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_44

醉月 2011. 2. 7. 08:48

‘미다스의 황금손’ 여기 잠들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44> 문명의 보고, 아나톨리아 문명

» 터키의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전시된 프리기아 왕국의 미다스 왕 밀납인형. 미다스 왕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황금손’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설의 주인공이다.
아라랏산 기슭 도우바야즈트에서 다음 목적지 앙카라로 가기 위해 반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오후 3시20분, 반 공항에서 민항기를 탔다. 화산과 분지, 구릉과 초원이 뒤엉킨 아나톨리아 고원을 가로질러 1시간반만에 앙카라 국제공항에 안착했다. 터키공화국 수도이자 주도인 인구 약 350만(1999년)의 앙카라는 고원 중심부 교통요지다. 옛부터 인접 8개 주와 회랑으로 이어져 아나톨리아 문명의 구심점 구실을 해왔다.

앙카라란 지명은 그리스어로 ‘앙키라’인 ‘닻’이 여기서 발견되었다는 것과 연관 짓기도 한다. 하지만, 특산물인 털깎이용 염소 ‘앙고라’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좀더 신빙성이 있다.

 

기원전 8000년에 시작된 아나톨리아
헬레니즘보다 1600여년 앞선
세계 최초 동서융합문명
아시아와 유럽 잇는 지리적 위치로
찬란한 문화 꽃피워

기원전 2000년께 히타이트 시대부터 알려졌으며 기원전 750년께 세워진 프리가이 왕국 때 역사무대에 점차 등장하게 된다. 기원전 6~5세기,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시대 개통된 ‘왕의 길’(수도 수사에서 아나톨리아 사르디스까지의 2475km) 길목에 있던 앙카라는 교역도시로 떠올랐다. 기원전 3세기 전반에는 유럽으로부터 유입한 가르타(겔트) 일파가 세운 나라의 도읍이 됐다. 그 뒤부터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반도와 운명을 같이하면서 로마 식민지를 거쳐 비잔틴 제국에 편입되었고, 11세기부터 투르크인들이 지배하는 셀주크·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한때 일칸국 속주로 전락하고, 티무르의 핍박도 받았다. 1차 세계대전 뒤 독립 전쟁 근거지가 되고, 공화국 성립 뒤 수도로 선포되면서 그 면모를 더욱 일신했다.

 

한국전 희생된 넋들 기념탑에

이런 역사와 더불어 오늘날 앙카라는 아나톨리아 문명 전반을 보여주는 전시장 구실을 하고 있다. 일행도 그 흡입력에 끌려서 왔다. 8월20일, 우선 한국 공원에 있는 높이 9m의 4층짜리 ‘한국전쟁 참전토이기(터키)기념탑’에 들렀다. 서울-앙카라 자매결연을 계기로 1973년 11월, 1년여간 시공을 거쳐 세워진 탑이다. 옆에 관리사무소로 쓰는 한국식 6각 정자가 있었다. 이어 찾은 곳은 도심 울루스 지역에 있는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이다. 오스만 시대에 지은 앙카라성(히사르) 남쪽에 자리잡은 박물관은 원래 대상들의 숙박소였다가 15세기 귀금속 시장으로 쓰던 두 개 건물을 개축했다. 처음 히타이트 박물관으로 출발했으나 1968년 개축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지금 이름으로 바뀌었다. 중앙에 10개 돔 지붕을 인 건물의 대문, 입구는 검소하나 내부는 굉장하다. 구석기~근대의 귀중한 유물들을 다량 소장해 세계적인 박물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나톨리아란 고대 그리스어의 ‘아나톨리코스’에서 나온 말로 ‘해 뜨는 곳’, 즉 ‘동방’이란 뜻이다. 지리적 범위는 터키와 에게해 연안 섬들, 이라크 북부 지역까지 포함한다. 동서 1600km, 남북 550km에 총면적은 78만㎢(남한의 약 8배)에 이른다. 그 중 97%는 아시아, 3%는 유럽에 속한다. 삼면이 바다로 에워싸인 반도이며, 오늘날 흔히 ‘소아시아’로 부른다. 이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반도에서 일어난 문명을 ‘아나톨리아 문명’이라고 하는데, 세계 문명의 보고로 인정받고 있다. 그 까닭을 박물관에서 확인해 보기로 하자.

아나톨리아 문명사는 대체로 6개 시대로 나눈다. 태동은 신석기-청동기 시대(기원전 8000~2000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콘야의 차탈 호육에서 출토된 기원전 5750년께의 지모신 좌상을 비롯해 하즈랄에서 발견된 기원전 5300년께의 각종 기하학 무늬 채도, 기원전 3000~2000년대 청동 순록상과 지름 6.5cm의 금제 팔찌 등은 유구한 문명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그 다음 히타이트-프리기아 시대(기원전 2000~700년)는 아나톨리아의 첫 통일국가 히타이트 왕국이 출현해 문명의 원형이 이뤄졌다. 금제 인장과 환인(幻人)곡예(서커스)상, 유익인면상, 전차부조상, 각종 각배가 대표적 유물들이다. 200년간의 앗시리아 식민시대 유물로는 점토판 쐐기문자 등이 보인다. 히타이트는 대단히 강성한 나라로 말이 끄는 전차로 이집트 중왕국을 정복하고 100년간 지배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강력한 전쟁수단인 전차가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스키토-시베리아 문화에 딸린 중국 수원 청동기 문화 속에는 세형동검, 날개 두개 달린 화살촉 같은 동전한 히타이트 청동기 문화 흔적이 엿보이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황금 손’이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전설(신라, 유고에도 비슷한 전설이 있음)의 주인공은 바로 프리기아 왕국의 미다스 왕이다.


우라루트-페르시아 시대(기원전 10세기~334년)에는 숱한 왕국들이 흥망을 거듭했다. 이 과정에서 동부 우라루트 왕국이 약 400년간 존속하면서 문명을 꽃피웠으며, 아케메네스조 아래서는 페르시아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화려한 금제 단추와 향로, 금제 보석 장식물은 이 시대의 높은 예술성을 말해준다. 리디아 왕국은 세계에서 처음 금속 화폐를 주조했다. 기원전 세계를 마감한 헬레니즘-로마 시대(기원전 334~기원후 395년)에 아나톨리아는 헬레니즘 중심지로서 그리스-로마 문화뿐 아니라, 동방 문화의 영향도 받았다. 유리 그릇과 그리스 신상 부조물, 각종 금속 주화 등이 이런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서구 기독교 문명이 동전한 비잔틴 시대(395~1071년)엔 기독교 유물들을 많이 남겨놓았다. 셀주크-오스만 터키 시대(1071~1922년)는 서구 기독교 문명을 대신해 동방 투르크인들의 이슬람 문명이 정착하면서 화려한 아랍-이슬람 예술을 수용하고 조화시킨 유물들이 특징적이다.

» 아나톨리아 문명은 신석기-청동기시대(기원전 8000~2000), 히타이트-프리기아시대(기원전 2000~700년),우라루트-페르시아 시대(기원전 10세기~334년),헬레니즘-로마 시대(기원전 334~기원후 395), 비잔틴 시대(395~1071), 셀주크-오스만 튀르크시대(1071~1922)로 대체로 6개 시대로 나누며 흔히 동서 융합문명의 효시라는 헬레니즘보다 무려 1600여년 앞선 인류 최초의 동서 용합문명이다. 터키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에 전시된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순록상(왼쪽)과 지모신 좌상(두번째). 히타이트-프리기아 시대의 곡예(서커스) 부조상(세번째)과 전차 부조상(맨 오른쪽).

유물들이 보여주다시피, 아나톨리아 문명은 인류 최초의 동서융합문명이었다. 인도-유럽어족에 딸린 외래 히타이트인들은 토착문화와 인근 메소포타미아·이집트·에게해 문명 등을 받아들여 철기 문화로 대표되는 특유의 문화를 창출함으로써 융합문명의 원형을 마련했다. 흔히 동서융합문명의 효시라는 헬레니즘보다 무려 1600여년 앞선 것이다. 아나톨리아 문명의 서구적 요소는 기독교 문명의 합류로 더욱 강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문명은 중세 우랄-알타이어족에 딸린 외래 투르크족에 의해 이슬람, 동방 문명의 요소들을 공급 받았다. 동서 문명의 영향과 침투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유례없는 융합문명이 발달한 것이다. 물론 이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지정학적 위치와도 필연적 연관성을 맺고있다.

참관을 마치고 로마 목욕탕 터를 찾았다. 3세기 카라카라 황제가 의학의 신 아스크레피오스를 위해 지은 대형 목욕탕이다. 10세기 때 불타 지금은 열탕과 온탕, 냉탕 등 목욕시설 방 10여개와 수로, 실외 운동장 등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이런 양식의 로마 목욕탕은 후일 터키 목욕문화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어 발길을 옮긴 곳은 국부로 추앙받는 공화국 창건자 아타튀르크(‘국부’란 뜻)의 영묘(아느트카비르)다. 앙카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입구에서 폭 30m, 길이 260m나 되는 진입로를 걸어서 정문에 들어서면 오른쪽 658만㎡터에 묘당과 박물관을 함께 지은 어마어마한 건물이 나타난다. 고대 아나톨리아 건축양식을 본뜬 것으로 1924년 설계해 1944년부터 10년간 지었다. 지하 ‘명예의 전당’에는 아타튀르크의 시신을 안치한 관이 있다. 본래 민속박물관에 있던 시신을 1953년 이장했다. 1층 박물관에는 그의 평생 행적을 소개한 각종 자필문서와 서적, 편지, 소지품, 사진, 외국에서 온 선물, 밀랍상 등이 전시되어 있다.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특히 군인들이 많이 보였다. '승리광장‘이란 드넓은 마당은 높다란 난간으로 에워싸여 있다.

 

국부 아타튀르크-정적 이스미드 묘 대조

박물관 반대쪽, 난간 밑에도 초라한 묘 한기가 보였다. 알고 보니, 공화국 2대 대통령 이스미드의 무덤이다. 원래 그는 아타튀르크의 친우였으나 사이가 벌어져 정적이 되고 만다. 죽은 뒤 두 사람이 묻힌 곳은 너무 대조적이다. 세월의 무상함, 정치의 비정함을 일깨워주는 풍경이다.

9개 ‘세계유산’을 보유한 아나톨리아 문명은 세계 최초의 동서융합 문명으로서 파고 파도 마르지 않는 보고다. 아직 그 바닥이 어디까지인지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인류 공동 유산인 아나톨리아 문명을 보존, 계승하고 가꾸는 것은 역시 인류 공동의 몫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연구가,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동서교역 ‘생명선’ 아나톨리아

유럽과 아시아 이민족 영토 싸움
700여차례 전란겪은 ‘고난의 땅’

아나톨리아는 중국 시안에서 로마까지 1만2000㎞에 이르는 실크로드 육로의 서쪽 끝이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전란만 700차례를 넘는다는 역사적 통계가 말해주듯 실크로드 물자가 유럽으로 흘러가는 ‘생명선’ 아나톨리아는 근대 이전까지 유럽, 아시아의 이민족들 사이에 땅을 뺏는 싸움이 그칠 새가 없었다.

척박한 중동부 산악 고원과 지중해변의 윤택한 서쪽 해안지대가 어우러진 아나톨리아는 본디 정착민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회색 지대였다. 따라서 어느 민족 세력권이 영유하느냐에 따라 실크로드 역사, 나아가 세계사의 양상이 바뀌었다. 인류사의 첫번째 천년 때까지 이곳을 영유했던 로마와 비잔틴 제국, 1071년 비잔틴 제국의 군대와 아나톨리아 동부 만지케르트에서 전투를 벌여 아나톨리아의 새 주인이 된 튀르크인들이 근대 이전까지 세계사를 주도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튀르크가 패배한 뒤 1923년 맺은 로잔 조약은 아나톨리아를 명백한 튀르크인의 땅으로 공인했다. 터키의 초승달 국기에서 바탕색이 피를 상징하는 빨강색인 것은 기실 피비린내 가득한 아나톨리아의 전란사를 함축한 것이기도 하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가는 실크로드 길은 네 갈래로 이집트에서 홍해로 빠지는 해로, 지중해~시리아~이라크 사막 횡단로, 이스탄불~아나톨리아~이란·이라크 산악로, 흑해 북방의 남러시아 돈강 하구~볼가강~중앙아시아의 초원로로 갈라졌다. 이 가운데 아나톨리아 고원을 거쳐 이라크, 이란으로 빠지는 산악 육로는 이동거리의 효율성이나 안전도 측면에서 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길이었다. 13세기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며 네개 통로를 활짝 열었던 몽골 제국의 시대가 지나자 이들 육로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수중에 들어가버린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중세 이래 가장 유력한 아시아 교역 창구였던 아나톨리아 고원을 봉쇄한 것은 실크로드 교류를 중국-아랍권 교역망으로만 국한시키는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대서양이나 아프리카 남단을 도는 인도양 항로를 통해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우회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노력이 신대륙 발견을 촉진하고, 실크로드사와 세계 경제사의 흐름을 전혀 다른 양상으로 반전시켰음은 잘 알려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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