감상했을 것이다. 멀리 섬진강에서 피어오르는 흰색의 허리띠 같은 모습의 물안개도 가만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비가 온 후에 중산리 골짜기에서 올라오는 운무도 아주 장관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산속의 움막집에서 배를 곯고 누워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진주에 두고 온 아내와 딸들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친구들과 막걸리집 파전 먹던 생각도 나지 않았을까? ‘왜 나는 이런 산속에 이렇게 혼자 누워 있는 걸까? 이게 팔자란 말인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밤에 골짜기를 진동하는 소쩍새 소리가 좋다. 아궁이에 불 때놓고 피어오르는 장작 타는 냄새와 윗목에 따다 놓은 산과일들 맛이 좋다.’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았을까. ‘삼시세끼 밥먹고 산다고 서로 물어뜯고, 고발하고, 고생하다 보면 한세상 다 흘러가는데, 나는 이렇게 구름 속에서 새소리 듣고 있으니 이 또한 신선 팔자 아닌가!’ 이런 생각도 했을 법하다.

동양의 제자백가 가운데 개인의 생활,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하는 노선이 바로 도가이다. 도가는 그 대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첫째는 고독이다. 혼자 있는 생활. 이걸 감내하고 즐겁게 여겨야 한다. 인간들이 모여 있을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소음과 다툼을 경멸해야 한다. 둘째는 배고픔이다. 산에서 나는 약초나 풀, 열매를 따먹어야 한다. 가끔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남겨준 음식을 먹기도 했을 것이다. 

이제는 우천 허만수의 움막집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그 집터 뒤에는 평평한 마당바위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지리산 민초들의 기도터이다. 마당바위에 쌓아 놓은 입석들이 우천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우천도 아마 이 집 뒤의 마당바위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았을까.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