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강인욱_초원에서 한반도까지_03

醉月 2011. 2. 3. 09:32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1> 동아시아를 제패한 초원의 음식 '만두'

-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요나라때부터
- 초원민족이 아시아 제패 과정, 중국·한국에 퍼져
- 고려가요 '쌍화점', 충혜왕의 기록 등 만두 인기 방증
- 초원제국 성장하며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초원, 이탈리아 음식 라비올리까지 명맥

 
  요나라 무덤벽화에 그려진 식당 모습. 상 위에 만두를 찌는 데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큰 찜통 모양의 요리기구가 있다.
요즘 만두 전문 중국음식점에 가면 만두가 제갈공명의 발명품이라는 설명을 볼 수 있다. 원나라 때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에 제갈량이 현재의 중국 남서부 운남성과 미얀마 지역을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억울하게 죽은 현지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사람 머리 모양으로 밀가루 반죽을 하고 그 안에 고기를 채워넣어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이 말이 맞는다면 만두는 중국에서 기원한 셈이다. 하지만 만두는 우리나라와 중국뿐 아니라 유라시아 초원지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과연 삼국 중에서 가장 약체였던 촉나라를 이끌고 전략을 짜기도 바빴던 제갈량이 만두를 발명했다는 말은 믿을 수 있을까?

■쌍화점에 간 여인들과 회회아비

 
  상 위에 만두 형태의 음식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고전문학 속에서 만두에 대한 대표적인 기록은 고려가요 '쌍화점'이다. '쌍화점'은 "쌍화점(雙花店)에 쌍화(만두)를 사러갔더니 회회(回回)아비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고려 여인이 회족의 만두집 주인과 정분이 나는 것을 자랑하니 또 다른 여인이 자기도 가보고 싶다며 부러워하는 내용이 다소 적나라하게 묘사돼 있다. 몽골의 침략 이후 국제화됐던 고려사회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하고, 또 만두가 당시 고려에서 인기 있는 음식이었던 것을 말해준다.

여기서 회회아비는 중국화된 무슬림인 회족(回族)을 말한다. 회족은 당나라 이래로 현재 중국 서북 지방과 중앙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는 돌궐(투르크)계의 위구르 족을 말한다. 이들을 회(回)라고 쓰는 이유는 이슬람 특유의 아라베스크 문양을 본 딴 것이다. 현재도 회족은 중국 서북부에 남한보다 조금 더 큰 영토의 자치구를 이뤄 살고 있다. 현재 중국 안에서 살고 있는 회족은 형질적으로는 많이 한화(漢化)되었지만, 이슬람교와 종교사원(모스크·淸眞寺)을 중심으로 고유 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다. 쌍화점의 회회아비도 당시 원나라의 한 축을 이뤘던 회족일 것이다. 국제화되었던 고려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문물과 함께 음식문화도 건너왔고, 회족이 경영하던 만두집도 인기였던 것 같다.

회족들이 중국사에 끼친 영향은 대단해서 당나라 시절 양귀비를 사랑했고, 반란을 일으켰던 안록산(알렉산더의 중국식 표기)도 회족계였다. 특히 중국의 회족 중에는 마(馬)씨 성이 많은 편인데, 마호메드 또는 무하마드의 첫 자를 땄기 때문이다. 회족의 독특한 음식문화는 중국에 많은 영향을 미쳐 지금도 중국에 가면 사방에 '청진식(淸眞式)' 양고기·만두·국수를 파는 식당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듯 고려가요에 등장한 회족은 단순한 외국인 이주민이 아니라 동서문명의 발전을 주도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 해도 고작 만두집 아저씨와 정분이 난 이야기가 유행하고, 조선시대까지 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충혜왕, 만두 도둑을 참하다

 
고려시대에 만두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고려사' 충혜왕 4년(1343년)의 기록에는 어떤 도둑이 궁정의 부엌으로 들어가 만두를 훔친 것이 발각되자 왕이 크게 노해 그를 죽이라 명령했다는 구절이 있다. 도대체 그 도둑은 얼마나 간이 컸기에 감히 왕이 먹는 만두를 훔칠 생각을 했으며, 또 일국의 왕이 고작 만두 몇 개로 사람을 죽였을까. 충혜왕이 사람을 죽인 이유는 단순히 음식을 훔쳤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기록에는 도둑이 그냥 음식을 훔친 것이 아니라, '만두'라고 절도품목(?)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만두 도둑도 궁정에 출입하던 사람이었을테니 단순히 배가 고파 훔쳐먹었을 리는 없다. 이 만두는 왕이 특별한 의식에서 먹었던 음식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실제로 '고려사'의 충렬왕 5년(1279) 기록을 보면 충렬왕이 새로 궁전을 짓자 회회사람들이 새 궁전에서 왕을 위한 연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요나라 때 벽화를 보면 만두는 잔치나 의식에 꼭 등장하는 음식이다. 실제로 '요사'와 '원사' 등의 기록을 보면 요나라 황실이 송나라 사신을 맞이한 연회에서도 만두가 등장하며, 원나라의 제사에도 만두가 등장한다. 만두는 초원에서 발원한 유목 국가들의 궁정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인 셈이다. 고려시대 잔치에도 회족들이 들여온 만두가 올라왔을 것이고, 만두 도난 사건은 단순 절도사건이 아니라 왕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만두 속에 담긴 초원과 정착의 만남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만두 제품의 포장지. 이 만두의 상표는 '빙하'이다. 만두가 겨울철에 러시아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임을 알 수 있다.
'삼국지'에 나온 대로 만두를 만든 사람은 제갈량이었을까? 여러 정황을 보면 이는 단순한 이야기에 그친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왜냐하면 만두에 대한 이야기는 원나라 때 지어진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만 있을 뿐 정식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삼국지'에 만두 이야기가 적힌 시점은 중국 전역에 이미 만두가 퍼진 원나라 때 이후다. 아마도 만두라는 이름이 만두라는 음식의 발음이 '남쪽 오랑캐의 머리'를 뜻하는 만두(蠻頭)와 비슷했기에 만들어진 이야기 같다.

만두가 언제 탄생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요나라 때부터 초원민족이 아시아를 제패하기 시작하면서, 초원에서 중국과 한국으로 퍼졌다는 점이다. 만두는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유목민이 부족한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위해 곡물을 구해 같이 먹었던 방식이다. 만두는 중세시대에 초원제국의 성장과 함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초원, 더 나아가 이탈리아 음식 라비올리로 이어지면서 유라시아를 제패했다.

실제로 투르크어로 만두는 '만띠'라 한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우리나라 만두 같은 음식은 파오즈(포자·包子) 또는 자오즈(교자·餃子)라 한다. 반면 현대 중국에서 만두(饅頭)는 속에 아무 것도 없는 밀가루 빵을 말한다. 바이칼호수 근처의 몽골계통 민족인 부리야트족은 반대로 중국의 영향을 받아 '포즈'라는 만두를 만들어 먹는다. 러시아를 필두로 슬라브민족이 먹는 만두인 펠메니도 유명하다. 초원지역의 만두는 대체로 고기의 비율이 많고 양고기를 선호하는 반면, 다른 지역의 만두는 상대적으로 채소의 비율이 높다. 최근 러시아에서는 극동의 고려인이 개발한 뻿새라는 새로운 만두가 대유행이다. 뻿새는 만두소로 매운 양념과 채소를 많이 넣은 것으로 채소가 부족한 추운 지방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만두에 새해의 복을 담자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유라시아를 제패한 음식인 만두의 성공 비결은 어디 있을까? 간편하게 요리할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주요 에너지인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골고루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만두를 싸는 만두피는 밀가루(한국의 옛 기록에는 메밀가루를 썼다고도 한다)이니 인간 활동의 주 에너지원인 탄수화물을 공급하며, 만두소는 고기이니 단백질과 지방의 공급원이 된다. 초원은 고기가 풍부한 반면 곡물은 부족했다. 반면에 농경민족인 중국이나 한국은 고기가 부족하니, 모두에게 적합한 음식이다.

또한 봄이 되면 새로 나온 과일·열매 등을 만두소로 활용해 부족한 비타민을 보충하기도 하니, 각 지역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만두가 나올 수밖에 없다. 또 만두는 만들기는 어려워도 먹기는 간편하다. 만두는 만두피를 만들고 속을 다져야 하기 때문에 비교적 손이 많이 간다. 하지만 끓는 물에 넣거나 기름에 튀기면 곧바로 요리가 되는 패스트푸드여서 멀리 여행가는 사람들에게도 적합하다. 러시아에서도 전통적으로 추운 겨울에 가족이 먼길을 떠나면 어머니는 밤새 펠메니를 빚어주었다 한다. 만두는 사방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초원민들의 가족사랑이 숨어 있는 음식이기도 하다.

부산에서 살고 보니 만두를 빚는 가정도 별로 없고, 거리에 만두집도 많지 않다. 아마도 겨울이 상대적으로 따뜻해 만두를 빚어도 장기간 보관할 수 없기 때문에 만두보다는 국밥 문화가 발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 쪽으로 가면 명절에 만두를 빚는 집이 꽤 많다. 만두가 우리나라 명절음식이 된 것은 애정이 듬뿍 담긴 음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곧 설날이다. 21세기 한국은 초원지역처럼 사방을 떠돌아 살게 되면서, 가족과 떨어질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어렵게 모인 가족들과 새해에 만둣국 한 그릇 하면서 가족 사랑과 우리음식 속의 초원을 느껴보자.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2> 투바공화국을 아시나요

 
  투바호수 위의 한 섬에 세워진 포르-바쥔 성. 매우 독특한 모습이다.


- 남한의 배 크기 · 인구 30만명
- 몽골계 민족의 전형적 유목국가

- 스키타이시대 적석목곽분, 황금유물 등 출토
- 알타이 못지 않은 유목문화 자랑

- 푸틴의 강한 러시아 투바 배경 상징화
- 중국과 러시아 영토·역사분쟁 가능성

러시아 남부 시베리아에는 우리나라 백두대간에 비유될 수 있는 커다란 산맥이 가로지른다. 이 산맥의 이름은 사얀-알타이로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을 아우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알타이도 바로 이 산맥의 일부다. 그런데 알타이의 동쪽에는 투바(현재는 티바로 개명)인들의 자치공화국이 있다. 이 공화국에는 알타이 못지 않게 고대부터 내려오는 많은 초원의 유적이 살아 숨쉬고 있다. 하지만 알타이보다 고고학 조사가 덜 진행된 탓에 외부인들이 잘 모른다. 유라시아 대륙 한 가운데 숨겨진 아시아의 진주라고도 할 수 있는 투바공화국은 러시아와 중국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위치와 유목민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20세기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 사라져가는 한 초원국가에 대한 강대국들의 동상이몽

 
  러시아의 공화국 지도 속 투바공화국. 아래쪽 녹색으로 칠한 부분이다.
투바는 몽골계 민족이다. 바이칼 근처의 부리야트, 몽골공화국과 함께 라마교를 숭상하는 독실한 불교국가였다. 비록 그들은 부족 별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서로 다른 나라로 갈라서지는 않았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20세기의 열강과 이데올로기였다. 러시아 시민전쟁 때 이 지역은 러시아 백군의 점령 하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적군이 승리함에 따라 중국과 몽골이 점령하기 시작했다. 볼세비키는 1921년에 탄누-투바(투바공화국의 별칭)라는 허수아비 독립정부를 세웠다. 초대 수상인 돈둑(Donduk)은 불교에 근간한 독립국가를 만들려 했지만 결국 볼세비키가 주도한 혁명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제2차대전이 마무리되던 1944년 공식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다. 남한의 배 크기인 17만㎢에 인구는 해운대구보다 적은 30만 명이 사는 전형적인 유목국가다.

 



 
  약 2500년 전 투바족이 사용했던 황금유물.
몽골처럼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주변국가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투바공화국이지만, 알고 보면 이곳은 초원의 여러 국가가 살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서는 스키타이 시대의 적석목곽분과 황금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돼 알타이 못지 않게 고도로 발달된 유목문화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알타이의 파지릭문화인은 동양계 위주에 서양인이 혼혈된 사람들인 반면, 이 지역 사람들은 순수한 몽골로이드 계통이라는 점에서 유라시아 초원과 아시아를 잇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에 숨어 있는 투바공화국. 하지만 의외로 미국에서 투바는 유명하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손꼽히는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죽기 직전까지 투바의 열렬 애호가로 자청하며 다양한 대외활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파인만은 196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등 아인슈타인과 함께 20세기 최고 물리학자였다. 또한 그는 1985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을 규명했으며,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라는 책으로 물리학계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학자이기도 하다.

 

 

 

 

 

 

 

 

 

 

 

 



■ 농담 잘 하는 파인만 씨가 진지해진 이유

 
  투바족장 황금보검.
파인만은 1970년대 중반 암에 걸리고 이후 10여 년간 힘겹게 투병생활을 했는데, 숨이 다하기 직전까지 투바의 여행을 계획하며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당시는 미소 냉전이 절정에 달한 시기로 파인만은 투바여행을 코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그와 행동을 같이했던 랄프 레이만은 파인만의 투바사랑 역정을 '투바-파인만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이 책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관심을 가지며 낙천적으로 행동하는 파인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파인만이 투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40년대에 발행된 '탄누-투바'공화국의 우표 한 장에서 시작됐다. 현대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패턴으로 초원 유목생활을 하는 투바인들은 언제나 창의력과 호기심에 가득 찬 파인만이 죽음의 공포를 떨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파인만의 경우가 잊혀져 가는 유목국가에 대한 관심이었다면, 21세기의 푸틴 러시아 총리(전 러시아 대통령)가 집권한 이후에 투바는 급격히 강해지고 있는 러시아 국력의 상징으로 재등장하고 있다. 근육질의 푸틴 총리가 휴가철에 반라의 차림으로 낚시나 수영을 즐기는 모습이 가끔씩 외신으로 보도된다. 강한 러시아와 지도자를 원하는 러시아 국민들을 위한 선전의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푸틴이 주로 휴가를 즐기는 곳이 투바의 초원이다. 그 배경에는 푸틴의 측근인 투바 출신 러시아 정부 비상대책부장관 세르게이 쇼이구가 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투바의 자연과 역사는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남은 초원문화의 터전에서 러시아 국력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투바에는 호수 속에 세워진 '포르-바쥔' 이라는 성터가 있다. 마치 엘도라도의 전설처럼 호수 위에 떠 있는 듯한 이 성터는 서기 12세기 대 탕구트국(티베트계통의 민족이 세운 나라. 중국어로 서하·西夏)의 것이다. 지난 2007년 여름에 푸틴은 모나코의 황태자 알베르트 2세와 이 성터 발굴 현장에 머물렀다. 한국 같이 정치인들이 양복에 안전모를 쓰고 뒷짐진 채 현장을 순시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캠핑을 하며 삽으로 흙을 퍼올리는 모습이 보도됐다. 푸틴의 마초이즘적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데 초원제국을 연구하는 고고학도 동원된 셈이다. 이렇듯 러시아에 가장 늦게 편입된 변방의 투바는 최근 강력해지는 러시아의 거칠지만 강한 자연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러시아의 화가이자 역사가 니콜라이 레리흐가 그린 '초원의 석양'. 아인슈타인이 그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물리학자 중에서 초원에 반한 사람은 파인만뿐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도 초원에 반했다. 아인슈타인은 알타이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여러 지역을 답사하며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자 역사가인 니콜라이 레리흐의 그림을 보며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그림만큼 나를 감동시켰던 것도 없습니다"라고 찬탄을 했다. 왜 이 천재 물리학자들은 초원을 좋아했을까? 단지 새로운 것 또는 지금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동정의 눈길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동양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오리엔탈리즘'의 발로였을까.

파인만과 아인쉬타인이 좋아했던 초원은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패러다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틀에 박힌 현대문명의 삶과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새로운 생활의 사람들이 그 원인은 아니었을까. 물리학에서 파인만이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기존의 통설을 깨는 단순하며 합리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개방적이며 창의적으로 살며 새로운 취미와 연구를 즐겼다. 그는 지적으로는 이미 유목민적인 사고를 지녔다. 그래서 나노(nano) 시대를 예언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투바에 빠진 이유는 단순한 탐험가적 취미가 아니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지금 세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이들 천재들은 유목민의 모습에서 수십 년 뒤 지구의 미래를 본 것은 아닐까?

초원은 창조력의 원천인 동시에 강대국들이 국력을 휘두르는 도구이기도 했다. 투바의 역사가 그를 증명한다. 투바는 13세기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청나라때는 중국의 판도에 편입되었다가 1911년에 독립할 수 있었다. 이후 다시 소련의 영토가 됐고, 지금은 강한 러시아의 상징이 되고 있다. 아직 중국이 투바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제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중국은 주변지역의 역사로 관심이 확장되고 있으니, 조만간 두 강대국 간 투바를 둘러싼 역사분쟁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한국에서도 투바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지난 2003~2005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투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행한 적이 있다. 일반인들은 오로지 알타이나 바이칼에만 관심이 있을 때 차분하게 숨겨진 진주를 밝혀서 조사한 것은 놀랍다. 21세기, 세계로 국력이 뻗어나가는 우리나라가 보는 초원은 달라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확장한 강대국이 아니라 투바와 같은 약소국이었음을 잊지 말자. 우리의 힘은 군사력이 아닌 주변국가에 대한 문화적인 관대함과 포용력에서 나와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숨겨진 투바공화국의 매력을 느끼길 바란다. 파인만과 아인슈타인이 초원에 매혹을 느낀 배경에는 다양한 문화에 대한 포용이었음도 기억해주시기 바란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3> 신라 황금보검의 미스터리

- 보로보예 황금 장식, 신라 계림로 14호분…제작 방법·형태 등 같은 지역서 만든 동일한 종류
- 계림고분 속 남자 허리띠 장식·귀고리 신라 고유의 것들
- 현재 발굴 중인 경주 쪽샘지구서 초원과 한반도 문화교류의 단서 쏟아질 수도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공사 도중 발견된 황금보검 장식.
1928년 카자흐스탄의 북쪽에 위치한 보로보예라는 마을 근처에서 건설공사를 하던 인부들은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힘들게 그 돌을 치워내자 그 밑의 구덩이에서 보석을 박은 황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뜻밖의 횡재는 곧 사방으로 소문이 났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러시아 고고학자 오레호프는 훔쳐간 유물들의 일부를 다시 회수할 수 있었다.

비슷한 상황은 약 45년 뒤 우리나라에서도 재현됐다. 1973년 경주 대릉원을 정비하면서 계림로에서 도로 공사를 하던 중에 작은 신라 고분들이 발견됐다. 다행히도 이 고분은 고고학자들의 체계적인 조사를 거칠 수 있었다. 특히 계림로의 14호 고분에서는 뜻밖에도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출토된 것과 똑같은 황금보검이 발견되었다. 두 단검은 만든 방법이나 형태 면에서 같은 사람 또는 같은 지역의 장인들이 만들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동일한 종류였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에서 나오는 공간이동을 한 듯한 두 유물은 한동안 신라 고고학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었다.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미공개로 있던 그 유물을 전시하면서 문제의 실마리가 하나씩 풀리고 있다.

■ 계림로 보검의 주인공은 초원민족인가?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황금보검. 1928년 카자흐스탄 보로보예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양식이다.
계림로 고분은 발굴된 지 40여년 가까이 미공개였고, 황금보검만이 국보로 지정돼 공개됐다. 신라에서는 전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황금보검이기 때문에 혹시 그 주인공은 초원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공개된 유물들을 종합해보니, 결론부터 말하자면 초원에서 직접 내려온 사람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보검 이외에는 유라시아에서만 발견되는 유물들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리나 황금장식 등 초원지역과의 연관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도 일부 존재하지만, 그들은 이미 '신라화'된 유물들일 뿐이다. 게다가 무덤도 신라의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이다.

지난 주 전시회를 보기 위해 경주로 가면서 필자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바로 유물의 주인공이 초원지역에서 내려온 사절일 가능성이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그러한 예가 있다. 중국 북부 초원과 접경지역인 감숙성에서 객성장(客省庄)이라는 한나라 시대 대형 고분군이 발굴된 적이 있다. 이 무덤군 중 140호로 명명된 고분의 유물은 대부분 한나라 것이었다. 그런데 유독 허리띠만은 동물이 장식된 흉노계통 버클이었다. 여러 정황을 검토한 끝에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흉노의 사신이라고 결론내렸다. 흉노 사신의 무덤에서 보듯이 먼 곳에서 온 사람이 객사한다면 같이 묻히는 토기를 비롯한 여러 물건은 방문한 국가의 것을 쓰고, 귀족의 무덤에 같이 묻힐 수 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옷과 같이 몸에 부착하는 물건들은 그냥 그대로 넣어주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데 계림로 14호 고분에서 나온, 몸에 부착하는 물건들인 시신의 허리띠장식과 귀걸이 등은 신라의 것이었다. 즉, 초원지역 어딘가에서 온 사신일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 황금보검 어떻게 신라에 들어왔을까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귀고리.
무덤의 주인공이 신라인일 가능성이 크다면 또 다른 문제와 맞물릴 수 밖에 없다. 도대체 '이 보검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가'이다. 먼저 보검이 놓인 자리를 보자. 이 칼은 35cm 정도의 단검으로 실용이 아니라 장식적인 기능이 강하다. 그런데 이 칼은 허리춤 바로 밑에 비스듬하게 놓았다. 바로 옆에 묻힌 사람의 경우는 허벅지 밑으로 장검을 놓은 것과 좋은 대조가 된다. 황금보검이 착용된 방법은 5~7세기 알타이 지역 투르크 인들의 칼 차는 방법과 똑같다. 즉,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그 검을 알타이 초원지역에서 어떻게 차고 다니는지 잘 알았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황금보검을 이런 저런 경로로 수입해온 것이 아니라 실제 차고 다녔음을 반증한다.

다음으로 황금보검이 출토된 무덤을 보자. 먼저 카자흐스탄 보로보예를 보면, 비록 이미 많이 파괴되었지만 대량의 황금유물이 출토됐다. 이는 실제 그 무덤의 주인공이 최상위 귀족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계림로 고분으로 오면 사정은 약간 달라진다. 무덤의 규모도 작고 출토된 유물도 270여 점으로 다른 신라고분보다도 작은 편이다. 하지만 출토된 안교 등자 장신구 등은 엔간한 최상위급 신라고분 못지 않다. 더욱이 흥미로운 점은 이 무덤에 일부 남아있는 치아의 마모흔이나 같이 묻힌 유물로 볼 때, 비슷한 신분과 나이인 남자 2명이 묻혀있다는 점이다. 여러모로 기존의 신라고분들하고는 사뭇 다르다.

계림로 고분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윤상덕 학예사에 따르면 실제 무덤의 주인공이 입었던 옷은 실크로 진골 이상의 신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황금보검의 주인공은 신라의 귀족으로 증여 또는 사사의 형태로 보검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게다가 비슷한 신분의 남자 2명이 같이 묻힌 것을 본다면, 고분 자체가 매우 작다는 것은 무덤을 준비할 시간이 거의 없었던 사람들, 즉 오랜기간 외국에 체재했었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 누가 신라인에게 황금보검을 주었을까

현재 계림로 14호 고분과 같은 보검의 실제 유물은 카자흐스탄 보로보예가 유일하다. 다만 중국 신장성 돈황에 있는 키질석굴에서도 비슷한 단검의 그림이 발견된 적이 있다. 또 동유럽 일대에 비슷한 4~5세기 황금유물이 많기 때문에 켈트족이 신라로 전해주었다는 일본사람의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황금제작기술은 멀리는 흉노문화에서 기원하며 서기 4~6세기에는 훈족의 대이동을 따라 동유럽으로 전파됐다. 또 황금보검에서 보이는 누금세공 같은 기술은 전 유라시아에 널리 유행했다. 그러니 흑해나 동유럽에서 비슷한 유물이 1점 나왔다고 곧바로 흑해 연안의 사람들과 신라가 직접 교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로보예나 계림로 14호 고분은 대체로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에 해당한다. 이때에 흑해 연안에서 황금보검을 쓰던 사람들은 이 지역 토착민이 아니다. 흑해 연안은 초원민족이 복잡하게 유입된 곳이다. 그들은 동쪽에서 밀려온 훈족, 그리고 이후에는 투르크(돌궐)계통이 거주했다. 따라서 신라와 교류했던 집단은 흑해보다는 동쪽인 시베리아나 몽골지역 사람들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이다. 5~6세기는 아직 돌궐세력은 미약했고, 대신 유연제국이 번성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유연의 왕족이나 고위층의 고분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광활한 몽골초원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유연제국의 고분이 혹시 답을 주지는 않을까?

■ 유라시아 고고학, 신라에서 답을 구하다
우리는 막연히 신라의 황금문화의 기원을 북방에서 찾고 있지만, 반대로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신라의 고분에서 초원지역의 고고학을 해결하려고 한다. 1970년대 소비에트의 중세고고학 최고 권위자인 A 암브로즈는 신라고분과 고구려 벽화의 연대에 근거해서 3~7세기 초원지역 고고학의 연대를 결정했고, 그의 연구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또 카자흐스탄 보로보예 단검도 실제 칼은 없어지고 칼집만 남아서 그 용도를 모르는 채 남아있었다. 하지만 신라의 계림로 고분의 보검이 발견된 덕에 그 황금장식이 칼의 일부였음이 밝혀졌다. 즉, 유라시아 고고학자들은 서기 4~6세기 전 유라시아를 뒤흔들던 훈족의 대이동과 그에 따른 문화 교류의 한 거점으로 신라를 파악한다. 우리도 시야를 한반도라는 좁은 틀에서 벗어나 전 유라시아적 관점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에서는 초원지역 자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비슷한 유물만 나오면 무리하게 전파루트를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북방지역 자료를 직접 접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자들의 연구를 재인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물론 1980년대 이전에는 이념적 장벽으로 사회주의권의 자료를 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회주의권이 개방된지도 20년이 넘는 지금도 여전히 단편적인 비교만을 하는 경우가 많다. 진정으로 신라의 비밀을 풀고 싶으면 당장 기원을 찾으려는 생각보다는 체계적으로 유라시아 초원의 고고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를 양성해야할 것이다.

황금보검의 문제는 대부분 미해결인채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신라와 북방문화의 관계에 한걸음씩 우리는 접근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경주에서는 쪽샘지구에서 적석목곽분 발굴이 한창이다. 천년고도 경주가 우리에게 또 다른 유물을 보여줄까. 조만간 초원에서 한반도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화교류의 흐름을 밝혀주는 발견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4> 칭기즈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가

- 영토의 개념 없었던 초원민족에게는 조상 무덤의 파괴가 부족 멸망과 직결
- 제국의 지속 원했던 칭기즈칸, 자신의 묘 조성 뒤 동원인력 모두 제거
- 그가 묻힌 곳 두고 고향 오논강說, 알타이산說 등 분분
- 실제 묘지 위치는 단서조차 찾지 못해

작년 말 중국 하남성 안양(安陽)현 서고혈촌(西高穴村)에서 '삼국지'의 인물 조조의 무덤인 고릉(高陵)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적이 있다. 이 무덤에서는 조조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 8점이 나왔고, 인골의 나이도 60세 전후로 조조의 실제 죽은 나이와 일치했다. 수 개월의 조사 끝에 중국의 고고학계는 조조 묘라고 공식발표했다.

이 말이 맞다면 진실로 놀라운 발견인 셈인데, 여전히 의문이 많다. 조조는 생전에 다른 사람의 무덤에서 황금을 도굴해서 군자금을 충당한 도굴꾼 원조로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본인이 죽었을 때는 수십 개 가묘를 만들었다 하니 섣불리 단정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이번에 발견된 '조조의 무덤'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 도굴이 되어 더 이상 나올 유물도 없으니 그 의문은 당분간 풀리지 않을 듯 하다.

그렇다면 초원이 낳은 불세출의 인물 칭기즈칸의 무덤은 어디 있을까?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이미 몽골에서는 그의 무덤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언급한 이래 지금까지 그의 무덤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도대체 칭기즈칸은 어디에 묻혀 있을까.


■초원 어디에 칸의 무덤 있을까

 
  알타이산의 기슭. 여기 어딘가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을 거라 보는 의견도 있다.
살아 생전 칭기즈칸은 주변의 모든 민족을 평정하며 무자비한 살육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런 그도 죽음의 섭리를 피하지는 못했다. 칭기즈칸은 유언을 할 때 자신의 죽음과 무덤이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리면서 자신의 묘에 아무런 표시도 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다. 극비리 치러진 장례식 행렬을 본 사람들을 모두 죽였고, 무덤을 만들던 일꾼과 그들을 지키던 군사들도 전부 죽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칭기즈칸이 묻힌 곳은 그가 태어나 자란 오논강이라는 설, 알타이산이라는 설 등 여러 얘기가 전해진다. 마르코 폴로는 그의 무덤이 '부르한 칼둔'이라는 곳에 있다고 기록했는데, 정확히 어딘지는 역시 논란거리다. 심지어 무덤 위로 강이 흐르게 했다거나 무덤 위에 숲을 만들었다는 등 전설도 많다.

20세기 이후에는 실제 고고학적 조사로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미국 시카고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마추어 고고학자 마우리오 크라비츠는 40여 년 가까이 그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일본의 고고학팀도 1990년대 이후 칭기즈칸 묘를 추적 중이다. 이런 조사 덕에 몽골시대 많은 무덤들이 발견되었지만, 칭기즈칸의 무덤은 발견된 바 없다. 더욱이 최근에는 첨단 위성기술이며 다양한 장비가 동원되는 데도 몽골시대의 거대한 고분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칭기즈칸의 무덤 규모는 그리 크지 않고 지상에 별다른 표시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칭기즈칸은 죽기 직전까지 사방을 정복했으며, 살아 생전부터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수의 몽골전사를 이끌고 세상을 정복하며 제국의 기틀을 다지기에 바빴던 그가 거대한 무덤 만들기를 좋아했을 것 같지 않다. 이집트 피라미드의 경우 파라오 즉위 전부터 만들기 시작해 수십 년의 공사끝에 조성된다. 유명한 투탕크 암몬의 피라미드는 그가 젊은 나이에 죽은 탓에 규모도 작고 미완성이었다. 칭기즈칸이 수천 명의 인력을 들여 거대한 고분을 만들었다면 그렇게 완벽하게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을까


■무덤 크기로 위대함을 논하지 말자

 
  중국 내몽골 오르도스시에 조성된 칭기즈칸 가짜 묘역. 무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관광지로 키우고 있다.
만약 칭기즈칸의 무덤이 발견된다고 해도 화려한 보물같은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몽골인들은 전통적으로 박장(무덤에 유물을 적게 묻는 풍습)을 하기 때문이다. 몽골 전사들의 묘는 그렇게 크지 않게 무덤을 파고 주변에 돌을 돌리며, 무덤구덩이 안에는 말과 시신을 묻는 정도이다. 초원민족의 풍습은 후장(풍부한 부장품을 묻는 풍습)인 가야, 신라 고분들과 좋은 대비가 된다. 창녕 교동, 합천 옥전, 김해 대성동 등 가야의 여러 고분들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유물과 금관들이 출토됐다. 같은 시기 일본의 왕릉인 전방후원분 중에 대형인 것은 그 둘레가 수백 m에 달할 정도여서 삼국시대의 무덤들을 능가할 정도다.

하지만 같은 시기 한반도 북부와 만주를 지배했던 고구려의 무덤 유물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빈약하다. 얼마 전 중국에서 광개토대왕비 앞에 있는 태왕릉(광개토대왕의 것으로 추정하지만, 한국학계에서는 반대 의견이 대부분이다)을 발굴한 결과 금관은 없었다. 몇 가지 금동제 장식이 나왔을 뿐 출토 유물은 아주 적었다. 그뿐 아니라 대부분 고구려고분은 유물이 거의 없다. 역사기록에는 고구려인들은 무덤에 시신을 넣을 때 그 유물들을 깨뜨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준다고 돼 있다. 주변 지역과 전쟁을 하며 항시 이동을 해야 할 초원민족, 또 반농반목을 하며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구려인들은 죽은 뒤의 안락을 위해 거대한 고분 조성에다 많은 유물을 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전통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 그는 조용히 묻히고자 했을까?

 
  아마추어 고고학자 마우리오 크라비츠. 40여 년간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다니는 미국인이다.
그렇다면 왜 칭기즈칸은 자신의 무덤을 숨기고 싶어했을까? 여기에는 자기가 일궈낸 제국을 지켜나가기 위한 바람이 숨어있다. 왜냐하면 초원민족에게 조상의 무덤은 그들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 지켜야할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거주지 없이 초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땅을 빼앗긴다는 개념은 없었다. 따라서 적이 쳐들어 와서 도망가더라도 후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원전 514년에 70만 대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스키타이족을 침공했을 때 기록을 보자. 당시 스키타이족이 계속 도망만 치니 추격에 지친 다리우스왕은 비겁하게 도망치지 말고 싸우자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스키타이 왕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답을 했다. "우리에겐 도시도, 농지도 없다. 우리와 싸우고 싶으면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건드리면 된다…." 즉, 이동하며 사는 초원민족에게서 영토를 뺏는다는 생각 자체가 어불성설이며, 한 부족의 멸망은 그 조상의 무덤이 파괴되는 것으로 상징된다는 뜻이다. 칭기즈칸이 재위하던 시기 몽골은 막 제국을 정비해나가고 있었다. 그도 자신의 무덤이 적에 의해 훼손돼 제국이 멸망할까 염려했을 것이 분명하다. 칭기즈칸이 진정 바란 것은 화려한 무덤보다는 제국의 존속이었을 터니, 그의 무덤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소박하게 조성됐을 것으로 짐작하는 게 더 맞을 듯 하다.

 

 


 


 
  오르도스시 칭기즈칸 묘역 관광지에서 몽골민속공연이 열리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자들은 대부분 한족이다.
현재 내몽골 오르도스시 근처에는 후대 사람들이 만든 칭기즈칸의 가짜 무덤이 있다. 이 곳은 지금 대규모 관광지가 되었고, 칭기즈칸 능 앞에 만들어진 민속촌에서는 매일 밤 관광객들에게 전통무용과 몽골민속 등 볼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 연기자들은 한족이다. 실제 내몽골지역은 한족이 다수를 점하고 몽골인들은 한족의 이주와 도시화에 밀려 멀리 북쪽의 사막지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살 뿐이니 지하에 묻힌 칭기즈칸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떨까.

칭기즈칸이 거대한 고분을 만들고 저승에 투자했다면 유라시아를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소수의 몽골인으로 세계를 제패했다. 그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내세의 화려한 지하궁전이 아니라 초원제국의 지속이었을 것이다.


■무덤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위인이나 유명인의 무덤은 단순한 보물찾기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다. 과거의 역사적 의의와 진면목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연구대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험한 효험과 자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며 위인의 묘를 찾는다. 심심치 않게 예수, 모세 등 성경의 인물이 발굴되었다는 해외토픽을 볼 수 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발굴해서 거대한 묘역으로 성지화했다. 이는 진정한 위인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껍데기만을 찾는 얄팍한 기대일 뿐이다.

여러 기록과 전설을 종합하면 칭기즈칸은 자신의 무덤을 소박하고 작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는 무덤이 커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으리으리한 자신의 송덕비를 세운 관리 치고 제대로 된 경우가 거의 없다. 이 간단한 진리가 아마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인지 모른다. 칭기즈칸의 무덤이 언젠가 발견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무덤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을 정복했던 한 인물과 그가 일궈낸 초원제국의 진면목을 밝히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5> 초원의 디어헌터

- 부족의 표시임과 동시에 전사들의 전공 따라 주어지는 계급장이요 용맹의 상징이었고
- 고기와 가죽 제공하는 사냥감뿐만 아니라 예술의 소재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사슴이 없는 초원을 상상할 수 있을까. 넓은 초원과 언덕을 유려하게 뛰어다니는 사슴은 보기만 해도 참 아름답다. 목축을 하며 살았던 초원민족들에게 양 염소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동물이었다. 초원사람들에게 사슴은 단순한 사냥감이 아니라 예술의 소재이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초원전사들의 동반자

 
  몽골 오르도스 지역에 속하는 영하의 하란산 사슴 암각화.
1997년 필자가 초원보다는 북쪽인 타이가 지역에서 순록을 키우는 에벤키(퉁구스)족을 조사하러 갔을 때 그들의 사슴과 순록에 대한 태도를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조사팀의 요청으로 촌장은 순록을 잡게 되었고, 촌장은 사슴을 몰던 아들에게 뭐라고 외쳤다. 그 순간 무리 중에서 한 순록이 잡힐 것을 직감했는지 무리에서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순록을 잡았지만 평소에는 순하디 순한 순록의 커다란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며 까치발을 곧추 세우며 저항하는 것이 아닌가.

순록을 잡아오자 촌장은 순록 머리위에 보드카를 뿌리며 주문을 외우고 칼등으로 순록의 미간을 때려 기절시켰다. 그리고 재빠르게 숨통을 끊어 순록의 고통을 최소화했다. 모든 주민들은 엄숙하게 그 과정을 지켜본 후 재빠르게 고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발목 부근의 가죽은 각반으로, 또 몸통 가죽은 겨울에 천막을 덮는 보온재로 쓰기 위해 무두질을 했다. 고기의 해체는 남자들의 몫으로, 맛있는 부위부터 어른에게 나눠줬고 공평하게 분배했다. 가장 맛있다는 넓적다리는 손님인 우리들의 몫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에벤키인들에게 순록은 단순히 탈 것이나 단백질 공급원이 아니라 그들의 동반자였다.

초원지역도 삼림(타이가)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원지대에 살던 초원민족에게 사슴은 살아나가는 데 필수적인 고기와 가죽을 제공했으며, 또 그 날렵하고 재빠른 모습은 초원에서 생존하는 강인한 전사의 상징이기도 했다. 초원의 고대 예술에서 언제나 사슴은 가장 중요한 모티브였으며 또 그들의 삶을 상징했다.

■사슴문신을 한 사람들

 
  알타이 우코크 고원 칼쥔에서 발견된 전사 미라의 몸에 새겨진 사슴 문신의 도판.
기원전 6~3세기 알타이 파지릭문화의 무덤은 고산지대의 영구동결대(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지역)에 위치한 덕택에 의복, 목재 등이 수 천년 동안 고스란히 보존된 채 발견된다. 특히 파지릭문화에서는 당시 전사들의 미라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하나같이 어깨 부분에 하늘을 나는 사슴을 문신했다. 모두 사슴문신을 했지만, 전사마다 문신의 부위며 크기가 달랐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큰 고분인 파지릭 5호 고분의 미라에는 어깨에서 발목까지 사슴이 문신되었다. 또 '알타이의 공주'라고 명명되어 1995년 한국에서도 전시됐던 우코크 고원의 여성 미라는 중형급 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 사슴무늬는 어깨와 손가락 부분에 있었다.

 

 

 


 
  알타이 파지릭 전사 미라의 어깨에 사슴문신이 새겨져 있다.
한편 1994년 발견된 우코크의 칼쥔 유적에서 발굴된 소형급 고분에서 나온 남성 미라에는 단지 한 마리의 사슴만 새겨져있었다. 무덤이 클수록 사슴문신도 다양해지고 화려해지는 셈이다. 즉, 문신은 무사의 신분을 상징하며 계급이 올라갈 때마다 문신이 하나씩 추가된 것이다. 그들에게 사슴은 자신이 어떤 부족에 속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시인 동시에 전공(戰功)에 따라 받은 계급장이요 용맹함의 상징이었다.

파지릭 고분의 미라에서 보듯 당시 초원의 전사는 자기 몸의 문신을 화려하게 드러냈으니, 화려한 문신은 곧 전사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신을 새긴 초원의 전사는 전사들을 표현한 일종의 선돌(立石·menhir)인 '사슴돌'에도 표현되었다. 사슴돌은 높이 2m 안팎의 직사각형 돌을 세운 일종의 거석기념물로 자바이칼, 알타이, 몽고 등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 이름이 사슴돌인 이유는 처음 발견되었을 때 빽빽이 전면을 채운 하늘을 나는 사슴무늬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사슴돌을 조사해보니 얼굴 부분에는 귀걸이가, 또 허리부분에는 허리띠가 있고 칼, 숫돌, 전투용 도끼 등도 있다.

 

 

 

 

 

 

 

 


■목이 길어서 성스러운 짐승

 
  초원지대인 타가르문화권에서 나온 하늘을 나는 사슴 모양의 청동장식.
즉 기원전 9~5세기 초원에서 살던 전사가 죽으면 그 사람을 기념해 선돌을 세웠고, 그 위에 새겨진 사슴은 바로 전사의 문신이었다. 사슴돌은 케렉수르라고 하는 돌로 만든 제사터 근처에서 주로 발견되며, 암각화의 앞에서도 나온다. 초원의 부족들이 성스러운 의식을 거행하는 중심에 있었던 셈이다. 대부분 사슴돌은 주변 풍광이 좋은 데에 위치한다. 필자가 조사한 알타이 아드르-깐의 암각화에도 사슴돌이 있는데, 병풍을 친 듯한 절벽 바로 앞에 있는 사슴돌은 마치 그 거대한 암각화를 지키는 수호신인듯 했다.

 

 

 

 

 

 


 
  사슴돌에 그려진 사슴문양.
사슴을 숭배하는 유물이 널리 퍼진 스키타이시대(기원전 8~3세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역동적인 동물 장식이다. 초원의 유목민은 청동, 나무 등으로 솜씨 있게 다양한 포즈의 사슴을 묘사했다. 도약하거나 앉아있는 등의 사슴 행태를 묘사한 여러 유물들이 있는데, 이 사슴들의 자세를 분석한 한 러시아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여기 표현된 사슴 종류만 10여 종이 넘으며 매우 정밀하게 사슴 활동상을 포착한 것이라 한다. 사슴이 뛰어오르는 자세만도 마치 활동사진을 한 장면씩 잘라서 보듯 약 20여 가지로 표현했으며 임신 중인 암사슴, 싸우는 수사슴 등 다양한 사슴 행태가 묘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 자세는 현대인의 눈에는 잘 포착되지 않는 것이어서 이 연구가도 고성능 카메라를 이용해 분석해서 결과를 얻었다. 당시 초원민족이 얼마나 사슴과 가까이 살면서 관찰했는지 보여주는 예다. 또한 사슴돌에 새겨진 것처럼 하늘을 날 듯 환상적인 동물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도 있다. 중국에 봉황, 서양에 유니콘이 있다면 초원에는 하늘의 사슴이 있다. 그 뿔은 마치 구름처럼 몸통 위를 뒤덮고, 주둥이는 새의 부리처럼 비죽 나온 것도 있다. 바로 중원의 용문양이 초원지역의 사슴과 결합하여 환상의 동물로 변한 것이다. 노천명의 시는 사슴이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라 표현했지만, 초원에서는 반대로 목이 길어지면서 성화(聖化)되어 하늘의 사슴이 된 것이다.

■우리 문화 속 사슴과 영화 '디어헌터'
우리나라에서는 초기 철기시대(약 기원전 3~1세기)에 북방 초원계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사슴이 새겨진 청동기들이 등장한다. 대구 영천 어은동과 일본인 오쿠라 씨가 모은 컬렉션에도 사슴이 그려진 청동기가 있다. 초원지역 암각화에서 발견되는 사슴과 그 표현방법이 아주 유사하다. 또 고려가요에도 사슴이 의외의 장면에서 등장한다. '청산별곡'에는 현대어로 풀면 '정지(부엌)에 가다가 듣노라 사슴이 장대에 올라가 해금(奚琴)을 켜는 것을 듣노라'라고 해석되는 구절이 있다. 고전문학계에서 논란이 많아 이 구절에 대한 정설은 없다. 장대 위에 있는 사슴이라면 서커스를 연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장대나 칼 손잡이의 끝에 사슴이나 산양이 까치발을 들고 서있는 장식은 초원지역 청동기에서 흔히 보이는 모티브다. 여기에 악기는 해금이니 아마 몽골의 마두금 같이 악기의 끝 사슴장식이 달린, 초원지역에서 건너온 악기를 연주하는 광경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국의 고대문화에서 사슴이 나오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주로 농사에 의지했기 때문에 사슴과 관련된 문화가 그리 많지 않다.

40대 이상 독자라면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1978년 영화 '디어헌터'를 기억할 것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는 아름다운 설경과 가난하지만 밝게 살던 러시아계 젊은이들을 그리고 있다.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전반부의 평화로운 장면은 주인공 젊은이들이 사슴사냥을 하는 장면으로 끝나고, 곧바로 참혹스러운 월남전으로 장면이 바뀐다. 이 영화의 배경이 베트남이면서도 그 제목이 '사슴사냥꾼'(디어헌터)으로 된 것은 전쟁 속에 비인간화되어서 사슴을 사냥하듯 사람을 사냥하고 또 사냥감이 되어간 미국 하류층 젊은이들을 그린 것이다.

영화 '디어헌터' 속에서 의미없이 스러져가는 젊은이들처럼 현대사회에서 사슴은 보약의 한 종류일 뿐 더 이상 예술의 주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인의 보약사랑은 알타이 지역에서도 유명했던지, 필자가 알타이 지역을 조사할 때 한국인이 왔다는 소문을 들은 현지 알타이인은 녹용이나 알콜에 담근 녹혈을 사라고 찾아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슴은 유라시아 북반구 초원지역 전사들과 삶을 같이 했던 동반자였다. 이제 한국과 초원을 잇는 대표적 동물인 사슴의 진정한 의미를 연구할 때가 된 것 같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6> `붉은 머리의 사람들`과 철릭

중국에서는 사방의 이민족을 이만융적(夷蠻戎狄)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각각 방위를 따라 동·남·서·북쪽 이민족을 말한다. 이중에 이는 동이족이며, 융과 적은 주로 초원지역 사람들을 일컫는다. 200여 년 전부터 서양학계는 중국 북쪽에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유럽인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심지어는 로마와 파르티아의 카레이전투 와중에 실종된 로마병사의 일파가 중국의 감숙성 언저리에 살고 있다는 연구가 100여 년 전 영국학자에 의해 제기된 이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붉은 머리의 사람들'을 찾아서

또한 러시아의 유명한 역사가 그룸-그루지마일로와 구밀료프는 '붉은 머리의 사람'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즉, 북쪽의 오랑캐인 '적(狄)'의 일파 중에 백적(白狄), 또는 적적(赤狄)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바로 중국 북방에 살던 서양인인 '붉은 머리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한나라시대 흉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한나라 장군 진탕(陳湯)이 노란 머리에 큰 코를 가진 포로를 생포했다는 기록 등 서양인의 흔적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과연 그들은 언제 어디에서 온 사람들일까.

 
  조선시대 철릭 모습. 초원 기마인의 옷이고려시대에 도입된 이후 700여년 세월 동안 우리 문화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인 계통의 전통은 비교적 오래됐다. 약 5500년 전 흑해 연안에서 처음 시작된 목축이 초원을 따라 동쪽으로 확산되면서부터이다. 과거에는 동투르키스탄이라고 불렸던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주의 실크로드 지역에서는 건조한 기후 때문에 보존상태가 좋은 유럽인종 미라들이 자주 발견된다.

바로 목축을 하던 사람들의 후예로 지금 신장성의 위구르인은 중앙아시아의 유럽인 전통이 이어져온 결과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의 성산(聖山)인 알타이에 이들 유럽인종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부 시베리아의 파지릭문화의 미라에도 있다. 초원지대로 유입된 유럽인종이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유는 이들이 목축이라는 독특한 경제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붉은 머리의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에 토착화된 유럽인 계통을 의미한다.

 

 

 

 

 



정령 그리고 철륵족

 
  몽골에 남아 있는 석인상. 철릭형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둘렀다.

중앙아시아와 초원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천재'와 '자기도 천재라고 착각하는 바보'로 나뉜다는 농담이 있다. 그만큼 수많은 민족이 점철돼 있기 때문에 연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실제로 초원지역의 민족들은 대부분 자신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민족의 흥망도 무척 잦았다. 그러니 멀리 떨어진 중국의 역사기록도 아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붉은 머리의 사람들'인 흉노가 발흥하던 기원전 3세기에는 현재의 남부 시베리아와 신장성 일대에 유럽 계통 인종이 정령(丁零)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현한다. 정령은 딩룩 또는 텔레 등으로도 불렸는데, 유목민족이었기에 초원지대 곳곳으로 이동해서 서쪽으로는 카자흐스탄, 동쪽으로는 바이칼 지역까지 그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고구려 전성기 무렵 정령은 철륵(鐵勒)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북방에 출현했다. 철륵은 문화적으로는 투르크(돌궐)계통이며, 고구려의 선진무기를 자신들의 유목문화와 결합시켜서 그 세력을 키웠다. 이후 철륵은 몽골제국에 편입되었고 현재는 알타이 근처의 텔레우트족, 케트 족 등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발해의 북쪽 변방에 위치했던 행정구역 중 철리부(鐵利府)가 있는데, 바로 철륵 민족이 살던 곳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철륵족이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초원지역 '붉은 머리의 사람들'의 후손인 정령과 철륵은 우리나라 전통 의습(衣褶·옷장식)인 '철릭'의 기원이 되었다. 철릭은 고려가요 정석가에 '무쇠로 철릭을 만들어서 옷이 다 닳으면 님과 헤어지겠나이다'라는 구절로 처음 우리나라 기록에 등장한다. 철릭이란 고려~조선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일종의 도포같은 옷으로 허리띠를 여미는 것이 특징이다. 융복(戎服)이라고도 했으니, 북쪽 이민족으로부터 수입된 옷을 의미한다. 바로 원나라의 강력한 영향을 받던 고려시대에 들어온 원나라풍의 옷이다.

 

 

 

 

 

 



우리 전통 옷 속의 철륵족

 

안동대 이은주 교수는 이 철릭은 몽골인들이 승마시 편리함을 위해 착용했던 벽력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철릭은 천익(天翼), 천닉, 털릭 등 다양하게 불렸는데, 'terlig'이라고 하는 몽골어를 음차한 것이다. '테를릭'은 곧 정령(텔레)과 철륵을 의미하는 것으로 철륵 계통의 민족이 입었다는 뜻이다. 치파오를 만다린 드레스라고 하듯 특정 민족의 이름이 옷 이름이 되는 경우는 흔히 있다. 알타이와 몽골의 초원지대에 남아 있는 돌궐의 석인상은 마치 가운처럼 길게 늘어뜨린 상의에 허리띠를 맨 옷을 입었으니, 바로 철릭 옷의 기원이다.

기마민족인 철륵족이 입었던 이 옷은 원나라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고려의 왕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처음에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만 입는 옷이었다. 하지만 말타기에 편하고, 몸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장점 때문에 평민층까지 널리 유행하게 되었고, 조선시대 군복으로도 쓰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급박하게 이동하던 왕 이하 신하들이 철릭을 입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전란이 끝나자 철릭의 기능성은 퇴화되어 그 자락이 땅바닥에 늘어질 정도로 장식화되자 여러 차례 이 옷을 입지 말라는 어명도 떨어졌다고 한다.

 
  신장성 누란에서 발굴된 여성 미라(위 사진)와 완연한 유럽 계통으로 복원된 모습.

철릭이라는 초원 기마인의 옷이 고려시대에 도입된 이래 700여 년간 우리 문화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점은 참 신기하다. 조선이 들어선 뒤 우리나라에 남아 있던 원나라 풍속을 금기시했지만 철릭이 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편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소중화를 자처했던 조선사회에서도 실용적이며 편리한 북방의 문화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민족들과 문화가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초원지대에서 유럽인 계통의 전통이 있다 해서 현재의 역사에는 별 영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19세기 이래로 서양 학자들은 중앙아시아의 유럽인종에 관심을 가졌을까. 또 중국 문명이 자생이 아니라 서방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우세했을까. 그 배경에는 이런 접근을 통해 서양인들이 중앙아시아를 식민화하면서 그 정당성을 뒷받침할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 모른다. 중앙아시아 고대의 유럽인종은 엄밀히 말하면 인도-아프간 계통에 가깝기 때문에 현재의 서유럽이나 슬라브인들과는 다르다. 설사 서양인 계통이 있다 해도 그것이 서양문명의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스킨헤드들, 초원에서 배워라

 
  철릭을 입은 고려 사람.
결국 '붉은 머리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의 속내는 서양인들의 우세한 문명이 전파되어야만 세계 전체가 발달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인지도 모른다. 유라시아의 동쪽인 우리나라 또한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지라 서양인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신라시대 처용이나 서역인 계통의 석인상과 같은 서양인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원나라의 영향으로 색목인으로 통칭되던 다양한 중앙아시아계 유럽인들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발해인들도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들과 교류했다. 이들 서양 계통의 사람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서 우리와 교류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철릭이라는 옷에서 보듯 우리 역사에는 중앙아시아 지역 유럽계 인종들과 다양한 교류가 있어 왔다.

최근 인종차별과 폭력을 일삼는 러시아의 국수주의자들인 스킨헤드의 공포가 러시아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덮치고 있다. 특히 지난달 광주교대 학생이 러시아 청년 3명에 집단폭행당해 사망한 바르나울시는 동서문명의 교류지인 알타이지역이다. 러시아인들이 시베리아 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이 불과 400년 전이다. 어떻게 이들이 그 땅이 자기들 땅이라며 외국인을 해칠 수 있는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분명한 것은 고대 알타이에서, 또 초원 각 지역에서 인종적 차별은 없었다는 점이다. 고대 시베리아는 몽골로이드가 주류를 이뤘지만, 그렇다고 소수의 유럽인종에게 어떠한 인종차별도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서문명의 가운데에서 문명의 전달자이자 동아시아 역사의 활력소로 받아들였다. 초원에서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는 문화교류의 지혜를 얻기 바란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7> 외계인의 모습을 한 초원의 샤먼

 
  카라콜문화 유적에서 발굴된 무덤. 무덤벽에 기괴한 모습의 그림이 그려진 카라콜문화권의 유적.
요즘 부쩍 필자에게 2012년 세계종말론이나 고대문명과 우주인에 대해 묻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포스 카인드(Fourth Kind)'와 '2012' 때문인 것 같다. 특히 '포스 카인드'는 외계인의 존재에 대한 관심과 고대문명에 대한 환상을 결합시킨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극영화)이지만 외계인이 고대 수메르어를 하는 상황을 설정해 수메르 문명을 창조한 주인공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주었다. '고대문명'이라는 단어는 많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마야의 팔렌체 석판, 인더스문명 리그베다에 나오는 불타는 전차, 성경 에스겔서 1장, 수메르의 불타는 로켓, 피라미드, 메소포타미아의 신비한 점성술 등 세계 각 지역 문명에서 '외계인'이 만들었다고 하는 유물이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약 4000여년 전 알타이의 한 자락에서 살던 작은 집단이 남긴 무덤에는 우주인과 흡사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시베리아의 고대 우주인'이라는 제목과 함께 종종 미스터리 관련 저작물에도 등장하는 이 그림의 정체는 뭘까.

 

 



■ 외계인을 그린 듯한 카라콜 유적

 
  카라콜문화권의 무덤에 그려진 다양한 형태의 사람 그림.
1976년 알타이 초원의 작은 마을인 오제르노예 근처에서 공사 중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석판과 인골들이 발견됐다.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된 고고학자 포고제바와 쿠바레프가 정식으로 이 유적을 발굴했다. 알타이 초원의 무덤은 대부분 나무로 관을 짜서 넣는 목관묘인데, 오제르노예의 무덤은 돌로 석판을 만든 것으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더욱이 무덤 벽을 이루는 석판에는 팔다리가 길쭉한 이상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 아닌가.

몇 년 뒤 알타이주 온구다이군의 카라콜마을 근처에서는 완벽한 채색그림이 그려진 무덤이 발견돼 이 이상한 그림을 남긴 사람들을 '카라콜문화'라 부르게 됐다. 카라콜의 그림은 무덤벽을 석판으로 만들고 그 석판 위에 사람이나 짐승을 그린 것이다. 이제까지 알타이에서는 돌을 쪼아 만든 암각화만 발견됐는데, 최초로 채색그림이 나온 것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림의 내용이었다. 머리에서 광채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손발은 길어 마치 외계인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팔이 새 깃털처럼 그려진 사람, 얼굴이 개구리인 듯 한 사람 등 그 기묘한 형상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방의 무덤벽에 목탄에 황토를 섞어 황색, 붉은 색, 흰색 등을 칠한 이 그림들은 무덤벽을 장식했다는 점에서 벽화의 아주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다.

■ 그들은 우주인인가, 샤먼인가

 
  마치 우주인을 그린 듯한 그림.
카라콜 석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몸통은 사람이지만 사지와 얼굴은 짐승 형태를 띤 일종의 반인반수다. 짐승 가면을 쓰고, 장갑과 날카로운 발톱이 남아 있는 신발을 착용했다. 꼬리가 달리고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 등 전반적인 형태는 짐승을 의인화하여 의식을 거행하는 샤먼의 모습이다. 손발의 모양이 역동적인 것으로 보아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짐승의 모습을 하고 춤추는 의식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왜 이런 벽화가 죽은 사람의 무덤방 사방에서 마치 죽은 자를 에워싸듯 그려져 있을까. 죽은 자를 위로하며 제사를 지내는 광경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자를 저승으로 인도하는 정령일 수도 있다. 수많은 상상과 가능성이 있겠지만, 실제로 이 괴수들의 의미를 규명할 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겨우 4개 유적만 발견됐기 때문이다. 단지 출토된 인골은 몽골인종이며, 목축이 발달하지는 않았다는 정도밖에 모른다.

카라콜문화가 발생할 당시 초원은 어떤 상황이었을까. 알타이에서는 기원전 3500~2500년께 목축을 하던 유럽 계통의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밀려오면서 목축이 시작됐다. 그리고 기원전 17~13세기에는 전차를 몰던 인도-아리안계 사람들의 안드로노보 문화가 유입됐다. 카라콜 문화는 바로 두 유목문화 사이에 등장한다. 또 카라콜 문화와 비슷하게 괴수를 돌에 그려 남긴 사람들이 알타이산맥과 바이칼 호수의 중간지대에 해당하는 미누신스크라는 분지에서 등장한다.

이 사람들은 오쿠뇨보 문화라 불리는데, 카라콜 문화와 비슷한 때인 기원전 2000년께 돌로 만든 무덤과 기묘한 형태의 사람들이 새겨진 선돌을 남겼다. 이들은 채색그림 대신 괴수와 기묘한 형상의 사람을 새긴 돌기념비를 세웠다. 얼굴에 관을 쓰고 창을 든 사람과 복잡하게 그려진 맹수 그림은 얼핏보면 마야 예술과도 비슷하고, 아프리카 민속품인 것도 같다. 카라콜문화에서도 오쿠뇨보에서 발견된 짐승과 비슷한 형태의 그림이 발견돼 미누신스크의 괴수그림 전통이 알타이로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인류가 남긴 생존과 문화의 증거로 봐야

 
  양서류나 맹수류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그림.
시베리아에 유목문화가 밀려오기 전부터 동아시아는 샤먼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종교문화가 발달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샤먼의 전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목축을 하던 초원인은 서쪽에서 밀려온 유이민이기 때문에, 시베리아와 한국의 샤먼문화와는 다소 달랐다. 기원전 20세기께 카라콜과 오큐뇨보 문화에서 다양한 동물의 모습을 결합한 샤먼 모습이 초원에 등장한 것은 지리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목문화가 감소하고 다시 사냥과 채집 등의 경제로 바뀌는 것과 관련이 있다.

즉, 초원의 목축경제가 약화되면서 이 지역에 살던 몽골인종 계통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신문화인 샤먼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몇 년 전 카라콜문화를 연구한 쿠바레프 박사가 한국에서 이 문화를 소개하자, 카라콜 그림을 고구려 벽화의 시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하지만 시기적·공간적으로 직접적 관련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시베리아의 이러한 독특한 정신문화가 한반도 고대문화의 연원에 대한 직접적 증거가 아니라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이는 빙하기 이후 아시아를 지배한 정신문화가 발현된 또 다른 증거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또 초원이 다양한 문화의 교차점이라는 사실이 다시 증명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문화를 남긴 사람들의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도 거의 아는 바가 없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카라콜유적은 여전히 발굴되지 않은 무덤이 많아, 추가 조사라도 한다면 내막을 더 알 수 있을 것이다.

■ 조금 뒤엔 주판도 신비한 유물이 될 수 있다
필자가 유학 시절 카라콜문화의 석판에 새겨진 개구리 모양의 사람을 직접 본 순간 엉뚱하게도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방영된 미국의 외계인 드라마 'V'가 떠올랐다. 외계인이 가면을 찢자 그 안에서 흉측한 파충류 모습이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인간 신체구조를 기본으로 해 문어 파충류 양서류 곤충 등 자연계 여러 생물의 모습을 조합한 것이다. 과거 사람들이 샤먼과 정령의 모습을 다양하게 결합한 것과 기본적으로 같다.

왜 사람들은 UFO와 외계인의 존재에 관심을 가질까. 초월자의 존재를 바라는 불완전한 인간 존재가 낳은 산물은 아닐까. 물론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아직 외계인과 만나본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인간의 본능이 낳은 산물로 생각될 뿐이다. 우리가 신비하게 생각하는 고대문명도 사실은 다양한 기후환경에서 자신의 문화를 꽃피운 흔적이다. 바빌론이나 마야의 점성술은 농사를 짓고 생존하는 데 필수적인 기후와 환경을 알려주는 중요한 요소였다. 또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빈번한 범람으로 농경지가 침수된 탓에 발달한 측량기법 덕에 지을 수 있었다.

최근 경우를 봐도, 한때 흔했던 주판이 지금은 보기 힘들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주판도 신기한 유물이 돼 있지 않을까.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고대문명도 단순히 신비와 흥미에 치중하기보다 우리와 똑같은 인류가 다양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나가며 남긴 유산으로 봐야 한다. 단순히 외계인이 고도의 기술을 전해줬다는 믿음은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온 과정을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고대문명이 몇 년에 지구가 망한다고 말했는지 찾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고대문명의 멸망 과정 자체가 곧 우리에게 내리는 경고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지리환경에 순응하지 못하거나 자연에 맞서 자연을 파괴한 문명은 살아남지 못했다. 이 이상 현대문명에 필요한 '예언'이 있을까.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8> 초원의 보검, 세형동검에 내려앉다

- 기원전 1000년께 동아시아 각 지역 청동검 널리 사용

- 동물장식 손잡이 초원지역에 등장
- 전사와 동일시로 숭배의 대상 돼…단순한 무기 그 이상의 의미

- 한반도 출현 조형검파두도 군사적 지도자 탈바꿈 과정 방증

예부터 칼은 사람을 죽이는 무기인 동시에 권력과 신성을 상징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기원전 1000년께가 되면서 동아시아 각 지역은 초원이건 온대지방 할 것 없이 청동검을 널리 쓰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와 고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동검이 비파형동검이라면, 초원지역에서는 동물장식을 손잡이에 새긴 독특한 검이 등장했다.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키타이족의 동검은 '아키나케스' 또는 '아키낙'이라고 불렸고, 사마천의 '사기'에는 흉노의 보검인 '경로도'가 등장한다. 초원민족에게 동검은 단순한 무기 그 이상의 것이었다. 전사를 상징하는 숭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흉노의 동검은 군신(軍神)이었다

 
  초원문화권인 몽골 오르도스 지역에서 나온 새머리장식 동검.
스키타이인들에게 칼은 군신인 아레스(Ares)를 대표하는 상징물이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스키타이인들이 있던 곳에는 반드시 아레스의 신전이 있는데, 그 앞에는 나무 다발을 쌓아놓고 그 위에 오래된 철로 만든 칼을 세웠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를 지낼 때 포로나 희생동물을 다룰 때 반드시 그 칼을 썼는데, 특히 포로의 목을 쳐 그 피를 받아 칼에 뿌렸다 한다. 스키타이인들은 비록 기원전 6~7세기에 그리스 근처인 흑해연안에서 활동했지만, 원래는 시베리아의 유목민족에서 기원한 사람들이다. 즉, 스키타이인들의 칼 숭배는 원래 시베리아 초원민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풍습의 일환인 것이다.

비슷한 풍습이 중국 북방 흉노들 사이에서도 보인다. 흉노족 동검을 한자로 경로(徑路)라고 했다. 글자 그대로 하면 '경로'는 지름길이라는 뜻이지만, 일본학자 에가미 나미오는 이 단어가 투르크 계통 언어로 스키타이족의 전쟁용 칼인 '아키나크'와 같은 어원이라고 주장하면서 스키타이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경로'와 아키나크의 어원이 같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으나, 아마도 칼을 숭배하는 풍습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베리아 초원지역에서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경로'라는 칼은 스키타이보다도 훨씬 전인 기원전 11세기께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 등장하기 때문이다. 역사서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왕은 달기라는 미인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며 주지육림으로 표현되는 극도의 환락에 빠졌다 한다. 이에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군사를 일으켜서 상나라의 주왕을 처단했다고 기록되어있다. 하지만 상나라 주왕이 저질렀다는 악행은 하나라의 폭군인 걸왕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이 같은 기록은 역성혁명을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격하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든 주의 무왕은 상나라 주왕의 시신을 향해 수레 위에서 화살을 세 발 쏜 뒤 수레에서 내려와 경려(輕呂)라는 보검으로 시신을 내리쳤다. 그 다음에 황색 도끼로 주왕의 목을 베어 장대에 꽂아서 사방에 그 죽음을 알렸다. 그런데 이 의식에서 쓴 보검의 이름이 '경려(輕呂)'이니 흉노의 '경로'와 발음이 비슷하다. 주(周)나라는 원래 중국의 서북지방에서 초원민족인 융(戎)족과 잡거하면서 그들의 강력한 무기를 받아들여서 강성할 수 있었으니, 아마도 아주 오래전부터 초원지역에서 신성한 칼을 의미하는 이름이었던 듯 하다.


한반도 고인돌인들의 칼 숭배 흔적

 
  여수 오림동의 고인돌 암각화. 석검(오른쪽)을 거꾸로 꽂아놓고 사람들이 의식을 치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흉노의 보검인 '경로'는 흉노의 왕인 선우가 중요한 맹세를 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즉 약속을 한 후에 선우는 경로로 백마를 죽여 그 피를 술에 섞어서 마시는 의식을 거행했다. 또한 경로는 스키타이의 아레스신처럼 신으로 숭상받았다. 흉노는 두 신을 믿었는데, 그 중 하나는 휴도금인(休屠金人)이라고 하는 불상과 닮은 금제 인물상이고, 또 하나는 바로 경로였다.

중국 기록에는 옹주(雍州) 운양(雲陽)에 흉노가 경로를 모신 제당이 있었는데, 후에 진(秦)에 의해 멸망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역에 해당한다. 흉노의 보검은 어떻게 생겼을까? 아마 황금으로 도금하고 보석이 군데군데 박힌 화려한 칼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키타이인들의 보검도 낡아빠진 철검이었으니 흉노도 비슷했던 것 아닐까. 실제 전쟁에서 수많은 적을 죽인 백전노장의 낡은 칼이 조금 더 군신의 이미지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칼에 특별한 의미와 힘을 부여한 것은 초원민족뿐 아니라 고인돌을 축조했던 한국의 청동기시대도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8세기께 한국의 청동기시대는 커다란 변환기를 맞이했다. 바로 논농사가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지도계급을 위한 고인돌이 생겨나고, 배산임수의 지세에 대규모 마을이 들어서는 등 지금의 농경사회 기반이 형성되었다. 논농사가 확대되면서 각 집단 간의 충돌이 심해지고, 때로는 서로 목숨을 빼앗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숭실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새머리모양 칼끝장식의 조형검파두. 세형동검 끝에 부착돼 있던 것으로 한반도 유물이다.
농사란 사냥과 달라서 가을의 수확을 위해서 1년을 투자해야한다. 하지만 흉작이어서 보릿고개를 넘길 수 없거나 불이라도 나서 곡물창고가 타버린다면 곧 집단의 종말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또 인구가 증가하면서 농사에 유리한 지역을 두고 집단 간의 갈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돌칼 또는 청동검으로 무장하게 되었고, 칼은 지도계급을 상징하는 무기가 되었다. 물론 같은 시기 중원이나 초원지역처럼 거대한 군사집단이 충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단 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무기는 소수의 지배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으며, 무기는 곧 그것을 지닌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게 되었다.

실제로 고인돌 사회에서 검을 숭배했던 자료가 있다. 전남 여수 오림동에서 발굴된 고인돌에는 당시 사람들이 그린 암각화가 새겨져있는데, 석검이 거꾸로 꽂혀있고 그 옆으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숭배하는 광경이 묘사되어있다. 또 경북 김천 송죽리 고인돌에서는 고인돌 바로 앞에 비파형동검이 꽂혀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귀하면서도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을 동검이 무덤 주변에 거꾸로 꽂혀있었으니, 이는 의식을 치르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둔 것 같다.


초원의 동검이 한반도로 전파되다
한국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지던 무렵 초원지역과의 관계는 거의 단절됐다. 따라서 흉노의 경로가 한반도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동검을 숭배하는 사상은 중국 북방에서는 적어도 기원전 12세기부터 존재했다. 또 칼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꼭 '어디에서 어디로 전파'되었음을 따지기 이전에, 원래부터 어느 지역이나 비슷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초원과 한반도 사이에서 검을 숭배하는 데 차이가 있다. 스키타이나 흉노와 같은 초원민족은 검 자체를 전사(戰士)의 상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무속인이나 시베리아 퉁구스계통 민족들의 샤먼들은 칼을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쓸 뿐 그 자체를 신으로 모시지는 않았다. 아마 초원지역은 집단 간의 전쟁이 빈번해서 전사라는 집단이 존재했던 반면,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상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검을 칼집에 꽂으면 손잡이부분만 보이기 때문에 손잡이의 끝 장식은 각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초원의 동검은 주로 전사를 상징하는 새(그리핀)나 동물의 머리를 조각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 기원전 3세기께 초원 동검의 장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북방 초원계 문화의 요소 중 대표로 꼽히는 세형동검의 '조형검파두(새머리형 칼끝장식)'를 말한다. 당시 한국은 다양한 샤먼의 무구와 함께 세형동검을 썼던 세형동검 문화가 널리 분포했다.

조형검파두가 유행하던 기원전 3~1세기는 초원지역에 흉노 세력이 발흥하던 시점이다. 세형동검의 조형검파두가 출현하는 것도 흉노의 동검이 주변으로 확산된 것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의 동검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의 길림성 일대, 남쪽으로는 중국 운남성, 또 일본에서도 널리 발견됐기 때문이다. 또 조형검파두를 부착한 세형동검이 등장하면서 이전에 등장하던 다양한 샤먼의 무구가 사라졌다. 즉 한반도 고대 사회의 지도자가 제사만을 주재하는 데서 탈피해 군사적인 지도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여기서 볼 수 있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29> 차마고도에서 찾은 초원 유목문화와 고인돌

6일부터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차마고도특별전이 열린다. 중국 윈난(雲南)과 쓰촨(四川)의 서부 산악지역에서 출발해 티베트로 이어지는 차마고도는 가파른 산악지역과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험난한 길을 초인적인 노력으로 여행한 상인들의 교역과 문화이야기로 유명하다. 윈난성 산악지역에서 교류는 사방으로 퍼졌으니, 차마고도는 동서를 잇는 교역루트이고 남쪽으로는 마약루트인 골든 트라이앵글로 악명높다. 더욱 놀라운 문화교류 루트는 북쪽이다. 이 경로로 초원 유목민족이 남하했으며, 고인돌로 대표되는 만주와 한반도 청동기문화가 유입됐다.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 지역간 교류는 어떤 경로로 언제 이뤄졌을까.


윈난성은 민족의 용광로, 민족학의 고향

 
  윈난성의 디엔국 유적인 이가산에서 나온 초원계통의 장식. 말타고 사냥하는 역동적 모습에선 시베리아와 오르도스 지역 초원계 청동기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제갈량이 남만 원정을 해서 그 수령인 맹획을 7번 잡았다 놓아준 유명한 대목이 있다. 이 원정 때 제갈량의 부대는 맹획 이외에도 기묘한 여러 민족들과 조우한다. 소설로 각색되었다고는 해도 이때 등장하는 민족들의 모습은 현대 민족학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아주 흥미롭다. (참고로, 한국에서 출판된 '삼국지' 중 이문열의 평역본이 거의 유일하게 생략 없이 이 장면들을 묘사했다.) 다양한 풍습의 그 사람들은 바로 현재의 윈난과 태국 일대 여러 소수 민족이다.

윈난성 동쪽은 평야지대로 주도인 쿤밍을 중심으로 대부분 인구가 몰려 있다. 반면 서부지역은 인구밀도도 희박하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으로 이뤄졌다. 이 산악지역은 글자 그대로 산 하나만 넘으면 언어며 풍속이 완전히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어서 민족학의 고향으로 불린다. 험난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다른 민족과 접촉 없이 자신들만의 문화를 수 천년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시(납서·納西)족은 중국 상나라의 것과 유사한 복골(卜骨)과 독창적 상형문자를 아직도 쓰는가하면, 그들의 일파인 모수오(마사·摩梭))족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완벽한 모계사회인 것으로 유명하다.

 

 

 

 

 

 

 

 

 



 
  윈난성 디엔국의 기마전사를 표현한 유물
중국이 독립한 지 10년도 채 안 된 시점인 1957년 윈난성에서는 약 2000년 전 이 지역에서 번성했던 최초 국가인 디엔국(전국·滇國)의 고분인 석채산 유적이 나왔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청동기 중 당시에는 귀중한 화폐였던 자안패를 담았던 저패기가 있었다. 그리고 제사나 의식에 쓰였던 청동북(동고·銅鼓)에는 제사를 지내고 죄인을 참하는 등 마치 활동사진처럼 역동적으로 당시 모습을 그려넣었다. '민족학의 고향'이라는 윈난성답게 디엔국에 복속된 여러 민족의 모습도 다양하게 묘사되었다. 심지어 그 그림들 속 인물들은 현재의 소수민족과 머리 모양이 똑같아 종족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이 보고서를 본 초원지역 연구자들은 탄성을 금치 못했다. 왜냐하면 석채산 청동기에서 발견된 말 타고 사냥하는 장면, 역동적인 동물장식 등에는 시베리아와 오르도스 지역 초원계 청동기문화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디엔국의 여러 민족 중에는 초원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석채산 유적 이후 디엔국 유적은 다수 발견됐고, 초원에서 내려온 문화는 디엔국 문화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이 밝혀졌다.


초원문화뿐 아니라 다양한 북쪽 문명 혼재

 
  쓰촨 지역에 있는 고인돌
역사기록을 봐도 윈난지역에는 고대부터 초원지역에서 전란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특히 초원계 청동기를 가지고 내려온 사람들로 지목받는 사람들은 복인(濮人), 강인(羌人), 수인(嶲人), 백랑족(白狼族), 교인(巧人) 등이 있다. 이들은 초원에 흉노가 발흥하던 와중에 전란을 피해서 남하했다. 흉노의 침략을 받은 오손(烏孫)이 다시 주변의 산악민족을 침입하자 그를 피해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것이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터진 셈이다.

이유야 어떻든 이들이 가지고 온 초원계 문화는 디엔국 문화로 재탄생했고, 나아가 태국의 동손문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와 유럽까지 영향을 준 초원문화가 남쪽으로도 수 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놀라운 전파를 보노라면 '지구촌'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다.

 



 
  차마고도의 고향인 쓰촨성 서부 지역 고인돌에서 발견된 토기. 이 무문토기는 한국 계통의 무문 토기와 비슷하다.
윈난성에서는 초원문화만 발견된 것이 아니다. 티베트와 맞닿은 윈난과 쓰촨의 서쪽 산악지역은 고인돌(그 지역 학자들은 대석묘라 부름)과 무문토기가 출토된다. 심지어 동검도 그 날이 휘어져 얼핏 보면 비파형동검과 유사한 것이 있을 정도다. 이러한 유사성은 이미 30여년 전부터 중국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엔 유사성이 너무 많았고, 또 윈난 에서는 초원을 비롯해 북쪽에서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내려온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쓰촨대학 고고학과 교수였던 동은정(童恩正)은 1986년 반월형문화전파대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즉, 한반도를 포함한 만주와 초원지역, 쓰촨, 윈난지역은 중원을 감싸듯 반월형을 이루며 서로 빈번하게 문화를 교류했다고 본 것이다. 그 원인을 지리·환경적 요건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울릉도에는 제주도에서 시집온 사람이 많다. 어업을 영위하던 사람들끼리 교류가 많았기 때문인 것과 같다. 중원을 제외하면 그 주변지역은 초원과 산악지역으로 맞닿은 곳이니, 사람들이 이동한다면 비슷한 환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실제 윈난과 쓰촨의 서북쪽은 티베트와 맞닿은 곳으로 수 천 미터의 고원지대다. 과연 이 지역에 한반도와 유사한 청동기시대 문화가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윈난성 중에서도 가기 어려운 지역이라 아직은 직접 확인할 길은 요원하다.


한국 고고학도 체계적 접근 필요

몇년 전 태국에서 다년간 일했던 재야사학자 김병호는 윈난과 태국에 사는 라후족이 고구려 후손이라 주장한 적이 있다. 뒤에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라후족의 풍습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은 유사성이 있었다. 자신들의 고향을 머나먼 북쪽 눈 내리는 곳이라 하며 언어구조도 한국어와 비슷한 라후족의 이야기는 이후 체계적 조사로 이어지지 못하고 한때의 해외토픽으로 끝난 듯 하다. 사실 윈난성 산악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한국 계통의 민족이 일부 유입되었다면 현재까지 고스란히 남아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윈난 지역의 초원민족이 그를 방증한다. 게다가 윈난의 험준한 산악지형은 마치 시간을 멈춘 기계처럼 한번 유입된 민족의 문화를 수 천년간 고스란히 보존한다. 하지만 체계적인 연구 없이는 흥미거리나 소설 소재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비슷한 유물이 나오면 앞뒤 맥락 살피지 않고 '기원지'와 '한국문화의 관련성'을 성급하게 결론내려는 경향이 있다. 단순히 '한국 계통 주민이 있을까'라는 관심 이전에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윈난과 쓰촨의 특수한 고대문화는 이미 세계적인 연구주제라는 점이다. 일본은 윈난성의 청동기를 연구하는 이마무라 게이지가 도쿄대 고고학과 교수로 있고, 러시아의 경우 이 지역을 연구하는 루돌프 이쯔는 윈난성의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교양서로 대중적 인기를 누릴 정도다. 정작 우리나라에는 연구자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개론서마저 없다. 차마고도의 인기가 한국에서도 이 지역 고고학과 민족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윈난성 초원문화가 보여주는 '수천 킬로미터를 뛰어넘는 문화교류'는 우리에게 또 다른 타산지석이 될 수 있다. 한국에도 북방초원문화 요소가 널리 섞여 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경로로 왔는지 구체적 연구는 제대로 돼 있지 않다. 너무 먼 지역과의 교류이기 때문이다. 윈난의 초원문화는 한국과 초원지역의 관련성에 대해 많은 힌트를 줄 것으로 기대한다.

윈난성과 쓰촨성 서부 산악지역은 최근 차마고도의 본향으로 대중의 관심이 높다. 이제 중국 남서부 산간지역으로 한국 고고학계가 관심을 넓혀야 할 것이다. 필자도 박사논문을 쓴 뒤 윈난과 초원의 연관성을 꼭 연구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실제 답사하고 유적을 볼 기회를 접하지 못한 탓에 아직도 숙제다. 2년 뒤 연구년을 맞게 되면 만사 제치고 꼭 조사하고 싶다. 아쉬운 대로 김해박물관의 차마고도특별전에서 갈증을 조금이라도 달래야겠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0> 한글에 숨겨진 초원의 지혜

한글은 왕의 명령에 따라 단기간에 매우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글자로 전 세계적으로도 참 드문 예다. 하지만 약간 시야를 넓혀 보면 자신의 글자를 만드는 전통은 세종대왕 이전에 초원의 여러 제국들에서 시작되었다. 과연 한글의 기원은 초원의 문자와 관련이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또 그 기원은 어디였을까.


글자를 모르던 초원민족

 
  돌궐제국의 비문이다. 윗부분에는 늑대가 그려져 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이 초원민족인 스키타이족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그리스의 여러 도시국가를 소집했을 때의 일이다. 다리우스왕은 보스포르해협을 건넌 후 그곳을 지키는 이오니아 군대에게 60마디가 엮인 매듭을 주면서, 하루에 하나씩 자르고 다 자를 때까지 우리 부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배로 만든 다리를 끊어버리라고 했다. 페르시아나 이오니아 같은 문명국가는 이미 문자가 고도로 발달돼 있었다. 문자가 있음에도 굳이 매듭을 주었던 이유는 초원 지역의 영향으로 중요한 약속은 매듭으로 의사를 소통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매듭으로 배수의 진을 치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초원민족은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던 흉노도 글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매듭을 엮는 식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흉노의 외교문서는 높은 수준의 한문으로 이루어졌지만, 그 문서를 실제로 쓴 사람들은 망명한 중국인들이었다. 아직 흉노인들의 글자는 발견된 바 없다. 흉노 같이 거대한 제국이 글자 없이 어떻게 전체 국가를 다스릴 수 있었을까.

이는 초원제국들의 독특한 지배체제와 연관돼 있다. 즉, 군인 10명은 1명의 장수가 통치하고, 또 10명의 장수는 다시 1명의 장군이 통치하는 일종의 십부장제다. 나라가 아무리 커진다 해도 각 군인이나 백성은 1명의 명령만 듣고 10명만 통제하면 되는 셈이니 굳이 글자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글자 대신 초원민족들은 '탐가'라는 기호를 썼다. 원래는 자신이 기르는 가축이나 말에 찍는 낙인을 말하는데, 무기나 토기에 자기 집단의 상징으로 그려넣기도 했다.

 

 

 

 

 

 

 

 

 

 

 

 

 



돌궐의 글자를 발견하다

 
  니콜라이 야드린체프가 19세기 말 발견한 돌궐비석에 돌궐왕조의 제2대 카간 퀼-테긴의 치적이 돌궐문자로 기록돼 있다. 사진은 퀼-테긴의 두상.
19세기 말 시베리아의 인텔리 중에는 시베리아를 러시아에서 분리시켜서 독립할 것을 주장하며 시베리아의 향토사 연구와 대외활동에 힘쓴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니콜라이 야드린체프(1842~1894)는 본업(?)인 대중계몽보다는 시베리아 고대사 연구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 이유는 그가 몽골의 올혼강 답사 중 발견한 돌궐제국의 비문 때문이다. 특히 그 중 한 개는 제 2 돌궐왕조의 제 2대 카간(왕)인 퀼-테긴의 기념비로 돌궐제국이 자신의 문자를 사용했음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었다.

퀼-테긴의 비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된 광개토왕비와 함께 19세기말 동양 고대사의 최대 성과로 꼽힌다. 더욱이 돌궐의 비문은 중국어도 같이 쓰여 있어 비교적 손쉽게 해독될 수 있었다.

흉노 이래로 초원국가는 한문을 빌려 쓰고 있었으며, 유목을 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돌궐제국은 왜 자신들의 글자를 만들었을까. 돌궐이 문자를 만든 이유는 자기 제국의 권위와 자주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돌궐문은 모두 중국어가 같이 쓰인 비문에서만 발견되며, 그 내용은 돌궐 카간의 치적을 열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돌궐문자는 마치 한글의 ㄱ,ㄴ,ㅁ 같은 간단한 기호로 '알파벳'을 만든 표음문자이다. 돌궐문자를 처음 해독한 덴마크의 언어학자 톰센은 돌궐의 문자를 '룬문자'라 하고 근동의 아람어에서 기원했다고 보았다. 초원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돌궐문자의 기호는 이전 스키타이 문화의 토기나 암각화의 탐가와도 유사하다. 아마도 독자적인 글자체계를 만들 때 이전 시대의 문자부호를 참고했을 것 같다. 좌우간 단기간에 글자를 만들고 사방에 반포할 정도였다면 돌궐제국에는 한문과 다른 글자에 능통한, 마치 집현전 같은 기구가 있었을 것이라 상상해볼 수 있다.


한글과 초원문자는 어떤 연관 있을까

 
  손잡이에 서하문자를 새겨넣은 청동칼(왼쪽)과 원나라 파스파 문자가 새겨진 은판.
문자는 보통 표음문자와 표의문자로 나뉜다. 4대 문명의 글자는 모두 상형문자에서 기원했다. 한자 이집트어 인더스어 모두 상형문자 계통에서 발생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역시 그 출발은 상형문자였다. 다시 말해 모두 표의문자 계열인 것이다. 반면 돌궐 이래로 거란, 서하, 몽골 등 초원제국은 기본적으로 표음문자를 만들었다.

초원제국의 문자들은 서하문자처럼 한자의 획을 조합하거나 간략화해서 만든 것(일본어의 가나도 이에 해당한다)과 부호식으로 글자를 만든 경우로 나뉜다. 글자를 만든 원리가 어떻든지 간에 공통점은 글을 배우는 데에 번잡하지 않고 실용적이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글자의 목적이 선택된 소수의 독점이 아니라 널리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인 '나랏말씀이 중국에 달라…사람마다 널리 편안하게 쓰려 함이라'와 상통한다.

한글의 기원에 대해서는 지금도 많은 논란이 있다. 한글 창제 당시 옛글자를 참고해 만들었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산스크리트어나 단군시대의 문자인 가림토에서 참고했다는 설, 몽골의 파스파문자를 참고했다는 설, 그리고 발성기관을 본따 만들었다는 설 등 분분하다. 사실 현재로서 어느 설이 결정적으로 맞는지 근거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이나 초원의 유목제국들 모두 나라의 기틀이 잡히면서 가장 먼저 자신의 문자를 고안하고, 또 자신의 말로 된 역사를 편찬했다는 점이다. 고려시대에 몽골을 비롯한 여러 초원지역 국가들과 교류했기 때문에 그러한 표음문자가 쓰이는 방법을 참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몽골의 파스파문자, 인도의 구자라트어, 산스크리트어 등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한글과 유사한 자모가 제법 있다. 하지만 기호의 형태가 비슷할 뿐 실제 음가나 언어체계는 완전히 다르다. 아마 특정한 글자를 따왔다기 보다는 다양한 초원국가 언어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우리말에 걸맞은 새로운 문자를 재창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한글의 기원은 다양한 언어의 장점을 취합한 자체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돋보이는 한글의 가치
돌궐에서 시작된 초원지역 표음문자의 전통은 한글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 또한 한글은 초원의 제자(題字)전통을 따른 문자 중 가장 발달한, 유일한 문자이기도 하다. 이전의 서하문, 돌궐문, 여진문, 몽골문, 거란문 등은 이미 사어(死語)가 되었거나 그 쓰임이 거의 없다. 지금도 중국의 내몽고나 영하 등의 자치주에 가면 간판에 한자와 함께 조그맣게 회어나 몽골어를 병기해놓았다. 하지만 그 글자들을 제대로 쓰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조만간 사라지고 한자사용권으로 통합될 운명이다.

이렇듯 세계는 서양의 알파벳문화권, 아시아의 한자문화권, 그리고 러시아문자인 끼릴문화권으로 재편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도 한글의 편리한 체계는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다른 초원제국의 언어가 사라지는 마당에 한글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 중 하나는 한글이 삼국시대 이래로 써오던 향찰을 변형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호를 창조해서 모음과 자음이 결합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 있다. 이로써 다른 초원국가들의 표음문자가 가지는 장점을 갖는 동시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음가 표현의 호환성을 갖추었다. 게다가 한자문화권 안에 있어 한자와도 잘 어울린다.

다양한 글자를 읽는대로 쓰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그 뜻에는 초원민족의 지혜가 녹아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세기 유교가 널리 퍼져 있던 조선에서 이런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을 했던 이유는 그 이전 몽골, 서하 등의 국가가 펼치고자 했던 초원과 농경국가의 완벽한 조화는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지혜는 21세기인 지금에도 더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인 동시에 초원제국 글자 전통을 잇는 마지막 표음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유산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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