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그시절 그이야기

醉月 2011. 2. 3. 10:07

 

 

 

'전쟁 중에도 아기는 태어나듯 암흑의 계절에도 방랑은 있다'고 했던가. 유신과 긴급조치에 짓눌린 1970년대 그 암담한 시절에도 분명 사랑과 청춘이 있었고 낭만이 있었다. 젊음은 금방이라도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흔들어보고, 멋대로 뒹굴어보고 싶은 열정에 몸부림 치고 있었다.

 

60년대 서양 팝송에 빠져 밤새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끌어안았던 젊은이들은 70년대 이른바 '통 블 생'의 새 문화를 탄생시켰다. 통기타와 블루진, 생맥주. 여기에 바람에 날릴 정도의 긴 머리까지 곁들이면 어둡고 갑갑한 정치사회적 현실을 잠시나마 잊을 만도 했다. 그건 분출하는 젊음이 누리고 싶어 하는 최소한의 자유였다. 꽉 끼는 청바지 차림에 생맥주 한 조끼, 그리고 통기타에 맞춰 긴 머리를 리드미컬하게 흔드는 것…그걸 자유라고 말하는 게 웃기는 일이었지만 유신정권은 그런 모습조차도 못 봐줬다. 머리를 조금만 길게 기르면 바로 퇴폐풍조로 단속했다. 경찰은 바리캉과 가위를 들고 긴 머리 젊은이들을 추격해 머리에 '고속도로'를 냈다. 반발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에 넘겼다.

 

'히피성 장발풍조가 부쩍 만연...민족의 주체의식과 국민기강이 문란'

 

 

치안본부 정발 일제 추방령 1976.05.14 7면 [경향신문]


1976년 5월14일자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치안본부는 무분별한 장발풍조가 만연… 민족의 주체의식과 국민기강이 문란해지고 있다고 지적, 전국경찰에 장발 일제추방령을 내렸다.' 가당찮다. 머리를 길게 기르는 게 뭐, 민족의 주체의식을 훼손하고 국민기강을 문란케 한다고? 이런 '거창한' 사고방식을 가졌으니 김성주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에서 한발 더 앞서나간 건 당연한 순서였다.

 

"장발추방엔 각급공무원 각 직장별로 지도계몽 단속에 나서…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점차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키겠다." 온 나라,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지속적으로 장발족 추방 운동을 벌이겠다는 얘기다. 그게 무슨 범국민운동 깜이 되는지 지금 생각하면 참 황당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모두 머리를 끄덕인 '지당한 말씀'이었다.

 

유신정권의 교주랄 수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 때의 군인정신에 여전히 투철한 탓에 '두발불량' '복장불량'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텔레비전을 보다 "저게 뭐야, 머리가...."  한마디 만 하면 내무부 문공부 문교부에선 난리가 났다. 방송국에도 바로 불똥이 떨어졌다. 일찍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러온 친척이 장발로 나타나자 "이런, 히피족!!"이라며 마구 때려 쫓아냈다는 소문도 돌 만큼 박대통령은 긴 머리에 히스테리 수준의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치안본부가 장발단속을 천명하기 세 달 전 그는 이미 문공부 업무보고 때 젊은이의 장발풍조를 개탄하는 일장연설을 했다.

 

"주체성 없이 외래문물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우리 자체의 문화예술을 좀먹게 할 우려가 있다. 이로 인해 어느 시기에 우리의 문예가 없어지게 된다면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마치 엄청난 외국문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한국문화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겁을 주는 이 '훈시'가 바로 장발을 겨냥한 것이었다.

 

치안본부장이 장발단속을 범국민운동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고 문공부장관은 혐오스런 장발족이 TV에 나와(외국인도 마찬가지!) 순수한 국민들을 물들여선 절대 안 된다고 입에 거품 문 것도 바로 '대통령의 철학'을 구현한다는 충성의 다짐이었다.

 

훗날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반정부 데모에 나선 대학생들의 장발을 보고 보복적으로 "저 놈들 머리를 자르라"고 지시한 것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60년대 KBS, TBC, MBC 등 텔레비전 방송국이 잇달아 개국하고 경쟁적으로 오락프로를 방영한 것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주체성 바탕 민족문화 창달 1976.02.05 1면 [동아일보]

 

 

67년 가수 윤복희가 무릎 위 '깡똥한' 치마를 선보인 이래 미니스커트 열풍이 불었고 69년 클리프 리처드 등 외국가수들의 내한공연후 장발바람이 불자 단속이 시작됐다는 것. 외국가수 공연무대에 여성 팬들이 속옷과 손수건을 던져 여론의 질타를 받자 그걸 빌미로 자연스레 퇴폐행위 단속으로 이어갔다는 해석이다. 73년 2월8일 개정된 경범죄처벌법에는 '신체의 과도노출, 안까지 투시되는 옷을 착용하는 행위'와 '성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장발을 한 남자'를 처벌대상으로 명시했다.

 

 

경찰관들이 치마가 무릎 위 몇 cm까지 올라가는지 잣대로 체크

 

 

해방에서 80년대까지 세월따라...유행따라...의상 35년
1980.08.15 5면 [동아일보]


이후 순찰경관은 한 손엔 가위, 다른 손엔 잣대를 들고 다녔다. 미니스커트 여성을 보면 그 자리에 세운 뒤 치마가 무릎 위 몇cm 까지 올라가는지 대자를 들이댔다. 17cm가 넘으면 치마 속단을 뜯어 내리도록 했다. 대로변에서 여자의 무릎 아래 경관이 꿇어 앉아 허벅지에 잣대를 대고 재는 모습은 한마디로 엽기 그 자체였다. 몇몇 여성들은 평소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다 경찰이 보이면 치마끈이 엉덩이에 걸리도록 끌어내렸다. 남자들은 여자친구가 큰 길에서 치마를 밑으로 내리는 걸 도와주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장발단속은 73년 한해에만 1만2천여 건의 실적을 올렸다. 이듬해 6월 서울시경은 딱 1주일 동안 1만1백 명을 적발했고 그중 머리 깎기를 거부한 2백62명을 즉심에 넘겼다. 경찰은 거리에 흰색 금줄을 치고 적발된 사람들을 중인환시 속에 가둬놓았다. 광화문 종로 명동 등 중심가와 대학가에는 노천구류소와 의자 서너 개의 간이 이발소가 설치됐다.

 

 

밧줄 안에는 20~40여 명 적발된 장발족이 빽빽이 들어찼고 서너 명씩 불려나와 간이 의자에 앉혀졌다. 제대로 이발을 원하는 사람은 이발료를 내고 깎았다.그러나 돈이 없으면 뒷머리나 옆머리를 고속도로처럼 바리캉으로 밀어버렸다. 멀리서 단속현장을 보고 골목길이나 사람이 많은 곳으로 냅다 줄행랑을 놓는 사람과 경찰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서울거리에서 항상 보는 일상사가 됐다.   

 

'예비군 전력강화를 위해 용모단정은 필수적'···경찰 기준보다 엄격해 곳곳서 불만

 

 

경찰만 단속을 하는 게 아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선 교관들이 머리를 깎았다. 그걸 항의하던 예비군이 구속되는 사례까지 있었으니 당시 머리를 기르는 건 비장한 각오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훈련장에서 별로 길지도 않은 머리를 깎인 기자들이 볼이 메어 "예비군 머리 깎기 기준이 애매하다", "경찰기준으로 깎고 갔다가 그것도 길다고 다시 깎이는 사례가 많다"고 항의하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자 군은 "예비군 전력강화를 위해 용모단정은 필수적이다"며 "동원예비군은 현역장교 기준, 일반예비군은 통상 개념의 공무원머리로 조발하는 게 옳다"는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했다. 이거 참,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온 나라가 이처럼 머리 길이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자 원로들이 느슨한 단속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병용 변호사는 신문 기고를 통해 외국축구선수들이 긴 머리를 펄렁이며 잘 싸우는 걸 TV에서 보았다.


"예비군 머리깎기 기준 애매하다" 1976.06.07 7면 [동아일보]

 

 

미국의 존슨대통령도 은퇴 후 머리를 길렀으며 일본의 사토 전수상도 노벨상을 타러갈 때 아주 긴 머리로 멋을 풍겼다"고 긴 머리를 예찬했다. 그는 특히 "갱을 잡는 데는 아주 무력한 경찰이 거리의 젊은이 머리를 잡아내는 데에는 아주 유능하다"고 비꼬며 역사를 더듬어보면 우리 조상의 머리가 훨씬 길었다는 걸 알고나 있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박대통령이 주체성과 무분별한 외래문물 도입을 비난한 76년 상반기에만 경찰은 55만9천여 명을 잡아내 2만4천9백 명을 즉심에 넘겼다. 단속기준은 언제나 '옆머리가 귀를 덮고 뒷머리가 셔츠 깃을 덮는' 머리였다.

 

70년대 중반 인기를 끌었던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미팅에 가려고 나섰던 주인공들이 경찰의 장발단속에 걸리자 죽어라고 도망가는 모습이 나온다. 경찰 역시 젖 먹던 힘을 내어 그들을 쫓아가는데 이때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이 송창식의 '왜 불러'다.

 

주체성 바탕 민족문화 창달 1976.02.05 1면 [동아일보]


경찰이 부르면 바로 돌아서서 튀고 제발 이제 다시는 부르지도 말라고 절규하던 시절, 그 '왜 불러'가 끝내 금지곡이 되고만 건 차라리 코미디였다. 79년 박대통령이 총탄에 쓰러질 때까지도 장발단속은 끊임없이 이 땅의 시민들을 괴롭혔다. 유신의 억압에 항거하느라 일부러 머리를  더 길게 길렀는지도 모를 일이다.

 

80년 9월, 내무부장관이 결국 전 경찰에 장발단속의 중지를 지시한다. 단속할 때는 주먹만한 활자로 보도했던 언론은 이 기사는 겨우 2단 정도로 보도했다. 어쨌거나 훈육주임 대통령과 그의 부하 규율부원들이 서슬 퍼렇게 가위 들고 설치며 깎고 잘라낸 것은 오로지 우리의 머리카락뿐이었을까? 획일주의, 병영주의 망령은 그 후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일까?

 

'유신·긴급조치 시대'는 감시와 처벌이 일상화된 시기였다. 마음 놓고 말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대학에서 데모를 하겠다며 누군가 일어서 "학우여!"의 "하…"자만 외쳐도 학생보다 훨씬 많은 정보요원이 둘러쌌다. 택시 안에서 술김에 청와대나 정부 비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경찰서로 끌려갔다. 교회 사찰 언론사에도 '사복'이 들락거렸다. 집에서조차 아들이 유신을 비방할라치면 아버지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긴급조치 9호 시대

 

 

"긴급조치 9호는 유언비어의 날조 유포나 교내 집회 시위는 물론 긴급조치 그 자체를 비방하는 행위도 처벌토록 했다. 철저히 재갈을 물린 것이다. 감시망은 촘촘했고 빠져 나올 구멍은 안보였다. 서울대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주검으로 돌아오던 시절이다. 인권을 얘기하는 건 사치였다. 부지기수가 잡혀가고 부지기수가 맞고 부지기수가 피를 흘렸다. 언론도 숨죽였다. 이미 제 식구들까지 잘라냈던 터다. 망나니 칼춤이 어디로 뛸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목을 조르면 더 숨 쉬고 싶듯 입을 막으면 더 말하고 싶은 법. 신문사 사회부 데스크들은 끝없이 추락하는 인권의 끄트머리라도 말하고 싶었다. 정보부나 보안사, 치안본부 대공(對共)분실 같이 출입이 원천 봉쇄된 덴 몰라도 서민들이 잡혀가 밤을 새우는 경찰서 보호실의 인권은 얘기해도 괜찮을 듯 했다. 그러자면 피의자들과 똑같이 밤을 새우고 즉결심판에 넘겨져야 할 터. 기성 사건기자들은 경찰에 얼굴이 알려져 불가능했다. 그래서 갓 입사한 수습기자들을 투입키로 결정했다. 일종의 신고식처럼….


긴급조치 9호 1669일 9시간 일지 1979.12.08 3면 [동아일보]

 

 

'술 취한 통금 위반자' 役으로 기자 신고식 치르다

 

 

통금 속의 도심 1978.09.21 5면 [동아일보]


1976년 1월13일 밤. 난생 처음 '기자증'이라는 걸 받아 쥔 '견습' 3명을 사건기자 선배들이 불러냈다.(당시는 수습을 '견습'이라고 불렀다. 볼 견(見) 자를 썼지만 개처럼 하염없이 뛴다고 자조적으로 개 견(犬)자를 쓰곤 했다) 무교동과 피맛골 술집을 돌며 맥주와 막걸리를 섞은 이른바 '맥막'을 입사 축하주로 끝없이 마시게 했다. 얼큰히 취했다. 시간은 훌쩍 12시 통금을 넘겼다.

 

새벽 1시. 갑자기 정색을 한 선배들이 슬슬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수습들의 기자증을 회수했다. 그리곤 취재차에 구겨 넣듯 '실었다.' 차 한 대 없는 서울의 밤거리를 달릴 때 술 취한 수습들은 신이 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들은 금세 서대문, 영등포, 성동경찰서 관할지역에 '떨어트려' 졌다. 그날 서울의 밤 기온은 영하 15도 안팎이었다. 떨어트리기 직전 선배들은 수습들에게 한마디 귀띔을 했다. "살아 돌아와. 내일 보호실 기사로 신고 한번 잘 해 봐!" '술취한 통금위반자' 2명은 바로 잡혀 경찰서 보호실로 실려 갔다.

 

그러나 서대문경찰서 관내에 떨어진 수습은 도무지 '잡혀지지가' 않았다. 순찰경관이나 방범대원은 오히려 "빨리 집에 가라. 다른 경찰한테 잡히면 즉심에 넘어 간다."며 원치 않는 호의를 베풀었다. "제발 잡아가 달라"고 빌 수도 없는 일. 그는 추운 밤거리를 헤매다 마포경찰서 관할지역으로 월경(越境)했고 끝내 파출소 앞에서 한바탕 오줌을 누고서야 붙잡혀가는 혜택(?)을 받았다. 단순 통금위반이 아닌 '공공건물 앞 방뇨'여서 경찰에게 받은 괴로움이 더 크긴 했지만….

 

 

뺨 맞고, 걷어 차이고.. '인권'은 없는 경찰서 보호실 

 

 

파출소 보호실에서부터 인권은 자취를 감췄다. 하긴 자기가 근무하는 사무실에 대고 소변을 본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긴 어려웠겠다. 그래도 우선 파출소로 끌려가자마자 냅다 뺨을 맞았고(영하 15도 추위에 헤매다 들어와 맞았으니…) 이어 무릎꿇림을 당했다. 파출소 근무자들은 돌아가며 꿀밤을 먹였다. 보고서를 꾸밀 때는 군대에서 상급자가 기합을 주듯 정강이를 걷어차기도 했다. 통금위반 장발 무전취식 노상방뇨 주취 고성방가 등 갖가지 죄목으로 붙잡혀온 사람들도 꼼짝 못하긴 마찬가지. 술김에 대들거나 경찰 지시에 반발하는 사람은 오히려 함께 갇힌 사람들이 더 따돌렸다.

 

새벽 2시. 호송차가 파출소마다 돌며 즉심 대기자들을 본서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호송차에 타기 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미적대면 경찰은 엉덩이를 걷어찼다. 파출소에서 '봐주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쭈뼛쭈뼛 뒤로 물러서거나 일부러 화장실에 보내졌다.


초만원「범법」…엉망「관리」 - 경찰서 경범 보호실서 「즉결」까지 1976.01.15 7면 [동아일보]

 

 

호송차 요원과 파출소 근무자들은 사람들의 머릿수를 세며 인수인계를 하다가 뺨을 때리거나 꿀밤을 먹이고 가슴을 주먹으로 내지르곤 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조금만 인심을 쓰면, 마지막에라도 풀려날지 모른다는 희망의 끈을 잡고 경찰관에게 읍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찰서 즉심대기 보호실은 파출소보다 환경이 더 나빴다. 10평가량 냉골 마루방에 70~80명이 수용됐다. 유리창은 깨져 찬바람이 솔솔 들었다. 바람을 막아줄 담요 한 장 없어 사람들은 그저 옷깃을 세우고 웅크려 앉는 것 외엔 뾰족한 수가 없었다. 술이 덜 깬 사람들이 마루에 토하고 뭉개기도 했지만 아무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경찰관 애환과 영욕의 허실 1977.04.27 5면 [동아일보]


보호실엔 시큼털털하고 퀴퀴한 냄새가 섞여 숨 쉬기조차 거북했다. 창살 넘어 당직 근무자는 작은 연탄난로를 쬐면서 파커 위에 담요까지 뒤집어썼다. 이따금 마음에 드는 대기자, 특히 여자 대기자를 난로 옆에 불러내 음담패설을 늘어놓기도 했다. 일종의 '특실' 혜택을 주는 거였다. 사실 70년대 초반엔 통금위반으로 걸린 일부 힘 있는 사람들이 통금이 해제될 때까지 경찰 간부 방에 있다 나가곤 해 특실 시비가 일곤 했다.

 

새벽 6시. 경찰서 구내식당 종업원이 보호실에 와 식사주문을 받았다. 시중에서 150원하는 장국과 설렁탕이 350원, 라면이 200원. 그밖에 사이다나 빵 삶은 계란 등이 모두 시중가격의 2배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경찰서에 잡혀있다는 전화를 해준다며 전화요금의 몇 배를 받아갔다. 즉심 대기자들은 바가지 요금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식'을 시키고 전화를 부탁했다.

 

 

사식을 시키지 않으면 '관식'은 백미 96g, 대두 48g 등 주식 60원 부식 49원으로 하도록 규정이 돼있었다. 하지만 경찰이 주는 밥은 꽁보리 도시락에 단무지가 전부였다. 그뿐인가. 사식을 시킨 사람에겐 특별히 보호실 철창 밖으로 나와 당직근무자의 책상 위에서 식사할 수 있는 특전까지 주어졌다.

 

 

 

오전 9시가 넘으면 경찰간부들이 출근해 즉심에 넘길 사람과 훈방할 사람을 가려낸다. 힘과 빽이 동원되는 마지막 단계다. 보호실 잠입근무를 한 수습 2명도 이때 풀려났다.

 

그러나 서대문경찰서 관할지역에 갔어야 할 1명은 마포 관내로 월경 한 탓에 훈방 명단에 들지 못하고 즉심 호송차에 실렸다. 그는 즉심의 맨 마지막 '30초 재판'의 인정신문 단계까지 갔다가 뒤늦게 소재를 파악한 신문사의 조처로 아슬아슬하게 훈방됐다. 30초 재판은 당시 영등포 즉심과에 넘겨진 245명이 재판을 받은 시간이 90분, 응암동에 넘어간 315명은 2시간 15분만에 모두 재판을 받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판사는 피의자들을 10여 명씩 줄지어 세워놓고 "각 벌금 3000원"하는 식으로 판결을 했다. 변론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동심이 수난 겪는 경찰서 보호실 1976.10.16 7면 [동아일보]

 

 

 

'경찰서 보호실' 기사, 가판에는 실렸으나 배달판에선 다른 기사로

 

 

영일부근서 "석유 발견" 박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1976.01.15 1면 [동아일보]


경찰서 즉심 보호실과 즉결심판장의 이런 실상을 담은 기사는 1976년 1월 15일 동아일보 사회면 헤드라인에 실렸다. 그러나 이 기사는 서울시내 가판에만 나갔을 뿐 배달 판에선 다른 기사로 대체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훗날 엉터리로 밝혀진 '영일만 석유 발견' 발표를 했기 때문이다. 석유발견 소식을 듣고 "우리도 이젠 잘 살게 됐다"며 기뻐하는 국민들의 반응이 보호실 인권기사를 밀어냈다. 그러나 당시 보호실 잠입기사를 계기로 신문사간 즉심 및 형사 보호실 취재 경쟁이 일어났다. '엄마 따라 경찰서 보호실에 잡혀온 아동의 인권'문제도 이때 제기됐다. 치안본부는 그해 9월 전국 경찰서에 '즉심업무 개선 지침'을 내려 보냈다.

 

  관련기사

 「30초 즉심」을 지양하라동아일보 1976-0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실정은 어떠한가. 유죄냐 무죄냐, 그리고 벌금이냐 구류냐를 가리는데 불과 30초, 길어서 40초 남짓을 헤아릴 뿐이다. 아무리 재판관이 명철하다 할지라도 그쯤의 겨를에 정당한 판결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긴급조치 1호에서 9호까지「묻혔던 사건」경향신문 1979-12-08
75년 5월 13일 발효됐던 대통령긴급조치 9호가 4년 6개월 27일만인 12월 8일 해제됐다. 긴급조치9호는 ▲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거나 왜곡 전파하는 행위 ▲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 등을 통해 헌법을 부정·비방하거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하는 행위...
통금시대 37년「발묶인 4시간」의 세태만상동아일보 1981-12-02
「음주시한」어긴 주당들의「합숙실」한잔 여흥...흰소리·고함이 뒤범벅 하룻밤 인연에 통성명..."나가서 한잔" 약속도 "이봐요, 통금 시간 조금 지난게 뭐 그리 대단한 죕니까. 한잔 하다보면 늦는 수도 있는데 꼭 이래야 됩니까"...

프로야구 올스타전을 가리켜 '꿈의 구연(球宴)'이라고 부른다. 스타급 선수들이 거의 한번쯤은 얼굴을 내비치고 기량을 뽐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스타전은 경기적인 측면보다 서비스적인 열기로 들뜨기 마련이어서 관중들은 열광한다. 그러나 이런 올스타전에도 빼놓을 수 없는 하이라이트가 있다. MVP(최우수 선수)의 탄생이다. 1982년 첫 번째로 열린 올스타전은 부산이 낳은 야구 스타 김용희김용철의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의 무대였다.

 

기억도 아득한 1982년 올스타전 때 필자는 서울 신문사가 발행하던 '주간 스포츠'의 야구 전담 기자로 뛰었다. 1981년 고교야구를 처음으로 취재했으니 야구에 관한 한 애송이였다. 그렇지만 1997년까지 16년간 열심히 뛰었다. 그러다 보니 선수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하며 숱한 사연들을 열고 닫기도 했다. 프로야구가 갓 출범했을 때만 해도 가는 곳 마다 야구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방 색이 강한 프랜차이즈를 도입, 애향심을 자극한 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프로야구의 인기가 높다 보니 선수들의 '사인 볼'은 최고의 선물로 통했다. 고속도로에서 속도 위반으로 걸렸을 때도 '사인 볼' 하나면 'OK'였으니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프로야구 첫 올스타 베스트 10

 

 

1982년 3월 27일 프로야구가 출범한 뒤 처음으로 치러진 올스타전은 6개 팀이 동군(롯데·삼성·OB)과 서군(삼미·MBC·해태)으로 나뉘어 7월 1일부터 7월 4일까지 3일간 부산, 광주, 서울에서 벌어졌다. 이 당시에도 올스타전 출전 선수는 팬들의 인기 투표에 의해 '베스트 10'(표① 참조)으로 20명을 뽑은 뒤 동∼서군 감독들의 추천(표② 참조)으로 각각 15명씩 30명을 선발, 50명이 기량을 다퉜다. 그러니까 웬만큼 잘 하는 선수들은 모두 올스타가 될 수 있었다고 보면 된다.

 

동군 감독=김영덕(金永德), 서군 감독=백인천(白仁天)

 

 

이런 올스타전은 1933년 7월 6일 미국 '시카고 코미스키 파크'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시카고 트리뷴'지의 스포츠 담당 기자인 '아치 워드'가 제안해 빛을 본 것이다. 때문에 미국 프로야구에서는 올스타전에서 뽑힌 MVP에 주는 상의 명칭도 '아치 워드 어워드'라 했다. 그러나 1970년 '커미셔너 트로피'로 바뀌었다가 1985년 '워드 메모리얼 어워드'로 다시 바뀌었다. 우리 올스타전의 MVP 명칭은 '미스터 올스타'로 불린다. 첫 '미스터 올스타'는 동군이 차지했다. 롯데의 대형 타자 김용희다. 1, 2차전까지만 해도 올스타전 내내 한방에서 붙어 자던 룸 메이트 김용철이 절대적으로 우세했다. 그러나 3차전에서 날린 단 한 방의 만루 홈런이 그를 '미스터 올스타'라는 영광스런 자리에 올려 놓았다. 상품도 뿌듯했다. 새한자동차가 내놓은 500만원 상당인 '맵시' 승용차였다. 승용차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김용희를 운전 못하는 '마이 카'족으로 신분을 격상시켰다.

 

 

 

 

부산 야구 사상 첫 야간경기, 구덕구장은 관중들로 인산인해

 

 

1982년 7월 2일 자 '경향신문' 9면을 보면 왼쪽 상단에 "이광은·김봉연 홈런" 이란 제목으로 역사적인 올스타 1차전을 소개하고 있다. 1차전은 부산 구덕구장에서 열렸다. 그것도 구덕구장 개장 이후 처음으로 야간 경기로 열렸다. 한국야구위원회가 4월부터 시작한 전국 주요 도시 야구장 조명시설 설치 공사가 6월 30일 첫 번째로 완공을 본 것이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야간 조명 시설을 갖춘 야구장은 전국 통틀어 동대문운동장(전 서울운동장) 야구장 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방에서는 야구를 야간에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꿈 같은 일이었다. 때문에 올스타전이 열리던 날, 아침부터 구덕구장 일대는 사람들로 뒤덮였다. 부산 야구 사상 처음으로 야간에 열리는 야구 경기 입장권을 매입하기 위해 몰려나온 사람들이었다. 태반이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 1만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에 1만3천385명이 들어차 그야 말로 인산인해를 실감나게 했다. 올스타 1차전은 1회초 2번 이광은이 첫 홈런을 터트리며 열기를 북돋운 뒤 8회초 김봉연의 마무리 2점 홈런으로 막을 내려 서군이 5-1로 승리했다. 1차전만 놓고 보면 MVP 후보는 홈런을 날린 이광은이나 김봉연보다 빠른 발로 결승점을 올린 김일권이었다.


프로야구 올스타전 이광은·김봉연 홈런
1982.07.02 9면 [경향신문]

 

 

 

부산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김용희는 3타수 1안타, 김용철은 막판인 9회말 대타로 나가 안타를 터트려 겨우 체면을 세웠을 뿐이다. 그러나 7월 3일 광주에서 벌어진 2차전에선 그게 아니었다. 유격수 겸 3루수로 출전한 김용희와 처음부터 지명타자로 나선 김용철이 신 들린 듯 북치고 장구 쳤다.

 

 

 

구덕 야구장에 조명시설 완공
1982.07.01 9면 [경향신문]


1982년 7월 4일은 일요일인 관계로 모든 신문이 휴무에 들어가 올스타 2차전의 활약상은 접합 길이 없어 유감이다. 그러나 이날 낮 경기로 벌어진 2차전도 1만2천명 안팎을 수용할 수 있는 구장에 8천72명의 관중이 들어 차 프로야구의 인기를 실감나게 했다. 그 뿐이 아니다 1차전에서 1안타에 그쳤던 김용철은 3, 5, 8회에 홈런을 날리는 등 4안타 4타점으로 생애 최고의 타력을 과시했다. 김용희 역시 김용철에 뒤질 새라 1, 8회에 날린 홈런으로 3타점을 뽑아 동군이 11-6으로 승리를 굳히는데 한몫을 해냈다.

 

그렇지만 MVP가 되기에는 미흡한 기록이었다. 질이나 양에서 김용철에게 뒤졌다. 2차전을 치르는 동안 김용희는 8타수 3안타(홈런2) 3타점을 때려 타율 0.375를 기록한 반면 김용철은 6타수 4안타(홈런3) 4타점을 올려 타율 0.667을 달리고 있었다. 동·서군 통틀어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김용희는 3차전에서 홈런 한 방으로 'MVP 선출 투표권'을 쥐고 있던 기자들의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적으로 돌려 놨다.

 

 

 

 

김용철 생애 처음 한 경기서 홈런 셋, 3경기 관중 3만 6천여명에 수입 6천여만원

 

 

김용철도 이런 점을 짐작한 것일까? 광주 경기를 끝내고 그날 서울로 올라와 숙소인 삼정호텔에서 만났을 때다. 김용희와 김용철은 부산과 광주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도 방을 함께 쓰고 있었다. 김용희가 55년생으로 57년생인 김용철보다 두 살이 많았다. 대뜸 MVP에 대한 예상부터 물었다. 그러자 김용철은 정색을 하며 "에이, 처음이니까 이번에는 형이 타야죠."  했다. "무슨 말을…, 난 포기했으니까. 용철인 지금 한창 물이 올라 당해낼 수가 없어요." 라고 응수했다. 이유로 허리 통증을 들었다. 사실 김용희는 시즌 초반부터 허리가 아파 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야구 선수들 가운데 가장 키가 큰 김용희는 손목 힘을 이용, 강하게 처 올리는 어퍼 스윙이 특기였다. 김용철 역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타격에 관한 한 자신 만만했다. 듬직한 체구에서 솟아나는 힘을 바탕으로 장타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그 만큼 김용철의 타격은 부산상고 선배인 삼성 라이온즈 김응룡 사장도 인정했다.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탤런트 이경진 등 시구
1982.07.02 12면 [경향신문]

 

 

 

김 사장이 실업야구 한일은행 감독으로 있을 때다. 무명에 가까운 김용철을 스카우트한 뒤 대뜸 4번 타자로 내세워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만큼 김용철의 재질 하나는 알아줬다. 하지만 기량이 뛰어나다고 해서 MVP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첫 째는 MVP 투표에 참여하는 기자들의 눈에 들어야 했다. 당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중앙기자단'의 수는 신문, 방송에 통신, 주간지를 합쳐 13개 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7표만 확보하면 MVP인 '미스터 올스타'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었다.

 

 

 

 

생애 두 번째 만루 홈런 친 김용희, 프로야구 첫 '미스터 올스타' 영광

 

 

프로야구 미스터 올스타에 김용희
1982.07.05 9면 [경향신문]


올스타 3차전은 7월 4일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1만4천867명의 관중이 들어 찬 가운데 야간 경기로 막이 올랐다. 당시만 해도 신축중인 잠실구장은 9월에 있을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한창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프로야구의 메인 스타디움 구실을 했다. 프로야구 개막 경기도 이 구장에서 열렸고 서울을 연고지로 한 MBC 청룡도 이 구장을 본거지로 이용하고 있었다.

 

1982년 7월 5일 자 경향신문 9면을 보면 하단에 "미스터 올스타에 김용희", 동아일보는 최하단에 "미스터 올스타에 롯데 김용희" 라고 조그맣게 소개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김용희는 운도 따랐다. 3루수로 출전한 김용희는 첫 타석에서 우익수 플라이, 두 번째 타석에선 삼진, 세 번째 타석에선 좌익수 플라이로 잡혀 3타수 무안타로 첫 타석에서 안타를 뽑은 김용철에게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행운의 타석인 7회말 신경식이 2루타를 치고 나가자 윤동균 김우열이 연속으로 출루, 만루 상태에서 타석에 들어선 김용희는 유종겸의 초구를 강타했다.

 

 

 

잡히면 끝이었다. 하지만 힘이 실린 볼은 왼쪽 펜스를 향해 쭉쭉 뻗어갔다. 프로야구 통틀어 3번째로 터진 만루 홈런이었다. 이 한 방으로 'MVP'는 따놓은 당상이었다. 12명이 참석한 기자단 투표에서도 8표를 얻어 첫 올스타전의 '미스터 올스타'가 됐다.

 

 

 

"홈런이구나! 느끼는 순간, 용철일 어떻게 보지? 그 생각 밖에 없었다. 말로는 나한테 양보한다고 했지만…, 왠지 참으로 미안했습니다."  김용희가 야구를 시작한 이후 홈런을 날린 것은 대학에서 15개, 실업 49개, 프로 8개를 합쳐 72개였다. 첫 홈런은 고려대 1년 시절 경희대와의 경기에서 천창호로부터 빼앗은 것이고 만루 홈런은 실업시절에 이어 두 번째였다.

 

'미스터 올스타'로 뽑힌 김용희는 부상으로 받은 맵시 본 네트에 앉아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며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며 MVP가 된 기분을 만끽했다. "승용차를 타게 돼 횡재한 기분이지만 운전을 할 줄 몰라 안타깝다. 그러나 이 차가 내차다 하는 생각을 하니 불현듯 집 사람과 아들이 보고 싶어졌다."며 특히 아들이 아주 기뻐할 것이라고 힘 주어 말했다. 그 아들이 몇 살이냐고 묻자 "4개월이 좀 넘었다"고 했다. 그 아들이 지금은 건장한 청년이 됐다. 계산을 해 보니 1982년 김용희의 나이와 같은 27살의 청년이 된 것이다.


'대상 제조기'김용희, 방망이 하나로 '미스터 올스타'벌써 2번째 "뚝딱" 1984.06.28 5면 [동아일보]

 

1977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이색캠페인 기사가 실렸다. "가정부를 두지 말자!" 한국부인회가 '가정부 안두기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한 것이 그 내용.

부인회는 부득이할 경우 파출부를 쓰되 그런 부득이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당국이 탁아시설을 증설해줄 것도 강력히 건의했다. 그리고 "종래의 관습에 얽매어 가정부를 마치 하인 다루듯 함으로서 돌발적 사고를 유발하는 잘못된 생활태도를 고치자"는 자상한(?) 주문도 덧붙였다.

 

 

 

77년 "가정부 두지 말자" 이색 캠페인, 왜?

 

 

'가정부 안두기 운동'은 꽤 화제를 불렀다.

당시는 도시화 바람을 타고 너도나도 상경한 처녀들이 버스 차장이나 가정부, 아니면 봉제공장 '공순이'로 가던 시절. 조금 산다면 가정부를 안 둔 집이 없던 때라 가정부 관련 운동은 공감을 일으킬 만 했다.

바로 그런 뜻밖의 관심 때문에 결국 여러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일이 벌어졌지만 말이다. 부인회가 캠페인을 벌인 계기는 1주일 전 발생한 호스티스 피살사건이었다.

 

 

 

 

숨진 채 발견된 호스티스 · 오락가락 진술하는 가정부

 

 

7월 13일 서울 신당동 약수아파트에서 그 집에 사는 도뀨호텔 나이트클럽 호스티스 강oo씨(당시 27세)가 목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녀의 시체는 좁은 싱크대 밑에 '종이처럼 구겨져' 있었다. 거실에는 술병과 안주가 널려 있었고…. '별들의 고향', 'o양의 아파트' 같은 호스티스 영화가 인기를 끌고 호스티스에 대한 관심이 높던 때라 언론도 흥미를 갖고 사건에 접근했다. 

 

경찰은 처음 일본인 관광객의 매춘 살인이나 치정살인 쪽으로 수사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첫 신고자인 강씨 집 가정부 유oo양(당시 21세)의 진술이 오락가락하자 그녀를 집중추궁, 결국 범행일체를 자백 받았다.

유양은 "강씨가 호스티스 생활을 하며 번 돈과 패물이 많아 탐이 난데다 술에 취해 들어오기만 하면 자주 모욕적인 말을 해 죽였다"고 진술했다.


가정부, 직업인으로 대우 뚜렷이 1977.07.20 5면 [경향신문]

 

여기까지는 사실 여느 살인사건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구도. 그러나 사건은 검찰에 송치되면서 한바탕 롤러코스트를 타기 시작했다.

 

  

 가정부 단독범행? 공범은 없나

 

 

세간의 관심이 높은 걸 의식해서였을까, 담당검사는 사건을 다시 조명했다. '어린' 유양이 '혼자 살인하고 혼자 시체를 싱크대 밑에 구겨 넣은 데' 의문을 품었다. 경찰도 같은 의문 때문에 공범 여부를 조사하다 유양 단독범행으로 결론 내렸으나 검사는 이를 무시했다.

 

경찰이 이미 용의자로 조사한 유양의 애인 대 모씨(당시 27세. 중화동 소재 중국집 주방장)를 붙잡아 살인 공범으로 기소했다. 경찰은 계속 그가 공범이 아니라고 항의했지만 검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사건 발생 한달 쯤 뒤에는 기자들까지 입회시켜 현장 검증을 실시했다.

 

 

 

"가정부를 두지 말자"한국부인회 이색캠페인
1977.07.19 7면 [동아일보]


여기서 77년 8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이날 검증에서 유양은 고개 한번 숙이는 일 없이 시종 태연하게 범행 순간을 재연했으나 대는 사건 당시의 정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듯 머뭇거리고 검찰과 유양이 시키는 대로만 범행을 재연해 보였다."

 

좀 미심쩍어하는 듯한 이 기사는 동아일보에만 보도됐다. 현장 검증 말미에 대씨는 "씨X, 나는 안 죽였단 말이야! 왜 생사람 잡어?" 라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 항변은 철저히 무시됐다.

 

사실 몇몇 기자가  "정말 범인이 맞는 거요?"라고 묻기는 했다. 그러자 검사는 "기자님, 사건기자 몇 년 하셨나? 아니 세상에 살인범 말을 다 믿어? 검사가 이 자가 살인범이다 하면 그 놈은 살인범인거요."라고 못 박았다.

 

 

 

기자도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 기사를 그렇게 송고한 건 아니었다. 다른 기자들처럼 '그대로 범행을 재연했다'고 했으나 지면이 남는다며 더 자세히 현장상황을 묘사하라는 주문을 받고 '기억이 안 나는 듯 머뭇거리고 시킨 대로 재연했다'는 표현을 덧붙인 거였다.

 

 

 

 

"그 사람은 공범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증언

 

 

신문에 기사가 나자 대 씨가 일하던 중국집 주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 기사가 맞습니다. 대 씨는 범인이 아닙니다." "무슨 근거로…?" "사람 죽였다는 날 그 사람 여기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증거는 있나요?" "글쎄, 내가 봤으니까 그게 증거지." 이런 종류의 전화는 신문사에 자주 걸려오던 터라 무시했다.

그러나 그는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했다. 나중엔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인데 취재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닦달도 했다.

 

당시 중화동은 가내 공장과 슬레이트집들이 혼재한 변두리 동네. 포장이 안 된 길에는 쓰레기와 분뇨가 나뒹굴었고 퀴퀴한 냄새가 거리를 싸고돌았다. 대 씨는 그 동네 유일한 중국집의 유일한 종업원이자 주방장이었다.

 

즉 그가 없으면 그 동네 사람들은 중국음식을 사먹을 수가 없었다. 취재를 시작하자 주민들은 너도나도 "그는 범인이 아니다. 검찰이 살인을 했다고 한 날에도 우리는 그 사람이 만든 짜장면을 먹었다"고 말해줬다.


가정부 꼭 두어야 하나
1977.07.25 7면 [매일경제]

 

 

 

그러나 그뿐. 한달 보름 쯤 전의 어느 특정한 날 특정한 시간에 중국음식을 시켜 먹었거나 중국집에 직접 가서 먹었다는 증거(기록물)는 찾아낼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동네사람들을 만날수록 대 씨는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굳어져 갔다. 오전엔 정상근무하고 오후엔 중화동으로 달려가 온 동네를 뒤지며 대 씨의 앨리바이(현장부재증명)를 찾는 일에 매달렸다. 지적도를 떼어 집집마다 들러 "혹시 7월 13일 짜장면 시켜 먹었나요?"를 한없이 묻고 다녔다. 간첩 의심자로 몰려 신고도 당했다.

 

그리고 닷새째. 거리에서 자주 마주쳤던 한 아주머니가 "혹시 이런 게 필요한가요?"라며 공책을 한 권 내밀었다. 초등학생의 방학 일기였다. 7월13일자. '방학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중국집 아저씨가 예쁜 강아지와 노는 걸 보고 함께 장난하다 집에 늦게 갔다. 엄마한테 혼났다'는 내용이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검찰은 점심시간 무렵 대 씨가 중화동에서 약수아파트로 와 살인했다고 했으나 같은 시간 그는 초등학생 꼬마랑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 일기도 한꺼번에 몰아 쓴 게 아니라 당일 쓴 것임을 확인했다. 당시 중화동에서 신당동까지는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살인하고 시체를 숨긴 다음 돌아오려면 최소한 3시간은 걸릴 것이었다. 검찰이 주장한 범행 시간을 뒤엎는 증거였다.

   

1심서 사형선고 받은 대 씨에 2심서 무죄

 

가정부 없이 살 수 있다면 1977.07.26면 [동아일보]


여기서 이야기는 또 한번 반전을 맞는다.

대 씨가 범인이 아니란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고도 그 기사는 신문에 실리지 않았다. 피어린 절규는 침묵으로 돌아왔다.

당시 서울지검장은 "결정적 증거 같다. 기사를 안 써주면 검사를 문책하고 대 씨는 바로 석방하겠다."고 했으나 식언이었다. 오히려 사건의 주범은 대 씨, 유양은 종범으로 몰아 재판정에 세웠다.

 

77년 10월 21일 서울지법은 대 씨에게 사형, 유양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대 씨의 국선변호인은 나중에 초등학생 일기의 존재를 알았다. 억울한 사람이 사형 선고를 받는 현실이 부끄러웠던 기자는 일기를 변호인에게 건넸다.

해를 넘긴 78년 3월 15일 서울고법은 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앨리바이가 성립되었다"는 게 무죄 선고 이유였다.

대 씨는 검찰수사 당시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고 거꾸로 매달고 때리는 등 고문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그냥 무죄 판결을 받은데 만족해야 했다.

정신이 이상해진 그는 1980년대 까지 종종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숨을 살려줬으면 직장 잡고 먹고 살 수 있게 도와줘야 할 것 아니오?" 90년대엔 그런 전화마저 끊겼다. 기자에겐 부끄럽고 뼈아픈 얘기다.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영상이 누구에게나 한두 개쯤은 있기 마련이다. 그건 마치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상영되는 영화의 한 장면과 같다. 특정한 단어만 입력하면 머리 속에 잊을 수 없는 이미지가 바로 생생히 떠오르는 것이다.

 

'장대 비' '물난리'라는 단어를 들으면 내겐 자동으로 예비군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물이 콸콸 흐르는 계곡 옆에 서있다. 방금 물에 떠내려 온 오이를 건져 군복바지에 쓱쓱 문지른 뒤 한 입 깨물었다. 우적우적 오이를 씹어 먹는 그의 얼굴 위로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비가 내린다. 그는 마치 우는 것 같다. 울면서 오이를 먹는 것 같다.

 

그런 바로 그의 옆에 한 주검이 있다. 오이를 줍기 전 그가 건져 올린 시체다. 인양된 주검은 보통 흰 천으로 감싸지만 여긴 아직 천이 준비돼 있지 않다. 대신 사람들이 얼굴을 볼 수 없게 엎드린 모습으로 안치해 놓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주검 옆에서, 그것도 방금 전 자기가 인양한 주검 옆에서 음식을 먹는 게 스스로 안쓰러운지 그가 불쑥 내뱉는다. "죽은 이는 죽은 거고, 산 사람은 … 어떻게든 살아야죠."

 

 

 

관악산 판자촌에 내린 물폭탄

 

 

1977년 7월10일. 서울 관악산 자락 시흥2동 산사태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비군복 청년은 피해복구 요원이었다. 그는 10시간 넘게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시체 발굴, 물길 바로잡기 등 수해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 계곡 하류 여기저기서 흙탕물속을 뒤지며 주검이나 쓸만한 가재도구 따위를 건져 냈다. "여기 있다!"하는 외침이 들리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물에 절은 시체를 끌어올렸다.


이틀 전, 7월 8~9일 서울 서부지역과 안양일대엔 4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사망실종이 3백여 명, 이재민도 6만 명이나 발생했다. 그야말로 '물 폭탄'이었다. 시흥2동 관악산의 꼬불꼬불한 계곡 300여m를 따라 올망졸망 지어놓은 판잣집 수백 채도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 계곡에서만 38명이 숨진 채 발견됐고 실종자도 26명에 이르렀다.


삽시간에 숱한 인명 삼킨 공포의 물벼락
1977.07.09 7면 [경향신문]

 

 

사회부 데스크는 엄청 흥분하고 있었다. "명색이 수도 서울인데 비 좀 왔다고 이런 떼죽음을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 데스크는 8일 밤부터 빗줄기가 거세지자 사건기자들을 수해 예상지역에 미리 투입하려 했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어딜 가나 물바다여서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연락만 보내왔다. 그리고 9일 오전, 관악산 계곡 판자촌에서 6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수해 현장서 동대문상고 학생의 노트가? 

 

 

"도대체 문제가 뭔지 샅샅이 뒤진 다음 완벽한 르포기사를 써 보내시오. 제대로 된 기사를 못 쓸 바엔 회사에 들어오지도 마시오." 물웅덩이와 계곡을 넘고 진창을 건너 밧줄까지 타며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기자는 이미 데스크 못지않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오이를 깨물어 먹는 복구요원을 보며 기자도 빗물인지 눈물인지를 한바탕 쏟아낸 터였다.

 

 

 

흔적없는 백여채... 빈터에 앉아 한숨만
1977.07.11 7면 [동아일보]


계곡을 따라 한발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집채가 넘어가고 가재도구가 파편이 된 참혹한 현장이 드러났다. 그리고 중턱의 탑동 초등학교 앞. 기자는 갑자기 망연자실, 넋을 놓았다. 이번엔 노트였다. 하류에서 숨진 채 발견된 동대문상고 3학년 남규근 군의 노트가 바위에 걸려 물살에 씻기고 있었다. 잉크로 이름을 썼다면 지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남·규·근 이란 이름은 물살에 하늘하늘 쓸리는 공책 위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한가운데로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아니, 동대문 쪽 학교에 다니는 애가 왜 이렇게 먼 관악산 계곡에 사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기자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소리를 내질렀다.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닌데 복구요원 한 명이 허리를 펴더니 기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몰라서 묻습니까? 이 사람들 시내 저지대 침수지역에서 살다 이리로 이사 온 것 아닙니까?"

 

 

 

 

'저지대 침수' 피해서 관악산으로 왔다 산사태 휩쓸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랬다. 시흥2동 89, 91번지 주민들은 일찍이 성동 성북 종로구 등 저지대에서 주택 침수피해를 당해 이리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서울시는 저지대 침수지역 주민들에게 관악산 땅 8평씩을 분양해줬다. 그러다 산사태 세 달 전인 4월, 사방공사를 한다며 고지대 집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사 장비를 쌓아 두었다. 큰 비가 오자 그 장비와 벽돌 블록 등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와 천변(川邊)의 집을 덮쳤고 이어 연쇄적으로 산사태가 난 것이었다. 두말할 것 없는 인재(人災)였다.


1970년대엔 돈 없고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항상 여기저기 쫓겨 다녔다. 그들에게 목숨은 '모질게 붙어있는' 것이면서 또 한편 '어이없이 스러지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게 달라졌겠냐만 그땐 더 심했다. 정치에 시달리고 경제에 찌들어 삶 자체가 팍팍한데 자연과 계절마저 없는 사람들을 수렁으로 내몰곤 했다.


참화는 미리 막을 수 있었다.
1977.07.11 7면 [동아일보]

 

 

 

저지대 주민들에게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물난리가 그랬다. 배수처리가 안 돼 비만 좀 오면 서울의 웬만한 곳은 모두 홍역을 치렀다. 집, 공장, 가게에 물이 차고 물 빠진 뒤 진흙벌이 되는 건 보통이었다. 게다가 한번 침수가 되면 가뜩이나 약한 건물이 붕괴위험에 직면했다. 그래 서울시는 침수지역 주민들을 산골짝으로 떠밀 듯 몰아낸 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죽어나는 건 서민, 아니 그 축에도 못 끼는 도시 빈민들이었다.

 

 

 

'끼니·식수난... 삼중고의 수재민
1977.07.11 7면 [동아일보]


물을 피해 도망가고 또 도망쳐도 결국은 물에 휩쓸려 죽고야 마는 설움. 빈민들은 그걸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하루벌이 노동자거나 구로공단 '공돌이'였던 그들은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장이마냥 도시화, 산업화의 그늘에서 잡초로 살다 물풀처럼 스러지고 만 것이었다.

 

조금 상류 쪽으로 올라가자 이번엔 놋쇠 밥그릇이 나왔다. 윗부분 흙을 쏟아내자 그릇 밑의 밥이 그대로 드러났다. 산사태가 난 시간은 밤 8시 반경. 누군가 늦은 저녁을 먹다 방안으로 치고 들어온 바위와 흙더미에 쓸려간 모양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방금 전 밥에 숟가락을 댄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모골이 송연했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분노는 화산처럼 끓어올랐고 슬픔은 응어리져 가슴에 얹혔다.

 

 

르포기사는 7월 11일 석간  에 실렸다. 산사태 희생자들이 작은 물을 피해 왔더니 결국 큰물에 지고 말았다는 내용이 그대로 들어갔다. 요즘 같으면 피해주민들이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일 법도 했지만 당시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긴급조치가 발동 중이고 어떤 형태든 데모는 엄금됐기 때문일 테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너무 순박했다. 아니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더 심각했는지 모른다. 이재민 수용소에서 만난 한 가장은 일용 잡급 직장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수마에 쓸려간 난·쏘·공

 

 

시흥2동 떡방아간은 수해 직후 반짝 특수를 누렸다. 한번 물에 절었다 건진 쌀은 말려도 냄새가 나고 쉽게 상하기 때문에 떡을 찧어 보관하려는 사람들이 몰린 탓이었다. 물에 불은 쌀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방앗간 앞에 줄을 선 이재민들은 속이 타고 무너져 내렸을 테지만 아이들은 모처럼 떡을 먹을 수 있는 게 즐거운지 연신 종알거렸다.

 

산사태 사망자 유족들은 장례비로 7만원씩을 받았다. 서울시는 피해 주민 205가구에게 자진철거를 조건으로 17평형 아파트를 분양해주고 가구 당 150만원만 부담케 하겠다고 위무책도 내놓았다. 그러나 아파트를 짓기로 한 건설사 측은 나중에 주민들이 580만원을 추가 부담해야 한다고 밝혀 주민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이런저런 시비 끝에, 입주 약속을 받은 이재민의 고작 반 정도가 새 아파트에 들어가 둥지를 꾸린 것으로 전해졌다.


박대통령 수해 현장 시찰 "아파트 지어 수재민 우선 입주"
1977.07.11 1면 [경향신문]

 

 

 

추가 부담할 여유가 없어 입주를 포기한 이들은 다시 빈민촌으로 터전을 옮겼을 테지만 이후의 삶은 추적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산업화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던 수도 서울에서 비 때문에 일어난 어이없는 떼죽음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관악산 판자촌에 내린 물폭탄

 

 

1977년 7월10일. 서울 관악산 자락 시흥2동 산사태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예비군복 청년은 피해복구 요원이었다. 그는 10시간 넘게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시체 발굴, 물길 바로잡기 등 수해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 계곡 하류 여기저기서 흙탕물속을 뒤지며 주검이나 쓸만한 가재도구 따위를 건져 냈다. "여기 있다!"하는 외침이 들리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물에 절은 시체를 끌어올렸다.


이틀 전, 7월 8~9일 서울 서부지역과 안양일대엔 4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사망실종이 3백여 명, 이재민도 6만 명이나 발생했다. 그야말로 '물 폭탄'이었다. 시흥2동 관악산의 꼬불꼬불한 계곡 300여m를 따라 올망졸망 지어놓은 판잣집 수백 채도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그 계곡에서만 38명이 숨진 채 발견됐고 실종자도 26명에 이르렀다.


삽시간에 숱한 인명 삼킨 공포의 물벼락
1977.07.09 7면 [경향신문]

 

 

 

사회부 데스크는 엄청 흥분하고 있었다. "명색이 수도 서울인데 비 좀 왔다고 이런 떼죽음을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 데스크는 8일 밤부터 빗줄기가 거세지자 사건기자들을 수해 예상지역에 미리 투입하려 했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어딜 가나 물바다여서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연락만 보내왔다. 그리고 9일 오전, 관악산 계곡 판자촌에서 60명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다.

 

 

 

 

수해 현장서 동대문상고 학생의 노트가? 

 

 

"도대체 문제가 뭔지 샅샅이 뒤진 다음 완벽한 르포기사를 써 보내시오. 제대로 된 기사를 못 쓸 바엔 회사에 들어오지도 마시오." 물웅덩이와 계곡을 넘고 진창을 건너 밧줄까지 타며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기자는 이미 데스크 못지않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오이를 깨물어 먹는 복구요원을 보며 기자도 빗물인지 눈물인지를 한바탕 쏟아낸 터였다.

 

 

 

흔적없는 백여채... 빈터에 앉아 한숨만
1977.07.11 7면 [동아일보]


계곡을 따라 한발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집채가 넘어가고 가재도구가 파편이 된 참혹한 현장이 드러났다. 그리고 중턱의 탑동 초등학교 앞. 기자는 갑자기 망연자실, 넋을 놓았다. 이번엔 노트였다. 하류에서 숨진 채 발견된 동대문상고 3학년 남규근 군의 노트가 바위에 걸려 물살에 씻기고 있었다. 잉크로 이름을 썼다면 지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남·규·근 이란 이름은 물살에 하늘하늘 쓸리는 공책 위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한가운데로 울컥 치밀어 올라왔다.

 

"아니, 동대문 쪽 학교에 다니는 애가 왜 이렇게 먼 관악산 계곡에 사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기자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큰 소리를 내질렀다. 대답을 바란 것도 아닌데 복구요원 한 명이 허리를 펴더니 기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몰라서 묻습니까? 이 사람들 시내 저지대 침수지역에서 살다 이리로 이사 온 것 아닙니까?"

 

 

 

 

'저지대 침수' 피해서 관악산으로 왔다 산사태 휩쓸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랬다. 시흥2동 89, 91번지 주민들은 일찍이 성동 성북 종로구 등 저지대에서 주택 침수피해를 당해 이리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다.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서울시는 저지대 침수지역 주민들에게 관악산 땅 8평씩을 분양해줬다. 그러다 산사태 세 달 전인 4월, 사방공사를 한다며 고지대 집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사 장비를 쌓아 두었다. 큰 비가 오자 그 장비와 벽돌 블록 등이 한꺼번에 쓸려 내려와 천변(川邊)의 집을 덮쳤고 이어 연쇄적으로 산사태가 난 것이었다. 두말할 것 없는 인재(人災)였다.


1970년대엔 돈 없고 힘없고 빽 없는 사람들은 항상 여기저기 쫓겨 다녔다. 그들에게 목숨은 '모질게 붙어있는' 것이면서 또 한편 '어이없이 스러지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그게 달라졌겠냐만 그땐 더 심했다. 정치에 시달리고 경제에 찌들어 삶 자체가 팍팍한데 자연과 계절마저 없는 사람들을 수렁으로 내몰곤 했다.


참화는 미리 막을 수 있었다.
1977.07.11 7면 [동아일보]

 

 

 

저지대 주민들에게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물난리가 그랬다. 배수처리가 안 돼 비만 좀 오면 서울의 웬만한 곳은 모두 홍역을 치렀다. 집, 공장, 가게에 물이 차고 물 빠진 뒤 진흙벌이 되는 건 보통이었다. 게다가 한번 침수가 되면 가뜩이나 약한 건물이 붕괴위험에 직면했다. 그래 서울시는 침수지역 주민들을 산골짝으로 떠밀 듯 몰아낸 것이었다. 이제나 저제나 죽어나는 건 서민, 아니 그 축에도 못 끼는 도시 빈민들이었다.

 

 

 

'끼니·식수난... 삼중고의 수재민
1977.07.11 7면 [동아일보]


물을 피해 도망가고 또 도망쳐도 결국은 물에 휩쓸려 죽고야 마는 설움. 빈민들은 그걸 숙명처럼 안고 살았다. 하루벌이 노동자거나 구로공단 '공돌이'였던 그들은 조세희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장이마냥 도시화, 산업화의 그늘에서 잡초로 살다 물풀처럼 스러지고 만 것이었다.

 

조금 상류 쪽으로 올라가자 이번엔 놋쇠 밥그릇이 나왔다. 윗부분 흙을 쏟아내자 그릇 밑의 밥이 그대로 드러났다. 산사태가 난 시간은 밤 8시 반경. 누군가 늦은 저녁을 먹다 방안으로 치고 들어온 바위와 흙더미에 쓸려간 모양이었다. 그럴 리 없지만 방금 전 밥에 숟가락을 댄 듯한 느낌이 전해졌다. 모골이 송연했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분노는 화산처럼 끓어올랐고 슬픔은 응어리져 가슴에 얹혔다.

 

 

 

르포기사는 7월 11일 석간  에 실렸다. 산사태 희생자들이 작은 물을 피해 왔더니 결국 큰물에 지고 말았다는 내용이 그대로 들어갔다. 요즘 같으면 피해주민들이 보상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일 법도 했지만 당시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긴급조치가 발동 중이고 어떤 형태든 데모는 엄금됐기 때문일 테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너무 순박했다. 아니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더 심각했는지 모른다. 이재민 수용소에서 만난 한 가장은 일용 잡급 직장에서 쫓겨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1977년 여름은 정말 짜증나게 무더웠다. 7월 초순의 집중호우로 젖은 땅과 도시 위에 햇볕이 사정없이 내려 꽂혔다. 한마디로 푹푹 삶았다. 찜통이 따로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낮 거리엔 인적이 끊겼다. 사람들은 도시를 탈출해 산과 바다의 피서지로 몰려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선 또 바가지 상혼에 열을 받았다. 이래저래 불쾌지수는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안방에서 30대 주부 숨진 채 발견···가정교사가 신고 

 

 

춤바람 살인 카바레
1977.08.13 [경향신문] 3면


그런 8월6일 낮3시. 서울 강남구 반포동 신흥주택가에서 36세 주부가 뒷머리를 흉기로 맞아 숨진 채 발견됐다. 자기 집 안방에서였다. 남편과 초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 딸은 피서여행을 떠나 집엔 그녀 혼자 있었다.  첫 목격자는 그 집의 가정교사. 아이들 소식이 궁금해서 들렸다가 부인의 시체를 발견했다. 윗옷은 벗겨져 있었고 이불 밑엔 피가 흥건했다.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강력반장은 벌컥 화부터 냈다. "어떤 놈이 까발렸어? 현장조사도 안 끝났는데 기자들을 보내면 어쩌자는 거야!"  그해엔 무슨, 무슨 부인 피살사건이 잇달아 터졌다. 남부경찰서 형사반장 부인은 계모임이 끝난 뒤 귀가하다 칼에 찔렸고 서울지법 판사부인은 집에서 목이 졸려 숨졌다. 모 대학교수의 부인은 방화로 보이는 불에 타 숨진 채 발견됐고 달포 전엔 나이트클럽 호스티스도 피살됐다.

 

 

 

 

강도에서 치정 살인으로 수사방향 급전환

 

 

경찰은 각각의 사건마다 수사본부를 차리고 지루한 수사를 벌였다. 여러 사람이 용의선상에 오르곤 했지만 대부분 범인으로 지목하기엔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다. 용의자라는 사람들의 범행동기 또한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언론은 경찰의 안이한 수사태도를 매섭게 질책했다. 몇몇 신문은 특히 형사반장 부인 피살사건의 경우, 용의자를 고문해 자백을 강요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나섰다. 이런 판에 또 주부 피살이라니… 지레 겁을 먹을 만도 했다.

 

 

 

수사는 세 갈래로 진행됐다. 원한, 치정, 강도 살인. 처음엔 강도 쪽에 무게가 실렸다. 안방 장롱을 뒤진 흔적이 있는데다 다이아반지도 없어진 게 확인됐기 때문.

그러나 주변인물 수사를 벌이던 형사들은 숨진 A부인이 몇 년 전부터 춤에 빠져 지냈고 행실도 바르지 못했다는 제보를 받아냈다. 게다가 부검 결과 A부인이 숨지기 직전 성관계를 맺은 사실도 밝혀냈다.  그녀는 수년전 불륜사실이 발각돼 남편과는 사실상 별거상태였고 성남, 의정부 등지로 춤바람 원정을 나가기도 했다.

 

수사방향이 치정살인으로 급전환하면서 경찰서 형사계에는 A부인과 바람을 피운 사람들이 속속 불려왔다. 30대 제비족부터 50∼6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카바레 족들이 조사를 받았다.


카바레 입장료 100% 올려
1977.09.02 [동아일보] 7면

 

 

 

행여 사진이라도 찍힐까봐 점퍼를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채였다. 그들은 담당형사에게 “아는 대로 다 얘기할 테니 제발 집에는 알리지 말아 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A부인은 카바레 업계에선 유명 인물이었다. 춤을 추다 만난 남자 20여명과 잠자리를 함께 한 사실이 수사결과 밝혀졌다.

 

 

 

 

1주일 만에 잡힌 범인은 카바레에서 A부인과 만나

 

 

대낮 원정 춤바람
1978.02.14 [동아일보] 7면


사건이 난지 꼭 1주일 만에 경찰은 범인을 붙잡았다. A부인 집과 가까운 논현동에서 꽃집을 경영하는 O씨(36)였다.

 

모처럼 제대로 수사해 범인을 검거한 게 흐뭇했던지 강남경찰서는 서장실에서 범인과 기자들의 일문일답 시간까지 마련했다.

 

2년 전 카바레에서 A부인을 만나 정을 통해왔다는 O씨는 그녀가 "본부인과 이혼하고 둘이 함께 살자"고 조르는 데 화가 나 범행했다고 말했다.  사건 당일에도 A부인이 꽃집까지 찾아와 "부인과 헤어져라. 당신이 먼저 말하기 싫으면 내가 당신 부인에게 우리 관계를 다 얘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 고민 끝에 그는 밤에 A부인 집을 찾아 다툼을 벌인 끝에 살해했고 강도 살인으로 위장하려고 장롱을 뒤져 다이아반지를 빼냈다는 것이다.  

그는 "사람을 죽인 나도 한심하고 못난 놈이지만 춤에 미쳐 자기 집은 물론, 남의 가정까지 파탄 내려는 A부인이 정말로 미웠다"면서 울먹였다.

 

 

 

그러나 사실 그도 춤바람에는 A부인 못지않은 ‘선수’였다. 1970년에 춤을 배운 뒤 서울 근교 카바레를 전전하며 수많은 여자를 만났고 유흥비로 5천만 원이나 탕진했다는 걸 자랑하듯 털어놓았다. 그는 "춤도 돌고 사람도 돈다."는 카바레 생리를 알고 난 뒤 1주일에 두세 번 카바레에서 새로운 여자를 만나 사귀지 않으면 좀이 쑤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O씨는 "남자나 여자나 한번 춤바람이 나서 빠지게 되면 관능의 노예가 되어 헤어나기 힘들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카바레에는 발을 딛지 말라"는 친절한 당부(?)까지 곁들였다.

 

 

 

 

'춤도 돌고 사람도 돈다' 카바레에 빠진 사람들

 

 

언론은 꽃집 주인 살인사건의 전모와 함께 서울 근교 카바레의 실태기사도 함께 내보냈다. 압권은 경향신문 사건기자들이 쓴 현장기사였다. "대낮에 돌고 도는 탈선 카바레가 늘어난다. 캄캄한 홀 안에서 남녀가 맞잡고 벌이는 정경은 낯 뜨거운 관능의 노예 극이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느끼한 분위기를 전하더니 바로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성남시장안 지하 N카바레에는 3백여 명의 남녀가 붐비고 있었다. 입장료는 신사 1천원 숙녀 7백 원. 1백50평 넓은 홀의 반은 춤추는 무도장으로 80여 쌍의 남녀가 1m 앞도 잘 안 보이는 어두운 조명 아래 음악에 맞춰 몸을 맞대고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기사는 손님의 3분의 2가량이 30∼40대 주부들이었고 카바레 부근에는 장바구니를 맡아주는 곳이 따로 있다는 것도 설명했다.

신촌 s카바레에서는 "홀 주위를 돌아 설치된 의자에는 파트너가 나타나 손을 내밀어주기를 기다리는 30∼40대 여인들로 꽉 찼다"면서 "때때로 남지들이 여자를 골라잡으러 오면 다투어 미소 짓고 자신이 뽑히기를 기대한다."고 폭로했다.


서울 위성 도시로 춤바람 원정…탈선 대낮 카바레
1977.08.13 [경향신문] 7면

 

 

 

또 카바레 안에는 '도살장'이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는데 그곳은 홀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불빛이 아예 없으며 '몸을 서로 맡기고 이상한 몸부림을 치는 남녀들이 차지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사실 춤바람은 이미 1950년대부터 사회문제가 되었다. 54년 작가 정비석은 '자유부인'을 통해 교수부인의 춤바람 탈선을 비판했는데 오히려 춤바람을 더 키웠다는 지적도 적잖았다. 70년 초 정을병은 칼럼에서 "오늘날 댄스홀의 여인들은 직업적인 댄서를 제외하고는 소위 윤락여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순진한 처녀시절을 보냈고 깨끗하고 착한 아내와 훌륭한 어머니의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라는데 문제가 있다"고 적시했다.

 

 

 

서울 근교 카바레 대낮 성업 1984.11.25 [경향신문] 11면


춤바람이 난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남편의 기사 같은 것들이 잊을만하면 신문의 사회면 톱을 장식하곤 했다.

 

77년 8월 꽃집 주인 살인사건 이후 언론은 가정파탄의 주범 춤바람의 근절을 강력히 주문했다.

 

경찰은 그해 뿐 아니라 이듬해 여름까지 지속적으로 카바레 단속활동을 벌여 주부 수백 명을 즉심에 넘기고 제비족들을 구속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춤바람이 끝장난 건 아니었다.

 

장바구니 주부들은 여전히 카바레를 찾았고 비밀 댄스 교습소는 80년대 중반까지도 성황을 이루었다.

 

1970년대는 경제가 고속성장의 엔진을 단 시기였다. 수출이 늘고 물류가 급증했다. 고속도로와 지하철이 뚫리고 국산 차가 거리를 달렸다. 먹고 살기가 좋아졌고 돈 씀씀이 또한 커졌다. 물론 70년대엔 '10월 유신'과 '긴급조치'로 자유는 실종되었으며 인권은 끝없이 억눌렸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은 "우리에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곧 인권"이란 해괴한 논리로 정치의 빙점(氷點)상황을 애써 호도했다.

 

 

 

과로 겹쳐 졸던 안내양, 추락사 

 

 

정권의 그 같은 '오직 경제' 논리가 씨알조차 먹히지 않는 곳이 있었다.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에, 붙박이다시피 기계에 매달려 주 60∼70시간씩 일하던 피복, 봉제공장 노동자들. 그들의 일터는 성장의 그늘에 처져 꽁꽁 언 동토(凍土)와 같았다. 한마디로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근로조건을 외치며 자신을 불사른 전태일 열사가 일한 평화시장도 그 중 하나.

그리고 그런 제조업보다 더 열악한 저임과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성적 차별까지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직종이 또 있었으니…바로 시내버스 여차장이었다.

 

77년 9월4일 낮 1시. 서울 한복판 광교에서 17세 여차장 김 OO 양이 달리던 버스에서 추락해 숨졌다. 시골에서 올라와 여차장으로 일한 지 불과 서너 달만이었다.


 

피로와 박봉에 시달리는 여차장
1972.03.10 [경향신문] 5면

 

 

 

사인은 뇌진탕. 꽃다운 나이에 어이없이 세상을 뜬 그녀의 주검 옆엔 10원짜리 거스름 동전만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처음엔 승객 중 누군가 밀어 떨어트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곧 과로에 지친 그녀가 승강구에 서서 졸다가 얼결에 출입문 개폐기를 누르는 바람에 문이 열려 추락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린된 인권의 실태, 그녀들의 25시  

 

 

인간 이하 대우받는 버스 안내원
1974.05.25 [동아일보] 5면


김양은 전날 꼬박 19시간을 일했다. 그녀의 일상은 이랬다.

늦어도 새벽 5시엔 일어나 한탕에 2시간∼2시간 반짜리 승차근무를 하루 8번 한다. 다음 근무를 나갈 때까지 20분 휴식시간이 주어지지만 정말로 '휴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버스 내부 청소를 하거나 담배, 드링크 음료를 사오는 등 운전사의 잔심부름을 한다. 변소(화장실이라는 표현을 도저히 쓸 수 없는, 냄새나고 파리가 끓는)에라도 잠깐 앉아있을라치면 "00호 차장, 빨리 승차하세요!" 라는 독촉방송이 왕왕 울린다.

 

하루 세끼 식사시간도 따로 없었다. 20분 휴식시간 내에 해결해야 했다. 기숙사엔 들리지도 못했다. 차비 일부를 슬쩍하는 이른바 '삥땅'을 방지한다며 근무 중 기숙사 출입을 절대 금지했기 때문.

 

 

 

입금액이 적으면 불시에 소지품 검사를 했고 이따금 60cm 높이 고무줄 위로 폴짝폴짝 뛰어보라고 시켰다. 머릿속이나 속옷에 숨겨둔 동전이 있으면 떨어질 테니 그걸 잡아내자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항의를 하면 더욱 말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다. '도둑년' 소리를 듣는 건 예사고 완전 알몸 수색도 각오해야 했다.

 

밤 11시 50분, 막차 근무가 끝나도 바로 잠자리에 드는 날은 거의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났으니 필수적으로 삥땅 검사를 받고 행여 술 취한 승객들이 버스에 쏟아놓은 토사물 등이 있으면 깨끗이 치워야 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버스 내부 청소를 하고 내친 김에 밀린 빨래까지 한다면 새벽 1, 2시 경에야 겨우 기숙사에 들어갔다.

8평 남짓한 기숙사 한 방에는 20명 정도가 자는데 경찰서에 붙잡혀가 보호실에서 자는 칼잠과 진배 없었다.


버스에 매달린 고투 25시
1977.01.19 [동아일보] 5면

 

 

 

 

힘들고 고달픈 삶의 최전선 현장 '버스'   

 

 

만원버스에 시달리는 등교길 "어른들은 너무해요"
1971.05.05 [경향신문] 7면


오로지 이런 환경뿐이라면 그래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을지 모른다.

60, 70년대를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듯 그 시절 출퇴근시간대 버스는 그냥 단순한 만원버스가 아니었다.

 

짐짝을 켜켜이 쓸어 넣듯 단 한 명의 승객이라도 더 태우거나 타려고 일대 전쟁을 벌였다. 이렇게 사람을 많이 태우고도 버스가 고무줄처럼 늘어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꽉꽉 밀어 넣었다.  

 

어린 학생들은 사방에서 몸이 조이고 숨이 막혀도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아니, 소리가 돼 나오지를 않았다. 그랬다. 시내버스 자체가 힘들고 고달픈 삶의 최전선 현장이었다.

 

 

 

버스 여차장들은 '힘이 장사'였다. 그들은 말 그대로 버스 차장이지 '안내양'이 아니었다.

힘을 못 쓰면 도저히 승차근무를 해낼 수가 없었다. 버스 내부로 오르지 못하고 승강구에 어설프게 서있는 승객 들을, 문 양옆 손잡이를 꽉 움켜쥔 뒤 오로지 팔과 배의 힘으로만 밀어 올렸다. 온 힘을 다한 여차장의 ‘배치기’에 승객들은 쑥쑥 버스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갓 스무 살 안팎인 그녀들의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오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승객들이 대충 버스 안에 빨려들면 여차장은 운전사가 듣도록 목이 터져라 "오라이!!"를 외쳤다. 출입문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승객을 실은 버스는 '오라이' 소리기 떨어지기 무섭게 내달렸다.

 

전쟁 같은 출퇴근 시간이 지나고 낮 시간에는 승객이 뚝 끊겼다. 이때가 여차장들에겐 한 숨 돌리는 시간. 그러나 승객이 없다고 해서 여차장이 좌석에 앉아서는 안 된다.

 

승강구 난간에 기대어 서서 쉴 수밖에 없다. 출근시간 온 힘을 다해 승하차 전쟁을 벌인데다 쏟아지는 햇살에 노곤해지면 서서라도 꿀맛 같은 단잠을 잘 수 있다. 바로 그렇게 졸다가 버스가 덜컹거리자 김양은 정거장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해 출입문 개폐기를 누른 것이다.


승차지옥 이대로 좋은가. 고달픈 안내양
1978.06.27 [동아일보] 7면

 

 

 

 

재조명 되기 시작한 버스 여차장의 처우 문제

 

 

버스 여차장이 졸다가 자기가 일하던 차에서 떨어져 숨진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자 시민단체 등은 그들의 인권, 근로조건 문제를 새롭게 조명했다. 이때 알려진 것이 처우문제. 여차장들은 이틀 일하고 하루를 쉬었다. 일당은 3천4백 원. 한 달에 20일을 빠짐없이 일하면 6만8천원을 받았다. 이 가운데 약 2만5천원은 기숙사비와 식비로 회사에서 떼어갔다.

 

여기에 스물 전후 처녀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 값과 부스러기 간식비 등을 빼면 그녀들의 손에 쥐어지는 건 고작 2만원 정도였다. 대부분 안내양은 그 돈을 시골의 부모님에게 부치거나 서울로 유학 온 동생들의 학교 등록금으로 쓰고 있었다.

 

 

 

안내양에게도 의자를...시내버스에 번지는 사랑의 운동
1983.03.23 [동아일보] 7면


수출 드라이브를 걸고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등 고속경제의 뒷전에 여차장들의 이 같은 참혹한 삶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

짐짝처럼 버스에 '실리며' 여차장들과 수없이 말싸움을 하고 욕설을 퍼부었던 사람들은 반성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김양 사건이 있기 얼마 전, 그 해 1월 부산에서 일어난 대창여객 기숙사 화재사건이 몇몇 언론에 의해 재조명됐다.

 

여차장 5명이 숨지고 9명이 중화상을 입은 당시 화재는 회사 측이 삥땅 방지용으로 기숙사 뒤쪽 창문을 철책으로 봉해 사상자가 늘었다는 거였다.

 

 

 

대창여객 8평짜리 기숙사에는 35∼40명이 잤다. 기숙사엔 출입문 외에 사람이 드나들만한 크기의 창이 2개 있었는데 회사는 차장들이 버스정비공들과 짜고 이 창을 통해 돈을 빼돌린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결국 겨울 외풍을 막는다는 핑계를 대고 창을 철책으로 꽁꽁 봉했는데 불이 나자 차장들이 유일한 출입구인 앞문 쪽으로 몰려 인명피해가 커진 것이었다. 유일한 난방기구인 석유난로가 문 앞에 있었고 거기에 기름을 붓다 불이 났는데 뒷문은 막혀 있으니 차장들이 죽자고 앞문으로 몰려든 거였다.

 

그럼 도대체 비상시 대피로까지 차단할 정도로 회사 측이 신경을 쓴 그 삥땅의 실태는 어떠했는가. 70년대 내내 버스 여차장과 회사 간에 신경전을 벌였고 심지어는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까지 등장했던 삥땅. 버스 여차장이 삥땅한 돈으로 대학생의 등록금을 대고, 삥땅을 감시할 감독들이 여차장을 갈취해 고급주택을 샀다는 둥 온갖 말이 많았던 삥땅, 그를 둘러싼 애환은 다음 주에 소개될 것이다. 

 

 

 

생계와 양심사이의 갈등 다룬 '삥땅 심포지움'  

 

 

"저는 올해 19세인, 서울 시내버스에 종사하는 여차장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하루 18시간의 긴 노동생활을 하면서 수입금에서 훔쳐내는 3백 원 또는 5백 원의 부수입, '삥땅'에 의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매일매일 죄의식에 몸부림치고 있으나 삥땅이 없으면 그나마 도저히 살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죄를 저지르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도 나갈 수 없는 형편입니다. 저는 교회와도 등져야합니까? 저는 정말 죄인입니까?"

 

1970년 4월 28일 한국노사문제연구협회 주최 '버스 여차장의 삥땅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공개한 어느 여차장의 편지다. 호소가 얼마나 애절하고 짠했던지 당시 8면만 발행해 지면이 많지 않던 신문들이 편지와 토론 내용을 가감 없이 게재했다.


 

삥땅 심포지움에서 제기된 문제점과 대책
1970.04.29 [경향신문] 7면

 

 

 

요즘이라면 삥땅 얘기가 무슨 공개 심포지엄 감이냐고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70년 당시 삥땅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억울하게 삥땅 누명을 썼다고 자살하는 여차장이 해마다 몇 명씩 나왔고 몸수색에 항의하는 차장들의 시위 농성도 신문 사회면에 자주 올랐다.

 

 

 

 

온몸으로 부딪힌 하루 '일당 540원'   

 

 

심포지엄에선 우선 여차장의 근무조건이 소상히 공개됐다. 차장들은 새벽 5시부터 자정까지 승강구에 '서서' 일했다. 출퇴근시간엔 산더미 같은 장정들을 '배치기'로 버스에 밀어 넣고 행선지를 고래고래 '외치느라' 목이 쉬었다. 이따금 승객들과 요금이나 서비스 문제로 대판 '싸움을 벌였고' 어린 학생들까지 "차장X"이라며 '욕하는 걸 들어'줘야 했다.

 

버스요금을 안내고 타는 승객과 '말다툼'을 하다 머리채를 잡히고 흔들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하류 인생으로 취급 받는 게 서러워 기숙사에선 밤에 훌쩍이며 우는 차장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뿐인가. 일부 치한들은 승객들에 밀리는 척 몸을 기대며 더듬기까지 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 70년 당시 그들이 받는 일당은 고작 540원. 1편에서 밝힌 77년 차장의 일당 3,400원의 5,6분의 1수준이었다. 한 달 10,800원을 받았지만 식대 4,500원을 제하면 실 수령액은 6,300원에 불과했고 외상이 있으면 2,000∼3,000원 손에 쥐기 빠듯했다. 17∼23세 꽃다운 나이, 한창 몸치장을 하고 멋 부릴 때지만 그 돈으론 얼굴화장품 하나 사기도 부족했다. 하기야 근무 중 화장품은 바를 수도 없었다. 온몸으로 승객과 부딪혀야 했기 때문이다. 행여 직장인의 흰색 셔츠에 입술 루주라도 묻혔다가는 그 집 부부싸움에 잡혀가 증언할 각오를 해야 했다.

 

 

 

 

삥땅, 죄인가 아닌가    

 

 

 

여차장의 「삥땅」죄냐?아니냐?
1970.04.29 [매일경제] 3면


여차장은 시골에서 갓 올라온 중졸 혹은 여고 중퇴생이 많았다. 가난한 집 입 하나라도 덜겠다며 무작정 상경한 처녀가 대부분.

한두 달 차장강습소를 거쳐 버스회사에 취직했는데 월급에선 그 강습료도 까나갔다. 돈 쓰거나 부칠 데는 많은데 급료는 쥐꼬리만 하니 현금으로 받는 버스요금에 손이 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당시 버스요금은 일반 25원, 학생 15원. 삥땅 500원이면 어른 20명 요금을 슬쩍하는 거였다. 고봉밥에서 티스푼으로 한 숟갈 덜어내는 것과 별 차이 없는 액수였다.

 

이러니 토론자들은 여차장의 삥땅은 불가피한 면이 많다고 주장했다.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연세대 교목실장 이계준 목사 등은 "삥땅을 했더라도 죄가 안 된다. 누구나 일에 대해 공정한 보상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근로기준법은 말뿐, 한 달에 152시간 초과근무하고도 합당한 임금을 못 받으니 삥땅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나 이들도 "삥땅을 권장하는 건 아니며 삥땅이 개인문제 아닌 사회문제로 확대될까 두렵다"고 입을 모았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빼는 횟수가 잦으면 도벽이 습관화되고 그런 습관에 젖은 이들이 아내와 어머니가 되었을 때 그 가정, 그 사회, 그 나라의 모습이 어떨지 심각히 고뇌해야 한다는 거였다.

 

 

 

 

짓밟힌 인권, 알몸 수색 '센터'     

 

 

토론에서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성토한 게 또 있었다. 삥땅을 감시하는 버스회사 여자 감독들이었다.

여차장 30명 당 한 명꼴인 이들은 이른바 '센터'를 한다며 차장들을 구석방으로 몰아넣고 팬티까지 벗겨 수색하곤 했다. 그들은 제 살림보다 차장들 가방 속, 몸속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행여 보는 눈이 많다거나 시중 여론이 불리해 차장 옷 벗기기가 수월치 않을 때는 물구나무서기를 시키고 줄 위로 뛰게 해 동전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여차장들에겐 정말로 '마귀할멈' 같은 존재였다.

추석이나 설 등 명절을 앞두면 감독의 '센터'는 더 심해졌다. 시골 출신 차장들이 고향 부모나 동생, 친척에게 한 푼이라도 더 송금하거나 좋은 선물을 산다며 삥땅 규모를 키울 것이라 의심한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고향에 못 가 서러운데 속옷을 완전히 벗기고 뜀박질 시키는 센터를 당하면 눈물이 쑥쑥 나왔다.

 

기숙사를 나와 달 보고 하염없이 우는 여차장을 버스 종점에서 마주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여감독 일부는 여차장이 삥땅한 돈을 다시 삥땅하는 경우도 있었다.


 

버스 안내양 생활상그린 「도시로 간 처녀」
1981.10.12 [경향신문] 12면

 

 

 

바가지 속 긁듯 돈을 긁어모아 한 달 수입이 월급의 10배인 12만원이라거나 버스 감독을 1년만 하면 고급주택 한 채 사는 건 일도 아니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토론에 참가한 버스노조 지부장은 "같은 근로자면서 벼룩의 간을 빼먹듯 여차장의 삥땅을 빼내 호의호식하는 여감독제도 부터 없애라"고 열을 올렸다.

 

 

 

 

'기름밥'과 '센터'에 울던 여차장의 생활     

 

 

 

「영자의 전성시대」영화화
1975.02.08 [동아일보] 5면


벼룩의 간을 빼먹는 이들은 또 있었다. 운전사들이었다.

다는 아니지만 일부 운전사는 여차장을 겁주어 상납을 요구했다. 액수가 성에 안차면 이른바 '뺑뺑이'를 돌렸다.

 

차장이 타지도 않았는데 버스를 출발시키고 정류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 자연 승객들의 욕설이 쏟아지고 몇 정거장 못가 여차장은 손찌검을 당하게 마련이었다.

 

어떤 운전사는 승객과 차장이 아슬아슬하게 버스 문에 매달려 있는데도 지그재그로 차를 몰아 골탕을 먹였다.

'영자의 전성시대' 영자도 그런 버스에서 떨어져 결국 한쪽 팔을 잃고 창녀로 전락한 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였다.

 

 

 

여차장들은 사기꾼들에게도 밥이었다. 버스회사 사감 생활에서 보고 들은 여차장의 삶을 그린 논픽션 '기름밥'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삥땅이라곤 전혀 모르던 한 여차장은 매일 자기 버스를 타는 허름한 차림의 어느 대학생에 끌린다.

시골서 올라와 고학을 한다는 그 학생의 맑은 미소에 끌려 그녀는 삥땅을 시작하고 등록금 일부를 보탠다며 그에게 바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가짜였다. 몇 개 버스를 돌아가며 같은 시간에 타 순진한 여차장들 속을 뒤집고 손때 묻은 돈을 우려내는 직업적인 사기꾼이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한 차장들의 빗나간 순정 얘기는 자조적 웃음거리로 자주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기름밥'과 '센터'에 울던 여차장 생활은 심포지엄이나 논픽션 고발 이후 과연 달라진 게 있었을까.


 

최우수작 「기름밥」 "불우소녀들의 생활상 계속 추적할터"
1976.08.21 [동아일보] 5면

 

 

 

 

삥땅을 둘러싼 끝없는 사건 사고   

 

 

 

삥땅 방지 버스 계수기 슬그머니 다시 등장
1980.10.14 [동아일보] 7면


76년 1월 5일. OO교통 여차장 이OO양(19)이 삥땅 의심을 받자 합숙소에서 칼로 자신의 배를 그었다. 그날 회사 측은 계수기에 찍힌 승객 수에 비해 입금액이 적다고 윽박질렀고 그녀는 울며 결백을 주장하다 끝내 목숨을 던지는 상황에 이른 것.

그러잖아도 여차장들의 알몸수색 항의와 승차거부 시위가 잦아 신경이 쓰였던 언론은 버스회사의 비인간적 처우를 집중 성토했다. 결국 이양이 숨진 1월 8일 서울시내버스조합은 삥땅 추궁의 원흉으로 지목된 계수기를 철폐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해 8월에도 제3한강교 위를 달리던 버스에서 19세 여차장이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벌어졌고 11월엔 24세 여차장이 음독자살했다.

 

 

 

그리고 77년 1월에는 부산 버스회사 기숙사에서 불이나 5명이 숨졌다. 모두 삥땅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언론에는 보도되지 않았지만 실제 삥땅 사실이 밝혀져 경찰에 구속된 여차장 또한 적지 않았고 삥땅을 봐주겠다며 여차장을 성폭행한 버스회사 직원이 적발된 사례도 있었다.

 

 

 

  

 서민의 발이 되어줬던 '고마운 그녀들'    

 

 

상황이 이랬으니 78년 연두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버스 여차장 문제를 거론한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청와대가 서울시내 90여개 버스회사를 감사한 결과를 밝히며 "대부분 회사는 경영주가 안내양의 후생복지에 관심이 적고 무성의했다"고 질책했다. 그러면서 "버스회사 경영진은 안내양을 가족처럼 생각해 따뜻이 보살피고 시민들은 내 딸, 내 누이동생처럼 대해 욕설과 큰 소리를 삼가 달라. 버스에서 웃음을 주고받고 고운 말을 쓰면 혼잡 속에서도 기분이 좋아질 것"이라고 당부 겸 처방까지 내놓았다.

 

당장 처우가 달라진 건 아니지만 이 덕분에 여차장이란 직종은 '안내양'이란 새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세기를 지나며 사라져간 박제 직종이 되었다. 70년대 고속성장의 그늘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의 발이 되었던 그녀들의 모습은 이제 추억으로만 남았다.

프로야구가 올해처럼 안개 속을 헤맨 때가 있을까? 예측할 수 없던 4위의 향방은 롯데 쪽으로 돌아갔지만 그 과정이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롯데는 25년 전인 1984년에도 부산 팬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막판까지 애를 먹였다. 삼성이 없었다면 후기리그 우승은 OB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삼성은 OB 편이 아니었다. 롯데를 향해 웃었다. 올해도 삼성은 막판에 힘을 뺏다. 덕분에 롯데는 어부지리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올해도 삼성이 봐준 것일까?

 

 

1984년 프로야구는 전기와 후기리그로 나누어 100경기를 치렀다. 때문에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뤘다. 그러나 한 팀이 전·후기리그를 제패하면 한국시리즈는 자연히 소멸됐다. 이런 경우는 프로야구 역사상 단 한 차례 있었다. 1985년 삼성 라이온즈가 완전 우승을 달성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삼성이 84년에도 전·후기리그를 제패했다면 프로야구 사상 가장 추악한 경기로 오점을 남긴 '져 주기 게임', 다시 말해 '승부 조작 게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전기리그에서 우승한 삼성은 후기리그까지 제패,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후기리그 들어 우승할 길이 멀어지자 파트너 선택으로 머리를 돌렸다.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는 한편 손 쉽게 이길 수 있는 팀 탐색에 들어갔다. 이래서 선택된 팀이 전기리그에서 4위를 차지했던 롯데였다.


삼성 마침내 전기리그 우승
1984.06.14 [동아일보] 9면

 

 

 

그런데 한국시리즈에서 이변이 생겼다. 빌빌거릴 줄 알았던 롯데가 무서운 거인으로 돌변,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던 삼성을 굴복시킨 것이다. 승부의 세계에서 파트너 선택을 놓고 왈가왈부할 사람은 없다. 파트너 선택은 강자가 승리를 위해 필연적으로 밟는 수순이다. 그러나 정도를 벗어나 비정상적일 때 비난이 따르고 이야기도 만들어진다. 삼성의 파트너 선택이 바로 그랬다. 25년 전 그 때로 돌아가 보자.

 

 

 

 

전기리그 우승으로 한국시리즈 진출권 확보한 삼성, 후기리그 접어 들자 파트너로 고심 끝에 롯데 낙점   

 

 

프로야구 오명의 '84
1984.09.24 [동아일보] 9면


1984년 9월 23일 프로야구 후기리그 우승은 롯데에게 돌아갔다. 삼성을 등에 업은 롯데가 OB를 1게임 차로 따돌리고 정상에 올랐지만 찝찝한 기분은 버리지 못했다.

9월 24일자 동아일보 체육 면을 보면 "프로야구 오명의 ‘84"라는 제목으로 프로야구를 질타하는 기사가 가득 채워져 있다. 경향신문도 "야구냐 야바위냐"란 제목으로 절반 이상을 채우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신문을 이토록 분노케 한 것일까? 

 

삼성의 '승부 조작 게임'이 문제가 됐다. 한국시리즈 진출권이 걸린 후기리그 우승의 향방은 롯데와 OB가 각각 2게임을 남겨 놓은 상태에서도 오리무중이었다. 9월 20일 현재(표① '84 후기리그 중간 순위 참조) 롯데는 27승1무20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고 OB는 1게임 뒤진 26승1무21패로 롯데를 추격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두 팀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삼성과 해태와 각각 2게임을 치러야 하는 점이었다. 그것도 같은 날(9월 22~23일) 롯데는 홈인 부산에서 삼성과, OB는 제주에서 해태와 2게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관심은 온통 부산에서 치를 삼성-롯데전(9월 22~23일 구덕구장)에 쏠려 있었다. 삼성이 롯데를 얼마만큼 봐주느냐에 따라 우승의 향방이 결정되는 갈림 길이었기 때문이다. OB가 제주경기에서 2승을 건져도 삼성이 롯데에 2게임 모두 져주면(표② 남은 2게임의 향방 참조) 만사는 끝이었다. OB는 삼성이 최소한 1게임 만이라도 잡아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러나 김영덕 감독 입장에서 보면 어림없는 소리였다. 김 감독은 그 만큼 OB를 싫어했다.


 

야구냐 야바위냐
1984.09.24 [경향신문] 9면

 

 

 

 

당시 취재 수첩을 들춰 보니 김영덕 감독과 인터뷰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김 감독에게 마음 속에 점 찍은 한국시리즈 파트너가 "OB가 아니면 롯데냐?"고 은근히 물어보았다. 그러자 김 감독은 대뜸 최동원을 들먹였다.

"한국시리즈는 7전 4선승제로 치르는 단기전이다. 이런 게임엔 비슷비슷한 투수 10명이 있는 팀보다 확실한 투수 1명이 있는 팀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롯데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경우 최동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김영덕 감독은 이어 81년도에 있었던 실업야구의 '코리언시리즈'를 상기시켰다. 당시 자웅을 겨뤘던 팀은 실업 팀 롯데 자이언츠와 군 팀 경리단이었다. 롯데에는 최동원이 있었고 경리단에는 김시진이 있었다. 멤버를 비교하면 경리단이 우세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5전 3선승제로 정상을 가리는 이 시리즈에서 경리단은 1, 2차전을 승리로 이끈 뒤 3차전에서 무승부로 숨을 돌렸다. 남은 3경기에서 1승만 올리면 우승을 차지하는 거였다. 하지만 경리단은 졌다. 롯데가 남은 3경기를 모조리 잡아 3승1무2패로 패권을 거머쥔 것이다. 최동원의 역투가 판세를 뒤집어 버린 것이다.

 

"올해 최동원의 볼은 그 때에 비해 스피드가 좀 줄었다. 그런데 우리 타자들은 그 스피드에 맥을 못 춘다. 컨트롤도 그 때보다 좋으면 좋았지 뒤지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볼 때 그 때보다 못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럴 만도 했다. 최동원은 갈수록 힘이 붙었다. 전기리그에서 9승에 그쳤던 그는 후기리그에서 18승을 올려 27승으로 삼성이 자랑하던 김시진(19승)과 재일동포 김일융(16승)을 따돌리고 다승부문 1위에 올라 있었다. 그렇다면 삼성은 왜 최동원이 버티고 있는 롯데를 파트너로 선택한 것일까? 당시 롯데를 진두 지휘했던 강병철 감독이 입을 열었다.

 

 

 

 

OB김영덕 감독, 구단 만류 불구 "책임통감" 사임
1983.10.15 [동아일보] 9면


"OB와는 안팎으로 악연이 많았다. 이런 팀을 파트너로 선택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또 롯데는 최동원을 빼면 모든 면에서 삼성에 뒤졌다. 후기리그에서 우승한 것은 롯데의 힘이 아니었다. 기적이었다. 나는 중위권만 들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건 그랬다. OB와 김영덕 감독의 악연은 83년 10월 성적부진과 박철순의 부상에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감독을 사퇴하면서 시작됐다. 김 감독은 사퇴 후 거취문제에 대해 "자신의 야구이론을 정리한 뒤 일본 유학"을 밝혔었다. 그러나 OB 감독을 사퇴한 11일 뒤에 삼성 감독으로 입단 계약을 마쳐 OB가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83년 5월 서영무 감독이 삼성을 사퇴하자 이듬 해 2월 OB가 관리이사로 영입해 삼성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인지 84년 전기리그에서 양쪽 선수들이 사소한 문제로 주먹 다짐을 벌이는 일이 예사였다. 이러니 김영덕 감독 입장에서는 OB의 한국시리즈 진출을 결사적으로 막을 수 밖에 없었다.

 

 

 

 

한국시리즈 우승 위한 롯데 선택은 고육지책, 상대 팀 감독도 모르게 '져주기 게임' 구상  

 

 

삼성의 김영덕 감독은 9월 22일 부산게임을 갖기 전 "고육지책으로 롯데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OB와 한국시리즈에서 만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쓰던 롯데를 밀어주어 한국시리즈에 함께 가겠다"고 밝혀 여차하며 '져주기 게임'도 감행한다는 언질을 주었다. 그러나 져준 방법이 문제였다. 큰 점수 차로 이기다가 어거지로 패해 많은 팬들의 분노를 샀다. 삼성 입장에서 보면 한국시리즈 제패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9월 22일 첫 경기는 삼성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롯데는 천창호를 선발로 내세운 반면 삼성은 진동한을 선발로 내세웠다. 이상한 쪽은 롯데였다. 우승을 다투는 중요한 경기에 천창호라니 경기를 포기한 느낌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은 1회초 천창호와 안창완을 두들겨 눈 깜짝할 사이에 6점을 선취, 승세를 굳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제주경기에서 OB가 11-9로 해태를 꺾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김영덕 감독은 판세를 뒤엎기 시작했다. 2회까지 잘 던지던 진동한을 빼고 3회에 송진호를 내보내 3점을 헌납했다. 4회에는 성낙수를 올려 4점을 내준 것을 시작으로 5회 1점, 7회 1점, 8회 2점 등 11점을 내주는 수준 이하의 경기(표 ③삼성의 이닝 별 자멸 플레이 내용 참조)를 펼친 끝에 9-11로 역전 패를 자초했다.

 

 

 

 

강병철-김영덕, 너무 짙은 명암
1984.10.10 [동아일보] 5면


그렇다면 롯데 강병철 감독은 삼성의 "져주기 게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삼성이 점수를 헌납하자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5회 들어 삼성이 '져주기 게임'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영덕 감독이 봐 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1회에 6점을 손쉽게 얻은 삼성이 선수를 자꾸 교체했지만 점수를 많이 내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했다. 고의로 자멸하는 경우가 눈에 잡히기 시작했다. '아하, 김 감독이 우릴 봐 주는구나!' 감을 잡은 것은 5회였다. 그래서 6회부터 최동원을 투입했다. 사실 최동원은 9월 20일 OB에게 완투 패를 당한 상태여서 등판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렇지만 승리를 줍는다는 느낌에 서슴없이 최동원을 내보냈다. 김 감독이 처음부터 언질을 줬다면 그렇게 욕 먹는 경기는 안 했을 것이다"

 

 

 

삼성은 9월 23일 경기에서도 변함이 없었다. 1회초 배경환을 두들겨 가볍게 3점을 선취했다. 그러나 2회말 약속이나 한 듯 실수를 가장한 자멸 플레이로 6점을 잃은 뒤 4회에 4점, 5회 2점, 6회 2점 7회 1점 등 대거 15점을 내주어 8-15로 역전 패를 자초했다. 역전 패를 당하는 방법이 첫 경기에 비해 다듬어졌을 뿐 내용은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삼성은 의기양양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삼성은 후기리그가 끝나자 이틀을 쉬고 9월 26일부터 한국시리즈에 대비한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숙소는 대구 수성관광호텔이었다. 김영덕 감독은 합숙에 들기 전 훈련 중에는 취재에 일절 응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놓고 있었다.

 

 

 

당시 취재수첩을 보면 재미있는 얘기들이 적혀있다. 시침 뚝 떼고 모르는 척 김영덕 감독의 방인 305호실을 무작정 들어선 것으로 되어있다. 정동진 코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김 감독은 눈부터 흘겼다. "누굴 또 잡으려고 나타났느냐"고 했다. 그래서 "툭 터 놓고 애기해 보자"고 응수했다. 그러자 김 감독은 TV를 가리켰다. 화면엔 최동원의 피칭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한창 최동원의 버릇을 탐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조져도 적당히 조질 것이지 그렇게 무자비하게 조질 게 뭐냐!"고 항의부터 했다. 롯데에게 한 '져주기 게임'을 신랄하게 비판한 기사를 놓고 하는 말이었다. 그런 뒤 "훈련이 끝날 때까지 취재나 인터뷰는 일절 응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 동안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자 김 감독이 미안했던지 슬며시 돌아 앉으며 "취재수첩은 덮고 애기나 하자"고 했다.


 

삼성 라이온즈 김영덕의 감독론
1984.06.22 [경향신문] 9면

 

 

 

-"롯데를 봐줬다"는 비난에 대한 심정은?
"항간에 떠도는 것처럼 롯데와 짜고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롯데가 이겨주길 바란 건 사실이다. 그리고 '져줬네, 승부를 조작했네' 하고 야단들이지만 선수들을 지휘 감독하는 감독이 어떻게 '져주라'고 말할 수는 있겠는가? 솔직히 말해 롯데전이 있기 전 선수들을 불러 놓고 우리 팀이 처한 입장을 설명한 적은 있다. 선수 각자가 알아서 잘 싸워 달라고 부탁도 했다"

 

-롯데가 이기길 원한 이유는?
"OB는 나와의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서도 짜임새도 있고 야구를 아는 팀이다. 투수력도 안정됐지만 타력 또한 만만찮다. 롯데는 최동원 한 명이다. 김용철과 홍문종이 잘 때리고 정영기가 좋은 수비를 펼치는 것은 최동원이 던지면 이긴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최동원이 무너지면 롯데는 혼란에 빠지지만 OB는 정반대다. 누가 얻어 맞아도 진드기처럼 달라 붙는 근성이 있다. 감독 입장에서는 이런 팀보다 손쉬운 상대를 택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여론은 김 감독이 노골적으로 롯데를 봐줬다고 비난한다. 후기리그 중반부터 삼성이 롯데를 밀 것이란 소문이 나돌았다. 그 소문이 기정 사실처럼 됐다. 거기다 초반 7점을 이기고 있다 9-11로 역전 패를 당한 건 너무한 게 아닌가?
"큰 경기(한국시리즈)를 앞둔 상태에서 영양가 없는 경기에 주전을 투입하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만에 하나 부상이라도 당하면 낭패를 보게 된다. 그래서 2진을 주축으로 투입했다. 롯데가 잘 때려 우승하기를 바랬다. 내가 욕을 먹은 것은 초반에 너무 많은 점수를 뽑은 탓이다. 못 때릴 줄 알았던 선수들이 그날 따라 너무 잘 때렸다. 그러나 끈기는 없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게 역전 당했다. 제주에서 벌어진 OB-해태전처럼 모양새를 갖춰가며 패했다면 덜 얻어 맞았을 것이다"

 

-매스컴에서 김 감독과 삼성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 때의 심정은?
"한 마디로 어리둥절했다. 내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에 놀랐다. 발단이 어디에 있든 나로 인해 프로야구 전체가 비난을 받자 감독 사퇴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그 뒤 구단에선 어떤 지시가 있었나?
"아무런 지시도 없었다. 그러나 저러나 걱정이 태산 같다. 한국시리즈에서 우리는 이겨 보았자 본전치기다. 반대로 롯데에 잡히기라도 하는 날엔 개망신이다"

 

 

 

 

김일융과 최동원 한국시리즈서 자존심 대결, 삼성은 롯데 얕보고 덤볐다 덜미 잡혀 낭패

 

 

김영덕 감독이 한국시리즈가 시작도 하기 전에 불길한 기운을 예감한 것일까? 패할 수도 있다는 언질을 줬다. 정말 한국시리즈는 김 감독이 예감한대로 평탄치 못했다. 9월 30일 대구에서 벌어진 1차전에서 삼성은 0-4로 패했다. 롯데는 일찍부터 최동원의 선발 등판이 예상됐었다. 그러나 삼성은 예정됐던 권영호 대신 김시진을 선발로 투입, 3이닝 동안 4안타로 4실점한 뒤 강판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삼성-롯데 주거니 받거니
1984.10.02 [경향신문] 9면


2차전은 김일융이 완투한 가운데 삼성 8-2로 승리해 1승1패가 됐다. 롯데는 김영덕 감독의 예상로 5명의 투수를 투입하는 벌떼작전을 폈다. 최동원이 없는 롯데는 종이 호랑이였다. 그러나 롯데의 강병철 감독은 만족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우리가 자력으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면 더 큰 욕심을 냈을 것이다. 어부지리로 올라왔으니 적지에서 1승1패란 큰 수확이다. 우리가 우승할 전력을 갖춘 것도 아니니 욕심은 없다.

하지만 선수들에게 부산에서 한 번만 더 이겨보자고 했다. 그래야 서울 땅을 밟아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져도 서울에서 지고 싶었다"

강병철 감독은 선수들에게 두 번 이겨 서울 가자고 했지만 그 속엔 노림 수가 숨어 있었다. 처음부터 최동원의 등판 횟수를 4번으로 잡아 놓은 게 그것이다.

 

 

 

후기리그에 접어들면서 완력이 더욱 강해진 그는 지금 절정기를 맞고 있었다. 그래서 1, 3, 5, 7차전에 투입한다는 각본을 짰고 여기서 모조리 이기면 4승으로 우승이었다. 그러나 과한 욕심이었다. 철완을 자랑하는 최동원에게도 체력의 한계는 있었다. 그 한계가 롯데의 운명선이나 다름 없었다.

 

 

 

부산으로 장소를 옮겨 치른 3차전은 최동원의 몫이었다. 삼성은 1차전의 악몽을 잊은 듯 김시진을 또 선발로 내세웠다. 그러나 김시진은 2-2 동점이던 8회말 홍문종이 때린 강한 타구에 왼쪽 복숭아 뼈를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진 뒤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덕아웃으로 걸어나갔다. 삼성의 불운이었다. 이를 알리듯 9회말 1사2루에서 정영기가 굿바이 히트를 날려 3-2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4차전은 김일융을 선발로 내세우고 황규봉을 마무리로 투입한 삼성이 7-0으로 승리했다. 롯데는 최동원 대신 임호균-천창호-안창완-조용철이 이어 던지게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덩달아 타선도 침묵을 지켜다. 삼성은 10안타로 7점을 뽑은 데 비해 롯데는 산발 4안타에 그쳤을 뿐이다. 그러나 강병철 감독은 여한이 없었다. 2승2패로 서울로 올라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때문이었다. 


 

巨人 징검다리 승리 "착착"
1984.10.04 [동아일보] 9면

 

 

 

5차전은 하루를 쉰 뒤 10월 6일 잠실구장에서 벌어졌다. 당연히 최동원이 마운드를 지킨 롯데가 승리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삼성이 3-2로 역전승을 했다. 삼성은 김시진의 부상으로 권영호를 선발로 내세워 6이닝 동안 3안타에 2실점을 했다. 그러나 7회부터 김일융을 내세워 뒷문을 굳게 지켰다.

 

 

 

 

최동원 벼랑에 사자 애간장
1984.10.08 [동아일보] 9면


"5차전서 최동원이 무너지자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사실 최동원은 너무 지쳐 있었다. 그런데 6차전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운이 다 됐다는 심정으로 임호균을 선발로 내세웠는데 의외로 잘 던졌다. 그렇지만 4회초 3안타로 1실점하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최동원일 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전 날 완투한 끝에 패한 몸이었다. 그런데 4회말 조성옥이 걸어나가자 홍문종, 김용철, 김용희가 김시진을 두들겨 3점을 뽑았다. 최동원이 승리를 직감한 듯 마운드에 오를 채비를 차리고 있었다"

 

5회부터 최동원이 마운드를 지키자 힘을 얻은 롯데 나인들은 8회말 또 다시 3안타를 터트려 3점을 추가했다. 김영덕 감독의 말처럼 최동원은 역시 대단했다. 그가 마운드에 있는 것만으로도 롯데 나인들은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롯데는 마지막 경기가 될 줄 알았던 6차전에서 뜻밖에 6-1로 승리해 기사회생한 상태였다. 그러나 7차전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강병철 감독은 앞이 캄캄했다. 투수진이 바닥이었다. 다행이라면 하루 쉰 뒤 10월 9일 7차전을 갖지만 차마 최동원을 내몰 수는 없었다. 그런데 최동원이 자청하고 나섰다."7차전은 국내파인 최동원과 해외파인 김일융이 자존심을 건 한 판 승부였다.

 

 

 

서로가 물러설 수 없었다. 후기리그서 우승했을 때만 해도 한국시리즈는 거저 진출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2승만 올리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서 한 번 뛰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7차전까지 오고 보니 욕심이 생겼다. 무지무지하게 고생하며 왔으니 우승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강병철 감독의 말이다. 7차전에서 강 감독은 선수들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삼성이 2회말 2안타로 3점을 뽑자 이를 만회할 욕심으로 '치고 달리기(히트앤드런) 작전'을 걸었다. 하는 족족 실패였다. 3회초 2안타로 1점을 만회한 뒤 1사1루에서 홍문종이 삼진을 당하는 순간 1루 주자 김재상이 2루로 뛰다 죽었다. 4회에는 1사1루에서 유두열이 삼진을 당하는 순간 1루 주자 김용희가 2루로 뛰어들다 또 죽었다. 작전을 걸지 않았으면 좀 더 수월하게 경기를 풀어 갈 수 있었다.


 

최동원-김일융 한국시리즈 최종전 마운드 대결에 관심집중
1984.10.09 [경향신문] 9면

 

 

 

어찌됐든 승운은 롯데 쪽에 있었다. 최동원도 지칠대로 지쳐 볼의 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지만 김일융은 한 수 더 떴다. 7회초 유두열, 한문연, 정영기에게 연속으로 3안타를 얻어 맞아 2점을 내주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코어는 3-4. 삼성에 1점을 뒤지고 있었다.

 

 

 

 

 

1984 정상서"巨人 만세"
1984.10.10 [경향신문] 7면


"최동원은 한 이닝을 던지고 덕아웃에 들어올 때마다 죽을 상을 짓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선수들이 그를 몸을 매만지며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우승을 직감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우리는 삼성을 잡을 수 있다. 네가 쓰러지면 안 된다. 너 아니면 누가 던지냐? 우리를 믿고 힘을 내라. 틀림없이 역전시킬 수 있다'며 최동원을 독려했다"

 

8회초 였다. 1사후 김용희, 김용철이 안타를 치고 나가자 유두열이 타석에 들어섰다. 유두열은 볼 카운트 1-1에서 가운데로 날라오는 김일융의 3구를 받아 쳤다. 함성이 터졌다. 유두열이 "홈런이구나!" 느끼는 순간 볼은 왼쪽 담장을 넘어갔다. 3점 홈런이었다. 순식간에 전세를 6-4로 역전시킨 것이다. 쓰러질 것만 같았던 최동원도 덩달아 힘을 얻었다. 9회말 장태수를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순간 장내는 또 한 번 함성이 울려 퍼졌다. 롯데가 프로야구 사상 첫 우승을 안는 순간이기도 했다.

난센스 퀴즈가 하나 있다. 1970년대 국회의원들이 자주 걸린 '직업병'은 무엇일까? 정치가 안 풀려 생긴 스트레스? 자주 소리 지르고 핏대를 올려 발생한 고혈압? 아니면 이것저것 주는 대로 꿀떡꿀떡 삼켜서 난 배탈? 글쎄, 모두 맞는 것 같지만 딱 떨어지는 답은 아니다. 힌트를 주자면 70년대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은 대통령이 지명해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승인하는 요식 절차로 의원이 됐다.

 

 

 

평화시장 피복 여공들 "유해한 작업 환경으로 폐결핵 등 앓아"

 

 

국민 뜻과 무관한, 오직 박정희대통령의 유신이념 구현을 입법 활동의 최고 가치로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름 하여 '유신정우회'. 그들과 공화당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지시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따라가야 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했다. 아니면 누가 어디서 어떻게 손을 볼지 몰랐다. 그래서 정답은.. 오른쪽 어깨 통증이다. 의안 표결 때마다 누가 지켜보기라도 하듯 오른쪽 팔을 번쩍번쩍 치켜들며 "찬성이요!"이라고 외치는 '거수기' 노릇에 충실해 직업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너무 심한 야유인가. 그러나 그 시절 국민들은 정말로 국회의원을 '월급쟁이 거수기'라고 불렀다. 국민의 대표가 한낱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것은 국민의 인권이 그만큼 바닥을 기었다는 얘기에 다름아니다. 앞장서 여론을 주도해야 마땅한 사람들이 죽을 쑤며 제 구실을 못하니 서민들이 당하는 일이야 오죽했겠는가.

 

정치적으론 유신과 긴급조치에 재갈이 물리고 경제적으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의 그늘 아래 저임금에 시달리고 직업병으로 골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70년 10월6일 매일경제 사회면에는 2단짜리 짤막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저임금에 직업병까지-평화시장 피복 여공들 개선 호소"  기사내용은 이렇다.


평화시장 르포…영세성·저임에 시달리는 노동이방지대
1980.04.12 6면 [동아일보]

 

 

 

"노동청에 들어온 진정에 따르면 서울 청계천 5가에서 6가 사이에 있는 평화시장 피복상회에 근무하는 약 2만 명의 근로자들이 하루 12시간 이상 고된 근무와 저임금, 그리고 수당도 없는 휴일근무에다 유해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안질, 폐결핵 등 직업병까지 앓고 있다고 호소했다."

 

 

 

 

'미싱'에 묶인 공장 노동자…섬유 먼지에 폐가 망가지고, 소음에 귀가 먹고

  

 

그 기사가 보도된 지 꼭 한 달 후인 11월 13일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씨가 분신자살했다. 언론이 경고음을 발했는데도 당국은 팔짱만 끼고 있다 끝내 전태일 분신자살이라는 한국 노동운동사 최고의 항의에 직면한 것이다.

 

10월 6일 기사는 전 씨의 유언이라도 미리 듣고 쓴 것처럼 생생하다.

"15세 가량의 여자 종업원(시다) 1만여 명은 하루 12시간 이상 근무에 월급은 3천원에서 3천5백 원을 받으며 1년에 한 번 건강검진을 받게 돼 있으나 몇 년 동안 한 번도 받지 않았고 (작업장 별로) 40명 중 한두 명이 진단을 받아 모두 받은 것처럼 위조하고 있다."

"평화시장 안 피복상회는 약 7백 개소가 있는데 보통 종업원은 30-40명, 많으면 2백 명까지 채용하고 있다. 작업장은 허리를 펴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천정이 낮으며 방 속에는 먼지로 꽉 차 있다."

 

이것이 이른바 미싱공장의 실태다. 15,6세 소녀들이 청춘을 바쳐 일하며 섬유 먼지에 폐가 다 망가지고, 좁은 방 가득 찬 미싱 돌아가는 소음에 귀가 먹고, 허리를 못 펴 20대에 이미 꼬부랑 할머니 신세가 되는 작업장이다.

 

 

 

 

 

노동청 직업병 실태조사 "직업병 가진 사람은 단 1명" 

 

 

먼지 속 13시간 노동
1970.10.07 3면 [동아일보]


소녀들의 꿈은 실밥처럼 뜯어지고 날아갔다. 비정한 미싱은 그래도 돌고 또 돌았다.

 

80년대 운동가요 '사계'는 그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어도

     하얀 나비꽃 나비 담장 위에 날아도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또 불어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소금 땀 비지 땀 흐르고 또 흘러도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
     우리네 청춘이 저물고 또 저물도록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

 

 

 

꽃다운 청춘, 봄바람도 애써 외면하며 입에 풀칠하기 위해 미싱을 돌리고 또 돌렸던 우리의 누이동생들. 끝내 직업병을 얻어 삶의 구렁으로 떨어지기 십상이었지만 노동 당국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이들의 실상을 호도했다.

 

70년 4월부터 12월까지 8개월간 전국 16인 이상 사업장의 직업병 실태조사를 벌였던 노동청은 이듬해 "서울에서 건강진단을 받은 13만5천여 명 중 직업병을 가진 사람은 단 1명이었다."고 밝혔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전북 역시 1만2천 근로자 중 직업병 발병은 1명뿐이었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는 전국 6,272개 사업장 69만1천명 가운데 0.14%인 780명만 직업병에 걸렸다고 한 이 조사결과에 언론은 분노했고 근로자들은 절망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대학이나 종교단체 부설 병원의 활발한 직업병 실태조사를 불러왔다.

 

 

 

 

무허가 고무공장 종업원 13명 전신마비 직업병 

 

 

그러던 74년 6월. 영등포 무허가 고무공장의 주부 종업원 13명이 손발이 굳고 마비되는 직업병에 걸린 사실이 보도됐다. 이들 주부들은 운동화 바닥에 고무창을 붙이는 작업을 해왔다. 작업 초기 손발이 굳고 꼬집어도 감각이 없는 증세를 보였으나 무시했다. 그러다 결국 전신이 마비돼 혼자선 일어설 수도 없고 일으켜 세워도 폭삭 주저 앉아버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건은 묻힐 뻔했다. 병 걸린 주부들이 해고가 두려워 쉬쉬하며 혼자 병원에 다닌 것.

그런데도 일을 못할 정도로 병이 진행돼 업주에게 치료비 보조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해 끝내 경찰에 진정한 것이었다.

진상조사에 나선 노동청 간부도 “이걸 세상에 알리면 도움이 되나? 소송을 걸던지 잘해봐라”며 오히려 환자들을 윽박지른 사실이 드러나 시민의 분노를 샀다.

 

고무공장 사건은 국회에까지 비화됐다.

야당의원들은 "산업화니 고속성장의  구호 속에 인권은 사각지대에 내몰렸다"며 "소음, 분진, 유독약품 등 각종 유해 물질에 둘러싸인 근로환경 개선대책을 내놓아라."고 요구했다.

언론도 영등포 공장지대, 청계천 피복상회, 강원도 탄광지대, 전라 충청 잠사공장, 시내버스 여차장과 운전사, 전국 가발공장 등 저임과 직업병에 시달리는 현장을 찾아 경쟁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직업병이 늘고 있다.
1977.01.18 5면 [경향신문]

 

 

 

용산의 한 신발공장에서 일하던 16세 소년 4명은 손발에 힘이 빠져 수저질도 못하고 앉은뱅이 상태로 작업해온 사실이 밝혀졌다.

15평 작업장에서는 휘발유에 생고무를 섞어 휘저은 다음 신발을 만드는데 환기통은 한 곳도 없었다. 게다가 시골출신 소년들은 아예 공장 안에서 숙식을 해결했는데 그곳은 휘발유 생고무 냄새에 연탄가스까지 뒤섞여 취재진이 발을 딛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80만 산업 역군의 절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시내버스 여차장은 34%가 동상, 무좀, 위장병, 요통 등에 시달렸다. 삥땅을 막는다며 근무시간에는 기숙사 출입을 금해 땀에 젖은 양말을 갈아 신을 수도 없는데다 세면장엔 온수 공급이 안 돼 여름엔 무좀, 겨울엔 동상에 번갈아 걸렸다.

 

77년, 산업보건협회가 전국 작업장의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80만 산업 역군' 중 23%가 유해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19.8%가 직업병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충격적 결과가 나왔다.

업종별로는 정밀제조업 27.7%, 금속제조업 27%, 인쇄업 22.2%, 의복제조업 17.3% 등 제조업 근로자 10명 중 3명가량이 이런저런 직업병을 앓고 있었다.

 

 

 

직업병 종류·현황·예방대책
1975.11.12 5면 [경향신문]


75년, 가톨릭 의대 산재병원 이승한 박사는 30개 사업장 근로자 1만6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도 발표했다.

38.2%가 소음, 36.2%는 분진, 28%는 염산 벤젠 톨루엔 등 유해약품에 둘러싸여 일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업 근로자의 99.1%는 직업성 난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100명 중 99명이 귀를 잃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 바쳐 나라의 근대화를 일구어 낸 '산업 역군'들에게 돌아간 노동의 대가는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애타게 바라던 최소한의 인권, 인간다운 노동조건은 썩어 밀알이 되었을까.  

 

 

 

그들이 앓고 신음하던 직업병은 이 나라 고속성장의 거름이 되고 기계를 돌리기 위한 기름이 되었을까. 전태일과 그의 청계 피복노조원들이 외친 절규는 70년대 제조업 작업장, 굴뚝공장의 실태를 한마디로 설명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쟁 중에도 아기는 태어나듯, 암흑의 시기에도 방랑은 있다."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유명한 항변이다. '술 익는 강마을'을 모티프로 쓴 서정시에 "국민은 굶는데 시인은 고작 밀주타령이냐?"는 비판이 나오자 점잖게 훈수하듯 던진 말이다. 포탄이 날고 살이 찢어지는 순간에도 애절한 사랑이 있듯 사람의 마음과 표현이야 어디 잡아 가둘 수 있겠냐는 뜻이겠다.

 

 

 

엄혹했던 시절 항거의 유일 표현 '낙서'

 

 

유신, 긴급조치 시대엔 국민의 입에 철저히 재갈이 물렸다. 정부는 언론자유를 빼앗고 항변을 공포로 눌렀다.

유신헌법 비판을 못하게 긴급조치를 내리고 그 조치 자체도 비판을 금하며 잡아가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그러면 사람들의 마음도 두려움에 떨고 갇히고 눌렸을까. 아무 말도 못했을까. 아니었다. 암흑 속에도 방랑이 있듯 사람들은 마음으로 항거하며 표현하는 방법을 익혀갔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낙서였다.

 

70년대 공중변소는 예외 없이 낙서로 도배돼 있었다. 온갖 필기도구로 갖가지 글자와 그림을 쓰고, 그리고, 새겨놓았다. 냄새를 줄이려고 흰 회칠을 해놓은 벽면은 훌륭한 칠판 노릇을 했다.

당시 변소는 지금처럼 미끈미끈한 타일로 바닥과 벽을 덮고 휴지까지 비치한 '화장실'이 아니었다. 물론 수세식도 아니었다. 변기통 밑으로 똥오줌이 그대로 다 보였다. 여름엔 파리 모기가 웽웽거려 일을 보기 어려웠고 겨울엔 엉덩이로 찬바람이 솔솔 불어 오래 앉아있지 못했다.


학원가…고절의 한해
1974.12.23 [동아일보] 3면

 

 

 

그 곳에서 땀을 뻘뻘 흘리거나 덜덜 떨면서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 억눌려 못 다한 말을 풀어 놓았다. 글이 안 될 땐 그림을 그렸다. 서울역 공중변소에는 대통령을 그려놓고 X몽둥이로 때리는 그림이 자주 등장했다.

"유신 철폐" "박정희 xx" "공화당 x들이 국민을 다 죽인다." 같은 정치구호를 휘갈겨 쓴 것도 많았다.

관할 남대문경찰서 보안과는 이런 정치성 낙서를 남들이 보기 전에 지우는 일이 큰 업무였다. 혹시라도 중앙정보부 요원이 먼저 그걸 발견하면 경찰서장이 곤욕을 치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건달들까지 정보원으로 포섭해 펼친 '염탐 작전'

 

 

낙서를 하다 붙잡혀 즉심에 넘어간 사람도 꽤 있었다. 지금 같으면 혼자 숨어서 낙서를 하는데 어떻게 들키느냐는 의문도 들 법 하다. 그러나 당시는 변소 낙서의 전파력이 워낙 높아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경찰 정보과 형사들도 '업무상 변소 출입'을 하곤 했다.

 

 

 

필적감정에 객관성 인정할 수 없다…대법원 새 판례
1976.11.24 [동아일보] 7면


민심 동태파악에 필요한 몇몇 낙서는 베끼거나 사진을 찍어 상부에 보고했다. 공중변소 주변의 상인이나 건달들을 정보원으로 포섭해 정기적으로 내용을 전달받고 누가 자주 변소에 와 낙서를 하는지 염탐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이 신문에 실린 적은 없다. 반정부, 반 유신 표현이 금지됐기 때문에 낙서 내용을 보도할 수도 없었다.

 

76년 11월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를 보자. 반공법위반 혐의로 1, 2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전북대생에게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학교 변소에 선동낙서를 쓴 혐의로 기소됐다.

수사기관이 낙서글씨와 비슷하게 고문까지 하며 필적연습을 시킨 뒤 감정서를 제출했는데 대법원은 필적조작 의혹을 문제 삼아 무죄를 선고한 것. 물론 낙서행위 자체를 무죄로 본 건 아니었다. 신문도 낙서 내용은 뻥긋도 못했다. ‘모두 42자의 불온 낙서를 했다’는 식으로만 보도했다.

 

 

 

 

낙서 주제는 사랑, 결혼, 인생, 학업, 종교순

 

 

유신시대 어느 대학이든 변소는 '불온낙서' 게시판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이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변소 안 벽면에 오늘 한쪽이 쓰고, 다음날 한쪽은 지우는 숨바꼭질이 벌어졌다. 학교 측이 견디다 못해 '낙서금지' 팻말을 걸면 "학교의 '낙서금지' 낙서는 괜찮은가"란 댓글낙서가 붙기도 했다. 고민하던 대학 측은 결국 낙서를 양성화해 낙서를 줄여보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연세대학은 학생회관 안 휴게실 '푸른 샘'에 낙서장과 낙서판을 비치하고 낙서 양성화의 새 문화를 선도했다.

 

 

 

75년 6월 신문들은 연세대 교수팀의 '낙서분석에 나타난 캠퍼스의 성향' 기사를 대대적으로 다뤘다. 2년간 낙서노트 6권 990페이지, 낙서판 173개의 낙서들을 분석한 결과였다.

낙서가 가장 많았던 주제는 사랑과 섹스, 결혼 등으로 15.8%였고 인생 학업 종교가 그 뒤를 이었다. 문제는 "분류해보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낙서"가 전체의 17%로 사실상 1위였다는 것.

학교 측은 말을 안했지만 이것이 시국, 정치, 반정부 낙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쨌거나 분류해 발표한 낙서들에도 당시 대학생들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 많았다.

"남자는 여자의 첫사랑을 구하고 여자는 남자의 끝 사랑을 구한다." "연애는 멋있는 여자, 결혼은 정숙한 여자" "금연이란 연애금지의 뜻이니라." "신은 죽었다-니체, 니체는 죽었다-신" "술은 사회악 마셔서 없애자" "진로(소주 이름)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낙서에 미친 캠퍼스 성향
1975.06.21 [경향신문] 5면

 

 

 

연세대는 교수 8명으로 '낙서평가위원회'까지 두고 분석했는데 한 교수는 "공개 장소에서 낙서할 때의 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므로 심각하게 볼 필요가 없다"는 의견을 냈다. 변소 같은 혼자만의 공간에서 남의 눈을 의식 않고 할 말을 다하는 낙서는 아니라는 의미.

한마디로 덜 솔직하다는 얘기였지만 대부분 평가위원들은 "학생들의 무의식이나 마음 속 깊은 곳의 일단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 있다"는 의견이었다.

 

 

 

 

대학에서 주워 본 낙서의 생리(生理) 

 

 

낙서를 광장으로 끌어내는 일은 대학에서 70년대 내내 시도됐다. 학교 측은 물론 학생회도 축제 때면 으레 낙서전시회 등을 열었고 교수들은 그런 학생들의 낙서를 분석하며 캠퍼스의 변모 상을 연구 분석했다. 이때 일반에 널리 퍼져 알려진 낙서로는,

 

 

 

낙서, 그리고 대중에 번지는 풍자와 푸념과 한
1982.12.20 [동아일보] 7면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E여대생들이여, 수준이 안 맞아서 못 놀겠다." - "웬 일이니, 우리는 더 이상 남학생을 울리지 않기로 했단다."

"남자들아, 모기 5천 마리의 저주를 받아라."

"요샌 야(野)스러운게 왕(王)이란다. 우리는 되도록 야하게 살아야한다는 걸 일찍 깨달아야 해."

"내가 제일 사랑하는 것- 앞 사람의 시험지/ 유급생."

"동양의 대식가- 묵자, 동양의 플레이보이- 노자, 활을 제일 잘 쏘는 이- 활명수."

"보긴 뭘 봐, 쓰긴 뭘 써, 밝히긴 뭘 밝혀."

"신의 딸인 내가 어찌 인간의 아들인 너를 사랑할소냐."

"몰라, 이 악마야, 핫도그야. - 당신의 악마는 핫 도구이군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남에게 고독이, 불행이, 고통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서다."

"사랑+눈물= 어머니" 등이다.

 

 

 

 

70년대 낙서족들은 지금 어디에 낙서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흔히 다른 대화 수단에 좌절했거나 큰 분노로부터 스스로를 정화시킬 필요가 있을 때 낙서를 한다.

70년대 교수들은 당시 학생들의 낙서를 보며 “표현 욕구가 억압당해 이것이 왜곡된 형태로 발산됐다”고 우려했다. 정치현실은 참담하고 암울한데 정치적 의사표현이나 정치색을 드러낸 낙서는 감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니 대신 현실을 부정하고 비트는 낙서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유신정치, 긴급조치가 사람들의 마음과 표현을 각박하게 비틀고 짜며 분노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다.

70년대 낙서족들은 지금 50, 60대의 사회 어른이 되었다. 시대의 아픔을 난센스 유머나 변소낙서로 희석하며 한 생을 보낸 그들은 지금 다시 세대간 대화 단절을 느끼며 마음에 낙서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두 달 앞둔 3월 1일. 모처럼 가족과 극장을 찾은 시민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본 영화에 앞서 애국가를 상영하니 모두 기립해 달라"는 방송이 나온 것이다. 이날 서울 등 전국 도시지역 381개 극장에선 국내 처음으로 영화 시작 전 애국가를 상영했다. 문공부 지시였다. 관객들은 일부 앉은 채, 또 일부는 엉거주춤 일어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걸 지켜봤다.

 

 

 

정부 "'극장 애국가'는 애국심의 표현"…20여 년 이어져

 

 

이튿날 문공부는 애국가 상영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발표했다. "애국가의 올바른 보급과 존엄성, 애국심 고취를 위해" 애국가 상영을 극장연합회와 합의했다는 것. 또 이 조치를 읍면동 포함 전국 782개 모든 공연장으로 확대하니 관객은 일제히 일어나 경의를 표하라는 것이었다. 1분 40초 애국가 영화는 이후 20년간 국민의 일상(日常)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국기, 국가가 좋든 싫든 국민 의식에 또렷이 각인되는 역사가 새로 시작된 것이다.

 

처음 극장 애국가를 틀 때만 해도 그것이 오래가리라고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상영 1주일째인 3월8일 신민당 김수한 대변인은 "전국 극장의 '애국가 영화'는 정부여당이 관권을 악용해 벌이는 사전선거운동의 표본"이라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다. 4월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군인 출신 박정희 후보가 국민들의 안보의식과 애국심을 적절히 섞어 건드려 3선을 달성하겠다는 전략을 세운 것쯤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언론 역시 중요한 사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공부는 이미 전 해부터 '국기, 국가,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을 범국민적으로 계몽한다며 학교마다 지침을 적은 책자를 배포하고 있었다.

대통령을 국가(國家)와 동격시하고 국기, 국가(國歌)로 표상되는 애국심을 곧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로 인식하게 하는 원려(遠慮)였지만 이를 간과한 것이었다. 일부 언론은 국기와 국가에 대한 존엄성 고취는 때늦은 감이 있다며 환영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던 3월 15일, 애국가가 연주되는데도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20대 청년이 즉심에 회부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는 극장마다 경찰 임검석이 있었지만 일반인이 담배를 피우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즉심회부가 애국가 상영 때 기립하지 않은 괘씸죄인지, 아니면 극장 내 흡연 때문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 탓에 사람들은 애국가 도중 그냥 앉아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애국가 연주때 앉아있다 즉심
1971.03.15 [경향신문] 7면

 

 

 

그뿐 아니었다. 신문 독자투고란에는 애국가 앞에서 경건하지 못한 태도를 비판하는 글이 줄을 이었다. 애국가 연주 중 의자를 덜컹덜컹 밀거나 껌을 씹는 행위, 옆 사람과 잡담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것들이 모두 비애국적 행동이라고 매도하는 것들이었다. 일부는 영화 필름이 낡아 '비가 오는 것'이나 필름이 끊겨 애국가가 한 소절 떨어져 나간 걸 지적하며 극장이 돈벌이에 급급해 국민 애국심 고취엔 무신경하다고 비난했다. 하루 4, 5회 1년 내내 쉼 없이 애국가를 상영하는 극장으로서는 참 난감한 일이었다.

 

어쨌든 관객들은 차츰 극장 안에서 앞 뒤 옆 사람을 의식하게 됐다. 일어선 건지 뭔지 엉거주춤하거나 자세를 삐딱하게 해 애국가를 듣다가는 어떤 말을 들을지 몰랐다. 옆 사람이 입술을 움직이자 덩달아 애국가를 따라 불러 끝내 온 관객이 제창하는 일도 일어났다. 어느 열렬한 애국자는 "극장에서 '잠시나마 일어서서 애국하는 마음을 가다듬자'고 방송하는데 한국 사람이 오죽 나라사랑을 안 하면 극장에서, 그것도 잠시나마 애국하자고 말하겠느냐"고 일갈하기도 했다.

 

60년대와 달리 70년대 극장에선 에로영화와 호스티스 영화가 종종 상영됐다. 이런 작품을 건 극장에서 사람들은 심한 심적 갈등을 느끼기도 했다. 생각해보라. 장엄하게 휘날리는 태극기와 우렁찬 애국가 앞에 차렷! 자세로 서서 조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한 뒤 바로 반라의 여인들이 몸부림치는 장면을 숨죽여 보는 것을…. 일종의 코미디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애국가가 면제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 부조화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생각이 이상한 사람들로 치부됐다. 맑은 정신으로 애국가를 듣고 흐린 정신으로 음란물을 본들 문제가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애국가가 나오면 국기를 향해 어른도 아이도 '동작그만'

 

 

애국의 하기식
1978.10.06 [경향신문] 7면


애국가가 나오면 바로 부동자세를 취하는 일은 극장 밖의 일상생활로도 빠르게 퍼졌다.

오후 5시(겨울), 6시(봄, 여름, 가을) 국기 하강식 때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아도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기 시작했다. 모자를 쓰고 있으면 불경으로 간주됐다. 모자를 벗어 들고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붙여 경의를 표했다. 어린이들은 땅따먹기나 줄넘기를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배터리 나간 자동인형처럼 동작을 멈췄다. 국기 하강이 끝난 뒤 몰래 움직였느니 아니니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다.

 

72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은 "국기를 존중하는 일이 바로 애국이며 우리는 국기를 통해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훈시했다. 곧 이어 문교부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제정해 모든 행사에서 학생과 교원들이 암송해 국기에 대한 존경심을 높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초중고생은 대표 학생의 선창에 따라 암송하고 대학생은 마음속으로 암송하도록 하라고 친절한 지침도 덧붙였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국기가 오르내릴 때 경례하지 않는 이들은 나라와 등 돌린 사람으로 간주돼 배척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 종교적 이유로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학생, 종교인들이 구속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학생들 중 일부는 "국기에 대한 '주목'은 괜찮지만 '경례'는 교리 상 우상숭배가 분명하다"며 자신들을 제적한 학교 측을 상대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중고생은 물론, 초등학생들도 과도한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해 반발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언론은 물론, 사회의 그들에 대한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78년부터 국기 하강식 범국민적으로 시행 

  

 

76년엔 대법원이 경례 거부 학생에 대한 학교 징계는 당연하다고 판결했다. 체제비판을 안보위기로 호도하고 잇단 긴급조치로 원천봉쇄하며 국가주의로 치닫던 정부는 더욱 국기, 국가, 국화, 국가원수 등 국가상징물에 대한 숭배를 강화해 나갔다. 이 무렵 거리에서 국기 하강식의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데도 그냥 지나치는 사람이 있으면 초등학생조차 손가락질을 하며 “저 아저씨, 공산당인가 봐”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77년 10월 경향신문 사회면 톱은 '높아진 국기에의 존엄성-1분 멈춤 거리의 조국애'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보도했다.

"18일 하오 6시 시청 앞 등 서울 중심가에서 애국가 주악이 방송으로 울려 퍼지자 모든 시민이 국기게양대에서 서서히 내려오는 태극기를 향해 차렷 자세로 예의를 표했다.

시끄럽게 장난치며 어울려가던 한 떼의 고교생이 발을 멈추어 섰고 그 뒤로 노신사, 숙녀, 바삐 가던 시민들이 우뚝 제 자리에 서 요란하던 거리는 삽시간에 고요한 광장으로 변했다…" "한 시민은 국기 하강식을 통해 나에게 영광된 조국이 있음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뿌듯함이 있었다고 말했다."

 

유신정부는 그러나 '요란한 거리를 고요한 광장으로 변모시키는' 그 국기 하강식도 민간자율로만 하는 것은 못미더웠다.


높아진 「국기에의 존엄성」
1977.10.19 [경향신문] 7면

 

 

 

내무부는 78년 10월1일부터 국기 하강식을 범국민적으로 펴기로 하고 관공서와 공공단체 학교 등은 매일 의무적으로 실시토록 하는 지침을 전국 시도에 시달했다. 이 지침은 "국기 하강식을 볼 수 있거나 애국가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모든 옥외 국민은 그 자리에서 차렷 자세로 국기를 향해 경례하고 옥내에서는 차렷 자세를 취하되 태극기 쪽이나 애국가가 연주되는 방향을 향하도록" 규정했다.

 

71년 극장 애국가가 상영된 지 7년 만에 이제 거리의 애국가에 국민이 부동자세로 경례해야 하는 강제의무가 부과된 것이다. 대한민국 전 국토는 오후 6시, 전 국민 차렷! 경례! 구호 속에 1분 동안 일체의 동작을 멈춰야 했다. 획일과 일사불란을 목표로 하는 군대 못지않게 조국에 충성을 다짐하는 일치된 국민의 모습을 보며 국가지상주의자들은 쾌재를 불렀다.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는 어떤 작은 몸짓도 비애국적 꼬리표를 붙여 저항할 수 없게 한 제도는 유신정권 몰락 후에도 근 10년간 존속했다. 전두환 정권은 이를 오히려 강화하기도 했다.

80년대 초반 학생들은 학교 정문에서 한번, 조회 한번, 매 수업시간 한번, 종례 한번, 거리 국기 하강식 한번, 혹시 극장에 가면 거기서 또 한 번 등 하루 몇 차례씩 국기에 대한 경례를 표하며 살기도 했다.

 

 

 

 

1989년, 배경 설명 없이 애국가 방송·극장 애국가 폐지  

 

 

국기에 여미는 한마음 내일을 약속한다.
1982.12.28 [경향신문] 9면


그러던 1989년 1월 20일, 문공부는 "매일 오후 5시 또는 6시에 시행해오던 애국가 방송을 1월 23일부터 하지 않도록 방송사에 협조 의뢰하는 한편 이날부터 영화관에서의 애국가 상영도 폐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동안 이를 둘러싸고 국가지상주의, 병영주의, 획일주의, 개인의 자유침탈 등을 이유로 반대가 많았다거나 종교단체 중심으로 폐지 주장이 있었다는 배경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국기, 국가에 대한 일률적 경례는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경례거부로 구속되거나 학교에서 쫓겨난 이들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애국심을 건드려 국가주의를 확립하려 했던 사상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황지우 시인시는 극장 애국가 상영 당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취재차는 고속도로를 단 1분도 쉬지 않고 풀 스피드로 달렸다. 시계는 새벽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을 떠난 지 3시간이 넘었다. 회식을 하다 차출된 기자들은 술이 깬지 이미 오래였다. 전주 톨게이트를 나올 땐 기자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나 대형사고의 낌새가 거기선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전주∼이리(지금의 익산시) 도로엔 달빛만 교교했다.

 

 

 

“이리역에 다이너마이트 열차가 폭발했다!”

 

 

꽈광…고요한 밤을 뒤흔든 죽음의 폭음
1977.11.12 [동아일보] 7면


1977년 11월 11일 밤 9시가 조금 지난 시각. 신문사에 믿기지 않는 제보가 들어왔다. ‘북한군이 이리를 폭격했다! 피난민이 길을 가득 메웠다.’ 처음엔 장난 전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리 발 제보 전화는 숨넘어갈 듯 다급했다. 폭탄이 터진 건 분명했다. 시민들이 놀라 집에서 뛰쳐나온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디서, 왜, 어떤 폭탄이 터졌는지는 불분명했다.


밤 9시50분. 특별취재반 1진이 무조건 이리로 출발했다. 회사 근처에서 술 마시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차에 ‘실릴’ 때도 무엇 때문에 이리로 가는지조차 몰랐다.

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선 다음에야 카폰이 울렸다. “이리 역에서 다이너마이트 열차가 폭발했다. 일부 시민은 북한이 공습한 줄 알고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꽝-하는 폭음과 함께 폐허로 변해버린 도시

 

 

취재차가 이리 남쪽 목천포를 지날 때 드디어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속터미널 부근부터는 눈이 쌓인 것처럼 길이 훤했다. 도시 전체에서 유리가 깨지고 쏟아져 길을 온통 덮었고 그 위로 달빛이 쏟아졌다. 거리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불 꺼진 건물의 음영만 으스스하게 차를 내려다 봤다. 차 밑에선 빠작빠작 유리 밟히는 소리가 났다. 유령도시를 가는 기분이었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모두 이리 역 주변에 모여 있었다. 지붕은 완전히 날아가고 외벽만 남은 역사 근처에 임시 전등이 가설돼 있었다. 무너지고 찌그러진 집을 빠져나와 깜깜한 시내를 헤매던 사람들이 불나비처럼 역 주변에 모여든 거였다.

그들은 흙먼지가 잔뜩 묻은 이불을 덮고 있거나 입술이 새파래져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조건 취재를 시작했다. 아이들 셋을 뉘고 이불을 연신 덮어주는 아주머니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사고 순간이 어땠나요?” 머리는 물론 얼굴에 온통 먼지를 뒤집어 쓴 아주머니는 그러나 별 일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암시랑토 안해유. 우리 아그들쫌 보소, 이쁘게 자잔유.(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이들이 예쁘게 자고 있잖아요.)”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이불을 끌어올려도, 아주머니의 손길이 거칠게 움직여도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슬며시 아이들 손을 잡아봤다. … 아이들은, 셋 다 죽어 있었다.


엄청난 한밤의 날벼락... 순식간에 절반이 폐허로
1977.11.12 [경향신문] 7면

 

 

 

취재기자들도 넋이 나갔다. 거리에 나온 이들 대부분이 머리가 깨졌거나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세 아이처럼 거리에 그냥 눕혀놓은 시체도 적잖았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그냥 꽝-하는 폭음이 들리더니 건물이건 사람이건 풀썩 뛰어 올랐다 내려앉았고 후폭풍이 몰아쳤다. 튼튼한 역 건물이 거의 날아갈 정도로 센 폭발이었으니 주변 집들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역 반경 500m 이내 건물은 거의 다 부서졌다.

 

 

 

 

밝혀진 사고 원인은 간 큰 사내의 ‘촛불’

 

 

역에서 200m 떨어진 창인동 삼남극장에서 리사이틀을 하던 가수 하춘화 양은 극장 천정이 무너져 어깨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건물 더미에 깔린 하양은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들쳐 메고 극장 밖으로 뛰어나와 병원으로 옮긴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이주일씨 본인도 지붕에서 떨어진 벽돌에 머리가 깨졌다. 그럼에도 어린 하양부터 살려야 한다며 깜깜한 극장 안에서 그녀를 더듬어 찾아내 함께 탈출했다. 지붕과 2층 객석이 폭삭 주저앉은 삼남극장 안에서만 관객 6명이 깔려 숨졌다.

 

 

천막 모자라 맨땅서 새우잠
1977.11.14 [동아일보] 7면


역 부근 여관에서도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한 신혼부부는 여관에 날아온 기차 철골을 맞고 병원에 실려 갔다. 원광대 주최 국제학술회의에 왔던 외국인 40여명은 여관에서 쉬다 날벼락을 맞았다. 이들은 전쟁이 난 줄 알고 파자마 바람으로 뛰쳐나와 무조건 사람들을 따라 달렸으나 말이 안 통해 애를 태웠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우도 있었다. 어느 중학 3년생은 건넌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아버지가 “한국-이란 축구 중계를 보고 공부하라”고 해 안방으로 건너온 순간 기차 화통이 건넌방에 떨어졌다. 그날 밤엔 2대2로 비긴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축구 예선전이 열렸었다.


날이 밝으면서 사고 경위와 피해규모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 사고는 술에 취한 폭약 호송원이 다이너마이트 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고 자는 바람에 일어났다.

 

 

 

정말로 간 큰 사내가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한국화약(지금의 한화) 인천공장에서 출고한 다이너마이트 30톤, 뇌관 280kg을 가득 실은 화차는 목포로 가기 위해 이리 역 구내에 정차 대기 중이었다. 호송원 신00씨는 저녁식사 때 소주1병과 막걸리 1되를 마시고 화차로 돌아와 촛불을 켜놓고 닭털 침낭 속에서 잠을 잤다.

 

한참 자는데 갑자기 얼굴이 뜨뜻해졌다. 놀라 일어나보니 다이너마이트 상자에서 촛농이 떨어지고 상자에 막 불이 붙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침낭으로 불을 끄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불길을 더 키우는 역할을 했다.

 

그는 맨발로 화차 밖으로 뛰쳐나와 “불이야! 화차에 불났다!”고 외치며 철길을 내달렸다. 선로보수 요원이 이를 보고 “어떤 화차냐?”고 물어 화약열차 임을 알고는 “폭약열차에 불이 났다!”고 소리쳐 역구내 철도요원들이 너도나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검수원 7명은 불을 끄겠다며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다. 이들의 노력도 헛되이 화차는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9350동 가옥 파손, 이재민도 1만명 넘어

 

 

이 사고로 이리 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의 웅덩이가 파였다. 역구내에서만 기관사 철로요원 등 16명이 숨졌다. 전체 사망자는 59명, 실종 8명. 중경상자는 1350명이었다.

이리 시내 13,362채 가옥 중 9,530동이 파손됐고 이재민은 1만 명이 넘었다. 화약열차의 폭발로 역에 입환돼 있던 다른 화물도 다 쏟아지고 날아갔다.

12일 아침 웅덩이 주변에서 쌀 무더기가 발견됐는데 그 안에 주민등록증이 끼어 있었다. 쌀 화차의 화주로 추정되는 주민증 주인은 폭발과 함께 시신이 산산조각 난 것으로 추정됐다.


호송원 신 씨는 살아있었다. 그는 술이 덜 깬 채 역 건물 앞 벤치에 누워 있다가 방송국 기자들에게 발견됐다. 처음엔 폭발 피해자로만 여겼던 그가 폭약 호송원인 걸 알고 방송사 측은 그를 숨겨놓고 인터뷰 등 특종기사를 속속 내보냈다.


악몽의 폭음 순간 8Km달려…5일만에 합동위령제에
1977.11.16 [경향신문] 7면

 

 

 

이리 시와 경찰서에 설치된 특별 재난대책본부, 특별수사본부조차 신의 인터뷰 방송을 듣고 정확한 사고경위를 알게 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 방송사를 제외한 수많은 신문방송의 2백여 특별취재반 기자들은 낙종에 땅을 쳐야 했다.

 

물 먹은 걸 회복하려고 기자들은 수사본부를 들쑤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화약류 운송과 화차배정의 문제점을 찾아냈다. 화약류 같은 위험물은 화차에 싣는 대로 바로 목적지까지 운송하도록 돼 있었으나 사고가 난 화약열차는 40시간을 철로 위에 있었다. 영등포 대전 논산역에서도 2∼7시간씩 대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만약 이들 역에서 사고가 났다면 그 규모는 훨씬 더 커졌을 터였다.

 

  

 

화차 배정늑장, 비료화차 먼저 보내
1977.11.16 [경향신문] 7면


철도역의 화차 배정 직원들은 급행료를 챙기고 있었다. 목적지에 빨리 화물을 보내고 싶은 화주는 역 직원에게 뒷돈을 주어왔다. 아니면 늑장운송으로 화물 값이 절반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

여름 생선이나 제철 과일류 운송에 특히 부정이 많았는데 화약열차는 그저 마냥 대기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호송원 신 씨는 이리 역에서 20시간 이상을 대기하게 되자 화가 나 역 밖으로 나가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물론 제일 큰 문제는 한국화약에 있었다. 화약을 실은 화차 내부에는 호송원조차 탑승할 수 없는데도 이를 무시했다. 폭약과 뇌관은 함께 운송할 수 없는 점, 호송원은 총포화약류 취급면허가 있어야 하는 점, 화차 내에 화기를 들일 수 없는 점 등을 깡그리 무시했다.

 

 

 

또 호송원은 흡연자, 과다 음주자를 쓸 수 없는데도 신 씨는 술 담배를 다 했다. 평소 그의 주량은 소주 3병(당시 소주는 25∼30도였으니 요즘처럼 20도 이하 술이라면 5병정도 주량)이었다.

 

다이너마이트 상자에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잔 간 큰 사내 못지않게 한국화약과 철도청도 간덩이가 부은 기관임이 드러났다. 한국화약 사장을 비롯한 간부, 철도청 직원들이 속속 구속됐다. 한국화약은 회장 이하 전 직원 이름의 사과문을 내고 이리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이리는 변모했다. 그러나 당시 사망자는 돌아오지 않았고 다친 사람들은 요즘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폭발참사인 이리 사고는 바로 부정과 부패, 적당주의가 팽배한 당시 사회의 치부가 갑자기 폭발한 것과 별 진배가 없었다.

 

50대 이상에게 60∼70년대 학창시절을 물어보면 거의 비슷한 대답을 한다. 겨울엔 언제나 손이 트고 갈라졌다. 교복 소매로 코를 훔쳐 소매 끝은 항상 반질반질했다. '기계 충'으로 머리가 뭉텅 빠져 허연 분칠을 하고 다닌 아이들도 꽤 있었다(당시엔 이발 기계 바리캉에서 벌레가 옮아 머리가 헌다고 생각했다).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샜고 어쩌다 계란말이라도 싸간 날은 으쓱대다 막상 제가 못 먹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여름 조회 때 쓰러지는 학생은 또 왜 그리 많았는지….

 

 

 

‘3천만이 일사불란’ 고달픈 범국민운동  

 

 

그래도 그때가 그립다는 이들에게 사회생활은 어땠냐고 물으면 머리를 긁적인다. 말할 거리가 마땅치 않은 것이다. 그랬다.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삶은 언제나 고단했다.

 

 

 

그칠날 기약없는 서울의 출퇴근 전쟁
1973.07.13 [동아일보] 7면


학창시절 고통은 그나마 예쁜 추억으로 남았지만 진짜 먹고살기, 생활의 최전선에 나선 삶은 추억 만들기조차 사치인 삶으로 바뀌었다. 출퇴근도, 직장생활도 전쟁이었다. 산업화의 진군나팔 속에 기본권은 명맥만 유지했다. 경쟁하며 벌어먹고, 자고 깨기도 고단한데 직장이나 사회 정부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등을 떠밀었다. 들들 볶았다.

 

여기서 70년대식 생활퀴즈를 하나 내보자. 정답을 맞춘다면 당신은 사람을 모으고 이끄는 능력이 있는 편이다. 맞추지 못하면? 아마 대부분 그럴 테니 크게 괘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웃고 지나치면 된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렇다.

"아래 열거하는 예시문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끈이 있다. 그 끈은 무엇일까?" 예시문항 = 근면저축, 소비억제, 교육환경 정상화건전한 증권투자청소년선도, 병충해 방제, 수출 진흥, 혼·분식 실천, 화재예방, 독서 생활화, 수출 무드 조성, 기업 주식공개

 

 

 

감 잡기가 어려울 것이다. 예시문안이 들쭉날쭉한데다 경제 교육 생활 도덕관련 용어들이 두서없이 나열돼 있다. 70년대를 살면서 예시해놓은 이런 일을 직접 실천해본 사람이라도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끈을 찾기란 쉽지 않다. 누구의 푸념처럼 장학퀴즈 하듯 문제를 냈으니 출제자가 요구하는 정답을 딱 찍기도 난망일 터이다.

답은…, 범국민운동이다. 정확히 정부가 주도한 범국민운동의 목표다. 그것도 1970년 단 한 해 동안, 정부가 범국민운동을 통해 실천하도록 지시한 캠페인의 목록이다.

 

 

 

그러니까 5월 청소년범죄예방 및 문제소년 선도 범국민운동(내무, 문교부 합동) 8월 병충해방제 범국민운동(농림부), 12월 국산품 애용 및 밀수품 근절을 위한 범국민운동(국무회의 의결) 같은 식이다. 이런 범국민운동이 벌어지면 3천만 국민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다.

 

70년대 내내, 1년에 10여 차례 이상 벌인 이런 범국민운동은 대부분 정부와 관변단체가 주도했다. 대통령이 직접 지시하거나 대통령 눈에 들려는 관료들이 아이디어를 낸 것들이었다. 문제는 이런 운동이 단순 캠페인에 그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말 그대로 범국민, 남녀노소 모두가 군말 없이 따라야하는 생활지침이요 강제였다.

요즘 범국민운동이라면 대개 정부정책과 따로 가는 사안이기 십상이고 동조하건 말건 개인의 자유지만 당시엔 그럴 수 없었다. 그 운동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동원하느냐에 따라 직장, 학교, 기관의 점수가 달라졌다.


티끌 모으는 고사리 손들. 어린이 저축
1971.06.10 [매일경제] 7면

 

 

 

 

저축 생활화 · 절미 · 혼분식 장려..

 

 

이제 한번 기억을 더듬어보자. 저축 생활화 범국민운동이 벌어지면 초중고교 모든 학급에서는 전원이 저금통장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담임은 매일 종례시간에 학급의 저축성적, 교내 석차, 저축 부진 학생을 찍어 독려했다. 등록금도 제때 내기 어려운데 저금통장은 살찌워야만 했다. 아니면 벌을 섰다.

 

 

 

경기여고 2천 학생 혼·분식 100%
1971.12.17 [경향신문] 6면


절미(節米·쌀 아끼기)범국민운동 때는 쌀가마니를 갉아먹는 쥐를 잡아 학교에 제출했고 기생충 박멸 범국민운동(70년 4월) 때는 전국 7백30만 학생과 군인 직장인에게 일제히 구충약을 먹였다. 학생들은 변에 섞여 나온 죽은 기생충을 골라내 성과물로 내놓았다.

 

혼·분식 범국민운동 때는 도시락밥 보리 분량이 규정에 맞지 않으면 식사당번으로 차출됐다. 계속 혼식 비율을 어기면 부모를 소환해 각서를 쓰게 하고 정부시책을 따르라고 요구했다.

 

식당에선 업주와 손님 사이에 보리가 너무 많이 섞였느니 아니니 승강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해외동포 모국방문을 위한 범국민운동에 기업들은 눈치껏 돈을 내야 했고 애꿎은 학생들도 저금통을 털어 모금액을 맞추느라 애를 썼다. 채권 생활화 범국민운동 당시는 각종 경조금을 현금 대신 소액채권으로 내기도 했다.

 

 

 

 

범국민운동 동참하지 않으면 사회적 '왕따'

 

 

정부가 국민생활 향상을 위해 운동을 벌이고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게 뭐가 문제냐는 시각도 있겠다. 그러나 하던 일도 방석 깔아주면 하기 싫고 좋은 음식도 계속 입에 넣어주면 목에 걸리는 법이다. 하물며 생업에 찌든 사람들을 1년에도 수십 번, 온갖 명목의 범국민운동으로 불러내 간섭하고 이래라 저래라 일을 시킴에 있어서랴.

한 달이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일을 만들어 시키고 어기는 사람에겐 온갖 불이익을 안기니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정부의 손발이 되어갔다. 어쩌면 이처럼 지시에 순응하는 국민성을 바라 쉬지 않고 범국민운동을 기획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이런 범국민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적극적 반대자야 물론 긴급조치나 각종 법의 올가미를 씌웠다. 소극적 반대자는 사회에서 '왕따'시키는 전략을 썼다.

 

79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 관련자들에게 직접 '근검절약 범국민운동' 역행사례를 예시하며 경고한 '말씀'을 한번 들어보자.

 

"한국 사람들은 웬 입이 그렇게 예민한지 모르겠다. 쇠고기도 한우고기만 찾고 쌀도 일반미만 먹으려든다. 대다수 국민은 안 그러는데 일부 계층만 그런다. 물가안정, 소비절약 운동에 역행하는 사람들은 신문이나 방송에 이름은 물론 사진까지 공개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


시급한 「감염원 제거」
1972.02.17 [매일경제] 6면

 

 

 

자, 이런 식이니 누가 감히 '각하'의 정부가 주도하는 범국민운동에 태클을 걸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뭉쳐 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박대통령은 그게 더 유별났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를 좋아했고 모든 참가자가 군대에서처럼 맹세하고 선서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가 범국민행사에서 언제나 즐겨 쓰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지금 이 시각을 기해 도시와 농촌,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전 국민이 XX범국민운동에 동참하자." 이런 선포가 있고 난 다음에 그걸 어기는 사람은 대통령의 통치행위에 거역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두들겨 맞아야만' 하는 거였다.

 

 

 

 

범국민운동도 유신정권 말기엔 임계점

 

 

유신정권이 황혼에 들어선 1979년, 범국민운동의 시민동원은 거의 임계점에 이르렀다. 3월 3일 '안 버리기' 범국민결의대회에는 전국 5만9천개 기관에서 6백20만 명이 참여했다.

26일에도 비슷한 인력이 동원돼 '비닐 공해 추방' 범국민운동을 벌였다. 행사내용도 대동소이했다. 직장대표, 주민대표들이 나와 결의문을 낭독하고 실천선언과 선서를 한 다음 환경 정화 운동에 나서는 거였다. 참석자 대부분은 어슬렁거리며 시간을 때우려했지만 완장 찬 이들이 돌아다니며 '불성실 운동원' 명단을 적는 바람에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독서인구 확대 운동
1970.09.22 [동아일보] 5면


범국민운동은 구호뿐 아니라 세부지침도 구체적이었다. 79년 2월 제2무임소장관실이 내린 소비풍조 건전화를 위한 범국민운동 실행, 단속지침은 해선 안 될 일을 모두 9개항으로 적시했다.

이런 식이다. ①호화혼수 ②호화 생일잔치 ③초고가 장신구 보석과시 ④외국산 최고급품 선호과시 ⑤퇴폐적 호화요식 접객행위 ⑥사치 자극적 과대광고 ⑦TV 드라마 호화 사치 배경 ⑧비정상 과외공부 ⑨일확천금 노리는 투기행위…

내무부는 안 버리기 운동에서 꼭 안 버려야할 품목도 적시했다. ①껌 담배꽁초 비닐봉지 빈병 깡통 ②침 ③연탄재 쓰레기 폐수 유독물 ④놀던 자리 치우기 ⑤등산 때 음식물 찌꺼기 ⑥성냥불 ⑦꽃나무 안 꺾고 안 버리기…. 

지시들은 처음엔 계몽용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곧 단속용이 되었다. 그리고 또 머잖아 그걸 어겨 구속되는 사람, 즉심에 회부되는 사람이 생겨났다. 피곤하고 짜증나더라도 정부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는 것이 여러모로 좋았다.

 

 

 

일부 분석가들은 범국민운동 러시가 새마을운동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1971년 새마을운동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런저런 이름의 범국민운동은 봇물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기획하면서, 나아가 유신을 생각하면서 '국민정신 개조론'을 다듬었고 그 구체적 실행의 키로 숨 돌릴 새 없는 범국민운동을 만들어냈다는 지적이 더 설득력 있다.

물론 중간에 등장했다고는 해도 새마을운동이 범국민운동의 정점에 서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새마을운동을 우리는 곧 '그 시절 그 이야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프로야구 출범 28년. 지금 삼미 슈퍼스타즈는 없다. 1985년 6월 21일 전기리그 마지막 경기(인천 롯데전)를 끝으로 문을 닫았다. 모기업의 자금 압박으로 청보식품에 매각된 탓이다. 그러나 삼미 슈퍼스타즈는 지금도 인천, 그리고 경기와 강원도 팬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3년 5개월 동안 120승 211패 3무(승률 .363)라는 기록을 남긴 채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지만, 이제는 그 숱한 이야기들 하나 하나가 전설이 됐다.

 

 

 

프로야구 5번째로 출범한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3월 27일 하오 2시 30분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에서 프로야구가 마침내 막이 올랐다. 한국 스포츠에 새로운 장을 연 이 날의 개막식은 MBC-TV가 4천여 만원의 제작비를 들여 마련한 화려한 개막 쇼로 흥을 돋운 뒤 2시25분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대구 경북지역을 연고지로 한 삼성 라이온즈와 서울 지역을 연고지로 한 MBC 청룡이 경기에 들어 갔다.

3만여 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 넣은 이 날의 경기는 이만수(삼성)의 프로야구 첫 홈런에 이은 연장 10회말 이종도(MBC)의 역전 만루 홈런으로 대미를 장식, 서울운동장 야구장을 찾은 3만여 관중들에게 프로야구의 참 맛을 만끽했다. 그러나 인천·경기·강원을 연고지로 한 삼미 슈퍼스타즈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에 열중했다. 개막 경기 다음 날(3월 28일) 대구에서 있을 첫 경기에 대비한 훈련이었다.

 

 

 

삼미 슈퍼스타즈 훈련 현장
1982년 2월 19일 [경향신문] 9면


삼미 슈퍼스타즈는 1982년 2월 5일 하오 3시 인천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창단식을 갖고 프로야구 5번째 팀으로 정식 출범했다. 이 때의 선수단은 박현식(朴賢植) 감독을 정점으로 이선덕(李善德), 이춘근(李春根)이 코치를 맡았다.

 

선수는 모두 23명이었다. 인호봉(印浩鳳) 이동주(李東周) 박경호(朴敬浩) 김동철(金東喆) 이하룡(李夏龍) 한상연(韓尙演) 김재현(金在峴) 등 7명이 투수를 맡았고 금광옥(琴光玉) 김진철(金鎭喆) 최영환(崔榮桓) 등 3명이 포수 마스크를 썼다.

야수로는 김구길(金邱吉·1루수), 김경남(金慶男·1루수겸 좌익수), 이철성(李哲聖) 장정기(張貞起·이상 2루수), 조흥운(趙興雲·1루수겸 3루수), 한인철(韓仁哲), 이찬선(李燦瑄·이상 3루수), 허운(許云·3루수겸 유격수), 송경섭(宋慶燮·유격수). 외야수로는 김무관(金武寬), 김호인(金浩仁·이상 우익수겸 좌익수), 양승관(梁承琯·중견수), 문주모(文柱模·우익수) 등 13명이 뛰게 됐다.

 

 

 

삼미는 창단식을 끝낸 3일 뒤인 2월 7일부터 진해에서 전지훈련을 시작했다. 2월 10일에는 전력 보강 차원에서 감사용(甘四用)을 영입했다.

77년 약관 20살에 인천체고 감독까지 역임한 감사용은 삼미특수강이 자랑하는 직장야구 에이스였다. 하지만 전지훈련이 끝날 때가 가까워질 수록 박현식 감독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지기만 했다. 좀처럼 입을 열지도 않았다.

삼미의 진용을 훑어보면 경기를 치르기 위해 숫자를 맞춘 형상이었다. 그 흔한 국가대표 출신이 한 명도 없었다. 우선 마운드가 허약했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하는데 한 경기를 책임지고 던져줄 에이스가 없었다.

 

 

 

이선덕 코치는 인호봉을 첫 손에 꼽았다. 그래도 자신이 없었던지 김재현 박경호에 이하룡까지 들먹였다. 이하룡은 80년 제2회 대붕기고교대회에서 서울고를 상대로 No hit No Run을 수립한 투수였다.

 

삼미의 프로야구 데뷔 전은 개막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가운데 대구에서 열렸다.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MBC에게 7-11로 역전 패를 당한 삼성은 선발 투수로 황규봉(黃圭奉)을 내세웠다.

삼미는 예상대로 인호봉을 등판시켰다. 황규봉은 경륜이나 기량에서 인호봉을 압도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기교파인 인호봉은 삼성을 갖고 놀았다. 7안타에 볼넷 9개를 내줬지만 3점으로 9이닝을 막았다. 반면 삼미는 금광옥 김경남 조흥운 등 3명을 제외한 7명이 황규봉과 권영호(權永浩)로부터 8안타를 터트려 5점을 뽑았다. 누구도 예상 못한 사건이었다.


삼미, OB에 작년 전패 설욕
1983년 4월 13일 [동아일보] 8면

 

 

 

 

역전패의 명수가 된 삼미 슈퍼스타즈 

 

 

삼미는 데뷔전에서 삼성을 꺾은 사건은 기적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다음 날(3월 31일) 1-5로 패한 삼미는 전 시즌 통틀어 삼성에게 2승14패라는 전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 전적은 양호한 편에 속했다. OB에게는 16전 16패, 한 팀에게 전패를 당하는 참혹한 기록을 남겼다. 뒷문이 약하다 보니 역전패를 당하는 일은 부지기 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경기가 4월 25일 춘천에서 열린 OB전이었다. 감사용을 선발로 내세운 삼미는 1회말 선우대영, 2회말 박상열(朴相悅)을 두들겨 8점을 뽑았다. 대세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3회초 4점, 4회와 5회초에 각각 3점씩 6점을 허용한 끝에 11-12로 역전 패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두 팀은 진기록도 쏟아냈다.

한 경기 최다인 38안타가 터졌다. OB가 21안타를 날렸고 삼미도 17안타를 터트렸다. 특히 삼미는 2회말 7안타를 터트려 1이닝 최다 안타를 기록했다. 또한 OB의 김우열(金宇烈)이 4타수 4안타를 터트리자 삼미의 장정기는 한 수 더 떠 5타수 5안타로 응수했다. 이날 쏟아진 23점도 한 경기 최다 득점이 됐다.

그런데 안타가운 일도 벌어졌다. 4월 27일 삼미는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박현식 감독을 단장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이선덕 코치로 감독대행으로 앉혔다. 1월 8일 삼미그룹 김현철(金顯哲) 회장이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불러 들여 지휘봉을 맡긴 '역전의 용사' 박현식 감독도 패배 앞에선 허약했다. 박 감독은 13경기에서 3승10패를 당한 끝에 퇴진, 최단명 감독이라는 불명예까지 안았다.

 

 

 

삼미 방망이에 늘씬 맞은 곰
1982년 6월 3일 [동아일보] 8면


삼미는 감독이 바뀌어도 여전했다. 오히려 한 수 더 떴다. 6월 12일 부산(구덕)에서 열린 삼성전에서는 오대석에게 프로야구 사상 첫 사이클 안타를 허용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1회초 7점을 헌납하기 시작한 삼미는 5회말 가까스로 1점을 얻어 1-20으로 영패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3명의 투수가 등판, 안타 27개를 허용해 4월 25일 OB가 춘천에서 세운 한 경기 최다 안타와 최다 득점을 단숨에 깨버렸다.

 

삼미는 연패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6월 26일 부산(구덕) 롯데전에서 3-13으로 패한 삼미는 7월 21일 인천에서 해태에 4-5로 패할 때까지 11연패를 기록, 프로야구 사상 첫 최다 연패의 흔적을 남겼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던 삼미는 80경기에서 15승65패(승률 .188)라는 꼴찌의 전적을 남기고 프로야구 원년을 마감했다.

 

 

 

 

기적을 몰고 온 재일동포 투수 장명부

 

 

1982년 12월 26일 낮 삼미에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장훈(張勳·총재 특보)이 일본 프로야구 히로시마(廣島)에서 은퇴한 장명부(張明夫)와 한신(阪神) 타이거스에서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주동식(朱東植)과 함께 귀국한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전력 보강과 야구 활성화의 일환으로 추진한 재일동포 영입이 결실을 본 것이다. 장명부는 귀국 즉시 삼미의 허형(許炯) 사장을 만나 입단에 따른 구체적인 조건을 협의했다. 그러나 입단 계약은 해가 바뀐 83년 1월 18일 마쳤다. 계약금 1,500만엔(약 4,500만원), 연봉 2,500만엔(약 7,500만원)에 부대 비용(세금, 아파트, 승용차 제공) 6,000만원 등 1억8,000만원이었다.

장명부는 확실히 국내 선수들의 머리 끝에서 놀았다. 자신을 들어내지 않았다. 장명부는 시범경기에 두 차례 등판했다. 11이닝을 던져 17안타를 얻어 맞은 끝에 11점을 내줬다. 매 이닝 1점을 내준 셈이다. 형편없는 투수 같았다. 그러나 이런 장명부도 시즌이 시작되자 표정부터가 달라졌다.

 

 

 

삼미의 첫 경기이자 장명부의 데뷔 전은 4월 3일 부산(구덕)에서 이루어졌다. 장명부는 7이닝 동안 29타자들을 상대로 삼진 7개를 잡으며 6안타 4볼넷으로 1실점, 10-4로 첫 승리를 이끌었다. 시범경기와는 달리 장명부는 전력 투구를 했다. 특히 외각을 찌르는 절묘한 컨트롤이 돋보였다. 볼은 빠르지 않았지만 능수능란하게 완급을 조절,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추는데 애를 먹였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전혀 다른 장명부를 보는 것 같았다.


삼미는 신이 났다. 5월 31일 현재 21승12패. 2위 해태(17승1무13패)를 2.5게임 차로 제치고 선두를 달렸다. 50경기를 치르는 전기리그에서 30승만 채우면 우승을 차지, 한국시리즈에 진출한다고 봤다. 앞으로 9승이 목표였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뜻밖의 사건이 터졌다.


너구라 장명부의 전력 투구
1985년 5월 4일 [경향신문] 9면

 

 

 

 

김진영 감독 폭력행위로 구속되다

 

 

6월 1일 밤에 열린 잠실 MBC전에서 삼미는 8회초 2사 만루의 득점 찬스를 잡았다. 타석엔 6번 최홍석(崔洪錫). MBC가 1-0으로 리드하고 있었다. 안타 한 방이면 역전이었다. 투수는 노련한 유종겸(柳種兼). 최홍석의 방망이가 힘 차게 돌아갔다. 좌익 선상에 떨어진 적시타였다. 3루 주자 이영구(李英求)에 이어 2루에 있던 이선웅(李善雄)도 홈을 밟아 단번에 2-1로 역전시켰다.

 

그러나 김동앙(金東昻) 주심은 이선웅의 득점을 인정치 않았다. 이선웅이 홈 플레이트를 밟기 전에 1루 주자 김진우(金鎭雨)가 3루에서 태그 아웃을 먼저 당했다는 거였다.

 

 

 

삼미 김진영 감독 구속
1983년 6월 3일 [동아일보] 11면


김진영 감독이 뿔이 났다. 김동앙 주심에게 달려가 강하게 어필을 했다. 그러나 김동앙 주심은 요지부동이었다. 덕 아웃으로 돌아가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감정이 격해진 김진영 감독은 욕설을 퍼부으며 모자를 벗어 그라운드에 내동댕이친 뒤 머리로 김동앙 심판의 배를 받아 넘겼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자 유니폼을 풀어 헤치며 폭언을 토해 댔다. 이를 보다 못한 경기 감독관(이기역 심판위원장)이 백 스톱 밖에서 자제를 당부했다. 이번엔 감독관의 넥타이를 잡아 끈 뒤 몸을 날려 다리를 찼다.

 

순식간에 일어났다 끝났다. 그렇지만 경찰이 손을 댔다. 강동경찰서는 김 감독을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입건, 조사를 마친 뒤 부산경기 출전을 위해 밤 11시 풀어줬다. 

 

 

 

피해자로 불려갔던 김동앙 주심과 이기역 감독관이 "김 감독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말해 잠잠히 끝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강동경찰서는 "김진영 감독을 구속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6월 2일 하오 4시쯤 형사 2명을 부산으로 보내 김 감독을 연행토록 했다.

 

 

 

이 날 하오 9시 50분쯤 부산 구덕구장에 도착한 형사들은 롯데전이 끝난 직후 덕 아웃에 들이닥쳐 김진영 감독의 오른 팔에 수갑을 채웠다. 이 때 삼미 선수들과 보도진이 몰려들어 20여 분간 실랑이가 벌어졌다. 형사들은 곧 수갑을 풀었다. 그러나 김 감독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하는 것은 막지를 못했다.

김진영 감독의 구속은 6월 3일 상오 9시 반에 집행됐다. 야구경기 중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감독이 구속된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김 감독이 검찰에 송치된 것은 구속 4일 만인 6월 7일이었다. 상오 8시 두 손이 수갑에 채워지고 포승에 묶여 일반 피의자 3명과 함께 서울지검 동부지청으로 송치됐다.


김진영 감독의 구속은 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6월 3일부터 이선덕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이끌었지만 상승 무드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삼미 김진영 감독의 격렬한 항의
1983년 6월 3일 [동아일보] 8면

 

 

 

6월 26일로 끝난 전기리그에서 삼미는 27승23패(승률 .540)에 그쳐 해태(30승1무19승, 승률 .612)에 이어 2위에 그쳤다. 그러나 장명부는 17승7패 1세이브(방어율 2.34)로 승승장구했다.

 

장명부는 9월 26일 자신의 60경기 등판이자 시즌 마지막 경기인 해태전에서 5-0으로 승리해 30승16패6세이브로 최다 출전에 최다승 기록을 남겼다. 그 뿐이 아니었다. ▲시즌 최다 선발(44) ▲시즌 최다 완투(36) ▲시즌 최다 투구횟수(427⅓이닝) ▲시즌 최다 투구수(5,886) ▲시즌 최다 피안타(388) ▲시즌 최다 볼넷(106) ▲시즌 최다 탈삼진(220) 등도 남겼다.

 

 

 

 

청보 핀토스가 된 삼미 슈퍼스타즈

 

 

김진영 감독은 시즌이 끝난 10월 4일 팀에 복귀했다. 6월 7일 검찰에 송치됐던 김 감독은 6월 11일 벌금 100만원을 물고 약식 기소로 풀려났었다. 그러나 삼미는 자숙하는 의미에서 김 감독의 팀 복귀를 묶어 놓은 채 풀지 안았다. 사실은 갈아치울 속셈이었다. 6월 30일 백인천(白仁天)을 코치겸 선수로 영입한 게 그것이었다. 김진영 감독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져 의혹을 키웠다.

 

 

 

삼미구단, 청보 식품서 인수
1985년 5월 2일 [매일경제] 12면


백인천은 삼미에 올 수 없는 몸이었다. 4월 26일 MBC가 가정문제를 들어 감독겸 선수에서 계약을 해지한 상태였다. 이런 백인천을 6월 27일 김현철 구단주가 강남고속터미널 뒤에 있는 궁전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났다. 삼미 행에 따른 흥정을 시작했다. 6월 29일에는 삼미가 MBC에 이적료(800만원)를 지불, 6월 30일엔 코치겸 선수로 영입했다. 모든 게 번개불처럼 빠르게 진행됐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안 김진영 감독은 7월 2일 허형(許炯) 사장에게 사표를 제출하는 소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백인천도 오래 가지 못했다. 8월 23일 강서경찰서에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감독이 구속된 지 2달 20일 만에 이번에는 새로 온 코치가 '간통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한 행위'로 구속되자 구단도 가만있지 않았다. 9월 2일 무기한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려 감독 설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83년은 삼미가 천당과 지옥을 오간 한 해였다. 하지만84년은 좋아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더 나빠졌다. 전기리그에서 18승30패2세이브로 꼴찌를 한 삼미는 후기에서도 20승29패1세이브로 꼴찌를 면치 못했다. 장명부도 13승20패7세이브에 머물러 벌금 무느라 정신 없었다. 그러나 선수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구단 매각 설이었다.

 

 

 

이 때문이었을까? 삼미는 85년 3월 30일 부산 개막전에서 롯데를 5-1로 꺾은 뒤 3월 31일부터 4월 28일까지 팀 최다 18연패 행진을 계속했다. 그런데 연패 탈출은 4월 29일 김진영 감독이 구단의 권유를 받아들여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복귀 조건부로 휴가를 떠난 다음 날 이루어졌다.

신용균(申鎔均) 코치가 감독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은 4월 30일 삼미는 인천에서 열린 MBC전에서 최계훈(崔桂勳)의 역투로 완봉승(4-0)을 올려 연패의 사슬을 끊었다. 하지만 이런 기쁨도 잠시였다.

 

5월 1일 삼미의 매각 소식이 전격적으로 발표됐다. 청보식품이 70억원에 인수했다는 거였다. 청보식품은 84년 5월 설립된 풍한방직 계열의 라면 제조 회사였다. 삼미의 매각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청보 핀토스 등록 마쳐
1985년 6월 19일 [매일경제] 12면

 

 

 

82년부터 매각 설이 나돌았다. 특히 84년 5월 삼미그룹이 자금난을 겪으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돌았다. 하지만 청보식품이 인수하리라곤 누구도 짐작을 못했다.

5월 3일에는 청보식품이 구단 명칭을 '청보 핀토스'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6월 29일까지 사용하고 후기리그가 시작되는 7월 1일부터는 '청보 핀토스'를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삼미 슈퍼스타즈의 명칭은 6월 21일 인천에서 벌어진 롯데와의 고별전을 끝으로 역사 속에 전설처럼 묻혔다.

한해 겪은 괴로움을 다 잊자며 갖는 모임이 오히려 더 큰 고통을 안기곤 한다. 바로 망년회다. 망년회가 일본식 한자어 표현이라 지금은 송년회, 송년모임으로 고쳐 쓰지만 70~80년대는 신문에도 망년회라고 썼다. 12월은 망년회로 시작해 망년회로 진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망년회 문화는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았다. 웬만한 직장인이라면 며칠 겹치기 출연도 불사해야 하고 2차, 3차 술을 마시며 끝없이 돌다보면 결국 인사불성으로 이어져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숙취로 다음날 일을 망치는 것 역시 보통 문제가 아니다.

 

 

 

12월이면 발령? 망년회 주의보!

 

 

옛날신문들은 12월이면 어김없이 '망년회 주의보'를 발령했다. 친교를 다지고 잃어버린 대화를 복원해야 할 망년회가 끝내 술이 술을 먹는 광란 파티로 변질돼 정말로 잊고 싶은 망년회가 된다는 얘기다.

1971년 동아일보 칼럼 '횡설수설'은 직설적인 훈계로 망년회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서구와 일본의 망년회 역시 흥청대고 광란과 소음의 도가니가 되기도 하지만, 그들과 한국의 여건은 다르다는 논리로 '먹고 마시기 일변도의 망년회'는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구, 일본인) 즐겁고 들뜰만한 이유가 있다. 두둑한 보너스에 유급휴가가 곁들여 있고 1년의 가계는 적자 아닌 흑자로 나타났으니 연말을 흐뭇이 지내고 보람찬 새해를 맞이하게끔 돼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어떠한가. 없는 돈 털어서라도 먹고 마시려 든다. 망년회는 그저 현실 도피가 아니면 자포자기적이다. 1년의 반성도 없고 새해 설계도 없다."


낯뜨거운 "특급호화"망년회·동창회·사은회
1978.12.22 [경향신문] 7면

 

 

 

한마디로 정리하면 '망년회 망국론'이다. 번 것도 없고 즐길 여유가 없는데 먹고 마시며 쓰기만 해서 될 일이냐는 주장인 것이다. 칼럼은 한걸음 더 나가, 그 해의 경제상황을 적시하며 흥청망청 망년회를 추방해야 할 논거를 댄다. "모두가 불경기에 허덕이고 있다. 시중에 돈이 나돌지 않는다. 중소기업은 빼도 박도 못한 채 자금난에 허덕이고 주부들은 가계부를 앞에 놓고 한숨만 내쉰다. 그런데도 거리는 어김없이 연말풍경에 들어섰다. 어쨌든 간에 일단 들떠나 보자는 심산인가. 안될 말이다."

 

그 해는 사실 정치 경제 사회상황이 모두 엉망이었다. 8월 실미도를 탈출한 공군 특수부대원들이 서울시내까지 진출해 총격전을 벌였다. 10월에는 학원데모가 격렬해져 위수령이 발동됐다. 12월25일 크리스마스엔 명동 대연각 호텔화재로 1백50명이 넘게 불타 숨지거나 추락사하는 최악의 참사가 일어났다. 그리고 12월27일 새벽, 공화당은 보위법을 국회별관에서 변칙 처리했다. 도무지 흥청망청 망년회를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연말 분위기는 너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추방해야 할 3악' 과도한 선물, 연하장, 망년회?

 

 

서울 새 풍속도. 조용히 보내기
1970.12.23 [경향신문] 7면


그러나 나라경제와 서민경제가 활기를 띤 해에도 신문들은 여전히 망년회 주의보를 발령했다. 어떤 신문은 세모(歲暮)에 추방해야할 3악으로 과도한 선물, 연하장과 함께 망년회를 들었다.

다른 신문은 망년회는 한해를 곰곰 생각하는 '상년(想年)', 지난 잘못을 회개하는 '회년(悔年)', 한번 저지른 잘못은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고 명심하는 '명년(銘年)', 묵은해에 쌓인 감정의 찌꺼기를 해소하는 '해년(解年)'이 돼야 한다며 그런 창조적 정신을 갖지 않는 망년회 모임은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일갈했다.

연일 이어지는 망년회로 한 달 내내 술에 취해, 조는 듯 일하는 듯 비몽사몽 속에 회사생활을 하므로 생산성이 저하된다고 개탄하는 신문도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망년회 추태와 탈선이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한 신문은 없었다. 다만 에너지 파동이 엄습한 73년, 당국은 탈선망년회 일제 단속에 나섰는데 당시 단속지침을 보면 퇴폐의 유형을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서울시가 경찰과 함께 설치 운영한 합동 지도단속 본부가 내린 중점단속 대상은 장발족·고고 꽈배기 춤·음화 음서 배포 구입·클럽 나체쇼·시간외 영업 숙박업소·독탕 음란행위·도박 등이었다.

 

 

 

이 정도로 '광란'이란 표현을 쓰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러니 언론은 구체적 탈선을 고발했다기보다 예상되는 퇴폐와 방종, 무질서에 미리 호루라기를 불어제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별일 없이 연말연시가 지나면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였다는 등 병 주고 약 주기 식 기사를 내보내곤 했다. 다만 언론의 호루라기 먼저 불기는 오래 되긴 했으나 실제 광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상 최악(?)의 64년 크리스마스"

 

 

경향신문은 1964년 크리스마스이브가 '역사상 최악의 무질서와 광란의 밤'이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70, 71년 연말에 잇달아 '광란을 벗어나 참된 축제로 연말연시를 보내자'는 기획기사를 싣고 64년의 광란 실태를 생생하게 보도했다.

 

"사상 최악의 크리스마스는 64년이었다. 65년 10월 서울시내 산부인과병원에 그 어느 해, 어느 달보다 많은 신생아가 태어났던 사실을 말하는 인사들은 '나라의 수치'라며 돌이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차일드들.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하오 8시부터 명동 충무로 종로 등 번화가에는 35만의 인파가(주로 청소년들) 몰려들었고 이날 밤 명동에서만 3백75명의 청소년이 추행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었다. 뿐이랴. 뿔피리로 기성을 내며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기괴한 복장, 가면까지 쓰고 아녀자들을 놀라게 하고 희롱하기도 했다."

신문은 그 해에는 청소년뿐 아니라 기성세대의 탈선도 정도를 넘어섰다고 지적했다.


광란 벗어나 참된 축제로 X머스와 새해맞이
1971.12.24 [경향신문] 7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올 나이트란 말이 유행했던 이때에는 청소년 못지않게 기성세대들도 댄스(요정)파티다, 노름판이다, 술타령이다 해서 시내 유흥가, 서울근교의 호텔 여관 등지에서 밤새우며 먹고 마시는 등 타락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음악 감상실, 다방, 살롱 등은 어디나 담배연기로 자욱했고 한창 유행하던 발광적 트위스트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대는 속에서 더벅머리 단발머리 청소년들이 음탕하기까지 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70년대 '연말 검소하게 보내기' '가족과 함께 명절 보내기' 캠페인

 

 

70년대에는 64년 같은 난장판은 일어나지 않았다. 언론은 매번 경고음을 발했다가도 연말연시가 지나면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 만족을 표하곤 했다. 청소년 선도단체, 부녀회, 종교단체 등은 앞장서 '연말 검소하게 보내기' '가족과 함께 명절 보내기' 캠페인을 벌였고 시민들은 대부분 그걸 따랐다. 그러나 흥청대진 않더라도 친구 동료 가족과 함께 한 해를 마감하는 망년회는 12월이면 어김없이 이어졌다. 술 취해 비틀거리며 구세군 자선냄비 앞을 지나는 직장인의 서글픈 뒷모습도 여전했다.

 

통금이 있던 시절, 그것이 해제된 하루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또 행동으로 옮겨보았던 청소년들도 그날이 지나면 일상으로 돌아왔다. 직장인들은 숙취로 깨질 듯 아픈 머리를 싸안고 다시는 과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퇴근 후엔 또 다음 망년회에 어김없이 참석했다. 망년회는, 그 해엔 힘들고 괴로움의 연속이었지만 지나고 나면 대개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1976년 12월의 명동은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 명동성당 언덕에서 아랫길 명동극장 쪽으로 훑어내리 듯 칼바람이 몰아치면 사람들은 진저리를 치며 코트 깃을 여몄다. 달랑 교복차림에 뺨이 빨갛게 물든 여학생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이까지 덜덜 마주쳤다.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싸매고 눈만 내놓은 사람들도 뛰다시피 갈 길을 서둘렀다.

 

 

 

자선냄비 속 돈 훔치는 '얌체도둑' 제보에 명동으로

 

 

길가 크리스마스트리는 벌써 몇 개 째 바람에 나뒹굴었다. 레코드 가게에서 틀어놓은 캐럴송도 추위에 움츠러들었는지 신명이 나지 않았다.

막 어둠이 내리려는 길가에서 그나마 의연한 자세를 갖춘 건 남녀 한 쌍 구세군뿐이었다. 연신 손 종을 울리며 자선냄비 곁에 선 이들은 실제 칼바람 추위보다 사라진 온정이 더 추운 듯 했다. 메아리도 없는 "불우이웃을 도웁시다! 사랑을 전합시다!"만 반복하는 입술이 새파랬다.

 

기자도 벌써 두 시간째 강추위에 덜덜 떨며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일종의 잠복근무였다. 자선냄비에 잠복근무라니…?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미션이었다.

그해 신문사 사회부에는 자선냄비에 관한 제보전화가 적지 않게 들어왔다. 거금을 남몰래 슬쩍 넣고 가는 '노신사'를 찾자는, 그런 류의 아름다운 제보가 아니었다. 손목이 다 들어갈 정도로 입이 넓은 자선냄비에 돈을 넣는 척 하며 오히려 돈을 집어가는 얌체가 많다는 제보였다.


세모에 바쁜 사람들, 구세군 자선남비
1979.12.12 [동아일보] 4면

 

 

 

그렇다고 어디에 설치한 자선냄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거였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럴 때 애꿎게 치다꺼리를 하는 게 사건기자다. 그것도 막내 기자다. 사회부장의 심각한 지시를 받은 시경 캡틴이 고갯짓으로 막내를 불렀다. "부장 얘기 들었지? 그런 놈들은 혼을 내야 돼. 24시간 지켜서라도 현장을 잡으세요." "어디 가서…, 어디 있는 자선냄비에서요?" "이 사람아, 그걸 알면 내가 직접 취재하지 당신을 시키겠나? 아무데든 가서 현장을 잡아와!"

 

그렇게 된 거였다. 생각나는 곳은 명동 뿐. 신문사에서 가깝기도 하려니와 왕래하는 사람이 많으니 분명 얌체 도둑도 있을 듯 싶었다. 그렇다고 구세군 사관에게 도둑질 현장을 잡아 보도하러 나왔다고 얘기하고 협조를 구할 수는 없는 일, 그저 길 건너편을 어슬렁거리며 잠복근무를 시작했다. 바람은 사정없이 몰아쳤다. 수은주는 오후가 되며 급격히 떨어졌다. 양 어깨를 잔뜩 오므려 두 손을 끼었다가 얼른 빼 얼어붙은 귀를 녹이고, 선 자리에서 종종 달려 몸에 열을 내는 등 거의 발광을 하며 도둑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런다고 될 일인가. 무엇보다 자선냄비에 다가가는 사람이 없었다. 종소리를 듣고 걸음을 휙 돌리는 사람, 냄비 앞을 지나며 애써 딴 곳을 보는 사람, 함께 묵묵히 걷다 냄비를 발견하곤 갑자기 대화에 열중하는 부부, 주머니를 뒤지는 척 하다 새삼 돈 없음을 발견한 듯 돌아서는 젊은이. 참 각양각색의 군상들이었다. 물론, 그 정도의 소심한 사람들이라면 자선냄비에서 돈을 꺼내갈 정도의 비양심도 아닐 것이었다.

 

 

 

 

학생도 젊은 연인도 스님도 온정의 손길…구세군은 신나서 "딸랑 딸랑"

 

 

단골은 10대 교복과 허술한 서민, 메아리 못 얻는 종소리
1970.12.24 [경향신문] 6면


지켜본지 20분이 지나서야 학생 한 명이 동전을 넣었다. 땡그랑 소리가 길 건너편까지 분명히 들릴 정도로 자선냄비는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얌체도둑이 올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이젠 추위에 지치다 못해 화가 치밀었다. 쓸데없는 제보를 믿고 취재지시를 한 부장과 시경 캡에게 마음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두 시간 가량 흘렀을 때였다.

 

버버리코트 차림의 술 취한 중년이 어슬렁거리며 오더니 손을 쑥 자선냄비에 집어넣었다. '찾았다!' 구세군 사관도 그랬겠지만 길 건너편 기자도 순간 숨을 멈췄다. 그가 냄비에서 돈을 꺼내기만 하면 바로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취객은 해롱대는 소리로 "아니 뭐야, 냄비에 왜 이렇게 돈이 없어?"라며 손을 빼더니 이내 자기 포켓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는 수표 한 장을 꺼내 냄비 바닥에 얌전히 넣고 다독거렸다.

그가 "수고하쇼" 한마디를 던지고 한 손을 흔들며 떠난 뒤에도 구세군은 신이 나 종을 울렸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순간적인 취객의 해프닝이 있고 난 다음에 갑자기 사람들이 자선냄비로 오기 시작했다. 젊은 연인들이 각각 천 원짜리 한 장씩을 넣었고 스님도 합장을 한 뒤 돈을 넣었다. 선물꾸러미를 들고 가던 아주머니는 선물을 땅에 내려놓고 핸드백을 열었고 어느 대학생은 책갈피에 숨겨둔 비상금을 꺼냈다.

훈훈한 장면이었지만 기자가 그토록 보기를 갈망했던 얌체도둑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도둑을 본 것보다 더 기막힌 일이 일어났다.

 

 

 

 

1891년 미국서 시작된 자선냄비 "온정으로 냄비를 끓게 합시다" 호소

 

 

구세군 사관이 길을 건너오더니 천 원짜리 몇 장을 기자에게 내미는 거였다. 놀라는 기자에게 사관은 빙그레 웃으며 "저녁 사드세요"라는 것 아닌가. '아니, 어떻게 기자인 걸 알아보고…'라며 놀라는데 사관은 "아까부터 봤더니 계속 사람들이 돈 내는 걸 보시더라고…"라며 돈을 받으라고 말했다.

추위에 새파랗게 질리면서도 두 시간 넘게 자선냄비 쪽만 응시하는 기자가 그의 눈에는 도둑이거나 저녁 밥값조차 없는 불쌍한 사람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구세군 사관과 초짜 기자는 그날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물론 화제는 자선냄비에 얽힌 얘기였다. 자선냄비는 1891년 크리스마스전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파선(破船)난민을 도울 방법을 생각하던 한 구세군 사관(조셉 맥피)이 생각해냈다.

그는 자기 집 냄비를 들고 와 선창가에 걸어놓고 "여러분의 온정으로 이 국 냄비를 끓게 합시다."고 호소해 기금을 모아 난민을 구제했다.

한국에서는 1928년 박준섭으로 이름을 바꾼 조셉 바 사령관이 인천에서 가마솥을 걸어놓고 성금을 모아 수재민들을 도운 게 효시였다는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 동안 잠시를 빼고 한해도 빠짐없이 자선냄비에 사랑과 온정을 담아 모아 불우이웃을 도아 왔다.


동포애 위한 구세군의 모금 마감
1971.12.27 [동아일보] 5면

 

 

 

초등학생이 1년 모은 저금통을 들고 오는가 하면 어느 신사는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내 "고아들을 위해 써 달라"는 메모와 함께 냄비에 넣기도 했다. 버스표와 토큰을 넣는 학생, 양로원 할머니들에게 떡을 해 전해달라며 떡가루를 가져온 시민도 있었다. 또 2,3천만 원 수표를 기부하면서도 천 원짜리에 싸서 넣어 자신의 선행을 알리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었고 가난한 대학생은 ‘죄송하다’는 편지와 함께 책을 넣고 가기도 했다.

 

 

 

 

아름다운 손길 이어져도 모금액은 '저조'

 

 

하나하나 미담은 아름다웠지만 성금액수가 그다지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기자가 취재에 나선 76년 구세군은 모금 목표를 1천만 원으로 잡았지만 실제 모금액은 8백40만원이었다. 74, 75년에도 목표의 74∼90% 수준에 머물렀다. 경제가 되살아난 77년에는 2천만 원 목표에 2천2백만 원, 78년엔 3천만 원 목표에 3천3백50만원이 모아졌지만 79년엔 5천만 원 목표, 4천3백만 원 모금으로 낮아졌다.

 

70년대 신문에게 '이웃사랑'과 그 실천, 특히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돕는 상부상조 정신은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며 겪는 큰 통과의례 같은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 자가용을 타고 모피 코트를 걸쳐 입은 부유층보다 단정한 교복의 학생들, 허술한 차림의 서민들이 1원 동전부터 천원 지폐까지 냄비에 차곡차곡 쌓아 넣는 그 정성이 온 나라에 사랑과 희망을 안긴다고 노래했다. 구세군 자선냄비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있으나 큰돈은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마음껏 이웃사랑을 펼칠 기회였던 것이다.

 

실제 1972년 구세군이 서울에서 걷힌 1백 44만원을 분류해,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100원짜리 지폐가 7천1백19장, 10원 동전이 3만8천7백64개, 1원 동전도 5백87개나 나왔다. 나머지는 100원 이상의 고액권이거나 금반지 등 물품이었다. 꼭 그대로는 아니지만 당시 100원 지폐라면 지금의 1만 원 정도, 10원은 1천원, 1원은 100원 쯤 될 테니 역시 1,2천원의 소액기부가 대세였던 것이다.

 

사회부장이 엄명을 내리다시피 취재 지시한 '자선냄비 도둑'은 끝내 잡지 못했다. 물론, 강추위에 잠복근무하느라 죽도록 고생만 하고도 기사를 쓰지 못했다. 그러나 "자선냄비 도둑이 있다"는 제보가 구세군에도 들어갔던 것일까. 아니면 교회에서 연보 돈을 내는 척 하며 거꾸로 돈을 훔친 일이 발생해서였을까.

 

77년부터 자선냄비 위에는 철망이 달려 나왔다. 어느 신문은 이를 한탄하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세태 탓인지 냄비를 덮은 철망이다. 뚜껑 없는 냄비만으로는 모금된 돈의 안보가 아무래도 불안했던 모양이다"고 서글퍼했다. 물론 그렇다고 자선냄비의 불우 이웃사랑 정신은 꺼지지 않는다. 새해를 기다리는 희망이 자선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동안이라면 인류에겐 미래가 있는 것 아닐까.

사람들의 뉴스-소식에 관한 갈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편지 한 통을 들고 찾아오는 우편집배원이 마냥 그리운 까닭이다.  해진 제복 차림에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누런 가죽 행랑을 멘 '체부'(집배원의 옛 명칭)가 마을 입구에 보일라치면 시골 처녀들은 얼굴부터 붉어졌다.

 

 

 

마을의 반가운 손님, 집배원 아저씨

 

 

군대 간 아들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집배원 발걸음이 늦다고 역정을 냈다. 그러면서도 고마운 아저씨를 위해 감자와 옥수수를 삶았다. 동네 강아지들은 컹컹거리며 동구 밖까지 달려가 집배원을 앞서거니 뒤세우니 호위하듯 마을로 들어서곤 했다.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은 그가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기다리던 편지를 다투듯 빼앗아갔다.


도시라고 반가움이 다를 바 없다. 이제나 저제나 사랑하는 이의 편지를 기다리던 연인들은 아파트 우편함 입구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우체부' '우편배달부'(역시 옛 명칭)를 기다렸다. 입사시험 합격통지를 고대하던 달동네 청년은 집배원이 힘들게 비탈길을 올라오는 걸 기다릴 수 없어 비탈 아래 구멍가게에 진치고 앉아 연신 고개를 빼들어 큰길 쪽을 내다봤다.


집배원. 성실·인종의 파수꾼
1973.01.04 [경향신문] 7면

 

 

 

70, 80년대 까지만 해도 연필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쓴 편지의 정감이 살아 있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글 못 읽는 할머니에게 편지를 읽어주는 집배원의 다정과 여유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산동네 처녀와 강마을 총각을 맺어주고 도시에서나 쓰는 '구리무'(얼굴크림)나 사탕과자를 들고 와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문패를 만들어 달아주는가 하면 시골 어린이 숙제를 해주거나 과외선생 노릇도 마다하지 않았다.

 

 

 

 

20kg 무게 행랑지고 40km씩 발품 팔아

 

 

우편물은 느는데 배달장비는 제자리
1980.12.19 [동아일보] 7면


그런데 요즘은? 연말연시, 1년 만에 보내는 연하장과 크리스마스카드도 인사말은 물론 이름조차 직접 쓰지 않고 ‘대량 인쇄, 살포’한다. 우편물에 정감이 사라졌다. 사람냄새가 없다. 한 명에 한 대 꼴로 휴대전화가 있고 인터넷이 분초를 다퉈 소식을 전해주니 직접 쓰는 편지, 카드는 골동품처럼 귀해졌다.

당연히 집배원도 현대화 됐다. 가죽 행랑, 먼지가 가득한 워커를 신고 걷는 대신 오토바이 뒤 바구니에 플라스틱 택배 상자를 싣고 다닌다.


물론 그렇다고 집배원에 대한 감사의 정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다만 정취는 반감됐다. 그래서 옛날 신문, 특히 집배원의 애환을 다룬 기사를 읽으면 문득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속으로 밀려들곤 한다. 한 신문은 "저물어가는 한해의 아쉬움을 평소보다 몇 배나 더 불룩해진 행랑을 짊어지고 가는 집배원의 뒷모습에서 발견한다."고 특집기사 첫 머리를 쓰기도 했다.

 

 

 

70, 80년대 집배원들은 대부분 걸어 다녔다. 빨간 자전거, 오토바이도 있었지만 대개 '속달 용'이었다. 행랑의 무게는 대략 20kg. 하루 배달 량은 도시의 경우 편지 소포 850통, 농촌은 350통이었다. 배달 거리는 도시 20km, 농촌이 40km. 집이 드문드문 선 농촌이 훨씬 더 발품을 요구했지만 대부분 집배원들은 시골에 가야 ‘사람 사는 맛’을 느낀다고 했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인고의 메신저'

 

 

1977년 12월24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15년 집배원 경력 김종설씨는 "서울에선 집배원과 수취인 사이에 오가는 흐뭇한 정이 없다"며 "너는 전하는 사람, 나는 받는 사람일 뿐이라는 모래알 같이 삭막한 이기주의적 생각이 도시인들 머리에 뿌리 깊이 자리 잡은 것 같다”며 서글퍼 했다.


강원도 인제에서 처음 집배원을 시작한 그는 "서울 간 손자 편지가 반가워 막걸리를 대접하는 할머니도 있었고 군대 간 애인 편지에 눈물 흘리는 강원도 산골 아가씨의 순정에 가슴 뭉클한 적도 있었다."며 "서울선 편지를 전하러 가면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대화, 정이란 없고 맹견이 튀어나와 물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 기사 제목은 '고달픈 전령'이다. '사람과 사람, 정(情)과 정을 이어주는 가교'라는 작은 제목도 붙였지만 기본적으로 박봉에 시달리며 마냥 걸어야 하는 고달픈 직업인임을 부각시켰다.


박봉에도 천직으로 고달픈 전령. 집배원 15년 김종설씨
1977.12.24 [경향신문] 5면

 

 

 

80년대 초에 들어서며 언론은 다시 집배원을 '인고(忍苦)의 메신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고 견디며 행복 메시지를 전한다는 의미. 물론 거기엔 편지 한 통에 목숨을 건, 한 집배원의 우직하고 투철한 사명감을 기리는 뜻도 담겼다.

 

 

 

 

목숨과 바꾼 '마지막 편지 한통'

 

 

눈길 순직 집배원 추모비 제작
1981.04.21 [동아일보] 11면


1980년 12월12일 저녁 7시. 충남 안면 우체국 집배원 오기수씨는 마을에서 10km나 떨어진 산간 외딴집에 마지막 우편물을 전달하고 돌아오다 벼랑에서 실족해 순직했다. 그날은 영하 15도 추위에 대설주의보까지 내려져 있었고 길은 폭설로 덮여 앞뒤 분간조차 안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가 전달한 마지막 우편물은 5원짜리 우표가 붙은 농민신문 1부였다.


신문을 받은 수취인은 날도 어두워지고 눈보라도 심하니 자고 가라고 권했다. 그러나 오 씨는 우체국에 연말 우편물이 가득 쌓여 있는데다 동료들이 돌아오지 않는 자기를 걱정할 게 더 염려됐다. 그 밤에 어떻게든 우체국에 돌아가야 다음날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외딴집을 떠난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가버렸다. 그의 시신은 다음날 그를 찾아 나선 동료들이 발견했다.

 

 

 

이듬해 만국우편연합은 기관지를 통해 '편지 1통에 목숨을 버린 집배원'기사를 상세히 실었다. 체신부는 그가 숨진 안면도 유망맞이 해변벼랑에 '1980년 12월12일 악천후 속에 마지막 우편물을 전하고 집배원 이곳에 지다’란 푯말을 세웠다. 동료들은 우체국에 ‘한통의 편지 위한 님의 정성, 우리 온 가슴에 길이 남으리.'라고 새긴 추모비를 세웠다.

 

 

 

오 씨의 사명감에 젖은 희생은 지금도 집배원들의 귀감으로 남았다. 사실 모든 집배원이 한 장의 편지, 한 통의 소포를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전하기 위해 온 정성을 다한다. 근대 우정(郵政)초기 역시 편지배달 중 순직한 이시중 씨의 경우도 오 씨 사건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1927년 7월 22일 전주우체국 집배원이었던 이 씨는 우림면과 나전면 두 마을에 우편배달을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마을로 가는 개울을 건널 수가 없었다. 편지는 전해야 하는데 길은 막혔고… 고민하던 그는 묘책을 생각해냈다. 개울 건너 마을 주민을 소리쳐 부른 뒤 그 마을로 갈 편지를 돌에 묶어 던지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막 돌을 던지자 편지가 풀려 개울에 떨어졌다. 오로지 편지를 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는 개울에 뛰어들었고 급류에 휩쓸려 숨지고 말았다. 한국인 집배원 순직 1호로 기록된 그의 추모비는 당시 일본인 우체국장이 세워주었다.


집배원 이시중씨의 순직
1973.02.23 [경향신문] 6면

 

 

 

집배원 안전사고는 오토바이, 자동차를 주로 이용하는 요즘도 자주 일어난다. 과거에는 우편물 배달에 나선 집배원을 보면 사람들이 먼저 길을 양보하곤 했으나 요즘은 그런 미덕도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80년대 초반 1만 명 선이던 집배원 숫자는 1만5천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비록 인쇄물이긴 주로 많지만 우편물량 또한 늘었다. 한통의 편지도 빠트리지 않고 목숨 걸고 전한다는 사명감 역시 다름없다는데 정감은 전만 못하다. 옛날 신문을 다시 꺼내 읽는 이유다.

1970년 1월 1일자 경향신문. '인류의 꿈이 날개를 펴는 70년대 우주과학'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정기항공편 달에 왕복' '73년 바이킹이 화성에 착륙' 부제를 붙인 이 기사 상단엔 달기지(基地) 상상도가 멋지게 그려져 있다. 울퉁불퉁한 달 표면에 천문대와 월면(月面)버스, 생명 의학 연구소 건물이 있고 지구로 가는 항공편이 공중을 날고 있다. 지구가 월면의 수평선 위에 둥근 달덩이마냥 떠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기사내용은 이렇다. "달에 세워진 연구소들은 초기에는 무인으로 지구에서 원격 조정하지만 후반에는 연구원들이 상주하게 된다. 연구원들은 한눈으로 지구전체를 바라보며 대기의 이동, 태양열이 지구에 주는 영향 등을 관찰, 폭풍우 가뭄 등 장기 일기예보도 지구에 보내줄 것이다." 70년대에는 인류가 달에서 생활하고 80년대 중 인간의 화성정복이 시작되며 20세기 말 또 다른 천체를 향한 탐험이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같은 해, 같은 날짜 동아일보. 1면에 '각광-70년대의 전위들'이란 특집기사 연재를 시작했다. 첫 번째로 다룬 아이템은 컴퓨터였다. 기사는 한국에 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67년 7월로 경제기획원 통계국과 한국전자계산소가 그 효시라고 밝혔다. 이어 70년 1월 현재 10대 정도의 컴퓨터가 임차 또는 구매 형식으로 국내에 들어와 있지만 70년 말이면 그 수가 20대를 웃돌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기 항공편 달에 왕복
1970.01.01 [경향신문] 4면

 

 

 

그러나 미국 4만, 서독 4천2백, 일본 3천6백, 영국 3천1백 대에 비해 컴퓨터 숫자가 턱없이 적다며 국민들의 컴퓨터에 대한 인식제고를 촉구했다. 또 '전자계산기 입문' 책을 발간, 황무지 한국에 컴퓨터 이론을 처음 소개한 송oo박사를 소개하고 "앞으로 대중과의 대화를 통해 일반의 컴퓨터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겠다는 것이 그의 신년 포부"라고 밝혔다. 한국에서도 컴퓨터가 각광받는 시대가 머잖아 올 것이며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각광 70년대의 전위들, 컴퓨터
1970.01.01 [동아일보] 1면


역시 같은 날짜 매일경제. '70년대 의식주 어떻게 달라질까'란 기사를 실었다. 전문가의 전망을 종합한 이 기사는 주생활과 관련, "주택은 공장생산주택의 등장으로 레디메이드 화하고 건축자재는 경량화하며 번거로운 이삿짐은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예언했다.

 

식생활에선 "야채를 사철 먹을 수 있는데 비닐하우스 등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생산하므로 서구처럼 신선한 야채 값이 육류보다 비싸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옷 문화에 대해서는 "그동안 옷의 노예였던 것에서 벗어나 70년대엔 자기 생활에 알맞게 소화한 옷을 입을 것"이라며 "요즘 신부들이 몸에 맞지도 않는 웨딩드레스를 빌려 입어서 어색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아름답고 우아한 한복이 예복으로서는 제격이어서 앞으로는 웨딩드레스가 한복으로 대체될 것 같다"고 예고했다.

 

 

 

 

신년호 특집은 '멋진 신미래' 예고가 대부분

 

 

신년호에 실린 이런 미래예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도 있고 그저 황당한 얘기로 전락하고만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그 기사들은 당시로선 화제를 모았던 기사들이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앞으로 과학의 발전과 국가의 중흥으로 삶이 한층 윤택해질 것이란 기대에 흐뭇한 웃음을 짓곤 했다. TV보다 신문이 매스컴의 총아였던 시절, 신문이 내보낸 '미래보고서'는 중요한 대화의 포인트로 작용했다.

 

70년대 신문들에게도 신년호는 꿈과 희망을 한껏 담아낼 수 있는 넓고 좋은 무대였다. 하루 8면, 지면을 잘게 잘라 뉴스를 편집하다 두 배인 16면을 쓰게 되면 그 안에 독자들의 눈을 확 끌어당기는 재미있고 꿈이 있는 기사를 실어 멋지게 요리하려고 경쟁했다.

12월 초부터 신문사에는 신년특집 기획팀이 구성돼 아이디어를 모았다. 편집국의 내로라하는 글쟁이, 기획통, 잡학사전들이 특집 팀에 포진해 머리를 짜냈다.


인간회복. 탁류의 심연에서 양심의 세계로
1977.01.01 [동아일보] 4면

 

 

 

특집은 '멋진 신세계'를 예고하는 기사가 대종을 이루었다. 신년호까지 우울한 일상, 어두운 현실을 들추어내는 것은 곤란하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70년대는 유신과 긴급조치로 민주주의, 인권이 위기 상황이었다. 언론 역시 재갈을 물려 비판기사를 내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1년에 한번, 새해를 여는 새아침에 논쟁적이며 투쟁적인 기사를 싣는 것은 어느 모로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70년대 후반 신문들은 신년 특집으로 논란거리가 될 만한 뼈대 있는 기사를 많이 내보냈다. '기형적 발전은 말자' '인간 회복' '세계석학의 한국 분석' '한국의 지식층' '선거, 한 표의 길' '불확실성 시대, 한국적 상황과 처방' 등이 그런 기사였다. 그러나 그런 비판성 특집은 대개 한두 페이지에 그쳤다. 사회면 머리기사부터 시작해 특집 판의 프런트 페이지에는 거의 언제나 밝고 희망에 찬 기사와 사진이 들어가 앉았다.

 

 

 

 

70년대 신문들의 신년호 1면에는 박대통령의 신년사

 

 

80년대 한국
1973.01.01 [경향신문] 12면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70년대 신문들의 신년호 1면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 신년사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70년부터 79년까지 10년 간 신년호 머리기사를 모두 대통령 신년사로 쓴 신문도 있었다. 대통령의 신년 휘호도 앞쪽 지면 중앙에 잘 보이도록 뽑는 것이 ‘예의’이기도 했다.


신년사 내용을 함축한 휘호는 대개 국민에게 근검절약, 자조자립, 유신 정신을 강조하는 것들이었다. 허리띠 졸라매고 정신 차려 한마음으로 국가발전을 이뤄 나가자는 구호들이었다. 그러니 신년호를 보면 1면 '고통 분담', 특집 '밝은 미래'로 이어지는 정형성이 있었다.

 

꼭 정치적 의도를 가진 편집이 아니더라도 장미 빛 미래 예측은 신년호에 번번이 등장했다. 73년 '80년대 한국' 특집도 독자들 가슴을 마냥 부풀게 했다. "81년 국민총생산은 세계 9위가 되고 국민 살림은 대량소비시대에 맞게 풍족해 진다."는 얘기였다.

 

 

 

세부적으로 "도시는 자동차 홍수를 이루며 전국 도시를 연결하게 될 고속도로도 자동차로 뒤덮이게 된다는 것. 그리고 가구당 소득은 농가가 더 많아지고 도시의 공해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 농촌으로의 인구유입이 생기며 90년대엔 1가구 1주택이 실현돼 내 집에서 살게 된다."고 예측했다.

기사는 그러나 말미에 이런 것이 모두 공짜로 얻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 같은 개도국의 미래는 선진국과 달리 도전의 의미가 강하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1천 달러 소득이 생기고 내 차를 몰 수 있는 게 아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제시한 "근거 있는 예측에서 부각된 미래를 이룩하려면 국민이나 정부가 모두 가파른 산을 오르는 것 같은 땀 흘림이 있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 보면 신년호에 담긴 '미래 특집' 빗나간 전망도 많아

 

 

여기에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앞서나간 미래 특집도 적잖았다. 76년 '미래에 산다.' 시리즈는 제1편으로 생명의 연장 문제를 다뤘다.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나고 인공장기 등이 활성화할 것이란 예측은 정확했지만 일부 질병에 대한 전망은 빗나갔다.

 

기사는 "80년대쯤이면 '인류의 적'으로 불리는 암도 간단하게 정복되고 고혈압과 당뇨병 따위도 21세기 초까지는 모두 퇴치될 전망"이라고 썼던 것이다. 세계의 모든 의학계가 21세기 초까지를 질병 퇴치의 최대시한으로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많은 환자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인간의 질병에 대한 전쟁은 여전히, 오히려 새로운 전선까지 형성하며 진행 중이다.

인류의 미래, 인간 삶의 질과 편의성, 국가 국민생활의 발전, 희망을 일구어내는 미래개척의 역군들에 관한 얘기는 신문 신년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뉴다. 그것처럼 읽는 사람의 기분을 업 시키고 재미까지 제공하는 기사도 별로 없다.


21세기 인간수명. 보통 백세 넘어
1976.01.01 [동아일보] 10면

 

 

 

신문사들은 1월 1일이 아닌 12월 31일 오전 중에 신년호를 찍는다. 그리고 간단히 냉주 파티 겸 송년회를 갖고 그해 업무를 종료한다. 파티도 끝나고 모두가 퇴근한 편집국 황량한 방에서 국장은 혼자 남아 다른 모든 신문의 신년호와 자기가 만든 신년호를 비교하며 읽어 본다. 웃기도 하고 한숨도 내쉰다. 잘 만들어진 신문 신년호를 보며 기분 나빠 하고 슬퍼하는 것은 아마 경쟁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내가 박철순(朴哲淳)을 처음 만난 것은 8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하순께였다. 당시 박철순은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 엘파소 디아블로스에 몸 담고 있었다. 그가 시즌을 마치고 귀국한 것은 10월 중순께였다. 그러니까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그를 취재하기 위해 만난 거였다. 마침 국내는 프로야구 창립 총회(12월 11일)를 마치고 6개 구단이 선수 영입에 정신이 없었다. 박철순도 서울지역 선수 공개 모집에 신청서를 접수해 놓고 있었다. 이런 틈 새에서 그를 만났으니 할 얘기는 뻔했다.

 

 

박철순은 미국 얘기부터 꺼냈다. 그리고 여러 얘기를 했다. 그렇지만 내 귀를 때린 것은 너클 볼이었다. 생소했다. 설명을 듣고 난 뒤에야 타자 앞에서 불규칙하게 변화를 일으키는 묘한 볼이라는 것을 알았다.

 

박철순은 이런 볼로 국내 무대에 선다면 20승쯤은 문제 없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설마 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뛰어 넘어 22연승에 24승을 올렸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방어율(1.84)과 승률(0.857)에서도 1위를 차지해 투수부문 3관왕에 올랐다. 과연 박철순은 슈퍼스타다웠다. 그러나 박철순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국부 진통제를 맞으며 코리안시리즈에 섰다. 그리고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하지만 그가 얻은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척추 디스크로 쓰러져 불사조라는 이름을 얻은 게 전부였다.


박철순, 미국프로야구 입단
1980.01.29 [동아일보] 8면

 

 

 

 

프로 데뷔 첫 경기서 MBC 꺾고 첫 승

 

 

박철순의 데뷔 전은 프로야구 개막 다음 날인 3월 28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에서 이루어졌다. 상대는 MBC 청룡. 개막 경기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황규봉(黃圭奉)과 이선희(李善熙)를 두들겨 11-7로 넉 다운시킨 MBC는 그 여세를 몰아 OB 베어스까지 잡을 기세였다. MBC는 1회부터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감독 겸 선수로 출전한 백인천(白仁天)은 1회부터 서둘렀다. 박철순은 볼 카운트 1-1에서 슬라이더를 몸 쪽에 붙였다. 백인천은 역시 노련했다. 기다렸다는 듯 가볍게 밀어 쳐 좌익선상으로 빠지는 적시 2루타를 만들었다. 박철순에겐 뼈 아픈 안타였다. 2루 주자 김용윤(金容允∙현 김바위)에게 득점을 허용한 안타였기 때문이다.

 

 

 

첫 완투승 거둔 박철순
1982.03.30 [매일경제] 12면


그러나 박철순은 당황하지 않았다. 초반을 넘어서면서 비장의 무기인 너클 볼을 꺼내 들었다. 빠른 볼을 노리던 MBC 타자들은 손쉽게 무너졌다. 박철순은 1회 말 1점을 내준 뒤 5회 말엔 1안타와 내야 실책으로 1점을 헌납했을 뿐 더 이상 MBC의 득점을 허용치 않았다. 대신 OB는 2회 초 신경식(申慶植)이 우전 안타를 날린 뒤 2루를 훔치자 양세종(楊世鍾)이 우중간 2루타를 터트려 첫 득점을 올렸다. 5회 초엔 3점을 뽑아 전세를 단박에 4-1로 뒤집었다. 이후에도 OB의 공격은 계속됐다. 6회 초 이홍범(李洪範)의 솔로 홈런에 이어 9회 초엔 신경식과 양세종이 대미를 장식하는 랑데부 홈런을 날려 9-2로 첫 승을 낚았다.

 

"박철순이 저런 투수였나? 깜짝 놀랐다. 스피드보다 컨트롤이 절묘했다. 특히 너클 볼이 좋았다. 너클 볼이란 타자들의 눈을 속이는 볼이다. 실밥이 보일 만큼 스피드도 없고 회전도 없다. 볼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데 번번히 당한다. 강속구가 뒤를 받혀줄 때 위력을 발휘한다. 빠른 볼이 들어올 줄 알고 있다가 느린 볼이 들어오니 타이밍을 맞추질 못하는 거다. 거기다 직구나 커브처럼 일정한 코스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제 멋대로 들어오니 속을 수 밖에 없다"

 

 

 

백인천 감독은 서울지역 선수 드래프트에서 박철순을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박철순이 이토록 희한한 볼을 익힌 것은 79년 3월 공군 팀 성무에서 제대, 연세대에 복학한 뒤였다. 책을 보며 연습을 했다. 아니, 흉내를 냈다는 게 옳았다. 그러다가 이런 볼을 자신의 것으로 완성시킨 것은 81년이다. 미국 프로야구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 엘파소 디아블로스에 몸 담고 있을 때였다. 밀워키가 마이너리그 투수들을 위해 운영하던 피칭 스쿨에서 익혔다.

 

박철순이 밀워키로부터 마이너리그 입단 제의를 받은 것은 79년 10월 23일이었다. 계약금 1만 달러(약 500만원)에 월봉으로 7백 달러(약 35만원)를 제시했다. 그 해 6월 미국에서 열린 제2회 한∙미대학선수권대회(6월 8~14일)에 대학대표로 출전, 미국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에게 인상적인 피칭을 선보인 게 계기가 됐다. 특히 박철순은 공식 일정이 끝난 뒤인 6월 26일 볼티모어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서 열린 볼티모어 실업 올스타 전이 결정적이었다. 이날 박철순은 강속구를 주무기로 6회까지 단 한 개의 안타는 물론 볼넷도 허용치 않는 퍼펙트 게임을 이끌어 이를 지켜보던 스카우트들을 매료시켰다. 

 

 

 

"경기가 끝난 뒤 대한야구협회 재미지부장인 이덕준(李德俊)씨가 밀워키 스카우트를 소개해 줬다. 그는 볼 스피드가 최고 148km가 나왔다며 이런 볼이면 빅 리그에서도 통할 수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뒤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러나 나는 연세대에 재학 중인 학생 신분이어서 확답을 못했다. 모든 것을 이덕준씨에게 일임한 뒤 귀국했지만 큰 기대는 갖지 않았다"

 

80년 1월 9일에는 밀워키 브루어스로부터 입단 초청장이 날라왔다. 계약 조건도 전보다 좋았다. 계약금 2만 달러(약 1,400만원)에 월봉은 1,200 달러(약 84만원) 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덕준씨의 주선으로 1월 28일 하오 1시 서울 무교동 체육회관 강당(10층)에서 김종락(金鍾珞) 대한야구협회장 등 관계인사와 세계야구연맹 부회장 '가르시아'(니카라과) 및 미국야구협회장 '니트 와일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단 계약식을 가졌다. 비록 마이너리그 계약이었지만 국내 선수로는 미국 프로야구에 최초로 진출한 투수가 됐다. 한국인으로는 68년 이원국(李源國)이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마이너리그에 진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국내 선수가 아닌 일본 선수 자격으로 진출한 거였다.


코리안시리즈 향방은 박철순 어깨에
1982.10.08 [경향신문] 8면

 

 

 

 

미국 피칭 스쿨서 익힌 너클 볼로 중무장

 

 

박철순이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른 것은 80년 3월 6일이었다. 밀워키 브루어스의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 해 2월에는 마이너리그 싱글A 스탁턴 포츠에 배속됐고 거기서 5승2패(방어율 2.31)를 올려 주가를 높였다. 월봉도 1,800 달러로 껑충 뛰었다. 특히 81년 7월 2일에는 더블A 엘파소 디아블로스로 한 단계 올라섰다. 이 때의 성적은 6승7패. 시즌이 끝났을 때는 12승10패(방어율 2,32)로 팀에서 다승 3위, 탈삼진 1위(138개)에 최소 사사구(28개)를 기록해 밀워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의 우수투수가 됐다. 그 덕분에 82년도 월봉은 2,500 달러로 오르고 트리플A 진출도 약속 받은 몸이 됐다.

 

 

 

프로야구 금자탑 세운 박철순
1982.10.15 [경향신문] 8면


"국내에 프로야구가 출범한다는 소식은 귀국하고 나서 한참 뒤에 들었다. 괜히 가슴이 뛰었다. 가슴은 이미 국내 프로야구에 가 있었던 것 같았다. 미국 갈 맘이 싹 없어졌다. 그래서 팀 매니저에게 국내 프로야구에 진출할 뜻을 내비쳤다. 즉각 연락이 왔다. 고생이 되더라도 한 해만 더 뛰어보자는 거였다. 트리플A에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할 수 있는 데 기회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을 굳혀진 상태였다. 언젠가 망가져서 돌아올 바에야 지금이 국내에 몸 담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박철순은 그의 말대로 미국 행을 접은 뒤 12월 23일 제일은행의 김우열(金宇烈)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야구위원회(KBO∙전 한국프로야구위원회)에 취업 신청서를 냈다. 박철순은 배명고 출신으로 서울지역이 연고지였다. 그러나 서울지역 프로야구 입단 희망 선수들은 자의로 팀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타의에 의해 충청지역이 본거지가 된 OB 베어스가 선수 취약지역을 내세워 서울이 본거지인 MBC 청룡과 1대2의 비율로 드래프트를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박철순은 가능한 한 MBC 청룡(서울)에 떨어지길 원했다. 그러나 박철순은 12월 29일 하오 3시간에 걸쳐 OB구단 사무실(서울 중학동 합동 빌딩)에서 실시한 드래프트에서 OB에 잡힌 몸이 됐다. 우선권을 쥔 MBC가 1순위로 김재박(金在博)을 찍자 OB는 단박에 박철순을 채 간 탓이었다.

 

박철순은 2월 19일 프로야구 진출 선수로는 유일하게 특급 대우(계약금 2,000만원, 연봉 2,400만원)로 OB와 입단 계약을 마쳤다. 실력은 미지수였지만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에서 2년간 활동한 경력을 높이 샀다. 그러나 박철순에겐 문제가 있었다. 밀워키가 브레이크를 걸었다. 계약 위반이라며 위약금 6만 달러(계약금의 3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거기다 한국야구위원회의 서종철(徐鐘喆) 총재도 '해적판 프로야구를 원치 않는다'는 뜻으로 이적 동의서를 요구했다. 할 수 없었다. OB 베어스 박용민(朴容玟) 단장이 미국으로 날라갔다.

 

"우리는 미국과 선수협정을 맺은 사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선수 등록을 할 때 이적 동의서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밀워키서 계약 위반이라고 떠드니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2월 초 겸사 겸사해서 LA 다저스를 방문했다. '피터 오말리' 구단주를 만난 자리에서 박철순 건을 얘기했더니 걱정 말라며 밀워키 구단주 '버드 세릭'를 만나게 해줬다. '버드 세릭'은 만나자 마자 박철순 칭찬부터 해댔다. 그런 뒤 그를 만드는데 2년간 15만 달러가 들었다고 했다. 그러니 트레이드 머니는 5만 달러(약 2,700만원)가 적당하다는 거였다. 아주 고단수였다. 이에 맞서 2만 달러를 제시했다. 트레이드 머니는 절충 끝에 3만 달러에 합의를 봐 3월 19일 외환은행을 통해 송금하는 것으로 끝냈다"

 

 

 

 

한 시즌 최다 세계 기록이 된 22연승

 

 

박철순은 프로야구 개막(3월 27일) 이틀 전인 3월 25일 밀워키의 이적 동의서를 첨부, 한국야구위원회에 정식으로 선수 등록을 마쳤다. 그리고 사흘 뒤인 3월 28일 MBC를 상대로 데뷔 첫 승리를 장식했다. 박철순은 우연스럽게 MBC와 여러 면에서 인연이 깊었다. 프로야구 데뷔 첫 상대로 첫 승리를 안긴 팀이 MBC였던 것처럼 그에게 첫 패배(4월 4일 청주)의 쓴 맛을 안겨준 팀도 MBC였다. 4월 4일 홈 구장인 청주에서 선발로 등판한 박철순은 6과 ⅓이닝 동안 4안타로 5점을 내준 뒤 강판 당했다. 못 던졌다기 보다 내야 실책으로 3점을 내주는 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러나 4월 10일 전주에서 열린 해태 전에서 구원 승으로 일어선 박철순은 목표 20승(8월 15일 서울)과 20연승(9월 11일 대전)을 MBC를 상대로 달성했다.

박철순은 프로야구의 막이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20승이 목표였다. 그런데 전기리그가 끝났을 때 18승2패3세이브(방어율 1.99)를 올려 놓고 있었다. 목표 20승이 20연승으로 바뀌었다. 내색은 않았지만 은근히 세계 최다 연승(24) 기록을 넘보는 눈치였다. 9월 18일 대전에서 롯데를 상대로 22연승을 올릴 때만해도 24연승은 문이 열려 있었다.


프로야구 최우수 선수에 박철순
1982.08.20 [경향신문] 9면

 

 

 

그러나 9월 22일 잠실로 옮겨 치른 롯데전이 화를 불렀다. 3-3 동점이던 9회 말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철순은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 연장 10회 말 김용철(金容哲)에게 결승 타를 얻어 맞아 연승 기록이 22승에서 막을 내렸다. 한 시즌 22연승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프로야구 100년을 넘어선 미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최다 연승 기록은 24연승이다. 1937년 뉴욕 양키스의 '칼 허벨'이 세웠다. 그러나 이 기록은 2 시즌에 걸쳐 이룩한 것이다. 1936년 16연승으로 시즌을 마감한 '칼 허벨'은 1937년 8연승을 올려 24연승의 기록을 남겼다. 한 시즌 최다 연승은 1888년 뉴욕 양키스의 '팀 키페'가 세운 19승이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22연승은 찾아볼 수가 없다. 1952년 교진(巨人∙요미우리 자이언트)의 마츠다(松田)가 2시즌에 걸쳐 20승을 올렸고 1957년에는 니시테스(西鐵)의 이나오(稻尾)가 20승을 세운 게 최다 연승으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박철순의 22연승은 한 시즌 최다 연승 세계기록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박철순은 쑥스러워했다 "올해는 나에게 행운을 안겨줬다. 타자들이 약해 덕을 본 반면 우수한 투수들이 없어 독주할 수 있었다. 내년엔 10승을 올릴 수 있을까? 미지수다. 그러나 나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로 입단이 보류됐던 우수 선수들이 합류한 83 시즌을 마친 뒤 내려야 할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고 박철순은 83 시즌 내내 병마와 싸워야 했다. 발단은 9월 29일 대구서 벌어진 삼성과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 경기는 OB나 삼성에겐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OB가 승리할 경우 전∙후기리그 우승으로 통합 챔피언이 되는 경기였다. 반대로 삼성이 승리할 경우 후기리그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 OB와 코리언시리즈에서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다툴 가능성이 높은 경기였다. 때문에 OB는 박철순을, 삼성은 권영호를 선발로 내세웠다. 하지만 박철순에겐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경기 초반 번트 수비를 하다 허리를 다쳐 1-2로 역전패를 당했다.

 

허리 통증은 일종의 경고였다. 박철순은 전∙후기리그 통틀어 36경기에 등판했다. 그 가운데 15경기서 완투를 했다. 224와 ⅔이닝을 던졌다. 혹사였다. 거기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삼성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4시간 7분 동안 11과 ⅔이닝을 완투했다. 박철순에겐 죽음을 건 사투였다. 이러고도 탈이 안 났다면 박철순의 몸이 이상한 거였다. "그 땐 허리 디스크 짐작도 못했다. 갑자기 허리에 충격을 주어 통증이 온 줄 알았다. 볼을 던지다 보면 이런 일은 다반사여서 이 때도 한 이틀 편히 쉬면 괜찮을 줄 믿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쉬어도 통증은 가시지 않고 기분 나쁘게 뜨끔거렸다. 병원을 찾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무조건 쉬라고 했다. 그런데 한가하게 쉴 처지가 아니었다"

 

 

 

 

허리 통증 잊으려 진통제 맞으며 등판

 

 

OB 우승 확정
1982.06.24 [동아일보] 8면


삼성이 시즌 마지막 경기(10월 2일 대구)에서 MBC를 3-1로 물리치고 코리언시리즈에 진출, 불꽃 튀는 접전의 와중에 있었다. 코리안시리즈는 7전 4선승 제였다. 4승을 먼저 챙기는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거였다. 그런데 1차전(10월 5일 대전)에서 3-3으로 비긴 OB는 2차전에서 0-9로 완패를 당해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박철순은 팀에 힘을 불어 넣기 위해서라도 등판할 수 밖에 없었다. 3, 4차전에 구원으로 등판했다. 두 경기서 승리를 지켜 전세는 2승1패1무가 됐다. 5차전은 선우대영(鮮于大泳)과 황태환(黃泰煥)이 승리를 지켜 3승1패1무. OB가 6차전만 잡으면 우승이었다. 김영덕 감독이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 차례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 봐도 박철순 밖에 없었다.

 

"6차전에 박철순이 선발로 나오자 우리는 쾌재를 불렀다. 박철순의 허리 이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박철순은 초반부터 집중 안타를 맞으며 허물어 졌다. 이런 상태라면 우리가 손쉽게 이긴다고 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회가 거듭될수록 볼의 위력이 살아나는 게 아닌가? 이상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박철순은 허리 통증을 잊기 위해 근육 마취제를 맞은 상태였다" 삼성의 임신근(林信根) 코치 말이었다.

 

 

 

그러나 박철순이 맞은 것은 국부 진통제였다. 박철순은 3차전부터 주사를 맞고 던졌다. 이 때의 사정은 김성근(金星根∙현 SK 감독) 투수코치가 잘 알고 있었다. "코리언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사무실에 갔더니 철순이가 나와 있었다. 우리가 1무1패를 당한 상태여서 분위기가 침울했다. 철순에게 '허리는 어때?'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좋아졌다'고 했다. 철순인 뻔한 거짓말을 해댔다. 그런데 철순이 주사를 맞고 뛰겠다는 거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 같았다. 그 주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투수 출신인 나나 김영덕 감독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았다. 소용이 없었다. 철순이는 경기 시작 전 국부 진통제를 맞았다. 비통했지만 선수들과 미팅할 때 분위기를 잡았다. '자 오늘은 철순이가 생명을 걸고 던지니 열심히 하자'고 했다. 선수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질렀다" 그 만큼 박철순은 OB 선수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가 마운드에 서면 터지지 않던 방망이도 불이 붙었다. 3차전에서 선우대영을 구원 등판, 승리를 지킨 박철순은 4차전에서도 주사를 맞은 뒤 황태환을 도와 승리를 지킬 수 있었다. 국부 진통제는 한 번 맞으면 2시간 동안 효력이 지속됐다. 이에 맛 들인 박철순은 6차전이 열리기 직전 주사를 맞은 뒤 몸을 풀었다. "그 당시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허리의 아픔이 아니었다. 오직 하나, 우승을 해야 한다는 것 밖에 없었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주사를 맞고 던졌다"

 

10월 12일 서울운동장 야구장(동대문)에서 벌어진 코리언시리즈 6차전은 OB가 8-3으로 역전승을 올려 4승1패1무로 원년 챔피언의 영광을 안았다. 박철순은 이날도 마지막 마운드를 지켰다. 그리고는 곧바로 우승의 기쁨을 뒤로 한 채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병명은 요부추간판(腰部椎間板) 헤르니아(척추의 제4 요추와 제5 요추 사이에 끼어 있는 물렁뼈가 삐져 나온 상태) 였다.


양복차림으로 나타난 박철순
1982.11.20 [경향신문] 9면

 

새해 새 아침이면 누구나 한가지씩은 소망을 품어본다. 소박하고 건실한 꿈이 있는가 하면 전혀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망상도 없지 않다. 남이 볼세라 일기장에 몰래 써놓는 바람도 있고 책상머리에 붙여놓는 포부, 만인 앞에 공표하며 다짐하는 약속에 이르기까지 새해 새 소망의 형식도 다양하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보통사람들의 꿈 이야기

 

 

60년대, 70년대 신문에서 사람들의 새해 소망을 찾아 읽다 보면 정말 많은 것을 생각게 된다. 우선 당시 사람들의 소망이 지금 눈으로 보면 지극히 소박했다는 느낌이 온다. 개인적인 신변잡사부터 인류와 미래를 위한 거창하고 이타적인 기원까지 꿈은 가지가지지만 대개 단순하고 직선적이다. 꾸밈이 없고 속마음이 우러난다. 보통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가령 "돈이나 실컷 벌어 2층 집을 짓고 싶다"는 회사원, "내 재주로 돈 벌긴 틀렸으니 공돈 1억만 생겼으면…"하고 바라는 어느 음악 평론가의 꿈같은 것이 밉지 않고 그냥 재미있다.

창경원(당시 명칭, 일제에 의해 격하된 창경궁의 명칭으로 1983년에서야 원래 이름으로 환원됐다)의 동물사육사가 "우리나라에도 기린이 들어와서 아이들이 보고 기뻐했으면…"하고 바랄 때는 너무 정감이 가 혼자 킥킥 웃기도 한다.

 

그 뿐인가. 새해 소망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정확히 보여준다. 인기 탤런트가 "작년에 못 단 전화를 올해는 꼭 다는 게 꿈"이라고 말하고 60년대 성악가는 이탈리아 극장 무대에 서보는 게 필생의 소원이라고 말한다. 한 택시 운전사는 우동을 먹다 흑진주를 씹기를 바라는가 하면 항공사 스튜어디스는 국제선 노선이 늘어 외국 운항 승무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100인의 새해 포부
1967.01.01 [경향신문] 11면

 

 

 

 

먹고 살기 힘든 60년대 "봉급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 오길"

 

 

새해 첫 꿈. 신인들 63년의 설계
1963.01.04 [동아일보] 5면


10년 단위로 60년대와 70년대의 소망도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무엇보다 먹고 살기가 정말로 힘들었던 시절엔 이뤄지지 않겠지만 꼭 이루고 싶은 꿈’으로 해외여행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그게 안 되면 국내여행이라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70년대엔 책읽기, 글쓰기 등 자기계발을 위한 소망이 많이 나오고 자유와 인권을 말하는 지성인도 눈에 띈다.

 

지금부터 47년 전인 63년, 성악가 이규도 씨는 '새해 첫 꿈'을 통해 이태리 라 스카라 좌 무대에 쥬제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서 커튼콜을 받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다. '사랑의 묘약'을 함께 부르다 박수를 받았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것이다.

같은 란에서 배우 신성일 씨는 "뉴욕의 엑터스 스튜디오 같은 데 가서 한 1년쯤 흠씬 스타수업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66년, 지휘자 김만복 씨는 '새해 민성(民聲)'을 통해 "우리는 너무 우물 안 개구리다"고 자탄하며 "예술인의 해외진출을 위한 정부 원조도 없었지만 예술인들이 한 덩어리가 돼 정부를 설득할 능력도 없었다. 이젠 해외진출이 활발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가 변종하 씨는 "'국가재건'은 국민정서 문제를 중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국가 체면을 위해서라도 현대미술관이 건립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음악가들이 거의 국내에서만 활동할 뿐, 해외활동이 미미했으며 현대미술관이 없어 화가들이 창피스러워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경제 부양에만 관심이 많았는지 예술가들의 불만이 컸다.

 

 

 

무용가 임성남 씨는 "국립극장의 66년 공연예산이 9백만원에서 4백만원으로 무자비하게 삭감됐다."며 도대체 국립극장 존립 이유가 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알려준 건 무엇보다 어느 주부의 민성이었다. 박00씨는 "한 해 동안 절약이란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아무리 절약을 해도 모자라는 살림이었다."면서 "새해엔 제발 그렇게 아껴 쓰지 않아도 조금은 저축도 할 수 있는 삶이면 좋겠다."고 바랐다. 그러면서 물가가 오르면 월급도 좀 오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부업거리도 늘어나기를 소망했다

 

먹고살기가 워낙 힘들어 설까. 67년엔 공무원, 교사들이 봉급 좀 오르면 좋겠다는 소망을 끝없이 피력했다. 동대문경찰서 수사주임은 "민폐를 끼치지 않고도 최저생활을 할 수 있게 보장해 주면"하고 바랐고 중부경찰서 순경은 "이 고달픈 검정제복을 벗기에 미련이 없는 새 직장이 나서기를" 희망했다. 당시 ‘민폐’란 경찰 사회에서 '약간의 뇌물'을 의미했다.


새해에 붙이는 민성
1966.01.01 [경향신문] 11면

 

 

 

또 한 국민학교(초등학교의 옛 이름) 여교사는 "봉급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대전시청 행정주사(주무관)는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연금수당이나 가족수당을 주면 좋겠다."고 했다. 한 유명 작곡가도 "만날 작곡만 할 게 아니라 나도 사장자리 하나 땄으면 싶다"고 해 돈 벌어 먹고살기가 만만치 않음을 은연중 내비쳤다. 

 

단성사 선정부장은 "돈이나 실컷 벌어 2층 집을 짓고 싶다"고 했고 택시운전사는 우동 속 흑진주 발견을 염원했다.

재미있는 것은 인기를 끌던 가수 최희준·현미 씨가 "살을 좀 빼고 싶다"는 소망을 공개리에 피력한 것. 한 사람은 "뚱뚱해 보행이 곤란할 정도"라고 했고 다른 이는 "지금 16관이 나가는데 1관 반 쯤 빼야겠다."는 계획을 공표했다.

 

 

 

여류한국 새해의 소망
1968.01.01 [경향신문] 11면


68년엔 여류 유명 인사들의 새해소망이 눈길을 끌었다.

이희호 여성문제연구회장은 "지난해 절실히 느낀 게 직장여성의 무력하고 처량한 신세였다."며 직업여성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줄 상담소를 열고 싶다고 밝혔다.

 

작가 최정희 씨는 "정동 아파트 6층에 살며 걸어올라 다니는데 엘리베이터가 생기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꿈을 신문에 실었다.

또 홍신영 간호협회장은 "대중음식점 웨이트리스가 간호원(당시 명칭) 캡을 쓴 걸 더러 보는데 올해엔 요식업자들을 설득해 꼭 그걸 벗기고 싶다"고 별렀다.

 

황온순 한국보육원장은 "1만2천명에 이르는 전쟁고아가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다"며 "제발 각 가정의 양자 양녀로 들어가기를 기원"했다.

 

 

 

 

살림살이 나아진 70년대, 건강·여가생활에도 관심

 

 

70년대에 들어서며 사람들의 소망은 조금씩 바뀌어갔다. 먹고 살기가 다소 안정되어서인지 업무 관련 소망이 늘었다. 또 건강을 생각하고 여가생활에 눈을 돌렸으며 재충전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는 얘기가 나왔고 책을 더 많이 읽겠다는 사람도 적잖았다. 물론, 형편이 나아졌다곤 해도 서민들은 여전히 어려운 살림살이에 볕이 들기를 고대했다.

 

71년 영화배우 윤정희 씨는 "지난해 저질영화 시비로 인 불명예를 씻고 건전하고 밝은 향토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했다. 연극배우 김동원 씨는 장충동에 신축중인 국립극장이 빨리 완공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로 미루어 국립극장 공사가 지지부진했으며 극장이 완공되면 그 자신이 첫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세운 것으로 풀이됐다.

 

76년은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 무대에서 첫 금메달을 따낸 해다. 주인공은 레슬링의 양정모 선수. 그는 그해 첫날 몇 신문에 밝힌 소망을 통해 "올해는 한국 스포츠가 올림픽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따는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며 "그 주역을 내가 맡아 조국에 영광을 안기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76인의 소망
1976.01.01 [동아일보] 5면

 

 

 

그해 농구선수 박찬숙 씨는 "현재 키가 191cm인데 4cm만 더 커 동양 제1의 센터가 되고 싶다"고 했다. 키가 더 컸는지는 모르나 그는 동양 제1의 센터로 군림했다. 탁구선수 이에리사 씨는 어깨부상에서 회복해 여자단식에서 8연패 하기를 염원했고 프로복서 유제두 씨는 모든 게임을 KO로 이겨 타이틀을 방어하고 싶어 했다. 프로레슬러 김일 씨는 "문화체육관이 매일 만원이 될 정도로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명 인사들은 대개 자기계발을 새해 소망으로 꼽았다. 김재규 건설장관, 김우중 대우 사장, 김준성 제일은행장, 김봉재 중소기협회장 등이 더 많은 독서를 새해 목표로 제시했다. 남덕우 부총리는 하루 2갑 피우는 담배를 줄여 건강을 살피겠다고 했고 영화감독 유현목 씨는 등산과 바다낚시에 빠져보겠다고 밝혔다. 서울의대 한용철 교수는 "전매청에서 의학계 권유를 받아들여 담배가 몸에 해롭다는 경고문을 붙이기를" 소망했다.

 

코미디언 구봉서 씨는 "거꾸로 매달려서라도 오래 살아야겠다."며 무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임희춘 씨는 "열심히 웃기고 벌어 고아원 양로원을 돕겠다."고 밝혔다. 중앙관상대(기상청) 김동완 통보관은 "하늘을 보고 걷는 버릇이 없어지기를" 바랐고 롯데 야구단 감독은 "인기도 없고 의욕도 상실한 성인야구에 신풍이 몰아치기를" 기원했다.

 

 

 

 

수많은 소망과 염원이 뭉쳐 이뤄진 오늘의 한국

 

 

'용'해 아침에 들어보는 100인의 한마디
1976.01.01 [경향신문] 9면


물론, 보통사람들의 소망은 더 절실했다. 한 어민은 "일반물가가 뛰는 것만큼 생선 값도 오르기를" 바랐고 은행원은 "찌든 월급봉투가 부풀던지, 아니면 정년퇴직 송별연을 받아보는 행운을 잡든지" 둘 중 하나를 소망했다.

택시 운전사는 생활보장을 위한 월급제를 희망했고 어느 음식점 주인은 "분식 날을 없애고 잡곡을 일정부분 섞게 하여 음식점마다 특색 있는 식사를 제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우편집배원은 "우편번호와 주소를 정확히 써주고 고층건물에는 우편함을 모두 설치해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반면 전화교환수는 "시외전화 이용자들이 전화 걸기 전에 이용방법을 잘 알고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해 새집을 장만한 주부는 "은행 빚 갚기 위해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겠다."고 밝혔고 가톨릭 신부는 "모두가 인간 존엄성과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이 뭉치고 결실 맺어 오늘의 한국이 이루어진 것 아닐까. 한 사람에겐 작은 소망일지라도 그것이 나라의 힘, 인류의 발전 동력이 된 것은 아니었을까. 21세기 두 번째 10년을 맞으며 또 얼마나 많은 소망이 나라 전체를 감싸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지난 신문에서 지난 이들의 소망을 읽는 것은 미래 후손들이 오늘 우리의 소망을 읽으며 느낄 것만큼이나 경이롭다.

옛날 사건기자들의 훈련법은 독특했다. 사건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무조건 희생자의 살아있을 때 얼굴사진부터 구하게 했다. 여러 명이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면 졸병 기자는 사망자 집을 일일이 돌며 사진부터 챙기는 게 일이었다. 기사를 잘 쓰는 것과 별개로 신문들은 그런 사진을 얼마나 더 많이 싣느냐로 경쟁을 벌였다.

 

 

 

'미션 임파서블' 사망자 사진을 구해라

 

 

요즘 같으면 초상권 때문에 어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데스크들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얼굴 사진이 들어가야 독자에게 사건사고의 현실감을 생생히 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알고 보면 사망자의 인생스토리나 주변 얘기 등 부가가치 높은 기사를 취재하고, 유족한테 사진을 얻어올 정도의 협상력과 순발력을 키워주려는 ‘기자 만들기’ 의도도 있었다.
 
사람이 죽었는데 신문에 쓰라며 기자에게 선선히 사진을 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범죄와 관련되면 더욱 그렇고, 전혀 자기 잘못이 없는 엉뚱한 희생자라도 슬퍼하는 유족에게서 사진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자칫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따귀라도 얻어맞기 십상이다. 회사에선 어떻게든 사진을 구하라 하고, 다른 사 기자는 이미 사진을 구해 간 것 같고, 유족들은 사진을 줄 생각조차 안 하고…. 이럴 때 초짜 사건기자는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 사진만 준다면 정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기동에 일가족 「연탄가스 중독」사건
1961.11.28 [동아일보] 2면

 

 

 

때문에 얼굴사진을 둘러싼 기자들의 애환이 적지 않았다. 투신자살 현장을 목격하고 사망자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내다 시민들에게 뭇매를 맞은 기자도 있었다. 어느 기자는 유족들이 모두 영안실에 간 사이 희생자 집에 몰래 들어가 앨범 등 사진을 싹쓸이했다 고발당했다.

 

 

 

지하세방 자취 고교생 5명 연탄가스 사망
1990.04.12 [동아일보] 19면


학교나 직장, 심지어 장례식장에 찾아가 수사경찰인 양 속이고 사진을 빼내는 수법도 많이 써먹었다. 사실상 절도죄에 해당하는 범죄인데도 경찰은 공익 차원이라고 여겨선지 적당히 눈을 감아주었다.
 
신문은 어린이 사고의 경우 더 사진에 집착했다. 누구나 관심 갖고 분노하는 일인 만큼 기사가 완벽해야 하며 사진은 바로 완벽의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사건 데스크는 "어린이 사건은 취재는 나중에 하더라도 얼굴사진이나 현장사진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기자들을 다그쳤다. 사진이 나가야 독자의 관심과 동정을 산다는 거였다. 그런 다그침 때문인가, 사진을 못 구하면 아예 기사를 송고하지 않는 기자도 있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비닐하우스 촌 가족에게 닥친 연탄가스 사고

 

 

꼭 그런 경우는 아니지만 기자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70년대 중반, 영동지역 개발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밤새 폭설이 내려 서울시내 교통이 온통 엉망이 된 날 아침 동부경찰서에 들렀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형사가 슬쩍 팔을 잡더니만 귓속말을 건넸다. "참 묘한 사건이 생겼는데…. 혹시 취재차 있으면 함께 가보는 게 어때?"

 

특종을 주겠다는 얘기, 사정을 하면 했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기자가 눈치 챌세라 바삐 경찰서를 빠져나와 차에 올랐다. 형사는 차에 타자마자 "현장은 개포동"이라고 일러줬다.

당시는 강남 택지 개발이 한창이고 인구도 빠르게 늘고 있지만 강남지역을 관할할 경찰서 한 곳도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다. 큰길을 빼곤 거의 비포장이고 대중교통 차편도 별로 없었다. 성동구 자양동 동부경찰서에서 개포동까지 가려면 2시간은 족히 걸렸다.


연탄가스 사망 28년간 6만명
1982.05.04 [경향신문] 7면

 

 

 

사건은 비교적 단순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던 어린이 3명 중 2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숨진 사건이었다. 물론 어린이가 관련됐으니 주목도가 높은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단순히 연탄가스 중독 사고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형사의 이어지는 설명이 여운을 남겼다. "그게 말이야, 아이들 부모들은 다른 비닐하우스에서 잤다는 거야. 물론 그쪽은 멀쩡하다는 거고…."
 
무슨 소리, 그럼 타살이라는 얘기? 놀라 묻는 기자에게 형사는 자신도 현장에 못 가봤기 때문에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했다. 다만 오랜 형사의 감으로 타살은 아니고 사고사가 분명한 것 같은데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가스 중독 사건을 전화로 신고한 사람(아마 통장이나 이장이었던 듯하다)에게서 들은 얘기를 고스란히 전했다.

 

 

 

 

어른들이 먼저 일어나 아이들 방에 가봤더니..

 

 

연탄가스 중독 곳곳서 식초특효
1977.02.22 [동아일보] 7면


개포동 근처 비닐하우스 촌에 각각 아이들을 둔 홀아비와 과부가 살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몰랐으나 아이들이 친해져 비닐하우스를 오가며 노는 바람에 각자의 사정을 알게 됐다.


남자건 여자건 생계수단이 막막해 재혼은 생각지도 않았으나 사정을 알면서 마음이 변했다. 어린 아이들도 새 엄마 새 아빠가 생기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가난한 두 사람은 식을 올릴 생각은 못하고 합방 날만 잡았는데 밤새 눈이 내린 어제가 바로 그날이었다.
 
어른들이 한쪽 비닐하우스에 신방을 차리고 아이들은 다른 하우스에 자도록 했다. 아침이 되어 어른들이 먼저 일어나 아이들이 자는 곳에 가봤더니 연탄가스에 중독돼 신음하고 있었다. 그러잖아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길이 폭설 탓에 완전히 끊겨 의사를 부를 수도 없었다. 비닐하우스 동네 사람들이 모여 김치 국물을 떠먹이는 등 난리를 쳤으나 회생하지 못했다. 부모들은 넋이 나가 울고만 있다….

 

 

 

형사의 얘기를 듣는 동안 취재차는 지금의 강남경찰서 부근까지 왔다. 운전기사는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온통 흰 눈에 덮인 둑길과 들판 저 너머로 높은 산이 보였다(아마 삼성동 근처 탄천 둑길에서 대모산을 바라봤을 것이다). 산 밑에 사고가 난 비닐하우스가 있다는데 눈밭을 헤치고 걸어간다 해도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한두 발 디뎌봤지만 거의 무릎까지 눈에 빠졌다. 형사도, 기자도 난감했다.

 

 

 

 

눈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한 아이의 죽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아무도 현장에 가지 못했다. 사연이 안타까워 기사만이라도 송고하려 했으나 결국 그것도 포기했다. 사진부터 구하라는 데스크 지시가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찰조차 확인하지 못한 현장상황을 전해들은 말만 믿고 보도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또 신문에 보도되면 형사는 자세한 상황보고를 올려야 하는데 그의 입장을 생각해서도 덜컹 들은 대로 기사를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형사는 우선 '폭설로 현장 접근 불가. 계속 수사 중' 보고서를 올리겠다고 했다. 경찰서 사건접수부에는 '연탄가스 중독'이라고만 쓰고 사망자 발생여부도 기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체 검안도 못했으므로 상황보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반장에게 알리고 길이 열리면 후속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입장도 고려해 다른 언론사에서 사건을 취재하지 못하게 보안을 지키겠다는 말도 했다.


연례의 「부엌 사신」 연탄가스
1982.10.19 [경향신문] 7면

 

 

 

그러나 눈 녹으면 현장에 가 어린이 사진을 구하고 가슴 아픈 사연을 신문에 실으려던 계획은 또 어그러졌다. 그날 밤 느닷없이 지방출장 명령을 받은 것. 출장 중 몇 차례 형사에게 전화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요즘처럼 휴대전화가 있는 시절도 아니어서 그 일은 서서히 잊혀졌다.

 

사건발생 열흘 정도가 지난 다음에 담당형사를 다시 만났다. 다른 사건을 배당 받아 바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현장에 갔을 때의 상황을 얘기했다. "두 명 죽은 게 아냐, 한명만 죽었어. 통장이 전화로 잘못 얘기한 거야. 단순 가스중독이고…타살혐의 일체 없어. 단순사고로 서류보고하고 끝냈지." 한참 지난 얘기를 쓰면 데스크에게 핀잔을 들을 게 분명했다. 사건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가슴은 먹먹했고 눈시울은 뜨거웠다. 지금도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한 어린이의 죽음이 머릿속에 아른거린다.

70년대 신문은 석간이 주종을 이루었다. 서울에서 발행하는 종합일간지 7개(경향 동아 서울 신아 조선 중앙 한국) 중 5개가 석간으로 나왔다.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낮 12시, 직장인들이 점심식사를 하러 나올 무렵이면 광화문 중심가는 '떡집에 불난 듯' 소란스러워졌다. 신문소년들이 저마다 가판신문을 들고 뛰며 "오늘자 00신문!" "방금 나온 xx일보!"를 외쳐댔던 탓이다.

 

 

 

하룻밤 사망자의 절반이 연탄가스 희생자이던 그 시절

 

 

가판소년들은 특종기사엔 빨간 색연필을 쫙쫙 그어놓고 독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얼굴엔 신문 잉크까지 묻힌 채 흥미로운 기사 제목을 고래고래 불러 재꼈다. 어떤 소년들은 노래하듯 운율을 맞춰 사건사고의 내용을 줄줄이 꿰기도 했다. 그런 모습이 좋아서 일부러 특정 신문소년에게 따끈따끈한 갓 나온 신문을 사가는 독자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가판소년들은 독자들이 선호하는 기사를 기자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정부의 요식적인 발표 같은 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사건특종이나 큼지막한 사고 뒷이야기, 연예인 가십 같은 것을 외쳐 호기심을 자극했다. 엽기적인 사건은 그들의 단골메뉴였다.

 

기자들은 기자들대로 어떤 기사가 가판소년의 호객거리 제목으로 뽑히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초년병 사건기자들일수록 더욱 그랬다. 발표 기사나 받아쓰던 선배 부처출입기자들과는 달리 사건기자는 새벽부터 자정까지 발로 뛰어 기사를 썼다. 


연탄가스 무방비.. 서울시 백명중 세명이 중독
1975.11.17 [경향신문] 7면

 

 

 

새벽 4시 통금이 풀리면 바로 집을 나와 병원과 경찰서를 돌며 사건사고를 챙겼다. 병원에선 시체실과 응급실은 필수적으로 체크 해야하는 곳이었다. 아직 경찰에 접수되지 않은 사건의 희생자가 꼭 있기 마련이었다. 당직 의사나 간호사 중엔 밤새 들어온 주요 환자 리스트를 만들어 새벽에 처음 들르는 기자에게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당시엔, 조금만 과장해 말하자면 병원에 안치된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연탄가스 희생자였다. 날이 궂거나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날은 하루 20명 가까이 사망자가 나왔다. 숨진 이들에겐 안 됐지만 기자들은 연탄가스사고 취재를 제일 귀찮아 하고 싫어했다. 가스사고가 워낙 흔하다 보니 기사가치가 떨어진 탓이었다.

 

 

 

 

취재 위해 찾아간 연탄가스 희생자 가족의 방안에는..

 

 

일가 6명이 가스 중독.. 세명 죽고 세명 중태
1962.03.14 [동아일보] 3면


그렇다고 데스크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항상 뒷이야기를 원했다. 죽은 이들 사진을 구하면서 '감동의 인생 스토리' 같은 읽을거리를 만들어 오라고 다그쳤다. 데스크들은 "못사는 이들 죽음 뒤엔 언제나 짠한 사연이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졸병기자들은 사건사고 희생자의 집에까지 찾아가 탐문취재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다. 한 방에서 포개자던 일가족이 가스에 중독돼 숨진 사건이었다. 이웃에서 발견했을 당시 창문 옆에서 자던 1명만 살아있어 급히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그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간호사는 "아마 대여섯 명이 포개어 자다 변을 당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비운의 가족 스토리를 취재하려 기자는 새벽부터 물어물어 산동네 현장을 찾아갔다. 이른 새벽이니 당연히 아무도 없으려니 싶어 벌컥 방문을 열어 재꼈다가 그만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다. 가스냄새와 사망자의 토사물 냄새가 훅- 끼쳐 나오는 어두컴컴한 방 한구석에서 누군가 웅크려 장롱을 뒤지고 있는 것 아닌가.

 

 

 

소스라치게 놀라 "누구냐?"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장롱을 뒤지던 이도 놀란 듯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눈물을 흘렸는지 눈자위가 뻘겠다. 방 한가운데 펼쳐진 이불 속엔 가스중독 사망자들의 시신이 엎어져 있었다. 잠깐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입은 떼지도 못한 채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그의 손에 사진이 들려있는 것 아닌가.


기자였다. 막 수습교육을 끝내고 사건기자로 투입된 첫날, 선배들이 가스중독으로 숨진 일가족 사진을 챙겨오라고 지시한 거였다. 방 밖으로 나와서도 그는 부들부들 떨었다. 헉헉대며 숨을 쉬어 입에서 김이 계속 올라왔다. 한겨울 새벽의 한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무서움에 떨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마 그는 생전 처음 시체들 속에서 혼자 사진을 뒤졌을 터였다. 처음엔 멋모르고 방안에 들어갔는데 고무줄을 맨 여닫이문이 닫히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고 겨우 숨을 돌린 그는 "사진이건 뭐건 이제 더는 못 찾아…"라고 중얼댔다. 결국 그는 얼마 안 가 기자를 그만 두고 말았다.

 

 

 

 

그 시절, 추운 겨울을 나게 해준 고마운 연탄

 

 

연탄가스 사고처럼 한꺼번에 일가족이 떼죽음을 당하는 사고도 드물다. 가난 탓에 단칸방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가족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떤 가족은 연탄은 때는 둥 마는 둥 서로의 체온으로 냉골 방을 덥히려고 한방 한 이불을 쓰다 사고를 당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다른 방에서 잤지만 낮은 기압 탓에 방방이 가스가 스며들어 몰사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가스사고의 증가는 빠르게 진행된 도시화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판잣집, 블록 집 등 날림집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졌다. 대충 구들장을 놓고 비닐 장판을 깐 뒤 아궁이와 굴뚝 역시 그럭저럭 시멘트만 발라 집을 지었으니 가스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었다. 집장수들이 판박이로 지어 파는 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시골에서처럼 나무를 땔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싼 기름보일러를 놓을 형편도 안 되는 도시생활에서 연탄은 처음엔 참 고마운 연료였다.


연탄중독 시공 잘못이 65%
1978.10.13 [동아일보] 7면

 

 

 

우선 가벼워(약 3.6kg) 운반하기 좋았다. 또 보관하기도 편했다. 불이 꺼져도 다시 빠르게 붙일 수 있는데다 탄을 갈기도 쉬웠다. 서민물가로 정부가 통제하기도 했지만 가격도 어느 정도 합리적이어서 서민들이 사기도 편했다. 그때는 동네마다 쌀가게나 반찬가게가 연탄가게를 겸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40∼50대라면 한번 쯤 자다 말고 일어나 아궁이 연탄불을 갈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형제가 많은 집은 아예 당번제로 연탄 갈이를 시키기도 했다. 연탄 갈기의 첫 번째 요령은 시간 맞추기, 두 번째는 아래 구멍과 위에 얹는 연탄구멍을 정확히 맞추는 거였다. 구멍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불이 붙지 않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심하게 났다.


구공탄(九孔炭. 공기구멍이 뚫린 탄이란 뜻으로 일본서 처음 나왔다. 구멍탄이라고도 하며 서울에선 구멍 19∼22개가 뚫린 연탄을 썼다. 19개의 구멍이 뚫린 탄은 십구공탄이라고 불렀다.) 2∼4개 정도면 밤새 방 하나를 충분히 덥혔다. 거기다 취사는 물론 난방에 목욕물까지 제공했으니 연탄은 빠르게 도시연료, 국민연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가난이 남긴 상흔, 연탄가스 중독 사고

 

 

공군참모 총장집서 운전병 4명 중독사
1960.11.17 [동아일보] 3면


그러나 연탄은 겨울을 따뜻하게 나게 도와주는 친구만은 아니었다. 온기를 주는 대신 '소리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 1971년 제1회 가스중독 학술세미나에서 서울의대 연구진은 54년부터 71년까지 경찰에 신고 접수된 가스중독 사망자가 12,653명이나 됐다고 보고했다. 그 숫자는 10년 후인 81년, 6만 명으로 급증했다. 정확한 통계를 잡지 못하던 시기이니 숫자가 들쑥날쑥하지만 어쨌든 한해 5천 명 가량이 가스중독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가스사고가 피크를 이룬 70년대에 한해 3천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게 지금은 정설로 돼있다. 그만해도 엄청난 숫자였다. 거기다 사망자의 거의 100%는 돈 없고 힘없는 서민들이었다. 60년대 초 공군참모총장 집에서 운전병 3명이 연탄가스에 중독, 숨진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총장 집에서 기름보일러 대신 연탄을 땐다는 게 화제가 됐다. 그만큼 있는 사람들은 연탄을 멀리했다는 증거다.

 

 

 

80년대 들어 사정이 조금씩 달라졌다. 83년 전국 830만 가구 중 연탄을 때는 집은 550만 가구였다. 280만 가구가 보일러를 쓰거나 중앙난방이 되는 아파트에 살게 됐다는 얘기다. 또 연탄을 때는 집도 서둘러 구들장과 아궁이를 뜯어 고치고 가스 경보기, 방출기 등을 달아 사고를 미리 방지하고 나섰다.

 

기자 동료 한 명은 '추억의 연탄 구이' 음식점엔 절대 가지 않는다. 처음엔 왕년의 가스사고 취재에 데어 그러려니 했다. 그런 그가 최근 속내를 털어놨다. "사실 나도 가스에 중독돼 죽을 뻔 했어. 그런데 회복해도 뇌손상이 심각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잖아, 밝힐 수가 없더라고…. 나는 요즘도, 하다못해 타고남은 연탄재만 봐도 가슴이 울렁거려." 아, 가난했던 시절의 상흔이여!

 

기존의 관습과 색다른 현상이 나올 때 언론은 대체로 어떻게 반응할까. 특히 문화적으로 전혀 새로운 트렌드와 마주하면 언론은 어떤 입장을 취할까. 새것(뉴스·news)을 좇는 매체의 본질상 이 새 현상에 호의적 태도를 보일까, 아니면 비판적일까. 그도 아니라면 호오(好惡)감정을 유보하고 사실보도에만 그칠 것인가. 기존 패턴과 다른 인물이나 현상이 대두될 때 당시 언론보도를 찾아보는 것도 옛날신문을 골라 읽는 재미 중 하나다.

 

 

 

60년대 청춘문화 키워드, 비틀즈의 등장  

 

 

20세기 팝음악의 가장 성공적 밴드로, 사회 문화적 혁명까지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비틀즈. 그들의 출현과 성공, 극성 팬의 등장과 요란한 에피소드, 그리고 결국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보도한 옛날신문을 읽다보면 여기저기서 재미있는 얘기를 찾을 수 있다.

 

1963년 'she loves you(그녀는 널 사랑해)'와 'I wanna hold your hand(당신 손목을 잡고 싶어)'를 잇달아 히트시켜 영국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한 비틀즈의 얘기는 이듬해인 64년 2월 한국 신문에 처음 등장했다. 자회사인 동아 방송의 '탑 튠 쇼'를 통해 그들 노래를 처음 소개한 동아일보가 미국 순회공연에 나선 비틀즈의 분석 기사를 실은 것.'소음인가 노래인가 - 비틀즈라는 이름의 재즈' 라는 제목의 박스기사는 새로 등장한 이 청년들이 영 마땅치 않은 듯 기사 서두부터 사뭇 비꼬는 투다.


소음인가 노래인가. '비틀즈'라는 이름의 재즈
1964.02.13 [동아일보] 6면

 

 

 

"맘보, 로큰롤, 차차차, 트위스트를 무색케 하는 새로운 형식의 재즈가 신사도의 본고장인 영국에서 발생하여 방금 세계에 퍼져가고 있다"고 전제하더니 "잘 생기지도 않은 용모에 눈썹까지 머리를 덮어 내린 비틀즈는 소음인지 노래인지 분간키 어려운 기성으로 노래를 부르며 몸을 비꼬고 하여 이른바 비틀즈 스타일을 창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사는 "그들은 1년 전만 해도 코카콜라나 마시며 재즈를 즐기는 아마추어에 불과했다"면서 "그들이 우연히 목소리를 합하여 제멋대로 부른 노래가 디스크로 팔리기 시작하자 이 더벅머리 총각들의 노래와 춤에 도취한 영국 틴에이저들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기성을 발하며 심지어는 졸도하는 사람까지 생길 지경"이라고 소개했다.

 

'잘 생기지도 않은' '소음인지 노랜지' '몸을 비꼬고' '우연히 목소리를 합해' '제멋대로 부른' 에다 '미친 듯이' '기성을 발하며' 등 가수와 청중까지 싸잡아 한껏 깎아 내리는 형용구를 골라 쓴 흔적이 역력하다. 마치 '서구에서는 도대체 왜 이런 자들이 생기고, 또 사람들이 거기에 미쳐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더니 결국 기사 말미에 "아무튼 비틀즈는 세계를 향해 새로운 음악과 춤을 유행시키는 '괴물들'이다"고 결론지었다.

 

 

 

 

열광하는 젊은이들 행태, 언론은 불만적으로 표시

 

 

비틀즈 선풍, 은막에까지
1964.07.20 [경향신문] 8면


한국 독자들에게 이렇게 처음 소개된 비틀즈는 그러나 미국에서는 정말로 공전의 인기몰이를 했다. 가는 곳마다 환호하는 틴에이저들에게 둘러싸였고 언론은 그들의 순회공연을 '브리티시 인베이젼(British invasion · 영국인의 침공)이라고 불렀다. 비틀즈가 출연한 에드 설리번 쇼는 시청자가 7천만 명이 넘는 경이적 기록도 세웠다.

 

첫 기사가 나간 꼭 일주일 후 동아일보는 이번엔 '비틀즈 선풍 오래 못갈 듯'이란 미 사회학자의 분석 기사를 실었다. 하버드대학의 데이빗 리이스먼 교수는 이 기사에서 "비틀즈는 엘비스 프레슬리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반성적(性的)이고 반 노골적인 가락을 갖고 있지 않다"면서 비틀즈 선풍은 엘비스 선풍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라고 단언했다. 교수는 특히 "엘비스는 음악이나 그 자신이 깡패 같은 건방진 냄새를 풍겼다"고 주장, 비틀즈에겐 그런 야릇한(?) 성적 매력이 없음을 시사했다.

 

 

 

2월말에는 비틀즈의 음반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시됐다. 물론 라이선스는 아니었다. 동아 방송 전파를 탄 '그녀 손목을 잡고 싶어' 등 비틀즈 노래에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사냥개'를 모아 미미 레코드사가 만들었다. 이때 신문은 레코드 출시 기사를 쓰면서 말미에 "우리나라 틴에이저들도 비틀즈에 미치고 말 것인지?"라고 여운을 남겼다.

 

 

 

4월에는 경향신문이 '세계의 사회면'난을 통해 비틀즈 분석에 나섰다. '회오리 물결 비틀즈' 제하 기사에서 신문은 이들을 우선 "보잘 것 없는 영국 동(童·아이)"이라고 깔아뭉갰다. 그리고는 "네 명의 묘한 꼴을 한 젊은이가 바로 비틀즈 선풍의 장본인"이라고 범인 다루듯 소개하고 "이들의 창법이란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니다. 로큰롤에다가 요란스레 망치를 두들기며 빽빽 소리 지르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역시 '15개월 전엔 담배연기 자욱한 리버풀 지하 재즈 홀에서 그저 이름 없이 노래나 부르던 존재' '21세부터 23세까지의 애송이들'이라며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 비틀즈의 특이한 이발법이 영국 청소년은 물론 성년에까지 미쳐 "꼭 뚜껑을 덮은 것 같은 머리들이 런던시내에 범람하고 있다"고 전했다.


회오리 물결 「비틀즈」
1964.04.13 [경향신문] 8면

 

 

 

 

더펄머리와 깔끔한 양복의 청년들, 전 세계를 공습하다

 

 

비틀즈에 맞선 "대머리 데모"
1964.04.03 [동아일보] 3면


언론은 비틀즈의 음악적 성과나 완성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용모와 거기에 미쳐 환호하는 젊은이들의 행태에만 불만이 많았다. '장발 뚜껑 머리를 모포처럼' 흔들고 '미치광이 춤사위'에 어린 청중들이 '울부짖고 기절하는' 현상에 대해 항상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이 비틀즈 형 더펄머리를 기른 젊은이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머리를 박박 깎아버리라고 명령한 기사를 의미 있게 다뤘다. 또 영국 공안위원회가 찰즈 왕자의 헤어스타일이 비틀즈를 닮았다고 분개했다는 뉴스나 일단의 독일 군인들이 비틀즈 선풍에 반발해 머리를 깎아 율 브리너 스타일의 대머리를 만들었다는 토픽 기사도 외신면에 비중 있게 보도했다.

 

 

 

1966년 여름에는 비틀즈가 일본과 필리핀 등 동남아 순회공연에 나섰다. 이때의 행태가 또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극성 오빠부대의 열렬한 환영이, 필리핀에서는 마르코스 대통령 부인 이멜다 여사의 초청을 받고도 비틀즈가 응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았다. ‘동남아 휩쓰는 비틀즈’란 기사는 첫 문장부터 비틀즈 선풍을 비판하고 나섰다.

 

"수 십 년 후에는 사가(史家)들에 의해 세기적인 농담으로 진단을 받을지도 모를 광폭한 음악의 사절 더 비틀즈가 최근 동남아를 찾아 법석을 떨고 있다"고 운을 떼더니 "한여름 무더위도 아랑곳없이 더벅머리를 해갖고 일본 필리핀을 휩쓸며 비틀즈 마니아의 수를 자꾸만 늘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특히 일본의 비틀즈 팬은 물경 3백만인데 "그중 20만은 거의 미치광이들, 대부분 15-16세의 청소년"이라고 노골적인 적개심을 드러냈다.

 

어느 근엄한 논설위원은 칼럼을 통해 "괴상도 하다. 동경에서 보내온 보도사진을 보니 비틀즈 공연을 보고 나오는 일본 여학생들이 울고 있다"면서 누구는 영화에서 봤던 얼굴보다 여위었다고 울고, 자기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고 울고,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울고, 그저 덮어 놓고 울고 싶다고 해서 울고…라며 한심하다는 듯 얘기를 풀어 나갔다.

 

 

 

칼럼의 백미는 마지막 문장에서 드러났다. "런던에 돌아간 비틀즈가 필리핀을 욕하고 있다. '다시 갈 일이 있다면 이번에는 수소탄을 들고 가야겠다.'는 것은 익살이 아니라 독설이다. 비틀즈의 매력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나 그들에게 광적인 눈물을 쏟을 줄로 알다가는 코 다친다. 너무 까불면 국제친선에도 누를 끼칠 것 같다." 한마디로 "까불면 다친다."는 경고다.

 

독자들도 나섰다. 66년 7월 동아일보에 투고한 독자는 비틀즈 광풍에 대해 "부유하고 여유가 많은 그들이야 무슨 짓들을 하건 우리나라 실정으로써 과연 허용될 수 있는 것들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 "자유중국(대만)에서는 (경찰이 장발머리를 깎아) 까까중을 만들고 요르단에서는 입국을 거절한다는데 각 나라의 실정과 장래성을 생각하는 장한 일"이라며 우리도 강제로라도 이런 폐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남아 휩쓰는 비틀즈
1966.07.06 [경향신문] 7면

 

 

 

 

해체됐지만 그들의 전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사과하는 비틀즈
1966.08.13 [동아일보] 4면


젊은이들의 폭발적 인기를 얻는 만큼 철저한 혐오파도 늘어가던 판에 비틀즈의 이른바 예수 모독발언이 나왔다. 이 사건으로 결국 비틀즈는 공개 사과하고 순회공연을 완전히 접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발단은 멤버 중 존 레넌이 "비틀즈는 이제 예수보다 인기가 있다"고 기염을 토한 데서 비롯됐다. 그가 비틀즈의 더펄머리가 예수의 그것보다 유명하다고 했는지, 그냥 단순 비교법을 사용했는지는 불확실하나 이 말이 전해지자 미국의 방송국 음악담당자들이 비틀즈 보이콧 운동에 나선 것.

 

이런 가운데 한 언론인은 "레넌이 예수보다 더 인기가 있다고 말하는데 어느 누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그해 8월 미국 15개 주의 35개 방송국과 캐나다 마니토바의 한 방송국은 앞으로 비틀즈의 레코드를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방송인들은 "비틀즈의 음악적 재질은 별 것 아니다"고 비웃었고 이런 내용은 국내 신문에 상세히 보도됐다.

 

 

 

비틀즈는 이후 순회공연을 중단했다. 또 존 레넌,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 조지 해리슨 등 멤버들의 불화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결국 1970년 4월 이들은 해체했다. 인기 절정일 때는 그래도 "노래냐, 소음이냐?" "깨트릴 듯 마구 두드리는 음악" 등으로 분석하던 언론은 끝내 그들의 음악적 성과나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심도 있는 평가를 하지 못했다. 그저 ‘현대 대중음악은 비틀즈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는 얼버무리는 얘기만을 내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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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영상] 우주여행 떠나는 비틀즈의 노래…'Across the Universe'

이 곡은 NASA의 국제우주탐사망(DSN)의 거대한 안테나 3대를 통해 동시에 발사되며 빛의 속도로 날아가 약 431년 후에 북극성에 도착하게 된다.
기사원문 : 2009. 02. 04 [YTN]

1960년 4.19가 나던 해, 나는 미아리 고개가 건너다 보이는 돈암동에 살았다.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이웃 집에 경동고에 다니는 한 아이가 있었다. 야구선수였다. 그 친구로부터 백인천(白仁天)의 얘기를 처음 들었다. 그는 만날 때마다 백인천이 야구 천재라며 자랑을 늘어 놓았다. 야구를 전혀 모르던 나도 백인천이 그런 선수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백인천이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홈런을 날렸다며 야단이었다. 야구장 개장 이래 고교 선수로는 처음 날린 홈런이라고 했다. 지금은 흔하게 나오는 홈런도 그 시절에는 참으로 귀했던 것 같다. 백인천의 말을 빌리면 "공의 반발력도 그렇고 방망이 마저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홈런을 날린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고 했다.

 

 

 

서울운동장 고교선수 첫 홈런의 주인공

 

 

지금 와서 그 홈런을 날린 대회를 찾아보니 제15회 청룡기 쟁탈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서울시예선대회(60년 6월 8~15일 서울운동장 야구장) 경동고-휘문고 전이었다. 대회 이틀째인 6월 9일 오후 2시 15분 경동고 선공으로 시작된 이 경기에 4번 타자겸 포수로 출전한 백인천은 3회초 휘문고 투수 이명우(李明右)의 볼을 받아 쳐 왼쪽 담장을 훌쩍 넘기는 330피트(약 100m) 짜리 투런 홈런을 터트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홈런이 바로 서울운동장 야구장 개장 이래 고교 선수가 터트린 첫 홈런이 됐다.

 

경동고는 이 홈런을 포함, 30명의 타자들이 10안타를 터트린 끝에 8-1, 7회 콜드게임으로 휘문고를 가볍게 누른 뒤 본선행 티켓을 따냈다. 그러나 옛날신문을 보면 동아일보는 이 대회 자체를 기사로 다루지 않았다. 라이벌인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지역대회이기 때문인 것 같았다. 경향신문도 경기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스코어만 간단하게 처리했을 뿐이다.


고교시절의 백인천(오른쪽 두번째)
1960년 10월 15일 [경향신문] 4면

 

 

 

답답한 것은 백인천의 홈런이 솔로인지 투런인지, 이명우(투수)의 몇 번째 볼을 때렸는지 신문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홈런을 날린 백인천 자신도 기억하질 못했다. 그런데 백인천은 방망이에 대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첫 홈런이라 얼떨떨했다. 덕 아웃에 들어오며 방망이를 분명히 배트 박스에 넣었다. 그런데 5회초 내가 칠 차례가 돼 방망이를 찾았더니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누가 잽싸게 집어가 버린 것이다. 참 아까웠던 마음이 지금까지 가슴 속에 남아있다"

 

 

 

경동고 시절의 백인천
1960년 12월 15일 [동아일보] 3면


이 대회 결승전은 우천으로 이틀을 연기한 끝에 6월 15일에 열렸다. 경동고는 감독 김일배(金日培)를 비롯해 ① 김정호(金正浩, 중견수) ② 김휘만(金輝滿, 2루수) ③ 오춘삼(吳春三, 3루수) ④ 백인천(포수) ⑤ 이용숙(李鎔淑, 1루수) ⑥ 이영기(李英基, 우익수) ⑦김영민(金永敏) 현아남(玄雅男, 이상 좌익수) ⑧ 김영호(金英鎬, 유격수) ⑨ 이재환(李在煥, 투수)이 출전했다. 봄철에 있었던 제3회 전국4도시선발고교야구대회(4월 7~11일 부산)의 우승 멤버들이었다. 경기공고는 이에 맞서 천석규(千碩圭)가 선발로 나간 뒤 김재규(金在圭, 5회)가 이어 던졌다. 그러나 경동고의 적수가 되지 못됐다. 1-9 참패를 당해 우승을 놓쳤다.

 

경동고는 제15회 전국고교선수권대회 예선대회 우승의 여세를 몰아 본선인 제15회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6월 21~27일, 7월 16~18일 서울운동장) 결승전에서 부산상고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의 히어로는 역시 백인천이었다. 백인천은 1회 말 1사 주자 2, 3루의 찬스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부산상고 투수는 유백만(兪百萬). 강타자 백인천을 맞은 유백만은 긴장한 듯 1구는 볼, 2구도 역시 볼이었다. 그러나 3구는 작심한 빠른 볼로 복판을 찔렀다. 이를 놓칠 백인천이 아니었다. 가볍게 밀어친 게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적시타가 됐다. 단숨에 2점을 선취한 경동고는 3회와 7회에 1점을 보태 4-0으로 부산상고를 꺾고 대망의 청룡기를 품에 안았다. 서울의 고교 팀으로는 58년 경기공고에 이어 두 번째로 얻은 쾌거였다. (60년 7월 19일 동아일보 석간 3면)

 

백인천은 제12회 쌍룡기(현 화랑기) 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7월 27일~8월 2일 부산공설운동장)에서도 경남고를 3-2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는데 일조를 한 뒤 제14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지구별 초청 고교야구쟁패전(9월 22~26일 서울운동장) 결승전에 경동고 4번 타자겸 포수로 출전, 감독 김일배 및 ① 김정호(중견수) ② 김영민(우익수) ③ 오춘삼(3루수) ④ 백인천(포수) ⑤ 이영기(좌익수) ⑥주 성현(朱成鉉, 투수) 이재환(투수겸 좌익수) ⑦ 김휘만(2루수) ⑧ 이용숙(1루수) ⑨ 김영호(유격수) 등과 부산상고를 3-2로 제치고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60년 9월 27일 동아일보 석간 2, 3면)

 

백인천은 이 대회에서 부산상고 투수 한을룡(韓乙龍)의 심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2타수 1안타 1타점에 2볼넷으로 대회 우승을 견인, ① 최재봉(崔在奉, 좌익수) ② 이성규(李成逵, 유격수) ③ 이규직(李圭直, 2루수) ④ 유백만(兪百萬, 3루수) ⑤ 한을룡(투수) ⑥ 박영국(朴英國, 포수) ⑦ 김병기(金秉冀, 중견수) ⑧ 주민리(朱敏理, 우익수) ⑨황종태(黃宗太, 1루수) 등이 지킨 부산상고를 전국고교선수권에 이어 또 한번 무릎을 꿇렸다. 그러나 백인천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9월 1일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벌어진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 방문 경기였다. 백인천은 재일동포학생모국방문 마지막 경기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국내 고교야구 사상 첫 일본 원정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경기는 56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이루어졌다. 한국일보사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초청, 일본에서 태어난 동포 2세들에게 모국의 참 모습을 일깨워주는 한편 선진야구를 받아들여 고교야구 발전을 꾀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56년 8월 7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그 지역 고교대표 팀과 기량을 겨뤘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이 월등한 실력으로 승리를 거뒀다. 59년까지 4차례에 걸쳐 58경기를 치른 끝에 47승7패4무의 성적을 올리고 있었다.


60년 8월 4일 내한한 제5차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8월 6일 벌어진 첫 경기에서 중앙고를 4-0으로 물리친 뒤 8월 31일까지 서울·인천·청주·부산·대구·대전을 돌며 15전13승2무승부의 성적을 올린 뒤 마지막 경기를 남겨 놓고 있었다. 무승부 경기는 8월 21일 부산에서 경남고와 1-1, 8월 30일 서울에서 경동고에 3-3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일본 원정 떠나는 경동고
1960년 10월 15일 [경향신문] 4면

 

 

 

마지막 경기는 9월 1일 경동고와 붙었다. 백인천을 위해 마련한 경기 같았다. 백인천은 1회말 주자 1루에서 투런 홈런을 날려 얼을 빼앗은 뒤 4-2로 재일동포 팀을 꺾어 첫 패배의 쓴 맛을 안겼다. 그러나 재일 동포 팀은 통산 73전60승8패6무의 성적을 남겼다. 그런데 백인천의 홈런에 감격한 이는 따로 있었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부단장을 맡았던 최태환(崔泰煥)씨였다. (60년 9월 2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

 

"내가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홈런 한 방이 계기가 됐다.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최태환씨가 부단장으로 따라 왔다. 59년 제4차 방문 때는 재일동포 팀 코치를 맡았던 분이다. 그 때 경동고는 0-4로 패했다. 그렇지만 이듬 해(60년) 제5차 방문 경기 때는 경동고와 첫 경기에서 1-1로 비긴 뒤 마지막 경기에서 내가 2점 홈런을 쳐 4-2로 이기자 상당한 수준이라며 일본으로 초청할 뜻을 비쳤다. 처음엔 인사치레로 그러려니 했다.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에 간다는 것은 어림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꿈 같은 일이 실현됐다"

 

일본 원정의 낭보가 날라온 것은 경동고가 제14회 황금사자기 쟁탈 고교야구쟁패전 우승으로 장안의 화제거리가 됐을 때였다. 일본학생야구연맹과 재일야구협회가 공동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일본초청야구경기(10월 26일~11월 11일)에 출전할 경동고는 고문=손희준(孫禧俊, 대한야구협회 이사) 단장=홍두표(洪斗杓, 경동고 교장) 감독=김일배(金日培, 경동고 전임 코치) 총무=이선룡(李善龍, 경동고 야구부장) 주장=명정남(明正男, 좌익수) 투수=이재환 주성현 고정안(高貞安) 최관수(崔寬洙, 동산고) 포수=백인천 현아남 내야수=이용숙(1루수) 김휘만(2루수) 오춘삼(3루수) 김영호(유격수) 외야수=김영민(우익수) 김정호(중견수) 이영기(좌익수) 등 18명이었다. 경동고가 발표한 1차 명단에는 유행신(柳行信, 우익수)이 포함됐었다. 그러나 마운드 보강 차원에서 초고교급 투수로 주목을 받던 동산고 최관수와 교체돼 유행신은 일본 원정에서 제외됐다. (10월 15일자 경향신문 석간 4면)

 

 

 

일본 원정에서 돌아온 백인천(오른쪽 두번째)
1960년 12월 16일 [동아일보] 3면


그러나 경동고의 일본 원정 길은 평탄치 않았다. 10월 19일 장도에 오를 예정이던 경동고는 문교부 장관의 승인 보류로 한 달 이상 마음을 졸여야 했다. 하지만 장면(張勉) 총리의 극적인 재가로 11월 23일 상오 대한체육회 강당에서 결단식을 가진 뒤 노스웨스트항공(NWA)편으로 출국할 수 있었다.

 

경동고의 첫 경기 상대는 규슈(九州)의 구마모토(熊本)에 있는 진세이(鎭西)고였다. 11월 26일 진세이고와 맞붙은 경동고는 2-0으로 이겨 기분 좋은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가고시마(鹿兒島)실업고와의 2차전에서는 백인천이 일본 원정 첫 홈런을 날렸지만 2-2로 비겼다. 3차전에선 오요도(大淀)고에 0-7로 패한 뒤 4차전에서도 시모노세키(下關)상고에게 1-8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5차전인 사쿠라가오카(櫻丘)고에게 7-0으로 완봉승을 올린 뒤 6, 7차전인 히메지(姬路)고와 헤이안(平安)고에 각각 1-1, 0-0으로 비겨 7전2승2패3무로 야구 선진국 일본과의 대등한 실력을 과시했다.

 

 

 

경동고는 마지막으로 니혼(日本)대학 제2부고와의 경기를 남겨 놓고 있었다. 니혼대 제2부고는 지난 봄 도쿄시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강 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백인천의 홈런 한 방에 2-9로 힘없이 허물어졌다. 니혼대 제2부고와의 경기는 11월 11일 도쿄(東京) 신주쿠(新宿)에 있는 메이지(明治) 진구(神宮)구장에서 벌어졌다. 이 경기에 경동고 4번 타자겸 포수로 출전한 백인천은 5회초 3점 홈런을 터트려 일본 야구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인천의 홈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진구구장에서 터진 두 번째 홈런이었기 때문이었다. (60년 12월 15일 동아일보 조간 3면)


"일본 원정 마지막 경기가 끝난 뒤 재일동포학생야구단 부단장을 맡았던 최태환씨와 일본 메이지(明治)대 시마오카(島岡) 감독이 숙소로 직접 찾아왔다. 이분들은 일본에서의 첫 경기부터 끝 경기까지 따라다니면서 내가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시마오카 감독은 메이지대에 올 경우 장학금은 물론 체재비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최태환씨 역시 내가 원할 경우 일본 6대학 어디든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일본 야구 잡지를 보며 프로야구를 동경해 오던 나는 일본에 유학할 수 있는 길을 놓치고 싶지 않아 시마오카 감독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채 귀국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국교가 정상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유학이란 꿈에 불과했다. 일본 유학에 들 떠 국내 대학 진학까지 외면한 나는 농업은행(현 농협)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대만 송산구장서 첫 홈런 날려 각광

 

 

백인천의 일본 프로야구에 대한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62년 자유중국(현 타이완)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1월 2~9일 타이베이)에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면서 기회를 잡았다.

 

이 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 팀은 단장에 대한야구협회 선우인서(鮮于麟瑞) 회장을 비롯해 총무 노정호(盧禎鎬, 협회 전무이사), 섭외 허곤(許琨, 협회 총무이사) 심판 모무열(毛無說, 협회 섭외이사) 감독 김영조(金永祚, 농협 감독) 투수=김양중(金洋中, 농협) 곽상령(郭相令, 육군) 김성근(金星根, 교통부) 최관수(동산고) 김수윤(金秀允, 재일동포) 포수=허호준(許鎬俊, 교통부) 백인천(이상 포수) 내야수=김정환(농협) 김응룡(金應龍, 한국운수) 성기영(成基泳, 육군) 박정일(朴正一, 재일동포) 김희련(金熺璉, 육군) 남갑균(南甲均, 교통부) 외야수=양철학(楊徹學, 한국운수) 배수찬(裵壽讚, 교통부) 김영빈(金榮彬, 육군) 박현식(朴賢植, 농협) 등으로 구성됐다. 역대 최고의 전력으로 우승까지 넘보고 있었다.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참가한 한국대표팀
1962년 1월 6일 [경향신문] 4면

 

 

 

61년 12월 19일 대만에 도착한 대표 팀은 12월 22일부터 연습에 돌입, 타도 일본을 외치며 전의를 불태웠다.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는 한국을 비롯 일본, 필리핀, 자유중국 등 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월 1일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비가 내려 하루 연기된 끝에 대만-필리핀전을 시작으로 한국-일본의 경기가 벌어졌다. 한국은 재일동포인 왼손잡이 김성근이, 일본은 훗날 일본 프로야구 다이요(大洋) 훼일스에서 퍼펙트 게임(66년)을 수립한 사사키 기치로(佐佐木 吉郞)가 마운드에 올랐다.

 

일본 팀은 한국 팀에게 벅찬 상대였다. 3회초 1사 후 9번 사사키가 포문을 열었다. 이어 1번 키타자키(北崎)가 땅볼을 치자 박정일이 2루에 악송구, 그 틈을 타 사사키가 3루로 뛰고 1루 주자 키타자키도 2루로 내달리자 백인천이 2루로 송구를 했다. 하지만 발 빠른 사사키가 홈으로 뛰어 들어 1점을 내줬다. 이어 2번 이시하라(石原)가 중견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날려 2루 주자 키타자키가 홈인하여 2점을 앞 서 나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사키의 호투에 눌려 속수 무책이던 한국 팀은 7회말 선두 타자 백인천이 좌중월 2루타로 득점 찬스를 만들고 9회말엔 배수찬이 안타를 뽑은 게 전부였다. 한국 팀은 세 차례에 걸쳐 범한 실책이 독이 되어 0-2로 완봉 패를 당했다. (62년 1월 4일 동아일보 3면)

 

하지만 백인천은 이 경기가 끝난 뒤 일본 야구 관계자들로부터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할 수 있는 타자"로 주목을 받았다. 사가키로부터 2루타를 뽑은 기량을 높이 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1월 9일 마지막 경기인 필리핀전 4회초 1사후 주자 3루에서 좌측 담장을 넘기는 대회 첫 홈런(약 104m)을 날려 갈채를 받았다. 이 대회는 물론 송산(宋山)구장 개장 이후 첫 홈런이어서 주최측은 홈런상으로 은 트로피를 수여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훗날 홈런이 떨어진 지점에 기념패를 박아 백인천을 기리고 있다. (62년 1월 10일 경향신문 4면)

"이 대회에서 우리 팀은 일본에 2패, 자유중국에 1패를 당해 3승3패로 자유중국과 공동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대만에서 한국을 가려면 일본을 거쳐야 했다. 직항로가 개설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정은 대회가 끝난 뒤 귀국하는 길에 일본에서 이틀간 체류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도착 첫 날이었다. 최태환씨가 찾아왔다.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할 생각이 없느냐?'고 했다. 그래서 '기회가 주어지면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최태환씨가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스의 미즈하라(水原) 감독이 널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를 데리고 도에이 사무실을 찾아갔다"

 

 

 

필리핀전서 홈런날린 백인천
1962년 1월10일 [경향신문] 4면


미즈하라 감독이 구단 관계자들과 백인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미즈하라 감독이 최태환씨를 통해 스카우트할 뜻을 전해 왔다. 백인천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백인천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고 싶은 뜻을 전했다. 복잡한 절차 없이 가계약을 하고 숙소로 급히 돌아왔다. 그 날 저녁 미쓰비시중공업이 국제호텔에서 환영 파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난리가 났다. 도에이와 입단 가계약한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 기자들이 몰려왔다.

 

"감독은 물론 동료 선수들 몰래 다녀왔는데 일본 기자들이 몰려오니 겁이 더럭 났다. 급한 김에 덩치 큰 박현식과 김응룡 선배 뒤에 숨어있다가 안되겠다 싶어 밖으로 튀었다. 한 참을 도망가다 뒤돌아 보니 박현식 선배가 쫓아오길래 그를 붙들고 그 동안 일어났던 일을 털어놨다"

 

 

 

백인천이 숙소로 돌아오자 도에이와 입단 가계약한 사실이 알려져 난리가 났다. 단장인 대한야구협회 선우인서 회장이 겁부터 줬다. "오늘 일어난 일 절대로 말해선 안 된다. 일본 기자들이 너를 취재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해야지, 네가 도에이를 찾아가서 가계약했다는 얘길 하면 큰일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까지 모가지다" 라고 했다. 백인천은 귀국한 뒤 부친에게 털어 놓았을 뿐 그 누구에게도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도에이와 가계약한 사실은 오래 숨겨둘 수 없었다.

 

귀국한 지 사흘이 지난 12월 16일이었다. 대한체육회에서 연락이 왔다. 이주일(李周一) 회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대한체육회장이 누군가?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기도 했다.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실세였다. 대한야구협회 선우인서 회장과 김영조 감독 및 박현식 배수찬 김성근 등도 함께 세종로 미대사관 옆 건물에 있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찾아갔다. 회장 집무실은 거기 있었다. "야, 백 선수 정말 수고했어" 이 회장이 백인천을 보자 먼저 손을 잡아 흔든 뒤 금일봉까지 내놓으며 무슨 애로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백인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 진출 13년 만에 타율 .319로 정상 정복

 

 

백인천은 도에이와 가계약한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리곤 "제가 일본선수들에게 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선수가 되어 돌아오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일본에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어, 그래?” 한 뒤 야구협회 선우 회장을 처다 보며 "가능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선우 회장은 뜻밖의 말을 했다. "아, 그건 불가능합니다, 백 선수 나이도 어리고 앞으로 큰 일을 할 선수여서 우리 나라의 야구 발전을 위해서라도 나가면 안 됩니다" 했다. 그러자 이 회장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런 인재들은 한국야구 발전을 위해 외국으로 자꾸 내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거 보고 배워올 게 아닙니까?" 했다. 그러더니 배석한 이후락(李厚洛) 보좌관에게 "국내 여론과 출국 가능성을 알아 보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주일 회장을 만난 다음 날(1월 17일)이었다. 동아일보가 첫 소식을 전해 세상에 알려졌고 1월 25일 도에이서 초청장을 보내왔다. 이틀 뒤인 1월 27일엔 경향신문이 보다 구체적으로 보도해 백인천의 일본 행은 기정 사실이 됐다. (62년 1월 27일 경향신문 석간 3면)


일본 도에이와에 입단한 백인천
1962년 3월 6일 [경향신문] 3면

 

 

 

백인천의 도에이 입단은 그 해 2월 2일 대한체육회 이주일 회장이 문교부에 추천, 3일 뒤인 2월 5일 김상협(金相浹) 문교부장관이 "①1년 뒤 귀국, 병역의무를 다한다 ②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은 뒤 승인을 했다.이로써 백인천의 일본 행은 막힘이 없이 진행됐다. 2월 22일 오후 3시 30분 서북항공(NWA)기 편을 이용 일본으로 출국한 백인천은 다음 날(2월 23일) 오전 도에이와 2년 간 계약금 300만엔(약 1,200만환), 연봉 96만엔(약 384만환)에 정식 계약을 마쳤다. 계약금 300만엔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당시 돈암동에서 웬만한 기와집을 35만원이면 구할 수 있었다. 또 미아리 고개 오른쪽 산은 평당 몇 십 환할 때여서 300만엔은 그 일대를 몽땅 사고도 남을 만한 큰 돈이었다.

 

그러나 백인천이 1군 무대에 선 것은 1년 4개월 26일이 지난 63년 6월 26일이었다. 난카이 호크스(현 소프트뱅크 호크스)전 7회초에 선발 포수 마루야마(丸山) 대신 마스크를 섰다. 그러나 안타를 치지 못했다. 대신 7점을 잃어 패전 포수가 됐다. 백인천의 프로 데뷔 첫 안타는 다음 날 터졌다. 6월 27일 난카이 호크스전에 선발 포수로 출전한 백인천은 2회초3루에서 홈 스틸을 감행하는 코이케(小池)를 블로킹한 뒤 뒤로 한 바퀴 굴러 떨어졌지만 공을 놓치지 않아 실점을 막았다. 6회말엔 유격수 키를 넘기는 안타를 날려 3타수 1안타 외에 스틸 2개를 멋지게 견제, 신인다운 투지를 선 보여 일본 신문들은 '도에이, 포수에 광명'이란 타이틀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훈과 나란히 선 백인천
1975년 10월 25일 [동아일보] 8면


일본 프로야구에서 좋은 일만 있었던 게 아니다. 70년 5월 23일 도쿄 고라쿠엔(後樂園)에서 열린 킨데스(近鐵) 버팔로스전 1회말이었다. 쓰유사키(露崎) 구심이 아웃 코너로 낮게 들어온 볼을 "스트라이크 아웃!"을 선언했다. 그 소리에 볼을잡은 포수 쓰지 요시노리(? 佳紀)가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어이없는 볼이라는 거였다. 백인천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았다. "이게 어째서 스트라이크냐?"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쓰유사키 구심은 지체 없이 "퇴장!"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백인천이 아니었다. 쓰유사키 구심의 멱살을 잡자마자 내동댕이쳐버렸다. 구심 역시 가만있질 않았다. 백인천을 검찰에 상해죄로 고소를 했다. 그러나 쓰유사키 구심은 너무했다 싶었던지 4일만인 5월 27일 고소를 취하했다. 하지만 '퍼시픽 리그' 사무국은 백인천에게 벌금 5만엔에 2일간 출전 정지 처분을 내렸다.

 

"쓰유사키 구심은 야구 선수 출신이 아닌 권투를 한 친구였다. 평소부터 내게 감정이 많았다. 나긋나긋하게 대해주고 가끔가다 용돈이라도 찔러 줬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자 않았을 텐데 나는 그런 사교성이 부족했다. 또 사사롭게 용돈을 준다든가 식사를 같이 하는 일 따위는 내 성격에 맞지 않았다"

 

 

 

백인천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꿈 같은 수위타자 자리에 오른 것은 75년이었다. 74년 1월 28일 니혼(日本) 햄 화이터스(전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다이헤이요(太平洋) 라이온스의 외야수 히가시타(東田正義)와 트레이드되어 유니폼을 바꿔 입은 백인천은 75년 4월 5일 다이헤이요의 홈 구장인 헤이와다이(平和台)에서 열린 개막경기에 이를 악물고 출전했다. 상대는 자신을 트레이드 한 친정 팀 니혼햄이었다. 멋진 플레이로 복수하고 싶었다. 7회말 시즌 첫 홈런을 터트린 뒤 연장 11회말엔 내야안타를 터트려 4-3으로 이기는데 크게 기여했다. 첫 경기에서 홈런을 포함, 3안타를 때렸으니 좋은 징조였다. 그리고 니혼햄을 꺾은 게 아주 통쾌했다.

 

75년은 퍼시픽리그 타격 3위(.315)에 올랐던 72년보다 감이 좋았다. 초반부터 타격 10위권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후반으로 접어든 7월 29일 한큐(阪急) 브레이브스전에서 연타석 홈런을 터트려 타율 0.308로 타격 3위에 오른 뒤 8월 9일 밤 난카이(南海) 호크스전에선 3타수 3안타를 날려 0.310으로 한큐의 가토(加藤)와 공동 수위를 마크했다. 승승장구 거칠게 없었다. 3일 뒤인 8월 12일 긴테스(近鐵) 버펄로스전에서 5타수 4안타를 터트려 타율 0.321(312타수 100안타)로 단독 수위타자로 나섰다. 이런 컨디션은 막판까지 계속 유지됐다. 페넌트레이스가 끝났을 때 백인천은 0.319로 퍼시픽리그 수위타자에 올라 있었다. 일본 진출 13년 만에 오른 정상이었다. 한국 선수로는 재일동포 장훈(張勳)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을 정복한 것이다. (75년 10월 8일 경향신문 6면)

 

'졸업식 추태'가 연일 신문 방송에 오르내린다. 교복 찢기, 옷 벗기기, 속옷 차림으로 바닷물 뛰어들기, 팬티만 입고 질주하기, 머리에 케첩 뿌리기…. 신문들은 이걸 싸잡아 '졸업 광(狂)파티'라고 명명했다. 그러면서 '막나가는 10대'와 그런 추태를 제대로 휘어잡지 못하는 학교교육에 대한 강한 우려를 표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이 문제를 거론할 정도로 사안은 심각하다.

 

 

 

60년대초, 역사의 회오리 속 경건하게 치뤄져

 

 

초기에는 "억압과 규율에서 벗어난 해방감이 다소 거칠게 표현된 것"이란 대범한 이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선배들이 '졸업 빵'의 가해자로 대두되면서 '어른들'은 너나없이 "도를 넘었다"며 눈살을 찌푸린다. "우리 땐 그래도 저 정도까진 아니었다"는 불만도 고조되는 형국이다. 과연 광란의 졸업파티는 요즘 신세대의 '제멋대로' '후배 길들이기 풍조'의 산물인가. 60-70년대 옛날신문으로 한번 졸업식 탐사여행을 떠나보자.

 

1960년은 4.19 학생혁명, 61년은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해다. 4.19 이듬해인 61년 2월25일 남녀 중고교가 일제히 졸업식을 갖는 날 경향신문은 '새 나라의 첫 졸업-데모하던 기백도 팽팽'이란 제목의 학생 찬양기사를 실었다. 거의 영탄(詠嘆)조로 흐른 이 기사는 혁명으로 독재의 고리를 끊어낸 그해 졸업생들을 “제2공화국의 1회 졸업생”이라고 명명했다.


새나라의 첫 졸업
1961.02.25 [경향신문] 3면

 

 

 

조촐하고 간소하게
1962.02.03 [동아일보] 3면


그리고는 마치 웅변하듯 "책가방 든 채 데모에 가담한 어린 투사들, 그리하여 조국에 뿌리박힌 독재와 부정의 아성을 때려눕혀 새 삶의 터전을 보게 하였다"고 추켜세우더니 "그러기에 교문을 나서는 그들의 모습에선 예년처럼 '평범한 의식'을 찾을 수 없었다. 희망에 부풀어 오른 듯한 그 가슴, 그 눈동자!"라며 감탄사로 기사를 맺었다.

 

62년 졸업식은 쿠데타에 이은 서정쇄신의 분위기 아래 치러졌다. 동아일보는 "고급승용차와 화려한 선물 등 부형들의 부귀를 겨루는듯 하던 옛날 분위기는 씻은 듯이 가시고 졸업식은 한결 한산하고 조촐하기만 했다"고 전했다. 이로 미루어 그때까지만 해도 졸업생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이 졸업식장에서 세 과시에 열중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60, 61년의 졸업식은 흠 잡을 데 없는 모범적 분위기에서 치러진 게 틀림없다.

 

 

 

 

해방감에 편승한 일탈행위, 언론의 도마 위에 올라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64년에 이르자 졸업생들의 뒤풀이가 언론의 도마에 오르기 시작했다. 몇몇 고교는 그 해 세종로 시민회관을 빌어 '으리으리한 호화 졸업식'을 가졌는데 "들뜬 기분의 졸업생들이 세종로 길이 좁다 하고 고성방가 등 눈에 거슬리는 행위를 많이 하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한 신문은 르포 형식으로 생생하게 '도를 넘은' 뒤풀이 현장을 보도했다. 한번 보자.

 

"스크럼을 짠 고등학교 학생들이 명동의 번화가를 누비며 지나간다. 비속한 유행가를 고함치듯 부르기도 하고 트위스트 춤을 추기도 한다. 찢어진 교모를 뒤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교복 잔등이에는 '축 졸업'이라고 페인트로 낙서를 해놓았다. 꼭 무슨 패잔병들이 행패를 부리는 것 같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길을 비켜주었다. 자칫하면 봉변당할까 두려워 아예 피하는 눈치다…"


화려한 졸업식
1964.01.23 [동아일보] 7면

 

 

 

64년 고교졸업생이라면 지금 60대 중반에 이른 어르신들이다. 그들이 졸업 당시에 과연 그런 해프닝을 정말로 벌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신문의 개탄은 매우 심각한 양상이다.

 

 

 

찢고 칠하고 분장한 '졸업날 광태'
1977.01.14 [동아일보] 5면


기사를 좀 더 보자. "경찰에서는 졸업식 사고를 막기 위해 특별기동대까지 마련하고 있다.…정든 학교를 떠나는 자리에서 의자를 때려 부순다거나 운동장에서 트위스트 난장판을 벌이고 교사에게 주먹질…" 이렇다면 요즘 졸업생 추태보다 크게 덜한 것 같지도 않다.

 

65년에도 이런 추태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서울시는 졸업식을 전후한 학생풍기선도와 도의지도 강화를 각 학교에 긴급 시달했다. 시는 특히 음주, 끽연, 대로에서의 고성방가, 남녀학생 동반 등 풍기문란행위와 극장 유흥장 다방 당구장 음악 감상실 음식점 등 금지구역 출입을 적극 단속할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그해엔 또 이런 엉뚱한 일도 있었다. 졸업식을 끝낸 S고교생 10여명이 한 친구의 집에 모여 술을 마시고 만취, 트위스트를 추고 고함을 지르면서 잔뜩 기분을 냈다. 그런데 그중 박 0군(19)이 과도를 휘두르며 칼춤을 춘다고 법석을 떨다가 흥분한 끝에 다른 친구의 등을 찔러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혔다는 것이다.

 

 

 

 

가운 벗고 알몸으로 연설한 美고등학생, 해외토픽에 실려

 

 

당시의 졸업식장이나 식후 뒤풀이 말썽이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일본에서는 졸업식 폭력사태가 심심치 않게 발생해 경찰이 졸업시즌만 되면 비상경계에 들어가곤 했다. 구미의 경우는 졸업식 풍경이 미주알고주알 알려지진 않았으나 이따금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져 가십난을 장식하곤 했다. 깜짝 놀랄 재미있는 일은 71년 6월 해외토픽에 실렸다. 기사내용은 이렇다.

 

"플로리다 주의 17세 고등학교 학생 다렌 홀브루크 군은 학교 졸업식에서 우등상을 타고는 어쩐 일인지 갑자기 2천5백 명의 학부형들 앞에서 졸업식 가운을 벗고는 알몸으로 연설했다. 성적이 우수한 그는 '무언가에 반항하고 싶었다.'고 했는데 지방법원에 풍기문란 죄로 기소되었다." 이 정도라면 청주의 중학생들이 반바지나 팬티 차림으로 시내를 달린 것보다 훨씬 중증이라고 할만하다. 71년에 17세라면 다렌은 지금 56세가 됐을 텐데 당시의 행동에 대해 지금은 뭐라 말할 것인지 매우 궁금해진다.


일본, 새골칫거리 중·고생의 교사 폭행
1982.02.06 [동아일보] 9면

 

 

 

어쨌든 졸업식 후의 해방감에 젖은 시끌벅적한 뒤풀이는 거의 매년 되풀이 됐다. 신문들은 졸업시즌만 되면 사설을 통해 ‘얼굴과 몸에는 밀가루 칠을 하고 목에는 너절하게 색 테이프를 휘감은 괴상한 몰골로 거리로 나와 패를 짓고 돌아다니면서 고성방가를 서슴지 않는 등 갖가지 추태와 난잡한 행태를 그만 둘 것’을 간절히 호소하곤 했다.

 

 

 

유흥가로 직행한 '고교 졸업 탈선'
1976.01.09 [동아일보] 7면


그리고 76년 1월, 동아일보는 사회면 머리기사로 '유흥가로 직행한 고교졸업 탈선' 제하 르포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지면의 절반을 메웠고 패싸움을 벌이는 고교졸업생들의 사진까지 큼지막하게 실렸다. 소제목도 '도심 뒷골목에 몰려 광란' '곳곳서 부녀희롱 패싸움’ 등 자극적이었다. 기사는 첫 문장부터 범상치 않았다. "미처 교복도 벗지 않은 애송이 남녀 고교졸업생들이 밤의 술집과 유흥가에 차고 넘친다.…"

 

르포에 등장한 주요 행태는 이렇다.
-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소리치고 부녀자를 희롱하며 30-40대 부녀자들에게까지 '함께 술 마시자'며 승강이를 벌였다.

- 술집은 고막을 찢는 사이키 뮤직과 어둠을 후려치는 환각조명 아래 어린 남녀학생들이 벌이는 광란과 기성, 미친 듯한 열기로 가득 찼다.

 

 

 

- 밤이 깊어가자 남녀고교졸업생들은 졸업장과 졸업앨범을 손에 든 채 몽롱한 취기와 광란의 열기 속에 흐느적거렸다.

- 교복을 갈기갈기 찢어 입은 고교졸업생들이 더벅머리 청소년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 버젓이 교복을 입은 한 떼의 졸업생들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젓가락 장단을 치기도 했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경찰은 일제단속을 벌였다.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 14개 업소가 허가취소 등 행정처분을 받았다. 또 교복을 입고 술을 마신 고교졸업생 60명이 즉심에 넘겨졌다. 그러나 경찰이 단속을 벌인다고 해서 졸업생들의 해방감에 젖은 분방한 행동들이 잦아드는 건 아니었다. 얼굴에 검은 구두약과 밀가루 칠을 하고 교복은 갈가리 찢어 입은 채 학교 주변 술집이나 다방을 전전하며 노래를 부르고 춤추는 행태는 쉽게 그치지 않았다.

 

 

 

 

젊음의 발랄함 느낄 수 있는 뒤풀이는 없을까

 

 

1979년 1월13일. 경향신문은 사회면 중앙에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회칠을 한 한 고교졸업생의 모습을 실었다. 그리고 캡션으로 "어떻습니까? 교복 갈기갈기, 밀가루 범벅 고교졸업생(의 모습이…)"라고 물었다. 이어진 기사에선 "일부 졸업생이 축하객들이 보는 앞에서 술을 마시고 연탄재와 검정 구두약을 칠했다. 몇 학부형도 졸업생들이 던진 달걀과 밀가루에 옷을 버렸다"고 폭로했다. 또 교사들이 그런 행태를 말렸지만 "우린 이제 졸업했으니 더 이상 속박하지 말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고 전했다.

 

80년대 교복 자율화가 되면서 '졸업 빵' 얘기는 차츰 자취를 감추었다. 억압, 규율의 상징인 교복이 사라짐에 따라 과격한 뒤풀이도 사라졌다는 해석이 가능하나 꼭 그렇게 주장할 근거는 없다. 최근 다시 졸업 뒤풀이와 폭력 사태가 빚어지는 것은 혹시 학생들이 다시 교복을 입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시각도 있다. 해방감에 들뜬 1회의 일탈은 사실 어린 학생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꿈꾸는 일이다.


"어떻습니다" 교복 갈기갈기·밀가루 범벅 고교 졸업생
1979.01.13 [경향신문] 7면

 

 

 

젊음의 패기는 반항에서 싹트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육체적 정신적 모욕이 없고 범죄와 광란이 아닌, 그래서 어느 세대나 다 함께 젊음의 발랄함을 느낄 수 있는 졸업식 뒤풀이는 정녕 없는 것일까.

한국에 상륙한 '오빠'의 함성

 

 

막이 오르기 전부터 객석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교복차림 여고생들이 객석의 거의 2/3가량을 메우고 있었다. 드디어 저녁 7시 30분. 서울 시민회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의 막이 서서히 올라가며 무대에 서 있던 사람의 구두가 보였다. 객석 여기저기서 갑자기 꺅∼ 하는 기성과 비명, "오빠-!" "사랑해-!"를 합창하듯 외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두는 그날 주인공의 것이 아니었다. 사회자였다. 그는 깜짝 놀라 막을 다시 내리게 하고 무대 뒤로 달려가 숨을 골랐다. 다시 커튼이 올랐다. 이날의 히어로 클리프 리처드(Cliff richard· 이하 CR)가 등장했다. 시민회관은 청중의 비명, 함성, 박수와 더 섀도우즈(The Shadows)의 신들린 밴드연주, CR의 노래가 뒤섞인 거대한 소음의 돔으로 변했다. 숨이 넘어갈 듯 '오빠!' '오빠!'를 부르는 소리가 회관 밖에까지 들렸다. 1969년 10월16일이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해외공연에서나 보았던 공연장 열광과 흥분, '오빠!' 함성이 드디어 한국에도 상륙한 것이었다.


"클리프 리처드의 모든 것" 英 BBC 특집시리즈 방영
1981.11.27 [동아일보] 11면

 

 

 

 

'흥분의 도가니'가 된 클리프의 내한 공연

 

 

늙지않는 스타 클리프 리처드
1982.10.15 [동아일보] 12면


이틀 뒤. CR의 내한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공연이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다. 전날 공연을 TV가 중계해서인지 이대 앞에는 수천의 관중이 몰렸다.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다 강당 유리창이 깨져 사람들이 베이고 넘어져 다치는 소동이 일어났다. 경찰은 서둘러 출입문을 막았다. 표를 가지고도 미처 못 들어간 사람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여학생들은 그런 중에도 "클리프 오빠, 사랑해!" 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공연장 안은 더 심했다. 뜨거운 흥분과 광기에 가까운 소란이 무대와 객석을 후끈후끈 달구었다. CR이 최고의 히트곡 'The young ones'를 부르자 무대 위로 꽃다발 손수건 선물상자들이 던져졌다. 관객 전체가 기성을 지르거나 노래를 따라 불러 정작 가수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흐느끼다 못해 통곡하는 여학생이 넘쳐났고 기절해 실려 나가는 사람도 생겼다. 몇몇 남성은 "시끄러워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며 의자를 쾅쾅 치고 여학생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거의 주먹다짐 수준이었다.

 

 

 

레퍼토리가 'Summer holiday' 'Devil woman'을 거쳐 당시 젊은이들이 거의 가사를 외다시피 한 'Visions(of you)' 'Evergreen tree'로 넘어가도 가수의 목소리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공연 초반 CR은 청중들에게 "제발, 제발, 노래를 할 수 있게 조용히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흥분과 함성 탓에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나중엔 그런 호소마저 포기했다. 아예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려놓고 자신이 오히려 청중의 노래를 듣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무대에는 여전히 손수건과 사진 수첩 머리핀 등 온갖 잡동사니 선물들이 쉼 없이 던져졌다. (이들 물건 가운데는 여학생들이 입고와 벗어던진 팬티도 있었다고 일부 언론이 보도했다. 그러나 주최 측은 나중에 선물을 모두 수거, 점검한 결과 팬티 등 속옷은 한 점도 없었다고 부인했다.) 한마디로 그날 이대 강당은 안과 밖 할 것 없이 완전히 집단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모든 소동은 공항에서부터 예견되었는데…

 

 

이런 소동은 사실 CR이 입국한 김포공항에서부터 예견됐다. 69년 10월16일자 매일경제는 입국장 소동을 이렇게 전했다. "0…클리프 리처드군(29세)일행이 내한한 15일 낮 김포공항은 2백여 명의 단발머리 소녀 팬들이 모여들어 수라장. 0…리처드 군이 트랩을 내려서자 그의 초상화를 든 앳된 소녀 팬들은 발을 구르며 일제 기성을 질러 이채. 0…리처드 군이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자 소녀들은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흐느끼는 등 광태(狂態)를 보여 기동경찰관들이 등장, 겨우 진압.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공항 손님들, 왜 무엇 때문에 저렇게 미치느냐고 고개를 갸우뚱."

 

그런데 당시의 팬클럽은 CR의 내한에 맞춰 즉석 결성된 게 아니었다. 내한공연이 있기 5년 전인 64년 12월 스카라 극장에서는 CR주연 영화 'The young ones'를 상영했었다. 이때 그에 감명 받은 여학생들이 CFC(Cliff Fan Club) 혹은 CRFC(Cliff Richard Fan Club)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것. CR의 내한공연은 사실 이들의 노력으로 성사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클리프 환영에 소녀팬들 광태
1969.10.16 [경향신문] 3면

 

 

 

한국 팬클럽은 외국의 팬클럽 및 영국 CR측과 연락해 최신 음반을 들여왔고 그걸 최동욱 이종환 피세영 등 라디오방송 디제이들에게 보내 한국에 CR노래가 더 많이 퍼지도록 애를 썼다. 물론 CR에게 끈질기게 내한공연도 요청했다. 소리만 지르는 오빠부대가 아니라 진짜 열광적인 팬이었던 셈이다.

 

당시 공연 입장료는 특A석 2,000원, A석 1,700원부터 D석 800원까지 5종류였다. 버스 값이 10원, 연탄 1장에 15원, 해장국과 자장면이 50원, 설렁탕이 90원 하던 때니 사실 꽤 비싼 편이었다. 그런데도 표는 거의 매진되다시피 했다. 구입자는 대부분 여고, 여대생. 이렇게 CR의 광(狂)팬이 많다는 걸 여고에선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시내 많은 여학교가 그의 방한일자에 맞춰 중간고사를 실시했다. 일부 학교는 아예 학생들의 조기 하교를 막았다. 생활지도 교사를 공항과 공연장에 보내 학생 동태를 파악한 학교도 많았다.

 

 

 

 

소녀 오빠부대에 충격받은 어른들은…

 

 

10대 리차드, 광란에 견해상반 Y논단
1969.11.13 [동아일보] 5면


이른바 오빠부대의 기성(奇聲)과 소란을 서구 젊은이들의 철없는 짓거리로만 보아왔던 기성세대는 'CR 사태'에 넋을 잃었다. 당시 '어른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는 한 달 뒤 Y시민논단이 이 현상을 분석하는 토론회를 연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10대와 클리프 리처드' 제목의 토론회에서 서울 의대 정신과 한동세 교수는 "우리사회 대로의 특성을 지닌 서울에서 그처럼 광란하는 10대의 반응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면서 서양의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하겠다는 사고방식은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작가 송정숙 씨는 "CR의 팝송이 불건전하지 않은 만큼 울부짖는 우리 10대의 사고나 행동이 불건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 10대들만이 지니고 있는 감정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가수에게 분출구를 찾아 폭발한 것"이라고 해석하며 기성세대가 10대의 '그 무엇'을 이해하여 건전한 방향으로 이끌어야지, 우범시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찬반논쟁은 급기야 새로운 '청년문화'의 태동을 예고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시민사회와 문화계가 어떤 반응을 보이건 정부는 달랐다. 소리를 지르며 울부짖고 자기들의 우상을 좇아 '날뛰는' 10대들에게 더 이상 자극의 원천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72년 CR이 다시 한국을 찾아 공연하려 했으나 정부는 일거에 이를 거부했다. 싱가포르가 그의 비틀즈 스타일 장발을 문제 삼았듯 한국도 그의 장발이 청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는 이유를 들었다. 마침 그때는 대통령의 엄격한 지시로 장발과 미니스커트, 고고 춤 등 '무분별한 외래 퇴폐풍조'를 발본색원하겠다고 나설 때였다.

 

 

 

 

클리프, 50대가 된 소녀들을 다시 만나다

 

 

결국 69년 이후 근 10년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 우상 팝스타의 내한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샹송가수 살바토레 아다모의 공연이 70년대 후반에 두 차례 있었으나 오빠부대가 동원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사이 한국가요무대에도 차츰 오빠부대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조용필 전영록 최성수 구창모 윤수일 김범용 등의 공연장이나 녹화무대에는 10대 소녀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오빠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좋아하는 가수의 집은 물론, 동선을 따라다니며 팬덤을 과시했다.

 

그러던 80년 6월. 미국의 19살 '꽃미남'가수 레이프 가렛(Leif Garrett)의 내한공연이 남산 숭의 음악당에서 열렸다. 이때의 분위기는 CR공연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음악당 유리창이 깨졌고 화단의 꽃도 무수히 뽑혔다. 공연 때 그에게 바치기 위해 뽑은 것이었다. 객석에선 기절해 병원에 실려 가는 여학생이 속출했다.


개러트 공연과 소녀들의 아우성. 어떻게 보아야할까
1980.07.04 [동아일보] 5면

 

 

 

무대 위에는 온갖 물건이 다 던져졌다. 모든 걸 다 줘도 좋다는 뜻으로 던진 열쇠도 수북이 쌓였다. 청소년들의 아이돌 스타를 향한 도 넘은 열정에 어른들은 다시 진저리를 쳤고 정부는 해외 아티스트 공연을 불허했다. 그리고 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공연 때는 사상자가 발생하는 불상사까지 빚어졌다.

 

오빠부대의 원조 클리프 리처드는 2003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공연장인 잠실체육관에는 이미 반백이 된 여성 팬들이 몰려와 옛날처럼 환호하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34년 만에 재공연을 하게 된 리처드도 "시간은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과 지난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요. 저와 여러분의 추억여행을 시작해 봅시다."며 정성을 다해 애창곡들을 불러냈다. 잠실벌에는 그와 50대 여성 팬들이 함께 부른 'Evergreen tree'가 울려 퍼졌다.

동대문경찰서(지금은 혜화경찰서) 출입기자들은 봄이 되면 바빠진다. 창경원 때문이다(현 창경궁 안에 일제가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은 뒤 '궁'을 '원'으로 낮춰 호칭했다. 해방 후에도 관습적으로 '원'으로 부르다 1984년에야 본래의 창경궁 명칭을 회복했다. 여기서는 당시의 호칭을 쓴다). 거기 모여드는 사람들과 거기 살고 있는 동물 모두가 출입기자들을 바쁘게 했다.

 

 

 

상춘객으로 붐비던 그곳엔 사건·사고도 많아

 

 

60, 70년대만 해도 시민들이 봄나들이 갈 곳은 창경원이 거의 유일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 일요일만 되면 창경원으로 난 길은 인파로 메워졌다. 버스와 택시, 전차가 뒤엉켰고 미아도 하루 2,3백 명씩 발생하곤 했다. 때문에 동대문서 출입기자들은 봄에 휴일이 없었다. 다른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모처럼 가족과 창경원 나들이를 하는 동안에 그들은 취재를 하고 기사를 써야 했다.

 

일요일뿐 아니라 월요일에도 동대문서 기자들은 쉬지 못했다. 전날 인파상황을 요약정리하고 사람 아닌 동물 피해도 집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행락객 중엔 온갖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말없는 동식물에게 행한 갖가지 '못된 짓'들이 월요일 창경원 사육사들에 의해 취합됐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한국여우 한 마리가 관람객의 쇠꼬챙이에 눈을 찔려 실명했다." "급성 위장염을 앓다 죽은 물개 뱃속에서 철사, 도토리, 복숭아 씨, 유리구슬 등 이물질 247개, 1323g 이 나왔다."


상춘 만원…전국에 100만 인파, 미아 2백면
1976.04.19 [경향신문] 7면

 

 

 

61년에는 한 정신이상자가 "사슴뿔을 삶아먹고 기운을 얻어 동묘에 있는 82근 관운장의 청룡도를 휘둘러 천하를 평정하겠다."며 심야에 창경원 담을 넘었다. 그는 꽃사슴 한 마리를 활로 쏘아 넘어트리고 목을 잘라갔다.

 

 

 

창경원의 이색 캠페인 "귀여운 동물과 아름다운 식물을 사랑하자"
1972.03.08 [동아일보] 6면


67년에는 "캥거루가 자동차 경적과 배기 폭발음에 놀라 우리에서 뛰다 철 기둥에 부딪쳐" 급사했다. 68년에는 "타조가 어느 여인이 내민 소형지갑을 먹고 25일간 위장병으로 시달리다 다행히 변으로 배설해" 위기를 넘겼다.

 

사고만이 아니었다. 기자들은 동물가족의 경사도 취재했다. 자기 자식의 탄생은 못 봤어도 사슴이나 하마가 새끼를 낳는 모습을 몰래 숨어본 기자가 적잖았다. 신문사는 갓 태어난 동물새끼가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사진을 사회면 중간에 큼지막하게 게재해 독자의 눈을 끌었다. 물론 그런 경사를 특종 취재한 기자가 있는 반면 낙종에 땅을 친 기자도 있었다. 창경원 코끼리의 임신소동이 바로 그런 기자들의 특종을 둘러싼 과열경쟁이 빚어낸 한바탕 소극(笑劇)이었다.

 

 

 

 

코끼리 임신 특종 보도에 흥분한 기자들 총출동

 

 

1978년 3월 어느 날. 관할 지역 순회 취재를 마치고 돌아온 동대문경찰서 출입기자들은 서로 '별 일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누군가 혼자 몰래 송고한 특종기사가 없다는 뜻이다. 이른바 '물먹은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모두가 안도하며 함께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려는 참에 서울시경 기자실과 연결된 핫라인이 요란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투덜거리며 전화기를 들었던 K신문 L기자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하는 말, "코끼리가 새끼를 낳았다는데…"

 

정확히 말하면 새끼를 낳은 게 아니었다. S일보(80년 언론 통폐합으로 폐간됨) 사회면에 '국내 최초! 창경원 코끼리 임신-사육사들 확인, 어미 코끼리 돌보기 초비상' 운운하는 톱기사가 실린 거였다.

점심은 날아갔다. 물론 기자실의 깨지기 쉬운 평화도 일거에 날아갔다. 기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득달같이 창경원으로 날아갔다. 동물원장, 사육과장을 앉혀놓고 문초(?)가 시작됐다. '육중하며 친근한' 코끼리(아이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가?)의 임신 같은 중차대한 일을 어떻게 한 신문에만 특종으로 줄 수 있느냐고 따졌다.


사랑과 생동의 대합창…봄은 창경원서 부터
1978.03.11 [경향신문] 4면

 

 

 

창경원 측도 난감한 모양이었다. 코끼리가 정말로 임신을 했는지 자기들도 알지 못하며 관련 보고도 받은 바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코끼리 임신테스트를 한 적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는 거였다. 흥분한 기자들이 "사육사가 임신사실을 확인해 줬다지 않느냐? 그 사육사가 누구냐?"고 다그쳤다. 마지못해 원장에게 불려온 코끼리 사육사도 난감한 표정이긴 마찬가지. 처음에 코끼리 임신문제는 입에 올린 적도 없다던 그는 그러나 얼마 안가 무슨 큰 죄나 지은 듯 어제 일을 실토하기 시작했다.

 

 

 

 

“새끼 낳을 가능성 없다” 해명서까지 배포했지만..

 

 

한국 체질로 바뀐 창경원 코끼리
1976.08.05 [경향신문] 8면


저녁 무렵 평소 알고 지내던 S일보 기자가 찾아왔다. 다짜고짜 "코끼리 한 쌍이 교접을 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최근엔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지만 한 달 전쯤 보았다고 하자 "임신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웃으면서 "정말 그러면 얼마나 좋아, 우리 동물원에서 코끼리가 새끼를 낳는 첫 케이스가 되는데"라고 하자 이번엔 "코끼리 임신기간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자 "명색이 사육사가 임신기간도 모른다니 기삿감"이라며 겁을 주었다. 그러더니 "자, 이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지"라며 돌아갔는데 덜컥 코끼리 임신기사가 나왔다는 것이다.

 

코끼리의 임신기간은 대략 650일이다. 야생상태에서 그렇지만 좁은 우리에 갇힌 코끼리는 스트레스 탓에 임신이 잘 안된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창경원 사육사 누구도 코끼리의 정확한 임신기간, 임신징후, 임신 전후의 성정변화를 알지 못했다. 이제 S일보가 과학적 검사를 거쳐 코끼리 임신 기사를 쓴 것이 아님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남의 특종을 뒤엎으려면 과학적 근거가 필요했다. 기자들은 창경원 측에 수의학적 임신테스트를 하자고 요구했다. 그러나 창경원은 막무가내였다. 교접한 걸 보았다고 해서 바로 임신으로 단정할 수 없고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어쩌면 당시 창경원은 덩치 큰 동물에게 약물테스트를 할 능력도 안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창경원 측은 '취재능력과 상관없이 낙종'을 한 기자들을 위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해명서다. "태국에서 들여온 코끼리가 임신했다는 일부 보도는 절대 사실이 아니며… 창경원은 임신했다는 코끼리가 정말 새끼를 낳을 가능성은 없다고 확신한다."는 요지의 해명서를 기자실에 배포했다. 기자들은 그걸 들고 데스크에게 "코끼리임신 기사는 오보요,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데스크는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일부는 "어쨌든 S일보 기자는 특종을 낚으려고 창경원을 돌다 코끼리 교접장면을 본 것 아니냐? 너는 그 시간에 뭐 했느냐?"는 핀잔을 들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오보에 기사로 바로 반박

 

 

바로 그 핀잔 탓에 나온 게 L기자의 '창경원 동물가족 대(代)가 끊긴다.'는 기사다. 소음과 먼지 등 공해로 창경원 동물들이 생식능력을 잃었으며 특히 호랑이와 코끼리는 20년째 불임증을 보이고 있다는 기사였다. 코끼리 임신은 오보라고 바로 기사로 반박한 것이다. 기사는 또 물범이 새끼를 낳았지만 창경원의 사육환경으로는 살릴 길이 막막하다며 해변 밀림 등 자연과 흡사한 조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경원 측으로서는 감사해야 할 기사였다. 그렇지만 창경원은 이번엔 문공부로부터 "도대체 관리를 얼마나 못하기에 동물들이 임신도 안 되고 태어난 새끼도 죽을 지경에 이르렀느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입이 부어 오른 창경원 사육사들은 사슴과 하마가 이미 새끼를 낳았거나 곧 낳을 예정이라는 보도 자료를 들고 언론사로 뛰어갔다. 우리나라의 동물 사육환경이 외국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는 해명 글도 덧붙였음은 물론이다.


창경원 동물가족 대가 끊긴다.
1978.03.18 [경향신문] 7면

1974년은 정초부터 나라 안팎이 뒤숭숭했다. 국내에선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령돼 유신헌법 개헌의 ‘개’자도 못 꺼내게 국민의 입을 막았다. 미국에선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진실을 밝히라는 요구와 탄핵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 더해 베트남전쟁은 끝없는 수렁에 빠져 애꿎은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었다. 현실은 답답한데 표현하긴 마땅치 않고 가위눌린 듯 숨이 찬 형국이 짜증나게 지속되는 꼴이었다.

 

 

 

'나체 질주' 전세계 선풍적 유행

 

 

그러던 3월 첫 주. 동아일보에 짧은 해외토픽 기사가 실렸다. 미국 테네시대학 캠퍼스에서 스트리킹(발가벗고 질주하기)이라는 ‘새로운 유행병’이 번져 9명의 남학생이 구두와 양말만 신은 발가벗은 모습으로 여학생 기숙사 가까이를 질주했다는 것이다. 또 미국 프로농구 플로리다와 앨러버마 경기에서 한 젊은 관객이 옷을 홀딱 벗고 코트 위를 달려 "특히 여성 관중을 즐겁게 했다" 라며 그 사진을 게재했다.

 

사실 미국에서는 1월 말 경부터 나체질주 행위가 대학 중심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풍요로운 나머지 권태를 느낀 자들의 엉뚱한 짓거리" 정도로 사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3월 둘째 주. 봇물이 터진 듯, 들불이 번지 듯 세계 곳곳에서 발가벗고 질주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났다. 여학생까지 ‘알몸 달리기’에 동참했고 하늘에서 낙하하는 나체족도 등장했다. 어떤 노인은 달릴 힘은 없다며 나체로 천천히 걸어 '스네일링 (달팽이처럼 알몸으로 걷기)'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여기도 알몸, 저기도 나체, 가히 알몸질주 세상이었다.


美 대학생 나체 선풍, 공중 낙하로 번져
1974.03.09 [동아일보] 3면

 

 

 

3월9일 자 동아일보에는 3장의 스트리킹 사진이 실렸다. 맨 위는 미국 대학생 13명이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앞에서 나체 질주 후 환호하는 모습. 그 밑으로 조지아 대학 상공에서 알몸으로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리는 학생, 그리고 뉴올리언스 대학생 수십 명이 발가벗고 구경꾼 사이를 달리는 사진이 차례로 배치됐다. 기사는 프랑스 언론을 인용, "학교에서 섹스교육을 실시한 역효과인지 모른다. 어쨌든 저속한 풍경"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별다른 논평 없이 객관적 보도를 하는데 그쳤다.

 

 

 

 

초반에는 신나는 봄맞이 운동처럼 여겼지만

 

 

미국 대학가 휩쓰는 스트리킹 물결
1974.03.27 [동아일보] 5면


이틀 뒤인 3월11일. 선풍적으로 번지는 나체질주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석하는 외신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톤은, 주로 미국인의 입을 통해 '스트리킹은 재미있고 신나는 봄맞이 의식과 같은 운동'이라는데 맞춰졌다. 크게 해로운 건 아니라는 말도 했다. 며칠 뒤 한국에도 나체질주가 '광풍'처럼 밀려오고, 차마 눈 뜨고 못 볼 망국풍토라며 개탄할 걸 미리 생각했더라면 쓰기 힘들었을 기사였다. 기사는 첫 문장부터 매우 낭만적으로 시작한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나체 경주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알몸으로 달리는 신나는 운동(?)이 74년 미국의 젊은 세대 사이에 요원의 불길처럼 부활했다!" 그리고 바로 "아담과 이브 이전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이 순진한 해프닝은 재미있고 신나고 또 돈이 안 들어서 단연 대학생들 간에 인기 있는 경기종목이 됐다"고 소개하고 유명교수들의 코멘트를 따 알몸 질주를 괜찮은 스트레스 해소제인 양 제시했다.

 

 

 

미주리 대학 사회학자 에드 토미치 교수는 "에너지 위기로 길고 따분한 겨울을 보냈기 때문에 옷을 홀가분히 벗어 던지고 숨이 턱에 차도록 뛰고 싶은 '봄 처녀의 충동'이 미국에 퍼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대학 윌리엄 볼드슨 교수는 "단숨에 달려 순간에 끝나는 이 체험은 그리스 이래 봄맞이 의식의 일종"이라고 정의했다. 또 환경론자 로버트 아드리는 한 대학연설에서 스트리킹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망측하면서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운동이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꽤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에도 '나체 질주' 상륙

 

 

나체질주에 대해 그런대로 긍정적으로 보도한 건 그게 마지막이었다. 신문사 논설위원들이 칼럼을 통해 "스트리킹의 한국 상륙만은 제발 막자"고 호소한 13일, 고대 앞에서 한국 최초의 스트리킹이 일어난 것이다. 오전 8시15분 고대 앞 보성다방에서 20대 한 명이 발가벗은 채 뛰어나와 안암동 로터리 쪽으로 200m 가량을 달린 뒤 주유소 옆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가 달리는 동안 뒤에서 친구 한 명이 카메라로 그 장면을 촬영했고 다른 한 명은 옷 꾸러미를 옆구리에 낀 채 뒤쫓았다.

 

언론은 아연실색했다. 아니, 통곡했다. 그런 X는 때려죽여도 싸다는 식의 막말까지 썼다. 3월14일 자 경향신문 칼럼은 이렇게 시작한다. "설마가 사람 죽인다고 스트리킹 광태가 급기야 서울거리에 출현하고 말았다. 통곡할 일이다."


스트리킹 한국 상륙
1974.03.13 [동아일보] 7면

 

 

 

그리고는 이내 매서운 독설을 쏟아냈다. "창피하기 짝이 없고 나라 체면에 먹칠을 했다. 어느 집 아들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집 가문도 볼 장을 다 봤고 겨레가 입은 수치도 이만저만이 아니다…쓸개 빠진 일부 젊은 세대의 앞날이 암담할 뿐이다." 논설위원은 자기 친구의 말을 인용해 "'만약 (발가벗고 대로를 달리는) 놈이 있다면 광화문 네거리에서 포살을 하거나 그 이전에 시민들이 때려죽이고 말거야' 라고 했는데, 이런 겨레의 믿음이 허무하게 무너졌다"고 통분했다.

 

그리고 "이따위 얼간 망둥이는 전 수사력을 풀어서라도 잡아다 혼을 내라" "인간의 탈을 벗은 짐승, 세기말적 사이비인간, 인면수심의 망종들에겐 따끔한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임시조치법'이라도 만들어 엄중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 이런 개탄과 분노에도 한번 불길이 댕겨진 스트리킹은 전혀 꺼질 줄 몰랐다.

 

15일 하루 여학교 교정과 대로, 술집 등에서 4건의 스트리킹이 일어났다. 주한 미군들이 술 취해 벌이는 나체질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외신들은 여전히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스트리킹을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었다. 점보기 승객이 기내를 발가벗고 달린 이야기, 알몸으로 태연하게 TV에 나온 디스크자키, 교회 결혼식 중의 스트리킹과 미 육사 웨스트포인트 생도 스트리킹 등이 연일 화제였다.

 

 

 

 

 

 

유행 막고자 '나체 질주자 수사본부' 설립까지

 

 

이럴 즈음, 미국에서는 알몸질주의 정치색도 논쟁 전면에 부상했다. 몇몇 대학생들이 4월1일 만우절, 백악관 잔디밭에 모여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을 발가벗듯 낱낱이 밝히라는 의미에서 알몸시위를 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 물론 나중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학생회는 "그런 짓은 사태의 중대성을 모독하는 것"이라며 공식으로 사과하고 스트리킹 계획을 철회했다. 그러나 닉슨 탄핵국면과 묘하게 결합하면서 알몸질주는 정치적 요구의 한 변형이 아니냐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이런 곡절 탓인지 국내에서도 스트리킹 엄벌론이 힘을 얻었다. 경찰은 애초 경범죄로 처리하던 나체 질주자에게 형법의 공연음란죄를 적용하는 등 처벌수위를 한층 높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국내 첫 스트리킹 사례로 보고된 고대 앞 사건과 한남동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신용두 파출소와 한남 파출소에 각각 '나체질주자 수사본부'라는 희한한 이름의 간판을 내걸었다. 본서의 간부급 경찰관을 본부장으로 1백여 명의 정사복 형사를 투입해 총력 검거체제에 들어간 것이다.


경찰 애먹이는 스트리킹
1974.03.20 [경향신문] 7면

 

 

 

당장 경찰은 일대 하숙집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긴급반상회까지 소집해 나체질주자에 대한 제보를 독려했다. 또 그들이 장발이었다는 목격자 진술을 확보해 서울시내 일원에서 장발단속도 벌였다. 그러나 예의 나체질주자는 꽁꽁 숨어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다른 사건 같았으면 수사본부까지 차려 검거에 나서고도 범인(?)을 잡지 못한 경찰을 언론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달랐다. 잡힌다 해도 그의 질주 동기를 듣고 모방하는 젊은이가 생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없지 않았다.

 

나체질주에 대해 미국에선 처음 개탄의 목소리가 높았으나 팽배한 물질주의와 획일적 교육, 인습과 가식적 삶에 대한 이유 있는 반발이란 이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런 이해가 싹조차 키우지 못했다. 언론이 쓸데없이 흥미 위주 기사를 써 젊은이들의 모방을 부추긴다는 비판도 거셌다. 결국 언론사 스스로 나체질주 기사를 자제한다는 방침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보도가 사라지자 나체질주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슬픈 역사의 흔적’ 정도로 치부하기엔, 그건 너무 깊숙이 우리 삶에 들어와 있었다. 의례적 ‘봄맞이 행사’ 쯤으로 치레하기에도 우린 거기에 너무 많이 빠져있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또 청춘은 청춘대로 그것에 대한 기다림이 있었고 설렘이 있었다.‘창경궁’이 궁의 위엄을 잃고 ‘창경원’으로 지낸 70여년이 그랬다.

 

 

일제의 ‘조선 말살 정책’으로 심어진 벚나무

 

 

세월은 거기서 아픔과 함께 낭만도 키워냈다. 그 바탕엔 일제가 제 나라 혼이라며 옮겨 심은 벚나무가 있었다. 흐드러진 연분홍 꽃잎으로 4월을 물들이는 이 봄의 전령은 해방 후에도 자그마치 40년간 창경궁 안뜰을 차지한 채 우리에게 아픔과 추억, 낭만을 동시에 제공했다.

 

갓 쓰고 도포를 펄럭이며 서울 나들이에 나선 노인 모습을 거기선 쉽게 볼 수 있었다. 일제 때는 모던보이, 모던 걸의 아베크 장소이기도 했다. 전차 타고 종로에서 내려 화신백화점을 거쳐 ‘창경원 벚꽃 터널’을 걷는 게 당시 신세대의 데이트 코스였다. 그것이 한국전쟁 후 60∼70년대엔 온 국민의 유일한 상춘관광지로, 소풍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30대 중반을 넘긴 이면 누구나 하나쯤 ‘창경원 추억’을 가지고 있을 만큼 국민적인 명소였다.


회갑맞이 창경원
1969.04.21 [경향신문] 7면

 

 

 

창경궁은 일찍이 중종이 대장금의 진료를 받았던 곳이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뒤주 비극’이 일어난 장소도 그곳이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기념으로 가난한 백성에게 쌀을 나눠주고,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참배하려고 쪽문을 낸 곳 역시 창경궁이다. 수많은 왕과 왕비, 왕자, 공주의 생로병사가 이루어졌고 왕이 직접 농사 시범을 보인 곳 또한 창경궁이었다. 한마디로 조선왕조의 혼이 깃든 터였다.

 

바로 거기서 일제는 조선왕조 말살의 삽을 떴다. 1907년부터 창경‘궁’(宮) 안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 식물원과 박물관을 지었다. 언덕과 뜰에 가득 벚나무를 심었다. 1911년엔 이름도 창경‘원’(苑)으로 격하했다. 백성들이 부담 없이 와서 보라고 순종이 궁을 원으로 낮췄다지만 일제 정책에 굴복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1924년 봄, 창경원에 처음으로 색등을 밝히고 밤 벚꽃놀이가 벌어졌다. 일본의 그것을 본뜬 것이었다.

 

 

 

 

소풍의 명소, 국민 대표 관광지로 자리잡다

 

 

상춘 절정.. 전국서 행락인파 백만
1970.04.27 [동아일보] 7면


망국의 한이 서려있건만 봄의 서막을 여는 창경원 벚꽃 축제는 언제나 화려했다. 1920∼30년대 옛날신문과 소설에도 창경원은 벚꽃 유락과 현란한 소풍의 명소로 등장한다. 1936년 4월25일 동아일보는 창경원 봄소식을 전하며 “금년도 시설로는 춘당지에 직경 약 12메틀(미터)의 장려한 네온사인 분수탑을 건립하야 오채(五彩)의 광파를 못 속에 비치게 할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상 김유정의 작품들엔 맥고모자 쓰고 꽃잎이 꽃비가 돼 날리는 창경원을 거닌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 곳곳에선 군국주의 상징처럼 된 벚나무를 베며 항의하는 소동이 일었다. 며칠 활짝 폈다 한꺼번에 지는 벚꽃 속성을 전우애마냥 주입시켜 젊은이들을 전쟁 낙화로 만들었다는 이유였다. 특히 미국함대에 자폭 돌진한 가미카제 특공대의 죽음에 대한 항거 표시가 많았다. 그러나 수많은 젊은이를 강제징병, 징용으로 잃고도 한국의 벚나무는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 화용(花容)으로 더 사람을 끌고 흥을 돋우는 축제의 주역이 됐다.

 

 

 

1961년 4월15일. 창경원 밤 벚꽃놀이 개막에 맞춰 신문들은 일제히 난장판을 우려하는 기사를 실었다. “미아 도난 주정뱅이 쌈패 등으로 난장판이 되곤 한다. 꽃구경이 아니라 사람구경이오, 꽃에 취하는 게 아니라 사람에 취하기 때문에 살풍경의 천지로 일변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바로 낯 뜨거운 얘기가 이어진다. “무지한 취한인 경우 경내에서 똥오줌을 함부로 내깔기는 것은 예사요…젊은 남녀 아베크족은 이르는 곳마다 으슥한 숲속을 찾아 온갖 추태를 벌이는 데 보는 사람이 머리를 외로 꼴 지경이다…”

 

 

 

그러나 어쩌랴. 먹고 즐길 것도, 탈 것도, 쉴 시간과 공간도 부족했던 때다. 추위가 물러간 봄 밤, 흐드러지게 핀 벚꽃 동산을 오색 전등이 밝혀주는 데가 어디 그리 흔한가. 입장료 싸고 꽃은 물론 사람구경, 동물구경도 함께 할 수 있는 창경원은 그야말로 최적의 유락공간이었다(사람이 워낙 많아 휴식공간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어린이 손을 잡은 가족 관람객이 줄을 이었고 밤에는 연인과 부부, 짝을 찾는 젊음들로 북적인 게 당연했다.

 

창경원 관리소도 사람을 끄는데 적극적이었다.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이어지는 벚꽃놀이 동안 낮에는 육해공군 군악대 쇼를 열고 밤에는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 영화도 상영했다. 많을 때는 하루 25만 명이 창경원을 찾았다. 시설물을 제외하고 사람이 설 수 있는 땅엔 평당 5명 넘게 들어찼다. 물론 입장객 기준이니 같은 시간 평당 인원으로 산출하긴 무리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밀고 밀려 거의 둥둥 떠다니는 형국이었다.


상춘 공해도 초만원
1972.04.24 [경향신문] 7면

 

 

 

창경원 옆 종로4가∼원남동∼혜화동 길은 휴일이면 사람들로 메워졌다. 가짜 입장권이 등장하고 암표도 기승을 부렸다. 아침 7시 찬합에 김밥을 싸고 과일과 달걀 사이다, 돗자리까지 꾸려 집을 나서면 버스 전차를 갈아타고 8시 반경 원남동에 도착했다. 거기서 홍화문 매표소까지 걸어가는데 또 한 시간. 표를 사느라 거의 3,40분을 허비하면 어른들은 다리에 힘이 다 빠졌다. 하지만 꼬마들은 신이 났다. 바로 옆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울부짖고 힘센 어른들이 발로 밟고 정강이를 걷어차도 마냥 신이 났었다.

 

 

 

 

일부 대학생들에게는 ‘나체팅’ 장소로 인기

 

 

100만 인파속에 난장판 행락
1970.04.27 [경향신문] 7면


경내는 꽃 길이라기보다 차라리 흙먼지 길이라고 부르는 게 옳았다. 바가지요금이 판을 쳤고 미아는 하루 종일 발생했다. 잠시 앉아 쉴 공간을 찾기도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앉았다 하면 껌팔이 풍선장수 사진사 등 잡상인이 끊임없이 괴롭혔다. 20원짜리 껌 한 통에 100원, 50원짜리 초콜릿을 500원에 파는 건 예사였다. 아이에겐 풍선을, 애인에겐 초콜릿을 권하며 안 사면 폭행이라도 할 듯 눈을 흘겼다. 공인매점도 다를 바 없었다. 45원짜리 소주를 60원, 100원 맥주를 130원, 30원 사이다를 40원에 파는 창경원 구내매점의 바가지 상혼이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집 나서면 고생’이란 말은 창경원 나들이에 딱 들어맞는 말이었다. 인파에 밀리고, 그 속에 숨은 소매치기가 불안하고, 바가지 상혼에 시달리고, 자칫하면 손잡은 아이를 잃고, 화장실이 부족해 적당히 해결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밤의 여인들’까지 등장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71년 경향신문은 “40여년 축제가 고고 니나노 폭력 윤락으로 뒤범벅 돼 모처럼의 나들이를 잡친다.”고 한탄했다. 옛날에는 “길가에 줄지어선 벚꽃들이 가지가 휠만큼 만개해 마치 꽃 터널을 지나듯 장관이었지만 요즘은 오색등 아래 술 마시고 흥청댈 놀이터나 찾아올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질책도 아랑곳없었다. 서민들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또 창경원을 찾았다. 아이들은 단 하루만이라도 창경원 놀이를 가자고 부모를 졸랐고 부모들은 그걸 미끼로 아이들 공부를 시켰다. 시골사람들은 서울에 오면 다른 어디보다 우선 창경원을 찾았다. 평일에는 초등학생의 소풍행렬이 이어졌고 일부 대학생들은 ‘나체팅’을 한다며 또 창경원을 찾았다. ‘밤(나이트)벚꽃(체리블라섬)미팅’의 앞뒤 글자를 하나씩 뽑아 만든 나체팅은 70년대 대학가에서 한때 인기품목이었다.

 

춘당지에서 보트놀이를 하고 노을 비낀 수정궁에 앉아 저녁식사를 한 다음 밤 벚꽃 길을 오색등 따라 걷는 미팅. 30년대 모던보이의 운치를 닮은 그것은 그러나 유신과 긴급조치의 시국상황에 분개해 있던 대학생들로부턴 속없는 짓거리란 비판을 받았다. 그즈음 일부에서나마 일제 식민 잔재인 고궁의 벚꽃 아래 요란하게 봄을 즐기는 행태가 과연 옳으냐는 의문도 제기됐다. 게다가 당시는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고 생활수준의 향상에 따라 여가시설이 속속 들어서는 등 창경원의 독보적 위치도 흔들리기 시작할 때였다.


봄이 속삭이는 밤 벚꽃놀이 창경원
1972.04.11 [동아일보] 7면

 

 

 

 

‘원’으로 지낸 아픔에서 회복된 창경궁

 

 

창경원 벚꽃 남겨두나…없애나
1986.04.21 [동아일보] 11면


1980년대 초반. 창경원 벚꽃놀이는 여전히 인기 있었다. 인파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왕궁을 동물원으로 격하하는 등 식민잔재를 해방 40여년이 되어서도 청산하지 못한데 대한 여론의 불만도 비등점에 이르러 있었다. 1983년. 창경원은 4월9일부터 5월8일까지 한 달 간 밤 벚꽃놀이 축제를 열었다. 첫 휴일인 4월11일에는 15만 3천여 명이 몰려와 연분홍 봄밤의 운치를 마음껏 즐겼다.

 

 그 해 8월 문화재관리국은 “일제에 의해 원으로 격하된 창경궁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 해부터 동물들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사를 갔다.

 

1986년. 새롭게 단장 복원된 창경궁을 공개하기에 앞서 궁내에 남아있던 벚나무의 처리문제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창경원 시절에 있던 1천3백여 그루 가운데 학교 등에 분양하고 남은 6백 그루를 그대로 궁내에 두느냐, 아니면 없애느냐는 논란이었다.

 

 

 

나무엔 죄가 없으므로, 또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에 얽혀 있으므로 존치시키자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식민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자는 의견을 엎지는 못했다. 벚나무는 어린이 대공원과 여의도 등으로 옮겨 심어졌다. 창경궁은 완전치는 않으나마 아픔에서 회복됐다. 일제가 파괴한 건물이 완벽히 재현된다면 왕궁으로서의 위엄도 다시 갖출 것이다. 원(苑)으로 지낸 70여년의 추억도 빠르게 잊어지는 것 같다.

 

그곳은 거리의 응접실이었다. 만인의 사무실이자 마음의 안식처였다. 한편으론 문학과 예술을 불태운 아지트였고 맞선과 데이트의 중심이었다. 나이 든 어른들의 사랑방이자 대학생의 공부방, 직장인의 휴게실이기도 했다. 실업자의 연락처였고 회사 없는 ‘사장님’의 둥지였다. 의자 깊숙이 들어앉아 조용히 흐르는 음악을 들으며 담소하는 여유도 있었다.

 

 

 

전국민의 아지트 '다방'

 

 

그곳은 다방이다. 커피숍이나 카페와 어감은 물론 질도 전혀 다른, 말 그대로의 다방. 세계 어디에도 없는 이 한국적 명물을 두고 어느 외국인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선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밖에 없다. 허구한 날 사람들이 모여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진지한 토론을 한다. 거기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수시로 들락거리고 화제도 무궁무진하다.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새 참석자가 올 때마다 또 새 뉴스, 새 토론이 시작된다."


그렇게 거창한 토를 달아도 되는지 의문이나 사실 오랫동안 다방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있었다. 거리엔 '한집 건너 하나' 꼴로 다방이 있었고 밥은 굶어도 커피는 마셔야 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중년의 느끼한 남성이 약간 코 먹은 목소리로 "0마담∼ 홍콩에서 배만 들어오면 말이야∼" 운운하며 다방 마담을 꼬드기는 농담마저 전국적으로 유행할 정도였다. 그만큼 다방의 마담이나 레지는 서민과 항상 마주하는, 친숙한 존재였다.


최대규모 '본전'다방.. 객석 320개
1969.12.05 [동아일보] 4면

 

 

 

사람들은 직장이나 거래처, 교류 범위, 대화 상대에 따라 다방을 골라 다녔다. 동선에 따라 지역별로 몇 개의 단골다방을 두기도 했다. 1980년대 말, 서울에는 무려 1만 1천 개의 다방이 있었다. 낮에는 다방, 밤엔 술을 파는 이른바 '주다야싸'도 많았지만 인구 1천 명당 한  곳 꼴로 다방이 있었던 셈이다. 차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을 죽치던 손님을 쫓아낸 '인정머리 없는 다방' 고발기사를 쓸 정도로 언론도 다방과 주변 일에 민감했다. 서민경제를 얘기할 때도 다방 동향은 빠지지 않았다.

 

 

 

 

모닝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다방, 외래품 판금에 타격
1963.05.06 [경향신문] 4면


1970년대엔 신문사에서도 기자들이 다방에 가 아침커피 한 잔을 하고 와서야 일을 시작하는 관습이 있었다. 부장급 편집간부들이 회의를 하는 사이 내근기자들은 우르르 근처 다방으로 몰려갔다. 그리곤 너나없이 '모닝'을 시켰다. 모닝커피의 줄임말인 모닝은 설탕과 크림을 다 넣은 커피에다 계란 노른자를 하나 떨어트린 것. 어느 다방은 거기에다 참기름까지 한두 방울 친 국적불명의 모닝을 냈고 반숙이나 프라이를 서비스하기도 했다.


기자들 중 전날 술이 과했던 사람은 '위티'나 '하이볼'을 주문했다. 위티는 말 그대로 위스키+티, 하이볼은 위스키+소다수 음료다.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다시피 하는 신문사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다방 마담은 위스키는 더블로, 모닝에는 계란 노른자를 두 개 넣어주기도 했다. 아침을 걸렀거나 속이 편치 않은 이에겐 충분한 해장거리가 되었다. 마담은 그렇게 생색을 내면서 자기 몫의 음료도 얹어 시켜 손님이 계산하게 하는 상혼을 발휘했다.

 

 

 

3, 40분에 불과한 티타임인데도 화제는 무궁무진했다. 진행 중인 사건이 주로 화제에 올랐지만 회사 높은 사람들의 기류나 길흉사, 아이들 교육문제에 총각들의 결혼 고민까지 정말 다양한 논제가 파노라마식으로 전개됐다. 담배연기는 언제나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얘기가 재미있다 싶으면 마담과 ‘레지’ ‘카운터’까지 둘러서서 귀를 곧추세우곤 했다. 광화문 근처 다방에는 그런 기자들의 단골다방이 몇 군데 있었다.


얘기꽃을 한창 피우다가도 누군가 "부장회의 끝났겠다!"고 외치면 금세 후다닥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정해진 순번에 따라 찻값을 내게 돼 있지만 대부분 "그어 놔" 한마디만 던지기 일쑤였다. 외상으로 하자는 얘기. 마담은 대충 그냥 넘어가지만 어떤 때는 막무가내 현금결제를 요구했다. 실랑이가 벌어지고 손님은 주머니 사정이 궁한 이유를 설명하고…. 집의 부인에겐 말 않던 속사정도 다방 마담에겐 솔직히 털어놓는 일이 적잖았다.


직업 중에서도 제일 바쁘다는 기자들의 다방출입이 그 정도였으니 보통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한번 다방에 들어가면 서너 시간 앉아 지내는 것은 예사요 마담이나 레지와 차를 더 시켜야 하네, 아니네, 싸움도 적잖게 일어났다. 변두리 다방에선 동네 어르신이 들어오면 레지들이 어깨를 풀어준다, 팔다리를 주무른다고 난리를 쳤고 소문을 듣고 뛰어온 할머니가 마담과 대판 싸우는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다방에서의 에티켓을 알리는 몸가짐 백과까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다방업은 붐을 맞았다. 제대로 된 건물도 별반 남아있지 않던 시절, 명동에 돌아와 둥지를 튼 모나리자 다방은 갈 곳 없는 문인과 예술가들의 고향 같은 안식처였다고 한다. 71년 경향신문은 "요즘 다방은 인정보다 상혼이 앞선다."고 개탄하며 예전의 훈훈하고 아늑한 다방의 실례로 모나리자를 들었다. "다방 정면에는 '모나리자의 미소'가 걸려있었고 마담은 항상 웃음 띤 얼굴로 분위기를 훈훈히 해주었고 조용한 음악이 6.25의 상처를 달랬다."


그런데 그 웃음 띤 마담이 다방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게 됐던 모양이다. 그러자 단골손님들은 "모나리자도 시집간다."면서 아쉬움을 달랬다는 기사를 실었다. 또 명동 동방살롱 주인은 "아래층 다방 위에 문인들을 위한 집필실도 따로 마련해주고 한강 밤섬에서 카니발도 열어주는 등 요즘 상인과는 달리 인간미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도대체 당시 다방은 어쨌기에 신문이 그처럼 옛 다방의 정과 운치를 못 잊어하는 걸까.


대형화 하는 다방.. 마담 레지 최대 이용
1971.08.05 [경향신문] 6면

 

 

 

"앉기가 무섭게 차를 주문하거나 서넛이 가서 한사람이라도 차를 안마시면 불도그처럼 눈을 뜨고 욕설까지 할 정도"로 당시의 다방은 각박해졌다고 신문들은 개탄했다. ‘시장 바닥처럼 시끄럽고' '브로커들은 탈세의 한 방편으로 다방을 이용하며' '대형화 기업화'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전화 있는 다방에 손님이 몰려 "사장님, 전화요" 하면 대여섯 명이 고개를 일제히 돌릴 정도니 '가난한 주제에 사장 좋아하는 허세'를 부린다고 꼬집기도 했다.


다방 경영이 기업화함에 따라 소위 '가오마담'이 다방의 꽃으로 손님을 끈다는 것도 뉴스였다. "중년층 샐러리맨이 많이 몰리는 다방마담은 한복차림으로 홀을 누비고, 젊은 대학생을 상대하는 다방에서는 젊은이에 맞먹는 발랄한 아가씨를 내세워" 핫팬츠가 유행하면 레지들에게도 그 옷을 입힌다는 것. 또 명동의 다방경영 원칙은 "보통 30세 내외의 마담 1명, 친절하고 예쁜 20세 내외의 레지 2명과 나머지 1명은 우악스런 아가씨를 끼어놓는다"고 했다. '우악스런 아가씨'가 왜 필요했는지 궁금해진다.


도시인이라면 다방 출입을 않고 살기 힘들다는 것이 당시엔 정설로 돼 있었다. 67년 매일경제는 '다방서의 에티켓'이란 '몸가짐 백과' 기사를 썼다. 거기서는 "차를 얼른 가져오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지르는 것과 옆의 박스에 있는 다른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은 남의 응접실을 넘겨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자신을 천하게 보일 따름"이라고 충고했다. "다방에 너무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것은 마담이나 레지의 눈총을 받게 되지만 차 주문을 너무 서둘러도 촌스럽게 보인다는 것"도 친절히 설명했다.

 

 

 

 

'꽁피 사건'에 커피 애호가 분노

 

 

다방주방장 5명 구속.. 커피에 담배가루 섞어팔아
1976.05.29 [경향신문] 7면


에티켓까지 숙지해야 할 정도로 시민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만큼 다방은 된서리도 적지 않게 받았다. 61년 5.16쿠데타 직후인 5월 29일 전국 다방은 일제히 "오늘부터 커피를 팔지 않습니다."란 게시문을 내걸었다. 외래품 근절을 위한 자발적 움직임처럼 보도됐지만 사실 정부의 강압적 조치였다. 전량을 외국서 수입하거나 미군부대 PX를 통해 불법 유통되는 커피를 아예 뿌리 뽑자는 군부의 조치였던 것이다.


9월부터는 커피 홍차 코코아 레몬주스 등 외래품 일체와 국산과의 혼용도 판금 됐다. 단골들에게만 몰래 커피를 팔던 다방주인들이 치안재판에 회부된다는 등 당국의 위협에 손들고 문을 닫는 곳이 속출했다. 커피 등 외래품 단속은 60년대 내내 지속돼 업자들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포켓 속의 전용다방’이란 광고문과 함께 등장한 00커피 캬라멜이다. 맛이 외국산과 거의 비슷하다는 '인조 커피' 광고도 신문에 심심치 않게 실렸다. 다방에선 커피 대신 콩을 볶은 '콩피'를 내놓기도 했다.

 

 

 

70년대에 들어선 담배꽁초를 섞어 커피를 끓였다는 '꽁피 사건'이 커피 애호가들을 화나게 했다. 미제 커피 찌꺼기에다 톱밥과 콩가루 계란껍질을 섞어 만든 가짜커피 사범도 잇달아 적발됐다. 이런 판에 커피 수입이 자유화됐고 70년대 후반에는 커피 자판기도 등장했다. 집이나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맛있고 질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됐다. 거기다 오디오의 빠른 보급은 음악을 들으러 다방에 간다는 핑계마저 앗아갔다. 사람들은 터진 공간에 쭈그려 앉아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차를 홀짝이기보다 저만의 오붓한 공간에 들어앉아 쉬기를 바라는 족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다방

 

 

다방은 80년대 이후 급격히 침몰했다. 술집이나 서구식 커피숍으로의 업종전환이 빠르게 이어졌고 일부는 매춘을 겸한 티켓 다방으로 변질돼갔다.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사람들도 빠르게 밝고 깨끗한 사무실로 만남의 공간을 이동시켰다. 때로는 면도도 하지 않고 물들인 군용 점퍼를 입고 컴컴한 다방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던 문청들도 어쩐 일인지 다방문화의 쇠퇴와 함께 사라졌다.


45년 해방 무렵 서울엔 60개 정도 다방이 있었고 50년대 말엔 그것이 1천2백 개소였다. 63년엔 8백 개소로 줄었다 71년 1천4백, 72년 3천, 80년 4천, 87년 9천, 89년 1만1천 개소까지 크게 늘었다. 80년대의 놀라운 숫자 팽창은 사실은 '주간다방 야간살롱(주다야싸)' 술집이 대종을 이룬 것이었으며 원래적 의미의 다방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다. 6780 다방은 지금 거의 골동품 수준으로 몇 곳만 살아남아 추억의 손님들과 함께 과거의 영광을 되씹고 있다.  


'사양길' 다방.. 술집 등에 밀려
1982.11.16 [경향신문] 6면

소란은 한순간 뚝 그쳤다. 8천여 명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배꽃마냥 하얀 한복을 입은 여왕.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분홍색 한복 차림의 시녀들. 해군 군악대의 멋진 주악에 맞춰 붉은 카펫이 깔린 21개 계단을 사뿐사뿐 오르던 여왕은 긴장한 듯 잠시 멈칫거렸다.

 

 

 

5월의 여왕 '메이퀸' 대관식

 

 

일순 “아-!”하는 탄성. 그러나 금세 자세를 고쳐 잡은 여왕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사철나무와 장미송이로 꾸며진 ‘5월의 궁’에 들어섰다. 우아하게 치마를 고르며 자리에 앉자 배꽃을 수놓은 메이퀸 화관이 씌워졌다. 식장 위를 돌던 헬리콥터에서 축하화환이 던져지고 오색 색종이가 날았다. 신록이 파릇한 캠퍼스에 박수, 함성이 가득하고 새 여왕의 탄생을 기리는 ‘이화의 노래’가 신촌 골에 메아리쳤다.


1960년대 중반 이화여대 개교기념 축제 ‘이화잔치’의 하이라이트, 메이퀸 대관식 정경이다. 대학축제 중에서도 단연 인기 최고였던 이대 메이퀸 대관식은 단순히 그 학교만의 행사가 아니었다. 서울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그곳 대관식과 이어진 ‘쌍쌍파티’에 가고 싶어 했다. 5월 마지막 주에 열리는 그 축제는 10여 군데 이상 대학에서 벌어지는 봄 축제의 흥겨움을 마지막으로 뽐내는 대미(大尾)나 다름없었다.


축제로 들뜬 대학가…메이퀸 반세기의 여화
1966. 5. 17 [동아일보] 7면

 

 

 

 

메이퀸의 가족관계와 취미까지 보도하던 당시 언론

 

 

이화여대, 메이퀸과 기숙사
1962. 7. 3 [경향신문] 3면


지금 생각해보면 여왕 선발대회는 대학문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학문과 지성의 전당’으로서 대학 이미지와 ‘미인대회’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올 리 없다. 하지만 60∼70년대 대학축제에서 ‘5월의 여왕 선발 및 대관식’은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약방의 감초요, 청춘의 특권과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대학뿐 아니라 서울의 직장들에서도 5월의 메이퀸 선발과 대관식은 언제나 화제의 정점에 섰다.


물론 메이퀸 선발이 이대에만 있던 행사는 아니었다. 숙명 덕성 수도여대 등 여자대학은 물론 연세 한양 단국대 등 남녀공학 대학에도 있었다. 일부 여고에서도 대학을 흉내 내 메이퀸을 뽑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대의 메이퀸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국 최초 여성교육기관으로, 또 이미 1908년부터 메이퀸 선발을 했다는 전통이 어우러져 메이퀸하면 이대라는 인식이 굳어진 탓이었다.

 

 

 

당시 신문들은 메이퀸이 선발되면 인물 사진과 함께 그의 가족사항과 취미까지 보도하는 게 관례였다. 예를 들면 “A양은 외교관 0씨의 3녀로 ㅇㅇ여고를 나왔으며 취미는 꽃꽂이와 음악 감상.” “B양의 아버지는 공무원이고 취미는 단소 불기” 같은 식이었다. 게다가 이대의 경우는 선발과정뿐 아니라 대관식 모습까지를 생중계하듯 보도했다. 65년 5월31일자 신문이다.


한가람 봄바람에 피어난 우리 성인이 이를 불러 이화라 하셨네. - 해마다 5월 마지막 날이 되면 이화여대에서는 ‘꽃 중의 꽃’ ‘5월의 여왕’이 태어난다. 0양은 8천여 학우들의 축복과 선망을 한몸에 받으며 29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찬란한 대관(戴冠)의 왕좌에 올랐다.” 서울인구라야 지금의 3분의 1 정도고 봄맞이 축제로 ‘여왕 선발’만큼 관심을 끌만한 일도 없었던 때문인지 이 기사는 사진과 함께 사회면 중요기사로 실렸다.

 

 

 

 

스피치부터 몸맵시까지 '메이퀸 선발 과정'

 

 

67년 이대 메이퀸은 각 과에서 뽑힌 후보 40명이 4천 명 학생이 들어찬 대강당에서 1분 스피치, 몸맵시, 걸음걸이 등 일종의 뷰티 콘테스트를 거쳐 선발됐다. 1차 학과에서 선발된 후보들은 B 학점 이상, 기독교인에 키 160cm 이상의 재원이었다. 학교 측이 꼭 그렇다고 말은 안 했지만 성적 품행 외에 외모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학교건 사회에서건 모두가 메이퀸이라면 “그 학교의 간판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해 연세대학이 뽑은 여왕은 여학생들이 추천한 14명의 후보를 250명 남자대학생 대표가 3명으로 압축하고 이를 다시 교수 15인 선정위원회에서 가리는 절차를 거쳤다. 여학생들은 기초자료만 제공하고 선발권한을 사실상 남성에게 일임한 것이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남성들 눈에 맞는 미인을 선발하자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대학가 '5월 여왕' 어디서 무얼하나
1990. 4. 23 [경향신문] 12면

 

 

 

5월 축제가 지나면 시내 대학가에는 “올해는 o대학 메이퀸이 제일 예뻤다”는 등의 품평이 나돌았다. 어떤 대학 일부 과에선 몇몇 메이퀸들을 놓고 인기투표를 실시해 그 결과를 발표하는 호사가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메이퀸으로 뽑힌 여학생들은 대학 학보는 물론, 각종 잡지에까지 사진이 실리므로 굳이 현장에 가서 얼굴을 보지 않더라도 미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총각들이 많은 직장, 대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외근활동이 많은 회사들은 일부러 총각 직원들을 외근에 배치, 대학 축제 쌍쌍파티 등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애썼다. 여대생으로부터 쌍쌍파티 파트너 초청을 받았으나 숫기가 없어 회사에 말도 못하고 끙끙대던 총각직원을 반나절 휴가를 준 상사의 얘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축제기간이 끝난 뒤 총각직원들은 술자리에서 상사들에게 쌍쌍파티와 여왕 대관식 등 대학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미주알고주알 설명해줘야 했다.

 

 

 

 

메이퀸 살해 사건으로 불거진 회의론

 

 

 

겉도는 미인대회…메이퀸 살해사건 유감
1971. 7. 8 [동아일보] 7면

 


대학은 물론이고 사회에까지 이처럼 화제를 제공했던 메이퀸 제도는 그러나 1971년 커다란 위기를 맞는다. 그해 6월30일 밤 11시 반경 서울 충무로 한 호텔에 든 모 대학 메이퀸이 17층 객실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발생한 것. 그녀는 이날 저녁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오빠 친구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다 강제로 객실로 끌려온 것으로 밝혀졌다.


사건은 처음 오빠 친구의 결혼요청을 거부하던 메이퀸이 스스로 투신, 숨진 것으로 수사방향이 잡혔다. 그러나 경찰수사 과정에서 허벅지 칼자국이 발견되고 사건은 살인 쪽으로 급전환했다. 사건발생 일주일 만에 경찰은 오빠 친구로부터 “겁탈해서라도 내 사람을 만들어 결혼하려 했으나 반항해 칼로 찌르고 목을 졸라 객실 밖으로 떨어트렸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 ‘메이퀸 살인사건’은 범인의 자백을 둘러싸고 2년여 재판이 진행돼 무기징역→무죄→무기→무죄 등 핑퐁 판결을 거듭했다. 결국 대법원이 징역 10년 형을 확정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언론이 사건과는 별개로 “미인대회 육체미대회로 전락한 대학의 메이퀸 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여론몰이에 나섰다.


한 여고교장은 신문칼럼에서 “여인의 미를 가슴둘레 허리 엉덩이 다리 등을 수량적으로 규격화하여 다양한 개성미보다 …육감적이고 외향적인 미를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어느 대학교수는 “학업에 전념해야 할 여대생들이 메이퀸으로 선발되기 위하여 의상이다 화장 값이다 하여 들이는 액수가 엄청난데 대해 개탄에 앞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질타했다.


이런 비판과 함께 학생들의 관심도 “우리 것과는 별 상관이 없는” 메이퀸에게서 멀어져갔다. 아니 정확히, 10월 유신과 긴급조치 등 시국상황이 국민을 옥죄는데도 대학생들이 ‘평화 시대처럼’ 여왕이나 뽑고 있어서 되느냐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60년대만 해도 여왕 대관식이 열리면 숨죽이고 지켜보던 학생들은 하나하나 축제현장을 떠나 민주화 데모에 나섰다. 일부 학생들은 축제장에 들어가 “학우들은 최루탄을 맞으며 민주주의를 외치는데 미인대회나 열 것이냐”며 울부짖기도 했다.

 

 

 

 

80년대 자취를 감춘 메이퀸 선발대회

 

 

그러나 관습으로 굳어온 메이퀸 선발대회가 호락호락 쉽사리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75년 5월 긴급조치 9호 발동으로 손발과 입이 묶이기 전까지 대학들은 축제 때면 으레 메이퀸 선발대회를 병행했다. 시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시녀 대동을 없애고 사진촬영 등 호화로운 부수행사를 축소했지만 일부에선 여전히 인기 있는 행사였다.


그러던 76년 3월 이화여대 학생신문 이대학보는 ‘5월의 여왕 선발시비’라는 특집기사를 실었다. 비록 찬반양론을 고루 게재했지만 의도는 누가 봐도 분명했다. 반대론자들은 “일개인의 얄팍한 명예욕이나 만족시키는…” “오늘날 과연 누가 누구의 여왕일 수 있느냐” “시대착오적 쇼”라며 열을 올렸다. 찬성론자들은 “여자대학만이 갖는 매력” 등을 운위했다. 찬성론 목소리는 약했고 대세는 이미 반대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이대생 대상 여론조사 "메이퀸은 좋으나 절차는 고쳐야"
1977. 4. 15 [동아일보] 5면

 

 

 

 

그런 반발이 있었지만 76년에도 이대는 메이퀸 행사를 강행했다. 대학의 상징처럼 된 전통적 행사를 대체할 다른 무엇을 찾지 못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면서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일까, 학교 측은 “여왕의 행렬과 대관현장에 외부인이 60m 이내로 접근하면 행사를 바로 취소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78년 5월. 이대는 임시 교무회의를 열고 “메이퀸 행사를 올해에 한해 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표면으로 내세운 이유는 “49개 학과 중 24개 학과가 메이퀸 선발을 거부, 50%이상 학생들이 반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해는 물론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메이퀸 행사는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대학들의 여왕 뽑기 행사도 80년대에 들어서며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먹을거리가 궁했던 시절 번데기는 아이들의 주된 간식거리였다. 누에가 고치실을 빼내 쭈글쭈글 주름 잡힌 묘한 생김새에 꼭 뭔가를 닮은 갈색 껍질 탓에 번데기는 보기만 해도 진저리를 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외국인들은 길거리 행상들이 양은 솥에 번데기 수만 마리를 넣고 끓여 파는 걸 보고 '곤충 탕' '벌레 수프'라며 한사코 고개를 내젓곤 한다. 한국에 와서 발견한 혐오 식품 제1번으로 번데기를 꼽는 사람도 적지 않다.

 

 

 

가난했던 시절 아이들의 영양 간식 '번데기'

 

 

하지만 60∼70년대 마냥 춥고 배고팠던 시절, 아이들에게 번데기는 그야말로 별식(別食) 중의 별식이었다. 생김새가 징그러워 '몬도가네' 풍이었지만 영양도 좋아 어른들까지 즐겨 찾는 먹을거리였다. 값도 비교적 싼데다 학교주변 행상들은 덤도 듬뿍 줘 아이들의 인기가 높았다. 번데기의 '데기'는 빼고 번 자만 된소리로 "뻔! 뻐∼언!" 외치고 다니는 행상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코흘리개 모습은 서울 주택가 골목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었다.

 

1978년 9월27일 새벽 6시. 서울 동북지역 사건 담당 L기자는 시립병원에 들렀다. 5살 어린이가 번데기를 먹고 숨졌다는 간호사의 귀띔을 들었다. 어린이 식품사고는 신문이 절대 빠트려선 안 될 뉴스다. 스스로 보호능력이 없는 어린이가 어른들의 무관심이나 횡포로 숨졌다면 고발기사로는 그야말로 최고 상감이기 때문이다. 즉시 시경 캡(서울시경 출입기자로 사건기자들을 총괄한다.)에 보고하자 캡은 더 심각한 소식을 전해준다.


위생법서도 빠진 위험한 군것질
1978. 9. 28 [동아일보] 7면

 

 

 

 

번데기 간식 먹고 숨진 아이들

 

 

번데기 먹고 어린이 7명 절명
1978. 9. 27 [경향신문] 7면


"뭐야? 파주에서도 번데기 먹은 애들 넷이 숨졌다던데…" 뭔가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충격. 빠르게 머릿속을 오가는 갖가지 생각. "이거, 누가 독을 푼 거 아냐?" "파주와 서울 동북쪽은 너무 먼데, 무슨 연관이지?" "변질 번데기가 서울 경기도 지방에 퍼졌나?" 전화기 속에선 시경 캡의 다급한 목소리가 왕왕 울린다. "사건기자들, 경찰서 나와서 서울시내 병원 모조리 뒤져봐. 어린이 사고 있으면 전부 보고해!"

 

오전 11시가 되자 사건의 규모는 훨씬 커졌다. 상계 정릉 미아동 일대에서 번데기를 사먹은 어린이 30여 명이 중독 증세를 일으켜 여러 병원에 입원치료 중이었다. 4명은 이미 숨졌다. 아이들은 번데기를 사서 먹은 지 2시간 만에 입에 거품을 물고 사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졌다. 전형적인 독극물 중독 증세였다. 파주의 어린이들도 같은 증세를 보였다. 아이들은 모두 경동시장의 중간도매상을 통해 나온 번데기를 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병원마다 아우성이었다. 두세 살 아기부터 일고여덟 살 어린이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들바들 떨며 끊어질 듯 말 듯 숨을 쉬는 옆에서 부모들은 통곡을 했다. 한 아버지는 "고깃국 한번 못 먹이고 겨우 50원짜리 번데기 한 봉 사줬는데 이게 애를 잡는다."며 울부짖었다. 번데기를 먹은 사연도 눈물겨웠다. 파주에선 학교 앞 행상이 "번데기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항의를 받고 집에 가져와 씻은 뒤 멍석에 말리던 것을 동네 아이들이 몰래 집어먹고 변을 당했다. 다섯 살 미만 아이들은 가난한 부모가 직접 사다 먹인 경우가 많았다.

 

 

 

 

사고 원인은 '농약 성분 묻은 번데기'

 

 

27일 석간신문에 "번데기 먹고 어린이 8명 숨져" 제목의 기사가 나가자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아이들이 번데기를 즐겨 먹는 것을 아는 부모들은 황급히 집에 전화를 걸어 '번데기 금식령'을 내렸다. 경동시장은 물론 영등포 아현동 시장의 도매상들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검찰 경찰 보사부와 농수산부가 각각 원인 규명에 나선 가운데 문교부는 학생들에게 거리 음식을 일체 사먹지 말도록 긴급 지시했다.

 

문제의 번데기는 경북 봉화의 제사공장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산지까지 찾아간 도매상이 번데기 58말을 사 정부미 마대(麻袋) 9개에 담아 중앙선 열차 편으로 서울로 옮겨왔다. 경동시장 중간도매상은 번데기에서 약품 냄새가 났으나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 5부대를 소매상에 팔아넘겼다. 그의 단골 소매상이 서울 동북부와 파주의 구멍가게나 포장마차, 번데기 행상들이어서 희생자들은 모두 이곳에서 났다.


번데기 참사…제조·유통·관리에 문제점 있다
1978. 9. 28 [경향신문] 7면

 

 

 

예나 지금이나 사건이 터져야 공무원들은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언론이 정부의 안일한 식품관리 정책을 비판하자 농수산부는 앞으로 시중에서 일체 번데기를 못 팔게 하고 사료공장이나 통조림공장에만 직행시키겠다고 밝혔다. 그때까지 번데기는 산나물처럼 자연산 농산물로 취급, 식품위생법상의 규제대상에서도 빠져 있었다. 번데기 부대는 일반 화물이나 잡화로 간주돼 열차나 용달차에 화공약품 농약 등과 같이 실리곤 했다.

 

 

 

번데기 참변을 계기로 본 오늘의 안타까운 실태
1978. 9. 29 [경향신문] 1면

 


이런 가운데 학계에서는 "얼마 전 번데기에서 중성세제가 검출돼 보건당국에 규제를 건의했지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더니 급기야 이번 참사를 빚었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공해문제연구소는 "번데기는 한때 동물사료용으로 외국에 수출했으나 세제(洗劑) 말고도 다른 유해성분이 발견돼 수출이 중단된 것"이라고 폭로했다. 외국선 사료로도 쓰지 않는 것을 식품 공해에 민감한 어린이들에게 기호품으로 나돌게 방치했다는 것이었다.

 

식중독 사고 발생 사흘째, 또 두 명의 어린이가 숨졌다. 사망자는 모두 10명, 병원치료를 받는 중환자는 40여 명으로 늘었다. 경찰은 숨진 어린이들을 부검하고 중간도매상의 마대자루를 검사해 파라티온 성분을 검출해냈다. 독성이 강한 잔류성 농약이 마대와 번데기에 묻어 아이들 입으로 들어간 원시적인 사고였던 것이다. 경찰은 그러나 언제 어떤 경로로 파라티온 농약성분이 마대자루에 묻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수사는 경동시장과 봉화의 제사공장 언저리에서만 뱅뱅 맴돌 뿐이었다.

 

 

 

 

식품 관리 소홀이 빚은 참사, 치료도 거부 당해..

 

 

그런 판에 새로운 폭로가 또 터졌다. 외아들이 번데기 식중독을 일으켜 둘러 업고 2시간 넘게 11군데 병원을 돌았으나 모두 진료를 거부해 청진기 한 번 못 대보고 숨졌다는 아버지의 분노가 보도된 것이다. 그는 동네 의원과 병원에선 의사가 없다거나 일손이 달린다는 이유로 진료를 거부했으며 아예 문조차 열어주지 않은 곳도 있다고 말했다. 또 종합병원과 대학병원에서는 입원실이 없다거나 더 큰 곳으로 가라며 혼수상태 아이를 맥 한 번 짚어보지 않은 채 내쫓았다고 울부짖었다. 네 살짜리 딸이 혼수상태에 빠진 아버지도 병원에서 3시간 넘게 응급치료를 않고 방치하는 바람에 딸이 사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죄 없는 아이들이 식품 관리의 소홀 탓에 죽음에 내몰린 것도 억울한데 돈이 없다는 이유로 병원에서 진료를 거부하다니 이러고도 나라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었다. 언론은 연일 행정 당국의 무능과 안일을 꼬집었다.


번데기 참사 '비정인술' 병원 고발
1978. 9. 30 [경향신문] 7면

 

 

 

급기야 검찰이 진료거부 병의원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고 의사 4명을 의료법 위반혐의로 입건했다. 서울시는 이와 별도로 시내 75개 병원에 대한 종합감사를 벌여 8개 병원에 행정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그 정도였다. 의사들과 병원들은 불구속 입건되거나 행정 처분을 받는 선에서 그쳤다. 농약 번데기를 유통시킨 경동시장 중간도매상은 구속되고 소매상들도 입건됐지만 식품관련 공무원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번데기의 시중 유통을 금지한다고 했지만 그해 12월쯤에는 다시 번데기 행상이 학교 앞이나 변두리 주택가에 등장했다. 그들은 단속이 두려워 "뻔!"을 소리치지 않을 뿐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번데기를 받아다 팔았다. 언론이 그런 실상을 보도하고 경고기사를 내보내면 당국은 집중 단속을 펴겠다며 반짝 쇼를 벌이곤 했다.

 

번데기 집단 식중독 사건 발생 6개월째인 1979년 3월. 아들을 들쳐 업고 11군데 병원을 헤맸으나 끝내 잃고만 그 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는 유서에 "아들이 죽은 뒤 굳세게 살려고 했으나 도무지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사랑하는 아들 곁으로 간다."는 글을 남겼다. 애끓는 이 사연은 그러나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느새 6개월 전의 사고를 잊었으며 힘들고 바쁜 일상에 파묻혀 있었다.

대한민국 6백 71만 모든 가구에서 1명씩 참석게 한 반상회가 1976년 5월 31일 저녁 6시 일제히 열렸다. 장소는 대개 동네 명사나 유명인의 집이었다. 일부러 그런 이를 명예반장 삼아 그 집에서 반상회를 열게 한 것. 그러나 집이 비좁거나 모일 곳이 마땅찮은 경우 마을 공터에 횃불 켜고 멍석을 깔거나, 골목길 보안등 밑에 모여 연 반상회도 없지 않았다.

 

 

 

일제 잔재 반상회, 부활하다

 

 

당시엔 적으면 20, 많게는 100여 가구까지 한데 묶여 반(班)을 이루었다. 시골보다 도시 가구 수가 많았고 전국에 25만 5천여 개의 반이 있었다. 76년5월 첫 일제 반상회의 출석률은 78.4%였다. 이날 대한민국은 같은 시간대 전국의 25만 5천 곳에서 5백 26만 명(남 3백 15만 여 2백 11만)이 한꺼번에 모여 비슷한 의제를 놓고 토론한 대기록을 세운 셈이었다.

 

반상회는 사실 일제 잔재다. 일본은 1917년 조선 사람을 통제하려고 반상회를 도입했다. 반장이 주도하는 회합에서 궁성요배를 한 다음 제시된 주제에 대해 강화(講話)를 듣는 식으로 진행했다. 사상주입을 통한 주민통제였다. 불참자는 요시찰대상이 되고 배급에서도 빠지는 불이익을 받았다. 해방 후 사상교육, 주민사찰 요소는 사라졌다. 하지만 중앙부처 지시를 전달하고 주민 친목에도 도움이 돼 반상회는 시도 조례에 의해 운영돼왔다.


"평소 느끼던 것 속시원히" 본지 전국 취재망을 통해 본 첫 반상회 이모저모
1976. 6. 9 [경향신문] 7면

 

 

 

그것이 해방 31년 만인 76년, 중앙정부 주도 아래 전국행사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었다. 첫 번째 전국 일제 반상회를 두 달 앞둔 4월 30일 내무부는 각 시도에 공문을 보냈다. “새마을의 날 (매달 1일) 하루 전날인 31일 반상회를 열어 행정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주민 건의사항도 받는 한편 경미한 민원은 협의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또 새마을의 날에 할 일을 중점토의하고 방범 방첩 교육도 함께 벌일 것을 지시했다.

 

 

 

 

100% 출석 경쟁 벌인 첫 반상회

 

 

"우리는 이웃4촌" 전국 25만 곳서 일제히 첫 반상회
1976. 6. 1 [경향신문] 7면


첫 반상회는 제법 성황을 이뤘다. 내무부가 일선 행정조직을 다그쳐 ‘100% 출석’ 경쟁을 벌였고 파출소 동사무소는 관할 가구를 가가호호 방문해 참석 다짐을 받는 등 공을 들인 탓이었다. 언론도 한 몫했다. 사설 논설을 통해 “이웃에 살며 왕래도 대화도 없는 도시인의 폐쇄적 익명성을 깨부술 기회”라며 “이웃끼리 얼굴을 대하고 대화를 나누어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를 밝고 따뜻하게 가꾸는 모임으로 키우자”고 주장했다.

 

정부는 신당동 김치열 내무장관과 구자춘 서울시장 집에서 열린 반상회를 공개취재해 보도하도록 언론에 요청했다. 20-30여 명의 사진기자 취재기자들이 안방과 대청에 들어차 반상회 진행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다. 반상회 부활을 기획한 김 장관은 “반상회는 민주자치회의다. 반원끼리 모여 얼굴을 익히고 정을 주고받으며 국민총화와 단결을 이루는데 그 뜻이 있다”고 강조했다.

 

 

 

 

부활 목적을 두고 논란 일기도..

 

 

김 장관의 그 말에 반상회 부활의 한 목적이 들어 있었다. 바로 ‘총화 단결’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전쟁이 미국 패배로 끝난 직후인 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발령했다. 유신헌법에 대해 찬반의 어떤 표현도 못하게 했고 학생데모와 ‘유언비어’ 유포를 전면 금지시켰다. 언론 표현 집회의 자유를 원천봉쇄한 것이었다. 거기에 학도호국단을 결성하고 민방위기본법을 만들어 국민을 언제든 동원 가능하게 조직화했다. 9월부터 12월까지는 주민등록증도 일제히 갱신했다.

 

이듬해 1월 박 대통령은 내무부 순시에서 “국론분열사범을 발본색원하고 전(全) 주민조직을 전략화”하라고 지시했다. 또 도시새마을운동의 전개를 주문하며 “새마을은 정신혁명운동이요, 사회운동이며 범국민운동이므로 도시인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무부는 그 지시를 받아 “도시새마을운동은 주민조직 기본단위인 반상회를 통해 실시하고 도시질서 확립 분위기부터 조성”한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반상회를 통해 도시새마을운동을 벌임으로써 국민의식을 다잡고 질서도 바로잡겠다는 의지였다.


민원해결 '안방 창구'로 정착..반상회 10년 되돌아본다
1986. 5. 26 [경향신문] 10면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에 따라 이웃 단절이 심해지고 공동체 의식 또한 사라지는 것을 막아보자는 반상회의 원취지는 정말 환영할 일이었다. 국가 기본단위에서의 애로점 등 민원을 현장에서 듣고 개선하겠다는 의지 역시 위민행정의 모범으로 쳐줄 만 했다. 그러나 한 꺼풀 속에는 체제유지를 위한 주민통제와 정책홍보, 사상 감시의 목적이 없지 않았기에 반상회제도는 시행 초기부터 논란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반상회 나가면 민방위 훈련 면제? 출석 강요 논란

 

 

궤도 못찾고 맴도는 '반상회'
1976. 7. 26 [동아일보] 7면


우선 출석 강요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출석부를 비치해 점검하거나 민방위대원이 반상회에 나가면 훈련을 면제해 주기로 한 데 대해 야당이 문제를 제기했다. “자율성이 배제된 반상회는 정치에 악용될 소지가 크다”는 것이었다. 명칭의 문제도 제기됐다. 공화당 김용태 의원은 “반상회란 이름은 일제 때 쓰던 것이므로 ‘새마을 친목회’로 바꾸자는 제의를 받았다”며 정부에 개명을 건의했다. 신민당 송원영 의원은 “국어순화운동을 편다는 정부가 어떻게 일제 용어인 반상회를 그냥 쓸 수 있느냐”고 따졌다.

 

비판이 거세지자 내무부는 부랴부랴 반상회운영 개선지침을 내놓았다. 각 시도에 보낸 지침에서 내무부는 “반상회를 새마을운동의 모체가 되게 하기 위해 출석부 비치를 금지시켜 주민 스스로 참여케 하라” 고 지시했다. 또 “정부 공지사항은 5건 이내로 줄이고 지도공무원이 반상회를 진행하는 일도 없도록 하라”고 했다. 김치열 내무장관은 국회에서 “반상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으며 서울시는 반상회에서 민방위 교육을 하지 말라고 긴급 지시했다.

 

 

 

그러자 이번엔 참석률이 떨어지고 일부 가구에서 가정부나 운전사 등 고용인을 내보내 문제가 됐다. 9월 박 대통령은 “지도층 인사들이 자진해서 나오는 반상회가 돼야 한다.”며 정부 여당의 주요 인사부터 적극 참석하고 각계 명사의 참석도 독려하라고 지시했다. 또 “반상회가 정부시책 전달과 홍보에만 치우치지 말고 생활주변의 문제를 화제에 올림으로써 동네 문제를 협력해 개선할 수 있도록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일까. 반상회 실시 1년을 맞은 77년 5월 내무부는 연 평균 참석률이 85.8%며 42만 2천 건의 민원이 토의돼 그중 68%가 정부시책에 반영됐다고 발표했다. 또 주민들이 스스로 공동관심사를 찾아내 이웃돕기 성금, 방위성금을 거두거나 절미운동, 새마을 가꾸기 운동에 참여한 것도 2백만 건이 넘는다고 밝혔다. 엄청난 실적이었다. 물론 그걸 달성하려고 내무부는 일선기관을 쉼 없이 몰아붙였고 일부에선 불참자들에게서 벌금을 받는 등 부작용도 잇따랐지만 그것까지 발표한 건 아니었다.

 

매년 정기국회 때면 야당은 어김없이 반상회의 문제점을 들고 나왔다. 여당의 정치홍보 무대로 불법 선거운동의 온상이 됐다는 주장, 주민감시체제가 아니냐는 지적, 국민 불편을 가중시킨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러나 농촌에 이은 도시새마을운동 무대로 반상회를 부활시킨 정부 여당이 그에 꿈쩍할 리가 없었다. 오히려 79년엔 내각의 반상회 참석을 독려해 최규하 총리 등 모든 각료가 분담해 지역반상회에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웃에 살면서 못 만나 죄송" 어제 반상회, 최총리도 참석
1979. 3. 31 [경향신문] 7면

 

 

 

 

주민통제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시들해져 가는 반상회
1980. 3. 31 [동아일보] 6면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80년 초엔 반상회가 한때 시들한 모습을 보였다. 일부에선 안건 토의보다 술타령 연회로 변질했다거나 잡부금을 걷고 물품을 강매한다는 불만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5월 광주 민주항쟁을 총칼로 누른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는 반상회를 정말로 본격적인 체제홍보와 주민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6월을 ‘안보 반상회’로 치르더니 7월엔 ‘사회정화 반상회’를 열었다. TV3사는 반상회에 앞서 25분간 ‘밝고 건강한 사회’라는 특집방송을 내보내고 주민들은 함께 모여 이를 본 후 지역사회 정화 회의를 갖게 한 것. 한마디로 민주세력을 짓눌렀듯 지역에서 군말이 나오면 “정화하겠다.”는 협박을 한 것이었다. 주민을 한데 모아 조직화한 것이 권력자 의도에 따라 얼마나 끔찍하게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8월. 정부는 애초 25일로 예정됐던 반상회를 28일로 연기했다. 27일 대통령에 당선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장 부부가 연희동 반상회에 참석해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청와대로 가는 것을 연출해 국민에게 보이려는 것이었다. 그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천 5백 40명중 2천 2백 25명이 참가한 장충체육관선거에서 찬성 2천 5백 24, 무효 1표로 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8일 반상회에 앞서 국민들은 TV를 통해 ‘새 시대를 향한 온 국민의 전진’이란 전 대통령 찬양특집을 보고 그가 “깡패는 모두 소탕하고 국민의 소리는 꼭 듣도록 하겠다.”고 자신에 차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전 대통령은 여기서 “반상회제도는 특히 도시에서는 꼭 필요한 것으로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나가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반상회 폐지 의견은 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역과 기초단체장을 포함한 지방자치 4대선거가 치러진 95년에 처음으로 반상회를 폐지한 지자체가 등장했다. 대전 중구청과 김천시가 주민들의 관주도 반상회 거부여론을 이유로 전면 폐지를 결정했다. 당시 내무부는 “지자체가 폐지한다 해도 법적 문제는 없다”면서도 “다만 정책 홍보, 민원 수렴 등 반상회의 긍정적 측면이 있으므로 지자체들이 반상회를 계속 활용하도록 권장하겠다.”고 밝혔다. 관 주도 강제가 아닌 반상회는 지금도 있다.


"국민의 소리만은 꼭 듣겠다" 전두환 대통령, 영부인과 함께 참석
1980. 8. 29 [경향신문] 1면

2002년 6월17일자 신문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에베레스트 국제 청소 원정대’가 산을 청소하던 중 해발 6천m 지점에서 ‘77 K. E. E.’라고 표기된 주황색 삼각기를 발견했다는 것. K. E. E.는 Korea Everest Expedition, 즉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약어다. 1977년 한국인으론 처음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에 오른 고상돈 원정대가 사용했던 깃발이었다. 고산설원에 묻혀 잠잔 지 25년 만에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감히 넘보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 ‘히말라야’

 

 

공교롭게도 ‘77 한국에베레스트 원정대’의 출발기사 역시 6월17일자 신문에 실렸다. 동아일보는 선발대 3명이 전날 김포공항을 떠나 네팔로 향한 사실을 스포츠 면에 보도했다. 10월3일 개천절을 D-데이로 잡고 8848m 도전에 나섰다고 보도했지만 성공가능성을 낮게 봐 8면 신문 마지막 페이지 맨 밑단에 1단 기사로 처리했다. 관심 있는 산악인 외에 보통 독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야 겨우 찾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62년 처음 다울라기리 2봉 ‘정찰’(고도 8172m 중 6700m지점까지만 갔다 왔다.)을 한 이후 15년간 단 한 번도 히말라야 정상에 서지 못했다. 오히려 71년엔 마나슬루 도전에 나선 김기섭씨가 정상을 400m쯤 앞두고 몰아친 돌풍에 날려 숨졌고 이듬해 동생의 한을 풀겠다며 마나슬루에 간 기섭씨의 형 호섭씨 등 4명까지 눈사태를 만나 숨지는 참변을 겪었다. 76년엔 기섭 호섭씨의 큰형 정섭씨가 3차 마나슬루 원정에 나섰으나 예상치 않은 부상으로 하산, 끝내 형제의 한을 풀지 못했다.


히말라야 마나슬루 참변서 본 등반 고투사
1972. 4. 15 [동아일보] 3면

 

 

 

히말라야 현지에서만 조난당한 게 아니었다. 국내에서 원정 대비훈련을 하던 산악인들도 잇달아 조난사하는 악운에 시달렸다. 69년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히말라야등반 대비훈련을 하던 한국산악회 해외파견 훈련대 이희성대장 등 10명이 한꺼번에 눈사태로 숨졌다.

 

 

 

설악산 난조현장..설악에 묻혀버린 산 사나이의 의지
1976. 2. 18 [동아일보] 7면


77년 원정에 앞서 76년에는 설악산 공릉능선에서 ‘에베레스트 원정’ 막바지 동계훈련을 하던 최수남 대장 등 3명이 또 눈사태로 숨졌다. 이런 연유로 한국과 한국인에게 히말라야는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리는, 감히 넘보기 어려운 경외의 대상이었다.

 

72년 마나슬루 조난 때 한국산악회 회장은 “우리나라 등반수준으로 히말라야에 도전하기엔 그 기술이나 훈련 면에서 부족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다”면서 “히말라야 도전을 대학입학에 비유한다면 현재 우리나라 산악인들은 초등학교 과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알프스 등반훈련대의 한 간부는 “외국인들이 고산등반에 사용하는 우수한 최신장비를 산에 가져가고도 사용법을 몰라 쓰지도 못하고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다”며 우리 산악계의 낙후성을 한탄하기도 했다.

 

 

 

 

세계 정상을 밟은 최초의 한국인이 되다

 

 

그 같은 엄청난 시련과 좌절을 딛고 우뚝 섰기 때문일까. 77에베레스트 원정대는 과감하게 속전속결식 도전에 나섰다. 8월 중순 5400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9월 초 8500고지에 최종도전을 위한 제 5캠프(C5)를 세웠다. 9월 9일 체력이 뛰어난 박상렬 부대장과 셰르파로 구성된 제1차 공격조가 정상 정복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정상을 100여m 남겨놓고 심하게 몰아치는 눈보라에 목까지 묻혀 완전히 탈진한데다 산소마저 모두 써버려 하룻밤을 비박하고 10일 새벽 C5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6일 후인 15일 새벽4시. 제2차이자 마지막 공격조인 고상돈대원과 셰르파 펨바 노르부가 C5에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두 사람은 5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오전 9시 반 정상까지 수직거리 110m를 남겨놓은 남봉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칼날능선이라는 장애물이었다. 훗날 고대원은 “약 50m 길이의 이 칼날능선은 너무나 뾰족하여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아찔했다”며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고 술회했다.


한국, 에베레스트에 서다
1977. 9. 17 [동아일보] 1면

 

 

 

참으로 “심장이 터지고 어깨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희망이라면 거기서 보이는 에베레스트 8848m 정상의 하늘이 의외로 맑게 개어있다는 점,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낸다면 분명히 거기 오를 수 있다는 낙관이 들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작은 언덕 3개를 넘었다. 또 하나의 봉우리가 보였다. 다시 결사적으로 올랐다. 더 오를 곳이 없다. 두리번거리며 정상을 찾았다… 낮 12시50분, 벅찬 감정을 누르고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를 외치면서 본부를 불렀다.”

 

 

 

태극기 펄럭, 에베레스트 정상의 한국혼
1977. 9. 23 [경향신문] 1면


1977년9월15일 낮 12시 50분. 고상돈은 한국인 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우뚝 섰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 정상에 오른 중국대가 남겨두었다는 3각 받침대가 보이지 않아 처음엔 에베레스트 아닌 다른 봉우리에 올라온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셰르파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던 중 발 밑에 딱딱한 것이 밟혀 눈 속을 파보니 3각대가 나와 제대로 정상에 올라왔음을 완벽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정상까지 고이 간직해온 3명의 사진을 꺼내 만년설 밑에 묻었다.

 

76년 설악산 공릉능선에서 숨진 ‘77에베레스트 원정 3차 훈련대’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대원의 사진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 청춘을 걸었으나 끝내 정상을 밟지 못하고 설악산 능선에서 스러진 동료 산사나이들을 향한 눈물의 고별 의식이었다. 그들이 그토록 오르고 싶어 했으나 생전에는 오르지 못한 그 정상에서 고상돈은 무려 1시간을 머물렀다. 국가별로는 세계 8번째, 등산대별로는 14번째, 그리고 개인으로는 55번째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그는 그곳에서 자연석 4개를 가져오기도 했다.

 

 

 

 

원정대 18명, 열렬한 환영 속 금의환향

 

 

한국 최초로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한데다 그것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는 소식에 온 국민은 감격했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는 고상돈의 무전 발언은 그해 최고의 인기어록으로 꼽혔다. 어린이들까지 “더 갈 곳이 없다”는 농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또 한국의 에베레스트 등정이 36일간의 최단 등정 기록(종전 영국팀 37일)을 세웠으며 보통 6개가 아닌 5개 캠프만 설치했고 9월 하순 이전에 동남 루트를 개척해 이루어진 최초의 등반으로 신기원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자부심이 높았다.

 

제주도 고상돈대원의 집에는 축하인파와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렸다. 평소 심장병을 앓았던 고 대원 어머니는 “1차 공격조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 밤 방안에 촛불을 켜놓고 아들의 성공을 빌었다”면서 “결국 정상을 밟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병이 다 나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최단기 속공"..한국인의 저력 과시
1977. 10. 7 [경향신문] 7면

 

 

 

설악산 훈련 때 숨진 대원의 유족들은 “비닐 커버로 곱게 싼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놓았으니 정상을 밟은 것과 마찬가지로 생전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고상돈은 4천만의 등을 딛고 세계정상에 섰다
1977. 10. 8 [경향신문] 3면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 18명은 10월 6일 금의환향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김포공항에 내린 대원들은 미스코리아들이 걸어주는 화환을 목에 걸었다. 오픈카에 나눠 타고 서울시내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1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이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체육훈장을 걸어주고 격려했다. 대원들은 “이번에 사용한 장비의 절반 정도가 국산이었고 성능 또한 우수했다”고 자랑하면서 “산에 오른 것은 우리지만 온 마음을 다하여 밀어준 국민들이 있었기에 정상정복이 가능했다”고 공을 돌렸다.

 

그 말은 사실 맞는 말이었다. 거국적 지원이 있었기에 에베레스트 등정이 가능했다. 그해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쓴 총예산은 1억3천3백48만원이었다. 그중 3분의 1인 4천5백만 원이 장비와 식량구입에 사용됐다. 장비 식량은 18t에 달했는데 특히 식량은 2만1천 끼니 분으로 한 사람이 20년간 먹을 수 있는 분량이었다. 특히 고산식량은 끓이지 않더라도 물만 넣으면 먹을 수 있는 알파 쌀과 건조야채가 새로 개발돼 사용되기도 했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진정한 산사나이

 

 

고상돈은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다음해 79년 5월.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해발 6194m)를 정복하고 하산하던 고상돈은 영하40도의 강추위 속에서 자일사고로 조난, 숨졌다. 그가 죽은 후 딸이 태어났다.

 

고상돈은 매킨리로 떠나기 전 한 인터뷰에서 고산을 오르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의 심정이다. “빙벽에 매달려 강풍을 맞으면서 한 발짝을 올려놓을수록 피로감은 반비례로 엄습해왔고 의식은 점점 몽롱했다. 그 순간에 그대로 묻히고 싶은 충동이 뇌리를 마구 할퀴었다. 그러나 나는 가야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 몸을 전율시켰다. 정상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한국인 최초로 세계의 지붕을 밟았던 산사나이는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 되었다.


산악인 고상돈, 77년 에베레스트를 정복
1979. 12. 24 [동아일보] 8면

 

 

 

그 이후 히말라야 8000고지 14좌를 완등한 한국인이 남녀 4명이나 나오고 ‘무산소 등정’, ‘알파인 방식등반’ 등 새 기록을 세우려는 산악인이 줄을 잇지만 고상돈이 진정한 한국산악계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그의 말에 그대로 녹아 있다. “나는 가야하고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정상이 거기 있기 때문에 …” 그의 묘는 한라산 1100도로에 있고 지인들은 그 도로를 ‘고상돈 로’로 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월요일 아침, 교내 벨이 울리면..

 

 

70년대 남자 중학교 애국조회 스케치다. 월요일 아침이면 으레 전교생이 운동장에 나가 1시간 가량 애국조회를 했다. 오전 8시 교내 벨이 쩌렁쩌렁 세 번 울리면 학급 주번만 빼고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자칫 늦었다가는 담임의 회초리를 맞았다. 운동장에선 ‘앞으로 나란히’ ‘좌우로 정렬’ ‘기준을 향해 좌우향우’를 서너 차례씩 하며 교장선생님을 기다렸다. 교장이 단에 오르고 모든 선생님이 일직선상에 정렬하면 조회가 시작됐다.


국기에 대하여 거수경례를 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가 삽입된 애국가를 제창했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묵념 뒤에는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낭송했다. 교가 교훈 제창은 그 다음이었다. 도대체 왜 그걸 매주 반복해야 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는 학생들이 직접 외우고 부르므로 참을 만했다. 문제는 바로 이어지는 교장선생님의 지루한 훈화였다.


1991. 10. 7 [경향신문] 19면
현직교사가 교단에서 본 요즘 중학생들

 

 

 

일부 모범생들은 교장훈화가 뜻깊고 가슴에 새길 만하다고 했지만 보통 학생들에겐 그걸 듣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시간을 보내려고 국민교육헌장을 성적(性的)으로 패러디한 농담을 옆 친구와 주고받으며 낄낄대다 담임이나 체육선생의 꿀밤을 맞기도 했다. 교장선생님 말씀은 언제나 ‘애국애족’이니 ‘나라의 근간’ ‘국가에 대한 충성’ 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훈화가 중간에 이를 때쯤부터 학생들은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땡볕 아래 지루한 훈화…쓰러지는 학생들

 

 

1974. 9. 5 [동아일보] 6면
이른 등교·먼거리 통학은 학생들 빈혈을 유발한다


만약 훈화내용이 새롭고 재미있었다면 쓰러지는 학생이 적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아침 조회를 하다 쓰러지는 학생들을 다룬 신문기사를 보면 훈화 내용 같은 것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일사병과 빈혈이 쓰러짐의 가장 큰 이유로 부각됐다. 가령 74년 경기도 의정부여중에서는 전교생 1천5백 명을 땡볕 아래 30분 이상 조회에 참석게 했더니 그중 2백여 명이 쓰러졌다는 기사도 있었다.


의정부여중에선 3년 동안 조회 중 쓰러진 학생들의 일상생활과 통학여건 등도 조사해 발표했다. 그에 따르면 “조회 중 쓰러진 아이들을 보면 학교에서 점심을 굶거나 통학거리가 먼 지방 변두리 영세민 자녀들로 아침을 굶고 기차나 만원 버스를 타고 등교한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또 남학생보다 여학생, 고학년보다 저학년이 많이 쓰러졌다. 이들은 대개 불규칙한 식사에 의한 소화불량, 그리고 빈혈 증세를 보였다는 것이다.

 

 

 

78년 7월 북제주군 추자중학교에서는 조회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간 1학년 학생 45명이 졸도했다. 이날 아침부터 추자도 날씨는 33도를 기록했는데 졸도한 학생 대부분은 5km 가량을 걸어서 통학하는 아이들이었다. 80년대 들어서도 학생들이 조회 중 쓰러지는 현상은 계속됐다. 83년 6월 서울 일신여중에서는 재단이사장 취임 10주년 기념조회에 참석한 학생 1백50여 명이 쓰러져 양호실 등으로 옮겨지는 가운데서도 식은 계속됐다.


학생들이 집단으로 쓰러지는데도 조회를 계속한다는 건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더군다나 제때 식사를 못해 몸이 약한 아이들을 30도 이상 땡볕에 세워둬 일사병이 생기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당시 학교나 언론에선 학생들이 갈수록 나약해지고 정신력이 떨어진다고 걱정하기만 했다. 앞서 중학 조회 때의 교장처럼 ‘그따위 정신상태’로 크는 아이들이 과연 나라의 기둥이 될 것이며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겠냐는 걱정이었다.

 

 

 

 

학생도 선생님도 견디기 힘들었던 애국조회

 

 

어느 일선교사는 교육현장 수기를 통해 “덩치는 큰 중학생들이 한 시간 운동장 조회를 힘들어한다. 아니 괴로워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여학교에서는 운동장조회 때 쓰러지는 학생이 많다”고 염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른 교육 아래 강한 훈육을 ‘학생이기에’ 받을 수 있고 즐거운 것”이라며 “애국조회 훈화 말씀을 잘 듣고 나보다 국가와 사회를 먼저 생각하는 심신이 강한 학생이 되어주기”를 당부했다.


그 선생님의 수기에는 어떻게든 조회에서 빠져보려고 ‘몸부림치는’ 학생들의 사례도 실려 있다. “애국조회에 나가기 싫어 좁은 화장실 한 칸에 다섯 명이 함께 숨어있었다. 냄새나는 화장실에 숨어 가슴 조이면서도 낄낄거리는 그 맛이 운동장에 서 있는 한 시간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감기 두통 급체 등 갖가지 핑계를 대고 교실에 숨어있다 주번교사에게 들킨 학생, 담을 넘어 전자오락실에서 한 시간을 보내고 조회가 끝날 때쯤 다시 담을 넘어오는 학생, 교실 뒷담 옆 으슥한 곳에 친한 친구와 함께 숨어 소곤거리는 학생 등…


1982. 10. 29 [경향신문] 7면
전통과 얼을 찾고 있다

 

 

 

 

1980. 6. 19 [동아일보] 5면
교단일기…채찍의 편지


학생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선생 스스로 힘든 조회를 고백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아주 추운 겨울이다. “을씨년스런 날씨가 체온을 앗아가던 아침 애국조회, 머리카락은 빳빳이 곤두서왔고 끈덕지게 파고드는 골 아픔, 얼어붙듯 한 발가락에 내 지체(肢體)의 평형을 유지하느라 안간힘을 썼다.” 그런데 그 혹독한 추위에도 선생님이 버틴 것은 한 학생의 편지 때문이었다. “진눈깨비가 점점 심해 교복에선 물이 줄줄 흘렀고…우리가 입실할 때까지 억세게 퍼붓는 눈비 속에 초연히 서 계셨던 선생님! 존경합니다.”


이렇게 선생님조차 견뎌내기 힘든 조회를 왜 어린 학생들이 싫어하고 빠지려는 걸 이해하지 못했을까. 심지어 군인이나 운동선수들도 땡볕에 서있다 쓰러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 중고생은 물론 초등학생까지 한 시간가량 열 지어 세워놓고, 하나 마나 한 훈화를 늘어놓고, 몽둥이로 윽박지르며 일체감을 가져야 한다고 다그쳤을까.

 

 

 

 

애국조회, 그 기원과 변천사

 

 

학교 조회는 사실 세계 어디에나 있다. 우리의 경우도 구한말부터 조회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군대처럼 정렬하고 기율을 잡고 맹세를 외우고 충성을 다짐하는 행사는 일제 때 틀이 잡혔다. 일왕이 있는 동쪽을 향해 ‘요배(遙拜)’를 하고 아이들은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천황폐하께 충의를 다합니다.”는 ‘황국신민 서사(誓詞)’를 달달 외워야 했다. 해방이 되자 사라졌어야 할 이 제국주의 잔재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그대로 살아남았고 군사정부 시절엔 오히려 ‘우리 실정에 맞게’ 국가에 충성을 다짐하는 애국행사로 자리를 굳혔다.

 

‘애국조회’라는 말은 68년 국민교육헌장 선포와 72년 국기에 대한 맹세를 전국으로 확대시행하면서 생겨났다. 그전에는 ‘아침조회’ ‘운동장 조회’나 그냥 ‘월요조회’로 불렀다. 그것이 애국 애족과 국가정체성을 유난히 강조한 박정희 정부 중반 형식적으로 더욱 강고하게 애국충성을 다짐하는 장이 되며 애국조회로 이름표를 바꿔 달게 된 것. 우스운 것은 애국조회에서 한 다짐을 제대로 실현했는지 점검하는 ‘반성조회’까지 토요일에 실시하는 학교도 생긴 것이었다.

 

봄가을이야 그런대로 괜찮지만 여름 겨울에 학생들이 쓰러지거나 추위에 떠는 고통에 시달리니 이걸 완화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던 시기다. 극기 훈련하듯 해 인내심을 기르고 정신력을 높이는 것도 좋지만 자칫 아이들을 회복불능의 상태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적잖았다. 이런 판에 곳곳 초등학교에서 애국조회와 관련, 아이들이 떼죽음을 하는 등 불상사도 속출했다.

 

 

 

 

조회 참석하려다 초등학생 압사 사고까지

 

 

1976년 3월 초등학교 개학 첫날 부산과 대구에서 운동장조회에 참석하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아이들이 넘어져 숨지거나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다. 부산에선 1명이 숨졌고 대구에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80년 2월 부산 용호‘국민’학교에서 다시 똑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이번엔 무려 어린이 5명이 압사하는 불상사였다. 오전 9시 벨이 울리자 운동장조회를 하는 것으로 안 학생 1천여 명이 한꺼번에 하나 밖에 없는 계단으로 몰린 탓이었다. 조회에 늦지 않으려고 달리다 한 아이가 넘어졌고 그 위로 계속 아이들이 덮쳐 쓰러져 사고가 커졌다.


국민들은 경악했다. 그동안 운동장 애국조회를 권장하던 당국도 어린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학교사정에 맞춰 조회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잖아도 운동장이 좁은데다 학생 수는 많아 일부만 운동장에 나가고 일부는 방송을 통해 교실조회를 하던 학교도 많은 참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리고 빠른 속도로 운동장조회는 방송조회나 강당조회로 바뀌어갔다. 87년 민주화 이후에는 또 언론에서 학교에 남아있는 획일주의 교육풍토와 일제 군사잔재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80. 2. 11 [경향신문] 7면
부산용호국민교 국교생 5명 압사

 

 

 

지금은 많은 학교들이 예전 같은 ‘극기 훈련’식 조회는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애국조회란 이름은 여전히 남아있고 반성조회를 하는 학교 또한 없지 않다. 교장 교사들과 교육행정가 가운데 많은 이들은 옛날처럼 강력하게 심신을 단련시키는 조회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과거 조회참석을 피해 도망 다니고 따분해했던 사람들 중에도 옛날식 조회를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다. 일상 속에 꾸준히 심어진 통제지만 시간의 흐름은 그걸 또 아름답게 변색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나루터하면 사람들은 대개 ‘기다림’ 아니면 ‘그리움’을 떠올린다. 또 나룻배하면 ‘빈 마음’이나 ‘떠나감’, 혹은 ‘창파(滄波)에 몸 싣고 흔들리는’ 여유로운 모습을 연상하기도 한다. 모터보트가 주는 새것, 빠르고 차가운 느낌대신 나룻배는 옛 것, 곰삭고 느릿느릿한 미소로 우리를 맞는 기분이 든다. 큰 하천이나 호수로 갈라져있는 두 곳을 이어주는 나루터와 나룻배. 그러고 보면 그것들은 사람의 마음속 아련한 정(情)과 끊어지려야 끊어질 수 없는 줄로 연결돼 있지 않나 싶다. 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에서 그걸 느낄 수 있고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노래가사 또한 그러하다.

 

 

 

나룻배를 타고 서울 강 남북과 동서를 오간다?

 

 

그런데 이 나룻배가 서울과 연결된다면? 천만 명 이상이 성냥 곽 같은 아파트에 모여살고 수백만 대 차가 사통팔달 뚫린 도로와 수십 개 한강다리를 쉴 새 없이 내달리는 서울. 수천수만의 직장과 배움터, 가정에서 부산하고 시끌벅적한 수천 수만 가지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곳. 그 서울과 나룻배를 한데 묶어 연상해 보면? 그러니까 여기저기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서울 강 남북과 동서를 오간다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장난하나?”일까.

 

서울에서 나룻배가 마지막으로 뜬 것은 1977년 10월말이다. 그 해 11월 1일 동대문구(당시의 행정구역, 이하 같음) 면목동과 전농동을 잇는 면목교가 개통되면서 나루터와 나루터 사이를 오가는, 삯을 받는 나룻배는 서울에서 영영 사라졌다. 물론 직업으로서의 나룻배 사공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묻혔다. 그러니까 꼭 33년 전의 일이다. 면목5동을 가로지르는 폭 100여m 중랑천은 강 건너 학교나 직장에 다니는 주민에겐 참 야속한 존재였다. 기침만 해도 들릴 듯 한눈에 뻔히 바라 뵈는 건너편에 가려면 3km 이상을 걸어 내려가 군자교로 건너거나 나룻배를 타는 방법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했다. 나룻배를 타고 내를 건너면 걸어가는 것보다 족히 20분은 단축할 수 있었다.


서울 새 풍속도..나루터를 쫓는 다리
1970. 10. 16 [경향신문] 7면

 

 

 

그곳 나룻배는 사공이 노를 저어 강심을 헤치는 그런 배도 아니었다. 중랑천 허공 위에 철선을 연결하고 그걸 잡아당겨 밀고 나가는 일종의 뗏목이나 나무상자 같은 배였다. 물론 삿대로 강바닥을 찍어 배를 밀기도 했다.

 

 

 

면목교 개통과 함께 사라질 서울의 마지막 나룻배
1977. 10. 29 [경향신문] 7면


나무판때기를 이어 붙여 만든 가로 2.7 세로 1.8m의 원시적인 나무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삯은 어른 20원, 학생 10원. 자전거나 리어카, 오토바이를 함께 실으면 10원 정도의 추가운임을 받았다. 배를 타고 건넌다니 혹시 낭만을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중랑천은 공장폐수와 생활오수 등이 쏟아져 들어와 썩은 내가 코를 찌르는 죽은 하천이었다. 사람이 많아 앉지도 못하고 서서 건너는 배 안에서 승객들은 강을 건너는 내내 한손으로 코를 싸잡았다.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배를 밀던 사공은 “60년대 말만해도 중랑천은 아낙들이 빨래할 정도로 물이 맑았지만 70년대 들어 썩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이곳에서 뱃사공 일을 하며 어머니와 동생 등 4식구의 생계를 꾸려왔다. 그만큼 수입이 짭짤했다. 면목교를 만들 때 서울시는 장안평과 면목동 일대 판자촌을 철거했는데 철거 전 판자촌 주민들은 대개 배를 타고 전농동, 청량리로 나가 일을 봤다. 그래 경기가 좋을 때는 판자때기 배가 무려 5척이나 투입돼 쉴 새 없이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는 것이다.

 

 

 

 

잊을만하면 일어나는 여름철 침몰사고

 

 

중랑천은 그렇다 쳐도 한강 본류, 그것도 강남의 신사동이나 청담동을 오가는 나룻배도 70년대 중반까지 운행됐다. 73년 7월26일 오후 4시 반, 봉은사 나루터를 떠나 뚝섬으로 오던 동력 철선 나룻배가 침몰해 승객 9명이 익사했다. 대부분 뚝섬에서 봉은사로 놀러갔다 돌아오던 사람들이었다. 정원 16명인 이 배는 봉은사, 청수장 나루터를 거치며 정원의 배인 30여명을 태우고 오던 중 뚝섬유원지 앞 50m 수중에서 침몰했다.

 

방학 철이어서 뚝섬유원지에는 피서객이 넘쳤다. 특히 초등학교 어린이가 많았던 그 피서객 눈앞에서 나룻배가 가라앉는 참사가 일어난 것. 원인은 배가 낡아 물이 샌데다 기관사가 음주운행을 했으며 일부 술 취한 승객들도 배 난간을 흔들며 장난을 쳤기 때문이었다. 청수장 나루터에서 승객이 탈 때 이미 배에 물이 차 사람들이 발목을 걷어야 했는데 기관사는 그건 아랑곳없이 뱃삯 50원을 받는 데만 신경을 썼고 나중엔 빨리 강을 건너려고 난폭운전을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나룻배 침몰 8명 익사
1973. 7. 27 [경향신문] 7면

 

 

 

사고가 나자 한강 여름경찰서 경비정과 유원지 놀잇배들이 몰려 구조에 나섰으나 10명 가까운 이들은 손쓸 틈도 없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경찰은 사고 당일 익사자 2구를 인양하고 이튿날 날이 밝은 다음에야 떠오른 시체를 수습했다. 요즘 같으면 있을 수 없는 늑장 구조였지만 당시는 야간 장비가 시원치 않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요즘 같으면 한강서 나룻배가 침몰해 9명이나 숨졌다면 당연히 사회면 톱기사 감인데도 신문들은 사회면 4단 기사로 축소 보도했다.

 

 

 

출근길 7명 익사
1969. 8. 9 [동아일보] 7면


한강 나룻배 사고는 그전에도 잊을만하면 일어나곤 하는, 일종의 여름 치레였다. 71년 7월17일, 성동구 송정동 중랑천 하류에서 승객 40명을 싣고 성수동 쪽으로 가던 나룻배의 노 고리가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배는 100m 가량 급류에 떠내려가다 공사를 위해 세워놓은 목조 ‘송정다리’에 부딪쳐 부서졌다. 대부분 승객은 다리 위로 기어올라 왔지만 4명은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또 69년 8월9일 아침에는 영등포구 사당동과 이수교 간을 다니던 목선 나룻배가 철선 나룻배와 부딪쳐 침몰, 출근길의 은행원 학생 등 7명이 숨졌다. 사고가 난 사당동 남성동 일대는 한강 수위가 6m70 이상만 되면 강물이 밀려와 이수교까지 1km 도로가 물에 잠기는 곳이었다. 때문에 일대 한강의 모래자갈 채취 배들이 임시 나룻배가 돼 1인당 10원씩을 받고 이수교 버스정거장까지 태워주는 영업을 해왔다.

 

 

 

사고는 이수교 쪽으로 가던 목선이 사당동으로 들어오던 철선을 피하려고 급회전하다 승객 1명이 물에 떨어졌고 선장이 그를 구하려다 배꼬리가 철선과 부딪쳐 일어났다. 당시 사당동 일대는 난민촌이 형성돼 주민 수가 5만 명에 이르렀지만 주거환경과 교통은 이처럼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강남 일대는 더욱 그랬다.

 

 

 

 

뚝섬나루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시절

 

 

69년8월, 불교신문 논설위원이었던 법정스님은 동아일보에 “너무 일찍 나왔군.”이란 칼럼을 실었다. 도입부를 보자. “강을 사이에 두고 나룻배가 오락가락한다면 백마강쯤으로 상상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곳은 부여가 아니라 대 서울의 뚝섬나루다.…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무슨 동임에는 틀림없는데 거기는 전기도 전화도 수도시설도 없는 태고의 성역이다. 교통수단이라고는 오로지 나룻배가 있을 뿐.”

 

참으로 금석지감을 느끼게 한다. 법정은 당시 뚝섬과 봉은사를 오가는 그 나룻배가 매우 서민적이어서 소 수레며 분뇨트럭도 실었고 적재량이 차야 떠났으며 장마철과 결빙기에는 며칠씩 거르기도 했다고 썼다. 아무리 바빠 발을 동동 굴러도 배는 떠나지 않고 또 공연히 마음이 급해 허겁지겁 나루터에 도착해도 한걸음 앞서 배가 떠났거나 저쪽 기슭에 매여 꼼짝을 않는다. 그래 그럴 때는 시간에다 마음까지 뺏기기 싫어 “너무 빨리 나왔군!”하며 스스로를 달랜다는 것이었다.


뭍으로 이어진 서울의 고도 잠실
1971. 4. 16 [경향신문] 7면

 

 

 

서울의 고도(孤島, 외딴섬)로 불리던 잠실이 육지로 변한 것은 그 칼럼이 나간 지 2년 뒤다. 71년 4월15일 잠실도(島)와 송파 사이로 흐르던 한강 지류를 막아 물길을 끊었다. 수천수만 년을 내려온 섬이 육지가 되자 마을 주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강바닥이 드러나자 수백 명 주민이 몰려 물고기를 잡느라 아우성을 쳤고 조상 대대로 잠실도∼송파 간 나룻배를 저어왔던 사공들은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또 그 물길막이 역사는 강남 부동산 열풍을 불러오는 전주곡이기도 했다.

 

 

 

 

개발의 흐름에 역사속으로 사라진 나룻배

 

 

근대화에 밀려나는 한남동 나루터
1969. 12. 26 [경향신문] 4면


69년 제3한강교(현 한남대교)가 개통되며 한남동 나루터가 없어지고 잠실마저 육지가 됐으니 강남개발은 날개를 달았다. 예로부터 삼남에서 서울로 들어오려면 천안에서 올 경우, 말죽거리(현 양재동)에서 하루를 묵고 신사나 동작나루에서 한강을 건넜다. 또 충주에서 오는 길손은 송파 천호동에서 새참을 들고 광나루를 건넜고 제물포 김포 쪽에선 양화나루를 이용했다. 한남동 나루터는 3한강교 개통 전만해도 경기도의 야채, 쌀과 배 등 각종 산물과 인원이 배를 타고 들어오던 길목이었다.

 

신사∼한남나루를 거치지 않으려면 신사동에서 약 4km를 서북쪽으로 걸어 제1한강교(한강대교)를 건너야 했다. 그러니까 이곳 나룻배는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지름길 역할을 했던 셈이다. 제3한강교 밑으로 강물은 흘러가고 그걸 따라 사랑이 익어간다는 노래도 있었지만 그 제3한강교가 생기기 전 이 한남동 나루에서도 끔찍한 도선 사고는 여러 차례 발생했다.

 

 

 

특히 62년 9월에는 발동선이 거룻배를 묶어 미는 형태의 나룻배, 속칭 ‘마차 배’가 전복해 30여 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났다. 남산 케이블카를 운행하던 한국 삭도가 이곳 한강에도 도선(渡船)용 케이블을 설치했는데 이 줄이 늘어진데다 마침 발동선이 고장 난 나룻배가 표류하다 줄에 걸려 전복한 것. 사고 직후 한남 신사나루를 계속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여론이 비등했으나 다른 특별한 도강 대책이 없어 69년까지 나룻배가 운영돼 왔다.

 

지금 한강다리는 근 30개에 이른다. 지천의 다리까지 합친다면 그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그 다리가 하나하나 생길 때마다 나루터와 나룻배는 사라졌다. 물론 지금 한강에는 유람선이 떠다니고 요트 모터보트 수상택시들이 다니지만 ‘창파에 몸 싣고 흔들리는’ 나룻배의 여유만 못한 게 사실이다. 그 많던 나룻배 사고의 아픈 기억도 사라졌고 나룻배를 타지 않고는 한강 건너 서울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옛 이야기를 해주던 사람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강상 여행은 물결만큼 많은 추억을 만들지만 흐르는 물은 그냥 무심할 뿐이다.


낡은배에 백여명..화근은 케이블선
1962. 9. 8 [경향신문] 7면

안가면 후회하고 갔다 오면 더 후회하는 게 바캉스라고 했다. 70년대가 특히 그랬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당연한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여름만 되면 사람들은 바다든 산이든 어딘가로 떠나야 했다. 피서를 다녀오는 것이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기본이며 직장동료에게나 가장으로서의 체면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떠난 후는? 어느 의사는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버스가 됐건 기차가 됐건 표를 사기 위해 늘어진 장사진 속에 끼어있어야 하는 지루함, 땀내가 푹푹 나는 만원버스나 기차 속에서의 고통스런 몸놀림, 대낮부터 곤드레가 된 젊은이들이 목 터지게 외쳐대는 퇴폐가요와 각종 악기소리를 견뎌야 하는 무지무지한 인내력. 거기다 불량배로부터의 안전을 위한 긴장과 신통치 않은 시설 때문에 겪는 불편, 잠마저 제대로 잘 수 없게 하는 밤낮 없는 소음…

 

 

 

난 촌스러운 휴가 말고 지적인 ‘바캉스’

 

 

바캉스라는, 운치 있다면 있달 수 있는 휴가의 불어 표현이 한국에 상륙한 건 62년 무렵이다. 신문사 특파원들이 프랑스 파리의 텅 빈 8월을 ‘바캉스’, 그리고 9월의 귀환을 ‘랑트레’라 한다고 전해오자 이 단어들이 급속도로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잖아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같은 노래가 유행하며 그 속에 낀 "what shall I do?" 같은 외국어들이 행세하던 시절이다. 촌스럽게 휴가 간다고 하는 대신 바캉스를 떠난다는 말이 훨씬 지적(知的)으로 들리는지 너도나도 바캉스를 입에 올리게끔 되었다.

 

그러나 60년대 초라면 먹고 사는 게 최고의 미덕이던 시절이다. 서울엔 전쟁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도 적잖았다. 아이들은 미군 지프나 트럭을 쫓아가며 “깁 미 껌” “초콜릿 프리즈”를 합창하곤 했다. 비가 조금만 와도 수해로 이어지고, 서울의 거리란 거리는 모두 진창이 돼 장화 없이는 다니지도 못할 시절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피서휴가라는 게 사치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물론 떠나는 사람이야 있었지만 그야말로 극소수였다. 노동자 공원은 말할 것도 없고 대부분 회사원도 실제 바캉스는 꿈도 못 꿨다.


현실..경포해안의 단층
1963. 8. 16 [동아일보] 1면

 

 

 

63년 경향신문은 외국의 바캉스 바람에 빗대 푸념을 늘어놓았다. “무덥고 가난하기만한 우리의 여름에는 휴일이 없다. 로맨스도 추억도 생의 축전도 없다. 시간과 돈에 몰리는 생활 속에 논다는 것이 곧 죄악처럼 여겨지는 오랜 관습이 있다…물가는 나날이 오르고 쌀 문제는 날로 절박하다. 이런 때 카메라를 메고 바다나 산으로 바람을 쐬러 다닌다는 것은 아무래도 겸연쩍은 일이다.” 설령 여유가 있더라도 마음이 불안해서 휴가를 못가고 직장에서도 휴가를 주지 않는다는 한탄이었다.

 

 

 

 

철없는 사치 피서 vs 여름 생활 필수품

 

 

장마갠 후 부산만 40만 인파
1965. 8. 2 [경향신문] 7면


그러나 ‘입 살이 보살’이라 했던가. 말로라도 자주 바캉스를 꿰다보니 정말로 바캉스가 사람들 일상으로 스며들었다. 60년대 중후반부터 인천송도나 부산해운대 충남대천 강릉경포대에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육체의 정글’ ‘바다 속 콩나물시루’라 부르며 붐을 조장했다. 66년엔 서울역에서 피서지 행 기차표를 사는 게 하늘의 별따기란 말이 나돌았다. 물론 암표도 돌았다. 피서휴가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어찌나 많았는지 어느 신문은 고무보트와 우끼(튜브의 사투리) 에어매트 구매 안내기사까지 실었다.

 

66년8월5일자 매일경제는 남대문일대 고물상점에서 팔고 있는 고무보트, 우끼 등은 전부 군수품으로 불하된 것이거나 부정유출된 것이라며 값이 항상 유동적이라고 썼다. 피서 철 워낙 인기 있는 상품이다 보니 불법으로 나도는 군수품 구입 방법까지 신문이 소개하고 나선 것이다. 이 신문은 68년엔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야전용 천막을 품종별로 소개하며 값비싼 물건은 군수품 취체반의 눈이 무서워 몰래 숨겨놓고 판다는 것도 귀띔했다.

 

 

 

사실 60년대 말은 피서휴가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다. 프랑스식 바캉스가 소개되며 젊은이들은 배낭과 텐트를 짊어지고 여행에 나섰고 어른들도 슬슬 그 대열에 합류했다.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대학 신입생들은 고교동창과 짝 지어 피서지로 떠나는 것을 특권으로 여겼다.

 

 

 

반면 선풍기 하나 장만할 길 없고 얼음과자조차 사먹기 힘든 서민들은 ‘속없이 배부른 자들의 철없는 사치 피서’에 눈을 흘겼다. 겨우 찬물 등목으로 더위를 식히면서 놀기 바쁜 젊은이들을 한 목소리로 비난했다.

 

언론 역시 이중적 자세를 보였다. 한편에선 “모래 위에 불 피우고 흡사 인디언 춤 같은 트위스트에 도취된 젊은이들이 한국의 앞날을 메고 나갈 수 있을지 한심한 생각”이라고 꼬집으며 도심의 육교 위나 남산 숲 속에 둘러앉아 열대야를 이기는 서민들 모습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상류사회만의 전유물이던 피서는 이제 대중화되었다”면서 “피서는 더 이상 사치가 아닌 여름 생활의 필수품이고 재충전을 위한 활력소”라는 주장을 폈다. 피서지 특집기사가 실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시원합니다..피서법 처방
1967. 7. 19 [경향신문] 7면

 

 

 

 모두 떠나자! 산으로 바다로 강으로~

 

 

마이카족 고속 달려.. 피서도 디럭스화
1970. 8. 3 [매일경제] 3면


69년과 70년 경인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가 잇달아 개통한 것도 바캉스 열풍에 기름을 부었다. 여름이 되기 무섭게 너도나도 피서 길에 올랐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은 아빠 엄마를 졸랐다. 회사에선 살갗을 누가 더 매력적으로 태웠느냐를 놓고 은근히 자랑하는 모습이 생겨났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휴가는 갔다 와야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섰다. 전국적 바캉스 붐에는 언론 역시 큰 몫을 했다. 70년 서울의 8개 중앙일간지는 각각 수영, 수상스키 강습회와 관광회원을 모집했다. 초특급 냉방 장치가 완비된 스웨덴 제 디럭스 버스를 이용한다는 선전 문구에 신청자가 쇄도했다.

 

이 무렵 어느 코미디언은 “모처럼의 휴가를 집구석에서 보내는 것은 현대인의 칠거지악”이라는 우스개를 내놓았다. 작가 이청준은 한 콩트에서 아가씨들의 바캉스를 재미있게 묘사했다. “아가씨들은 정오가 다되어 참새처럼 떼를 지어 바닷가에 왔다. 카메라와 트랜지스터를 메고 과일상자와 점심주머니를 나눠 들고 차양 넓은 모자에 요란스런 판탈롱과 미니스커트 차림을 하고…”

 

 

 

그들은 짐을 풀고 트랜지스터 볼륨을 높인 다음 한 명씩 탈의장에 가 비키니 차림으로 돌아온다. 그리곤 과일이니 과자를 먹고 사진을 찍는다. 그러다 보니 해가 지고, 다시 교대로 탈의장에 가 판탈롱과 미니스커트로 갈아입고 깔깔대며 해수욕장을 떠난다. 물론 몸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71년 국정감사에 나선 국회 건설위원들은 정부를 향해 호통을 쳤다. 480억 원이나 들여 만든 경부고속도로의 이용차량 중 50%가 도시민의 주말 레저 붐에 이용된 바캉스 승용차인데 이래서야 산업도로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마이카 족이 창문을 열어젖히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속도로를 달려 디럭스 휴가를 즐기고 오는 것이 국민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내놓았다. ‘500만이 법석대는 원색 디럭스 판 바캉스’라는 신문제목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번 붙은 바캉스 열풍은 좀체 식지 않았다. 사기업들도 휴가비 주며 직원들 피서휴가를 주는 걸 당연한 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푹푹 찌는 더위에 도시의 빌딩과 아스팔트 숲에 그냥 남아있으라고 한들 그걸 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문제는 피서지로, 피서지로 사람이 몰리다 보니 여름만 되면 온 나라가 바가지 천국으로 바뀐다는데 있었다. 또 피서지 범죄가 극성을 부리고 바캉스 베이비 또한 증가하는 불편한 현실이 대두됐다. 며칠 여행 경비를 마련하려고 강절도 행각에 나선 젊은이들이 등장했고 피서지 성 문란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집나서면 고생" 짜증속 피서지옥을 벗긴다
1978. 7. 22 [경향신문] 7면

 

 

 

 

올 여름은 또 어디로 떠나 고생할 것인가

 

 

쓴맛을 남긴 피서붐
1981. 8. 14 [경향신문] 9면


안가도 후회, 갔다 오면 더욱 후회한다는 말은 70년대 중반부터 등장했다. 한 신문은 “물이 흐르는 계곡 사이, 나무그늘 한 곳을 찾으려 해도 엄청난 자릿세에 놀라야 했다”며 “가는 곳마다 바가지요금에 가난한 호주머니 걱정부터 앞섰으며 불친절 또한 이루 말할 수 가 없다”고 한탄했다. 신문들마다 분수에 맞는 휴가, 바가지 없는 명랑 상도의, 건전풍토 조성을 외웠지만 그때뿐이었다. 해수욕장 물웅덩이 위에 나무다리를 세우고 통행료를 받는 봉이 김선달이 등장했고 휴가비가 떨어진 여성이 계약 동거를 하던 남자가 달아나는 바람에 여관비를 못내 고소당하는 웃지 못 할 일도 벌어졌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는 오일쇼크에 이은 불경기와 물가고가 온 세계를 덮쳤다. ‘구두쇠 바캉스’ ‘알뜰 피서’ ‘고향마을 순례 휴가’라는 신조어가 생겼으나 그렇다고 바캉스 붐을 완전히 제압하진 못했다. 이미 한여름 더위를 피해 가족끼리 친구끼리 또는 애인과 함께 피서지를 찾는 문화가 사회 저변에 뿌리를 내렸고 빚을 내서라도 피서는 가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여행 자유화에 따른 해외 바캉스 바람까지 일었다. 올 여름은 또 어디로 떠나 생고생을 하고 올 것인지.

담임선생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치미는 화를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종례를 시작한 지도 벌써 20분이 지났다. 반 아이들은 모두 책상 위에 꿇어앉았다. 눈을 꼭 감고 양팔은 바짝 쳐들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가늘게 눈을 떠보려다가도 들킬까 두려운지 다시 질끈 내리감곤 했다.

 

 

 

학급 도난 사건에  70명 전원이 단체기합

 

 

“한번만 더 얘기하겠다. 체육시간에 00이 가방에서 돈 빼 간 친구는 오른손을 내려 가슴에 얹어라. 그러면 전체 기합은 끝이다. 생각해봐라. 나 하나 못된 짓 때문에 반 친구 70명이 모두 기합을 받아 되겠느냐? 양심이 있으면 손을 가슴에 대라. 모두 눈을 감았으니 보는 사람도 없다.”


교실 이곳저곳에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주로 여학생이었다. 남학생들은 툴툴대며 낯모르는 범인을 향해 욕을 해댔다. “어떤 놈이야? 빨리 자수해, 팔 떨어지겠어!” 수군대는 소리, 훌쩍이는 소리로 교실 안이 웅성거렸다. 기진한 아이들은 대부분 머리 위에서 팔을 맞잡고 있었다. 갑자기 선생님이 몽둥이로 교탁을 쾅! 내리쳤다. 아이들이 움칫 놀라 진저리를 쳤다. 다시 선생님의 훈계. “안 나온단 말이지, 좋다. 누가 했는지 밝혀질 때까지 모두 학교에 남아 벌을 받는다. 쥐새끼 같은 도둑놈, 양심껏 자수하길 바랐는데 안 한다고? 내가 꼭 잡고야 말겠다. 범인을 아는 친구는 선생님께 말하라. 누가 얘기했는지 비밀은 철저히 지킨다!”


선도와 체벌 '한계' 어디에
1983. 9. 24 [동아일보] 7면

 

 

 

범인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약이 바짝 오른 선생님은 결국 매를 들었다. 처음엔 반장과 부반장의 종아리를 5대씩 때렸다. 곧 분단장들도 불려나가 종아리를 맞았다. 아이들 통솔을 제대로 못해 도둑이 생겼다는 거였다. 선생님은 매를 칠 때마다 교실 안이 쩌렁쩌렁 울리게 “친구가 죄 없이 맞는다. 그래도 안 나오나!”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날 종례는 아이들 모두가 차례로 종아리를 맞고 한바탕 울음바다가 된 다음에야 끝이 났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체벌

 

 

"학생 체벌 규제 필요하다"
1990. 9. 25 [동아일보] 9면


학창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집단기합과 체벌을 경험해 봤을 것이다. 위 얘기는 1970년대 말 초등학교 체벌 취재를 했던 교육위원회 출입기자 수첩에 적힌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그나마 이 경우는 신문지면을 장식한 여타 체벌이나 교사폭행에 비해 정도가 심하지 않은 편이다.


성적이 나쁘거나 수업태도가 좋지 않다고, 또는 복장이나 두발상태가 불량하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이유로 교사가 학생을 기합주고 때리는 일은 과거 학교에선 시쳇말로 ‘흔해빠진 일’이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는 물론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찬가지였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겨우 선생님으로부터 맞거나 꾸중 듣는 공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얘기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불가피하게 때릴 경우 가슴 아파하며 ‘사랑의 매’를 들 수밖에 없는 입장을 절절히 설명했다. 아니, 매는 아예 들지 않는 존경스런 선생님도 많았다.

 

 

 

그러나 일부 선생님은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는 가르칠 수 없다는 듯 걸핏하면 손찌검을 한 게 사실이었다. 잣대나 출석부, 회초리로 때리는 건 그래도 나은 편. 어떤 때는 야구 배트나 곤봉, 심지어는 혁대를 풀어 때렸고 발로 가슴팍을 차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남자고등학교 같은 경우 나무를 깎아 다듬은 몽둥이 모서리에 ‘사랑의 매’ ‘군사부일체’같은 문구를 써놓고 다니는 선생님도 있었다. 대개 생활지도교사나 훈육교사들이 그랬다. 보통은 그저 겁이나 주고 마는 경우였지만 학생들 사이에선 그런 선생님에게 잘못 걸린 학생이 된통 얻어맞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곤 했다.

 

 

 

 

학생들은 사랑의 매로 이해하려 했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든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학생들은 이해하는 편이었다. 이해하려고 애썼고 또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사랑과는 전혀 관계없이 정말 미워서, 증오하며 때리는 경우를 학생들은 용케도 알아챘지만 그것을 문제 삼고 항의할 수도 없었다. 다만 학생 입장에서 정말로 참기 어려운 것은 인간적인 모욕을 당하고 다른 학생과 차별해 구타를 하는 경우였다.


60년대엔 월사금을 제때 안 냈다고 “공짜로 학교 다닌다면 거지 아니고 무엇이냐?”며 급우들 앞에서 모욕을 주고 때린 교사도 있었다. 저축통장에 저금할 돈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재활용품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단체기합을 주는 교사도 많았다. 학생들의 집안 형편은 생각지도 않고 교육위원회 지침이나 교무회의 결정사항만을 최우선으로 따르는 경우였다.


체벌, 사랑의 매냐 폭력 행위냐
1990. 11. 6 [동아일보] 19면

 

 

 

70년대 중반에는 걸핏하면 담임에게 불려나가 매를 맞던 한 소녀가 신문사에 찾아와 울먹였다. “엄마가 담임선생에게 한 번도 인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만 골라 때린다.”는 얘기였다. 다른 아이 엄마들은 때만 되면 학교에 찾아와 담임을 만나는데 남의 집 가정부를 하는 제 엄마는 그러지를 못해 자기가 미움을 샀다는 것. 치맛바람이 드셌던 시절의 얘기다.


사실 교사들의 도를 넘어선 학생구타는 근대 교육제도가 도입된 이래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됐다. 61년 경남 거제에선 초등학교 교장이 한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 10살짜리 아이들을 때리며 기합주다 아이들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학생이 맘보바지를 입고 다닌다고 곤봉으로 때려 상처를 입힌 고교교사, 하급생의 돈을 빼앗은 중학생을 훈계하다 화가 치밀어 몽둥이세례를 퍼부은 중학 교사들이 잇달아 구속되기도 했다.

 

 

 

 

체벌 합법화 공식 논의와 잦은 폭력 사고

 

 

체벌, 과연 '사랑의 매'인가
1980. 10. 2 [동아일보] 5면


학교체벌 문제가 보도될 때마다 당시 사회에서는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졌다. 도를 넘는 체벌로 학생 팔이 부러지고 장이 파열되는 등 중상을 입힌 선생이야 옹호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 안 듣는 아이에게 어느 정도 기합을 주고 매를 드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는 입장이 자주 개진됐다. 그러나 한편에선 아무리 교육적 견지라도 학교 내 폭력은 용인할 순 없으며 교사의 학생 폭행은 아이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드는 독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교사들은 원칙적으로 아이들을 때려선 안 되지만 불가피하게 손을 대더라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초등학교 교감은 “어쩌다 학생을 때린 교사가 말썽에 휘말리지만 그런 교사는 오히려 평소 교육에 열성적”이라며 “선생의 꾸지람이나 체벌이 미움과는 거리가 먼 지극한 성의에서 비롯된 걸 이해하면 좋겠다.”고 했다. ‘콩나물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 보면 한두 명 말 안 듣는 애들에게 벌을 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 한 학부모는 “때려서 길들일 수 있는 건 강아지 아니냐?”는 극단적 비유를 들며 “아이들을 때려 순간적 효과는 얻을지 몰라도 결국 열등감과 반항심만 키우고 폭력성향을 본받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대학교수는 “아이들을 체벌로 가르쳐 버릇하면 어른 앞에서만 적당히 가장하는 비열한 아이가 되기 십상”이라며 폭력을 지렛대 삼은 교육은 학생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사랑의 매냐, 교사 폭력이냐’를 둘러싼 논쟁은 80년대 중반까지는 “어떤 이유에서건 체벌은 금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무게를 실어갔다. 문교부와 교육위, 교원단체 학부모 단체들이 한목소리로 체벌금지를 외쳤다. 66년 서울 초등학교 교장단이 일체의 체벌은 물론 과외공부와 잡부금 징수를 금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서울시 교육위원회는 그해부터 매년 초등학교 6학년 담임모임, 중학교 진학교사 모임, 고등학교 교장단 회의 등을 열어 체벌금지를 약속하고 서약서까지 쓰게 했다.


한국교총의 전신인 대한교련도 74년 교육주간에 ‘인간회복을 위한 교육복지 건설’ 슬로건을 내걸고 ‘체벌 근절 등 학교교육 비인간화 추방’ 캠페인에 나섰다. 아이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어느 정도 매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없지 않았지만 폭력배제야 말로 교육 민주주의의 요체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뒤집어 생각해보면 당시 일선 학교에 체벌 등 비인간적 요소가 만연해 있고 학생이나 학부모의 불만이 그만큼 높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인간 회복을 위한 교육을"
1974. 10. 8 [경향신문] 5면

 

 

 

 

사랑의 매? 교사 폭력? 찬반 논쟁

 

 

'사랑의 매' 교사 체벌 찬반 논쟁
1992. 10. 20 [경향신문] 21면


그러던 76년, 대법원은 밤거리를 쏘다닌 7명의 남녀 중학생을 나무라며 때린 지방의 한 중학 교장 사건과 관련, “훈육을 위한 어느 정도의 체벌은 형사 처벌대상이 아니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78년엔 평소 허약한 체질의 학생 뺨을 한차례 때렸다 숨지게 해 기소된 체육교사에게도 무죄가 선고됐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육당국은 더욱더 체벌금지 입장을 고수했다. 문교부는 그해 전국 교육감과 5대 도시 고교 교장 회의에서 “교사의 학생에 대한 체벌은 물론, 폭언 구타 단체기합도 일절 없도록 하며 특정학생에 대한 편애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체벌 합법화를 공식 논의 무대에 올린 건 83년이었다. 4월 대한교련이 ‘교육상 필요할 경우, 교사가 학생에게 체벌을 가할 수 있도록 하고 교사에 대한 폭행은 가중 처벌한다.’는 요지의 교권보호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표했다.

 

 

 

학부모가 대수롭지 않은 학생 체벌에 항의, 학교로 찾아와 교사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고교생이 조회불참을 나무라는 교사를 폭행한 사례도 빚어진 것이 교권보호 주장에 힘을 실었다. ‘사랑의 매냐, 교사 폭력이냐’는 논쟁이 다시 불붙었고 그 와중에서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6월, 서울의 한 중학생이 교사에게 맞아 장이 파열됐고 이를 괴로워한 20대 교사가 학교에서 음독자살했다. 그는 교장과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 학생들에게 쓴 유서에서 우발적 실수지만 교육자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절절한 뜻을 밝혔다. 체벌을 둘러싼 찬반논쟁이 다시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러자 문교부는 다시 어떤 이유로든 체벌을 해서 안 된다는 긴급지침을 각 학교에 내려보냈다. 교육법 정신에 따라 일체 체벌을 금지하며 바람직한 학생지도 기법을 개발하라는 것이었다.


92년에도 수업시간에 만화를 보던 학생을 지시봉으로 때렸다 팔이 부러진 것을 비관한 중학교 여교사가 자살했다. 그해 말 대통령 교육정책 자문회의 소속 교수들이 국민 5천 명을 대상으로 ‘교육에 관한 국민의식조사’를 해본 결과 63.4%가 교육목적의 체벌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그해 모 교육 월간지가 중고생 2천9백 명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48.6%가 선생님으로부터 체벌을 포함, 심한 벌을 받은 적이 있으며 78.6%는 체벌이 학교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응답했다. 95년 한국교육개발원이 성인 남녀 1천5백 명을 상대로 한 의식조사에서는 68.3%가 체벌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한때 체벌 대신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벌금을 물게 한 학교도 있었다. 지각하거나 수업 중 졸면 500원, 숙제를 안 해오면 1000원 등을 걷어 학급비로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바로 체벌보다 못한 비교육적 처사라는 비판에 봉착했다. 반성문 쓰기, 청소당번 시키기, 급우 심부름하기 등 체벌을 대체할 의견도 백출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학교 구타는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두더지 게임의 양상까지 보였다.


최근 서울시 교육청이 2학기부터 학교체벌을 일체 금지토록 한데 대해서도 의견은 갈리고 있다. 과거 체벌을 둘러싼 논쟁이 순수한 교육적 차원, 인권과 교권, 매 맞지 않을 권리와 집단교육에서의 불가피한 질서 확립의 문제였다면 이번 체벌논쟁에는 이념문제까지 가세했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학창시절, 사랑의 매와 존경스런 선생님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교사의 감정적 폭행에 대한 응어리가 불쾌감과 한으로 남은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지각하면 500원, 숙제 안해오면 1,000원..초중교 체벌 대신 벌금
1992. 11. 4 [동아일보] 23면

 

방학의 묘미 중 으뜸은 뭐니 뭐니 해도 기차여행이었다. 그것도 삐익∼삐익∼기적을 울리고 검은 연기를 뭉클뭉클 뿜어 올리며 칙칙폭폭 내달리던 증기기관차 여행이었다. 1967년 8월31일 한국 철도의 현장에서 공식 퇴역하기 전까지 증기기관차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에게 꿈과 낭만의 표상, 바로 그것이었다.

 

시골 아이들은 푸른 산등성이에서 불쑥 삐져나와 긴 여운, 기적소리와 함께 들판을 가로지르는 기차를 보며 도회지에의 무한한 동경을 키웠다. 서울 변두리 아이들은 앞바퀴에서 헐떡이듯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한강철교 위를 달리는 기차를 보며 시골 할머니 집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느꼈다. 가슴을 헤집듯 뭉클뭉클 뿜어 나오는 화통 연기처럼 도무지 주체할 길 없는 그리움이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쌩쌩 달리는 묘미, 객차 승강구의 ‘특등 입석’

 

 

봄가을엔 서울 가서 돈 벌어 돌아오겠다며 무작정 상경하는 소년소녀들이 그 기차를 탔다. 역두(驛頭)에서 눈물로 이별한 친구의 격려를 생각하며 기차 안에 앉아서도 그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면 여름과 겨울에는 서울 부모가 아이들에게 주는 최고의 방학선물이 시골집 행 기차표였다. 힘들고 각박한 서울생활에 지친 부모일수록 아이들을 푸짐하고 넉넉한 시골에 잠시라도 보내고 싶어 했다. 기차 안에서 아이들은 설렘에 달뜬 얼굴로 연신 조잘댔다. 물론 부모와 함께 갈 경우엔 천군만마라도 얻은 듯 의기양양했다.

 

그렇긴 해도 머리가 좀 큰 아이들은 객실 안에 얌전히 앉아가지만은 않았다. 웬만한 어른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승객들로 꽉 차 비좁고 냄새 나는 객실, 딱딱한 나무 의자보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쌩쌩 달리는 묘미를 한껏 느끼게 해줄 객차 승강구의 ‘특등 입석’이 훨씬 인기였다. 두세 칸 발판에 대여섯 명씩 난간을 잡고 매달려 서서 가노라면 스쳐 지나는 논밭과 산의 청기(淸氣)가 가슴 가득히 파고들었다. 기차 타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휴일 교외선 공포..초만원
1972. 6. 12 [동아일보] 7면

 

 

 

위험을 안고 "여름"을 달린다
1981. 8. 1 [경향신문] 1면


기차는 터널에 들어가기 전이면 으레 기적을 울렸다. 석탄 그을음과 연기가 객실로 날아들지 모르니 미리 창문을 닫으라는 신호였다. 물론 승강구에 매달린 승객도 차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석’을 빼앗길까 두려운 사람들은 난간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오면 그들의 얼굴은 새카만 검댕으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손으로 문지르기라도 하면 영락없는 토인 전사의 얼굴이 됐다. 그래도 옆 사람과 낄낄대고 웃으면서 세 시간 네 시간 아랑곳없이 기차 옆구리 여행을 즐겼다.

 

객차 한 량 당 4개 승강구에 20여 명이 매달린다면 열다섯 량이 달린 기차의 경우 3백여 명이 ‘난간 승객’이었던 셈이다. 한때 유행한 식인종 시리즈 농담을 차용하자면 “김밥(까만 기차)이 군데군데 터져 흰색 쌀(사람)이 삐져나온” 형국으로 기차는 우렁찬 기적을 울리며 달려 나갔다. 물론 안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매년 10여 건 이상 추락사고가 일어났다. 그 대부분은 학생 등 젊은이들이 승강구 난간을 잡고 가다 떨어져 숨진 사고였다.

 

 

 

 

승강구 사고 날 때마다 배상 둘러싼 논란

 

 

증기차시대는 물론, 67년 9월 시작된 ‘디젤기관차 시대’에도 사고는 끊이지 않았다. 63년 1월 승강구 발판에 서있던 40대 여인이 열차 출발순간 날치기가 목도리를 낚아채는 바람에 철로에 떨어져 숨졌다. 67년 여름 중3 남학생이 한 손엔 책가방을, 한 손엔 난간을 잡고 가다 한강교각에 부딪쳐 사망했고 78년 추석에는 기차가 역 구내에 들어서는 순간 빨리 내리려는 승객들이 승강구로 몰려 매달려있던 초등학생이 떨어졌다. 80년 경남 양산에서는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형제가 열차가 자기 마을 앞을 지날 때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다 떨어져 숨졌다.

 

승강구 사고가 날 때마다 배상을 둘러싼 논란도 일어났다. 1969년 서울민사지법은 “만원 열차에서 승강구 발판을 딛고 난간에 매달려간 사람이 추락사한 경우, 국가가 주의의무를 소홀히 했으므로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같은 해 “특급열차 승강구에서 추락사한 경우, 스스로 신체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과실이 크므로 국가는 배상할 필요가 없다”거나 “만원이 아닌 열차에서 승강구에 매달려가다 떨어져 죽은 것도 피해자 과실이기 때문에 국가가 배상할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반면 82년에는 “술 취한 승객을 승무원이 차내로 유도하는 등 안전조치를 취했더라도 취객이 승강구 난간을 잡고 가다 추락사했다면 국가는 50% 정도의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도 나왔다. 사고책임과 배상을 둘러싼 논란이 일 때마다 승무원들은 난간승객들을 모두 객실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시간에 두어 번씩 순찰을 돌며 승강구 승객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그때뿐, 승무원이 다른 칸으로 넘어가기 무섭게 승객들은 바로 난간으로 나와 ‘맞바람 특석’의 묘미를 즐겼다.

 

 

 

 

낭만 되살리자는 극한론에 증기기관차 재등장

 

 

어찌 됐거나 67년 증기기관차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기차여행의 낭만도 함께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 해 8월31일 오후 1시50분, 새벽에 전북 남원을 출발한 ‘파시’ 5형, 102보통여객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해 ‘증기기관차 퇴역 종운(終運)식’을 가진 날 신문들은 매우 감상적인 기사를 게재했다. “증기기관차여, 안녕! 영국이나 미국 같으면 사람들이 ‘올드 랑 사인’을 합창할 일이다. 앞으로는 어린이들이 ‘칙칙폭폭’이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게 되는 것일까.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아기 잘도 잔다.…”

 

칙칙폭폭 대신 우∼웅 소리를 내며 달리는 디젤차 독점시대는 그러나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증기차 퇴역식이 있은 지 2년 반쯤 된 70년 1월 철도청은 전주∼군산 노선에 다시 증기차 5대를 투입했다. 외국차관으로 도입한 20년 수명 디젤차가 무리한 운행으로 5년 만에 고장이 나는 등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물론 증기차는 얼마 안가 다시 디젤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75년부터는 영동 태백 중앙선 등 산업철도가 모두 전철화하면서 디젤과 전철의 혼용시대가 시작됐다.


증기기관차 퇴역 종운식
1967. 8. 31 [경향신문] 3면

 

 

 

이즈음 철도는 새로 개통한 고속도로에 승객을 빼앗기며 국내 최고속, 최대, 최다 수송수단으로서의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철도인들 사이에서는 전철시대를 넘어 고속철 도입을 서둘러야 고속버스, 마이카에 맞서 철도운송의 명맥을 유지할 것이란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다. 사실 적자라고는 모를 것 같던 철도영업은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만성 적자에 허덕이는 천덕꾸러기’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서비스를 개선하고 기차여행의 낭만을 되살리지 않는 한 철도의 미래는 없다는 극한론도 대두되었다.

 

81년 바로 이런 낭만과 서비스 개선 분위기를 타고 증기기관차가 재등장했다. 철도청이 10월1일부터 부산∼경주 동해남부선에 증기기관 관광열차를 투입, 운행을 시작한 것.

 

 

 

"어린이날 만세" 기념잔치 푸짐
1986. 5. 5 [동아일보] 11면


증기차는 모양만 그럴 뿐 발전차가 끄는 형식이었지만 ‘어린에겐 꿈을, 어른들에겐 옛 정취를’ 심어준다는 취지를 들고 나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철도청의 ‘대박’ 욕심은 그냥 욕심에 그치고 말았다. 경주 부산 간 141km를 시속 40km로 3시간에 달리는 이 느림보 기차를 아무리 추억이 좋다 해도 이용하려는 승객이 많을 리 없었다.

 

불과 2개월 운행했을 뿐인데 하루 승객이 2백 명에도 못 미치자 철도청은 이듬해 1월 운행을 중지했다. 7월에는 우등 객차를 보통으로 바꾸고 운행구간도 부산∼좌천으로 단축해 보았지만 승객이 안 들기는 여전했다. 결국 이도 흐지부지한 철도청은 85년부터 어린이날 불우어린이 위문용 증기차를 교외선에 내보냈다. 어린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영화에서나 봤던 시커먼 기차, 운전실 앞으로 길고 둥글게 누운 원통형 화실이 삐죽 나온 증기차는 꼬마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꼬마들이 즐겁고 신나 하는 걸 지켜본 언론의 보도도 호의적이었다.

 

 

 

 

2010년, 추억의 기차는 단 한곳만 남아

 

 

94년 8월 서울역-수색-장흥-송추-의정부 교외선 노선에 증기기관차가 다시 등장했다. 중국의 장춘 기차공장에서 3억 원에 구입한 이 기차 역시 겉만 증기차일 뿐 속은 디젤인 짝퉁. 검은 연기는 나지 않고 기적소리는 낼 수 있도록 경적기를 달았다.

 

 

 

처음엔 토요일 1회, 일요일 공휴일 2회 운행하다 승객이 없어 토요일 운행은 곧 중단했다. 그래도 추억과 낭만이 깃든 이 칙칙폭폭 기관차의 매력은 여전해 그해 11월5일 이 교외선 열차 안에서 국내 처음으로 열차결혼식도 열렸다.

 

2010년 지금, 달리는 증기기관차를 볼 수 있는 곳은 전남 곡성 기차마을이 유일하다. 구 곡성역에서 침곡역 가정역 13km를 30분 간 달리는데 이것도 겉모습만 증기차지 엔진은 디젤이다. 화통에서 흰 연기를 뿜지만 짝퉁이기 때문에 과거처럼 뭉클뭉클 하늘 높이 올라가지도 않는다. 하지만 섬진강변을 달리는 이 차 안에서 사람들은 옛 정취를 느끼고 추억에 젖는다. 그을음과 검댕 때문에 토인전사가 되곤 했던 승강구 난간 특실 승객들은 어느덧 50을 넘어 60, 70에 이르렀다.


추억의 증기기관차 다시 달리다
1994. 8. 22 [동아일보] 31면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에 ‘서당’이란 그림이 있다. 18세기 글방의 훈장과 학동(學童) 묘사가 빼어난 걸작이다. 아이는 방금 훈장한테 회초리를 맞았다. 눈을 내리깔고 서러움에 복받쳐, 흐르는 눈물을 찍어내면서 바지 대님을 만지작거린다. 훈장에게 등 돌린 채다. 책상너머 아이의 등판을 물끄러미 내려 보는 훈장의 표정에도 수심이 가득하다. 귀여운 제자의 여린 종아리에 회초리를 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아이는 외워오란 천자문을 못 외웠거나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뒤편엔 읽다만 책이 떨어져 있다. 요즘 학교체벌을 찬성하는 이들은 이 그림을 들며 ‘사랑의 매’는 교육에 꼭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림처럼 아무리 자애로운 훈장이라도 어쩔 수없이 회초리를 들어야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 드는 회초리야말로 정녕 사랑의 매며 그걸 맞은 아이는 바짝 정신 차려 학업에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림엔 또 다른 아이들이 있다. 훈장 앞 왼쪽에 다섯 명, 오른쪽에 세 명이다. 회초리를 맞고 우는 아이는 이 여덟 아이들 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이 아이들, 표정이 웃긴다. 마냥 고소해하는 것 같다. 벌써 웃음을 터뜨렸거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아이도 있다. 친구가 매를 맞고 서럽게 우는데 신이나 웃다니? 좋아 어쩔 줄 모른다니? 아하, 그러고 보니 맞은 아이는 친구들에게서 따돌림을 받는 모양이다. 요즘 말로 ‘왕따’인 것 같다.


18C 조선시대 김홍도 그림 '서당도'
1983. 5. 9 [매일경제] 9면

 

 

 

 

학교방화·살인미수, 따돌림 때문에 벌어진 사건들

 

 

교육자는 어디 갔는가
1963. 5. 27 [경향신문] 5면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은 역사가 오래 됐다. 18세기 서당에도 있었으니 50년 전이라고 다를 바 없을 것이다. 1963년 5월, 서울 모 중학교 1학년생이 죄명도 으스스한 ‘위계에 의한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위계란 계획적이란 뜻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13살 소년이 살인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다 적발된 걸까. 어처구니없게도 학생들이 마실 물에 청소용 양잿물을 넣다 발각됐고 그 이유는 “따돌림에 대한 보복”이란 것이었다.


소년은 그 일이 있기 전 반 친구의 만년필을 몰래 가져간 적이 있었다. 잠시 빌린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통하지 않았고 결국 15일 정학을 당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반 아이들이 일제히 따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도둑놈”이라고 말을 하면 그래도 나은 편. 아예 말을 않거나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학교 대청소일이 다가왔고 소년은 교실 바닥을 윤이 나게 닦음으로서 환심을 되찾으려고 했다.

 

 

 

부모를 졸라 때를 잘 빼는 양잿물을 학교에 가져왔다. 반 아이들에게 자신이 양잿물 묻힌 걸레로 마루를 닦아 윤을 내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이들은 들은 체 만 체, 본 체 만 체 했다. 자기들끼리 숙덕대고 얘기를 하면서 소년은 아예 거기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소년은 아이들이 점심시간에 먹을 물을 끓이던 솥에다 양잿물을 쏟아버렸다.

1972년엔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가 학교에 불을 지른 사건이 일어났다. 역시 따돌림 때문이었다. 생모를 잃고 계모 밑에서 자란 A군은 사랑이 없는 집과 학교 모두에 관심을 잃었다.

 

 

 

특히 학교에서는 공부를 못한다고 손가락질하는 담임이나 반 아이들 모두를 미워했다. 자연히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고 다른 아이들과 싸우는 일도 잦았다. 몇몇 아이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선생님이 칭찬하는 걸 보면 질투심에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장기 결석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열등감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A군은 몰래 학교에 숨어들어갔다. 교실 뒷벽에 붙어있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그림을 한 장씩 뜯어내 불을 붙였다. 한 장 한 장 태울 때마다 희열을 느꼈지만 불은 어느 순간 갑자기 공작도구 상자로 옮겨 붙었다. 혼자 꺼보려 했지만 역부족.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온 A군은 소방차가 오자 물을 퍼 나르며 진화를 도왔다. 그런데 이때 또 이상한 행동이 나타났다. 반 친구들을 보자 느닷없이 “시원하게 잘 탄다. 저 불은 내가 낸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한 소년이 떨고 있다…아니 모두..
1995. 7. 18 [경향신문] 25면

 

 

 

 

80년대 이후 사회문제로 대두된 왕따 문제

 

 

어린이들 빗나간 '끼리끼리 의식'
1986. 10. 10 [동아일보] 7면


왕따 당한 아이들이 사건사고를 저지를 때마다 언론은 교육의 부재를 한탄했다. 양잿물 사건 때는 소년이 물건을 훔친 행위를 교실에서 공개한 담임의 잘못을 지적했다. 또 아이가 집단 따돌림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걸 알고도 방치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교실에 불 지른 소년의 경우도 가정과 학교 모두 그에게 무관심했다며 특히 장기 결석할 때 가정방문 한 번 하지 않은 학교 측 처사를 나무랐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이들 세계에 은밀히 번진 따돌림을 심도 있게 추적한 것은 아니었다.


학교에서의 집단 따돌림이 사회문제로 본격 대두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오면서였다. 86년 일본에서 ‘이지메’(힘센 학생이 약한 학생을 폭행하고 괴롭히는 행위. 집단으로 한 학생을 찍어 괴롭힌다.) 희생자인 중학생들이 잇달아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에서도 학교폭력 실태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그해 5월 경향신문은 일본의 이지메가 한국에 번져 “초 중학생들 사이에 학우들의 괴롭힘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학교로 전학하는 사태가 늘고 있다”고 폭로했다. 신문은 서울시 교위와 7개 교육구청이 월 40여 건의 전학 상담을 받고 있으며 대개 급우들에게서 집단구타, 따돌림, 비웃기, 낙서 따위로 괴롭힘을 당해 전학을 희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여학생의 경우 급우들이 책상 위에 이상한 쪽지를 붙여놓곤 하는데 일체 말은 않고 자기들끼리 웃기만 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다른 남학생은 단지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상급생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했다고 울먹였다.

 

동아일보는 어린이들이 주거 형태나 아파트 평수 등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며 다른 아이들을 따돌린다고 주장했다. 특히 초등학교 4∼6학년 여자어린이에게 이 ‘끼리끼리 현상’이 심한데 “어떤 아이가 유독 선생님의 귀여움을 받거나 ‘잘난 체’ 할 때, 성적이 아주 좋거나 혹은 나쁠 때” 그 아이를 따돌리며 괴롭힌다고 했다. 가령 아파트 밀집지역에서는 단독주택에 사는 아이를, 부자 동네에서는 가난한 집 아이를 따돌리며 외모, 부모 직업, 성격, 옷차림 등 갖가지 핑계의 따돌림이 성행한다는 것이었다. 왕자병 공주병 아이들이 따돌림 대상이 되기 쉽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폭력교실…도피 전학 잇따라
1986. 5. 23 [경향신문] 11면

 

 

 

 

청소년들의 큰 고민 '따돌림'

 

 

청소년 21% '이성 문제'에 고민
1990. 1. 23 [경향신문] 9면


일본의 이지메 탓에 학교 따돌림이 재조명됐지만 사실 사건은 꾸준히 일어나고 있었다. 82년 서울의 한 여중생이 급우들의 따돌림과 협박에 못 견뎌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K양은 전해 크리스마스에 동급생 몇 명이 남학생과 어울려 술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를 들었다. 담임선생에게 몰래 그 사실을 알렸는데 담임이 문제아들을 불러 추궁하던 중 K양의 이름을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문제아들은 개학하자마자 K양을 협박하면서 반 아이들에게도 “고자질쟁이와는 말도 하지 말라”고 윽박질러 왕따를 시켰다. 어떤 때는 K양에게 전화를 걸어놓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끊는 경우도 있었다. 자살하기 전 K양은 학교에서 울며 돌아온 날이 많았다. 따돌림과 협박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다 결국 “나는 죽을 몸이다. 이제 그 계획을 시도하는 것뿐”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85년 사랑의 전화가 서울의 중고생 77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친구에게 따돌림을 받아 학교생활에 흥미가 없다”고 대답한 학생이 7.1%에 이르렀다. 90년 10대들의 고민을 상담하는 ‘10대들의 쪽지’가 상담편지 2천 건을 분석한 결과 자신의 문제, 이성 문제와 함께 친구 문제가 3대 고민으로 꼽혔다. 친구문제의 경우, ‘친구가 없어 외롭거나’ ‘따돌림을 당해 고민’이라는 실토가 많았다.

 

 

 

 

왕따없는 교육 풍토, 언제쯤 가능할까?

 

 

94년 11월부터 3주 동안 일본에서는 또 중학생 5명이 이지메를 못 견뎌 자살했다. 학생들은 유서에서 자신이 이지메 당한 실상을 낱낱이 폭로했고 일본 열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해 마이니치신문이 초중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42%의 학생이 자기 교실에 이지메가 있다고 응답했으며 29%는 자신이 직접 이지메를 당했다고 답변했다.


이웃 일본의 ‘폭력교실’ 뉴스가 전해지자 깜짝 놀란 우리 교육 당국도 학교에서의 폭력이나 집단 괴롭힘을 샅샅이 뒤져 뿌리를 뽑으라고 긴급지시를 내렸다. 사실 그때쯤 우리나라에도 이미 왕따에 이어 ‘은따’(은근히 따돌림) ‘전따’(전교생이 따돌림)까지 등장해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었다. 또 그런 모든 따가 폭력과 연계돼 있다는 것도 학교에선 공공연한 비밀이 돼 있었다. 거기다 일진까지 등장하며 교내 폭력은 구조화하는 양상까지 보였다.


日 '교내 폭력 이지메' 위험수위…힘약한 학생 잇단 자살
1994. 12. 18 [경향신문] 23면

 

 

 

2010년 올해도 학교 폭력, 따돌림을 없애 밝고 명랑한 교육풍토를 만들어보자는 바람이 불고 있다. 18세기 서당에도 있었던 왕따, 과연 없앨 수 있는 것일까.

 

함교는 피로 물들었다. 함수갑판 중갑판 함미갑판 어디건 전사자와 중상자들이 뒹굴었다. 주포인 3인치 포신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함체는 이미 크게 기울었다. 피투성이 함장과 포술관은 고통에 찡그리면서도 고함을 질러댔다. “위치를 사수하라!” … “쏴라! 연막탄이건 뭐건 다 쏴라!”

 

한낮이었다. 태양이 뻔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바다엔 풍랑도 별로 없었다. 그 멀쩡한 시간, 대한민국 해군 56함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바다로 침몰하고 있었다. 강원도 금강산이 보이는 어로저지선 인근 해상이었다. 1967년 1월19일, 정확히 오후 2시34분이었다.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는 무슨 일이?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전사했다. 침몰원인은 분명했다. 북한의 해안포 직격탄을 맞은 것이었다. 명태 잡이 어선들의 어로저지선 월선(越線)을 저지하고 북한 함선의 납치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띠고 작전 중이던 56함은 이날 북한의 122mm 해안포 8발을 정면으로 맞았다.

 

해군 56함, ‘당포’호는 그 전해 12월28일 진해기지를 출항했다. 동해 해상 휴전선 인근 명태어장에서 어로보호 임무를 하고 1월15일 귀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해 명태 어획은 기대에 못 미쳤다. 날씨가 고르지 못해 출어일수가 줄어 평년 어획량 6,600톤보다 1,000톤이나 감소했다. 11월1일부터 3만3천여 척의 배가 나선 걸 감안하면 형편없는 실적이었다.


해군 56함 북괴 피격침몰
1967. 1. 20 [동아일보] 1면

 

당국은 어로저지선 인근 명태 잡이를 1월 말까지 15일간 연장했다. 설마 이것이 56함의 최후를 불러오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작전기간이 연장된데 대해 승조원들도 다소 불만스러웠지만 적전(敵前) 해상근무의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기대 어획고를 올리지 못한 어선들이 고기떼를 따라 북상, 해상 휴전선을 넘나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날도 어선 수백 척이 명태 어장에 몰렸다. 날도 청명했다. 부진했던 실적을 만회하려고 어선들은 필사적이었다. 70여 척이 어로저지선을 지그재그로 넘어 들어갔다. 56함은 이들에게 경고방송을 하며 남쪽으로 선수를 틀도록 유도했다. 그러던 오후 1시 반, 수원단(水源端·북한 장전항 인근 해안 돌출부) 동방 6마일에 북한 경비정 2척이 나타나 선단 쪽으로 접근했다.

 

 

 

지구상에서 보낸 마지막 신호에는 긴박함이..

 

사건 경위 해군 발표
1967. 1. 20 [동아일보] 2면


그로부터 꼭 30분 후인 오후 2시. 56함은 “본 함, 육상 포와 교전 중”이란 긴급무전을 보냈다. 이것이 지구상에서 56함이 보낸 마지막 신호였다. 56함은 북한 함정이 명태선단에 접근하자 이를 어선 납치 기도로 보았다. 함장은 즉각 “우리 어선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북한 함을 막고 어선들을 더 북상 못하게 추스르며 내려 보내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북한 해안 절벽에서 번쩍 불꽃이 일었다. 대함포가 발사된 것이었다.

 

북한의 수원단 포대는 ‘나바론의 요새’처럼 위장돼 있었다. 절벽 속에 동굴을 파고 레일을 놓아 포를 갑자기 돌출시켜 바다 위 목표물을 타격하게 돼있었다. 물론 동해 경비에 나선 우리 해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느닷없이 표적사격을 하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굉음과 함께 사방에서 물기둥이 치솟자 함장은 ‘전투배치’를 발령하고 엔진을 모두 가동, 전속력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후부기관실에 포탄이 날아들었다. “기관실 맞았습니다, 감속 기어 파손…”이란 보고와 “탄약고 불 붙었습니다.”란 보고가 동시에 함교로 전달됐다. 그리고 이어 전부기관실에 또 한 방을 맞았다. 첫 번째 포탄을 맞고도 표적에서 벗어나려고 지그재그로 달리던 배가 뚝 멈췄다. 수병들은 3인치와 40mm 기관포에 달라붙어 필사적으로 적 포대를 향해 포를 쐈다. 사정(射程) 시야를 가리려고 연막탄도 터트렸다. 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배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생존자들은 나중에 그 상황을 생생히 전했다. 박태만 중위는 파편에 끔찍한 부상을 당하고도 수병들을 독려하며 연신 “쏴라!”고 외쳐댔다. 연막탄까지 남김없이 쏘라고 지시한 것도 그다. 나중에 퇴함명령이 내려졌을 때 그는 포대 옆 벽에 머리를 숙인 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끝까지 지휘하다 앉은 자세로 전사한 것이었다.

 

이승무 중위는 통신실이 포격으로 부서지자 비상통신실로 달려가다 작렬하는 파편에 맞아 전사했다. 포탄에 다리가 떨어져 나간 하사관, 복부에 파편을 맞아 장이 쏟아져 나온 수병, 몸 가득 파편이 박힌 장교들이 갑판 여기저기서 신음했다. 기관실을 복구하러 들어간 기관장은 배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걸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함장에게 “침수 중입니다. 퇴함해야 합니다.”고 소리쳤다.

 

이때 북한의 해안포는 잠시 멈춰 있었다. 그러나 56함이 구명정을 내리는 순간 다시 포격을 개시했다. 처음 준비한 포탄을 다 쏘고 새로 장전한 모양이었다. 해군은 그날 북한이 56함을 향해 286발을 쏘았다고 밝혔다. 북한 해안포대가 포격을 완전히 멈췄을 때 배는 절반 이상 가라앉아 있었다. 함수 앵커 부분에 몰려있던 장병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당포호의 최후..필사의 교전 40분
1967. 1. 25 [경향신문] 7면

 

함장 김승배 중령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부상한 수병에게 입혀 구명정에 태운 뒤 마지막으로 생존자가 없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고 바다로 뛰어내렸다.

 

 

 

56함과 함께 영원히 귀대하지 못한 대원들

 

수병들의 군인정신도 투철했다. 전탐 근무자 정완섭 병장은 극비서류인 21MC 전탐일지를 허리띠 아래에 묶은 뒤 바다에 뛰어들어 53함에 구조됐다. 암호사 김영석 하사는 전 해군 공용 암호 문건을 배가 침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렸다 함께 수장시켰다. 가지고 탈출하다 적에 잡히기라도 하면 암호가 누출될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구명정에 탔거나 바다에 뛰어내린 51명이 달려온 해군함정에 구조됐다. 그러나 그중 11명은 이미 숨진 채였거나 구조 직후 숨을 거뒀다. 작전관 포술관 등 장교 2명을 포함해 28명은 침몰한 배와 함께 수심 200m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애초 출항한 진해기지로 영원히 귀대하지 못했다. 그들이 제 몸보다 아끼던 애함 56함과 함께였다.


피로 물든 함교...56함의 투혼
1967. 1. 21 [동아일보] 7면

 

시퍼런 대낮 어로보호 경비함이 격침된 대참사가 일어나자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불과 닷새 전인 1월14일 밤 해군함정과 민간여객선이 충돌, 여객선 한일호의 승객 1백 명이 숨졌던 터라 충격이 더욱 컸다. 오후 5시 청와대에서 긴급안보회의가 열렸다. 정부대변인은 “호전적 침략근성을 드러낸 북괴는 응분의 대가를 각오하라”며 ‘모종의 응징책’을 세우겠다고 발표했다. 이튿날 유엔군사측은 군사정전위 본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북측에 ‘살인적 함정 격침 행위에 대한 공동조사’를 제의했다.

 

북괴감위조사 거부
1967. 1. 21 [동아일보] 1면


유엔의 입장은 단호했다. “56함은 아무런 적의와 도발행위 없이 한국어선단을 남쪽으로 인도하는 중이었는데 북이 무차별 포격을 가했고 이는 엄연한 휴전협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측은 이를 부인했다. “56함이 휴전선 북측 연안을 침범했고 격침은 자위행위”였다는 것이다. 또 56함이 먼저 함포사격을 해왔으며 침몰 전후해 유엔 측 비행기와 함선이 북한의 영해와 영공을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정전위에서의 양측 입씨름은 똑같은 방식으로 지루하게 지속됐다. 유엔군은 ‘공동조사’를 다그쳤고 북측은 56함의 월선과 자위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는 사이 정부는 공언했던 ‘모종의 응징책’의 1단계 조처 내용을 발표했다. 1)북의 만행을 규탄하는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고 2)우리 어선의 북상 어로를 금지하며 3)미국과의 교섭을 통해 만행을 응징하는 대책을 세우면서 4)대형 함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북위 38도39분45초, 동경 128도26분48초

 

 

침몰 6일째인 25일 어로저지선 근해에서 포탄 파편으로 헤지고 얼룩진 25인승 구명보트를 어선들이 발견해 속초로 예인했다. 56함의 좌현에 실렸다 침몰 후 떠오른 것이었다. 바다 속 56함이 수면 위로 보낸 단 하나의 유품이었다. 유엔군과 한국 해군 공군들은 사고해역에서 몇 날 며칠을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승조원 시신은 물론, 56함으로부터 나온 어떤 부유물도 찾지 못했다. 북측은 이들이 휴전선을 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월27일 오후 2시 ‘당포’함 전몰장병 영결식이 진해 한국함대 사령부에서 열렸다. 박태만 이승무 중위에겐 충무무공훈장이, 김경수 상사 등 37명에겐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전사자들은 또 모두 1계급 특진 추서됐다. 이튿날인 28일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39위, 장병들의 국립묘지 안장식이 현충원 해군묘역에서 열렸다. 유해조차 못 찾은 28 장병들은 유품만 묻혔다.


 

56함 전몰 장병 국립묘지에 안장
1967. 1. 28 [동아일보] 7면

 

 

 

2월9일, 국방부는 해상 어로보호임무를 내무부와 농림부로 이관하겠다고 밝혔다. 경비함들이 민간어로 보호 임무를 하느라 본연의 군사임무에 소홀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날 주문진 양양 속초 고성의 어민들이 모여 동해 최북단 거진항 뒷동산에 56함 충혼탑을 세우기로 의결했다. 56함이 피처럼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침몰하는 모습을 주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지켜봤던 바로 그 장소였다.

 

4월27일. 해군은 56함을 대체할 고속 경비정(PCE) 1척과 초계호위함(PGMI) 1척을 미국으로부터 인수했다. 그날은 또 56함 격침 현장 인근 해역 DD 91함 함상에서 전몰장병 진혼제가 열린 날이었다. 침몰 직후 정부가 호언했던 ‘응분의 대가’ ‘모종의 중대 조치’는 별도로 지면에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70년대 초 해군에 입대한 장병들은 훈련조교들로부터 “56함의 복수를 위해 UDT대원들이 북한 00항에 야간 침투, 쑥대밭을 만들고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물론 확인되지도 않고 보도되지도 않은 얘기였다.

 

56함 참사는 1월 말까지는 그래도 언론에 보도됐으나 2월 들어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67년 말 어로저지선에서 조업하던 어선 39척과 어부 340여명이 납북됐을 때, 또 이듬해 해군 방송선이 납북됐을 때 56함의 기억이 다시 국민에게 살아났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지금도 동해바다 북위 38도39분45초, 동경 128도26분48초 해저에는 56함이 잠자고 있다.

 

1971년 10월15일 점심 무렵. 공수특전단과 수도경비사령부의 무장군인, 헌병대가 연 고대 서울대 등 캠퍼스에 진입했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집총한 군인들이 학교 별로 2백∼5백 명씩 물밀 듯 쏟아져 들어갔다. 군인들은 말 그대로 인정사정이 없었다. 강의실을 덮쳐 학생들을 연행하고 달아나는 학생 뒤를 쫓아가 워커 발로 까고 정강이를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1971년  위수령 발동에 아수라장이 된 대학가

 

위수령이 발동된 것이다. 양탁식 서울시장이 “데모로 흐트러진 학원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군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했고 육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렇다는 건 행정적 요식일 뿐, 실제 대학에 군 병력을 집어넣은 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이날 오전 ‘학원질서 확립을 위한 특별명령’을 발표, “교련반대를 빙자한 불법데모로 질서가 파괴된 대학에는 학원의 자유 자주 자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박대통령은 이 명령에서 “경찰은 학원 안에 들어가서라도 데모 주동학생을 색출하고 안 되면 군을 투입해서라도” 질서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학생들의 불법적 데모 성토 농성 등교거부 및 수강방해 등 난동은 일체 용납할 수 없다”며 “주동학생을 전원 잡아들여 학적에서 제적하라”고 강조했다. 마치 한 무리의 적을 일망타진, 섬멸하라는 투의 지시였으니 캠퍼스에 난입한 군인들이 물불 안 가리고 학생들을 잡아들인 건 너무나 당연했다.


무장 군·경들이 각대학에 투입되던 날의 캠퍼스
1971. 10. 15 [동아일보] 7면

 

고려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은 강의실까지 들어가 문을 부수고 학생들을 연행했다. 문이 열리지 않는 방은 유리창을 깨고 최루탄을 던져 ‘너구리 잡듯’ 학생들을 체포했다. 여학생 십여 명이 최루가스에 질식해 쓰러졌다. 놀라 도망가는 학생들을 총과 곤봉을 든 군인이 쫓느라 캠퍼스 안에는 비명과 고함이 어지러웠다. 학교주변 주민들은 높은 건물 옥상에서 ‘야수적 폭력현장’을 지켜보며 발을 동동 구르고 눈물을 훔쳤다.


연세대에서는 교련거부 단식농성을 벌이던 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며 집단폭행 당했다. 이를 항의하던 교수들도 군인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학생처장은 학생들을 모아놓고 “6.3사태 같은 일이 또 일어났다. 이젠 통곡을 해도 해결할 수 없으니 집에 가서 학교의 연락을 기다려라”며 울먹였다. 자리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서울문리대 법대와 성균관대 외대 등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교련 반대 항의 데모로 뜨겁던 대학가

 

비상에 묶인 대학가
1971. 10. 16 [경향신문] 7면


그해 대학가 데모 초점은 군사훈련(교련) 반대였다. 신학기 직전인 2월25일 당국은 교련강화 지침을 발표했다. 69년 시행 때부터 선택과목이던 교련을 교양필수로 격상했고 현역군인을 교관으로 대학에 진입시켰다. 남학생은 주 3시간 학과와 방학 집체훈련 포함 총711시간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교련은 전체수업의 20%로 졸업 때까지 7학점을 채워야 했다. 전시에도 대학 군사훈련 비중이 이렇게 높은 적은 없었다. 교수들조차 항의데모를 부추겼다. 한 대학총장은 “데모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러나 1학기 데모가 투석전으로 변하는 등 극성을 부려도 당국은 일부 대학에 잠시 휴업령을 내렸을 뿐 센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 그해 4월엔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학생들은 교련반대 데모를 벌이다 전력을 공명선거 감시 쪽으로 돌렸다. 박정희 김대중 후보가 격돌한 선거가 끝난 뒤 다시 거리로 나왔으나 정부는 역시 강경대응을 자제했다. 대신 교련을 주 2시간으로 하며 병역단축 혜택을 주는 완화 방침을 내놓았다.

 

 

이게 2학기에 학원을 초토화하려는 전략이었을까. 걷잡을 수없이 시끄럽게 만들어놓고 싹쓸이하려는 계산이 숨어있었던 것일까. 사실 정부가 내놓은 완화안도 교련을 필수과목으로 하며 현역군인 교관이 대학에 상주한다는 첫 방침에서 후퇴한 게 아니었다. ‘상아탑’에 ‘총검술’을 접목시킨 자체에 반대한 학생들이 받아들일 리 없는 안이었다. 교련을 선택과목으로 재조정하고 예비역이 교련을 전담토록 하자는 의견은 차라리 타협적이었다.

 

2학기 들어 두 달 동안 가두데모는 1백여 차례 넘게 일어났다. 국무총리가 “(교련을) 압박감 부담감 없이 체육을 한다는 마음으로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현역군인이 시간강사 급으로 30∼40명씩 진주해있던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그들을 캠퍼스 밖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교련 허수아비, 군복 화형식도 일어났다. 당시 대학생들이 징집 연기원을 낼 때는 교관으로부터 ‘교련 수강확인서’를 받도록 돼있었으니만큼 이는 제 목에 칼을 대는 경우나 마찬가지였다.


위수·휴업령 내려져 굳게 닫힌 캠퍼스
1971. 10. 16 [동아일보] 7면

 

 

 

 

계속되는 데모시위를 막기 위해 강행한 강제 징집

 

바로 이런 교관 밀어내기와 화형식이 박대통령의 분노를 촉발했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이들이 다시 총칼로 학원을 짓누르는 강수를 선택하게 빌미를 제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항의가 심하다 한들 대통령이 더 이상 대학에 “자유 자주 자치가 없다”는 말을 공언할 수 있었을까. 위수령 발동 첫날 군경은 대학에서 1616명을 연행했다. 위수령 발동 전부터 학원사찰을 통해 데모 주동자는 112명, 학내 ‘불량’서클 174개, 지하신문 20여개 등을 파악해 놓았던 즉각 이들의 검거와 해체, 와해 작업에 들어갔다.

 

훈련소에서 온 편지…입영 학생들
1971. 12. 30 [동아일보] 7면


놀라운 것은 데모 주동자급 학생들은 검거 즉시 입영영장을 발부해 군대로 끌고 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당국자들이 스스럼없이 밝히고 나선 것이었다. 위수령이 내려진 9일 동안 전국 대학에서 174명이 제적됐고 68명이 징집영장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논산훈련소 등으로 보내졌다. 가족 친지들과의 송별? 그런 건 없었다. 검거 즉시 군대로 직행했으니 매 맞지 않고 간다면 그것만이라도 감사해야할 판이었다.

 

그해 12월 송년호에서 한 신문은 ‘1971 안부- 훈련소에서 온 편지’란 특집을 실었다. 강제 징집된 71명(위수령 해제 후 피검, 징집된 학생 포함) ‘전’ 대학생들의 심정을 전한 것이었다. 당국의 눈이 무서워선지 기사는 일부 ‘개과천선한’ 학생의 얘기도 실었지만 대부분 강제 입대자들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젠 가능한 한 조용히 젊음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나 꿈과 낭만과 정열을 잃은 젊음은 추호도 갖고 싶지 않다.” “인생 제 1라운드는 실패로 끝났으나 결코 굽힐 수 없는 젊은 용기가 그립다.”

 

 

당시 강제입대자, 데모 주동자들은 훗날 ‘71 동지회’를 만들어 지금도 모임을 갖는다. 그들이 징집될 당시 야당은 “위수령을 발동해 놓고 데모 주동자를 현역병으로 데려가는 것은 신성한 병역의무를 형벌 응징수단으로 악용한 것”이라고 성토했으나 당국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문제는 위수령과 함께 징집된 학생들은 공개리에 처벌된 셈이지만 그 전에도 당국은 사찰과 협박을 통해 입대를 반대자 처벌의 도구로 악용했다는 점이다. 69년 교련 도입 때부터 반대활동을 벌인 A의 경우가 그런 사례다.

 

 

 

공무원인 아버지를 협박하며 군대 보내기도..

 

71년 봄 대학3년생이던 A는 군대에 간 학생회 간부 출신 선배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선배는 정보기관 요원으로 대학에 파견 나와 있었다. 그는 “아버지가 공무원이던데… 목이 떨어지면 자네 대학에 다닐 수 있나?”고 천연덕스레 물었다. 교련반대 기고문을 발표한 대학신문 기사뭉치를 들이밀면서였다. 아버지의 직위, 상관의 평가까지 주절거린 그는 “공무원 하나 목 치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고 협박했다. 그러면서 “아버지 좋고 아들 좋게 군대에 가라. 아니면 온 가족이 쪽박 찰 것”이라고 회유했다.


A의 아버지도 직장에서 비슷한 협박을 당했다. 그러나 아들에게 말을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해라”고 했지만 그건 군대에 가라는 것보다 더 가슴을 후비는 말이었다. A는 결국 ‘어린 나이에’ ‘가족과 가정을 위해’ 군대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며칠 전 육군의 징집 신체검사를 연기한 것이었다. 정보기관 선배에게 1년 후에나 신검을 받게 된다고 하자 “해 공군 지원병으로 가라. 아니면 아버지는 결국 잘릴 것”이라고 계속 협박했다.


위수령 발동 경위 등 밝혀
1971. 10. 22 [동아일보] 1면

 

당시 해군 지원병의 합격요건 중 하나는 좌우시력 1.0이상이었다. 안경을 쓰고도 0.5수준 시력이던 A는 당연히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러나 이튿날 대방동 해군본부에 붙은 지원병 합격자 명단에는 그의 수험번호가 끼워 넣기(∨) 표시 속에 들어가 있었다. 당국의 ‘배려’였다. 진해에서 2차 신검을 받을 때는 아예 해군본부 중사가 함께 가 시력표를 읽어주고 A는 따라 말하는 방식으로 시험에 통과했다. 그는 훈련기간은 물론 부대에 배치돼서도 시력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대학에서 엉뚱한 짓 하다’ 군대에 왔다고 걸핏하면 ‘빳다 세례’를 받은 데다 눈이 나빠 ‘고문관’ 노릇까지 하니 군대생활은 가히 ‘지옥 수준’이었다.


그가 5개월쯤 군대생활을 했을 때 위수령으로 제적된 학우들이 강제 입대했다. 당국은 그들이 군대에서 보복적 가혹행위를 당한다는 말이 나올지 모른다며 강제 징집자들에게 가급적 폭력 폭언을 하지 않도록 특별 지시했다. A도 그 혜택을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정년 때까지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A의 참 어처구니없는 입대도 40년이 지난 지금은 추억이란 수채화 속에 들어앉았다.

88 서울올림픽의 추억

그리고 정적. 10만이 들어찬 경기장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관중의 귓전엔 바로 전 태권 격파의 함성이 이명(耳鳴)처럼 울렸다. 느닷없는 고요. 사람들은 내심 술렁였다. 아니, 왜 행사를 계속하지 않지? 프로그램 실순가? 1초도 짬이 없어야 하는데… 당황하며 어리둥절한 그때. 북동쪽 출입구 풍선터널을 통해 한 작은 소년이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흰 반바지에 반팔셔츠. 하얀 모자 붉은 챙. 소년은 잠깐 관중석을 올려보더니 곧 그라운드 한가운데로 달려 나갔다. 그는 굴렁쇠를 굴리고 있었다. 파란 운동장에 하얀 점이 움직였다. 은색 원이 반짝이며 살아 굴렀다. 숨조차 멈추게 하는 기막힌 장면. 여성들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들은 눈을 크게 떴다. 모두 목을 길게 뺐다. 어떻게 해, 굴렁쇠가 쓰러질 것 같아.

 

 

 

88년 9월 17일. 세계의 잔치가 서울에서 열리다

 

딱 한번 비틀했을 뿐 소년은 그라운드 중앙까지 ‘무사히’ 달렸다. 센터 서클에서 굴렁쇠를 탁 잡더니 어깨에 걸고 애태운 관중을 향해 앙증맞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활짝 웃었다. 단 '1분의 퍼포먼스'. 봇물이 터진 듯 탄성이 쏟아졌다. 세계 50억 인구 축제의 날. 화려하고 웅장하며 역동적인 잔칫날. 그런데 꼬맹이 굴렁쇠 놀이라니. 믿기지 않는 감동이 물결쳤다.

 

1988년 9월17일 낮 서울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제24회 서울올림픽은 그렇게 사람들의 심장을 뒤흔들며 시작됐다. 태곳적 인류부터 꿈꾼 번영과 화합의 소망을 잔디밭 원 굴리기로 묘사한 걸까. 굴렁쇠는 현장 관중은 물론 TV로 개막식을 시청한 전 세계인의 가슴에 강력한 이미지를 심었다. 말 그대로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 안긴 날이었다.


88 호돌이 윤태웅군 멋진 운동선수되는게 꿈
1988. 9. 17 [경향신문] 19면

 

 쨍- 청명한 가을 날씨도 행사에 빛을 더했다. 잠실 한강을 타고 오르는 4백50척 대선단과 주선의 용고(龍鼓) 위용도 파란 하늘아래 돋보였다. 76명 파라슈터들이 잠실 상공에 만든 인간 띠 오륜기 역시 파란 하늘 바탕이어서 멋이 났다. 160개 나라 8천5백 선수들이 젊음과 우정을 뽐내고 힘과 기량을 겨룬 올림픽의 막은 그렇게 용틀임하듯 올라갔다.

 

 

 

'마하 인간' 벤 존슨 VS '갈색 탄환' 칼 루이스

 

「갈색탄환」 칼루이스, 「마하인간」 벤 존슨 "내가 최고 스프린터"
1988. 9. 22 [경향신문] 13면


당시 올림픽 경기 최대의 관심은 남자 100m 달리기였다. 캐나다의 '마하 인간' 벤 존슨과 미국의 '갈색 탄환' 칼 루이스는 개막 전부터 팽팽한 기 싸움을 벌였다. “아직까지 내 앞을 달린 인간은 없었다. "난 남의 등짝이나 보고 달린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며 신경전을 펼친 그들의 이야기는 스포츠기사로는 이례적으로 1면 톱을 장식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이스는 올림픽 두 달 전 9초78이라는 역대 최고기록을 세웠다. 비록 뒤바람이 강해 공인을 받진 못했지만 마의 9초8 벽을 깬 건 그가 최초였다. 반면 존슨은 공인 세계기록 9초83을 보유하고 있었다. 9월24일 오후 1시30분. 결승 트랙에 선 그들은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애써 상대를 무시했지만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드디어 총성. 용수철처럼 누구보다 먼저 뛰쳐나간 건 존슨이었다. 60m 지점까지 그는 다른 7명 주자를 1∼2m 앞서 나갔다. 손바닥을 밖으로 튼 기묘한 주법. 중반에 루이스가 롱 스트라이드로 따라 붙었지만 그는 틈을 주지 않았다. 무쏘처럼 숨을 내뿜으며 돌진했다. 단 46보. 9초 79. 자신의 세계기록을 0.04초 단축한 대기록. 루이스는 9초 92, 존슨에 0.13초 뒤졌다.

 

그러나 존슨의 100m 제왕 등극은 3일 천하로 끝난다. 경기 후 약물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왔고 메달은 박탈됐다. 캐나다는 물론 서방세계의 자존심도 무너졌다. 그전까지 세계 스포츠에서 약물 말썽을 일으킨 건 언제나 동구권 선수들이었다. 서방에선 "공산국가 선수들만이 지도자 동지를 의식해 약물을 쓴다."고 비아냥댔으나 존슨의 사례 앞에 할 말을 잃었다.


벤 존슨 약물복용 금메달 박탈
1988. 9. 27 [동아일보] 1면

 

 

 

 

멋과 미를 갖춘 그녀는 ‘달리는 패션모델’

 

육상3관왕 미국 그리피스 조이너
1988. 12. 14 [동아일보] 13면


남자 육상 간판인 100m가 추문에 말렸지만 여자 육상은 달랐다. ‘달리는 패션모델’ ‘세기의 스프린터’ 그리피스 조이너(미국) 덕분이었다. 그녀는 하루에 세계신기록을 두 번 세웠다. 9월29일 낮 여자 200m 준결승에서 종전 세계기록을 0.15초 단축하더니 1시간 40분 뒤 결승에선 또 0.22초를 단축했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대기록이었다.

 

100m와 400m 계주도 석권, 3관왕에 오른 그녀의 팬서비스는 그야말로 명품이었다. 짙은 화장에 대담한 노출, 길게 기른 손톱에 형형색색 매니큐어, 출렁이는 머리칼과 근육질의 야성미까지… 다른 선수들은 게임에 앞서 심호흡을 하지만 그녀는 곱게 화장을 한다. 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단 10초짜리 자신의 주파를 숨죽여 지켜보고 환호하는 관중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경기 뒤 화장이 땀으로 얼룩져 엉망이 되면 그녀는 또 화장을 고친다. 기자회견에 나설 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왜? 사랑하는 사람에 자신의 모든 걸 알려주고 더 사랑받을 수 있게 보도하는 이들이 기자니까. 그런 프로정신으로 그녀는 잠실운동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 장딴지 근육이 출렁이고 심장이 터지는 고통도 웃음으로 감추면서.

 

 

 

'우.생.순.'의 탄생 신화! 구기사상 최초의 금메달

 

육상종목은 세계의 관심을 끌었지만 한국인에게 88올림픽 최고의 감동을 선사한 건 여자 핸드볼 팀이었다.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신화가 생기기도 전의 일이었다. 9월29일 밤 수원 실내체육관. 한국 대 소련의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유고에 져 1패를 안고 결승에 올라 우승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나 경기 직전 노르웨이가 유고를 이기는 바람에 다시 소련을 이기면 우승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처음 경기는 한국의 뜻대로 풀렸다. 전반 13대 11, 후반 10분까지도 16대 12. 낙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스포츠에서 섣부른 예단은 금물. 후반 중반 9분 동안 소련에 내리 5골을 헌납해 거꾸로 패색이 짙어졌다. 이때부터 한국여인들의 독기가 나왔다. 키는 평균 10cm나 더 크고 몸집도 두 배는 됨직한 소련선수들의 전후좌우를 번개처럼 교란하며 날아 다녔다.


여자 핸드볼 구기사상 첫 금메달
1988. 9. 30 [동아일보] 1면

 

소련선수들이 북극곰이라면 한국선수들은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였다. 아니, 제비였다. 가볍게 떠오르다 어느새 다이빙하듯 몸을 던져 골대에 볼을 넣었다. 8천 관중은 실성한 것처럼 "코리아"를 외쳤다. 체육관은 땀과 열기, 함성으로 들썩이며 후끈거렸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아대는 신출귀몰의 묘기에 북극곰은 그저 허우적대기만 할뿐이었다.

 

최종 스코어 21대 19. 동점 5번, 역전 2번의 혈투가 끝났음을 알리는 버저가 울리는 순간 선수들은 그대로 코트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코칭스태프도 함께 울었다. 그리고 그 늦은 시간 전국의 가정에서 "이겼다!"는 함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한국 구기사상 최초의 금메달. 세월이 지나 '우생순' 감동을 재연할 한국여자 핸드볼 팀의 탄생신화는 그날 그렇게 씌어졌다.

 

 

 

환호와 감동, 추태와 한심..올림픽 뒷이야기

 

뒷머리 부딪치는 순간
1988. 9. 20 [동아일보] 5면


서울올림픽 감동드라마는 이뿐이 아니다. 동독의 '미녀 물개' 크리스틴 오토는 자유형 배영 접영 계영 혼계영에서 6개의 금메달을 따내 이듬해 독일 통일로 사라질 조국에 헌상했다. 불가리아에서 터키로 망명한 150cm 단구 나임 슐레이마놀루는 역도 60kg급에서 무려 6개의 세계신기록을 들어 터키에 사상 첫 금메달의 영광을 안겼다.

 

미국의 루가니스는 다이빙경기에서 뒤로 돌기를 하다 스프링보드에 부딪쳐 피를 흘리고 4바늘을 꿰맸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경기를 마쳐 다이빙 종목의 금메달 2개를 독식했다. 훗날 그는 자신이 AIDS에 걸렸음을 밝혀 환자의 피가 수영장에 퍼지면 다른 선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논란을 일으켰다. 물론 감염 등 문제는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잔칫집엔 환호와 감동만 있는 게 아니다. 눈살 찌푸리는 추태와 한심한 작태 또한 심심치 않았다.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에 오른 한국의 마지막 금메달은 누가 봐도 '훔친 게' 분명했다. 복싱 경기장에서 일어난 일. 동네북처럼 얻어맞고 얼굴이 일그러진 한국선수의 팔이 올라가는 순간 사람들은 떳떳한 패배가 창피한 승리보다 훨씬 값지다는 걸 깨달았다.

 

복싱은 그러잖아도 판정불복 링 점거 항의 파동으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됐던 판이었다. 미국의 NBC는 그걸 기화로 한국을 조롱하는 방송을 계속 내보내 외교적 마찰까지 일으켰다. 게다가 한국에 취재 온 NBC 직원들은 "올림픽 뒤 지옥에나 가라", "오 제기랄" 등의 문구를 넣고 태극기를 모독하는 티셔츠를 만들거나 입고 다녀 사람들의 감정을 극도로 상하게 했다.


미국 NBC방송 한국비난 T셔츠 주문
1988. 9. 28 [동아일보] 15면

 

 

 

웃고 울고 가슴 졸였던 그 해 가을은 행복했네

 

손에 손잡고 "서울이여 안녕"
1988. 10. 3 [경향신문] 15면


그해 국민들은 세계의 축제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했다. 승용차 홀짝제를 시행해 선수 임원들이 막히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배려했다. 기초질서도 철저히 지켰다. 심지어 소매치기들도 ‘국위선양을 위해’ 휴업을 선언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올림픽기간 16일 동안 한국을 다녀간 외국 관광객은 2백90만 명. 서울 올림픽 연 시청인원은 104억 명이었다.

 

올림픽 동안 웃고 울고 환호하며 가슴 졸였던 국민들은 '가을의 행복'이 지난 뒤 허탈감에 빠졌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졌다. 중단됐던 정쟁이 다시 재개됐다. 5공 청문회 등이 열렸고 신예 노무현 의원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살인마"라고 외치면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추기: 개막식에서 굴렁쇠를 굴린 소년은 서울 잠원초등학교 1학년 일곱 살 윤태웅 군이다.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1981년 9월30일 태어난 2천4백 명 중에서 뽑힌 ‘88 호돌이’였다. 그는 지금 배우로 성장했고 TV의 ‘1박2일’ 프로에도 출연했다.

 

소련에겐 88올림픽이 ‘소비에트 연방’ 이름으로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 되었다. 여러 개 나라로 분열했기 때문이다. 반면 동서독과 남북 예멘은 각각 다른 나라로 참가했으나 차기 올림픽 이전에 통일을 이뤘다.

 

88올림픽에 북한은 참가하지 않았다. 지금 남북한은 세계 유일 분단국가다. ‘벽을 넘어서’ ‘손에 손 잡고’ 세계평화와 화합을 제창한 서울올림픽이었지만 정작 제 국토의 화합은 일궈내지 못했다.

 

88올림픽 서울 유치

1981년 9월30일, 한밤 11시45분. 잠도 잊은 사람들이 TV 앞에 바짝 당겨 앉았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화면에 나타났다. 한손에 발표문 봉투를 든 그도 긴장한 듯 멈칫거렸다. 좌중은 목이 타는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짧지만 한없이 길게 느껴지는 정적. 그걸 깨고 초성이 센 ‘꼬부랑’ 말씨가 TV를 탔다. “쎄울… 피프티 투(52표)!”

 

 

 

서울, 나고야 누르고 올림픽 유치하다

 

사람들은 사마란치의 뒷말, “나고야 트웬티 세븐(27표)”는 거의 듣지 못했다. ‘쎄울’ 소리에 벌써 세상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진 것이다. “해냈다! 서울이다!” 자정의 어둠을 날려버리는 고함이었다. 지구의 반대쪽 서독 바덴바덴은 그때가 오후 3시45분. 거기 IOC 총회장에서 한국대표단 역시 회의장이 떠나가라 같은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겼다! 서울이다!”


세계가 깜짝 놀란 대이변이었다. 대한민국 서울과 일본 나고야가 1988년 제24회 하계올림픽 개최를 놓고 경합을 벌인 끝에 서울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 IOC위원들의 투표결과가 나올 때까지 서울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국 유일의 IOC위원 김택수마저 그날 점심때 "내 두 손에 장을 지지는 한이 있어도 서울이 이길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었다.


승리 순간의 현지
1981. 10. 1 [동아일보] 3면 

 

국내언론은 물론 외신도 나고야의 승리를 예견했다. 한국은 불과 30년 전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든 민족전쟁을 치른 데다, 여전히 휴전 상태며, 가난한 개발도상국이고, 80년엔 민주항쟁 시민을 정부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한 나라였다. 올림픽을 개최할 능력,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게 이상했다. 그런 한국이 이미 선진국 반열에 든 일본을 눌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국제 스포츠계 웃음거리가 된  88올림픽 서울 유치 선언

  

선더버드(thunderbird)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전설에 등장하는 새다. 천둥 폭풍과 함께 나타난다는 그 새의 이름을 딴 ‘선더버드 작전’이 한국 올림픽유치위원단에 내려진 절체절명의 미션이었다. ‘몸도 다하고 숨마저 목에 걸린(絶體絶命)’ 벼랑 끝 위기지만 어떻게든 올림픽을 따낼 것, 안되면 모두 현직에서 물러날 각오를 하라는 엄포가 작전이름에 숨어있었다. 실제 어떤 유치위원은 고위층으로부터 “실패하면 사표를 내쇼. 어쩌면 지중해 푸른 물이 여러분을 기다릴지 모르오.”라는 진반 농반 협박을 듣기도 했다.

 

 

88년 올림픽 서울서 연다
1981. 10. 1 [경향신문] 1면 


알고 보면 웃기는 측면이 있었다. 한국은 몇 달 전만 해도 ‘올림픽개최 신청을 어떻게 명예롭게 철회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나라였다. 내각에선 올림픽 개최 찬반론이 맞서 고성이 오갔다. 비관론자들은 “올림픽을 따기 전에 쪽박부터 먼저 찰 것”이란 말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어떻든 올림픽 신청을 해본 나라로 만족하자”는 얘기도 많았다. 총리도 부정적이었다. 사실 유치선언 직후부터 서울올림픽은 항상 '뜨거운 감자'였다.

 

1979년 10월8일. 서울시는 거창한 기자회견을 열고 88년 올림픽의 서울 유치를 선언했다. 그러나 보름 후 10월26일. 유치를 재가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고 서거했다. 나라는 거센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빠져 들었다. 민주화가 당겨지리란 기대도 있었으나 꽃은 피기도 전에 시들었다. 신군부가 전면에 등장하며 나라엔 폭풍우가 몰아쳤다.

 

80년. 5월 들어 ‘서울의 봄’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사람들이 무더기로, 한밤에 집에서 끌려갔다. 광주에선 꽃다운 젊음들이 총칼에 스러졌다. 완전무장한 군인이 제 나라 국민을 쏘고 찌르고 짓이기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계는 경악했다. 긴급조치로 국민을 재갈 물리며 정권을 이끌던 대통령이 최측근에게 살해된 게 불과 반년 전인데 이젠 잔혹한 국민 살상이라니….

 

그런 나라가 정식으로 올림픽 개최를 신청한 것 자체가 경이였다. 국제 스포츠계는 웃고 있었다. 한국이 되지 않을 일이란 걸 알면서도 ‘명분 쌓기’로 신청했다는 거였다. “아무렴 어때, 유치 경쟁하는 나라가 많아야 관심도 끌 것 아닌가.” 사마란치 등 올림픽을 이끄는 사람들 생각은 그랬다. 속마음 뿐 아니고 실제로 자기들끼리 그런 말을 하고 다녔다.


88년 올림픽 서울 유치 IOC에 공식 요청키로
1979. 10. 8 [경향신문] 1면 

 

 

 

국내에서조차 커지는 유치 철회 목소리  

 

그럼 한국은? 80년 8월 신군부의 리더 전두환 장군이 체육관선거로 대통령이 된 후 이규호 문교장관은 올림픽유치로 정통성 약한 정부의 이미지를 살리자는 생각을 했다. 박정희 시절 이미 유치선언을 했기에 IOC에 정식으로 서류만 올리면 됐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개최도시인 서울이 그러잖아도 적자인 시 살림이 거덜 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80년 10월27일엔 아예 그런 내용의 공문을 문교부에 보냈다.

 

한국 유치철회 소문만
1988. 2. 19 [경향신문] 9면 


그럼에도 전 대통령은 10월 28일 이 장관에게 올림픽 유치신청을 지시했다. 그는 “전임 대통령이 결심한 사항을 특별한 사유 없이 변경해선 안 된다” 며 “역사적 사업을 추진도 안 해보고 패배의식에 젖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공식입장이야 그랬지만 전 대통령은 총칼과 폭력으로 세운 ‘얼룩진 정권’을 올림픽 개최를 통해 세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다. 아무튼 유치신청을 했으나 난관은 여전히 첩첩산중이었다.

 

81년 4월 IOC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집행위원회 회의에 한국이 참석해 올림픽 준비상황을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또 9월 총회를 여는 바덴바덴 시는 총회에 보낼 한국대표단과 기자단 숫자를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한국은 이 두 요구를 다 묵살했다. 무슨 배짱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부 안에서 유치신청을 포기하자는 의견이 비등했기 때문이었다. 유치 포기를 하자는 판에 무슨 개최준비를 설명하며 총회대표단 숫자를 통보하겠는가.

 

 

 

지더라도 망신은 당하지 말자는 절박감으로..

 

당시 남덕우 총리 주재로 열린 정부 올림픽 대책위에서는 총리 경제부총리 등 대부분이 한 목소리로 유치 철회를 주장했다. 80년 경제성장률이 -4.8%를 기록했는데 올림픽까지 치른다면 재정이 완전 파탄 날 것이란 주장이었다. 또 일본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해 봤자 형편없이 져 망신당할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결국 일본에 밀사를 보내 우리가 올림픽을 포기하는 대신 86년 아시안게임을 열 수 있게 도와달라는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그러나 이 협상도 무참히 깨졌다. 일본 측이야 나고야 승리가 확실한데 공연히 한국과 뒷구멍 거래를 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이미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유치신청을 철회할 거란 소문이 파다했다. IOC 사무처가 개최준비 설명조차 못하는 서울을 후보도시에서 제외하려 했으나 사마란치 위원장이 “어차피 나고야로 가지만 그래도 다른 도시와 경쟁하다 낙점 받는 모양을 연출하는 게 좋다” 며 살려줬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철회제의' 日선 시큰둥
1988. 2. 27 [경향신문] 9면 

 

이런 창피한 장면이 겹쳤기에 바덴바덴의 승리를 따냈는지 모른다. 나고야와 표 대결을 하면 하프스코어도 안될 거란 위기감, 질 때 지더라도 노력해 망신은 당하지 말자는 절박감이 정부 안에 스며들었다. 우선 재외공관이 모두 나서 IOC 위원들을 포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한국이 해외에서 수주활동을 할 때 쓰는 ‘수법’도 쓰고 재계의 도움을 받으며 국제 스포츠계에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사람 역시 다 동원하자는 의견이 속속 나왔다.

 

 

 

숨막히는 드라마, 바덴바덴의 열흘

 

그렇긴 해도 81년 9월18일 대표단이 독일로 떠나는 날까지도 한국이 승리해 올림픽 개최권을 따리라고 믿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주영 현대, 김우중 대우,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과 조중훈 KAL사장, 유창순 무역협회장, 조상호 한국올림픽위원장, 김택수 IOC위원,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등 공식대표단은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도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에 박종규 전 대한체육회장(피스톨 박·전 청와대 경호실장)이 공식 대표단원도 아니면서 끼어있었으나 누구도 그에 주목하지 않았다.

 
선더버드 작전은 이들이 9월20일 바덴바덴에 도착해 9월30일 국제 IOC위원들이 올림픽 개최도시 선정투표를 하는 날까지 열흘 동안 전개됐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했기에 절대 열세의 표 대결을 막판 대역전시키며 승리할 수 있었을까. 기적을 잉태한 바덴바덴의 열흘, 그건 정말로 숨 막히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88올림픽 서울 유치2

바덴바덴은 19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를 결정, 한국인에게 친숙해진 도시다. 하지만 81년 9월20일 한국 올림픽 유치단이 도착했을 당시 그곳 분위기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숙소를 구할 수 없었다. 유치위원 및 지원단 90명, 기자단 15명 등 대부대가 몰려가자 IOC 사무처에선 “도대체 이 자들이 뭐 하러 왔나?”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 올림픽 유치단, 바덴바덴에 도착했지만..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IOC가 올림픽 개최준비 상황을 보고하라고 요구했을 때 아무 설명 없이 깔아뭉갠 나라였다. 바덴바덴 숙소선정 등 편의제공을 위해 유치단 명단과 숫자를 사전에 알려달라고 했을 때도 시치미를 떼고 무시했다. 그런 나라가 개최지결정 총회를 열려는 마당에 떼로 몰려와 숙소를 요구한다? IOC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ID(신원 확인)카드를 내준 것만도 '크게' 봐준 거였다.


한국은 회의장 부근에 숙소를 얻지 못했다. 변두리로 나가 숲속 산장 형 호텔을 겨우 찾아 여장을 풀었다. 조상호 한국올림픽위원장은 IOC 사마란치 위원장, 베를리우 사무총장을 찾아가 인사 겸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그들은 '개 닭 보듯' 했다. 서독 언론은 “한국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했지만 올림픽 유치는 웃기는 얘기다. (사실상 나고야로 결정됐고 한국은)개최지 결정투표 때 몇 표를 얻느냐만 관심”이란 요지의 기사를 썼다.


올림픽 유치 '바덴바덴 드라마'
1988. 6. 1 [경향신문] 11면 

 

 

현지인은 싸늘하고, 주최 측은 얕잡아보고, 제대로 된 숙소도 없고, 언론은 놀리고… 이러면 분한 마음에 "에잇, 한 번 해보자!"는 게 한국인 기질인가. 한국의 올림픽 유치단은 독이 오를 대로 올랐다. 특히 정주영 유치위원장은 분을 참지 못했다. 서울에서부터 다들 '안 된다' 타령하는 게 싫어 "난관은 넘으라고 있는 거다.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소리 하지마라"며 위원장 자리를 맡았던 그다. "무조건 이겨야한다"고 결기를 다졌지만 뾰족 수가 마땅치 않긴 그도 마찬가지였다.


예산이 없다는 말에 사재까지 털었지만 시계(視界)는 참으로 깜깜 제로였다. 유치단 사이에서 "돈과 여자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IOC 위원들이라고 국제신사만 있다더냐?"는 얘기도 나왔지만 답답한 마음에 나온 황당한 아이디어일 뿐이었다. '나고야와의 표 대결에서 국제 망신만 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 대처론도 슬슬 머리를 들어 승부욕이 강한 그는 속마음만 끓이고 있었다.

 

 

 

아디다스 회장과 극비회동을 통한 협력약속

 

서울올림픽 투입·산출의 백서
1988. 9. 19 [매일경제] 19면


이때 박종규 전 대한체육회장은 아디다스의 홀스트 다슬러 회장을 만나고 있었다. 국제 스포츠계 '큰손'으로 아버지 아디 다슬러(그의 이름과 성의 첫 3글자씩을 딴 게 '아디다스'다)의 사업을 세계화하는 데 수완을 발휘한 그는 국제경기단체 수장들을 수하처럼 잡고 있었다. 사마란치는 물론 중남미의 바스케스 세계올림픽연합(ANOC)회장, 아벨란제 국제축구연맹(FIFA)회장 등이 다슬러의 도움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당시 IOC가 상업적으로 타락했다는 얘기를 들은 건 다슬러 때문이었고 그만큼 그의 영향력은 컸다.


박종규가 그를 만난 것은 그러니까 ‘한방’을 꿈꾼 거였다. 그게 천둥을 몰고 오는 '선더버드 작전'의 요체였다. 박종규는 박정희대통령에게 서울올림픽 유치를 끈질기게 설득해 성사시킨 사람이다. 박대통령의 죽음으로 유치계획이 공중에 뜨고 자신도 초야에 묻히는 신세가 됐지만 그는 끝까지 꿈을 버리지 않았다. 공식대표단도 아닌 그가 민간유치단에 합류한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바스케스와의 막역한 관계를 업고 '큰손' 다슬러를 접촉하면 사마란치도 움직일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박종규와 다슬러는 결국 극비회동을 통해 '서울올림픽 협력'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진다. 다슬러가 IOC위원 40명의 표를 서울에 몰아주는 대신 한국이 그의 사업권을 보증했다는 설이 돌았다. 올림픽에 걸린 이권 일부를 다슬러에게 넘기는 뒷거래가 성립됐다는 얘기였다. 다슬러는 겉보기엔 시골 신발가게 주인 같지만 수완 덩어리 국제 장사꾼이다. 올림픽 광고권, 협찬사 선정권 등 약속 없이 개도국이자 분단국이며 휴전중인 한국의 유치를 도와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정주영은 박종규의 신원보증까지 서주지 않았던가.

 

 

 

한국, 미인계와 꽃선물까지 ‘지극정성’

 

물론 다슬러의 도움만으로 한국이 올림픽 유치라는 큰 떡을 먹은 건 아니었다. 유치위원들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유치단이 바덴바덴에 도착한 이틀 후인 9월22일 서울올림픽 유치전시관 개관식이 열렸다. 옛 바덴바덴 기차역에 차린 전시관에선 미스코리아 출신 3명과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5명이 안내역을 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나긋나긋 미소 지으며 유창한 영불어로 설명하는 한국관은 금세 인기를 독차지했다. IOC 위원들 중엔 몇 번이고 한국관을 찾은 이도 적잖았다.


그런데 이 개관식에 한국 IOC위원 김택수의 모습이 안 보였다. 수배해보니 그는 그 시간 파리에 있었다. 본국의 긴급공문을 받고서야 황급히 바덴바덴에 돌아온 김택수에게 정주영이 넌지시 물었다. "각국 IOC위원에게 김 위원 명의로 꽃바구니를 보내고 싶은데…" 그러나 김택수는 고개를 저었다. 국제 명사인 IOC위원들에게 그런 유치한 공세는 격에 안 맞고 더구나 자신은 '쪽이 팔려'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거였다.


"한국이 미인계를 쓴다"
1988. 6. 2 [경향신문] 11면 

 

"함자 위원에 국빈 대접"
1988. 6. 16 [경향신문] 11면 


그러나 이튿날부터 80명 IOC 위원들 방에는 소담한 꽃바구니들이 배달되기 시작했다. 그 안엔 문안인사를 적은 예쁜 카드가 들어 있었다. 물론 발신인은 김택수가 아니었다. 조상호 한국올림픽위원장과 정주영 서울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 명의였다. 매일 아침 IOC위원들은 한국인만 보면 "꽃이 참 예쁘다. 한국인들은 마음이 고운 사람들"이라고 추켜세웠다. 묻지도 않았는데 "전시관도 서울이 나고야보다 훨씬 낫다. 상냥하고 미인도 많다."며 웃기도 했다. 마른 땅에 싹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아시아 스포츠계 거물이자 말레이시아 IOC위원인 함자는 바덴바덴에 오지 않았다. 한쪽 발을 다쳐 거동이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일본보다 한국에 가까운 그가 오지 않으면 1표를 잃는다고 판단한 유치단은 본국에 '함자 특별수송 작전'을 요청했다. 주 말레이시아 대사가 페낭 휴양지에 머물던 함자를 찾아가 호소했다. 함자가 탄 비행기가 바덴바덴에 가는 도중 기착지마다 한국외교관이 찾아가 인사를 하고 매우 정중하게 "아픈 발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바덴바덴에서 그는 한국 전도사가 됐다.

 

 

 

투표 하루전 유치도시 설명회에서 까지도..

 

물밑 한국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 애 쓰는 동안에도 일본은 느긋했다. 나고야가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공연히 안달 떨 필요가 없었다. 일부 표를 깎아먹는 언동이 있었으나 까짓 몇 표는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일본은 새 IOC위원으로 쿠웨이트의 셰이크 파하드가 추천되자 "36세 어린 바람둥이를 국제 명망가들이 모인 IOC위원으로 선정할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했다. 중요한 투표를 앞두고 해선 안 될 망언이었다. 한국에 부정적이던 파하드는 일본을 더 미워하게 됐다.

 

유럽인들의 변화도 감지됐다.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으로 잿더미에서 부활한 일본이 언제부터 유럽과 대등한 선진국이 됐느냐는 말이 나돌았다. '경제 동물'에게 두 번씩이나 (64년 동경개최에 이어 88년 나고야 신청) 올림픽 개최권을 줄 필요가 있느냐는 쑥덕거림도 있었다. 어떤 유럽위원은 한국 유치단에게 "아프리카 표를 잡아라. 거기 위원들에게 한국방문 비행기 1등석 티켓을 주면 호감을 살 것"이란 귀띔도 했다. 물론 그의 말은 실행됐다.


파하드는 나어린 돈환
1988. 6. 29 [경향신문] 11면 

 

AP통신 「백중세」 보도
1988. 8. 4 [경향신문] 11면 


9월29일. 개최지 결정투표를 하루 앞두고 유치도시 설명회가 열렸다. 나고야는 이미 승리를 확신한 듯 대충 설명을 끝냈다. 한국은 "올림픽이 언제나 부자만의 잔치일 수는 없다. 가난한 나라에게도 기회를 주어 화합과 번영의 기틀을 마련해주자"는 걸 새삼 강조했다. 그날 저녁 한국유치위원단이 수뇌회의를 갖고 표 분석을 했다. 서울이 40표, 나고야 25표라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나 우리만의 손가락 셈법, 믿을 건 못됐다. 밤새 더 많은 IOC위원을 만나 마지막까지 득표몰이를 하자고 다짐한 뒤 회의는 끝났다.


드디어 30일 오후 3시 45분. 사마란치 위원장은 "쎄울 52, 나고야 27"이란 표결결과를 발표하고 자신도 못 믿겠다는 듯 다시 쪽지를 내려 봤다. 그리고 좀 전보다 더 큰소리로 "쎄울, 꼬레아!"라고 외쳤다. 바덴바덴의 기적, 단 열흘의 역전 작전이 대미를 장식하는 순간이었다. 너무 기쁘면 눈물이 난다던가. 춤추고 환호하던 한국인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엉엉 우는 사람도 있었다. 사마란치는 후일 "한국인의 열정이 신화를 창조했다. 일본에는 그것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추기: 84년 IOC는 한국의 정정불안을 이유로 서울의 올림픽 개최권을 박탈하려 했다. 노태우 당시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은 로잔 집행위에서 "만약 개최지를 변경하면 잠실 올림픽스타디움에 IOC 위원들의 무덤을 만들겠다. 거기 묘비에는 IOC의 과오를 기록하고 자손만대로 그 과오를 기억하게 만들겠다."고 말했다.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서구가, 84년 LA올림픽은 공산권이 외면한 반쪽 대회였다. 88년 서울은 일부 행사 미숙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벽을 넘어서' '손에 손 잡고' 치른 화합의 무대였다. 한국은 그걸 계기로 선진국 문턱에 다가갔다.

 

난관은 넘으라고 있는 것이라는 한국인의 불굴정신은 결국 88올림픽 이전에 민주화를 달성하는 근본 힘이 되었다.

부끄러운 한국의 밤

'그 시절 그 이야기'엔 자랑스러운 장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혀를 물어 아픔을 삭이고 수치심에 낯붉히며 몸을 떨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라를 뺏기고 동족전쟁도 치렀지만 짧은 시간에 고도성장을 이루다보니 그 뒤안길에 진창은 오죽 많았겠는가. 눈물로 닦기 힘든 수모를 또 얼마나 견뎌야 했겠는가. 1970년대 이른바 '기생 관광'은 수치스럽지만 잊어선 안 될 현대사의 치부요, 진창으로 기록돼있다.

 

 

 

체면도 염치도 없이 '기생 관광'에 오른 일본인들

 

 

박정희대통령이 김재규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서거하기 하루 전인 1979년 10월25일. 서울 여의도의 한 호텔 객실에서 40대 일본인이 한국인 호스티스 L양(23)을 살해하고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자살기도 전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유서를 써 객실 창문 옆에 남겨놓았다. 빗나간 사랑과 살인을 변명하는, 치기어린 넋두리였다.

 

 

 

"우리는 천국에서 결혼한다. 천국엔 국경이 없다… L은 나와 반지까지 교환하며 결혼을 약속해놓고 내가 준 결혼비용을 다른 남자와 다 써버렸다. 기생의 말을 믿은 내가 바보다… 경성특별시 직원님, 수고스럽지만 우리 두 사람 시체를 무연고자 묘지에 함께 묻어주십시오…"

 

일본에서 선박소개업을 하는 기요타(44)는 4개월 전 단체관광을 와 요정에서 L양을 만났다. 닷새를 L양과 함께 보낸 기요타는 그 후 매달 입국해 그녀를 찾았고 9월에는 이혼증명까지 떼어와 보여주며 결혼을 요구했다. 그러나 L양은 성격이 포악한 그와 맺어질 마음이 없었다. 결혼비용으로 1백만 엔을 받았지만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그예 변을 당한 것이다. 기생관광으로 맺어진 욕정과 돈의 변주곡이 빚은 치정살인이었다.


일본인은 호색동물
1973. 7. 10 [동아일보] 7면

 

 

 

70년대 초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의 '섹스 관광'은 한국의 밤을 마비시켰다. 그즈음 서울의 관광지는 어디나 일본인으로 득실거렸다. 일본의 일용잡급이나 막 노동자 수입으로도 한국에 오면 한껏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엔화 가치가 그만큼 높았다. 제 나라에서는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는 푼돈을 나부끼며 허세를 부렸다. 체면도 염치도 없었다. 아니, 그런 걸 차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일본 돈 위세로 최고의 향락을 누리기 위해 한국을 찾은 거니까.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일본인 관광 한국의 실상
1973. 7. 13 [동아일보] 5면


72년 일본교통공사가 발행한 관광안내서에 "한국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욕망을 충족시키는 나라"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 관광회사들도 "한국에선 하루 30달러만 쓰면 최고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며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향락을 누리는 곳, 한국 유객작전을 폈다. 관광단 모집 명칭부터 아예 '기생파티 관광단 모집'이라고 한 곳이 많았다. 흥청망청 밤마다 섹스 파티를 벌인다는 노골적 표현만 안 했을 뿐 한국만 가면 바로 기생을 끼고 놀 수 있으며 매매춘도 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60년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도쿄올림픽도 성공적으로 치른 일본은 일찌감치 자국민 해외여행을 자유화시켰다. 일본 관광단이 해외로 쏟아져 나오며 그 유별난 행태가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40-50명 대부대가 '깃발' 든 인솔자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단체로 매매춘에 나서는 모습도 보도됐다. "돈만 아는 '경제 동물'이 돈을 좀 벌자 '섹스 동물'이 되었다"는 비난이 높아졌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침공피해를 입은 나라들은 그들의 새로운 '섹스 침공'에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1972년. 일본은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대만은 그동안 일본인들의 은밀한 섹스 여행지 노릇을 해왔던 곳. 지리적으로 가깝고 비용면에서도 별 부담이 없던 관광지 한 곳을 잃자 일본 여행사들은 그 대안으로 바로 한국을 점찍었다. 일본인들이 선망하는 '게이샤' 즉 기생을 한국관광 핵심 포인트로 잡아 선전을 시작했다. 5만 엔 정도를 들고 2박3일 한국여행에 나서는 일본 중년남자가 속속 모였다. 72년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의 80%는 아내나 가족동반이 아닌 나 홀로 중년남성들이었다.

 

일본의 한국 기생관광 러시는 많은 이의 분노를 자아냈다. 식민지배의 한이 가시지 않은데다 한일국교정상화마저 석연치 않게 이뤄졌다고 믿는 이들이 특히 분노했다. 언론도 비판에 앞장섰다. 관광수입이 주요 외화 획득원이 된 데에는 박수를 치면서도 "아무리 관광을 보이지 않는 무역이요, 달러 획득의 지름길이라 한들 일본인에게 우리 여인의 정조를 상품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관광망국의 우'를 범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미풍한국 흐리는 외빈접대
1971. 11. 25 [동아일보] 7면

 

 

 

 

한 푼의 외화가 더 중요했던 정부는 ‘수수방관’

 

 

접객여성 등록증의 허실
1972. 10. 5 [경향신문] 5면


72년 중반 무렵부터 신문들은 일본인들의 매춘관광 실태를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관광단 뒤를 쫓으며 르포기사를 쓴 신문도 있었다. "한국관광 첫날, 낮에 고궁 몇 군데를 대충 둘러본 뒤 바로 관광요정으로 향한다. 1부에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인들이 나와 제비뽑기로 파트너를 정한다. 2부에선 서먹함을 감추려고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운다. 밤 9시쯤 3부가 시작된다. 바로 아가씨들과 호텔로 동행하는 것이다."

 

일본의 한 주간지는 자국민 섹스관광 실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50명 단체관광객이 모두 한 명씩 아가씨를 동반하고 희희낙락하며 호텔 엘리베이터에 몰려드는 꼴은 러시아워의 전철 정거장을 연상케 한다." 이 잡지는 "관광객은 원하는 대로 몇 번이고 즐길 수 있다. 기생은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는 낯 뜨거운 코멘트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당시 미국의 시사 잡지 타임도 특집기사를 통해 "한국이 일본 호색한들의 도락장이 되었다"고 개탄할 지경이었다.

 

 

 

일본인들은 매너도 엉망이었다. 고궁 담벼락에 오줌을 누는 사람, 호텔 로비를 맨발로 다니거나 욕실 옷을 입은 채 거리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구두를 벗어드는가 하면 모든 층 단추를 눌러 엘리베이터가 설 때마다 시시덕거리는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인간이 갖가지 추태를 부렸다. 어느 칼럼니스트는 일단의 일본관광객이 술이 취해 목청껏 일본 군가를 부르는 걸 듣고는 "이런 걸 방관하는 한국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된 나라냐?"며 울분을 터트리기도 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한국 정부는 손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방관하며 외화수입이 느는 것만 즐기고 있었다.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집행하는 정부에겐 당장 한 푼의 외화가 더 중요했다. 경제부처는 물론 모든 장관들은 "적극적 외화획득이 곧 애국"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여기에 고무되어서 일까, 기생관광에 종사하는 어느 여성이 외신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자신이나 가족,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외화가 필요합니다."고 말해 화제가 되었다.


관광지대의 섹스 오염
1981. 8. 14 [경향신문] 3면

 

 

 

정부가 기생관광을 국제매춘보다 외화획득의 발판쯤으로 생각하다보니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숫자도 늘었다. 73년 여름 로이터통신은 "한국관광공사엔 안내양이 1천5백 명으로 등록돼 있지만 8천 명이 더 일본인 접대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에는 '요정 근무, 초보 우대, 옷 선불 제공' '관광호텔 근무, 초보 환영, 월수 25만 보장' 같은 광고가 심심치 않게 실렸다. 서울 풍속도 연재소설을 쓴 한 작가는 일본인을 상대로 매춘하는 여성을 '단순 매춘부' '콜 걸' '현지처' '고급 계약자'로 구분해 화제가 되었다.

 

 

 

 

"정신 부패하고 도덕 타락하면서 달러 벌어 뭐하나"

 

 

한해 10만 미만이던 일본 관광객이 근 50만 명으로 급증한 73년 여성계에서 기생관광 반대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한국교회 여성연합회 등이 일본의 기독부인회 등과 연대해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벌였다. 12월19일 이화여대생들이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섹스 애니멀 고 홈'이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이날 나눠준 유인물에서 "정신은 부패하고 도덕은 타락하면서 달러는 벌어 뭐하느냐" "내 조국을 일본남성의 유곽지대로 만들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여성운동 차원서 기생관광 정화를"
1983. 8. 3 [경향신문] 7면


12월 22일에는 서울대 기독학생회원들이 일본대사관에 들어가 매춘 관광 반대 구호를 외쳤다. 25일에는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22개 일본 여성단체가 연합한 데모가 벌어졌다. 부인들은 '한국에 대한 섹스 침략 반대' '기생관광을 위한 한국여행은 집어치워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본 남성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외신들이 이날 피켓 데모를 긴급기사로 타전한 탓에 세계는 다시 한 번 추한 일본인들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정도가 다였다. 여성계의 반대운동이 아무리 거세도 한번 시작한 일본의 한국 섹스관광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물론 외화 획득을 통한 경제발전 구호만을 꿰고 있던 정부도 일본인의 섹스 관광을 막을 의도가 전혀 없었다.

 

74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대통령부인 육영수여사가 재일본 조총련계 문세광의 총탄에 쓰러졌다. 그리고 10여일 후 30대 일본인 주부가 아파트에서 피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 경찰은 육 여사 저격에 분노한 애국단체 회원이 불특정 일본인을 보복 살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피살자 남편인 일본 상사원의 한국인 현지처가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다시 한국에서 무절제하게 놀아나고 있는 일본인 행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당시 한국에 상주하는 일본인 1천 명 중 독신자가 7백 명이고 그 중 5백 명이 현지처와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경찰은 추산했다. 80년대 초에는 한국 상주 일본인은 약 3천 명이었고 그 중 가족을 동반한 경우는 2백40명에 불과했다. 79년 뉴욕타임스는 일본의 섹스관광이 동남아에서 주로 서울 타이페이 방콕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도하며 50만 명의 일본인이 서울을 찾는데 그 중 여성은 3만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리영희는 70년대 중반에 낸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일본인 섹스관광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정부나 국가가 그 여성국민에게 통행금지 면책특권을 주면서까지 외국인 사나이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은, 딸을 바치고 그 대가로 부자가 되는 아비와 얼마나 도덕적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 돈으로 국민이 얼마나 부해지며 국가가 얼마나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지…"


기생관광 다시활개 요정마다 100여명씩
1983. 3. 25 [동아일보] 7면

 

“장독대를 없애라!”

요즘은 '장독대'라면 "뭐지?"라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아예 본 적이 없다는 이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장류를 담은 독이나 항아리를 놓아두는 곳"이 장독대의 사전적 풀이다. 그러나 그것으론 맛이 없다. 장독대는 우리네 삶의 큰 터전이었다. 마음의 고향이고 믿음의 성소(聖所)며 맛의 원천이고 살림 규모의 기준이었다. 과장어법이 아니다. 장독대는 그 역할은 물론, 그 이상의 것까지 수십 수백 가지를 한국인에게 제공해 왔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정성, 계절의 바뀜이 있다

 

장독대는 우선 어머니의 무대다. 한 손으론 치마폭을 쥐고, 한 손엔 간장 뜰 바가지를 들고 장독대를 오르는 어머니 모습은 우리네 일상이었다. 정안수를 떠놓고 촛불 하나 켜놓고 "오직 자식 하나 잘되게 해 달라"며 비는 곳도 장독대였다. 혼담이 오가면 사람들은 집안 장독대부터 보았다. 큰 독과 가운데 중들이, 작은 항아리가 제대로 갖춰졌나 살펴 살림의 규모와 본때를 알아챘다. 장맛이 나쁘면 "집안 인심이 사납다", 장이 뒤집히거나 항아리가 깨지면 "변고가 닥칠 것"이라고 걱정했다.

 

계절의 바뀜도 사람들은 거기서 느꼈다. 항아리뚜껑에 서리가 앉으면 가을이 지나감을 알았다. 지붕 위와 처마 밑, 장독대와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 차이를 들으며 여름장마의 지루함을 이겼다. 장독대 옆 봉숭아 채송화가 움을 틔우면 봄이 왔고, 갈색 독 사이로 흰 날 것이 내리면 눈 오는 겨울이 왔음을 실감했다. 아이들은 거기서 술래잡기를 하고 항아리 위를 폴짝폴짝 뛰며 키가 자라는 걸 실감했다. 단소하고 각진 아파트 문화가 들어왔을 때 다른 건 다 버려도 유독 장독대만 버리지 못한 것은 그런 때문이었다.

 

그 장독대를 없애자는 공격적 캠페인이 벌어진 건 1960년대 후반이다. 돌격적 서울건설을 진두지휘한 '불도저 시장' 김현옥이 앞장섰다. 당시 서울엔 산비탈이건 개천 옆이건 어디나 판잣집이 즐비했다. 전쟁 후유증이었다. '도시 미관'을 해치는 건 물론 한번 불이 나면 수십 채를 태워 재산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김 시장은 그걸 깨끗이 쓸어버리고 싶었다. 판자촌 자리에 아파트를 지으면 될 것이었다. 육군준장으로 예편, 부산시장을 하던 그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로 부른 것도 바로 그걸 하라는 뜻이었다.


앞서야할 유해식품 근절
1969.6. 3 [매일경제] 5면

 

68년 1월9일. 김 시장은 연두회견을 갖고 "대규모 김치 간장 된장공장을 육성해 장독대를 차츰 없애는 방향으로 시정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그는 '장독대 없애기 운동'으로 명명한 이 캠페인을 서울시가 3개년 계획으로 추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보름 후 서울시는 1억 원 규모의 민간자본을 유치, 김치공장을 세우기로 하고 공장설립 희망자를 공모했다. 공장이 생기면 그 해 서울시민의 5%인 20만, 69년엔 15% 60만, 그리고 70년엔 30%인 120만 명이 김칫독에 묻지 않은 공장 김치를 먹게 된다는 계산이었다.

 

 

 

장독대 없애기 계획의 목적은 '아파트 건설'

 

당시 김치공장은 인천 나주 등지에 있었는데 거의 전량을 베트남 파견 군대에 납품하고 있었다. 국내에선 공장김치 수요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가정에선 100% 직접 담은 김장김치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는 왜 느닷없이 김치공장을 세우고 간장 된장공장도 육성하겠다며 설친 것일까. 경제개발계획마냥 장독대 없애기 3개년 계획까지 세우고 시민들을 몰아붙인 것일까. 답은 아파트 건설에 있었다. 판자촌 15만 채를 헐고 아파트를 지어 입주시키려 했지만 당시 서울사람들은 시큰둥했다. 왜? "장독대가 없으니까."

 

아파트 생활 좋은 점 나쁜 점
1963. 3. 28 [동아일보] 7면


물론, 장독대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민들이 아파트를 외면한 건 아니다. 당시 서민 아파트에 살던 사람들의 불만 조사를 해보면 제일 큰 것은 뜰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음이 고층을 걸어 오르내리기 힘든 점, 서로의 살림을 지켜보는 시선, 정전 때의 사고위험, 장독대와 빨래널이 설치가 불편한 점 순이었다. 뜰이 없는 것과 장독대, 빨래널이 문제는 사실상 연결된 것이니 그게 가장 큰 이유랄 수 있었다. 장독대가 아파트 문화 확산의 걸림돌로 일정부분 작용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실례도 있었다. 50년대 후반, 60년대 초 아파트 건설업자들은 분양을 원활히 하기 위해 "각종 식품제조 공장을 아파트 옆에 지어 통조림을 중심으로 한 식생활 개선을 도모하겠다."고 선전했다. "아파트 단지 안에 공동 장독대를 만들며 세대별 개인 장독대 설치도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장맛 두고 싸운다."는 옛말이 있듯 사람들은 공동 장독대니 베란다 장독대에 별 감동을 받지 못했다. 대규모 아파트 건설을 벌인 김 시장도 이 점을 우려해 '변죽 울리기'로 장독대 없애기 운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여름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서울 주부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빨래널이에 걸린 옷가지를 잽싸게 걷는 것이고 둘째가 햇볕을 쬐기 위해 열어놓은 간장 된장독 뚜껑을 닫는 일이었다. 신문들은 70년대 후반까지도 동네별 살충제 소독약 살포시간을 게재, 장독대 뚜껑을 닫는데 차질이 없도록 배려했다. 거의 모든 집이 반 지하 광과 옥상 장독대를 갖고 있었으니 당연한 서비스였다. 봄만 되면 '장독대 제대로 청소하는 법' 같은 알뜰살림 기사도 빼놓지 않고 실었다.

 

그만큼 장독대는 시민 살림 중심에 있었다. 그뿐인가. 우리네 기원 문화의 뿌리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장가간 아들이 손을 못 보면 간장독에 붉은 고추를 맨 새끼를 두르고 아이를 기원했다. 해외 원정경기에 나선 선수의 부모들도 장독대에서 승리를 빌었고 납북 어부 가족들도 장독대 곁을 떠나지 않았다. 동짓날이면 집집마다 팥죽 한 그릇씩을 장독 위에 얹어놔 "집안에 변고가 없기를" 빌었다. 서울시가 없애기 운동을 한다고 쉽게 없어질 장독대문화가 아니었다. 아파트 입주민들도 베란다에는 꼭 장독대를 두었다.


공장제품 기피 도시인들의 장류·김치 소비경향
1972. 2. 24 [경향신문] 5면

 

 

 

설상가상 와우아파트 붕괴 책임까지 덮어쓰다

 

와우 시민 어파트 도괴
1970. 4. 8 [동아일보] 7면


그러던 70년 4월8일 새벽 6시 반.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와우아파트 한 동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 아파트 주민 33명과 아파트 단지 밑 판자촌 주민 1명이 매몰돼 숨졌다. 판자촌 철거, 아파트 문화 조기정착에 집착한 서울시 정책이 부실공사를 불러온 탓이었다. 이 아파트는 착공 6개월 만에 준공하고 준공 3개월 만에 무너져 내렸다. 골조조차 제대로 쓰지 않아 무너졌지만 이 사고 탓에 많은 아파트 주민들이 또 '장독대 없애기'의 희생자가 되었다.

 

시민아파트를 관리하던 서울시는 장독대 무게 때문에 와우아파트가 무너진 양 호들갑을 떨었다. 시민아파트마다 공문을 보내 "하루빨리 장독대를 없애라"고 지시했다. 붕괴사고에 놀란 고위 공무원들이 다른 아파트 시찰이라도 나갈라치면 구청 동사무소 직원들이 나와 장독대가 있나 없나를 조사했다. 주민들은 된장 고추장 항아리를 안방 이불 밑이나 화장실 변기 옆에 숨기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당장 서울시로 사람들이 몰려갔겠지만 당시 아파트 주민들은 공무원 위세에 떨며 장독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청계천 3.1고가도로 변 3.1아파트에 살던 주민들은 더 심한 꼴도 당했다. 고가도로를 달리던 차안에서 아파트 베란다를 본 고위층이 "아직도 장독대를 저런 곳에다 두나?" 한마디를 한 것 때문에 서울시가 모든 집 베란다를 1.5mm 두께의 회색철판으로 가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즈음 서울시는 아예 '건축 행정 쇄신책'을 발표하며 간선도로변 건물의 장독대 설치와 빨래 널기를 금지시켰다.

 

서울 중심지를 '집단 미관지구'와 '노선 미관지구'로 지정하고 그 안에서는 "세탁물 진열이나 철조망 장독대 및 이와 비슷한 공작물을 외부에 노출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또 "전면의 도로에서 실내가 들여다보일 때는 이를 막는 시설을 하도록" 강제했다.


수난속의 장독대 시민 아파트
1971. 4. 12 [경향신문] 7면

 

 

 

여러분 집에는 낭만이 깃든 장독대가 있습니까?

 

이제 장독대는 한마디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시민들은 여전히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신문 인터뷰에서 한 주부는 그 이유를 "담가 먹는 장류의 맛도 맛이지만 독 속에 저장하는 간장 고추장이 없으면 생활 한구석이 빈 듯 허전하다"고 했다. 다른 주부는 "각종 불량식품이 판치는 세상에 내가 만든 장을 못 먹게 해서야 되느냐?"고 불만을 털어놨다. 어느 신문은 "크기와 모양 무늬가 다른 독을 모으는 것이 어느새 주부들의 낙이요, 취미로 자리 잡았는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멋 테마에세이 시리즈 장독대
1982. 5. 17 [매일경제] 9면


1978년. '가정주부들의 장독대 왕래 가사노동'에 관한 이색 석사논문이 신문에 소개됐다. 논문에 따르면 서울주부들은 부엌과 장독대 거리가 평균 10보이며 2, 3일에 한번 장독대에 가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농촌에선 부엌과 장독대 거리가 15-20보, 매 식사 때마다 왕래해 농촌주부들의 가사노동 부담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독의 숫자도 아파트 4-6개, 도시 단독주택 12-14개인 반면 농촌은 평균 20개나 되었다. 그리고 장독대는 2010년경에나 사라질 것으로 보았다.

 

혹시 여러분 집에는 장독대가 있는가. 간장이나 된장을 직접 담아 저장하는 항아리라도 있는가. 담근 장의 맛을 가려내고 음미할 능력이 있는가. 혹시 무언가를 기원하고 또 거기서 낭만도 찾을만한 먹을거리 저장소가 있는가. 60, 70년대 그 시절 그토록 공격적으로 장독대 없애기 운동을 벌인데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가. 장독대 위에 앉은 고추잠자리가 참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요정 정치, 그 요지경 세계

요지경의 나라가 따로 없었다. 60-70년대 우리 정치판을 비유해 하는 말이다. 권력과 돈이 모든 걸 지배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었다. 백성은 굶는데 고관대작은 흐느적거리며 밤이 짧은걸 아쉬워했다. 거기에는 '요정정치'라고 불리는 음침하고 도색적인 밀실 문화가 큰 몫을 했다. 검은 돈과 정치, 술과 가무, 색정이 한데 버무려진 얄망궂은 귀족놀음이 밤마다 흥청망청 이루어졌다.

 

 

 

70년대 밤의 정치판 
 

요즘은 요정정치라면 "뭐야, 요정처럼 깜찍한 정치?"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요정이란 '고급 요릿집'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룸살롱이 비슷한 역할을 한다지만 요정의 맛 멋(?)을 따를 길이 없다. 한옥 깊은 곳 아늑한 방에 아리따운 한복여인을 끼고 앉아 가야금 운율이나 판소리에 우선 흥을 돋우었다. 그러면서 권커니 잣거니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왕조시대 양반도 못 했음직한 기생 잔치가 질탕하게 벌어졌다.


글깨나 한다며 여인속곳에 붓글씨를 쓴 '풍류가객' 정치인의 큰손 놀음이 화제가 되던 시절이다. 치마를 올려 속곳을 내놓고 거기에 맘껏 붓질을 하니 돈은 얼마나 뿌려야 했겠는가. 또 그게 제 힘으로 번 돈이겠는가. 여기다 치마폭에 글발을 날릴 계제는 못되고 요정 벽에 잔챙이 글씨나 남긴 '애송이' 얘기도 심심찮게 들렸다. "00은 거물 정치인 X가 머리를 얹어줬다"는 얘기가 돌면 정치초년병들은 그녀 옆에 앉아 아양을 부리기도 했다.


명사들의 향락장…고급 요정
1964. 12. 5 [경향신문] 7면 

 

 

 

요정정치 추방을 외친 정치인들 마저도.. 

 

요정의 실태
1969. 11. 12 [경향신문] 8면 


요정정치를 요지경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다. 그걸 추방하자고 외친 이들이 바로 그 꿀맛에 단단히 젖은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6년 넘게 국무총리를 한 정일권 씨는 임기 내내 '공무원 요정 출입금지'를 외쳤지만 자신은 요정여인의 피살과 그 사이에 난 자식이 있다는 소문으로 평생 구설에 시달렸다. 부패척결을 강조하고 요정정치 엄단을 역설했던 박정희 대통령은 사실상 관제 비밀요정인 궁정동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총을 맞았다.


65년2월24일. 박정희 대통령은 시민회관에서 열린 공화당 중앙상위에 참석, 요정출입 자제를 강력히 촉구했다. "(정일권 총리 지시에 의해) 공무원들의 요정출입을 단속하고 있는 요즘, 정치인 특히 국회의원들이 고급요정에서 회의를 해 일반국민의 빈축을 사고 있다"며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은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말이 유의지, 요정 출입을 전면 금지하고 적발되면 문제 삼겠다는 으름장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요정정치에 대한 국민 반감은 엄청났다. 그해 5.16 반혁명사건으로 체포된 국가재건최고회의 전 공보실장 원충연 대령은 쿠데타 모의 이유 중 하나로 요정정치를 들었다. 그는 법정에서 "5.16군사혁명 후 원대복귀 한다던 공약을 어겨 국민을 배신한 점, 요정정치로 정부가 극도로 부패한 점을 개혁하려 했다"고 말했다. 깨끗한 정치를 주장하며 나온 5.16세력이 배금주의에 빠져 음습한 요정정치나 하고 있다는 신랄한 지적이었다.


원 씨 주장이 아니더라도 언론 또한 요정정치의 폐해를 잇달아 제기하고 있었다. "'식(食)과 색(色)의 별세계'에서 '비밀 정치협상과 비밀 수표거래가 낳은 어두운 자식'이 바로 요정정치"라는 건 약과고 요정 접대부 수입이 연평균 국민소득의 20배에 이른다는 폭로도 나왔다. 국회 상임위원 20명을 요정으로 초청해 '한턱 낸' 장관은 37만원 경비를 비서관에게 돌렸고 1인당 쌀 두 가마니 값이 들어간 그 경비를 마련하느라 비서관은 국장들을 들볶고 있다는 실례도 소개됐다.


'한국판 아라비안나이트' 비밀요정
1970. 7. 25 [매일경제] 7면 

 

언론인 송건호는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 비춰보면 정치는 요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고 개탄했다. 그는 "다소라도 이름 있는 정치인치고 요정출입이 잦지 않은 인사가 적고 요정출입이 잦은 정치인치고 마담을 비롯해 한두 명 친하게 지내는 기생을 가지지 않은 자가 드물다"고 했다. 압권은 "그런 인사 중 일부는 비밀리에 딴살림을 차려주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단체들의 건의문 발표
 

'여성협의회'의 정치풍토개혁 심포지움
1967. 4. 6 [동아일보] 7면 


요정정치가 안고 있는 비밀거래, 공직기강 해이와 풍기문란 축첩문제 등이 연일 도마에 오르자 여성단체가 들고 일어났다. 67년 4월 전국 23개 여성단체들이 연합한 협의회가 서울 YWCA 강당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제목은 정치개혁이지만 사실 심포지엄은 요정정치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여성의 힘으로 요정출입 정치인들을 축출하자는 결의 대회에 다름 아니었다.


심포지엄 후 이들은 1천5백만 여성의 이름으로 된 10개항 건의문을 발표했다. 제1항은 점잖게 '국회의사당 내에서 연구와 모든 정치활동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춰 달라'고 했지만 이후 항목은 모두 요정 모임과 축첩 기생파티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있다. "요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정치 경제계획을 개혁하라"부터 "축첩공무원을 단속하고 축첩한 사람은 공천을 주지 말라" "기생파티를 철폐하고 정치회의를 유흥장이나 온천장에서 하지 말라"는 것도 건의했다.

 

'각종 연회에 부부동반 참석 풍조'를 키우며 '지방출신 국회의원을 위한 아파트 건립'을 요구한 것도 정치인 아내가 제 역할을 해 요정 여인이나 접대부와 은밀한 관계를 갖는 것을 막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건의문은 말미에 구체적으로 '비밀요정을 적발 단속하라'고 요구하고 감시 주체로서의 여성에게 '정치 사회 모든 영역에 참여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사라질 요정정치가 아니었다.


새해 예산심의가 한창 벌어진 67년 12월 첫 주. 회의는 대충 끝내고 줄줄이 요정으로 달려간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언론은 신랄히 꼬집었다. 가령 재경위의 경우, 야당이 제출한 세법개정안 설명만 듣고 부리나케 고급요정으로 달려가 술잔을 나누었다. 이럴 수 있느냐는 지적을 받자 재경위원장은 "다른 위원회가 다 하는데 우리만 안할 수 있느냐"고 항변했다. 대부분 상임위가 요정정치의 맛에 취해 있음을 실토한 발언이었다.


다시 고개드는 요정정치
1967. 12. 6 [경향신문] 3면 

 

언론이나 정부 사회단체 등이 시끄럽게 떠들면 주춤했다 이내 용수철 튀듯 다시 나오는 게 요정문화였다. 또 요정 단속 뒤끝에는 무허가 비밀요정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공식 요정에서는 1인당 1만5천 원 가량을 받았으나(물론 팁, 가무 비용은 별도) 비밀요정은 그 두 배를 받았다. 일제단속을 피해 손님을 맞는 위험비용에다 더 은밀한 서비스 이용료가 붙은 것이었다. 조사에 따르면 60년대 초반 4백 개이던 요정은 63년 6백, 64년 7백, 67년 8백40개로 급증했다. 물론 주택가 비밀요정까지 포함한 것이니 숫자는 정확할 리가 없다.

 

 

 

미모의 요정 접대부 살인 사건

 

박정희, 정인숙사건에 노발대발
1990. 12. 28 [동아일보] 19면 


그러던 1970년 3월17일 밤 11시. 서울 마포구 절두산 근처 강변3로에 멈춰서 있던 검정색 코로나 승용차에서 미모의 여인이 머리와 가슴에 총을 맞고 숨진 채 발견됐다. 운전사는 넓적다리에 권총을 맞아 신음하고 있었다. 숨진 여인은 26세 정인숙, 당시 최대 요정 선운각 등에 나가는 접대부였다. 부상한 운전사는 정인숙의 오빠인 34세 정종욱이었다. 숨진 정인숙에겐 3살 난 아들이 있었다. 그녀의 수트케이스에는 당대 권력자 26명을 포함 33명의 명함과 전화번호가 보관돼 있었다.


기묘한 사건이었다. 국무총리나 중앙정보부장 등 정권최고위층과 교류가 있는 듯한 여성 접대부가 권총 살해된 게 우선 묘했다. 거기다 초동수사에 나선 경찰은 겁먹은 듯 엉거주춤,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검찰이 바로 수사바통을 이어받았지만 마찬가지 진척이 없었다. 드디어 1주일 후, 검찰은 오빠 정종욱이 정인숙을 살해했다고 발표했다. 동생의 문란한 행실을 지적했으나 듣기는커녕 욕하고 대들자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고 죽였다는 것이었다. 또 강도사건으로 위장하고자 자신의 다리에도 권총을 쏘았다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범인은 잡혔지만 소문은 꼬리를 물고..

 

그러나 증거는 한 점도 없었다. 범행에 사용된 권총도 나오지 않았고 오직 정종욱의 자백만으로 검찰은 수사를 종결했다. 정인숙이 살해되기 전 만난 사람이 누구며 명함주인들과 어떤 관계고 아이는 누구의 씨인지 아무 것도 밝힌 게 없었다. 시중에는 정인숙의 아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씨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나훈아의 노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패러디해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누구라고 말하겠어요./ 만약에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것을…" 하는 노래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소문은 돌고 돌아 또 아이의 아버지가 정일권 총리라는 말도 나왔다. 야당은 국회에서 강변로 여인 피살사건을 호되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속 시원히 풀린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단지 서정쇄신이니 부정부패 척결을 무섭게 다그치던 대통령과 총리를 비롯해 고위직들이 오히려 요정의 꿀맛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켰을 따름이다. 야당은 대통령 아니면 총리 둘 중 한 명이 아이 아빠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오빠 정종욱씨가 밝힌 정인숙사건의 진상
1991. 1. 16 [경향신문] 15면 

 

 

동생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던 정종욱은 1990년대 출소 후 "나는 살인죄를 뒤집어썼다. 아이 아버지는 정일권 씨"라고 주장했다. 또 장성한 정인숙의 아이도 정일권 씨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내고 취하하기를 반복하는 등 사건 진상에 다가서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94년 정 전 총리가 별세하는 바람에 법적 확인을 받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정인숙 사건 후 쇠퇴기를 걷는 요정

 

정인숙 사건 이후 요정의 역할은 다소 약화됐다. 허가 받은 공식 요정보다 풀장 등 고급시설을 갖추고 최고 미녀를 내며 하룻밤 딱 한 팀만 받는 비밀요정들이 한남동 성북동 신당동 이태원과 강변로에 들어서 요정정치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위치가 명확히 노출돼 있고 마음만 먹으면 누가 출입했는지를 알 수도 있는 정식 요정이 쇠퇴기에 접어드는 그만큼 비밀요정은 막후 롤을 강화해 나갔다.


70년대 중반에도 정부는 걸핏하면 공직기강 확립, 서정쇄신을 부르짖으며 퇴폐업소 출입자 적발 시 엄벌을 강조했다. 그러나 79년, 사람들은 박대통령이 오히려 중앙정보부가 안가에 차린 비밀요정 생활을 즐기다 끝내 총격 당한 것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런 탓에 70년대 정 관 재계 사람들이 빠져 지낸 비밀요정의 이모저모가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폭탄주, 치명적 유혹의 시작

맥주 한 컵에 위스키 한잔을 톡 떨어트려 만드는 폭탄주. 두 가지 술이 섞이며 오르는 거품이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같대서 지어진 이름만큼이나 거친 술. 패가망신은 물론 종종 목숨까지 앗아가지만 뿌리치기 힘든 마력을 지닌 '치명적인 유혹'. 언론 인사평란에 "폭탄주 0잔, 두주불사" 따위 고정 문구를 쓰게 만든 한국인의 '애음(愛飮)식품'.

 

 

 

폭탄주 문화 한국 상륙

 

폭탄주 천국 위스키 왕국
1996. 7. 9 [경향신문] 1면 


폭탄주 '제조법'은 1980년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폭탄주가 "일찌감치 한국인 고유의 술이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 등장은 30년이 채 안됐다는 얘기다. 사실 폭탄주가 만들어진 과정은 권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60-70년대의 요정정치가 그랬던 것과 같다. 정상적이지 않은 힘의 움직임과 그 안에서 내연한 파워게임의 산물이었다.


유신과 긴급조치로 짓누르던 ‘박정희 18년 정치’가 끝날 무렵, 술자리'방석' 문화는 '의자' 문화로 돌아서고 있었다. 졸부들이 행세하고 밤의 유락지가 요정에서 룸살롱으로 변했으며 맥주 소비량은 소주를 앞질렀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양주를 즐기고 있었다. 83년경 강원도 춘천도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지역 기관장 모임에 참석하는 멤버들- 안기부와 검찰 경찰의 고위직, 그리고 군 장성들은 만날 때마다 위스키를 즐겼다.

 

남성들, 특히 권력을 쥔 사람들 모임에선 술을 마시는 것도 종종 승부로 번진다. 상대에게 힘과 능력을 과시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맡은 일은 다르지만 지역에선 자신이 최고라 생각하며 다른 기관의 장은 한 수 아래로 보는 유지들 모임이라면 더욱 그렇다. 뭐든 지지 않으려 하고 호방한 남자다움을 자랑하려고 한다. 그래서 마시는 술의 양도 경쟁의 대상이 된다.

 

 

 

권력층에 한정되었던 폭탄주

 

폭탄주의 유래는 당시 기관장 모임에 나온 군인들이 민간인 기관장 기를 꺾으려고 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남전 때 군인들이 철모에 맥주를 가득 붓고 '조니 워커' 위스키를 병째 담아 마신 걸 본뜬 것이란 설이다. 물론 다른 주장도 있다. 군인들이 맥주 컵에 물 따르듯 양주를 채워 돌리는 데 질린 민간인 기관장이 "맥주와 양주를 섞어 마시자"고 제안했는데 술술 잘 넘어가 이후 회식 때마다 애용했다는 얘기다.


어느 주장이 옳건 일단 폭탄주의 시초는 권력층이 끊은 셈이다. 애초 구미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비싼 위스키를 조금만 마시고도 빨리 취하려고 싼 맥주에 위스키를 섞은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를 만들어 마셨다. 위스키를 한입에 털어 넣고 맥주로 입가심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한국에선 "독한 위스키를 순한 맥주에 말아 마시는" 형태로 변한 것이다. 물론 구미의 것을 본뜬 게 아니라 배움 없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 다르다면 달랐다.


폭탄주에 '폭탄'맞은 검찰
1999. 6. 9 [동아일보] 23면 

 

부드럽게 마실 수 있되 마시면 이내 취기가 도는, 그래서 웬만한 술꾼도 오래 버티기 힘든 '폭탄주의 발명'은 술꾼들을 즐겁게 했다. 춘천 지역 기관장들은 각자의 모임에 나가 제조법을 전파하고 또 마시는 '법도'도 교육했다. "더도 덜도 없이 똑같이 마시는 민주적인 술" "높은 사람이 참석자들로부터 일일이 잔술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리적인 술" "위스키 독성을 중화시켜 부드럽게 넘기기 좋은 술"이란 예찬론이 높아졌다.


그래도 한동안 폭탄주의 전파는 검경과 정치권 언론계 고위공무원 등 특정세력에 한정돼 있었다. 이중 검찰은 폭탄주를 마치 부서 고유문화라도 되듯, 거기서 조직원의 동질감을 찾기라도 하듯 열광적으로 탐닉했다. 서열이 분명한 '기수문화'인데다 회식이 잦고 스폰서도 대기 쉬운 이들은 폭탄주를 잘 만들고 잘 마시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나중 그것이 조직 전체를 망신시키고 수많은 검사의 옷을 벗기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국방위 회식으로 입방아 오른 '폭탄주'

 

국방위 회식사건
1993. 4. 1 [동아일보] 5면 


폭탄주 과음이 말썽을 빚고 처음으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른 것은 86년 봄, 이른바 '국방위 회식 사건'을 통해서다. 3월26일 저녁 국회 국방위원 10여명과 육군참모총장 등 장군 8명이 모인 술자리에서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 전해 2.12총선을 통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확인되자 군도 국회의원들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 여야 국방위 위원들을 초청해 한판 거하게 산다는 것이 멱살잡이와 피 흘리는 혈투로 변질되고만 것이다.


사건 7년 후 동아일보에 군 시리즈를 연재한 김재홍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접대하는 장군들은 모두 제 시간에 왔으나 국회의원들은 시간 맞춘 사람이 적었다. 게다가 늦게 도착한 신민당 김동영 총무가 여당의 이세기 총무도 오지 않은 걸 보고 '허, 거물은 안 나오고 똥별만 먼저 모였네!'라고 농담한 것이 분위기를 싸늘하게 냉각시켰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한 장군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고자 연신 술을 돌렸다. 불과 1시간이 안 돼 모두가 대취했다. 이런 판에 여당 이총무가 뒤늦게 나타나자 장군들은 화풀이하듯, "후래자 삼배"(늦게 온 사람은 벌주 세 잔을 마심)를 외며 그에게 술을 강권했다. 마셔라, 못 한다 거친 말이 오갔다. 군인들이 술이 취해 행패를 부린다고 생각한 한 의원이 결국 맥주잔을 벽에 내던졌다. 잔이 깨지며 튄 파편에 장군 한명이 피를 흘렸고 흥분한 그는 발차기로 그 의원을 공격했다. 의원도 입에서 피를 흘렸다.


당시 사건내용은 정확히 보도되지 않았지만 국회의원과 장군들이 폭탄주를 마시고 난투극을 벌였다는 소문은 금세 시중에 퍼졌다. 물론 국회의원들이 막무가내로 맞았다는 얘기였다. 이 때문에 국회는 공전하고 여야 대치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시중에선 묘한 일이 벌어졌다. 욕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있듯 국회의원과 군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면서도 폭탄주 돌려 마시기가 대유행한 것이다. "높은 놈들이 마신다는 술, 우리도 먹어보자"는 심리가 발동한 것이었다.


국방위 회식사건…여야 악수 강요가 반감불러
1993. 4. 15 [동아일보] 5면 

 

 

 

전국민이 사랑하게 된 술 '폭탄주'

 

이후 폭탄주는 전 국민이 애용하는 술이 되었다. 86년 말 신문들은 일제히 그해의 단어로 폭탄주를 꼽았다. 망년회에서 폭탄주를 적게 먹는 법과 부득이 폭탄주를 마실 때 좋은 안주를 소개하는 기사가 봇물을 이루었다. 물론 술자리 일을 기억 못할 정도로 폭탄주를 마시면 어느 정도 뇌손상을 당하는지, 폭탄주 한잔이 간에 미치는 영향 등의 건강기사도 쏟아졌다.

 

'하나마나' 국감
1998. 8. 3 [경향신문] 5면 


폭탄주가 정치적으로 다시 문제가 된 것은 89년이었다. 9월 국회법사위의 법무부 국정감사장에서 몇몇 의원들이 폭탄주를 마시고와 실실 웃고 욕을 하거나 정부의 답변을 중단시키는 등 주정을 부렸다. 일각에선 국감 무용론을 폈고 정당에는 폭탄주 의원을 제명하라는 항의전화도 걸려왔다. 그래도 정치인들은 폭탄주를 즐겼다. 심지어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민주당 김영삼 총재조차 국회대표연설을 마친 후 당직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는 장면이 보도되기도 했다.

 

92년 한국인의 1인당 연간 술 소비량은 맥주 58병, 소주 46.7병, 막걸리 13.1 리터, 위스키 반병이었다. 세계 10위.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섞어 마시고 '노털카'(잔을 놓지도 마신 뒤 털지도, 카 하지도 말 것)'찡떼오'(찡그리거나 떼거나 오래 갖고 있지 말 것) 식으로 마셔 사회적으로도 후유증이 적잖았다. 처음 폭탄주를 '발명'했던 군이나 검찰이 폭탄주 안 마시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한번 길들인 음주문화는 좀체 잡히지 않았다.

 

 

 

수많은 사건사고의 시초가 되기도..

 

그러던 95년 8월. 서석재 총무처장관은 여당 출입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신 자리에서 "전직대통령 것으로 보이는 비자금 4천억 원에 대한 설이 시중에 떠돈다."며 고급정보를 흘렸다. 뒷날 박계동 의원의 국회대정부 질문을 통해 사실로 밝혀진 이 이야기는 그러나 당시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 측 거센 항의를 받고 서 장관이 사퇴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폭탄주와 관련해 장관이 사퇴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된 것이다.

 

1999년6월. 이번엔 대검 진형구 공안부장이 점심때 폭탄주를 마시고 기자들을 만나 "한국조폐공사의 파업은 공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기 위해 검찰이 유도한 것"이란 '자뻑성' 발언을 했다. 검찰이 노조를 꾀어 파업을 유도했다는 엄청난 말에 정국은 들썩였고 진 부장은 끝내 구속됐다. 뿐만 아니라 당시 법무장관도 인책 사퇴하는 대형사고로 진전됐다. 이 사건은 후일 "양주는 독하므로 맥주에 씻어 먹는다."는 웃지 못 할 항변을 만들어냈고 지금도 애주가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다.


폭탄주 취해 '폭탄발언'
1999. 6. 9 [경향신문] 5면 

 

 

정치인이나 검찰 등 권력 쥔 사람들의 폭탄주 사고는 그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검찰 법원 인사들이 관련된 법조비리는 터졌다 하면 술자리 폭탄주 비사를 쏟아냈다. 고위층이 관련된 여기자나 여종업원 성추행 사건 등도 대부분 폭탄주가 몇 순배 돈 후에 일어났다. 최근의 검찰 스폰서 비리도 룸살롱 폭탄주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학에서 신입생 환영회 도중 폭탄주를 마시고 숨진 학생이 나오고 음주운전 사고의 상당수도 폭탄주 때문이라는 조사결과도 있다.


올해 연말엔 또 어떤 대형사고가 터질런지, 숱한 사고와 패가망신을 보고도 사람들은 여전히 폭탄주를 만든다. 그 시절 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의 이야기로 이어져 슬픈 것이 폭탄주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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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주? 몸이 안 받으면 가슴으로 받는다!

시인과 소설가 중에 누가 술을 더 잘 마실까. 소설가 김종광씨에게 물어보았다. 단연 시인이라고 답한다. 술을 마시면 영감을 얻을 수 있고, 그 영감이 글 쓰는 데 힘이 되기도 하는 건 시나 소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기사원문: 2010. 10. 25 [신동아]

초가집을 없애라

온 천지에 소복이 눈이 쌓였다. 해질녘이다. 머리 가득 눈을 인 초가집 허리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로 올라간다. 점박이 강아지는 신이 났다. 떨어지는 눈송이를 받아먹는지 주둥이를 가득 벌리고 껑충이며 마당을 헤집는다. 누가 오시려는 것 일까. 아이는 툇마루 안쪽 들창문을 빼죽이 열고 탱자나무 담장 밖 동구 길을 하염없이 내다본다.

 

 

 

'가난의 상징' 초가집
 

서울 이방지대 양옥 속의 초가집
1981. 4. 18 [경향신문] 7면 

겨울방학 무렵이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림이다. 70년대까지 새해 달력이나 연하장엔 으레 눈 덮인 초가집, 동자승 같은 아이, 뛰는 강아지가 단골로 나왔다. 장독대 항아리뚜껑에 얹힌 눈을 맨손으로 쓸던 할머니의 꼬부랑 허리도 물론 빠지지 않았다. 겨울, 시골 정경을 맛깔나게 설명해주는 것이 그것들 외에 다른 무엇이 있기나 했을까.

 

그림의 중심은 초가집이다. 눈에 넣어도 한군데 찔릴 데 없는 부드러움과 아늑하고 동그란 웅크림이 거기엔 있다. 삐죽이거나 모나지 않은 넉넉함과 자연에 동화한 듯 붙박이로 선 친근함도 장점이었다. 때문에 초가는 언제나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이었다. 누런 황토를 허리에 두르고 수수한 볏짚을 머리에 인 채 처마 안쪽엔 누런 멍석과 된장까지 넌 초가집.

 

그러나 한편 그것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다"는 호사가적 예찬은 말뿐, 가난 때문에 자연에서 재료를 구할 수밖에 없는 천둥벌거숭이 민초의 그냥 둥지일 뿐이었다. 밖에서야 아무리 '멋'을 얘기하건 그 안의 삶은 멋스럽지 않았다. 여름엔 빈대 노래기 등 벌레가 끓고 겨울엔 화재에 노출됐다. 1년에 한번 겨울맞이 이엉(지붕이나 담을 이는데 쓰기 위해 엮은 짚)을 얹는 일도 엄청난 고역이었다.

 

 

 

초가집 없애라는 한마디에..

 

그 가난의 상징 초가집을 일거에 쓸어버리자고 나선 것이 박정희대통령이다. 앞서 대통령들과 달리 가난한 농촌출신인 그는 초가집에 한이 많았다. 가난에 대한 원망과 어떻게든 그걸 벗어나겠다는 욕구가 강했다. 가난을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인권이니 자유는 얼마든지 유보할 수 있었다. 당장 먹고살지 못하는 마당에 인권은 무슨 사치냐는 생각도 하는 것 같았다.

 

1969년 2월15일 경제과학심의회의에서 한 발언은 초가집에 대한 박대통령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지방에 갈 때마다 가장 서글프게 생각되는 것은 수천 년 동안 그대로 내려오는 농촌의 초가집"이라고 운을 뗐다. 그러고는 "그러나 지금 당장 한꺼번에 모든 초가집을 없애버릴 수는 없는 것이니 당분간은 수출증대에 최선을 다하면 시멘트 등 생산량이 증대하고 농민 수입도 늘어나 초가집은 자연히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했다.

농가철거 그 뒤
1969. 5. 24 [동아일보] 7면 

 

도백 감투가 날아간 과잉 충성
1969. 5. 13 [경향신문] 3면 

생각 같아서는 초가집을 단박에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심정을 그대로 담았다. 대통령 생각이 이러니 공무원들이 대통령의 눈에 초가가 안 띄도록 하려고 과잉 충성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그해 5월 경남 진양 군청은 박대통령이 관내 농업용수개발공사 현장을 시찰할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밤중에 길가 초가집 13채를 강제로 철거했다. 40여 주민이 한밤중에 거리로 쫓겨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더욱 가관은 이튿날 대통령이 그곳 시찰계획을 취소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나라 안이 들끓었다. 아무리 대통령에 잘 보이려 했기로서니 멀쩡히 사람 사는 집을 헐어버릴 수 있느냐는 비난이 빗발쳤다. 게다가 당시 대통령이 시찰 나간 울산-부산 간 도로를 경찰이 3시간 동안 차단한 일도 밝혀지며 나라에 만연한 전시행정이 도마에 올랐다. 급기야 내무부는 자체조사를 벌여 "이 사건이 '불쌍한 국민'의 재산을 경시해 일어난 전시행정의 산물"이라고 사과하고 도지사를 전격 해임했다.

 

 

 

초가집 없애기 작전에 돌입한 구청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됐지만 이로 인해 대통령이 초가집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국민은 명확히 알게 됐다. 사실 가난의 상징으로, 주거생활의 불편이 점점 드러나고 있는 초가집에 대한 일반의 인식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자연히 공무원들은 더욱더 초가집을 사람들의 시야에서 빼내려고 애를 썼다. 당장 70년에 들어서면서는 서울시내 구청들이 다퉈 초가집 없애기 작전에 돌입했다.

 

2월 종로구는 관내 106채가 있는 초가집을 모두 개량하기로 하고 특히 간선도로에서 바로보이는 초가집은 지붕을 당장 바꾸기로 했다. 8월부터는 경부고속도로 연변에 있는 성동구(당시의 지명. 현재 강남, 서초구) 도곡동 신사동 내곡동의 초가집 174채를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갔다. 다른 구청이나 지방에서도 사정은 거의 비슷했다. 집 수리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는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행정관청은 앞장서 저리융자를 주선해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물론 이것은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하기 이전의 일이다. 70년 4월 22일 한해 수해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지방장관회의에서 박대통령은 "전국 농촌의 각 부락단위로 향토예비군이 중심이 돼 새마을 또는 알뜰한 마을 가꾸기 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이것이 새마을운동으로 구체화한 것은 10월에 들어서였다. 그러니까 새마을운동의 제창 이전부터 정부는 초가집을 없애고 짚으로 이은 지붕은 갈아버리는 작업을 해온 셈이다.


여기서 60, 70년대 우리나라의 주택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건국직후인 48년 전국 주택은 2백30만여 채로 대부분이 초가, 기와집이었고 주택영단이 지은 다다미 온돌 겸용 집과 판잣집도 끼어있었다. 서울의 경우 중구 종로구 등 번화가도 두 집 걸러 하나 꼴로 초가집이 있었으며 성동구 왕십리, 마포 서대문 동대문 외곽지역은 초가집 일색이었다.

100년전 서울 초가집이 69.6%
1994. 7. 29 [동아일보] 5면 

 
그러던 것이 전쟁을 거치고 5.16쿠데타까지 겪고 난 61년 서울 초가집은 1만6천7백 동으로 줄어 있었다. 대신 판잣집이 3만여, 천막집이 1만여 동으로 늘었고 심지어 토굴도 2천6백여 동이나 됐다. 당시 서울의 전체 주택은 27만 호였고 가구 수는 50만 6천에 이르렀다. 서울시민의 절반이 남의 집에 살고 그 대부분은 판자, 초가, 천막집이나 토굴생활 등 열악한 주거환경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시빈민촌과 농촌 초가집을 없애는 것은 당국 입장에서 보면 빈곤을 추방한다는 상징성도 지니고 있었다.

 

 

 

본격화된 새마을 운동에 점차 사라진 초가집 

 

주인 빈 새 초가 헐어
1973. 9. 7 [동아일보] 7면 

드디어 72년 5월. 내무부는 전국 어디서건 초가집 신축을 억제하도록 각 시도에 긴급명령을 내렸다. 이 지시에서 내무부는 ‘만약 초가집 건축 신고를 받으면 ①읍면 담당자를 현지로 보내 슬레이트나 함석지붕을 씌우도록 종용②불응할 경우 이동 개발협의회를 통해 설득③그래도 안 들으면 마을금고에서 소요 예산을 융자해 초가 신축을 일체 못하게 하라고 강조했다. 당시 전국의 초가집은 2백7만여 동이었는데 이처럼 신축은 억제하고 기존 주택은 모두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바꿔 75년까지는 전국 초가집을 모두 없애겠다는 방침이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새마을운동이 본격화했다. 전국 곳곳에서 초가지붕은 벗겨지고 빨갛고 파란 슬레이트지붕으로 대체됐다. 황토흙벽은 헐리고 대신 블록 벽이 규격대로 척척 쌓여갔다. 이런 가운데 집을 허느냐 마느냐로 행정 하급기관과 주민 간 마찰도 여러 곳에서 빚어졌다. 경기도 시흥 군에서는 주민이 병원에 입원한 사이 이장이 멋대로 초가집을 헐고 지붕을 퇴비로 써버린 사실이 밝혀져 형사 입건되는 사태도 일어났다.

 

언론도 무조건 농촌 초가집을 헐겠다는 것은 졸속행정이요, 한국의 미를 죽이는 일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건축가 화가나 전통 공예인들이 신문기고 등을 통해 일률적인 초가 말살을 꼬집으며 전통가옥은 보존하는 방법을 찾으라고 권유했다. 한 화가는 "요새 시골에 슬레이트지붕을 올리고 빨간색 파란색 '도깨비 칠'을 해놓은 것은 그야말로 가관"이라고 매섭게 질타했다. 다른 건축가는 "막 지은 초가는 물론 개량해야겠지만 농촌 부엌에 타일을 깔고서도 장작을 때는 것은 갓 쓰고 양복 입는 격 아니냐."고 비웃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초가집의 철거와 개량사업은 박차를 가했다. 76년까지 전 농가 3백60만 채 중 2백42만 채가 슬레이트나 함석으로 지붕을 바꿨다. 토담도 거의 대부분 허물어졌다. 70년대 후반쯤에는 방학 때 시골에 다녀온 아이들이 그려내는 그림일기가 서울에서만 지낸 아이들의 그것과 채색이 비슷해졌다. 시골집들이 오히려 서울보다 더 울긋불긋해진 것이다

한민족의 멋과 얼을 가꾸는 특별기획 '초가'
1972. 7. 4 [경향신문] 5면 

 

 

 

사라지는 전통초가를 보존하라

 

전통의 초가가 보존된다
1978. 9. 25 [경향신문] 7면 

그러나 점차 사라지고 도시화하는 시골풍경에 어떤 아쉬움을 느꼈을까. 박대통령은 서거 1년 전 초가집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사료로 보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78년 4월28일 내무부장관에게 사신 형식의 편지를 보내 “앞으로 얼마 안 가서 옛날 우리나라 농촌의 빈궁상을 상징하는 초라하고 서글픈 초가집이 사라질 것”이라며 “장차 역사의 사료로 남기기 위해 지금 농촌에 남아있는 초가집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난한 농촌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내무부에 보관하라”고 지시했다. 그해 9월 내무부는 전국 20개 마을 648채 전통초가를 보존가옥으로 지정했다.

 

80년대를 거쳐 90년대에 들면서 초가집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사거리가 되었다. 강서 신정동의 몇 채 안 되는 초가집 사진은 서울시민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눈 내리는 날 장독대가 있는 초가집과 마당에서 껑충이는 강아지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제 얼마나 될까.

 

동지팥죽 한 그릇 어떠세요?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것들은 왜 그립고 아름답다 생각하는 걸까?" 친구의 질문에 잠시 말을 잃었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쓰고, 다루고, 먹고, 겪던 당시에는 지긋지긋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했던 사물이나 사안들이 골동품화한 지금은 왜 그리 아름답고 그리운 형상으로 우리의 가슴에 남아있을까. 사라져 아쉽고, 불현듯 생각이 난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 번지곤 하는 걸까.

 

"추억과 향수는 아름답다"는 말도 그렇다. 곽재구의 시에선 사평역이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한줌의 톱밥', '한줌의 눈물'로 연결돼 삶의 고단함을 노래하는 장소지만 우리에게 그리움과 아름다움으로 채색된 연유는 또 무얼까. 어쩌면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둔갑시키는 '시간의 마력'이 작은 행복을 주는지 모른다. 그 고통, 그 아픔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하다면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요 현재적이며 당연히 아름다움 또한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호호 불며 먹던 '동지팥죽'

 

동지팥죽에 얼음 "동동" 동치미
1997 12. 19 [동아일보] 23면


의문은 남는다. 단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진 것들은 그렇다면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름다우며 아쉽고, 그리우며 되살리고 싶은 데도 그냥 추억의 곳간에 갇혀버린 것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춥고 긴 겨울밤, "온 식구가 둘러앉아 호호 불며 먹던 동지팥죽"이 바로 그런 '갇힌 것'의 하나다. 문풍지를 때리던 북풍한설조차 돌려세울 것 같던, 그 뜨겁고 맛깔스러운 동지팥죽은 지금 너무 쉽게 우리 주변에서 물러나 버렸다.

 

동지는 1년 중 밤이 가장 긴 때다. 북반구에선 연중 가장 남쪽에서 태양이 떠오르며 고도가 가장 낮다. 태양이 떠있는 시간이 가장 짧으므로 일조량도 가장 적다. 그렇다면 이론상으로 가장 추운 날이어야 맞다. 하지만 지표와 대기가 머금은 열량 탓에 최한 추위는 한 달쯤 후에 온다. 음양 중 음(陰·어둠 밤 달)이 극에 달하고, 이때 미세하며 작은 양(一陽·밝음 낮 해)이 처음으로 생겨나니 음양 순환의 끝이자 시작인 날이 또 동지다. 농경사회에선 그 동지를 새해의 첫날로 쇠며 축제를 벌였다. 기독교의 성탄일도 동지축제 풍속이 옮겨진 것이란 설도 있다.

 

바로 그 '동짓날 긴긴 밤', 우린 팥죽을 쑤어 조상과 조상신에 올리고 가까운 친척친지와 나눠먹는 아름다운 풍속을 키웠다. 궁중에서는 관상감(지금의 기상청)이 만든 황장력(黃-粧曆·누런 표지의 책력, 달력)을 백관에게 나눠주고 관리들은 다시 백성에게 돌려 모두의 다복다행을 기원했다. 단옷날 한여름에 대비해 부채를 선물하고, 동짓날 새해맞이 달력을 돌리는 것은 이른바 하선동력(夏扇冬曆)의 미풍양속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일찍부터 나눔의 기쁨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왔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나누던 정겨움도 실종

 

그러나 어쩐 일일까. 동지 무렵 연말연시 달력을 돌리는 풍속은 여전하지만 팥죽을 올리고 함께 먹는 풍습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빨간 팥죽에 동동 뜨는 하얀 새알심- 그걸 먹어야 또 한 살 나이를 먹는다는, 그래 아이들이 연신 입언저리를 혀로 쓸며 핥던 팥죽의 기억이 사라졌다. 부엌에 쪼그려 앉거나 무쇠 솥 옆에 붙어서 한 명은 지푸라기나 나뭇가지를 아궁이에 쓸어 넣고 다른 한 명은 큰 주걱으로 솥을 휘휘 젓던 정다운 할머니 어머니의 모습도 간데없다. 뜨거운 팥죽그릇을 꼬맹이 고사리 손에 들려 가난한 이웃에 보내던 정겨움이 실종됐다.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아침, 팥죽그릇을 들면 손바닥은 뜨겁고 손등은 얼어터질 듯 했다. 꾀를 낸다고 털장갑을 끼고 들고 가다 미끄러워 떨어트리며 뜨거운 팥죽을 뒤집어쓰고 울며 집에 돌아온 아이를 어머니는 맛 좋은 팥죽을 떠먹여주며 달래곤 했다. 팥죽을 쑤면 우선 조상신께 한 그릇 올린 뒤 이어 장독대, 광과 각 방에 또 한 그릇씩 놓아둔 뒤 먹게 마련이지만 귀여운 아들에겐 언제나 예외였다. 할머니한테 들키지 않게 한 수저씩 떠주면 입안의 뜨거움 때문일까, 눈물 콧물이 주책없이 흐르곤 했다.

 

동짓날 팥죽 풍습은 붉은 색을 싫어하는 역신을 쫓아낸다는 전설에서 시작됐다. 대문에 붉은 팥죽을 바르거나 뿌림으로서 귀신을 몰아내고 한 해를 병치레 않고 보내려는 바람이 그 안에 담겼다. 그러나 선조들은 제 식구, 제 피붙이만의 행복을 기원한 게 아니었다. 행복과 기쁨은 나눠야 커지고 눈덩이처럼 구른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실천했다. 그래 시식(時食·때에 맞춰 먹는 음식)을 만들면 언제나 이웃과 나눴다.


동지팥죽 풍속은?
1982 12. 22 [매일경제] 11면

 

"할머니 만수무강" 이웃서 팥죽가져와 위로
1967 12. 25 [경향신문] 8면

1967년 동짓날. 서울 종로구 화동 주민들은 89세난 정은성 할머니에게 팥죽을 쑤어주고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할머니는 52년 전부터 조선왕실이 쓰던 복주우물을 혼자 지키며 살아왔다. 창덕궁에서 쓰던 이 우물물은 고종도 마시던 것. 갑신정변 임오군란의 와중에 혹시 누가 독이라도 탈까 보아 궁에서 우물까지 1백m 거리에 포졸을 세우고 상궁이 그 사이를 지나 물을 떠오곤 했다. 당시 포졸이던 남편이 갑자기 병사하며 유언으로 "우물을 지켜라"고 한 것을 52년 동안 하루같이 우물가 삶을 보내왔다.

 

관할 파출소에서도 할머니에게 쌀 한말과 연탄 1백장을 보내 "한겨울 추위에도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보내시기를" 기원했다. 신문들은 이 온정기사를 사회면 중요기사로 다루며 세밑을 어렵고 힘든 이웃과 나누며 보내자고 호소했다. 논설위원들은 동지팥죽의 기원과 우리 전통으로 굳은 '이웃 나눔'을 강조하는 글을 실었다. 어느 칼럼은 "작은 밝음이 어둠 속에서 생겨나는 동지는 곧 희망의 싹이 트는 날"이라며 "지나면 밝고 따스한 날이 오듯 나누면 밝고 따스한 기운이 사회에 생겨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동지?' 명절로 안 여기고 요리법도 몰라!

 

그러나 사실 팥죽을 쒀 나눠먹는 동지의 전통은 이미 오래전부터 사라져가고 있었다. 60년대 초반부터 언론은 절기로서의 동지를 소개할 때 마다 꼭 "사라지는 전통이 아쉽다"는 말을 함께 넣었다. 그도 그럴 것이 50년대에는 전쟁으로 피난 다녀 말 그대로 '살기 바빠' 팥죽을 쑤어먹을 겨를이 없었다. 판잣집 단칸살이에 팥죽은 호사였다. 강냉이 죽, 미군 군용 식으로 한 끼 때우기도 힘들었던 시절 일부러 팥과 찹쌀을 구해 팥죽을 쑤어 먹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60-70년대에 이르러서도 급격한 도시화와 그에 따른 간편식 바람을 타고 팥죽은 더욱 더욱 추억의 창고 안쪽으로 들어앉았다. 백자 항아리 그림을 자주 그린 수화 김환기 화백과 그의 부인 김향안 여사의 집에 들렀던 어느 제자가 동짓날 하얀 백자에 담겨 나온 붉은 팥죽을 보고 감탄한 얘기도 있지만 삶에 찌든 보통 이들에겐 그야말로 '그림 속 팥죽'이었다. 그 아름다운 팥죽 이야기는 1959년의 일이고 일화는 79년 칼럼으로 알려졌다.


세시풍속도 상품화
1988 12. 22 [매일경제] 15면

 

"팥죽이 뭡니까"
1994 12. 22 [동아일보] 31면


회사마다 대량으로 찍어 돌리는 달력이 캘린더 걸로 채워지던 시절엔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신문은 "동방예의지국의 안방에 벌거벗은 여체가 걸려있어서야 되겠느냐"며 동짓날 달력 돌리기 풍습이 에로틱 세속화하는 것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거리에 종은 울리는데 자선냄비엔 들어가는 것이 적다"고 한탄했다. 바로 팥죽 나눔을 통해 이웃과의 작은 정조차 단절하고 사는 무감정 세태를 한탄한 것이다.

 

그리고 90년대. 동짓날 거리에 나갔던 여기자는 "동지팥죽? 그게 뭐예요?"라고 되묻는 주부들을 만나 기사를 실었다. "지방에 살거나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주부들의 경우 팥죽을 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신세대 주부들은 동지를 명절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예전엔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아 명절음식을 챙겼지만 요즘은 사정이 다르다.' '시간도 없고 끓이는 방법도 몰라 반찬가게에서 파는 2천 원짜리 팥죽을 사먹겠다.'" 하긴 솥에 얹혀 지은 밥도 전기밥솥에 자리를 내준지 수십 년인 지금 직접 쑨 팥죽을 얘기하다니, 자칫 쫓겨나기 십상이다.

 

 

 

올해 동지에는 팥죽 한 그릇 어떠세요?

 

올해 동지는 12월22일이다. 초순에 끼면 애동지라 해 팥죽도 끓이지 않는 법이지만 올핸 그렇지도 않다. 팥죽 한 그릇이 그냥 팥죽 한 그릇이 아니고 우리의 삶이며 정이고 아름다움이며 나눔이던 시절이 있었다. 호호 불며 한 수저 가득 팥죽을 넣어주던 엄마의 눈을 마주보던 아이들은 아마 지금 중년 노년이 되었을 게다. 가난한 이웃 팥죽 돌리기에 나섰다 벌건 팥죽을 뒤집어 썼던 아이도 그럴 테지.

 

왕십리 중앙시장, 독립문 영천시장, 영등포시장 등 재래시장에는 옛날 팥죽을 쑤어 파는 곳이 있다. 불린 쌀을 넣어 함께 끓인 서울식, 새알심만 넣고 끓인 남도식이 그곳엔 다 있다. 입언저리를 핥으며 먹는 팥죽이 제 맛이다. 세상은 추워도 거긴 따뜻하다.

마지막 굴뚝소제부

그의 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몸이 앞으로 쏠리고 어깨가 출렁였다. 한 손에 든 징과 채, 등에 짊어진 굴뚝쑤시개와 검정 털북숭이 솔대 때문만은 아니었다. 몸 전체에 삶의 고난과 곤궁이 찌들고 절어있었다. 모자와 옷, 얼굴에 뚝뚝 묻은 검댕도 애처로움을 더했다. 지나온 세월의 그을음이 눈물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생각난 듯 징을 치곤 되레 놀라 꼭 쥐었다. 여운을 없애려는 거였다. 아마 골목길에 울리는 징-소리 때문에 항의깨나 받은 모양이었다. 다른 이들은 징을 치며 목청껏 "뚫어~!"를 외친다지만 그는 그것도 하지 않았다. 아아, 그나 나나 당시는 몰랐다. 징소리와 '뚫어~!'외침이 추억의 창고에 들어가 더 듣고 싶어도 못 듣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될 걸 말이다.

 

 

 

송년특집 '사라져가는 풍물'에 숨겨진 뜻
 

사라져가는 풍물, 펑튀김 장수
1981 12. 15 [동아일보] 11면


재래식 굴뚝소제부 심 씨를 만난 것은 그야말로 요행이었다. 30년 전, 1981년 겨울 세밑이었다. 신문사 사회부에서는 송년 특집으로 '사라져가는 풍물-우리는 무엇을 잃어 가는가'를 연재물로 기획했다. "격랑의 81년은 과연 무엇을 남기고 또 우리 주변에서 무엇을 잃게 하며 지나가는 것일까?" 신파조의 기획의도를 실었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81년은 암울한 해였다. 79년 대통령서거와 함께 온 민주화 희망은 신군부 쿠데타와 80년 광주민주항쟁 유혈탄압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사회정화를 통한 '정의사회'를 앞세우며 구석구석 짓누르는 억압은 유신 긴급조치시대와 별 다름이 없었다. 정치는 성역에 굽실거리고 언론은 '우회 필법' '행간 뜻 감추기'에 의존했다. 오죽하면 송년 사설을 통해 "의견의 자유로운 개진만이 대화를 통한 안정의 길"이라고 정권에게 빌듯 호소했겠는가.

 

굴뚝소제부, 뻥튀기 장사, 신기료 장수, 거리의 점쟁이들을 송년특집 사라져가는 풍물로 선정한 것은 그런 사회상을 간접고발하자는 의도였다. "더럽고 검댕으로 가득한 굴뚝같은 세상"을 확 소제하고 "뻥튀기 튀듯 하고 싶은 말을 그야말로 뻥뻥 터트렸으면" 하는 바람이 그 안에 담겼다. "신발 끈 고쳐 신고 어디든 취재하는 자유"를 누리고 "사는 것을 요행처럼 느끼며 점쟁이 말에 인생을 맡기는 나라는 정상이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다. 경제도 엉망인 나라, 서민의 힘들고 찌든 하루살이도 똑똑히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눈 밝은 독자라도 이런 숨은 뜻까지 어찌 알아채겠는가. 어쨌든 변죽이나 울려보자는 생각으로 취재에 나섰다. 그러나 막상 대상을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엔 재래식 직업을 가지고 있더라도 부수적 장비와 판매수단은 거의 현대화한 때였다. 그야말로 옛 것, 수십 년 전통방식으로 생업을 삼는, '사라져가는 풍물'과 그 인물을 찾는다는 건 '한강 백사장에서 백동전을 찾기'와 진배없었다.


사라져가는 풍물, 신기료 장수
1981 12. 16 [동아일보] 7면

 

 

 

"뚫어!"를 외치며 골목을 누비던 숯검댕 묻은 얼굴

 

전국 취재진에 재래업종을 찾으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행정관청에도 협조를 요청했다. 결국 뻥튀기 장수는 경기도 양평장터에서, 좌판 점쟁이는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 앞에서 찾았다. 우습게도 신기료 장수는 종로4가 시장 골목에서 '구두 대학병원'이란 그럴 듯한 손 간판까지 걸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가 몇 남지 않은 재래식 장사꾼들이었다. 그러나 굴뚝소제부는 쉽게 보이지 않았다. 신문사 안에서도 "누가 아직까지 힘든 굴뚝소제부를 하며 살겠느냐"는 등 벌써 사라졌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길 몇 날 며칠. 북촌마을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시커먼 털북숭이 솔과 대나무를 쪼개 만든 굴렁쇠 같은 걸 들고 다니며 '뚫어! 뚫어!' 하는 사람을 찾는 겁니까?" 왜 아니겠는가. 게가 어디냐고 묻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가회동 골목 오르막길에서 드디어 그와 마주쳤다. 꼬맹이 대여섯이 그의 뒤를 따르며 입으로 징- 징-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그는 다 귀찮은 듯 터벅터벅 발걸음만 내고 있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멘 기자와 동사무소 직원이 함께 나타나자 순간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단속이 있다 하면 우선 피하고 보는 게 장땡이라는 것을 오랜 행상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라져가는 풍물, 굴뚝소제부
1981 12. 14 [동아일보] 11면


단속 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자 그는 "휴~" 긴 한숨을 쉬었다. 굴뚝소제부 경력 15년. 전북 김제 백구면에서 농사를 짓다 올라왔다는 심 씨는 당시 60세였다. 집은 여전히 백구에 있지만 매년 추수가 끝나면 서울로 올라와 겨우내 굴뚝소제를 한다고 했다. "왜냐고? 아, 시골서야 겨울에 할 일이 뭐 있어. 방구석 짊어지고 화투나 치다 마는 거지. 놀면 뭐혀? 한 푼이라도 벌라고 서울 와서 굴뚝청소 하고 댕기는 거지." 한마디로 농부가 주업, 굴뚝소제부가 부업이라는 얘기. 봄이 되면 다시 시골로 간다고 했다.

 

잠은 독립문 근처 무악동 합숙소에서 잤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서교동 물품보관소에 가서 징과 솔 등 장비를 찾아 시내 순회에 나선다. 하루 왼 종일 걷는 거리만 약 24km. 그럭저럭 버는 돈은 2만 원가량 된다. 굴뚝만 쑤시고 소제하는 게 아니라 막힌 아궁이, 온돌도 고쳐준다. 굴뚝만 손보면 3천원을 받지만 아궁이나 구들까지 집안 난방을 다 봐주면 1만원을 받는다. 점심 저녁을 5천원에 때우면 그래도 손에 1만 원쯤 남는다.

 

 

 

대한민국 땅에서 사라진 직종 '굴뚝소제부'

 

처음 서울에 왔을 때는 돈벌이가 꽤 괜찮았다. 집집마다 섶을 때 굴뚝에 끼는 검댕을 1년에 한두 번은 쑤시고 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와 주택개량, 난방시설의 개수 작업은 조금씩, 조금씩 그의 일자리를 먹어 들어갔다. 굴뚝청소도 기업화했다. 동네에 사무실을 차리고 전화로 주문을 받았다. 진공 털이 등 최신식 장비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징치고 솔대 멘 채 터벅터벅 걷는 그가 경쟁이 될 리 없었다.

 

"처음 일 시작했을 때는 반나절만 돌아도 꽤 돈이 됐지. 나 같은 굴뚝소제부를 대여섯씩 보는 건 일도 아니었어." 그러나 이젠 하루 종일 재래가옥이 있는 동네를 돌아다녀도 징치며 굴뚝 쑤시라고 외치는 사람은 한 명도 만나지 못한다. 칼갈이 장수, 새벽 두부 장수와 한겨울 찹쌀떡 장수가 흔적 없이 사라졌듯 굴뚝소제부도 희귀 직종이 됐다는 것이다. 실제 그랬다. 그날 이후 취재진은 대한민국 땅에서 굴뚝소제부를 더 이상 보지 못 했다.

 

처음에 머뭇거리던 심 씨는 취재 막판엔 기분이 좋아졌다. 신문에 사라져가는 풍물로 자신이 소개되면 사람들이 더 많이 일을 시킬 것이라며 "돈 좀 벌겠다"고 기뻐하기도 했다. "어쩌면 박물관에 갈 사진이 될지 모른다"며 포즈를 부탁하자 여태까지와는 전혀 달리 힘차게 계단을 올라갔다. 그의 뒤로 서산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또 한 해가 우리의 옛 풍물과 함께 역사의 창고 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있었다.


이웃같던 직업들 세월속에 묻고
1996 10. 8 [경향신문] 41면

 

추기 1 : 1990년대에 들어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교양철학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때는 이미 한국엔 굴뚝소제부가 사라진 뒤였다. 노동부 산하기관에서 펴낸 '한국 직업사전'에는 굴뚝청소원이 사라진 직종이라고 명기했다.

 

추기 2 : 굴뚝소제 얘기는 유태인의 생활철학서 탈무드 첫머리에 등장한다. 청년이 랍비에게 찾아와 탈무드를 가르쳐달라고 한다. 랍비는 그에게 문제를 내 테스트한다. "두 아이가 굴뚝소제를 했다. 한 아이는 검댕이 심하게 묻었고 한 아이는 깨끗했다. 누가 얼굴을 씻겠는가?" "그야 더러워진 아이지요." "틀렸다. 소년들이 서로 얼굴을 보고 상태를 알 것이니 오히려 깨끗한 아이가 씻는다. 너는 탈무드를 배울 자격이 없다." "한번만 더 문제를 내 주십시오." 또 똑같은 상황, 똑같은 질문. 의기양양해진 청년 "알겠습니다. 얼굴이 깨끗한 아이입니다. "틀렸다. 너는 탈무드를 배울 자격이 없다. 속이 시커먼 굴뚝을 청소했는데 어떻게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있을 수 있느냐. 두 아이 모두 얼굴을 씻는다." "?!"

 

'철학과 굴뚝소제부'의 도입부에도 소개돼 유명한 이 일화는 정치판을 비유할 때도 많이 사용된다. '굴뚝 속 같은 정치판' '속에 숯 검댕이 가득 차있는 정치' 비유가 많이 나왔다. 칼럼도 실렸다. 요즘과 별로 다르지 않다.

 

굴뚝은 한때 근대화의 상징, 부의 상징으로 운위되었으나 환경공해문제로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지금도 70년대부터 공해를 내뿜는 공장굴뚝에 대한 민원이 제기되기 시작해 요즘도 끊이지 않는다.

 

추기 3 : 우리나라에선 굴뚝소제부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독일에는 굴뚝청소 전문학교도 있다. 고수입이 보장되는 굴뚝청소원을 하려면 이 학교 3년 과정을 마쳐야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아침에 굴뚝소제부를 만나면 재수가 있다는 속설이 있다. 굴뚝소제부가 굴뚝 속에서 반란 모의를 듣고 황제에게 알려 반란을 막았는데 이후 황제의 명으로 굴뚝소제부를 보면 꼭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파시여, 다시 한 번

항구는 이미 수백 척의 배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내항 좁은 수로를 따라 통통배가 연이어 들어온다. 고기를 엄청나게 잡아 설까, 배마다 중갑판이 미어터질 듯 뺑뺑하다. 오색 만선기(滿船旗)아래 검게 그을린 어부들은 신이 났다. 얼싸안고 춤을 춘다. 징과 꽹과리를 치며 목청껏 노래를 불러댄다. "칠산 바다에 뛰노는 조기/ 우리네 그물로 다 들어왔네." 뒤를 바짝 따르는 운반선 선원들이 후렴을 받아 화답한다. "지화자 좋다~ 어 헤요, 에 헤요!"

 

 

 

파시(波市), 바다에 선 어시장

 

흑산어장 초만원사례
1966. 5. 3 [동아일보] 1면

파시(波市)다. 풍요다. 모든 게 넘친다. 섬은 생선과 어부와 술, 그리고 아낙으로 가득 찼다. 뿐인가. 생선 쪼가리를 찾아 날아든 갈매기 떼마저 부두 하늘을 메웠다. 위판장과 주변엔 파리도 끓는다. 얼굴이건 생선에건 날것이 앉으면 귀찮아 손을 휘휘 젓지만 사람들 입가엔 웃음이 함박처럼 걸렸다. 조기가 벌써 몇 동(1동은 1천 마리)이 풀렸는가. 그 돈이 얼마인가. 한잔 걸친 기분은 왜 이다지 좋은가. 아아, 세상살이가 제발 오늘만 같았으면, 넘치고 흥청대 웃음꽃 가득한 파시가 오늘처럼만 열린다면….


파시는 바다에 선 어시장이다. 그물 가득가득 잡혀 올라오는 고기를 처분하러 뭍에 나갈 시간조차 아까운 배들이 어장에서 바로 운반선에 생물을 넘겼다. 그 바다가 파시다. 검푸른 파도에 목숨을 걸지만 만선만 되면 목숨 값을 두둑이 챙기는 사나이들. 한없이 거칠고, 뭍에의 그리움에 가슴이 단 사나이들이 평생을 품에 안고 사는 시장이 또 파시다. 그 바다 장터가 가까운 뭍과 섬의 항구로 옮겨지자 술과 여인이 숙명처럼, 철새처럼 따라붙었다. 그렇다. 파시 대박은 혼자 오지 않는다. 나눠가져야 진정한 파시다.

 

 

 

풍요의 대명사 '서해바다 파시'

 

1970년대 중반까지 서해바다 파시는 풍요의 대명사였다. 90년대 부동산 돈벼락 때 "개도 포니를 타고 다닌다."는 말이 유행했듯 60-70년대 서해 파시에선 "새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말이 돌았다. 전남 흑산도 파시, 전북 위도 파시, 경기 연평도 파시는 조기어장의 3대 파시로 유명했다. 동 남해안의 삼치 멸치 고등어 오징어 파시도 있었지만 흥청거리고 북적대 한몫 두둑이 챙겨나가기는 조기 파시와 비길 바가 아니었다.


동지나해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는 봄에 황해를 거슬러 산란 길에 오른다. 3월 흑산도, 4월 칠산어장(전남 영광앞바다 위도근해), 5월 충남 격렬 비열도를 거쳐 연평도와 황해도 장산곶에 이르러 알을 낳는다. 그때의 바다는 목만 잘 잡으면 그야말로 '고기 반, 물 반'이다. 진정한 풍어, 진짜 대박은 그때 단 한 번 그물질로 만선이 되는 것이었다. 유자망(바다 속에 커튼처럼 내려 그물코에 물고기가 걸려들게 하는 그물)을 딱 한번 내렸다 올릴 뿐인데도 고기가 가득해 미처 떼지도 못하고 그물째 입항해야 진짜 만선풍어였다.

드높은 만선
1973. 4. 18 [경향신문] 5면

 

그래야 출어경비도 별로 안 들었고 첫물 조기라 값을 꽤 받았다. '해방 후 최대 풍어'라던 1966년 흑산 파시에는 첫 그물에 조기 80~120동을 잡은 배들이 오색 만선기를 펄럭이고 꽹과리를 치며 예리 항으로 들어오곤 했다. "황금에 덮인 흑산도"라는 신문제목이 나올 정도로 대풍을 맞은 그해 흑산 어장에는 전국에서 당도한 2천여 척의 어선이 바다에 잔뜩 깔렸다. 마치 옥쟁반에 콩을 뿌린 듯 드넓은 바다에 점점이 깔린 배들마다 그득그득 조기를 끌어올렸다. 흑산 어업조합은 그해 1월부터 4개월간 조기어획량이 4백58만kg, 1천5백28만 마리, 3억4천5백만 원어치라고 밝혔다.

 

 

 

만선의 기쁨이 가득한 어시장, 어둠이 깔리면..

 

서해의 초하 '바다의 집시 아가씨'
1962. 5. 28 [동아일보] 3면

이러니 밤의 흑산도는 그야말로 '니나노 세상'이었다. 선창가에 기다랗게 늘어선 목조 2층 건물마다 어부들이 들어차 동이 틀 때까지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골목길에선 팔도 사투리가 다 쏟아졌고 거친 사내들의 주먹질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쇠 젓가락으로 주전자 두드리는 소리에 간드러진 웃음이 잦아들고 대박을 맞은 뱃사람들은 '마도로스 인심'을 팍팍 썼다. 다음날 아침 헛돈을 뿌린 게 아까워 쓰린 속을 부여안고 해장술을 켰지만, "까짓 것 한 항차만 더 나가 한 번 더 대박을 터뜨리면" 금세 만회가 될 것이었다.


파시는 밀물 썰물처럼 옮겨 다녔다. 어떤 어장에서 고기 대박을 터트리느냐에 따라 파시는 이동했다. 선착장에 갈매기와 여인네가 얼마나 보이느냐로 파시의 규모를 알 수 있었다. 76년 흑산도 예리 항구의 상주인구는 3백12가구 1천7백여 명이었으나 5월 파시 때는 어부와 철새 아가씨 등 3천여 명이 늘어난 5천명이 복작거렸다. '명동보다' 더 붐비고 물가도 비싸다는 이곳 선창가에는 밤새 여는 다방 7군데, '관' '장'자 돌림으로 된 술집과 음식점 여관이 80개소, 이발소만도 네 군데나 됐다.

 

물가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74년 흑산 파시를 취재한 신문에 따르면 생선찌개 한 냄비는 무조건 1500원, 맥주 안주로 나오는 땅콩 한줌에 500원이었다. 개다리소반에 술 한상을 보면 못 잡아도 1만원은 나왔다. 술값만 비싼 게 아니었다. 80원이던 환타 한 병이 150원, 70원짜리 비누 한 갑은 130원이었다. 또 30원이던 하이타이가 60원, 30원이던 연탄 한 장이 90원이나 해 거의 모든 물가가 육지의 최소 2배, 많게는 4-5배까지 받았다. 오죽하면 억울함을 못 이겨 담벼락에 "손님은 곰이다"는 낙서를 대문짝만하게 써놓기까지 했겠는가.


아이러니한 것은 날씨가 좋아 어군을 제대로 쫓아야 풍어를 바라보지만 파시 장사꾼, 특히 여인네들은 오히려 날이 궂기를 기원했다는 점이다. 산꼭대기에 올라 고기잡이 선단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여인들은 "바람아, 강풍아 석 달 열흘만 불어라, 우리 님 보고 싶어…"를 소리 내 읊조리기도 했다. 기상상황이 안 좋으면 배는 조업을 중단하고 가까운 항구로 피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라도 님을 만나고 싶다는 염원이 거기 담겼다. 파시에서 맺어진 한두 푼 풋사랑일 망정 그리움을 잉태하는 건 여느 사랑과 같았다.

흑산도의 이모저모 '파시엔 낙조만이'
1974. 5. 9 [동아일보] 7면

 

 

 

70년대부터 내리막길을 걷게된 파시

 

「파시」가 사라져간다
1974. 5. 7 [동아일보] 7면

그러나 파시는 60년대 말을 절정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어업협정 체결 이후 반짝했던 어획고는 장비 기술면에서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 한국의 완패로 빠르게 귀착돼갔다. 게다가 69년에는 북한의 무장간첩선 침투 루트를 막는다며 서해 어로한계선을 남하한 탓에 조기잡이 어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연평도 주어장과 서남방의 '밧세 어장', 백령도 남방 '서청골 어장'에서의 조업을 사실상 금지한 조치로 이때부터 조기 철 최고의 바다시장, 연평파시는 이름만 남긴 채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위도 파시도 위기에 처했다. 70년 서해바다의 조류가 바뀌며 조기보다 삼치가 더 많이 잡히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칠산어장 최대의 항구 위도 파장금 항에선 그해부터 삼치파시가 서기 시작했다. 대일 활선어 수출선이 상시 정박해 칠산어장에서 잡힌 삼치를 바로 일본으로 빼냈다. 흥청거리던 조기파시의 맛을 아는 사람들은 부두 위판장에 잠깐 스칠 뿐, 바로 일본으로 나가는 삼치 장은 파시가 아니라고 항변했다. "진짜 파시는 말이여, 파장금에서 멀리 칠산 어장까지 배를 건너뛰어 갈 수 있었당게! 어느 배에나 조기가 그득했어! 부안이나 영광에서 밤에 바다를 보면 휘황찬란한 불배들이 섬을 이룬거라, 그게 진짜 파시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여, 다시 한번! 

 

74-76년 흑산도에서는 거의 끝물 파시가 열렸다. 어획량이 급감하자 당국이 어로자금을 풀어 어선의 현대화 대형화를 유도했고 덩치가 커진 배들이 남지나해상까지 진출해 고기를 잡아온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79년 언론은 "파시는 옛말이 됐고 조기는 금값"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기 어획이 10년 전의 반의반 정도로 줄었다는 것이다. 가령 69년 인천항에는 참조기 6410톤이 입하됐으나 5년만인 74년 4924톤, 9년째인 78년 1675톤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줄었고 79년엔 겨우 640톤만 입하됐다고 했다. 그나마 참조기는 거의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들이 커지자 섬의 작은 항구에 파시가 서는 일이 없어졌다. 고기잡이 기술과 장비가 늘면서 알밴 조기를 그야말로 '일망타진'하니 연안의 고기가 사라졌다. 게다가 지구온난화 탓인지 수온과 조류조차 들쭉날쭉해 많던 고기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흥청거리고 질펀했던 파시가 섰던 자리는 이제 관광선이나 외지인을 위한 낚싯배 부두로 변했다. 새해 아침이면 한해 조기 고등어 삼치파시가 자주 열려 돈벼락이 떨어지기를 고대했던 섬사람들은 거의 뭍으로 떠났고 이젠 파시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조기 흉어에 한숨만 만선
1977 5. 16 [동아일보] 7면

 

 

2011년 새아침, 그래도 '넘치고 흥청대 웃음꽃 가득한 파시'가 우리 삶 속에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파시여, 다시 한 번.

 

겨울한강의 얼음낚시

치받쳐 오르더니 미끄러지듯 쑤욱 잠기는 찌. "걸렸다!" 낚아채는 손끝이 재빠르다. 솜바지에 군용파카, 어깨부터 머리까지 칭칭 휘감은 목도리, 두툼한 소가죽장갑. 그렇게 중무장한 몸에서 어떻게 저런 잽싼 동작이 나올까. 얼레 줄을 당겨 감으며 낚시꾼은 신이 났다. 조금 전 나직이 "걸렸다!" 혼잣말을 했지만 이젠 흥에 겨워 "걸렸다~ 걸렸다~" 노래하며 줄을 당긴다.

 

그래도 코끝은 강추위에 빨갛게 얼었다. 입에선 기차화통처럼 흰 김이 뿜어져 나온다. 금세 잉어 한마리가 얼음바닥 위로 올라왔다. 펄떡이는 놈을 보며 꾼은 "어, 그놈 크다! 두 자(尺)도 훨씬 넘네!" 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른 꾼들도 일제히 "야아!" 환성을 지르며 발을 둥둥 구른다. 다른 낚시와는 다르다. 소리치고 발을 굴러야 강바닥 고기들이 움직이고 물린다는 것이다.

 

 

 

꽁꽁 언 한강 가운데 구멍을 뚫고 낚시?

 

강 한가운데다. 그것도 서울한강 한가운데, 인도교 부근이다. 배낚시가 아니다. 꽁꽁 언 강심에 끌로 구멍을 뚫고 그 속에 삼봉낚시를 내렸다. 꾼도 한둘이 아니다. 10여 명이 옹기종기 썰매 같은 나무판 위에 곰처럼 웅크려 전을 폈다. 다들 많게는 예닐곱 대씩 견지를 놓았다. 이따금 철교 위를 우르릉대며 달려가는 기차소리에 얼어붙은 강도 깜짝 놀라 쩡-쩡- 함께 운다.

 

 

신나는 은반의 향연
1961. 12. 15 [경향신문] 3면

워낙 추워 설까, 어부들은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찌만 노려본다. 칼바람이 회오리쳐 눈과 얼음 파편이 뺨을 때려도 미동조차 않는다. 강둑에서 보면 하얀 눈밭에 점점이 먹물을 친 한 폭의 동양화처럼 보이리라. 아, 그랬다. 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 한강은 도시인에게 이런 멋진 볼거리를 선사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유롭고 기분 좋은 그림을 그려줬다.

 

강추위로 한강이 결빙됐다지만 강심을 걸어보지도 못하는 요즘 생각하면 참 옛날이야기다. 50-60년대엔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지프차가 다닌 적도 있었다. 왕십리 지나 뚝섬이나 그 위쪽 한강에 나가보면 트럭 자국도 나있곤 했다. 그러니 겨우 20여 군데 구멍을 뚫고 얼음낚시를 하는 것이야 일도 아니었다. 30~50cm 두껍게 언 강 위에서 쿵쾅거리고 달려도, 수백 명이 썰매를 타거나 스케이트를 지쳐도 얼음이 꺼질 일이 없었다.

 

서울한강의 결빙여부는 한강대교 노량진 쪽 2~4번째 교각의 상류 100m 지점에서 관측한다. 1906년 현대식 기상관측을 시작한 해부터 그랬다. 종로에 있던 관측소(현 기상청)에서 접근성이 좋아 그곳을 관측점으로 잡았다. 물살이 빠르고 수심도 깊어 웬만해선 얼음이 얼지 않는 곳이라 여기가 얼어 강물이 안 보이면 다른 곳도 모두 결빙된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1906년 이후 한강이 하루도 얼지 않은 해는 모두 7번 있었다. 1960년에 처음으로 얼지 않았고 70년대엔 3번이나 강이 얼지 않았다. 이후 88년, 91년, 그리고 2006년에 단 하루도 한강은 얼지 않았다. 물론 기록과 실상은 다른 측면이 있다. 한강종합개발이 완료된 80년대 중반 이후 한강은 얼었다 해도 사람이 내려가 걸을 수 없는 살얼음 강이 됐다. 70년대 이전엔 말 그대로 꽝꽝 언데다 30-40일씩 연속으로 결빙상태를 유지해 각종 빙상 놀음이 가능했다. 겨우내 한강 결빙일수는 40년대 69일, 50년대 43일, 60년대 35일, 70년대 32일이었으나 90년대엔 8일로 급속히 떨어졌다.

53년래에 처음, 얼지 않는 한강
1960. 1. 13 [동아일보] 3면

 

 

 

추위 앞에도 여유롭기만, 내가 바로 강태공!

 

한강 얼음치기 반세기, 강태공 강순종 노인
1977. 1. 8 [경향신문] 5면

어쨌든 과거 겨울한강의 얼음낚시는 '한파 엄습'을 알리는 시적(詩的)도구였다. 언론은 추위가 왔다 하면 부리나케 한강에 달려가 강태공 사진을 담아왔다. 77년 1월, 경향신문은 광나루에서 진짜 강 씨 성을 가진 '강태공' 강순종 씨(61세)를 만난 사연을 기사화했다. 꽝꽝 얼어붙은 위에 눈까지 내려 백색 세상이 된 강심에 견지 대를 드린 그의 모습은 여유, 그 자체였다.

 

강 씨는 열다섯부터 46년간 한강에서 어부를 하며 살아왔다. 광나루에서 태어나 평생을 거기 살았고 봄여름 가을 겨울 없이 서울한강과 팔당 양평한강까지 고기를 찾아다녔다. 강이 얼지 않으면 마상이(노로 젓는 작은 배)를 타고 강을 오르내렸으며 겨울엔 동료들과 얼음 치기로 잉어 붕어를 건져 올렸다. "고기값? 한 근에 500원씩 장사꾼한테 넘겨주지. 예나 지금이나 잉어 값은 쌀값을 따라가, 잉어 한 근이 쌀 두 되 값이야."

 

 

한강에서 얼음낚시를 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전문 어부다. 생업이 고기를 잡는 일이란 얘기다. 휴일에 종종 회사원 낚시 광들이 나름대로 무장을 하고 한강에 나오지만 목을 제대로 못 찾고 추위도 못 견뎌 이내 철수하곤 한다. 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이겠다고 버너에 고추장 야채까지 싸들고 오는 호사가도 있지만 손맛 한 번 못보고 얼음장 위를 걸어 나가기 마련이다. 전문어부들이 일하다보니 한강에도 바다처럼 파시가 생기기도 했단다.

 

"팔당 '밸미'에 '말등바위'란 게 있는데 잉어가 어떻게나 많이 잡히는지 말 등에 실어 날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야." 일제 시절엔 아래 팔당, 위 팔당 열두 바탕(고기가 잘 잡히는 곳)에 하루 낚배 백여 척에 2,3백 명 낚시꾼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잘 잡는 이는 20여 마리 60-70근씩을 거뜬히 건져 올렸으며 자연히 '잉어 경기' 따라 술파는 여인들이 몰려들었다는 것. 흑산도 위도 등 바다뿐 아니라 한강에도 파시가 섰다는 증언인 셈이다.

조는 낚시에 강심도 웃고 햇빛도 웃고
1969. 1. 13 [매일경제] 3면

 

 

 

"그런데 말이야, 요즘 뚝섬 아래쪽 한강에서 나는 고기는 찌개를 하든 고아먹든 석유에 담가놓은 것처럼 기름내에 절어있어. 고기 맛이 안 나." 그러니 낚배도 광나루 밑으로는 안 내려가고 얼음낚시 역시 그 곳 상류에서만 한다는 것이다. 노들강(노량진), 서강(서강), 동작강(동작동), 조강(김포), 용호(용산동)에 동호(금호 옥수동)까지 하류로 진출해 펼치던 낚시 판이 쫓기듯 동쪽으로 밀려났다는 얘기다.

 

 

 

 

한강이 얼지 않는 이유는? 개발과 오염이 원인

 

 

혹한에도 얼지않는 한강의 이변
1977. 2. 1 [동아일보] 7면

바로 그해 2월 동아일보는 '혹한에도 얼지 않는 한강의 이변'을 보도했다. "영하 10도 이하 강추위가 연거푸 며칠 계속되는 데도 한강은 예처럼 강심까지 꽁꽁 얼어붙는 일이 드물다"로 시작하는 기사는 그 원인을 공해에서 찾았다. 연세대 공해연구소장 권숙표 교수는 *수질 오염 *유속 유량의 변화 *하수의 가열효과 *한강상공 대기에 의한 온실효과 등이 복합 작용해 한강이 '부동강(不凍江)'이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당시 한강에는 매일 173만t의 하수가 흘러들었다. 그런데 한강의 하루 평균 유량이 5천만t이므로 결국 한강물 30t 중 1t은 도시하수라는 계산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엄청난 하수는 오염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수온을 덥히기도 해 한강이 쉽게 얼지 않을 뿐 아니라 얼었다가도 금방 녹아내린다는 설명이었다.

 

 

 

71, 72년 2년 연속은 물론 78년에도 한강이 얼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래도 67년까지는 한강의 이른바 특설링크에서 전국 65개교 어린이들이 참석한 초등학교 빙상대회와 4도시 빙상대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후 한강에서의 공식대회는 자취를 감추었다. 바로 이때부터 낚시꾼들도 서서히 상류로, 상류로, 한남동을 거쳐 뚝섬 광나루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70년대에는 한강에서 썰매나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들이 얼음이 깨져 익사하는 사고가 빈발했다. 주로 잠실 아래, 청계천 중랑천이 합류해 하수가 강에 유입되는 지점 하류에서 난 사고였다. 공해연구소 지적처럼 얼어봤자 두께가 얇고 또 어는 둥 마는 둥 녹아버려 일어난 사고였다. 이런 한강이니 전문 얼음낚시꾼들이 웬만해선 발을 들이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추억이 살아숨쉬는 곳, 그 시절 한강이 그립다

 

 

88서울올림픽에 맞춰 한강종합개발이 이뤄진 후 유량도 훨씬 늘고 유속도 빨라졌다. 오염을 방지하고 강의 청정도를 높였지만 물이 깊어지고 흐름이 빨라져 당연히 얼음도 얇게 얼었다. 기상대에서 "한강이 얼었다"고 발표해도 강심 얼음두께는 1-2cm에 불과한 적도 많았다. 94년 겨울 모처럼의 추위가 몰려와 한강이 얼었다는 소식에 낚시꾼과 썰매를 즐기려는 아이들이 몰렸으나 서울시는 청원경찰까지 동원해 이들의 진입을 막았다. 자칫 조금만 강 안쪽으로 들어갔다 얼음이 깨지면 대형 참사로 이어질까봐 취한 조치였다.

 

물론 개발이니 오염 온난화가 문제되기 이전에도 '이상난동'(춥지 않은 겨울)이 없었던 건 아니다. 64년 1월, 삼동에도 한강이 얼지 않고 남녘에선 꽃소식까지 있다며 신문은 호들갑을 떨었다. 한강변에 빨래 감을 들고 나온 여인들이 줄을 이뤄 쭈그려 앉아 소매를 걷어붙이고 빨래하는 모습을 항공 촬영해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2월13일 한강은 꽁꽁 얼어붙어 관측사상 가장 늦은 결빙일로 기록되기도 했다.

한강변의 기적 얼지않는 삼동
1964. 1. 15 [동아일보] 7면

 

 

 

한겨울에 얼음낚시를 하는가 하면 날이 풀려 수다도 풀리는 빨래터가 되기도 했던 한강. 얼음이 얼면 강변에서 조약돌을 던져 한없이 미끄러지게 하고 좋아 환호하던 추억의 놀이터. 언젠간 썰매로 강을 건너보겠다는 '거창한' 꿈도 갖게 했던 강. 지금의 각지고 번듯해진 강, 조금만 얼음이 얼면 안전상 부신다는 그 강보다 왜 그 시절 추억의 강이 더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설을 못 쇠게 하라

아이는 신이 났다. 때때옷이 요렇게 잘 맞을 수가 없다. 바느질을 하던 엄마 곁에서 언제 잠이 들었을까. 흔들려 깨보니 설빔 색동저고리가 머리맡에 놓여있다. 후다닥 이불 속을 빠져나와 옷을 집어 든다. 소매에 팔을 넣자 빠작빠작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상큼하다. '와~ 날아갈 것 같아'. 차례 상 준비에 분주하던 엄마도 기분이 좋은가 보다. "우리 아들 예쁘다, 옷이 날개네!" 할아버지 눈길 또한 그윽하다. 야! 신난다. 설날 아침이다.

 

저녁엔 제대로 잠을 못 잤다. "설날 동이 트는 걸 안 보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졸린 눈을 몇 번이고 부릅뜨곤 했다. '엄마랑 고모들이 흐릿한 전등 아래 바느질을 했었는데…', '잠들면 눈썹이 센다고 했는데…' 불현듯 놀라 거울 앞에 달려가 본다. 눈썹은, 여전히 까맣다! '그러면 그렇지, 하얘질 리 없어'. 공연히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데 고모들이 와락 웃음을 터뜨린다.

 

시골집이다. 아버지는 끝내 못 오셨다. 매번 그렇다. 양력 1월1일엔 서울에서 설을 지냈다. 그저 가족이 둘러앉아 떡국만 먹는다. 아버지는 수저를 놓기 바쁘게 직장 어른들에게 세배를 나간다. 그러나 오늘, 음력 정월초하루, 진짜 설은 다르다. 전국 일가친척이 모두 시골집에 모였다. 조상께 차례지내고, 어른께 세배하고, 세뱃돈 받고, 윷놀이도 한다. 다만 공무원인 아버지는 예외다. 설날에도 일하기 때문이다. 양력 대신 음력설을 쇠러 시골에 가는 걸 윗사람이 알면 불이익을 받는다고 했다.

 

 

 

정부 '새해맞이는 모두 양력설에 하라'

 

이중과세 폐지는 말뿐…관공서도 개점휴업
1967. 2. 9 [동아일보] 7면


1970년대 설 풍경이다. 80년대 후반까지 정부가 정한 설날은 양력 1월1일 뿐이었다. 고향방문과 차례, 세배, 떡국 먹기부터 윷놀이에 널뛰기까지 새해맞이를 모두 양력설에 하도록 정부는 몰아갔다. "허례허식, 이중과세(二重過歲. 이중으로 해맞이를 하는 일)를 하지말자"며 음력설 추방캠페인도 벌였다. 60-70년대를 산 사람이라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었던 허례허식이니 이중과세는 양력설 음력설을 다 쇠고 돈 있는 걸 자랑하듯 차례 음식을 과하게 차려 낭비하는 일을 지칭했다.


참 난감한 노릇이었다. 요즘이야 설을 양력으로 쇠건, 음력으로 쇠건, 아니면 둘 다 쇠건, 몇 날 며칠을 쇠건 뭐랄 사람이 없다. 능력만 닿는다면 한 달 내내 설 기분을 내고 놀이를 한들 대수일까. 오히려 그런 집이 있다면 TV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프로 소재로 삼아 취재경쟁에 나설지 모르겠다. 그러나 옛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양력 음력설을 다 '먹고 노는 게' 싫었다. 그래서 양력설만 쇠고 음력설은 쇠지 못하도록 갖가지 수를 냈다.

 

1월1일부터 사흘은 휴무일로 정했지만 음력설엔 하루도 못 쉬게 했다. 공무원은 물론 민간기업도 그런 지침을 따라야 했다. 몰래 나가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하는 사람이 생길까 봐 그날엔 휴가나 출장도 보내지 말라고 공문으로 지시했다. 그뿐인가. 방앗간에는 설날 며칠 전부터 떡을 찧지 말라고 종용했다. 떡이 없으면 차례를 못 지내고 떡국도 못 끓여 먹을 터였다. 웬만큼 배짱 좋은 사람도 음력설을 쇠려면 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음력설 푸대접' 일제 시대의 잔재

 

정부는 음력설은 옛날에나 쇠던 설, '구정(舊正)'이라고 불렀다. 사실은 그 명칭부터가 일제 잔재였다. 대한제국은 친일세력이 주도한 을미개혁 이후 1896년부터 양력설을 정초(正初)로 삼았다. 그러나 민간에선 그걸 따르지 않았다. 관청과 일부 개혁인사들만 보란 듯이 '일본 명절' '서양 설'을 쇠었고 백성들은 그런 이들을 비웃기 일쑤였다. 문제는 일본이 한국을 삼키고 강압적으로 양력설만 쇠도록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들은 음력설을 쇠는 조선인은 불령선인으로 몰아 압박했다. 설을 앞두고 고등계형사들이 방앗간에 나가 영업을 하는지 감시하고 설빔을 입고 나온 조선 사람을 보면 옷에 먹물을 뿌렸다. 일이 그렇게 돌아가자 백성들은 양력설을 '왜놈 명절'이라며 더욱 경원하게 됐다. 음력설에 몰래 조상에게 술 한 잔 올리고 성묘하는 것을 "민족정신을 굳게 지키고 일본인들의 식민지배에 항의하는 운동"으로 여기기도 했다.


구정철시…거리는 조용하게
1972. 2. 15 [경향신문] 1면

 

작가 조흔파 씨는 "일본인들은 음력설을 못 쇠게 하려고 설날에 부역을 시키고 푸줏간과 방앗간을 강제 휴업시키곤 했다"며 "당시 일본인 몰래 음력설을 쇠는 건 민족정신을 잃지 않겠다는 기개의 표시였다"고 술회했다. 상황이 그러니 해방만 되면 기필코 우리 명절을 되찾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다짐한 건 무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다짐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자유당 정부가 49년 신정을 유일한 설이자 휴무일로 지정해버렸던 것이다.


거기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종전에 쓰던 단기연호를 서력으로 바꿨다. 당연히 양력 1월1일이 새해의 첫날로 굳었고 음력설은 한 계단 더 뒤로 물러앉았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정부조치와 다르게 명절을 쇠고 있었다. 양력설은 쇠는 둥 마는 둥하고 음력설을 진짜 명절로 보냈다. 농어촌은 거의 100%, 도시에서도 3/4 이상 가구는 음력설을 쇠었다.

 

 

 

여러 압박 속에도 음력설을 쇠던 국민들

 

뼈속에 밴 '겨레의 설'…'구정 공휴'의 열기
1978. 1. 31 [동아일보] 5면


귀성열차나 버스표가 동나고 암표가 나도는 건 음력설이나 추석 때지 양력설이 아니었다. 제조공장이 들어선 공단에선 근로자 귀성을 돕느라 전세버스를 계약했고 설탕 한과 등 선물도 준비했다. 사람들은 일제 36년 억압 속에서도 꿋꿋이 지킨 고유명절을 휴무일이냐 아니냐 여부로 무시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새해 무렵엔 음력설을 제대로 쇠게 해달라는 민원도 끊임없이 제기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선물 주고받기를 강력히 단속한 62년의 설 풍속은 흥미로웠다. 그해 음력설 주부들은 떡 방앗간에 들고날 적마다 누군가 감시하는 건 아닌지 신경을 곤두세워 주위를 살피곤 했다. 정부가 이중과세를 못하게 강원도 지역 방앗간을 봉쇄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금세 소문이 돌아 사람들이 몸을 사린 것이었다. 급기야 경찰은 "방앗간을 봉쇄한 적도 없고 구정을 쇤다고 단속하지도 않는다."는 담화를 발표하기 이르렀다. 유언비어가 돌고 민심이 흉흉해진 탓이었다.

 

신문들은 그 상황을 묘하게 분석했다. "신정에는 방앗간이 한산했는데 구정에는 왁작하게 붐볐다. 그런데 이것이 당국의 설 선물 단속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였다. 즉 신정 때 당국이 선물이나 돈을 주고받는 걸 암행 감찰하는 바람에 시중에 돈이 안돌아 많은 집이 명절음식을 차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양력에는 못했으니 음력설엔 엎어지더라도 조상께 차례를 지내야 한다."며 눈치코치 살피며 떡을 찧어 제사음식을 장만했다는 거였다.

 

 

 

음력설, 민족의 명절로 재탄생하기까지..

 

"설은 음력설이 진짜"라는 민심이 워낙 거셌기 때문일까. 63년 최고회의는 "구정을 '농어민의 날' 국경일로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양력설은 그대로 두되 음력설 하루를 쉬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문제가 제기되자 이미 양력설에 길들어 반대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중과세를 양성화하고 가뜩이나 많은 노는 날을 더 늘린다는 이유였다. 세계가 모두 양력을 쓰는데 우리만 고리타분하게 음력을 되살려 국제화에 역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았다.


바라던 바였던지 정부는 바로 "구정을 공휴일로 하는 건 시대에 맞지 않고 여러 가지 낭비가 뒤따른다."며 백지화했다. 이후 공화당이 선거를 의식해 음력설을 경조일이나 민속의 날로 지정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공론에 그쳤다. 이는 누구보다 박정희 대통령이 반대해 성사되지 않은 측면이 컸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착안해 한국의 유신을 이끈 그는 구정 공휴일화는 산업 경제를 일으키는 것과는 거꾸로 가는 일이라며 반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음력설을 '농어민의 날'로
1963. 1. 15 [경향신문] 5면

 

옛 정취를 듬북 '민속의 날'
1985. 2. 14 [경향신문] 9면


70년대 내내 박대통령은 음력설날 중앙부서 연두순시를 하거나 기관장회의를 열어 근무기강을 다잡곤 했다. 75년 국무회의에선 "정부가 이중과세를 않도록 국민을 지도 계몽하는 방침에 전혀 변화가 없다"고 새삼 강조하고 "공무원부터 솔선수범해 두 번 설을 쇠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78년 최규하 총리는 "구정 날 공무원이 정시에 출퇴근을 하는지, 근무 중 자리를 뜨지는 않는지 철저히 감시하라"며 '집안단속'을 주문했다.


공직사회에서도 출근을 않거나 조퇴해 설을 쇠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지시를 계속 내린 것으로 볼 수도 있다. 81년 조사에 따르면 음력설을 쇠는 국민은 전체의 81.8%에 이르렀다. 이런 압도적 다수의 음력설 선호에 따라 그해에도 '구정 공휴일화'가 논의됐으나 또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총무처는 "구정을 쇠는 이들이 대부분 고령, 저학력, 저소득층에 농어촌 사람들"이라며 "질과 수준으로 미뤄 불합리한 보수성, 관습의 무의식적 추종과 막연히 놀고 싶다는 생각에 기인했을 것"이라고 국민을 무시하는 표현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부활한 음력설…사라져 버린 설 풍습

 

그러나 절대다수 국민이 쇠는 명절을 언제까지고 이중과세 방지란 명목으로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85년 정부는 음력설을 하루 휴무, '민속의 날'로 제정했다. 그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89년 '구정'은 '설날' 이름을 다시 얻어 국민에게 되돌려졌다. 근 1백년 양력설에 밀려 숨어 쇠던 진짜설이 명실상부한 민족의 명절로 재탄생한 것이다. 전래의 미풍양속까지 정부의 지침과 규제로 밀어붙이는 일이 더 이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중과세 굴레에 묶여 푸대접을 받는 동안 우리 고유 설 풍습은 많이 잊어지거나 사라져 버렸다. 정식 명절이 아닌 풍습 정도로 격하된 채 지낸 세월이 길다보니 조금이라도 번거롭거나 힘든 일은 자연스레 도태된 것이다. 설빔을 직접 바느질하는 건 완전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복조리를 사는 일도, 체를 대문에 걸어놓아 야광귀가 촘촘한 구멍을 밤을 세다 새벽을 맞아 물러간다는 풍습도 사라졌다. 올해는 윷놀이나 연날리기 등 모처럼 왁자지껄한 시골 풍경조차 구제역 탓에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답답하다.


사라져 가는 고유 설 풍속
1978. 1. 9 [동아일보]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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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은 때때옷 입고 세배하는 날.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설을 맞아 조상께 차례를 올리고, 가족·친척들이 한곳에 모여 덕담을 나누며 서로간의 복을 빌어주고 흥겹고 즐거운 놀이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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