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취(黨聚)가 있었다. ‘땡추’의 어원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승려들의 지하비밀 조직을 가리킨다. 왜 머리 깎은 불교의 승려가 비밀조직을 만들었나? 조선조의 유교체제에 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승려가 브라만 계급, 즉 성직자 계급으로 대접받다가 조선에 들어와서 하층민 신분으로 전락하였다. 푸대접을 견디지 못한 승려들은 조선왕조가 들어서자마자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가장 강성 승려들이 결성한 단체가 금강산 당취이다. 100년 정도 더 조선 유교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결성한 당취가 지리산 당취이다. 그리고 묘향산 당취가 있다. 이북 지역의 승려그룹들이 결성한 것이 묘향산 당취다. 당취는 육식도 하고 때로는 머리도 기르고 다녔다. 악질로 소문난 양반이나 부자는 산으로 데리고 와서 혼쭐을 내기도 하였다. ‘참회’라는 방식이었다. 죄질이 아주 안 좋으면 잡아서 죽였고, 죄질이 덜하면 팔이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참회를 시켰다.
비밀결사 조직의 핵심은 보안유지였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조직의 실체를 발설하지 않는 맹세를 하였다. 심산유곡의 암자나 토굴에서 살았고, 활동할 때만 산 밖으로 나왔다. 당취의 필수 능력이 무술이었다. 산속의 암자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유사시에는 주먹과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어야만 했다. 당취는 깊은 산속의 협곡이나 암자, 사찰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므로 밖에서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 당취 본거지 의신사의 후방
지리산 당취의 본거지는 의신사(義神寺)였다. 사찰의 이름에 옳을 의(義) 자가 들어가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그 터에 잠재되어 있는 땅의 기운이 사회정의를 실천한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의로운 혼령이 깃들어 있는 사찰이 의신사였다. 화개 골짜기에서 약 30리 정도 계곡 옆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타나는 절이었다. 조선시대 지리산은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길이 많았다. 계곡은 험난한 길이었다.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계곡의 옆길은 우마차로 갈 수도 없는 길이었고, 대규모 토벌대가 쉽게 들어가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지금은 자동차 길로 뚫려 있지만, 조선시대의 지리산은 호리병처럼 좁은 계곡을 통과해서 들어가야만 그 모습이 나타나는 특수한 지형이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남쪽으로는 화개 골짜기가 가로막고 있고, 북쪽으로는 1300m 높이의 벽소령이 가로막고 있었다. 1300m 고개 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서쪽으로는 ‘안당재’와 ‘바깥당재’가 이중으로 의신사를 방어해 주고 있는 형국이다. 안당재라는 고개는 의신사를 방어하는 내성(內城)의 개념이고, 바깥당재는 외성(外城)의 개념으로 보면 된다. 바깥당재 넘어서 가면 연곡사가 나타나고, 연곡사에서 다시 고개를 넘어가면 화엄사가 나타난다. 화엄사, 연곡사, 의신사는 당취의 중요 거점 사찰이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동쪽은 어떤가? 의신사가 자리 잡은 형국으로 보면 절의 뒤쪽이 된다. 후방이다. 앞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밀리게 되면 뒤로 후퇴해야 한다. 이 후퇴하는 루트는 어떻게 되는가? 이것이 필자의 관심사였다. 동서남북이 모두 요새지형으로 둘러싸여야만 의신사가 지리산 당취의 본부사찰로서 자격이 있는 셈이다. 요새가 아니면 외부 공격에 쉽게 뚫릴 수밖에 없다. 의신사 뒤편은 동쪽에 해당한다. 남북과 서쪽은 파악이 되었지만 동쪽에 대한 지형지물 파악이 되지 않았는데 근래에 지리산 전문가인 민모 대장님과 바위에 새겨진 금석문을 연구하는 도솔산인, 그리고 지리산의 가축이동 통로에 대해서 전문가의 내공을 지닌 경상대 조모 교수님을 통해서 이 뒤쪽의 동쪽 루트를 알게 되었다. 지리산은 동서로 40㎞, 남북으로 30㎞의 넓은 구역이다. 쉽게 파악이 안 되는 산의 구조이다. 수백 번 지리산을 답사한 선수들의 도움 없이 문필가 혼자서 감을 잡기 어려운 산이다.
의신사는 현재 폐사된 상태이다. 1600년대 초반에 폐사된 이후로 이상하게도 복구가 안 되었다. 현재는 그 자리에 민간인들이 들어와 동네를 이뤘다. 의신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의신마을에서 1시간 정도 도덕봉 쪽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중간에 원통암이 자리 잡고 있다. 의신사 주변에 대략 30개의 산내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다 없어지고 겨우 남아 있는 몇 개 터 가운데 하나가 원통암이다. 조선시대 원통암에 있던 숭인장로가 16살짜리 서산을 발탁해서 고승으로 키웠다. 지리산 당취의 당시 두목이 숭인장로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의신사를 중심으로 반경 십리 구역 내의 사찰과 암자는 서산대사가 수도하고 내공을 닦고, 당취 조직을 관리한 영역으로 본다. 한마디로 지리산 의신사 일대는 서산의 구역이었다.
당취의 사령관 서산대사의 구역
필자가 보기에 서산은 숭인장로의 뒤를 이어 지리산 당취의 최고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에 관한 증거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청소년기의 서산이 숭인장로에게 발탁되어 머리를 깎은 곳도 여기이고, 수도한 곳도 여기이고, 한 소식을 성취한 곳도 여기이다. 시간으로 봐서 서울에 올라가 승과에 합격하고 30대 중반에 서울 봉은사 주지를 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이 지리산에서 보낸 인물이 서산대사이다. 지리산파를 대표하는 인물은 서산대사인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산이 평소에 훈련시켜 놓았던 당취 조직이 승군으로 변했다. 임란은 승군이 최전선에 섰던 전쟁이다. 불살생을 내세우는 승려가 어떻게 전쟁에 앞장선단 말인가. 사전 조직과 훈련 없이 피가 튀고 목이 날아가는 전쟁터에서 전투를 할 수 있겠는가? 자기 살려고 다 도망가지 왜 전쟁터까지 끌려간단 말인가. 더군다나 승려는 사회보장을 전혀 받지 못하는 천민계급이었다. 천민이 무슨 책임감이 있다고. 그리고 평소에 조직이 없는데 서산이 무슨 수로 승군을 지휘할 수 있단 말인가. 인터넷도 전화도 없던 세상에 무슨 수로 전국 산골짜기에 숨어사는 승려들을 불러내어 승병을 규합할 수 있단 말인가. 조선의 당취 조직을 승병으로 전환하여 임진왜란에서 싸우도록 한 인물이 바로 서산대사이다. 그러니까 의신사 주변은 승병의 훈련소였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의신사 터에서 주변 산세를 바라다보면 2개의 봉우리가 필자의 눈에 들어온다. 하나는 유두봉(乳頭峰)이다. 산꾼들은 이 봉우리를 ‘단천독바위’라고 부르지만 필자의 눈에는 젖꼭지 모습과 흡사한 모양을 가졌으므로 당연히 유두봉이라고 해야 한다. 이 봉우리가 아주 아름답다. 훌륭한 문필봉이기도 하다. 이 유두봉의 상서로운 기운 때문에 의신사 터를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전국에서 본 문필봉 가운데 상위 랭킹 3위 안에 드는 급수를 가진 문필봉이다. 또 하나의 봉우리는 의신사 뒷산에 서 있는 바위 절벽이자 봉우리들이다. 원통암 터를 청학포란(靑鶴抱卵)이라고도 부른다. 청학이 알을 품는 자리이다. 그 뒷산의 바위 봉우리는 청학의 벼슬에 해당한다. 학은 덩치가 있는 새이므로 닭벼슬보다는 큰 벼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도덕봉이다. 도덕봉은 청학포란의 벼슬 역할을 하고 있다.
도적봉에서 도덕봉으로
의신에 사는 토박이 주민에게 도덕봉을 물어보니 의외의 답변이 왔다. “그 봉우리는 원래 도적봉입니다. 도적봉이 변해서 도덕봉이 된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이 ‘도적봉’이라는 말 한마디가 필자의 모든 의문을 풀어주었다. 반체제 승려들인 당취들이 은신하기에 좋은 봉우리였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서산대사도 죽고 지리산 당취들도 그 세력이 차츰 약해져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에는 일반 도적떼들이 이 도적봉에 은신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도적들이 사니까 당연히 현지 사람들은 그 이름을 지었을 수밖에 없다. 지명은 거짓이 없다. 사실을 전해준다. 도적봉. 당취의 후예들이 도적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근래에 들어와 ‘도적’이라는 어감이 안 좋으니 ‘도덕’으로 바꾼 셈이다. 도덕봉이 훨씬 근사하지 않은가. 도덕봉 정도의 칭호에 합당하려면 산봉우리 모습이 테이블처럼 평평해야 한다. 풍수가에서는 이런 봉우리를 토체(土體)라고 부른다. 토체 봉우리 밑에서는 성인군자, 제왕이 태어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테이블마운틴. 아주 평평하다. 만델라가 약 30년간 감옥살이를 했는데, 만델라가 갇혀 있던 감옥에서 바라다보면 이 테이블마운틴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인다. 아프리카가 배출한 성인군자는 만델라였다고 보아야 한다. 무슨 추장이나 축구선수가 아니다.
조선시대 화담 서경덕 학파의 멤버였던 유몽인은 이 도적봉을 ‘검각(劍閣)’이라고 이름 지었다. 삼국지 촉나라로 들어가는 요새가 검각이다. 백 명이 천 명을 막아낼 수 있는 요새가 검각이다. 유몽인이 이 도적봉을 검각이라고 이름 붙였다는 것은 그만큼 지형이 험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적봉에 올라가서 바라다보니 3개의 칼 같은 바위 봉우리가 삼지창처럼 서 있다. 해발 1200m. 주변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아래는 거의 절벽 비스듬한 지형이다.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산세이다. 나는 이 도적봉 정상, 그러니까 검각에서 원통암, 철굴암 쪽을 바라다보면서 풍수지명이 생각났다. 철수검각(鐵手劍閣)이 그것이다. 쇠로 된 5개의 손가락이 검각과 그 일대를 감싸는 형국이다. 오른손을 바닥에 짚었을 때 엄지에 해당하는 자리가 원통암 자리이고, 집게손가락이 검각이다. 중지와 약지, 새끼손가락에 각각 상철굴암(上鐵窟庵), 중철굴암, 하철굴암이 배치되어 있다. 즉 의신사 뒤쪽의 30여 개 암자가 모두 이 철수검각의 보호망 아래에 배치되어 있다. 특히 검각에서 오른쪽 편의 3개철굴암. 이름도 ‘철(鐵)’ 자가 들어간다. 전투 시에 일종의 참호이자 진지 개념의 암자라는 점이 ‘철굴암’ 이름에 함축되어 있다. 3개의 철굴암은 모두 서산이 공부했던 암자들이다. 철의 손가락이 지키고 있는 요새지형. 여기가 지리산 당취의 헤드쿼터였던 것이다. 당사자들은 모두 죽었고, 기록은 남겨지지 않았고, 그 터만 남아서 400년 만에 필자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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