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13

醉月 2011. 2. 7. 08:49

틀려야 예언이다

미래를 정확히 예언할 수 있을까. 역사상 수많은 예지자들이 소위 ‘예언(豫言)’이라는 것을 했다.
그러나 정작 인간이 역사를 통해 행한 수많은 예언 중 정확히 맞아 떨어진 예언은 얼마나 될까. 아마 맞았던 예언보다도 틀렸던 예언이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물론 인간에게 예언능력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래를 ‘예언’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능력은 몇몇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예언’아닌 말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예언’이란 말이 난무하고 있다. 일개 점술가부터 시작, 웬만한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예언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여기서, 여러분이 분명 알고 있어야 할 법칙이 있다. 일명 ‘예언의 법칙’이다. 이 커다란 예언의 법칙에 어긋나는 ‘예언’에 대해서는 반드시 의심해보길 바란다. 요즘같이 예언이 난무하는 시대, 여러분의 이성을 현혹하는 예언에 대해서는 말장난으로 치부해도 상관없을 듯싶다.
먼저 예언의 법칙 첫번째.
예언은 어두운 예언보다 밝은 예언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면서 큰 운명체의 바른 길을 인도하게 하는 ‘큰 예언, 밝은 예언’엔 귀를 기울이되, 그와 반대인 개인의 사리사욕과 특정집단의 사악하고 편협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작은 예언, 어두운 예언’에는 현혹되지 말길 바란다.
둘째, 조금은 역설적이지만 ‘중요한 예언은 결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하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신 조물주께서는 자신이 하고픈 말씀을 제외한 ‘예언’들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때문에, 초능력자를 자칭한 자가 부정한 예언을 한다고 했을 때 조물주는 이를 ‘틀리게끔’ 시계바늘을 옆으로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예언은 초능력자나 종교인들에 의해 정확히 맞았다고 할지라도 실제 벌어진 일에 있어서는 100% 틀린 것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신은 우리 주변에 수많은 ‘상징적 예언’의 징후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계신다.
보통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일상과 주변을 자세히 살피고 ‘느낌’을 보다 충실화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까지는 예언적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를 ‘조짐(兆朕)’이라고 하는데, 이를 자세히 살피면 예언가 못지않은 미래예견 능력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오늘날에는 예언보다도 예측(豫測)이 더 중요하게 된다.
예언이라는 말의 시대적 해석도 달라져야 할 것이다. 그 범위나 대상, 그리고 정확도에 있어 100% 맞는 예언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예언이 갖는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 인류가 축적해 온 시대적, 역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미래 예견 능력, 미래예측 능력 등도 실제는 예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다섯째, 한 개인의 욕심에 의한 욕심을 위한 예언은 천기를 누설하는 행위로서 예언을 한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뭇 심각한 이야기다.
인간은 실제 현상세계에서 살면서 어느 한면을 지향하도록 나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남과 여, 둘 중 하나로 태어나 밝음과 어둠을 상징하는 두 개의 천체속에서 살아왔으며, 우주의 근본인 음과 양의 상대성, 또는 상보성의 범위하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반드시 영계와 육계 중 어느 한가지 영역 속에서만 존재하도록 되어 있지 살아있으면서 영계의 세계를 한꺼번에 체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계속의 인간은 영혼의 세계를 넘나들면서 예언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이런 행동을 할 때, 천기를 누설하는 천법(天法)을 어기는 벌을 반드시 받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절대 맞는 예언은 절대 틀리게 되어 있다.”
예언을 하는 자에게 사심이 생기면 이 법칙은 반드시 맞는다.
맑은 거울에 티끌이 앉듯 영능력자의 마음에 욕심이 끼면 절대로 미래나 현상의 정확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법이니 말이다.
이 세계는 주물주의 것이다. 그렇기에 미래는 그분의 뜻이다. 이는 우리가 ‘예언’을 한다 해서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부처님 손 안의 손오공’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가 늘 변화하는 미지수의 세계이기에 인생은 살 만한 것이 아닌가 싶다.

1999년의 진정한 의미

“일천구백구십구년 칠월에
하늘에서 무시무시한 왕이 내려오리라
앙골렘의 대왕이 부활하리니
그 후 마르스가 평화에 굴복하리라.”
희대의 예언자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가 남긴 이 짧은 4행시로 인해, 1999년을 맞는 세계인의 얼굴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노스트라다무스가 1999년을 ‘지구 멸망의 해’라 예언했기 때문이다.
물론 노스트라다무스만이 1999년을 지구 종말의 해라 예언한 것은 아니다. 1877년 미국 켄터키 지방에서 태어난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 또한 이와 흡사한 예언을 하고 있다. 그의 예언서를 모아둔 자료를 찾아보면 1929년 미국의 대경제공황, 세기 중반에 미대륙을 휩쓴 인종대환란,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종결시기, 소비에트연방의 공산주의체제 붕괴 등 그의 예언은 1900년대 이후를 세세히 예언해 놓고 있다.
그이 예언서에도 20세기 말 지구전체에 걸쳐 발생할 지각대변동을 예언하고 있는데,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지진이 발생할 것이며 이는 지구 종말로 치닫는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예언을 남겨놓고 있다.
서양뿐 아니다. 동양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풍신수길의 등장 등을 정확히 예언하신 격암 남사고 선생이 남긴 <격암유록>에 의하면 20세기 말 최종적으로 인류는 선천시대를 마감하고 후천세계를 맞을 것이라 예언하고 있다.
이쯤해서 ‘종말’에 대한 세 가지 비밀을 털어놓을까 한다.
첫째, 성서에 등장하는 종말, 즉 ‘회계하라! 종말이 다가온다!’에서 동장하는 종말은 결코 ‘세계의 종말’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 여기서 ‘회계’라는 말은
‘REPENT'로 이는 ’회귀‘를 뜻하는 말이다. 즉, 종말은 인간 자신의 종말인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여 인간은 죽음을 통해 회귀(REPENT), 새로운 생을 살아간다는 의미이지, 세계의 종말, 우주의 멸망을 의미하는 말이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둘째, ‘지구의 종말’이 ‘끝’은 아니다. 즉, 지구가 멸망해도 또 다른 지구인 우일촌(又一村)이 존재하며 우일촌은 4차원, 5차원을 넘어선 9차원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습의 다른 지구가 존재해 영혼은 다른 차원의 지구를 선택해 자유롭게 안착, 새로운 문명을 꽃피워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셋째, 1999년에 지구가 종말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1999년 종말을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서에는 신기하게도 2025년의 일도 예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2025년부터 지구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예언이 그것이다. 1999년에 종말했을 지구에 2025년에 평화가 찾아온다니… 앞뒤가 안 맞지 않은가?
이는 노스트라다무스를 추종하는 자들이 만든 극과 극, 즉 종말과 평화라는 시나리오 덕분이다. 결과야 어떻게 되든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파놓아 전세계인들을 현혹시킨 대가를 회피해 보고자 하는 그들의 음모가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이래도 지구 종말 예언을 믿겠는가?
예언은 인류를 바르게 이끌기 위한 지혜를 던져준다.
그 예언이 종말에 관한 예언이라면 되도록 인류를 ‘종말’에 치닫지 않게 충분히 경고하는 것이 예언자의 역할이라 할 것이다.
1999년은 ‘지구 종말의 해’가 아닌, ‘지구 종말설 경계의 해’이다.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구 종말 그 근원에는 이를 악용해 사심을 채우려는 사이비종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위기는 ‘지구종말’이 아닌 ‘IMF'다. 이 어려운 시기에 바른 이성을 갖고 ‘종말론’을 경계, 새천년을 ‘대한민국의 천년’으로 만들 각오를 되새기는 한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환경파괴의 위협

러시아의 지리학박사 보트야코프(Anatoly Votyakov)와 그의 아들 알렉세이(Alexei)는 《이론지리학에서 본 대재난》이라는 제목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각변동을 예고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에도 불구하고 극지점의 만년설에는 얼음이 증가하면서 편중된 무게를 골고루 분포시키기 위해 지각운동이 시작되는 시기에 엄청난 대홍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그들은 노스트라다무스의 1999년 지구종말설을 더욱 구체화시켜 1999년 7월 17일에 대홍수가 시작, 영국과 유럽의 저지대 방향으로 지반을 침몰시킬 것이며, 북미에는 캐나다 등이, 아시아지역에는 일본과 중국이 그 영향권에 들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지각대변동 예고는 세기말, 자주 거론되는 예언중 하나이다. 전설적인 예언자 중 하나인 에드가 케이시는 20세기말 지구전체에 걸쳐 발생하는 지각 대변동을 예언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지진이 계속 발생하며 1998년까지는 일본의 대부분은 바다속으로 침몰할 것이고, 북부유럽도 대변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이다. 미국 역시 LA 지역은 대부분 붕괴되고 뉴욕시가 파괴되는 등 최초의 피해국은 아메리카 대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는 지각 변동의 원인을 지구내부의 변동과 북극성 중심과 관련된 지축의 변화에 의한 지구의 이동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앞서 지각변동을 예언했다는 에드가 케이시의 예언이 그것이다.
1998년 일본침몰설. 이것은 우리나라의 예언가도 점친 바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엄연히 1999년. 그럼 벌써 일본은 침몰해 지도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 이러한 지가대변동 예고도 인류의 환경파괴를 경고하기 위한 메시지일 뿐, 그 이상은 아닌 것이다. 환경파괴에 의한 지구온난화 현상. 이로 인한
생태계가 파괴될 때, 이보다 더 큰 재앙은 없을 것이다. 환경파괴는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
바로 옆, 중국을 보라. 광활한 중국땅 곳곳에 공장이 세워지고 있다. 이 빠른 산업화로 인해 중국에서 생산되는 공해는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 하늘을 뒤덮고 있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공기오염뿐 아니라 온난화 현상이 가속화되는 등 엄청난 환경재앙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까이에서 자행되는 가장 큰 위협은 모른 채, 뜬금없는 지각변동설에만 솔깃해 일본이 가라앉는지에만 관심을 쏟아온 것이다. 지각변동설의 예고. 이것은 인간의 환경파괴를 경고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위협적인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의 참뜻을 잘 새겨 밀레니엄시대에는 환경이 우선되는 환경보호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밀레니엄 버그

밀레니엄 버그, 그 음모를 밝힌다.
‘밀레니엄 버그’라고도 불리는 Y2K.
그 외에도 Y2K는 “2000년 1월 1일의 악몽” “디지털시대의 대재앙” 등 듣기만 해도 끔찍한 닉네임으로 불리고 있다.
도대체 Y2K란 게 무엇이길래 이런 끔찍한 닉네임으로 불리는 것일까?
1977년 퍼스널 컴퓨터의 시초 애플 I호가 만들어질 당시, 시스템의 램은 4K에 불과했다. 따라서 단 1K의 메모리라도 줄여보기 위해 고안해 낸 방법이 날짜의 연도를 뒷부분 2자리 숫자만 표기하기로 한 것이고, 그것이 Y2K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즉, 1999일 경우, 99란 숫자만 표기해도 컴퓨터는 알아서 1999년으로 표기,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장 내년인 2000년부터 시작된다. 즉 지금처럼 끝의 두 자리 00만 입력한다면 2000년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1900년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컴퓨터상의 오류를 ‘밀레니엄 버그’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 밀레니엄 버그는 2000년이 되기 전부터 심시치 않게 발생하고 있어 2000년의 재앙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1998년 5월에는 미국 통신위성 갤럭시 4호에서 버그가 발생, 미국 전지역에서 호출통신과 데이터 통신이 거의 마비, 항공, 금융, 통신 등 전 부분에서 심한 혼란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통조림 공장에서는 보존기간 표시를 하는 도중 2000년이 넘어서자 1900년으로 인식한 컴퓨터가 새로 만들어진 통조림을 100년이나 된 통조림으로 오인, 폐기처분 명령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Y2K 버그로 인한 사건들이 아니라 Y2K를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다. Y2K를 종말론과 결합시키는 재앙예언가(DOOMSAYER)들은 2000년 버그가 현대 사회의 종말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돈을 한꺼번에 인출하기 때문에 주식시장은 무너지고 은행은 문을 닫게 되어 모라토리엄 상태에 이를 것이고, 전기와 전화선이 끊겨 통신이 두절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들이 어찌나 강하게 경고했는지 최근 한 IP 업체에서는 17년 이상 경력의 39명 프로그래머들을 대상으로 Y2K의 심각성을 1(전혀 문제되지 않음)에서 5(모라토리엄의 상태)까지 점수를 매겨보았더니 그 평균점수가 3.96점. 즉, 밀레니엄 버그는 주요시스템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또한 전문가들은 종말원인으로까지 부상한 Y2K 신드롬에 의아해하고 있었다. Y2K 문제는 하드웨어의 저장능력이 제한돼 일어난 경우라 과거에도 종종 발생해 왔다는 것이다. 즉, 과거에는 두 자리로도 부족해 한자리로 날짜를 지정했기 때문에 1970년대가 지나 1980년대가 다가왔을 때,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해왔고 이런 버그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면 늘 접해 왔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재앙 예언가들의 말대로라면 지금까지 세상은 여덟이나 아홉 번 정도는 족히 망했을 거라고 덧붙였다는 것이다.
물론 Y2K 버그는 고쳐져야 한다. 이 버그를 고치는 것에 상당히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직들은 이미 이 버그를 해결했거나 해결과정에 있다. 또한 컴퓨터 전문가들은 어느 누구도 재앙예언가들이 경고하는 Y2K로 인한 혼란이나 종말은 오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2000년 1월 1일이 되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밀레니엄 버그’는 세기말 작은 혼란에도 쉽게 흔들리는 현대인들의 기우(杞憂)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외계인과의 동거

TV 외화시리즈 [X-파일]을 시청하신 분들이 꽤 많을 줄 안다. 이 [X-파일]을 보면, 심심찮게 등장하는 것이 있다. 바로 ‘외계인’인다. [X-파일]뿐 아니다. 최근 개봉된 영화에서도 줄줄이 외계인이 등장한다. <화성침공>, <에일리언4>, <맨인블랙>, <콘텍트> 등이 그것이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외계인들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각기 다른, 때로는 침략적이고, 때로는 공포스럽고, 때로는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외계인에 대한 모습이 한 가지로 정해지지 않은 것은 그만큼 외계인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하겠다.
그러나 상상만으로 그치던 외계인과의 조우(遭遇)가 곧 이루어질 듯싶다. 이것은 최근 우주과학의 발달과 미국이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외계 탐사로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 내의 행성에도 물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밝혀짐과 동시에 지난 여름에는 지구에 떨어진 별똥별 조각을 분석해 본 결과 생명체의 초기 형태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즉, 외계에도 생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이미 확보된 상태라는 말이다.
이제 외계인의 존재에 대해 유무를 가린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외계인을 만날 것인가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과거 일부 UFO 전문가들이나 SF 소설을 즐기던 사람들만의 영역이라 생각했던 외계문명. 그 알려지지 않은 문명에 대한 증명되지 않은 설(說)들이 미래에 어떤 단계에 가서 진실로 밝혀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 떠도는 설중 몇 개만 소개해 보겠다.
첫 번째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는 외계인들이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황당한가? 그럼 웃으면서 끝까지 일어 보도록.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 실현된 아폴로 프로젝트 달 탐사를 통해 외계인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텍사스 주를 통해 외계인이 지구에 왔었다는 명백한 증거를 국민들에게 발표하기 직전 암살당하고 말았다.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들어선 존슨 정부는 베트남전에 뛰어 들었고 이로 인해 미국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따라서 아폴로 계획도 2039년 이후로 미뤄지고 만 것이다.
케네디 암살 전 발표된 외계관련 성명 중 눈길을 끄는 발표가 있다.
“우주의 지성 생명체들이 달의 뒷면에 중계 기지를 건립해 지구로 오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정면 돌파하고 대결해야 한다.”(1963년 칼세이건 NASA 고문 천문학자)
두 번째로, 우리가 매일 쳐다보는 달에는 우주인들의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한국에서도 UFO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 동호인 사이에서도 주장된 바 있다. 여기에는 아폴로가 달에 착륙할 때 촬영된 사진에 외계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괴비행물체가 출현, 이를 증명하고 있다.
미국 항공 우주국(NASA)에서 일했던 과학자들을 포함한 일단의 미국인사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달에 고등존재에 의해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인공 구조물들이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이들의 주장은 ‘엔터프라이즈 미션’이라는 명칭하에 NASA 및 구소련 우주 탐사자료를 토대로 4년 동안 추적, 사실로 밝혀졌다.
세 번째, 우리는 현재 알게 모르게 외계인들과 함께 살고 있으며, 향후 미래 어느 시기가 되면 그 외계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맨인블랙>인 줄 아나…’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외계인 동거설은 신비주의자들이나 기인(奇人)들에 의해 실제 신빙성을 가지고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모르지 않은가. 지금 당신의 배우자가 외계인일지….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현재까지 이룩한 문명이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 우주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과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나 이상 현상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갖가지 주장들에 대해 이것을 사실이라는 견지에서 다시 한번 숙고해 보길 바란다.
이를 통해
인간은 스스로가 갖고 있는 ‘유일성을 근거로 한 교만과 편견’을 불식하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인식을 보다 넓게 확대할 수 있길.

워터쇼크를 대비하라!

우리나라는 봄만 되면, 가뭄에 시달린다. 올 봄만 해도, 5개월 동안 가뭄앓이를 했지 않은가.
겨우내 가뭄으로 인해 낙동강의 수질은 사상 최악의 수준인 4급수로 떨어질 위기까지 맞았었다. 낙동강뿐만 아니다. 한강, 금강, 영산강 유역도 최근 4개월 동안 강수량이 1년전 같은 기간의 30% 수준에 불과해 상대적으로 상수원 등의 수질은 점차 떨어지고 있다. 상수원의 수질이 떨어졌으니, 수돗물의 수질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하긴 요즘 세상에 수돗물을 그냥 먹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말이다. 그나마 수질 걱정할 수 있는 지역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고지대 지역에서는 아예 수도조차 공급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연초부터 말 그래도 ‘물’ 비상에 걸렸던 것이다.
비단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만은 아닌 것 같다. 중동지역은 9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을 겪고 있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수자원국장이 3월 13일 영국 BBC와의 인터뷰에서 “가뭄 때문에 요르단에 대한 물공급을 줄이겠다”고 밝혔고, 이에 질세라 요르단 측도 “요르단도 가뭄을 겪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고통을 나누고자 요구할 권리가 없다”며 “당연히 물을 내놔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점차 “물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물전쟁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 세계 물회의에서는 유네스코와 세계기상기구(WMO)가 앞으로 25년 안에 중동-미국 등의 심각한 물부족 사태를 예견했으며, 현재 25개국이 물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2025년경에는 이러한 국가가 34개국으로 늘어날 전망이며, 물부족으로 고통받는 인구도 2050년에 가면 세계 인구의 13~20%인 10억~24억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하니 말이다.
이제 오일쇼크(OIL-SHOCK)보다 워터쇼크(WATER-SHOCK)를 걱정해야 할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20~30년 전만 해도 “돈으로 물을 산다”고 하면 코미디에나 나올만한 이야기였지만 생수(生水)를 사는 것이 현대인의 일상이 되어 버리지 않았는가. 환경오염 등으로 인해 먹을 수 있는 물이 줄어든 까닭이다. 가뜩이나 지구온난화현상으로 인한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이때, 환경오염까지 발생, 물부족 현상을 가속화시킨다면 워터쇼크를 염려하는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만약 워터쇼크 시대가 찾아온다면 그것은 오일쇼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재앙을 초래할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기름은 대체에너지를 갖고 있지만, 물은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오는 2000년대에는 물값이 석유값보다도 더 비사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물로 인한 전쟁도 경고하고 있다.
더군다나 유엔에서는 우리나라를 물이 부족한 나라로 분류하고 적절한 대책마련을 경고하고 있으니, 곧 우리나라도 물을 수입해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될지 모른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이웃마을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개울에는 군데군데에 ‘물챙이’라는 허술한 둑을 만들었다. 이 ‘물챙이’는 윗마을에서 버린 오물이 아랫마을로 직접 흘러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인데, 여기에 걸리는 각종 오물은(오물이래 봤자 나뭇가지 정도지만) 나중에 건져서 소각하기도 하고 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다. 환경오염이라는 말도 없었을 시대에도 이렇듯 수질을 보호했던 조상들의 지혜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미래의 워터쇼크를 대비하기 위해, 우리에겐 ‘물챙이’의 지혜가 필요하다. 풍족할 때, 아껴쓰고, 깨끗하게 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 조금만 신경쓰고 앞날을 대비하는 ‘물챙이’의 지혜로 물과 더불어 살아갈 때, 우리에게 ‘워터쇼크’란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인간 수명의 한계

최근 어떤 인류학자가 발견한 지구상 최장수 노인은 케냐의 한 여인으로 추측건대 130~140세사이라고 한다. 이 여인의 건강은 노화로 인한 실명을 제외하곤 상당히 좋다고 한다. 아직까지 아들과의 농담도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고 하니 ‘원더우먼’이 따로 없다.
130세. 정말 놀라운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21세기에는 130세의 나이가 더 이상 해외토픽감은 되지 않을 듯싶다. 평균 수명 100세 시대가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00살 이상의 노인의 숫자가 10년 새 무려 두 배 이상인 6만여 명을 기록했고, 장수나라 일본도 1만 명을 돌파해 더 이상 ‘100세’가 특별한 몇몇 사람만이 누리는 특권은 아니게 된 모양이다.
이러한 100세 인구의 증가원인은 의학의 발전과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 그리고 식생활과 위생의 개선 등이 그 원인이므로, 21세기에 평균수명이 늘어날 것임은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이에 편승, 전문가들은 ‘150세까지도 수명을 늘릴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측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70세. 여성의 평균수명은 77.7세임을 고려해 볼 때 무려 2배 가까이 오래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과연 평균수명 150세의 시대가 올 것인가.
우리에게는 한 세대를 구분하는 무의식의 시간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100년이다. 100년을 기준으로 세대와 세대가 교체되었고, 이러한 교체의 힘에 의해 새로운 사상이, 새로운 과학이 싹터 왔고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00년은 바로 인류의 삶을 끌어온 무의식의 시간단위가 되어 왔다.
우주의 섭리를 말없이 안고 있는 100년이라는 시간.
이 100년을 넘어서 150년 가까이 산다는 것은 그리 반길 만한 얘기는 아니다. 현생을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 100년이라는 시간이 상당히 길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전생을 거듭해 살아왔음을 감안해 볼 때, 이 100년이란 시간은 한없이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여러분 모두는 100년이 아닌 몇 천 년 동안 살아온 하나의 개체이며,
현생은 단순히 ‘진화의 과정’일 뿐,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기에 100년 단위로 삶을 마친다 하지라도 멀리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죽는 것이 아닌 새로운 개체로 ‘진화’해 다시 태어나 또 다른 100년을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한다 해도 새로운 병은 계속해서 인간의 수명을 위협할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자연의 위협 속에서 우수한 종자만이 살아남게 되고, 또 그 종자들이 일군 백년의 역사속에서 인간이 문명이 발전해 왔고, 발전해 갈 것이며 또 그것이 정당한 ‘이법(理法)’임을 깨닫길 바란다.
자연의 이법을 어기고 의학에 의지해 수명을 강제적으로 ‘늘려’놓게 될 때, 이는 자연에 대한 면역기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 오히려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게 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될지 모른다.
분명, 21세기는 평균 수명 100세의 세기가 될 것이다. 이제 100세라는 나이가 갖는 희귀성은 감소해, 누구나 살려고만 하면 살 수 있는 시간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닐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수명이 길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닌, 그 시간동안 어떻게 살았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반성하고 계획하는 알찬 삶을 꾸려나가시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천수(天壽)를 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름다운 서해안 갯벌

서해의 아름다움은 갯벌에서부터 나온다. 갯벌에 한발 한발 밀어넣을때마다 느껴오는 질퍽한 바다감촉은 끈끈한 한국인의 정맛을 되찾게 해주기에 많은 관광객들이 갯벌을 찾고 있다. 이는 사람만 느끼는 감정은 아닌가 보다. 때마다 찾아오는 수만 마리의 철새가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최근들어 철새떼가 서해안 갯벌에 자리잡고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광경이 보기 힘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철새의 수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추세이다.
무엇이 서해안 갯벌을 망쳐 놓았는가. 지난 70년대 이후 진행된 경제개발계획에 의해 갯벌은 점차 간척대상지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그 질퍽했던 갯벌은 척박한 토지로 변해야만 했고, 갯벌을 끼고 돌던 호수는 썩은 내 나는 물로 변해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는 서해안 갯벌의 중요성을 예측하지 못한 과거 정부관계자들의 졸속정책으로 빚어진 어처구니없는 결과이다. 몇만 년 동안 형성되어온 ‘천혜의 땅’을 단 십여년 만에 황무지로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 아름다웠던 서해안 갯벌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환경파괴현장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서해안 갯벌은 북해연안, 미국 동남부와 더불어 세계 3대 갯벌로 꼽히는 중요한 자원으로 세계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갯벌이 무슨 세계적인 가치?’하고 의아해하신다면, 아래 세 가지 사항을 명심하시기 바란다.
첫째, 서해안 갯벌은 도요새, 물떼새 등 ‘국제환경대사’라고 불리는 새들의 경유지로 유명하다. 철새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잘 보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에 그 의미가 상당하다.
둘째,
갯벌은 정화작용을 하며 지구의 온난화작용을 저지하는 환경파수꾼이다. 그 어떤 기계장치로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셋째, 대부분의 어류와 해양생물들의 고향이 바로 갯벌이므로 갯벌을 뭍으로 바꾼다면, 우리나라 어획량의 상당량이 감소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얘기다. 이렇게 갯벌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서해안 갯벌의 대부분(약 98%) 지역이 간척지 개발이 진행중이거나 매립계획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갯벌보다 몇 만 평의 토지가 중요하다는 엄청난 생각을 당장 바꾸지 않으면 필시 머지 않은 미래에 돌아올 갯벌매립의 대가를 고스란히 받게 될 것이다.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보물이라 떠받들어도 시원찮은 서해안 갯벌을 아무 의미 없는 ‘뭍’으로 만드는 황당한 작업을 그토록 열심히 벌이고 있다니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지금에라도 늦지 않았으니 갯벌개발 사업을 당장 그만두시길 바란다. 그렇지 않을 경우, 21세기 한국은 서해안 갯벌매립에 따른 재앙으로 전국토가 병들어, 금수강산의 시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저도시에서 허니문을

“심해 깊숙이 파고드는 태양빛에 눈을 뜬다. 창밖으로는 해저뜰에서 키우고 있는 해초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오늘은 해저터널을 통과하는 셔틀버스는 타고 지상에 나가 쇼핑을 할 예정이다. 그이와 산책나갈 때 사용할 산소통을 몇 개 더 장만해야겠다.”
‘갑자기 웬 SF 소설?’하시며 의아해하는 분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신혼의 모습은 머지 않은 미래에 나타날 우리의 ‘일상’이다. 잠수정 속에서의 해저생활은 영화 등을 통해 여러번 공개된 바 있어, 선상생활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음을 잘 알고 계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저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분들이 꽤 많은 줄 안다. 아마 ‘해저생활’을 체감하지 못해서이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해저생활’도 ‘육상생활’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가 21세기 ‘해저생활론’을 주장하는 것은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선진국 사이에서는 이미 지상공간의 한계성을 깨닫고 한정된 육지를 최대한 이용해 보자는 취지에서 다각도의 건축물이 제작되거나 구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에서는 ‘주거빌딩’이라는 개념이 등장, 뉴욕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거인 아파트들이 속속 세워지고 있으며, 곧이어 63빌딩의 3배가 넘는 규모의 주거빌딩을 세울 예정이라고 발표까지 한 바 있다.
일본 도쿄의 다이세이 사는 갈매기 모양으로 디자인된 ‘조나단 리빙스턴 시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 ‘인공섬’을 건설하고 있다. 4억5천만 달러나 투자될 예정이라는 갈매기모양의 ‘인공섬’뿐 아니라 해저 엔터테이먼트 계획도 포함하고 있어, 거대규모의 쇼핑 아케이드와 컨벤션센터, 요트계류장, 수족관 등을 갖춘 천 개의 객실이 있는 호텔, 그리고 세계 최초의 떠다니는 관광 잠수함 기지까지 들어설 예정이라고 하니, 이쯤되면 21세기 새로운 해저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그들의 의지가 참으로 놀랍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선진국들이 잘나가고 있다 해서 기죽을 필요 없다. 우리나라도 1980년대 후반부터 이 좁은 땅덩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미래 공간 활용’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고, 이데 따른 계획도 발표되고 있다.
삼성물산건설부문은 부산과 후쿠오카를 잇는 총연장 113km의 ‘한일 수중투명터널’ 계획을 발표해 세간에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이 터널은 프랑스와 영국을 잇는 도버터널이나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를 연결한 세이칸 터널과는 달리 수심 30m의 수중에 고강도 섬유질로 투명창을 설치해 바닷속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된다고 하니, 이 정도면 해저개발에 그리 늦은 편만은 아니지 않은가.
유독 ‘땅 콤플렉스’가 강한 나라지만,
우리는 땅보다 넓은 바다를 갖고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해저생활이 가능하기까진 상당시간이 지나야겠지만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려선 안 된다. 살기 좋은 바다를 이웃 일본에게 빼앗기기 전에(이번 한일어업협정을 보면 화부터 난다) 하루빨리 해저개발계획에 참여, 삼면이 바다인 해양국가로서의 면모를 자랑해 봄이 어떨까.
미래는 바다의 시대. 대한민국에서 해저를 정복할 ‘제2의 해상왕 장보고’의 탄생을 기대해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미래예측 능력

21세기가 되면 기업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21세기가 되면 경제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실제 경제학자들이나 경영 전문가들이 내리거나 또는 기업과 경제 분야에 정통한 미래학자들이나 문명과 역사에 대한 조망을 시도하는 문명사학자들이 판단할 문제지만, 그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미래느낌’을 바탕으로 향후 전개될 기업의 미래를 한번 예측해 보고자 한다.
향후 기업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은 무엇일까.
과거 경제활동은 ‘자본’ ‘토지’ ‘노동’의 3요소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나 이것만을 경제활동의 요소로 생각하는 경제학도들은 거의 없을 줄 안다. 보는 관점에 따라 ‘경영’, ‘기술’, ‘정보’, ‘인재’ 등의 요소를 추가하기도 한다. 그만큼 현재의 경제 활동을 이끄는 요소가 다각화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필자는 ‘미래예측 능력’이야말로 미래 기업사회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요소라고 밝히고 싶다. 이것은 기업인뿐 아닌 정치인들도 갖추어야 할 소양이다.
여기서 미래예측 능력이란, 미래를 예측하고 판단, 그리고 그에 따라 결단내릴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 능력은 동적(動的)인 능력으로 한편에서는 기업과 경제가 반드시 갖춰야 하는 미래변화에 대한 위기 대응 능력 또는 현실개척 능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수출품목이 된 반도체. 한국은 지금 반도체 생산 국가 중 1,2위를 다투는 반도체대국이 되었지만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 반도체대국이 될 것임을 예상하는 나라는 없었다. 한국이 일본과 유사한 중공업 우선주의를 추진하던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한국의 선구자적 비전을 가진 기업인들이 상당한 위험 부담을 지고서 이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희망없는 모험’이라 판단했던 이 엄청난 모험을 통해 한국은 반도체 신화를 만든 종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이다.
반도체 경기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 위축되기 시작할 때 관련업계와 국민들은 심한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된다. 그 당시 반도체는 ‘본전치기도 힘든’ 장사였으므로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반도체 경기가 향후 다시 반도체 부흥시기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가 아니다. 우리가 80년대, 90년대 반도체 호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제2의 반도체, 제3의 반도체 상품을 개척하고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제2의 반도체 신화는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반도체 분야에서 경제적 타격을 받기 시작하자 도미노현상처럼 빠르게 파급되어 결국 우리경제가 붕괴되고 말았다.
우리는 1980년대 초기에 보여 주었던 위대한 미래예측 능력은 어디로 가고 지금의 경제공황을 맞게 된 것인가.
이는 국가경제와 국민의 기업들을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한 정부의 정보력 부족과 스스로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기업들 모두의 책임이라 할 것이다. 결국
한국은 미래예측 능력 부족으로 IMF를 맞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다.
인간이나 기업, 더 나아가서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향후 미래를 살면서 더욱더 ‘미래예측 능력’을 절실히 요구하는 환경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독일이 지난해 외무부와 내무부 등과 같은 정부의 정식부서로서 미래부를 신설한 것에 교훈을 받아야 한다.
우리 스스로가 국가적으로 또는 기업에서, 더 나가서는 개인적으로 늘 미래의 변화에 대해 긴장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 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특히 국가에서는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시대를 대비하여 정부의 정식부서로 미래부나 국가기획부를 신설하고 정치나 경제 그리고 통일, 사회개조, 국민성의 고급화 등을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경주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향후 하나의 민족국가로서 생명을 여위하면서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과 토지와 노동 그리고 인재, 경영, 기술 등과 함께 스스로 미래를 예견하는 예측능력을 배가시킴으로써 격동하는 경쟁의 바다에서 살아남고 국가와 민족발전에 기여하는 기업보국(企業報國)의 임무를 다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