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정찬구 교수의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_01

醉月 2011. 2. 10. 08:48
<1> 바다가 기른 영웅, 탈해(脫解)
바다를 넘어 영웅, 민중의 고해를 읽어 神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1> 바다가 기른 영웅, 탈해(脫解) 

 탈해가 아진포에서 토함산으로 물길을 따라 걸어 왔을 길이다. 탈해는 이 길을 따라 올라와서 토함산에 7일 동안 머물다가 지세를 살펴보았다. 호공의 집을 빼앗고 마침내 신라의 공주를 얻는다.   

 

탈해탄강유허가 있는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의 포구. 그러나 이곳은 '삼국유사'의 아진포가 아니다. 아진포는 더 아래쪽의 하서리다. 조선 고종 때 석씨(昔氏) 문중이 여기에 기념비를 세우면서 잘못 알려진 것. 물론 이 포구에서도 좁은 물길을 따라 토함산에 이를 수 있으나, 하서리 쪽이 토함산으로 가기에 훨씬 알맞다.

  

탈해왕릉. 경주시 동천동에 있다. 그러나 민중들은 탈해가 신이 되어 토함산에 머문다고 여겼다 삼국유사는 민족의 고전이다. 삼국사기가 엄정한 '머리'라면 삼국유사는 울고 웃는 가슴이다. 아직 그 깊이와 넓이를 마저 알 수 없는 가슴인 삼국유사, 그 바다 이야기에 빠져본다.

삼국유사 속의 바다 이야기는 민중들의 생생한 이야기다. 지식인들의 표백된 해석이 아니라 민중들이 생동감있게 즐기던 당대의 이야기들이다. 일연 스님의 붓이 닿기 전까지, 그 이야기들은 애초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기려던 것이 아니라 나날을 사는 민중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으로 섬겼던 것들이다. 글쓰기가 아닌 말하기, 이 부분이 '삼국유사' 인문주의의 핵심이다. 그 스토리텔링 속에서 삼국유사의 바다가 출렁인다. 왜 바다 이야기인가. 부산하면 바다이지 않은가.

그리스 신화의 저 유명한 트로이 전쟁에는 무수한 영웅들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간계와 변장의 화신으로 불리는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이 있다.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서 10년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숨은 주역이다. 그런 오디세우스도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데는 무려 10년이 걸렸다. 바다를 떠도느라 그렇게 되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바다는 그렇게 영웅조차 고난과 시련을 겪게 하는 무대다.

신라에도 그런 바다를 건너온 영웅이 있다. 바로 탈해(脫解)다. 탈해의 영웅적 면모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민중들의 이야기 속에 잘 드러나 있다. 탈해는 57년에 62세로 왕위에 올랐고, 23년 동안 재위하였다가 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검은 소천구(疏川丘)라는 곳에 장사지냈는데, 나중에 신령이 되어 나타나서 "내 뼈를 삼가서 묻고 장례지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파내어 보니, 두개골은 둘레가 석 자 두 치, 몸의 뼈는 길이가 아홉 자 일곱 치였다고 한다.

· 바다에 버려진 영웅

탈해가 살았던 때는 중국의 한대(漢代)에 해당한다. 그때 한 자는 지금의 30cm가 아니라 대략 22.5cm였다. 그렇게 보면 탈해의 머리는 70cm, 몸은 225cm 정도가 된다. 엄청난 대두요 어마어마한 거구였다. 게다가 "치아는 엉기어 한 덩어리 같았고, 뼈는 마디가 모두 이어져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천하에 대적할 자 없는 역사(力士)"의 골격이다. 그러나 과연 힘만으로 영웅이 될까?

역사(力士)였던 헤라클레스도 그러했고 오디세우스도 그러했듯이, 고대의 영웅은 주로 막강한 힘과 함께 용기와 지혜도 아울러 지녔다. 그리고 고대의 영웅들은 그런 능력을 타고났다. 타고난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 모험을 하고 고난을 겪을 뿐이다. 그런데 탈해는 고대의 영웅이면서 타고나기보다는 만들어진 영웅에 가깝다. 탈해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아득하게 펼쳐진 위험천만한 바다, 그 바다다. 그리고 진정한 영웅이 되기 위해서 먼저 그 바다에 버려졌다.

수로왕 때, 가락국의 앞바다에 배가 와서 머물렀다. 수로왕이 신하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그 배를 맞으려 하였으나, 배는 달아나서 계림(鷄林)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에 이르렀다. 지금의 경주 양남면 하서리가 아진포에 해당한다. 거기서 고기잡이 노파가 배를 끌어서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고 배 안에는 궤짝이 하나 있었다. 궤짝은 길이가 스무 자, 폭은 열세 자였다. 그 궤짝에서 단정한 사내아이와 칠보, 노비들이 있었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탈해다. 궤짝은 배 안에 마련된 방이었으리라.

노파가 7일 동안 대접하였더니, 아이는 자신의 내력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자신은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으로, 부친은 그 나라의 왕인 함달파(含達婆)이고, 모친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였다. 오래도록 자식이 없다가 7년만에 얻은 것이 큰 알 하나였다. 그래서 왕과 신하들은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서 큰 궤짝을 만들어 거기에 알과 함께 칠보와 노비들을 넣어서 배에 실어 띄웠고, 마침내 아진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배에 탈 때는 알이었는데, 노파가 궤짝을 열었을 때는 사내아이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탈해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서 어엿한 사내로 성장했음을 상징한다.

· 바다가 기른 영웅

바다는 아무나 나설 수 있는 그런 공간이 아니다. 가까운 바다조차도 늘 목숨을 위협한다. 더구나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는 크나큰 용기와 탁월한 지혜를 갖추지 않고서는 살아남기도 어렵지만,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바다는 자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죽음과 공포의 바다, 그러나 자유의 바다. 그래서 용기와 지혜가 요구되는 바다. 탈해는 그런 바다를 건넜다. 그것도 알에서 갓 깨어난 때부터 말이다. 한 마디로 탈해는 바다에서 자랐다. 그리고 바다에서 배웠다.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고 노래했지만, 탈해는 "나를 키운 건 오롯이 바다였다"고 말했으리라.

그러면 탈해가 건넌 바다는 어떤 바다였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탈해는 다파나국에서 태어났고, 그 나라는 왜국의 동북쪽 천 리 밖에 있다"고 적고 있다. 용성국이 아닌 다파나국이고, 위치도 왜국의 동북쪽이다.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다. '다파나'는 산스크리트에 가까운 음운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 일연도 용성국이 "왜국의 동북쪽에 있다"고, 작은 글씨로 주석을 달았다. 용성국이라면 바다의 용왕과 관련이 있고, 음운상으로 왜국 동북쪽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니, 이 자체로는 파탄이 없다. 그렇지만 이를 주석으로 처리했다는 데서, 오히려 일연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기존의 견해를 마뜩찮게 여겼음을 읽을 수 있다.

실제로 신라 주위의 해류를 아는 이라면, 탈해가 왜국 동북쪽이 아니라 남쪽 어딘가에서 왔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탈해 이야기를 전승하던 민중들은 실상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 속에서 탈해의 배는 먼저 가락국 쪽으로 갔다가 이어서 신라 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는 결코 동북쪽에서 온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항해술과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주로 해안선을 따라 안전하게, 또 해류를 거스르지 않고 따르면서 항해를 했다.

우리나라는 삼면의 바다가 쿠로시오 해류와 쓰시마 난류의 영향을 받는다. 그 해류와 난류를 따르면, 탈해의 배는 남쪽에서 올라와서 남해안에 이르렀다가 동해안으로 나아가게 된다.(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였던 허황옥도 비슷한 바닷길로 왔으리라.) 이는 저 옛날 남해안과 동해안의 뱃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따라서 바다 가까이서 생활했던 민중들은 탈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그런 경험들을 그대로 되살려냈다. 또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그런 바다를 건너온 탈해를 특히 숭앙했던 것이리라.

· 영웅의 거듭나기, 고대에서 중세로

노파의 대접을 받은 탈해는 곧장 토함산에 올랐다. 탈해의 배가 머물렀던 아진포에서 토함산까지는 좁은 물길이 그 산자락까지 이어져 있다. 아마도 탈해는 그 물길을 따라 곧장 토함산에 이르렀을 것이다. 토함산에 오른 탈해는 돌무덤을 쌓고 그 안에서 7일 동안 또 머물렀다. 왜 그랬을까?

탈해는 토함산에서 지세를 살펴보고, 오래 살 만한 땅을 찾아냈다. 그곳은 호공(瓠公)의 집이었다. 탈해는 꾀를 써서 그 집을 빼앗았는데, 이 일로 해서 남해왕의 눈에 띄어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다.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행위가 오늘날에는 도둑질이고 사기가 되지만, 고대에는 지혜 겨루기를 통해서 얻은 엄연한 승리였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속임수를 쓰는 일은 고대 영웅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탈해 또한 고대의 영웅이었으므로 그런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탈해는 어떻게 해서 지세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까? 역시 바다다.

탈해는 망망한 대해를 건너면서 하늘을 보고 해안선을 보고 물의 흐름을 보았을 것이다. 지도가 없던 시절에 바닷길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 체득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살아남기 위해서 온힘을 다 기울였을 것이다. 더구나 탈해는 영웅이었으니, 남들이 알지 못하는 지식을 습득했을 것이다. 그런 탈해도 땅에 발을 딛자마자 지리(地理)를 통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지리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민중은 그것을 "돌무덤 속에서 7일을 보내는 것"으로 대체하였다. 말하자면, 바닷길을 아는 자, 특히 영웅이라면 지리를 쉽사리 꿰뚫을 수 있으리라고 민중들은 여겼던 것이다. 여기서도 탈해는 단순히 타고난 능력자가 아니라 스스로 터득한 영웅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고대의 영웅에서 중세의 영웅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야기를 전승하던 주체인 민중들의 삶이 고대 신라에서 중세 고려로 전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영웅에서 신으로

바닷가에서 살았던 민중들은 누구보다도 바다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양식과 함께 죽음이 기다리는 바다! 공포이면서 자유이기도 한 바다! 탈해는 그런 바다를 건너 왔다. 바다! 그렇다, 불교에서는 고뇌의 연속인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했다. 그 고해를 건너서 피안의 세계, 즉 열반과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고 가르치는 것이 불교다. 탈해 이야기를 전승하던 민중들은 신라와 고려의 민중들이었고 불교의 나라에서 살았으니, 탈해를 통해 고해를 건넌 부처나 보살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탈해'를 거꾸로 하면 '해탈(解脫)'이다. 한자어도 똑같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민중들이 자신들의 염원을 담으려 한 것일까?

'삼국유사'의 '제4탈해왕'조는 탈해 스스로 신이 되어 나타나서 "내 뼈를 동악(東岳)에 안치하라"고 이르는 데서 이야기를 끝맺는다. 알에서 태어나 버림받은 이가 영웅이 되고 다시 신이 되었다. 탈해가 스스로 신이 되었다고 이야기되지만, 실은 민중들이 그를 신으로 만들었다. 이야기는 민중들이 엮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민중들은 알았다. 탈해를 어느 곳에 신으로 모실 지를. 동악은 곧 토함산이다. 동악은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산이요, 저쪽 바다와 이쪽 땅을 아우르는 거룩한 공간이다. 그러니 바다에서 건너 와서 땅의 왕이 된 영웅이 머물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 아니었겠는가.

 

<2> 바다 건너 문화를 건네 준 연오랑세오녀
평범한 그래서 민중의 영웅이 된 부부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  바다 건너 문화를 건네 준 연오랑세오녀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2> 바다 건너 문화를 건네 준 연오랑세오녀
  시마네현(島根縣) 이즈모시 히노미사키 곶.(버나드 가뇽 작.) 이 북쪽이 바로 동해다. 시마네현은 독도 문제로 우리에게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그런데 이즈모는 '신들의 고향'이라 불리는 곳인데, 그 신들이 대개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알려져 있다

바다는 늘 사람을 유혹한다. 뛰어들고 싶은 마음을 일게 한다. 특히 동해안은 차를 몰고 가더라도 내내 바다를 곁에 끼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일지 않던 그 마음이 어느새 슬며시 고개를 들고는 끝내 모험을 떠나도록 부추긴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인다. 바다는 그 끝을 보여주지 않고 그 속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과 죽음 그리고 재생을 파도 아래에 감추고 있는 바다. 그 바다는 누구나 바라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도전과 모험의 공간이다. 그래서 바다를 건넌 사람은 영웅이 된다. 그 옛날 그런 영웅이 이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었다. 이제 그네들을 만나러 간다.

부산을 떠나 경주를 가로질러서 감포로 갔다가 거기서 곧장 북쪽으로 꺾었다. 해를 등 뒤에 두고서 해안선을 따라 갔더니, 금방 포항이다. 다시 더 가니 구룡포가 나오고, 이윽고 호미곶이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 속에서 호미곶은 마치 범이 바다에 꼬리를 담근 채 낮잠을 즐기는 듯 한산하다. 거기 호미곶에 해맞이광장이 있고, 그 광장 한가운데에 서로 마주 서 있는 부부의 동상이 있다. 연오랑과 세오녀다.



· 이야기가 역사로

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서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 이야기' 다음에 나온다. 제왕의 역사 속에 자리하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사실 '연오랑세오녀' 이야기가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동해의 바닷가에 살았던 부부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너 일본에 가서 왕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중세라고는 하지만 지식인들이 사실로서 믿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던 내용이다. 하물며 관찬(官撰)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실릴 리는 더욱 만무하다.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삼국유사'가 매우 독특한 역사서로서 평가받는 것이다.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은 왜 이 이야기를 실었는가? 제왕들의 이야기들 속에 버젓이 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삼국유사'의 명칭을 찬찬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제목의 '유사(遺事)'는 이중적인 뜻을 담고 있다. 먼저 "버려진 일"을 뜻한다. 누가 버렸으며, 무엇을 버렸는가? 지배계층이 버렸고, 민중들의 삶과 그 이야기들을 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관찬 역사서에서 "빠지거나 남은 일"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관찬 역사서에서 버려진 삼국의 일들을 모아 엮은 것을 의미한다.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역사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역사가 사실의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심각한 오해다. 역사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이해 또는 인식'이다. 사실은 일어난 일이고, 역사는 기록된 일이다. 사실과 역사 사이에는 사관(史官)이라는 역사서 편찬자가 개입한다. 따라서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과 취사 선택에 의해서 기록된 것일 뿐이다. 과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은 그 일이 일어나자마자 사라졌다. 다만 누군가가 특정한 관점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서술한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중세는 상층의 지식인이 지배하고 하층의 민중들이 지배를 받던 시대였다. 상층 지식인들에게 민중은 다스려져야 할 대상이며 지배층에 봉사해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의 삶, 그들이 남긴 이야기들이 어찌 역사 속에 자리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설화집에나 남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나 사실의 차원에서는 민중도 엄연히 역사의 주역이었다. 일연 스님은 사실에서 주역이었던 민중의 역사, 그리고 진실로서 이야기의 역사를 쓰려고 했고, 그 결과물이 '삼국유사'다. '연오랑세오녀'는 그렇게 민중이 전하는 이야기의 꼴로 남겨진 역사다.



· 부부의 사랑을 넘어서

그런데 호미곶 해맞이광장에 서 있는 연오랑과 세오녀는 민중의 이야기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느낌을 준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서로 마주 서서 팔을 뻗고 있는 형상은 단순히 애틋한 부부의 이야기쯤으로 여기게끔 만든다. 아무런 설명이 없다면, 견우와 직녀로 오해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그러나 '연오랑세오녀'는 단순히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1년에 한 번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짓눌려서 비극적인 사랑을 하다가 결국 그 한으로 하늘의 별이 된 그런 사랑 이야기와는 아주 다르다.

연오랑과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그러자 일관(日官)이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려왔다가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겼다"고 왕에게 아뢰었다. 연오랑과 세오녀는 해와 달의 정기를 타고난 존재였다. 이는 얼핏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와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에서는 오누이가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되었다. 그러나 연오랑과 세오녀는 해와 달의 정기가 땅에 내려와서 된 사람이다. 사람이 해와 달이 되었다는 것은 완전한 허구이며, 단순한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러나 해와 달의 정기가 땅에 내려와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상징이다. 즉, 연오랑과 세오녀가 영웅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연오랑과 세오녀는 어떠한 영웅인가?

그 전에 먼저 오누이가 아닌 부부가 갖는 의미를 한 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사실 해와 달에 관한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퍼져 있는데, 대개 오누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다. 오누이와 부부, 둘 다 남녀 사이의 관계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그렇지만 오누이는 핏줄로 맺어진 생물학적 관계이고, 부부는 핏줄이 다른 남녀가 만나서 함께 생활하는 사회학적 관계다. 말하자면 오누이가 자연을 의미한다면 부부는 문명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연오랑세오녀'에는 부부가 그런 문명의 표상으로 묘사되고 있다.



· 바다를 건너간 부부

이야기에서는 연오랑이 먼저 바다를 건너갔다. 바위 하나가 연오랑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고 하는데, 바위는 곧 배를 상징한다. 일본에서 사람들은 연오랑을 "비상한 사람이다"고 말하고는 그를 왕으로 세웠다. 마치 바다를 건너온 탈해가 왕이 된 것처럼. '연오랑세오녀'가 탈해 이야기를 하나 건너뛰어서 적혀 있다는 점도 어딘지 의미심장하다.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이 일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때인 158년에 있었던 일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안다. 호미곶이 있는 포항에서 해류와 바람을 잘 타면 일본의 서쪽 시마네현(島根縣)에 닿는다는 것을. 그러나 그 옛날에는 이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드물었던 만큼 그런 사람은 대단한 존재로 여겨졌을 것이다.

해류와 바람을 읽는 일은 매우 어렵다. 해류와 바람은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르다. 더구나 바다라는 게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곳임에랴. 그런 바다의 생리를 알려면 물려받은 지혜도 있어야 하지만, 그 자신이 직접 경험을 통해 체득해야만 한다. 연오랑은 바로 그런 뱃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오랑만 바닷길을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세오녀 또한 바닷길을 알고 있었다. 이야기에서는 세오녀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하고 그 바위에 올랐으며, 그 바위가 또 연오랑을 싣고 간 것처럼 세오녀도 싣고 갔다고 하였다. 벗어 놓은 신발은 연오랑이 평소에 바다에 대해서 들려주었던 지식, 구체적으로는 해류와 바람을 읽는 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리라.

남편이 가르쳐 준 그 방식으로 바다를 건너간 세오녀는 연오랑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여인이 홀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으니. 사람들이 세오녀를 귀비(貴妃)로 삼은 것은 단순히 연오랑의 아내였기 때문이 아니다. 세오녀가 바로 탁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 민중의 영웅, 문화 영웅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다를 건너가자 해와 달이 빛을 잃었고, 이에 왕은 사자를 보내어 두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연오랑은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아내인 세오녀가 손수 짠 세초(細초)를 주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라고 하였다. 세초는 고운 비단이다. 이 비단은 고대와 중세 내내 아주 귀한 물건이었고, 그 자체가 문명을 상징한다. 신라의 왕은 지금의 포항시 오천읍 용덕리 일월지(해병대 제9227부대 안에 있다)에서 제사를 지내고 근처에 곳간을 마련해서 비단을 보관했다고 한다.

'대지'의 작가인 펄벅 여사가 1960년대 한국에 왔다가 경탄을 금치 못한 것이 한국 여인네들의 바느질 솜씨였다. 우리에게는 평범한 것이 그이의 눈에는 예술로 비쳤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한국 여인네들의 조상이 바로 세오녀다. 세오녀는 우리의 직녀다. 그러나 사랑에 애달파 하는 여인이 아니라, 문화를 한 몸에 갈무리하고 그 문화를 전한 여인이었다.

일본의 고대에는 한반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가서 문화를 전하고 지배층을 이루었다. 그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승려와 같은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 가운데도 앞선 문화를 체득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문화를 전한 이들이 분명 있었다. 바로 연오랑 세오녀 같이. 이들이야말로 민중의 영웅이요, 전쟁 영웅이 아닌 문화 영웅이었다.

 

<3> 바다에 잠든 통일 외교의 영웅, 김인문
적을 감동시켜 돌려보낸 것은 굴욕이 아니었다

 

[삼국유사 속 바다이야기] <3>  바다에 잠든 통일 외교의 영웅, 김인문 

 

김인문의 묘비를 등에 업었던 귀부(龜趺). 이제는 김인문의 묘를 가만히 지키고 있다.

토요일. 며칠 동안 봄답지 않게 을씨년스럽더니, 오랜만에 햇살이 환했다. 요즘 날씨를 봐서 또 언제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릴지 몰라서 냉큼 일어나서 길을 나서기로 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서 곧장 노포동을 지나 울산으로 갔다. 거기서 장생포 쪽으로 가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계속 북쪽으로 내달리니 경주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있는 월성에 채 이르기 전에 도로 오른편에 사천왕사(四天王寺)라고 씌어 있는 푯말이 보인다.

어느새, 해거름이다. 지는 햇살의 흐릿함 아래에 놓인 유적지는 오히려 시간을 거슬러 오르게 하는, 묘한 울림을 전해 준다. 고고학이나 역사학이 객관적 대상을 다루지만, 그 대상 안에는 과거 어느 때엔가 숨을 쉬고 살았던 사람들의 열망과 고통이 배어 있다. 그런 속사정을 느끼지 않고서야 어찌 숨겨진 진실에 다가갈 수 있으랴.

· 적선들을 침몰시킨 사천왕사

사천왕사에 대해서 '삼국사기'는 '신라본기'의 문무왕 19년(679)조에 "사천왕사가 낙성되었다"라고만 적고 있다. 원래가 역사 기록이란 읽는 이가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하지만, 이 구절은 그래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략하고 무미건조하다. 사천왕사란 말 그대로 사천왕이 지켜주는 절이라는 뜻이다. 사천왕은 사방에서 불법과 그 불법을 따르는 이들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다. 사찰마다 입구에 들어서다 보면 만나게 되는,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서 사나운 형상으로 노려보는 험상궂은 이들이 바로 사천왕이다.

사천왕은 본래 인도 신화 속의 수호신들이었다. 불교가 인도에서 탄생한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수용되어서 변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먼 인도의 수호신이 어느새 동방의 끄트머리 신라에 와서 누군가를 또는 무언가를 지키려고 서 있다니,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정말로 사천왕사로 무엇을 지키려고 하였을까? 바로 당나라의 군사들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문무왕법민 조에 자세하게 나온다.

668년에 고구려가 멸망함으로써 삼국은 통일된 듯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당 황제의 명으로 당의 군사들 가운데 일부가 이 땅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그 군사들과 신라의 군사들이 충돌하였고, 이를 기회로 당 황제는 50만 대군을 조련하여 신라로 보내려 하였다. 미리 소식을 들은 신라에서는 신이한 비법을 익힌 명랑(明朗) 법사의 조언을 듣고 이 사천왕사를 지었다.

드디어 당나라 군사들이 배를 타고 국경 근처에 이르렀을 때, 명랑 법사는 문두루법이라는 비법을 닦았다. 이에 당나라 배들은 모두 바다에 침몰하였다. 바로 불법의 수호신인 사천왕이 서쪽 바다를 지켜준 것이다. 그런데 이 사천왕사는 낭산(狼山)의 남쪽 자락,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던 곳에 서 있다. 낭산은 신라의 토착신이 머물었던 신령한 산이고, 신유림도 토착의 신이 노닐었던 숲이다. 불교라는 보편적인 종교도 토착의 신앙과 만나서 어우러지지 않고서는 제 위력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뜻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 외교적 술수가 낳은 망덕사

사천왕사에서 낭산 쪽으로 눈길을 주면, 바로 앞에 망덕사(望德寺)가 있었던 터가 보인다. 이른바 망덕사지다. 사천왕사 앞의 도로를 건너가면 이내 망덕사지를 만나는데, 지금은 논밭이 에워싸고 있어서 좁다란 논두렁을 따라서 조심스레 걸어가야 한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그 터라도 남아서 내가 찾아갈 수 있으니. 터의 한쪽에는 마치 주인이 떠난 고택을 지키는 늙은 하인처럼 당간지주가 서 있다. 소나무들이 그를 에워싸고 있어서 다행히도 외롭지는 않은 듯 보인다.

망덕사는 "덕을 우러러보는 절"이라는 뜻이다. 누구의 덕을 우러러보는가? 바로 당 황제다. 자칫하면 대국에 굽실거리는 조상의 못난 꼴을 연상할 지도 모르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대국을 희롱하고 통일이라는 대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서 세운 절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사천왕사의 도움으로 두 차례 당나라 군사들을 태운 배들을 바다에 침몰시켰다. 그러자 당 황제는 급히 그 연유를 알고자 하였다. 그래서 당시 신라의 유학자로서 한림랑(翰林郞)으로 있다가 당과 신라 두 나라가 전쟁 상태에 돌입하자 옥에 갇혔던 박문준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물었다. 박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입어서 통일을 했으므로 그 덕을 갚으려고 천왕사를 낭산 남쪽에 세워서 황제의 수명을 축원하는 법회를 열고 있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황제는 아주 기뻐하였고, 이에 예부시랑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신라에서는 사천왕사를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서 새로 절을 지었다. 바로 망덕사다. 그러나 당의 사신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천왕사가 아님을 알아챈 사신은, "이는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오"라고 하였다. 결국 금 천 냥이라는 뇌물을 주어서 그를 달랬다. 사신은 돌아가서 박문준이 말한 대로라고 아뢰었다. 이때 사신이 한 말에서 절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예나 이제나 외교는 상대의 마음을 휘어잡는 빼어난 언변과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두둑한 배짱이 요구된다. 박문준은 그런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대담하게도 당 사신을 속이려 한 신라 조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가 간의 외교나 전쟁에서는 술수가 흠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절묘하게 구사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망덕사는 당 황제를 흠모한다는 미명 하에 대국의 황제조차 갖고 놀겠다는 신라인의 기상이 배어 있었던 절이다.

· 옥에 갇힌 왕자를 위해 세운 인용사

망덕사지에서 반월성 쪽으로 올라가서 국립경주박물관을 끼고 왼쪽으로 돌아서 곧장 들어가면 거기에 절터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인용사지(仁容寺址)다. 이곳도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다. 사천왕사나 인용사의 유물은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맛은 또 다르다. 휑하니 비어서 웅장한 옛 모습은 없지만, 바로 거기에 역사의 향기가 있다.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는 불교에서 늘 가르치는 바이지만, 역사의 현장에서는 더욱더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이 인용사에 대해 '삼국사기'에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만 나온다. 앞서 말한 당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 온 것은 신라의 군대와 이 땅에 남아 있던 당나라 군사들이 서로 맞선 데서 연유한다. 그 일로 해서 당 황제는 숙위(宿衛)로서 당 조정에서 시위(侍衛)하고 있던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박문준도 함께 가두었다. 숙위는 당나라 주변의 국가들에서 왕자를 당 조정에 보낸, 일종의 인질이었다. 인질이기는 했으나 양국 간의 외교적인 일을 도맡아 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외교관이었다. 이런 이중적인 성격 탓에 양국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생기면 가장 먼저 문책을 받는 이는 숙위일 수밖에 없다.

김인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 사람들은 그를 위해서 절을 지었다. 바로 인용사다. 인용사란 당 황제에게 어진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어달라는 바람을 담은 절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루어진다. 앞서 말한 박문준의 외교적 수완으로 당 황제의 마음이 풀어졌음을 안 신라 조정에서는 강수(强首)에게 김인문을 놓아달라고 청하는 표문을 짓게 해서 보냈다. 그 글을 읽은 황제는 눈물을 흘리며 김인문을 놓아주어 보냈다고 한다.

이야기에서는 박문준이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것으로 드러나 있지만, 그 뒤에는 김인문이 있었다. 김인문이 외교의 수장이었고 또 함께 옥에 갇혀 있었으니, 박문준의 언변은 김인문의 꾀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천왕사를 세운 일도 김인문이 당나라에 유학 와 있던 의상(義湘)에게 당나라에서 군사를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몰래 알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바다에 잠든 외교 영웅

인용사지에서 다시 박물관 쪽으로 나와서 왼쪽으로 가면 팔우정삼거리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곧장 나아가면 태종무열왕릉을 가리키는 푯말이 보인다. 태종무열왕릉을 찾으면, 바로 그 앞 저만치에 웅장한 무덤이 있다. 제왕의 무덤과도 같은 거기에 김인문이 누워 있다. 무덤 뒤로 지는 해는 저 멀리 한때 당나라였던 중국에도 똑같이 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리라.

'삼국사기'를 보면, 김인문은 당나라 수도에서 병으로 죽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는 김인문이 돌아오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다고 한다. 왜 이렇게 다른가?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이 사실이고,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민중이 지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여기에는 역사적 진실이 숨어 있다. 바다 위에서 죽었다는 말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말이 아니다. 배 위에서 죽었다는 말이다.

김인문은 대국인 당나라의 조정에 인질 아닌 인질로 있으면서 신라가 외교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외교관으로서 일생을 바친 영웅이었다. 바다를 일곱 번 건너갔고, 날짜로 계산하면 무려 22년 동안 당나라에 머물렀다. 그런 영웅이 당나라 수도에서 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민중들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영웅은 영웅답게 죽어야 했다. 김인문은 외교 영웅이었으니, 마땅히 바다 위에서 일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래서 민중은 이야기를 통해 김인문을 바다에 잠들게 했다. 이야말로 오늘날 말하는 국민장(國民葬)과 같은 민중장(民衆葬)이 아니겠는가

 

<4> 바다의 관용을 지닌 처용랑
처용 잃은 신라, 철학 잃고 비틀거리는 왕국

 

 

 

처용암. 바위 뒤쪽의 선박들이 그 옛날 아랍 상인들이 탔던 배를 떠오르게 한다.

 

노포동을 지나 곧장 내달려서 웅상을 지나면 곧 울산의 율리(栗里)가 나온다. 이어 망해사지(望海寺址)를 가리키는 푯말이 눈에 띄고, 가리키는 대로 왼쪽으로 꺾으면 영취산으로 향하게 된다. 구불구불 좁다란 도로를 따라서 가다보면 나지막한 고개가 나오고, 그 고개를 넘자마자 오른쪽으로 산길로 접어들면 그 너머가 바로 망해사지(望海寺址)다.

망해사지는 저 옛날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개운포(開雲浦)에서 처용랑을 만난 뒤에 세운 절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라는 뜻인데, 어찌하여 바다가 보이지 않는가? 바다가 보이지 않으니, 무언가 열망이 느껴진다. 이제 멀리 보이는 것이라고는 희뿌연 하늘 아래 울산의 공장 지대다. 울산 번영의 상징! 문득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의 첫 대목이 떠오른다.

·역사 속 빛과 그림자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49대 헌강왕 때, 서울에서 지방에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는데,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길거리에서는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바람과 비는 철마다 알맞았다." 풍요롭고 태평한 시절에 대한 묘사다.

그런데 울산의 공장 지대에 굴뚝들이 솟아 있는 풍경과 겹쳐진다. 풍악과 노랫소리 대신에 기계가 쉼 없이 돌아가고 있고, 농업이 아니라 공업이니 바람과 비가 어떠하든 철마다 좋은 시절이다. 실제로 울산은 부자 도시 1위로 꼽히고 있어 신라의 전성기와 사뭇 비슷하다. 그런데 이 울산에 부자의 철학이 있는가? 아니, 30~40년 전에 그토록 꿈꾸고 바랐던 경제 성장을 이룩한 우리나라에 지금 철학이 있는가? 신라에서도 풍요와 번영 뒤편에 어둠이 있지 않았을까?

7세기 말, 통일을 이룬 신라는 한동안 평화와 안정을 구가하였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우는 법! 혜공왕(惠恭王) 때를 지나면서 반역과 반란이 잦아졌다. 이른바 권력 쟁투가 시작되었다. 홍수나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거나 전염병이 돌면, 그것은 모반의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권력의 맛을 본 자는 쉽사리 그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자들일수록 권력을 탐하는 마음이 더 강하고 많았다. 주로 진골 출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헌강왕 5년에도 일길찬 신홍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사형을 당했다. 그럼에도 태평성대로 묘사되었던 것은 "지는 햇살이 더욱 강렬하다"는 그런 역설의 표현인가? 풍요와 사치, 화려함과 순조로움을 전경(前景)으로 한 채, 그 배경에서는 지배층의 끝없는 권력욕과 골품제라는 신분제에 대한 불만, 그리고 소외된 민중의 한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분열의 시대, 통합의 열망으로

망해사지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와서 율리 저수지를 오른쪽에 두고 곧장 달려 울산석유화학단지를 지나면 조선시대 개운포성(開雲浦城)이었던 터가 나온다.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는데, 제법 너른 터가 왕이 노닐러 가기에도 괜찮아 보인다. 망해사는 바로 이 개운포성의 터를 향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홍이 모반을 일으키기 바로 전, 헌강왕이 동쪽으로 순행을 하다가 깜짝 놀랄 만한 모습에 괴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왕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이 산과 바다에 사는 정령이라고 여겼다. 신라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바로 그들 가운데 하나가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랑이다.

'처용랑망해사'를 보면 왕은 물가에서 놀다가 갑자기 낀 구름과 안개로 말미암아 길을 잃었다고 한다. 동해의 용이 조화를 부려서 그렇게 된 것인데, 용의 시험에 든 셈이다. 이에 왕이 그 근처에 절을 짓겠다고 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용이 왕의 뜻을 받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왕이 지명을 "구름과 안개가 걷힌 물가"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하자, 용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나타나서 춤을 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용의 아들 하나, 즉 처용이 임금을 따라 서울에 들어가서 정치를 도왔다. 용과 왕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이 무슨 협상이나 타협을 하는 듯하다.

차근차근 음미해 보자. 왕은 왕실을 에워싼 여러 세력들이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헌강왕은 경문왕의 아들이다. 경문왕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그 임금님으로, 헌안왕의 사위였다가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렇다면 경문왕이나 헌강왕도 지지 기반이 탄탄했다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사위가 왕위에 올랐는데, 왕족이라면 누군들 왕위에 오르지 못하겠는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헌강왕은 지금의 울산인 학성(鶴城)으로 강력한 외부 세력의 도움을 받으러 왔고, 그 세력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왕이 바랐던 것은 권력 쟁투로 말미암아 일어난 분열을 극복하는 일이었다. 그 분열은 지혜와 어진 마음을 지닌 자라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인물이 바로 처용이었다. 처용은 동해 용의 아들로서, 그 이름 그대로 "관용에 서는 자"다. 관용은 단순히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혜와 어짊으로 포용하는 것이 관용이다. 따라서 처용은 아득히 펼쳐진 바다를 속으로 갈무리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깜짝 놀랄 만한 모습에 괴이한 옷차림"을 했다고 했으니, 이곳의 토착세력은 또 아니다.

·똘레랑스의 실천가, 처용랑

새로운 인물 처용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온 왕은 약속한 대로 영취산 동쪽 기슭에 절을 지었다. 바로 망해사다. 그리고 처용의 마음을 붙잡아두려고 미녀를 아내로 주고 또 급간이라는 관직도 주었다. 그런데 참으로 아름다웠던 그 아내를 흠모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역신(疫神)이었다. 역신은 역병을 퍼뜨리는 신이다. 어느 날, 처용이 외출한 사이에 그 역신이 처용의 아내와 동침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그 꼴을 본 처용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물러 나왔다.

과연, 역신은 누구이고 무엇을 상징하는가? 역병을 퍼뜨리는 신이니, 전염병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처용이 물러난 것은 무기력하게 아내를 버려둔 셈이 된다. 물론 노래와 춤, 즉 한바탕 굿으로 역신을 퇴치하려고 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는 왕이 처용을 데려온 이유와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왕권과 대립하고 있던 세력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처용의 아내가 미녀인 까닭도 새삼 분명해진다.

왕이 처용에게 주었다는 미녀는 곧 권력을 상징한다.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끈다. 권력은 탐욕을 부추긴다. 그 둘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 인류의 역사가 또한 증명하는 바다. 그리고 관직은 그 권력에 상응하는 지위다. 따라서 왕권을 견제하던 세력들에게는 그 권력을 쥔 처용이 매우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처용의 권력과 지위를 침해하여 처용의 심사를 건드리며 괴롭히는 음모를 꾸몄을 것이다. 그러나 처용이 누구인가? 이름 그대로 관용을 베푸는 자이니 어찌 맞서서 갈등과 대립을 고조시켰겠는가?

처용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 것은 굿을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고한 풍류였다. 바다와 같은 너른 마음, 보살의 원융(圓融)으로 상대를 껴안으려는 풍류였다. 처용은 시쳇말로 똘레랑스(tolerance)를 실천함으로써 갈등과 분열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처용의 관용에 역신도 무릎을 꿇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사악한 귀신을 물리치는 데 썼다. 그러나 결국 처용의 지혜와 어짊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배층들 사이에는 불신과 탐욕이 너무도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빈곤이 부른 쇠망

개운포성지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만 더 나가면 처용암이 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어름에 떠 있다. 지금 그 바다에는 거대한 선박들이 드나들고 있는데, 저 옛날 신라 때에도 그곳으로 무역 선박들이 드나들었다. 그 선박의 주인공들 가운데는 아랍 상인들이 있었다. '악학궤범'에 그려진 처용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아랍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저 멀리 인도양을 건너서 온 아랍 상인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7~8세기 해상무역로를 개척한 아랍 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중국까지 망망한 대해를 오가며 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이슬람사상에는 경제에 관한 한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부의 축적과 향유를 장려하면서도 합법적으로 취득하여야 하고 또 기꺼이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슬림이 수행해야 할 의무 가운데 하나가 "기꺼이 베풀어야 한다"는 '자카트' 즉 희사(喜捨)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布施)다. 처용은 바로 그런 철학을 체득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바다를 오가며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사유의 지평을 넓히면서 바다를 닮은 마음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이야기의 말미에서 왕은 신들이 나타나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인 줄을 몰랐다. 그럴 수밖에. 풍요와 번영 속에서, 더구나 권력자가 어찌 멸망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경제적 풍요는 곧 철학의 빈곤을 불렀고 철학의 빈곤은 끝없는 추락으로 이끈다.

신라의 통일을 뒷받침한 철학은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었다. 화쟁사상은 아집과 집착을 버리고 극단에 치우치지 말며 대립과 갈등을 넘어서 조화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통일 뒤, 그 사상은 잊혀졌다. 민중은 원효를 대신하여 똘레랑스를 실천할 처용을 이야기했으나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신라는 쇠망의 길을 걸었다. 아, 아는가? 민심은 천심이라는 것을! 그리고 왕조는 멸망해도 민중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5> 업보 씻으려 바다에 누운 문무왕
피를 부른 영웅, 죽어서야 미소를 배웠네

 

 

 

보리사(菩提寺)의 석불좌상. 보리사는 남산 동쪽 기슭에 있다.

남산신성은 사라지고 석불좌상의 미소만 남았다. 이 미소가 민중이 바라던 정치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토함산에 올랐다가 내려올 때 감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꾸불꾸불 한참을 내려가니 너른 들판이 나오는데, 토함산 자연휴양림이다. 눈이 다 시원하다. 그곳을 지나쳐서 가면 첫 번째 길갈래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가면 추령터널을 지나 덕동호를 거쳐 보문단지로 가게 된다. 감포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꺾어야 한다. 그렇게 조금 더 가면 다시 길갈래가 나온다. 왼쪽으로 꺾으면 감포로 빠지게 되는데, 목적지는 그곳이 아니다. 오른쪽으로 곧장 간다. 그러면 감은사지(感恩寺址)가 나오고, 이윽고 문무대왕릉이 있는 봉길해수욕장이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 아래, 커다란 바위가 저만치 바다 위에 누워 있다. 파도가 잔잔하니,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그렇게 잠들어 있는 바위, 그 바위가 바로 문무대왕의 수중릉이다. 숲 속의 공주는 왕자의 입맞춤으로 깨어났다는데, 이 문무왕은 누가 어떻게 깨워줄 것인가? 이제 민중이 남긴 이야기로 그를 깨워보려 한다.

· 통일 그리고 업보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과업을 시작한 김춘추의 맏아들이다. 문무왕은 신라가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평정할 때 태자로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왕위에 올랐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삼국통일의 시작을 열면서 등극을 한 셈이다.

문무왕은 21년 동안 재위했는데 그 가운데 16년은 통일 전쟁의 기간이었다. 백제 유민들과 거듭 싸워야 했고 또 고구려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의 야욕을 또 상대해야 했다.

문무왕은 참으로 자긋자긋한 전쟁 속에서 통치하였다. 이윽고 당나라 군대를 패퇴시킴으로써 오롯한 통일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결코 위대한 승리가 아니었다. 병법에서 최상책은 바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이다. 그런데 참 많이도 싸웠다. 그것은 곧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들의 목숨과 통일, 과연 어느 것이 더 귀한가? 목숨이야 언젠가는 사그라질 것이지만 통일은 분열과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더 많은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말한다면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문무왕은 죽기 전에 긴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그 유언은 자신이 서쪽(백제)과 북쪽(고구려)을 정벌하여 천하를 안정시켰다는 자부심, 백성들이 편안하고 풍족한 삶을 영위하게 되었다는 떳떳함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이 땅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라고 하였다. 그 유언대로라면 그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인데 과연 그럴까?

'삼국유사'의 '문무왕법민' 조에서는 아니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민중이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 왕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어서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였고, 그 까닭은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고, 또 추한 과보로 짐승이 되는 것이 뜻에 맞다"는 것이었다. 왕이 말한 '추한 과보'는 곧 전쟁으로써 지은 업보, 수많은 생명들을 죽음으로 내몬 업보를 가리킨다. 그런 죽음 한가운데서 오랜 세월을 신음해야 했던 민중은 왕이 결코 위대한 일을 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 업보를 씻어주는 바다

'삼국사기'에서나 '삼국유사'에서나 문무왕은 그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긴 유언을 통해서는 그렇게 한 까닭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어찌하여 지식인은 알지 못 했던 까닭을 민중들은 알았을까? 그렇지 않으리라. 지식인들도 처음에는 알고 있었으나,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이리라.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하였는데 중세에 용은 그저 토착신앙의 대상일 뿐이었다. 불교에서 보자면, 그것은 축생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나라를 지킨다는 고상한 목적과 의도를 지녔다고 해도, 용은 해탈하지 못 하고 윤회를 거듭해야 하는 존재일 뿐이다. 그런 용이 되겠다는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과응보에 따른 것일 뿐이다.

통일이라는 과업은 세간에서나, 그것도 제왕이나 지배층에서나 가치 있는 일이지, 불교에서는 그저 하찮은 일, 탐욕이 부른 망상일 따름이며 민중들로서는 고역 가운데 고역이었다.

민중이나 중생은 돌보고 구제해야 할 대상들인데 오히려 전쟁 속으로 내몰았으니 그 업보는 또 얼마나 크겠는가?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통을 더해주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아닌 유교를 내세우더라도 제왕이나 지배층은 백성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해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제왕이다. 백성이야 고작해야 제 자신이나 이웃을 괴롭히지만 제왕은 온 나라 사람들, 천하 사람들을 괴롭히니 말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얼른 고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고해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해 속에서 법해(法海)를 찾는 일이다. 불법(佛法)의 바다, 지혜와 자비로 가득한 바다, 그 바다만이 비로소 고통을 말끔하게 씻어준다. 문무왕이 바다에 누운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신라의 왕들이 머물었던 월성(月城)에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바로 남산이다. 남산은 그 자체가 불국토(佛國土)다. 곳곳에 불상들과 석탑들이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에도 거룩한 산이었고 전래된 뒤에도 여전히 거룩한 산이었다. 남산에서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인공과 자연, 불교와 토착신앙 등의 차별이 없다. 모든 것이 평등하다. 그것이 불법이 가르친 바요, 민중들이 염원하던 것이다.

문무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이 남산에 장창(長倉)을 설치하여 곡식과 병기를 쌓아두었다. 남산성도 수리하였다. 경주 서쪽에 처음으로 부산성(富山城)도 쌓았다. 이 모두 전쟁을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서울에도 성곽을 쌓으려고 하였는데 의상법사가 말렸다.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재앙을 씻고 복이 절로 오게 할 수 있으나,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 하면 만리장성을 쌓아도 재앙을 없애지 못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그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고 한다.

이제 남산에 올라가보면 문무왕 때 수리한 성 즉 남산신성(南山新城)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아주 자세하게 살펴보아야 비로소 눈에 띈다. 아,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전쟁에 대비하고 나라를 굳건하게 지키려고 했건만 그 모두 가뭇없이 사라져버렸다. 한가로이 산길을 걷는 사람들은 여기에 성을 쌓았는지, 장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는지, 알지도 못 하고 관심도 없다. 그저 역사의 흔적을 알려고 하는 학인들이나 관심을 가질까?

그런데 불상들과 석탑들을 만나면 누구나 발걸음을 멈춘다. 아니, 일부러 그곳을 찾아서 간다. 왜일까? 그저 유적이고 유물이기 때문인가?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에는 하나같이 무언지 모를 민중의 숨결,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다. 억압도 핍박도 없고 차별도 고통도 없는 세상을 그렸던 민중의 꿈,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꿈이 숨쉬고 있다. 그 꿈을 민중은 곧잘 이야기 속에서 이루고는 했다.

'문무왕법민' 조에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덧붙어 있다. 그것은 왕의 동생인 거득공(車得公)―'삼국사기'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인물―에 관한 일이다. 왕은 거득공에게 재상이 되어서 백관을 통솔하고 천하를 다스려달라고 하였다. 이에 거득공은 국내의 부역이나 조세의 사정, 관리들의 청렴함과 탐오함이 어떠한지를 살펴본 뒤에야 관직을 맡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사의 차림을 하고 서울을 떠나 각 지방을 두루 다녔다. 그렇다, 정치는 오로지 백성의 안위를 살피는 일이다. 적어도 민중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실천한 제왕이나 지배자들은 얼마나 되었던가?

· 민중에 의해 거듭난 제왕

'삼국사기'에서는 "속설에서는 왕이 용으로 변했다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왕이 용으로 변했다는 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속설, 즉 "속된 설"이라고 하였다. 이야말로 민중의 속내를 전혀 알아채지 못 한 지배층의 논리요, 진실은 그저 사실을 서술한 데에만 있다고 하는 지식인의 편견이다.

'문무'는 "문화와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는 의미에서 붙은 시호다. 그런데 과연 문무왕은 그런 제왕인가? '삼국사기'에 서술된 문무왕의 면모는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통일을 이룬 제왕이다. 이는 무위(武威)로써 천하를 다스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이 그런 점만 부각시켰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문무왕 자신이 실제로 그런 면모를 더 지녔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문무'라는 시호로써 일컬은 데 대해 납득할 만한 설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민중이 대신해주었다. 바로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지배층과 지식인들에 의해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칭송받는 왕, 그러나 통일이라는 고귀한 목적(?)에 집착하여 숱한 목숨을 돌보지 않은 왕, 고해에서 끊임없이 고통의 격랑을 일으켰던 왕, 그 왕을 위해서 민중은 '이야기'라는 재를 올렸다. 생전에 지은 업을 씻으라고 용이라는 축생으로 만들어 저 바다에 눕혔다. 날마다 쉼 없이 드나드는 물결로, "통일에 대한 집착"이 만든 번뇌와 업보를 말끔하게 씻으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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