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산 묘적사
진정한 적멸의 빛은 그림자를 상대한 ‘빛’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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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적사 계곡은 사람들 사이로 간신히 흐르고 있었지만, 묘적사엔 고요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마당엔 적멸의 빛이 한가롭습니다. 적멸의 빛은 선악을 다 뛰어넘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부처 마음입니다.
호모 루덴스라는 말을 ‘놀 줄 아는 인간’으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쉽게 개념이 잡히지 않습니까? 물론 놀이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닙니다. 곰도 원숭이도 개도 고양이도, ‘놀 줄’ 압니다. 심지어는 머리 나쁜 얘기만 나오면 비유로 드는 닭도 사람에게 장난을 걸어오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 묘적사 대중방. 다듬지 않은 나무로 지은 집이다. 툇마루에 앉으면 누구나 아이 같은 마음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의 놀이에 대한 집착은 유별납니다. 로또까지 갈 것도 없이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성인 오락실을 보십시오. 놀이로 사냥을 즐기는 동물도 인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가 좀 그렇습니다만, 종족 보존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로지 즐기기 위해서 암수가 엉키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할 겁니다. 인간은 발정기가 없는 동물입니다.
▲ 낭랑한 독경 소리가 허공 가득 퍼져간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평안이 깃들기를….
덕소역을 지나 86번 국도를 타고 묘적사 계곡 입구에 닿을 때까지 피서철 치고는 길 사정도 좋았습니다. 계곡 입구의 구멍가게에서 음료수까지 준비했습니다. 20년 전쯤으로 돌아간 듯한 가게 분위기도 기분을 좋게 했습니다. 거의 소풍 가는 아이 기분으로 묘적사 계곡으로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역시, 절까지 1.6km에 이르는 계곡 옆 찻길은 양쪽 모두 차들로 빼곡했습니다. 입구에서 차를 버리고 걷기로 했습니다.
▲ 대중방 뒤의 연못. 부처님과 물고기는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
그러나 또 그러나, 올라갈수록 이건 아니다 싶은 모습들이 너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아래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데도 개고기의 핏물을 천연스럽게 흘려보내고 있었고(개고기 먹는 행위에 대해서 시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세제로 그릇을 닦고 있었습니다. 슬펐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모습이 슬펐습니다. 그 모습이 아이들에까지 세습될까 봐 우울했습니다.
이런 인디언 격언이 있습니다. “만일 가난한 자가 외관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가난하다면, 죽는 날까지 가난한 사람 말고 다른 무엇이 되겠는가?”(E. T. 시튼 편. <인디언의 복음>) 가난에 우아함이 깃들면 청빈이 됩니다. 가난해도 품격을 잃지 않을 수는 정녕 없는 것인지요.
▲ 기도하는 꼬마 불자들. 이 아이들만큼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세상에서 살기를 기원해 본다. |
계곡과 묘적사의 극명한 대비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역시 세상은 빛과 그림자로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지옥과 극락을 품고 살듯이 말입니다.
니르바나를 생각해 봅니다. 본디 니르바나는 불어 끈다는 뜻입니다. 번뇌를 소멸시킨다는 것이지요. 그 상태가 곧 적(寂)입니다.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 묘적사의 주불전인 대웅전과 조선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팔각칠층석탑(향토유적 제1호) |
묘적사의 역사는 기록으로 전하여 오지 않습니다. 절에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대(661-690) 원효 스님이 창건하였다 하나 문헌 근거는 없습니다. 초창 이후의 문헌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양주목 불우(佛宇)조에 ‘묘적사는 묘적산에 있는데, (이에 관해) 김수온(金守溫)이 기록한 글이 있다(妙寂寺在妙寂山金守溫記)’고 적혀 있습니다만, 그 기록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또 같은 책의 양주목 산천(山川)조에는 소요산과 나란히 언급하면서, ‘묘적산은 주 동쪽 70리 지점에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때가 1484년(성종 17)이니 최소한 그 전에는 절이 존재했다는 얘깁니다.
▲ 몸돌을 잃은 탑의 옥개석과 상륜부. 묘적사의 지워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또한 스님은 지역의 노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통해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이곳이 왕의 밀명에 의해 승려로 위장한 군사 양성소였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실제로 절 앞의 공터에서 화살촉이 발굴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에 대한 믿음의 끈을 놓지 않고 호국도량으로 복원하기 위해 절집을 일으켜 왔으나 그 뜻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고 아쉬워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로선 사실 여부를 떠나 호젓한 도량 하나를 얻은 복을 누립니다.
▲ 다가가는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문, 그것이 법문(法門)입니다. |
묘적사는 작은 절입니다만 아주 독특한 건물 양식으로 자연과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마하선실과 요사가 바른 네모꼴 마당을 이루었는데,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의 기둥과 부재들이 다듬지 않은 나무로 지어져 있습니다. 바라보는 이들을 절로 자연과 동화되게 합니다. 수호신장처럼 선 도량의 아름드리 은행나무는 가을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황홀한 가을의 정취를 선물한다 합니다.
대웅전 오른쪽에서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보리수를 따라가 보면, 산령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납니다. 휘도는 모양새가, 짧은 길을 대단히 깊어 보이게 만듭니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분위기의 산령각 마당도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게 만드는 분위기입니다. 묘적사는 그렇게, 이 세상의 들끓는 욕망을 응시하게 하는 거울로 서 있습니다.
가을이 익어 갈 무렵 다시 묘적사를 찾아서, 아무도 없는 계곡물에, 내 마음속 그림자가 얼마나 짙은지를 비춰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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