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윤제학_백봉산 묘적사

醉月 2011. 2. 8. 09:00

백봉산 묘적사

진정한 적멸의 빛은 그림자를 상대한 ‘빛’이 아닙니다

▲ 묘적사 계곡은 사람들 사이로 간신히 흐르고 있었지만, 묘적사엔 고요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당엔 적멸의 빛이 한가롭습니다. 적멸의 빛은 선악을 다 뛰어넘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부처 마음입니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인간을 특징짓는 말 가운데 하나로, ‘유희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호이징가(Huizinga Johan· 1872-1945)가 제시한 인간 규정입니다. 호이징가는 유희에서 문화의 기원을 찾으면서 호모 루덴스라는 말을 했는데, 문화를 유희의 상위에 두는 기왕의 견해를 뒤집으면서 이 말을 처음 썼다고 합니다. 원초적으로 문화는 유희로서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수긍이 가는 말입니다. 이성을 인간의 고유한 특징으로 본 호모 사피엔스라는 인간 규정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호모 루덴스라는 말을 ‘놀 줄 아는 인간’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쉽게 개념이 잡히지 않습니까? 물론 놀이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닙니다. 곰도 원숭이도 개도 고양이도, ‘놀 줄’ 압니다. 심지어는 머리 나쁜 얘기만 나오면 비유로 드는 닭도 사람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 묘적사 대중방. 다듬지 않은 나무로 지은 집이다. 툇마루에 앉으면 누구나 아이 같은 마음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놀이에 대한 집착은 유별납니다. 로또까지 갈 것도 없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성인 오락실을 보십시오. 놀이로 사냥을 즐기는 동물도 인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가 좀 그렇습니다만, 종족 보존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 암수가 엉키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할 겁니다. 인간은 발정기가 없는 동물입니다.


▲ 낭랑한 독경 소리가 허공 가득 퍼져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평안이 깃들기를….
변죽이 길었습니다. 지나친 일반화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 사회의 성숙도를 알려면 구성원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노는지를 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막 전쟁 치르듯 휴가와 피서를 끝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머니 사정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기 싫어서, 더위를 피해서 도망 다니는 것(避暑) 보다야 더위를 잊는 것(忘暑)이 몇 길 위라는 말로 올 여름도 그냥 넘겼습니다. 그러긴 했지만 묘적사 가는 길은 좀 설레었습니다. 서울 근교인데다 남양주 일대에서는 이름난 묘적사 계곡이니 만큼 탁족(濯足)이라도 하면서 한가(閑暇)를 즐길 수 있겠거니 하고 말입니다. 숟가락 하나 더 올리는 심정으로 가까운 후배도 한 명 불렀습니다.


덕소역을 지나 86번 국도를 타고 묘적사 계곡 입구에 닿을 때까지 피서철 치고는 길 사정도 좋았습니다. 계곡 입구의 구멍가게에서 음료수까지 준비했습니다. 20년 전쯤으로 돌아간 듯한 가게 분위기도 기분을 좋게 했습니다. 거의 소풍 가는 아이 기분으로 묘적사 계곡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역시, 절까지 1.6km에 이르는 계곡 옆 찻길은 양쪽 모두 차들로 빼곡했습니다. 입구에서 차를 버리고 걷기로 했습니다.

 

 

 

 

 

 

 


▲ 대중방 뒤의 연못. 부처님과 물고기는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계곡엔 사람들로 빼곡했습니다. 아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는 표현이 옳겠습니다. 넓고 깊은 계곡은 아니었습니다만 숲이 무성해서 더위를 식히기에는 그만이었습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도 아이들 웃음소리는 새 소리 같았습니다. 그래, 이 예쁜 것들을 위해서 어른들이 끌려나왔겠지. 그래, 서민들에게 이런 즐거움조차 없다면 산다는 일이 너무 팍팍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나 또 그러나, 올라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은 모습들이 너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아래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도 개고기의 핏물을 천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있었고(개고기 먹는 행위에 대해서 시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세제로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슬펐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모습이 슬펐습니다. 그 모습이 아이들에까지 세습될까 봐 우울했습니다.


이런 인디언 격언이 있습니다. “만일 가난한 자가 외관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난하다면, 죽는 날까지 가난한 사람 말고 다른 무엇이 되겠는가?”(E. T. 시튼 편. <인디언의 복음>) 가난에 우아함이 깃들면 청빈이 됩니다. 가난해도 품격을 잃지 않을 수는 정녕 없는 것인지요.

 

 

 

 

 

 

 

 


▲ 기도하는 꼬마 불자들. 이 아이들만큼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세상에서 살기를 기원해 본다.
마침내 전나무숲 사이로 묘적사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계곡에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유명 관광지의 사찰보다도 더 한가했습니다. 계곡이 먹고 마시는 사람들로 무아경이었다면, 그곳은 말 그대로 신묘(神妙)하리만큼 적막(寂寞)했습니다. 의아할 정도로 계곡의 사람들은 절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가끔 연못을 기웃거리다 절 마당을 둘러보는 사람들이나 아예 윗옷을 벗어제낀 채 도량을 활보하던 사람들이 스님의 나직한 꾸지람을 듣고 사라지는 정도였습니다. 남의 집 마당을 기웃거려도 이럴 수는 없을 겁니다.


계곡과 묘적사의 극명한 대비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역시 세상은 빛과 그림자로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지옥과 극락을 품고 살듯이 말입니다.


니르바나를 생각해 봅니다. 본디 니르바나는 불어 끈다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것이지요. 그 상태가 곧 적(寂)입니다.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 묘적사의 주불전인 대웅전과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팔각칠층석탑(향토유적 제1호)
묘적사의 적막이 제게 말합니다. 개고기의 핏물을 보고 분개하는 네 마음도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진정한 적멸의 빛은 그림자를 상대한 빛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겠습니다. 묘적사는 세상의 들끓는 욕망과 번뇌를 비추는 거울이었습니다.


 

묘적사의 역사는 기록으로 전하여 오지 않습니다. 절에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대(661-690)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 하나 문헌 근거는 없습니다. 초창 이후의 문헌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양주목 불우(佛宇)조에 ‘묘적사는 묘적산에 있는데, (이에 관해) 김수온(金守溫)이 기록한 글이 있다(妙寂寺在妙寂山金守溫記)’고 적혀 있습니다만, 그 기록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또 같은 책의 양주목 산천(山川)조에는 소요산과 나란히 언급하면서, ‘묘적산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때가 1484년(성종 17)이니 최소한 그 전에는 절이 존재했다는 얘깁니다.

 

 

 

 

 

 

 

 

 

 


 

▲ 몸돌을 잃은 탑의 옥개석과 상륜부. 묘적사의 지워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한편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절을 1974년부터 오늘의 모습으로 가꾸어 온 주지 스님은 원효 스님의 창건설을 믿고 있습니다. 마을에 구전되는 얘기에 의하면, 요석 공주가 이곳에 머무는 원효 스님을 찾아와서는 차마 절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마을에 머물며 간절히 만날 수 있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곳을 원터라고 부른답니다. 그런데, 이를 안 원효 스님이 소요산 자재암으로 피했지만 결국 그곳에서는 요석 공주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소요산과 묘적산이 나란히 언급되는 걸로 보아, 당시 지역민들에게는 사실로 받아들여진 설화일 것 같습니다.


 

또한 스님은 지역의 노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통해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이곳이 왕의 밀명에 의해 승려로 위장한 군사 양성소였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절 앞의 공터에서 화살촉이 발굴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호국도량으로 복원하기 위해 절집을 일으켜 왔으나 그 뜻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로선 사실 여부를 떠나 호젓한 도량 하나를 얻은 복을 누립니다.

 

 

 

 

 

 

 

 


 

▲ 다가가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문, 그것이 법문(法門)입니다.
절의 연대를 더 위로 볼 수 있는 근거는, 고려 양식을 모방한 대웅전 앞의 팔각칠층석탑(향토유적 제1호)이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대웅전 앞의 장대석으로 보면 최소한 조선 초기에 왕실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됐거나 그보다 훨씬 전에 초창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궁궐 외에는 다듬은 장대석을 쓸 수 없었습니다.


 

묘적사는 작은 절입니다만 아주 독특한 건물 양식으로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하선실과 요사가 바른 네모꼴 마당을 이루었는데,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기둥과 부재들이 다듬지 않은 나무로 지어져 있습니다. 바라보는 이들을 절로 자연과 동화되게 합니다. 수호신장처럼 선 도량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가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황홀한 가을의 정취를 선물한다 합니다.


 

대웅전 오른쪽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보리수를 따라가 보면, 산령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납니다. 휘도는 모양새가, 짧은 길을 대단히 깊어 보이게 만듭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분위기의 산령각 마당도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입니다. 묘적사는 그렇게, 이 세상의 들끓는 욕망을 응시하게 하는 거울로 서 있습니다.


 

가을이 익어 갈 무렵 다시 묘적사를 찾아서, 아무도 없는 계곡물에, 내 마음속 그림자가 얼마나 짙은지를 비춰 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