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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순례] 2000년 족보 여산신이 지리산 법계사에

醉月 2022. 12. 8. 17:32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의 7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법계사. 이 법계사의 산신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여산신이다. 그 표시가 절에 들어가는 입구의 기둥에 그려져 있다. ‘법계사’라고 쓴 현판을 걸어놓은 입구의 양쪽 기둥에 하얀 옷을 입은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왼쪽 기둥에 흰옷 입은 중년 여자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법계사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이 두 기둥에 그려져 있는 여산신과 호랑이의 통과의례를 거쳐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보통 산신은 흰 수염이 난 할아버지의 모습인데 여기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중년 여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 중년 여인이 산신이라는 표시를 하기 위해서 오른쪽에 호랑이를 그려 놓았다고 본다.

필자 눈에는 이 여산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원고지 수백 매가 돌아간다. 파노라마처럼 영화 필름이 한참 돌아간다. 할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구라업종(口羅業種)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고단백질의 콘텐츠이다. 이 여산신의 존재가 진짜 있다고 믿는가? 법계사에 기도하러 오는 50~60대 여자 신도들에게 물어보았다. “흰옷 입은 여산신이 꿈에 나타났습니까?” “네. 기도를 열심히 하면 흰옷 입고 나타나요. 나만 나타난 게 아니고 다른 보살님들도 꿈에 본 사람이 많아요!”

종교신앙은 그냥 신앙심이 생기는 게 아니다. 말로만 되는 게 아니다. 꿈에 나타나야 믿는다. 뭔가 자신에게 체험이 있어야 믿는 것이다. 병을 낫거나, 재판에서 이기게 해준다거나, 아니면 합격, 승진 등이다. 신도들의 꿈에 그동안 이 여산신이 쭉 나타났으니까 부처님을 모셔 놓은 절에서 여산신을 절 입구 기둥에까지 표시해 놓은 것이다.

 

천왕봉 주관 신은 ‘성모’

이 여산신의 계보를 추적해 올라가면 천왕봉의 성모신앙(聖母信仰)까지 소급된다. 천왕봉을 주관하는 신은 성모(聖母)라는 여신이라고 믿는 신앙이다. 천왕봉에 있는 신은 남신이 아니었다. 이 여산신 신앙은 그 역사가 아마도 2000년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다. 기록과 구전으로만 따져 보면 고려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 가야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다. 천왕봉 밑에는 돌로 만든 성모상(聖母像)이 지금까지 존재한다. 중년 여인이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 쪽진 머리 모습을 한 상반신을 돌로 조각한 형태이다. 이 성모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버전 중의 하나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상이라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도 이 성모, 즉 여산신에 대한 신앙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천왕봉 밑에는 고대부터 성모당(聖母堂), 성모사(聖母祠)라고 하는 건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많은 참배객들이 해발 1900m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이 성모당에 참배하였다.

그 참배의 순서는 4단계이다. 먼저 마천 쪽에 위치하고 있는 용유담(龍遊潭)이다. 용유담에서 용왕에 대한 기도를 드린다. 두 번째 코스가 백무당(百巫堂)이다. 성모여신의 딸이 100명 있었는데. 이 100명의 딸들이 바로 무당이고, 이 100명의 무당들이 기도를 하던 터가 백무당이다. 백무동계곡 중간쯤에 있다. 현재 추정키로는 느티나무산장 터가 이 백무당 터가 아닌가 싶다. 느티나무산장은 백무동계곡의 물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고, 집채만 한 바위들이 계곡 중간중간에 버티고 있어서 고대의 기도터로서 조건을 갖추고 있는 점도 눈여겨보아야 한다. 세 번째 코스가 제석당(帝釋堂)이다. 천왕봉 밑의 제석봉에 있었던 기도터이다. 백무당에서 기도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 올라가는 코스가 제석봉에 있었던 제석당이다. 불교에서는 하늘의 최고신을 제석천왕이라고 부른다. 이 제석천에게 제사 지내고 기도 드리는 터가 제석당이다.

조선 중기까지 지리산 유람객들의 기록을 보면 이 제석당 건물은 상당히 큰 규모로 건재했던 것 같다. 그만큼 기도객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추정컨대 100여명 정도의 인원은 수용할 수 있는 건물이 운영되고 있었다. 주된 출입객은 기도를 하던 무당, 박수 그룹이었을 것이다. 제석당에서 기도를 마치면 마지막으로 올라갔던 지점이 천왕봉의 성모당이었다. 파이널 코스였다. 지리산의 최고신이다. 지리산을 여산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모든 구전은 이 성모당에서 퍼진 이야기이고, 그 구전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국가 지배층이 퍼트린 신앙도 아니다. 오직 신앙 체험을 한 민초들에 의해서 형성되고 뿌리를 내린 오랜 토착신앙으로 보인다. 그만큼 뿌리 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마천 쪽에서 시작하여 용유담, 백무당, 제석당, 성모당으로 올라가는 코스가 천왕봉 북쪽 방향이라면, 중산리에서 순두류를 거쳐 법계사로 올라가는 코스가 남쪽 방향이다. 천왕봉 남북 양쪽에서 모두 최종 귀결점은 천왕봉 성모였음이 드러난다.


지리산 서쪽은 노고 할머니

천왕봉이 지리산 동쪽이라면 서쪽에는 성모신앙이 없는가? 서쪽에도 여산신 신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근거는 구례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석탑(四獅子石塔)이다. 4마리 사자가 탑을 바치고 있는 석탑인데, 그 4마리 사자 가운데는 여인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이 여인상을 화엄사의 개창조인 연기조사 어머니 상이라고 한다. 연기조사가 효심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돌로 조각해 이 석탑 안에 조성했다는 이야기이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도 연기조사 어머니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 사사자석탑이 받들고 있는 여인상이 연기조사 어머니가 아니고 지리산 노고단을 주관하고 있던 여산신의 모습이라고 본다. 노고단(老姑壇)이라는 이름 자체가 여자 신을 가리킨다. ‘노고’는 ‘마고’와 같은 뜻이라고 간주한다. 늙은 할머니 신. 이 노고 할머니 신을 석탑에다 모신 것이라는 심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출가 승려가 속가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절 안의 신성한 불탑에까지 모실 수는 없다. 그건 너무 오버이다. 집을 떠난 출가승려가 어떻게 속가의 어머니를 수행공간인, 그것도 불보살이나 모셔 놓을 수 있는 석탑 안에까지 조성할 수 있단 말인가!

석탑은 신을 모시는 공간이자 구조물이다. 지리산 서쪽의 노고단에 오래전부터 신앙되어 오던 여산신을 불교 사찰에 모셔 놓은 것이 석탑 안의 여신상이다. 뿌리 깊은 토속신앙인 여산신 신앙을 불교가 들어오면서 포용한 증거이다. 산신각을 사찰 경내에 끌어들였듯이 토속신앙의 신격을 불교가 수용한 셈이다. 여신에 대한 민초들의 신앙심이 원체 뿌리가 강하고 깊으니까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불교도 티베트의 토속신앙이었던 본교와 불교가 혼합된 모습이다. 불교도 외래종교였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의 이 땅의 토착신앙. 그것은 여산신 신앙이었고, 굴러온 돌인 불교도 박힌 돌이었던 토속신앙과 전략적 합의 내지는 포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계 종교사에서 볼 때 모든 외래종교는 그 나라의 토착문화와 습합(習合)이라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만약 ‘습합’을 거부하면 ‘모 아니면 도’의 승부를 걸어야 한다. 기존 종교 신봉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 이게 종교 탄압이다.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이루자는 종교가 오히려 사람을 죽이고 인권을 탄압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종교가 여기까지 오면 종교는 도그마로 전락한다. 도그마는 정신병적 집착에 해당한다. 도그마로부터의 해방이 문명화의 길이 아니던가! 이렇게 놓고 본다면 지리산 동쪽에는 성모당이 있었고, 서쪽에는 노고단이 있었다. 양자 모두 여산신 신앙이다. ‘聖母(성모)’나 ‘老姑(노고)’나 그 말이 그 말이다.


여신은 언제부터 지리산을 장악했을까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보자. 이러한 여신들은 언제부터 지리산을 장악하게 되었을까? 삼국시대, 더 들어가면 가야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심증이 든다. 지리산은 가야의 산이었다. ‘지리’라는 단어가 산스크리트어의 산을 뜻하는 ‘giri’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면, 이 산스크리트어를 가지고 온 집단은 가야이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장유화상과 허황후가 바로 가야불교의 시초이다. 가야불교의 종착지는 지리산이었다. 김수로왕의 7왕자가 득도했다는 지리산 칠불암, 그리고 가야의 마지막 왕이었던 구형왕이 쌓았다는 피란성인 추성, 박회성 등의 유적이 이를 암시한다. 칠불암의 7왕자가 김해에서 곧바로 지리산에 와서 수도를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김해 신어산이었을 것이고, 그다음에 삼천포(사천)의 와룡산에서 수도하였고, 그다음에 창녕 화왕산에서 있었다. 화왕산에서 다시 캠프를 옮겨 합천 가야산으로 이동하였다.

가야산은 좀 특별하다. 산이 1000m가 넘는 고산인데다가 산 전체가 날카로운 암벽들이 노출되어 있다. 이런 골산은 수행하기에 적합하다. 날카로운 암벽과 봉우리들은 전부 기도발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높은 암산에서 종교신앙이 깊어지고 신비체험을 하고 도인이 나오는 것이다. 고령 지역에 있었던 대가야의 성산이 바로 가야산이었다. ‘가야’라는 산 이름 자체가 가야국과의 관련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현재 가야산 해인사는 큰 절이다. 해인사 들어가는 입구에 자그마한 사당 형식으로 지은 건물이 있다. 바로 ‘정견묘주(正見妙主)’를 모셔 놓은 사당이자 산신각 같은 건물이다. 왜 절에서 잘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 정견묘주를 모셔 놓은 건물이 존재한단 말인가? 정견묘주는 여자이다. 가야 김수로왕의 어머니라고 알려져 있다. 왕조 창업주의 어머니를 신격화한 것이다. 말하자면 김수로왕의 어머니는 죽어서 가야산의 여산신으로 모셔진 셈이다. 가야국의 안녕을 책임지는 신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름이 바르게 본다는 뜻의 ‘正見(정견)’이다. 이를 해석한다면 국가의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해 주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앞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국가대사는 한결같이 결정하기가 어려운 문제들이 많다. 전쟁을 하면 이길 것인가, 질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해 국왕이 언제까지 살 수 있는가, 병이 낫겠는가, 천재지변이 언제 사그라들 것인가 등등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델피신전의 신탁이 이 역할을 담당했다. 지중해 국가들 사이에 거의 1500년간 가장 영험한 점발로 유명하였다. 델피신전 신탁소에서 하늘로부터 신탁을 받았던 사제들은 모두 여자였다는 점을 참고해야 한다. 나는 수로왕의 어머니였던 정견묘주가 대가야의 신탁소 책임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죽어서도 나를 위해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주는 묘주(妙主) 할머니였다. 묘한 주인이었다. 가야산의 원래 용도는 정견묘주를 모셔 놓은 신전이었고, 나중에 해인사가 들어서면서 불교의 산으로 되지 않았을까. 물론 가야도 가야불교가 있으니까 불교를 배제할 수는 없지만, 정견묘주의 존재는 불교보다는 토속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 같다.

 

가야국 시조 정견묘주

7왕자가 가야산을 거쳐 최종 정착한 곳이 지리산이었다. 칠불암은 그 산맥의 줄기로 볼 때 반야봉 자락이다. 반야봉은 ‘지혜’라는 뜻의 ‘반야’를 의미한다. 확실한 불교 작명이다. 반야봉의 좌우로 노고단과 천왕봉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종주 대간의 중간에 반야봉이 있다. 천왕과 노고는 불교적 작명은 아니다. 가야의 7왕자가 도 닦은 노선은 불교이지 토착신앙은 아니다. 칠불의 지향점은 지혜이고 반야이다. 불교는 반야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가야 7왕자와 칠불암의 관점에서 두고 본다면 반야의 좌우 보처보살이 노고와 성모이다. 이 노고와 성모라는 여산신의 모델이 수로왕의 어머니, 즉 할매 신이었던 정견묘주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노고와 성모는 정견묘주의 지리산 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견묘주는 가야국 시조의 어머니이면서 가야불교를 가지고 들어온 허황후의 시어머니에 해당한다. 정견묘주는 가야의 입장에서 볼 때 토속신앙과 불교의 연결고리이자 접점이다. 중간 연결고리로서는 딱 들어맞는다. 이를 다시 종합하자면 불교 이전부터 존재했던 지리산의 토착신앙은 여신이었고, 여기에다 가야불교가 다시 그 위에 자리 잡는다. 그러면서 수로왕의 어머니이자 7왕자의 할머니에 해당하는 정견묘주가 그 토착여신에 오버랩이 된다. 그 오버랩이 법계사와 천왕봉의 여산신 족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2000년 넘게 이어져온 여산신 신앙의 맥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고 현대의 법계사 현판 기둥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놀랍다. 그 수많은 전쟁과 방화, 세월의 풍우에도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살아 남아서 법계사에 기도드리러 가는 민초들의 꿈에 이 할머니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신화와 종교적 영험, 그리고 2000년의 역사가 집약되어 있는 도상이 법계사 여산신이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