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30m 높이 ‘수직 단풍’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醉月 2022. 12. 4. 09:49

■ 박경일기자의 여행 - 초겨울, 대전의 숨은 매력

장태산 휴양림 고깔처럼 솟은 메타세쿼이아
15m 허공에 길이 200m 덱 …새처럼 나는 느낌

상소동 산림욕장 곳곳의 400여개 돌탑 ‘이국적’
‘대전의 앙코르와트’ 별명… 유아숲 체험장으로도 유명

가로수 골목길 옛 충남지사 관사촌 ‘테미오래’
다다미방부터 붙박이장까지 ‘일본풍’ 느낌 그대로

1932년 지은 충남도청, 근현대사전시관 변신
우체국은 공유책방…으능정이 사거리엔 미술창작센터


대전을 두고 흔히 ‘노잼 도시’라 부릅니다. 재미는 대개 ‘비(非) 일상성’에서 나오는 법. 일상에 속한 익숙한 공간은 대개 지루합니다. 하지만 같은 공간도, 보는 시선에 따라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생활이 다 그렇듯 도시도 다들 비슷비슷해 보입니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좀 다른 면모가 보입니다. 도시를 여행하는 재미가 거기서 나옵니다. 여행하는 도시를 통해서 제가 사는 도시를 되돌아보게 되는 건, 도시여행의 예기치 않은 소득이기도 합니다. 여행자를 흥분시키는 도시는 분명 아닙니다만 대전은, 일상에서 살짝 벗어난 공간을 느긋하게 뒤적여보는 여행지로 나무랄 데 없습니다. 거기서는 이름난 여행지의 ‘강박’이 없습니다. 숨이 가쁠 이유도 없고, ‘가지 않으면 안 될 곳’도 없습니다. 대전에서 늦가을 숲과 도심 속 근대의 풍경을 찾아다녔습니다만, 꼭 여기 소개한 곳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더 자세히 보는 것만으로도 낯선 도시로의 여행은 충분히 즐거우니까요.

대전=글·사진 박경일 전임기자 parking@munhwa.com

# 침엽수 단풍이 얼마나 근사한지…

‘내로라’하는 여행지는 두 가지 중 하나다. 빼어난 자연경관을 가졌거나, 아니면 오래된 역사유물을 가졌거나…. 랜드마크가 되는 테마파크나 미술관과 박물관, 혹은 초대형 쇼핑몰 같은 인프라를 가진 경우도 있겠다. 대전을 ‘노잼 도시’로 부르는 걸 반박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딱 한 곳, 이곳이 있다. 다른 계절은 말고 딱 이즈음에만 여행자들의 목적지 상위 목록에 오르는 곳이 대전에 있다. 바로 장태산 자연휴양림이다.

잘 다듬은 고깔 모양으로 하늘을 찌르듯 치솟은 메타세쿼이아가 늘어선 장태산 자연휴양림 숲은 ‘수직의 세상’이다. 이 숲이 가장 빛나는 때는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지금 무렵이다. 활엽수의 붉고 노란 선명한 단풍이 다 떨어지고 나면, 마지막으로 물드는 게 낙엽 지는 침엽수다. 모두 붉은 기운이 감도는 진한 갈색으로 혹은 황금색으로 물들어서 가을의 마지막에 낙엽으로 진다.

꽃도 그렇지만, 단풍도 역광으로 볼 때가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 장태산에는 오전 나절에 휴양림 메타세쿼이아 단풍을 역광으로 볼 수 있는 기막힌 전망대가 있다. 휴양림 안에 있는 철골구조물 전망대 말고, 휴양림 바깥의 장태산 둘레길에 있는 전망대다. 나무 덱으로 만든 전망대는 역광의 단풍을 감상하기 딱 좋은 자리다. 메타세쿼이아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 주는 건 아침 햇볕. 일부러 나무를 그렇게 심었다 해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방향이 딱 맞다. 메타세쿼이아 숲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장태산 휴양림이 늦가을 단풍으로 이름난 이유가 여기 있다.

전망대 바로 아래에는 돌출 바위가 있다. 한창 단풍이 물들 무렵이면 위태롭게 바위 위에 올라서서 이른바 ‘인생 사진’을 남기려는 이들이 길게 줄을 선다. 사진촬영을 온 사진가들까지 뒤섞여서 전망대 일대는 북새통이다. 하지만 단풍이 절정을 살짝 넘기고 나면 전망대는 다시 한적함을 되찾는다. 단풍의 풍성함이나 색감은 좀 덜하겠지만, 단풍을 즐기겠다면 그편이 오히려 낫다. 다만 요 며칠 기습적인 한파에 메타세쿼이아 단풍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 거대한 숲에 바쳐진 한 사람의 노고

휴양림의 메타세쿼이아의 키는 30m가 넘는다. 거대한 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힘차게 곧게 수직으로 뻗은 나무들이 주는 위압감에 그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휴양림의 압권은 ‘스카이웨이’다. 그 말의 뜻 그대로 ‘하늘(Sky)’에 낸 ‘길(Way)’이다. 철골 구조물로 다리를 놓듯 15m 높이의 허공에 길을 내놓았으니 스카이웨이에 오르면 늘씬하게 뻗은 메타세쿼이아의 허리 혹은 어깨쯤을 지나가게 된다. 나무에 눈이 있다면 그가 내려다보는 세상이 이럴까, 숲 사이를 나는 새들의 시선이 이럴까. 우람한 나무의 둥치가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하다. 숲 사이로 난 스카이웨이의 길이는 200m가 채 안 되지만, 그 길이 짧다고 느껴지지 않는 건 숲 사이의 허공을 걷는 경험이 강렬해서다.

장태산의 거대한 숲과 나무는 한 가족의 평생을 바친 수고로 만들어졌다. 고 임창봉 선생. 192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토목업을 해서 모은 큰돈을 모조리 이 산자락에 쏟아부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30여 년 동안 장태산의 76만㎡(약 23만 평) 산에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해 도합 20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200억 원이 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300억 원이 넘게 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큰아들이 대학을 중퇴하고 내려와 함께 숲을 가꿨고, 본격적인 조림이 시작되면서 둘째 아들까지 합류했다. 일가족의 땀과 정성으로 지금의 거대한 숲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가족의 노고로 이뤄진 장대한 숲 앞에 서면 ‘대역사’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장태산의 숲은 1991년 전국 최초로 민간휴양림이 돼서 일반에 공개돼 꿈을 이루는 듯했으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이후 극심한 경영난을 겪게 됐다. 휴양림은 경매에 부쳐졌고, 결국 그는 40억 원을 받고 휴양림을 대전시에 넘겼다. 쌓인 빚을 다 갚는 데도 모자란 돈이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휴양림 한쪽에 컨테이너 박스를 얻어 기거하다 휴양림을 넘긴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떴다. 장태산 휴양림은 죽을 때까지도 이 숲을 떠나지 못했던 그가 남기고 간 숲이다. 낙엽 져서 빈 나무로 돌아가고 있는 숲에서 이곳에 평생을 바친 이를 생각한다.


# 산림욕의 숲에서 돌탑을 보다

대전에는 상소동 산림욕장도 있다. 만인산과 식장산 자락 사이에 있는 산림욕장이다. 활엽수 단풍이 곱기로 이름났는데, 지금 단풍은 다 지고 없다. 상소동 산림욕장은 오토 캠핑장이나, 아이들의 유아 숲 체험공간으로도 이름이 더 알려지기도 했다.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주말이면 산림욕장 앞 잔디밭은 텐트로 가득 찬다. 산림욕장의 숲에서는 전문해설사가 다양한 숲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상소동 산림욕장에서 인상적인 것은 돌탑이다. 산림욕장 곳곳에는 400여 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피크닉장 입구의 돌탑군(群)이 단연 압권이다. 이곳에는 러시아 성당의 양파 모양 돔 같기도 하고, 불교사원의 종탑 같기도 한 대형 돌탑 17기가 모여있다. 돌탑의 형태가 워낙 이국적이어서 마치 동남아 어디쯤으로 여행 온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전의 앙코르와트’란 별명은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이 돌탑은 부여가 고향인 이덕상(92) 할아버지가 쌓은 것. 청년 시절인 1960년대부터 농한기를 이용해 돌탑을 쌓기 시작한 그는 불과 5∼6년 만에 500평 가까운 땅에 빽빽하게 돌탑을 세웠다. 객지에 나가 살던 그는 1971년 마을에 대홍수가 났다는 보도를 보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마을주민들이 그의 손을 꼭 붙들고 고마워했단다. 영문을 모르는 그에게 마을 주민들은 ‘돌탑이 산사태를 막아줬다’고 설명해줬다. 마을 주민은 구했지만, 홍수로 탑은 다 쓸려 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돌탑을 잊고 살았던 이 할아버지는 일흔네 살 때인 2003년 9월부터 여기 상소동 산림욕장에 다시 돌탑을 쌓기 시작했다. 대전 동구청이 휴양림에 돌탑 쌓기 캠페인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듣고 본격적으로 돌탑 쌓기에 나선 것. 대흥동의 집에서 상소동까지 출퇴근하며 탑을 쌓았다. 기왕에 쌓는 것 모양을 내서 멋있게 쌓기 위해 쌓았다가 부수고 다시 쌓기를 몇 번이나 거듭해가며 공들여 쌓은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돌탑 하나를 쌓는 데 평균 3개월. 17개 탑을 다 쌓고 나니 나이 여든이 됐단다. 그 나이에도 사소한 돌탑 하나에 이런 지극한 정성을 담을 수 있을까.

# 오래된 관사촌에서 일본을 보다

이제 도심으로 간다. ‘테미오래’. 이름만 듣고는 대체 뭘 하는 곳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곳이다. 대전 도심 한복판인 대흥동에 있는 옛 충남지사 관사(官舍)촌을 리모델링한 전시관 겸 문화예술 공간이 ‘테미오래’다. 관사촌은 도지사 공관뿐만 아니라 국장급 이상 고위공무원들이 살던 집이 늘어선 플라타너스 가로수 골목이다.

테미오래란 이름은 주민공모로 결정됐다. 산봉우리 주변을 둥글게 테두리를 만들 듯 쌓은 이른바 ‘퇴뫼식’ 산성들이 주변에 있어 관사촌이 자리 잡은 마을을 ‘테미’라 불렀다는데, 여기다가 ‘오래됐다’는 뜻과 ‘오시라’는 뜻을 중의적으로 담아 ‘오래’라는 말을 붙여 ‘테미오래’가 됐다.

관사촌은 전형적인 일본식 건축물이다.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온 1932년에 지어졌으니 딱 10년 모자란 100세다. 이곳은 2012년까지 현역 관사였다. 충남을 거쳐 간 도지사들이 모두 80년에 걸쳐 여기서 살았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여기 관사촌에서 생활했던 이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다. 그는 2012년 충남도청이 내포 신도시로 이전하기 전까지 관사촌의 도지사 공관에서 살았다.

덧붙이는 사족 몇 마디.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3년 6개월 실형을 산 안희정 전 지사의 재판과정에서 충남지사 공관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수행 비서가 성폭력 사건이 있었던 공간으로 도지사 공관을 지목했던 것. 그런데 당시 수행 비서가 지목한 장소는 여기 대전 관사촌이 아니라, 옮겨간 내포 신도시 용봉산 아래 새 관사였다. 전직 도지사의 추문 때문이었을까. 새 관사 터가 풍수상 ‘흉지(凶地)’라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면서 뒤이어 당선된 지사들이 이용을 꺼려 한동안 비워두었던 새 관사는, 지금 어린이집이 됐다.

테미오래, 그러니까 관사촌에는 충남지사 공관을 중심으로 골목 양쪽에 관사들이 죽 늘어서 있다. 관사는 1호부터 10호까지 일련번호로 매겨졌는데, 1932년 처음 지어진 건 도지사 공관을 비롯해 1호 관사부터 6호 관사까지 모두 7채였다. 1960년대 관사 일부를 민간에 불하했다가 4호 관사가 소실되면서 6채만 남았는데, 1970년대 추가로 4채의 관사가 지어졌으니, 테미오래에 지금 남아있는 관사는 모두 10채다.


# 친일파 남편과 독립운동가 아내

테미오래의 도지사 공관에 들어서면 집에 스며있는 선명한 일본색 때문에 놀라게 된다. 집은 겉모습부터 내부 구석구석까지 일본식이다. 외관 일부에 서양식 건축 요소를 가미했고 응접실에도 양식 벽난로를 놓긴 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진하디진한 일본풍이다. 다다미방부터 협실, 붙박이장은 물론 선반과 장식공간까지 일식가옥의 특징 그대로다. 실제 일본에서 보는 집보다 ‘더 일본풍’이라 느껴질 정도다. 더 놀라운 건 식민지 시대의 유적처럼, 마치 일본 여행을 온 듯 느껴지는 이 공간을 불과 10년 전까지 충남지사들이 관사로 쓰며 생활해왔다는 것이다.

도지사 공관이 지어진 지 90년, 거기서 도지사가 80년을 살았으니 깃든 이야기가 없을 리 없다. 관사촌의 관사에서는 다양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도지사 공관에는 6·25전쟁으로 피란 와 닷새 동안 충남지사 공관에 머물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이야기가 있다. 여기가 전쟁 통에 대통령이 머물렀던 ‘임시 경무대’였다는 걸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역사적인 공간’이란 의미를 강조하고 싶어서였을 터. 하지만 입맛은 그다지 개운치 않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의정부가 북한군에 함락되고, 북한군 전차가 서울 청량리까지 진출하자 이 전 대통령은 27일 새벽 4시 열차 편으로 몰래 서울을 빠져나와 대구를 거쳐 대전으로 와 충남지사 공관에 머물렀다. 공관에 도착하자마자 대통령은 방송관계자를 불러 방송녹음부터 했다. 이렇게 녹음한 방송이 27일 오후 9시 전국으로 송출됐다. “친애하는 서울시민 여러분, 아군은 이미 의정부를 탈환했습니다. 서울시민은 안심하십시오.” 대통령의 ‘서울사수’ 결의는 단호했지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빠져나온 뒤였다. 그리고 이튿날, 한강철교가 폭파됐다.

테미오래 1호 관사에서는 관사촌에 거주했던 김우영과 그의 네 번째 부인 양한나의 삶을 대비한 흥미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우영은 ‘나혜석의 남편’이다. 그는 네 번 결혼했는데, 두 번째 부인이 신여성 나혜석이었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가를 변호한 변호사였던 김우영은 변절해 조선총독부 관료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부인 양한나는 일제강점기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으며 해방 후에는 고아원과 정신질환자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최초의 여자경찰서장으로 일했으며, 여성운동 등으로 사회에 헌신했다.


# 전시로 보는 대전의 과거

테미오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옛 충남도청이 있다. 관사가 지어진 같은 해인 1932년 지어진 건물로 건축적 가치가 높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옛 도청 건물에는 대전근현대사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경부선 철로 부설로 시작된 근대도시 대전의 역사를 전시해놓은 곳이다. 회덕군 ‘대전리’였던 곳이 ‘대전군’을 거쳐 ‘대전부’가 되고, 대전시가 다시 ‘대전광역시’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역사를 살필 수 있다.

전시관은 이렇다 할 유물 없이 대부분 사진과 글로 채워졌지만, 도시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발굴해 소개하고 있어 흥미진진하다. 일제강점기 대전에 있었던 휴지추(富士忠) 간장공장 창업주 쓰지 만타로(십萬太郞) 이야기부터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도산 안창호의 편지와 유성온천을 개발한 공주갑부 김갑순 이야기까지 전시는 다양하다. 일제강점기 대전에서 가장 큰 백화점이 ‘미나카이(三中井)’였으며 그 옆에 ‘미야카와 깃사텐(宮川喫茶房)’이란 찻집이, 또 그 곁에는 러시아 혁명 때 쫓겨난 귀족 출신 러시아 사람이 하던 ‘아무르 양복점’이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도 생생하다.

옛 도청 담장 안의 우체국과 선거관리위원회 및 무기고 등으로 사용했던 부속 건물에는, 지난 7월 개관한 시민들의 소통협력 공간을 표방하는 ‘커먼즈필드 대전’이 들어서 있다. 도청이 내포신도시로 옮겨간 뒤 10년 동안 방치됐던 공간이 강연, 공연, 북토크, 공예체험 등을 하는 시민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커먼즈필드는 개방형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어 여행자에게도 문이 열려있다. ‘모두의 서재’라는 간판을 단 옛 우체국 건물은 시민공유 서가(書架)로 다양한 주제의 추천 도서를 비치해 놓았는데, 대전 여행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도 있다.

대전 원도심의 중심인 으능정이 사거리에는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가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회화, 설치, 멀티미디어 등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작품이나 전시를 선보이고 있는데, 지금은 ‘나는-윤동주, 윤봉길을 말하다’ 전시가 열리고 있다. 1층은 윤봉길 의사, 2층은 윤동주 시인의 전시공간으로, 비치된 태블릿PC 등을 활용해 딥페이크 기술로 되살려낸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거나 가상현실(VR)로 애니메이션 영상을 감상하는 방식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 대전의 레트로 골목

대전에는 이른바 ‘레트로’ 느낌의 골목이 곳곳에 있다. 낮은 지붕의 단독주택들이 처마를 잇대고 있는 대화동 벽화마을도, 대전 시내가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주택가 언덕 위 대동 하늘공원도, 퇴락한 철도 관사촌에 감각적인 카페나 편집숍이 들어서면서 젊은이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는 소제동도 그런 곳이다.