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강인욱_초원에서 한반도까지_04

醉月 2011. 2. 6. 08:42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1> 오랑캐를 경멸하는 자, 중원을 얻을 수 없다

- 주나라 유물은 중원계통 문화에 서북지방 토착문화
- 초원 전차·무기가 더해진 조화의 산물
- 타 문화 배타성보다 다양한 문화 조화를 강조했던 세종의 실리적 태도 엿보여

 
  중국 산시(陝西)성 함양에서 출토된 주나라 시대의 청동기.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뒤 처음으로 만든 한글 문헌이다. 조선의 개국을 칭송하는 125장의 악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1절은 중국 고사를 적고 2절은 1절의 내용에 대응되는 조선 건국의 다양한 일들을 기록했다.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임을 중국의 역사에 빗대어 강조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대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많다.


사실 용비어천가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그 내막은 조금 다르다. 용비어천가는 세종대왕이 여러 학자들과 같이 중국 고전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에 기초한 것인데, 여기에서 든 중국 역사의 여러 이야기는 중국 서쪽의 오랑캐와 같이 살았던 주나라를 비롯하여 요, 금, 원 등 초원민족에 의해 세워진 정권의 사례가 다수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 용비어천가와 주나라

 
  주나라와 접촉했던 융적이 썼던 다양한 유물.
용비어천가의 시작은 태조 이성계 이전의 4대조 할아버지와 태조, 태종을 함께 '해동육룡'이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 중 왕으로 첫 번째로 추존된 목조(?~1274년)는 고향인 전주를 떠나 강원도와 함경도에 살기 시작했다. 용비어천가의 3~6장에서는 목조의 치적을 주나라의 건국에 비유했다. 용비어천가의 1, 2장은 전체 이야기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사실상 용비어천가는 조선의 개국을 주나라 건국에 빗댄 셈이다. 도대체 조선의 시작과 주나라의 개국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세종대왕이 조선을 주나라의 개국에 비유한 내용은 주나라 역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전설적인 시조 후직(后稷)에서 기원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후직의 3대손인 공유(公劉)가 빈곡이라는 곳에서 융적과 같이 살면서 시작된다. 이후 공유의 9대손인 고공단보(古公亶夫)가 험윤과 융적을 피해 기산(岐山)에 살면서 주나라의 기틀을 잡은 것으로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돼 있다.

뒤에 주나라의 태왕(太王)이 된 고공단보가 실질적인 주나라의 선조인 셈이다. 여기에서 험윤과 융적은 바로 중앙아시아와 중국 서북지방의 유목민족을 의미한다. '사기'에 따르면 고공단보는 인의로 주변 사람들을 포섭하고 험윤과 융적을 잘 막아냈기 때문에 세력이 커졌다고 돼 있다. 주나라가 인의로 오랑캐를 눌렀다는 것은 중국사에 흔히 있는 상투적 서술이라고 보면, 결국 중원에서 초원지역으로 건너간 일파들이 다시 중원으로 진출해 상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공단보가 자신들의 일파를 데리고 정착한 곳은 대체로 현재의 중국 산시(陝西)성 기산현과 보치시 부근이다. 실제로 기산현의 주원(周原) 유적은 주나라가 기틀을 잡은 주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 고공단보가 도읍한 기산을 찾아라

 
  주나라 시대 중 서주 (西周) 시기 금제장식과 귀걸이. 초원민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공단보가 도읍해 주 문왕대까지 기산에 세운 기읍(岐邑)은 지난 수십 년간 중국 고고학자의 주요한 관심거리였다. 실제로 수년 전 주나라 초기의 도읍지 유적인 주원 유적보다 서쪽에 위치한 주공묘(周公廟)가 고공단보가 도읍한 기산이라는 주장이 나와 큰 이슈가 된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 발굴 결과를 보니 대부분 고분은 도굴됐고, 남아있는 유물도 고공단보가 살았던 때보다도 늦은 것이어서 이 문제는 다시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아마도 고공단보의 기읍은 현재의 기산보다 더 서쪽으로 치우친 곳 어딘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기록에서는 고공단보가 융적과 같이 살면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고고학적으로 보면 주나라가 강성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북방민족의 강력한 전차와 무기의 덕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주나라 유물은 중원계통의 문화에 서북지방 토착문화, 그리고 여기에 초원지역의 강력한 전차와 무기가 더해진 것이다. 주나라가 기틀을 잡은 기원전 12~11세기께 초원과 중앙아시아는 카라숙문화라 하는, 전차와 강력한 무기를 겸비한 세력들이 변방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 초원민족들은 실제로 주나라에게는 치명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금석문에 서쪽의 오랑캐를 뜻하는 융(戎)은 주로 중국을 침략할 뿐 중국이 정벌한 기사는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고공단보도 기산으로 이주할 때 융의 침략을 받아 땅과 재물을 모두 내어주고 간 것으로 돼 있다.

고공단보와 이웃했던 융적이라는 집단은 중국 서북~중앙아시아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민족이다. 현재 중국의 행정구역 상 산시, 간쑤(甘肅), 칭하이(靑海)성 등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토착문화와 함께 중앙아시아와 초원지대에서 유입된 문화가 발달된 지역이다. 고공단보가 주나라를 개국할 수 있었던 것은 중원의 문화를 이러한 중국 서북지역의 융적문화와 조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세종대왕이 고공단보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기원전 12~11세기 주나라 시대 중국 금장식. 중국 북방 초원문화권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 서북지역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이어서 고고학적 발굴도 아주 적다. 특히 며칠 전 지진으로 수 천 명이 희생된 칭하이성의 경우 융족의 후손인 장족이 다수 거주하는 곳인데, 아주 낙후된 지역이라 더 피해가 크다.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개발과 조사가 이어진다면 중국 북방 초원 역사의 잊혀진 한 페이지가 드러날 것이다.

조선의 시조인 '해동육룡'은 고향인 전주에서 변방인 함경도로 이주해 원나라의 쌍성총관부에서 근무하며 여진족과 같이 살았다. 실제로 홍건족이 개경을 위협하자 이성계는 여진족과 고려인으로 구성된 친병으로 막아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성계의 몽골어 이름은 아기바토르였는데 그런 이성계의 오른팔인 이지란 장군은 여진족으로 뒤에 조선인으로 동화되었다.

고려시대 말기에 원나라의 문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었고, 여진족도 고려국의 일부로 다양하게 활동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편적인 사실만으로 '한국인' '여진인'이라는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하여튼 문치를 이룩하고 유교에 입각하여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한 조선시대에 왕족과 그 선조들이 동북 지역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여진, 몽골족과 다양한 교류를 했음은 조선왕조에는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었다.

중국의 고문에 밝았던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의 첫머리에 고공단보의 일화를 들어서 초원의 이민족과 같이 살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웠던 주나라에서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찾았다. 다른 문화에 대한 배타성보다는, 겉으로 대의명분을 표방하면서 다양한 문화의 조화를 강조했던 세종의 지혜가 용비어천가에 숨어있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쓴 것처럼 한글 창제에는 초원민족의 지혜가 숨겨 있고, 또 한글로 만든 첫 작품인 용비어천가의 첫 대목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교류와 다문화의 저력을 주목하라
초원 이민족들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은 이중적이었다. 그들을 야만과 미개로 규정하며 멸시했지만, 그 모든 유목민족이 사실은 중원에서 갈려나간 사람들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흉노, 견융(서북지방의 오랑캐)은 중국 황제에서 기원하여 하나라와 같은 뿌리라고 보았다. 왜 중국사람들은 그렇게 멸시하고 천대한 이민족을 자신들의 족보와 연결시키려 했을까. 오랑캐가 그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며 또 오랑캐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오랑캐를 이용하는 자가 결국 중원을 지배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던 표시는 아닐까. 최근 삼황오제와 초원민족을 잇는 기록을 들어서 한족이 중국 주변의 소수민족을 통치하는 역사적(?) 근거로 악용하기도 한다.

분명한 점은 진정한 중원의 패자는 오랑캐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오랑캐의 문화와 교류로 태생되었다는 점이다. 중국의 서북지방에서 융적과 교류했던 주나라와 진시황의 진나라는 모두 중국의 서북지역에서 초원민족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원을 지배할 수 있었다. 또 한나라 이후 다양한 초원민족의 제국이 중원에서 웅거했다. 결국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서술은 주변민족에 대한 열등감의 표출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중국 역사는 오랑캐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들의 장점을 얻은 자가 중원을 지배했음을 보여준다.

세종대왕이 용비어천가에서 말하고 싶었던 내용도 결국 북방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과 실리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단일민족의 신화에서 벗어나 다문화를 지향하는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배워야 할 점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2> 초원의 늑대인간

대체로 한반도를 포함한 극동지역과 시베리아의 삼림지역, 즉 초원보다도 더 추운 북쪽에는 곰숭배신앙이 널리 퍼져 있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도 바로 시베리아의 곰신화문화권의 일부다. 한편, 시베리아 초원의 유목민족들 역시 동물을 숭배하는 문화가 매우 강했다. 초원을 대표하는 유목문화인 스키타이문화의 3요소 중 하나를 동물장식으로 꼽을 정도로 동물숭배가 널리 퍼져 있었다.

초원의 전사들이 선호한 동물은 독수리 표범 늑대 같은 맹수와 맹금이 주류를 이룬다. 알타이의 황금문화인 파지릭문화는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라는 별명답게 맹금류를 자신의 상징으로 했다. 이후 흉노를 거쳐 돌궐에 이르면서 그 상징은 늑대와 늑대의 신화로 바뀌어갔다.


■늑대, 돌궐과 로마의 은인이 되다

 
  초원문화권인 중국 북부 영하성에서 출토된 청동상. 양을 잡아먹는 늑대를 표현했다.
흉노에서 시작된 늑대신화는 서기 4~7세기에 알타이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퍼진다. 우리 '혈맹'인 터키의 조상 돌궐(투르크)족의 건국신화에도 늑대가 등장한다. '주서(周書)'의 '돌궐전'에 따르면 그들 부족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간신히 한 어린아이가 살아남았는데, 그는 늑대들 속에서 자라고 암늑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다. 그를 기념하여 뒤에 돌궐족은 자신들의 깃발에 늑대를 그려넣었다 한다.

한편, 또 다른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국가인 고거(高車)국도 자신을 늑대의 후손으로 보았다. 이들 돌궐계 부족은 모두 흉노제국의 일파였으니, 늑대를 숭앙하고 자신의 선조로 보는 풍습은 흉노에서 기원해 이후의 여러 초원민족들로 퍼져나간 셈이다. 늑대와 관련된 탄생신화는 멀리 로마에서도 보여서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가 숲에 버려진 뒤 암늑대가 젖을 먹여서 키웠다고 한다.

고도의 문명국가였던 로마의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될 정도로 늑대신화는 널리 유행했던 것 같다. 전남대 최혜영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동아시아와 로마의 늑대신화는 구조적으로 아주 유사하다고 한다. 고고학과 달리 신화학은 구체적인 물증으로 증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고대 동서문화 교류의 실마리가 되는 또 다른 주제임은 분명하다.

 
  로마 건국의 주역인 로물루스 형제가 어릴 적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을 보여주는 조각상.
한국이나 시베리아 삼림지대의 경우 곰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실제로 청동기나 암각화 등에 구체적으로 곰이 표현된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초원지역에서는 수많은 동물장식이 등장하는 이유는 어디 있을까.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따르면 스키타이의 동북쪽에 거주하는 네우리(Neuri)라는 부족은 9년에 한 번씩 늑대로 바뀌었다. 아마 자신을 늑대로 의인화시키는 의식을 표현한 것 같다.

굳이 헤로도투스가 아니어도 동물장식은 바로 초원을 대표하는 청동유물이었다. 기원전 8~3세기에 초원지역에 번성한 스키타이문화에서 발달하게 된 동물장식은 이후 흉노로 계승되었다. 유목민족들은 자신들의 칼과 같은 무기와 허리띠의 장식으로 주로 동물장식을 썼다. 실제로 초원의 기마인들은 아래로 늘어지는 상의를 입고 그 겉에 허리띠를 둘렀다. 그러니 전사의 허리 가운데서 반짝거리는 허리띠와 그 옆에서 반짝거리는 동검이야 말로 그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이러한 동검을 맹수나 맹금류로 장식했으니, 동물장식은 '장식'을 넘어서 일종의 계급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기호보다는 부족의 상징과 신분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었다. 기원전 3세기 대에 흉노가 중국의 조공을 받으면서 중국의 장인들이 황금으로 만든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을 납품한 증거도 있어서 동물장식은 바로 흉노인들의 신분증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성경 속의 늑대, 중세유럽의 늑대

 
  구약성서에서 신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이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늑대인간이 된 것을 그린 그림. 늑대와 초원문명에 대한 서양인의 인식을 보여준다.
초원의 전사들이 자신을 늑대와 동일시하는 이유는 험난한 사막과 초원지역에서 강하게 살아남는 그들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이후 초원문화를 백안시하는 서양문명의 등장과 동시에 야만의 상징으로 바뀌어갔다.

1970년대 크게 유행한 디스코 음악인 보니엠(Boney M)의 'Rivers of Babylon'이라는 노래는 30대 이상의 독자라면 친숙할 것이다. (요즘에는 롯데 자이언츠의 포수 강민호의 응원가로도 사랑받는다) 이 노래의 가사는 성경 시편 137편에 근거한 것으로 기원전 587년 유다왕국이 신바빌론왕국의 느부갓네살(영어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에 의해 멸망당하고, 그 귀족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바빌론유수'의 한 장면이다.

신바빌론왕국의 느부갓네살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정원을 만들었으며,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느부갓네살의 이탈리아어 준말임)'의 주인공이다. 사담 후세인이 미군에 쫓기면서도 자신을 느부갓네살에 비유하는 글을 남길 정도로 근동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꼽힌다. 반면 느부갓네살은 서양 문명에서 야만과 공포의 대상이었던 '늑대인간'이 된 최초의 예라고도 알려져 있다. 구약의 다니엘서에는 이 왕이 교만에 빠져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7년 동안 반짐승처럼 미쳐 궁 주변을 날뛰었다고 한다. 이를 들어서 고병리학자들은 낭광증(狼狂症 Lycanthropy: 자기를 늑대 또는 이리로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병)의 첫 케이스라 한다. 서양문명에서 마녀와 함께 금기시됐던 늑대인간은 흔히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해 사람들을 해치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저주에 의해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다소 다르다. 낭광증은 근대 이후 서양에서 본격적으로 발생한 정신병이다. 성경의 사해사본에는 느부갓네살이 아니라 다른 왕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그가 7년 동안 미친 채 궁정을 돌아다녔다면 실제로 바빌론왕국이 유지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문헌에서도 짐승처럼 살았다고 전해지는 왕들의 기록이 제법 있으니, 아마 그러한 기록들이 와전된 것 같다. 이 왕들은 정신병이 아니라 벌판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괴력을 과시하며 다닌 것을 이민족들이 늑대처럼 살았다고 기록한 결과인 것 같다.

■초원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다
낭광증과 늑대인간에 대한 공포는 서양의 근대문화가 초원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하면서 등장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늑대인간은 영어로 '웨어울프'(werewolf), 러시아어로는 '오보로찐'이라고도 한다. 얼핏 생각하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유행한 '구미호'와 유사한 듯 하지만 한국의 구미호는 죽은 처녀의 상징으로 다소 낭만적(?)인 반면 늑대인간은 그 피해를 입은 사람도 같이 늑대인간이 되어버리기에 더 공포스럽다.

사람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피가 섞이거나 밤만 되면 짐승으로 변하는 이야기는 뱀파이어나 드라큘라 같은 흥미 위주의 이야기로 변해갔다. 자신을 동물로 착각하거나 동물처럼 행동하는 낭광증은 정신분열이나 우울증의 일종으로 요즘에는 늑대뿐 아니라 개 말 호랑이 고양이 등 다양한 동물로 표현된다고 한다. 실제로 늑대인간의 설화가 널리 퍼지는 시기는 17~18세기로 당시 유럽은 소빙기시대(little ice age)로 아주 추운 겨울이 지속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미신이 성행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늑대인간 소동은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 분위기와 혹독한 환경에서 집단적인 정신분열을 일으킨 소산이다. 많은 동물 중에서도 하필 늑대였던 이유는 당시 늑대는 초원과 야만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동물과 함께 살며 동물의 다양한 힘을 얻고자 한 것은 초원 전사들의 열망이었다. 자신들을 늑대의 후손으로 자처하며 강인한 정신과 신체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착하고 국가를 이루는 등 문명화하면서 그런 야성적인 모습을 점차 잃게 되었다. 쿠빌라이칸을 비롯하여 모든 초원제국의 왕들이 자신의 궁궐에 거대한 숲을 만들고 사냥터를 가꾼 것도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초원을 잃어버린 요즘 사람들은 또다른 늑대인간을 꿈꾼다. 20세기 이후 영화나 만화에서는 헐크, 슈퍼맨, 배트맨, X맨 등 괴력을 가진 초현실적인 인격체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현대사회에는 다른 사람을 해쳐서라도 초월적인 힘으로 돈과 권력을 가지려는 '늑대인간'들이 너무 많고, 또 서민들에게는 달콤한 말로 '슈퍼맨'이 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진정한 늑대인간은 자연과 하나 되면서 혹독한 환경을 이겨나간 자랑스러운 초원의 전사였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3> 오랑캐의 옷을 입은 중국의 왕

 
  한나라 시대 말타는 중국 관리를 표현한 유물. '호복기사'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연두에 당시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새해의 각오를 밝히면서 중국 전국시대 조나라 무령왕의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인용했다. 기병의 옷을 입고 말위에서 활을 쏘듯 만반의 준비를 잘해서 경제위기를 극복하자는 뜻이었다. 이와 같이 호복기사는 만반의 준비를 철저히 하자는 고사성어로 흔히 쓰인다. 하지만 원래 뜻은 다소 다르다. 이 고사성어에는 초원민족의 지혜를 통해 구습을 타파하고 자신의 국가를 주변의 위협에서 지키려 한 조나라 무령왕의 강력한 개혁정책이 숨어있다. 과연 조 무령왕은 무슨 생각에서 오랑캐의 옷을 입었을까.

 

 

 


■흉노와 중원의 틈바구니에서

 
  중국의 전국시대 조나라를 괴롭혔던 중산국의 독특한 동물형상 청동기 유물.
전국시대 중국 북방의 조나라를 통치했던 무령왕(기원전 340~295년)은 서서히 밀려오는 국가적 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북쪽에는 유목민족인 흉노와 동호가 발흥하고 있었고, 초원문화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작지만 강한 나라 중산국도 위협을 가해오고 있었다. 한편 중원에서도 진나라와 연나라 세력이 갈수록 조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다. 특히 중산국이 문제였다. 조 무령왕은 방자(房子)에서 중산국에 크게 패하자 답답한 가슴을 끌어안고 사방을 주유하다 현재의 산시(山西)성의 황화산(黃華山)에 올라가 천지신명에 맹세했다. "오랑캐의 땅인 중산국, 반드시 내가 차지하리라!" 그리고 무령왕은 재위 19년 새해를 맞이하여 중산국을 없애고 중원의 패자로 서기 위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무령왕은 신하들에게 "오랑캐의 옷을 입고 말위에서 활을 쏘는 기마술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군신들은 오랑캐의 옷을 입으면 세상이 모두 비웃을 것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아마 이 이야기는 중국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힌 듯 하다. 왜냐하면 중국 역사를 축약하고 정리해 죽간에 정리된 사마천의 '사기'에서 무령왕의 호복논쟁은 1000여 자가 넘게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흔히들 무령왕이 호복기사를 도입함으로써 중원에서도 기마병이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원에서 기마병은 그 이전에 이미 출현했다. '한비자'의 조양자와 악양의 고사에서도 이미 기병이 등장하며, '손자병법'을 쓴 손무의 손자인 손빈이 쓴 '손빈병법'(한때 '손자병법'을 일부 고친 것이라 여겨지기도 했지만, 얼마 전 원본이 발견되면서 '손자병법'과는 다른 것임이 밝혀졌다)에도 이미 기병 전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 무령왕이 굳이 호복기사를 들고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기득권 누르고 군사 개혁 성취

 
  흉노의 금제 허리띠
여기에는 단순히 '오랑캐 옷을 입자'는 것을 넘어서 구습에서 탈피해 새로운 국가로 변신시키겠다는 조 무령왕의 뜻이 숨어있다. 당시 중원에서 옷은 신분의 상징이었다. 당시 중국은 가운처럼 길게 늘어뜨린 관복을 입었는데, 허리띠와 관복의 색깔은 관직 등급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니 군신들이 호복을 입는 순간 자신들의 지위가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할 만했다. 당시 중국에는 기병이 도입돼 있었지만, 중원의 평원지역에서 전쟁을 할 때는 여전히 주로 전차를 타고 상대 보병의 대오를 흩트리는 전법을 사용했다. 조 무령왕의 호복기사는 전차 위주의 부대에서 경기병 위주의 부대로 바꾸는 것을 의미했다. '호복기사'를 도입할 경우 기존 전차 위주의 전투로 경력을 쌓아온 장군들은 순식간에 모든 부대를 재편성하고 신기술을 도입해야 했으니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해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니 반대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전국시대 연나라 왕족 무덤의 초원계 허리띠 버클.
하지만 무령왕은 모든 반대를 뿌리치고 손수 바지를 입고 허리띠를 질끈 동여매 말 위에서 화살을 쏘며 군대를 조련했다. 결국 무령왕은 강력한 기마부대를 앞세워 중산국을 수차례 침공했고, 무령왕의 대를 이은 혜문왕 3년인 기원전 301년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자로 등장했다. 명분을 앞세운 기득권자들을 뿌리치고 개혁을 성공적으로 주도한 무령왕은 위기를 국가 부흥의 기회로 바꾸었고, 전국시대 조나라 최고 성군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조 무령왕의 '호복기사'에서 말하는 호복이란 무엇일까? '사기'는 '호복기사'에 대한 논쟁만 자세히 기록했을 뿐, 어떤 옷이었는지 상세한 기록은 없다. 다른 역사기록을 참고할 때 호복은 머리에는 털모자를 쓰고 목에 금제장신구를 걸쳤으며, 발에는 황색 가죽신발을, 허리띠 버클은 장방형의 순금으로 만든 것이다. 당시 중국 북방의 흉노가 입었던 복식이다.

실제로 중국 옷에는 S자형의 허리띠 고리(hook)를 썼지만, 바지를 입었던 초원지역에서는 화려한 동물장식이 새겨진 허리띠 버클을 썼다. 고고학 발굴을 하면 옷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허리에 찬 초원계 버클이 심심치 않게 발견돼 초원지역 옷의 전통이 중원에 들어왔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말을 타는 데 꼭 필요하지 않은 털모자나 금장식까지 초원지역의 것으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무령왕의 야심이 숨어있었다. 즉, 조나라가 유목민족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탁월한 군사력의 유목민족이 자신의 나라에서 차별없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무령왕은 스스로 오랑캐 옷을 입었던 것이다. 북방에서 중원과 유목민족의 사이에 존재한 조나라가 실리를 위해서는 다문화가 서로 공존해야함을 안 것이다.

■원수는 미워도, 원수의 장점은 사랑하라
무령왕은 현재 내몽고 호화호특 동남부에 있던 원양(原陽)이라는 마을의 군대기강이 흐트러지고 법이 잘 지켜지지 않자, 본보기로 그 마을을 없앴다. 대신, 그 자리에 기마병이 상주하는 마을인 '기읍'(騎邑)을 세웠다. 기읍이란 기병이 상주하면서 외적에 대비하는 일종의 국경의 군사화된 마을이다. 기읍을 세우면서 온 백성이 자신의 개혁을 따르도록 독려하고 또 기병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조 무령왕이 원수처럼 지냈던 중산국의 왕릉이 1974~1978년 하북성 평산에서 발굴되었다. 그 결과 중원지역 청동기에 초원유목민족 양식이 잘 조화된 특유의 청동기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중산국은 원래 북방 초원지역 유목민족인 백적(白狄)의 후손이라는 역사기록이 제대로 증명된 셈이다. 중산국은 출신은 초원지역이지만 중원으로 진출해 중원과 초원의 장점을 조화시켜서 작지만 아주 강력한 나라를 이루었다.

중산국 주변의 위(魏) 한(韓) 조(趙) 연(燕)나라는 만 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萬乘之國 )였지만, 중산국은 천대의 수레를 가진 나라(千乘之國)였다. 작은 규모였지만 유목민족의 강력한 군사기술을 가졌던 중산국은 여러 중원 국가들의 골칫거리였다. 조 무령왕은 중산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그들의 장점인 유목민족의 군사기술을 적극 받아들였다. 원수를 없애기 위해서 원수의 가장 큰 장점을 배운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은 중산국을 야만스럽게 묘사하며, '호복기사' 논란을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중화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굴의 예를 보면 많이 다르다. 전국시대~한나라의 중국 각지 귀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초원지역의 허리띠를 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남쪽 광저우(廣州), 윈난(雲南)부터 허난(河南), 허베이(河北)에 이르기까지 중원 각 지역 초대형 고분에서는 예외없이 화려한 황금으로 만든 초원계 허리띠와 장신구가 출토됐다. 사실 '호복'은 당시 중국 귀족에게 초원전사의 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최근 우리 상황과 조나라의 사례

아무리 경제 발전이 좋다 한들 군사적 힘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모두 헛될 뿐이다. 세계적인 열강과 북한의 틈 사이에 있는 우리는 현실적으로 너무나 작은 나라다. 우리가 강소국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 무령왕의 지혜가 필요하다. 북방 초원민족과 중원 제후국 틈바구니에서 그는 구태를 벗고 '호복기사'라는 군사적 개혁을 이뤄냈다.

전국시대 열강과 초원민족에 둘러싸였던 조나라는 현재 우리 모습과 많이 닮았다. 구태를 벗고 국제정세 속에서 실익을 명확히 추구했던 그의 리더십으로 조나라는 전국시대 최고 강자로 등장했다. 천안함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힘을 강화해야 한다. '호복기사'와 같이 지금의 우리 상황을 나라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이 안타까운 젊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닐까.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4> 진시황의 천하통일과 초원의 힘

- 기원전 7세기 진목공 재위 때 초원 다양한 문화 전파자 역할 한 서융족 복속 후 강국 기틀 다져
- 유목 수렵 교역, 각 민족 경제활동 장려와 통합 통해 경제적 기반 쌓고 통치 시스템 구축… 통일왕조 이룩

중국을 대표하는 인물인 진시황(기원전 259~210년). 오랜 세월, 그는 중국사에서 부정적인 폭군의 모습이었다. 분서갱유, 만리장성의 노역 등 역사는 그를 잔혹하게 백성을 괴롭히고 자신의 나라도 오래 못가 망하게 한 악한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중국은 문화혁명이 끝나고 1980년대가 되면서 진시황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바꾸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여 현재와 같은 거대한 중국의 기틀을 세운 영웅으로 추앙한다.

전통적으로 중국 역사가들이 진시황과 진 제국의 어두운 점을 강조한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펼친 강력한 전제정치 탓이었다. 진시황의 통일왕조는 각 제후국의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도량형과 글자도 통일하여 '만인에 공평한' 법에 의한 통치를 내세웠다. 수 천년 역사에 걸쳐 자신들의 전통대로 나라를 다스려온 중국역사 속 여러 나라들이 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게다가 진나라는 서주(西周)시대 이래 오랑캐의 나라로 치부되며 중원의 여러 나라로부터 멸시를 받았다. 오랑캐와 잡거하며 중원의 도덕을 이해하지 못하던 진나라, 어떻게 그들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까.


■변방에 치우쳐 오랑캐와 잡거한 진나라

 
  마가원 유적에서 출토된 마차.
진시황은 결코 갑자기 나온 영웅이 아니었다. 춘추시대 이래 중국 서북지역에서 초원지역과 접경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오던 진 제국이 그의 뒤에 있었으며, 진 제국의 성장에는 그들과 접경했던 초원의 민족들이 있었다.

춘추시대의 진나라가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9세기 진비자(秦非子)부터다. 그로부터 31대 손인 영정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으로 등극했다. 처음 진나라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진시황의 진 제국 탄생까지 약 600년 동안 진나라 역사는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주나라를 도운 결과로 분봉받은 진나라는 지금의 산시(陝西)성에 도읍했지만, 그 서쪽에 살던 초원 유목민족인 서융(西戎)의 등쌀에 국력을 제대로 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원의 서융 무덤에서 나온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청동그릇. 바닥에 변법을 통해 국력을 키운 재상 상앙을 뜻하는 '앙' 자가 새겨져 있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대인 진목공(秦穆公·재위 기원전 659~621년) 때 서융의 세력을 제압하면서 비로소 나라로 기틀을 갖추었기 때문에, 진시황으로 대표되는 진나라의 발전은 진목공의 서융 정벌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시대 진나라의 문화는 고고학적 발굴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중국 서쪽의 오랑캐들과 잡거했다는 역사기록을 뒷받침하듯이, 고고학적 발굴은 진나라의 문화가 중원지역과 달리 초원민족의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진나라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교류하며 초원의 기술과 문화를 전해준 서융의 실체는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진나라의 국력을 살찌운 새로운 기술과 무기를 전해준 초원의 문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고고학이 밝힌 진나라 황금문화가 뜻하는 것

 
  중국 간쑤성 장가천의 마가원 유적 발굴 장면. 이곳에서 춘추시대 진나라 문명에 대한 단서가 여럿 포착됐다.
2006년 7월 중국 간쑤(甘肅)성의 회족 자치주인 장가천(張家川)의 마가원에서는 3개의 대형 고분이 도굴되었다. 지난 몇 년간 중국은 빠르게 발전하는 경제와 맞물려 도굴범도 급증하고 있었기에, 이는 비일비재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도굴품을 확인한 고고학자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바로 초원지역의 색채가 강한 황금유물과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제품들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곧바로 발굴대가 조직되어 2008년까지 도굴된 3기를 포함하여 모두 11개의 대형 무덤을 발굴했다. 그 결과는 2008년에 1차 발표된 바 있었다. 다시 최근인 2009년 10월에 나머지 발굴 결과도 공개되었다. 필자는 이 결과를 보는 순간 경탄을 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나라와 초원 및 서방과의 관계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었기 때문이다. 마가원 무덤은 기원전 4~3세기대의 것으로 당시 서융은 이미 진나라에 복속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 유물에는 초원지역 스키타이계 문화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더욱이 고도의 세공기술로 만들어진 금제품과 유리제품은 이제까지 중국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완전히 계통을 달리한 것이었다.

마가원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유물들에는 직경 0.4~0.5㎜ 정도의 자잘한 황금구슬을 붙이는 누금세공기법이 쓰였다. 이 누금세공기법은 그 시기 이전까지의 중국 중원에서는 볼 수 없던 기술로, 지중해 지역에서 처음 개발되어 기원전 7세기 이탈리아에서 번성한 옛 나라 에트루리아가 고도로 발전시킨 기술이다.

이 금속기술은 이후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거쳐 시베리아의 황금유물로 이어졌으며, 한참을 지나서 신라의 황금유물에서도 사용된 기술이다. 특히 서부 시베리아의 스키타이시대 고분인 필리포프카(Filipovka)와 표트르 대제가 모은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에도 이런 금 가공 기술은 흔히 보인다.

 

 

 


■시베리아 거쳐 중국에 들어온 금세공기술

 
  마가원 유적 발굴 때 나온 초원계통의 금장식품들.
마가원 유적의 황금은 바로 누금세공기술이 초원을 거쳐 동아시아로 유입된 길목을 보여주는 셈이다. 즉, 원래 중앙아시아 토착의 유목민족에서 기원한 서융족은 진나라에 복속되면서 동서양 문명의 중간기지 역할을 했고 진나라, 나아가 중원 여러 나라에 초원의 여러 문화를 전달하는 중개자의 역할을 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이로써 신라의 황금기술 전파루트에 또 하나의 가능성이 제시된 셈이다.

진나라가 중국 서북의 변방에서 강력한 나라로 커가는 데에는 초원민족 서융의 역할이 컸다. 진나라는 자신들 자체가 '순수한' 한족이 아니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초원 민족들을 포섭하는 데 이용했다. 1974년 거연(居延)에서 발견된 죽간에는 '진호(秦胡)'라는 구절이 있다. '진'은 중국인이요, '호'는 오랑캐인데 둘을 같이 쓴 이 낱말은 진나라에 포섭된 초원민족들을 의미한다. 진나라는 서북쪽 변방이라는 중원의 멸시를 문화교류의 거점으로 발달하면서 극복했다.

또한 진나라가 상대적으로 농업에 불리한 자연환경이라는 점을 유목·수렵·교역 등 각 민족의 다양한 경제활동을 장려하면서 이를 통합하여 더 큰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중원이 진나라를 멸시하는 사이, '변방'의 반야만인 진나라는 다문화를 포용하는 능력으로 진시황의 위업을 일구어냈다.

중국의 여러 나라가 진나라를 욕한 것으로는 순장의 풍습도 있었다. 서융을 정벌한 진목공도 정작 본인이 죽었을 때에는 측근 신하 3명을 포함해서 177인을 순장했다고 하여 사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순장은 진나라의 풍습이었기 때문에 현군 진목공도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진나라는 순장을 고집했을까. 아마도 선대의 주요한 세력들을 같이 없앰으로써 뒤에 왕위를 잇는 왕이 큰 무리 없이 자신의 뜻을 펼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변방·혼합·교류에서 솟는 새 에너지
진나라가 팽창할 무렵, 중원은 합종과 연횡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들이 그토록 무시했던 진나라가 강성하여 자신들을 노리는 순간까지도 중원의 여러 나라들은 힘을 합칠 수 없었다. 좁은 중원 안에서 서로 다투며 수 백 년간 자신들끼리 반목과 원한이 너무나 깊었기 때문이다. 결국 중원은 다민족이 서로 섞여 있는 '야만족의 국가'라는 오명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법을 적용하는 상앙의 변법으로 강력한 국가를 세운 진나라가 차지했다.

한나라 이전에 중원을 제패한 주나라와 진나라는 모두 실리를 추구하면서 초원의 여러 문화를 조화시킨 중국의 서북 지방 출신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찬란한' 중국의 역사에는 언제나 초원의 민족이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중원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오랑캐의 틈바구니에서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을 통치하는 시스템을 개발해왔고, 이는 곧 중원을 통일하는 힘이 되었다.

지금은 덜하지만 한국도 지역감정이 무척 심했다. 땅 크기로만 본다면 지극히 작은 나라에서 그렇게 갈려 서로 반목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시야와 생각이 좁다는 것을 의미한다. 춘추전국시대 중원을 통일한 나라는 그들 안에서 서로의 명분과 정통성을 내세운 나라가 아니라, 시야를 넓히고 이질적인 문화를 받아들인 진나라였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 되지 않을까.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5> 치우의 청동투구와 황제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이 한 달 남짓 남았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응원팀의 상징은 붉은 악마와 치우(蚩尤)천왕이었다. 중국의 시조 황제(黃帝)와 탁록에서 큰 전투로 맞섰다고 알려진 신화 속 인물인 치우는 현재 한국과 중국 사회에서도 꾸준히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치우를 동이족을 다스린 제왕으로 간주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다원일체의 중화민족을 세운 황제의 최대 방해세력이었던 괴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축구 응원팀의 상징이 될 정도로 유명한 치우천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치우 이야기는 언제 등장했나

 
  몽골에서 나온 고대의 청동투구.
사실 치우를 한민족의 직접적인 조상이라 간주할 근거는 그리 많지 않다. 게다가 치우나 황제 같은 인물이 등장하는 시기는 신석기시대로 현재와 같은 대형 전투가 일어났을 때도 아니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치우는 중국 서남부에서 사는 소수민족인 먀오(苗·묘)족의 선조로도 숭앙되고 있다. 즉 치우는 단순한 고대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중원세력과 대립했던 중원 주변 이민족들의 상징이 되는 셈이다. 과연 치우는 한민족의 선조일까. 그리고 치우와 황제의 싸움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중국은 최근 한족을 중심으로 하는 여러 민족이 한데 어울려 세운 '다원일체(多元一體)'의 나라임을 내세우고 있다. 사실 이 개념은 신해혁명(1911년) 이후 일본과 서구 열강의 여러 세력이 중국을 침탈하는 와중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전에 황제는 단순히 신화 속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황제를 비롯한 삼황오제에 대한 신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부터다. 이후 황제는 거의 숭배되지 않다가 명·청 대에 그 신앙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 만주족에 억압되었던 한족의 문화를 부활시키는 상징으로 중국 내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를 시조로 숭앙하면서 그와 맞선 대표적 인물인 치우는 괴수화되었다.

연세대 김종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상나라 때의 책인 '귀장역'을 인용한 '초학기'에 치우가 처음 등장한다. 만약 그 문헌의 인용이 맞다면 적어도 치우의 등장은 기원전 13세기까지는 올라가는 셈이다. 치우가 본격적으로 괴물로 등장하는 책은 '상서'(尙書)로 원래는 주나라 때 역사를 한나라 때 기록한 것이라 한다. 치우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한나라 이후 최근의 역사까지 중국에 대적한 '악의 축'이었던 셈이다.


■탁록의 전투는 있었을까

 
  서주 시대 연나라의 무덤인 베이징 근처 유리하에서 출토된 청동가면과 투구들. 치우에 대한 옛 기록과 잘 부합한다.
황제와 치우의 갈등은 '탁록대전'에서 폭발했다. 황제가 55번 전투를 한 끝에 간신히 치우를 이겼다고 하는 이 전투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서 가장 큰 전투였다. 탁록은 허베이(河北·하북)성 동북 쪽으로 랴오닝(遙寧·요령)성과 거의 맞닿은 지점이다. 실제로 고대부터 교통의 요지로 중원에서 고구려, 고조선으로 정벌을 나갈 때 반드시 지나가는 길목이다. 즉, 중원과 만주지역의 교통로인 셈이다. 신화에 탁록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 이야기는 단순한 신화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중원의 세력과 비중원 세력이 만나는 상징적 장소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탁록지역은 이미 기원전 2000년께부터 유목민족이 발흥하는 장소가 되었다.

기원전 15세기께 시베리아의 전차 문화는 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그 문화의 일부는 중원의 상나라에도 도달했다. 상나라에 그 전차를 전한 세력들은 중국 북쪽에 거주하면서 바로 그 상나라를 괴롭혔다. 탁록을 중심으로 허베이 지방에도 강력한 전차무기를 지닌 초원민족의 유적이 바이푸, 차오다오고우 등에서 발견됐다. 치우에 대한 기록이 상나라~주나라 대에 등장하니, 아마도 이 때 탁록을 중심으로 웅거하던 초원민족이 치우라는 신화로 재등장한 것으로 보는게 가장 맞을 듯하다.

한편, 춘추시대가 들어서면서 이 지역에는 산융과 동호가 등장했다. 이들은 만리장성의 북쪽에 웅거하며 스키토-시베리아유형의 초원문화를 동아시아에 전달하던 주역이었다. 그들도 현재의 탁록을 중심으로 허베이 지방에 웅거하면서 연나라뿐 아니라 중원의 여러 지역을 괴롭혔다. 신화에 치우와 황제의 전투 장소가 탁록이라고 기록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고고학적으로 보아도 고대부터 중원과 요령 그리고 한반도를 잇는 길목이요, 또 상-주 대에는 초원세력이 남하해서 첨예하게 대립한 세 문화의 교차점이기 때문이다.

 

 

 


■'구리 이마에 쇠로 된 이마' 속 실마리

 
  주나라 시대 북방 지역의 청동기.
중국 신화의 여러 기록에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치우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강력한 전차와 금속무기로 상징된다. 신화에서 황제가 치우에 고전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치우의 강력한 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중국의 북방에서는 초원지역에서 유입돼 발달한 전차와 청동무기가 확인되고 있으니, 이러한 묘사는 어느 정도는 부합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치우를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 묘사하는 점이다. '구리의 머리에 철로 만든 이마'라는 뜻이니 곧 금속제 투구를 썼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기원전 12세기께부터 탁록이 위치한 허베이~랴오닝성 서부 일대에는 투구가 유행한다. 청동투구는 상나라 때 처음 등장해서 중국 북방의 여러 민족들이 썼으며, 나아가서 랴오닝성 바이칼 몽골 등으로 전파됐다. 심지어 흑해 연안의 스키타이시대 유적에서 '쿠반식'이라 하는 독특한 투구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중국 북방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형태이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두 지역 투구가 너무 흡사해서 중국 북부 초원지역에서 파급된 것으로 보는 게 현재 학계의 정설이다.

당시 청동투구는 중국 북방 초원전사의 상징이었다. 1981년 산시(陝西·섬서)성 하무자에서 발견된 청동솥(鼎·정)에는 오랑캐(戎·융)를 포로로 삼고 투구 30점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청동솥은 당시 주나라 종실이 골칫거리였던 초원지역 오랑캐(戎)을 무찌른 제후에게 상을 내리면서 기념으로 준 것이다. 또 베이징 근처에 위치한 서주 시대 연나라 무덤인 유리하(琉璃河) 무덤 유적에서는 얼굴을 덮는 청동가면도 등장했으니, 동두철액은 단순히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주나라가 건국될 당시 탁록 근처인 베이징에는 연나라가 있었다. 베이징 근처의 오랑캐들은 발달된 전차와 무기로 연나라에 맞섰다. 주나라 왕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북방의 적들에 맞서기 위해서 주나라 건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소공석을 연나라에 봉해서 그들을 막아내도록 했다. 치우에 대한 신화는 북방에서 초원의 발달된 무기를 가지고 내려오던 세력을 대적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역사의 역동성 밝히는 진정한 연구 필요
치우 신화는 상-주나라 대에 현재의 허베이성을 둘러싸고 중원세력과 초원의 발달된 무기를 받아들인 이민족간의 투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요즘 중국에서는 황제를 포함하여 삼황오제를 고고학과 역사학에 결부시키며 대중교육을 강화시킨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도 최근까지 만세일계의 천황과 탄생신화를 교과서에서 가르치며 국민교육을 해왔다. 영토가 수시로 바뀌고 민족들도 다양하게 섞여 있는 서구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신화와 고대사를 자신들 정당성의 근거로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땅에 근거하여 생계를 꾸리는 동아시아의 정착문명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자국 중심의 서술 속에서 진정한 역사의 역동성은 빛을 잃고 있다. 지난 수 천년간 '악의 축'으로 폄훼되고 괴수화되었던 치우는 이제 중국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지난 1998년 허베이성에 있는 회래현 탁록에 세워진 '중국삼조당'에 치우는 황제, 염제와 함께 당당히(?) 중국을 대표하는 세 명의 시조로 같이 봉안되었고, 심지어 중국 남방의 묘족 수 천명이 참배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힘과 무기를 가졌던 치우를 시조로 모심으로써 최근 급격히 주변지역으로 팽창하고 있는 중국의 힘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칭기즈칸과 흉노와 함께 치우마저 중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면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신화를 현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또 신화를 역사로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신화에는 사람들의 수천 년 역사적 기억이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없는 것을 꾸며낸 이야기와는 다를 것이다. 치우와 황제신화 속에 숨겨진 초원과 정착민족 간의 교류와 전쟁이 제대로 연구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6> 초원의 헤드헌터들

 
  영화 '하이랜더' 시리즈에 나온 전사 쿠르간. 쿠르간은 거대한 무덤을 뜻하는 초원민족의 낱말이다.
1986년도에 나온 영화 '하이랜더' 시리즈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인 영생불사를 영상으로 풀어냈다.

스코틀랜드의 전설을 바탕으로 산속에 사는 불사(不死)의 사람을 환타지로 그려냈으며 '반지의 제왕' 만큼이나 인기를 얻었다. 영생을 얻은 하이랜더들은 서로 목을 베어서 죽여야 하고, 최후에 남은 자가 진정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악당으로 등장하는 사람의 이름이 '쿠르간'이다. '쿠르간'은 '거대한 무덤'이라는 뜻으로 초원의 고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이름이다. 영생을 얻고자 싸우는 사람에게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이름의 주인공이 거대한 고분을 만들 수 있는 강성한 초원민족임을 암시한다. 영화 '하이랜더'에 따르면 이 악당은 스키타이시대가 시작될 무렵인 기원전 1000년께 태어났고, 서기 4세기에는 훈족, 반달족, 고트족과 함께 로마를 파괴했다. 이후에는 타타르족, 투르크족 그리고 징기스칸이 이끌던 몽골족과 함께 세상을 파괴한 사람이다. '쿠르간'은 오랜 기간 서양인들을 공포에 빠지게 한 초원민족의 상징이다.

꼭 이 영화만이 아니라, 많은 정착민들은 초원의 전사를 잔인한 악당으로 묘사했다. 전쟁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초원민족에게는 실제로 적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풍습이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적의 머리를 탐한 사람들

 
  임진왜란 때 희생된 조선 백성과 군사들의 코를 모아서 만든 일본 교토의 귀무덤. 스키타이인들이 전장에서 적장의 머리를 베는 것과는 또다른 형태다.
요즘 헤드헌터는 기업체를 위해 유능한 사람을 스카우트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샐러리맨이라면 헤드헌터의 연락을 내심 바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고대 초원지역으로 오면 상황이 아예 달라진다. 고대 초원의 '헤드헌터'는 적의 머리를 사냥하는 용맹스러운 전사를 뜻한다.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인의 헤드헌팅 풍습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묘사했다. 그에 따르면 스키타이 전사는 적을 죽이지 못하면 대접을 못받는다고 기록돼 있다. 스키타이인들은 적을 죽이면 그 머릿가죽을 벗겨 손수건처럼 만들어 말에 매달았다고 한다. 초원을 누비는 용맹스런 전사의 뒤에 달려있는 손수건(?)의 수만 보고도 엔간한 적들은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다. 아주 철천지 원수를 무찔렀을 경우 그 살가죽으로 말안장을 삼거나 화살통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이런 풍습은 흑해 연안 스키타이뿐 아니라 유라시아 전역에 널리 퍼졌다. 실제로 파지릭고분에서 발굴된 한 미이라의 머리 부분은 벗겨지고, 대신에 소가죽을 꿰맸다. 아마 적에게 희생당한 장군을 모시고 와 장례를 지내기 위해 다시 소가죽으로 봉합한 것 같다. 그밖에도 사람의 어깨 부분 살갗을 이용한 화살통도 발견되어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정확했음을 증명했다. 시베리아 각지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시대 고분에서 나온 해골 중에는 날카로운 칼로 그은 흔적이 자주 발견되는데, 형질인류학자들은 이 역시 머릿가죽을 벗기는 풍습의 일종이었다고 주장한다.

■'사기열전'에도 보이는 헤드헌팅 흔적

 
  경남 진주 남강 유역 대평리 지구의 석관묘. 머리 부분이 통째로 없는 유골이 나온 유적이다. 전쟁보다는 매장의 풍습으로 보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은 아주 특별한 적을 죽인 경우 이마 윗부분의 머리뼈를 잘라서 술잔을 만들었다. 부자인 경우는 소가죽으로 덧대고 금도금을 한다고 한다. 흉노도 현재의 알타이 지역에 거주하던 월지국의 왕을 죽이고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이 풍습은 북중국의 흉노를 거쳐서 중국에도 전해졌다. 사기 '자객열전'에 등장하는 '예양(豫讓)'이라는 사람은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士爲知己者死)'는 고사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예양이 목숨을 걸고 복수하려고 했던 사람은 진(晉)나라의 조양자(趙襄子)였다. 조양자는 예양의 주군인 지백을 죽인 후에 그의 해골을 장식한 뒤 변기의 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적의 해골로 술잔을 만들던 초원의 풍습이 변용된 것 같다. 초원의 전사가 머릿가죽으로 전공을 따졌다면 귀나 코를 잘라 전공을 대신한 경우도 있다.

임진왜란 때 희생된 우리 백성과 군사들의 코를 모아서 만든 일본 교토의 귀무덤(미미즈카·耳塚 이름은 귀무덤이지만 사실은 코를 베어갔다)이 그러하다. 또 취하다는 뜻의 '取(취)'라는 한자도 전쟁에서 적의 귀(耳)를 손(手)으로 잡아당겨 전공을 따지는 형상이다.

■한반도에선 비슷한 풍습 찾기 어려워

초원이 서로의 머리를 탐하며 전쟁을 했을 당시 한반도는 어땠을까? 한반도에서 전쟁이 활발히 일어난 증거는 그리 많지 않다. 기원전 8세기부터 한반도에는 비파형동검이라는 청동무기가 도입되지만, 그보다는 돌을 갈아 만든 석검이 주로 쓰였다. 전쟁이 많이 없었으니 잔인하게 서로 죽였을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산성이 강한 한국의 땅에서 인골이 남아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실제로 어땠을지 알기가 거의 어렵다.

그래도 고인돌을 발굴하면 가끔씩 부러진 돌화살촉이 무덤방 안에서 흩어진 채로 나와 이것이 당시 화살에 맞은 증거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런데 1998년 경남 진주 남강 유역 대평리에서 발견된 석관묘에서 인골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머리뼈 쪽이 통째로 없었다. 대개 사람 뼈 중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는 부분이 두개골과 치아이기 때문에 이는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현장에 투입된 형질인류학자가 조사한 결과 이 주인공은 목이 잘린 채로 묻혔다고 결론지었다. 바다 건너 일본 규슈에서는 야요이시대 대형 마을인 요시노가리 유적에서 목부분이 없이 옹관에 묻힌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렇지만 남강 대평리 석관묘나 요시노가리의 옹관묘가 전쟁 중에 서로 목을 자른 증거라고 보기는 어렵다. 전쟁과 무기가 고도로 발달한 초원 지역에서도 전투중 단번에 목을 자르는 풍습은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단칼에 목을 자르는 일은 고대에는 쉬운 게 아니었다. 이는 경추(목뼈) 사이를 날카로운 강철검으로 벨 때에나 가능한데, 강철로 만든 칼이 아니라 청동검이나 돌칼처럼 상대적으로 무딘 무기로 단번에 목을 자른다는 것은 실제 전쟁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아마도 한국과 일본의 단두 풍습은 전쟁보다는 매장풍습의 일종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머리를 참할 정도의 중죄인을 그렇게 거대한 옹관이나 고인돌에 온전히 묻을 리도 없으려니와, 머리만을 따로 묻거나 하는 풍습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들은 잔인하기만 했던 걸까

영화 '하이랜더'는 영생을 바라며 욕심을 부리지만 결국은 죽어야 하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옆의 사람을 죽여야만 자기의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는 서로 죽이면서 그런 죽음을 지켜봐야 했던 고대인들의 잠재적 공포가 숨어있다. 이는 어딘지 동료와 친구와도 경쟁하면서 서로를 눌러야 살 수 있는 현대 경쟁사회의 슬픈 모습과도 겹치는 점이 있다.

적의 머리를 자르고 그를 과시한다는 것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잔인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상대에게 자신이 가진 우월한 힘을 과시해 쓸데없는 싸움과 희생을 줄이는 방법으로도 활용되지 않았을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보면, 병사들이 진을 치면 장군들이 나와 전쟁의 승패를 건 결투를 하는 예가 자주 보인다. 서로 잔인함을 과시하며 목을 취하기 위해 싸우지만, 그 같은 1 대 1 결투의 결과로 싸움의 양상이 미리 일정한 방향으로 정리되고 전면적인 전투를 피할 수 있다면 병사들로서는 목숨을 건질 기회가 늘어난 셈이니 다행(?) 아닐까.

현대사회에서 가시적으로 잔인함을 보여주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중죄범을 공개처형하는 중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사형제마저 폐지되는 추세다. 하지만 이제는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노린다. 환경파괴, 오염된 음식물, 핵무기, 약물 등 우리를 보이지 않게 죽이는 것이 너무 많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과 테러도 적의 우두머리보다는 민간인과 약자들에게 집중되고 있다. '묻지마 살인'도 결국은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집중되고 있다. 초원의 전사는 잔인하게 보일망정, 전쟁에서 자신의 목을 걸고 적장과 힘을 겨루었다. 과연 현대인은 초원전사에게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7> 초원의 황금, 한국을 깨우다

금은 가장 값진 금속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금본위주의 경제를 채택하면서 금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세계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금속으로 중요성이 더 커졌다. 하지만 금이 경제통화의 기준이 된 데는 이 금속이 주는 아름다움과 희귀함에 매혹된 인류의 역사가 숨겨져있다. 한국도 삼국시대에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황금을 좋아했을까, 또 황금 예술은 어디에서 왔을까.

■동아시아에선 늦게 발달한 황금문화

 
  평양 석암리 9호분에서 출토된 낙랑시대의 황금대구(버클)
전 세계적으로 황금의 사용과 숭배는 근동 지역에서 기원전 3000년 이전에 등장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에서 금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2600년께니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중국에서는 상나라 시기인 기원전 15세기가 되어서야 조금씩 황금이 나오기 시작하니, 이집트 등에 비하면 그렇게 일찍부터 인기 있었던 셈은 아니다. 한국으로 오면, 기원전 1세기대에 고조선이 망하고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황금이 쓰이기 시작한다. 일본의 경우는 그보다도 더 늦어서 야요이시대에 중국이 일왕에게 하사한 '한왜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새겨진 인장을 제외한다면, 5세기 후반인 이나리야마고분에서 출토된 금이 입혀진 철검이 최초다.

세계 문명 중에서 동아시아가 유독 황금을 늦게 도입한 이유는 바로 옥에 있었다. 한국 중국을 포함하여 바이칼에 이르는 지역은 초기 신석기시대부터 옥을 선호했다. 특히나 중국사람들의 옥에 대한 사랑은 유명하다. 랴오닝(遼寧·요녕)성의 홍산문화가 중국 문명을 대표하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자리잡은 이유는 바로 옥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랴오닝성 여러 도시의 상징물이 홍산문화의 옥이며, 중국의 유력한 은행 중 하나인 화하은행(華夏銀行)의 상징마크도 옥일 정도이다. 동아시아가 이렇게 옥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옥의 매장량이 풍부했던 데다, 옥이 주는 다양한 약효 때문이었다. 지금도 장판, 매트, 찜질방 등 다양한 기능성 용품에 옥이 널리 쓰이며 사랑받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옥은 비단 동아시아뿐 아니라 초원 지역의 여러 곳으로도 전파되었다. 중국 이외의 또 다른 유명한 옥의 산지는 바이칼 호수 근처였다. 바이칼의 옥은 기원전 15세기께부터 초원의 루트를 따라 서쪽으로 널리 퍼져갔다. 우랄산맥 근처에서 발달한 세이마-투르비노 문화는 전차·청동무기·금으로 유명했는데, 이 문화권의 무덤에서도 옥으로 만든 다양한 장신구들이 발견됐다. 바로 바이칼에서 전해진 옥이다. 세이마-투르비노 문화가 발달시킨 전차와 금은 동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옥이 세이마-투르비노와 동아시아의 교류에서 중요한 특산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흉노의 황금유물이 한반도에서도 빛내다

 
  초원 유목 계열인 스키타이 문화의 금제 그릇
중국에서 처음 등장하는 황금은 대부분 베이징과 간쑤(甘肅·감숙)성 등 중원의 북방지역이다. 바로 초원민족과 접경한 곳이다. 하지만 그 황금 유물들은 대부분 귀걸이 팔찌 등 소형의 장신구류다. 게다가 이들 황금유물은 거의 초원지역 양식이다. 기원전 15세기께 상나라에 전차와 청동무기가 전해지면서 황금도 함께 중국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나팔형으로 휘어진 귀걸이는 흑해 연안에서 비롯되어 시베리아에 전해진 기원전 18~15세기 안드로노보문화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아서, 중국의 금제 유물이 초원지역에 유입된 결정적 증거다. 안드로노보문화의 금제 귀걸이는 보통 여자들이 썼으니, 최초의 국제결혼에 대한 증거라는 농담을 할법도 하다.

또, 진시황의 진나라에서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금으로 손잡이를 감싸고 날은 강한 철로 만든 검이 유명했다. 화려한 금제 장식에 터키옥으로 상감한 이 유물은 중원의 청동기와는 다른 진나라 청동기의 정수로 꼽힌다. 진나라는 초원지역의 금과 함께 강력한 기마부대와 무기를 도입했으니, 금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욱일승천하는 왕권과 군사력의 상징이었다.

동아시아의 황금문화는 흉노가 발흥하면서 또 한번 변화를 겪는다. 상나라 때 금제 유물은 중국북방에서만 유행했지만, 흉노의 화려한 황금은 전 중국으로 확산되었으며 한반도로도 유입됐다. 흉노에게 엄청난 조공을 바쳤던 한나라에는 흉노에 바칠 황금을 만드는 공방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점차 중국 내 귀족들 사이에서 초원풍의 허리띠, 동물장식이 널리 유행했다.

그러는 와중에서 한반도에도 흉노풍의 황금유물이 유입되었다. 낙랑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평양 석암리 9호분의 용무늬 황금대구(버클)가 대표적인 예다. 1㎜도 안 되는 자잘한 알갱이를 누금해서 9마리의 용을 묘사한 이 유물은 한반도에 황금문화가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재미있는 사실은 낙랑시대의 평양 석암리 출토 황금대구와 거의 똑같은 황금대구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의 실크로드 도시국가와 랴오둥(遼東·요동)반도 다롄시의 같은 시기 무덤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양쯔강 유역 초나라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황금대구가 멀리 우랄산맥 근처 스키타이 고분에서 발견된 적도 있다. 초원풍격의 황금유물이 수천㎞ 이상 떨어진 지역에서 다수 발견된 점은 초원지역 황금이 비단 북방지역뿐 아니라 사방에 널리 유행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들은 왜 황금을 선택했을까

 
  금을 입힌 낙랑의 유물.
한반도의 옛 사람들도 이때 초원의 황금에 반했고, 신라에 이르러 황금문화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초원민족들 사이에서는 나무나 청동장식에 금박을 씌우는 등 비교적 소량의 금을 이용한 황금예술이 발달했다. 하지만 신라는 소규모 장식에 그치지 않고 왕관과 같이 대형의 금제품을 만들어 냈다. 중국 북방의 초원민족들도 금제 왕관을 썼지만, 그 예는 그렇게 많지 않다. 게다가 신라의 금관은 초원의 금관과 형태도 많이 다르고 묵직한 것이어서 그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동하는 유목민족과 달리 신라는 정착국가를 이루었기 때문에 초원민족의 황금예술을 이어받아 자신들의 황금문화로 꽃피울 수 있었다.

금은 보기에 찬란할 뿐 아니라 가공하기에 매우 쉽다. 연성과 전성이 매우 강한 탓에 적은 양으로도 실처럼 길게 뽑거나 넓게 펼 수 있다. 물론 구하기 어려운 금속이지만, 적은 양으로도 화려한 장식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사방을 이동하는 초원민족에게 금은 적은 양으로 여러 장식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귀금속으로 적당했다. 게다가 금은 상대적으로 가공하는 데 많은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 청동기나 철기 등의 금속을 주조하려면 용광로 거푸집 등의 시설과 인력, 공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금은 소량을 망치로 두드리기만 하면 되니 사방을 이동하는 유목민족들도 쉽게 가공할 수 있었다. 초원민족들은 나무나 청동으로 만든 장식이나 마구에 얇은 금박을 입히는 방법으로 찬란한 황금문화를 꽃피웠다.

초원의 민족들은 어디에서 금을 얻었을까. 현재까지 그들이 채굴했던 금광은 발견된 적이 없다. 게다가 수십 m씩 파고 들어가야 하는 금광은 당시 사회 수준으로 볼 때 그렇게 효율적인 원료 구입방법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신 비교적 채취가 쉬운 사금으로 금을 얻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황금문화 중심지인 알타이를 답사하면서 최근까지도 사금을 채취한 흔적을 군데군데 찾아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는 특징
금은 시간이 지나도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고대 왕들은 종종 황금으로 자신을 감싸면 영생할 것으로 기대한 모양이다. 초원문화인 사키문화에 속하는 카자흐스탄 이식고분에서는 몸 전체를 황금으로 만든 옷으로 감싼 황금인간이 발견된 적이 있다. 또 허베이(河北)성 만성에서 출토된 한나라 유승(劉勝)과 부인의 무덤에서는 몸 전체를 금실로 꿰맨 옥으로 감싼 금루옥의(金縷玉衣)가 발견됐다.

불멸을 상징하는 옥과 금으로 수의를 만드는 이 방법은 당시에 영생하는 비결로 생각됐다. 유승은 수백명 장인을 동원해서 엄청난 돈을 들여 수의를 만들고 영생을 기대하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부질없는 기대 덕에 한나라 귀족들의 무덤은 도굴꾼의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다. 유승의 묘는 운좋게 도굴을 피했지만 발굴 당시에 인골은 간데없이 수의만 남아있었고, 문화혁명 때는 미신에 사로잡혀 민중을 착취한 고대의 어리석은 귀족의 예로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유럽 중세의 연금술, 잉카의 멸망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금은 영생과 부의 상징이자 세계사 변동과 교류의 중심이 되었던 금속이다. 그리고 금은 고대 초원과 한반도를 이어준 가교였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8> 알타이와 바이칼은 한민족 기원지일까

- 일본인 학자 우메하라, 한민족 타율성 강조
- 식민사관에 입각 한국문화 기원지로 시베라아 지역 지목

- 한반도 독자적 유물 해방 후 잇단 발굴로 억지 주장 설득력 잃어

- 북방기원설 동조도 자생설 맹신도 위험
- 유라시아 지역 문화 교류로 이해해야

한국 사람에게 한민족 북방기원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면 막연히 알타이와 바이칼호수를 떠올린다. 아마도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계통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이유가 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한국의 청동기에는 아연이 포함돼 있어 중원의 청동기와는 다른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게다가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비슷한 파지릭고분이 알타이에 있다는 점도 여러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다뤘기 때문에 북방기원설은 더더욱 친근감 있다. 지금은 이 구절은 삭제됐지만, 30~40대에게 스키타이나 시베리아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친숙한 '한민족 북방기원설' 일제시대 출현

 
  일본의 오쿠라컬렉션에 포함돼 있는 청동기.
이렇듯 우리에게 무척 친근한 북방의 초원문화가 과연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필자 역시 한국과 유라시아 초원은 고대 이래로 꾸준히 문화교류를 해왔음은 분명하지만, 대규모의 사람들이 한반도로 밀려왔다고는 보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흥미로운 점은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이 처음 제기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며, 식민지 한국을 조사하던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그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중국의 하얼빈은 러시아 땅이었다. 동정철도의 부설과 함께 러시아 사람들은 하얼빈을 개발했다. 당시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러시아인 역사·고고학자들은 '만주연구회'를 구성하여 만주지역의 역사·고고·민속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이 러시아 학자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발해의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금나라의 성인 아성(阿城), 한국 신석기시대 융기문토기의 기원지로 꼽히는 유적인 앙앙계(昻昻溪) 등을 조사했다. 그 중 하얼빈박물관에서 근무했던 톨마쵸프(V.Ya. Tolmachev)라는 학자가 초원의 청동기가 만주지방으로 파급되었음을 발견했다.

톨마쵸프의 인생역정은 러시아 혁명 와중 사방으로 흩어진 러시아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는 우랄산맥 근처에서 살다가 10월 혁명의 와중에 이르쿠츠크로, 또 다시 하얼빈으로 피해서 살았다. 뒤에 그는 하얼빈이 중국땅이 되지 다시 캐나다로 이주했다. 톨마쵸프는 우랄산맥 근처에서 스키타이 시대의 유적을 조사했기 때문에 초원지역 청동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경북 경산 신대동 삼한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된 호랑이모양 허리띠 장식. 당시 유행했던 이 같은 동물 모양 금속장식은 초원지대 문화권과 한반도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유림푸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보고 경탄했다. 그가 우랄산맥 근처에서 조사한 스키타이시대의 동물장식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의 청동기가 만주지역으로 전파된 최초의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본 청동기는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들이 흑룡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유물이었다.

사실 1910~1920년대 이미 독일의 민스(Minns)나 예일대 교수였던 러시아인 로스트프체프(P.I,Rostovcheff)같은 학자들이 초원의 청동기가 중국에도 유입되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톨마쵸프는 더 나아가서 초원지역 청동기가 중국을 넘어 더 동쪽인 만주까지 확대된 것을 밝혔다.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았던 톨마쵸프의 연구는 러시아 내에서 혁명의 와중에 잊혀졌지만, 이후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알려져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 일본고고학자의 러시아여행

 
  '한민족의 북방 기원설'을 처음 제기했던 일제시대 일본의 고고학자 우메하라 스에지.
중학교만을 졸업한 사람이 일류 국립대의 교수가 될 수 있을까? 바로 교토대 교수를 역임한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라는 학자 이야기다. 그는 1914년에 중졸의 학력으로 교토대 진열관(현재의 대학박물관)의 자원봉사자 격으로 들어온 후, 1939년 45세 나이로 교토대학 고고학과의 최고 교수 자리에 올랐다. 소설 같은 우메하라의 성공은 교토대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우메하라 스에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식민지시대의 한국 조사와 러시아·유럽 유학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한국은 일본 학자들의 발굴연습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 교토대는 매년 사람을 파견해서 고분 등을 조사했다. 실측에 능력이 뛰어났던 우메하라는 한국의 다양한 유물을 조사하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러던 중 당시 일본에서 유행이었던 구미 세계로의 유학기회가 주어졌다. 우메하라는 당시로서는 최신 자료인 시베리아의 여러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으며, 갓 식민지가 된 한국과 중국의 여러 자료를 서양 학계에 소개했다.

러시아와 서구의 학자들은 무학에 가까운 우메하라를 높이 평가했고, 이는 그가 향후 교토대의 교수가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우메하라는 당시 1920년대 러시아가 발굴한 시베리아와 몽골의 스키토-시베리아 고분 유물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특히 하얼빈의 톨마쵸프를 만나면서 만주지역에도 스키타이 계통의 유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우메하라는 한반도의 청동기에서도 보이는 북방계 요소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스키타이계통의 문화라고 보았다.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중국이 혼란해지면서 유이민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한반도로도 들어왔고, 그 덕택에 한반도도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우메하라가 제시한 한국문화 북방기원설은 당시로서는 최신인 옛 소련의 자료를 이용했기에 주목을 끌었다. 또한 한반도의 고대문화를 고립된 변방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와 관련지으면서 당시 선진국이었던 러시아와 유럽에 어필할 수 있었다.

■왜 일본인들은 시베리아에 주목했을까

 
  초원의 동물모양 장식품이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로 전파된 것을 밝혀낸 러시아 출신 고고학자 로스트프체프(왼쪽)와 부인.
우메하라가 한국 문화의 기원지로 시베리아를 꼽은 것은 사실은 강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면서 한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들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했다. '한국은 북쪽은 한나라의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금속을 모르는 미개한 석기시대가 지속되었으며, 남쪽은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어서 식민지였다'고 보았다. 즉 한국은 옛날부터 다른 문명국이 식민지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역사가 발전하는 미개한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문명화'하지 않으면 계속 미개하기 살게 될 것이므로 식민지화는 한국인을 위한 것이라는 억지주장을 했다.

일제 강점 이후 한국을 고고학적으로 조사해보니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세형동검, 청동거울 등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가 존재함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의 논리라면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 이전에는 독자적인 청동기가 나와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은 세형동검에 보이는 동물장식을 들어 한국의 청동기는 중국 북방과 시베리아의 유목민족이 전란을 피해 한국으로 유입한 결과라고 보았다. 일본 학자들이 초원지역과의 관련성을 밝혀낸 것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관련이 아니라, 중국 세력의 유입 및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제 3의 기원지로 스키타이문화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그러니 기원지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북방기원설도 '한민족의 타율성론'을 설명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자생설'에만 기대는 것도 경계해야
최근 한국에서 북방지역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경우 누가 봐도 분명한 초원지역의 무덤에 유물도 나왔건만, 자생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북방기원설이 일제 때에 등장한 이후 누구 하나 유라시아 초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없이 옛 자료만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나 황금보검같은 유물들을 단순하게 한반도 자생적인 것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모순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라시아는 거대한 '민족의 이동' 시기였으며, 자생설은 유라시아의 여러 자료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북방문화기원설 또한 그것이 일제 식민지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목욕물과 아기'라는 서양속담이 있다.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리겠다고 욕조 안에 있는 아기까지 같이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일제 잔재를 극복하는 길은 주변 실정을 무시한 자생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와의 문화교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21세기인 지금 북방의 여러 나라는 꿈에도 못 가보는 나라들이 아니라 한국의 수출품이 넘치는 주요한 파트너들이 되었다. 이런 때, 아직도 70~80년 전 이야기로 한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학자들이 직접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한민족의 형성과정을 차근히 풀어나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필자가 일생을 두고 풀어보고 싶은 과제이기도 하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9> 부산 `제5의 문명`을 만들자

- 서구 기독교관에 입각, '4대 문명' 주관적 설정
- 중국도 '중화'에 치우쳐 초원문명을 야만 취급

- 이동의 초원 유목민족… 문물·기술교류 역할로 세계사 발전 한 축 담당
- '5대 문명'이라 불러야

- 부산 역사·문화·지형적, 초원·해양문화 공존
- 동북아 바닷길 중심지… 대륙가는 출발점 돼야

러시아 유학 시절 필자는 거의 해마다 여름을 시베리아의 발굴현장에서 보냈다. 9월로 접어들면 너른 시베리아의 평원에서는 밀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러시아에 물자가 귀했던 1990년대였던지라 발굴 틈틈이 들에 팬 밀 이삭을 손으로 베어먹거나, 지도교수가 사냥해오는 오리와 너구리 고기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초원, 그 냉혹한 현실

 
  만년설을 연상시키는 눈 덮인 산맥 아래 초원에서 스키타이 유적을 바라보고 있는 필자.
특히나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10월까지 발굴이 이어질 때면 고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침낭을 몇 개씩 덮고 자도 아침에 깨면 손이 곱아서 침낭끈을 제대로 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날은 아침 식사당번을 위해 새벽에 일어났는데 곱은 손가락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보드카 한 컵을 들이켜 몸을 녹일 정도였다. 지도교수가 사냥해온 오리, 너구리의 고기로 발굴 도중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한편, 흉노족이 중원과 맞서면서 살아갔던 중국 북방의 내몽고 지역은 최근 사막화가 심해진데다 한화(漢化)된 도시들이 들어서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초원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다. 실제 내몽고 자치주 북방 초원지역은 광활한 초원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는 가축이나 목축인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초원 하면 막연한 낭만 아니면 먼 나라의 이색적인 모습을 상상했던 필자에게 그 모든 것은 충격이었다. 아니,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한민족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고고학에 입문한 필자에게 초원은 박사 과정 동안의 화두였다. 지난 100여 년간 한국에서 막연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한민족의 기원이 북방지대에서 비롯됐다는 북방민족 기원설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초원 하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초원에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초원의 민족들뿐이었다.

도대체 이런 척박한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사의 한 축이었던 초원의 발달된 문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또 그들의 유물들은 까마득히 먼 한반도까지 어떻게 유입될 수 있었을까. 필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야만과 오랑캐 이미지로 덧칠된 초원역사

 
  필자(맨 오른쪽)가 서부 시베리아에 있는 안드로노보문화 유적을 발굴하던 중 연구진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계 4대 문명'은 19세기 이래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서구세계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장된 결과다. 특히 18세기 이후 사막의 한가운데서 꽃피었던 메소포타미아문명권은 바로 성서의 고향이었기에 집중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와 인더스 문명 역시 서구에 의한 식민지화에 따라 그 연구가 진행됐다.

서양이 성서고고학의 발달에 근거한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동양에서는 중국의 중화 중심 역사관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사서에서 초원의 여러 민족은 중국(중화)을 위협하고 침략하는 무뢰한의 이미지로 채색됐다. 이렇듯 동·서양은 오랜 세월 '세계 4대 문명'이 세계사를 대표하는 가장 선진적이며 우수한 문명이라는 인식 속에 그 외 지역의 중요성은 간과했다. 특히 초원지역의 민족들은 옛날에는 자신들의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도 않았고, 정착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 탓에 야만의 대명사이자 오랑캐로 치부됐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일궈놓은 세계사적 문화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초원지역을 바라보면서 막연히 한민족의 기원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민족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초원민족들이 초원에서 일구었던 문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라시아의 초원문명은 정착민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정착해 살면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세계사의 한 축을 이루며 마치 피를 받고 뿜어올리는 심장처럼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차 목축 야금술을 비롯해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이집트와는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인더스·중국문명의 북방에 접해 4대 문명과 다양한 교류 속에서 세계사를 구성해왔다.

■"초원문명은 세계 제5대 문명이다"

 
  초원문명을 상징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 알타이의 황금사슴상.
필자는 기존 세계 주요 문명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초원의 문명이 4대 문명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에 주목해 '제5의 문명'이라 하고 싶다. 세계에 4대 문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온대지역에서는 정착생활에 기반한 '4대 문명'이 성장했다면, 그와는 다른 환경과 지역에서 태동한 초원의 문명은 그에 걸맞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이를 제 5의 문명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원의 문명에서는 각 민족을 초월한 다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또 자연에서 자라는 풀을 이용해 목축과 유목을 했던 것은 오늘날 보면 친환경적인 특징이다. 또한 이들은 물자의 빠른 교류와 지역간 이동과 활발한 교류를 전제로 했다. 이 외에도 많은 특징이 있지만, 어쨌든 정착에 근거한 다른 4대문명과는 이질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초원민족의 문명은 유라시아 4대문명의 북쪽에서 기원전 3500년께 시작돼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이 세운 몽골제국 시절에 절정을 이뤘다. 근 5000년간 초원문명은 4대문명의 북쪽에서 새로운 문물과 기술이 교류되는 고속도로 역할을 하며 각 문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인체의 기관으로 비유한다면 피를 받고 다시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다.

 
  알타이 주민의 오두막.
초원과 해양. 얼핏 들으면 서로 전혀 관계 없는 주제 같이 보인다. 하지만 바닷가 도시 중에서도 부산은 지형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 북방과 해양의 심성과 특징이 공존한다. 필자가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낯선 부산에 왔을 때 왠지 모를 친밀감과 익숙함을 느꼈다. 재미있는 것은 필자가 만나본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부산은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부산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유로 흔히 6·25때 전국의 피란민들이 몰려든 임시수도였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은 고대 이래로 북방계를 비롯해 주변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교역을 근거로 살아왔다.

완만한 산 사이의 너른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지역과 달리, 경남과 부산은 대체로 험한 산, 너른 바다를 낀 땅에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예부터 교역에 적극적이었고,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잘 받아들이면서 나라를 발전시켰다. 좋은 예가 바로 가야다. 너른 바다를 끼고 있고 판세도 넓지 못했던 가야는 당시의 최신 소재였던 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발굴하여 교역품으로 만들어 사방과 교역했다. 또 다양한 북방계 유물도 적극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역사를 봐도 부산은 해양·초원문화 결절점
 초원의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가야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교역에 힘썼기 때문이다. 가야는 해양과 초원이 맞닿은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북방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섬나라 일본과 교역하면서 진정으로 국제적인 국가를 이뤘다. 21세기 부산이 진정한 국제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타산지석이 아닐까.

20세기 초엽 이래 부산은 한국의 제 2도시이자 선진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최근 그런 매력을 조금씩 잃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모든 국가적 역량이 서울로 집중되는 지금 부산이 나아가야할 길은 한국의 제 2 도시가 아니라 '동북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가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제1회(2009년 9월 22일 자)에서 밝힌 것처럼 '유라시아 지도를 거꾸로 놓으면 부산은 바닷길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유라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위해 21세기 부산은 해양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포용력을 갖추어야한다. 사실 필자의 연재는 이러한 '현실적인' 부산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원의 여러 문화가 번성했던 원인에서 부산이 나아가야할 바에 대한 타산지석을 제시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필자의 부족한 연재가 담백솔직하며 야성적인 부산이 초원과 해양을 아울러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지난 9개월간 매주 머릿 속에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고 마침표를 찍는 지금, 필자의 머리 속은 텅 비고 속도 허전해지는 것 같다. 조방 앞 식당에서 말아주는, 초원 유목문화의 냄새가 물씬 나는 뜨거운 돼지국밥 한 숟갈(2009년 11월 3일 자 제7회 '가야의 청동솥과 돼지국밥' 편 참조)이 그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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