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운주산 비암사

醉月 2011. 2. 4. 12:27

느티나무 아래서 아미타부처를 만나다

운주산 비암사

먼눈바라기만 해도 다가가 안기고 싶은 나무가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정자나무라고 부르는, 오래된 마을의 동구에 선 느티나무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그 나무는 당산나무이기도 합니다. 마을의 수호신입니다.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그 나무를 보며 ‘잘 다녀오겠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을 테고, 무사히 다녀와서는 ‘잘 다녀왔습니다’하고 속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혹 나그네가 마을을 찾을 때도 그 나무를 보며 매무새를 고쳤을 것이고, 스쳐 지나는 길이라면 땀방울을 식히며 다리쉬임을 했겠지요. 

느티나무가 정자나무로 혹은 신목(神木)으로 기림을 받은 이유에 대해서는 상식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선 동구에는 으레 마을을 감싸며 흐르는 개울이 있게 마련인데, 축축한 곳을 좋아하는 느티나무의 생리와 궁합이 맞습니다. 큰물이 날 경우 둑을 튼튼하게 해 주는 역할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거기에다 오래 살기까지 합니다. 현재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살피는 나무만도 열다섯 그루나 됩니다.

▲ 느티나무가 사천왕처럼 객을 맞는 비암사 초입.

느티나무는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을 어루만져 줍니다. 봄이면 하늘이 비치는 연록색 잎으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심신에 활력을 줍니다. 여름이면 짙푸른 잎으로 서늘한 그늘을 드리웁니다. 은근하게 노란 가을 단풍은 차분하게 겨울을 준비하게 하지요. 그리고 겨울, 잎 다 내려놓아 허허로운 모습은 열심히 뿌리고 거두었으니 겨우내 푹 쉬라고 등을 두드려 줍니다.

먼눈으로 느티나무를 보면 왜 이 나무가 신목(神木)으로 기림을 받는지를 쉽게 알게 됩니다. 너무 나이가 들어 가지가 성하지 않은 경우가 아니면 거의 둥근 부채 모양인데, ‘우주나무’로 딱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을 볼라치면 하늘 아래 작은 하늘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옛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딱히 의식을 하지 않고도 하늘과 소통하는 통로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절 찾아 가는 길에 느티나무 얘기가 길었습니다. 까닭인즉, 비암사와 첫 대면을 하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느티나무가 너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 비암사 가운데 마당. 극락보전과 대웅전이 약간 비껴앉아 있다. 후대에 선 대웅전의 낮춤이 아름답다.

비암사는 널리 알려진 절이 아닙니다. 현존하는 절 자체의 존재감으로 알려진 절도 아닙니다. 국보 제106호 계유명 전씨 아마타불삼존석상(국립청주박물관 소장), 보물 제367호인 기축명 아미타여래 제불보살석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368호 미륵보살 반가석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이 절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현재 절에는 이들 문화재들의 조악한 플라스틱 모조품만 있습니다. 발견 당시 절이 워낙 쇠락한 상태였고, 보존의 편이성 때문에 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므로 이를 시빗거리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의미가 거세된 박제화된 문화재의 발견지였다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본질적으로 절은 불상이나 건물 구경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국보급 문화재여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이나 봉정사 극락전이 세인의 찬사를 받는 것은 그것이 국보이고 고건축의 걸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지금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살아있는 건물로 제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보존의 중요성만을 내세워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다거나 통째로 옮겨서 박물관에 보관한다면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금강경에 이르기를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면, 이는 사도를 행함이니 여래를 보지 못할 것(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이라 했습니다.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이 말은 진리일 것입니다. 절은 심란(心亂)을 잠재워 형상 너머의 본질을 보는 곳입니다. 불교 문화재는 문화재 일반의 의미와 다른 특수성이 있습니다. 결코 보존의 중요성을 가벼이 여겨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불교 문화재의 보존 가치와 종교적 구실의 중요성이, 양립 가능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 대웅전의 심우도 벽화. 모든 존재는 깨닫고 태어나, 진흙탕을 걷다가 깨달음의 세계로 돌아간다.
비암사는 지역민들이 백제재건운동의 상징적 사찰로 여기는 절입니다. 앞서 언급한 계유명 전씨 아마타불 삼존석상에 “전(全)씨들이 마음을 합쳐 아미타불과 관세음, 대세지보살상을 삼가 석불로 새긴다. 계유년 4월15일…중략…목(木) 아무개 대사 등 50여 선지식이 함께 국왕, 대신, 7세(七世 ) 부모의 영혼을 위해 절을 짓고 이 석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향토사학자들이 1983년부터 4월15일에 백제 유민들의 혼을 달래는 제를 지내기 시작했고, 1985년부터는 백제대제라는 이름으로 지역 문화제인 도원문화제의 개막 행사로 봉행한다고 합니다. 이 또한 지역 문화 정체성을 위한 대단히 중요한 행사이긴 하나 비암사의 현존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암사의 창건 시기와 창건주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타불 삼존석상에 기록된 계유년을 기준으로 삼으면 절대 연대를 673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확정하기는 힘듭니다. 이미 존재하는 절에 아미타삼존상만 새겨서 모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현재 극락보전 앞 안내판에 통일신라 말 도선 스님이 창건했다고 적혀 있지만 후대의 가탁인 것으로 보입니다.

비암사(碑岩寺)라는 절 이름도 어디에서 연유했는지 정확히 전해오는 바가 없는데, 1960년에 황수영 박사가 극락보전 앞 삼층석탑에 모셔져 있던 아마타불 삼존석상을 비롯한 ‘비석처럼 다듬은 돌’에 새겨진 불보살상을 발견하면서 비롯됐다는 추정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의현 편에 ‘운주산(雲住山)에 운점사(雲岾寺)가 있다’는 기록을 근거로 원래 이름을 운점사(雲岾寺)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운점사(雲岾寺)와 현재의 비암사가 같은 절이었는지를 확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실제 지형을 보면 현재의 운주산(460m)은 비암사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다 조천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 비암사는 호서정맥의 가지 줄기에 속한 금성산(418m) 남서쪽 자락에 자리해 있습니다.

어쨌든 비암사는 1,300년이 넘은 고찰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고, 그 연원을 밝히는 데 아마타불 삼존석상이 절대적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이 그것이 현재 비암사의 존재 의미와는 실제적 관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설사 그것이 절에 보관돼 있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게 마련이고, 현재 그것이 이 세상에 어떤 의미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이태준 선생의 <무서록>을 다시 읽다가 참으로 나를 부끄럽게 하는 글을 만났습니다. 그 동안 절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근거 없는 전설이나 문헌 자료를 앵무새처럼 주워섬긴 태도를 심각히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된 글이었습니다. 일부를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좋다. 자연에 대한 솔직한 감각을 표현하라. 금강산에 어떠한 문헌이 있든지 말든지, 백두산에서 어떠한 인간의 때 묻은 내력이 있든지 말든지, 조금도 그 따위에 관심을 기울일 것 없이 산이면 산대로, 물이면 물대로 보고 느끼고 노래하는 시인은 없는가? 경승지에 가려면 문헌부터 뒤지는 극히 독자(獨自)의 감각력엔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 산신각에서 바라본 비암사의 뒷모습.

금강산은 금강산이라 이름 붙여지기 훨씬 전부터, 태고 때부터 엄연히 존재했던 것이다. 옥녀봉이니 명경대니 하는 이름과 전설은 가장 최근의 일이다. 본래의 금강산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그야말로 ‘무근지설(無根之說)’이다. 소문거리의 ‘모델’로서의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니 12폭포니 하고 계산된 삽화로서의 금강산을 보지 못해 애쓸 필요가 무엇인가…‘

언감생심 예술가연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절 탐방을 하면서 절의 자연미에 대한 육친적 느낌을 전하려 했던 나의 소신과 거의 일치하는 생각이지만, 반에 반도 그에 미치지 못했다는 열패감 때문입니다.

다시 비암사의 첫 인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비암사의 느티나무는 일주문이고, 천왕상이고, 살아있는 절의 역사였습니다. 나무 옆 안내판의 설명대로라면 나이가 800살이 더 되는데, 고려 고종 대인 1200년대부터 살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절 마당의 고려 양식 3층석탑(도유형문화재 제119호)과 함께 절의 대대적 중창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이름난 도요지였던 이 일대(전의면 금사리)는 모조리 왜군들에게 끌려갈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고, 절 또한 화를 입었는데, 이 느티나무만은 멀쩡했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왜군들도 외경을 떨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왜군들은 그 외경의 외연을 인간에까지 넓히지는 못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의 비극은 그것에서 비롯됩니다.
자연에서 신성을 보고 경이를 느낄 때, 그 마음자리가 진정한 극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비암사 느티나무에서 아미타부처님의 현신을 봅니다.


▲ 극락보전과 대웅전 사이로 바라본 산신각.
연기군 전의면 다방리에 있는 비암사는 인적과는 거리가 먼 산사다. 교툥도 대단히 불편한 곳이지만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수도권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남천안 나들목에서 나와 1번 국도를 타고 공주 방면으로 가다가 전의면에서 691번 지방도로 10km쯤 달리다 보면 금사초등학교 앞에서 안내팻말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다시 2m 정도 가면 비암사를 1.3km 앞둔 좁다란 숲길이 나온다. 절 앞까지 포장이 되어 있고 주차시설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조치원에서 하루 5회 전의면을 거쳐 다방리로 가는 버스가 있다.

비암사의 사실상 장점인 약점은 주변에 식당이나 숙박시설이 없다는 점이다. 끼니는 전의면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 특별한 음식을 원하면 비암사 입구에서 조치원쪽으로 4~5km 쯤 가면 고복저수지가 나온다. 도가네식당의 민물매운탕이 유명하다. 비암사는 관광이나 답사 개념으로 찾을 절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연 속에 몸 마음 모두 놓고 푹 쉬고 싶을 때 찾으면 더없이 좋을, 깊은 산 속 절이다.
연기금사가마골(http://gumsa. go2vil.org, 011-9928-6546)

비암사 초입 금사리는 마을 전체가 도요지여서 사구실 또는 사기소로 불렸다. 1993년부터 도자기마을의 옛 전통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마을 초입에 숙소를 겸한 도자기체험관을 세워 놓았다. 폐교가 된 금사초등학교를 체험관으로 꾸며 놓았고 그 옆에 가마가 있다. 도자기 체험 외에도 다양한 농촌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 연기향토박물관
비암사 아랫마을인 청라리에 연기향토박물관(관장 임영수)이라는 장승 안내판이 나온다. 한옥을 개조한 전시실에 연기 지역 옛 도요지에서 나온 도자기를 비롯,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근현대 생활용품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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