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結局)이란 단어가 있다. ‘마지막에 이르러’라는 뜻이다. 이건 원래 풍수 용어이다. 산줄기의 마지막 부분에 정기가 뭉쳐서 국(터)을 만든다는 것이다. 마지막 부분에 에너지가 집결되어서 자리 또는 명당을 만든다. 그러니까 산꼭대기에는 명당이 드물다는 이야기이다. 호박이 가지 끝에 열매를 맺듯이 풍수에서는 산줄기의 아래쪽 끝자락에 제대로 된 터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런 ‘결국’의 관점에서 산을 바라다보면 산의 정상보다는 낮은 쪽의 끝자락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일반 등산객과 풍수가의 산을 보는 관점이 다른 것이다.
결국의 관점에서 지리산 끝자락을 보면 눈에 들어오는 암봉이 있다. 바로 노장대(老將臺)이다. 커다란 바위군이 마치 늙은 장수처럼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같다.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서 지리산 줄기를 바라다보면 천왕봉에서부터 중봉, 미타봉을 거쳐 그 끝자락에 이 노장대가 있다. 해발 1200m 높이쯤 된다. 멀리서 보면 약간 뾰쪽하게 생긴 바위 봉우리가 마지막 자락에 높이 솟아 있다. 도로 옆을 지나가다 보면 이 바위 봉우리가 눈을 잡아 끈다. “아! 저 봉우리에 기운이 뭉쳐 있겠구나!” 지리산의 영랑대(永郞臺)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산꾼 이영규(63) 선생에게 도로를 오가면서 눈여겨보았던 저 봉우리를 한번 가보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 “저기 가면 주변에 바위굴이 많습니다. 송대마을에서 올라가면 한 2시간 반이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송대마을은 함양군 휴천면이다. 노장대에 올라가기 위해 먼저 송대마을부터 들렀다. 그런데 이 마을도 물건이다. 지리산 동북쪽 해발 500m가 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옆으로는 계곡을 끼고 있고 동네 뒷산으로는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을 한 와불산이 굽어보고 있는 형세이다. 지리산은 동북쪽에서 향이 좋은 나물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반음반양(半陰半陽)의 기후조건이라서 그렇다. 나물은 너무 햇볕이 강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응달이 져도 적합하지 않다. 적당히 햇볕이 들고 적당히 그늘이 져야 한다. 사람 성격도 반음반양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송대마을 쪽에서 나오는 나물은 가격이 비싸다.
송대마을에는 80대 여걸 산꾼이 산다
봄이 오면 이 나물 생각이 난다. 두릅, 곰취 등등이다. 송대마을에는 60년 넘게 지리산 동북쪽에서 나물을 뜯으며 살아온 박영남(84) 할머니가 민박집을 하며 살고 있다. 60년이 넘게 온 산을 뒤지고 다녔으니 자연히 지리산 박사가 되었다. 어느 골짜기에 어떤 나물이 나는지 훤히 꿰고 있다. 생김새도 여걸같이 생겨서 기억력도 좋다.
“나물만 뜯어서 먹고살았다는 말입니까?”
“약초도 캐고 벌꿀도 하고 그랬지요. 한때는 산청 대원사까지 따 놓은 산초 자루를 메고 왔다 갔다 하기도 했지요. 대원사 여자 스님들이 산초를 좋아했어요. 산초로 만든 장아찌를 즐겨 먹었거든요. 나한테 산초를 공급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우리 집에서 대원사까지는 산길로 20㎞쯤 됩니다. 아침 7시에 산초 자루를 메고 고개를 넘어 산을 타다 보면 오후 6시 무렵에 대원사에 도착해요. 그러면 그날은 거기서 자고 다음날 집에 오죠. 산초 나올 때는 서너 번씩 대원사까지 왕복을 했죠. 산초를 갔다 주면 여스님들이 알아서 돈은 줬어요. 내 쪽에서 얼마 달라고 말은 못 하고 스님들이 그때그때 형편대로 돈을 줬어요”
“마지막 여자 빨치산이라는 정순덕도 만났다면서요?”
“그때가 1963년 4월쯤 되었을 겁니다. 4월이면 나물이 가장 많이 나올 때거든요. 집 뒤로 올라가면 선녀굴이 있어요. 커다란 바위가 병풍처럼 서 있고 그 바위 사이로 굴이 있고 조그만 샘물이 있죠. 선녀굴 쪽으로 올라가는데 어떤 여자가 바위 밑의 샘물에서 뭐를 씻고 있다가 나물 캐러 올라오던 저를 봤죠. 저도 정순덕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저는 ‘큰일 났다’고 생각하고 줄행랑을 쳐서 산을 내려와 버렸습니다. 여자 빨치산 정순덕도 놀랐을 겁니다. 만약 제가 동작이 느렸다면 정순덕이 굴에다 놓은 총을 뽑았을 수도 있죠. 선녀굴은 ‘ㄷ’자 형태고 굽어져서 그 안에 들어가면 빛이 안 보이고 밖에서 총을 쏘기도 어렵죠. 그래서 아마 정순덕이 여기 숨어 있었을 겁니다.”
정순덕은 몇 달 후인 1963년 11월쯤에 경찰과 총격전 끝에 생포된다. 아마 박영남 할머니와 마주친 후에 은신하던 아지트를 옮겼을 가능성도 높다. 선녀굴은 노장대 주변에 있는 30여 군데의 암자터 가운데 하나이다. 그만큼 노장대 주변으로 도를 닦던 터가 많다. 노장대는 ‘결국’이란 이야기이다. 에너지가 뭉쳐 있는 것을 옛날부터 알고 수행자들이 노장대 주변에 와서 포진했던 것이다. 노장대 밑에 있는 선녀굴부터 먼저 보기로 하였다. 해발 1000m 정도 높이다. 과연 병풍처럼 터 뒤로 커다란 바위들이 서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평평한 터가 자리 잡고 있다. 뒤에는 바위이고, 바닥이 평평한 데다가 좌향도 남향이다. 따뜻한 햇볕이 들어오는 양지바른 곳이다. 거기에다가 바위 틈새 사이로 굴이 있다. 중간에 막혀서 들어갈 수는 없지만 ‘ㄷ’자 형태였다고 하니 숨어 있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정순덕을 잡기 위해 굴 앞에서 총을 쏘아도 총알이 직진하지 못하니까 말이다.
지리산을 다녀보면 빨치산이 은거했던 터가 동학 때에는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숨어든 동학군이 숨었던 곳이란 걸 알 수 있다. 한말의 의병들도 역시 여기에 숨었고, 더 소급해 올라가면 당취들도 이용했던 터가 많다.
수행터로 은신처로
선녀굴도 바위 앞에 샘물이 있다. 물이 있으면 사람이 살기에 더없이 적당한 조건이다. 선녀굴은 고대부터 수행터였다. 지리산 이쪽 일대는 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이 성을 쌓고 머물렀던 추성(樞城)과 대궐터에 인접한 지역이다. 추론해 보자면 6세기의 가야 시대부터 승려들이 공부하던 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대를 후대로 잡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이 일대가 암자터로 북적거렸을 것이다. 선녀굴은 터가 넓어서 상당한 규모의 절이나 암자가 있었을 법한 공간이다. 도 닦기에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특히 미타봉의 바위 틈새에 있었던 소림굴(少林窟)과도 직선거리로 가깝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폐사가 되었고, 여자 빨치산 정순덕이 몸을 숨기고 살았던 아지트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선녀굴 주변에는 고혈암(古穴庵)과 신혈암(新穴庵) 터도 남아 있다. 역시 바위 틈새에 있는 암자터라고 볼 수 있다. 주변의 30군데 암자터를 총괄하는 바위는 역시 노장대이다. 가까이 가서 노장대를 살펴보니 바위는 약간 쭈글쭈글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명칭에 ‘老(늙을로)’ 자를 쓴 것 같다. 그러나 그 기상은 믿음직하다. 저 아래 인간세상을 지켜보면서 아마도 몰락한 가야의 피란정부 격이었던 추성과 대궐터를 외곽에서 지키던 늙은 장수였을 것이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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