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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헌의 영지 순례 ]판자 한 장의 기적이... 원효대사의 척판암

醉月 2022. 12. 8. 17:01

척판암(擲板庵)이라는 뜻은? ‘擲(척)’은 던지다라는 뜻이다. 판자를 던졌다라는 의미이다. 참 희한한 이름의 암자이다. 무슨 판자를 던졌길래 이런 명칭을 가진 암자가 되었을까? 그 주인공은 바로 원효대사이다. 원효대사가 이 암자에서 중국 쪽으로 판때기를 던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효대사. 한국에서 지난 2000년 동안 배출된 인물 중에서 손꼽을 만한 인물이 바로 원효이다. 어떤 점 때문에? 바로 ‘영발’과 ‘학문’이라는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갖추었기 때문이다. 대단한 도력을 지녔던 대도인이면서도 불교의 깊이 있는 저술들을 남겼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겸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보통 영발이 있으면 책을 쓰지 못한다. 영발이 있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세밀하게 추론하는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상황을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마치 카메라가 공중에서 사진 찍듯이 어떤 상황을 한순간에 비주얼로 파악한다. 분석하고 추론하기 전에 상황이 그림이나 어떤 장면으로 보이는 셈이다.

반대로 분석적인 책을 쓴다는 것은 치밀한 논리적 두뇌이다. 인체의 전두엽이 발달해야만 이 작업이 가능하다. 영발이 머리 뒤쪽의 후뇌(後腦)를 각성시키는 작업이라면, 책을 쓰는 일은 전두엽(前頭葉)이 작동해야만 한다. 사물을 어떤 인과관계의 연속으로 파악하는 두뇌, 원인과 결과 사이를 추론해 내는 사유능력은 영발을 감퇴시키는 과정이다. 디지털적 사유이다. 


척판암 앞산 풍경.
영발과 논리적 두뇌 갖춘 능력자

신입사원 면접을 할 때 그 사람의 관상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그 사람의 주특기와 기질을 한순간에 파악하는 방식이 영발의 직관적 방식이다. 반대로 그 사람의 이력서를 보는 방식, 예를 들어 학교를 어디 나왔고, 어떤 코스를 거쳤으며, 어떤 집안 출신인가를 따져서 보는 방식은 전두엽의 방식이다. 디지털적 두뇌가 발달한 사람치고 영발 있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신학 이론에 밝은 사람치고 영발 있는 사람이 드물다. 책만 많이 본 신학자가 설교하면 교회 신도들이 하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상반된 두 가지 영역을 동시에 작동시킬 수 있을 때 그 사람이 큰일을 한다. 공중에서 항공사진 촬영하는 영발적 능력과 컴퓨터의 연산작용 같은 수학적 능력을 모두 갖춘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국사급은 이 두 가지 능력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원효가 이런 사람이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열반종요’ 등과 같은 여러 종류의 저술을 남겼다. 저술의 수준도 일급이다. ‘대승기신론소’의 경우 이걸 읽어내려면 적어도 4~5년 정도는 여기에 몰빵을 해야만 가능하다. 그만큼 치밀하고 분석적이고 통찰적이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판때기도 날렸다고 하니까 그 신통력이 어마어마 하다.

척판암의 판때기 전설은 이렇다. 원효가 척판암에 머물며 어느날 선정(禪定)에 들었다. 선정은 깊은 삼매에 드는 상태를 가리킨다. 삼매는 개인의 에고(ego)와 우주의식이 하나가 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이 단계에서 신통력이 발생한다. 삼매에 들어가서 보니까 당나라 종남산의 태화사(太和寺)가 보였다. 그런데 당시에 장마로 인하여 산사태가 일어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태화사에는 천 명의 승려들이 도를 닦고 있었다. 산사태가 발생하면 이 천 명의 대중은 흙에 파묻혀 죽는 것이다. 척판암에 앉아서 당나라 태화사의 이 위급한 상황을 봤던 것이다. 원효는 판자에 ‘海東元曉擲板救衆(해동원효척판구중)’이라는 글씨를 써서 태화사 법당 앞에다가 날렸다고 한다. 해동의 원효가 판자를 던져 대중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어디에서 갑자기 날아온 이 글씨 쓴 판자가 공중에 너울거리는 모습이 태화사 승려들의 눈에 보였다. 그 판자 글씨를 보려고 태화사 승려들이 법당 밖으로 나온 순간 산사태가 발생하여 법당이 흙에 묻혔다는 것이다. 이 판때기가 천 명 대중의 목숨을 살렸다.

신라의 척판암에서 날린 판자가 당나라 종남산 태화사에까지 도착하였다는 설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아랍에는 양탄자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설화, 호리병에서 시커먼 연기가 나와 이게 거인으로 변하여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설화가 있다. 척판암 설화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기도 하고 불교적 차원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 불교적 차원에서는 천안통(天眼通)이 있다. 하늘의 눈이 열리면 천 리 밖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공간이동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시공무애(時空無碍)의 경지가 있다. 시간도 뛰어넘고 공간도 뛰어넘는다. 우주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런 신통력을 원효대사가 지녔다고 믿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사항은 왜 하필 태화사일까이다. 원효보다 한 세대 위의 고승이 바로 자장율사이다. 여왕이었던 선덕여왕의 절대적 후원을 받고 신라 불교의 틀을 짠 고승이다. 자장이 신라에 세웠던 3개의 중요한 사찰이 양산 통도사,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그리고 태화사이다. 태화사는 현재 폐사되었다. 울산 태화강 입구쯤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신라의 해상물류 기지에 해당하는 절이었을 것이다.


척판암 절벽 중간의 산신각.
왜 하필 태화사일까

자장이 절 이름을 태화사라고 지었던 것도 당나라 장안에 갔을 때 태화지(太和池)라는 연못에서 신인을 만나 계시를 받은 게 계기였다. 그 신인은 용이었던 모양이다.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고 신라에 태화사를 세웠으니 말이다. 당나라에 있었던 태화사는 아마도 자장이 인연을 맺었던 태화지 근처의 같은 이름을 가진 절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원효, 의상 세대는 한 세대 선배였던 자장율사 시대의 불교를 한 차원 뛰어넘어 극복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듯싶다. 자장이 당나라 태화사(태화지)에서 계시를 받고 신라에 와서 그 시키는 대로 심부름을 했다고 본다면, 원효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당나라 태화사에서 위험에 처했던 승려 천 명을 구해준다는 설화는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 아니다. 가르침을 주는 입장으로 바뀌어 있다. 한 수 지도받는 입장에서 지도해 주는 입장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권위의 원천이었던 중국 불교에 한 수 가르쳐 주는 위치로의 변화이다. ‘대승기신론소’가 당나라 불교계에 충격을 준 저술이었음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신라는 더 이상 변방이 아니다’라는 선언, 또는 메시지가 이 척판암 설화에 담겨 있다. 2000년 역사에서 원효처럼 탈중(脫中)을 제대로 한 인물이 있을까?

척판암이 자리 잡고 있는 불광산 자락은 그리 높지 않다. 300여m 남짓 될까. 그러나 암자 바닥은 완전히 돌판이다. 산자락이 모두 암반이다. 이런 암반 자락 끄트머리쯤에 척판암이 있다. 돌판 위에 앉아 있는 셈이다. 말하자면 쩔쩔 끓는 자리에 암자가 위치해 있다. 돌을 살펴보니 화강암은 아니다. 척판암은 부산광역시 기장군(機張君)에 속해 있다. 태백산맥 척추뼈 끝 부분에 해당한다. 이쪽의 바위들은 서울 북한산 부근의 화강암과는 다른 지질대이다. 단단하면서도 수정 기운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원효는 성격이 다혈질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강한 터 기운이 올라오는 곳을 선호했다는 점도 그렇고, 척판암 옆으로는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기 때문이다. 척판암 위의 바위 좌선터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가장 일찍 뜨는 지점이기도 하다. 동해의 바다 수기운이  전달되는 터이다. 절절 끓는 바닥과 동해의 수기운이 뭉친 지점. 그리고 아침에 정동에서 해가 뜬다. 그래서 산 이름도 불광산(佛光山)이 아닐까? 척판암은 동해 바다에서 포착되는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고, 이 일출을 불광으로 여겼던 것 같다. 원효가 여기에서 공부했으니까 말이다.
 

청룡이 감싸안은 터

전국에는 원효가 수도했다는 암자와 절이 많다. 이 중에서 70~80%는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가탁(假託)한 경우가 많다. 원효가 공부했다고 해야만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진짜로 원효가 공부했던 터는 어디일까. 그중의 핵심이 바로 이 척판암이라고 본다. 너무나 구체적인 설화가 존재하니까 말이다. 어지간한 암자에서는 척판암 같은 설화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너무 대단한 스케일이다.

척판암의 풍수상 특징은 좌측의 청룡 자락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다는 점이다. 척판암 뒤로 올라가 산봉우리에서 보면 총 일곱 가닥의 청룡이 둘러싸고 있다. 두세 가닥도 아니고 일곱 가닥이나 말이다. 공부터는 청룡 자락이 두껍고 여러 가닥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 청룡이 좋아야 공부터가 된다라는 말은 불가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말이다. 그 모범 케이스가 청룡장안(靑龍長案). 청룡이 길게 내려와 절터 앞을 감싸는 안산 역할까지 하고 있는 터를 가리킨다. 척판암이 바로 청룡장안이다. 더구나 일곱 가닥이다. 우리나라 수행터에서 청룡이 이처럼 여러 가닥으로 감싸안은 터는 척판암 터밖에 없다. 그 대신 백호는 약하다. 외백호가 한 자락 있다. 백호는 보통 재물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척판암은 부자 절도 아니고 겨우 수행자 몇 명이 먹고살 만한 절이다. 척판암은 많아 봐야 4~5명이 도 닦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대중이 머물 수 있는 암자가 아니다. 지금도 그렇게 보인다.

척판암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산신각이다. 암자 뒤쪽으로 가파른 계단을 한참 올라가니까 커다란 바위 절벽이 나타난다. 이 바위 절벽이 통째로 산신각이다. 절벽 중간에 가로 세로 1m 크기의 산신상을 모셔 놓았다. 절벽 중간에 설치해 놓은 산신상에는 사람이 직접 접근할 수 없다. 좀 떨어진 곳에서 산신을 향해 망배(望拜)를 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영험이 대단하다고 한다. 이 산신각에 와서 지성으로 기도하면 어지간한 일은 다 이루어진다고 척판암의 보련화 보살이 귀띔을 해준다. 아주 영험하게 생겼다. 이 산신령은 원효대사 당대에도 존재했던 산신령 같다. 아마도 원효대사를 보좌해서 심부름도 해주었던 산신령이었을 것이다. 그 산신령이 지금도 신통력을 다투고 있다. 척판암은 기장의 항구와 가깝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8~9세기에도 일본 상인들이 여기를 드나들면서 원효대사의 카리스마를 접했던 것 같고, 그 신통력이 일본 본토에까지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