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100년 성당·금강 가르는 철교… 밤이면 더 그림같은 도시

醉月 2023. 1. 13. 13:29

 충남 공주의 근대건축 중에서 미감이 단연 돋보이는 공주 중동성당.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붉은 벽돌로 쌓은 외벽이 인상적이다. 서울 약현성당을 모델로 지어졌다.

■ 박경일기자의 여행 - 백제를 지우고 본 공주

공주 = 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공주는 ‘좋은 여행지’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사이즈’ 때문입니다. 공주야말로 ‘여행하기 딱 알맞은’ 크기의 도시입니다. 금강의 물길이 도시를 관통해 확장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게, 근대 이후 공주 발전을 가로막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런 결함이 곧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는 작고 단단하면서 품격이 있는 문화 도시로 자리 잡게 했습니다. 공주라면 백제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번에는 백제를 지워버린 공주 이야기입니다. 공주 원도심으로 몇 발짝만 들여놓는다면 백제를 빼고도 그곳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공주의 재발견’ 이야기입니다.

도청 내주고 보상받은 ‘금강교’ … 공산성 보며 걷기 ‘딱’
‘(하숙)쳐서 먹고 산다’ 던 제민천변 하숙마을도 눈길

갤러리만 6개… ‘그림 반값 할인’에 1년내내 전시 빼곡
유관순 드나들던 교회·라틴십자형 중동성당도 근대명소



# 백제를 지우고 공주를 보다

충남 공주. 모두들 ‘백제’로 기억하는 땅이다. 공주에는 무령왕릉이 있고, 공산성이 있으며 공주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실은 그게 공주에 있는 백제의 전부다. 백제 유적은 공주보다, 부여에 더 많다. 정림사지 석탑도, 낙화암도, 궁남지도, 부소산성도, 백제 금동대향로도 다 부여에 있다. 공주와 부여를 저울에 달면 늘 부여 쪽으로 기운다. 그동안 부여를 목적지로 삼고, 공주를 스치듯 지나간 이유다.

부록처럼 딸린 여행지라 생각했던 공주의 진짜 매력은, 단언하건대 관광객들이 거의 발을 들이지 않는 ‘공주 원도심’에 있었다. 그곳에 백제를 지워버리고 남은 공주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이전의 공주는, 뜻밖에도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단단한 도시였다.

공주의 전성기는 아마도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시간쯤에 있는 듯하다. 종교적 미감으로 화려하게 빛나는 중동성당, 공주의 근대를 앞장서 이끌었던 제일교회, 금융조합 건물로 지어져 읍사무소와 시청, 그리고 미술학원으로 쓰이다가 박물관이 된 읍사무소…. 공주 원도심에 드문드문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에는 저마다의 사연이 깊이 새겨져 있다.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과 맞바꾼 금강철교. 도청 이전에 반발하는 공주 주민들의 민심 수습을 위해 지어준 금강철교는 당시 최첨단 공법으로 건설됐는데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다리였다.



# 도청 이전과 맞바꾼 금강철교

지금이야 그나마 백제 아니면 존재감이 불투명한 한낱 중소도시 신세지만, 공주는 임진왜란 직후 충청감영이 세워진 이래 300여 년 동안 호서지역의 대표도시였다. 공주는 한때 청주와 영동, 금산과 천안, 평택 등 자그마치 27개 군을 관할했을 정도로 몸집을 불렸다.

공주의 추락은 경부선 철도 부설로부터 시작됐다. 한때 유력한 경부선 노선 후보였던 공주는, 러시아와의 군사적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 일본 군부가 고수한 ‘최단구간’ 노선 건설 원칙으로 최종 건설과정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이어 건설된 호남선 노선도 공사비용 절감을 이유로 공주를 비껴갔다. 충청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제와 행정의 중추도시였던 공주가, 근대 문명 도입의 문턱에서 탈락하게 되는 시발점이었다.

 공주 제일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한국인 작가에 의해 개신교 예배당에 최초로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다.



경부선 철로가 공주를 벗어나 대전으로 연결되면서 공주에 있던 충남도청도 대전으로 옮겨간 건 수순이었다. 공주 주민들이 길거리로 나서 횃불시위에 투석전까지 벌여가며 ‘이전 반대’를 외쳤지만, 대전 일대에 거대한 농지를 보유하고 있던 공주 갑부 김갑순을 비롯한 일부 친일파들은 도청 이전을 지지했고 결국 거대한 부를 쌓았다.

기차역과 도청을 잃은 공주에 보상으로 주어진 건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강교’였다. 1933년에 지어진 금강교는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철교였다.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고 공사 기간만 1년이 걸렸다. 그때도 그랬겠지만 지금도 공주를 들어설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바로 트러스트 형식의 철교인 금강교다. 공산성의 누각 아래 금강을 가로지르는 금강교는 밤이면 조명을 받아 도시를 장식하는 레이스처럼 황금빛으로 번쩍인다. 금강교는 지금은 두 개 차선 중 한 개만 차량의 일방통행을 허용하고, 나머지 차선은 보행자나 자전거에 내주었으니 금강 변의 공산성 전경을 감상하며 천천히 걸어보기에 딱 좋다.

도청 이전의 대가로 공주에 주어진 보상이 또 하나 있었다. 공주에 여자사범학교와 농업학교 등 각종 교육기관을 지어준 것이다. 공주가 오랫동안 ‘교육도시’라는 지위를 유지해올 수 있었던 이면에는 철도 소외와 도청 이전이 있었다는 얘기다. 금강의 트러스트 철교와 원도심의 학교 주변 하숙촌은 근대도시로서의 공주의 시작이면서, 놓이지 않은 철도와 옮겨간 도청으로 인한 상실감을 볼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공주 하숙마을 앞 제민천에 놓은 다리 중동교에 설치된 조형물. 지금은 작은 개천에 불과하지만 예전에는 제민천에서 빨래도 하고 고기잡이도 했단다.



# 하숙집, 공주 경제를 지탱하다

공주 원도심에는 ‘하숙마을’이 있다. 도시재생 사업으로 재현한 1960∼1970년대 공주의 하숙문화에 대한 추억과 향수를 담아낸 공간이다. 원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제민천 변의 오래된 약방과 요정 건물을 매입해 자그마한 복합문화공간과 게스트하우스를 넣었다. 그 시절 웬만한 규모의 도시라면 다 하숙이 있었으니 그게 뭐 대수일까 싶었는데, 하숙마을에서 입이 딱 벌어지는 사진을 보곤 마음이 바뀌었다.

1970년대 중반쯤의 사진이라고 했다. 제민천 둑 윗길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변의 길이 마치 만원 지하철 내부처럼 보일 정도였다. 도대체 믿기지 않았던 건 대규모 시위라도 벌어진 것 같은 이 장면이, 매일 아침 벌어지는 등교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각급 학교가 한데 모여있던 공주 원도심은 유학 온 학생들로 가득했고 천변의 주택가는 이 수많은 학생을 재우고 먹이는 하숙집이었던 것이다.

제민천 변의 주택은 보통 방이 예닐곱 개가 넘었다. 그중 한 칸이나 두 칸만 집주인이 쓰고 나머지는 하숙을 쳤다. 주인은 다락방을 쓰고 방을 모두 하숙을 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하숙비는 쌀로 냈다. 1970년 중반쯤 한 달 하숙비가 쌀 두 말쯤이었다고 했는데, 하숙비로 내는 쌀은 하숙생 학부모가 제일 좋은 쌀로 특별히 후하게 재서 보내줬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 귀하디귀한 반찬으로 내준 꽁치 이야기며, 하숙집 딸과 하숙생의 로맨스까지 제민천 주변 주민들의 추억 이야기가 끝이 없다.

# 공주 원도심을 여행하는 법

당시 공주에서 하숙은 ‘비워두느니 방을 내놓는’ 식이 아니었다. 하숙은 공주 주민들의 주요한 생계였다. 공주 지역사를 연구하는 한 관계자는 “그 무렵 공주시민 70% 정도가 하숙비로 가정 경제를 꾸렸다”고 했다. 박봉에 시달리던 공무원도, 대학교수도 다 하숙을 쳤다. ‘온양 사람들은 (온천에서 때를) 벗겨 먹고 살고, 공주 사람은 (하숙을) 쳐서 먹고 산다’는 얘기도 이 무렵에 나왔다.

제 자식 하나 건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열 명, 스무 명이 넘는 하숙생들을 먹이고 재우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시절 얘기를 꺼내면 할머니들이 금세 설움이 북받치는 이유다.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그때 하숙집에는 따스한 온기와 모여 사는 재미가 있었다. 진저리칠 정도로 고생스러웠음에도 그 시절을 너도나도 그리워하는 이유다.

하숙마을 부근의 제민천 일대는 걷기가 좋다. 다양한 조형물과 벽화가 길을 안내한다. 제민천에서 반경을 좀 더 넓히면, 학생용품을 팔다가 문 닫은 오래된 극장 자리나 실핏줄처럼 이어진 오래된 뒷골목도 만나게 된다.

공주 원도심에서는 구태여 목적지나 코스를 정할 것도 없다. 제각기 다른 사업으로 조성해 옛 골목에 새 이름을 달고 만들어진 길이 여럿이지만, 구태여 그 코스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 이리저리 반나절만 걷다 보면, 일대의 지도가 머릿속에 다 들어온다. 그러니 얼마든지 길을 잃어도 좋다.

# 공주에 갤러리가 앞다퉈 들어서다

공주 원도심에는 갤러리가 6개나 된다. 해마다 두어 개씩 새로 문을 열고 있다. 올해도 두어 개의 갤러리가 문을 연다. 인구 10만 명이 겨우 넘는 중소도시에 갤러리가 8개나 된다는 건 극히 이례적이다. 비밀은 공주문화재단의 프로젝트에 있다. 공주가 법정 문화도시로 지정되면서 공주문화재단은 ‘그림상점’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림상점 프로젝트는 간명하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공주를 미술이 활발하게 향유되고 거래되는 예술시장으로 만드는 것. 이를 위해 그림 한 점을 사면 그림값의 절반을 공주문화재단에서 대신 내주고 있다. 아무 작품이나 이렇게 지원해주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지원 대상 작품을 공주 출신 작가 그림으로 한정했는데, 이제는 한 번이라도 공주에서 전시회를 했다면 그 인연으로 지원 대상 작가가 될 수 있다. 이러니 화가들이 너도나도 공주에서 전시회를 하려고 하는 바람에 공주의 갤러리는 벌써 연말까지의 전시 일정이 꽉 찼다.

# 여행을 하다가 그림을 산다고?

지금 공주에서는 공주문화재단의 새해 첫 전시인 ‘공유전시프로젝트’가 열리고 있다. 공주 시내의 여섯 개 갤러리에서 공동으로 여는 ‘고흐, 향기를 만나다’전(展)이다. 고흐의 레플리카(모작) 작품을 조향사가 만든 향수의 향기와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고흐의 작품을 시대와 공간 순으로 여섯 개로 나눠 갤러리에 번호를 매겨 순서대로 전시했다.

레플리카 작품이 무슨 감동이 있을까 싶었는데, 정교하게 모사된 그림에서는 붓질의 느낌까지 느껴졌고, 그림 앞의 시향지를 들어 향기를 맡으며 그림을 보는 경험도 새로웠다. 무엇보다 원도심을 누비며 저마다 독특한 느낌의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재미가 각별했다. 뜻밖이었던 건 전시 작품이 제법 팔린다는 것이었다. 레플리카라 수집의 의미는 없지만,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으면 10만∼2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으니 감상만을 위한 것이라 해도 지갑을 여는 데 부담이 없다. 이미정 갤러리의 이미정 관장은 “작품 구입자 중 한 명은 현역 화가”라며 “평화로운 그림의 분위기에 이끌렸다며 구입을 원했다”고 했다. 공주의 갤러리들은 그림에 대한 별다른 식견이 없어도 ‘여행을 하다가 그림을 사는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 보여준다.

# 교회와 성당, 그리고 신부

원도심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의 하나가 공주제일교회다. 1931년에 짓고 1955년에 개축한 오래된 교회건물은 기독교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교회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 이상화가 아내 서은순과, 시인 박목월이 부인 유익순과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또 유관순 열사가 이화학당에 진학하기 전에 영명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드나들기도 했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스테인드글라스다. 한국인 최초로 우리 땅에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설치한 이남규 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가는 서울 약현성당 제대에 1974년 처음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들어 설치했는데, 여기 공주제일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는 1979년 작으로 개신교 예배당에 걸린 우리나라 최초의 작품이다. 이런 타이틀에 걸맞게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을 만큼 크고 화려하며 아름답다.

고딕식 종탑을 갖춘 라틴십자형 성당인 중동성당은, 공주의 근대건축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건축물이다. 중동성당은 1921년 주임으로 부임한 최종철 마르코 신부가 서울의 약현성당을 모델로 직접 설계한 성당으로 1934년에 짓기 시작해 2년 만에 완공했다. 최 신부는 이곳에 묻혔는데, 대전교구 방침으로 대전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면서 묘지에는 아래턱뼈를 묻었다. 신부의 묘 옆에는 최 신부의 형인 최종수 요한의 순교 현양비가 세워져 있다. 최종수 신부는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이 성당에 총질을 하고 성물을 훼손하는 것에 항의하다 성당마당에서 총살당해 순교했다.

중동성당에서 공주의 천주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248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된 순교성지인 황새바위까지 가 닿는다. 이야기는 1911년 독일의 성베네딕트회 소속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의 공주 여행 이야기로 이어진다. 식민지 공간인 공주에서 황새바위성지를 찾아 박해와 순교의 공간을 목격한 베버 신부는 연민이 가득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한국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가 여행자의 시선으로 공주를 떠나기 직전 공산성에 올라 남긴 글은 지금 읽어도 뭉클하다. 그 문장의 몇 줄을 여기에 옮긴다.

“지는 해의 그윽한 광채를 받아 석양의 깊은 그림자가 능선을 붉게 물들였다. 이 놀랍도록 신비스러운 그림자 속에 우리가 서 있었다.…(중략)… 한국은 아름다움과 정취를 점점 더해갔다. 나는 한국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밤의 어둠이 이 경이로운 장관을 집어삼킬 때까지, 부서진 마름돌 위에 앉아 하염없이 이 풍광에 침잠하고 싶었다. 이 아름다운 언덕을 떠나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마 다시는 못 볼 것이다.”



■ 잠자리는 어디로 갔을까

공주 원도심 일대 골목 중 흥미로운 곳이 2013년 주민들이 조성한 ‘잠자리가 놀다 간 골목’이다. 호서극장과 공주양조장, 공주도립병원으로 이어지는 뒷골목인데,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공주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조성한 지 10년이 흘러 다듬어 놓은 풍경도 낡아 버리고 말았지만, 그래서 골목이 품고 있는 시간은 더 깊어졌다. 찻집 ‘루치아의 뜰’을 겨눠 찾아가면 이 골목에 들어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