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인 학자 우메하라, 한민족 타율성 강조
- 식민사관에 입각 한국문화 기원지로 시베라아 지역 지목
- 한반도 독자적 유물 해방 후 잇단 발굴로 억지 주장 설득력 잃어
- 북방기원설 동조도 자생설 맹신도 위험
- 유라시아 지역 문화 교류로 이해해야
한국 사람에게 한민족 북방기원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하면 막연히 알타이와 바이칼호수를 떠올린다. 아마도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계통이라고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온 이유가 클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없어졌지만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한국의 청동기에는 아연이 포함돼 있어 중원의 청동기와는 다른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게다가 신라의 적석목곽분과 비슷한 파지릭고분이 알타이에 있다는 점도 여러 역사 다큐멘터리에서 다뤘기 때문에 북방기원설은 더더욱 친근감 있다. 지금은 이 구절은 삭제됐지만, 30~40대에게 스키타이나 시베리아가 친근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친숙한 '한민족 북방기원설' 일제시대 출현
|
|
|
일본의 오쿠라컬렉션에 포함돼 있는 청동기. |
|
이렇듯 우리에게 무척 친근한 북방의 초원문화가 과연 우리 민족의 기원인지는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필자 역시 한국과 유라시아 초원은 고대 이래로 꾸준히 문화교류를 해왔음은 분명하지만, 대규모의 사람들이 한반도로 밀려왔다고는 보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 흥미로운 점은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이 처음 제기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이며, 식민지 한국을 조사하던 일본의 고고학자들이 그 주역이었다는 점이다.
1920년대 중국의 하얼빈은 러시아 땅이었다. 동정철도의 부설과 함께 러시아 사람들은 하얼빈을 개발했다. 당시 하얼빈에서 활동하던 러시아인 역사·고고학자들은 '만주연구회'를 구성하여 만주지역의 역사·고고·민속 등을 광범위하게 조사했다. 이 러시아 학자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발해의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금나라의 성인 아성(阿城), 한국 신석기시대 융기문토기의 기원지로 꼽히는 유적인 앙앙계(昻昻溪) 등을 조사했다. 그 중 하얼빈박물관에서 근무했던 톨마쵸프(V.Ya. Tolmachev)라는 학자가 초원의 청동기가 만주지방으로 파급되었음을 발견했다.
톨마쵸프의 인생역정은 러시아 혁명 와중 사방으로 흩어진 러시아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는 우랄산맥 근처에서 살다가 10월 혁명의 와중에 이르쿠츠크로, 또 다시 하얼빈으로 피해서 살았다. 뒤에 그는 하얼빈이 중국땅이 되지 다시 캐나다로 이주했다. 톨마쵸프는 우랄산맥 근처에서 스키타이 시대의 유적을 조사했기 때문에 초원지역 청동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
|
경북 경산 신대동 삼한시대 목관묘에서 출토된 호랑이모양 허리띠 장식. 당시 유행했던 이 같은 동물 모양 금속장식은 초원지대 문화권과 한반도 문화 사이의 관련성을 잘 보여준다. |
|
그런데 그가 헤이룽장(黑龍江)성의 유림푸에서 발견된 청동기를 보고 경탄했다. 그가 우랄산맥 근처에서 조사한 스키타이시대의 동물장식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스키토-시베리아 유형의 청동기가 만주지역으로 전파된 최초의 증거를 발견한 것이다. 그가 본 청동기는 흉노의 일파인 선비족들이 흑룡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남긴 유물이었다.
사실 1910~1920년대 이미 독일의 민스(Minns)나 예일대 교수였던 러시아인 로스트프체프(P.I,Rostovcheff)같은 학자들이 초원의 청동기가 중국에도 유입되었음을 밝혔다. 그런데 톨마쵸프는 더 나아가서 초원지역 청동기가 중국을 넘어 더 동쪽인 만주까지 확대된 것을 밝혔다.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았던 톨마쵸프의 연구는 러시아 내에서 혁명의 와중에 잊혀졌지만, 이후 일본의 학자들에게도 알려져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 일본고고학자의 러시아여행
|
|
|
'한민족의 북방 기원설'을 처음 제기했던 일제시대 일본의 고고학자 우메하라 스에지. |
|
중학교만을 졸업한 사람이 일류 국립대의 교수가 될 수 있을까? 바로 교토대 교수를 역임한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라는 학자 이야기다. 그는 1914년에 중졸의 학력으로 교토대 진열관(현재의 대학박물관)의 자원봉사자 격으로 들어온 후, 1939년 45세 나이로 교토대학 고고학과의 최고 교수 자리에 올랐다. 소설 같은 우메하라의 성공은 교토대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이다. 우메하라 스에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식민지시대의 한국 조사와 러시아·유럽 유학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에 한국은 일본 학자들의 발굴연습장이 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 교토대는 매년 사람을 파견해서 고분 등을 조사했다. 실측에 능력이 뛰어났던 우메하라는 한국의 다양한 유물을 조사하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러던 중 당시 일본에서 유행이었던 구미 세계로의 유학기회가 주어졌다. 우메하라는 당시로서는 최신 자료인 시베리아의 여러 자료를 섭렵할 수 있었으며, 갓 식민지가 된 한국과 중국의 여러 자료를 서양 학계에 소개했다.
러시아와 서구의 학자들은 무학에 가까운 우메하라를 높이 평가했고, 이는 그가 향후 교토대의 교수가 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우메하라는 당시 1920년대 러시아가 발굴한 시베리아와 몽골의 스키토-시베리아 고분 유물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특히 하얼빈의 톨마쵸프를 만나면서 만주지역에도 스키타이 계통의 유물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우메하라는 한반도의 청동기에서도 보이는 북방계 요소가 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스키타이계통의 문화라고 보았다. 중국의 전국시대 말기에 중국이 혼란해지면서 유이민들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다가 한반도로도 들어왔고, 그 덕택에 한반도도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보았다.
우메하라가 제시한 한국문화 북방기원설은 당시로서는 최신인 옛 소련의 자료를 이용했기에 주목을 끌었다. 또한 한반도의 고대문화를 고립된 변방으로 한정한 것이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와 관련지으면서 당시 선진국이었던 러시아와 유럽에 어필할 수 있었다.
■왜 일본인들은 시베리아에 주목했을까
|
|
|
초원의 동물모양 장식품이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로 전파된 것을 밝혀낸 러시아 출신 고고학자 로스트프체프(왼쪽)와 부인. |
|
우메하라가 한국 문화의 기원지로 시베리아를 꼽은 것은 사실은 강한 식민사관의 영향이다. 일본은 한국을 점령하면서 한민족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들어서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했다. '한국은 북쪽은 한나라의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에는 금속을 모르는 미개한 석기시대가 지속되었으며, 남쪽은 임나일본부가 설치되어서 식민지였다'고 보았다. 즉 한국은 옛날부터 다른 문명국이 식민지로 만들어야만 비로소 역사가 발전하는 미개한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문명화'하지 않으면 계속 미개하기 살게 될 것이므로 식민지화는 한국인을 위한 것이라는 억지주장을 했다.
일제 강점 이후 한국을 고고학적으로 조사해보니 낙랑군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세형동검, 청동거울 등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청동기가 존재함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일제 식민지의 논리라면 한국은 중국의 식민지 이전에는 독자적인 청동기가 나와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일본 학자들은 세형동검에 보이는 동물장식을 들어 한국의 청동기는 중국 북방과 시베리아의 유목민족이 전란을 피해 한국으로 유입한 결과라고 보았다. 일본 학자들이 초원지역과의 관련성을 밝혀낸 것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관련이 아니라, 중국 세력의 유입 및 임나일본부설과 함께 제 3의 기원지로 스키타이문화를 만들어낸 셈이었다. 그러니 기원지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북방기원설도 '한민족의 타율성론'을 설명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자생설'에만 기대는 것도 경계해야
최근 한국에서 북방지역과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신라 적석목곽분의 경우 누가 봐도 분명한 초원지역의 무덤에 유물도 나왔건만, 자생설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북방기원설이 일제 때에 등장한 이후 누구 하나 유라시아 초원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 없이 옛 자료만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신라의 적석목곽분이나 황금보검같은 유물들을 단순하게 한반도 자생적인 것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모순이다. 왜냐하면 당시 유라시아는 거대한 '민족의 이동' 시기였으며, 자생설은 유라시아의 여러 자료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북방문화기원설 또한 그것이 일제 식민지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엄정하고 비판적인 태도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목욕물과 아기'라는 서양속담이 있다.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리겠다고 욕조 안에 있는 아기까지 같이 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일제 잔재를 극복하는 길은 주변 실정을 무시한 자생론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유라시아와의 문화교류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21세기인 지금 북방의 여러 나라는 꿈에도 못 가보는 나라들이 아니라 한국의 수출품이 넘치는 주요한 파트너들이 되었다. 이런 때, 아직도 70~80년 전 이야기로 한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 학자들이 직접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한민족의 형성과정을 차근히 풀어나갈 때가 되지 않았을까. 필자가 일생을 두고 풀어보고 싶은 과제이기도 하다.
초원에서 한반도까지 <39> 부산 `제5의 문명`을 만들자
- 서구 기독교관에 입각, '4대 문명' 주관적 설정 - 중국도 '중화'에 치우쳐 초원문명을 야만 취급 - 이동의 초원 유목민족… 문물·기술교류 역할로 세계사 발전 한 축 담당 - '5대 문명'이라 불러야 - 부산 역사·문화·지형적, 초원·해양문화 공존 - 동북아 바닷길 중심지… 대륙가는 출발점 돼야 러시아 유학 시절 필자는 거의 해마다 여름을 시베리아의 발굴현장에서 보냈다. 9월로 접어들면 너른 시베리아의 평원에서는 밀 이삭이 패기 시작한다. 러시아에 물자가 귀했던 1990년대였던지라 발굴 틈틈이 들에 팬 밀 이삭을 손으로 베어먹거나, 지도교수가 사냥해오는 오리와 너구리 고기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초원, 그 냉혹한 현실
|
|
|
만년설을 연상시키는 눈 덮인 산맥 아래 초원에서 스키타이 유적을 바라보고 있는 필자. |
| 특히나 밤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 10월까지 발굴이 이어질 때면 고충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침낭을 몇 개씩 덮고 자도 아침에 깨면 손이 곱아서 침낭끈을 제대로 풀 수 없을 정도였다. 어떤 날은 아침 식사당번을 위해 새벽에 일어났는데 곱은 손가락이 도저히 풀리지 않아 보드카 한 컵을 들이켜 몸을 녹일 정도였다. 지도교수가 사냥해온 오리, 너구리의 고기로 발굴 도중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한편, 흉노족이 중원과 맞서면서 살아갔던 중국 북방의 내몽고 지역은 최근 사막화가 심해진데다 한화(漢化)된 도시들이 들어서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초원의 모습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다. 실제 내몽고 자치주 북방 초원지역은 광활한 초원에서 유유자적 풀을 뜯는 가축이나 목축인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초원 하면 막연한 낭만 아니면 먼 나라의 이색적인 모습을 상상했던 필자에게 그 모든 것은 충격이었다. 아니,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다. 한민족의 형성 과정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고고학에 입문한 필자에게 초원은 박사 과정 동안의 화두였다. 지난 100여 년간 한국에서 막연하게 되풀이되고 있는, 한민족의 기원이 북방지대에서 비롯됐다는 북방민족 기원설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초원 하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본 초원에는 혹독한 자연환경과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는 초원의 민족들뿐이었다. 도대체 이런 척박한 땅의 사람들이 어떻게 세계사의 한 축이었던 초원의 발달된 문명을 이룰 수 있었을까. 또 그들의 유물들은 까마득히 먼 한반도까지 어떻게 유입될 수 있었을까. 필자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야만과 오랑캐 이미지로 덧칠된 초원역사
|
|
|
필자(맨 오른쪽)가 서부 시베리아에 있는 안드로노보문화 유적을 발굴하던 중 연구진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 |
|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세계 4대 문명'은 19세기 이래 세계를 식민지화하던 서구세계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확장된 결과다. 특히 18세기 이후 사막의 한가운데서 꽃피었던 메소포타미아문명권은 바로 성서의 고향이었기에 집중적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집트와 인더스 문명 역시 서구에 의한 식민지화에 따라 그 연구가 진행됐다. 서양이 성서고고학의 발달에 근거한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면, 동양에서는 중국의 중화 중심 역사관으로 주변을 바라봤다.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사서에서 초원의 여러 민족은 중국(중화)을 위협하고 침략하는 무뢰한의 이미지로 채색됐다. 이렇듯 동·서양은 오랜 세월 '세계 4대 문명'이 세계사를 대표하는 가장 선진적이며 우수한 문명이라는 인식 속에 그 외 지역의 중요성은 간과했다. 특히 초원지역의 민족들은 옛날에는 자신들의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도 않았고, 정착민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그 탓에 야만의 대명사이자 오랑캐로 치부됐다. 그런 와중에 그들이 일궈놓은 세계사적 문화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는 초원지역을 바라보면서 막연히 한민족의 기원지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민족의 기원을 논하기 전에, 초원민족들이 초원에서 일구었던 문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유라시아의 초원문명은 정착민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정착해 살면서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실제로는 세계사의 한 축을 이루며 마치 피를 받고 뿜어올리는 심장처럼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차 목축 야금술을 비롯해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대는 이집트와는 약간 떨어져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인더스·중국문명의 북방에 접해 4대 문명과 다양한 교류 속에서 세계사를 구성해왔다. ■"초원문명은 세계 제5대 문명이다"
|
|
|
초원문명을 상징하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 알타이의 황금사슴상. |
| 필자는 기존 세계 주요 문명과는 다른 패러다임에서 발생하고 발달한 초원의 문명이 4대 문명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에 주목해 '제5의 문명'이라 하고 싶다. 세계에 4대 문명만 있었던 것이 아니란 뜻이다. 온대지역에서는 정착생활에 기반한 '4대 문명'이 성장했다면, 그와는 다른 환경과 지역에서 태동한 초원의 문명은 그에 걸맞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이를 제 5의 문명으로 명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원의 문명에서는 각 민족을 초월한 다문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또 자연에서 자라는 풀을 이용해 목축과 유목을 했던 것은 오늘날 보면 친환경적인 특징이다. 또한 이들은 물자의 빠른 교류와 지역간 이동과 활발한 교류를 전제로 했다. 이 외에도 많은 특징이 있지만, 어쨌든 정착에 근거한 다른 4대문명과는 이질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초원민족의 문명은 유라시아 4대문명의 북쪽에서 기원전 3500년께 시작돼 칭기즈칸과 그 후손들이 세운 몽골제국 시절에 절정을 이뤘다. 근 5000년간 초원문명은 4대문명의 북쪽에서 새로운 문물과 기술이 교류되는 고속도로 역할을 하며 각 문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인체의 기관으로 비유한다면 피를 받고 다시 공급해주는 역할을 했다.
|
|
|
알타이 주민의 오두막. |
| 초원과 해양. 얼핏 들으면 서로 전혀 관계 없는 주제 같이 보인다. 하지만 바닷가 도시 중에서도 부산은 지형이나 문화적으로 볼 때 북방과 해양의 심성과 특징이 공존한다. 필자가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낯선 부산에 왔을 때 왠지 모를 친밀감과 익숙함을 느꼈다. 재미있는 것은 필자가 만나본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사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부산은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부산에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이유로 흔히 6·25때 전국의 피란민들이 몰려든 임시수도였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은 고대 이래로 북방계를 비롯해 주변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이며 교역을 근거로 살아왔다. 완만한 산 사이의 너른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지역과 달리, 경남과 부산은 대체로 험한 산, 너른 바다를 낀 땅에서 살아야 했다. 따라서 예부터 교역에 적극적이었고,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잘 받아들이면서 나라를 발전시켰다. 좋은 예가 바로 가야다. 너른 바다를 끼고 있고 판세도 넓지 못했던 가야는 당시의 최신 소재였던 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고 발굴하여 교역품으로 만들어 사방과 교역했다. 또 다양한 북방계 유물도 적극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지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역사를 봐도 부산은 해양·초원문화 결절점 |
초원의 문명이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가야처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신기술을 받아들이고 교역에 힘썼기 때문이다. 가야는 해양과 초원이 맞닿은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해 북방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섬나라 일본과 교역하면서 진정으로 국제적인 국가를 이뤘다. 21세기 부산이 진정한 국제도시로 나아가기 위한 타산지석이 아닐까.
20세기 초엽 이래 부산은 한국의 제 2도시이자 선진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최근 그런 매력을 조금씩 잃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모든 국가적 역량이 서울로 집중되는 지금 부산이 나아가야할 길은 한국의 제 2 도시가 아니라 '동북아의 새로운 중심지'로 가는 것이다. 이 시리즈의 제1회(2009년 9월 22일 자)에서 밝힌 것처럼 '유라시아 지도를 거꾸로 놓으면 부산은 바닷길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유라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출발점'인 것이다.
이를 위해 21세기 부산은 해양뿐 아니라 북방의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포용력을 갖추어야한다. 사실 필자의 연재는 이러한 '현실적인' 부산의 문제에 대한 지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초원의 여러 문화가 번성했던 원인에서 부산이 나아가야할 바에 대한 타산지석을 제시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 필자의 부족한 연재가 담백솔직하며 야성적인 부산이 초원과 해양을 아울러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지난 9개월간 매주 머릿 속에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고 마침표를 찍는 지금, 필자의 머리 속은 텅 비고 속도 허전해지는 것 같다. 조방 앞 식당에서 말아주는, 초원 유목문화의 냄새가 물씬 나는 뜨거운 돼지국밥 한 숟갈(2009년 11월 3일 자 제7회 '가야의 청동솥과 돼지국밥' 편 참조)이 그립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